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토막 역사 13화) 개항기 때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돈이 쓰였을까?

1. 조선 후기에 어떤 돈을 쓰고 있었나?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한반도에서도 <화폐>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럼 조선 후기 이후 개항기까지 어떤 돈들이 주로 쓰였을까요?

우리나라에서 국가가 주도하여 화폐가 쓰인 것은 고려 성종기부터입니다. 중앙집권이 이루어지고, 최승로의 건의로 유교정치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고려 초기초기부터죠. 이 때의 화폐란, 국가가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어 행정적으로 사용하기 쉽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화폐유통을 권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 백성들은 돈의 효용성을 몰랐지요. 고려 시대 유명한 스님인 의천도 화폐 유통이 국가경제와 사원경제를 원할하게 하여 결과적으로는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 국가의 세금은 현물세로 내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토지세는 쌀과 콩으로, 군역은 군포로, 특산물세는 각 지역의 특산물을 직접 내는 형태였죠. 이러한 현물을 운반하는 것도 일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세금을 내기가 힘들었습니다. 조선시대 대납(대신 내주고 이자붙여 받는 것), 방납(미리 내주고 후에 받는 것)과 같은 형태의 세금내기가 유행하기도 하였습니다.

화폐가 본격적으로 유통된 것은 조선후기 상평통보가 사용되면서입니다. 보통 가운데가 뻥뚫린 이러한 엽전은 사용하기도 간편하였고, 가운데 구멍에 돈을 꿰어차고 다니기도 용이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화폐가 본격적으로 유통되었음에도 시중에 화폐가 없어서 곤란을 겪는 <전황>이 종종 발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화폐가 재산으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부자들이 화폐를 저장하기만 하였지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계속 화폐를 발행하고, 부자들은 계속 화폐를 저장만 하니 돈의 진정한 가치 중 저장가치만이 제 기능을 한 것이죠. 유통가치, 교환가치로서의 돈이 사용되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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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2. 갑오개혁 이전에 사용했던 화폐들

조선 후기부터 사용된 대표적인 돈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엽전>입니다. 영조, 정조 때 이 엽전은 돈의 구실을 제대로 하였고, 사람들은 돈을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동김씨 등이 집권한 세도정치 때에도 탐관오리들은 백성들을 착취하곤 했는데, 그 때에도 돈의 가치를 이용하곤 하였습니다. 이자를 붙여 돈을 늘리는 고리대업을 할 줄 알았던 것이죠.

이후 흥선 대원군이 집권한 이후, 초기에는 화폐의 균형이 잡히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기존의 돈을 걷가나, 마구 새로운 돈을 발행하여 큰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하는 사람만 내라던 <원납전>은 백성들에게 강제로 걷었기 때문에 <원망하면서 납부한다는 뜻의 원납전>으로 말이 바뀝니다. 또 새로운 돈인 당백전을 마구 찍어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더욱 고달팠고, 시중에 돈이 남아도는 관계로 인플레이션을 겪기도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돈이 부족해지자 청나라 화폐를 수입하여 국내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청전>이라고 합니다.

대원군 이후, 민씨 정권이 정치를 하면서 청, 일본 등과 본격적인 무역을 시작하였습니다. 1880년대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돈들이 유통되기 시작합니다. 물론, 1894년의 갑오개혁까지 우리나라의 공식화폐는 엽전이었지만, 유통된 화폐는 다양해졌죠.

1880년대 초기에 청, 일본과 무역을 하기 위해 사용한 화폐는 멕시코의 은화였습니다. 신항로 개척 이후 가장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돈이었고, 당시 세계 금융시장이 은본위 화폐제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지요. 그런데, 점차 일본과의 무역량이 많아지면서 일본의 화폐가 조선시장에 들어오게 됩니다. 무역시장에서 주로 사용하던 <멕시코 은화>가 점차 <일본 은화>로 전환되기 시작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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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은화


해외 국가들과의 접촉이 많아지자, 정부는 엽전보다 더 큰 단위의 돈을 만들었습니다. 1883년부터 엽전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된 돈이 <당오전>이라는 돈입니다. 당오전은 <엽전 5개의 가치는 갖는 돈>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돈의 가치는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불량 화폐가 너무 많이 많들어져서 시중에서 당오전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돈의 실제 가치는 상당히 낮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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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당오전


3. 갑오개혁 이후에 사용하게 된 화폐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본격적으로 갑오개혁이 추진되면서 화폐도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이 새로운 돈이 바로 <백동화>입니다. 백동화는 갑오개혁 때부터 주조되었고, 대한제국기에 대량으로 주조되면서 엽전을 대체하였습니다. 이 돈의 명칭이 백동화인 것은 원료가 <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백동화는 엽전 24개의 가치를 갖는 돈이었습니다. 당오전이 엽전 5개인데, 백동화가 엽전 24개의 가치를 갖는 돈이라면 당시 물가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겠네요.

갑오개혁 때 사용된 또 다른 돈은 <일본 지폐>였습니다. 일본 지폐는 청일 전쟁 때 일본이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대량으로 사용하면서 유통되기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897년 일본이 은본위제에서 금본위제로 화폐단위를 바꾸면서 <일본은화> 대신에 <일본지폐, 일본금화>가 많이 사용됩니다. 일본은화와 일본금화, 그리고 우리나라의 백동화는 그 가치를 같게 하여 1:1:1로 교환할 수 있는 화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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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금화


그리나, 백동화 역시 당오전과 마찬가지로 불량 화폐가 너무 많았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백동화와 엽전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고, 백동화는 점점 가치가 하락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백동화와 일본은화(일본금화)는 실제로는 1:1의 가치였지만, 사실 백동화 2개 이상을 주어야 일본은화와 바꿔주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일본화폐가 조선에서 대량 유통되면서 생길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조선에서 대량 유통되는 일본화폐가 일본의 농간으로 모두 일본에 환수된다면 조선은 화폐 공황을 맞아 큰 위기가 닥칠 수 있었습니다. 조선에서는 환수되는 일본 은화와 구별하기 위해 조선에서만 유통되는 은화에 도장을 찍었고, 도장을 찍은 은화는 조선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을 <각인 부은화>라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개항기에 조선에서 유통된 화폐들은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후기 우리 상업은 충분히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 외국과의 무역 개방은 상인들에게 큰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체계적이지 못한 화폐단위는 상인들에게 변수로 작용하였습니다. 훗날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면서 실시한 화폐개혁으로 우리 상인들은 모두 몰락하게 됩니다.

