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30건

  1. 2010.06.01 수능 근현대사와 세계사
  2. 2009.01.27 수능 근현대사 정리 17 : 민주주의의 발전 2 / 장면 내각과 5.16 군사정변 (4)
  3. 2009.01.07 수능 세계사 정리 16 : 유럽사 7 / 크리스트교의 전개1(로마제국~프랑크 왕국) (6)
  4. 2009.01.07 수능 근현대사 정리 16 : 민주주의의 발전 1 / 이승만의 독재와 4.19
  5. 2008.12.30 수능 세계사 정리 15 : 유럽사 6 / 중세의 문화와 비잔틴 제국
  6. 2008.12.29 수능 근현대사 정리 14 :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토지개혁 (1)
  7. 2008.12.29 수능 세계사 정리 14 : 유럽사 5 / 2차 민족이동과 봉건사회
  8. 2008.12.29 수능 세계사 정리 13 : 유럽사 4 / 게르만 이동과 프랑크 왕국
  9. 2008.12.29 수능 근현대사 정리 13 : 광복과 건국에 대한 노력
  10. 2008.12.28 수능 근현대사 정리 12 : 일제의 식민지 교육 문화 정책과 국학 운동 (2)
  11. 2008.12.27 수능 근현대사 정리11 : 학생 운동과 일제 감정기의 경제적 구국 운동, 국외의 사정과 종교단체의 항일운동 (1)
  12. 2008.12.27 수능 세계사 정리 10 : 유럽사 1 / 에게 문명과 폴리스
  13. 2008.12.27 수능 근현대사 정리 8 : 국권피탈 과정
  14. 2008.12.27 수능 세계사 정리 9 : 중국사 7 / 중국현대사
  15. 2008.11.24 수능 세계사 정리 7 : 중국사 5 / 중국의 근대화
  16. 2008.11.24 수능 근현대사 정리 7 : 경제적 구국 운동과 개항 이후의 사회, 문화 (7)
  17. 2008.11.22 수능 세계사 정리 6 : 중국사 4 / 명(明), 청(淸) (2)
  18. 2008.11.22 수능 근현대사 정리 6 : 아관파천과 이권 침탈, 그리고 개항 이후의 경제 (1)
  19. 2008.11.20 수능 9번문제 논란은 뉴라이트 교과서 논쟁의 신호탄이다. (8)
  20. 2008.11.20 수능 근현대사 정리 5 : 의병투쟁 (1)
  21. 2008.11.20 수능 세계사 정리 5 : 중국사 3 / 송(宋), 원(元)
  22. 2008.11.18 수능 세계사 정리 4 : 중국사 2 /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수(隨), 당(唐)
  23. 2008.11.18 수능 근현대사 정리 4 : 거문도 사건과 개혁의 노력 (2)
  24. 2008.11.17 수능 근현대사 정리 3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4)
  25. 2008.11.17 수능 세계사 정리 3 : 중국사 1 / 주(周),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 진(秦), 한(漢) (4)
  26. 2008.11.16 수능이 싫다 : 좀 지각했다고 시험보지 말라구요?
  27. 2008.11.16 수능 세계사 정리 2 : 문명의 성립
  28. 2008.11.16 수능 세계사 정리 1 : 역사인식과 선사시대
  29. 2008.11.16 수능 근현대사 정리 1 : 흥선대원군과 척화비, 그리고 개항 (10)
  30. 2008.11.14 수능을 거부했다는 것은 만용일까, 용기일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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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2) 장면 내각과 5.16 군사정변
  4. 19 혁명 이후 허정의 과도 정부는 독재 정권의 등장을 막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의회의 역할을 증대하는 내용이 담긴 개헌을 행하였다(1960. 6. 내각 책임제, 양원제兩院制 의회 개헌). 개헌 이후에는 과거 자유당을 견제하였던 야당인 민주당이 내각의 주역이 되었으며, 총리는 장면, 대통령에는 윤보선이 당선되었다. 장면 내각은 이승만 시절부터 꾸준히 지적되어오던 민생고 문제를 없애기 위해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나,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과거 독재정권이었던 이승만 시절과 달리, 장면 시절에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많은 내용들이 논의되었는데, 학원 민주화, 노동운동, 통일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특히 통일 문제에 대해 혁신계에선 중립화 통일론, 남북 협상론 등 활발한 통일 운동이 진행되었다.
  국민들의 활발한 운동과 논의와는 달리 장면 정부는 부정선거 책임자에 대한 처벌과 더불어, 각종 민주화 요구와 통일에 대한 개혁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또한 민주당 자체도 신파新派, 구파舊派로 분열되어 적극적으로 개혁에 나설 겨를이 없었다. 

  5. 16 군사정변은 4. 19 이후 ‘혼란하고 어수선하며 기강이 없고 헤이해진’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박정희 등의 일부 군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것을 일컫는다. 권력을 장악한 군부는 계엄을 선포하고 군사 혁명 위원회(박정희 부의장)를 만들어 각종 혁명 공약을 발표하였다. 이후 박정희가 의장을 맡아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여 군정軍政을 실시하였다. 국가 재건 최고 회의는 미국의 신임을 얻기 위해 반공 체제를 강화하고, 그동안 의회중심이었던 헌법을 다시 고쳐 4년 중임의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單院制 의회 등의 개헌이 이루어졌으며, 구 정치인의 활동금지, 농어촌 고리채高利債 정리 등의 개혁을 단행하고, 1962년에는 그동안 계획 중에 있었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였다. 군부 세력은 각종 개혁이 이루어진 이후에 ‘양심이 선량한 정치인’에게 정권을 양도하기로 하였는데,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 쯤 군정에서 정권을 잡았던 중요 인물들이 제대하여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여 ‘양심이 선량한 정치인’으로 변모하였다. ‘양심이 선량한 정치인’인 박정희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결국 당선되었다. 

Tip. 장면 내각
1960. 6. 내각 책임제, 양원제 개헌
민주당 내각 - 총리 장면, 대통령 윤보선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실행하지 못했음
민중의 민주화 요구(학원 민주화, 노동운동), 통일에 대한 논의
장면 내각은 개혁에 소극적 “선 건설 후 통일”
1961. 5. 16 군사정변으로 정권 붕괴 

Tip. 5. 16 군사 정변
정변 과정 : 군부의 정권 장악 - 계엄 선포 - 군사 혁명 위원회 - 국가 재건 최고 회의
개혁 : 구 정치인의 활동금지, 농어촌 고리채 정리 단행 / 1962. 경제 개발 5개년 개획 추진
대통령 선거 : 민주공화당 창당, 박정희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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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트교의 전개
① 로마시대의 크리스트교
  크리스트교는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조로아스터교의 천당, 지옥, 최후의 심판, 영생 등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예수는 믿음과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제자들과 함께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로마는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고 하여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신자들을 박해하였다. 그래서 크리스트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많은 신자들은 카타콤과 같은 지하묘지에 몰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여러 사도들의 편지를 보면서 교리를 공부하였다.
  크리스트교가 만들어지고 300년이 지났을 무렵,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전선(戰線)의 하늘에 새겨진 붉은 십자가를 보고 역전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각주:1] 그는 하늘에 크리스트교로 개종할 것을 약속했으며, 그 약속은 곧 크리스트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313)으로 지켜졌다.
  크리스트교가 공인된 이후에는 많은 신자들이 카타콤과 같은 곳에서 비밀리 모일 필요가 없어졌으며, 그들은 이제 지상에 나와 떳떳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연구한 교리였다. A 카타콤과 B 카타콤의 교리 연구는 똑같은 자료를 가지고 했음에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세상으로 나온 교도들은 성경과 교리에 대한 해석을 통합할 필요가 있었는데, 니케아 공의회(325)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성경의 교리와 해석을 통합하기 위해 열렸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파(派)와 아타나시우스파(派)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아리우스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의 신성성은 하느님에 미치지 못하다고 주장하였고, 이는 그 당시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반면 아타나시우스는 하느님과 그의 아들 예수는 모두 신성하며 성부(聖父) - 성자(聖子) - 성령(聖靈)은 모두 같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를 주장하던 아타나시우스파는 그 당시 아리우스파에 비하면 소수였다. 하지만 소수였던 아타나시우스파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인정을 받으면서 아리우스파를 압도하고, 크리스트교의 정통교리로써 자리 잡았다.[각주:2]


Tip.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


아리우스파 : 다수 / 하느님과 예수의 신성이 같지 않다고 주장


아타나시우스파 : 소수 / 하느님과 예수, 성령의 신성이 같다고 주장

  이후 크리스트교는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국교화(392) 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이 성지로 지정되었고 다른 지역들도 교구 단위로 조직되었다. 또한 교황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인데, 로마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인식과 니케아 공의회 이후 여러 우월권을 로마교회가 확보해 가면서 교황은 서유럽지역에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② 프랑크 왕국 시대의 크리스트교
  게르만인들이 대거 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유럽에는 게르만인들이 세운 많은 나라들이 들어섰다. 게르만들인이 유럽사회로 스며들면서 크리스트교 역시 게르만에게 젖어들었다. 사실 많은 게르만들은 다수파였던 아리우스파로 개종하였었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개창자 클로비스만은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하였는데, 이는 프랑크 왕국의 성공에 주된 요인이 되었다.
  메로빙거 왕조 말기 카롤루스 마르텔(칼 마르텔)은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군을 막아냄으로써 크리스트교의 수호자로서 여겨졌고, 그의 아들 피핀은 로마 지역의 땅을 정복하여 교황에게 기증하여 교황과 서로마 교화의 지지를 받았다.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한 카롤루스 대제(샤를 마뉴)가 800년에 서로마 황제로 대관하면서 서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의 연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1. 종교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하늘의 기적으로 인해 승리하고 감동을 받아 크리스트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학에서는 당시 도시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종교 - 크리스트교의 입장으로 보면 이교異敎 -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이들을 견제하고 종교적인 형평성을 지키기 위해 크리스트교로 개종했다고 설명한다. [본문으로]
  2.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역사학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인정한 것은 종교적인 형평성 때문이었다고 평가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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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민주주의의 발전
  앞서 살펴보았듯이, 광복 이전에 건국을 준비해오던 단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건국의 강령으로써 내세웠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꿈꿔오던 단 한 가지 목표였으며, 각종 파벌과 이념으로 갈라져있던 독립운동세력을 아우르는 하나의 매개체였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그들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름뿐인 자유와 민주, 자신의 부정부패를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원들과 대통령들― 일제강점기를 억압을 벗어나 순탄할 것만 같았던 우리나라 현대사는 또다시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격동에 휩싸인다. 

 1) 이승만의 독재와 4.19
  이승만 ‘박사’는 과거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맡았던 인물로, ‘이름난’ 독립운동의 ‘거목’이었다. 이승만은 주로 하와이나 미국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각종 국제회의에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로 참여한 바 있다. 이승만의 ‘공식적인’ 활동들로 인해 그는 국내외에서 유명해졌으며, 결국 광복 이후에는 초대 대통령직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가 정권을 잡은 것도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대다수의 민족주의자들은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반대하여 이승만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이승만은 미약했던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해 친미파로 변신에 성공한 친일파와 손을 잡지 않으면 안됐다. 헌법을 만든 초대 의회였던 제헌의회制憲議會는 친미파였던 한국 민주당 출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그들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지지기반의 대부분이 친일파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제헌의회의 임기가 2년으로 끝나고, 6.25 전쟁 직전에 이루어진 선거에서는 과거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던 민족주의자들과 이승만을 비판했던 사람들이 대거 당선되어 이승만의 대통령직이 위태로워졌다. 이승만은 2대 대통령 선거가 행해질 1952년, 6.25 전쟁 중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경찰, 군대, 폭력배 등을 동원하여 강제로 대통령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헌법을 고쳤다(발췌개헌). 1954년에는 초대 대통령만은 계속 대통령직을 역임할 수 있도록(중임 제한 규정 철폐) 다시금 헌법을 고쳤다. 1954년 개헌에서는 개헌과 함께 웃지못할 이야기가 전해진다. 본래 헌법을 고치기 위해서는 전체 국회의원의 2/3의 동의가 필요했다. 1954년 당시 국회의원 재적은 203명으로, 그의 2/3은 135.33333....이었으며, 때문에 개헌을 위해서는 136명이 개헌에 동의해야했다. 투표 결과는 135명이 찬성하여 부결되었지만, 후에 이승만의 자유당은 0.333....명은 있을 수 없으므로(자연인이 아니므로) 소수점을 반올림(사사오입)하여, 135명의 찬성만으로도 개헌이 가능하다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펼쳤다. 결국 극적인 반올림으로 대통령의 중임제한을 철폐하는 것으로 헌법이 개정되었는데, 이를 사사오입 개헌이라고 한다.
 
  이
승만의 이러한 ‘노력’에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항상 시험 당해야 했다. 이승만과 갈라선 이들은 민주당을 만들어 대립하였는데, 민주당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때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대통령 후보에는 신익희, 부통령 후보에는 장면을 입후보하였다. 선거 유세 도중 신익희는 급사하였지만, 장면이 부통령에 선출되면서 자유당을 견제하였다. 1960년에 이루어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혁신을 주장했던 진보당의 조봉암이 인기를 끌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3.15 부정선거를 자행했을 뿐만 아니라,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을 선고했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그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였으며, 언론을 탄압하고 반공사상을 강화시켰다.

  3.15 선거는 3인조, 5인조로 묶어서 투표를 하도록 하거나 투표함을 교체하는 등의 부정행위로 많은 사람들의 규탄을 받았다. 국민들은 부정부패와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이러한 불만들은 각종 시위를 통해 표출되었다. 김주열이 참여한 마산 시위도 이러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 중에 하나였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마산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행방 불명 되었는데, 얼마 후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올라 발견되었으며, 시체를 유기한 것이 경찰의 소행임이 알려지자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김주열의 사망소식은 전국적인 시위의 계기 되었으며, 4.18 고대 학생시위를 거쳐 4.19 전국 시위가 전개되었는데, 경찰들이 시위대에게 발포하였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희생당했다. 결국 같은 해 4월 26일에는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하야함으로써 막을 4.19는 막을 내렸다. 4.19는 학생과 시민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었다는 의의를 갖는다. 또한 4.19 이후로는 그동안 북진 통일 이외에는 사실상 ‘금기’로 여겨지던 통일에 대한 열망을 어느 정도 펼쳐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판문점으로! 등“)

  4.19 이후 대통령이 아닌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내각제 개헌이 이루어졌으며, 과거 선전하였던 민주당의 장면이 국무총리로서 권력을 잡았다.(대통령 윤보선, 국무총리 장면)

Tip1. 이승만 정부
1952. 발췌개헌
1954. 사사오입 개헌
1956. 대통령 이승만(자유당) vs 신익희(민주당) / 부통령 이기붕(자유당) vs 장면(민주당)
        민주당 “못살겠다 갈아보자” / 신익희, 선거 유세 도중 급사
1960 대통령 이승만(자유당) vs 조봉암(진보당) / 조봉암, 간첩으로 몰려 사형

Tip2. 4.19 혁명의 전개
3.15 부정선거 -> 마산 규탄 시위 -> 김주열 사명 -> 전국적으로 확대 -> 고대 시위 -> 4.19 전국적으로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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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중세의 문화
  중세 문화는 로마, 게르만, 크리스트교의 문화가 합쳐져 복합적인 색채를 띤다. 특히 서유럽의 대부분이 크리스트교 신자였기 때문에, 크리스트교 중심의 통일적 문화가 형성되었다. 중세 철학은 신학을 증명하기 위해 사용되었는데, 신학적 철학인 교부 철학(Tip. 敎父 哲學 : 신학에 근간을 이룬 신학자들의 철학, 2~7 혹은 8C 기독교 철학)에서는 “철학은 신학의 시녀”라고 할 정도였다. 교부철학의 대표적인 학자인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을 편찬하였다. 반면 중세 대학을 중심으로 발전한 9~ 12세기 유행한 스콜라 철학의 대표적인 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의 저서 『신학대전』에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것 역시 13세기 이후에 스코터스와 오컴은 신앙과 이성의 분리를 주장하였다.
  신학 강의는 대학에서 이루어졌다. 대학은 중세 초기에 교회나 수도원의 학문의 중심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12세기 이후로는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 교수나 학생들에 의해 대학이 조직되어 일종의 길드로 거듭났다. 이렇게 건설된 파리 대학, 볼로냐 대학은 국왕이나 교황으로부터 벗어나 자치권을 행사하기도 했다.
  중세 문학은 봉건 기사의 모험과 사랑을 소재로 한 것이 많았다. 이를 기사 문학이라고 하는데, 기사나 음유시인에 의해 창작되었다. 『니벨룽겐의 노래』,『롤랑의 노래』,『아더왕 이야기』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토속어 문학인 단테의 『신곡』과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 등이 있다.
  건축은 11세기, 12~15세기로 나눌 수 있는데, 11세기에는 로마의 분위기를 따른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중후한 돌벽과 돔형 아치를 이용한 것이 특징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는 피렌체 성당, 피사 성당 등이 있는데 장중하지만 창문이 작아 내부가 어둡다. 12~15세기 사이에는 고딕 양식이 유행하였는데 높은 첨탑과 스테인드글라스가 돋보이는 양식으로, 천국을 향한 중세인의 염원을 잘 나타내고 있다. 퀄른 성당, 샤르트르 성당, 노트르담 성당 등이 대표적이다.

② 비잔틴 제국
  비잔틴 제국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비잔티움으로 천도하면서 로마의 새로운 중심이 된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로마의 또 다른 이름이다. 성상 숭배 금지령(726)으로 로마 카톨릭과는 결별하고 황제교황주의(Tip : 황제가 교황직을 도맡아 함)를 내세운 정교일치(政敎一致)의 그리스 정교가 발달하였다. 중세에는 단순히 칭호에 불과한 서로마 제국의 황제와는 달리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오리엔트와 같은 절대적인 존재였다. 관료제와 둔전병(Tip : 토지를 국가에서 나누어주고 그 농민들을 군인으로 사용함. 당나라의 균전제와 유사)을 근간으로 중앙 집권이 이루어졌으며, 6세기에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때 전성기를 이뤘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로마법 대전과 성 소피아 성당을 축조하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로마법 대전은 실용적인 로마인의 성격을 전적으로 대변하는 법 분야의 완성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잔틴 제국은 지방 유력자들의 대토지 소유로 둔전병이 붕괴하고, 셀주크 투르크, 십자군 등의 공격을 받아 쇠약해졌다가, 결국 오스만 투르크에 결국 멸망하였다.
  비잔틴 제국은 그리스, 로마의 문화를 보존, 계승하여 훗날 서유럽의 르네상스를 자극하였으며, 셀주크, 오스만 트루크의 공격을 막아 서유럽의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비잔틴 제국의 국교였던 그리스 정교는 동유럽으로 전달되어 동유럽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Tip.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의 차이(비잔틴 제국 / 서유럽)
정치 : 황제중심(중앙집권) / 봉건제(지방분권)
경제 : 비잔티움 중심의 무역, 상업이 발달 / 장원 중심의 농업. 후에 도시의 부활로 상업 발달
문화 : 그리스 정교, 그리스, 동유럽 문화 / 크리스트교, 서유럽 문화
군사제도 : 군관구제, 둔전병제 / 기사
해체 : 오스만의 공격 / 십자군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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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대한민국의 수립
 1) 모그크바 3국 외상 회의과 좌/우 대립
  미국, 소련, 영국은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를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라고 한다. 회의의 결과는 한반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그를 지원할 미/소 공동 위원회 설치, 강대국들에 의한 5년 이내의 신탁 통치 실시에 관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여론을 통해 신탁 통치에 관련된 내용만이 부각되었다.(물론, 이를 부각시켜 선동한 언론은 조중동이다. 너무 당연한가?) 이에 좌익으로 대표되는 조선 공산당초기에 신탁통치를 반대하였으나, 후에 신탁 통치가 점진적으로 한반도 독립을 위한 길임을 깨닫고 찬탁으로 돌아섰다. 반면, 김구, 이승만, 한국 민주당 등의 우익은 열렬하게 반탁을 지지하였으며, 후에 반탁 운동이 신문사 등을 통해 반소련, 반공산당 운동으로 확대되게 되었다.

 2) 대한민국의 건국과 분단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협의한 것처럼, 미국과 소련은 1차 미 / 소 공동 위원회를 만들고(1946. 3), 한반도 신탁에 대해 논의하였다. 소련은 신탁에 찬성한 세력(좌익)만을 참가할 것을 원했으며, 미국은 좌 / 우익의 모든 세력이 참가하길 바랐다( * 참고 :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소련과 미국 둘 다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들의 이익이 되는, 친소, 혹은 친미적 정권 탄생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미국이 모든 세력의 참가를 원했다는 것이 결코, 우리나라를 위해서였다는 생각은 버리자. 근현대사에 나오는 외국인은 착할지 몰라도, 외국 국가 자체는 착하지 않다는 것을 명심하자.).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며, 결국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기에 이른다. 이를 지켜본 (또라이 쌍 간나ㅋ)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의사를 어렴풋이 전하는 정읍 발언(1946. 6)하기도 하였다.
  분단은 한반도를 위한 것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한 일이었다. 이에 중도 세력이었던 중도 좌익의 여운형과 중도 우익의 김규식이 손을 잡아 좌우 합장 운동(1946. 10)에 앞장서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정작 김구, 이승만 등의 우익과 공산당 등의 좌익이 합작 운동의 불참하고, 여운형 마저 암살당하면서(* 여담 : 미스터리라지만, 이승만의 하수인이 여운형을 암살했다는 말이 있다. 앞으로 이승만의 '데쓰노트'는 계속 등장할 것이다.) 좌우합작운동은 막을 내리고 만다.
  2차 미 / 소 공동위원회(1947. 4)에선 미국이 완전 결렬을 선언하면서, 해체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당시 미국의 입김이 강했던 UN으로 넘겼다. UN은 한반도 정부수립을 인구비례에 의거한 투표를 통한 정부수립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남한 대 북한의 인구비율이 2 : 1정도 되는 상황에서, 소련에게 압도적으로 분리한 것이었으며, 소련과 북한은 총선거를 거부하였다. UN은 어쩔 수 없이 선거가 가능한 곳(남한)에서만 선거를 실시가 결의되었고(1948), 이는 분단의 시작을 고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이에 두 손을 들고 기뻐하였으나, 김구는 이에 강력하게 비판하였고, 좌익은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김구와 김규식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였다. 이들은 38선을 수없이 넘나들며 김일성과 회담을 가졌으나, 수구 우익은 이러한 김구 일행을 좌익으로 몰았으며, 김일성은 김구 일행을 정치적으로 악용하였다. 또한 좌익을 비롯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사람들은 제주도에서 무장 봉기하였다.(1948 제주 4.3사건) 이로 인해 제주도에서 선거가 이루어지기로 했던 3곳에서의 총선도 한 곳 밖에 하지 못하였으며, 행해지지 못했던 지역은 1년 후에나 선거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제주도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든 남한 지역에서는 5.10 총선거가 단행되었다. 이에 반발하여 김구나 김규식 등의 민족주의 계열과 중도계열의 인사들은 출마를 하지 않았으며, 출마한 것은 이승만, 한국 민주당, 그리고 일부 중도세력에 불과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였다.( * 참고 : 광복절과 정부수립일이 같은 것을 광복의 의미를 되세기기 위해 정부수립을 광복절에 맞춰서 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지지 기반이 부족했던 이승만은 대다수를 차지했던 무소속과 한국 민주당과 손을 잡고 정책을 시행해갔다. 하지만, 이런 굳건하지 못한 동맹은 권력 분배과정에서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느슨해졌으며, 이승만은 이러한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 반공 체제를 강화하였다.
  한편 제주의 무장봉기를 제압하기 위해 여수에 주둔시켰던 군대가 남한만의 단독정부에 반대하고자 봉기하여 여수와 순천 일대를 점령하는 여수, 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났다.

Tip. 대한민국 건국 과정의 이해
이승만의 정읍발언 - 분단 조장
여운형, 김규식의 좌우합작 - 통일 노력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 - 분단 조장
제주도 4.3 사건, 남북 협상 - 통일 노력
5.10 총선,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 분단
여수 순천 10.19 사건 - 통일 노력

31. 북한 정권의 수립
  실제로 북한이 수능에 나오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다. 내가 선생님께 언뜻 듣기로는 여태까지 한 문제정도 출제되었다고 하는데ㅡ 교과서에서 할애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으나, 실질적으로 나오지 말라는 보장 역시 없기 때문에 일단은 정리하고 넘어가도록 하자. 역시 가장 많이 부각되는 것은 광복 이후에 이루어진 남북한의 토지 개혁에 관한 내용이다. 그것은 뒤에 팁으로 엮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앞서 말한 것처럼, 광복 이후에 북한은 소련의 군정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 와중에도 북한은 그 나름대로의 자치 활동이 가능하였는데, 1946년 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 발족시켜,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 개혁과, 친일파 숙청을 단행하였다. 북한에 남아있던 주요 공장(즉, 일제가 남기고간 군수공장 따위)들이 이 때 국유화 되었다. 하지만, 분배된 토지는 사유재산을 의미하는 것이었음으로, 아직 완벽한 사회주의가 도입되지 않았음을 유의하자.
  이후 1946년 8월 북조선 노동당을 창당하여 사회주의 계열을 통합하였으며, 1948년 9월 2일, 최고인민위원회를 개최하고 헌법을 제정하였다. 1948년 9월 9일,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한반도에는 두 개의 이념을 지닌 두 개의 체제가 출범하게 되었다.(즉 분단되었다.)

Tip. 남한과 북한의 광복 후 정책 비교
 1)토지 개혁 :
  남한(1949, 농지 개혁법, 유상몰수 유상분배)
  북한(1946, 무상몰수 무상분배)
 2) 친일파 청산
  남한(1948, 반민족 행위 처벌법 재정) -> 실패
  북한(1946) -> 성공

32. 좌절된 친일파 청산
  나름 잘 나오는 주제 중에 하나이다. 특히나 요즘 과거사 청산에 대한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대중 매체에서 보도되므로, 출제될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 같다.(물론, 간도나 독도 문제만큼 빈번한 것은 아니다.) * 참고 : 이명박 정부에 들어보면서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주제 중의 하나. 이명박에겐 청념이니 과거사 청산이니 하는건 별로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전에 다루었던 것처럼, 미군정 시기에 미군정이 총독부 체제를 유지하면서 친일파 청산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게 되었다.. 정부를 수립한 남한은 미군정 때 제쳐두었던 친일파 청산을 해야만 했다. 국회는 1948년 9월,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재정하여, 반민족 행위를 했던 사람에 한정하여 법의 불소급 법칙을 깨고, 친일 행각을 소급하여 따지기로 하였다.(법과 사회 하시는 분들은 잘 아실 겁니다. 원래는 법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행했던 범법행위에 대해선 묻지 않는 것이 원칙입니다만, 친일파에 한해선 이 원칙을 적용하지 않는 다는 것이죠.) 그리하여 제정된 법에 의해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반민족 행위 특별 검찰부, 반민족 행위 특별 재판부 등이 새로 만들어졌다. 과거에 걸출한 친일행위를 했던 이광수, 최남선 등의 친일파를 체포, 조사하였으나, 과거 친일 행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친일 경찰)에게 위원회 건물이 파괴 되는 등 실질적인 조사와 같은 위원회의 활약이 많이 제한되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자신의 권력기반이 단단하지 않아 친일파에 많이 의지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이승만은 친일파 청산에 대해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승만은 반공 우선 정책을 핑계 삼아 친일인사를 다시 등용하고, 조사 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던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면서(1949. 8. 국회 프락치 사건), 조사 위원회의 의원들이 전원 사퇴를 결의하였다. 결국 반민족 행위 처벌법 폐지안이 국회를 통과하였고, 이와 더불어 친일파 청산도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사료1) 미군정의 포고문
 제2조 정부, 공공 단체 및 기타의 명예 직원과 고용인 또는 공익사업, 공중위생을 포함한 공공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유급 또는 무급 직원과 고용인, 또 기타 제반 중요한 사업 기관에 종사하는 자는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정상 기능과 업무를 수행할 것이며 모든 기록 및 재산을 보호, 보존하여야 한다.

