남조 정권의 계승 과정

이번 장에서는 5호 16국 시대가 진행되는 동안 한족 정권인 남조 정권에 대하여 간략히 포스팅해보겠습니다. 그 두 번재 국가로 <송, 제, 양, 진>을 살펴보죠. 중국 남조는 동진 - 송 - 제 - 양 - 진 - 수(통일국가)로 연결됩니다.

5호 : 후한조부터 중국내지 이주  → 중국지식인의 사융론(한(흉노) - 후조(갈) - 전진(저 : 비수전투) -북위(선비))

△ 秦의 통일(BC 221) → 한제국(BC 202) → 왕망(8년) → 후한(23년) → 삼국시대(220) → 서진(265)

△ 화북 : 5호 16국(304-439) → 북위(439-539) → 동위(북제), 서위(북주) → 수의 통일(589)

△ 화남 : 동진(317-420) → 송-제-양-진(420-589)

1. 송 나라 시대

실제 송, 제, 양, 진의 남조시대는 엄청난 격동기로서 전투와 전쟁이 많았던 만큼, 제대로 포스팅 하려면 시리즈로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 포스트는 이야기 중국사가 아닙니다. 나중에 중국사를 다시 포스팅할 때 고사들은 다시 정리하기로 하고, 아주 간략히 왕조의 흥망만을 다루겠습니다.

동진의 뒤를 이어 선양으로 송을 건국한 사람은 <유유>입니다. 바로 송 무제라고도 하죠. 유유는 사실 동진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화북 서진 군대의 장군이었습니다. 유유는 화북을 통일한 전진의 부견과 중국 패자자리를 놓고 엄청난 격전인 <비수의 대전>을 이끈 장수입니다.(5호편 포스트를 보시면 됩니다.) 그는 비수의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어 북방 민족들이 남조를 넘볼 수 없도록 일시적으로 쐐기를 박아놓은 영웅이었죠.

유유는 북방 민족들을 끊임없이 공격하여 남연, 후진 등을 박살내고 강자로 떠올랐습니다.그리고 5호에 대한 적대감을 그대로 표출하여, 남조 귀족들에게 든든한 <장수>라는 인상을 심어줍니다. 결국 무력을 가진 유유가 동진의 왕으로부터 <선양>의 예로서 황제에 즉위합니다. 이 나라가 송입니다.

그런데 문제점은 유유라는 <군인>이 황제가 되었는데, 남조의 귀족들은 이 유유를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인정한 정도가 아니라 유유가 왕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까지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논란이 많습니다.

첫 번재는 무인정권이 군사적 기반으로 귀족들을 굴복시켰다는 설입니다. 두 번째는 귀족들이 자신들이 사회, 정치적 지배권을 가졌기 때문에 적당한 <무인 영웅>을 왕으로 앉혀놓고 왕에게 북방 이민족을 견제하도록 유도했다는 설입니다. 실제, 무인 출신 왕은 북방 이민족과의 싸움에 이긴 영웅으로 중앙정치를 하는 왕이었지만,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사희 지배집단은 호족출신의 귀족집단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번째 논점을 인정하는 형태에서 포스팅을 할 까 합니다.

실제 무인으로서 왕이 된 <유유>를 비롯한 남조의 왕들은 모두 싸움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미천한 <무장 세력>이었습니다. 이 무인들은 무술 실력으로 북방 민족들을 견제하면서, 귀족들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들은 정치적 실권이 없었기에, 송- 제 - 양 - 진으로 이어지는 남조 국가들은 모두 단명하고 맙니다. 즉, 군사력으로 집권한 왕들은 군사적 가치가 떨어지면 실세인 귀족이나 지주세력에 의해 제거되는 것이지요.

실제 송나라는 송무제(유유)이래 문제 시대에 안정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이 당시 북조에서는 북위가 북방을 통일하고 송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지만, 무신정권은 이들을 효율적으로 막아내였지요. 그러나, 송 문제 이후 왕권이 약해지고 군사력이 약해지자 결국 송은 더욱 강력한 무장은 <소도성>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왕을 양위하고 맙니다. 그 결과 평화적으로 송에서 <제>나라로 양위가 양위됩니다. 그러나, 이후 강력한 무장들이 서로 왕위를 노리는 상황에서 소연의 쿠테타로 <제>라는 무신정권도 몰락하고 <양>이라는 무신국가가 다시 등장합니다.