일본이 실시한 화폐개혁이란, 백동화를 모두 일본화폐로 바꾸고, 일본화폐만을 공식화폐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량 백동화는 바꿔주지 않았고, 그 교환도 1:1의 맞교환이 아니였기 때문에 어지간한 재력이 있는 상인이 아니면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흥선대원군 시대, 격동의 한국사 속에서 어떻게 봐야할까?

이번장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정책에 대하여 논의해보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1863년부터 1873년까지 약 10년간 정치를 이끌며 한국 근현대사의 주된 흐름을 이끌어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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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화와 척사가 난립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직전의 한국사회는 개화, 척사라는 두 흐름이 정치 전반에 긴장감을 주던 시기였습니다. 1860년대, 서양에서는 이양선을 보내 아시아 각국에 통상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또 중국은 서양에 의해 베이징을 점령당했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차지하여 우리와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죠.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을 차츰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860년대 초부터 이항로 등의 유학자들은 외국과의 통상이 국내 경제에 미칠 영향이 어떤 것인가를 분석하면서 <통상반대운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반대로 양반인 박규수, 중인출신인 오경석과 유홍기 등은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만 이후 조선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개화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오경석은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의 도서를 국내에 소개하였고, 이것은 훗날 조선책략, 만국공법과 함께 개화정책의 지침서가 됩니다.

또 순조 때의 효명태자와 같은 집권층 사람들은 세도정치 하에서 강력한 <국왕권>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개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도정치 하에서는 이러한 개화, 척사의 논의보다는 안동김씨 일문을 비롯한 정치가문의 정치적 논리가 우선이었으므로, 이러한 개화, 척사의 논의가 본격화되지 못하였습니다.

2. 대원군이 등장하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서 고종의 어린 시절 <강력한 국왕권 확보>를 위해 개혁정치를 실시한 사람입니다. 그는 순조,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안동김씨 등 일문독재의 세도정치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상가집 개라고 불릴 정도로 미친척을 하여 안동김씨 세력을 안심시키면서, 자신의 아들을 안동김씨집안에서 이의없이 왕위에 올릴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종이 왕이 된 후 흥선대원군은 <대원군>으로서 정치를 독점하고, 안동김씨 일문을 축출하여 세도정치가 마감됩니다.

그의 정치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정확보와 민생안정을 통한 <강력한 왕권 확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흥선대원군의 정치가 민생을 안정시키고, 소농과 상인층을 보호하면서 세도정치 가문의 병폐를 근절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원군의 목적은 <농민보호>가 이니였습니다. 농민보호와 상인보호는 <왕권강화>를 위한 조세원 확보책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그럼 하나 하나 대원군의 정책을 짚어볼까요?

3. 왕권 강화를 시도하다.

흥선대원군은 집권후 가장 큰 목적인 <왕권강화>를 위해 세도정치와 관련된 인물들을 비롯하여 신권을 축소시키는 개혁을 시도합니다.

먼저, 조선 후기에 강해진 비변사를 축소합니다. 원래 조선 최고의 기구는 의정부였는데, 임란과 호란 이후 임시 군사기구였던 비변사에 신하들이 모여 붕당정치를 실시하면서 <비변사>가 조선 최고의 기구가 되는 변태정치가 실시되어 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약해진 왕권 강화를 위해 신권 기구인 비변사의 기능을 줄이고, 의정부 기능을 복원함으로서 <국왕권>이 주도하는 중앙정치로 환원시킨 것입니다.

다음으로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합니다. 경복궁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궁전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을 버리고 선조가 북으로 피난가자 백성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복궁에 불을 질렀습니다.경복궁을 중건한다는 것은 곧, 떨어진 왕실 권위를 회복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죠. 그러나, 경복궁 중건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드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을 징수합니다. 원납전이란, 원래 <원하는 사람이 납부하는 돈>이란 뜻이었는데, 점차 국가는 이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여 경복궁 중건에 투입합니다. 백성들은 반강제적인 원납전을 <원망하면서 내는 돈>으로 바꿔불렀다고 합니다. 또 동대문부터 북대문까지 4대문과 4대문 사이에 있는 소4문을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문세>를 받아 자금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역을 늘려서 백성들을 무상으로 일을 시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비가 부족해지면 <당백전>이라는 돈을 찍어서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 당백전 발행으로 시중에 돈이 너무 많아져서 인플레이션 현상이 심화되었고, 백성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리더쉽으로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보장하여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들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다시 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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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흥선대원군, 경복궁 근정전, 당백전>

대왕대비가 경복궁 중건을 명하고 다음 날 3일 시원임 대신을 회정당에 불러 중건 대사를 대원군에 위임하였다. 경복궁 영건 때의 비용과 백성의 역에 대한 절차를 의논하였는데, 백성의 노역 문제는 신중을 기하고, 안으로 재상 이하 밖으로는 지방 수령 이하가 역량에 따라 보조하며, 선비, 서민층은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자진 납부하는 자는 상을 주기로 하고 이 뜻을 8도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미 서울의 원납전이 20만량이 되었다.

- 승정원일기, 고종 2년 4월 2일, 5일 -

또 대원군은 자금 확보를 이유로 전국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정리해버립니다. 흥선대원군은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은 공자가 살아돌아오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명분을 강조하면서 서원을 철폐합니다. 서원 철폐는 양반계급이 대원군을 적대시하게 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를 계기로 지방 양반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족이 있는 곳마다 평민을 못살게 굴지만 가장 심한 곳이 서원이었다. 먹도장을 찍은 다음 편지 한통을 고을에 보내서 서원 제수전을 바치도록 명령하였다. 사족이나 평민을 물론하고 그 편지를 받으면 반드시 주머니를 쏟아야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서원에 잡혀가 혹독한 형벌로 위협을 받았고 화양동 서원 같은 곳은 그 권위가 더구나 강대하여 그곳에서 보내는 편지를 화양동 묵패지라 하였다.

