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퀴즈) 제 1부. 근대인되기 : (02) 학교 종이 땡땡땡!

 

근대를 보는 창 20에 대한 도서퀴즈 2회 문제입니다.

도서퀴즈는 역사와 관련하여 재미있고 유익한 책들을 선정한 뒤
각 단원별로 공부한 내용을 풀어보는 퀴즈입니다.

학교시험처럼 성적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책을 얼마나 꼼꼼하게 읽었는지 확인하고,
무심코 넘어간 중요한 내용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는 퀴즈랍니다.

70점 이상일 경우, 축하 메시지가, 70점 미만일 경우에는 격려의 메시지가 나온답니다.
다음 회차는 근대를 보는 창 2회차분입니다.
역사도서 <근대를 보는 창 20> 은 제목 그대로 총 20회분으로 퀴즈를 구성했습니다.

만약 문제를 풀어보시는 분이
역사 전공을 하고 있는 대학생, 대학원생이시거나
공무원 또는 교원 준비를 하고 계시는 수험생이시라면
책을 읽지 않고도 충분히 문제를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실력이 되시는 분들은 책을 읽지 않고 도전해 보세요~


**** 도서 정보 ****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최규진
출판 : 서해문집 200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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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보는창20인간을둘러싼여러이야기묶음이곧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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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 크로스 퀴즈(난이도 :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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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을 볼래요... 클릭!!!

가로 퍼즐

  1. 1926년 김구가 조직한 비밀 독립 운동 단체.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가 유명하다.
  2.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부처의 힘으로 막기 위해 불경을 세긴 목판
  3. 나라가 위태로울 때 자발적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사람들
  4. 학문은 실제 쓰임에 이롭고 백성들의 삶을 풍족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실학 사상.
  5. 토지를 잃고 산으로 들어가 불을 질러 밭을 만들고 농사를 짓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6.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기본 사상
  7. 조선 숙종 때부터 200년간 사용된 화폐. 동전, 엽전으로도 불렀다.
  8. 조선 후기, 김정호는 우리나라를 13번 직접 돌아다니면서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이 지도는 분첩식이라서 분리할수도 있었습니다.
  9.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에서 미국 군함과 우리 군대가 충돌한 사건
  10. 예성강 하구에 있던 고려 제 1의 무역항
  11. 중국 당나라 때부터 해상 무역에 대한 모든 사무를 맡아보던 관아입니다. 송나라 이후 크게 발전하였다가 청나라 때 폐지하였습니다.
  12. 조선 세종 때, 우리 나라 농사법을 연구한 책
  13. 고려의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안동에서 싸웠던 모습을 놀이로 꾸민 것
  14. 인류 역사상 문헌 자료가 없는 시대. 역사가 쓰여지기 이전의 시대
  15. 강강찬 장군은 거란의 3차 침입을 **에서 막았습니다. 이 전투를 **** 이라고 합니다.

세로 퍼즐

  1.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고조선의 건국 정신
  2. 우리 정부가 일본에 진 빚을 국민이 대신 갚자는 운동. 1907년 대구에서 서상돈의 제의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3. 3.1운동 이후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1919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상하이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정부.
  4. 천주교 박해를 원인으로 강화도에서 프랑스 함대와 우리 군대가 충돌한 사건.
  5. 6.25 전쟁의 전세를 바꾸기 위해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실시한 작전
  6. 동명왕편의 저자
  7. 지금 세상은 운이 다하고, 백성들의 새로운 세상이 온다는 동학의 가르침.
  8. 신라시대, 심신을 단련하기 위해 '랑'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단체를 부르는 말입니다. 원광 대사의 세속오계를 규율로 삼기도 했습니다.
  9. 조선 후기 실학자인 홍대용은 지구가 돈다는 *** 을 주장했습니다.
  10. 율곡 이이의 어머니
  11. 개화기에 우리 나라 바다 근처에 나타난 서양 배를 이르는 말
  12. 을사조약 체결에 대해 장지연이 황성신문에 쓴 논설, 일제 침략의 부당함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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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상고사와 신채호 선생 (1)

어둠의 시기, 역사를 바라보는 틀은 <민족>일 수 밖에 없었다.

1. 1910년 이전의 신채호....

오늘 소개할 역사책은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이다. 먼저, 책의 내용을 소개하기 전에 신채호 선생이 살았던 시기를 간략히 짚어보자.

신채호 선생이 태어난 1880년은 민씨 정권에 의해 본격적인 <개화>가 시작되던 시기였다. 흥선대원군을 대신하여 <일본>으로부터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개화 정책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술렁이고 있었다.

개화가 사회의 큰 화두가 되었던 그 시기, 동학농민들이 개혁을 외치다 총탄을 맞고 쓰러진 그 시기, 구체제의 모든 것을 버리고 서구식 새 옷을 마련한 1894년의 갑오개혁이 일어난 바로 그 때의 조선... 

그 변화의 한가운데에서 신채호는 19세의 나이로 성균관에 입학하여 유학을 공부하였다.

약관의 나이로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그는, 훗날 삼균주의의 아버지라 불리는 조소앙과 함께 <항일 성토문>을 발표하여, 친일파를 규탄하는 운동을 시작했으며, 산동학원을 만들어 교육자로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1905년에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자진 사퇴하고, 장지연의 황성신문사에 들어가 활동하였다. 그는 객원논설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계몽사상을 전파하려고 했으나, 장지연이 을사조약 반대를 표명한 <시일야 방성대곡>을 발표하면서 신문사 자체가 일본에 의해 탄압받게 되었다. 이후, 황성신문은 무기한 정간당하였고,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1906년, 양기탁과 베델이 이끌어가던 대한매일신보에 들어가 주필로 활약하면서 일본의 침략에 대한 부당함을 다양한 글로 적어 내었다. 초창기 그의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역사논문

   독사신론(讀史新論)

신문논설

   일본의 삼대충노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한일합방의 부당       대한의 희망   등...

연재시론

   천희당시화

영웅전기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이태리 건국 삼걸전

다양한 영웅전기는 그가 <민족주의>를 선호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역사 속의 <민족>이란, 생명체와 같은 것으로 나라는 주체(아我)는 다른 모든 것(비아非我)과 구별되는 실체이다. 우리 역사 속에 살아숨쉬는 영웅들은, 민족이라는 <생명체>를 숨쉬게 한 매개체와 같은 것이다. 영웅이 제시해줌으로서 민족을 계몽하려던 신채호의 초기 계몽사상은, 일제 강점기에 <좌절감>을 느끼던 대중들에게 반항의 힘을 주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반대로 <독사신론>은 위대한 민족의 역사를 부정하면서, 일본에 의지하려는 편협한 개화주의자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개화와 매국은 뭐가 다른 것인가? 일본에 의지해서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이들이, 일본과의 조약에 서명하고 나라를 일본에 넘기는 것까지 선진문물과 개화로 연결시킨다. 이것은 로마제국에서 노예로 살면서 로마를 찬양한 이들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

독사신론은, 단군에서 출발한 우리 민족은 <부여>, <고구려>로 이어지는 위대한 시기를 구가했었다고 주장한다. 일본보다 위대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노예근성으로 타락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1908년 무렵 대한매일 신보에 연재된 이 글들은, 신채호가 민족의 위대함만을 강조하기 위해 적은 글이 아니다. 일본에 의지하여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노예근성이 망국으로 이어졌다는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고자, 고대사 이야기를 계속 꺼내고 있는 것이다. <독사신론>의 이야기는 그 이후,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조선상고사 등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신채호는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1910년까지, 국내에서 다양한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거나, 직접 주도하여 친일파들과 항전하였다.