2. 양의 시대

송 - 제를 이어 왕에 오른 자는 강력한 무신 집단이지만, 가문이 미천했던 양 무제입니다. 양나라의 소연은 왕이 되자 바로 실세인 <귀족집단>의 특권을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화북 귀족들의 정치, 경제, 사회적 특권을 보장하기 위해 <백가보>라는 것을 작성해주고, 문벌귀족들을 국가 관리로 적극 등용합니다. 그는 유교와 불교 등을 정비하고, 지방 호족적 성향의 관리들을 중앙에 적극적으로 끌어오려고 하지만 <후경의 난>으로 몰락하고 맙니다.

<후경의 난>이란, 북위가 동위, 서위로 분열된 이후 북에서 내려온 동의의 후경 장군이 일으킨 난입니다. 후경은 하남 13개 주를 양나라에 바치고 남조에 충성할 것을 맹세했지만, 결국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쿠테타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이 후경의 난으로 당시 지방세력이었던 문벌귀족들이 대거 죽습니다. 후경은 본래 남조 출신이 아닌 만큼, 남조의 귀족들을 우대할 이유도, 그들의 눈치를 볼 이유도 없었습니다. 이 후경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결국 문벌귀족체제가 무너지는 신호탄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양을 이어 진패선이라는 장군이 진을 건국하였지만, 당시 강성했던 북방의 국가들에게 멸망하였고, 중국은 <수>나라에 의해 통일국가로 전환됩니다. 남북조 시대가 끝난 것이지요.

3. 남조 정권의 가장 큰 특징

결국 남조 정권을 살펴보면,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1. 귀족세력이 실세였지만, 귀족들은 북조의 침략을 막을 만큼 실력있는 장군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2. 남조의 왕들은 모두 무장 출신으로서 쿠테타를 통해 집권했지만, 그 집권 방식은 대부분 선양이었다.
   3. 남조의 창업주들은 철저하게 귀족들의 지위를 보장하고 그들의 협조로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4. 귀족들은 군인무장을 왕으로 삼은 뒤 자신들의 가문의 영광만을 추구하였다.
   5. 남조의 왕조는 모두 문벌귀족의 신임을 잃으면 망하였기 때문에 황제권이 약하였고 단명하였다.

남조 왕조의 특징은 이 정도로 정리하고 이후에 포스팅은 북조 왕조의 통일 국가 북위를 다루겠습니다. 북위를 다루기 위해서는 5호 16국을 어느정도 다루어야 하고, 효문제와 우문태를 키워드로 왕조를 설명하는 것이 좋겠네요. 그럼 북조의 전성기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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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를 통일한 조조, 조비 부자의 <위> 나라

이번 장에서는 삼국시대에 대한 내용을 <위>나라 중심으로 포스팅 하겠습니다. 하지만, 삼국지의 이야기식이 아닌 순수한 역사적 관점에서 적어도록 하죠.

1. 위나라는 정통성이 있는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국시대의 나라는 조조의 위, 유비의 촉, 손권의 오를 말합니다. 영웅들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어렸을 때 한번쯤은 읽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소설인 삼국지는 훨씬 후대에 나관중이 쓴 소설입니다. 역사로서의 정사 삼국지는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이죠.

진수의 삼국지와, 진수 이후의 삼국시대 사서들은 좀 관점이 다릅니다. 진수는 삼국시대의 정통이 <위>에 있었다고 봅니다. 위나라는 후한의 호족연합정권에서 파생된 가장 강력한 호족 세력으로서 후한 대 이후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었고, 역사는 명분보다 <실세>로 흘러간다는 입장에서 보아도 위가 정통성이 있다는 것이었죠. 특히, 진수가 삼국지를 저술할 시기에는 삼국시대 이후 <진>나라가 정권을 잡으면서 실력있는 자들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습니다. 진수는 위나라를 전통으로 하여 위를 기전체 역사에서 황실의 이야기인 <제왕 본기>로 서술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 자체가 실력으로 줭권을 잡는 시기였습니다. 실력있는 이민족들이 중국 대륙을 넘보는 시기의 역사 서술은 조씨 일가와 사마의에게 정통성을 부여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후 중국민족이 중국 전체를 휘어잡고 이민족을 몰아낸 송대에는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유지기의 사통, 주희의 통감강목 등의 역사서에서는 중화민족의 기틀을 <한나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전한왕실의 정통성을 후한이 이어갔고, 후한의 멸망 뒤에는 왕실 성인 <유씨>가 계승하려 했으므로, 유비가 곧 정통이라는 입장입니다. 이 논리는 상당히 유교적인 논리입니다.