백성들은 탐학한 아전들에게 시달렸는데 여기에 또 서원 유생에게 침탈을 당하니 모두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원망을 하고 이를 갈아도 하늘만 쳐다볼 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대원군이 영을 내려 나라 안 서원을 죄다 허물고 서원 유생들을 쫒아 버리도록 하였다. 감히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하니, 사족이 크게 놀라서 온 나라 안이 물 끓듯 하였고 대궐 문간에 나아가 울부짖는 자도 수십만이나 되었다. 조정에서는 어떤 변이라도 있을까 하여 대원군에서 이렇게 간언하였다.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선비의 기풍을 기르는 것이므로 이 명령만은 거두기를 청합니다.>

대원군은 크게 노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유를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에는 도둑의 소굴로 됨에 있어서라.>

드디어 형조와 한성부 나졸들을 풀어서, 대궐 문 앞에서 호소하려는 선비를 강 건너로 몰아내 버렸다. 여러 고을에서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영을 거행하지 못했는데, 대원군이 먼저 한 고을 원을 파면시키고 무거운 벌을 시행하니, 이에 여러 도에서는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일시에 서원을 철폐시킬 수 있었다.

다시 8도에다 암행어사를 보내니, 사족으로서 평민을 침해한 자가 있으면, 그 몸에 죄를 주고 재산을 몰수하니 떵떵거리는 집안들도 숨을 죽이고 감히 나쁜 짓을 못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춤추고 칭송하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체제 정비도 시도하였습니다. 먼저 수령에 대한 조목을 수정하여, 조세징수를 부당하게 하는 수령들을 적발하여 처벌하였습니다. 또 오래된 붕당정치와 일문독재정치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파와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계승한 정책도 실시합니다. 실제 대원군의 국정 운영을 잘 살펴보면, 정조기 <탕평책>으로 활용했던 정책들이 상당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원군이 집권한 뒤 어느 공회 석상에서 음성을 높여 여러 대신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겠으며 태산을 깎아 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떠시요?>

대저 천리지척이라는 말은 종친을 높인다는 뜻이요, 남대문 3층이라는 말은 남인을 천거하겠다는 뜻이요, 태산을 평지로 만들겠다는 것은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의사이다.

- 매천야록, 갑오이전 -

또 이러한 체제 정비를 체계화 하기 위하여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편찬하였습니다. 조선의 법전은 경국대전으로 완비된 이래, 새로운 사회변화에 따라 법전을 일부 개편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영조의 속대전, 정조의 대전통편은 이러한 사회변화를 반영한 대표적인 법인데, 대원군이 대전회통을 발표함으로서 보다 왕권위주의 사회개혁을 표방하는 체제정비가 이루어졌습니다.

4.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다.

삼정이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세금은 전정(전세 : 토지세), 군정(군포세 : 군역세), 환곡(이자세)를 말합니다. 원래 조선의 세금은 토지에 부과하는 전세를 바탕으로 하되, 백성들이 국가에서 몸으로 때우는 역을 추가로 설정합니다. 역이란, 실제 일을 하는 요역과 군에서 일하는 군역이 있는데, 군적수포제 이후 군역은 세금항목화 되었습니다.(조선시대 군역편을 참조하세요) 환곡은 원래 국가가 농민에게 춘궁기에 쌀이나 종자를 빌려주고, 수확기에 돌려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운반 등에서의 손실분을 메우기 위해 일분모회록을 작성하여, 약간의 이자를 받았는데, 이후 국가가 가난해지면서 이 이자를 세금처럼 늘려 받게 됩니다. (환곡편을 참조하세요)

이러한 삼정이 세도정치기에 무척이나 문란해집니다. 전정은 토지세를 엄청나게 늘려받았습니다. 토지 측량에서 관리들의 부정이 많아지고, 토지를 재는 <척>도 제각각이 됩니다.

군정은 균역법이후 군포 2필을 1필로 감해주어, 이 1필만 내면 군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은 군적을 속여 군포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를 16세 이상이라고 속여서 군적에 올리거나, 여자를 남자로 속여 군적에 올리는 행위(황구첨정), 죽은 사람을 죽지 않았다고 하면서 군적에 올리는 행위(백골징포), 도망간 자의 이웃이나 친척에게 군포를 받는 행위(족징, 인정) 등이 대표적인 군적 문란의 예입니다.

환곡은 더욱 심하여, 백성들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빌려준 후 이자를 계속 배로 받아 원곡보다 이자가 몇 배 증가하는 경우, 강제로 대출해준 다음 고리대처럼 이자를 받는 경우, 겨가 섞인 불량쌀을 빌려준 후 받을 때는 품질좋은 쌀로만 받는 경우 등등 경우도 다양했습니다.

대원군은 이러한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전정, 군정, 환곡을 대수술합니다.

먼저 전정에서는 불법으로 토지를 겸병하는 것을 막습니다. 또 국가 몰래 숨겨 경작하던 땅들을 모두 찾아내었고, 만약 숨겨진 땅이 있으면 수령이나 향리를 처벌하는 등 엄하게 토지관련 법규를 정비합니다.