사료2) 이승만의 특별 담화문(반민 특위 해산 관련)
 반민 특위 사업에 대한 견해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그러나 가장 심했던 자만 처단하고 나머지는 관대히 할 것이 인정을 펴고 인심을 수습하는 도리가 되는 것이다. 사람을 벌하려는 것이 아니요, 반민족 정신인 죄를 징계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니 이 정도의 처단으로 족히 민족정기를 바로 잡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더욱이 38도선이 그대로 있고 시국이 혼란하고 인재가 부족한 이 때에 반민족 행위 처단을 지나치게 하는 것은 도저히 민족과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다.

33. 토지개혁
  보기와 문제, 답지로 많이 나오는 주제 중에 하나다. 사실 배우는 것은 현대사 부분에서 배우게 되지만, 문제가 나올 때는 동학 농민 운동(아... 왠지 내가 생각해도 까마득하다)과 더불어 오답의 답지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토지 개혁이 실시되었다, 따위로.) 속지 말도록 하자.
  북한은 이미 1946년에 토지 개혁을 단행한 바가 있다. 하지만, 남한 같은 경우는 북한에 비해 뒤늦게 행해졌다. 사실, 정부가 주체적으로 개혁하였다기보다는, 북한의 토지 개혁을 지켜본 민중이 지속적으로 정부에 토지개혁을 요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남한의 토지 개혁은 기본적으로 유상매입, 유상분배이다. 즉, 3정보 이내의 소유 규정을 넘어간 토지들을 국가에서 사들여, 농민에게 돈을 받고 분배하는 것이다. 이 때 농민은, 농지 대금을 평년작의 1.5배로 지불하게 되는데, 일시불이 아닌, 5년간 분할 납부하는 것이다.(* 참고 : 말이 어렵게 된 것 같은데, 토지의 가격은, 그 토지에서 1년 동안 수확할 수 있는 값어치의 1.5배라는 것이고, 그 땅을 사들인 농민은 전에 그 땅을 가지고 있었던 지주에게, 토지 가격을 5년간 분할하여 낸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자영농이 증가하게 되었고, 상대적으로 지주가 감소하였다. 하지만, 농민들 같은 경우에 농지 대금을 다 갚지 못하여, 다시 땅을 팔고 소작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토지개혁 중간에 6.25전쟁이 끼는 등 개혁이 시간을 끌면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미 대다수의 지주는 몰수될 땅을 미리 팔아버리기도 하였다. 또한, 지대의 분할 상환은 농민뿐만 아니라, 영세한 중소 지주에게도 큰 피해를 주었고, 중소 지주들은 토지를 몰수당하면서 정부가 발행하였던 지가 증권을 헐값에 팔아버리기도 하였다. 후에 정부는 이러한 지가 증권을 많이 소유한 지주에게 일본이 남겨두었던 공장들을 분배하였는데, 이것을 통해 성장한 기업이 오늘날의 삼성 등이다.
  탈 많았던 과정 중에서도 의의를 찾자면 동학농민운동 때부터 농민들이 그토록 주장하였던 토지 개혁이 이 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됨으로써, 농민이 땅을 갖는(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이 확립되었다는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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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2차 민족이동
  노르만족은 원래 게르만의 한 계통으로 ‘북쪽에 있는 게르만’이라는 뜻이다(로마는 게르만에 대해 세세한 분류를 하지 않았다. 로마를 제외한 모든 지역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 ‘게르만’이다). 이들은 스칸디나비아 지방에서 거주하고 뛰어난 항해기술을 가지고 있으며 9세기경에 유럽으로 침입하기 시작하여 게르만 족처럼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국가를 세웠다. 프랑스 서북 지방에 노르망디 공국(Tip : 훗날 노르망디로 말미암아 영국과 프랑스는 많은 마찰을 빚게 된다.), 잉글랜드에 노르만 왕조, 지중해에 나폴리 왕국, 러시아에 노브고로트 공국과 키예프 공국을 각각 건설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이 아메리카 대륙에까지 이르렀다는 설(說)도 있다.
  노르만 뿐만 아니라 반(半)유목민인 마자르족이 유럽으로 들어왔고, 이슬람 왕조였던 후옴미아드 역시 북아프리카를 거점으로 하여 유럽으로 진출하여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여 많은 이슬람 유산(ex. 알함브라 궁전이 이에 속한다.)을 남겼다. 게르만 이동 이후에 있었던 이러한 민족이동을 제2차 민족이동이라 부르며 서유럽의 혼란과 동요를 일으켜 기사계층의 역할을 부각시켰으며 봉건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Tip. 민족 이동의 결과
1차 민족이동(게르만) : 게르만 왕국의 설립 -> 프랑크 왕국
2차 민족이동(노르만, 마자르, 이슬람) : 프랑크 왕국의 혼란 -> 봉건사회 형성의 계기

② 중세 봉건 사회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고, 이슬람, 노르만, 마자르족과 같은 외부 세력의 공격으로 서유럽 사회는 스스로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제도를 만들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또한 기사계층의 성장 역시 봉건화를 촉진시켰다. 봉건제는 게르만의 종사제(從士制)와 로마의 은대지제(恩貸地制度)를 적절히 섞어 만들어졌다. 정치적, 군사적 주종 관계는 종사제에서, 장원의 모델은 은대지제에서 가져온 것이다. 봉건제는 주군이 봉신에게 봉토를 나눠주고, 봉신은 충성과 군역을 맹세하는 계약으로써 형성되었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부양, 보호의 의무가 있었으며, 서로의 봉토에는 상관하지 않았다(영주의 불입권 인정). 이러한 제도는 피라미드식 계서(階序 )조직을 만들었고, 지방 분권 체제를 형성하였다.

Tip. 봉건제 vs 봉건제
중국의 봉건제 : 혈연적, 왕 - 제후의 1 대 1 관계.
유럽의 봉건제 : 계약적, 복수의 왕(혹은 제후)와 계약 가능.

③ 장원과 농노
  장원은 왕으로부터 계약을 통해 하사받은 봉건영주의 봉토(封土)이다. 영주는 장원을 운영하고 농노를 다스리는데, 재판, 과세 등에서는 계약한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아도 되었다(불입권). 농노는 부역을 통해 영주나 교회 땅에서 일을 해주고(노동지대), 사유지에서 생산한 농작물 등을 영주에게 바쳤다(현물지대). 농노는 가정을 꾸리고, 사유 재산을 가지며, 재산의 상속권이 있었다. 하지만, 거주 이전, 직업 선택에서는 자유가 제한되었는데 이러한 면에서는 농노의 위치는 반 노예적인 위치라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이야기한 바 있지만, 농노의 기원은 군인황제시기 제정 로마의 콜로누스(비자유 소작농)에서 비롯되었다.
  장원은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의 경제 체제(자연 경제 체제)를 가지고 있었는데, 3포제, 개방 경작제, 혼재지 제도를 통해 생산하였다. 3포제춘경지, 추경지, 휴경지를 나눠 지력을 보존하는 방법으로 서유럽의 생산력 증대에 기여하였다. 개방 경작제, 혼재지 제도는 영주 직영지와 교회령, 농민 보유지가 한 데 섞여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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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세 유럽
① 게르만족의 이동
  게르만 족은 원래 발트 해 연안 등의 북유럽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었다. 기원 전후에 인구 증가와 식량 부족으로 점점 남하하면서 로마와 접촉하게 되었다. 그들은 3세기경부터 로마 사회에서 소작농이나 용병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4세기 후반에 훈족이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게르만 역시 서로마 방면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이로써 서로마는 멸망하고, 서로마가 있던 자리에 게르만이 세운 여러 왕조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② 프랑크 왕국
  프랑크 왕국 역시 게르만이 세운 많은 왕조 중에 하나였다. 프랑크 왕국은 예전 로마 문화의 중심지였던 갈리아 지방(지금의 프랑스 지역)에서 번창하였다. 클로비스는 메로빙거 왕조를 개창(481)하고, 가톨릭의 정통파인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하여 로마 주민들과의 별다른 마찰이 없었으며, 로마 교회의 지지 또한 획득하였다. 궁재로 말년 메로빙거 왕조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카롤루스 마르텔은 투르, 푸아티에 전투(732)에서 이슬람 세력이었던 옴미아드 군대를 격퇴하여 크리스트교 세계의 수호자로서 인정되어 로마 교회의 지지가 더욱 굳건해졌다.
  카롤루스 마르텔의 후손인 피핀은 메로빙거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이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하였으며, 이탈리아 북부 라벤나 지방을 교황에게 기증하였다. 이것은 훗날 교황령의 시초가 되었으며, 프랑크 왕국은 로마 교회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었다. 피핀의 뒤를 이은 카롤루스 대제(칼 대제, 샤를 마뉴)는 옛 서로마의 영토를 대부분 회복하여, 로마 교회로부터 서로마 황제의 칭호와 함께 새로운 서로마 황제로 대관(800)의 영예를 받게 되었다. 이를 어떤 사람들은 서로마 제국의 부활이라고도 한다.(글쎄;) 카롤루스 대제는 정복뿐만 아니라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집권을 도모하고, 궁정 학교를 설립해서 라틴어, 논리학 등의 교육에도 힘썼으며 수도원에 고전 필사를 장려하여 문예 발달에도 기여하였다. 이를 카롤링거 르네상스라고 한다.
  카롤루스 대제 사후에 프랑크 왕국은 베르됭(843), 메르센(870) 조약을 통해 동, 서, 중 프랑크로 나뉘게 되었다. 이들은 각각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의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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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일제에 의해 빼앗긴 빛을 되찾아왔다. 광복과 독립, 우리 민족이 약 34년 동안 갈망해온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사의 역사 구분에 의거하여, 흥선대원군의 섭정부터 일제 강점기까지를 근대사(近代史)로, 8. 15 광복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를 현대사(現代史)로 분류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편의를 위한 구별이며, 단순히 딱, 하고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즉, 8.14은 근대이고, 8.15는 현대로, 갑자기 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사적 특징에 해당하는 민중의식의 성장 등은 이미 근대 후반에 나타나서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 Tip : 역사는 흐르는 것으로 칼로 무를 자르듯이 딱딱 끊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한 유명한 중국사학자인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 市定는 연대표에 '/' 대신 '~' 으로 연대를 구분했다고 한다.

29. 대표적인 건국 준비 운동의 성향과 건국 구상
  광복 이전부터 여러 독립운동 단체나 임시정부 등은 광복 이후에 만들어질 나라에 대해 구상하고, 실행하기 위하 노력하였다. 이런 대표적인 단체들은 김구가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김두봉의 조선 독립 동맹, 그리고 국내에서 여운형 등이 결성한 조선 건국 동맹들을 꼽아볼 수 있다.

 1)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정부의 위기를 구한 김구가 결성한 1940년에 결성한 한국 독립당으로 대표할 수 있다. 한국 독립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의거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1941)하고, 이듬해인 1942년 나머지 조선 민족 혁명당의 군대인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가담하게 되면서, 바야흐로 군대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앞서 설명하였다.(* Tip : 무장독립투쟁 참고)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의거한 대한민국 건국 강령은 보통 선거(정치적 평등), 토지와 대생산 기관의 국유화(경제적 균등), 의무 교육(교육적 균등)을 주장하였다.

 2) 조선 독립 동맹
  중국 국민당의 부당한 처우에 불만을 품고 있던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북상하여 화북지방에 있던 사회주의계열의 인사들과 함께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어서 조선청년연합회를 근본으로 화북에서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고, 그의 산하 군대인 조선 의용군(1942)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 정권(공화정)을 수립하고, 일제가 관리했던 재산과 토지를 국가에서 몰수하여 관리하며(국유화), (하루) 8시간 노동제, 의무 ․ 무상 교육을 주장하였다.

 3) 조선 건국 동맹
  조선 건국 동맹은 국내에서 여운형이 결성하였다(1944). 국내에 있었기 때문에 광복 이후 재빠른 활동이 가능하여,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로 확대하여 전국에 지부를 설치하고, 자주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는데 힘썼다. 또한 그들은 일제의 망령을 타도하고, 민주주의의 원칙에 의거하여, 노동자와 농민을 해방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 참고 : 사회주의라고 해서 무조건 독재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본래 사회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진정한 자유와 해방으로 가는 과도기로 인식한다.)
  이들은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고 인민 위원회를 설치하였으나, 이러한 자주적 건국을 위한 노력에 미군정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무시해버렸다. 또한 지도부가 좌익 중심으로 선출됨에 따라 대다수의 우익인사는 단체를 떠나기도 하였다.

Tip. 건국 준비 주요 단체 주장의 공통점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 공화제 정부 수립
주요 생산 수단의 국유화

(사료1)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 강령
  2. 삼균 제도를 골자로 한 헌법을 실시하여 정치와 경제와 교육의 민주적 시설로 실제상 균형을 도모하여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 기관의 국유가 완성되고 전국 학령 아동 전부의 고급 교육의 무료 수학이 완성되고 보통 선거 제도가 구석 없이 완전히 실시되어(이하 생략)
  6. 다음에 열거한 기본 원칙에 의거하여 경제 정책을 집행함.
   가. 대생산 기관의 공구와 수단을 국유로 하고 토지, 광산, 어업, 농림, 수리, 소택과 수상, 육상, 공중의 운수 사업과 은행, 전신, 교통 등과 대규모의 농, 공, 상 기업과 성시(城市), 공업 구역의 공용적 주요 방산(房産)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및 혹 중등 기업은 사영으로 함.

(사료2)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선언과 강령
  (전략) 조선 전 민족의 총의를 대표하며 이익을 보호할 만한 완전한 새 정권이 나와야 하며 이러한 새 정권이 확립되기까지의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본 위원회는 조선의 치안을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 조선의 완전한 독립 국가 조직을 실현하기 위하여 새 정권을 수립하는 한 개의 잠정적 임무를 다하려는 의도에서 아래와 같이 강령을 내세운다.
 
  강령
   1. 우리는 완전한 독립 국가의 건설을 기함.
   2.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족주의 정권의 수립을 기함.
   3.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가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 생활의 확보를 기함.

30. 광복과 광복 이후 남북한의 정세
 1) 광복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하기 전부터 많은 열강들이 우리나라의 일제로부터 독립을 여러 차례 협의한 바가 있다.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우리나라의 독립이 최초로 거론되었으며, 2차 대전이 끝난 1945년 포츠담 회담에서 그 의견을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회담들은 우리나라의 자주적인 독립과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자주적인 방법(한국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을 통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광복에 대하 수동적인 입장이 될 것이라던 김구의 예상이 적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김구의 견해는 후에 미 군정기에도 맞아떨이지고 만다.
  1945년 8월 15일, 무수한 노력 일제로부터 우리나라는 해방되었다. 이후 여운형, 안재홍 등의 조선 건국 동맹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로 확대되어 자체적으로 질서유지에 나선다. 하지만, 미국이 광복 이후에도 남아있던 일본군의 무장해체를 구실로, 소련과 협의하여 38도선을 경계로 분할을 제안하였고, 소련도 이를 승락하였다. 이는 훗날 분단의 계기가 되었다.

 2) 광복 이후 남북한의 정세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각각 점령하게 된 미국과 소련은 군정(軍政)을 통해 한반도를 통치하였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군정은 판이하게 다른 통치양상을 보였다.
  우선 남한에 군정을 설치한 미국의 경우,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한국인의 노력을 일체 부정하였다. 여운형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가 선포한 조선 인민 공화국도, 김구의 임시정부도 미국은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로 인해 중국에 있었던 임시정부계열의 인사들은 정부단체의 자격이 아닌 개인의 자격으로 국내에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반면, 미군정은 앞서 한반도를 강제 점령하였던 일본의 총독부 체제를 유지하여, 온갖 친일 인사들이 다시금 등용 되는 상황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이는 오늘날까지도 겪고 있는 불완전한 과거사 청산에 불씨가 되었다. 또한 미군정은 친미파로 변모한 친일 인사들(친일 기업가, 지주 : 송진우, 김성수 등) 등으로 구성된 한국 민주당을 지원하여 친미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 당시에 남한에는 우익세력 이었던 김구의 한국 독립당과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중도 좌파였던 여운형의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와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이 있었으나, 미군정은 이들을 무시당하였다. 특히 조선 공산당은 미군정의 탄압으로 인해 위기를 겪기도 하였으나, 남조선 노동당(남로당南勞黨)으로 개편 등의 위기를 모면하고자 했다.
  미군정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일제의 식민 통치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을 다시 등용하였고,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도입하려 하였다(고는 하지만, 거의 식민통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직속기관인 ‘신한회사’를 만들어, 그동안 일본인에게 소유되었던 재산을 관리하였다.( * 참고 : 일제의 동양척식 주식회사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신한회사는 일본인 지주에게 넘어갔던 토지들을 몰수하여 소작농에게 1/3의 값싼 소작료에 지급하고, 지주가 일방적으로 소작 계약을 깨뜨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농민들은 직접적인 토지 개혁과 소작료의 추가 인하, 그리고 금납제를 요구하였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갈등은 겪었다.
  미군정은 미곡 자유화 정책 등을 통해 자유 자본주의 시장을 도입하려 하였으나, 상인과 지주들에 의해 매점매석으로 인해 미곡과 물가가 폭등하였다. 후에 1946년 1월 미군정은 미곡 수집령을 발표하여 쌀을 거둬들이려고 하였으나, 춘궁기에 생산비도 안떨어지는 허접한 가격으로 쌀을 사들인다는 그들의 방침은 농민들과의 갈등을 커져만 갔다.
  또한 실업자의 증가 등의 문제로 미군정의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1946년 9월 미군정에 반대하는 철도 노동자들의 총파업이 일어났다. 이것이 더욱 발전되어 대구 등 여러 민중 봉기로 이어졌으며, 전국적인 규모로 까지 확대되었다. 이들은 쌀 공출과 식민지 교육의 철폐, 토지 개혁, 미군정 퇴진을 요구하였으나,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에 의해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북한에 주둔하던 소련군의 군정은 미군정에 비해 한국인의 자치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완벽한 것은 아니여서, 조만식 등이 있던 평남 건국 준비 위원회를 해체해야만 했다. 대신,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추대한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결성(1946)하고, 이 인민 위원회를 통해 부분적으로 자치를 할 수 있었다.
  북한은 소련 군정기에도 많은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무상몰수 ․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이었다. 이는 가히 혁신적인 것으로,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개혁에 반대를 하였던 유산가 계층은 남쪽으로 이주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무상분배 된 토지는 개인의 소유였기 때문에, 아직 완벽한 사회주의는 완성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주요 생산 시설을 국유화하였으며, 남녀 평등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북한은 이 무렵 친일 청산을 단행할 수 있었다.

Tip. 정치 양상
좌익 : 박헌영, 김일성
중도 좌익 : 여운형, 김원봉
중도 우익 : 김규식, 안재홍
우익 : 이승만, 송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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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일제의 식민지 교육, 문화 정책
 1) 식민지 교육 정책과 민족 교육 운동
  일제는 기본적으로 천황과 식민 통치에 순응하는 충실한 황국 신민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 정책을 시행하였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를 3단계로 나누는 것처럼 일제의 교육정책도 크게 3차례의 개정을 통해 이루어졌다.
  우선 1910년대 무단통치기의 교육은 제1차 조선교육령(1911)에 근거를 두어 차별과 우민화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일제는 사립학교의 축소,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 축소, 중등 교육의 기회를 제한, 대학 교육을 금지함으로써 조선인에 대한 교육 기회에 차별을 두었으며, 학교에선 아주 기초적인 산수 정도의 최소한의 교육만이 행해졌으며 대부분은 실업, 기술 교육이 위주였다. 이러한 교육 실태는 식민지 공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양성하는데 중점을 둔 일제의 교육정책을 잘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사료. 제1차 조선교육령(1911)
 제1조 조선에 있는 조선인의 교육은 본령에 따른다.
 제2조 교육은 충량(忠良 : 충성스럽고 선량한 ㅡ 작성자 주)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 로 한다.
 제5조 보통교육은 보통의 지식, 기능을 부여하고, 특히 국민된 성격을 함양하여 국어(일본어)를
        보급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6조 실업 교육은 농업, 상업, 공업 등에 관한 지식과 기능을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7조 전문 교육은 고등 학술과 기예를 가르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조선 총독부 관보, 1911

  일제의 우민화 교육도 우리 민족의 높은 교육열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사립학교와 개량 서당은 일제의 우민화 교육에 맞서 근대적 민족 교육을 시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 역시 일제의 탄압을 통해 사정이 어려워졌다. 일제는 사립학교와 개량 서당을 각각 사립학교의 축소와 서당규칙(1918)을 시행하면서 압박하였으며, 민족 교육의 주역은 점차 사립학교와 개량서당에서 야학이나 강습소로 넘어가게 되었다.

사료. 서당 규칙(1918)
 1. 서당을 개설하려고 할 때에는 도지사의 인가를 받아야 한다.
 2. 서당에서의 교과서는 조선 총독부 편찬의 교과서를 사용하여야 한다.
 3. 조선 총독부가 적격자로 인정하지 않는 자는 서당의 개설자 또는 운영자가 될 수 없다.
 4. 도 장관은 서당의 폐쇄 또는 교사의 변경, 기타 필요한 조치를 명령할 수 있다.
 * 추가사항 : 주요 사료가 아니므로 눈으로만 봐두자

  1920년대는 3.1운동의 영향으로 일제는 문화통치를 표방하게 되었다. 이는 교육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어 일제는 교육에 대한 차별을 누그러뜨린 유화 정책을 폈다. 일제는 제2차 조선교육령(1922)을 발표하고 이에 맞춰 우리나라의 학제를 일본식의 학제로 변경하고 일본식 교육을 강화하였다. 국민교육이 4 ~ 6년이 된 것도, 대학의 설립이 가능해진 것도 이 때였다. 또한 일제는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보통 교육의 수업기간을 6년으로 연장하였으며, 1면 1교 정책으로 전체적인 보통학교의 숫자를 늘렸다. 조선어와 조선사를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기도 하였다. 문화통치기의 일제의 교육정책은 언뜻 보기에 큰 선심을 쓴 것처럼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과 조선을 동화하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경성제국대학은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견제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며, 1면 1교 정책으로 학교가 세워진 곳은 마을의 정신적, 문화적 근간이었던 곳을 허물거나 파괴, 개조하여 만든 것이었다.
  1920년대 민족 교육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야학이나 강습소로 계승되었다. 야학이나 강습소에선 기본적으로 역사, 조선어, 지리, 창가 등의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내용이 많았으며 그 외에도 일반 지식을 확충하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농민독본』,『경제학』,『노동산술』등의 실용 교과도 가르쳤다. 그러나 결국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야학 역시 점차 쇠퇴해갔다. 민립대학 설립운동(1922), 6.10만세운동(1926), 광주학생운동(1929), 문맹 퇴치 운동(1920년대 ~ 1935)등도 1920년대 있었던 민족 교육을 위한 운동들로 이 때 역시 일제가 여전히 차별교육을 행했음을 알 수 있겠다. 결국 유화정책이라는 것도 허울만 좋은 것이었다. 이러한 와중에서도 안창남의 비행에 깊은 감명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과학교육에도 힘썼다.

Tip. 유화 정책과 동화 정책
 유화 정책 : 보통 교육 수업 연장, 대학 설립 가능
 동화 정책 : 서당 설립 허가제, 민립 대학 설립 운동 탄압

  만주사변(1931)과 태평양전쟁(1938)으로 전선(戰線)을 지나치게 확장시킨 일본은 조선을 하루빨리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만들고 조선에서 징병, 징용하기를 원했다.( * 참고 : 본래 식민지의 주민들은 도주나 반란의 우려 때문에 전쟁에 내보내지 않는다. 조선에서의 징병, 징용은 당시 일본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한 것인지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배경아래 발표된 제3차 조선 교육령(1938)은 조선의 국민들을 모두 황국 신민화를 시도(* 참고로 국민학교는 '황국신민학교'의 줄임말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1990년대에 이르러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꿨다.)하였다. 주된 내용으로는 조선어 사용의 금지, 조선어, 조선사 교육 금지와 중일전쟁 이후 대대적으로 실시된 군사 훈련, 그리고 강력한 민족 교육의 탄압 등이 대표적이다. 일제의 강압이 극도에 달해 민족 교육은 상당히 힘든 처지에 처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2) 식민지 문화 정책과 국학 운동
  일제는 우리 민족의 자주성과 독창성을 부정하고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조선사 편찬 위원회(1925년 이후 조선사편수회로 개편)의 『조선사』, 청구학회의 『총규학총』 등을 통해 식민사관을 만들어내었다. 일제는 타율성론, 정체성론, 당파성론, 일선동조론 등으로 우리 민족의 역사를 규정하여 폄하하였다. 이외에도 일제는 예술, 종교, 문학 분야에서 친일 인사를 육성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청소년들에게 일본문화를 강제로 이식하고 복종하도록 강요하였다.

 Tip. 일제의 역사왜곡
  타율성론 : 조선은 외세의 간섭 없이 독자적인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설
  정체성론 : 중세 부재론. 개항 당시 조선은 아직도 고대 수준 밖에 이르지 못했다는 설
  당파성론 : 조선시대의 붕당정치를 폄하하는 이론.
  일선동조론 :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다는 이론. 단군이 일본 초대 천황의 동생이라고 주장.

