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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

(답변자료실) 소유권상의 사전과 수조권에서의 사전을 구분하기 수조권에서의 사전에 대한 해설 1. 질문답변자료 - 공전, 사전, 민전이라는 용어의 문제 간만에 질문답변자료를 올려보네요. 경준님이 말하신 공전, 사전 등 수조권 용어에 대한 내용 몇가지 정리해 드립니다. 경준님이 임용고시를 준비하시는 분이라, 제가 이해하고 있는 개념보다는 시험에 나올 수 있는 개념으로 말씀드려야 할 것 같네요. 몇가지 개념들을 덧붙여서 설명해볼께요. 틀린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주시고, 개인적인 글이라는 것도 염두에 두고 읽어주세요. 다 읽기 귀찮으시면, 필요한 부분의 번호만 읽으세요. 2. 수조권이라는 것의 개념 수조권이 처음 시작된 것은 신라시대 녹읍부터입니다. 그러나, 교과서적으로 말하면, 신문왕 때 관료전 부터라고 하죠. 교과서에 맞추어야 하니깐 관료전부터로 설명하겠습니다. 수조권.. 더보기
신문왕의 전제왕권 3 - 토지제도를 정비하다 신문왕의 전제왕권 3 - 토지제도를 정비하다 이번 장에서는 신문왕의 왕권 강화책 중에서 토지제도를 다루어보겠습니다. 토지제도 역시 신문왕의 라는 맥락에서 이해하면 쉬울 듯 싶네요. 지금까지의 포스팅에서 의 정의를 권주 1인의 독재정치 확립이라는 기존의 논의를 버리고, 로 이해했습니다. 관점의 차이에 따라 다른 전개가 있을 수도 있으니, 주의하면서 읽어주세요. 1. 관료전을 지급하고, 이후 녹읍을 폐지하다 신문왕 7년 5월, 교를 내려 문무 관료전을 차등있게 지급하다. 신문왕 9년 정월, 교를 내려 내외관의 녹읍을 혁파하고, 매년 조를 차등있게 주었는데, 이것을 영구히 법으로 하다. 성덕왕 21년 8월, 백성들에게 정전을 지급하다. 경덕왕 16년, 내외 관료들의 월봉을 중지하고, 녹읍을 부활하다. 위 사료.. 더보기
신문왕의 전제왕권 2 - 중앙집권화를 위해 귀족권을 억압하다. 신문왕의 전제왕권 2 - 중앙집권화를 위해 귀족권을 억압하다. 이번 파트부터는 통일신라 전제왕권을 완성한 신문왕에 대한 포스팅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로 나누어 다양한 각도에서 포스팅하겠습니다. 신문왕을 자세히 포스팅하는 이유는 신문왕 자체가 통일신라의 문물을 정비하고, 완성한 사람이므로 신문왕을 로 하여 통일신라의 전성기 체제를 바라보면 이해가 쉽기 때문입니다. 이번 장에서는 신문왕기의 정치사를 정리해 봅시다. 1. 전제왕권의 성립 배경 지난 장에서 전제왕권을 정의내릴 때, 국왕의 1인 독재권이 아닌 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럼 이러한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이 성립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삼국통일에서 그 핵심 배경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삼국통일기 신라는 가 계속되었습니다. 고.. 더보기
신문왕의 전제왕권 1 - 집사부 체제를 완성하다 통일신라시대와 신문왕의 전제왕권 1 - 집사부 체제를 완성하다 이번 파트부터는 통일신라 전제왕권을 완성한 신문왕에 대한 포스팅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분야로 나누어 다양한 각도에서 포스팅하겠습니다. 신문왕을 자세히 포스팅하는 이유는 신문왕 자체가 통일신라의 문물을 정비하고, 완성한 사람이므로 신문왕을 로 하여 통일신라의 전성기 체제를 바라보면 이해가 쉽기 때문입니다. 그럼 시작해보죠. 1. 통일이 되면서 가 강화되다 신라가 삼국통일이 된 것은 무열왕, 문무왕기를 거치면서입니다. 실제 나당전쟁후의 676년 삼국통일은 문무왕기에 이루어졌습니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완성하면서 그 아들인 신문왕은 이라는 2가지 과제를 안고 등극하였습니다. 신문왕은 먼저 체제가 발전해오던 기존의 신라 제도를 확고히 합니다... 더보기
통일신라의 정치사에 대한 개관 통일신라의 정치사에 대한 개관 통일신라에 대한 구체적인 포스팅을 하기 전에 통일신라시대에 대한 개관을 해보겠습니다. 1. 전제왕권이 성립하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면서 겪은 가장 큰 변화는 국가 운영 체제와 영토의 팽창입니다. 삼국통일은 곧 영역의 확대 뿐 아니라 인구,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또 통일로 인하여 유민 세력에 대한 처우 개선, 군사력의 확보, 정치적 안정의 추구, 반신라세력에 대한 탄압 등 국가적 과제가 많았습니다. 즉, 국가적으로 팽창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과제들을 해결할 정치적 역량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라의 왕권은 이러한 새 시대의 과업을 를 통해 효율적으로 해결하였습니다.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충신의 왕으로서 새 시대를 위한 체제 개선을 .. 더보기
