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앙의 변법운동

1. 변법운동의 배경

변법운동의 배경은 15,16장에서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상앙이 다른 나라보다 변법을 더 강력히 추진해야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진나라가 서방의 오랑캐로 불릴 정도로 낙후된 국가라는 점이었죠. 진은 서방 끝에서 시작되어 중화문화에서 상당한 변방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진에게도 큰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중원의 치열한 전쟁에서 벗어난 지역이었다는 점과 위수분지를 중심으로 한 천연의 요새이자, 곡창지대였다는 점입니다. 상앙은 진의 잇점을 살리고, 진의 부국강병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구귀족과 구체제를 모두 없애 버리고, 진의 잇점을 실릴수 있는 효율적인 제민지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진이 외진 곳에 있다는 것은 다른 국가의 눈치와 강압을 피해 부국강병정책을 마음껏 펼칠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 진이 변법을 시도했을 때, 주변국의 침입은 거의 없었으며, 진의 전쟁은 진이 원할 때 원하는 국가와 동맹을 맺고 했다는 점도 특이합니다. 보통 진의 외교책을 먼 나라와 동맹을 맺고 가까운 나라부터 제압해가는 <원교근공책>이라고도 하죠.

2, 상앙의 1차 변법

상앙의 변법은 2차례에 걸쳐 각각 당면한 목적을 가지고 시행되었습니다. 상앙의 1차적 변법 목적은 종래 구귀족을 일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귀족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진 주나라 종법제도의 파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개혁은 말 그대로 주나라의 혈연의식에 기반한 종법원리를 철저히 부수어 모든 사회 조직을 재편하기 위함입니다. 일단 상앙은 각각의 호와 민들이 상호 감시하는 십오제와 연좌제, 그것을 위한 사전조사인 호적작성을 통해 씨족공동체적인 읍제질서를 철저히 파괴하고 구귀족의 특권을 없애버립니다. 귀족공동체적인 사회 조직인 국가 행정조직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또 분가정책을 통하여 가족들을 다른 호로 분리시키는데, 이것은 더 많은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농업생산력 극대화를 위해 철저한 중농정책을 펼침과 동시에 상업은 규제하는 억상정책을 시도합니다. 농업이란 가장 효율적인 생산수단이나, 상업이란 생산된 물품을 분배하는 것일 뿐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상앙의 변법에서 구귀족들이 가장 많이 반발한 것은 군공수작제입니다. 전쟁에 나가 공이 있는 자들에게 <작>을 내린다는 이 제도는, <작위>와 그에 따른 <예법>이란, 귀족에게만 있다는 주나라 제도의 근간을 통채로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평민들도 능력이 있으면 <예법>이 없어도 <작위>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3. 상앙의 2차 변법

상앙의 1차 변법이 기존 <종법제도 파괴>였다면, 2차 변법은 파괴되어 임자가 없는 모든 사회질서를 군주에게 돌리는 정책이었습니다. 정의를 내리자면 <군현제적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제민지배체제의 완벽한 확립을 통한 왕권의 신성화>가 그 목적이었죠.

단 분가정책은 더욱 강화됩니다. 아예, 부자지간, 형제지간에도 같은 집에 있지 못하도록 하여 분가된 호의 수를 늘리고, 세금원을 많이 확보합니다. 군공수작제도 더욱 확대합니다.

1차 변법과는 달리 2차 변법에서는 일정부분 상업도 인정합니다. 농업외에 상업에서 걷는 조세도 국가 수입원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믿음으로, 도량형을 통일하고 국가가 무역을 규제하면서 이득을 얻는 정책을 실시합니다.

또 1차 변법으로 파괴된 씨족적 사회질서에는 군현제적 질서가 침투합니다. 군, 현에 따라 인두세와 호등세, 토지세를 부여하여 국가가 직접 인민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4. 상앙의 시대 휴경농법이 시작되었는가, 휴경농법이 사라졌는가의 논쟁

상앙의 변법에서 한가지 이슈가 되는 것은 휴한 농법의 문제입니다. 상군서의 제원전을 보면, 상앙이 <제원전>을 설치했다고 나옵니다. 문제는 원이 휴한농법을 상징하는 글자라고 할 때, 제라는 글자가 <제정>인가, <제거>인가의 논쟁이죠.