  국학 연구는 크게 한글연구와 식민사관에 대항하기 위한 국사연구로 나뉜다.
  조선어 연구회는 1921년 이윤재, 최현배 등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잡지 『한글』을 발간하고 지금의 한글날인 가갸날을 제정하여 한글 대중화에 앞장섰으며, 훗날 조선어학회의 뿌리가 되었다. 조선어 연구회는 조선어학회로 개편되면서 한글 연구에 더더욱 박차를 가한다. 조선어학회는 한글의 상용화를 위해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를 제정하였다. 우리말 『큰사전』의 편찬을 시도하였으나 아쉽게도 실패하였다.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여 이윤재, 최현배 등을 강제로 투옥시킨 다음 조선어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를 ‘조선어학회 사건’이라고 한다.
  서양의 인문과학에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역사학계도 많은 변화를 하게 되었다. 일제의 왜곡된 식민 사관을 타파하고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전통을 만들고자하는 여러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우선 신채호, 박은식 등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사학은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 우리 민족성을 고취하고 주체적 발전을 강조하였다. 민족주의 사학1920년대 신채호, 박은식에 의해 그 기틀이 마련되었으며 민족의 고유의 정신을 강조하는 정신 사학으로,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연구가 진행되었다. 신채호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정신을 강조하였는데, ‘낭가사상’라는 고대 무인의 기상을 널리 강조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조선사 연구초』와 『조선상고사』가 대표적인데, 그는 『조선상고사』에서 ‘나(我)와 내가 아닌 것(非我)의 투쟁’을 통해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여겼다. 박은식‘나라는 형(形 : 형태, 껍데기)이고 역사는 혼(魂 : 본질)’이라고 여겨 ‘혼’을 강조하였다. 그는 신채호와는 다르게 그가 살아가는 시대에 관심을 두었으며 그러한 관심은 『한국통사』,『한국 독립운동지혈사』등을 통해 나타났다. 정인보『조선사 연구』에서 ‘얼’을 강조하였고, 문일평은 『호암전집』에서 ‘심(心 : 마음)’을 강조하여 1930년대 민족주의 사학의 계보를 이었다.

Tip.
 신채호
  ~ 1910년 : 계몽사학의 선구자로 외국흥망사, 구국 영웅전기로 유명,
                비평인 「독사실론」을 통해 역사의 주체성을 주장
  1910년 ~ : 의열단의 『조선혁명선언』을 작성
                낭가사상 강조, 「조선사」의 고대부분을 엮어 『조선상고사』 발간
 박은식
  ~ 1910년 : 조선광문회에서 고전연구, 유교구신론을 발표하여 실천유학인 양명학을 독려
  1910년 ~ : 민족 ‘혼’을 강조,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 저술

* 참고로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여기서 소개된 역사서를 읽지 않길 간곡히 바란다. 중요한 구절을 알아두는 것은 상관이 없지만, 특히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에겐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특히 국사를 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고등학교의 국사교과서와 『조선상고사』에서 신채호의 서술은 사뭇 다른 정도가 아니라 완전 다르다.(예를 들자면 신채호는 고조선이 망한 뒤에 고조선의 유민이 세갈래로 나뉘어 남한에 정착한 것이 삼한이라고 한다.) 자칫 혼동할 수 있으므로 주의.

  사회경제사학사회주의의 사적 유물론(唯物論)에 입각하여 우리 민족의 역사가 세계사 발전의 보편성에 발맞추고 있음을 증명하고자 노력하였다. 백남운의 『조선 사회 경제사』등이 대표적이며 이러한 사회경제사학자들은 일제의 식민사관인 정체성론을 전면적으로 부정함과 동시에 실질적이지 못한 민족주의 사학을 비난하기도 하였다.

 Tip. 사적 유물론적 역사 발전 5단계설
 고대 노예제(귀족 - 노예) / 중세 봉건제(영주 - 농노) / 근대 자본주의(자본가 - 노동자) / 사회주의

  실증 사학랑케의 실증주의의 영향을 받아 실증을 통해 한국사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이병도, 이상백, 손진태 등의 실증주의 사학자들은 1934년 진단학회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진단학보』를 편찬하였으며 청구학회와 대립하였다.
   * 참고 : 훗날 진단학회는 일제와 타협하고 친일노선을 걷게 된다.(진단학회 회원 대다수가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마친 유학파였다.) 6.25가 끝난 이후 이들의 학풍이 우리나라의 학계를 지배하였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진단학보』는 아직까지 출간되고 있다.

  문학 활동1910년대 계몽적 성격을 지닌 신소설이 등장하였다. 『혈의 누』,『금수회의록』과 최초의 현대소설로 불리는 이광수의 『무정』, 새로운 형식의 시인 최남선의 신체시 등이 있다. 1920년대는 낭만주의적이고 예술성만을 추구하는 『창조』, 『폐허』등의 동인지가 나오기도 하였으며 한편에는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아 신경향파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은 문학가들은 카프(KAPE)를 결성하여 사회주의를 선전하였다. 이외에도 일제에 저항하여 시를 쓴 한용훈, 김훈, 이상화, 김소월 등이 있었다. 1930년대에는 일제의 광범위한 탄압으로 오로지 순수문학과 친일 문학만이 살아남을 수 있어서, 대부분의 문학가들이 붓을 꺾어나 변절하였다. 그 와중에도 이육사, 윤동주만이 주옥같은 저항 문학을 남겼다.
  예술분야는 영화, 연극, 음악, 미술 분야로 나눌 수 있다. 영화는 1910년대 신파극을 시작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1920년대는 나운규가 『아리랑』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이 역시 결국 1940년대 일제가 조선영화령으로 탄압하자 영화 사업은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연극분야에선 토월회, 극예술 연구회 등이 활동하면서 연극에 대한 연구가 이뤄졌으나 중일전쟁 이후로 일제가 연극을 탄압하였다. 음악에는 홍난파, 현제명, 안익태 등이, 미술에선 안중식, 이중섭 등이 유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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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1920년대의 학생운동
 1) 6.10 만세운동(1926)
  일제가 문화통치를 표방하고 있었음에도, 일제의 가혹한 수탈과 차별적인 식민지 교육정책(원인)에는 조선인들의 심기를 계속 건드리고 있었다. 학생들과 사회주의자(주체)들은 일제의 지속적인 폭압에 신음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그러한 불만을 터뜨리기 위해 다시 한번 커다란 민족 운동을 꾀하였다. 전에 3.1운동이 고종의 안산일이었다면, 이번에 학생들과 수회주의자들은 고종의 뒤를 잇는 순종의 안산일에 맞춰 6.10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다. 일찍이 일제는 1925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자들을 박해왔고, 6.10만세운동에서도 그러한 이유로 사회주의계열의 고등학생들이 먼저 격문을 만들어 놓았으나, 그들은 사전에 일제에게 대부분이 검거되었거나 하였기 때문에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결국 민족주의계열의 학생들이 그 전단을 뿌리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여 6.10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6.10만세운동은 사회주의계열과 민족주의계열이 손잡고 함께 운동을 일으켰다는데에 의의가 있다. 사회주의계와 민족주의계의 연계하여, 훗날 6.10만세운동은 후에 민족 유일당의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2) 광주 학생 운동(1929)
 
  광주에서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여학생을 희롱하자, 한일 학생들 사이에서 패싸움이 일어나게되었다. 이 패싸움에 대해서 일본 경찰은 상대적으로 더 무거운 책임을 조선인에게 부과하자, 참다못한 학생들과 광주의 주민이 합세하여 불합리한 처리에 항거하였다. 이것은 점점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3.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으로 확장되었다. 신간회는 사건이 커지자 조사단을 파견하여 진상 규명을 시도하였으며, 광주 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퍼뜨리는데 기여한다(민중대회). 하지만, 학생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신간회의 지도부가 대거 체포되어 신간회의 실질적인 권한이 많이 약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민중대회사건). 표면적으로 볼 때는 단순한 조선-일본 학생 간의 패싸움이 발단이 된 듯 하나, 그 이면(異面)에는 식민지 교육의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Tip.

1926.6.10만세운동(민족 유일당 운동의 계기)

1927.신간회(민족 유일당)

1929.광주 학생운동(전국 규모의 항일 운동)

22. 사회주의의 유입과 계층 운동의 활성화
 
 1) 사회주의 사상의 유입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1917) 이후 정권을 잡게 된 레닌은, 사회주의의 세계적인 전파를 위해 약소 민족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자 하였다. 그러한 이야기가 조선인에겐 매우 호의적으로 느껴졌으므로 사상 자체의 내용은 뒷전으로 하고, 사회주의를 따르는 사람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1925년 조선 공산당이 결성하면서 대대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같은 해 일제가 치안유지법을 만들어 탄압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이 지하조직화 되었다. 그들은 조선의 독립이 공산 혁명으로 가는 과도기로 생각하였으므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독립운동을 활성화시켰다. 

 2) 사회 운동의 활성화
 
  사회주의의 유입으로 그동안 소외된 계층들이 자유와 평등을 위해 계몽운동을 활발히 벌이기 시작했다. 조선 청년 총동맹은 1924년 수많았던 청년, 학생 단체를 규합하면서 탄생하였다. 그들은 교육과 산업 진흥을 위한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또한 신간회의 자매단체이자 여성 단체였던 근우회(1927) 또한 신간회와 마찬가지로 좌우합작을 주도하는 단체였으며 여성 계몽, 문맹 퇴치, 구습 타파 등의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조선 소년 연합회의 방정환은 어린이날을 제정하였으며, 갑오개혁 때 이미 신분제가 타파되었음에도 계속된 차별대우에 못마땅해하던 백정들은 조선 형평사(1923)를 조직하여 사회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였다. 후에 이들 역시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점점 계급 투쟁, 둑립운동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23. 농민 운동과 노동 운동
 
  1920년에 최초로 만들어진 조선 노동 공제회노동운동의 시초를 마련하였다. 그 계보는 계속 이어져 내려오다 1924년 조선 노농 총동맹이 결성되었고, 이윽고 1927년 각각 직업별로 갈라져 조선 농민 총동맹과 조선 노동 총동맹이 결성되었다. 

 1) 농민 운동(소작 쟁의)
 
  농민들은 오래전부터 토지 조사 사업과 산미 증식 계획 등으로 시달려왔으며 이에 농촌 경제는 파탄에 이르렀다. 1920년대에 들어오면서 사회주의 사상이 확대되고, 그럼에 따라 농민들은 그들의 생존권을 위하여 투쟁하기에 이른다. 가장 그 규모가 크고 성공했던 소쟁 쟁이로는 암태도 소작쟁의(1923)가 꼽히는데, 그들은 거기서 소작권 이전 반대, 소작료 인하 등의 지극히 생존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요구하였다. 1927년 그들은 조선 농민 총동맹을 결성하여 합법적인 투쟁을 해 나아갔다. 
  하지만 1930년대가 지나가면서 이러한 요구 조차 일제는 탄압하게 되고(비합법적 투쟁), 그로 인해 잠시 농민 운동이 주춤하긴 하였으나, 오히려 항일 운동, 계급 투쟁으로 확대되어갔다. 

 2) 노동 운동(노동 쟁의)
 
  회사령이 철폐되고 점점 식민지 공업화가 진행되어 감에 따라 노동자의 수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만이 증가하였다. 이 역시 사회주의가 유입됨에 따라 열악한 조건과 저임금에 대해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기에 이른다. 그들은 1927년 합법적으로 조선 노동 총연맹을 결성하고 1929년 원산에서 생존을 건 파업을 하게 된다(원산 노동자 총 파업). 
  1930년대는 역시 일제가 이러한 노동 쟁의를 불법으로 하여 가혹하게 단속하였다. 노동조직은 비밀 조직으로 노동운동을 계속해나갔으며 반일, 계급 투쟁의 속성을 띠게 되었다.

24. 민족 실력 양성 운동

  민족 실력 양성운동은 앞의 급진 개화파 - 애국 계몽운동의 뒤를 이어 교육과 산업을 통해 독립을 준비하고자 하였다. 

 1) 물산 장려 운동
 
  3.1운동 이후 일제가 문화통치를 표방하게 되면서 회사령을 철폐하자, 그들은 우리네 민족 자본을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회사령을 철폐한 것은 우리 민족 자본의 육성을 도와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본 자본이 국내에 유입되는 것을 용이하게 만든 것이라 하겠다. 또한 일제는 면직물, 술 등의 관세를 철폐하면서 위기를 느낀 민족 자본가들은 평양에서 조만식을 중심으로 물산 장려회를 조직(1922)하면서 토산품(국산품) 애용운동을 전개하였다. 주 품목으로는 방직물, 고무신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하지만 결국 물산 장려 운동은 국산품의 가격만 올려놓았을 뿐이었고, 결국 자본가들의 배만 채워주었던 데다, 결과적으로 빈곤한 농민, 노동자 계층은 국산품을 오래전부터 소비해오고 있었음으로 사회주의 계열에게 맹렬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추가사항 : 예전에 선생님께 물산장려운동이 어째서 민족주의 항일운동이었는지 여쭤본 적이 있다. 그 선생님의 답변은 "그냥." 원래 자본가와 민족주의자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엄격하게 분류한다면 물산장려운동은 민족주의 운동이 아니다.)

 2) 민립 대학 설립 운동
 
  일제는 교육 기회를 더욱 확대한다고 하였으나, 고등교육의 기회는 보장해주지 않았다.(고등학교 또한 중등교육이다. 헛갈리는 일이 없도록) 이에 이상재 등은 민족 교육을 시키는 고등교육기관을 만들기 위해 1922년 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고 모금운동을 진행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민립대학기성회에 탄압을 가하는 동시에 경성제국대학(現 서울대)을 설립하는 바람에 대학을 세울 명분 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이것 또한 고등교육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소수 자본가들의 자제 뿐이었음으로 사회주의계열에게 비난을 면치 못했다.  * 추가사항 : 민립대학기성회가 기성모금을 하러다닐 당시 가뭄 등의 피해 등으로 농민과 노동자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3) 문맹 퇴치 운동
 
  문제는 맨날 일제의 식민지 차별 교육이다. 일제의 부실한 교육정책으로 시골의 문맹이 급증하고, 식자층과 무식자층의 격차가 점점 더 커 가기만 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920년대야학과 강습소 등을 차려 농민, 노동자 등을 가르쳤다. 1930년대에 들어오면서 언론, 학생이 참가하게되는데, 이로써 문맹 퇴치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기에 이른다. 조선일보에선 문자 보급운동을, 동아일보에선 브나로드 운동을 펼쳐 학생을 모았다. 학생들도 방학을 이용하여 적극참여하였다. 그들은 한글 전파를 비롯하여 문화 운동, 음악, 연극 공연, 구습 및 미신 타파, 근검 절약 등을 가르쳤다. 1931년 갓 태어난 조선어학회도 강습회를 열어 한글 보급에 노력하였다. 사회주의계열이 호응을 얻었던 거의 유일하다 시피한 운동이었는데, 중요한건 이 운동의 전체적인 기간이다. 이 운동은 1935년에 일제의 방해로 막을 내리게 되는데, 일제의 통치 방법의 변화를 살펴보자면 민족말살기의 시작은 만주 사변 이후인 1931년이다. 그러나 문맹 퇴치 운동과 산미증식계획은 예외로 보아, 두 사건에 대해선 민족 말살기의 시작을 중일전쟁의 시작인 1937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4) 실력 양성 운동의 한계
 
  실력 양성 운동은 '선실력 후독립'을 표방하였지만, 일제와의 실질적인 차이는 너무나 컸기에 실질적으로 불가능 해 보이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에 대한 희망도 차차 희미해지고, 민족주의자 대부분이 대농장 지주라든지 공장 지주 등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친일 노선을 걷기도 하였다.

25. 민족 유일당 운동
 
  일제가 자치를 제시하면서 민족주의 진영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른바 '자치론자'들이라 불리는 타협 민족주의와 그에 반대하는 비타협 민족주의로 갈리면서 민족주의 진영은 독립운동에 많은 차질을 빚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중국은 만주에 있는 군벌들을 타도하기 위해 국민당과 공산당이 손을 잡자(국공합작), 이를 눈여겨본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난 6.10만세 운동을 통해 힘을 모은 독립운동의 전개를 갈망하게 되었다. 1926년 몇몇의 비타협 민족주의자와 얼마되지 않는 사회주의자들이 만든 조그마한 조직인 조선민흥회(시초)가 었는데, 조선민흥회를 시작으로 사회주의계열에서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게 됨으로써 본격적인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게 된다. 민족의 단결과, 정치 및 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기회주의(자치론)을 배격하면서 1927년 신간회를 창립하기에 이른다. 신간회가 출범하면서 비타협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는 통합된 지도부를 갖게 되었으며, 그들의 항일 운동 전부가 계승되었다. 그들은 민중 계몽, 온갖 대중 운동 지원과 광주 학생 운동에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민중 대회 사건 이후 지도부가 우경화 되고, 민족주의계열에서 합법 투쟁을 주장하여 이념적인 대립을 하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중국의 국공합작도 깨어져버렸으며 이에 코민테른(세계 사회주의 지도부)은 민족 유일당 운동에 회의를 품으며 각개 투쟁으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그리하여 신간회는 해소(해체X)하게 되는데, 최초의 민족 유일당 단체라는 것과 전국적(군, 현 정도까지) 영향력이 미친 최대 규모의 항일 단체였다는 의의를 남겨준다.

26. 국외 이주 동포의 활동과 시련
 
 1) 만주 
  만주는 19세기 후반부터 우리나라의 빈농층이 이주하며 살기 시작하면서 한족(韓族)의 또 다른 생활의 터전이기도 하였다. 보통 생존을 위한 경제적인 이주가 대부분이었으며, 만주지방에는 일찍이 백두산 정계비의 해석문제로 고종 때 생긴 청과의 영유권 분쟁으로 관리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초반인 1910년도에는 한창 독립 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서 정치적인 이주가 많아졌으며 1920년대항일 무장 투쟁의 본거지가 되기도 한다. 
  청산리 전투의 보복이었던 간도 참변(1920, 경신 참변)과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해 만주 군벌과 맺은 미쓰야 협정(1925), 일본이 사소한 물꼬싸움에서 일방적으로 조선인의 편을 들어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한 만보산 사건(1931) 등을 통해 우리 민족은 시련을 겪곤 하였다. 

 2) 연해주
 
  연해주 역시 만주와 마찬가지로 19세기 후반 경제적 이주가 많았다. 러시아 정부의 적극적인 권유로 거기서 그들은 험한 러시아의 땅을 개간하면서 꿋꿋히 살아갔다. 1910년도에 독립 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정치적인 이주가 많았으며 대한 광복군 정부, 대한 국민 의회 등이 대표적이다. 
  소련의 내란에 휘말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죽어가던 자유시 참변(1921),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스탈린은 일제의 스파이의 가능성을 조선인에게 뒤집어씌우고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 시켜버렸다(1937). 

 3) 일본
 
  초반엔 학생들이 유학도 많이 가고 하다가, 후엔 일자리를 찾기 위해, 징병, 징용 등으로 일본에 이주하였다. 2.8독립선언을 처음 작성한 것도 일본 도쿄의 학생들이었다. 
  동포들은 일본에서도 민족적 차별이나 노동력 착취 등에 시달렸으며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자 조선인에 대해 안좋은 유언비어가 퍼져나가면서 조선인들은 마구잡이로 일본인에게 학살당하였다(1923). 

 4) 미주
 
  20세기 초반에 사탕수수, 옥수수 밭 등의 농장이나 철도 공사장의 노동자로 이주가 시작되었다. 거기서 안창호는 미주의 항일단체를 통합한 대한인 국민회(1910)를 조직하였고, 이승만은 국제적 여론을 조직하기 위해 구미위원부(1919)를 만들었다.

27. 종교 탄압과 종교 운동
 
 1) 기독교 
  기독교는 주로 의료, 교육 분야에서 활약하였다. 안악 사건, 105인 사건(1911)들도 그 들과 연관이 깊다. 그들의 교리에 따라 신사 참배를 거부하여 탄압받기도 하였다. 

 2) 천주교
 
  천주교는 무장 투쟁 단체인 의민단을 조직하여 일제에 항거하였다. 북간도의 청산리 대첩(1920)에 참여할 정도로 활약을 보였다. 

 3) 불교
 
  일찍이 일제는 사찰령(1911), 승려법 등을 제정하여 불교계를 탄압해왔다. 유명한 독립운동가라고는 한용운 밖에는 교과서에서 소개되지 않는다. 한용운은 1913년 불교 유신론을 발표하여 불교의 쇄신을 주장하였고, 1921년에는 불교 유신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 추가사항 : 일본이 본래 신도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불교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한국, 일본, 중국은 꼭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불교를 통해 역사적으로 많은 동질감을 갖게 된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 아래에서 일본은 불교를 통해 조선을 동화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위의 설명은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한 것이지만, 불교계가 오로지 친일노선을 걸은 것은 아니다.)

 4) 원불교
 
  원불교는 개간사업, 저축운동, 금주, 금연 등의 금욕적인 생활을 통해 일제에 대항하였다. 

 5) 천도교
 
  천도교는 본래 동학이다. 일진회와 같은 친일조직이 동학 내에서 분리해 나감으로써, 동학은 그러한 위기를 타개하고 다시한번 시작하자는 의미에서 그 이름을 천도교로 개칭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3.1운동을 광고하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6) 대종교
 
  나철을 교주로 하고, 단군 신앙을 근본으로 삼는 종교이다. 나철의 전적을 보건데, 오기호 등과 함께 을사 오적을 암살하자면서 만들어진 오적 암살단 등이 있다. 그러한 사람이 만들어서 그런지, 대종교의 교도들은 무장독립 투쟁에 활발히 참여하였다. 중광단(후에 북로 군정서) 또한 대종교도들이 만든 단체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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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지중해 세계
 ① 에게 문명
  에게 문명은 에게 해를 중심으로 발전했던 문명들을 말한다. 크레타, 미케네, 트로이 등이 있었는데, 트로이는 고등학교 세계사에서 크게 다루지 않는다. 기원전 2000년 전에 크레타 문명크레타 섬에 있었던 문명을 말하는데, 크노소스 궁전과 궁전 안에 거대한 미궁으로 된 구조를 볼 때 그만큼 강력한 권력을 가진 국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섬에 위치한 만큼, 개방적인 태도를 가졌을 것이다. 그래서 크레타 문명은 그리스나 유럽에 청동기와 오리엔트의 문명의 유산을 전해주는 중간 매체가 되었다. 반면 기원전 14세기에 등장한 미케네는 대륙에 위치한 문명으로, 대륙적인 호방한 성격과 상무적인 문화가 발달하였다. 미케네는 철기를 사용하는 도리아인의 이주에 의해 멸망하게 되는데, 도리아인은 훗날 스파르타를 건국하는 민족이다.

 ② 폴리스의 형성
  폴리스가 형성된 것은 기원전 약 8세기였다. 도시국가인 폴리스는 산이 많고 평야가 적은 그리스의 지형에 따라 그리스 주민들이 모여 살면서(集住) 형성되었다. 보통 폴리스의 형태를 크게 아테네형과 스파르타형으로 나누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폴리스에 대한 사료가 많지 않아 아테네와 스파르타 외의 것은 구체적으로 구상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폴리스는 크게 산 둔턱에서 신전과 요새의 기능을 하는 아크로폴리스와 중앙광장인 아고라로 구성되어있다. 아고라에선 연극, 음악회, 향연 등이 열렸다. 그리스인들은 강한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헬렌의 자손’이라는 뜻에서 자신들을 ‘헬레네스’라고 하고, 변방의 외국인들을 ‘바르바로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들은 4년에 한 번씩 현재의 올림픽과 같은 올림피아를 열어 운동시합을 겨뤘다.

 ③ 스파르타
  스파르타는 앞서 말한 것처럼 미케네를 멸망시켰던 도리아 인에 의해 건설된 나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의 원주민이었던 아리아인과의 마찰인 피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스파르타가 확장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마찰은 더더욱 확대되었다. 도리아인은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군국주의적인 정책을 펴게 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스파르타 전체인구에서 도리아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고작 20% 전후로, 모든 도리아인은 군인이 되어야만 했다. 이들은 ‘아고게’라고 하는 공동 학습의 장에서 군사, 글쓰기, 문화 등을 수료해서 보다 완벽하고 이상적인 전사로 거듭나기를 희망했다. 반면 스파르타의 아리아인은 대부분 헬로트(헤일로타이)라는 노예였으며, 농업에 종사하였다. 도리아인들은 노예들을 감시하고 지배하였다. 무역은 페리오이코이라는 반자유인들에 의해 행하여졌는데, 아테네에 비해 활발하지 못했다.

 ④ 아테네
  아테네는 정복 국가의 성격을 띠는 스파르타와 달리, 해상무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폴리스이다. 처음엔 왕정이었다가 귀족들의 기병을 중심으로 한 귀족정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해상무역으로 상공인 계층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아테네는 점점 보다 민주적으로 변해갔다. 아테네가 가장 크게 변화하게 된 동기는 전술상의 변화였다. 상공인들은 축적된 부를 통해 중무장을 하여 보병으로 전투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를 중장보병이라 한다. 중장보병은 기병을 밀어내고 아테네의 주력이 되었다. 이를 통해 상공인 계층은 정치적인 발언권을 갖게 되었다.

 ⑤ 아테네의 민주주의 발달과정
  솔론은 아테네의 주력이었던 상공인 계층에게도 정치적인 권한을 주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솔론의 ‘금권정’이다. 비로소 상공인 계층인 부를 통해 정치에 참여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부의 정도에 따른 평등을 기하학적 평등이라고 하며, 솔론의 금권정은 기하학적 평등에 의한 민중의 참여정치인 것이다.
  솔론의 개혁은 그 당시 상당히 진보적이고 혁신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기득권을 잡고 있던 귀족들은 솔론의 개혁에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상공인 층 역시 자신들의 정치 참여도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귀족과 상공인들은 서로 대립하게 되었는데, 이를 군사로 제압하고 권력을 잡은 것이 페이시스트라토스였다. 그는 군대를 통해 권력을 유지하고, 시민을 다독여 지지를 돈독히 하였다. 이러한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독재를 참주정이라고 한다.
  참주정은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죽음과 거의 동시에 폐지되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들의 정책은 시민들에게 시원치 않았고, 시민들은 그들을 결국 추방하게 된다. 이후 클레이스테네스는 앞서 나타났던 참주의 등장을 저지하기 위해 도편 추방제를 실시하였으며, 500인회를 구성하고 여기에 성인 남자를 참여시켜 민주주의의 기틀을 다져갔다.
  페르시아 전쟁은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롯한 지중해 폴리스들에게 크나큰 위험이었다. 오리엔트에 위치해 그동안 많은 문화를 그리스 지역에 전파한 바 있는 페르시아는, 이젠 무력을 가지고 그리스 세계의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다. 3차에 이른 페르시아 완정은 마라톤 전투나 살라미스 해전을 통해 그리스의 폴리스들이 힘을 합쳐 막아내었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는 훗날 있을 페르시아의 침략에 대비하여 서로 동맹을 맺게 되는데,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도 그러한 동맹 중에 하나였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나고 아테네를 맹주로 하는 델로스 동맹의 완성은 아테네의 생활수준에 큰 변화를 주게 된다. 거기에는 민주주의도 포함되는데 페리클레스는 델로스 동맹의 전쟁자금을 끌어들여 민주주의 발전의 발판으로 삼았다. 페리클레스는 민회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수당을 지급하고, 특수직이 아닌 일반 행정직 같은 경우에는 추천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이런 아테네의 영광은 페리클레스 사후에 선동정치가들에 의해 중우(衆愚)정치로 변질되었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배로 아테네인들은 오히려 민주주의에 좋지 않은 감정마저 갖게 된다.