1905년 장지연의 <황성신문>, 1906년 양기탁의 <대한매일신보>에서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논설을 지속적으로 실었고, 1906년 대한자강회에서 활동하면서 조선인의 교육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국채보상운동을 장려하기 위해 직접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윤치호, 안창호와 같이 결성한 청년학우회의 창립취지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링크 : 신채호가 대한협회 원보에 올린 글(1906) http://historia.tistory.com/189

그러나, 1907년 일본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가 한일합방 무렵부터 일본에 의해 탄압받으면서, 일제강점기 시기 내내 망명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중국으로 망명하면서도 안정복의 친필이 담긴 <동사강목>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고 한다.

링크 : 신민회의 설립 취지문 http://historia.tistory.com/188

2. 1910년 이후의 신채호

1910년, 31살의 신채호. 그의 30대는 너무나 암울하고 어두운 시기였다. 독립을 위해 발버둥칠수록 더욱 암담한 현실의 벽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고나 할까?

1910년 안창호와 같이 산둥지방으로 도망간 신채호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인 <청도회의>에 참여한 뒤, 독립운동자금을 모아 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독립투쟁>을 할 것을 결의한다.

링크 : 청도회의 <daum 신지식인 검색>

1911년 이동휘와 함께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을 역임하면서, 청구신문 등 민족신문에 끊임없이 글을 기고하였다. 1913년에는 상하이에 <동제사>를 건립하여 신규식, 조소앙, 박인식, 정인보 등 민족주의 학자들과 함께 조선 독립운동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다녔다. 30대의 신채호가 독립운동과 계몽활동을 위해 노력한 흔적들은 다음과 같다.

1910년

  대동공보 주필, 청구신문 발행

1911년

  광복회 부회장으로 활동

1912년

  권업신문 주필로 국외 조선인 계몽활동

1913년

  동제사 활동 - 박은식, 조소앙, 정인보, 문일평 등과 민족주의 저술활동

1914년

  대종교 동창학교 교사 활동, 조선사 집필 착수, 광개토왕릉비 현지 답사

1915년

  신한혁명단 조직 후 무장독립운동 활동 시작(일본에 의해 실패)

1916년

  소설 <꿈하늘> 집필, 도제사언문 집필(나철 추모)

1918년

  <조선사> 집필, 무오독립선언 33인에 참가

1919년

  3.1운동 국외 참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원 활동, 신대한 주필 활동

1920년

  만주 독립군 단체를 통합한 군사통일촉진회 발기

  1910년대 신채호는, 망명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글을 지었고, 독립운동과 계몽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적어나갔다. 특히 1915년에는 무장독립활동이 독립에 필요하다는 전제하여, <신한혁명당>을 조직하여 1차 무장독립운동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의 철저한 감시로 실패하였다.

일찍이 민족 영웅을 통한 애국심 고취에 관심이 많았던 신채호는 직접 광개토대왕릉비를 답사하여, 비석을 일본이 위조했다는 것을 밝혀내고, 그 비석이 가진 의미를 재발견하기도 하였다. 신채호의 노력으로 광개토대왕릉비를 위조한 일본의 만행을 논리적으로 지적할 수 있게 되었다.

링크 : 광개토대왕릉비 비문 조작설(출처 : 조선상고사) http://historia.tistory.com/323

 

 

다음 장에서는 3.1운동이 신채호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으며, 신채호의 사상이 3.1운동 전후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이야기 해본 뒤, 당시 민족주의자들이 생각한 3.1 운동과 독립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자. 신채호의 일대기를 정리한 뒤, 3-4편부터는 대표작인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신채호 사상을 정리해보면서 마치도록 하겠다. (블로그에 적는 주관적인 글이기에 일부 다른 견해가 있어도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p.s : 요즘 백범 김구선생의 기념관을 짓는 것, 김구선생을 모델로 한 10만원권을 발행하는 것 등이 전면 중지되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이고, 김구는 건국을 반대한 빨갱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홍경래, 전봉준은 내란을 일으킨 좌파 빨갱이이고, 안중근, 윤봉길은 테러리스트에 불과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황당함과 짜증을 넘어 색다른 이론을 창조적으로 만드는 그 분들에게 경의까지 표한다.

단, 근현대사 교과서는 만든 사람끼리만 읽어주세요.. 제발..

링크 : 그 분들이 수험을 출제한다면 이런 문제가???

 

역사 이야기 <히스토리아 >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자세한 내용은 이 책을 참조하세요 ...

조선상고사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신채호 (비봉출판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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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푸른 역사가 신채호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김남일 (창비,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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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그생애와 사상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임중빈 (명지사,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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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문화사(외)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신채호 (비봉출판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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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의 역사사상 연구
카테고리 역사/풍속/신화
지은이 신일철 (고려대학교출판부,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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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평전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김삼웅 (시대의창,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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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문집(사르비아문고 29)
카테고리 시/에세이
지은이 신채호 (범우사,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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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15. 국권 피탈
과정 : 조약의 순서, 내용 등을 알아두자.


1) 한일 의정서(1904)

  러일 전쟁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에게 군용지 조차를 요구하였고, 정부는 이에 응하면서 일본의 합법적인 토지 약탈을 허용하게 된다. 

2) 제 1차 한일 협약(1904)
 
  일본은 이 협약을 통해 우리나라의 내정에 고문을 파견하여 관여를 하기 시작하였다. 외교고문으로는 친일 미국인 스티븐슨과 경제고문인 메가타가 이 때 파견되었다. 

3)
을사조약(1905)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의 영향을 미칠만한 서구 열강(영, 미 등)과 사전에 협약을 마치고, 포츠머스 조약에서 러시아의 항복을 받아내었다. 이후 한반도에 대한 침략 야욕을 노골화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을사조약이라 하겠다. 을사조약의 주된 내용은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내정에 대한 간섭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제 1조 
  일본국 정부는 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금후에 조선의 외국에 대하는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할 것이요, 일본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있어서 한국의 신민 및 이익을 보호할 것임. 

제 2조 
 (전략) 한국 정부는 금후에 일본국 정부의 중개에 경유치 않고서 국제적 성격을 가진 하등의 조약이나 또는 약속을  않기를 서로 약속함. 

제 3조
 
 (전략)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제 폐하의 궐하(闕下)에 한 명의 통감을 두되 통감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경성에 주재하고..... (후략)

  이에 우리 민족은
의병활동(을사의병)을 통해 저항하였고,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是日夜訪聲大哭)」을 황성신문에 발표하였으며, 고종은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였다. 민영환 또한 「동포에게 남기는 글」을 써놓고 자결하였다.
 

