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6화. 고구려의 불교 이야기

1. 불교가 원시 신앙을 대신하다.

자, 이번 회부터의 불교 이야기는 우리 역사 속의 불교 이야기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한반도의 불교 이야기는 인도나 중국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구성하기가 힘들다. 특히, 고대 불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일부 자료와 중국측 기록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불교 이야기를 적더라도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전파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아도화상이라는 스님이 다시 건너오자 성문사에 순도를, 이불란사에 아도를 머물게 하여 불법을 전수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첫 번째 이야기는,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가 372년이라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372년은 전진왕 부견이 불도징을 초빙하여 불교가 뭔지를 간신히 깨닫고 있던 시기였다. 아직 도안, 구마라습 등은 불도징의 초빙조차 받지 못한 시기였다.

참고링크 :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 6화. 현학, 청담에서 시작된 격의 불교 이야기

따라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는 불교이론이 확립된 도안이나, 구역경을 번역한 구마라습의 시기가 아니라 초기의 원시적인 불교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술로 꽃을 피우거나, 도교의 신선 이야기로 부처의 이론을 설명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 도안, 구마라습 이야기는 위 6, 7 화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수준 낮은 불교를 왜 국가가 도입했느냐는 점이다. 그 이유는 고대 민간 신앙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고구려 초기의 민간 신앙은 상당히 다양했다. 특정 부족신을 숭배하는 부족신 신앙, 동물을 숭상하는 토테미즘, 다신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정령숭배사상(애니미즘), 주술사를 통해 하늘과 지상을 이어준다는 무격 사상(샤머니즘) 등이 여기 저기에 존재했다.

다양한 종교 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 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국가에서는 주몽이나 유화부인을 숭배하는 사상(시조신 숭배)을 강조했지만, 각 지역별로 다양한 민간 신앙이 존재했다. 이러한 민간 신앙들은 종교적 역할 뿐만 아니라 일반민들의 사회생활을 지배했고, 심지어 국가가 아닌 지역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마저 유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백제에 의해 고국원왕이 죽고, 중국 북조의 압박으로 정치적 입지가 약해진 고구려의 왕실은 부족 통합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불교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2. 전진왕과 소수림왕의 정치적 거래

소수림왕 때 들어온 불교는 사실 제대로 된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하기 힘든 불교였을 것이다. 전진왕 부견도 불교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스님은 전쟁의 수호신이거나, 불법으로 국가를 지켜주는 주술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불교를 왜 고구려가 받아들였을까?

첫 번째 이유는, 불교가 이미 고구려 민간 신앙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소수림왕 당시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이미 불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 해동고승전(석망명전)에는 이미 청담사상가들이나 격의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중국 고승들이 고구려 불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왕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고구려인들이 신선 사상과 불교 사상을 이미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소수림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회적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은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을 통해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신성하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이전보다 약화되어 있었다. 고조선부터 전해내려온 제천의식은 더 이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동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와 같이 대부분의 군장국가부터, 고구려 내부의 각 부족까지 모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신사상과 다른 새로운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불교의 수용은 필요했다.

마지막 이유는, 소수림왕의 대외 정책 때문이었다. 소수림왕은 국가안정을 위해 전진왕 부견과의 화해가 필수적이였다. 전진왕 부견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해가 필요했다. 소수림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그동안 적이었던 중국 북방의 전진왕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중국 북방과 동아시아 북방이 화해를 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영토를 통일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획기적인 외교적 전환이었다. 이제, 이들은 치고 받고 싸우지 않는다. 그 결과 소수림왕의 후대에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이 동북아를 평정할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3. 격의 불교와 호국불교

고구려 초장기 민간에서는 불교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천신 신앙이나, 신선 신앙으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햇던 듯 싶다.

이제 주술사(샤먼)의 역할은 스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스님이 곧 샤먼이었다. 스님이 손으로 마법을 부려 백성들을 치유하거나, 전쟁에서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믿음은 전진왕 부견 시대의 <불도징>이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활용했던 전략이었다.

주술사들의 웅얼거림과 마법적인 이야기들은 그대로 스님들의 이야기로 전해졌고, 그것이 스님들과 관련된 <향가 이야기>로 전해졌다. 부처와 보살, 미륵을 제대로 구분할 방법이 없었던 고구려에서는 보살을 산신령으로, 미륵을 하늘에서 내려온 지배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절은 원시신앙에서 제천의식을 행하던 신성한 자리에 건립되었고, 전통적 재래신과 보살은 구분이 애매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산신령이나 도사와 같은 <도가 신앙>이 초기부터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 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가 쉽게 전파되었다. 부처의 <색즉시공>은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이해하였고, 불교의 <해탈, 열반>은 도가의 <신선>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지배층은,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중국 방식을 철저히 응용하였다. 특히, 불교에서 강조하는 윤회설, 업설 등을 묶어 <인과응보>로 정리하여 지배층의 우월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업설>은 전생의 행위에 따른 윤회를 강조한 것으로 국왕의 신성함을 극대화 시켰다. 국왕은 전생에 높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만민의 지배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왕은 곧 부처의 화신이며, 귀족들은 왕을 도와 불국토에서 안락을 누릴 미래의 보살들인 것이다. 노예들은 전생의 악덕함 때문에 현실의 고뇌가 시작된 것이므로 누군가를 탓해서는 안되는 신분이 되었다.

또 하나 왕권 강화를 위해 제시한 것은 <연기설>이다. 연기란, <인연>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모든 만남은 이전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누군가와 만난 것은 수십만개의 인연이 돌고 돌아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든 현상은 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상호 관계 속에서 돌고 돌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 우주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현상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떤 원인이 없었으면 지금 너와 나의 만남이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전체 속에 포함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왕권에 대입하면? 모든 개인은 국가 속에서 활동하며, 국가의 흥망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 모든 부족들도 왕권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서 인연을 만들어 갈 뿐,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부족이라는 개체를 떠나 초부족적인 통합의 법(다르마)이 존재한다. 따라서 국왕의 행동과 국가의 율령은 모든 개체들의 운명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고구려의 초기 불교 이념이었던 것이다.

4. 광개토대왕과 불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은 고구려 최전성기의 3대 태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왕들은 모두 불법의 수호자였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다음 왕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나왔던 <고국양왕>이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참 뜻을 깨닫고, 광개토(담덕)에게 <불교를 받들어서 복을 구해야 한다>는 충언을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선대 왕들의 유지를 깨닫고 불교를 통한 국가 보호 사업을 추진하였다. 광개토대왕 2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선대 왕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강력한 백제군을 부처님의 가호로 막겠다는 뜻이었다.

평양은 남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자, 백제군과 계속적인 전투를 벌었던 요지이다. 또 고조선의 수도이자, 대동강을 통한 국제 무역의 공식 루트였다. 광개토대왕의 불심으로 미루어 북방에도 많은 절들을 건립했을 것이지만, 기록에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단, 당시 5세기의 불교는 구마라습의 구역경이 번역되어 전파된 시기이기 때문에, 국왕이 곧 부처라는 북조의 <왕즉불>사상이 전파되었음은 예측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도 불법의 수호자이자, 자신이 곧 전륜성왕이라는 이념을 생각했을 것으므로, 세계 지도자로서의 불법왕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5. 장수왕과 불교 첩보전

광개토대왕이 북방으로 영토를 넓혔다면, 다음 왕인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실시한 왕이다. 장수왕 때에는 불교에 관련된 재미있는 고사가 나온다.