Tip. 아테네 민주주의 발달 과정
솔론의 금권정 -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 - 클레이스테네스 - 페리클레스 - 중우정치

* 주의
아테네 사회가 다소 불완전하지만 민주주의 그 자체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 좋다.
그 때의 민주주의의 개념과, 지금의 민주주의의 개념은 너무나 다르다. 별도의 것이라고 봐도 좋다.

 ⑥ 폴리스의 쇠퇴
  아테네의 델로스 동맹과 같이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고 있던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아테네와 델로스 동맹을 탐탁케 여기지 않았다. 결국 델로스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격돌하여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데, 전쟁은 육군이 발달한 스파르타에게 아테네가 패배하면서 끝났다. 이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폴리스들의 전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도시국가에겐 큰 부담을 줄 수밖에 없었다.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하였으며,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중우정치(衆愚政治)라고 비난했다. 폴리스 후반기에 주도권을 잡은 것은 아테네도 스파르타도 아닌 테베였으며, 테베 역시 오랜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마케도니아에게 멸망하였다.

 ⑦ 그리스의 문화
  그리스의 문화는 기본적으로 인간 중심적, 현세 긍정적, 합리적인 성격을 띤다. 그러한 성격은 바로 미술에서 나타나는데 페르테논 신전과 아테네 여신상에서 볼 수 있는 조화와 균형적인 미가 바로 그것이다. 아테네에선 특히 철학이 발달하였는데 탈레스,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자연 철학자부터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있다. 역사서로는 최초의 역사서라고 일컫는 헤로도토스의 『역사(페르시아 전쟁사)』와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있다.

* 생각해볼 문제
그리스의 문화가 저러하다면, 과연 페르시아나 이집트는 동물 중심적이고, 현세 부정적이며, 불합리적인 문화를 이루었을까? 당연히 아니다. 이는 서구 학자들에 의해 미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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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국권 피탈
과정 : 조약의 순서, 내용 등을 알아두자.


1) 한일 의정서(1904)

  러일 전쟁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에게 군용지 조차를 요구하였고, 정부는 이에 응하면서 일본의 합법적인 토지 약탈을 허용하게 된다. 

2) 제 1차 한일 협약(1904)
 
  일본은 이 협약을 통해 우리나라의 내정에 고문을 파견하여 관여를 하기 시작하였다. 외교고문으로는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과 경제고문인 메가타가 이 때 파견되었다. 

3)
을사조약(1905)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영향을 미칠만한 서구 열강(영, 미 등)과 사전에 협약을 마치고,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후 한반도에 대한 침략 야욕을 노골화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을사조약이라 하겠다. 을사조약의 주된 내용은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에 대한 간섭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제 1조 
  일본국 정부는 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에 조선의 외국에 대하는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할 것이요, 일본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있어서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할 것임. 

제 2조 
 (전략) 한국 정부는 금후에 일본국 정부의 중개에 경유치 않고서 국제적 성격을 가진 하등의 조약이나 또는 약속을  않기를 서로 약속함. 

제 3조
 
 (전략)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闕下)에 한 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경성에 주재하고..... (후략)

  이에 우리 민족은
의병활동(을사의병)을 통해 저항하였고,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夜訪聲大哭)」을 황성신문에 발표하였으며,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였다. 민영환 또한 「동포에게 남기는 글」을 써놓고 자결하였다.
 

4) 한일 신협약(1907)
 
  헤이그 특사 사건을 밀비로 일본은 한일 신협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그로 인해 조선에 있던 일본의 통감부의 기능이 입법, 사법, 행정 전반을 전담할 수 있게 되었다. 고문제를 폐지시키고, 조선의 중요직 등은 통감부가 일본인들을 추천하여 등용시켰다. 그리하여 각 부의 차관들이 대한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를 '차관정치'라 한다. 그리고 군대 마저 해산시킨 것도 이 조약의 핵심 중 하나이다. 

제1조 대한 제국은 시설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2조 대한 제국의 법령 제정 및 주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제4조 대한제국의 고등 관리 임명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것 
제5조 대한 제국은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대한제국 관리에 임명할 것 

 이후 일본은 기유각서(1909, 사법권 박탈), 6월 각서(1910, 경찰권 박탈) 등을 통해
1910년 8월 29일 국권이 피탈되었다.
 

5) 당시의 국제 정세
   
  가쓰라-테프트 밀약(미-일, 1905.7)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고, 미국 또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한다.

                 ↓

  제2차 영일동맹(영-일, 1905.8)

  일본에 대한 조선의 지배, 감독 인정

                 ↓

  포츠머스 조약(러-일, 1905.8)

  일본에 대한 조선의 지배, 감독 인정. 조선 내의 러시아 이권을 전부 일본에게 양도

  (러일 전쟁 이후, 제2차 영일동맹 이후)

                 ↓

  제2차 한일 협약(을사조약, 조-일, 1905. 11)

  조선의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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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중국
  중일 전쟁이 끝나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다시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이를 국공내전(國共內戰)이라고 하는데, 국민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던 공산당이 국민당에게 승리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마오쩌둥의 공산당의 영향력은 전 중국 대륙에 미쳤다(1949). 드디어 중국에는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 인민 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정권을 잡은 중국 공산당은 개혁에 나섰다. 그동안 중국 전체에 만연해 있던 전근대적(前近代的, 혹은 봉건적封建的) 지주제를 폐지했으며, 관료들의 패단과 부정부패를 엄정히 단속하여 없앴다. 또한 중국 농촌의 사회. 생활 및 행정 조직의 기초 단위였던 인민 공사(人民公社)를 설립(1958)하고 1950년대 말 경제 성장을 위한 대약진 운동을 펼쳤다.(* Tip : 본래 중국은 소련식으로 산업화를 시도였으나 매번 실패한 경험이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은 스스로 새로운 경제 개발 방안을 찾아야만 했는데, 그 결과 창안된 것이 대약진 운동이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소원해졌으며, 공산당의 무리한 추진은 많은 인민을 굶주리게 하였다.)
  1960년대 초 중국과 소련은 이념적으로 불화를 겪었으며(중소 이념 분쟁), 소련은 그동안 지원해왔던 중국의 원조를 끊어버렸다. 대약진 운동 역시 결국 실패하였으며, 그와 겹쳐 자연 자해가 일어나면서 중국은 경제적으로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되었다. 또한 덩샤오핑은「흑묘백묘론(黑苗白描論 :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경제)만 잘 잡으면 된다는 이론)」을 통해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하며 마오쩌둥을 비판하였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자연 재해, 정치적 고립은 마오쩌둥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는 10년간의 문화대혁명(1966~1976)을 통해 그동안 중국을 지배해왔던 전통을 사그리 몰아내고,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문화대혁명의 주역은 그의 팬클럽이었던 홍위병이었는데 마오쩌둥은 이들을 통해 문화재를 파괴하고 전통사상을 근절하였다. 그 결과 마오쩌둥만의 공산주의 체제가 확립되었다.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정권을 잡은 것은 마오쩌둥의 오랜 전우 덩샤오핑이었다. 그는 예전에 「흑묘백묘론」을 주장했던 것처럼 실용주의자였으며, 이는 그의 개혁, 개방 정책을 통해 잘 드러났다. 그는 사회주의체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 요소를 도입했다(사회주의 시장경제). 시장 경제를 도입함으로써 중국은 점차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자유 경쟁은 곧 정치적인 민주화는 아니었다. 개혁, 개방과 더불어 베이징 시민, 대학생을 중심으로 중국인들은 사상해방, 언론자유, 개인의 자유, 법치, 민주화 등을 주장하였지만, 정부는 이들을 무력으로 무참히 진압하였다. 중국 당국은 경제를 개혁할 마음은 있었지만, 정치 개혁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천안문사태, 1989)

Tip. 중국현대사의 흐름
국공내전 - 중화인민공화국 - 대약진운동 - 중소이념분쟁 - 덩샤오핑 흑묘백묘론 - 문화대혁명 - 개혁개방 - 천안문사태


드디어 중국사가 끝났습니다.

앞으로는 유럽사를 연재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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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중국의 근대화
 ① 아편전쟁(1840 ~ 1860)
  중국을 처음으로 개항시킨 것은 영국이었다. 원래 영국은 중국과 오랫동안 교역해오던 나라로, 주로 공행을 통해 차를 수입해가곤 하였다. 영국은 일방적인 구매자의 위치에 불과하였으며 영국은 줄곧 이러한 처지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은 식민지였던 인도에 면직물을 팔고 인도에선 아편을 재배하여 청에 팔았는데, 이러한 형태의 무역을 삼각무역이라 한다. 삼각무역에서 아편을 떠받은 청에서는 국민의 건강이 침해당하고, 경제가 악화되는 등의 폐해가 나타났다. 결국 영국과 청은 마찰을 빗게 되어 전쟁까지 이르게 되었다. 1차 아편전쟁은 청 관료였던 임칙서가 아편을 몰수하고, 통상을 금지시키자 영국이 무력으로 침략하면서 일어났다. 전쟁은 화포가 발달한 영국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였으며, 영국과 청간에 난징조약이 맺어지면서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난징조약은 중국이 맺은 최초의 불평등 조약으로 홍콩을 할양하고 상하이 등의 5개의 항구를 개항하였으며, 치외법권과 아편전쟁의 배상금을 물어준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아편전쟁의 패배와 난징조약에도 청은 공행무역을 유지하였으며, 밀수선이었던 애로호의 영국 국기를 훼손하고, 프랑스의 선교사가 중국에서 피살되는 등 국제적인 문제를 야기했다. 이로 인해 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으며, 위협만 했었던 1차 아편전쟁과는 달리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2차 아편전쟁의 결과 텐진 조약과 베이징 조약이 맺어졌으며, 이는 외국 공관의 베이징 주재를 인정하고, 크리스트교의 포교를 허용했으며, 아편 무역이 실질적으로 공인되었다. 텐진 조약과 베이징 조약을 중재한 러시아에게도 연해주가 돌아갔다.

 ②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 1850 ~ 1864)
  아편전쟁의 패배는 청 왕조의 권위가 하락된 것을 증명했을 뿐더러, 청조는 전쟁 배상금을 물기 위해 농민들을 대상으로 과중하게 조세를 징수하였다. 또한 물가가 폭등하여 농민 생활이 궁핍해지면서 농민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이에 청조에 불만을 품고 있던 홍수전은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아 상제회(上帝會)를 조직하였다. 홍수전은 멸만흥한(滅亡興漢 : 만주족을 멸망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킴)의 슬로건을 내걸었고, 토지 균분제인 천조전무제(天朝田畝制) 주장하였다. 이외에도 남녀평등, 전족 금지의 근대적인 사상을 주장하면서 농민들을 모아 난징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러한 농민 봉기도 결국 같은 한족이었던 향용(향촌 의용대)을 조직한 지주들과 서구 열강의 공격을 받아 결국 실패하였다.

 ③ 양무운동(洋武運動)
  태평천국운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한족들은 새로운 지배층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출세한 이홍장, 증국번 등의 한인 관료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의 과학기술과 군사기술을 받아드릴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양무운동은 중체서용(中體西用 : 중국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 군사기술만을 수용함)을 근본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양무운동은 얼마가지 않아 조선에서 벌어진 청일전쟁(1894)에서 청이 패배하면서 한계가 드러나게 되어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 이야깃거리 : 청나라 군대는 그 전부터 부패의 도가 지나쳐 군수물자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주로 일본군과 싸웠던 군대는 이홍장이 거느리던 부대로 결국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패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대포의 화약을 빼돌리고 거기다 모래를 넣는 등의 비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④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
  양무운동의 실패로 청나라는 개혁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여야 했다. 또한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여 그 정체가 종이호랑이임이 밝혀져 일본과 서구 열강에게 끊임없이 영토를 분할하고 이권을 침탈당하여야 했다. 캉 유웨이, 량치차오 등의 공양학파 출신의 개혁가들은 양무운동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하는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시행하고자 했다. 이들은 입헌 군주제, 의회 설치 등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변법자강운동 역시 서태후 등의 보수세력의 방해로 결국 실패로 그쳤다.

⑤ 의화단 운동
  청일전쟁 이후 서구가 중국의 영토를 분할하고 이권을 침탈하였으며,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트교 전파는 많은 중국인들의 불만을 샀다. 백련교도(* Tip. 백련교 : 남송 이후 중국에 전해내려오는 민중종교. 남송 이후 많은 농민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를 중심으로 조직된 의화단은 비밀결사였으며, 부청멸양(附淸滅洋 : 청을 도와 서양을 없앰)의 구호를 내걸고 철도 파괴, 방화 등을 통해 서양에 대항하였다. 의화단은 자체적으로 권각법(拳脚法 : 권법拳法 + 각법脚法)과 병법(兵法)을 교육하여 외세를 쫒아내고자 하였으나, 서구 열강들이 먼저 연합군을 구성하여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청과 서구는 신축조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서양군대의 베이징 주둔, 배상금 지불 등이었다.

 ⑥ 신해혁명
  잇따른 개혁에 실패하고 태평천국운동, 백련교도 등에게 위협을 느낀 보수 세력 역시 개혁을 꾀하게 되었다. 광서 신정이라 불리는 이 개혁은 입헌군주제 채택, 과거제 폐지 등을 내세웠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쑨원은 민중으로부터 개혁을 꾀하여 중국 혁명 동맹회를 결성하고 삼민주의( * Tip. 삼민주의 : 민족民族(멸망흥한), 민권民權(공화주의), 민생民生(토지분배))를 주창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서구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으며, 이를 갚기 위해 민간철도를 국유화하여 이를 서구에 넘기려고 하였다. 중국인들은 청나라 정부의 조치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또한 우창에서는 신식 군대였던 신군(新軍)이 봉기하여 중국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로 인해 우창봉기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혁명은 중국전역에 확산되기에 이른다. 신해혁명을 통해 중국에선 아시아 최초의 공화정인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다급한 청은 위안스카이를 사신으로 보내 쑨원과 협상을 하였으나 쑨원이 위안스카이를 잘 구슬려 임시총통으로 앉히면서 청나라는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Tip. 각종 구호들
태평천국운동 : 멸만흥한
양무운동 : 중체서용
의화단 : 부청멸양
신해혁명 : 멸망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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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개항 이후의 경제적 구국 운동 
 1) 방곡령
  일본이 점점 산업사회로 이행해 감에 따라 쌀의 수출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당시 함경도 관찰사로 원산 관장하고 있던 조병식은 일본에게 방곡령을 사전 통보하고 원산 비롯한 주변 함경도에 방곡령(防穀令)을 실시하기에 이른다(1889). 이것이 황해도 등으로 퍼져나가 곡물의 수출을 전적으로 금지시켰지만, 일본은 방곡령 실시 1개월 전 미리 통보를 해야한다는 조일통상 장정의 규정에 의거하여 보상금을 요구한다. 이에 정부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방곡령을 철폐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2) 상권 수호 운동
 
  기존의 금난 정권(신해 통공) 등의 기득권을 잃어버린 시전 상인들은 임오군란 이후부터 인정된 외국 상인들의 내지통상으로 인해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전 상인들은 철시(撤市 : 시장을 철폐함)를 하고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하고(황국 협회는 보부상 조직에다 이 전에 있던 단체이다. 헛갈리지 말자.). 종로 직조사 등을 설립하여 대항하였다. 
  개항 초에 개항장과 내륙의 시장을 연결하면서 부를 축척했던 보부상, 여각, 객주 등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로 인해 입지가 곤란하게 되었는데, 대동 상회와 같은 근대적 상회사 등을 설립하여 살 길을 모색하였다. 

 3) 이권 수호 
  아관 파천 이후, 러시아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자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한러 은행 철폐 등의 이권을 수호하는데 성공한다. 
  여기서 우리는 독립협회의 이중적인 면을 볼 수 있는데, 러시아는 배격하면서 일본, 미국 등에는 맹목적인 지지를 보인다. 이는 구(舊) 급진 개화파의 맥락을 이었기 때문(서재필 등)이다. 

 4) 민족 자본 육성
 
  대한 제국이 출범하면서 광무 정권은 광무 개혁의 일환으로 상공업 분야를 육성하였다. 그로인해 광무정권은 농상 회사(방직), 해운 회사, 철도 회사 등을 세웠다. 민간에 의해서 조선, 한성, 천일 은행 등 근대적 은행을 이때 설립되었다. 하지만 후에 화폐정리 사업으로 은행들은 몰락하였다. 

 5) 황무지 개간권 반대
 
  일본이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보안회(1904)가 농광회사를 설립하여 대항하였다. 그로 인해 일본은 황무지 개간 철회하였다. 독립협회의 절영도 조차 반대, 한러 은행 폐쇄 등과 같이 몇 안되는 성공사례이므로 곡 알아두자. 

  6) 국채 보상 운동(1907)
 
  일본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광무 정권에게 차관을 강요하고, 이러한 이유가 대한 제국이 일본에게 예속되는 것이라 생각한 서상돈 등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하여, 서울에 국채보상 기성회를 조직하고 대한 매일 신보 등 언론 단체와 각종 애국 계몽 단체가 참여하면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한 푼 두 푼 모아서는 현실적으로 일본에서 들여온 차관을 갚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운동에 대한 참여도 일반인들만이 호응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통감부의 방해까지 겹쳐, 결국 실패하기에 이른다.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금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에게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1천 3백만 원을 모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액수가 다 차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응당 자원해서 일원, 십원, 백원, 천원을 특히 출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1일



16. 사회 구조와 의식, 생활모습의 변화

1) 사회 구조와 의식의 변화 
  1801년 공노비를 해방을 필두로 개항이 되면서부터 신분제 폐지가 가속화 되었다. 1882년에는 서얼, 중인을 비롯한 모든 계층의 관직 진출이 허용되었고, 1884년 갑신 정변에서 최초로 신분제 폐지를 주장하였다. 1886년, 노비 세습제가 철폐되었으며 1894년의 동학 농민운동에서도 신분제를 철폐하고자 하는 욕구가 다시금 확인되었다. 이윽고 1894년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철폐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호적에는 신분 대신 직업을 기재하도록 하였다. 독립협회를 통해 자유 민주주의 사상이 보급되었고, 만민 공동회를 통해 평민의식이 확산되어갔다. 또 애국계몽운동이 시작되면서 평등사상이 보편화 되었고, 신민회를 통해 민주 공화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2) 생활 모습의 변화
 
  신분의 구별이 나타나지 않도록 복식 개혁을 하고, 서양식 복제를 도입하였고, 커피 등의 서양음식이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다. 가택의 규모, 형태, 소재의 제한이 없어지고 서양식 건물이 등장하였는데 명동성당, 정동교회, 덕수궁 석조전, 각국 공사관 들이 이에 속한다.

17. 근대 문물의 수용
 
 1) 근대시설, 교통 통신 
  지금의 우체국 격인 우정국도 1884년부터 설립되었으나 갑신정변 때 불이 났다가 을미개혁 때(1895)나 다시 부활하였다. 또한 기기창을 설치(1883)하여 무기 개발에도 힘썼다. 또한 박문국(1883)을 설치하여 한성순보 등 각종 인쇄물을 인쇄하기도 하였다. 화폐를 발행하던 전환국 역시 1883년 설치되었다. 
  1885년 전신은 서울 - 인천(일), 서울 - 의주(청)에(자기네한테 가까운 곳에 설치했다고 생각하면 쉽다. 인천은 일본에게 개항했던 항구, 의주는 청과 국경에 가까운 곳이다.) 각각 군사적인 목적으로 설치되었고, 전화는 1898년 궁중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점 민가로 확대되었다. 전차도 1898년 한성 전기 회사의 제안으로 전차를 도입하였다.(서대문 ~ 청량리, EBS 파이널) 1899년 경인선을 필두로 시작하여 / 경부선(1901), 경의선(1905), 경원선(1905)이 차례대로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철도가 '결국' 일본에 의해 완공되었으며, 대한 제국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러일전쟁 기간 중에 군사적인 목적과, 후에 수탈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최남선은 '경부철도 노래' 등을 만들어 찬양하기도 하였다.


 2) 의료 기관
 
  최초의 근대식 국립 병원인 광혜원은 갑신 정변 때 수십 번이나 칼빵을 맞은 민영익을 살려낸 외국인 선교사 앨랜의 의술에 감동한 고종에 의해 1885년 설립되었다. 후에 제중원으로 개칭하였으나 1894년 없어지게 된다. 또한 1899년 국민들의 질병치료를 위해 설립된 국립병원이 개칭한 광제원, 1904년 애비슨이 세운 개인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과 의료 요원을 양성하기 위해 황제의 명령으로 1907년 짓기 시작하여 1908년 완공된 대한 의원, 1909년 가난한 백성을 위해 세워진 자혜의원 등이 있다.


 3) 건축
 
  1896년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방해서 만든 독립문은 독립협회에서 지은 것으로 청을 향한 독립을 나타내고 있다.(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일본에 대한 독립의지가 있는 독립문을 일본이 가만 둘리 없지 않은가.) 1898년에는 고딕양식의 명동 성당이 지어졌고, 1909년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덕수궁 석조전 등이 있다.

  서양 문물의 수용은 제도 개혁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했으므로, 동도 서기론적 입장에서 수용했다고 할 수 있다.
 

 4) 근대 교육
 
  근대교육의 도입기인 1880년대에는 최초근대식 학교이자 사립학교원산 학사1883년 함경도 덕원에서 세워졌다. 정부는 동문학(1883, 통역관 양성 기관)과 상류층 자제가 주 대상이었던 육영공원(1886)이 설립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제도가 마련되었고 정부가 주도하는 교육정책이 실현된다. 과거제를 폐지하고 학무아문(現 교육인적자원부)을 설치하였으며, 고종의 교육 입국 조서(1895)를 발표하면서 교과서, 학제(교육시스템, 現 초, 중, 고)가 마련되었고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외국어 학교등의 각종 관립학교가 설립되었다. 광무 개혁으로 인해 기술학교들도 많이 만들어졌다. 
  1900년대는 애국 계몽 운동기로 민간이 주도하는 형태가 나타났다. 대성, 오산, 보성 학교 등이 애국 계몽가가 세운 학교배제, 이화, 숭실 등 선교사가 세운 학교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1908년 일제가 사립학교령을 실시하여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통제하고, 탄압하였다.

5) 언론의 발달
 
  최초의 신문이자 관보(官報) 한성 순보는 순 한문신문으로, 개화정책의 일환으로써 급진 개화파가 개화 사상의 확산을 위해 1883년 발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갑신 정변 때 박문국이 불타면서 잠시 중단되었다가, 을미개혁 이후 한성주보로 바뀌어 다시 출판되었다.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1896)은 한글판, 영문판 두 가지로 발간되었다. 독립신문은 미국의 영향으로 최초로 띄어쓰기를 시도하였다. 민권 의식 확산에 기여하였으나 정부와 러시아의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애국계몽 단체가 그랬듯이 의병활동에도 비판하였으며 미국을 지지하였다. 대표적인 논평가로는 '아무개씨(서재필)'이 있다. 
  황성신문(1898) 국한문 혼용 신문으로 주로 구(舊) 유림이나 양반을 대상으로 한 신문이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린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신문 역시 의병활동에 비판적인 면을 보였다. 
  제국 신문(1898)은 겉으로 보면 상당히 딱딱한 이름의 신문이지만 순한글을 사용하여 서민층과 부녀자들을 주 대상으로 하였다. 
  대한매일신보(1905)는 양기탁과 영국인 나이스 가이 베델이 공동 창간한 신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채보상운동의 홍보하여 확산에 기여하였고, 의병활동에 지지한 유일한 신문이기도 하다. 신채호가 이 신문의 대표적인 논평가이다. 
  그 외 천도교(舊 동학)의 기관지였던 만세보(1906, 국한문 혼용), 친일파인 이용구는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 신보 등이 있따. 
  일제는 이러한 신문들을 1907년 신문지법을 제정하여 탄압하였다. 만세보의 폐간(1907)을 필두로 하여,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이 1910년에 폐간되었다. 