4) 한일 신협약(1907)
 
  헤이그 특사 사건을 밀비로 일본은 한일 신협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그로 인해 조선에 있던 일본의 통감부의 기능이 입법, 사법, 행정 전반을 전담할 수 있게 되었다. 고문제를 폐지시키고, 조선의 중요직 등은 통감부가 일본인들을 추천하여 등용시켰다. 그리하여 각 부의 차관들이 대한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데, 이를 '차관정치'라 한다. 그리고 군대 마저 해산시킨 것도 이 조약의 핵심 중 하나이다. 

제1조 대한 제국은 시설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을 것
 
제2조 대한 제국의 법령 제정 및 주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칠 것 
제4조 대한제국의 고등 관리 임명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할 것 
제5조 대한 제국은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대한제국 관리에 임명할 것 

 이후 일본은 기유각서(1909, 사법권 박탈), 6월 각서(1910, 경찰권 박탈) 등을 통해
1910년 8월 29일 국권이 피탈되었다.
 

5) 당시의 국제 정세
   
  가쓰라-테프트 밀약(미-일, 1905.7)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고, 미국 또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한다.

                 ↓

  제2차 영일동맹(영-일, 1905.8)

  일본에 대한 조선의 지배, 감독 인정

                 ↓

  포츠머스 조약(러-일, 1905.8)

  일본에 대한 조선의 지배, 감독 인정. 조선 내의 러시아 이권을 전부 일본에게 양도

  (러일 전쟁 이후, 제2차 영일동맹 이후)

                 ↓

  제2차 한일 협약(을사조약, 조-일, 1905. 11)

  조선의 외교권 박탈, 통감부 설치

Posted by 비회원

을사조약의 부당성에 대한 고종의 친서와 원문

요즘 인터넷과 신문에 을사조약 무효 선언서라는 글이 공개되었다고 기사가 나오더군요. 공개는 지금되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논문들 속에서 익히 정리된 내용들입니다. 인터넷 내용들을 좀더 구체적인 내용들로 올려볼께요.


이 글의 인용 논문 : 을사조약과 병합조약은 성립하지 않았다, 이상찬, 역사비평(1995년 겨울호)

을사조약 주요 관계자료를 가지고 계신 분 : 서울대 김기석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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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종이 9개국에 보내는 친서의 3개 무효 주장

고종황제가 헬버트에게 9개국 국가원수에게 친서를 올리라 하고 위임장을 전달했으며,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공판소에 공정한 재판을 요청하도록 권한을 위임하였다.

-. 만국공법에 위배되는 강제 체결의 증거인 3가지의 내용으로 보아 이 조약은 무효인 것.

     하나. 정부대신이 위협을 받아서 작성한 조약

     둘. 정부가 조인하는 것을 고종황제께서는 허가하지 않았음

    셋. 정부회의라고 하지만 일본인들이 정부대신을 강제로 가두고 한 회의였음

-. 고종 황제가 조약을 승인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므로 고종황제가 조약을 승안하였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

-. 한국은 당당한 독립국이므로 예전과 같이 공사관을 다시 설치해야 할 것.

2. 1907년 1월 13일 <트리뷴>지에 보도한 친서 전문에 대한 <대한매일신보>의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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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5년 11월 17일 일본사신과 박제순이 체결한 조약 5조는 황제께서 처음부터 인허하지 않았고 또한 서명하지 않았다.

2. 황제께서는 이 조약을 일본이 마음대로 반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3. 황제께서는 독립 황제권을 조금도 다른 나라에 양여하지 않았다.

4. 일본이 외교권에 대해 조약을 강제한 것도 근거가 없는데 하물며 내치상에 한 문제라도 어떻게 인준할 수 있는가?

5. 황제께서는 통감이 와서 상주하는 것을 허락치 않았고, 황제권을 조금이라도 외국인이 마음대로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6. 황제께서는 세계 각 대국이 한국외교권을 함께 보호하고 그 기한은 5년으로 할 것을 원함.

(이 6개조의 내용은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여 만국공판소에 제소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고종이 퇴위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3. 프랑시스 레이,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지위

프랑시스 레이의 1906년 논문은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지적하였습니다. 당시 국제법상 만국공법에 의거했을 때,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것을 유럽인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죠.

<조약은 일본과 같은 문명국으로서는 부끄러운 정신적, 육체적 폭력에 의하여 한국정부에 강요되어 체결되었다고 한다. 조약의 서명은 전권대사인 이토 후작과 하야시가 호위를 받는 일본 군대의 압력 아래에서 대한 제국의 황제와 대신들로부터 얻었을 뿐이다.

이틀 동안 저항한 후 대신회의는 체념하고 조약에 서명하였지만, 황제는 즉시 강대국, 특히 워싱턴에 대표를 보내어 가해진 강박에 대하여 맹렬히 이의를 제기하였다.>

다음은 윤병석님의 (을사5조약의 신고찰), 이상찬님의 (을사조약과 병합조약은 성립하지 않았다)의 논문에서 발췌한 레이의 글입니다.

1. 11월 16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는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원안을 보여주면서 찬성할 것을 협박하였다. 한편 이토는 한국정부 각 대신을 모두 그의 숙소로 납치하여 밤 늑게까지 조약 체결을 찬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2, 11월 17일 오후 3시경 경운궁에서 정부대신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본회의장 안으로 칼을 찬 헌병경찰들이 몰려들었고, 회의장 주변과 궁궐 안팎에는 완전 무장한 일본군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일본 공사관 앞, 기타 서울시내 전역을 무장한 일본군이 시가행진을 하였고, 시내의 각 성문에는 야포, 기관총까지 갖춘 부대를 배치하였다.

3. 당시 의정대신 한규설은 을사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에 이토는 무장한 일본군을 시켜 한규설을 본회의장 앞의 골방에 잡아넣고 감시하였다. 이토는 한규설에게 간청도 하고 공갈도 하여 유혹도 하였지만, 한규설은 죽으면 죽었지 결코 인준하지 않는다고 버티었다. 그러자 이토는 한규설이 도장을 찍지 않는 것은 관계없다고 말하면서 외부대신의 도장을 가지고 오라고 하여 도장을 찍고 나머지 대신 또한 날인하게 하였다.

4. 외부대신을 비롯한 정부 대신에게 폭력을 가하고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국왕 고종에게도 여러 차례의 협박이 가해졌다. 일본 천황의 친서를 가지고 내한한 이토는 11월 10일 고종을 알현하였다. 이 때 전달된 친서는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니 대사의 지휘를 쫓아서 조치>하라는 협박이 담겨 있었다. 11월 15일에는 조약안을 고종에게 제시하고 이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레이가 주장한 을사조약 무효의 또하나의 근거 : 한일의정서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보호관계를 설정한다는 조약을 하였으나, 그 조약을 무시하고 을사조약에서 한국의 독립을 포기하도록 강요하였기 때문에 선 조약과의 모순이 있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기로 약정한 이상 이약정에 구속되어야 한다. 한국의 독립을 제한하거나 특히 박탈할 목적으로 하는 어떠한 조약도 체결할 수 없다. 보장국은 만일 피보장국의 독립이 제 3국의 공격에 의하여 위험에 처하면 개입하여야 한다. 그 자신이 그것을 침해할 수는 없다.