장수왕이 백제에 보낼 간자(첩자)를 찾고 있었는데, 승려 도림이 자발적으로 첩자가 되겠다고 했다. 도림은 고구려에 큰 죄를 짓고 망명한 스님으로 위장하여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을 한다.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자 도림은 왕의 바둑 친구가 되어 왕의 신임을 얻는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거대한 건축 사업을 제안한다. 궁궐 보수, 왕릉 개축 등을 위해 백성들을 징발하여 화려한 건물을 짓도록 한 것이다. 이 사업으로 백제의 창고는 비게 되고, 백성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되면서 국가를 원망하게 되었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장수왕은 총공격을 실시하여 백제 수도를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다.

즉, 스님이 첩보활동까지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몇가지 고구려 불교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불교 스님이 불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왕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간첩질까지 한다는 점이다. 초기 고구려의 불교가 얼마나 국가 권력에 종속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백제의 백성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불교 자체가 성숙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중생 구제라는 참 뜻 조차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불교 전파를 신라가 크게 반대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신라에서 이차돈의 목까지 잘라가며 불교를 믿으라고 절규할 만큼 불교가 전파되지 못한 점 중 하나가 이런 <불교를 이용한 침략작전>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불교를 전파받는 국가의 지배층은 새로운 사상 자체가 기득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이유로 <불교라는 종교가 기존 사회체제를 흔들기 위한 선진국가의 함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6. 장수왕 이후 불법의 참뜻을 파악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까지의 불교가 왕권에 휘둘리던 호국 불교였다면, 그 이후의 고구려 불교는 진정한 불교의 뜻을 파악하기 시작한 <종파 불교>였다.

부처의 진정한 뜻을 탐구하고자 노력한 고구려 스님들의 노력은 장수왕 말기 <승랑>에서 시작된다.

승랑법사는 중국에서 구마라집이 인도불경을 번역하여 불경의 참 뜻을 해석하자 그의 경전을 읽으면서 불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북위로 건너가 중국 대승불교의 참 뜻을 연구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그는 특히 반야(지혜)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성실종>을 연구하면서 인도 대승불교의 창시자인 용수의 반야사상을 연구하였다. 그가 연구한 학문을 <삼론학>이라고 한다.

삼론종 7대조 : 구마라집 - 승조 - 법도 - 승랑- 승전 - 법랑 - 길장

특히 승랑은 중국의 성실종과 달리, 오로지 순수한 인도의 대승불교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삼론종의 계보를 잇는 7대 대사로 이름을 날렸다.

삼론학파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의 3가지 이론을 내세우는 불교 학파.

이들은 모든 사물은 원래 실체가 없다는 공(空) 사상을 주장하기 때문에 중관학파(공사상 학파)로 분류된다. 아무 것도 없다는 3론은 다음으로 정리해 본다.

1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진리이다. 집착은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적 형상이므로,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불법의 최고 단계이다.

2론 : 만물이 실제한다는 것과 실체가 없다는 것도 언어에 의한 말장난일 뿐이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중도를 걸어야 한다.

3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탄생도, 소멸도, 영원도, 순간도 없다. 하나도 아니며 여럿도 아니다.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팔부중도)

삼론종은 성실종에서 주장했던 <마음으로 인식하여 언어로 표출>한다는 인식론을 아무 것도 없다는 공 사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하였다. 이 삼론종은 중국보다는 고구려에서 더 활성화 되었는데, 수나라 때 길장은 삼론종 7대사에 들어가며, 제자인 혜관은 일본 삼론종을 개창하였다. 이 삼론종은 훗날 법성종으로 불리며 명맥을 이어간다.

반면, 공 사상과 별도로 <유식> 사상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유식학을 공부한 원측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공유논쟁>으로 학문적 논쟁을 야기시켰다. 비록 고구려 불교 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지만, 불교 자체가 왕권을 벗어나 스스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7. 승군으로 활약한 고구려의 불교 교단

점차 독립적인 불교 교단으로 발전한 고구려의 불단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연구하는 교단도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다. 신라 원광 법사의 세속오계, 고구려 불법 단체들의 몽골 항쟁, 임진왜란 등에서 보여준 스님 의병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이다.

불교 단체가 <호법>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는 2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땅이 국왕의 땅이기 이전에 진리를 연구하는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의 땅을 지키기 위해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호법 사상이 있는데, 이것을 정의를 지키는 정법(다르마 : Dharma)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국가가 불법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한 불법이 펼쳐지고 있는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이다. 불법의 <연기설>에 의하면 국가가 없으면 불법도 없다. 국가가 불법을 인정한다면 불교 교단은 국가의 위기에서 국가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국가의 위기 때 직접 전장에 뛰어든 스님들이 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우리는 살수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때, 7 승려들이 살수(청천강) 위를 홀연히 걸어갔는데, 수나라 병사들은 스님들의 행동을 보고 물이 얕다고 생각하여 청천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 많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이후 7 스님의 동상을 세워서 공적을 칭송한 절이 바로 <칠불사>이다. (동국여지승람)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고구려 스님 3만명이 당 군대와 치열하게 항쟁하여 물리친 기록도 있다. (고려서 열전 외전)

그러나, 실제 남아있는 기록 및 유물과는 다르게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들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몇몇 사료와 남아있는 사원 등을 통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8. 번성한 고구려의 불교와 쇠퇴 과정

점차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고구려의 불교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혜편은 일본 불교 최초로 비구니를 양성하였는데, 선신, 혜선 두 일본여인을 가르쳐 출가시켰다고 한다. 혜자는 고구려의 공식 사절로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활약하다고 귀국하였는데, 지금도 호류사에는 혜자법사 상에 존경의 예를 표하고 있다.

담징은 법정과 함께 불교와 더불어 종이, 먹 등의 기술을 전파하였고,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9년 화재로 벽화가 타 버린 이후 재현된 모사 벽화에는 담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빼 버렸다.

혜관은 일본 2대 승정이 되었고, 도현은 일본세기를 저술하였으며, 승륭, 운총 등은 일본 사절로 일본을 방문하여 많은 문물을 전파해 주었다.

그러나 5-6세기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구려 불교는 7세기에 급격한 쇠퇴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최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 때문이었다.

중국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불법이 고유한 철학을 찾아가게 되면 도교나 유가를 이용한 탄압이 뒤따른다는 점을 언급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왕권 강화에 이용되었던 호국 불교가 사라져가고, 불교가 독립성을 주장하자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행하는 <호국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 결과 많은 스님들이 망명하게 되고, 고구려의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말기에는 모든 백성들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깨달음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열반종 사상까지 들어오게 되자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보덕이 개창한 우리식 열반종은 백제, 신라 등 남방 국가로 이전되어 전파되었다.