2. 위의 발전 배경 - 둔전제

삼국시대, 위나라의 가장 큰 발전 배경은 <토지 개혁>이었습니다. 후한 말기 원소, 조조 등 유력한 토지보유 호족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사병을 양성했기 때문에 후한 말에는 토지가 황폐해졌고, 백성들은 수많은 민란을 일으켰습니다. 전란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사실 조조, 원소, 동탁 등 대토지를 보유한 호족 계급이었지만, 그들 중 사회적 모순을 적극적으로 개혁할 의지가 있었던 자들은 초기에 거의 없었습니다.

삼국시대에 조조, 유비, 손권이 패권을 잡은 것인 이렇게 문란한 토지제도와 경제질서를 개혁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조는 둔전법으로, 유비는 낭방 개척과 수운사업으로, 손권은 양자강 일대의 수운 무역과 그 일대 농지개간으로 성장한 호족세력이었습니다. 이중 가장 토지개혁을 철저하게 했던 자가 바로 조조입니다.

조조는 전란으로 황폐화된 영지가 늘자 임자없는 농경지를 모두 <둔전>으로 편제하여 버립니다. 이 둔전에 유망하는 유민들을 둔전민으로 편제하여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또 둔전을 관리하는 둔전관도 호적에 넣어서 철저한 둔전 통제책을 실시합니다. 둔전민들은 조조의 보호아래 청주 일대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관리관은 소, 씨앗 등을 무상으로 대여해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농경민을 적극 유치한 이유는 군사력과 조세 때문입니다. 이 둔전에서 조조는 소를 대여한 땅에서는 6/10, 자가농의 영지에서는 1/2의 세금을 걷었습니다. 엄청난 세금이었지만, 농민들은 혼란기에 안정적인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한 듯 싶습니다. 이 농민들은 전쟁이 극심할 경우에는 청주일대를 중심으로 조조의 사병이 되어 전쟁에 투입되었고, 조조는 병사들에게 더 많은 정복 토지를 보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둔전제의 의의는

첫째, 떠도는 유민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한 것
   둘째, 황무지를 개간함으로서 국가의 경제력을 재건한 것
   셋째, 경제력과 유민을 확보함으로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한 것 등입니다.

3. 후한제국의 계승자로 자처하다

조조의 경제적 실권이 둔전책이라면, 정치적 실권은 바로 <후한계승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것입니다. 조조는 새로운 왕조는 자신의 왕조가 아니라, 후한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조조일가는 양자로서 가문이 계승되었던, <환관> 가문이었습니다. 중앙의 정치력을 가진 환관가문이자, 지방에서는 대토지와 무력를 소유한 호족가문이었습니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위>를 건국할 때도 무력으로 후한 세력을 다 죽인 것이 아닙니다. 조비는 구세력의 저항이 가장 적은 방법으로 <선양>이라는 형식으로 즉위합니다. 선양이란, 성현에게 왕위를 양위한다는 유교의 덕치주의적 정치원리의 형식만을 빌린 왕위계승법입니다. 즉, 위는 후한의 황제로부터 덕이 있어 왕위를 물려받은 왕조가 되는 것이지요. 이 선양은 주례체제에서 빌린 획기적인 방식 왕위계승 방식입니다. 이 후 대부분의 중국 전통 왕조는 왕위계승을 선양의 형식으로 합니다.

또 조비는 자신의 거점지인 화북을 중심으로 <낙양>에 도읍을 정하여 한의 수도가 곧 위의 수도라는 명문을 내세우며 한의 계승자임을 자처합니다.

4. 위의 몰락

그러나 위 왕조는 너무 단명하였습니다. 그것은 후한말 이래 호족 세력들이 할거한 시대를 통일했지만, 호족 세력이 상당수 잔존하였기 때문입니다. 위는 호족세력과 개국공신들에게 많은 관직을 내려주었고, 호족세력들을 중앙 관리로 끌어들여 귀족세력으로 재편하려고 했습니다. 또 9품관인법 같은 제도를 계승함으로서 관직임명에 제도적 명분도 만들려 하였죠.