- 프랑시스 레이,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지위(최종고, 남효순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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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1907년 1월 16일자에 수록된 '을사조약 무효선언 국서'의 내용이다. 이것은 1906년 1월 29일에 작성된 것으로 '대한국새'가 찍혀 당시 영국 트리뷴지의 더글라스 스토리 기자에게 전달되었고, 그후 이 내용은 1906년 12월 1일자 트리뷴지에 보도되어 "황제가 을사조약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서양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위의 <매한매일신보>는 그 내용을 다시 받아서 국내 보도한 것이다

4. 이상찬 교수님(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소장) 논문의 을사조약 부당 근거

다음은 을사조약의 허구성에 대한 대표적인 논문을 쓰신 이상찬 교수님의 주장 내용입니다. (좀 심하게 압축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1. 을사조약이 무효인 것은 레이 등이 쓴 논문과 유엔 국제법위원회 등에서 낸 보고서 등에서 이미 확인되어 있고, 국제법학회와 유엔이 이미 무효라고 주장한 것을 일본 역시 알고 있다.

2. 을사 조약과 같은 국가 존망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약은  최고수준의 등급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개 대신이 국왕을 대리하여 위임과 비준과정을 무시하여 체결하였다. 일본은 이 조약을 <협약>차원에서 체결(일한협약)한 뒤 국제 사회에 조약(한일협상조약)으로 공표하였다. 즉, 국제적으로 조약의 등급이 위조되었다.

3. 조약이 체결할 당시 조약의 제목을 빈 칸으로 두었다. 고종이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일본이 편의에 따라 이 조약의 이름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4. 전권대표가 조약체결권을 위임받지 못하였다. 일본대표 하야시는 일본천황에게 받은 위임장이 없었고, 우리측에서는 전권대표라는 표현이 빠진채 외부대신 박제순이라는 이름으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즉, 양국의 전권대표의 신뢰성이 없다.

5.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속 뜻은 <도장을 찍지 않았다>는 뜻이다. 친일파인 외부대신 박제순도 두려워 직접 도장을 찍지 않았고, 박제순이 전권대표가 아니였기에 일본은 외부대신의 도장을 훔쳐 찍었다. 즉, 조약 조인 절차조차 없었다.

6. 고종은 조약의 비준을 거부했고, 헐버트에게 친서를 보내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즉, 고종 퇴위 전까지 을사조약은 비준이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을사조약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실제 효력이 발휘된 것은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시점이었다.

7. 고종이 물러난 후 순종도 조칙을 보지 못하고 서명하였다. 즉, 순종 때의 공포 칙서들도 일본의 날조 행위였다. 또한 순종 역시 고종이 강제퇴위한 후 등극하였기 때문에 전단계 황제인 고종을 승계하지 못하였고, 고종이 살아있는 시점에 새 연호를 쓰는 등 일본에 의해 조종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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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한제국 관보> 1907년 1월 21일자에 수록된 의정부(議政府) 명의의 '광고'로 위의 <대한매일신보>에 소개된 '을사조약 무효문건'을 전면 부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그림 참조 사이트 : http://cafe.daum.net/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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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일본의 유명한 개화주의자 유키치는 <세계 속의 일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조선, 중국과 같은 어리석은 친구들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21세기 일본은 이런 정신상태를 개조해서 진정한 동아시아의 좋은 친구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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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청과 일본이 조선의 경제권을 놓고 다양한 조약을 맺다.

1. 정치적 침략 못지 않게 경제적인 침략이 중요하였다.

1880년대 조선에서는 청과 일본이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시기였습니다. 초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까지만 해도 청이 조선에서 전통적인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 대립은 1894년 동학운동 당시 청일전쟁 기점으로 일본에게 정치적 주도권이 넘어갑니다. 청과의 정치적 대립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후 조선이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재하려고 하자 을미사변 등을 일으켜 조선의 주도권을 유지하였고, 1904년 러일 전쟁을 계기로 조선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인정받습니다. 러일전쟁 직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렇게 일본은 조선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주변 열강과 끊임없는 암투를 벌여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1880년대는 조선에서 청과 일본이 경제적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제적 대립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메이지 유신 등을 통하여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일본은, 자국의 산업혁명을 위해 조선을 철저하게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특히 일본이 산업혁명을 위해 모델로 삼았던 나라가 <영국>이었고, 일본은 영국의 산업혁명 모델 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공동으로 막기 위한 연대전선까지 형성하게 됩니다.

일본은 영국산 면직물을 조선에 내다 팔고, 이 차익으로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가져오려고 하였습니다. 즉, 농업기반의 사회를 공업기반의 사회로 급격히 전환하는 시기에 모라자는 식량 자원을 조선에서 가져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에서는 정치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산업화를 위한 추가 조약>이 꼭 필요하였습니다.

사실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이 조선에 진출한 것은, 일본의 자본주의가 확립되어 조선을 강탈할 만큼의 여유가 생겨서가 아닙니다. 일본은 조선에 진출하여 제국주의적인 무역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고, 그 무역망을 통한 치익을 통해 서양과 같은 자본주의를 단기간에 이루려고 한 것입니다. 즉, 서양이 자본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제국주의와 같은 움직임을 일본이 한 것입니다. 가장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을 모델로 하면서 그런 것이죠.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면서 원료 공급지 확보와 제품수출을 위한 기지로 활용한 것을 일본은 그대로 조선에 적용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영국과 같이 국가 경제가 견고한 나라가 아니였습니다. 일본은 미국에게 강제로 개항당하여 근대화에 막 발을 들여놓은 나라였을 뿐이죠. 따라서 영국이 조선에 팔고자 했던 것은 자국산 공업물품이 아니라 영국산 면직물 등 수입품이었습니다. 수입품을 팔아서 차익을 남기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경제적 침탈은 조선과 전통적으로 무역국이었던 청을 자극하게 됩니다.

2. 조일수호 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1876년)

일본이 1876년 조선과 맺은 강화도 조약은 구체적인 경제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단지 3개 항구를 개항하고,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한다는 정도였지요. 이러한 내용들은 강화도 조약 편에서 자세히 다루었죠? 잠시 강화도 조약의 내용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보신 분은 그냥 패스!!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원래부터 우의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우의가 미흡한 것을 고려하여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가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인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과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인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이 조선국 강화부에 와서 조선국 정부가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과 부총관 윤자승과 함께 각기 지시를 받들고 조항을 토의 결정한 것으로써 아래에 열거한다.