반면, 북교 교리가 심화되자 불교 교리를 통합하기 위한 통합 종교들도 유입되었다. 중국에서 사상 통합을 위해 활용되었던 천태종, 화엄종 등의 교리가 고구려에 유입되었고, 특히 천태종은 고구려 말기에 불교 통합 사상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이후, 급격한 국력쇠퇴와 내분으로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종파 불교도 그 꽃을 다 피우기 전에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는 백제, 신라, 가야의 불교 역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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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고대 경제 무역권이 우리 민족국가의 운명을 좌우하였다.

   <뒤집어 읽어보는 역사>는 역사적 사실일 수는 있지만, 정설로 인정된 내용은 아닙니다. 일부 사료의 파편으로 구성한 내용이거나, 아직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역사적 내용들을 가지고 구성한 페이지입니다. 정설이 아니니, 글에 대한 비판보다는 이런 내용도 있을 수 있구나 하는 측면에서 만든 카테고리라는 점을 이해하고 읽어주세요.


1. 고대의 전쟁을 왜 공성전으로만 보는가?

우리는 고대의 전쟁하면 동이족과 중국족의 싸움.... 고조선, 고구려 등 북방의 패자들과 중국 춘추시대와 수당으로 이어지는 중국 국가들간의 세력 다툼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그리고 동북아 국가와 중원국가의 싸움에서 주목하는 것은 부여성 - 요동성 - 평양성 등으로 이어지는 공성전을 생각하곤 합니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꼭 고대의 전쟁이 공성전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바다를 통한 전쟁 역시 항상 같이 전개되었으니까요. 그리고, 당시 중국과 우리 민족의 영역 사이에 바다라는 것이 역사에 씌여진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일단 고조선과 고구려가 중국 민족과 항쟁을 벌인 경로를 보면 <교과서가 고대사에 대하여 상당히 부실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교과서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교과서는 중고등학생을 위한 지침용 3차 사료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만큼의 자세한 내용과 중요한 사료를 다룰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그럼 교과서에 빠졌거나, 1단어만 기술되어 빠져 버린 바다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일단, 우리나라의 서쪽 바다는 동해와는 달리, 서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서쪽 바다의 국제적인 공식 명칭은 <황해>입니다. 아니 왜, 동쪽 바다는 일본해도, 청해도 아닌 <우리 영토로서의 동해>이면서 서쪽 바다는 <황해>라고 해야되나요? 이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서는 역사적인 이유만 말해보도록 하죠. 동해는 고대부터 근대까지 우리가 지배권을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다입니다. 일본이 동해바다에 대한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 에도 막부가 들어서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대등한 관계라고 인식한 이후부터이고, 메이지 유신 이후 자국의 경제력이 성장한 이후부터입니다. 즉, 근대 이전까지 이미 역사적으로 <동해>는 우리 영역으로 자리잡았죠.

그러나 <황해>는 다릅니다. 이 바다는 중국민족과 우리 민족이 고대부터 주도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바다였고, 이 바다의 주도권을 누가 잡는가에 따라 고대 천하관이 바뀌곤 하였습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도 이 바다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주도권을 잡고 자국의 <영해>로 편입하기에는 껄끄러운 면이 있었던 바다였죠.

실제 고조선, 고구려와 대중국 항쟁은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것처럼 육로에서의 전쟁만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중국의 한무제가 고조선을 공격할 때, 서해바다를 이용했고, 수,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도 항상 바다를 경유하였습니다. 그리고, 황해바다라는 것은 실제 한, 수, 당이 우리 국가를 침공하였던 원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그럼 나라별로 차근히 보도록 하죠.

2. 한무제는 왜 고조선을 1년간이나 공격해야만 했는가?

중국과 고조선의 치열한 항쟁이 시작된 것은 중국 한무제 때부터입니다. 진시황제도, 한고조 유방도 고조선과 직접적인 대립을 하지 않았습니다. 진나라 이후 통일된 중국은 끊임없이 흉노 등 북방민족과 영역 싸움을 하였지만, 고조선과의 직접적인 큰 대립은 없었습니다.

중국과 고조선이 직접적으로 대결구도에 들어간 것은 위만조선 때부터입니다. 교과서에서는 위만조선이 들어서면서 고조선에 철기 기술이 도입되었고, 중계무역이 성행하였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이 바로 <중개무역>입니다. 위만 조선이 시작한 중개무역이란, 한반도 남부의 진국과 중국 한나라 사이에서 무역을 하여 그 차액으로 큰 이득을 보는 것을 말합니다.(중개무역이란 A국과 C국사이에서 B국이 물품을 운송해주고 중간에서 차액을 챙기는 것을 말합니다. 중계무역이란, A국의 물건을 B국이 자국에 가져와 가공하거나, 물품 표지를 한 다음에 C국에 넘기는 것으로 보다 적극적인 무역을 말합니다. 역사에서는 이 2가지를 구분할 필요가 없으므로, 그냥 합쳐서 중간무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위만이 남방국가들의 물품을 중국에 교역하기 시작하면서 이용한 루트는 바로 <대동강>이라는 고대 상업 해상망이었습니다. 특히 위만조선 때 철기를 이용하여 정복사업을 많이 하였다는 기사도 대부분 이 대동강 유역의 루트를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대동강 루트를 통한 중개 무역은 위만조선이 곧 중국의 골치거리인 흉노와도 무역을 할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게 하는 했습니다. 보통 중국이 위만조선을 공격하여 멸망시킨 것을 <고조선과 흉노와의 차단>이라고 말하는데, 그 속사정에는 이런 경제적 문제가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 한나라는 고조선을 공격할 때, 단순히 요동성을 중심으로 육로로 쳐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육로에서는 좌장군이 침입하였고, 바닷길을 통해서는 누선장군이 대동강 뱃길을 통해 평양으로 직접 쳐들어오는 양동작전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조선은 1년여간의 항쟁끝에 무너집니다.

3. 대동강 루트와 서해 북부를 일시 중국이 장악하다.

중국은 고조선을 멸망시킨 이후, 한사군을 설치하고 고조선의 영역을 한의 영역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이 한사군은 현토군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고조선 멸망이후 나타난 조선유민들의 저항으로 거의 사라져 갑니다. 하지만, 끝까지 남아있었던 지역이 있었으니, 그곳이 대동강 연안의 <낙랑군과 대방군>이었습니다.

낙랑군이 중요하게 부각된 이유는 이곳이 바로 고대 황해안 루트를 이어주는 상업권의 맥으로서 그 중심지가 <대동강>이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교과서와 개론서들을 보면 변한에 철이 많이 생산되는데, 그 철은 바닷길을 통해 낙랑군으로 수출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금관가야가 대가야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게 된 이유중 하나가 바로 낙랑군이 고구려, 백제의 협공에 망하게 되면서 <중개무역 루트>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적혀 있지요. 즉, 금관 가야는 일본 - 가야 - 낙랑군을 이어지는 고대 상업 루트를 통해 발전한 나라였지만, 낙랑군이 망하게 되면서 그 교역 대상국을 일본 - 가야 - 백제로 바꾸게 됩니다. 이것은 고구려를 자극하게 되어 광개토 대왕이 일본, 가야, 백제를 동시에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게 되는 원인으로도 작용합니다. 이 정도면 이 당시 대동강 무역로가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알 것 같지요?

