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토리아

역사 크로스 퀴즈(난이도 :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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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답지 확인하기 클릭!!!

 

 

좌우 크로스

  1.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 경주 김씨의 시조이다.
  2. 1884년 프랑스의 에펠이 시공을 착수하여 만든 상으로, 1885년 미국으로 옮겨졌다. 프랑스가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양국의 친목을 다지기 위해 세웠다.
  3. 16세기 프랑스의 카톨릭과 개신교의 분열을 표현한 영화. 주인공은 샤를르 9세의 동생으로 구교도였지만, 프랑스의 정략결혼 희생양이 된다. 이자벨 아자니의 열연이 돋보이는 영화이다.
  4. 중국 청나라 건륭제의 명으로 1781년 (건륭 46년)에 편찬 및 완성된 중국 최대의 총서이다. 전 3,503부 79,337권에 달한다..
  5. 1880년. 중국의 황줸믱의 저서를 국내에 번역한 책. 조선의 개화 방법의 지침을 적은 책으로, 이후 조선 사회의 심각한 분열을 야기하였다.
  6. 은 조선 후기에 명나라에서 들어온 한국의 놀이이다. *패라고 불리기도 했다
  7. 중국 당나라 현장의 구법여행을 명나라 때 다시 재구성한 소설. 오승은의 저작이다.

상하 크로스

  1. 통일신라 원성왕의 이름이다. 혜공왕대 김지정의 난을 평정하고, 혜공왕을 사살했다.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데 공을 세워,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선덕왕 사후 김주원을 대신하여 신라 하대의 원성왕계를 시작하였다.
  2. 고대 이집트에서 만든 죽은 자의 책.
  3. 조선시대, 말을 치료하는 의원.
  4. 중국 남송 말에서 원나라 초에 걸쳐 활약했던 증선지(曾先之)가 편찬한 중국의 역사서. 《사기(史記)》《한서(漢書)》 《삼국지(三國志)》 등 정사(正史) 17종에, 송대(宋代)의 사료를 더하여 이런 이름을 붙였다.
  5.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모든 저술을 정리한 문집이다. 흠흠신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외 154권 76책으로 정리하였다.
  6. 옛날 결혼한 남자들의 머리 모양.결혼을 하거나 관례를 올릴 때 한다. 이는 머리카락을 올려빗어 정수리 위에서 틀어감아 삐죽하게 맨 것이다
  7. 단군이 개창한 최초의 국가.
  8. 고려시대 수조권에 기반하여 토지를 분급한 토지제도.
  9. 고려, 조선 시대 세곡을 운반하기 위해 각 포구에 만든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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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12  화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한국사 3급 검정 문제> 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1. 다음 그림을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1. 위 그림과 같은 피난길에서 있었던 사실과 다른 것을 골라보세요.
①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소현세자를 전주로 내려보내고 자신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②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되었다.
③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가 피난한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화해를 하였다.
④ 청과 사대 관계를 맺은 후 효종은 북벌을 준비하였다.
⑤ 북벌을 위한 군대는 러시아와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는 나선 정벌에 이용되었다.

 

2. 다음 그림을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2. 위 지도와 같은 시기에 있었던 사실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① 조선에 표류했던 하멜은 네덜란드에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작성하였다.
② 김육은 서양식 달력인 시헌력 채택을 주장하여 실현시켰다
③ 소현세자는 아담샬을 만나서 천주교 신앙에 관한 책을 국내로 가져왔다
④ 정두원은 천리경과 자명종을 조선에 수입하였다
⑤ 김홍집은 황쭌셴으로 부터 조선책략을 수입하여 17세기 국제정세를 조선에 알렸다.

 

3. 다음 지도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3. 위와 같은 국제 정세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무엇일까요?
① 대성 : 백제가 마한땅을 정복하고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한 시기였네
② 승리 : 낙동강에 진출해서 가야의 해상 교역에도 큰 타격을 주었겠군.
③ 탑 : 중국의 요서 지방과 산둥 반도에서 진출했잖아?
④ 태양 : 근초고왕의 고구려 공격으로 고국천왕이 전사했었어
⑤ 지드레곤 : 근초고왕이 왜 왕에게 하사한 칠지도는 백제의 우수한 철기문화를 보여주는 예로 볼 수 있지

 

4. 다음 지도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4. 위와 같이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반대운동이 있던 시기의 조선과 주변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을 골라보세요.
① 규리 : 조선에서 3.1 운동이 있던 같은 해에 러시아는 코민테른(제 3 인터내셔널)이 결성되어서 반제국주의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지.
② 니콜 : 3.1 운동과 같은 해에 중국은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반대하는 5. 4 운동이 있었지, 아마?
③ 하라 : 당시 이집트의 반영운동은 수에즈 운하에 대한 소유권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네.
④ 승연 : 당시 인도의 독립운동은 비폭력, 불복종을 지향했었잖아.
⑤ 지영 : 3. 1 운동은 세계 1차대전이 발생하기 전에 시작되었지?

 

5. 다음 표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5. 위 표에서 설명하고 있는 단체에 대해서 틀린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창민 : 이 단체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계승하고, 베이징에 수립하였지.
② 윤호 :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였고, 행정 기관으로 국무원을 두었잖아.
③ 유천 : 이승만의 외교론과 신채호의 투쟁론이 대립하면서 분열되었고, 창조론이 대두했었지.
④ 창민 : 개헌을 거듭할 수록 힘이 약해져서 결국 김구가 주석을 맡아 이끌어갔잖아.
⑤ 재중 : 우리 나라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인데, 연통제와 교통국 등의 조직과 애국공채 발행 등을 통해 군자금도 마련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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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6. 개화 세력의 대두와 개화 정책의 추진 
 개화파의 뿌리는 박지원, 박제가를 축으로 하는 북학파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후 박지원의 손자인 박규수와 청을 왕래했던 오경석과 같은 역관 출신의 중인들로부터 신 문물이 전파되면서 중인들도 통상개화론의 주연들로 등장하게 된다. 통상개화론자들 이후로 개화파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양무 운동(洋武運動)를 모델로 개화하고자 하는 온건 개화파문명 개화론에 입각하여 변법적(變法的)인 개화를 모색하는 급진 개화파가 그것이다.
 온건 개화파 같은 경우 의 북양대신 이홍장이 주장했던 것처럼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중심으로 깔아둔 양무 운동을 근본으로 삼고 있다. 때문에 청나라와 친하고 상대적으로 일본과는 감정이 좋지 않았다. 동도 서기(東道西器). 즉, 동쪽 나라의 도리와 서양의 기술이라 함은, 우리 나라는 성리학적 윤리로 도(道)는 완성에 이르렀으나 아직 기술 문물이 발전하지 못했음으로 서양의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부국 강병을 추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주로 개항 이후 1880년대의 주된 개화 운동(통리기무아문, 박문국, 기기창, 우정국, 별기군 등)와 대한 제국의 광무 개혁(기술, 농업, 학교 설립 등)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문명 개화론에 의한 개혁을 추구했던 급진 개화파는 서양 제국주의 열강을 개화된 문명이라 여기면서 그 중간자인 일본을 반 개화된 상태로 보고 미개화 상태인(그들 생각에) 우리 나라를 개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일본과 깊은 관계를 갖고, 청을 무시하였다. 동도 서기론자들과 달리, 그들은 서양의 발전된 문물들과 함께 그들의 제도를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당시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제도 개혁에 힘썼다. 예를 들어보자면, 이들이 시행했던 갑신 정변과 독립협회는 입헌 군주제적인 제도를 지지하고 제도적 변화를 모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7. 위정 척사 운동
  위정 척사(爲正斥邪)라는 말은 '바른 것(성리학)을 위하고 사악한 것(서학 : 기독교)을 배척한다는 것'이다. 당시 선비들이 성리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그들이 제사를 모시지 않고 조상신을 귀신으로 모는 등 유교 윤리에 정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처럼 여기어졌다. 굳이 말해본다면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를 개화, 보수의 두 축으로 보수쪽이라 할 수 있다. 크게 10년 주기로 나누어 설명하도록 하겠다.
  1860년대 병인양요를 배경으로 쓰여진 이항로의 척화주전론은 강력하게 통상 반대를 주장하였다. 물론 척화주전론은 당시 집권하고 있던 흥선대원군의 통상 거부정책과 맞아떨어져 큰 호응을 얻었다.(유일하게 정부정책과 위정척사론이 일치한 경우이다.)
  "(전략) 사학(서학)의 무리를 잡아 베게 하시고, 밖으로는 장병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케 하소서." 

- 이항로, 「척화주전론」


  1870년대
최익현1876년 강화도 조약을 반대하면서 통상 개화가 불가능한 다섯가지 이유를 들어가면서 5불가론(소)으로 반대하였다.

"우리들의 물화는 대부분이 땅에서나는 것으로 유한한 것이고 저들의 물화는 모두 지나치게 야비하고 음란한(?♡_♡?) 노리개로, 손으로 만든 것이므로 그 양이 무궁무진합니다. (중략) 저들이 비록 왜인(倭人)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洋敵)입니다." 

- 최익현, 「왜양일체론」


  1880년대
2차 수신사였던 김홍집이 "일본에서" 황쭌센으로부터 받은 「조선책략」을 가져오면서 청의 말도 안되는 외교정책에 이용당하는 설움을 영남에 있는 만명의 선비의 (상)소를 통해(지금으로 보면 서명운동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반대하였다.

"수신사로 일본에 갔다온 김홍집이 가져온 황쭌센의 「조선책략」을 보건데 온몸에 털이서고, 눈앞이 흐려집니다.(중략) 원교(遠交 : 여기서는 미국과의 통상을 뜻한다.) 핑계로 근린(近隣 : 러시아)를 배척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들은 모두 같은 오랑캐입니다. 누구는 후하게 대하고 누구는 박하게 대할 수 없는 일입니다."

- 이만손 외. 「영남만인소」

   
  1890년대 을미개혁으로 인해 단발령이 내려지고 을미사변(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로부터 시해당한 사건)을 계기로 양반 유생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전략)... 국모의 원수 ... (후략)" 
 
  위정 척사의 의의는 통상 수교 정책처럼 반외세, 반침략에 대해 국권과 문화적 주체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것이다. 단점 또한 통상 수교 정책과 같아서, 우리 나라의 근대화를 지연시켰다는 단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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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0. 다시 한 번 시작하며ㅡ
  올해도 수능이 끝났습니다. 수능이 끝났음에도 수능대비용으로 정리하는 것처럼 덧없고 부질없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군입대를 앞둔 대학생이며, 현재 활동하시는 분들께도 공부가 미치지 못합니다. 더욱이,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란 일부를 추려내고 몇몇 사항을 정리하고 그 인과관계를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서술한 내용과 히스토리아의 다른 필자분께서 집필하신 내용이 다르다면, 다른 필자분의 의견을 좇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등학교, 특히 수능에서만 통용되는 '시험대비용'에 불과하며 다른분들이 공부해서 작성한 것과는 그 질에서 비할바가 못됩니다. 이 점을 유의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어린 나이에 왕에 즉위한 고종 대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그 당시 상황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데, 국내적으로는 세도정치로 인한 왕권 약화와 그에 따른 조세 제도의 문란(삼정의 문란)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고 국외적으로는 이앙선이 출몰하여 민심은 동요케 하고, 천주교가 확산되어 성리학적 세계관이 흔들리는 등, 혼란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먼저 그는 폭넓은 인재 등용과 세도 정치의 중심이었던 비변사를 축소하게 되면서 세도 정치를 혁파하였고, 재상 회의기구였던 의정부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법전을 편찬(대전 회통)하고 경복궁을 중건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좀더 쉽게 이해를 하기 위해, 세도 정치를 혁파하고 왕권을 확장시킨 것을 정리한 것을 대전회통이라고 생각하는게 좋다.) 당시 무차별적으로 농민들의 땅을 합병하고, 세금도 내지 않았던 서원을 철폐하고, 각종 삼정의 문란을 개혁하면서 민생 안정을 꾀하였다.