하지만, 호족이 중앙에 올라와 귀족화되면서 초기 조조, 조비의 참신한 기풍은 점점 사라지고, 지배집단이 <귀족세력>으로 변질되기만 하였습니다. 이들 호족들은 중앙에서 서로 편을 갈라 대립하곤 하였고 그 결과 사마의가 정권을 정악하면서 사마씨의 <진> 나라로 정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물론 이 진의 건국도 <선양>의 형식을 빌립니다. 사마염(무제)가 위을 선양으로 이어받으면서 건국된 <진>은 명실상부한 <삼국시대 통일국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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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춘추전국시대의 사상 2. 도가와 묵가

이번 장에서는 중국 춘추전국시대 사상의 2번째 편으로 도가와 묵가를 간략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이 두 사상은 전편에 다른 유가와 정면적으로 충돌한 사상으로, 유가와 비교해서 해석하면 재미있습니다.

1. 도가

도가의 기원은 노자, 장자의 노장사상을 흔히 말합니다. 도가는 유가와 함께 중국 2대 사상으로 발전하지만, 그 사상은 유가에 대한 반발적 경향이 강합니다.

도가 사상의 핵심은 유가에서 말하는 <도덕원리>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도덕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연성을 훼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또, 가부장권을 이론적 근거로 하여 전제군주권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유가는 국가주의적인 기형아적 사상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춘추전국의 혼란은 인간이 욕심을 부려서 일어난 <인재>라고 보고, 인간이 욕심을 떠나서 자연 그대로의 삶을 보고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소위 <무위자연>이며, 도가에서는 국가생활을 떠나 자연생활에서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봅니다.

보통 이러한 현실 부정의 사상은 중국 남부의 초나라 등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인도 등 남부 지역의 자연주의 사상이 중국에 전파된 것이라 보는 입장도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사상의 기원이 아니라 도가 사상이 실제 자연중심적이고, 자연과 인간이 서로 조화를 이룬다는 중국 사상의 기반을 이룬다는 점이죠.

도가에서는 국가란 것의 규모가 커질수록 인위적인 사회라고 말합니다. 국가는 될 수 있으면 인간 생활에 필요한 만큼의 최소 단위인 것이 좋으며, 국가의 규제보다는 자연의 법칙이 더 커질 때 진정한 자유가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을  <소국과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죠. 따라서 국가가 만약 일반 백성의 삶을 지나치게 규제한다면, 백성들은 국가에 대하여 저항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도가에서는 <저항권>의 개념이 은연중에 나타나는 것이며, 중국 민란의 사상적 근거의 대부분이 훗날의 <도교>에서 비릇된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2. 도가의 사상가

도가 하면 일단 노자를 떠올릴 것입니다. 도가의 창시자이자 무위자연, 소국과민이라는 용어도 노자에게서 비롯되니까요. 그는 전제군주제를 비판하였고, 백성들의 저항을 인정하였으며, 유가의 인위적 질서를 비판하였습니다. 그의 사상은 거의 전해지지 않습니다. 다만, 노자가 은둔하기 직전 국경검문소 병사의 요청으로 그 자리에서 적어주었다는 <도덕경>만이 남아 있는데, 이 도덕경의 심오함은 계몽주의 시대 서구 사상가들마저 감탄하여 필독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장자는 도가사상에 종교성을 주입하여 <도교>를 확립하는데 기여한 철학가입니다. 그는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여, 어떤 진리도 절대적 근원은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가, <내가 꿈 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인가, 내가 나비인데 지금 인간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라고 말한 부분은 진리의 상대성을 명확히 드러내주는 말입니다.

3. 묵가 사상

묵가는 묵자가 창시했는데, 유가의 형식주의와 불평등주의를 전면적으로 반발하고 나온 제자백가입니다. 묵가는 전국시대 당대에는 가장 활발했던 학파로서, 당대 사상을 이끌었던 핵심 제자백가입니다.

묵가가 유가를 비판한 내용은 다양합니다. 일단 유가의 윤리성이라는 것이 너무 형식적이고, 비실용적이라는 점입니다. 묵가의 입장에서 유가를 바라볼까요?