4. 백제와 고구려의 초기 싸움은 강과 강을 두고 무역권을 쟁탈하려 하였다.

이제 대동강을 일시 점령했던 낙랑군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황해안 무역권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사라진 것이지요. 낙랑군이 멸망한 것은 백제, 고구려 군의 협공 때문이었고, 이들의 협공은 곧 영역 확보와 중국 민족 축출이라는 관점도 있지만, 고대 무역권 확보라는 관점도 있습니다. 낙랑이 사라져 서로 국경을 마주보게 된 백제, 고구려는 강을 사이에 끼고 큰 한판 전쟁을 시작합니다. 이들의 초기 전쟁은 한강 - 예성강, 재령강 - 대동강 이라는 황해안 루트를 두고 전쟁을 하였습니다.

먼저 주도권을 잡은 것은 백제였습니다. 4세기 백제 근초고왕은 고구려의 대동강 연안의 평양성까지 진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고, 고구려의 해상 무역로를 장악해 버렸습니다. 보통 삼국시대의 4세기 하면, 근초고왕의 전성기로 왜 - 황해안 - 중국 남조, 북조 - 요서 점령 등으로 이어지는 고대 상업권 확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상업권의 확보는 결국 당시 가장 중요한 고대 무역로인 대동강 연안과 황해안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5. 5세기 이후 황해안 무역권은 대동강이 아닌 한강을 두고 벌어졌다.

5세기 이후, 백제와 고구려의 공방전은 이제 한강을 두고 벌어집니다. 광개토대왕은 북방 영토를 확장하면서, 한강 이북까지 진출하였습니다. 백제는 수도인 한강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국운을 걸고 사투를 벌여 사수합니다. 대동강은 고조선의 중심지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선진지역이고, 평양평야와 바닷길을 이용할 수 있는 천연의 자원이었습니다. 반면, 한강 역시 백제의 중심지로서 김포평야의 농업중심지이자 정치적 중심지로서 그 가치가 말로 할 수 없었죠. 실제 황해안 유역의 금강 - 한강 - 대동강으로 이어지는 무역로는 모두 정치, 사회적 중심지였습니다. 사실 황해안 루츠를 이용할 수 없어서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한 신라는 6세기 이전까지는 삼국간 항쟁에 끼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삼국 중 2- 3세기 가장 체제 정비가 빨랐던 나라가 백제인 이유도 활발한 중국과의 대외교역으로 경제적 성장과 함께 중국 정치제도를 빨리 인식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한강을 고구려의 장수왕이 차지하면서 삼국의 주도권은 순식간에 고구려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의 경계는 이제 금강이 되어버립니다. 장수왕이 평양성으로 천도하면서 국가 기반은 고조선의 문화유산과 풍부한 물산이 집약된 대동강 연안으로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강은 남진정책의 전초기지가 되었는데, 그 가장 선봉지역이 남한강 하류의 충주지역입니다. 즉, 남한강 하류를 장수왕이 경영하면서 한강의 자원을 확보함과 동시에 백제를 견제하는 전초기지로 이용한 것이지요. 이것을 보통 개론서들에서는 <장수왕의 충주경영설>이라고 합니다.

6. 고구려의 무역권 독점과 반고구려 체제의 형성

고구려는 광개토대왕, 장수왕의 영토 확장으로 대동강 무역권, 한강 무역권으로 이어지는 서해안 무역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또, 북방으로 넓힌 영토를 통하여 말갈, 거란, 돌궐 등에 대한 무역로도 확보하였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패권주의는 다른 국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고구려에 우호적이었던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었고, 그 동맹의 핵심 내용은 한강 무역권의 탈환이었습니다.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였는데, 그 핵심적인 적대 이유는 흉노 이래 중국이 지배해오던 조공경제 무역 질서를 고구려가 빼았아갔다는 것에 있었습니다. 광개토 대왕 이후 고구려는 거란, 말갈, 돌궐 등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동북아시아 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수왕 이후 고구려는 확보한 광대한 상권을 지키지 못하고, 그 부산물을 차기 하기 위한 내분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신라에게 한강을 빼앗기게 되었고, 수나라에게 끊임없는 위협을 당하기 시작합니다.

고구려와 수의 전쟁은 요동성 등 공성전과 함께 대동강을 통한 바닷길 싸움도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수는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려다가 을지문덕 장군에게 청천강에서 크게 대패하고 맙니다.(살수대첩) 이후 수는 지속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는데, 대군은 육로였지만, 실제 큰 격전지는 압록강, 대동강, 청천강 등 강 하류에서였습니다.

고구려에 대한 지나친 전쟁도 하나의 원인이 되어 수가 망해 버리자, 당나라는 고구려보다는 고구려와 무역을 통해 교류를 하고 있는 주변국들을 먼저 점령하였습니다. 서역의 경제권을 가지고 있던 돌궐 고창국을 멸망시키고, 거란과 말갈족의 주요 상업 중심지를 당이 장악하면서, 당은 다시 중국식 조공 경제 무역을 회복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이러한 경제적 압력으로 인하여 친리장성을 축조하고, 연개소문이 대당강경책을 구사하기 시작합니다. 당은 고구려의 동북아 상권과 황해안 상권마저 빼앗고,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자 하였지만, 안시성 싸움의 패배등으로 한걸음 물러섭니다.

7. 신라가 지키려고 했던 대동강 까지의 확보

당은 이후 나당동맹을 통하여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나당동맹에서 신라가 요구한 것은 <대동강 유역까지의 영토 인정>이었습니다. 그것은 신라 진흥왕이 한강을 차지한 이후, 대동강까지 진출하여 황해안에 대한 전면적인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의도가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은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에게 대동강은 절대 줄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고, 이것은 결국 신라 전체를 복속하려는 당의 야심으로 <나당 전쟁>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신라는 끝까지 사수하여 대동안 연안을 확보하였지만, 당은 이후 150년 이상 <대동강이 신라의 영토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대동강 연안의 황해를 자국의 근거지로 생각합니다. 실제, 대동강 연안에서 중국의 동부지역까지는 많은 신라인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동부아시아의 가장 활성화된 무역로로서 많은 물자가 오가고 있었습니다.

대동강을 신라의 영토로 당이 인정한 것은 신라 성덕왕 때로, 당이 신라에게 대동강 무역권을 인정한 이유는 발해 때문이었습니다. 발해가 북방 상권을 장악하고 고구려의 뒤를 잇는 국가로 성장하자 당은 신라를 회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8. 해상왕 장보고의 상권 확보

그러나 8세기 이후 안사의 난 당으로 당의 국력이 쇠약해지고, 동북아의 상권과 황해안의 상권은 점차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이 때 중국 - 신라 - 일본과의 해상 루트를 장악하고 거대한 상권 루트를 재건한 인물이 바로 장보고입니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바탕으로 일본 - 신라 - 중국 동부의 상권을 움켜쥐었습니다. 신라원, 신라방, 신라소 등의 명칭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신라인들은 중국 동부 해안가에 무역로를 개척해두고 있었고, 장보고가 중국, 신라, 발해의 약세를 틈타 그 무역로를 완전 장악하여 <국가보다 더 큰 권력>을 확보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장보고는 신라 왕실의 왕위 다툼 속에서 암살당하고 맙니다.