 Tip. 삼정 개혁 : 전(田)정, 군(軍)정, 환곡(環穀) 개혁

 전정 : 양전, 양안 사업(토지 조사), 토지 겸병을 통한 개혁

 군정 : 호포법(號~, 집집마다 군포를 내도록 하는 법)을 통해 양반에게도 군역 부여

 환곡 : 환곡제를 폐지하고 양심있는 양반의 개인 창고(사창)에서 곡식을 꾸도록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원납전(願納錢 : 양반들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해서 내는 돈)을 강제적으로 징수하고 당백전의 무리한 발행으로 인프레이션을 유발하였다. '경복궁 타령'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노동력의 징발 또한 가혹하여,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Tip. 인민들의 반대
  
양반이 반대한 것 : 서원 철폐, 호포제, 원납전

농민이 반대한 것 : 당백전, 노동 징발


2. 통상수교 거부 정책과 양요 
  순서, 인과 관계, 관련국(중요), 지리적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1) 병인박해(1866) 
  러시아의 강력한 남하 정책으로 위기를 느낀 흥선대원군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에게 러브콜을 신청하였으나, 이를 프랑스 선교사들이 무시를 했다. 러브콜의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흥선대원군은 이로 인해 기존 세력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함으로써 프랑스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참고로 말하자면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절실한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 수정사항)

 2) 제너럴 셔면호 사건(1866)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들어왔다. 물이나 식량을 구걸하는 등의 연극을 통해 평양에 들어왔지만, 시내를 향해 공격하자 이에 박규수가 제너럴 셔먼호를 불질러 버렸다.

 3) 병인 양요(1866)
  대동여지도를 통해 서울로 곧바로로 가는 길을 알게된 프랑스는 강화도를 통해들어왔다. 문수, 정족 산성 등에서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내쫓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강화도를 통해 들어와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장서들을 쌥쳐가서 현재까지 외교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4)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충남 덕산(예산)에 위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5) 신미양요(1871)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뒤늦게 알고서는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의 보복을 한 사건이다.  그들 역시 대동여지도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왔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당시 미국과 조선은 압도적인 화력차이가 났고 미국은 대포 몇 번 쏘다가 반응이 없어서 그대로 돌아갔다는 말이 있을정도이다.

 
6) 척화비
  이래저래 서양에 대한 안좋은 이미지를 갖게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 거부(소위 쇄국정책)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하게 된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수호하고 주체성을 지켰다는 것은 높이 평가되어 지지만, 그만큼 근대화와 세계화를 지연시키기도 하였다.


3. 강화도 조약(1876)
  최익현의 도끼 상서로 실각하게된 흥선대원군의 바톤을 민비가 이어받아 민씨 정권을 수립하였다. 통상수교 거부 정책 및에서 억눌려왔던 개화론이 박규수 등을 필두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위로부터 원샷 개혁(메이지 유신) 성공한 일본이 예의를 지키지 않는 투로 외교문서를 보내자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이에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한론(征韓論 : 한반도를 정복하자는 이론) 내세우기 시작한다.(원래는 신생 일본의 발전 발판으로써 한반도를 정복하려고 하였다.) 곧 일본이 운요호 사건(1875)을 꼬투리 잡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조 일 수호 조규, 1876)가 맺어지게 된다.

 주요 조항 분석

1관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 침략을 쉽게 하기 위해 청의 종주권을 부정

5관 조선은 부산 외에 2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왕래 통상함을 허락한다.

  => 본래 부산(동래)는 왜와 통상하던 항구였으므로 경제적 항구였던 부산러시아의 
        
남하 견제를 위해 군사적 목적을 띈 원산의 개항,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인천항을 개항하므로써
       
서울에 직접적인 정치적 간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7관 조선은 일본의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가한다.

   => 연안의 자원, 항로 확보와 유사시 효율적인 작전을 전개하기 위함이다.

9관 양국 관리는 약국 인민의 자유로운 무역 활동에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 더 많은 물량을 가진 일본 상인에게 유리

10관 일본 인민이 조선이 지정한 각 항구에서 죄를 범한 경우 일본 관원이 심판한다.

   => 치외법권(영사 재판권)을 인정하였다. 대표적인 불평등 조항

 * 주의 : 강화도 조약에는 최혜국 조항이 없다


부속 조약

1) 조일 수호 조규 부록

 4관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간행이정을 10리로 제한한다 => 거류지 제한

 7관 일본 국민은 본국에서 사용되는 화폐로 조선 국민이 보유하고 있는 물자와 마음대로

 교환할 수 있다 => 일본의 화폐 유통 허용하여 경제적 침략을 받게 된다.


2) 조일 통상 장정

 제 6조 조선 항구에 머무르는 일본인은 쌀과 잡곡을 수출할 수 있다.

  => 양곡의 무제한 유출을 허용하게 된다(훗날 방공령으로 방어)

 제 7조 일본 선박은 선세를 납부하지 않으며, 수출입 상품에도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 자국 산업을 보호 불가(마치 현재 FTA라고 보면 됨.) 


4. 다른 나라와의 수교

 1)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제 2차 수신사로 다녀온 김홍집 전한 황쭌센의 「조선책략」에 의해 맺어진 조약이다. 청은 자신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종주권)을 과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주선하였다. 사실 청의 본 뜻은 청 - 조선 - 미국의 한 축을 구성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고, 확대되어가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견제라 할 수 있다.


 주요 조항 분석

 제 4조 (전략) 미 합중국 국민이 조선에서 조선 인민을 때리거나 재산을 훼손하면

        (중략) 미 합중국 법률에 따라 체포하고 처벌한다 => 치외법권

 제 14조 (전략) 본 조약에 부여되지 않은 어떠한 권리나 특혜를 다른 나라에 허락할

        때에는 자동적으로 미국 관민에게도 똑같이 주어진다.

         => 최혜국 대우, 아관 파천 이후 이권침탈에 악용되었다.

 

  그 외

  거중 조정 조항 : 위험할 때 서로서로 도와준다.

  => 형식적인 조항이다. 이후 일본과 미국 사이에 맺어진 가쓰라-테프트 밀약에서
     
정면적으로 위반된 조항이기도 하다.

 2) 한러 통상조약(1884)
  조선 정부는 국내에서 청, 일의 간섭이 점점 더 심해지자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다. 때마침 러시아는 외교 고문인 베베르를 파견하여 친러 세력을 확장하고 이윽고 러시아와 독자적으로 수교를 맺게 된다. 그 결과 러시아는 함경도 경흥에 조차지를 확보하였다.


5. 외교 사절
  민씨정권은 개화한 이후 개화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주변국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여 신 문물과 신 제도를 수용하였다. 에는 영선사를, 미국에는 보빙사를, 일본에는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공식적인 외교사절로 각각 귀국 후 보고서를 작성하여 올렸다. 하지만 형식적인 보고서에 실망한 고종은, 밀서를 내려 비밀리 조사 시찰단(신사 유람단)을 파견하여 일본 근대화에 대한 다향한 의견을 수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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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1884. 갑신정변이 일어나다!

1. 1880년대 이후 개화파의 분위기

오늘 다룰 내용은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은 1884년에 일어난 사건이지요. 갑신정변은 개화기의 모든 정황과 동 떨어져 단독 사건으로는 볼 수 없는 사건입니다. 개화기의 큰 흐름 속에서 척사와 개화라는 양대 기류가 정면 충돌한 사건이지요.

따라서 갑신정변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전 포스트에서 다룬 조선책략, 위정척사, 임오군란, 개화파의 흐름 등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럼 간략하게 그 흐름만 다시 짚어볼까요?

1880년 개화의 지침서인 조선책략이 들어온 이후, 조선 사회는 개항과 개화를 반대하는 위정척사운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이 운동은 조선책략 태우기 운동, 개화를 추구하는 민씨 정권 타도 운동으로 까지 발전하려는 분위기였죠.

반대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속에서 숨 죽여 개화를 주장하는 개화 1세대들은 민씨정권의 등장이후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이들은 1878년 충의계라는 개화조직을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개화를 위한 깃발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이 개화와 척사라는 큰 흐름은 언젠가 한번 크게 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폭발은 엉뚱하게도 <임오군란>을 통하여 전혀 다른 역사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임오군란은 청의 도움을 받은 민씨세력의 재집권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청나라의 전면적 내정간섭이 시작되었지요. 문제는 개화와 척사라는 큰 흐름이 <청>이라는 외세에 의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청나라는 조선에 정치고문인 묄뢴도르프, 군사고문인 마젠창을 보내면서 민씨정권의 소극적인 개화마저도 태클을 걸게 됩니다.

안 그래도 민씨정권의 개화에 맘이 안 들었던 급진개화파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적 개화파들은 그동안 민씨정권에서 추진해온 소극적 개화파들의 정책으로는 근대화가 늦어질 것으로 판단하고 <고종>에게 직접 접근하여 빠른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갑신정변의 주역들 :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홍영식(좌측부터)>

2. 급진개화파가 청의 세력에게 밀리다.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고, 기존의 개화파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급진 개화파들이 고종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청의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883-1884년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급진개화파들은 조정에서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의 세력을 견재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철종의 딸인 영혜공주와 결혼한 <박영효>는 고종과의 인척관계를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청을 견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분위기에서 김옥균은 고종에게 개화가 필요한 이유를 역설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이는 오직 밖으로 널리 구미 각국과 신의로 친교하며, 안으로는 정략을 개혁하여 우매한 백성들을 문명의 도로 교육하며, 상업을 번성시켜 재정을 정리하는 데 있습니다. 또 군대를 기르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할 수 만 있다면 영국은 마침내 거문도에서 물러날 것입니다. 그 밖의 여러 나라도 역시 침략의 뜻을 버릴 것입니다.

바야흐로 세계는 상업을 주로 하여 서로 산업의 크고 많음을 자랑하고 경쟁하는 때이거늘, 아직도 양반을 제거하여 뿌리를 뽑지 않는다면 국가의 패망은 기어코 앉아서 기다리는 꼴이 될 뿐입니다. 전하께서 이를 철저히 반성하시어 하루 빨리 무식 무농하고 수구 완고한 간신배를 축출하시고, 문벌을 폐하고 인재를 골라 중앙 집권의 기초를 확립하여 백성들의 신용을 얻으시고, 널리 학교를 세워 백성의 지식을 깨우치게 하시옵소서. 외국 종교를 들여와 교화를 돕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 고균 김옥균전 -

고종은 급진개화파의 사상을 어느 정도 공감하였습니다. 이미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파의 추진 정책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당시 조정의 실권은 청의 고문들에게 있었으니까요.

이러한 급진개화파와 청의 세력간의 갈등은 <재정문제>를 둘러싸고 크게 한판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재정은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는데, 이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의 고문은 묄렌도르프는 <악화주조>를 주장합니다. 악화주조란, 일단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돈을 찍어내자는 것으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짓기 위해 <당백전>을 발행한 것처럼 <당오전>을 발행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청의 재정고문의 의견에 급진개화파는 적극 반대합니다. 흥선대원군의 당백전 발행으로 물가가 올라서 백성들의 삶이 황폐해졌다는 것을 이유로, 돈을 만들어 찍기 보다는 <차관을 빌려서 재정 위기를 해결한다는 경제원칙>을 주장한 것이지요. 즉, 급진개화파의 재정해결책은 <차관도입론>이었습니다.

박영효는 일본에서 돈을 빌려서 국가의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고, 급진개화파의 입지를 확실히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겪은 후 내부적으로 일시 불황을 겪고 있던 일본은 돈을 빌려주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급진개화파의 입지는 한없이 좁아졌고, 청의 고문들은 급진개화파를 공격하여 그 세력을 뿌리뽑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습니다.

3. 하늘이 도와 청군이 일시 물러가다.

차관 도입에 실패한 개화파들은 정치적으로 구석에 몰려 곧 괴멸당하거나, 망명해야 할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하늘이 도왔습니다. 청과 프랑스 사이에 청불 전쟁이 벌어졌고, 청나라는 조선의 군대를 급히 인도차이나 반도로 돌려야 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3000명의 청군이 있었는데 이중 절반 이상이 조선을 떠난 것입니다.

김옥균 등 개화파들은 일본에 군사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정변을 계획합니다. 일본 역시 청 때문에 약해진 자신들의 입지를 고려해서 급진개화파를 적극 지원하기로 합니다. 급진개화파들은 친청파인 보수세력을 제거할 시기로 <우정국 축하연>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그럼 갑신정변의 과정을 상세한 사료로 한번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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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진행도 : 정변의 과정>

갑신(1884) 9월 다케조에 신이치가 부임지인 조선에 왔다. 이때 중국와 프랑스는 안넘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일본 공사는 김옥균 등을 꾀어 말하기를 <청국은 이제 조선을 돌아볼 틈이 없으니 청국세력을 배제하고 독립할 기회는 바로 이때다. 기회를 놓치지 말라> 하니 매일 밤 모여서 은밀한 화합을 가지고 일본군을 의탁하여 청국인을 방어하며 자객을 양성하여 청당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로부터 군함을 파송하여 후원해준다는 밀약까지 받았다.

- 박은식, 한국통사 -

같은 해 10월 17일 우정국이 낙성되고 홍영식이 총판이 되매, 연회를 베풀고 대관들과 각국 공사, 영사들을 초청하였다. 이에 육조판서와 내아문, 외아문 독판, 전후좌우 네 영사, 그리고 미국 공사 푸트, 영국 영사 애스톤, 청국 영사 진수당 등이 모두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일본 공사는 병을 칭탁하고 오지 않았으며 서기 시마무라를 시켜서 대행하도록 하였다.