제1조.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써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제부터 양국은 화친한 사실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우하여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이전부터 사귀어온 정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없애고 되도록 너그러우며 융통성있는 규정을 만들어서 영구히 서로 편안하도록 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또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에 가서 직접 외무경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조선국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제3조.
이제부터 두 나라 사이에 오고가는 공문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따로 한문으로 번역한 것 한 본을 첨부하며 조선은 한문을 쓴다.

제4조.
조선국 부산 초량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공관이 세워져있어 양국 백성들의 통상 지구로 되어왔다. 지금은 응당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은 없애버리고 새로 만든 조약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조선국 정부는 제5조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국 백성들이 오가면서 통상하게 하며 해당 지방에서 세를 내고 이용하는 땅에 집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을 짓는 것은 각기 편리대로 하게 한다.

제5조.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중에서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서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기간은 일본 역서로는 명치 9년 2월, 조선 역서로서는 병자년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 안으로 한다.

제6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혹 큰 바람을 만나거나 혹 땔 나무와 식량이 떨어져서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가닿은 곳의 연안 항구에 들어가서 위험을 피하고 부족되는 것을 보충할 수 있으며 배의 기구를 수리하고 땔나무를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며 그에 대한 비용은 반드시 선주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은 특별히 진심으로 돌보아서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도록 하며 보충해 주는 데서 아낌이 없어야 한다. 혹시 양국의 배가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탔던 사람들이 표류되어 와닿았을 경우에는 그들이 가닿은 곳의 지방 사람들이 즉시 구원하여 생명을 건져주고 지방관에 보고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본국으로 호송하거나 가까이에 주재하는 본국 관리에게 넘겨준다.

제7조.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를 이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면을 만들어서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8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정부는 조선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제기되면 소재지의 지방 장관과 만나서 토의처리한다.

제9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 백성들은 각기 마음대로 무역하며 양국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만일 양국 상인들이 값을 속여서 팔거나 대차료를 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으면 양국 관리들이 빚진 상인들을 엄히 잡아서 빚을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갚아줄 수는 없다.

제10조.
일본국 사람들이 조선국의 지정한 항구에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만일 조선과 관계되면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어 조사 판결하게 하며 조선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경우 일본과 관계되면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서 조사 판결하게 하되 각기 자기 나라의 법조문에 근거하며 조금이라도 감싸주거나 비호함이 없이 되도록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11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따로 통상 규정을 작성하여 양국 상인들의 편리를 도모한다. 그리고 지금 토의하여 작성한 각 조항 중에서 다시 보충해야 할 세칙은 조목에 따라 지금부터 1개월 안에 양국에서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의 경성이나 혹은 강화부에서 만나 토의결정한다.

제12조.
이상의 11개 조항을 조약으로 토의 결정한 이날부터 양국은 성실히 준수시행하며 양국 정부는 다시 조항을 고칠 수 없으며 영구히 성실하게 준수함으로써 우의를 두텁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조약 2본을 작성하여 양국에서 위임된 대신들이 각기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증거로 삼는다.

대조선국 개국 485년 병자년 2월 2일
대관 판중추부사 신헌
부관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
대일본 기원 2536년 명치 9년 2월 6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


-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구한말조약휘찬 상 -

자, 위의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보면 경제적인 내용이 많이 빠져있고, 중요한 경제적 합의 사항은 추후에 다시 정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강화도 조약을 맺은 직후, 같은 해 8월 일본은 <강화도 조약의 부록(조일수호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을 작성하여 경제적인 침투에 대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해 둡니다.

조일수호조규의 부록(통상토지조약)

일본국 정부는 전에 특명전권변리대신육군중장겸참의개척장관 흑전청륙 특명부전 권변리대신의관 정상성으로 하여금 조선국 강화부에 파유하고 조선국 정부는 대관 판 중임부사 신헌 부관도총관 윤자승에게 위임하여 일본역 명치 9년 2월 26일 조 선역병지년 2월 초 2일 쌍방이 서로 조인하고 수호조규 제 11조의 취지에 따라 일 본국 정부는 이사관 외무대승 궁본소일에게 위임하여 조선국 경성에 파유하고 조선국 정부는 강수관의 정부당상 조인희에게 위임하여 상호 회동하여 의정한 조약 을 좌에 개례한다.

제 1관

  차후 각 항구에 주류하는 일본국 인민, 관리관은 조선국 연해지방에서 일본국 제선이 조난하여 위급을 요할 때는 지방관에게 고하고 해지에 갈수 있는 도로를 경과할 수 있 다.


제 2관

  차후 사신 급 관리관이 발하는 문리서신을 수송하게 되면 비용을 사후변상하고 또는 조선국 인민을 고용하여 전차할수도 있으니 각종기편할 것이다.


제 3관

  의정한 조선국 통상각항에 있어서 일본국 인민이 지기를 조차하여 주거함은 각지기주와 상의하여 그 가격을 정한다. 조선국정부에 속하는 지는 조선국인민으로부터 관에 납조함과 동일한 조액을 납부하고 거주 한다. 부산초양항공사관에는 종전에 동국정부로부터 수문·설문을 설정하였으나 금후 이를 징발하고 신정의 정한에 의하여 표식을 경계 상에 설정하되 타의 이항도 역시 비례에 준한다.


제 4관

  금후 부산항에 있어서는 일본국인민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의 이정은 방파제로부터 기산하여 동서남북 각 직경 10리(조선법에 의한다.)로 정한다. 동래부중에 있어서는 이 정외라 할지라도 특별히 왕래할 수 있다. 이 이정내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은 자유로 통 행하고 기타의 산물 및 일본국산물을 매매할 수 있다.


제 5관

  의정한 조선국 각항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은 조선국인민을 채악할 수 있으며 조선국인 민은 그 정부의 허가를 받으면 일본국에 왕래함도 무방하다.


제 6관

  의정한 조선국 각항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이 만약 사망할 때는 적선의 지처를 선발하 여 이장할 수 있다. 단 타의 이항의 이장치는 부산이장지의 원근의 예에 의한다.


제 7관

  일본국인민은 일본국의 제화폐로서 조선국인민의 소유물과 교환할 수 있고 조선국 인민은 그 교환한 일본국의 제화폐로서 일본국소산의 제화물을 매득할 수 있으니 이시로 조선국의 지정한 개항에 있어서는 인민상호간에 통용할 수 있다. 일본국인민은 조선국 의 동화폐를 사용운수할수 있다. 양국 인민으로 감히 전화를 사주하는 자가 있다면 각 그 국가의 제법률에 비추어 처단한다.


제 8관

  조선국민은 일본국민으로부터 매득한 화물 혹은 증여를 받은 제물품을 자유로 사용하 여도 무방하다.


제 9관

  수호조규 제 7조에 기재된 취지에 따라 일본국의 측량선이 소선을 내어 조선국 연해 를 측량하다가 풍우에 봉착하거나 혹은 간조로서 본선에 귀환할수 없을 시는 해처 이 정으로부터 그 근방의 인간에 안착시키고 만약 수용의 물품이 있으면 관청으로부터 변 납하고 후일 그 비용을 청산한다.