유가에서의 예악정치란, 속마음을 숨기고 형식으로만 상대를 조롱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왕위세습이라는 것은 지배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든 사회적 제도 장치입니다. 유가가 말하는 어짐, 효도, 우애는 자신들의 가족만을 위한 가족윤리로서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겸애사상에 맞지 않습니다. 묵가에서는 유가의 사랑을 <차별애>라고 하며 비난합니다. 또, 삼년상이란 쓸데없는 허례허식으로, 그 시간에 노동을 해서 이웃과 더불어 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유가가 말하는 정치철학은 너무 현세주의적이라 내세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서 다수 <백성>들의 삶에 위안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반대의 사상이 묵가 사상의 핵심입니다.

묵가사상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겸애,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야 한다는 비공, 모두가 평등하다는 상동, 모두가 일한 만큼 똑같이 나누어 가진다는 교리, 위인을 존경한다는 상현, 왕위와 높은 직책은 능력에 따라 열심히 일한자에게 준다는 선양 등을 주장합니다.

따라서 사람에게 꼭 갖추어야 하는 본성은 <가족윤리>가 아니라 <노동의 자세>라고 말합니다. 노동은 곧 생활이자, 사회적 능력이자, 이웃에 대한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온정인 것입니다.

묵가사상에서 본 정치는 노동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공정한 능력 사회입니다. 이 공정한 사회를 위해서는 국가의 역할이 너무나 크다고 묵가는 말합니다. 즉, 국가는 정치를 공정하게 할 수 있는 인물을 선거(선양)하여 그 인물이 모든 노동자들에게 혜택을 주어야 합니다.

국가의 부강함, 인구의 증가는 모두 공정한 정치에서 나오며, 공정한 정치란, 노동자들에게 생산, 노동, 절약의 정신을 심어주고 가난한 자를 없애주는 정치를 말합니다. 특히 국가가 해야 할 일을 <3환의 제거>라고 말하는데, 3환이란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 추위게 입을 것이 없는 것, 일하는 자에게 휴식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묵가는 묵자 이래 거대한 교단을 형성하여 사회 노동조직이자, 종교적 성향을 지닌 사학 집단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들은 이웃에 대한 절대적 겸애를 바탕으로 한 <공리주의>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사랑>을 핵심 덕목으로 하는 사상체계였습니다. 그리고 철저한 노동과 금욕주의를 통하여 생산력과 개인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에 주안점을 두었으므로, 게으른 자에 대한 귄위주의적 체벌과 훈련, 노동에 대한 복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묵가의 강력한 노동 중심의 권위주의는 묵가의 몰락을 초래합니다. 춘추전국시대 가장 강성했던 묵가가 몰락한 원인은, 그 사상이 너무나 철두철미하여 <중용>을 강조하는 중국사람들에게는 어려운 과업이었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후의 묵가 교단은 중국 역대 왕조에서 두각을 나타낸 적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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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의 사상 1 - 유가사상

1. 유가 사상의 특징

유가 사상은 춘추시대의 공자로부터 출발하여 그 제자들인 맹자, 순자로 계승된 사상입니다. 이 사상의 가장 핵심은 인간을 정치, 사회, 역사의 주체로 놓고 인간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가에 대한 철학적 논의를 통해 삶의 원리를 발견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상은 인간이 살면서 지켜야 할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며, 윤리란 자연적인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가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이 사상은 자연속에서 진리를 찾는 도가적인 관찰자 역할을 무책임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법가적인 강압주의는 인간의 윤리를 근본적으로 깨닫는 이치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유가사상가들은 자연과 강압의 가운데에서 <중용>을 통해 윤리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후세계보다는 현실 속에서 인간이 살아야 할 방향을 탐구하였으며, 그것은 곧 정치 윤리로 연결되어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치국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따라서 유가주의자들의 논의는 상당히 지배계급의 이상적 당위성과 치국의 방법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또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내적인 윤리와 도덕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예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서주시대의 봉건적 질서와 예작제도를 중시하였으며, 그 원리에 따라 예법을 만들고 제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들은 군주는 덕치를 바탕으로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한 윤리라고 말하면서도, 그러기 위해서 군주가 지켜야할 행동가짐은 예치로 규정해 놓습니다. 그리고 군주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데, 이것은 어느 한쪽에 치우침이 없다는 중용의 논리와도 일통합니다. 즉, 예치, 덕치, 중용에 입각한 덕치주의, 예약정치, 왕도주의는 군주의 필수 항목으로서 이러한 항목을 군주가 지켜가야 혼란한 시기를 구원하고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유가주의는 당시 공자 이래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면서 중삼-자사-맹자 계열, 자하-순자 계열의 사상이 달라집니다. 이들은 인간이 예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이치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유가의 핵심 원리는 인정하면서도,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인간은 스스로 사회를 개척할 수 있는가, 패도는 받아들일 수 있는가 등의 구체적인 부분에서 계열이 갈리게 됩니다.