같은 날 오후 6시에 연회를 시작하였는데, 홍영식 등은 미리 왕궁문 앞과 경우궁 안에 사관생도들을 매복시켰으며, 또한 우정국 앞 개천에 자객을 매복시켜 방화로 신호를 하게 하였다. 김옥균 등은 출입이 잦았으나 지휘하는 형적은 속이고 극비에 부쳤다. 10시가 되어 갑자기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그 때 달이 밝아 대낮 같은데 불빛이 충천하였다. 민영익은 <불이야> 소리를 외치며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밖으로 나오니 앞 개천을 따라오던 자객이 칼로 내려치자 영익이 몇 군데 자상을 입고 쓰러지자, 빈객들은 모두 대경실색하였다. 일당들은 여기서 청당을 모두 죽이려 하였으나 단지 민영익 한 사람만을 부상시켰다. 박영효, 김옥균, 사광범 등은 대궐로 달려가 바로 침전에 들어갔으니, 미리 내응이 되어 있던 궁녀가 문을 열고 기다린 까닭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헐떡이며 급히 아뢰되 <청나라 군사가 난을 일으켜 불빛이 성안에 가득하고 대신들을 마구 죽이니 급히 자리를 옮기시어 피신하소서> 라고 청하고, 아울러 일본 공사를 불러들여 호위케 하라고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김옥균 등은 울며불며 달래다가 위협하며 빨리 떠나라고 요구하였다. 중관 유재현이 살해되니, 왕은 창황히 침전에서 나갔으며, 조태호, 홍태후와 왕후, 태자 이하는 모두 걸어서 따라나섰다.

영숙문에 이르러 갑자기 총소리가 일어나자, 김옥균 등은 급히 외치며 청병들이 많이 이르렀으니 서둘러야 한다고 하였다. 이 총소리는 일당들이 미리 이곳에 사관생도들을 매복시켜 왕이 이르는 것을 엿보아 총소리를 내 암호로 삼은 것이었다. 다시 일본 공사를 불러들여 호위해달라고 청했으나 왕이 듣지 않자, 김옥균, 서광범 등은 품과 있던 연필과 서양 종이를 꺼내어 일사내위(일본공사는 나를 지켜라)라는 넉자를 쓰고, 인신 증거도 없이 일본 공관에 보냈다. 왕이 경우궁에 당도하였다는 소식이 일본 공관에 이르자, 일본 군사들은 이미 낭우에 가득하고 일본 역관 아사야마는 맞아 뵙고, 공사 다케조에는 따라 들어왔다. 왕은 동상에 어거하시고, 일본 공사와 일당들은 청사에 거처했다. 조금 뒤 사관생도 12명이 입궁하여 둘러쌌으며 김옥균, 홍영식 등은 슬퍼하며 우는 모양을 짓고 있었다. 이에 일본병은 궁문을 에워싸고 일당들은 그 가운데 거하면서 외부와 내통을 억제했다.

- 박은식, 한국통사 -

이 때 우리 민인들은 일본인을 원수로 보았고 맹세코 함께 살 수 없다 하여 만나면 치고받아 죽이기까지 했다. 청병 또한 일본 공사관을 밤에 몰래 공격하여 39명을 죽이고 부녀는 욕을 보였으며 방사를 파괴하니, 드디어 다케조에 공사는 깃발을 내리고 군대를 이끌고 서소문을 빠져 도망쳤다. 이 때문에 우리 백성들은 더욱 노하여 일본 공관을 불태우고 육군 대위 이소하야시를 죽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머리를 깎고 양복 차림으로 영사관에서 나무 궤짝 속에 몸을 감추고 24일 일본 상선을 타고 도망쳤다.

- 박은식, 한국통사 -

4. 갑신정변과 김옥균에 대한 평가들

갑신정변의 여러 적들(김옥균 등)은 서양을 존중하고 요순과 공맹을 비판하면서 유교를 야만이라고 하고, 도를 바꾸려 하면서 매번 개화라 일컬었다.

- 속음청사, 상 -

김옥균은 청군의 종주권 아래에 놓여 있는 굴욕감을 이겨내지 못하여 어떻게 하면 이 같은 치욕에서 벗어나 조선이 세계 각국 가운데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일원이 될 것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심초사 하였다. 김옥균은 그대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니, 시대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도 강력한 현대 국가가 되어야 함을 절실하게 바랬다. 그리하여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기술 채용에 따라 정부와 일반 사회의 구투인습을 일변시킬 필요를 확신하였다.

그(김옥균)는 구미 문명이 하루저녁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열국이 서로 경쟁을 벌여 점진적으로 이룩해낸 것으로서 수세기나 필요했으나, 일본은 일대만에 속성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일본을 본보기 삼고자 백방 분주하였다.

- 서재필, 회고 갑신정변 -

한국이 생존하기에 적합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 한국이 적자로서 살아남게 하는 것이다. 한국이 공정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한국이 적자로서 생존할 능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 윤치호일기, 1982년 4월 7일 -

1884년 중엽에 새로운 집단이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일본으로 유학 간 몇몇 젊은이들은 철저한 개혁론자가 되어 돌아왔다. 일본이 변모하는 과정을 본 이들은 일본처럼, 아니 일본보다 더 철저히 개혁을 바랐다. 가능하다면 필봉 한자루로 조국을 서구화하고 싶어하였다. 또 일본 관료의 품에 몸을 던져 혁명적 변혁을 위한 만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 F. A. 맥켄지, 대한제국의 비극 -

처음 김옥균은 박규수 선생 문하에서 배웠다. 1881년 나는 영선사로, 김옥균은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다같이 나라를 일으킬 것을 기약하였다. 임오군란 이후부터 청이 우리나라에 내정간섭을 자주했다. 나는 청나라당으로 지목되었고, 청국이 우리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데 분노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은 일본당으로 지목되었다. 그 후 일이 허사로 돌아가자 세상을 그를 역적이라 하였는데, 나는 정부에 몸을 담고 있어 그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결코 다른 나라에 있지 않았고, 애국하는 데 있었다.

- 김윤식, 속음청사 -

갑신정변에 대하여, 김옥균에 대하여 당시의 전통 성리학자들은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온건개화파를 비롯하여 개화사상을 알고 있는 이들은 김옥균에 대하여 동정을 보낸 것 같습니다. 독립협회의 서재필은 그를 민족의 근대화를 위하여 노심초사한 인물로, 윤치호는 당시 근대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같은 개화파이지만 노선을 달리한 김윤식은 김옥균 역시 애국자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김옥균이 걸어온 길이 우리 개화사상의 전통적 맥을 잇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다룬 개화파의 연결그림이 아래 있죠? 김윤식이 말한 김옥균의 스승이 박규수라는 점, 김옥균 역시 개화파의 계보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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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의 흐름도>

5. 정권을 잡은 급진개화파, 바로 개혁 정강을 내 놓다!

갑신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김옥균은 바로 개혁 정강을 내놓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이죠. 내용을 한번 볼까요?

1.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4.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다.
  5. 부정한 관리 중 그 죄가 심한 자는 치죄한다.
  6.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0.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의정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이 14개조 정강의 핵심 내용을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나눠보죠.

일단 정치적으로 급진개화파가 추구한 것은 <입헌군주제>입니다. 김옥균은 조선 사회가 추구해야 할 근대화는 서양식 <부르조아>계급이 사회를 주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조선에서 부르조아 계급은 곧 토지를 가진 지주계급과 대외무역에 종사하는 상공업 계급이었죠. 따라서 이들을 중심으로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일본 메이지 헌법처럼 법으로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동양식 전제군주제를 영국, 미국식 의회제도로 바꾸어 <내각이 책임지고 통치한다>는 방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국의 젠트리 계급이 명예혁명을 일으켜 내각을 수립한 것을 모델로 하며, 그것을 받아들인 일본의 메이지 유신 헌법을 모방하려 한 것입니다. 따라서 궁안의 내시부를 혁파하고, 의회식 회의제도인 고관 회의를 적극 도입할 것을 주장합니다.

다음으로 외교분야에서는 그동안 내정간섭을 해온 청을 적극 배제하고, 자주 독립국임을 주장합니다. <흥선대원군을 돌아오게 하라>라는 것은 대원군의 집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어른을 납치는 청을 질타하고, 사대외교를 폐지하여 나라의 자주권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다음 경제분야에서는 부세제도의 개혁인 <지조법>을 실시합니다. 이것은 지주의 봉건적이고 불법적인 수탈을 방지함으로서 <근대적 세율의 법정화>를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또 불명확한 토지의 소유권을 확실하게 하여, 주인이 없는 땅은 국유지로 편압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즉, 일정한 국유지를 확보하면서도, 토지소유자인 지주의 소유권을 인정하여 <지주계급의 부르조아지화>와 <국가 재정 확보>를 동시에 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지요. 이렇게 확보한 재정은 호조가 일괄적으로 관리하고 예산을 계획함으로서 국가 재정을 근대화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이지 유신을 모방한 것이지만, 큰 약점이 있습니다.

지조법은 실제 지주층에게 유리한 반면, 백성들이 원한 <토지제도 자체의 개혁>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이 지조법을 통한 근대적 부르조아지 양성은 농민층의 지지를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회분야에서는 봉건적 관습인 신분제도, 과거제도 폐지를 주장합니다. 이것은 유럽의 시민 혁명과 메이지 유신에서 모방한 것으로, 전근대적 제도를 타파해야 근대적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인식한 결과입니다.

즉, 양반중심의 지배체제를 청산하고, 지주층의 기득권을 중심으로 한 <서구적 자본주의>가 바로 갑신정변에서 추구한 이상적 근대화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위해서는 청나라라는 외세의 간섭을 완전 배제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6. 갑신정변의 실패

우정국 정변을 계기로 정권을 잡은 김옥균 일파는 3일만에 청군의 개입으로 망명을 떠납니다. 청의 대응은 김옥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척 빠른 것이었습니다. 청은 개화당의 정권 획득이 조선에서 기득권을 잃게 되는 것임을 인식하고 발빠른 대응을 한 것입니다. 문제는, 개화파를 돕기로한 일본 공사가 김옥균을 돕지 않은 것입니다. 청군이 예상과는 달리 빠르게 대군을 조선에 보낸 마당에 일본 공사관군이 대응하기가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갑신정변은 3일만에 실패로 끝납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일본이 돕지 않은 것 외에 급진개화파의 미숙성도 있습니다. 김옥균은 단순히 근대적 개혁을 국민들이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큰 착각이었죠. 일단 개혁의 방향이 국민중심이 아니라 <지주적 부르조아> 중심이었습니다. 급진개화파들은 백성들을 우매하여 계몽시켜야할 대상이라는 <계몽관>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주제를 인정하고 지주층을 중심으로 부르조아적 지조법을 단행함으로서 봉건적인 부분을 개선하지 못한 개혁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일본과 밀착한 개혁이었던 만큼 백성들은 개혁 자체의 의도를 불순하게 보고 있었지요. 갑신정변은 최초의 근대국민국가 건설을 지향한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개혁이 되고 말았습니다.

7. 청과 일본은 정변을 핑계로 경쟁적으로 조선에 침투하다.