제 10관

  조선국은 아직 해외제국과 통신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국은 수호 경년하여 체 맹한 제국과 우의를 보유하고 있는 관계상 금후 제국의 선박이 풍파로 곤경에 빠져 연 변지방에 포착하게 된다면 조선국인민은 모름지기 이를 수휼 않을 리가 없는지라 해표 민이 그 본국에 송환되기를 원망할 때에는 조선국정부로부터 각 항구 주류의 일본관리 관 거치하여 본국으로 송환한다. 해관원은 이를 응낙하여야 한다.


제 11관

  위 10관의 장정급 이에 첨부한 통상규칙은 모두 수호조규와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 양 국정부는 존행하여 위반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차 각 조중에 만약 양국인민이 교제 무역을 실천함에 있어 장해가 있다고 인정되어 불가불 개혁 하게 될 경우에는 양국정 부는 그 의안을 속히 작성하여 일개년 전에 통지하여 협의결정하여야 한다.

1876년의 조약들 중에서 경제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조일수호조규부록>입니다. 이것은 일본인이 경제적으로 조선의 거류지 무역을 공식으로 허락받는 것으로, 조선은 더 이상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막을 합법적인 방법이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같은 시기에 경제적 침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맺은 추기 규칙도 한번 볼까요?

조일 무역 규칙(1876)

1칙 일본국 상선이 입항하였을 때는 선주는 일본국 인민무역관리관이 교부하는 증서를 한국 관청에 제출하여야 한다.

2칙

일본상선이 하물(荷物)을 양륙(揚陸)하고자 할 때에는 하물의 내용과 수량등을 상기(詳記)하여 한국관청에 제출하고 하선면허를 받아야 한다.

3칙

양륙하는 하물을 한국정부관리가 검사하고자 할 때에는 이에 응해야 한다.

4칙

출하하물에 대해서도 하주(荷主)가 그 하물의 내용과 수량 등을 상세히 한국관청에 보고하고 출항하물면허를 받아야 하며 하물의 검사에 응해야 한다.

5칙

일본상선이 출항 할 때에는 전일 정오까지 이를 한국관청에 보고하고 출항면허를 받아야 한다.

6칙

금후 한국 제항구에서 양미(糧米) 및 잡곡을 수출입 할 수 있다.

7칙

항구로 들어오는 상선은 항세를 납입해야 한다. 단 일본정부소속 선박은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

8칙

한국정부 또는 인민이 제물품을 부개항장의 해안에 수송코자 할 때에는 일본국 상선을 고용할 수 있다.

9칙

일본국 선박이 허가없이 조선국의 항구에 내항하여 물화를 매매해서는 안되며 이를 어길 때에는 그 물화를 한국관청이 몰수한다.

10칙

아편의 판매를 엄금한다.

11칙

이 조약은 조인과 더불어 효력이 발생되고, 각 임원(任員)의 상의(商議)로 개정증가(改正增加)할 수 있다.

이러한 조약들로 인하여 우리는 개항장에서의 모든 일본인의 권리를 인정하게 됩니다. 즉, 개항장에서 일본인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주고, 일본의 화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조약들 속에 <무관세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이 무관세 보장에 의하여 일본이 파는 <영국산 면제품>을 막을 방법이 없게 되었으며, 일본인이 조선의 쌀을 유출하는 것도 막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수호부록 11조에 적혀있는 <양국의 무역을 다시 조정할 때에는 1개월 전에 통지한다>는 원칙도 문제가 됩니다. 훗날 <방곡령>이 일본에 의해 저지되는 것도 이 1개월 통지 약관에 따른 것이니까요.

일본은 우리 항구인 부산 부산, 인천, 원산 등을 차례로 개항하고 조계를 설치함으로서 점차 조선에서의 경제 침투를 가속화합니다.

3. 조선의 무역 구조 - 3종류의 무역으로 전개되다.

강화도 조약과 추가 경제 조약들은 <조선의 전통 경제 구조>를 크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서 일본 상인들이 활동하면서 1876년부터 1882년까지의 대 조선 무역은 일본이 주도해 나갑니다.

이 당시 무역은 3종류의 무역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첫 번째 무역은 일본과의 조약을 통하여 <거류지 무역>이 활성화 된 것을 뽑을 수 있습니다. 거류지 무역이란, 조약을 통해 개방한 항구와 조약으로 규정된 항구의 일정 거리 이내에서의 장사를 말합니다. 즉, 초기 조약이 항구를 개방하고 항구에서 10리까지의 무역권을 일본에 허락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이 항구 10리안의 주요 포구를 거점으로 활발하게 무역을 전개합니다.

두 번째 활성화된 무역은 <조선인의 중개무역>입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개항장에 와서 10리 안에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주로 조선에 판 것은 영국산 면제품이며, 조선에서 무관세로 가져가는 것은 쌀, 콩, 소가죽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10리 안에서 무역을 하겠다는 원칙 때문에 항구와 내륙을 연결하는 조선 전통의 상인들이 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바로, 객주, 여각으로 대표되는 전통 상인들의 성장을 가져오게 되죠. 특히, 항구와 먼 내륙지를 이동하면서 물건을 파는 부보상들(교과서에서는 보부상으로 표기)들은 많은 돈을 벌게 되죠. 그러나, 이후 항구에서의 무역거리가 100리 이상으로 확대되고, 조청무역장정으로 외국인의 내륙무역이 허가되면서 전통 상인들은 외국 상인에 의해 몰락하게 됩니다.

세 번째 무역은, 일본의 약탈 무역입니다. 일본은 자신들의 물건을 반 강제로 팔기도 하였습니다.

4. 청나라의 대응 -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1882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이 조선 무역을 독점하면서 청나라는 긴장하게 됩니다. 특히, 일본이 조선과 맺은 영사재판권, 화폐사용권, 치외법권, 무관세 규정 등은 조선에서의 청의 입지를 한없이 좁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1880년대 청나라는 조선의 어떤 사건만 있으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여 <청이 조선의 정치, 경제적 지배국가>라는 것을 확인하려 합니다. 또, 조선시대 이래 실제적 조공관계로 규정되던 청과 조선의 관계를 실제적 속국관계로 전환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임오군란 때의 청의 개입입니다. 청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출병하여 조선의 내정을 완전 장악하고, <위안스카이의 고문정치>를 시작합니다. 또, 갑신정변 때 김옥균이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며 내정을 장악하려 하자, 청불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무리할 정도로 많은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여 개화파를 완전 진압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을 체결하여 경제적으로 일본과 동등한 내용의 조약을 체결한 뒤, 더 많은 경제적 이권을 약속받게 됩니다. 그럼 장정의 내용을 볼까요?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1883)

전문(前文) : 조선이 속방임과 청상의 특혜규정
 “오직 이번에 체결하는 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후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다른 각국과 일체 균점하는 예와 다르다”

 제 1조 청국 상무(商務)위원의 파견 및 이들의 처우,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이 대등한 위치임을 규정.
 제 2조 조선내에서의 청 상무위원의 치외법권을 인정
 제 3조 조난구호 및 평안.황해도와 산동.봉천 연안지방에서의 어채 허용(청국인의 조선연안 어업권을 인정). 관세규정
 제 4조 북경과 한성.양화진에서의 개잔(開棧)무역을 허용하되 양국상민의 내지채판(內地采辦) 금지. 단 내지채판 및 유력(遊歷)이 필요할 경우 지방관의 집조(執照)를 받을 것.(개항장이 아닌 서울 양화진(楊花津)에 청국인이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와 도성에서의 상행위 허용. 호조(護照:일종의 여행증명)를 가진 자에게는 개항장 밖의 내륙통상권과 연안무역권까지 인정) 관세규정.
 제 5조 세칙규정. 책문.의주, 훈춘.회령에서의 개시
 제 6조 홍삼무역과 세칙규정(국경무역에서 홍삼을 제외한 5 % 관세)
 제 7조 초상국윤선(招商局輪船) 운항 및 청 병선의 조선연해 왕래.정박
 제 8조 장정의 수정은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의 자문으로 결정.