다음으로 군정에서는 유명한 <호포법>을 실시합니다. 호포법은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것으로서 양반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양반들이 자존심 때문에 호포를 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양반들이 군포를 낼 때에는 하인들의 이름으로 납부하게 하여 양반 위신을 세워주었고, 또 매포당 2냥씩으로 균등한 괴세를 매겨 평등한 세금 부과를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환곡제는 완전 폐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관에서 운영하는 환곡이 관리의 부정부패로 인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환곡을 폐지한 뒤 지방자치조직인 <사>에다가 곡식 대여의 임무를 맡깁니다. 이것은 관리의 부정을 방지하면서도, 왕실의 재정과 민생 안정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한 대책이었습니다. 원래 고려 시대 이후 지방에서는 <사창>이라고 하여, 국가가 운영하지 않은 비인가 대여기구가 있었습니다.(고려에서는 국가기구였지만, 조선에서는 의창이 국가기구입니다.) 의창이 공식기구라면 사창은 조선시대의 비공식 백성 구휼기구였던 것이죠. 흥선대원군기에 사창은 국가에 공식 인정되어 국가 환곡을 담당하는 <의창>을 대신하게 됩니다

삼정의 문란이 시정되면서 흥선대원군은 원하였던 재정확보와 왕권강화를 추구하면서도, 농민층의 지지를 받게됩니다. 이후 명성황후의 집권기에 국가조세제도가 다시 문란해지면서 근대화기 우리나라는 대원권의 강력한 정책을 그리워하는 농민층이 많아졌고, 대원군의 이후 복권에도 이러한 정책에 대한 지지가 많은 뒷받침을 했었습니다.

대원군의 삼정의 문란 극복 정책

전정의 수정 : 은결색출

대저 임금이 있으면 나라가 있는데, 금일의 형세는 나라가 있으나 믿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나라라는 것은 민이 모인 것이고 민을 모으는 것은 재물입니다. 안으로는 왕실과 정부가 모두 텅 비고 밖으로는 창고가 모두 고갈되었으니, 녹봉을 계속 지급하기 어렵고 진휼곡은 내주기도 어려우며 생민이 날로 초췌해지고 온 팔도에 소요가 일어나니 흰수건을 둘러쓰고 몽둥이를 든 자가 걸핏하면 1만명이 넘고 관가를 약탈하고 관원을 살해하고 재변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난 역사에 없던 일들로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전하의 나라에 백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승정원일기, 고정 1년 정월 27일 -

영의정 조두순이 아뢰기를

<수령이 경작 토지를 찾아내어 중앙에 보고하는 양이 많고 적음으로서 징벌과 권면의 기준으로 삼기를 청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대왕대비는 여기에 따라 시행하되 회기 내에 실효가 있도록 하라고 답변하였다.

- 일성록, 고종 1년 11월 20일 -

군정의 수정 : 호포제

갑자년 초에 대원군은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그 전의 형태를 바꾸어 모든 양반, 천민에게 1정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세납전 2량씩 고루 바치게 하였으니 이를 동포전이라고 한다.

- 매천야록, 갑오이전 -

환곡의 폐지 : 사창절목

본 창에는 관장할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니 반드시 본면 중 부지런한 자를 택하고 일면회에서 천거하여 관에 보고한 뒤에 뽑니다. 또한 관에서 감히 강제로 정하지 말고 그를 일러 사수라고 하고 환곡을 분급, 수납하는 것을 맡아 검사한다. 또한 각 동에서 근검한 사람을 가려 뽑아 당장으로 삼아 일청 사수가 지휘하고 본동이 받고 내주어 그로 하여금 바로잡게 하며 창고지기 1명도 사수로 하여금 지역에 뿌리박은 자를 잘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맡아서 지키고, 출납하고, 용량을 재서 일체 환곡을 분급받은 백성에게 부칠 일이다.

환곡을 분급하는 규칙은 해당 면에서 각 동 대소 빈부로써 차등으로 삼으며 양반과 상민을 가리지 않고 동네에 분급된 양을 헤아려 지나치게 맣거나 지나치게 적을 우려를 없게 하며, 만약 유망하여 받아내지 못한 곳이 있으면 해당 동에서 골고루 배분하여 채워낼 것이로되 사수와 해당 동장은 모두 경계하고 삼가지 못한 죄로써 심문할 일이다.

- 일성록, 고종 4년 6월 11일 -

5. 쇄국정책을 실시하다

대원군이 국내에서는 강력한 <왕권보호>정책을 실시하였다면, 대외적인 정책은 철저한 <쇄국정책>이었습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강력한 정책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초기에 천주교에 관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정조기 이래 반세도정치 세력들 중에 개화주의자들이 많았고, 대원군 역시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고래 <이이제이 정책>을 생각해두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천주교를 전파하는 것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고 하였죠.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정치 불간섭 및 철저한 인도주의적 선교원칙을 주장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와의 정치적 교섭은 실패하였고,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하고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합니다.(병인박해)

또 당시 대동강 하류에 정박하면서 우리와의 통상을 주장하였던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거부당하자, 평양근처의 민가를 불지르고 약탈을 자행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평양군민들은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버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입니다. 이 프랑스, 미국과 연계된 사건은 우리 정부의 정책이 급격하게 반외세로 돌아서는데 기여합니다.

1866년 프랑스는 강화도에 쳐들어옵니다. 이것이 병인양요입니다. 강화도는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오는 인천물길의 입구로서 통상을 위해서 한양으로 오기 위한 입구입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대외정책상 강화도를 철저히 방비하고, 대포와 함선을 비축해두고 있던 곳입니다. 또 문서를 보관하는 외규장각이 있던 섬이기도 하지요. 프랑스의 침입은 양헌수의 부대를 비롯한 관군이 정족산성 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외규장각의 수많은 문서들이 프랑스에 의해 약탈되었는데, 그 많은 문화재들을 아직도 찾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느낌표의 74434인가에서 대대적으로 방영해주기도 하더군요.

조선 국왕이 프랑스 주교 2인과 선교사 9인 그리고 조선인 신도 다수를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잔폭은 패망을 자초하는것이다. 조선은 중국에 납공하는 나라이므로, 본국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유죄를 정토하러 떠나기 전에 조선 원정을 알리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줄 안다. 조선 국왕이 프랑스 신부를 살해하는 날은 곧 조선국 최후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수일 내로 조선 정복을 위해 출정할 것이다. 조선을 정복하여 국왕을 책립하는 문제는 프랑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시행할 것이다. 전에 수차 귀 아문을 방문하고 프랑스 석교사에게 호조(여권) 발급을 요청하였으나, 귀 아문은 모두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이 비록 중국의 조공국이지만, 모든 국사를 자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호조 발급은 천진조약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본관은 조선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믿고, 이후부터 본국과 조선이 전쟁을 벌이더라도 간섭하지 않기를 선언한다.