갑신정변이 청의 간섭으로 실패함으로서 조선은 다시 <청의 고문>이 실권을 잡아 정치하는 임오군란 이후로 되돌아갔습니다. 청의 간섭이 심화될수록 보수세력은 계속 장기집권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게 되었고, 개화세력은 이제 완전 도태되고 맙니다. 이후 김홍집, 박영효 등이 깁오개혁, 독립협회 등의 세력과 연계되어 활동하지만 그 활동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갑오개혁의 결과, 조선은 일본공사관이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일본 공사관의 신축비를 부담하고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하게 됩니다.(한성조약)

또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공동출병, 공동철수 할 것을 약속하는 톈진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것은 조선에서 정치적으로 밀린 일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맺은 것으로, 일본이 청과 동등한 파병권을 확보함으로서 조선에 대한 군사적 기반을 계속 유지해나감을 의미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이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과정을 다루겠습니다. 밤이 깊었네요. 그럼 안녕히....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잃어버린 혁명(갑신정변 연구) 상세보기
강범석 지음 | 펴냄
한반도 근대 이행기에 일어난 1884년의 갑신정변의 진실을 연구한 책. 저자는 김옥균이 갑신정변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전말을 써서 남겼다는『갑신일록』이 김옥균의 일기가 아니라 일본인에 의해 위작된 것임을 주장한다. 갑신정변의 배타적인 제1차 사료가 되어온『갑신일록』이 김옥균의 일기가 아니라는 착상을 통해, 갑신정변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심도 있는 시각을 보여준다. 1부에서는『조선 갑신일기』,「메이지 17년 조
갑신정변 회고록 상세보기
김옥균 지음 | 건국대학교출판부 펴냄
갑신정변에 대한 회고록을 편역해 소개한 책. 풍운의 한말을 살다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갑신정변 주역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함께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육성을 들어보며 갑신정변을 이해하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당시 혁명의 주역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남긴 회고록 4편을 소개하고 있다.
갑신정변 연구(한국학연구총서 27) 상세보기
박은숙 지음 | 역사비평사 펴냄
근대 변혁운동의 선구적 시발점인 갑신정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 보다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방법으로 갑신정변에 총체적으로 접근한 책이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들의 개혁방안을 보여주는 정령 14개조안을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하고, 정변 관련자들의 회고록과 각종 저술들을 비교 분석하여 당시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이 책은 개화파가 당시 개화사상을 받아들인 참여층의 자발적 동참과 협조를 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상세보기
김용구 지음 | 원(이보란) 펴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대하여 19세기 세계정세와 관련하여 설명한 연구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같이 한국사와 세계사의 충돌에서 나오는 격동적인 사건들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했고 그런 대응 태도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 국제정치 구조에서 살아가는 데에 치유할 것이 있는지 해부한다.

갑신정변연구 상세보기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 지음 | 평민사 펴냄
김옥균(역사논술교과서 38) 상세보기
서울교육대학교 역사논술연구회 지음 | 파랑새 펴냄
『역사논술교과서』시리즈 제38권《김옥균》. 본 시리즈는「인물로 보는 한국사」시리즈를 읽은 후 활용하면 좋은 통합논술 대비 부교재이다. 학습자는 7단계로 나뉜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사를 종합적으로 꿰뚫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논술 학습을 할 수 있다.
한국의 근대사상(세계의사상 36) 상세보기
김옥균 외 지음 | 삼성출판사 펴냄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상세보기
김육훈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미래의 눈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우리나라 청소년을 위한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야말로 오랜 세월의 분투를 통해 달성한,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우리 모두의 현재임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가 실현한 민주주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란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살펴본다. 대안적인 특징점을 바탕으로 21세기 근현대사 인식과 역사교육, 그리고
서재필(주니어세계의인물자서전 13) 상세보기
송건호 역 지음 | 금성출판사 펴냄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6 상세보기
김태웅 지음 | 펴냄
대원군 정권의 성립부터 3.1운동 직전인 일제의 무단통치 시기까지를 다루었다. 내용 역시 이런 범위에서 외세의 침략과 수탈,사회경제 변화및 근대 개혁 운동의 전개등을 집중서술하였다. 특히 반봉건, 반침략을 둘러싸고 처지와 이념에 따라 상이한 방략을 제시하는 여러 계열의 노선과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개설서와는 달리 생생한 자료의 정확한 전달과 충실한 해설에 비중을 두고 개별 항목단위로 구성한 나머지 한국 근
한국사 편지 세트(전5권)(사진과 그림으로보는) 상세보기
박은봉 지음 | 웅진닷컴 펴냄
※ 이 도서를 구매하신 고객 분께 알립니다! [한국사 편지 세트] 일부 품목에서는 별책부록인 '역사 여행을 떠나요'가 발송되지 않았습니다. 별책부록을 받지 못한 고객 분에게는 별도로 별책부록을 보내 드립니다(출판사로 연락해 주시면 바로 발송해 드립니다). 문의전화 : 웅진주니어 편집부 02-3670-1590, 영업부 3670-1501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학부모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역사책 친근한 글로
갑신일록 상세보기
김옥균 지음 | 건국대학교출판부 펴냄
이조말의 김옥균이 그가 주동한 갑신정변의 거사에 실패하고 망명처인 일본 땅에서 정변의 전후를 회고하면서 적은 기록으로 당시의 정세와 정변의 실상을 생생 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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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1882년. 임오군란이 조선에 미친 영향에 대한 글

1. 1882년이 나타내는 시대적 상징은 무엇인가?

이번 장에서는 임오군란에 대하여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임오군란 하면 보통 <임오년에 일어난 구식 군대의 난>이라고 알고 있고, 또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시콜콜 다 아는 이야기, 교과서에 써 있는 이야기를 굳이 또 적을 필요가 있을까... 고민끝에 이번 포스트에서는 임오군란을 1882년이 가지는 상징성을 가지고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오군란이 과연 군란인가? 이런 주제로요. 일단 지난 장까지 설명했던 <개화, 위정척사, 조선책략>이라는 부분을 복습해 놓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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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임오군란 때의 격전지 모습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의 조선은 국론이 분열되고, 국가 체제가 동요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이유는 1880년 조선 책략이 유입되고 민씨정권이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실시하면서부터 <조선책략 거부운동>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죠. 외국과 통상을 하겠다는 개화파와 민씨정권에 대하여 기존의 성리학 유생들은 <위정척사운동>을 <정권타도 운동>으로 발전시켜 가면서 국가 위기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거기에 세도정치이래 계속된 정치의 혼란은 백성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제시해주지 못하였죠. 백성들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정치는 혼란하지, 세금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지, 부농과 소작농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지.... 1882년의 농민들은 산업혁명기의 영국과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농민들은 몰락하여 개화된 도시로 몰려가서 도시 빈민을 형성하였고, 도시에서는 소수 자본가 집단이 성장하려는 중이었습니다.

실제 1882년의 상황을 가지고 이후의 상황을 추론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되네요. 동학운동은 변화하는 사회체제 속에서 농민들이 살 길을 찾았던 운동이고, 갑신정변은 소수 자본가 집단의 영향력을 밀어주면서 우리나라에서 부르조아지 근대화를 시도하려던 개혁이었습니다. 갑오개혁은 전근대적인 문제점들을 조금이나마 시정하면서 신분제, 조세제를 개혁혀였죠.

1882년에는 <조선책략>의 유입 이후, 개화, 척사라는 거대한 시대 흐름이 정면 충돌하는 한 해였습니다. 개화파들은 1882년 <조미수호조약>을 맺고 조선책략의 내용대로 미국을 통상국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백성들과 보수파들은 그것을 환영하였을까요? 아니죠. 백성들은 일본과 서양 열강이 조선의 상권, 농업권에 침투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민씨세력의 개화정책에 회의를 느낀 보수파들과, 세도정치 이래 문란한 정치에 질린 민중들은 강력한 리더쉽을 가진 흥선대원군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야 말로,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일본세력 등 외세의 침투에 대항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한 것이죠.

2. 1882년... 민중들은 반란거리가 필요했다.

1882년의 상황은 홍경래의 난, 진주 농민 봉기 등의 농민 반란이 계속 일어나던 세도 정치 이후, 1863 - 1873년까지 농민봉기가 없었던 <농민운동의 침체기>입니다. 그 이유는 10년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강력한 리더쉽으로 농민들의 요구 사항이었던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면서, 조세 제도를 일부 개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876년 민씨정권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민중들은 한없이 추락해가는 자신들의 지위에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개화정책의 과도기적 분위기 속에서 농민들의 몰락으로 도시 빈민이 한없이 늘어만 갔습니다. 즉, 임오군란 때 군인들의 봉기가 아니였어도 이미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몇몇 구식군대의 봉기인 임오군란이 조선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정도로 크게 번진 이유는 임오군란 직후 <도시 빈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연구가 더 이루어져서 역사가 다시 평가한다면 <임오 시민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민란적 성격을 가진 군인봉기>까지는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임오군란과 같은 시민봉기가 있지 않았다면, 불만이 쌓일대로 쌓인 농민들의 <동학농민전쟁>은 10년이 앞당겨졌을지도 모릅니다.

실제 1882년은 외세로 인하여 민중이 시련을 겪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정부의 세금 말고도 일본이 무역을 빙자하여 가져가는 쌀이 어마어마하였습니다. 조선 전역에서는 쌀값이 폭동하여 안그래도 힘든 빈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하였죠. 임오군란의 원인이 구식군인들의 월급이 1년 6개월 이상 밀렸다는 것에서 보았을 때도, 이 당시 쌀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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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임오군란 당시의 빈민의 모습

3. 구식 군인들의 불만은 <개화와 일본에 대한> 불만이었다.

임오군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구식군인에 대한 차별>입니다. 실제 민씨정권은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신식군대가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군대라기 보다는 <지배층을 위한 군대>라는 편이 더 어울렸습니다. 예로, 조선 후기 서인 특정 가문이 집권을 하면서부터 조선의 군대는 국가의 군대라기 보다는 <서인>의 군대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 전기 <5위>가 조선 후기 <5군영>으로 바뀌면서 부터였죠. 세도정치기에 특히 심했던 이 <지배층을 위한 군대 역할>이 흥선대원군기에 <국가를 위한 강력한 군대>로 재편되었지만, 민씨정권에서는 다시 <지배층을 위한 군대>로 전락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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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임오군란 당시 구식군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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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임오군란 당시 신식군대의 모습

흥선대원군 때 강력하게 재편한 <5군영>을 민씨정권은 <2영>으로 줄여버립니다. 그러고 남는 돈을 신식군대에 투자한 것이지요. 신식군대를 정말 확실한 <국가 군대>로 육성했다면 좋았겠지만, 신식군대의 주요 구성원은 양반집 자제들이었습니다. 대우는 무지 좋았고, 돈먹는 귀신들이었지만 전투력은 글쎄요.... 거기에 그들을 가르치는 신식 장교가 군사 선진국이었던 일본 장교라는 점은 구식군대와 국민들을 아주 열받게 만드는 일이었죠. 또 신식군대의 제복을 마련한다는 이유 등으로 구식군대에게 1년이상 월급을 안주었다는 점도 임오군란의 원인이 되었씁니다. 결국,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군인들의 불만은 헛돈쓰는 개화정책과 일본이 우리 내정과 군사권에 간섭하는 분위기가 싫다는 것이었죠.

4. 시민들이여, 일어나라!

1882년, 드디어 구식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사실, 신식군대에 비해 무기나 인력에서 부족한 구식군대의 폭동이 손쉽게 성공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하였습니다. 민씨정권도 구식군대를 우습게 보았거든요. 그러나, 문제는 이 폭동에 도시 빈민들과 일반 백성들이 적극 참여하여 <시민 폭동>적인 성격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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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임오군란 때 구식 군인들의 폭동 경로

도시 빈민들은 군인들과 합세하여, 민씨일족들의 집을 불태우고 정부고관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일본 공사관으로 향합니다. 우리를 간섭하는 외세를 물리치자는 것이었죠. 그들은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에 불을 지릅니다. 성난 군중들은 궁궐에 침입하여 왕비인 민씨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구식군인들과 빈민들이 왕비의 얼굴을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이지요. 민씨는 시녀 복장을 하고 궁밖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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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임오군란 당시 나가사키로 도망간 일본 공사관 직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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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임오군란을 피해 도망다니던 중의 명성황후 일기가 최근 발견되었다.

이렇게 국가 위기 상황이 발생하자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다시 정권을 넘기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시민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개화정책을 다시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되돌리기 시작합니다. 2영체제를 다시 5군영으로 돌려 구식군대를 강력한 상비군으로 정비하고, 개화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였죠.

5. 민씨 정권의 반격으로 조선의 주도권은 <청>에게 넘어가다.

도망간 왕비 민씨는 다급함에 청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청군은 국모인 민씨의 부름이라는 근거를 들어 당당히 서울로 쳐들어와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민씨를 다시 궁궐로 돌려보냅니다. 임오군란은 결국 외세에 의해 실패하고, 시민들의 봉기는 무참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외교적 전환점이 마련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청나라의 전면적인 내정 간섭>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임오군란을 진압하면서 민씨를 도운 청나라는 아예 정치고문과 외교고문을 우리나라에 보내어 우리 나라에 종주권을 행사하려고 하였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다가 공룡을 불러온 셈이죠.(민씨정권은 위기때마다 일본, 청, 러시아 등 외세에 의존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개화기 근대사를 엉망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럼 청나라가 우리의 내정을 적극적으로 간섭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장하는 일본 때문이었습니다. 청은 일본이 조선에 간섭하는 것을 보면서 동아시아 전체에서 일본을 막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청, 러시아 등 대륙 세력을 막고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해양 전체를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개척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에도 일본이 요구한 첫째 내용이 바로 <조선은 자주국가이다>라는 조약이었습니다. 조선이 자주국이어야 청 등이 조선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할 수 없을 테니까요.

