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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

만파식적 만파식적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요 성은 김씨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를 위하여 동햇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 절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려 하여 이 절을 지었으나, 역사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역사를 마쳤는데, 금당 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다. 이것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은 대왕암(大王巖)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感恩寺)라 이름했으며 후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현대(利見臺)라 한 것 같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파진.. 더보기
통일신라의 국학 제도 국학 국학(國學)을 설치하고 경(卿) 1인을 두었다. - 삼국사기 8권, 신라본기 8, 신문왕 2년 6월 - 국학(國學)은 예부(禮部)에 속한다. 신문왕(神文王) 2년에 설치하였다. … 교수하는 법은 주역(周易)·상서(尙書)·모시(毛詩)·예기(禮記)·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문선(文?BR> ?으로 나누어 학업을 닦게 하였는데, 박사(博士)나 조교(助敎) 1인이, 혹은 예기·주역·논어(論語)·효경(孝經)을 가르치고, 혹은 춘추좌전·모시·논어·효경을 가르치며, 혹은 상서·논어·효경·문선을 가르쳤다. … 혹은 산학박사(算學博士)나 조교 1인을 명해서 철경(綴經)·삼개(三開)·구장(九章)·육장(六章)을 교수케 하기도 한다. 모든 학생의 관등은 대사(大舍) 이하 무위(無位)에 이르기까지 하며, 나이는 15세에서 3.. 더보기
신문왕 대 일통삼한의식의 형성 일통삼한의식의 형성 왕은 군신과 더불어 의논한 후에 당의 조칙에 답하였다. 생각건대 선왕 춘추는 자못 어진 덧이 있었고, 더욱이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일통삼한을 하였으니, 그 공적을 이룩한 것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12년조- 사료해석 : 통일신라시기부터 진정한 민족의 형성이라고 보는 이유는 통일신라시대에 의식이 싹뜨기 때문입니다. 일통삼한이란, 이전 3국이 각각 분립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가진 것과 대비되어지며 드디어 우리 민족이 역사적인 관점에서 하나라는 의식을 스스로 자각하게 되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