이 문서를 보면, 일본과 맺은 <조약>과는 달리 <무역장정>이라고 표기하였습니다. 장정은 대등한 양국의 협정문이 아니라 중국이 속방과 맺는 협정문입니다. 임오군란으로 조선의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청나라가 <경제마저 일본을 누르기> 위한 조치로 맺은 장정입니다.

문제는 이 조약에 내륙통행권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청은 일본보다 한술 더 떠서 아예 내륙지 무역까지 하겠다고 일방적인 협정을 체결한 것이지요. 조선의 경제는 이 협정에 의해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그러나, 이 협정은 비단 청나라에게만 적용되는 협정이 아니였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동안 거류지 무역 및 개항장 무역 만을 하던 일본 등 외국들은 이 조약을 계기로 앞다투어 최혜국 대우를 요구하면서 내륙무역을 요구하게 됩니다. 최혜국 대우는 예전에 여러번 이야기 했었죠? 최혜국이란, 어느 한 나라가 조약을 맺을 때 그 조약의 내용이 제 3국과 체결한 조약의 내용과 불리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청과 맺은 조약의 좋은 내용들은 일본 등 다른 나라와의 조약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본 역시 이러한 논리를 내세워 다시 <조일통상장정>을 다시 체결하도록 강요하였고, 이 일본과의 <장정>으로 일본과 거류지 무역권을 확보하고 조선 경제에 더욱 침투하게 됩니다. 덕분에 조선의 객주, 여각, 보부상 등 항구 100리 밖에서 중개무역을 하던 전통상인들이 크게 몰락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이 조약으로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은 외국과 조선간의 중계무역을 하던 여각, 객주 등 조선 상인들입니다. 조선 상인들이 몰락하면서 조선의 경제권은 점차 외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청과 일의 이 경제적 침투를 보시면,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왜 청과 일본이 치열하게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해야 했는지 경제적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5. 청과 일본은 조폭 수준으로 조선의 경제를 흔들어 놓았다.

조선과 각각 무역장정을 맺은 청과 일본은 이제 조약의 내용대로 조선 경제를 침투해 나갑니다. 요즘 뜨고 있는 무이자! 무이자! 외치는 대출광고처럼 한번 무역을 하기 시작하면 그 조약의 내용 때문에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지요.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의 경제는 일본의 독무대였으나, 청의 반격으로 조선은 두 나라 사이에서 심한 경제적 압력에 시달려야 했고, 내륙무역이 허가되면서 조선 전역에 그 여파가 미치게 됩니다.

청나라는 그나마 조선과 비슷한 경제단계였기 때문에 침탈적인 경제활동보다는 <우세한 자본과 대규모 인력>을 활용하는 중개무역을 주로 하였습니다. 청은 조선의 물건을 가져가기 보다는 자국의 물건을 판매하는 쪽으로 무역의 기준을 잡았죠.

그러나 산업혁명이 끝나지 않아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은 조선의 쌀, 콩을 최대한 쥐어짜서 일본에 가져가려 했고, 그 비용은 영국산 면직물을 대량 판매하는 것으로 충당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경제적 침탈은 뜻대로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의 대조선 영향력>이 매우 급상승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본은 청에 대한 불만이 아주 많았죠. 청일전쟁의 경제적 배경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청일 양국이 더욱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거의 깡패수준으로 우리 포구에서 행패를 부렸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두모포 사건을 볼까요?

두모포 사건은 1878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정부의 관세방침과 일본의 무관세 규제가 충돌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조선정부는 포구의 대외무역이 활발해지자, 막대한 상업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조선은 두모포 등의 포구에 포구세를 걷기로 하였는데, 일본은 이것이 무관세 규정에 어긋난다면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합니다. 조선정부는 두모포와 같은 개항장 밖에서의 관세는 규정과 상관없는 <조선의 내정>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말로 이길 수 없자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하였습니다. 즉, 일본 상인과 부산 주둔 일본 해병대가 해관을 습격하여 점령해 버린 것이죠.

결국 조선은 일본의 압력으로 개항장 밖에서의 관세마저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후 일본은 개항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장시에 대한 관세도 폐지하라고 정부를 협박하였고, 정부는 일본에 굴복하였습니다. 결국 우리 정부는 상품에 대한 직접 과세를 받지 못하자, 자릿세나 영업세 등의 부가적인 일부 세금만 징수하게 됩니다.

청과도 이러한 마찰이 있었습니다. 1886년 청나라는 모든 경제적 면에서 일본보다 우월한 지위를 요구하면서 인천 해관을 습격하기도 합니다. 우리 정부는 역시 속수무책이었지요.

이러한 청, 일본의 경제적 협박은 조선 전반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전통상인들은 객주, 여각 등은 강화도 조약이후의 중개무역으로 어느 정도 자본이 축척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청, 일본 상인들과 맞서 조직을 만들고 상권을 지켜나가기 위한 투쟁을 시작합니다.

조청수호조규의 속약(제물포 조약의 추가 협약)

제 1조. 부산, 원산, 인천항의 강행이정을 사방 50리로 하고, 1년 뒤에 양화진을 개시한다.

제 2조. 일본 공사 영사와 수행원이 조선 내지에서 자유롭게 여행을 한다.

- 고종실록 권 19, 고종 19년 7월 17일 -

위 조약은 갑신정변의 결과로 맺은 제물포 조약 때 일본이 청과 대등한 경제적 위치를 점하기 위해 맺은 속약입니다. 위 내용을 보면 일본 역시 청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자유로운 무역이 점차 가능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청일전쟁 이후 무역의 주도권은 일본에게 넘어가다.

청과 일본의 대조선 무역 쟁탈전의 승자는 일본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서 조선의 무역은 또 한차례 크게 흔들립니다.

먼저 <영국산 면제품 - 조선의 쌀, 콩>으로 이어지던 대일 무역이 더욱 강화되면서 미면교환체제가 일본의 대조선 무역형태로 확고하게 자리잡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에게 넘어갔던 대조선 무역이 일본의 독점으로 넘어간 것이지요.