청 역시 이러한 일본의 야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청이 임오군란 이후 우리 내정에 적극 간섭한 이유는 조선시대 이래 <형식적인 조공무역>을 통해 속국 관계로 생각하던 조선을 <실제적인 식민지>로 만듦으로서 일본이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 당시 청의 실권을 잡고 있던 사람은 그 유명한 <위안스카이>였습니다. 위안스카이의 목적은 조선에 친청 정권을 수립하여 <조선은 청의 꼭두각시이다>는 것을 확실히 하려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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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

따라서 청은 민씨정권의 개혁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개편하여, 통리교섭통상아문(외교부), 통리군국사무아문(행정부)를 신설합니다. 또 5군영도 청나라 식으로 개편하는데, 위안스카이의 직속군영인 <친군영>을 세우고, 그 밑에 4개의 군영을 두어 모든 조선의 군권을 위안스카이가 장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감시하기 위해 군사고문인 마젠창, 외교고문인 뮐렌도르프를 파견하여 모든 정치 상황을 감시하였습니다.

6. 조청 상민 무역 장정을 체결하다.

1882년은 우리나라의 경제면에서도 획기적인 해입니다. 임오군란 이후, 청은 우리 나라에서 자유로이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일본을 누르기 위해 <조청수륙 무역장정>을 발표하였기 때문입니다.

전문(前文) : 조선이 속방임과 청상의 특혜규정
 “오직 이번에 체결하는 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후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다른 각국과 일체 균점하는 예와 다르다”

 제 1조 청국 상무(商務)위원의 파견 및 이들의 처우,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이 대등한 위치임을 규정.
 제 2조 조선내에서의 청 상무위원의 치외법권을 인정
 제 3조 조난구호 및 평안.황해도와 산동.봉천 연안지방에서의 어채 허용(청국인의 조선연안 어업권을 인정). 관세규정
 제 4조 북경과 한성.양화진에서의 개잔(開棧)무역을 허용하되 양국상민의 내지채판(內地采辦) 금지. 단 내지채판 및 유력(遊歷)이 필요할 경우 지방관의 집조(執照)를 받을 것.(개항장이 아닌 서울 양화진(楊花津)에 청국인이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와 도성에서의 상행위 허용. 호조(護照:일종의 여행증명)를 가진 자에게는 개항장 밖의 내륙통상권과 연안무역권까지 인정) 관세규정.
 제 5조 세칙규정. 책문.의주, 훈춘.회령에서의 개시
 제 6조 홍삼무역과 세칙규정(국경무역에서 홍삼을 제외한 5 % 관세)
 제 7조 초상국윤선(招商局輪船) 운항 및 청 병선의 조선연해 왕래.정박
 제 8조 장정의 수정은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의 자문으로 결정.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치명적인 무역약관이었습니다. 위에 파란 줄 보이시죠? 그것 때문입니다. 이 조약의 핵심은 <조선에서 청상인이 자유롭게 거주하고, 여행하고, 영업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규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이제 <항구에서의 거류지 무역>뿐만 아니라, 내륙에서의 자유로운 무역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 배웠던 <최혜국 대우>... 기억나시나요? 최혜국 대우란, 어느 한 나라에게 맺은 정치, 경제적 조약을 조약 당사자인 국가에게도 똑같이 적용한다는 불평등 조약의 내용을 말합니다. 이 청과 맺은 <내륙 무역 허가>는 최혜국 대우에 의해 일본, 미국, 영국 등등 다른 모든 국가에게도 적용됩니다. 그 결과 우리 경제는 이 때부터 파탄나기 시작하고, 우리 전통 중계무역상인으로 볼 수 있는 객주, 여각 등은 몰락하게 되죠.

또, 이 장정의 승인으로 일본도 조일수호조규 속약과 조일 통상장정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1880년대 중반부터 청과 일본은 조선의 경제권을 놓고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그 결과는 1889년 방곡령과 1894년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로 인해 일본이 경제적 주도권을 가져가게 되죠.

7. 일본도 얻을 것은 다 얻는다 - 제물포 조약의 체결

임오군란은 청의 전면적 간섭을 초래하였지만, 일본에 단숨에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일본은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들이 죽었다는 이유로 우리 정부에 강력한 손해 배상을 요구합니다. 또, 일본 공사관이 다시는 피해보지 않도록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킨다는 명목으로 우리 나라에 <군대>를 파견합니다. 이것이 제물포 조약입니다. 제물포 조약의 내용을 줄이면, 청에 의해 입지가 약해진 일본이 조선에 <군대 주둔>을 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해 나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조약은 결국 조선에서 청의 군대와 일본의 군대가 동시에 거주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훗날, 갑신정변 때 맺은 톄진 조약으로 청과 일본군대는 <동시파병 공동철수>를 결의하게 되자만, 그 조약은 동학운동 때 청일전쟁을 야기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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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풍자화 - 제물포 조약 체결을 위한 일본의 진격

8. 급진개화파가 등장하다.

임오군란의 실패로 인해 청이 조선에 대한 전면적인 내정간섭을 하였습니다. 이 것은 민씨정권이 스스로 개화를 할 수 없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건개화파들의 입지는 약해졌고, 반대로 <일본의 힘을 빌려서라도 청을 타도해야 한다>는 급진개화파의 이론이 힘을 얻게 됩니다. 특히, 급진개화파는 청의 경제 구문인 묄렌도르프와 대립하면서 청의 보수적 정책에 반발하였고, 고종을 사이에 두고 친청세력과 급진개화세력이 대립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갑신정변에서 다루도록 하죠.

오늘은 임오군란과 그 결과에 대하여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하루종일 일하고, 밤에 술을 먹고... 새벽에 글을 쓰려니깐 글이 횡설수설이네요. 내일은 말짱한 정신으로 아자아자....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은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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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임오군란에 대한 풍자화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 자세한 내용은 이 책에.....

찬란한 여명 4:임오군란 상세보기
신봉승 지음 | 갑인출판사 펴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상세보기
김용구 지음 | 원(이보란) 펴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대하여 19세기 세계정세와 관련하여 설명한 연구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같이 한국사와 세계사의 충돌에서 나오는 격동적인 사건들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했고 그런 대응 태도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 국제정치 구조에서 살아가는 데에 치유할 것이 있는지 해부한다.
한국 근현대사(숨마쿰라우데) 상세보기
박준규 지음 | 이룸이앤비 펴냄
최상위권을 지향하는 수험생들을 위한 숨마쿰라우데 시리즈 『한국 근ㆍ현대사』. 숨마쿰라우데의 본문은 전체의 난이도에 따라 2중 체제(CUM LAUDE 단계와 SUMMA CUM LAUDE 단계)로 구성하였다. 즉, 교과 학습 내용에 대한 본문 설명 2단계와 해당 단원의 문제 부분 2단계로 짜여져 있어 심화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학습 개념을 확실히 잡으면 내신, 수능, 심층 면접 등 어떤 시험도 두렵지 않게 될 것이다.
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상세보기
김인기외 지음 | 두리미디어 펴냄
교과서에서 소홀히 해 왔던 한국 근현대사의 논쟁점을 다양하게 소개하는 <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외세 침략의 시발점이 된 강화도조약의 배경에서부터 현 참여정부의 탄핵 정국까지, 청소년들이 쉽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질곡의 우리 근현대사를 올바르게 조명하고 현재와 미래에 대해 발전적이고 건강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최근의 논쟁점들까지 투명하게 정리하였다. 이 책은 근현대 역사 교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상세보기
김육훈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미래의 눈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우리나라 청소년을 위한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야말로 오랜 세월의 분투를 통해 달성한,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우리 모두의 현재임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가 실현한 민주주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란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살펴본다. 대안적인 특징점을 바탕으로 21세기 근현대사 인식과 역사교육, 그리고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서해역사책방 5) 상세보기
역사학연구소 지음 | 서해문집 펴냄
이 책은 역사 사실을 바탕으로 서술하되 새로운 연구성과를 받아들이고 이를 종합 정리했다. 근현대사를 통사로 서술하는 한편 각 장은 각 시기의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서술했으며, 사진과 자료를 직접 수록해 객관성을 높였다. 또 각 강의 끝부분에 기존의 중요 연구 성과와 최근의 성과를 실어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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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구 지음 | 원(이보란) 펴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대하여 19세기 세계정세와 관련하여 설명한 연구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같이 한국사와 세계사의 충돌에서 나오는 격동적인 사건들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했고 그런 대응 태도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 국제정치 구조에서 살아가는 데에 치유할 것이 있는지 해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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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덕규 지음 | 일송북 펴냄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중국 역사 이야기> 제14권. 중국의 전체 역사를 시대별, 왕조별로 나누어 그 시대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중국 역사에 쉽게 접근하고 싶어하는 초등학생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이 책은 주왕조시대부터 청나라까지 약 3천년에 이르는 중국 역사 대부분의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6 상세보기
김태웅 지음 | 펴냄
대원군 정권의 성립부터 3.1운동 직전인 일제의 무단통치 시기까지를 다루었다. 내용 역시 이런 범위에서 외세의 침략과 수탈,사회경제 변화및 근대 개혁 운동의 전개등을 집중서술하였다. 특히 반봉건, 반침략을 둘러싸고 처지와 이념에 따라 상이한 방략을 제시하는 여러 계열의 노선과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개설서와는 달리 생생한 자료의 정확한 전달과 충실한 해설에 비중을 두고 개별 항목단위로 구성한 나머지 한국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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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교양 한국사 교재. 크게 2개 부로 나눠 제1부에서는 한국사의 각 시대별 특징을 14주제로 압축하여 정리하고, 2부에서는 문화사와 사회경제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10개의 주제를 따로 설정하여 분류사 형식으로 서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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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2 20세기를 넘어 새로운미래로> 20세기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 보고 21세기 새로운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가꿀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또한 본문으로 들어가는 창에는 단원마다 역사 사진에 청소년 캐릭터를 넣어 역사 체험을 좀더 재미있고 생생하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여성과 역사에서는 세상의 절반이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들의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고 '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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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 I S T O R I A > 한국사 사전

1880년 개화정책으로 유입된 대표적인 저서들

<시발점>

조선 책략(朝鮮策略, , 1880) : 개화정책의 지침서

<역사 지리서>

해국도지(海國圖志 ; , 1844년)

영환지략(瀛環志略 ; , 1850)

지구설략(地球說略 ; 미국 선교사 Richard Q. Way, 1856)

보법전기(譜法戰記, 王 , 1872)

<정치 법률>

만국공법(萬國公法, 미국 선교사 William Alexander Par - sons Martin, 1864)

흥아회잡사시(興亞會雜事詩 ; 1880년 일본에서 설립한 친목회 흥아회 회원들이 지은시)

이언(易言 ;  1880)

<자연 과학>

격물입문(格物人門 ; 1866)

박물신편(博物新編 ; 영국 의사 Benjamin Hobson, 1855)

<신문 잡지>

신보(申報 ; 영국 상인 Ernest Major, 1872)

만국공보(萬國公報 ; 미국 선교사 Yong J. Allen, 1868)

중서견문록(中西見聞錄 ; 미국 선교사들, 1872)

격치휘편(格致彙編 ; 미국 선교사 John Fryer, 1876)

<한국인 저술 및 번역>

기화근사(箕和近事, 김옥균)

지구도경(地球圖經, 박영교)

농정신편(農政新編, 안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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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1894)의 추진배경

1. 1894년... 왜 개혁이 필요했는가?

오늘부터 전개할 이야기는 갑오개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갑오개혁은 1894년에 1, 2차 개혁을 하였고, 그 다음해인 을미년에 3차로 을미개혁을 하였습니다. 이 개혁으로 조선은 서구식 근대화를 이루게 되었지만,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그럼 이 개혁이 이루어진 배경을 한번 볼까요?

갑오개혁은 우리 정부가 주체적으로 추진했다는 <자율성론>과 일본에 의해 강제로 추진했다는 <타율성론>의 시각이 있습니다. 이번 나중에 다루고 이번 장에서는 이 2가지를 적절히 다루어 보도록 하죠.