- 청계중일한관계사료 제 2권 -

제너럴 사건이후, 시간이 꽤 흘러서 미국도 제너널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1872년 침입합니다.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어재연의 광성보 전투와 평양군민들의 저항으로 미국이 물러나기는 했지만, 이후 미국은 계속적인 통상수교를 요청하곤 합니다.

이후 독일인 오페르트의 상선이 무역을 요청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합니다. 오페르트는 조선과의 통상에 대한 정치적인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대원군의 아버지 <남원군>의 묘를 도굴하려 하다가 실패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과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 도굴사건에 분개하였고, 이 사건은 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유생층이 지지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개화파들도 당시에 개화정책을 입에 담을 수 없도록 하는 효과도 있었죠.

그들의 유골을 잠깐이나마 점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진 자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할 것이며, 서울을 점령하는 것과 다름없는 의의를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원군은 그것을 돌려받기 위해서 누구에게든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일에도 찬성할 것이다. 그러면 그를 강요하여 제안된 조건을 수락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대원군을 강요하여 이 요구를 수락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이것뿐이라는 것이다.

- 오페르트,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  -

사료분석 : 1868년(고종 5) 오페르트(E. J. Oppert:1832~?)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에 관한 사건입니다.  오페르트는 중국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던 유태계 독일상인으로 1866년 2번에 걸쳐 통상요구를 하다가 거절당하였죠. 그러자 그해에 미국인 젱킨스의 지원을 받아 통상조약 체결을 명분으로 상하이에서 조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때 통역으로 프랑스 선교사 1명과 한국인 천주교도 약간 명을 대동하였는데, 이들은 통상요구는 하지 않고 4월 18일 밤에 충청도 홍성군 구만포에 몰래 상륙해 바로 덕산으로 이동했으며, 덕산군청을 습격한 후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쳤답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들은 조선인이 시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관을 미끼로 조약을 체결하려 했던 것 같네요. 하지만 중도에 날이 밝아 도굴은 실패하였습니다. 21일에 이들은 영종진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수비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사상자를 내고 달아났습니다. 이 사건은 국외에도 널리 알려져 젱킨스가 기소되는 등(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남) 많은 파문을 일으켰으며, 대원군이 천주교탄압령을 내리고 대외강경책을 더욱 고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페르트는 이 사건 이후 〈조선기행 A Forbidden Land:Voyage to the Corea〉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예전에는 단순한 도굴사건이 통한 쇄국정책에 영향을 주었다는 책들이 많았는데, 요즘 서적들은 오페르트는 하나의 통상방법으로서 이 수단을 선택하였으며, 치밀한 계획과 조선에 대한 여러가지 상황을 감안하여 실시된 계획적인 사건이라는 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강력한 척양정책을 고수하였고, 이 정책에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대원군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특히 이항로, 최익현 등의 개항반대운동은 대원군 정권의 정통성을 공고히 해주게 됩니다. 또 서양은 조선의 강력한 저항을 보면서, 조선을 독자적인 자주국가로 인정하게 되고, 다른 방향에서의 접근을 모색하게 됩니다. 실제, 유럽 열강들은 당시 자국의 국제적인 관계상 조선까지 쳐들어올 적극적인 이유를 찾지 못하였고, 이후 대조선 정책에 있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으로 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후 척화비를 전국에 세워 반외세 정책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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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때의 강화도 격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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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어재연, 척화비, 대원군의 묘>

대원군기 통상수교 거부정책 : 이항로가 올린 글

또 하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양이의 화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홍수나 맹수의 해일지라도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힘쓰시고 경계하시어 안으로는 관리들로 하여금 사학의 무리를 잡아 베시고, 밖으로는 장병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하도록 하옵소서.

사람 노릇을 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고비와, 존속하느냐 멸먕하느냐 하는 기틀이 잠깐 사이에 결정되오니 정말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한갓 지엽만 다스리고 근본을 제거하지 않거나, 한갓 흐름만 멈추게 하고 원천을 막지 아니한다면 근본의 싹과 원천의 샘솟음을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이의 재앙을 일소하는 근본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전하를 위한 계책은 마음을 맑게 닦아 외물에 견제당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외물이란 것은 종류가 극히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양품이 가장 심하옵니다.

몸을 닦아 집안이 다스려지고 나라가 잡힌다면 양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기이함과 교묘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저들이 기필코 할 일이 없어져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평생 양직물을 입지 아니하고 집안에서 양품을 사용하지 아니하여 그것으로 집안의 법도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잡아죽이고 정벌하는 일과 본말이 되어 서로 돕고 의지하게 되오니 꼭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 화서집 권 3 -

올해 여름과 가을 이래로 외국 선박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 5도에 몰래 출몰하매 혹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가 없었다. 그중에는 상륙하여 물을 길어가기도 하고 때로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데, 그 선박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다.

- 현종실록 15권, 현종 14년 12월 -

대원군의 양이보국책 유시

   (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 때 철저한 항전의 뜻을 정부 관료에게 내린 유시)

1.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친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파는 것이다.

2. 해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3. 적이 경성에 다다를 때 도성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4. 만약 잡술이나 육정육갑(둔갑술 등에 이용되는 신) 따위로, 또는 귀신을 불러 신기하게 침략자를 물리치고자 하면 이후에 생겨나는 폐단은 사학(천주교)보다도 더 심할 것이다.

- 용호한록 권 18, 병인년 9월 4일 -

6. 대원군 정권과 메이지 정권의 마찰이 시작되다.