장보고가 죽은 시점은 곧 고대가 중세로 넘어가는 시기였습니다. 중국은 송으로 넘어가 중세가 시작되고, 한반도에서는 고려가 건국되어 중세가 시작되는 과도기였습니다. 일본 역시 전후 중세시대로 넘어갔으며, 고대의 영광을 재현한 발해도 이 무렵 거란에 망하게 됩니다.

이렇게 고대 상업권에 대하여 쭈욱 한번 적어보았습니다. 상업이라는 한쪽 시각에서만 적은 글이라 편협하긴 하지만 그냥 이런 관점도 있구나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글이었으니, 그런가 보다 하고 읽어주세요.

<뒤집어 읽어보는 역사>는 기존 관점과 다른 부분들이 있거나, 숨어있는 한줄의 문장이 눈에 띄면 정리해서 글로 만들어 보겠습니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반부, 1991
  2. 한국사통론, 변태섭 저(4개정판), 1997
  3. 7차 교육과정 근현대사 교과서(대한교과서)
  4. 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구회, 청아출판사, 1988
  5. 한국통사, 박은식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6
  6. 누드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이투스, 2007
  7.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1권, 서의식, 강봉룡 지음, 2003, 솔출판사
  8. 한국고대사 산책, 한국역사연구회 고대사분과 지음, 1992
  9. 한국역사입문 제 1권, 한국역사연구회 엮음, 도서출판 풀빛, 1979
  10. 한권으로 읽는 중국의 사상, 권순우 편역
  11. 동양사개론, 신채식, 삼영사(1993)
  12. 삼국사기(김부식), 삼국유사(일연), 7차 교육과정 국사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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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고대 사회에서의 <부체체론>

1. 부체제론과 귀족연합론

부체제론과 귀족연합론은 초기 삼국시대의 독자적 족장세력을 국가가 흡수하는 것에 대한 관점의 차이 논쟁입니다. 부체제론에서는 <독자적 독장 세력>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는데 비해, 귀족연합론은 <왕권에 신속된 귀족세력>이라는 것에 키워드를 맞추어 <중앙집권화 과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귀족연합론부터 볼까요?

귀족 연합론이란, 초기 국가의 형태가 <왕권 밑의 중앙귀족들이 귀족회의체를 구성하여 정치를 운영하는 정치 형태>에 주목하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국왕과 귀족은 서로 권력에 있어서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존재입니다. 삼국이 각 독자 세력들을 관등제도에 의해 편제하였지만, 과연 이 관등제도가 왕권과 귀족권 중에 어떤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 졌는가를 논의합니다.

일반적으로 논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관등제도의 성립으로 지방 족장들이 왕권에 복속되어 <귀족 관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귀족들이 관등제도에 복속함으로서 귀족들은 이제, 족장의 특권이 아닌 <관등에 의한 특권>을 항구적으로 누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왕 밑에서 <행정적 관료>로 편재된 귀족들은 관등을 이용하여 <왕권>을 제약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러한 귀족들의 특권은 <귀족회의>에 의해 체계화됩니다. 제가, 정사암, 화백 회의 등의 회의는 귀족권이 왕권을 거부할 수 있는 <귀족연합>의 무기인 것이죠. 이것이 귀족연합론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논의를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국왕과 귀족간의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가에 대한 논의로서, 그 쟁점을 왕권 밑에 관등제도로서 복속한 중앙귀족권이 귀족회의 등을 바탕으로 국정을 이끌어가는 체제입니다.

귀족연합론에서는 삼국사회의 발전과정을 이렇게 봅니다.

1. 소국의 단계 : 각 군장국가들이 존속하는 단계
   2. 귀족연합체제 : 왕권 밑에서 합의제적인 귀족회의로서 국정을 이끄는 단계
   3. 전제왕권체제 : 국왕이 1인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귀족세력보다 우위를 점하는 단계
   4. 귀족연립체제 : 국왕권이 약해지면서 지배층이 연합정권을 구축하는 각국 말기의 체제

이러한 단계를 거쳐 삼국사회가 진전되는데, 그 과정에 귀족연합체제를 중요하게 상정한 것이지요.

2. 부체제론

부체제론은 모건의 <부족국가론>을 계승한 형태의 논의입니다. 모건은 초기 사회의 발전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습니다.

씨족사회 - 혈연중심의 부족국가 - 부족연맹체 국가 - 고대국가

모건은 특히 국가의 발전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혈연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체제>가 확장 발전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고대 국가가 성립하는 과정은 곧 <씨족적 족장 세력>들이 각각 자신의 세력기반을 토대로 연합하면서 <연맹국가>를 형성하고, 이 연맹국가의 <부족세력>들이 중앙 세력에 <흡수>되면서 고대국가가 <중앙집권화>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모건의 논의는 한국 고대사 뿐이니라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고대사를 논의할 때 키워드로 작용합니다. 예로, 중국 역시 초기 부족들이 연합한 <읍제국가>체제에서 시작하여 <영역국가>로 발전하는 것을 체계화하여 고대사를 정리하는데, 이 모건의 정통적 입장이 활용되곤 합니다.

부체제론이란 씨족적 유풍을 가진 집단들이 국가체제에 흡수되면서 <중앙국가권력>과 <지방세력>의 권력관계는 어떠한 것인지, 정치체제의 운영원리는 어떻게 정비되는지, 족장세력들의 독자적 권한은 얼마나 되는지 등을 논의하는 이론입니다.

부체제에서 <부>란, 삼국형성기에 <부족연맹체>를 형성하여 삼국건국에 주체가 된 <각 씨족 집단>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이 <부>의 지배집단들은 과거 씨족적 족장들로서 피정복민에 대한 우월한 지위를 가지며, 중앙의 지배 집단으로 편입됩니다. 신라에서는 흡수된 강력한 <부>세력은 중앙의 <경위>로, 나머지 지방 세력은 <외위>로 편제하여 차별하였다고 합니다.

이 부체제는 귀족연합론과 비교해 보았을 때 다음과 같은 국가 발전과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1. 소국의 단계 : 각 씨족적 족장 세력들이 존속하는 단계
   2. 부체제 : 각기 혈연적이고 지연적인 부들이 국가에 종속되면서도 독자적 위치를 인정받는 단계
   3. 중앙집권체제 : 각 부들이 국가 권력에 종속되어 1원적인 행정체계에 편입되는 단계
   4. 귀족연립체제 : 국왕권이 약해지면서 지배층이 연합정권을 구축하는 각국 말기의 체제

3. 부체제가 형성된 이유는 무엇인가?

부체제라는 특이한 제도가 형성된 이유는 <읍락의 씨족적 유제>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삼국 초기에 각 국가는 <왕권>강화를 추진하려고 하였지만, 독자적 세력을 가진 읍락 씨족원들을 모두 1원적으로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읍락은 공동체적 유제가 강하여 이것을 깨뜨리는 것보다 <공동체적 읍락>을 <집단적으로 예속>하여 하나의 단위로 통제하는 것이 효율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 중앙정부의 지배력은 각 집단 내부까지 미치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각 읍락 집단의 <수장>들에게 어느 정도 권한을 주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4. 부체제의 독자성

따라서 부체제에서의 족장들은 상당한 독자성을 갖습니다.