 6) 국학 연구 
  국학은 크게 국사학과 국문학으로 나뉜다. 
  민족사학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계몽 사학신채호, 박은식 등을 통해 발달하기 시작한다. 보통 영웅 전기나 위인전, 각국(베트남, 미국) 등의 흥망사 등에 대해 서술한다. 또한 박은식, 최남선 등이 고전을 정리하고 간행하기 이해 조선광문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국어계열에선 종두법을 주장하였던 지석영이 사람들의 무지를 타파하기 위해 국문 연구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지석영과 주시경은 국문 연구소(1907)를 만들어 「국어문법」을 저술하고 그 동안 훈민정음에 '언문'이라는 굴욕적인 이름을 대신하여 '한글'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한성주보, 유길준의 「서유견문」등을 통해 국한문이 혼용되었으며 독립신문, 제국 신문 등의 한글 전용 신문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7) 문예와 종교
 
  문학분야에선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같은 신체시가, 계몽적 성격을 지닌 신소설(이인직의 「혈의 누」, 이해조의 「자유종」, 안국선의 「금수회의록」등)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신소설들은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순 한글로 쓰여졌으며 언문 일치, 계몽적 주제 등으로 쓰여지긴 하였으나, 어느정도 친일적인 내용도 첨가되어 있어 후에 식민지 문학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예술부분에선 서양식 악곡에 맞추어 부르는 창가 등장하였고,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졌다(1909). 
  각종 종교단체들도 근대 문물의 수용과 애국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개신교는 의술 보급과 교육 발전에, 천주교는 고아원과 양로원 등을 설립하여 민중을 이바지하였다. 동학에선, 일진회 등의 친일조직이 생겨나고 부패하기 시작하자 의지를 새롭게 다지기 위해 손병희가 천도교로 개명하였다. 나철이 창시한 민족 종교인 대종교는 단군 신앙을 바탕으로 창시되었으며, 이후 무장독립투쟁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유교, 불교 등 고대부터 받아들여졌던 종교들은 자체 내에서 그 경직성을 비판하면서 양명학을 중심으로하는 박은식의 유교구신론, 한용운의 불교 유신론 등이 주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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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명(明 1368 ~ 1644), 청(淸 1616 ~ 1911)
  원말에 한족의 주권회복을 위해 백련교도나 홍건적의 난 등 수많은 봉기가 있었다. 명의 태조인 홍무제(洪武制) 주원장 역시 이러한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일단 명이 들어서고, 다시금 중국을 한족이 지배하게 되자, 명은 지난 원나라 때 남아있던 원의 풍습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과거제를 부활하여 한족 전통 문화를 부흥하고자 하였으며, 재상제를 폐지하고, 율령 정비, 이갑제(里甲制)를 통해 황제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새로 호적인 부역황책과 토지대장인 어린도책(魚鱗圖冊 : 물고기 비늘과 같은 그림의 책)을 만들어 역과 토지세를 부과하였다. 명이 베이징으로 천도해서 보다 중국적인 면모를 갖춘 것은 성조 영락제 때였다. 영락제는 중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베트남을 공략하고 정화를 통한 원정을 실시하였다. 정화의 원정은 1405 ~ 1433년 7차에 걸친 항해 원정을 말한다. 동남아, 아프리카 동부해안에까지 닿았으며 이러한 활동은 중국의 조공질서를 명확히 하고, 훗날 화교의 동남아 진출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규모의 원정은 단지 중화주의적인 조공질서를 만들었을 뿐이며, 어느 한 곳 침략해서 식민지화 한 적은 없다. 명은 환관 세력이 점차 득세를 하고 북로남왜(북쪽은 유목민족, 남쪽은 왜구)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더욱 국력이 소모되었다가 이자성의 난으로 결국 멸망하였다.
  은 처음에는 후금(後金)이라는 이름으로 여진의 누르하치가 팔기 조직을 통해 만주 지방을 지배하면서 성장하였다. 처음 국호를 청이라고 정한 것은 태조로, 태조는 조선을 침략해 정묘, 병자호란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세조는 이자성을 몰아내고 베이징에 입성하여 중국 통치의 기틀을 다졌다. 청에서 가장 손꼽아 다루는 것은 성조 강희제와, 세종 옹정제, 고종 건륭제이다. 우선 성조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정상공의 난을 정벌하여 타이완을 복속시켰다. 또한 중국 최초의 근대식 조약인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1689)하여 러시아와 국경 문제를 명확히 했다. 그 외에도 외몽골, 칭하이, 티베트를 정복하여 나라를 굳건히 하였으며, 문자의 옥을 통해 사상 탄압을 하기도 하였다(문자의 옥은 강희, 옹정, 건륭제 때 계속 지속된다). 세종 옹정제는 군기처를 독립시키고 러시아와 카흐타 조약을 체결하였다. 고금도서라는 백과사전을 편찬하였으며, 크리스트교가 중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포교를 시작하자 크리스트교 포교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고종 건륭제에 이르러서는 청의 최대의 영토에 달해 만주, 몽고, 한, 위구르, 티베트 지방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고금도서를 보강한 사고전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중농 정책으로 인해 농업은 여러 발전을 하였다. 관개 시설의 확대, 농업 기술의 향상, 품종 개량을 통해 농업 생산력이 증대하였다. 쌀 외에도 목화 생산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으며, 고구마, 옥수수, 땅콩 등의 외래 작물이 전해져오기도 했다(* Tip(추가사항)  : 고등학교 국사에선 이러한 외래작물이 유입된 시기를 보통 임진왜란 전후 혹은 이후로 본다). 과거 중국과 명, 청대의 쌀 생산지는 매번 변화하였는데 송원대에는 양쯔강 하류에서, 명대는 양쯔강 중류에서 청대에 와서는 쓰찬 지방에이 쌀의 주산지가 되었다( * Tip(추가사항, 참고) : 오늘날 중국의 쌀 생산지는 만주지역이다. 원래 만주는 농경 / 목축 / 유목이 전부 가능한 비옥한 곳이긴 하였으나, 대규모 농경지로 변화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 우리니라 사람들이 이주하면서부터였다. 만주 일대의 농경 기술은 대부분 조선족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수공업 역시 크게 발전하였다. 명대에는 면직물과 견직물의 직물공업이 16세기 이후 양쯔강 하류지역에서 발달하였는데, 기존에 농민들에 부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실학의 영향을 받아 이젠 공장을 갖춘 수공업으로 면모하여 자본주의의 맹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명에서는 과거 원과 달리 초기에는 조공무역의 형태를 띠다가 16세기 중엽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대상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이들은 농산물과 직물, 차, 도자기 등을 수출하여 은을 벌여들었다. 이들 역시 동업 조합인 공소와 동향인 조합이었던 회관을 운영하였다. 명의 수취제도는 기본적으로 양세법을 따랐다. 하지만,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명에서는 은이 가장 구하기 손쉬운 귀금속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명 정부는 은을 본위로 하는 경제체제를 확립하고, 잡다한 세금을 지세(토지세)와 정세(인두세)로 묶어 은으로 납부하는 일조편법을 시행하였다.
  명, 청대는 여러 분야에서 경제력이 향상되는 시대로 서민 경제 또한 같이 발맞춰 성장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서민경제의 성장은 서민의식의 확대와 성장을 야기하여 서민 운동을 야기하였다.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도시에서 일어난 노동자의 권익 옹호 운동인 민변(民變)과 소작인이 소작료의 경감을 요구하는 항조(亢燥) 운동, 노예의 신분 해방운동인 노변(奴變)과 명나라 때 방직 공장에서 직공을 중심으로 부당 징세에 항거한 직용(織傭)의 변(變)(1601)등이 있다.
  청대에는 대상인이 자본을 축적하여 저장 재벌로 성장하였으며, 상인 무역 조합인 방이 있었다. 청대에는 명대의 자유로운 무역과는 달리 특허를 가진 상인만이 무역을 할 수 있었는데, 이를 공행 무역이라고 한다. 18세기 이후에는 광저우만 개항되기도 했다. 청 왕조가 비록 공행을 통해 무역을 했다고는 하지만, 중국의 상품은 값비싼 것이었으며, 청은 이로 인해 막대한 은을 얻었다. 청대 역시 은을 본위로 하는 세금제도가 만들어졌는데, 18세기 초 세종 옹정제는 정은(인두세)를 지세에 포함시켜 징수하는 지정은제가 그것이다. 지정은제는 세금이 일원화 되었다는 의의와 함께 호적 상에 인구가 급증하는 결과를 낳았다.
  명, 청대에 사회 지도층은 향신(鄕紳) 혹은 신사(紳士)였다. 이는 생원(지방학생), 감생(국자감 학생), 거인(향시 합격자), 퇴직 관리들을 일컫는 말로, 민중교화, 각종 사업, 조세 징수 등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은 한족의 전통문화를 이어가기 위해 초기에는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았다. 성리학의 관학화는 유학의 형식화를 초래했기 때문에 명 중기에는 서민의식의 성장과 함께 양명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양명학은 양명 왕수인이 정리한 것으로, 마음이 즉 이치(심즉리心卽理)라는 내용과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한 실천적인 유학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양명학도 명나라 후기 때는 비판 받았으며 『본초강목』등의 실학이 발달하여 수공업 등에 영향을 끼쳤다. 명대에는 『삼국지연의』, 『서유기』, 『수호지』, 『금병매』 등이 완성되어 서민문학이 발달하였으며(* Tip(추가사항) : 삼국지연의, 서유기 등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원대이고, 완성된 것은 명대이다. 헛갈리지 말자.),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리치에 의해 곤여만국지도와 『천주실의』가 전해졌다. 곤여만국지도는 중국인의 세계관 확대에 기여하였다.
  청대에는 문자의 옥, 금서령 등으로 학문의 현실 비판 기능을 억누르자 고전의 객관적인 해석을 근거로 실증적 연구를 하는 고증학이 발달하였다. 고염무, 황종희, 왕부지 등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강희자전』,『고금도서집성』(* Tip(추가사항) : 조선시대 후기 정조는 사고전서가 곧 출판된다는 말에 사람을 시켜 사고전서를 구입하려고 하였으나 사고전서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고금도서를 사들였다고 한다. 시기상으로 차이가 있으나, 그렇게 정조 때 고금도서가 들어왔다),『사고전서』 등이 출간되었다. 고증학이 형식화하자, 그에 대한 반발로 공양학이 등장하였다. 공양학은 진보적 발전 사관을 가지고 훗날 변법 자강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된다. 청대에는 『도화선전기』,『장생전전기』와 같은 희곡과 구어체 소설인 『홍루몽』, 『유림외사』 등의 서민문화가 발달하였고, 선교사에 의해 서양과학이 전래되기도 했다. 하지만 건륭제 때 크리스트 교리와 중국 전통문화가 마찰이 일었으며, 이를 전례 문제라고 한다. 이러한 전례문제로 인해 더 이상 크리스트교의 포교는 금지되었으며, 청은 쇄국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세계사 흐름에 뒤처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Tip(추가사항) : 명과 청은 크리스트교에 대해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명대의 대표적인 선교사는 마테오리치였으며, 아무런 마찰이 없었다. 반면 청대의 대표적인 선교사는 조선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와 상당히 친분이 있는 인물인 아담 샬로,  전례문제 때문에 청대의 선교사들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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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애국계몽운동

 애국계몽운동은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두고 과거 개화파였던 사람들의 이념을 계승, 발전 시킨 형태라 할 수 있다. 주로 교육과 산업, 언론 활동 등을 통해 국민들을 계몽시키고 실력을 양성하여 자주적인 근대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독립협회는 정치단체이지 애국계몽단체로 분류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애국 계몽단체는 아래와 같다

1) 보안회(1904) :
  일본이 러일전쟁 때 군용지 조차, 철도 부설 등의 구실을 내세우고, 오랜 전통이었던 개간을 통한 경작권(耕作權 : 농사지을 권리, 실질적으로는 소유권)을 획득하려 하자,
농광회사를 조직하여 대항하였다. 보안회의 농광회사는 몇몇 안되는 성공사례이니 꼭 알아두자.


 2) 헌정연구회(1905) -> 대한 자강회(1906) -> 대한 협회(1907)

헌정(憲政), 즉 헌법정치를 주장한 단체다. 고종이 살아있었음으로 그 때 당시의 헌법정치는 입헌군주제를 뜻하는 것이었으며, 헌법을 통한 국민의 민권 확대를 주장하였다. 헌정연구회는 대한 자강회로 이어졌다.

대한 자강회는 고종 강제퇴위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본 통감부의 강제로 해산되었가 대한협회로 다시금 계승되었다.


 3) 신민회(1907 ~ 1911)

안창호, 양기탁 등이 평안도 중심으로 조직한 공화정을 처음으로 주장한 조직이다. 아무래도 그 때 당시에도 고종은 건재했고, 순종 또한 왕위를 이어받은 상황이었음으로 공화정을 주장한다는 것은 대한제국으로부터도 곱지 않은 눈길을 사게 됐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비밀결사로 활동했다고 생각된다. 전국적으로 퍼져 상당한 규모의 단체에 이르르게 된다. 그들은 여타 애국단체와 같이 태극서(점(書店))관, (도)자기회사 등의 회사를 경영하였고, 대성, 오산학교 등을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신민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여타 애국 계몽단체와는 달리 무장독립투쟁에도 상당히 호의적이어서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였다.(의병활동을 직접적으로 지원한 것은 아니다. 착각하지 말자.)

신민회는 1911년, 안중근의 사촌형제였던 안명근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돌아다니다 일본경찰에게 잡혔고(안악사건), 일본은 조작된 총독 암살을 조작하여 평양도에 있던 배일(일본을 배척하는) 지식인들 105인을 잡아들이게 된다(105인 사건). 공교롭게도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민회의 멤버였고, 더 이상 비밀결사의 의미가 없어지자 해산하였다. 신민회는 1911년 해산하였고, 이후에 이루어지는 독립군 기지 건설은 엄격히 말하자면 전(前) 신민회 멤버들이 했다는 것이지 신민회가 직접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었다 하겠다.


14. 일본과 청의 경제 침탈

 1) 무역

  개항 직후의 무역은 크게 3분기로 나눌 수 있다. 개항(18760), 임오군란(1882), 청일전쟁(1894)이 그것이다.


 가) 개항(1876), 시장점유정도 : 일 > 청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을 개항시킨 일본은 우선 경제적인 침략부터 시작하였다. 개항 직후에는 일본인이 활동할 수 있는 범위가 개항장 주변 10리로 제한(거류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로 개항장 주변에서의 경제적 침략이 두드러졌다. 그 당시 일본의 공업이라는 것도 한심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주로 영국산 면제품 따위를 상하이, 홍콩 등에서 영국상인들에게부터 구입하여 국내 시장에 중계하여 팔아넘겼다.(중계무역) 하지만, 일본인들의 활동범위는 거류지로 제한되어 있음으로 일본상인들이 사들인 영국 면제품들은 토착 상인(여각, 객주, 보부상) 등을 통해 국내에 널리 유통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 - 여각, 객주, 보부상 - 조선인 소비자'의 형태를 중계무역이라고 하지 않고, 앞에서 말한 '영 - 일 - 조선', 이러한 형태를 일본이 중계무역 했다고 하는 것이다. 수입품은 면제품이었음으로, 우리나라의 면화생산, 가내 수공업등은 큰 타격입게 된다.
( * 주의 : 지주는 개항이 되었어도 수입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거류지의 일본인들은 고리대나 선대제(혹은 입도선매(立稻先賣 : 곡물 따위가 논에 서있(立)을 때 미리 사들임)을 통해 폭리를 취하고 터무니 없는 가격으로 쌀을 사갔다. 이러한 형태를 '약탈적 무역' 이라 한다.

   

나) 임오군란(1882), 시장점유도 : 일 ≒ 청

조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으로 인해 청나라 상인들의 내지(內地, 조선 내지) 통상이 가능해지자, 중간과정인 객주, 여각, 보부상 따위를 거쳐갈 필요가 없어졌으므로, 객주, 보부상, 여각과 우리나라 고유의 토착상인들은 차차 몰락하게 되거나 그들끼리 힘을 합쳐 근대적 상인으로 도약하게 된다.(황국협회 -> 공진회 -> 황국중앙총상회(1898) 등) 청 상인 뿐만 아니라 일본의 상인들까지도 내지 통상권을 얻게 되는데, 이후로는 청 상인과 일본 상인들의 본격적인 대결구도가 성립되게 된다.

   참고로 황국중앙총상회가 거의 10년 뒤에나 생기게 된 것은 민중의식의 성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다) 청일전쟁(1894) 이후, 시정점유도 : 일본 독점

청일 전쟁에서의 청나라의 패배는 상인들의 대립에도 영향을 끼쳤다. 종이 호랑이임 드러나게된 청나라와 청나라 상인들은 조선에서의 입지가 곤란하게 되어 물러갔다. 삼국간섭에서 고개를 떨굴 수 밖에 없는 일본이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이 때부터 거의 일본의 지배는 굳어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라) 수출입 경향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개항 이후에는 산업혁명의 상징인 대량의 면제품이 일본상인들을 통해 들어오게 된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 쌀, 콩, 쇠가죽과 같은 원자재(1차 산업에서 얻어진 결과물)을 수출하게 되는데, 개항 직후 같은 경우는 쇠가죽의 수출량이 제일 많았다. 하지만 점점 일본이 산업화에 성공해 감에 따라, 수출에 있어서도 일본 자국의 면제품의 비율을 높이고, 영국산 면제품의 비율을 점점 줄여간다. 당시 산업사회로 거듭나고 있던 일본은 저임금 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저곡가 정책을 폈으며, 그러므로 인해 리나라에서 사가는 쌀의 양도 개항 직후와 비교하여 압도적인 차이를 나타내었다.(수출량의 50%, 혹은 그 이상정도.)


2) 이권침탈

이권 침탈은 아관 파천 이후 최혜국 대우 조항의 악용으로 가속화 되었다. 주로 눈여겨 볼 것은 철도, 산림 채벌권, 광산 채굴권 등이 있는데, 철도 같은 경우 철도 부설권을 맨 처음 누가 얻었던 간에 '결국'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고, 산림 채벌권러시아의 독점으로,압록강, 두만강, 울릉도 등의 산림을 채벌할 수 있었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자, 포츠머스 강화조약(조선에서의 모든 이권을 일본에게 양도하고, 신경 끄기로 함.)에서 일본에게 양도하였다. 광산 같은 경우 '노다지'로 유명한 운산 광산 정도를 미국이 관리였다는 것만 알아두면 될 것 같다.


3) 토지 약탈

토지약탈 역시 무역처럼 개항 직후, 청일전쟁 후, 러일 전쟁 기간 3분기로 나눠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개항 직후는 거류지 내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으므로, 거류지 안에 있는 조선인들을 상대로 하여 고리대를 하여, 그 돈을 갚지 못하는 사람들의 땅이나 집 등을 빼앗아갔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인들은 거류지 제한도 없어지고 라이벌이었던 청을 몰아냈음으로 최대의 곡창지역이었던 전주, 나주, 군산 일대에 대규모의 농장을 손쉽게 경영할 수있었다. 러일전쟁 기간에는 철도 부지와 군용지(軍用地, 한일의정서(1904) 내용 中)를 명으로 대규모의 토지를 약탈하였다.


 4) 화폐 정리 사업(1905, 2006 수능)

1차 한일협약으로 고문정치가 시작됨으로써, 일본인 제정 고문 메가타와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이 외교고문으로 일본으로부터 파견되었다. 제정 고문인 메가타는 당시 우리나라의 화폐와 유통 구조가 구시대의 그것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하면서 화폐와 화폐의 유통을근대화 시킨다는 명목으로 화폐정리 사업을 시작하였다.(1905) 화폐정리사업은 당시 유통되고 있던 조선의 상태를 고려하여 백동화를 제일(Not 現 제일, 일본 은행) 은행권으로 교환하였는데, 대부분의 백동화가 상태가 좋지 않다(이른바 악화, 惡貨)는 구실로 교환을 주지 않아, 실질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제일은행권(이른바 양화, 良貨)이 귀해지면서 물가가 폭등하였다(2006 수능). 그와 함께 국내 은행과 각종 민간 회사 등이 모두 도산하기도 하으며 우리나라가 발권력(돈을 뽑아내는 능력)을 상실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경제적인 예속이 심화되었다.


Tip. 고문들

 1.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으로 왔던 고문

  1) 마진창 : 청인

  2) 묄렌도르프 : 청이 파견한 독일인. 외교고문. 후에 한러 통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2. 한일협약(1904)

  1) 메가타 : 일본인, 화폐정리사업

  2) 스티븐슨 : 친일 미국인. 끝내 전명훈, 장일환 의사에 의해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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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수능 9번문제 논란은 뉴라이트 교과서 논쟁의 신호탄이다.

이번 수능에서 정답 오류 시비가 벌어진 문제가 있다. 수능 사회 <정치> 문항인 9번 문항 때문이다. 이 문제가 논란이 된 것은 <전형>이라는 단어 때문이다. 논란의 핵심을 볼까?

이 문제는 대통령제(A)와 의원내각제(B)를 표로 재구성하여 물어본 것이다.

수능 출제 위원들은 <전형적인> 정부를 물어보았기 때문에 정답이 2번이라고 말한다. 학생들도 교과서에 그렇게 나와있기 때문에 당연히 2번을 정답으로 찍었다. 대통령제에서 의회는 각료임명권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예외가 있을 수 있으나, <전형적인> 것을 물어보았기 때문에 2번이 답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상식이 있는 학생들은 3번도 답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전형적>이라는 것은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게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일부 국가의 의원내각제 형태로 보았을 때, 정답이 3번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문제의 답이 2번인가, 3번인가의 논쟁은 <전형적>이 무엇인가에 기준이 달라지면 답이 달라진다.

여기서 의구심이 든다. 그럼, <전형적>인 국가는 어디란 말인가? 출제자와 교과서가 말하는 <전형>은 미국이다.

전형적인 대통령제 국가인 <미국 의회>가 각료 임명 동의권이 있기 때문에, 정답은 2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전형적이란 것은 <미국>을 기준으로 하는 것일까? 세계 대부분의 나라를 기준으로 하는 것일까? 세계 각국의 대통령제는 너무나 다양하다. 그러나 대통령제 체제를 유지하는 유럽과 남미의 국가에서 의회에 임명동의권이 있는 나라를 출제의원들보고 손에 꼽아보라고 하고 싶다.

일단, 우리나라부터 각료 임명 동의권이 없다. 의회가 동의권을 가지는 경우는 <국무총리 비준> 때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교육부 장관을 뽑을 때 국회 동의를 구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국회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청문회를 연다던가, 국정조사로 장관들을 견재한다던가 하는 일 뿐이다.

우리 실정에도 안 맞고, 세계 각국의 추세와도 상관없는 <미국식 대통령제>가 왜 <전형적>인 것일까? 차라리 대한민국의 대통령제를 물었으면 문제 취지라도 이해하겠다. 미국식 대통령제를 우리가 외워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위의 문제에서 각 문항들은 <~ 한다>가 아니라 <~ 수 있다>로 끝나고 있다. 당연 예외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문제를 낸 것이다. 예외가 있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가 예외인데, 뭐가 전형적이라는 것일까?

우리 나라 교과서가 민주화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미국 따라잡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사회 교과서에서 서술하는 정치의 발달 과정은 미국식 정치 과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다. 중학교 사회 교과서 첫 장은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에서 시작한다. 민주주의의 참 뜻이 마치 링컨에서 시작된 것 처럼 이야기한다. 

   고등학교 교과서의 사법제도를 보면 <미국의 전형적 사법제도>를 모델로 하고 있다. 미국부터 주마다 법이 다른데, 무슨 전형을 찾고 있는지 모르겠다. 고등학생들이 대륙법이니, 영국식 해양법이니 하는 걸 알 필요가 있을까? 그런건 학자 여러분... 너희분들이나 공부하세요~~~

   교과서는 학습의 큰 틀만 잡아주고, 최대한 쉽게 적어야 한다. 그리고 교과서는 우리 실정에서 이야기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시작은 <링컨>이 아니라, 광복에서 시작되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 나라 교육철학은?

   독자적 철학이 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대학에서 교육학 수업을 듣다보면 순 <숀다이크, 듀이, 배글리, 헉슬리> 등등 미국 철학자들 이름만 듣다 끝난다. 교육관련 수업을 몇 번을 들었지만, 한국 교육학자 이름이 나오는 경우는, 서울대 교수들이 미국 철학을 한국식으로 재편집했다는 정도에서 그친다. 그나마, 한국 교육철학은 미국 교육철학을 <30명 이상 떼거지 수업을 듣는 한국 방식>에 적응시키는 정도이다. 한국 학생들의 학습 태도와 학습 발달과정은 <피아제> 연구 결과를 놓고 계산한다. 이게 뭔가?

분명 대한민국 공무원 시험을 뽑는 시험인데, 문제를 보니 황당한 경우가 있었다. 법을 물어본다면서 서구식 공법, 사법 얘기만 2/3를 늘어놓는다. 교육을 물어본다면서 서구 교육학자 이름만 끝까지 물어본다. 외국의 사례들은 참고 사례가 아니였던가? 페스탈로찌가 한국 교육을 이끌어가나? 공무원 시험 보시는 분들이 불쌍한다. 대한민국 공무원 시험에 대한민국 이야기가 나오는 분야는 국사와 국어 뿐이다.

광복 60주년인데, 아직 연구 성과가 미흡해서 그렇단다. 무슨 국가의 교육철학이 아직도 미국 철학인가? 학자들이 반세기동안 잠만 잔 것인가?

  세계사 교과서의 절반 이상은 서양 이야기이다. 영국, 프랑스가 세계사의 절반인 것인가? 그나마 역사학자들이 노력해서 <동아시아사> 교과서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럼 뭐하는가? 뉴라이트라는 역사와 상관없는 단체들이 나서서 <친일교과서>를 써야 한다고 현장 교사들을 협박하고 있는데...

사회과 교육의 기본틀은 <교과서>를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옳다. <교과서>에서 미국식 대통령제가 전형이라고 했으니, 답이 2번이고, 예외는 대학가서 생각해라~~~~ 는 따위의 발상 자체가 옳지 않다. 결국, 피해는 2번이든, 3번이든 답을 적은 학생들만 보는 것이 아닌가?

교과서는 국가 정책과 연구하는 학자들의 사상이 담겨있는 책이다. 학자들이 A가 옳다는 입장에서 교과서를 쓸 수 있고, 뉴라이트 같은 단체가 나와서 B가 옳다라는 입장에서 교과서를 쓸 수 있다. 그리나, 학생들은 그냥 교과서가 지정해준 것을 답이라고 찍어야 한다. 현실보다는 교과서가 우선이다.

최근 근현대사 논란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대안교과서>가 인정되어 <수능> 문제로 적용될 때 얼마나 끔찍한 일이 발생할까라는 점이다.

건국대통령인 이승만은 위대하고, 김구는 남북통일을 주장하면서 건국자체를 반대한 빨갱이이다. 일제시대 위안부들은 자발적으로 일본에 봉사한 것 뿐이다. 일제시대덕분에 한국의 근대화가 쉽게 이루어졌다. 4.19는 경제성장을 반대한 몰지각한 학생들의 움직임이다.  - 이런 게 수능으로 나오면 우리는 어떤 답을 찍어야 할까? 교과서가 우선일까, 현실이 우선일까?

이번 수능 논란은 단순한 헤프닝이 아니라, 앞으로 전개된 치열한 <교과서 논쟁>의 신호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반된 입장의 교과서로 <근현대사> 수능 시험을 보는 학생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친일시대를 인정하고 한국사회의 근대화 및 산업화 과정을 우선시 하는 경제학자들의 교과서.

반대로, 민족주의와 민중적 전통 및 역사학계의 자료를 우선하는 교과서

학생들은 두 교과서 중 어느 교과서를 택할지에 대한 자유가 없다. 교육부는 <새로운 교과서>를 선택하라고 각급 학교 교장단에게 압력을 넣고 있다. 역사 교사들과 학교운영위원회는 결사 반대를 하고 있다.

앞으로 수능 근현대사를 선택하는 학생들은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하는 것일까? 교과서가 절대적이라고 믿었지만, 이젠 교과서에게 배신당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다가온다. 이제 교과서를 버리고 직접 사회문화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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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항일 의병 전쟁

항일 의병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각각의 특징과 유명했던 의병장들은 꼭 알아두자. 또한 EBS나 여러 모의고사 중에 활빈당 관련 지문이 나온 적도 있으니 봐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1) 을미 의병(1896.1)

 을미 사변과 단별령에 항의하여 일어난 의병이다. 주로 양반 유생들이 주도하였으며 유인석, 이소응과 같은 의병장들이 대표적이다. 아관 파천(1896) 때 고종의 해산권고로 해산하였다.


2) 활빈당

 동학 농민 운동과 을미 의병에 참여했던 농민들이 의병이 해체되고 난 뒤에 별도로 조직한 조직이다. 이미 양반 유생들은 고종의 해산권고로 집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농민들로만 구성된 단체였다. 주로 농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단체격이며, 반외세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3) 을사 의병(1905)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을사 조약(1905)으로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후에 총독부)를 설치하여 통감정치를 하자, 이에 항의하여 의병이 일어났다. 을사 의병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양반 의병장(최익현)을 비롯하여, 신돌석 등의 평민의병장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이로써, 평민들 역시 의병단체를 만들어 항일 의병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4) 정미 의병(1907)

 헤이그 특사 사건을 일제가 알아차린 이후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키자 민중들의 항일 감정이 극에 달했다. 군대 마저 해산하여, 해산된 군대가 무기 등을 가지고 의병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로 인해 의병은 보다 조직적인 작전 전개가 가능하였으며 화력적인 면에서도 눈에 띄는 증가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의병활동이 극에 달했을 무렵, 각 지방의 의병장들이 연합하여 13도 창의군을 조직하고 서울 진공작전을 실행(1908)하지만, 당시 지위를 맡고 있던 이인영의 부친이 별세하자, 부친상을 치루고 오겠다며 이인영이 떠나버리자 뜬구름처럼 흐지부지 되어버리기도 하였다.