흥선대원군이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외세에 저항했다면, 당시 일본은 미국에 의해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을 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위해 사신을 보냈고, 1868-1876년까지 조선과 일본에서는 이 새로운 관계를 놓고 대립하게 됩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서계문제>입니다. 서계란, 일본측에서 조선측에 보낸 문서를 말하는데, 이 문서의 형식과 내용이 기존 관례와 너무 어긋나서 대원군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기존 일본은 조선에서 통신사를 받아 문물을 전수받으며 조선에 대한 예의를 지켜왔고 문서 역시 예의있는 표현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메이지 황제는 대원군에게 예의없는 문서, 즉 <대일본제국 천황이 고종의 아버지 흥선이에게 보내는 말투>의 문건을 보내고 새로운 관계설정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 서계를 보낸다, 못받겠다의 논쟁은 68-70년까지 계속되면서 양국의 첨예한 외교문제로 대두합니다. 이것은 메이지 체제의 일본과 조선의 큰 대립이었고, 흥선대원군은 일본과 외교를 단절해버립니다. 흥선대원군은 <왜양일체론>을 말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 역시 서양과 다를 바 없는 <서양 오랑캐>라고 말합니다.

일본은 흥선대원군과의 서계문제를 놓고 당장 조선을 침략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일본의 내수산업을 일으킨 이후에 점진적으로 침략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합니다. 당장 침입하자는 것을 정안론, 천천히 침략하자는 것을 점진론이라고 하는데, 이토 히로부미의 점진론이 받아들여져서 훗날 민씨정권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 부분 산업별로 조금씩 조선에 침투하기 시작합니다. 점진론의 1단계는 경제적 침략이었다고 하네요.

삼가 조선국예조판서 공 각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근래 정세가 일변하여 정권이 황실로 돌아갔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별사를 보내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겠으므로 여기서는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재주 없는 이 몸이 직을 받들어 귀국을 찾았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특히 옛 공로를 어여삐 여겨 작을 올리고 벼슬을 좌근위소장으로 진급시켰고, 다시 교린직을 맡도록 명하셨으니, 오랜 전통이 사라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별사가 가지고 가는 도서(인장)는 새로운 도장을 찍게 하여 우리 조정의 성의를 표하겠사오니 귀국 또한 잘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옛적에 귀국에서 받아온 도서는 원래 전적으로 후의에서 나왔기에 쉽게 이를 고쳐 바꿈이 옳지 않은 줄 아옵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우리 조정의 특명에 따른 것이니 어찌 사사로이 공적인 일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불초 이 몸의 정황이 여차하오니 귀국이 양찰하길 깊이 소망하는 바입니다.

- 메이지 원년 11월 -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대마도주가 보낸 서계 중에 자신을 좌근위소장으로 써온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조선이라는 두 글자는 기왕의 격례에 크게 어긋납니다. 역관으로 하여금 이를 엄중하게 알리도록 하고,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고쳐 올리게 하십시오. 직명이 전과 다른 것은 항식과 항례가 아니거니와, 300년이나 된 약조의 본의가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그들에게 서계를 고쳐 올리도록 분부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이 말에 임금이 윤허하였다.

- 승정원일기, 고종 6년, 12월 13일 -

7. 대원군 정권에 대한 반발

대원군 정권의 정책은 필요한 정책이 많았고, 국가 계층의 고른 지지를 받았습니다. 삼정문란의 극복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고, 쇄국정책으로 양반유생들의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원군에 대한 긍정적인 면들은 대원군의 극단적인 정책에 의해 모두 가려져 버립니다. 서원철폐와 호포법의 실시는 양반층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하면서도 서원정리에는 크게 반발하여 고종의 친정이 필요하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합니다.

대원군 정책에 대한 츼역현의 반발

호조참판 최익헌이 상소하였다.

<지난 나랏일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어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일이 순하지 않아 짧은 시간 안에 다 미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만 그 가운데 더욱 드러난 심한 것을 보면 만동묘(명 의종을 제사하는 사당) 철거로 임금과 신하의 윤리가 썩어졌고, 서원 철폐로 스승과 제자의 의리가 끊어졌고,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일로 아비와 자식의 친함이 문란해졌고, 호존(청나라 돈)을 씀으로서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도 어려워졌습니다.

이 몇가지 조목들이 곧 한 조각이 되어 천리와 인륜이 이미 탕진되어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원납전 같은 것이 표라가 되어 백성과 나라에 재앙을 끼치는 도구가 된 지 거의 몇 년이나 되었으니, 이것이 선왕의 옛 전장을 변화시키고 천하의 떳떳한 윤리를 썩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신의 생각으로는 전하를 위하여 오늘날의 급선무를 말하자면, 만동묘를 다시 설치하고, 서울과 지방 서원을 흥기시키고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일을 금하고 원통한 일을 풀고 부끄러운 일을 씻어 버린 국적에게 추율(죽은 역적을 다시 법을 집행함)을 적용하고 호전 사용을 혁파해야 할 것이며, 토목 공사 원납전도 한 시각이라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대원군의 정치는 <왕권강화>를 위해 백성을 이용하면서,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다고 낙인찍혀 개화주의자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백성들도 신분제 개혁과 지주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대원군의 정책을 100% 지지할 수 없었습니다.

8. 대원군은 긍정적인 인물이었다는 평가

대원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의 중요한 기준은 <전통사회의 폐단을 개혁>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대원군은 삼정의 문란을 극복하고, 기존 세도정치의 잘못된 점을 시정하였으며, 백성들을 위한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특히 대원군의 정책은 정조에서 시작되는 <탕평론>적인 개혁정책이 지속되었다는 것에서도 의의가 있습니다. 정조는 조선왕조에서도 드물 정도의 <유교적 계몽군주> 성격이 강합니다. 서양으로 따지면 <태양왕 루이 14세> 정도의 절대군주라고 할까요?