신라에서는 왕명과 관직명 앞에 자신이 어느 부 출신인지 소속부를 붙입니다. 이것을 <공동하교>라고 하죠. 왕위계승도 부에서 부단위로 이전하며, 같은 부라 할지라도 부 안에서 합의를 통한 왕위 배출을 합니다. 실제 부자상속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는 건 삼국이 건국한 훨씬 후대의 일이었습니다.

부는 독자적 제사와 독자적 관리를 갖습니다. 중앙 정부라고 해도 군사권, 외교권, 무역권 등 국가공권을 제외하고는 각 <부> 내부의 일에 참견하지 못합니다. 실제 고구려 소노부는 계루부에게 정권을 넘긴 이후에도 자체의 영성사직과 자체 관원을 보유하였다고 합니다. 소노부에서 계루부로 왕위 계승이 넘어간 것은 부단위 국왕선출에 대한 증거입니다.

이 부체제에서 중요한 것은 가, 간층이 국왕에 복속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지방 족장들은 형식적으로 관등을 받아 중앙 귀족화 되었는데, 이들은 중앙 관료화 된 이후에도 경, 사대부의 관직, 사출도 등의 백성과 토지지배 등의 권한을 그대로 누리면서 지역 사회의 기반을 유지합니다. 고구려의 수장층인 제가들은 중앙에 복속하면서 <5나>가 <5부>로 개편되어 그 서열에 따라 <고추가, 대가, 소가>로 서열화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사자, 조의 선인 등 독자적인 관료들을 따로 가질 수 있었습니다.

또, 부 안에도 작은 <부>들이 공존하는 <부 내 부>가 존재합니다. 부 안에서의 읍락과 토지는 일정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라 <점유권>을 행사합니다. 동예의 <책화>같은 풍습은 고대 점유권의 대표적인 예였는데, 이 유제가 계속 남아있는 것이죠.

결과적으로 부체제에서 왕은 어느 한 부의 대표자의 성격일 뿐, 국정 전반을 홀로 이끌어가지 못합니다. 따라서 국정은 족장 회의를 통해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국왕이 공식적으로 국정최고의 운영자임으로서 국왕은 귀족회의인 <남당>의 최고 책임자 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고구려의 경우, 족장 세력인 대가가 독자적 관료를 유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신명단을 국왕에게 보고>해야 했으며, 가신의 서열은 <국왕>이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러한 경로를 통해 족장의 자율적 지배권과 국왕의 지역 통제권이 조화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5. 부체제가 중앙집권화 되어 가는 배경

삼국초기의 부체제는 왕권이 강화되면서 점차 중앙집권화되어 갑니다. 중앙집권이 이루어지는 배경은 당시 사회적 변화요인이 가장 크게 작용합니다.

일단 철제 도구가 보편화되면서 철제 농기구의 사용으로 생산력이 발전합니다. 이것은 생산력의 우열에 따른 빈부차와 사회분화를 촉진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신라사회가 중앙집권화되는 시기는 지증왕 대 <우경>의 시작과 <순장>의 금지라는 부분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우경이란, 생산력의 비약적인 성장을 상징하면서, 반면 소를 이용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계급과 그렇지 못한 계급의 신분차이를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입니다.

이러한 생산력 발전과 함께 철기 무기의 사용으로 정복사업이 확대됩니다. 삼국은 정복사업을 통해 국가의 정치적 통일을 추진하였고, 효율적인 백성 통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정복사업은 정복노예의 증가로 사회분화를 촉진시킵니다. 실제, 초기 노비는 전쟁노비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러한 정복전쟁의 확대는 각 <부>의 자율성보다는 <공동방어>를 위한 강력한 <중앙집권세력>을 요구하는 시대적 사명을 부여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부체제는 이제 중앙집권체제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6. 중앙집권체제의 내용

중앙집권초기에는 일단 왕위계승의 형태가 <국왕 일원적>으로 정비됩니다.

국왕권의 강화 : 왕위의 부단위 교대 배출 - 한 부의 왕위 고정배출 - 특정 씨족가문의 왕위 배출 - 부자 상속

그리고 모든 사회 조직이 왕권 강화를 위해 <제도적으로> 정비됩니다. 즉, 관등제도의 재정비, 관복제도, 불교의 수용, 율령의 반포, 행정구역 정비 등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특히 행정구역 정비는 주성제도를 통하여 호등제도를 정착시키고, 효율적으로 부세제도와 요역제도를 정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국가주도로 <인두세>를 확보하여 국왕권의 재정적 강화를 추진하는 것이었죠. 주성제의 정비로 요역을 징발하기가 수월해졌습니다. 또, 군대조직을 행정구역에 일원화하여 편제하고, 거점지에 군대를 확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주성제도의 확립 때문입니다.

이러한 중앙집권의 결과 인두세, 호등제도에 따라 국왕이 백성과 토지를 일원적으로 지배하는 체제가 성립되었습니다. 이제 족장이 다스리던 <토지와 백성>은 왕권에 복속되었고, 족장의 구역은 행정구역으로 전환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체제 정비가 진행되면서 씨족장 회의는 약화됩니다. 이제 회의의 주재자들은 국가현안을 의결하여 국왕에 건의하는 정도의 역할만 하였고, 실제 국왕은 <단독하교>로서 모든 업무를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국왕권 밑에 관등제도로서 포섭된 귀족들은 관등을 이용한 <새로운 권력>에 쉽게 적응하였습니다. 화백, 정사암 등의 회의는 계속 남아서 존속하였고, 이것은 고려의 도병마사와 식목도감, 조선의 의정부 체제 등의 신권 체제로 이어지게 됩니다.

7. 삼국 말기 귀족연립체제

귀족 연립체제는 삼국 말기 왕권이 약화되면서 귀족들이 연합적으로 정치하는 각국의 말기 체제입니다. 귀족연합론이든, 부체제론이든 이 귀족연립기가 각 체제의 마지막으로 상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수당의 통일제국 등장 등 국제관계의 변화, 철기보급으로 인한 생산력의 확대 등으로 사회 전반이 동요하는 시기인 6세기 무렵 등장합니다.

고구려는 6세기 이후 귀족들이 연합하여 대대로를 선입하는 귀족연립체제를 성립시킵니다. 대대로는 3년에 한번 실력자 가운데 선출했으며, 왕은 이 때 궁문을 닫고 승리자를 인정하는 정도의 역할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최근에는 이러한 고구려의 귀족연립기를 장수왕 이후 천도한 평양성계 귀족과 장수왕 이전 국내성계 귀족의 대립으로 보는 견해도 많습니다.

백제는 개로왕의 전사 이후 웅진으로 천도하였는데, 이 때부터 웅진 토착 귀족들이 왕권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표현합니다. 이후 강력한 왕권을 가진 성왕이 죽은 이후 연, 백, 사씨 등의 8대성들이 연합하여 국정을 이끌어가는 체제로 돌아섭니다.

이러한 체제를 귀족연립체제라고 합니다. 이 귀족연립체제로 인한 내분과 갈등은 고구려, 백제의 멸망과 연결됩니다.