갑오개혁은 조선인 스스로 개혁을 해야 한다는 <개화파>의 개혁의지가 1894년 반영되었다는 점이 일단 중요합니다. 그동안 조선은 개혁을 추진하려는 세력과 그것을 막으려는 보수세력이 혼재해 있었습니다. 1860년대부터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반대 정책이 있었고, 외국의 침략적 움직임을 간파한 위정척사운동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미 1860년대에도 박규수, 유홍기, 오경석 등의 개화 선구자들은 외국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외세를 막으려는 위정척사와 외세를 받아들여 이용하자는 개화의 흐름은 1880년 조선 책략이라는 개화지침서가 들어오면서 대대적으로 충돌하였습니다. 1882년 조미수호조약은 개화의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고, 같은 해 임오군란은 외세를 배척하는 움직임이 강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은 <개화사상에 의한 조선의 개혁>이란 과제를 조선 사회 전체에 던진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많은 개화파가 죽었으며,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개화파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김옥균같은 <급진적 개화파>는 실패하였지만, 고종과 일부 개화파들은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꾸준히 조선의 개혁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여, 대내외의 새로운 사상을 알렸고, 최초의 국립학교인 육영공원을 세웠습니다. 서양식 군사훈련을 위한 연무공원, 광산개발을 위한 광무국, 근대적 진신시설을 위한 전신국이 창설되었죠. 물론 이러한 시설들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측면이 많았기 때문에 외국인 고문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청, 러시아, 일본 등에서 파견한 고문은 침략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근대 시설을 수용하기 위해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또 유럽 각국에서 넘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구한말 카톨릭 선교사들에게 먼저 빼앗긴 종교 입지를 찾아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조선 포교에 앞장서게 됩니다. 원래 종교란, 순수한 목적으로 포교를 한다고 해도 국가적 차원에서는 그 포교를 정치적 논리로 해석하기 마련입니다. 서양에서는 종교적 포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정치, 경제적 침투를 하려 하였고, 조선은 이들을 이용하여 조선의 근대화에 도움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우리 내정에 심하게 간섭하였던 청에게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일본, 미국에 공사관을 개설하기도 하였습니다. 초대 주미 대사의 이름은? 훗날 독립협회의 헌의 6조로 유명해진 박정양입니다. 우리 정부는 청을 견재하기 위해 조러 비밀 협약을 체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청의 강력한 반대로 조러 비밀 협약은 실패하였고, 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은 소환당하기도 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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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가운데)

2. 개혁의 불씨를 당긴 동학농민운동

조선은 점진적으로 개화의 단계를 밟아가고 있었습니다. 열강에게 둘러싸여 힘이 없었고, 조선 스스로의 개혁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외국의 힘을 조금씩 빌려 조금씩 국가의 체질 개선을 하는 중이었죠. 하지만, 조선의 백성들이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개혁이었고, 이 개혁이 과연 백성에게 혜택으로 돌아올 것인가는 의문이었죠.

학교를 세웠지만 양반자제들의 학교였고, 군대를 개편했지만 농민들과는 상관없는 군대였습니다. 농민들이 원한건 잡세를 없애고 토지개혁을 추진하며, 신분제도를 철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를 가지고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정부를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더군다나 동학농민들을 진압하겠다던 명분으로 출병한 청과 일본은 동학과 정부가 정부화약을 맺고 대립을 끝냈음에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조선에 더 이상 머물 명분이 없었던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강력히 요구하였습니다. 겉으로는 동양 평화를 위해 <조선의 개혁을 돕는다>는 입장이었지만, 사실 이것은 일본이 청을 대신하여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히기 위함이었죠.

정부는 일본의 속셈을 파악하고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농민군의 요구가 포함된 자주적인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조선의 자주적인 개혁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조선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그럼 한번 일본군의 내정 간섭 과정을 자세힐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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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알연하는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쓰케 :
조선 내정개혁을 요구하고 일본의 입맛대로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3.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과정과 목적

동학농민과정에서 전주화약으로 조선과 농민군이 화해를 하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전쟁이 끝났으니, 일본군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농민을 잡기 위해 늑대를 불렀는데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늑대가 순순히 물러날리 없죠. 일본군은 바로 서울로 쳐들어와서 떡 하니 서울 한복판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청, 일본 양국이 조선을 개혁하자는 개혁안을 제시하였죠. 청나라는 일본의 속셈을 알고 이것을 거부합니다.

일본공사는 조선 정부에 <일본이 조선 개혁에 도움을 주겠다>라는 공식입장을 밝히고, 일본이 작성한 내정개혁안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거부했고, 일본군이 먼저 물러가면 생각해보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일본과 조선은 내정 개혁에 대한 1,2차 회담을 열었는데, 일본의 목적이 수상하다는 것을 느낀 조선정부에서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조선 스스로의 개혁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조선은 3차 회담에서 일본의 모든 요구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은 검은 속셈을 드러냅니다. 서울에 주둔하던 군대를 이용하여 바로 경복궁을 침입하여 조선의 정권을 탈취하였습니다. 민씨 정권은 축출당하였고, 흥선대원군이 허수아비 정권으로 다시 들어섰으며 친일적인 성향의 <개화파>들을 통해 갑오개혁을 추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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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당시의 김홍집과 어윤중

여기서 친일적인 성향이란, 친일파라는 뜻이 아니라 일본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겠다던 개화파들을 말합니다.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경력이 있었던 지식인들을 개혁 주체로 하여 개혁을 추진한 것이죠. 갑오년에 일어난 이 개혁은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이 수립되었고, 이 내각의 개혁 중심기구인 <군국기무처>는 국왕권마저도 초월하는 초법적 기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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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당시의 군국기무처(교과서 그림)

그럼 왜, 일본이 이렇게 조선의 내정 개혁에 열을 올렸을까요?

1. 전주 화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주둔할 명분도 없었고, 청과 전쟁을 할 이유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통해 조선을 보호하고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갑오개혁을 추진한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청일전쟁을 장기화하면서도 조선에 머물 수 있는 최선책이었습니다.

2. 조선에 내정간섭을 하면서 조선의 발전을 위함이라고 말함으로서, 훗날 청, 미국, 독일, 영국,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우선적으로 침략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이 필요한 것은 조선 등 아시아 식민지였으니까요.

3. 조선의 개혁을 방해하는 청군을 몰아낸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청일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청군을 조선에서 영구히 추방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4. 그러나 1차 개혁은 일본의 간섭이 적었다.

갑오년에 실시한 1차 조선 개혁은 일본이 주도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간섭이 적었습니다. 그 이유는 갑오년 동학농민전쟁의 1차, 2차 전쟁 사이에 청과 일본의 청일전쟁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혁의 시작인 일본의 압력이 작용하였지만, 실제 개혁은 조선의 개화파들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김홍집 내각은 일본의 요구를 몇가지 적절히 섞어서 조선식 개화를 추진하였는데, 일본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기 때문에 개혁은 다시 한번 일본의 요구대로 진행됩니다. 이것이 갑오년 2차 개혁입니다. 2차 개혁의 내용은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를 볼 수 있는 개혁이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모델을 같은 섬나라인 영국의 황제국가체제(영국은 여왕 중심체제였고, 일본은 천황중심체제였음)에서 일부 모방하였는데,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구실로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삼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 역시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것이 당시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오개혁이 순전히 일본의 의도대로만 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개화파들은 조선 사회의 시급한 문제들을 개혁의 내용에 우선적으로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럼 다음 포스트에서는 1차 개혁, 2차 개혁, 3차 개혁의 내용을 차례로 포스팅하고 갑오을미개혁의 논쟁점들을 간략히 다뤄보도록 하죠. 오늘 서론이 길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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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1885년 조선의 중립화론을 주장하다.

1. 갑신정변 이후 정세

갑신정변 이후, 우리나라는 또 다시 청에게 정치적으로 종속되고 맙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이 모두 청의 개입으로 실패하면서 우리나라는 청에게 내정간섭을 심하게 받게 되죠. 그리고 일본은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청을 견제하고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조선과 지속적인 조약을 체결합니다.

일단, 임오군란 때는 제물포 조약을 통해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얻어냅니다. 갑신정변 때의 톈진조약으로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청군과 공동 출병, 공동 철수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냄으로서 최소한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청에게 밀리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의 정치적 주도권은 아직 청에게 있었죠. 청은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민씨정권쪽에다가는 <정치고문, 경제고문>을 파견함으로서 조선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니까요.

2. 조선과 러시아는 서로의 목적에 도움이 될 듯 싶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청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러시아에게 접근하려고 합니다. 러시아는 1880년 조선책략이 들어왔을 때, 일본, 중국, 미국과 연합하여 막아야 한다고 인식하였던 나라입니다. 갑신정변 직전까지만 해도 개화파 중에서 이 말을 의심하는 사람이 적었죠. 그러나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러시아는 우리 나라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 나라이고, 이 나라를 이용하면 청과 일본의 조선 침투를 막기에 좋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사실 80년대 초반부터 위정척사파들은 러시아를 적대시하는 개화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우리와 아무런 이익관계가 없던 나라였으니까요.

일본이 이미 우리의 수륙 요충 지대를 점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허술함을 알고 충돌을 자행할 경우 이를 제지할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입니다. 갑자기 황 쭌셴의 종용을 받고 우리 스스로가 끌어 들인다면, 그들이 풍랑을 헤치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재산을 약탈 하거나, 저들이 우리의 약점을 잡아 어려운 청을 강요한다면 이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러시아는 본래 우리와는 혐의(嫌疑)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연히 남의 이간을 듣고 우리의 위신을 손상시키거나 원교를 핑계로 근린을 배척하다가 만의 하나 환란이 일어나면 장차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사학에 종사하여 재화를 이루고 농, 공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원래 우리에게도 옛부터 재용과 농공에 대한 훌륭한 법규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서학에 종사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야소교 전래가 해롭지 않다고 하는 것은 사교를 조선에 유포시키려는 간계이니, 주공, 공자, 정자, 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혀서 그 사람 귀류들을 물리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만손의 영남 만인소 중에서 조선책략의 내용을 비판한 글 -

사실, 조선은 청과 일본을 막기 위해 미국과 먼저 접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먼 나라인 미국은 조선을 돕는 것이 자국에 도움이 될지 확신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우리가 접촉한 청나라의 대항마는 러시아가 된 것이죠.

그럼 러시아는 우리를 도왔을 때 무슨 이득이 있을까요?

러시아는 당시 적극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북극해에서 내려와 얼지 않는 항구(부동항)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죠. 덩치큰 러시아는 이것을 위해 전 세계적으로 열강들과 부딪히게 됩니다. 유럽에서는 발칸반도로 진출하기 위해 러투전쟁, 크림전쟁 등이 지속되었고, 청나라와는 아이훈 조약, 네르친스크 조약 등으로 국경을 정하고 있었습니다. 또 표트르 3세, 에카테리나 2세 등을 거치면서 알레스카와 북미까지 진출하려고 하였습니다.

1860년이 되면서 청과 러시아의 관계는 급속이 냉각됩니다. 1860년 청이 아편전쟁에서 져서 영국과 베이징 조약을 맺을 때 러시아는 이 조약을 중재한 대가로 연해주를 획득하게 됩니다. <연해주>는 우리나라 동북쪽 국경과 마주보는 곳으로서, 이제 러시아가 우리와 국경을 통해 직접 만나는 국가가 된 것입니다.

1884년 조선는 러시아와 조러수호통상조약을 맺고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인정하면서 청과 일본을 견재>하려는 정책을 추진합니다. 러시아와 조선이 각각의 목적을 가지고 만난 것이지요. 그 공통의 목적은 성장하고 있는 청, 일본의 세력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베베르를 조선에 외교 고문으로 파견합니다.

1888년에는 육로통상조약을 체결하는데, 그 내용은 러시아와 마주보는 동북국경선인 <함경북도 경흥에서 국경무역을 허락>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80년대 후반부터 러시아도 우리나라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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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러수호조약원본>

3. 조선은 중립을 외치고 싶다.

러시아를 막기 위해 일본은 영국과 손을 잡기 시작합니다. 영일동맹 이전부터 이미 일본과 영국이라는 섬나라는 항구를 찾아 남하하는 러시아를 막기 위한 공동전선을 편 것이지요. 특히, 1885년 조선이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러시아와 조러비밀협약을 추진했는데 실패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구실로 우리나라 남쪽의 섬인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는 거문도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제 한반도는 <청, 러시아, 일본, 영국>이라는 4개의 나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제사회의 이슈가 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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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중반 4개국의 조선 간섭 : 청, 러시아, 일본, 영국>

이렇게 되자 조선주재 독일 부영사인 부들러는 조선의 외교 담당관이었던 김윤식에게 한반도의 중립을 건의합니다.(1885) 조선이 이러다 청일 양국의 전쟁터가 되고, 조선은 청일간의 승자에게 넘어가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이 부들러의 주장이었습니다. 실제, 10년 후 청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이 한반도 주도권을 잡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10년을 내다본 통찰략으로 말한 것이지요.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러한 의견에 부정적이었고,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톈진조약에서 조선에 대한 공동출병과 공동철수를 보장하여 세력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중립을 외쳐 그들을 자극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공론만 벌이다가 중립론을 인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 미국에서 유학을 다녀온 유길준 역시 조선 중립화론을 주장하지만, 민씨정권은 그를 김옥균, 서재필과 같은 급진 개화파의 무리로 몰아 버리는 바람에 조선 중립화론은 공표되지도 못한채 사장됩니다.