5) 남한 대토벌 작전(1909)

 일본는 남한 지방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던 의병들을 탄압하였다. 대다수의 의병장들과 의병부대가 이 때 일제에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는 등 의병활동은 시련을 겪게 된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의 실질적인 의병활동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의병장들의 대다수가 북쪽으로 향해 만주 등에 거주하면서 게릴라적인 소규모 부대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6) 의병 운동의 의의와 한계

 의병 투쟁은 1920년대부터 주를 이루게 되는 무장 독립투쟁으로의 교량적인 역할을 했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반면, 의병 운동은 주로 그동안 지식층인 유생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행하여졌으며, 그로 인해 봉건적인 계층 구조, 명분에 대해 탈피하지 못한 한계가 있었다. 의병장들 대부분은 거의 유생이었으며, 그들은 신돌석과 같은 평민 의병장들을 거의 무시하다 싶이 하였다. 또한 13도 창의군의 서울 진공작전을 담당했던 이인영 역시 명분에 의해 행동하였으며, 그 결과 의병 활동에 어려움이 생기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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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송(宋 960 ~ 1279)
  당이 멸망하고 5대 10국이라는 혼란을 통일한 것은 후주 절도사를 맡고 있었던 조광윤이었다. 먼저 황제가 된 그는, 당의 멸망이 절도사를 통한 지방 세력의 무력 확장이라고 믿었고 그걸 방지하기 위해 중앙 황제 중심의 문치주의(文治主義) 정책을 폈다. 이는 곧 인재 등용제도에도 영향을 미쳐 황제가 과거를 주관하는 ‘전시’라는 제도가 나오게 되었다. 이렇게 선발된 인재는 황제에게 뽑힌 인재로서, 황제에게 충성을 다했다. 바야흐로 송은 본격적으로 황제가 지배하는 나라가 된 것이다. 또한, 과거를 통해 붙은 관리라고 하여, ‘사대부’라는 새로운 이름의 지배층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송의 문치주의는 국방력의 약화라는 치명적인 결점을 낳았으며, 송은 결국 유목민족으로부터 평화를 사게 된다. 때문에 송은 유목민에 대한 세폐(일종의 세금)라는 엄청난 부담이 지어야했으며, 이를 개혁하기 위해 왕안석이 시역법, 청묘법, 보갑법, 보마법 등을 아우르는 ‘신법’을 발표하였으나, 지배 세력에게 지지를 받지 못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런 와중에 또 한 번 북방 유목민족들이 강력한 군사력으로 화북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들의 군대는 부족중심으로 개편이 되어 언제든지 싸움에 임할 수 있도록 태세가 갖춰져있는 강력한 군대였다.(* Tip : 이는 유목민족의 정복왕조가 모두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처음 화북지역을 차지한 것은 거란의 요(遼 916 ~ 1125)였다. 요나라는 거란족과 한족을 구분하여 정책을 폈는데, 그것을 남면관제, 북면관제라고 한다.
<Tip. 요의 정책은 'ㅛ'와 'ㅕ'의 유사성을 생각해서 암기하자.>
  요를 멸망시키고 중국과 맞닿은 것은 여진의 금(金 1115 ~ 1234)이었다. 금 역시 요와 같이 유목민과 한인을 구별하여 통치하는 이중정책인 맹안모극제를 실행하였다. 또한 금은 송의 황제를 납치하여 송을 남쪽으로 내쫓아버렸다.
  송대에는 드디어 강남의 경제가 화북의 경제를 추월하였다. 비록 농업 부분에서는 소작제도인 지주 전호제가 자리 잡고, 대규모 장원이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대만에서 참파벼를 수입해서 강남에서도 벼농사가 가능해졌다. 또한 비단길을 상실했다고는 하지만, 이젠 중국의 주 수공업품은 도자기로 바뀌었기 때문에, 바닷길을 이용한 무역이 발달하게 되었다. 수공업의 발달은 상공인들의 집주를 야기하였으며, 상업, 공업 도시가 만들어지고, 행(行 : 상인 조합), 작(作 : 공인 조합)이 생겨났다. 화폐 역시 발달하였는데, 교자(북송), 회자(남송)가 그것이다.
  송은
도시 중심의 서민적인 문화가 발달하였다. 무역의 발달로 사대부가 아닌 사람도 부를 축적할 수 있었으며, 평민들은 축적된 부를 통해 문화를 향유하기 시작했다. 떠들썩거리는 무역항과 항구에 붙어있는 도시를 상상하면 되겠다. 이를 와자(瓦子)라고 하며, 와자에선 연극 등의 많은 볼거리가 있었다. 그리고 송대에 와서는 완성된 훈고학을 바탕으로 하여 선종과 도교의 영향을 받은 주자에 의해 성리학이 성립, 발전하였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고, 대의명분을 내세웠으며, 가족중심의 윤리관으로 황제의 독제체제를 지지하였다. 역사서로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이 나왔으며 문학은 서민문학인 사(詞)가 발달하였다.
  송의 가장 큰 히트 상품으로는 3대 발명품인
인쇄술, 화약, 나침반이 있다.
 * 추가사항 : 당 말기 안사의 난과 더불어 송의 건국은 중국사에서 가장 큰 변화로 꼽는다. 앞선 중국의 여러나라들과 송나라를 비교하면서 어떻게 달라졌는지 한번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8) 원(元 1271 ~ 1368)
  원나라는 원래 테무친 칭기즈칸이 세운 몽골제국의 일부였다. 하지만 칭기즈칸이 죽게 되면서 아들들에게 각각 나라를 물려주어 다스리게 했는데, 칭기스칸의 손자였던 쿠빌라이가 금과 남송을 멸망시키고 새운 것이 원이었다(몽골제국은 원과 4한국(汗國)인 킵차크, 일, 차가타이, 오고타이로 나뉘었다). 원은 유목민족이었던 몽골족이 지배층이었고, 그 아래는 행정실무를 담당하는 색목인, 화북지방의 한인(漢人), 남송 사람이었던 남인(南人)으로 구성된 민족 차별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를 ‘몽고인 제일주의’라고 한다. 과거 또한 보지 않았다.
  원은 비단길에는 역참제(驛站制)를 통해 상인들에게 온갖 특혜를 주었고, 임안, 항조우 등에 시박사를 설치하면서, 해상 무역 또한 발전하였다. 유목민족이 원래부터 사용했던 초원길도 많이 사용하였다. 몽골인의 개방적인 성격은 이러한 동서무역의 활성화에 많은 기여를 했다.
  원의 이러한 사회배경은 국제적, 서민적인 문화를 낳았다. 희곡인 『서상기』,『비파기』 등의 원곡(元曲)와 인형극 등의 서민 오락이 발달하였으며, 한족의 민족주의격의 소설인 수호지』,『삼국지연의』의 원형이 만들어졌다. 몽골족이 지배계층이었기 때문에, 몽고 문자인 ‘파스파’어를 사용하였고, 당연히 공용어 역시 몽고어였다. 마르코 폴로는 원을 여행하고 『동방견문록』을 저술하여, 서양 사람들의 동양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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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위 진 남북조(魏晉南北朝 220 ~ 589)
  황건적의 난으로 멸망한 후한이 여러 제후들로 인해 분열되었다가, 적벽대전 이후로 크게 삼국(위魏 촉蜀 오吳)으로 나뉘었다. 이후 소설로 유명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같은 100년간의 전쟁이 있었고, 사마의의 손자였던 사마염이 통일하여 진(晉)을 건국하였다(AD 280, 이를 서진西晉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진의 통일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으며, 한족(漢族)은 북방민족이었던 흉노에게 멸망한 뒤, 양쯔강 이남으로 쫓겨 내려가게 되었다. 남북조는 북방의 유목민의 왕조와 강남으로 쫓겨간 한족이 세운 왕조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일컫는다.
  유목민이 차지한 화북지역은 흉노 이외에도 5가지 민족(흉노, 선비, 갈, 저, 강)에 의해 16개의 국가가 생겨났는데, 다섯 개의 이민족이 16개의 국가를 세웠다고 하여 5호 16국이라고 한다. 5호 16국을 통일한 것은 선비의 북위(北魏)였다(AD 439). 화북을 통일한 북위는 효문제 때 호족의 토지 비대를 막기 위한 균전제와 적극적인 한화정책(漢化政策)을 폈다. 그 결과 북위의 유목민족은 한족 문화에 동화되어 거의 한족화(漢族化)가 이루어졌다. 훗날 수(隋)와 당(唐)을 건국한 사람들도 이곳의 군벌 세력 중 하나였다.
  강남으로 쫓겨간 한족(漢族) 또한 동진, 송, 제, 양, 진의 네 왕조를 거쳤다. 원래 강남은 늪지로 이루어진 곳이 많았기 때문에 불모지와 같았으나, 남북조 시대 이후로는 남하한 한족들에 의해 개발되어 산업이 발달하고 벼농사를 짓기 시작해 인구도 증가하였다.
  남조의 인재 등용은 한의 향거리선제를 보완한 9품 중정제를 시행하였다. 9품 중정제는 지방에 중정관을 파견하여 참신한 인재를 선발하고, 호족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의도와는 반대로 호족이 문벌귀족(門閥貴族)이 되어 오히려 9품 중정제를 통해 관직을 세습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호족은 빈곤한 농민의 토지를 고리대를 이용해 빼앗거나, 불법으로 겸병하여 대토지를 소유하여 권위를 더해갔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여러 왕조들은 귀족의 대토지 소유를 막고 농민을 구제하려는 정책을 내놓았으나 매번 실패하였다.

Tip. 호족의 대토지 소유 억제 및 농민 구제책
위: 둔전법 / 서진 : 점전제, 과전법 / 북위 : 균전제 / 서위 : 균전제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과거 한나라 때 수입되었던, 불교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유목민족과 한족 모두 불교를 보호하고 발전시켰다. 비단길 부근(둔황, 원강, 룽먼)에 석굴사원이 세워진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대에 등장한 문벌귀족으로 인해 지극히 귀족적인 문화가 발달하였는데,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나 4.6 변려체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도교 역시 북위의 구겸지나 진의 죽림 7현의 청담사상(淸淡思想)을 통해 맥을 이어갔다.

 * Tip(추가사항).
  귀족적인 문화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체, ~ 형식의 문화가 발전기 마련이다. 훗날 서민문화, 대중문화가 발전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꺼리김 없는 친근한 표현이 특징이지 않은가?

 6) 수, 당(隨 AD 589 ~ 618, 唐 AD 618 ~ 907)
  긴 분열의 시대는 북위의 군벌 출신이었던 양씨 가문에 의해 수나라로 통일이 되면서 끝났다. 중국을 통일한 문제(文帝)는 중국 최초로 선거제(選擧制)라는 최초의 과거제도를 시행하였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煬帝)는 대운하와 같은 무리한 토목사업과 무리한 대외원정 등으로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하였고, 이것이 농민의 원성을 사서 2대 만에 단명한 왕조가 되었다.
  수의 뒤를 이은 것은 양씨 가문의 외척이었던 군벌 이연(李淵)이였다. 그러므로 당의 전체적인 제도와 관료 등용제도인 과거제와 같은 정책들은 거의 모두 수를 따랐다. 중국의 최고 명군(名君)으로 추앙받고 있는 당 태종(太宗)의 치적(治積)은 ‘정관의 치’라고 불린다. 그 외에도 주변의 유목민족이었던 토번, 돌궐, 위구르를 복속(?)시켜 내외의 안정을 꾀했다. 또한 현종도 ‘개원의 치’라고 불리는 위대한 치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훗날 양귀비와의 관계로 인해 정치가 소홀해지고, 절도사를 파견하여 지방 세력의 힘을 실어주는 등의 실정(失政)을 행해 현종 말년의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현종 말에 터진 것이 ‘안사의 난(755)’이다. 안사의 난으로 인해서, 그동안 당나라를 떠받쳐왔던 율령, 균전제 등이 붕괴하였다. 안사의 난이 몰고 온 여파는 상당한 것이어서, 안사의 난 이전의 당나라와 이후의 당나라는 큰 차이가 나게 된다. 그것에 대해선 뒤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하여튼 당은 안사의 난으로 생기게 된 사회적 혼란은 황소의 난과 같은 농민 반란에 의해 몰락하게 되었다.
  당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문벌귀족이 지배하는 귀족적인 사회였다. 과거를 봐서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능력이 존중되는 사회였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과거는 문벌 귀족 출신의 자제가 더 높은 관직에 올라가는 등용문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당이 탈라스 전투(751)로 비단길을 상실하기 전까지는 비단길을 통한 육상 무역이 발달하였으나, 탈라스 전투 이후로는 바닷길을 통한 해상무역을 주로 하게 되었다. 주 교역품 역시 비단에서 도자기로 바뀐 것도 해상무역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동서양 문물이 오가게 되었으며, 당나라에서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이슬람, 네스토리우스교와 같은 외래종교가 정착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외국풍이 유행하는 국제적인 분위기의 사회가 만들어져갔다. 대운하의 이득을 본 것은 수가 아니라 오히려 당이었는데, 당은 대운하를 통해 강남과 강북 지방의 물자가 이동하였기 때문에,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였다.
  당나라는 기본적으로 수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졌던, 균전제와 그것을 기반으로 한 조용조(租庸調), 부병제(府兵制 : 군을 징집하는 방식, 현재 우리나라가 이를 채택하고 있다.)를 채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사의 난’ 이후로 당의 경제 기반이었던 균전제가 붕괴되고, 귀족들이 소농의 토지를 겸병하여 대토지인 장원(莊園)을 경영하게 되면서, 세금제도였던 조용조는 재산 소유정도에 따라 세금을 내는 양세법으로 바뀌었다. 또한 의무병제였던 부병제 역시 지원해서 군대를 가게 되는 모병제(募兵制)로 달라졌다.
  당에 문화는 앞서 말한 것처럼 기본적이고 귀족적이며 국제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 외에도 당은 여러 가지 중국의 고전문화를 완성하였는데, 3성 6부와 같은 정치제도를 포함해서, 그동안 유교의 학파를 계승하고 있었던 훈고학이 완성되어, 공영달은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였다. 당나라의 문학은 귀족적인 취향만큼 세련되었는데, 이백, 두보, 백거의 같은 당시(唐詩) 작가와 한유, 유종원 등의 고전을 부흥시키고자 한 문자가도 있었다. 당삼채의 등장은 이후 등장할 도자기의 종주국으로서의 중국을 증명해준다. 도교는 왕실의 보호로 발전하였으며, 불교는 선종이 유행(소림사도 이 때 만들어진 것이다ㅎ)하고, 서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승려들이 늘어났다. 『서유기』도 삼장 법사가 이 때 법(法)을 구하기 위해 서역으로 떠난 것이 모티브가 되었다.
  당의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 문화의 근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자, 유고, 불교, 율령은 통일신라, 베트남, 일본, 발해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를 ‘동아시아 문화권’이라고 한다.

 Tip. 당은 시험에서도 많이 다뤄지는 주제이다.
      안사의 난 이전과 이후의 구별, 당의 문화에 대해 숙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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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거문도 사건과 중립화론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으로 청군이 우리나라에 진주하고 청과 일본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당시 청의 외교고문이었던 뭴렌도르프와 러시아 외교고문으로 친러파를 양성하고 있었던 베베르의 건의를 받아들여 비밀리에 러시아와 독자적으로 수교를 하게된다.(1884)
  러시아는 우리나라와 통상 조약을 맺으면서 함경도 경흥을 조차지로 요구하고 정부는 그것을 승락하게 된다. 이로써 러시아의 오랜 바람이었던 부동항의 확보는 이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항상 러시아를 늘 주시하고 있던 영국의 눈이 뒤집어졌고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기에 이른다.(거문도 점령 사건, 1885 ~ 1888)
  이에 부들러와 유길준 등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감안하여 중립화론을 내세웠으나 스위스와 같이 실행되지는 않았다.


대저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중립국이 된다면 러시아를 방어하는 큰 기틀이 될 것이고 또한 아시아의 여러 대국들이 서로 보전하는 정략될 것이다. 오직 중립만이 우리나라를 지키는 방책인데 우리 스스로가 제창할 수도 없으니 중국에 청하여 처리해야 할 것이다. 중국이 맹주가 되어 영국, 프랑스, 일본, 러시아 같은 아시아에 관계 있는 여러 나라들과 화합하고 우리나라를 참석시켜 같이 중립 조약을 체결토록 해야 될 것이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의 이익도 될 것이고 여러 나라가 서로 보전하는 계책도 될 것이니 무엇이 괴로워서 하지 않겠는가.

ㅡ 유길준, 「중립화론」

 


11.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 을미 개혁

 악명높고 출제가 두드러지는 곳이다. 순서, 주체, 개혁 내용들을 반드시 숙지하도록 하자.
 

  1) 동학
 
동학은 1860년 서학에 반발하여 최제우가 유불도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에 있는 민간 신앙과 통합하면서 생겨나게된 종교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서학(西學)에 반대하였다하여 그 이름도 동학(東學)이라 하였다.
  사해 평등주의와 '사람은 곧 한울'이라는 구호 아래 남녀노소의 평등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성리학적 입장을 가진 보수세력의 입장에서 본다면 세상과 백성을 혼란캐(혹세무민)하는 사이비 종교였으므로, 1863년 최제우는 처형당했고, 동학교도들은 탄압받았다.
  하지만 평민들에게 있어서 동학이 내세운 평등 사상은 무척이나 달콤한 것이었기에 몰래몰래 믿어나가다 정부의 탄압이 많이 줄어들었을 무렵, 전에 처형당한 교주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집회를 벌였다.(삼례 집회, 교조신원운동, 1892) 이는 종교적인 집회라 하겠다.
  이듬해 동학교도 이외에도 많은 농민들이 참여한 보은 집회에선 '보국 안민(保國安民, 나라를 구하고 민중을 편한캐 함)', '제폭 구민(除暴求民, 폭정을 없애고, 민중을 구함)' 등의 구호를 내걸며 지극히 사회 개혁적, 정치적인 집회로 바뀌어 나갔다.

 2) 1차 동학 농민 운동(1894)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 중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라.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황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 내몰고자 함이라."            

ㅡ 전봉준의 격문
 

1894년 1월,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 이라고도 불리우는 동학농민운동은 그렇게 시작하였다. 이 운동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부당하고 가혹한 수탈(만세보 등)에 항거하여 전봉준 등이 항거하여 처단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부에서 사건의 해결을 위해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는 이러한 농민들의 항거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전몽준 등에게 돌리자 분노한 동학 교도와 농민들은 민란을 일으켰다.

1894년 3월 남접의 강경한 동학교도(비교적 남쪽이라는 것이다. 호남 등의)들이 운동을 일으켰다. 1월 고부 민란의 정봉준 등의 지도부를 온건히 계승하여 반봉건적인 성격을 띄었다. 그들은 애초부터 한양을 향하지 않고, 세력확장을 위해 남하했다가 다시 북상하여 황토현, 완산을 거쳐 진주성을 점령하였다. 동학교도들이 전주 이씨 종가였던 전주성을 점령하자, 당황한 정부는(당시 왕들이 전주 이씨였으므로) 청에게 군사를 요청하고 5월 5일, 어린이날이 없던 그들은 출병하게 된다. 그에 따라 1884년 갑신 정변 이후 일본은 청과 맺은 텐진조약을 근거로 남자어린이의 날, 코이노보리 등에 두발 뻗고 잘만 놀고 있던 일본군은 청군이 출발한 다음날인 5월 6일에 출정하게 된다. 청과 일본군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자, 정봉준 자신이 구상한 시나리오와 크게 빗나가자 정부와 전주 화약을 체결하고, 폐정 개혁안을 발표하여 그에 따라 집강소를 설치하고 자치를 실시하게 된다.


 1.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2. 탐관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3. 횡포한 부호(富豪)를 엄징한다.

 4.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5.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6.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 갓은 없앤다.

 7. 청상 과부의 개가(改家)를 허용한다

 => 5, 6, 7 반봉건적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 수취제도 문란

 9. 관리 채용에는 지벌(地閥 ; 지연)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10. 왜(倭)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 반일적 성격

12.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分作)한다.

 => 토지 제도 개혁 요구

ㅡ 폐정 개혁안 12조

3) 갑오 개혁, 2차 동학 농민 운동(1894) 을미 개혁(1895)
  그렇게 1차 동학 농민 운동은 막을 내리고 정부는 정치적인 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자체적으로 교정청을 설치한다. 하지만 일본이 경복궁을 둘러싸고 교정청을 폐지할 것을 협박하였다. (일본 경복궁 포위)
  동학 농민 운동이 자체적으로 끝이 나고, 조선정부의 요청을 무시하고 청, 일 양군은 군대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갈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으며, 결국 전쟁이 나기에 이른다. (1894. 6. 23. 청일전쟁)
  이윽고 일본은 교정청을 폐지시키고 군국기무처를 설치시켜 개혁을 단행하도록 한다. (1894. 6. 25. 1차 김홍집 내각, 1차 갑오개혁)
  하지만 당시 일본은 청와 전쟁 중이었으므로 개혁에 대한 간섭도 적어 주체적인 개혁이 가능했다. 그러하여 10년 전의 갑신정변의 내용이나 동학교도들의 요구가 대다수 반영된 개혁이기도 했다.


 1. 이후 국내외 공사(公私)문서에 개국 기원( = 단기)를 사용한다.

  => 청의 종주권 부정

 2. 문벌과 양반, 상민 등의 계급을 타파하여 귀천에 구애됨이 없이 인재를 뽑아 쓴다.

  => 신분제 폐지, 동학 농민군의 요구 반영

 4. 죄인 자신 이외의 일체의 연좌율(連座律)을 폐지한다.

 6. 남자는 20세, 여자는 16세 이하의 조혼을 금지한다.

 7. 과부의 재혼은 귀천을 막론하고 자유에 맡긴다.

  => 동학 농민군의 요구반영

 8. 공사 노비법을 혁파하고 인신 매매를 금지한다.

  => 동학 농민군의 요구반영

 => 1.2.4.6.7.8 봉건적 악습철폐

18, 퇴직 관리의 상업 활동은 자유 의사에 맡긴다.

20. 각 도의 각종 세금은 화폐로 내게 한다.


ㅡ 1차 갑오개혁의 개혁 법령


  나름대로의 개혁은 성사되었지만, 한반도는 남의 나라(청, 일) 전쟁터가 되어버렸다. 이에 동학교와 농민들은 다시 한번 반외세의 깃발하에 모두 모여(남+북접) 운동을 일으켰다.(척왜양창이)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11월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게 되면서 힘을 잃고 흐지부지 되어버리고 만다.

  같은 11월, 갑신 정변에 실패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던 박영효가 일본을 빽으로 삼아 돌아왔다. 김홍집 - 박영효의 온건 - 급진 연립 내각(2차 김홍집 내각)이 구성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박영효가 2차 갑오 개혁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일본의 입김이 어느정도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여튼, 2차 갑오개혁에서는 헌법적 법률인 홍범 14조와 독립서고문, 교육입국조서(2005 수능) 등을 발표하였다.


 

 1. 청국에 의존하려는 마음을 버리고 확실히 자주 독립하는 기초를 확고히 세울 것

  => 청의 종주권 부정.

 2. 왕실 전범을 제정하여 왕위의 계승과 종실, 외척의 구별을 밝힐 것

 4.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모름지기 나누어 서로 혼합하지 아니할 것

  => 왕권 약화, 내각 중심(입헌 군주제가 아니다.)

 5. 의정부와 각 아문의 직무 권한을 명확히 제정할 것

 6. 인민에 대한 조세 징수는 법령으로 정하여 명목을 덧붙여 함부로 거두지 말 것

 7. 조세의 부과와 징수,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이 관할할 것

10. 지방 관세를 빨리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할 것 => 사법권 분리

12.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하는 법을 사용하여 군제의 기초를 확정할 것

 => 실질적으로는 시행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볼 때, 일본이 우리나라가 군제 개혁하는 것을 좋아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1895년 4월, 청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었고,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은 요동 반도와 대만을 할양하고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을 압박하자(삼국 간섭) 12월, 일본은 청에게 요동반도를 반환하게 된다.
  러시아의 이러한 강한 모습을 보고 민씨정권을 비롯한 온건개화파는 청을 저버리고 친러파가 되었고 7월에 새로운 내각을 구성함에 있어서도 친러적인 내각을 구성하였다.(3차 김홍집 내각) 이에, 일본은 자신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하여 친러파의 우두머리격이었던 명성황후를 낭인들을 통해 시해하고 친일 내각을 세우게 된다.(4차 김홍집 친일내각, 을미개혁 : 연호(건양) 제정, 친위대(서울), 진위대(지방) 설치, 태양력 사용, 단발령) 

 4) 동학 농민 운동(1894)의 의의와 한계
  동학 농민운동은 대내적으로 반봉건적인 성격을 띠어 사회체제에 항거하고 갑오 개혁 때 그 뜻이 수용되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반외세적 성격으로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항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근대국가의 모습을 제시하지 못해 미완의 운동으로 끝맺은 안타까운 '운동'이기도 하다. 

 5) 갑오(1894) 을미(1895) 개혁에 대한 평가

  온건개화파 중심으로 정부의 주체적인 근대 개혁이라는 것과 앞서 갑신 정변의 급진개화파나 동학농민운동의 농민층의 주장을 수용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그것 또한 권력을 가진 소수층의 위에서부터의 개혁이었고, 토지 개혁도 하지않아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으며, 일본의 강요 속에 이루어졌다는 씁쓸한 면도 없지 않아 있다.

 
6) 개화 운동의 비교
  공통점 : 신분제 폐지, 인재의 고른 등용, 조세제도 개혁
  차이점 : 재정의 일원화, 반청적 경향(갑신정변, 갑오개혁) 
              토지제도 개혁, 반일적(동학 농민운동)


 7) 아관파천(1896)

  을미개혁엔 태양력과 특히 단발령이 포함되어 있는데, 고종을 필두로하여 머리를 잘리고 그 이하의 양반 유생, 평민을 비롯하여 남자들의 상투를 잘리게 된다. 명성황후 시해와 더불어 엄청난 파장을 일으켜 1896년 1월 을미의병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인 보초가 경복궁을 지키고 있었음에도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하자, 고종은 조선인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독살에 대한 히스테릭으로 일절 가공품은 입에 가까이하지도 않았으며, 그가 오로지 허기를 달랬던 것은 서양에서 수입되어 들어오던 캔으로 포장된 연유 까먹는 것과 생 달걀을 직접 깨뜨려 먹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참한 생활을 하다 그는 결국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을 결정한다.(1896, 아관파천)
  갑작스럽게 러시아 공사관 창문을 통해 나타난 고종은 을미개혁(특히 단발령)의 무효를 선포하고 을미의병의 해산을 권고하자 의병들은 해산하였다. 러시아 공사관에 있으면서 몇몇 이권을 러시아 공사에게 넘기기도 하는데, 이에 관해 최혜국에 관련된 모든 국가가 이권을 빼앗아 가게 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인 침해를 입기도 하였다.