제를 제거라고 보면 휴한농법이 이 때부터 페지되어 연작상경을 했다는 뜻이 되는데, 당시 농업기술로 매년 농사를 짓는 연작상경은 조금 무리입니다. 비료도 없구... 제를 제정이라고 보면 이 당시부터 휴한농법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즉, 땅의 지력을 생각하여 서양 중세의 3포제 처럼 일정한 땅을 쉬게 해주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다수설입니다.

또 하나의 논쟁은 천맥을 열었다라는 뜻의 <개천맥>이라는 단어입니다. 천맥을 정전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때, 여기서 개를 <열다>로 해석하면 이 때부터 <정전제>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면 서주부터 시작된 정전제를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 상앙의 변법이념과는 조금 안 맞는 듯 합니다. 개를 <파괴하다>로 해석하면, 정전제를 파괴하고 토지 사유제가 시작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상앙의 변법 내용으로 보았을 때 후자가 다수설입니다.

5. 상앙 변법의 성공원인

상앙 변법의 성공원인 중 가장 큰 것은 법가주의적인 상앙의 무대포 개혁을 왕이 적극지지했다는 점입니다. 상앙의 변법은 왕이 살아있는 한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변법이 가장 철저한 법가주의적으로 시행되어 반대파의 주장을 묵살하고, 구귀족을 철저히 제거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으로 진나라는 어느 나라 못지 않은 강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그 결과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는 나라로 역사에 이름이 남게 되었습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춘추전국시대에 등장한 <국>의 개념을 심화해보자.

1. 국이란 무엇인가?

앞에 중국사 12장에서 은-주-춘추시대까지의 지방체제와 국, 도, 비의 개념을 심층 분석하였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이 중 현재 국가의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 <국>의 개념을 자세히 정리해 보도록 하죠.

국이란 원래 초기 씨족사회 및 군장사회에서 <족읍>이라는 독자적 취락을 기본으로 하던 공동체 사회를 말합니다. 주나라 시기 봉건제도에서는 이 <국>이라는 것은 왕이 하사한 봉토의 개념으로 제후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던 곳이었죠. 그러나 사회 경제가 발전하고, 특히 철기 무기와 농기구가 등장하면서 국은 이제, 하나의 독립된 거대한 세력으로 발전합니다. 이 국이 주왕실의 <직할지> 수준에 맞먹는 생산력과 무기기술 단계에 들어서면 점차 독립하게 되는 것이지요.

은, 주 시기의 도시국가 수준에서의 <국>은 4개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도>에 사는 사람들은 <도성>이라는 성을 쌓아 중심 수도를 이루었고, <국>전체에는 <외성>을 쌓아서 국과 그 밖의 지역(비읍)을 구분하였습니다. 비읍에 사는 자들은 지배층인 국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민이라 불렀습니다.

1. 국 - 내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왕에게 국을 분봉받은 제후가 거주하는 지역
   2. 읍 - 원래부터 씨족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거주하는 곳
   3. 도 - 원래 제후가 경, 대부에게 하사한 분봉 지역이었으나, 춘추시대 중기 이후 국가의 수도로 인식되는 지역
   4. 비 - 국의 외성 밖의 지역으로 작은 소읍으로 구성되어 있는 공백지역

그리고 국의 교외에는 소읍으로 비읍이 존재합니다. 비읍이란 국과 국 사이의 공백이 되는 모든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야인, 비인이라 불러 국에 사는 국인과 차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비인들은 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집단적인 개간을 통해 농업을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철기 농기구가 도입되면서 집단 취락을 형성하여 생산력을 높이게 되었는데, 이로서 비읍의 생산력은 <국>의 생산력에 버금가는 생산력을 보이게 됩니다. 전국시대에 부국강병을 추구했던 각 <국>들은 이 비읍의 생산력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고, 이러한 영토분쟁은 각 <국>의 영유권 주장으로 확대됩니다. 따라서 각 국은 이 비읍을 점령한 다음 <군>, <현>을 설치하여 이 지역을 행정구역화 한 뒤 세금을 걷어 상비군과 관료제를 유지한 제원을 확보하려 하였습니다.