2. 공자의 사상

공자의 사상은 한마디로 <인> 사상입니다. 어질게 사람이 사는 것이 곧 인간의 도리이자 윤리라고 주장하면서, 이 어진 삶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효, 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 - 효 - 제라는 핵심 도리를 말함으로서 이 도리가 가족윤리적임을 밝힌 것입니다. 즉, 가부장권을 옹하하면서 그 가족제도가 인간 삶의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효도와 우애를 국가적으로 확장하면 국왕에 대한 충성으로 확대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사상이었습니다. 국가에서도 국왕은 아버지가 사랑으로 가족을 감싸듯이, 덕으로서 백성들을 위무해야 합니다.

또 공자는 이렇게 인 - 효 - 제를 지켜가면서 윤리적으로 사는 이상적인 사람을 <군자>라고 지칭했습니다. 군자란 우애와 효도를 통해 <수신제가>를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세상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 마음 가짐을 가지고 <치국평천하>를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래서 공자가 말한 이상적 군자의 모범은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입니다.

그는 군자란 윤리적인 측면이 강한 인물로서, 교양을 갖추되, 그 교양의 바탕에는 올곧은 지식을 근간으로 합니다. 따라서 정치의 목표는 소인배들을 군자로 끌어올라는 것이 곧 목표입니다. 공자는 바람직한 인간상을 4가지로 분류하였는데, 이것을 4등론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은 성인 - 현인 - 군자 - 소인이 있으며, 보통의 사람들은 소인이 되지 않고 군자가 되는 것이 곧 삶의 지향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현인은 군자의 단계를 넘어선 지식과 정신을 겸비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성인은 선천적으로 성인의 천성을 타고난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극한의 경지라고 말합니다.

공자의 이 4등론은 한나라 시대 한고가 인간유형을 9등으로 다시 세분하였고, 훗날 위진남북조 시기에 구품관인법을 실시해서 관인을 선발할 때의 기준으로 쓰입니다.

공자는 내적인 윤리(덕)와 외적인 예(예절)이 균형잡힌 사람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봅니다. 지식과 정신의 겸비를 다시 강조한 말이죠. 그리고 이러한 지와 정을 고루 갖추어 한곳에 치우침이 없는 것을 중용이라고 합니다. 중용은 관용과 타협정신을 가진 것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어 중국문화의 사상적 기반으로 작용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중용을 실시함에 있어 격식에 맞게 행하는 것은 서주의 예에 맞는 것으로, 예악정치도 강조합니다.

3, 맹자의 사상

맹자는 공자의 제자로서 공자 사상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 그는 일단 인간 윤리에 대한 전제로 인간은 선하게 태어난다는 <성선설>을 주장합니다. 인간의 선한 마음은 그 처음의 본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켜나가야 할 것으로 파악하고, 본성을 지키는 것이 곧 유교 윤리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부여된 4가지 본성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사단이라고 합니다. 4단은 측은지심(인), 수오지심(의), 사양지심(예), 시비지심(지)입니다. 그리고 이 4단이 발하는 것은 인간의 욕정 때문인데, 이것을 희, 노, 애, 락, 애, 오, 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4단에 맞추어 인간은 다섯 가지 도리를 지키며 살아야 선한 본성을 유지할 수 있는데, 이것은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 장유유서, 붕우유신 이라는 5륜입니다.

맹자는 부국강병을 위한 정치이론으로는 <덕치주의>를 바탕으로 한 <왕도정치>를 주장하였습니다. 왕도주의란, 국왕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한점 부끄럼도 없이 정의에 의해 다스려야 함을 말하는데, 이것은 4단 중에서 <수오지심>과 관련된 것입니다. 즉, 의 = 정의를 뜻하는 것이지요.