고구려는 이후 연개소문이 당제국에 맞서 천리장성을 축조하면서 세력을 키웠고, 선대왕을 죽이면서 귀족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연개소문은 <대대로 체제>가 아닌 강력한 <대막리지 체제>로서 독재 정권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연개소문 사후 다시 귀족간 내분에 휘말려 고구려는 멸망하게 됩니다. 백제는 의자왕이 즉위하면서 귀족연립체제를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결국 망국의 길을 걷게 됩니다.

여기까지 부체제에 대한 내용을 정리하여 보았습니다. 생각나는 만큼 막 적었더니, 포스트에 체계가 없네요. 다음 포스트에서는 삼국시대의 대외관계사를 정리하면서 삼국통일 이야기를 다루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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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불교를 이용한 정보전

1. 불교의 수용과정에서의 대립

요즘 뿌리깊은 한국사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책에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내용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고대사를 바라보고 있더군요. 그런데, 좀 읽다보면 신빙성 있는 부분들이 꽤 있습니다. 정확한 원문 사료를 비교해서 근거를 명확히 제시하니깐 좋은 것 같아요. 그 책에서 <불교>부분에 관한 재미있는 내용입니다.

불교 수용은 삼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것은 토템적, 애니미즘적인 자연주의 신관이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신관으로 바뀐 것을 말합니다. 훨씬 체계적이고 국가 이념으로 활용하기 좋은 종교였죠. 그러나 실제 불교가 공인된 것보다 더 이른 시기에 불교가 전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불교의 공인이 늦었던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2. 토착종교와의 갈등이 심하였다.

불교 수용이 늦은 첫 번째 이유는 토착종교와의 갈등입니다. 토착죵교는 자연주의적 종교로서 <천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건국하였다는 것을 주 이념으로 합니다. 단군도 하늘의 자손이고, 주몽과 하늘의 신과 바다의 신의 결합에 의한 작품입니다. 따라서 왕과 왕 주위의 지배층은 모두 천신과 지신의 후손들이기에 모두 동등한 하늘의 족속(천강지응족)입니다.

그러나 왕권 강화로 왕은 귀족들을 초월하는 새로운 종교인 불교를 수용하려고 했습니다. 국왕은 <왕은 곧 부처와 관련된 신성한 존재이다 - 왕즉불 사상>는 논리로 차별적이고, 초월적이며 신성한 권위를 과시하려고 했죠. 그 결과 국가의 지배층들은 국왕이 불교를 공인하는 것을 처절할 정도로 반대합니다. 왜냐면, 불교 공인은 곧 왕권 강화로 인한 귀족권 약화를 뜻하기 때문이죠. 예로 신라 법흥왕 때에는 불교 공인에 대한 귀족들의 무조건적인 반대로 인해 이차돈이 순교한 사건까지 발생합니다. 즉, 국왕과 귀족의 불교 수용을 둘러싼 갈등은 거의 전쟁을 방불케 하는 커다란 이슈였지요.

3. 불교는 침략 수단의 정보전이었다.

불교를 지배층이 인정하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불교의 수용이 곧 외세의 침략 수단이라고 생각한 인식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예로, 5C 남하정책을 펼쳐 고구려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 장수왕은 백제 개로왕을 몰락시키기 위하여 승려 도림을 간첩으로 보내어 개로왕이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백제 한성이 함락한 이야기에는 개로왕이 승려 도림의 말만 믿고 정치를 하다가 장수왕과의 전투에서 패해 죽게 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또, 신라 소지왕 시기에 서출지에 관련된 유명한 설화도 있습니다. 신라 소지왕 때 궁주와 승려가 간통을 했는데, 신라 소지왕은 하늘의 도움으로 그것을 알아 승려를 죽입니다. 그 승려 역시 첩자였을 가능성이 있죠. 원래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에 의지하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하던 신라가 이제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자, 승려를 통해 신라를 감시했던 고구려의 정보전을 엿볼 수 있는 사례입니다.

4. 관련된 사료들 모음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려고 간첩으로 갈 수 있는 자를 구하였다.

이 때 승려 도림이 응모하였다. 왕은 기뻐하여 비밀리에 보내어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 죄를 짓고 도망온 것처럼 하고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 백제왕 근개루(개로왕)는 바둑을 좋아하였다. 왕이 도림을 불러들여 바둑을 두었더니 과연 국수었다. 그래서 그를 상객으로 받을어 매우 친근히 하였다. 어느 날 도림은 왕을 모시고 있다가 조용히 말하였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악과 강과 바다니 이는 하늘이 베푼 요충이요 인위적 형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위세와 부유한 실적으로 남의 눈을 놀라게 해야 하는데 성곽과 궁실은 수리되지 않고, 선왕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고, 백성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무너지니 신은 대왕을 위하여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왕이 이를 옳다고 여겨 국인을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 등을 지었는데, 모두가 장대하였다. 이 때문에 창고는 비고 인민은 가난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이 달걀을 쌓아놓은 것보다 위태로왔다.

도림이 도망하여 이 사실을 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 삼국사기 권 25, 백제본기 3, 개로왕 21년 -

사료해석 : 초기 백제와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삼국의 귀족들이 왕권이 강화될까봐 염려되어 왈즉불 사상을 가진 불교 수용을 반대한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그 외에 정보전의 수단으로서 불교를 인식하였기 때문에 불교 수용을 꺼렸다는 기사들이 눈에 보입니다.

이 사료는 그 중 백제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즉, 고구려 장수왕이 스님 도림을 간첩으로 보내 백제를 혼란하게 하였다는 유명한 사료의 내용입니다. 이로 인해 백제는 장수왕에게 한강 이남을 빼았겼다는 내용입니다. 고구려 장수왕은 신라 소지왕을 암살하기 위해 스님에게 암살 임무를 부여하여 활동하였다는 기사도 나옵니다. 즉, 이 당시 장수왕은 활발한 정보전과 중국과의 적절한 외교, 탁월한 군사 전략 등을 적절히 섞어서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이렇게 불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신라왕까지 암살하려고 하였다면 신라 내부에서 불교에 대한 반감이 무지 컸을 것이고, 아차돈의 순교까지 보아가면서야 겨우 불교를 공인하였다는 점이 이해가 가기도 하는 대목입니다.

제 21대 비처왕(소지왕) 즉위 10년(488)에 왕이 천천장에 행차하였다. 이 때 한 노인이 못에서 나와서 글을 올렸는데, 겉봉에 이렇게 써 있었다.

<이를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을 것이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일관이 아뢰기를, <두 사람이란 서민이요, 한 사람이란 왕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왕이 그리여겨 떼어보니, <거문고 통을 쏘아라>라고 씌여 있었다. 왕은 곧 궁궐에 돌아가 거문고 통을 쏘니 거기에는 궁궐에서 분향 수도하던 중이 궁주와 몰래 간통하고 있어, 두 사람을 사형에 처하였다.