2. 국의 신분질서

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는 바로 제후라 불린 국군(공)입니다. 국군이란 국에서 가장 높은 군주란 명칭이고, 제후는 왕이 분봉한 땅의 주인이란 뜻이며, 공이란 주왕실이 하사한 제후의 명칭입니다.

그러나 국을 지배하는 국군은 춘추중기까지만 해도 힘이 미약했습니다. 그들은 국에 사는 지배층(국인)들의 수장이자 대표자 정도의 위치였습니다. 군사, 제사는 국인들이 공동으로 하여 읍사공동체적 성격을 유지하였습니다. 특히, 제사란 조상신이 같다는 혈연적 유대를 유지하고 종법질서를 확인하는 절차로서 춘추시대 권력의 구조는 아직도 봉건제도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춘추 5패와 전국 7웅을 거치면서 강력한 패자 중심의 정치가 진전되면서 이런 구조는 군현제도를 통한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변화됩니다.

경, 대부는 원래 제후로부터 <채읍>를 분배받아 생활하였는데, 그들은 이렇게 받은 채읍 중 중심지를 <도>라는 본읍으로 만들어 독자적인 권한을 유지하는 지배층(국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분봉받은 대가로 전쟁에 적극 참여할 의무가 있었고, 공통의 제사를 통하여 종법적 혈연 관계를 확인하였습니다.

국에서 가장 낮은 지배층 계급은 <사>입니다. 사 역시 국인이었지만, 이들은 경, 대부보다 혈연관계가 소원해져서 하위 무사계급으로 추락한 지배층입니다. 그들은 전쟁 참여를 통해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였고, 특히 제후, 경대부와 함께 제 3의 세력으로서 국의 지배자 계승권 분쟁, 외교 분쟁 등에 관여했습니다. 만약 국인간에 내분이나 싸움이 날 경우 이 <사>계층이 누구편인가가 상당히 중요한 변수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이 사계급은 초기에는 몰락한 국인계급이 많았지만, 점차 부국강병을 통해 군사력이 중요해진 춘추 중기 이후에는 실력을 통해 성장한 평민층이 숫자가 많아집니다. 이들 새로운 평민 지배층은 전쟁참여의 대가로 토지를 분봉받은 영주이자, 학문을 통해 성장한 제자백가가 되기도 합니다. 또는 경, 대부로 신분상승하여 제후 밑에서 <재상>이 되기도 합니다. 실제, 춘추전국시대의 많은 왕들은 현명한 인재나 강병한 장군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재상>, <장군>자리를 보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자, 맹자, 한비자 등은 각국에서 서로 초빙하려 했던 유명한 제자백가입니다.

여기까지가 지배층입니다.

이러한 춘추전국시대 지배층은 일반 백성인 농인, 공인, 상인, 천민 등과 구별되는데, 그 구별법은 <작>과 <예>라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작이란, 신 앞에서 지배층으로서의 의무를 선서해서 얻은 신분을 말합니다. 흔히 우리가 공작, 백작, 남작, 자작 할 때의 그 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작을 행하는 의식과 예법을 <예>라고 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고결함의 상징을 이런 <예법>을 아는가로 따졌기 때문에, 이 <예>라는 의식을 행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문명인이자, 국인입니다. 이 예는 사 계층까지만 베풀어지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춘추전국시대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구별하는 방법이라고 하겠네요. 이 <예>라는 단어는 후대 <예절>이라는 뜻으로 인식되어 쓰입니다. 그리고 유가주의자들에 의해 <예>는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는 것으로, 꼭 인간에게 필요한 도덕으로 재인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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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