제왕이 수오지심에 의거하여 정의로 백성을 다스리면, 천명은 자동으로 따라오는 것으로서 하늘이 스스로 제왕을 돕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천명은 곧 하늘의 정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덕이 없는 군주가 정치를 한다면 이것은 하늘의 정의를 버리는 일이고 백성들은 새로운 하늘의 정의를 세울 수 있음을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맹자의 사상 속에는 <혁명론>의 근거가 숨어있습니다. 이러한 혁명론적 사상이 내포되어 있기에, 맹자는 살아생전에 크게 존경받으면서도 군주들이 꺼려하는 유가사상가였습니다. 또, 이러한 천명의 변화라는 개념은 후대 <선양>이라는 선례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법가사상가들은 맹자의 사상은 너무 이상적이고,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4. 순자의 사상

순자의 사상은 유가주의이면서도 기존의 학설과 많이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규정하는 성악설을 배경으로 하는 철학입니다. 따라서 공자, 맹자가 인간의 본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가족윤리를 주장할 때,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므로 예절을 통해서 억눌러야 된다며 맹자를 적극 비판합니다.

인간에게는 4단이라는 윤리가 내제한 것이 아니라, 절대 악이 내제되어 있습니다. 이 절대악을 누르기 위해서 예악정치, 인간윤리가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순자의 사상은 유교적 도덕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실현 방법에 있어서는 약간 패도적인 법가주의를 받아들입니다.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이사를 3번 하면서 교육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면, 순자는 아마도 자식의 교육을 위해 잘못된 길로 갈때 마다 체벌과 정신교육, 토론을 계속 할 것입니다.

또 순자는 공자가 주장하는 인효제라는 가족윤리는 허망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순자는 가족 윤리는 작은 것이며, 이 작은 것을 지키는 것보다 더 큰 윤리가 있는데, 이것은 곧 <의>를 따라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의>를 따라 산다는 것은 소속한 사회, 또는 국가를 위한 헌신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러한 순자의 견해를 <충의론>이라고 합니다.

5. 유가를 비판하기 시작하다.

그럼 여기서 순자 외에 공자 사상을 비판한 수많은 제가 백가들의 비판 내용을 한번 볼까요?

도가에서는 공자의 유교사상을 도덕관념에 너무 얽매여서 인위적으로 구성된 모순덩어리의 사상이라고 말합니다. 또 유교사상이 인간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하다보니, 국왕권과 밀착된 현생문제에만 몰두하여 인간이 가진 내면의 본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도가에서는 전제군주제를 비판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 <소국과민>을 추구하라라고 말합니다. 도가는 국가의 단위는 최소한 작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유가는 절대군주권을 옹호하면서 지배층의 이념만을 정당화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법가는 유가사상을 허무한 형이상학적 이념이라고 비판합니다. 유가 사상은 도덕과 윤리로 사회를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것은 너무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이여서 과연 그것이 정치이념이 되었을 때, 실제 전쟁으로 굶고 있는 백성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를 이야기 합니다. 실제, 유가 사상은 부국강병책과는 거리가 멉니다.

묵가사상가들은 가장 신랄하게 유가를 비판합니다. 유가가 왕권이 강한 중원지역의 학맥을 가지고 있다면, 묵가는 가장 남방의 초나라 권역에서 발생하였습니다. 유가가 중원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원리를 정당화하는 학문이라는 것에 묵가는 크게 반발합니다. 묵가는 유가의 인-효-제의 가족윤리는 자신들만 챙기는 이기적인 윤리이고, 그것을 확대한 가부장적인 군주관은 절대군주권을 옹호하는 지배층만의 사상이라고 비판합니다. 묵가는 가족애는 <차별애>이므로, 만민이 모두 평등할 수 있는 <겸애>를 실현하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또 유가에서 말하는 <예절과 예악>은 허례허식일 뿐이며, 그런 절차가 과연 무슨 생산력 발전에 도움을 주느냐고 비판합니다.

묵가 사상가들이 유가에 대하여 비판한 부분은 너무 많습니다. 왕위를 세습하는 것은 차별적인 관습이다, 3년상은 허례허식이다, 예악정치는 낭비이다, 가족윤리는 차별애이다, 또 현세적인 유교적 치국주의는 노동력을 중시하는 생활상과 맞지 않는다 등입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도가, 법가, 묵가의 사상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장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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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