 8) 독립협회(1896 ~ 1898)

  1896년, 서재필이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갑신 정변의 주인공들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던 그 역시 급진 개화파에 속했다. 그는 갑오 개혁이 위로부터의 좁은 개혁임을 반성하고 독립협회(1896 ~ 1898)를 조직하여 민중을 계몽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자유인권 및 기본권 보장을 주장하고 만민 공동회 등을 통해 민중들의 의식을 높이고 정치적 참여를 촉구하기도 하였다. 절영도 조차, 한러 은행 폐쇄 등의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나, 그 대상은 러시아에 한정되었을 뿐, 미국, 일본 등에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역시나 급진 개화파 출신답게 입헌 군주제의 전신격인 중추원 관제(의회 기능정도)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뒤에 나올 광무개혁 이후, 황제제일을 주장하는 광무정권과 정치적인 마찰(경제, 사회적인 마찰은 없었다.)을 이루어 황국협회와의 패싸움을 구실로 해산하게 된다.


 9) 광무개혁(1897)

  드디어 1년의 고요 끝에 그가 돌아왔다.(이렇게 말하고 보니, 무슨 아이돌이 컴백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문무백관과 독립협회의 간청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부터 고종이 돌아왔다. 그가 돌아온 곳은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덕수궁'이라는 이름 자체도 일본의 잔재라고 한다.)으로 러시아 공사관의 바로 건너편이다.(언제든지 도망가기 쉽도록. 전에 경복궁 포위 때 호되게 고생한 고종이기에;;) 환궁한 고종은 원구단(* 참고 : 환구단이라고도 한다. '원구단'도 일본의 잔재라는데. 확실히 내가 생각하기에도, 황제로 즉위한 곳이니 '환구단'이 맞는 말인 것 같다.)에서 황제로 즉위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하였다. (Tip  : 인기만화 「궁(宮)」의 영향으로 대한제국이 입헌군주제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옳지 않다.) 대한제국은 구본신참(舊本新參, 옛 것에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 동도서기와 비슷한 입장이다.)을 중심으로 하는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황제의 전제적인 권한(정치적인 면)만 제외하면 모두 근대지향적인 (경제, 사회)개혁이었다 할 수 있다. 경제면에선 안정적인 조세를 걷기 위해 양전 사업을 실시했고, 지계(地契 : 땅문서)를 발급하여 근대적인 토지 소유를 인정하였다. 근대적 공장과 회사 등도 이 개혁 때 생긴 것이다. 교통, 통신, 의료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앞서 언급한 교육입국조서와 같이 고종은 교육에도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 각종 실업, 기술 학교를 세우고, 유학생도 파견하였다.
  갑오 을미 개혁의 급진성을 비판한만 광무개혁이었지만 역시 황제의 유일한 권한만을 강조하였음으로 복고주의적이고 보수적이었다. 또한 이 시기가 가장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한 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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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임오군란(1882)
  임오 군란은 표면상으로 본다면 신식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대우에 분노한 구식 군인들이 반발에서 빚어진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개화 이전부터 계속 되어오던 개화파와 보수파의 갈등의 하나의 표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낫겠다.


구식군인 : 당신(대원군)이 집권할 때는 이런 일(차별 대우)이 없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

흥선대원군 : 그럼 내가 다 책임질테니 하고 싶은대로 해라.

  위와 같은 뒷이야기가 있는걸 보면,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볼 때 구식 군인과 별기군의 대립과 더불어 그들 배후에 있는 흥선대원군과 민씨정권의 간접적인 대립이라고 볼 수도 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명성황후는 청나라에 군사를 요청하고 멀리 도망가 버린다. 사실 임오군란 자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청나라의 군대가 지금의 용산에 주둔하기 시작했다는 것과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1882)했다는 것이다. 청나라 군대가 국내에 주둔하게 되고 청이 고문을 파견하였으며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으로 내지 통상권과 청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조선에 대한 간섭이 심화되었다.   반면 임오군란으로 인해 피해를 입어 제물포까지 불이나케 꽁무니를 빼버린 일본을 또 우리 정부가 열나게 제물포까지 쫓아가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인들의 자위를 위한 일본군의 주둔을 허용하게 된다. (제물포 조약, 1882)


9. 갑신 정변(1884)
  임오군란이후 청나라의 등에 올라타 권세를 누리게 된 명성황후는 개혁을 중단하고 보수화하게 된다. 하지만 청나라는 전쟁으로 인해 주둔하고 있던 병력의 반을 회수해가고(라도 해도 아직도 서울엔 1500명 가량의 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김옥균은 보수정권을 타도하고 개화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일본의 지원(일본군 150명ㅋ)을 지원받기로 약속하고 우정국 축하연을 기회삼아 정변을 일으킨다.(갑신정변, 1884)   그들은 14개조의 개혁 정강을 발표하여 정치, 재정 근대화를 위해 노력하였으나 일본의 약속 불이행으로 인해 3일만에 정권을 접고 일본으로 망명한다.
  그들의 어설픈 정변은 오히려 청을 다시금 자극하여 청의 내정간섭을 보다 심화하였다. 게다가 급진 개화파의 다수는 해외로 망명하였기 때문에 개화정책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청의 조선 내정간섭이 점점 더 심화되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는 청의 북양대신 이홍장과 정치적인 담판을 짓고 서로의 군대를 조선에서 철수하기로 한다.(텐진조약, 1884)
  갑신 정변은 최초의 근대국가를 향한 노력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후 갑오 개혁에도 이들의 주장이 일부 반영되고, 서재필이 돌아와 독립협회를 조직하는 등 다시금 활발한 활동을 보여 계보를 잇고 이어간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에 의존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했으며 극소수의 급진 개화파들만이 지지를 했을 뿐,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관심조차 갖지 않았을 뿐더러, 토지 개혁에 소홀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14개조 개혁안

1. 대원군을 가까운 시일 안에 돌아오게 하고 청에 조공하는 허례의 행사를 폐지할 것

 => 청의 종주권 부정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할 것

 => 신분제 폐지

3. 지조법(地組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구제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할 것

 => 지조법(地組法)은 토지세(土地稅)이지, 토지 개혁이 아니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날짜를 정하여 합문 내의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 의회적 요소(입헌 군주제적 요소), 최초의 근대적 국민국가 건설에 대한 노력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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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은, 주, 춘추전국, 진, 한, 위진남북조, 수, 당, 송, 원, 명, 청, 현대 중국
중국사는 현대 중국 영토 내에 있었던 국가들에 대한 역사를 일컫는다. 어느 역사든 공부할 때 항상 각 나라의 범위를 나타낸 지도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세계사는 범위가 방대하기 때문에 교과서나 다른 자료 등에서 제시하는 지도는 꼭 눈에 익혀두도록 하자.

1) 주(周, BC 1100년경 ~ BC 770년경)
 주나라는 호경(현재 시안西安)에 도읍하여 세워졌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덕치주의와 천명사상으로 은(隱, 혹은 상商)을 전복시킨 것을 합리화하였다. 가족 공동체에 기반을 두어 예(禮, 예의범절 등)을 중시하였으며, 그러한 영향으로 적장자(장자, 첫째) 중심으로 가계를 이어가는 종법이 발달하였다. 또한 이를 기반으로 주나라만의 영토분할 통치제도인 ‘혈연적 종법에 의한 봉건제도’가 성립하였다. 당시는 청동기 시대였기 때문에 석기나 목기로 된 농기구를 이용하여 경작했다. 때문에 농산물의 많은 생산을 기대할 수 없었다. 정전제는 이러한 이유로 만들어졌는데, 씨족을 중심으로 공동 생활을 하며, 공동 생산을 하는 토지 공(共)개념의 제도가 나타났다. 주로 농경 생산에는 농민과 노비 계층이 종사하였다.

2) 춘추전국시대(春秋 BC 770 ~ BC 403, 戰國 BC 403 ~ 221)
 ① 춘추시대
  사실 춘추전국시대는 주나라 시대로 분류되어있다(동주東周시대라고도 한다. 은을 멸망시키고 호경에 위치한 시대를 서주西周시대라고 한다). 춘추시대의 시작은 북쪽에서 유목민족인 건융족이 침입하면서, 주 왕실이 낙양(현재 뤄양洛陽)으로 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춘추(春秋)’라는 시대 이름은 공자가 쓴 책의 『춘추』에서 유래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주 왕실의 위엄이 어느정도 유지되던 시대로, 궐기한 세력들은 저마다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명분으로 세웠다. 이 때 유명했던 패자(覇者 : 주 왕실을 능가하는 힘을 가진, 춘추시대의 대표국가)로 등장했던 커다란 세력을 가진 나라들을 춘추 오패(五覇 : 제濟 진秦 초楚 오吳 월月)라고 한다. 춘추시대 중후반기부터 철기가 중국에 전래되었는데, 보편화 되는 것은 전국시대부터였다.

 ② 전국시대
  전국시대의 이름은 한나라 때 유항이 엮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하였다. 이 때는 가신과 제후들이 주의 왕실을 완전히 무시하게 되는 때로, 하극상(下極上), 약육강식 등으로 대표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제후들이 봉토로 받았던 토지들은 제후 개인의 국가로써 발전하였으며, 제후들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실력 있는 관료를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등용된 사람들을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하며, 제자백가들의 출현은 사(士) 계층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제자 백가의 대표적인 학파로써 인의(仁義)와 예(禮 : 각자의 역할)을 중시하는 유가와 무차별적인 사랑인 겸애(兼愛)를 주장하는 묵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법치(法治)를 주장하는 법가가 있다. 제후들은 제자백가를 등용하여 군현제와 관료제 중심의 정책을 꾸렸다. 또한  상업과 공업, 농경 등에 큰 변화가 생겨 각자 개성이 뚜렸해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층이 명확해졌다.  
  전국시대 들면서 철기가 더욱 폭넓게 사용되었다. 철기가 활용된 것은 전쟁과 경제 부분인데, 전쟁 부분은 뒤에 진이 통일하는 과정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경제부분에서 철기의 활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철제 농기구와 우경(牛耕)으로 인해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으며, 노동력이 절감되었다. 그로 인해 토지의 사유화가 시작되었고, 공동체 중심의 생활 문화(정전제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 노동체제)가 해체되어 갔다. 대토지 소유자가 늘어났고, 남아도는 농작물로는 서로 교환하고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면서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상공업의 발달은 제철, 제염업의 발달로 이어졌고, 또 동전의 발명으로까지 나아갔다.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시대 때의 동전이 발굴되는데, 이는 중국과 우리나라와의 무역을 증명하고 있다.

3) 진(秦 BC 221 ~ 206)
 비교적 변두리에 위치했던 진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주변에서 활동을 하던 유목민족으로부터 철기를 제일 먼저 수입해 재빨리 실용화에 이룩하였기 때문이다. 진은 유목민의 기마전술과 철제 무기, 법가 사상을 통해 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을 통일한 진 시황제는 중앙집권의 군현제를 실행하였으며, 법가 사상을 수용하여 엄격한 통치를 하였다. 이에 유(儒)학생들은 반발하였으나, 시황제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 : 유교 경전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매장함)를 일으켰다. 사실 시황제의 업적은 분서갱유와 같은 잔혹함 보다 중국을 하나로 만들었던 것에 있다. 그동안 나라마다 달랐던 화폐, 문자, 도량형(추의 무게) 등을 진의 것으로 통일하여 표준으로 삼게 하였다. 또한 지난 전국시대에 나라간의 성벽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으로 보완하여 흉노의 침입을 막는 한편, 흉노를 공격하여 나라의 내외를 굳건히 하였다. 현대의 중국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영토이지만, 진의 통일은 오랜 시간 계속되었던 내란을 종결하고 ‘하나의 중국’을 이룩하였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이러했던 진나라도 대규모의 장성 건설과 엄격한 법의 적용으로 인해 백성들의 불만을 사게 되고, 진승과 오광의 난으로 결국 2대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4) 한(전한前漢 BC 206 ~ AD 8, 신新 AD 8 ~ 23, 후한後漢 AD 25 ~ 220)
 진승과 오광의 난으로 진(秦)이 멸망한 이후, 초패왕(楚覇王) 항우와 한왕(漢王) 유방의 싸움 끝에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한을 건국하였다. 유방은 후에 한고조(漢高祖)로 추대되는데, 한고조는 처음 통치 정책으로 주(周)의 봉건제와 진(秦)의 군현제를 조합한 군국제를 시행하였다. 이는 군사적, 행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왕이 직접 다스리고, 변두리 지역을 측근이나 친인척 등에게 하나의 소국을 만들어주어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써 진(秦) 나라 때 군현제에 불만을 가졌던 지방세력의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지방 곳곳까지 황제의 권위가 닿을 수 있을 만큼 강성한 황제권이 형성되었다고 보기 힘들 것이다. 
  한 고조 이후 한나라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한무제(漢武帝)였다. ‘무제’라는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무제의 업적은 거의 모든 것이 전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우선 무제는 예전부터 중국을 괴롭혀오던 주변에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장건을 통해 비단길을 개척하였으며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진(辰)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이득을 보고 있던 고조선을 함락하였다. 하지만 무리한 대외원정은 국가 재정에 심각한 무리를 초래하였고, 한무제는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금과 철을 나라에서 독점해서 판매하였으며(염철 전매제), 균수법과 평준법을 통해 유통과 물가를 조절하였다. 국가의 경제 개입은 전쟁 수행에 효율적인 재정확보를 꾀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물가가 상승하는 등 사회의 불안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진에서 탄압을 받았던, 유가 사상을 국교로 삼아 유교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한은 외척과 환관들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었으며 끝내 외척이었던 왕망에 의해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인 신(新)이 들어섰다. 왕망은 토지를 국유화하여 주(周)나라의 토지제도였던 정전제를 부활하고자 하였으며(왕전제王田制), 노비 매매를 금지하는 등 평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이미 향거리 선제로 굳건한 지배층으로 성장한 호족(豪族)의 반발을 샀으며, 파격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경제개혁은 오히려 농민들에게 부담을 안겨주어 신(新)은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신이 무너지고, 호족이 광무제(光武帝)를 추대하면서 후한(後漢)이 만들어졌다. 후한은 전한과 달리 호족의 연합정권으로, 전한에 비해 황제권이 빈약하였다. 반초의 서역 원정으로 다시 비단길을 회복하였으나, 외척, 환관, 관료의 대립으로 점점 나라가 쇠약해졌다. 그래서 태평도나 오두미교와 같은 도교를 기반으로 한 민간 신앙이 널리 퍼졌고, 끝내 태평도가 중심이 된 농민 봉기인 황건적(黃巾賊)의 난으로 인해 후한 역시 문을 닫게 되었다.
  한은 관료를 뽑을 때 향촌에 있는 유능하고 청렴한 인재를 추천받는 방식으로 관리를 등용하였다. 이를 ‘향거리선제(鄕擧里選制)’라고 하는데, 기본적인 개념은 위와 같은 것이었으나, 현실에 적용되었을 때는 관료의 친인척을 등용하는 등의 문제가 생겨났다. 그래서 지방에 어느 유력한 집안을 중심으로 관료가 배출되었으며, 이러한 지방 세력가를 호족(豪族)이라고 한다.
 한의 문화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으로 중국 고전 문화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한문이 정비된 것도, 채륜이 최초로 종이를 만든 것(한지)도, 또한 유교 사회가 성립된 것도 이 때이다. 유교와 사학이 접목된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의 시초로, 이후 역사서들의 근본이 되었다. 반고의 『한서(漢書)』도 한나라 때 나왔다.
 종교도 많이 발전하였다. 도교의 기초한 태평도나, 오두미교의 민간신앙이나, 후한 초기에 비단길을 통해 전해진 대승불교도 있었다.
 한대의 유교는 진(秦)나라 때 분서갱유를 당한 관계로 예전에 불타 없어진 경전을 정리하기 위한 훈고학(訓詁學)이 발달하였다.

Tip. 기전체(紀傳體)
 본기(本紀), 지(志), 연표(年表),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의 이름을 따서 기전체(紀傳體)라고 하였다. 각각 기록한 것이 다른데, 본기는 왕의 업적이나 행동을, 지는 제례나 천문, 문화를, 연표는 역대 왕조의 변천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열전은 위인의 기록을 전한 것이다.
ex.1) 삼국지(三國志)는 삼국(위魏 촉蜀 오吳)의 문화를 서술한 것
ex.2) 관우전(關羽傳)은 관우의 행동과 업적을 기록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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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이상한 수능 시험

8시 40분 시험인데, 8시 11분에 오면 집으로 돌려보내는 미친 시험

대한민국은 참으로 신기한 나라다.

수능이란 시험이 대한민국 국민 자격 시험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 대학에 못가면 인간 취급 못받는다... 수능 망치면 평생에 한이 된다... 인간처럼 살려면 재수, 3수, 4수도 불사할 수 있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모든 학생들을 국영수 실력으로 등급을 쪼개서 시험본다는 것도 짜증나는 일인데, 더 짜증나는 기사가 있다. 재수생이 늦게 도착해서 시험장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기사다.

수능 시험은 8시 40분에 시작한다. 참 이른 시간이다. 다른 국가시험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시험을 시작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질릴 정도로 많은 문항을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찍 시작했는데 오후 6시가 넘어야 시험이 끝난다.

시험은 8시 40분에 시작하는데, 입실 시간은 8시 10분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국가에서는 8시 10분에서 1초만 늦어도 돌려보낸다. 난 이 규정이 이해가 안된다.

8시 40분에 시험이 시작하는데, 8시 10분까지 입실하라는 것은 <권고 규정>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차가 막히거나 개인적인 일이 생겨서 8시 10분까지 못온 학생들은 8시 20분에, 혹은 8시 30분에 올 수 도 있다. 늦게 와서 주의사항을 못듣거나 마음의 준비를 못하는 것은 본인이 입는 피해이다.

본인이 입는 피해를 왜 국가에서 규정하려고 할까? 8시 15분에 도착하면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날까?

수능을 못본 학생이 불쌍하기도 하지만, 그 아래 달린 댓글들이 더 짜증난다.

수능같이 중요한 시험에 지각할 정도라면 문제가 있는 거라고... 준비성이 없냐고... 미리 고사장 확인 안했느냐고...

그건 아니다. 8시 40분 시험인데 8시 11분에 도착한 학생이 중요한 시험을 망칠 정도로 큰 잘못을 한 것인가? 설마 국가에서는 수십만 학생들 중에서 차가 막히거나, 피치못할 사정으로 1-2분 늦을 수 있는 학생이 있을 거라는 것을 예상하지 못할까?

더 한심한 건 중요하다는 시험일수록 더 규정을 철저히 해서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준다는 점이다. 수능이나, 공무원 임용 시험, 행정고시, 사법고시 등은 정말 시간 엄수한다.

그런데, 그 외 국민들의 관심에서 좀 먼 시험은?

전혀 아니다. 공무원 진급 시험을 볼 때나 교원 임용시험을 볼 때 시험 시간 준수는 권고 사항일 뿐이다. 국가고시는 보통 9시에 시험을 보기 때문에 8시 30분(혹은 8시 20분)까지 입실하라고 한다. 하지만, 그건 시험보는 사람들의 편의를 생각해서 정해준 시간이다. 마음의 준비도 하고, 커피도 마시라는 시간이다.

시험 시작 전에만 들어오면 된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주지 않도록 조용히만 들어오면 되고, 주의사항을 못듣거나 해서 입는 피해는 개인의 피해이므로 다시 설명해주지 않는다.

왜 수능 시험에는 엄격하게 시간 제한을 하고 교문을 닫아 버리는 걸까?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수능이라는 시험을 개인의 미래를 결정할 정도로 큰 시험으로 만들어 놓고, 국가가 가혹하게 학생들의 미래를 내친다. 지각한 학생들이 10명이든, 100명이든 그들의 오랜 준비는 시작도 하지 전에 쫑난다.

학교에서 9시 수업인데, 8시까지 와서 미리 준비하고 있어라.. 라고 했다. 그런, 미리 수업을 준비하라는 것뿐이다. 그럼 일있어서 8시 50분에 온 학생은 집에 돌려 보내는가? 그게 학교인가?

지각한 학생은 한 두대 머리를 쥐어박긴 해도 그걸로 퇴학시키지 않는다. 8시까지 오라는 건 공고 사항이지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할 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왜 우리 나라의 교육은 학생들이 원하지 않는 지식을 멋대로 머릿속에 넣어 버리곤, 그 지식을 평가받겠다는 학생들마저 말도 안되는 규칙으로 내치는가?

그 학생들이 1-2분 지각해서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논리는 도무지 말이 안된다. 규정 시간을 봐주면 조금 늦게 오는 학생들이 속출할 것이라는 논리도 말이 안된다.

1-2분 늦은 학생들이 <나 지각했어요>라고 광고하면서 들어올 것 같은가? 수능 시험에서?

규정 시간을 봐주면 학생들이 대거 지각한다고? 수능 같은 중요한 시험에 빠듯하게 8시 39분에 올 학생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혹시 또 몰라서 8시 10분으로 정한거 아닌가? 8시 10분은 시험 시작 시간이 아니다.

규정 시간을 철저하게 단속하지 않는 일반 국가 시험에서도 수험생들은 시험 시간보다 30분 정도 일찍 와서 기다린다. 본인의 시험을 망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딱 맞춰 오는 바보는 없다.

수능에 미쳐서 국가와 학부모들이 너무 경직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8시 40분에 보는 시험인데, 8시 11분에 왔다고 학생을 버리는 국가 시험... 난 이 나라가 미쳐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시험이 20분도 더 남았는데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의 심정을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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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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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명의 성립
 크게 문명의 성립 조건으로는 계급의 출현, 청동기의 제작, 문자의 사용을 꼽는다. 중, 고등학교에서 다루는 세계사에서는 세계의 4대 문명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을 다룬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큰 강에 위치해 있으며, 매번 하천이 범람할 때마다 치수(治水)를 위해 대규모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하천 하류에 위치한 이러한 문명들은 하천 하류의 비옥함을 이용하여 농업생산을 하였기 때문에 생산력이 올라가고, 인구가 증가하였다. 또한, 하천을 이용한 교통으로 상업 활동과 문화를 교류하였다.

2) 4대 문명
 ① 중국
  중국의 황하문명은 기원전 5000년 경 황하의 황토 지대를 중심으로 나타났다.신석기 시대에 나타난 문명은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전기는 양샤오 문화라고 하여, 채도(彩陶, 색칠한 도기)를 사용하였으며, 주로 황하 중상류에서 있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후기는 황하강 하류에 위치하여 흑도(黑陶, 검은 도자기)를 사용하였는데 이를 룽산 문화라 한다.
  본격적으로 문명이 시작된 것은 은나라(殷, 혹은 상商)부터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16 ~ 11세기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원래는 신화 속의 나라였다가, 은허가 발견되면서 역사로 편입되었다. 정치는 왕이 제사장을 겸하는 신정(神政)이었으며, 왕위가 부자 세습되고, 순장을 하는 것으로 보아,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는 여러 부족이 연맹한 계급사회였으며 또한 씨족 사회이기도 하였다. 청동기를 사용하였으며, 점을 친 이후에는 한자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을 남겼다. 은력(殷曆)이라는 태음력의 달력을 사용하였다.
  은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주나라(周)는 기원전 11세기 ~ 8세기까지 이어졌다. 원래는 춘추전국 시대의 혼란도 주나라 내에서의 분쟁이긴 하지만, 여기서는 춘추시대 전의 주나라를 다루도록 하겠다. 먼저, 주가 은에 비교되는 점은 덕치주의(德治主義)와 천명사상(天命思想)의 정치적 철학이다. 은을 멸망시킨 주는 대의명분으로써 덕으로써 다시리는 덕치주의와 하늘이 내린 명분을 따른다는 천명사상을 내세운 것이다. 하지만, 주의 가장 큰 정치적 특징은 봉건제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줄 곧 서양의 계약적 봉건제도에 비교된다. 서양과 달리 주의 봉건제도는 혈연적 종법(宗法)에 의한 것으로, 황실의 종친에게 봉토를 하사하고 그곳을 다스리도록 하는 것인데, 그 대가로 군역과 공납을 받았다. 이는 혈연으로 맺어진 왕과 제후가 반목을 일삼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왕과 제후의 혈연적 관계는 전보다 소홀해져,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비극을 낳았다. 사회는 장자 중심의 종법(위의 혈연적 ‘종법’할 때 그 종법이다.)이었고, 예법이 발달하였다. 정전제(井田制)라는 공(共 : 함께 쓰는)개념의 토지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논이나 밭을 우물 정井자와 같이 9개로 나눠 경작하는 것을 뜻한다. * 수정사항 : 덕치주의, 천명사상의 부연설명, 공개념의 정의 부연설명

 ② 인도 문명
  처음 인도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에 드라비다 족에 의해 인더스 강 유역에서 발달하였다. 이는 하리파, 모헨조다로와 같은 계획도시나, 청동기, 채색도기, 상형문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드라비다 족은 계획도시 내에 도로와 하수도, 목욕탕 등의 거대 벽돌 건물을 건축하였으며, 가축(물소, 염소, 코끼리 등)을 키우고, 농경(밀, 보리 등)을 했다.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가 기록된 점토판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무역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했던 인더스 문명도 기원전 1500년경에 인더스 강 유역을 점령한 중앙아시아 출신 아리아인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다. 이들은 철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브라만교를 만들고, 계급제도인 카스트제도를 통해 드라비다족을 지배하였다. 자연신을 믿는 아리아인들은 그들의 기나긴 원정에서 겪었던 자연의 신비와 경의를 기록한 서사시베다』가 브라만교의 경전으로 엮어졌다.

 ③ 메소포타미아 문명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니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인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서 시작했다. 메소포타미아는 ‘두 강 사이’라는 뜻이다. 개방적인 지형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무역이나 문화교류가 손쉬웠으나, 그만큼 왕조의 교체도 빈번하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시작은 수메르 인이 도시국가를 건설하면서 시작하였으며, 뒤이어 기원전 2350년 경 아카드 인이 통일 왕국을 수립하였다가 다시 아무르 인이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국하고 기원전 1800년경 함무라비 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이때 함무라비왕은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을 만들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주의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이 법전을 통해 계급분화에 따른 신분에 대한 법의 차별적 적용을 엿볼 수 있다. 후에 아시리아에게 멸망하여 통합되었다.
  또한 메소포타미아는 개방적인 지형으로 인해 현세적인 종교가 발달하였다. 길가메시의 서사시에 나오는 ‘지금을 즐겨라’라는 말은 너무나도 유명한 것이다. 또한 지구라트라는 커다란 신전이 있어 신정(神政)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이며, 점성술이 발달하였다.
  그들은 잦은 교역으로 실용적인 문화가 발달하였는데, 쐐기 문자와 그를 기록한 점토판이나, 태음력, 60진법을 사용하였다.