- 삼국유사 권 3, 원종흥법염촉멸신 -

참고글 : 이 이야기는 신라 소지왕 대의 이야기입니다. 소지왕은 백제와 손잡고 강력하게 고구려에 대항하려 하였던 왕인데, 고구려는 소지왕을 제거하려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즉, 궁주와 함께 왕을 암살하려고 했던 승려 간첩을 서출지에서 나온 노인이 알려줘서 막았다는 설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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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 마립간 시대

자비 마립간 11년(468)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경계 실직성에 침입하였다. 9월에 하슬라인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니하(강릉 오십천)에 성을 쌓았다. 13년에 삼년산성(보은 오정산성)을 쌓았다. 14년(471) 2월에 모로성을 쌓았다. 17년에 일모, 사시, 광석, 답달, 구례, 좌라 등의 성을 쌓았다. 17년 7월에 고구려왕 거련(장수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니 백제왕 경(개로왕)이 아들 문주를 보내 도움을 구하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도왔다. 그런데, 미처 그곳에 이르지 못하여 백제는 이미 함락되고 경도 또한 해를 입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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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회의 정보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치려고 간첩으로 갈 수 있는 자를 구하였다.

이 때 승려 도림이 응모하였다. 왕은 기뻐하여 비밀리에 보내어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 이에 도림은 거짓 죄를 짓고 도망온 것처럼 하고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 백제왕 근개루(개로왕)는 바둑을 좋아하였다. 왕이 도림을 불러들여 바둑을 두었더니 과연 국수었다. 그래서 그를 상객으로 받을어 매우 친근히 하였다. 어느 날 도림은 왕을 모시고 있다가 조용히 말하였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악과 강과 바다니 이는 하늘이 베푼 요충이요 인위적 형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왕께서는 마땅히 숭고한 위세와 부유한 실적으로 남의 눈을 놀라게 해야 하는데 성곽과 궁실은 수리되지 않고, 선왕 해골은 들판에 가매장되어 있고, 백성의 가옥은 자주 강물에 무너지니 신은 대왕을 위하여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왕이 이를 옳다고 여겨 국인을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 등을 지었는데, 모두가 장대하였다. 이 때문에 창고는 비고 인민은 가난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이 달걀을 쌓아놓은 것보다 위태로왔다.

도림이 도망하여 이 사실을 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백제를 공격하였다.

- 삼국사기 권 25, 백제본기 3, 개로왕 21년 -

사료해석 : 초기 백제와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는 삼국의 귀족들이 왕권이 강화될까봐 염려되어 왈즉불 사상을 가진 불교 수용을 반대한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그 외에 정보전의 수단으로서 불교를 인식하였기 때문에 불교 수용을 꺼렸다는 기사들이 눈에 보입니다.

이 사료는 그 중 백제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즉, 고구려 장수왕이 스님 도림을 간첩으로 보내 백제를 혼란하게 하였다는 유명한 사료의 내용입니다. 이로 인해 백제는 장수왕에게 한강 이남을 빼았겼다는 내용입니다. 고구려 장수왕은 신라 소지왕을 암살하기 위해 스님에게 암살 임무를 부여하여 활동하였다는 기사도 나옵니다. 즉, 이 당시 장수왕은 활발한 정보전과 중국과의 적절한 외교, 탁월한 군사 전략 등을 적절히 섞어서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되겠네요.

이렇게 불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신라왕까지 암살하려고 하였다면 신라 내부에서 불교에 대한 반감이 무지 컸을 것이고, 아차돈의 순교까지 보아가면서야 겨우 불교를 공인하였다는 점이 이해가 가기도 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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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 고구려비

5월에 고려대왕상왕공(高麗大王相王公)과 신라 매금(寐錦)은 세세토록 형제같이 지내기를 원하여 서로 수천(守天)하기 위해 동으로 [왔다]. '매금(寐錦) 기(忌) 태자(太子) 공(共)…상(尙)…상공간노(上共看奴) 주부(主簿) 도덕(道德)'등이 …로 가서 궤영에 이르렀다. '태자(太子) 공?(共)…상(尙)…상공간(上共看)' 명령하여 태적추(太翟鄒)를 내리고 … 매금의 의복을 내리고 '겅립처(建立處) 용자사지(用者賜之) 수자(隨者) … 노객인(奴客人) … 제위(諸位)'에게 교를 내리고 여러 사람에게 의복을 주는 교를 내렸다. 동이 매금이 늦게 돌아와 매금토내(寐錦土內)의 제중인(諸衆人)에게 절교사(節敎賜)를 내렸다. [태자 공(共)이] 고구려 국토내의 대위(大位)·제위(諸位) 상하에게 의복과 수교를 궤영에서 내렸다. 12월 23일 갑인에 동이매금(東夷寐錦)의 상하가 우벌성(于伐城)에 와서 교를 내렸다. 전부(前部) 대사자(大使者) 다우환노와 주부 도덕(道德)이 국경 근처에서 300명을 모았다. 신라토내(新羅土內) 당주(幢主) '하부(下部) 발위사자(拔位使者) 보노(補奴) …'와 개로(盖盧)가 공히 신라 영토내의 주민을 모아서 …로 움직였다.

'… 중(中) … 성불(城不) … 촌사(村舍) … 사공(沙攻) … 절인(節人) … 신유년(辛酉年) … 십(十) … 태왕국토(太王國土) … 상유(上有) … 유(酉) … 동이(東夷)' 매금의 영토 '… 방(方) … 환□사□사색(桓□沙□斯色) … 고추가(古鄒加)' 공(共)의 군대가 우벌성에 이르렀다. '… 고모루성수사(古牟婁城守事) 하부(下部) 대형(大兄) 이다.(耶)□'

자료 참조 : 중원고구려비는 의미하는 바가 많으나, 거의 알아볼 수가 없어서 안타까운 비석입니다.

1. 고구려왕과 신라 매금이 서로 형제같이 지내기로 하고 서로 도왔다라는 측면에서 아직까지 신라가 고구려의 영향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매금에게 의복을 내리고 교를 내리다라는 점에서 고구려는 신라를 속국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2. 수천, 노객 등이라는 말로 보아 신라는 고구려를 받들고 스스로를 고구려의 종이라고 표현하는 듯 합니다.

3. 신라 영토 내에 당주의 직책을 가진 발위사자가 존재하였다라는 점이 나오므로 고구려가 신라의 영토에 대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 실력도 모자라고, 이 글에 대한 해석본을 찾기가 힘들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습니다. 추후에 자료를 찾게되면 다시 올리 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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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영토 확장

동명성왕 2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그  땅을 다물도로 삼고 송양을 그 곳의 주로 봉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

부여왕 사촌 동생이 만여명을 데리고 투항해 오니 대무신왕이 왕으로 봉하고 연나부에 안치시켰다. 9년 10월에 왕이 친히 개마국을 정벌하여 왕을 죽이고 백성을 위로하여 노략질을 못하게 하고 군현으로 삼았다. 12월에 구다국왕이 개마가 멸망했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

태조대왕 11년 8월에 갈사왕 손도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도두를 우태로 삼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 -

9월, 왕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현도군에 침입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

6월, 왕이 군사 4천 명을 내어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키고 남녀 l만명을 사로잡아왔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

8월, 왕이 백제와 패수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포로 8천 명을 사로잡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

9월, 왕이 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입해서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왕 부여경(개로왕)을 죽였으며 포로로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

자료 참조 : 고구려의 영토 확장에 대한 현재 교과서 내용의 증거 사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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