특히, 청일전쟁을 겪을 무렵 1차적으로 산업화를 완성한 일본은 영국산 면제품이 아닌 일본산 면제품을 조선에 내다 팔면서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됩니다. 일본이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되면서 조선의 쌀은 더 많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쌀을 생업으로 하는 많은 소작농들이 몰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쌀을 상업적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된 지주층들은 일본과 협력하여 많은 이익을 남기게 됩니다. 즉, 일본의 대조선 무역이 농민층의 몰락과 지주층의 성장을 돕게 된 것이지요.

일본이 쌀을 많이 사갈수록 쌀값이 폭등하면서 농민이 망해갔습니다. 쌀을 상품으로 내댜판 지주들은 그 이익금을 토지에 재투자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입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식민지 지주제도>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일제시대를 구분하는 사회구분법으로 흔히 <식민지 반봉건제도>를 말하곤 하는데, 이것은 조선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자들은 <제국주의 일본세력>이지만, 조선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자들은 <식민지에서 토지를 가지고 돈을 번 지주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선은 1889년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쌀이 부족한 북부지역 지방관들이 <방곡령>을 반포하고 일본에 쌀 수출을 금지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방곡령은 <조약 개정시 1개월 전에 통보한다>는 일본과의 조약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여 오히려 일본에 벌금만 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후, 농민들은 더욱 더 분노하였고, 이것은 동학농민운동의 경제적 배경이 됩니다.

7. 청이 사라진 자리를 러시아가 메꾸려 하다.

청일전쟁이후 1894년에서 1896년은 일본이 조선의 경제를 장악합니다. 그러나, 청일전쟁 직후 삼국간섭에 의해 일본이 요동반도를 다시 청에 할양하게 되면서 조선에도 새로운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와 친해짐으로서 일본을 견재하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일본이 그 의도를 알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킴으로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게 됩니다.

아관파천으로 조선의 정치권은 러시아의 영향아래 들어갔고, 철도, 산림, 광산 등의 큰 이권들은 외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일본은 10년뒤인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마저 조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모든 경제권을 손에 쥐게 됩니다.

8. 러일전쟁 후 합일합방 이전까지의 경제정책

러일전쟁 후 일본은 을사조약(1905)를 맺고, 조선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 실시한 것이 바로 <차관제공> 정책입니다. 이것은 조선의 화폐를 정리한다는 명복으로 재정적으로 조선을 예속화하는 정책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화폐로 바꿈으로서 전통적 화폐를 사용한 조선 상인들을 몰락시키고,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 터를 잡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화폐정책> 포스트에서 다룰께요.

화폐정리사업으로 조선의 전통적 상인들이 몰락하자, 다음으로 토지약탈을 합법화 하기 위한 다양한 법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본의 의도를 알고 범국민적으로 일본에게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면서 <자주국권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언론활동을 통하여 열강의 약탈성을 알리고 열강의 이권침탈을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독립협회는 러시아 절영도 조차 요구를 거절하는 입장을 보였지요.

이 독립협회와 연계되어 상권수호운동을 벌인 단체가 황국중앙총상회였습니다. 이들은 시전상인을 중심으로 상업자본육성운동을 벌이면서, 각종 회사를 설립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생각한 경제적 자주권이란, 민족자본을 육성하여 일본과 대등히 맞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반대로 좌절되었지요.

또, 일본이 빌린 차관을 갚아 버리자는 국채보상운동도 전개됩니다. 대구에서 서상돈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의 신무사들의 호응을 얻어 애국계몽운동(왜 명칭이 애국인지 모르지만, 교과서에서 그렇게 부릅니다.)과 연계되어 대대적으로 일어납니다. 양기탁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하였고, 국민들이 돈을 모아 일본의 차관을 갚아 버리려고 하였지만, 결국 일본의 집요한 방해로 실패하고 말죠.

오늘 포스트는 원래 청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만을 다루고, 몇가지 사료를 보는 선에서 쓰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져서 일제시대 직전까지 전개되어 버렸네요. 뒷부분에 간략하게 다룬 이야기들은 해당 시대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이 자료는 각 교육청 기관 중고등부 학습 자료실에서 만든 자료입니다.
   따라서 이 자료는 학습 목적 외에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 자료들은 사이트내에서 중고등부 한국사 모의시험 출제를 위해 수집하고 있습니다.

플래시 출처 : 에듀넷 중앙학습자료실(경남교육청 자료실)    고용호의 사회교실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을 사 조 약

일본국 정부와 한국정부는 양제국을 결합하는 이해공통의 주의를 공고히 하고자 한국의 부강의 실(實)을 인정할 수 있는 때에 이르기까지 차목적(此目的)을 위하여 좌(左)의 조관(條款)을 약정함.

제1조
일본 정부는 재동경 외무성(外務省)을 경유하여 금후에 한국이 외국에 대하는 관계 및 사무를 감리(監理)·지휘할 것이요,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는 외국에 있어서의 한국의 신민(臣民) 및 이익을 보호할 것임.

제2조
일본 정부는 한국과 타국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는 임무에 당하고 한국 정부는 금후에 일본국 정부의 중개에 경유치 않고서 국제적 성질을 가진 하등의 조약이나 또는 약속을 하지 않기를 상약(相約)함.

제3조
일본국 정부는 기(其)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폐하의 궐하(闕下)에 일 명의 통감을 치(置)하되 통감은 전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하여 경성에 주재하고 친히 한국 황제폐하에게 내알하는 권리를 유(有)함. 일본국 정부는 또한 한국의 각 개항장급, 기타 일본국 정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지역에 이사관(理事官)을 설치하는 권리를 有하되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 일본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아울러 본협약의 조관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하여 필요로하는 일체의 사무를 장리(掌理)할 것임.

제4조
일본국과 한국과의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 및 약속은 본협약에 저촉하지 않는 한 다 기 협력을 계속하는 것임.

제5조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유지하기를 보증함.

右 증거로 하여 각 본국 정부에서 상당한 위임을 受 본협약에 기명 조인함.
   광무(光武) 9년 11월 17일
   외부대신(外部大臣) 박제순(朴齊純) 인
   명치(明治) 32년 11월 17일

               특명전권공사(特命全權公使) 하야시 곤스게(林權助) 인

-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구한말조약휘찬》상, 1965) -

참고글 :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1902년 영일 동맹을 체결하고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합니다. 이후 1904년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여 군사요지를 점령한 뒤, 1904년 8월 1차 한일협약으로 제정(메가다), 외교(스티븐슨)의 고문정치를 실시합니다.

1905년에는 7월 카스라테프트 밀약으로 조선의 지배권을 미국으로부터 인정받고, 8월에는 2차 영일동맹으로 영국으로부터의 지배권을 승인받습니다. 9월에는 포츠머드 조약으로 러시아로부터 지배권을 승인받고, 11월 2차 한일협약(을사조약)으로 우리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정치를 실시합니다. 1907년에는 한일 신협약 - 정미 7조약으로 차관정치를 실시하고, 1909년 기유각서로 사법권을 강탈한 뒤 1910년 한일합방을 합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