한국사에서 중세는 언제 부터인가에 대한 논쟁 사료 분석 한국사에서 중세 시대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사료들 1. 통일신라가 중세이다! 1. 신라초기 읍락에는 호민이 산다. 하호라 불리는 자들은 모두 노복이다. 제가는 별도로 사출도에 산다. 대가는 모두 일을 하지 않는다. 하호는 노복으로서 부세를 공급해야 한다. 순장으로 죽이는 자가 수백에 이른다. 2. 지증왕 : 명을 내려 순장을 금지하였다. 전대의 왕이 죽자 남녀 오십인을 순장하였는데, 이 때 금지하였다. 주군을 나눠 농사를 권장하였고, 우경이 시작되었다. 3. 신문왕 : 7년 5월 교를 내려 문무 관리들에게 관료전을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 이 기록들은 모두 통일신라시대부터 중세가 시작되었음을 증명하는 .. 더보기
우리가 완전히 잘못알고 있었던 고대 식읍과 녹읍의 개념 정리 우리가 잘못알고 있던 고대 사회에서의 식읍과 녹읍제도 1. 고대 사회에서 식읍이란 무엇인가? 식읍이란, 전쟁 등을 통하여 공이 있는 자에게 내린 토지를 말합니다. 설명하자면, 왕실의 성원, 대공신 등 아주 소수의 일부 공훈자들에게 특별 급여로 땅을 지급하는 것을 말하죠. 땅을 지급한 대신 왕실을 번병하여 지키고, 국왕에게 충성하라는 의무를 부여합니다. 즉, 식읍은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부여된 땅입니다. 식읍으로 받은 땅에서는 인민, 토지 등을 포괄적으로 지배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광역 지배가 허용된 것이지요. 사실 식읍은 실제 땅을 내려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초기 국가시대에 소국의 족장들에게 원래 영토의 기득권을 허용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원래 소국 점유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양도한 것으로 .. 더보기
통일신라 시대의 불교를 총론 형식으로 총정리해 보겠습니다. 통일신라의 불교 사상 이번 장에서는 통일신라에 대한 불교사상을 호국불교의 이념과 대중불교의 이념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중간에 다룬 원광, 자장 대안, 혜숙, 원효와 의상은 이야기는 각 인물 각론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고, 통일 신라 불교의 개념만 다뤄 보도록 합니다. 1. 초기의 불교 : 호국 불교의 이념 신라의 불교는 호국 불교의 성격이 상당히 강합니다.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면서 불교식 왕명을 사용한 신라에서는, 진흥왕 대에 불교 교단을 정비하면서, 불교 교단을 국가 행정 구역과 일원화 시켰습니다. 마치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교구를 로마 행정 구역과 일원화 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인하고 세계종교로 전파한 것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동양에서의 종교와 행정구역 일원화는 서구와 같이 와 교.. 더보기
김흥돌의 난과 관련된 사료 김춘추가 진골계통으로 즉위했다면, 어떤 계통인가? 신문왕 즉위년 8월 16일에 왕은 교서를 내리어 가로되,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은 옛 성인에 좋은 규정이요, 죄 있는 자에게 벌을 주는 것은 선왕의 아름다운 법이다. 과인이 조그만 몸과 적은 덕을 가지고 큰 기업을 승수하여, 식사도 폐하면서 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면서 신하와 더불어 국가를 편안케 하려 노력하는데, 상중에 난이 서울에서 일어날 줄을 뉘 생각하였으랴? 적괴인 흠돌, 홍원 등은 그 벼슬이 재능으로 높아간 것도 사실상 왕의은혜로 올라간 것이지만, 시종을 삼가거나 부귀를 보전치 못하고 불인과 불의로 위복을 작하고 관료를 모만하고 상하를 속고 포악한 마음을 드러내어 흉사한 자를 불러들이고 근수와 교결하여 화가 내외에 통하고 같은 악인들.. 더보기
삼국통일 후 민족융합정책 삼국통일 후 민족 통일 정책과 삼한 일통의식의 표현 문무왕이 고구려의 반란 무리들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관인을 보내 지키게 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왕의 관작을 박탈하고, 당시에 당의 경사(京師)에 있던 왕의 아우 우요위원외대장군임해군공(右饒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 인문(仁問)을 세워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 유인궤(劉仁軌)로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摠管)을 삼고,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으로 부관을 삼아 군사를 발하여 신라를 토벌하게 하였다. (《三國史記》7, 新羅本紀7 文武王 14年) 처음에 신라는 고구려·신라와 경계가 들쭉날쭉 혼란하여 혹은 서로 화친하고 혹은 서로 노략질하였는데, 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