 ④ 이집트 문명
  앞서 언급한 메소포타미아와 달리 상당히 폐쇄적인 지형으로 빈번한 왕조 교체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줄곧 통일왕조가 들어섰다(고故 왕조 → 중中 왕조 → 신新 왕조). 이러한 자연환경은 종교관에도 영향을 주어 폐쇄적인 다신교가 성행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파라오, 피라미드, 사자의 서 등이 그것이다. ‘사자의 서’와 피라미드 안은 온통 상형문자로 장식되어있다. 혹은 이러한 상형문자를 파피루스에 기록하기도 하였다. 또한 미라를 만들기 위해 해부학이 발달하였다.
  나일강이 주기적으로 범람하여 비옥한 토지가 유지되었으며, 고대 그리스인은 이것을 ‘나일강의 선물’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나일강의 범람은 이집트의 측량술을 발전시켰고, 10진법, 태양력 등의 과학기술을 낳았다.

Tip. 위의 4대문명 중 유일하게 태양력을 쓰는 문명은 이집트였다. 정리해보면
 태음력 : 은력(은나라), 메소포타미아 문명
 태양력 : 이집트 문명

⑤ 고대 소아시아
  서아시아라고도 한다. 이곳에서 다룰 곳은 크게 세 군데이다.
  먼저 히타이트는 오리엔트 최초로 철기를 사용한 국가이다. 철제 무기와 전차로 주변 지역을 정복하였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철기 제조법이 전파되었다.
  페니키아는 해안에 위치한 도시국가로 주로 해상무역에 종사하였다. 이들을 통해 유럽과 서아시아, 이집트의 문물이 오가곤 하였다. ‘문명의 전달자’라는 칭호가 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카르타고와 같은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알파벳의 기원인 표음문자를 사용하였다.
  팔레스타인 지방에 위치했던 헤브라이는 다윗과 솔로몬 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국교인 유대교는 훗날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에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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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0. 마찬가지로 여기서는 고등학교 과정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역사의 분야가 아니라 고고학적 분야라 학계의 유행에 맞춰나가지 못하는 면도 없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역시 제가 고등학교 때 공부했던 여러 자료들을 통해 만들고 있음으로 교과서에 큰 개편이 가하지지 않는 이상 특별이 틀린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근현대사 정리에서 언급한 것처럼, 만약 제가 서술한 것과 다른 필자분들이 서술한 것이 서로 다르다면, 다른 필자분의 서술을 우선순위로 쳐주시기 바랍니다. 시험볼 때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으나, 대학 이상에서 '제대로된 공부'로 말하자면, 상식 수준에 머무르는 것들이거나 혹은 전혀 판이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 역사 인식

역사는 그 사실을 인식하는데,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사실로서의 역사’와 또 하나는 ‘기록으로서의 역사’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로서의 역사’는 말 그대로 역사 자체를 객관적인 사실로 인식한다. 즉, 역사 서술에 있어, 그것을 기록하는 역사학자는 자의적인 해석 등을 함부로 곁들여선 안되며, 역사는 현재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 인식은 근대 사학의 아버지라 일컫는 랑케에 의해 제창되었다. 여담이지만, ‘근대’라는 것은 ‘과학적, 객관적, 이성적’인 사고와 또 그러한 행동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그들은 그렇게 주장하였다.).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오랫동안 내려온 역사 해석의 방식으로, 현재까지 있었던 사실 중에 역사적 가치 있고, 후세에 교훈을 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일에 대해, 역사가가 선별하여 기록하고,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현재 교육과정에서의 역사도 이러한 견해를 차용하고 있다. 이는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대표되는 견해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장점이 있는 관점임에는 틀림없지만, 어느 정도 역사왜곡을 용인한다는데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한다.  

Tip.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 역사의 예

나는 오늘 밥을 먹었다. -> 사실로서의 역사

나는 오늘 맛있는 밥을 먹었다 -> 기록으로서의 역사


정보와 통신의 발달많은 분야에 영향을 주었다.

       사실                         기록


2) 인류의 출현과 구석기 시대

원인(猿人) 화석의 발견은 진화론의 근거로써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선 최초의 인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이다. ‘남방의 원숭이’라는 이름에서처럼,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아프리카 최남단 쪽에서 발견되었다. 약 300만 ~ 150만 년 전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되며, 최초로 직립 보행을 하였다. 자갈돌 석기를 사용하였다곤 하지만, 그다지 크게 다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직립한 인간’이라는 호모 에렉투스는 하이델베르크, 자바, 난티엔, 베이징에서 각각 발견되어 그 지명이 붙여졌다(하이델베르크인, 자바인, 난티엔 인, 베이징 인). 이를 통해 그들은 아프리카를 떠나 유라시아로 활동범위를 넓혔으며, 과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도구가 발달하여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구석기 시대의 특혜를 받기 시작한 것도 이들부터이다. 이때부터 한반도의 구석기 문화의 시작이라고도 한다. (즉 한반도의 구석기 지도는 일본이나 중국과 연결되어 있다)

호모 사피엔스는 ‘슬기로운 사람’이라는 뜻으로, ‘네안데르탈 인’이라고 불린다. 그런 만큼, 구석기 시대의 문화를 굳혀간 사람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이들은 양날면 석기와 같은 정교한 도구를 만들 수 있었으며, 종교 관념이 생겨나고, 그로 인해 사람이 죽으면 매장하였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현생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흔히 말하는 ‘크로마뇽인’, ‘그리말디인’, ‘산둥인’도 이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4 ~ 3만년 전에 등장하였으며, 발달된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로 인해 도구가 다양해졌다. 사냥을 위해 잔석기와, 이음도구가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이 그린 동굴 벽화(쇼베, 알타미라, 라스코 동굴 벽화)와, 풍만한 여인상(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조각하여 사냥감의 번성과 성공적인 사냥을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나타냐고 있다.


3) 중석기 시대

당연히 세계사 교과서에선 다룬 바가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국사 교과서에선 우리나라의 중석기 시대에 관해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그 이유를 증명할 고고학적 사료가 빈약하기 때문인데, EBS 수능 특강 같은 경우, 국사에서도 중석기 시대를 다루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이 정리하도록 하자.(마침 내용도 많이 없다.)

중석기는 구석기와 신석기 사이의 기간을 뜻한다. 약 1만 년 전 빙하기에서 얼음이 녹기 시작하여 날씨가 따뜻해짐에 따라, 큰 동물이 사라지고 몸집이 작은 동물이나 어류가 많아지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인류는 새로운 석기를 만들 게 되는데 그것이 잔석기와 잔석기를 활용하기 위한 이음도구이다. 돌창, 돌화살, 슴베찌르게 등이 이에 속한다. 국사 교과서에선 주먹도끼와 슴베찌르게가 같은 크기인 양 사진에 제시하고 있지만, 사실 둘의 크기는 상이하며, 주먹도끼가 훨씬 크다. 슴베찌르게는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것 같다. 이 때 이후로는 한반도와 중국, 일본이 바다로 인해 분리 된다


4) 신석기 시대

 기원전 8000년 경에 일어난 변화는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생활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버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농경과 목축이 시작된 것이다. 농경으로 인해 인구가 증가하였고, 이를 ‘신석기 혁명’ 혹은 ‘농업 혁명’이라고 하며, A. 토플러는 이를 ‘제 1 물결(The First Wave)'라고 하였다. 농경의 시작으로 인해, 인류의 생활양상도 많이 변화하였다. 구석기 시대의 이동, 채집 사회였던 것에서 정착, 농경 사회로 바뀐 것이다. 이들은 간석기를 이용하여 농작물을 수확하였으며, 수확한 농작물들은 토기에 보관하였다. 또한, 농경이 가능하기 위해 강변 등지와 바다에 살면서 이음도구를 통해 사냥과 어로 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가락바퀴나 뼈바늘을 통해 의복이나 그물을 제작하였으며, 움집에 살았다. 혈연을 중심으로 한 씨족으로 된 부족 사회로, 족외혼을 하였으나, 아직은 평등한 사회 계층을 유지(* 주의)하였다. 애니미즘, 영혼, 거석, 조상 숭배나 샤머니즘, 토테미즘 등의 종교의식도 이 때 생겨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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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0. 다시 한 번 시작하며ㅡ
  올해도 수능이 끝났습니다. 수능이 끝났음에도 수능대비용으로 정리하는 것처럼 덧없고 부질없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군입대를 앞둔 대학생이며, 현재 활동하시는 분들께도 공부가 미치지 못합니다. 더욱이,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란 일부를 추려내고 몇몇 사항을 정리하고 그 인과관계를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서술한 내용과 히스토리아의 다른 필자분께서 집필하신 내용이 다르다면, 다른 필자분의 의견을 좇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등학교, 특히 수능에서만 통용되는 '시험대비용'에 불과하며 다른분들이 공부해서 작성한 것과는 그 질에서 비할바가 못됩니다. 이 점을 유의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어린 나이에 왕에 즉위한 고종 대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그 당시 상황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데, 국내적으로는 세도정치로 인한 왕권 약화와 그에 따른 조세 제도의 문란(삼정의 문란)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고 국외적으로는 이앙선이 출몰하여 민심은 동요케 하고, 천주교가 확산되어 성리학적 세계관이 흔들리는 등, 혼란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먼저 그는 폭넓은 인재 등용과 세도 정치의 중심이었던 비변사를 축소하게 되면서 세도 정치를 혁파하였고, 재상 회의기구였던 의정부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법전을 편찬(대전 회통)하고 경복궁을 중건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좀더 쉽게 이해를 하기 위해, 세도 정치를 혁파하고 왕권을 확장시킨 것을 정리한 것을 대전회통이라고 생각하는게 좋다.) 당시 무차별적으로 농민들의 땅을 합병하고, 세금도 내지 않았던 서원을 철폐하고, 각종 삼정의 문란을 개혁하면서 민생 안정을 꾀하였다.


 Tip. 삼정 개혁 : 전(田)정, 군(軍)정, 환곡(環穀) 개혁

 전정 : 양전, 양안 사업(토지 조사), 토지 겸병을 통한 개혁

 군정 : 호포법(號~, 집집마다 군포를 내도록 하는 법)을 통해 양반에게도 군역 부여

 환곡 : 환곡제를 폐지하고 양심있는 양반의 개인 창고(사창)에서 곡식을 꾸도록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원납전(願納錢 : 양반들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해서 내는 돈)을 강제적으로 징수하고 당백전의 무리한 발행으로 인프레이션을 유발하였다. '경복궁 타령'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노동력의 징발 또한 가혹하여,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Tip. 인민들의 반대
  
양반이 반대한 것 : 서원 철폐, 호포제, 원납전

농민이 반대한 것 : 당백전, 노동 징발


2. 통상수교 거부 정책과 양요 
  순서, 인과 관계, 관련국(중요), 지리적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1) 병인박해(1866) 
  러시아의 강력한 남하 정책으로 위기를 느낀 흥선대원군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에게 러브콜을 신청하였으나, 이를 프랑스 선교사들이 무시를 했다. 러브콜의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흥선대원군은 이로 인해 기존 세력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함으로써 프랑스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참고로 말하자면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절실한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 수정사항)

 2) 제너럴 셔면호 사건(1866)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들어왔다. 물이나 식량을 구걸하는 등의 연극을 통해 평양에 들어왔지만, 시내를 향해 공격하자 이에 박규수가 제너럴 셔먼호를 불질러 버렸다.

 3) 병인 양요(1866)
  대동여지도를 통해 서울로 곧바로로 가는 길을 알게된 프랑스는 강화도를 통해들어왔다. 문수, 정족 산성 등에서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내쫓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강화도를 통해 들어와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장서들을 쌥쳐가서 현재까지 외교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4)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충남 덕산(예산)에 위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5) 신미양요(1871)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뒤늦게 알고서는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의 보복을 한 사건이다.  그들 역시 대동여지도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왔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당시 미국과 조선은 압도적인 화력차이가 났고 미국은 대포 몇 번 쏘다가 반응이 없어서 그대로 돌아갔다는 말이 있을정도이다.

 
6) 척화비
  이래저래 서양에 대한 안좋은 이미지를 갖게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 거부(소위 쇄국정책)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하게 된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수호하고 주체성을 지켰다는 것은 높이 평가되어 지지만, 그만큼 근대화와 세계화를 지연시키기도 하였다.


3. 강화도 조약(1876)
  최익현의 도끼 상서로 실각하게된 흥선대원군의 바톤을 민비가 이어받아 민씨 정권을 수립하였다. 통상수교 거부 정책 및에서 억눌려왔던 개화론이 박규수 등을 필두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위로부터 원샷 개혁(메이지 유신) 성공한 일본이 예의를 지키지 않는 투로 외교문서를 보내자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이에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한론(征韓論 : 한반도를 정복하자는 이론) 내세우기 시작한다.(원래는 신생 일본의 발전 발판으로써 한반도를 정복하려고 하였다.) 곧 일본이 운요호 사건(1875)을 꼬투리 잡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조 일 수호 조규, 1876)가 맺어지게 된다.

 주요 조항 분석

1관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 침략을 쉽게 하기 위해 청의 종주권을 부정

5관 조선은 부산 외에 2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왕래 통상함을 허락한다.

  => 본래 부산(동래)는 왜와 통상하던 항구였으므로 경제적 항구였던 부산러시아의 
        
남하 견제를 위해 군사적 목적을 띈 원산의 개항,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인천항을 개항하므로써
       
서울에 직접적인 정치적 간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7관 조선은 일본의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가한다.

   => 연안의 자원, 항로 확보와 유사시 효율적인 작전을 전개하기 위함이다.

9관 양국 관리는 약국 인민의 자유로운 무역 활동에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 더 많은 물량을 가진 일본 상인에게 유리

10관 일본 인민이 조선이 지정한 각 항구에서 죄를 범한 경우 일본 관원이 심판한다.

   => 치외법권(영사 재판권)을 인정하였다. 대표적인 불평등 조항

 * 주의 : 강화도 조약에는 최혜국 조항이 없다


부속 조약

1) 조일 수호 조규 부록

 4관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간행이정을 10리로 제한한다 => 거류지 제한

 7관 일본 국민은 본국에서 사용되는 화폐로 조선 국민이 보유하고 있는 물자와 마음대로

 교환할 수 있다 => 일본의 화폐 유통 허용하여 경제적 침략을 받게 된다.


2) 조일 통상 장정

 제 6조 조선 항구에 머무르는 일본인은 쌀과 잡곡을 수출할 수 있다.

  => 양곡의 무제한 유출을 허용하게 된다(훗날 방공령으로 방어)

 제 7조 일본 선박은 선세를 납부하지 않으며, 수출입 상품에도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 자국 산업을 보호 불가(마치 현재 FTA라고 보면 됨.) 


4. 다른 나라와의 수교

 1)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제 2차 수신사로 다녀온 김홍집 전한 황쭌센의 「조선책략」에 의해 맺어진 조약이다. 청은 자신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종주권)을 과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주선하였다. 사실 청의 본 뜻은 청 - 조선 - 미국의 한 축을 구성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고, 확대되어가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견제라 할 수 있다.


 주요 조항 분석

 제 4조 (전략) 미 합중국 국민이 조선에서 조선 인민을 때리거나 재산을 훼손하면

        (중략) 미 합중국 법률에 따라 체포하고 처벌한다 => 치외법권

 제 14조 (전략) 본 조약에 부여되지 않은 어떠한 권리나 특혜를 다른 나라에 허락할

        때에는 자동적으로 미국 관민에게도 똑같이 주어진다.

         => 최혜국 대우, 아관 파천 이후 이권침탈에 악용되었다.

 

  그 외

  거중 조정 조항 : 위험할 때 서로서로 도와준다.

  => 형식적인 조항이다. 이후 일본과 미국 사이에 맺어진 가쓰라-테프트 밀약에서
     
정면적으로 위반된 조항이기도 하다.

 2) 한러 통상조약(1884)
  조선 정부는 국내에서 청, 일의 간섭이 점점 더 심해지자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다. 때마침 러시아는 외교 고문인 베베르를 파견하여 친러 세력을 확장하고 이윽고 러시아와 독자적으로 수교를 맺게 된다. 그 결과 러시아는 함경도 경흥에 조차지를 확보하였다.


5. 외교 사절
  민씨정권은 개화한 이후 개화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주변국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여 신 문물과 신 제도를 수용하였다. 에는 영선사를, 미국에는 보빙사를, 일본에는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공식적인 외교사절로 각각 귀국 후 보고서를 작성하여 올렸다. 하지만 형식적인 보고서에 실망한 고종은, 밀서를 내려 비밀리 조사 시찰단(신사 유람단)을 파견하여 일본 근대화에 대한 다향한 의견을 수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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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한국 사회 이야기

수능을 거부했다는 것은 만용일까, 용기일까?

수능이 끝났다.

수능은 <국가의 대사>이다. 난,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입 시험에 온 국가의 관심사가 쏠리는 나라... 수능이 인생을 결정한다는 문구.

<오늘 하루가 당신의 일생을 바꿉니다.>

수능이 끝나고, 고등학생들에게 격려의 글이나 남길까 하고 관련 카페와 블로그들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유독 눈에 띄는 기사가 있다. 수능을 거부한 고등학생?

나에게 관심은 수능보는 날, 수능을 보지 않고 입시교육 철폐를 외치는 학생에게 집중되었다. 관련 기사도 많고 사진도 많았다.

 

얼마나 입시제도에 대한 스트레스가 쌓여있으면 고 3이 수능일날 거리로 나와 시위를 하고 있을까? 나는 그 학생이 대한민국 입시제도의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관련 글들을 찾아보면서 놀라게 되었다. 난 당연히 그 학생의 행동이 용기 있다라고 말하는 글들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많은 블로그 기사들의 초점은 그게 아니였다.

<대단한 용기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수능을 포기해야 했을까? 다른 날에 시위하면 안되나?>라는 글도 있었고, <부모가 너희를 가만 놔두었냐>는 글도 있었다. <시위하는 사람들의 수능 점수는 몇 점이길래...>라는 댓글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의 인식은 <수능>과 <입시>제도의 대안이 없는데. 저런 시위가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는 회의론이었다.

슬프다.  얼마나 수능이라는 교육제도에 시달렸으면, 이런 말까지 하게 될까? 한국의 입시 교육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입시의 피해자인 대한민국 청소년과 성인들이 왜 그렇게 말해야 하는지, 현실이 슬프다.

<입시 제도>에 대안이 없기 때문에 <무책임한 시위를 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대안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당장 서점에 가 봐라. 한국 입시제도의 역사부터, 입시제도의 문제점, 세계 각국의 입시제도와 대안을 논의한 책들이 한 책장 가득 있다.

입시제도에 대안이 없다고 말하면서 <수능을 포기한 여학생>에게 수능 점수 몇 점 나오니? 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본질과 다른 공격이기 때문이다. 

교육에 관심을 갖는 것은 대한민국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의 의무이다. 국가에 의해 의무 교육받을 권리를 받은 이상 자신과 후대를 위해 교육에 관심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정부의 방침은 <입시>가 당연히 있어야 한다는 관점에서 모든 교육행정을 기획해 왔기 때문에 교육의 <기본틀>을 다시 짜는 일에는 관심 자체가 없다. 학무모들의 관심은 자녀들이 입시교육의 틀 안에서 살아남아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지, 교육의 대안 어쩌구 하는 것에 귀 기울일 시간도, 열정도 없다.

즉, 지금의 문제는 대안의 부재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대안>이 없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관심이 적다는 것을 반영한다.

예전에 서울대 총장님께서 서울대를 평준화하고 대학원 중심의 교육체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한마디 던졌다가 <보수단체>들의 못매를 맞으신 적도 있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이상한 논리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분위기에서 뭘 바꾸겠다고 혼자 튀면, <따> 당한다. <교육은 학력이며, 인재는 학문적 지식이다.>라는 명제를 대부분이 인정한다. 왜냐면, 그렇게 교육받아왔기 때문이다. 말로는 창의적 사고를 이야기 하면서 국영수과사 음미체도기가... 뭐 과목이름 셀 수도 없이 많은 지식을 머릿 속에 주입시킨다.

그렇게 많이 공부한 학생들인데 일본의 독도 망언,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는 학생들이 많지 않다. 딱 한시기 대입 논술 때만 빼고....

세계화 시대 어쩌고 말하는 뉴라이트들이 힘을 얻는 현 정부에서 <학생들을 이해해 주세요...>라고 말하면 <빨갱이 취급>을 당할지도 모른다. 왜냐면, 그들은 한국 사회의 발전 원동력이 국가 산업 체제의 발전 과정과 연관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오랜 세월 <발전>의 논리에 종속되어 온 교육을 <학습자> 중심으로 바꾸자고 말하는 것이 21세기가 된 이 시점에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은 왜일까?

난, 새로운 교육에 대한 <대안>이 없어서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식>의 문제이다. 사람들은 한국 사회에도 <대안적> 교육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 아니, 관심이 없다.

입시와 전혀 상관이 없는 교육을 하는 학교들이 우리 사회에는 상당히 많이 존재한다. <대안학교>라고 불리는 학교들은, 우리 나라의 교육 과정체계와 다르게 <그들이 옳다>라고 생각하는 교육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인식은 사뭇 다르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안학교? 장애우들이나 문제 있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아냐?> 라고 말한다.그러나, 수많은 대안학교들이 정상적인 아이들을 정상적으로 모집하여 독특한 <교육철학>을 가지고 교육한다는 것은 모르고 있다. 정부로부터 인가받은 학교도 있고, 특성화 학교도 있지만 대부분은 비인가 학교들이다. 그나마 노무현 정부로부터는 꽤 많이 인정받았지만, 현 정부는 공교육과 다른 방식의 학교들에게 냉정하기만 하다.

내가 생각하는 교육의 문제는 <대안>의 부재가 아니라고 본다. 전 세계에 수많은 국가들이 있고, 수많은 교육철학이 있으며, 수많은 교육제도가 존재한다. 한국 교육제도가 나아갈 길이 무엇인가를 다룬 논문은 셀 수도 없이 많으며, 그것을 쉽게 풀이한 책들이 시중에 많이 있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보려 하지 않는 <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먹고 살기 바쁜데 무슨 관심을 가지며, 우리 아이가 급한데 무슨 10년뒤의 교육을 논한단 말인가? 여고생이 수능 날, 시위를 하고 있는데 <니 인생 어떻게 할래?>라는 걱정부터 드는 것은, 한국 사회의 교육제도가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그 믿음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깨지는 것일까? 그 믿음만 깰수 있다면, 우리 사회의 교육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난 정부의 교육관계자들이 무능해서 교육제도가 개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가 교육부 장관을 한다해도 지금과 다른 교육철학으로 칼질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어디서 어떤 교육제도를 내놓아도 교육부장관은 돌맞는 자리이다. 내신위주의 학교교육 정상화 방안은, 내신을 위한 사교육을 부추킨다. 논술위주의 사교력 강화 방안은 논술 과외가 성행하게 된다. 학원이 아닌 학교에서 받는 보충수업 강화 방안은, 아이들을 새벽에 학원가는 파국으로 몰았다.

뭘 해도 안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입시>라는 틀은 불변한다는 모두의 믿음 때문이다. 머릿속에 하나라도 더 <지식>을 집어넣는 것이 <경쟁력>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론은 <입시>의 폐지 뿐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게 가능할까? 수백 수천개의 대안을 내놓아도 우리 국민들의 반응은 한결같다.

<경쟁이 없다면 어떻게 발전이 가능하겠어?>

이러한 인식은, 건국이후 한국사회는 무한 경쟁과 산업화의 논리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뉴라이트같은 경제 우선주의 집단이 등장해서 경쟁을 부추킨다.

물론 경쟁은 성장의 밑거름이다. 그러나, 그 경쟁이 단순한 <지식>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교육행정고시에 합격한 엘리트 공무원이, 30년이상 근무한 현장 교사보다 교육을 더 잘알고 있을까? 교육부 장관에 교사 출신이 오른 적은 없다.

모든 것은 <지식>으로 평가한다. 수능은 학생의 창의적 사고를 테스트한다고 하지만, 실제 테스트하는 것은 <지식의 활용능력> 뿐이다. 지문을 읽고 가장 올바른 <사실과 논리>를 찾아내는 것만이 <능력>이다.

한국 사회는 <교육은 가난의 탈출구>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집의 아이가 부자가 되고 출세하는 길은 <공부해서 대학가는 것>이다. 개천에서 용났다라는 말도, 교육이 신분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사회가 경제 성장을 겪는 동안, <교육>은 개인이 희망을 갖는 힘이었다.

어렵게 살았던 과거 세대들은 물론이지만, 지금의 신세대 부모들까지도 그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도 교육이 출세의 바탕이 될까?

지금의 교육은 돈놓고 돈먹기이다. 돈이 많을수록 더 많은 과외비용과 유학비용을 투자할 수 있고, 질 좋은 교육에 투자할 수 있다. 돈이 없다면 있는 돈을 교육비로 돌려 투자해야 한다. 부모들은 투자가 성공을 낳는다는 공식을 잘 알고 있기에, 없는 돈도 만들어서 교육에 투자한다.

사실, 돈 많은 집 아이가 더 잘 살게 되는 것은 교육사회학에서도 인정하는 공식이다. 그러나, 부모들은 생각한다. 우리 자식만큼은 그 공식을 깨고, 비좁은 명문대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고... 주변의 일화를 보면 실제 그런 예들이 꽤 있다. 그러나, 실제 여러 조사에서는, 명문대 생들의 재산과 부모의 직업군이 비명문대의 그것보다 훨씬 월등하다고 한다.

어느 날 부터, 대학은 투자의 성과물이 되었다. 학생들은 그 투자 결과에 만족하기 위해 피터지게 공부한다. 꿈이 뭐냐고 묻는 것은 형식적이다. 어느 대학, 어느 과의 커트라인에 맞추느냐에 따라 투자 비용이 결정된다. 물론 학생들은 그 안에서도 자신의 꿈과 열정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자신의 능력과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그 노력하는 과정은 너무나 가혹하다. 그리고, 그 가혹한 시련을 모두 학생과 학부모에게 떠 넘기고 있다.

누군가 말한다. 군대가서 배우는 것도 있듯이 학창시절의 고난이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그 시간에 학생들이 한번 더 꿈을 꾸고, 한번 더 친구들과 추억을 만들고, 한번 더 관심있는 철학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보다 100배 더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앞으로도 한국 사회의 <교육철학>은 당분간 바뀌지 않을 것 같다. 입시제도는 <경쟁> 체제를 지켜나갈 것이고, 수능 때는 국방부 비행기도 움직이지 말아야하는 일들이 반복될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바뀔 것이다. 지금의 문제는 <대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바뀌지 않을 거라는 <인식>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

어느 날, 더 이상은 안되겠다. 도무지 못살겠다. 바꿔야겠다 라고 생각하는 날이 오면 한 순간 확 바뀌지 않을까? 오바마가 미국 사회에 불가능할 것 같은 충격을 준 것 처럼 말이다.

홧김에 주저리 주저리 논리도 없는 글을 적었다. 하지만, 한국의 교육을 보고 있자면, 수능 때 학생들이 시위 표지를 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자면, 너무 서글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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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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