정조는 상당히 개혁적인 군주였습니다. 그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당파분열을 수습하고 서얼까지 등용하여 능력위주의 관료제를 마련합니다. 그 핵심이 규장각이었죠. 또 장용영을 마련하여 스스로의 상비군을 갖추려 했었고, 상공업 육성을 위해 사도세자의 묘가 마련된 화성을 건축합니다. 또 자유상업을 위해 신해통공으로 금난정권을 폐지하였습니다. 또 대전통편 등 법전을 정비하고, 북학사상을 가진 실학자들을 등용하여 중상주의적 국가체제를 마련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정조 때의 관료군은 모두 몰락하고, 일문독재가 시작됩니다. 물론 정조의 이념은 효명태자 등에 의해 지속되지만, 안동김씨의 입김으로 효명태자는 요절하였죠.

대원군은 이러한 정조의 이념을 부활시키고, 세도정치를 불식시킨 왕입니다. 그는 강력한 상비군을 바탕으로 국가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외세를 몰아내었습니다. 이것은 근대 민족국가를 추구하려던 정조의 이상과 일치합니다. 또 삼정의 문란 극복과 법전정비, 능력위주의 관료 등용 등으로 근대사회로 나아갈 계기를 마련한 왕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통사회의 폐단을 개혁하여 근대사회로 나갈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지요.

9. 대원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

대원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크게 2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그의 개혁 목표가 단순한 <왕권강화>였다는 점입니다. 대원군은 민생안정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즉, 조선 전통의 조세질서를 회복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고, 전제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실제 서원정리도 서원의 특권 폐지를 통한 조세확보였고, 호포제도 양반 등 특권계급에게 조세를 부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경복궁 중건을 위한 각종 세금은 민생 안정이라기보다 백성들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었죠.

따라서 흥선대원군의 왕권강화란 전통사회질서를 정조시대 이전으로 정상화하여 회복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신분제도를 인정하였습니다. 지주제도 인정하였습니다. 전제군주제도 인정하였습니다. 이 3가지는 실제 프랑스 혁명에서 말하는 구제도의 모순과 일치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구제도를 바탕으로 전통적 봉건질서를 부활하려는 인물이었습니다.

대원군에 대한 2번째 부정적 평가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의 문제점입니다. 대원군이 취한 통상수교 거부는 이유없는 반외세로서 근대 사회 발전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원군의 반외세 정책은 성리학적 이념을 가진 유생층의 지지를 통한 반외세로서 백성들의 생활과는 상관없는 반외세입니다. 따라서 개화주의자들은 시대착오적인 유교이념에 따른 반외세적 보수주의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였지만, 대원군은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곤 하였습니다. 대원군 이전 등장한 박규수, 오경석 등의 개화주의자들의 이론은 대원군 집권기에 힘을 잃고, 조선의 개화사상은 10여년의 세월동안 잠복기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민씨정권에서 개화주의자들이 활개치기 시작하지만, 이 때의 개화사상은 이미 민씨정권에 야합한 개화사상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었죠.

대원군의 정치는 결국 반근대적인 전제군주제, 봉건적 신분질서, 지주제적인 중세 토지제도를 강화하는 보수적인 정책이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이 점을 강조하여 대원군을 근대사회에 역행하는 인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원군에 대한 긍정론, 부정론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역사적 난재입니다. 보는 사람의 입장과 각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죠.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는 <강화도 조약>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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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 그리고 콜로누스제도

1.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제국 분할 통치>

군인황제 시대 이래 약해진 로마는 제국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최후의 노력을 시도합니다. 제정 로마가 후기로 가면서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트누스는 강력한 황제권을 유지하기 위한 독재적 개혁정치를 실시합니다. 그럼 이번 장에서는 이들 철인황제들의 개혁 정치를 한번 볼까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정치는 <제국 분할 통치>로 총괄할 수 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명의 황제와 그 2명의 황제 아래 2명의 부황제로 이루어진 황제단이 제국을 나누어 통치하는 4제통치를 실시합니다. 이중 디오클레티아 누스가 최고 황제권을 가지며, 그가 죽을 시 아래에 속한 직속 부황제가 제국을 계승하는 형태의 정치체제입니다. 이것을 실시한 목적인 황제가 죽은 후 군인들에 의해 <제위계승분쟁>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또 동방으로 수도를 옮김으로서 동방의 초인간적이고 신적인 <전제군주제>를 도입하였습니다. 즉, 동방 페르시아식의 강력한 전제군주제를 답습함으로서 강력한 황제권을 갖추는 것입이다. 그리고 여러명의 황제가 제국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것이지요.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분할과 동시에 속주 분할도 추진합니다. 그런데 속주 분할은 로마 제국에 엄청난 재정압박을 가져옵니다. 당시 로마제국은 그 규모가 엄청났으며, 그 엄청난 로마를 유지하기 위한 행정관리의 수와 군대의 수도 엄청났습니다. 이것은 황제에게 커다란 재정적 압박으로 다가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분할과 속주분할의 후속조치로, 로마의 군제 개편을 했습니다. 수도에는 중무장한 기동부대로서 야전 기병을 두었습니다. 국경지배에는 변경주둔군을 둡니다. 기동부대는 출신과 관계없이 능력이 우수한 자를 선별하여 변경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기동력을 발휘하여 변경에 지원가는 부대입니다. 이 당시 싸움을 잘하는 자들 중에는 겁 없는 게르만인들이 많았습니다. 기동부대의 주력은 게르만인이 차지합니다.

변경주둔군은 현지인으로 충당하였지만, 군인수가 현저하게 모자라자 병역의 의무를 세습화시켜 버립니다. 따라서 변경주둔군은 세습화된 현지인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은 강제징집된 경우가 많았으므로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2. 콜로누스제도가 정착되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사실 군대, 행정 개혁이 중심인데, 이러한 개혁은 엄청난 국가재정의 압박을 가져오는 것이였습니다. 따라서 개혁에 뒤따른 세금 증세는 필연적이였고, 이것은 로마 사회의 기본 제도를 흔들어버릴 만큼 파격적이였습니다.

황제는 증가된 세금을 속주에 할당합니다. 속주는 그러한 세금을 각 도시에 할당합니다. 도시의 시참사회와 도시의원들은 그 세금을 몽땅 내야하므로 상당히 부담이 되었겠죠. 따라서 도시에서 떠나려는 사람이 늘고, 도시 의원을 포기하려는 자들이 속출합니다. 황제는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도시사람들의 직책을 고정시키고, 그 직책을 세습하도록 강요합니다.