우리의 지리적 위치는 벨기에와 같고, 중국에 조공하던 것은 터키에 조공하던 불가리아와 같다.

불가리아의 중립은 유럽 열강들이 러시아를 막기 위함이고, 벨기에의 중립은 유립 열강들이 자국을 보전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나라가 아시아의 중립국이 된다면 러시아를 방어할 수도, 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보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직 중립만이 우리를 지키는 방책인데, 우리 스스로가 제창할 수도 없으니 중국에 청하도록 하자. 아시아에 관계있는 여러 나라들이 화합해 조선의 중립을 확인받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우리만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이며 다른 여러 나라가 서로 보전하는 계책도 될테니 무엇이 괴로워서 하지 않겠는가?

- 유길준의 조선 중립화론 -

유길준이 위 글에서 제시한 중립화론은 우리의 현실이 답답해서 한번 말해본 감정적인 중립화론이 아닙니다. 유길준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서유견문을 적을 정도로 당시 시대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럽의 벨기에, 불가리아와 같은 중립국이 생긴 원인을 국제 정세에서 분석하여, 우리가 중립을 하였을 때 주변의 반응과 주변국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변 열강 모두에게 인정을 받으면서도, 주변 열강들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는 실리적 중립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집권자들은 이러한 의견을 한번 고민해보지도 않은 채, 김옥균당의 변병이라면서 묵살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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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

오늘 글은 상당히 짧았네요. 다음 장에서는 중립화론이 무효화 된 이후 일본과 청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침략하는 과정을 조일수호조규부록, 통상정정,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반부, 1991
  2. 한국사통론, 변태섭 저(4개정판), 1997

  3. 7차 교육과정 근현대사 교과서(대한교과서)
  4. 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구회, 청아출판사, 1988
  5. 한국통사, 박은식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6
  6. 누드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이투스, 2007
  7.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6권, 김태웅 지음, 2003, 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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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개화파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1. 개화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번 파트에서 이야기할 내용은 개화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흔히 개화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배경만 간단히 설명하고 갑신정변을 주로 다루곤 합니다. 하지만, 개화파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은 이상 그 기원이 있었겠죠? 자 지금부터 전개할 이야기는 개화파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부터입니다.

개화파를 알기 위해서는 <개화>란 말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객이 나에게 물었다. <개화는 무엇이며, 어떠한 일을 말하는 것인가?>

내가 답하였다. <만물의 뜻을 깨달아 천하의 일을 이루는 것이며(개물성무 : 開物成務),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바로잡는 것(화민성속 : 化民成俗)이 바로 개화이다.>

- 황성신문 논설, 광무 2년(1898) 9월 23일 -

무릇 개화란 인간의 온갖 만물이 가장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일컫는데, 개화에는 인륜 개화, 학술 개화, 정치 개화, 법률 개화, 기계 개화, 물품 개화가 있다. 인륜 개화는 천하만국을 통하여 그 동일한 규모가 천만년을 지나도 장구함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 이하의 여러 개화란 시대에 따라서 변개하기도 하고 지방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맞았지만 지금은 맞지 않으며, 저쪽에는 좋지만 이쪽에는 좋지 않은 것도 있어, 곧 고금의 형세를 살피고 피차 사정을 비교하여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리는 것이 곧 개화의 큰 도인 것이다.

- 서유견문 제 14편, 개화의 등급 -

개화란, 백성을 다스리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인륜을 바로세우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화에는 인륜, 학술, 정치, 법률, 기계, 물품에 대한 개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더 간추리면, 인륜(도덕), 정치(통치술), 기술(물질문명)에 대한 3가지가 개화에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중에서 동양의 인륜은 지키고, 서양 기술만 받아들이자는 입장을 <동도서기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통 개화파하면 인륜, 정치, 기술 등 모든 서양 문명의 장점을 취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동도서기적인 관점의 개화는 온건한 개화파라고 구분합니다. 실제 모든 것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은 변법적 개화파인 김옥균 등 급진적 개화파였죠.

2. 개화파의 기원 1 - 조선 시대 낙론에서 이어지는 통상 개화론자들

개화파의 기원을 찾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부분은 <북학사상>에서 기원하는 통상 개화론자들입니다. 이들은 그 인맥과 사상이 상당히 깊은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먼저 방금 급조해서 만든 다음 표를 한번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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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표를 제시한 이유는 개화사상의 연결고리가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개화파부터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개화사상의 근간이 되는 기원적인 이론은 이미 조선시대 <호락논쟁> 때의 낙론에서 비롯됩니다. 낙론과 개화사상이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낙론의 개방적인 이론이 훗날 개화사상으로 이어지는 기원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할 뿐입니다. 낙론에서는 <인물성동론>을 내세워서 명을 멸망시킨 오랑캐 국가(여진의 청나라)도 하나의 국가로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낙론적인 입장은 중상학파 실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청과 상공업을 통한 무역>을 적극 추구하는 것을 낯설게 생각하지 않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 때의 실학자들이 활동했던 시기가 정조 때이지요. 그러나, 정조 이후 세도정치를 겪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겪으면서 이들의 대외 개방적 사고는 자취를 감추는 듯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를 겪으면서도 개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원군의 정책에 반발하여 외국의 통상의 이로움을 주장하면서 외국 저서들을 적극 유입한 이들이 있었죠. 바로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로 이어지는 통상 개화론자들입니다. 비록, 쇄국정책의 국론에 밀려 이들의 뜻은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이들은 개화의 선구자 역할을 합니다. 만국공법, 영환지략 등의 개화 저서들이 이 때 들어오고, 이 책들은 훗날 1880년 조선책략의 유입과 함께 개화사상을 이끌어가는 사상적 기반이 됩니다.

이러한 연결고리를 통해 개화파들은 성장하였고, 대원군 이후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개화가 곧 <국가 주요 정책>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사상적 측면과 함께, 인맥에 있어서도 개화파와 기존 북학파가 연결이 된다는 점입니다. 즉 북학파인 박지원의 제자가 박제가이고, 박지원의 손자가 통상개화론자인 박규수입니다. 오경석과 유홍기같은 중인들도 이덕무와 같은 북학파들의 저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의 인맥이 훗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의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즉, 결론 내리자면 우리나라 개화파들의 등장은 낙론부터 북학사상, 통상개화론에 이르는 사상적 연결고리, 인맥적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합니다.

3. 개화파의 기원 2 - 청과 일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개화파가 내부적인 성장만을 거친 것은 아닙니다. 더 큰 요인을 따지자면, 당시 국제 정세의 긴박함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우리의 주변국인 청과 일본은 각각 개항을 통해 변혁을 거치고 있었습니다.

청은 영국과의 아편전쟁 이후 서양 무기의 우수함을 알고 양무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그 중심인물은 <이홍장>이었습니다. 이홍장은 중국 핵심 지도층은 아니지만, 자신의 근무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서양식 기술을 도입하여 <중국의 정신에 서양의 기술을 입힌다>는 중체서용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개화파들은 이홍장과 많은 교류를 통하여 서양 기술의 우수성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홍장과 연결되어 민씨 정권에서 협력한 일련의 개화파들이 중체서용과 유사한 동도서기를 주장하는 <온건개화파>무리를 이룹니다.

또 당시 일본 역시 미국에 의해 개항을 하여 <메이지유신>을 겪었고, 변법적인 개화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기수, 김홍집 등의 수신사를 보내어 일본의 발전상황을 기록하고 그들의 발전과정을 배우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침략적인 행보 속에서 일본의 문물은 청의 문물보다 크게 신경쓰지는 못하였습니다. 민씨정권의 개화는 이홍장의 조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일본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입장의 전면적 개화는 민씨정권이 전면적인 청의 간섭을 받게되는 임오군란 이전에는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4. 개화파가 추진한 한국 근대화의 모델

개화파는 서구식 발전모델을 그대로 적용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하려 하였습니다. 개화파들은 강화도 조약을 맺고 난 이후인 1878년 충의계를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개화 정책을 시작하려 하였습니다.

개화파가 추구한 서구식 모델이란, 서구의 산업혁명을 모델로 하는 <부르조아지적인 부국강병>이었습니다. 개화파는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가진 지주층을 서구의 <중산계급>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따라서 지주제를 발전시켜 근대적인 농법을 발전시키고, 지조법을 개혁하여 조세제도의 합리화를 통해 지주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근대화로 인식하였습니다.

또, 상공업에 있어서는 서양식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합좌회사를 늘려 <민간자본주의>를 실현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상공업에 기여할 수 있는 계층을 자본가로 육성하여 그들에게 특혜를 주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개화파가 추진한 근대화의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갑신정변이나, 김홍집 내각의 개혁안을 보아도 농민을 위한 토지개혁이나, 노동법 등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개혁들은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여 새로운 부르조아 계급을 양산하기 위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으니까요.

5. 1880년대 개화파가 분화되다.

1880년 조선책략이 유입된 이후, 임오군란을 겪으면서 개화파는 분화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세력은 강화도 조약 이후 계속적인 개화 통상을 요구하였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 관료세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홍장의 충고를 받아들여 <몸은 우리의 것이되,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들인다>는 관점에서 동도서기론적인 개화를 추진합니다. 즉, 이들이 추구한 개화의 모델은 중국의 양무운동이었죠.

김홍집 내각은 민씨정권에서 일하는 관료세력들로서 이홍장 등 청의 세력과 타협하는 사대적인 자세를 가지고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개화방법은 국가 체제를 건드리지 않고, 조금씩 서양의 문물을 흡수 수용하는 점진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두 번째 세력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으로 대표되는 급진적 개화파였습니다. 이들은 조선책략이 유입된 이후, 조선책략의 내용대로 이행되는 사항이 더디게 이루어짐을 비판하였습니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어 개화정책이 후퇴하자, 청의 고문인 뮐렌도르프 등과 잦은 마찰이 있었습니다. 급진개화파는 임오군란 이후 고종과 직접 접촉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이들이 추구한 개화는 서구의 기술과 사상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여,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국왕중심의 입헌군주제, 즉 내각제도를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기존 세력인 민씨정권을 비판하고, 민씨정권의 개화파들과 대립하였습니다. 특히 청에 대한 사대외교를 망국의 외교라고 비판하면서 자주외교를 통하여 스스로 개화할 힘을 키울 것을 주장합니다. 이들은 청의 정치, 재정 고문들과 차관을 빌리는 문제로 대립하였고, 이것이 훗날 갑신정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됩니다.

즉 정리하자면, 온건 개화파와 급진개화파가 분화된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민씨정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입니다. 민씨 정권의 개화정책을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가, 소극적인 흉내내기로 보는가에 대한 차이입니다.

두 번째로는 외교정책에 대한 차이입니다. 조선책략에서 말한 <러시아를 견재하기 위해 청, 일본, 미국과 힘을 모아야 한다>라는 부분에서 온건개화파는 <청>에 중심을, 급진개화파는 <일본, 미국>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개화의 방법상의 차이입니다. 온건개화파는 <인륜, 정치방식>은 그대로 두고 <서양기술>부터 점진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입장이었습니다. 급진개화파는 <정치방식과 서양기술>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자는 변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여기까지 간단히 다루고 다음 파트에서는 갑신정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제가 적으면서도 지루한 이야기였네요.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반부, 1991
  2. 한국사통론, 변태섭 저(4개정판), 1997

  3. 7차 교육과정 근현대사 교과서(대한교과서)
  4. 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구회, 청아출판사, 1988
  5. 한국통사, 박은식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6
  6. 누드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이투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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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1860년대 이후 위정척사는 계속되었다.

1. 위정척사란?

흥선대원군이 18363년부터 집권하여 안동김씨의 노론 세도 가문을 축출한지 10년... 1873년 민씨가 정권을 잡으면서 대원군이 실각하고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개화정책을 실시합니다. 이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개화정책은 강화도조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고, 조선책략이 유입되면서 구체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화 사상을 우리 전통 유교주의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당연히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반대한 이유는 아무런 근거없이 서양을 싫어해서도, 조선 왕조를 지탱하는 신분질서의 하나인 성리학을 수호하기 위해서만도 아니였습니다. 물론 통상요구가 조선의 신분제와 사회질서의 근간을 흔들기는 하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것을 나름대로 논리있게 반박하였습니다.

성리학의 근본질서를 옳은 것(正)으로 여기는 것을 위정이라 하고, 서양의 문물을 악으로 보아 사(邪)라 하는 것을 척사라 하여 이러한 사상을 <위정척사>라고 합니다. 그럼 위정척사의 핵심 내용들을 한번 볼까요?