상인과 수공업자들에게도 많은 세금을 부과했는데, 이들도 도망가지 못하도록 직업을 고정시키고, 세습화합니다.

또 대지주나 황제령의 경영자는 많은 토지세를 내게 되어 있는데, 이들 경영자는 그 세금을 소작인이나 소농에게 전가합니다. 소작인이나 소농들은 많은 세금을 감당하기 힘들어 토지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황제는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 농민들을 토지에 묶어두고, 직업을 고정화, 세습화 하였습니다. 농민들은 토지에 강제로 묶이게 된 것이지요.

황제는 이렇게 대부분의 세금원이 될 직업들을 고정화, 세습화해버렸습니다. 그 중 가장 힘든 것은 엄청난 토지세와 인두세, 재산세를 내야 하는 농민들이였습니다. 결국 농민들은 어마어마한 세금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파산선고를하고 스스로 자유민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게 됩니다. 왕에게 세금을 내느니, 차라지 유력한 대지주 밑에 소작농민으로 들어가 대지주 땅을 경영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대지주에게 스스로 투탁해서 토지에 결박된 농민들이 생겼고, 이것이 새로운 소작제도은 <콜로누스제도>입니다.

용어를 좀 구별하자면, 고대의 <라티푼티움>이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한 제정초기의 대농장 경영체제라면, <콜로누스제>는 로마 제정후기 자유를 버린 농민들인 콜로누스를 이용하여 대농장을 경영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이렇게 자유를 버린 농민들은 훗날, 중세시대의 농노라 불리게 되면서 노예도 아니고, 자유민도 아닌 어정쩡한 신분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또, 콜로누스 제도가 정착되면서, 기존의 노예들도 콜로누스인(자유를 버린 예속농민)과 같은 위치로 올라서게 됩니다. 즉, 대지주들이 노예에게도 토지를 주고 예속농민처럼 토지 경작을 하라고 강요합니다. 노예들은 지주에게 소작료만 꼬박꼬박 내면 이전 노예생활보다는 좀 더 나은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죠.(물론 일부 노예에 한정된 이야기입니다만....) 이러한 노예들도 중세에는 농노로 업그레이드 될 것이라고 예언할 수 있겠네요.

콜로누스(콜로나투스)가 생긴 원인 중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정복전쟁의 중단으로 전쟁 노예공급이 감소했다는 점입니다. 노예가 부족해진 로마 지배층이나 대지주는 농민을 노예로 활용하기 위해 <소작제도>를 적극 도입하였고, 이 것이 당시 황제의 토지결박제도와 맞물린 측면도 있습니다. 또, 고위관직자와 국가의 지배층은 대지주로서 스스로 면세특권을 획득하고, 자신의 땅에 대한 일종의 <불입권>을 관습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중세 장원의 불입권과 연결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러한 개혁 속에서 모든 사회 계층이 황제권에 종속되고, 농민들은 토지에 결박되었습니다. 이것은 세금을 토지에서 나는 현물로 받게 되는 것을 일반화시켜 화폐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인플레이션을 심화시켰습니다. 황제는 이러한 현상을 막아보고자 <최고가격제>를 실시하여, 물가 상승을 막고 물건 가격의 상한선을 규제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3. 황제의 개혁 결과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동방적 전제군주제를 도입하면서 제국을 4분통치하고, 속주를 세분화하는 정책입니다. 그러나, 속국의 세분화의 목적은 속주총독이 군인화하는 것을 막아 군인정치를 억제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속주 세분화로 행정관리가 너무 증가하였고, 군제 개편으로 재정지출이 너무 많았습니다. 황제는 재정 위기를 극복하려고, 병역을 세습화시켜버리고, 연좌적 납부제를 도입하여 직업을 고정화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직업의 세습화와 토지결박은 <콜로누스>라는 예속적 소작제를 발생시켰습니다.

이러한 황제의 개혁은 3세기 무렵 흔들리던 로마를 일시적으로 안정시킨 공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 그대로 <일시적>인 것이였습니다. 왜냐면, 이러한 개혁은 문제가 된 근본원인을 해결한 것이 아니라, 강력한 황제권을 바탕으로 문제점을 감춘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직업의 고정화와 엄격한 신분계층화를 바탕으로 방대한 관료군과 군대에 의존하는 정치체제입니다. 또, 동방적인 절대 군주를 표방하여 사회를 엄격한 군사독재체제로 몰고가서 사회 모순을 감히 꺼낼 수 없게 만든 체제이기도 하죠. 결국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은 강력한 황제가 사라지면, 그 모순이 더 커져서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곪아버릴 개혁이였습니다.

4. 콘스탄티누스의 재개혁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이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대안을 찾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일단 5황제 통치체제를 혁파하고, 단일황제체제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로마의 향락적인 문화와 로마인들의 부패한 생활상을 개탄하면서 밀라노 칙령을 발표합니다. 밀라노 칙령의 내용은 <크리스트교에 대한 공인>이였습니다. 그러나, 실제 황제가 크리스트교를 믿었다기 보다는, 경견한 생활을 하는 기독교인을 이용하여 로마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함이였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동방적 전제군주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수도를 동방의 <콘스탄티노플>로 이전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은 황제의 이름을 따서 만든 도시인데, 후에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비잔티움>으로 바뀌었다가, 오스만투르크가 점령하면서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뀝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전 황제시 인플레이션과 화폐제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솔리두스 금화를 만들어 화폐개혁을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콜로누스제도를 강화하여 농민들이 토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강격하게 규제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역시 강력한 동방적 전제군주제에 입각한 power로서 정치했을 뿐, 사회적 모순의 근본원인은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 로마 사회는 계속적으로 강력한 동방적 전제군주제를 시도했지만, 차츰 먹히지 않게 되었고, 결국 로마의 서로마와, 콘스탄트노플의 동로마로 분열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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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