2. 대원군기의 위정척사(1863-1873)

흥선대원군이 막 집권하던 시기는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하고, 아편 전쟁 이후 중국 베이징을 함락시킨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열강들이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가지던 시기입니다. 또 미국은 일본을 개항시킨 이후 그 통상영역을 조선에 까지 확장하려고 하던 시기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외세를 몰아내고 척화비를 건립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부터 1871년 신미양요까지 조선은 통상을 요구하는 외세의 압력과 직접 맞싸워야 했습니다. 또, 제너럴 셔먼호 사건 등으로 조선민들은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이 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1860년대의 위정척사운동이란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인식으로 외국과의 통상은 곧, 매국이라고 여기는 분위기였습니다. 박규수, 오경석 등 초기 개화주의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집권층이 대원군 정권과는 연결되지 못하고, 개별적인 개화 주장을 해야 했습니다.

위정척사론은 외국과 통상을 했을 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화이사상에 기반을 두고 전개된 내용이긴 하지만, 이미 중국과 일본이 외세에 넘어간 상황에서 우리 상황을 잘 이해하고, 서양 침투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나열한 논리적인 반대였습니다. 하지만, 그 논리속에는 서양에 대한 두려움과 유교사상의 입장에서 본 서양인의 <짐승>같은 행위들에 대한 좁은 시선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럼 몇 가지 글을 한 번 볼까요?

또 하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양이의 화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홍수나 맹수의 해일지라도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힘쓰시고 경계하시어 안으로는 관리들로 하여금 사학의 무리를 잡아 베시고, 밖으로는 장병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하도록 하옵소서.

오늘날 양적의 침입을 당하여 군론이 교(외교)와 전(전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런데 양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은 내 나라 쪽 사람, 곧 국변인의 주장이고, 양적과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은 적국 쪽 사람, 곧 적변인의 주장입니다. 전자를 따르면 나라의 의상지구(조선문화의 전통)를 보전할 수 있지만, 후자에 따른다면 인류(조선인)가 금수의 지경으로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 점이 양적과 싸우니냐 화친하느냐 하는 차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근본을 잡는 신념, 곧 겸이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상황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 노릇을 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고비와, 존속하느냐 멸먕하느냐 하는 기틀이 잠깐 사이에 결정되오니 정말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한갓 지엽만 다스리고 근본을 제거하지 않거나, 한갓 흐름만 멈추게 하고 원천을 막지 아니한다면 근본의 싹과 원천의 샘솟음을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이의 재앙을 일소하는 근본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전하를 위한 계책은 마음을 맑게 닦아 외물에 견제당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외물이란 것은 종류가 극히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양품이 가장 심하옵니다.

몸을 닦아 집안이 다스려지고 나라가 잡힌다면 양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기이함과 교묘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저들이 기필코 할 일이 없어져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평생 양직물을 입지 아니하고 집안에서 양품을 사용하지 아니하여 그것으로 집안의 법도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잡아죽이고 정벌하는 일과 본말이 되어 서로 돕고 의지하게 되오니 꼭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 이항로, 화서집 권 3, 소차, 사동부승지겸진소회 -

1860년대 대표적인 위정척사 사상가 이항로의 화서집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위 내용에서 보면 1860년대 위정척사 사상이 <인수지별>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항로는 신미양요 후 세운 척화비에 대하여 열렬하게 지지한 유생입니다. 그는 서양의 물건을 사는 것은 <농산물>을 <공산품>과 교환하게 됨으로서 나라의 경제가 망하여 외국에 종속된다고 주장하면서,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을 최초로 꼬집여낸 성리학자입니다.

따라서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을 백성들에게 알려서, 서양의 물건을 사지 않고 서양이 통상을 요구하는 목적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신제가부터 해서 집안을 잘 단속하고, 유교윤리에 맞는 경제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유교 윤리에 따른 경제관은 농업중심의 생필품 교환과 검약 정신입니다. 따라서 유교윤리를 통해 서양을 차단하기를 주장하였고, 이 논리에 의하면 유교적 윤리를 모르는 서양과 일본은 <짐승>인 것이지요. 따라서 이 당시의 주장은 만약 외세가 통상을 계속 요구한다면,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강경한 <척화주전론>과도 연결됩니다. 이 척화주전론을 실행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척화비>를 세운 자가 바로 흥선대원군이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모든 유생들이 개화 정책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양반들 중에서는 개화사상을 인정하는 학자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유생들이 더욱 더 적극적으로 위정척사 운동을 벌였던 것이지요. 특히 위정척사를 전개했던 유생들은 이항로, 이만손, 최익현, 기정진 등 서울 근기쪽의 전통 성리학자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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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 선생과 추도비

3. 민씨 정권 집권 후 위정척사운동(1873-1880)

대원군이 축출되고 민씨 정권이 들어서자 위정척사를 전개하던 유생들은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민씨가 강화도 조약을 맺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이죠. 이제 유생들은 단순히 통상 거부 운동 차원을 떠나서 <개항>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논리적으로 펴기 시작합니다. 흥선대원군 때에는 쇄국정책이 국론이었기 때문에 유생들이 국가 정책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위정척사파들은 민씨와 개화파들에 대하여 <반정부투쟁>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의 위정척사운동은 흔히 <개항 반대 운동>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대표적인 예는 최익현의 5불가소입니다. 한번 봐야겠죠?

 대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약점을 보고 이를 숨기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들이 우리가 방비가 없고 약함을 보이는 실상을 알고서 우리와 강화를 맺는 경우 앞으로 밀려올 구렁텅이 같은 저들의 역심을 무엇으로 채워주시겠습니까? 우리 물건은 한정이 있는데 저들의 요구는 그침이 없을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응해주지 못하면 저들의 노여움은 여지없이 우리를 침략하고 짓밟아 우리가 이전에 들인 모든 노력은 허망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불러들이는 첫째 이유입니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면 적들의 욕심은 물화를 교역하는 데 있습니다. 저들의 물화는 모두가 지나치게 사치하고 기이한 노리개고 손으로 만든 것이여서 그 양이 무궁하지만, 우리 물화는 모두 백성들의 생명이 달렸고 땅에서 나는 것이어서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같이 피와 살이 되어 백성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유한한 물화를 가지고 저들의 사치하고 심성을 좀먹고 풍속을 음란하게 하는 물화와 교역한다면 그 양은 틀림없이 1년에도 수만에 달할 것입니다. 그러면 동토 수천리는 몇 년 안 지나 땅과 집이 모두 황폐하여 다시 보존하지 못할 것이고 나라 또한 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는 둘째 이유입니다.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이옵니다. 강화가 한번 이루어지면 사학의 서적과 천주의 초상화가 교역하는 속에서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 안 가서 선교사와 신자 간의 전수를 거쳐 사학이 온 나라 안에 퍼질 것입니다. 포도청이 살피고 검문하여 잡아다 베려고 하면 저들의 사나운 노기가 또한 더욱 커질 것이고 강화로 맺은 맹세가 허사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얼마 안 가 집집마다 사학을 받아들이고 사람마다 사학에 물들 것입니다. 아들이 아비를 아비라 여기지 않고 신하가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아 예의는 시궁창에 빠지고 인간들은 변하여 금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는 셋째 이유입니다.

강화가 이루어진 뒤에는 저들이 상륙하여 서로 왕래하고 또는 우리 지경 안에서 집을 짓고 살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강화하였으므로 거절할 말이 없고 저절할 수 없어서 내버려 두면 재물이나 비단과 부녀자들을 빼앗는 일을 마음대로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도대체 누가 능히 막겠습니까? 또한 저들은 얼굴만 사람이지 마음은 짐승이어서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고 짓밟을 것입니다.

- 최익현, 면암집 권 3, 지부복궐척의소 -

5불가소에서 최익현은 서양과 통상을 했을 경우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일본과의 통상도 안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정리했네요. 5가지 이유를 볼까요?

1. 개항 반대운동 : 일본의 강요에 의한 조약을 맺으면 일본의 탐욕에 노예가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2.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 : 개항 후 수공업품과 농산물 교환이 이루어지면 나라의 경제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18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이 우리에게 수출한 영국산 면제품과 조선쌀의 무역은 방곡령에도 불구하고 우리 농촌을 망치는 것이었고, 결국 동학 농민운동의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동학 운동 중에서도 이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을 지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 왜양일체론 : 70년대 개항 반대의 가장 큰 논리가 바로 이 <왜양일체론>입니다. 즉, 서양과 일본은 사실 같은 나쁜 놈들이라는 것이지요. 메이지 유신 이후 미국의 영향을 받은 일본은 서계 문제 등으로 우리에게 행패를 부렸고, 이들은 서양의 사교 및 짐승같은 윤리를 우리에게 강요할 것이니, 대원군의 쇄국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풍속의 교란 문제 : 일본인이 부녀자를 능욕하고, 윤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할 것이니 개항을 하면 인륜이 바닥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5. 인수지별론 : 이것은 일본 역시 프랑스, 미국과 같은 짐승들이니 짐승이 인간과 같이 살수 없다는 사람, 금수의 구별론입니다. 위정척사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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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4. 조선책략 유입 후 위정척사 운동(1880~)

앞 포스트에서 설명했었죠? 조선책략은 두말 할 것 없이 중요한 우리 나라 개화의 지침서입니다. 이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민씨정권이 미국과 수교를 맺고, 별기군을 설치하는 등 적극적인 개화를 실시하자 위정척사운동은 <정권타도>를 외치며 폭력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특히 80년대 위정척사파들은 조선책략 태우기 운동을 하며 개화파들을 적대시합니다. 이제, 국가 안에 아군과 적군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지요. 특히 이만손이 올린 <영남만인소>는 위정척사 사상이 극에 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영남만인소 역시 논리적인 어조로 조선책략의 유입이 왜 문제인지를 조목조목 따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이미 우리의 수륙 요충 지대를 점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허술함을 알고 충돌을 자행할 경우 이를 제지할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입니다. 갑자기 황 쭌셴의 종용을 받고 우리 스스로가 끌어 들인다면, 그들이 풍랑을 헤치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재산을 약탈 하거나, 저들이 우리의 약점을 잡아 어려운 청을 강요한다면 이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러시아는 본래 우리와는 혐의(嫌疑)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연히 남의 이간을 듣고 우리의 위신을 손상시키거나 원교를 핑계로 근린을 배척하다가 만의 하나 환란이 일어나면 장차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사학에 종사하여 재화를 이루고 농, 공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원래 우리에게도 옛부터 재용과 농공에 대한 훌륭한 법규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서학에 종사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야소교 전래가 해롭지 않다고 하는 것은 사교를 조선에 유포시키려는 간계이니, 주공, 공자, 정자, 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혀서 그 사람 귀류들을 물리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만손에 동조한 조선의 최고 재상 홍재학의 상소입니다. 홍재학은 이 상소로 말미암아 고종의 눈에서 벗어나 나중에 죽게 됩니다.

    대개 서양의 학문은 천리를 어지럽히고 기강을 소멸시킴이 심하다는 것을 다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서양의 물건은 대부분 음탕하고 욕심을 유도하며, 유교 윤리를 깨뜨리고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히며, 천지를 거역하는 것들입니다. 서양의 학문과 물건은 귀로 들으면 창자가 뒤틀리고 수컷이 다른 것으로 바뀌며 눈으로 보면 창자가 꼬이고 위가 뒤집히며, 코로 냄새를 맡고 입술로 그것에 닿게 하면 마음이 변하여 실성하게 되니 이는 곧 그림자가 서로 부딪치고 전염성이 서로 감영되는 것과 같으며, 그 사람의 좋고 싫음이 향배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상을 받들지 않는다 해도 예수교의 책을 읽게되면 성인에게 죄를 얻는 시작입니다. 전하의 백성들의 과연 귀와 눈과 코와 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라 안의 실정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 홍재학의 상소  -

위정 척사는 정조 임금 이래로 내려온 조정의 기본 정책으로서 아직도 그 의리가 빛나는 바, 전하의 친정 이래로 왜양일체의 해를 모르고 일본과 통상을 주장해 온 결과 사설과 이의가 횡행하여 국가의 사태가 위급하기 비길 데 없습니다. 양물과 아소라는 사교의 위세로 공맹의 태도는 날로 사라져 가정에는 윤리가 깨지고 사람에게 예의가 허물어진 결과, 종묘 사직이 무너질 위기에 있으니 전하께서는 더욱 위정척사의 대위를 밝혀 주시어 ‘주화매국’하려는 신료를 처단해야 합니다. 신설된 아문을 폐쇄하여 옛 제도를 복구하고 경비를 절약하여 사치를 금하고 언로를 넓혀 지혜를 모으고 정학을 장려하여 사악함을 막아 기강과 민력을 떨친다면 상하원근이 한 마음으로 뭉칠 수 있으니, 그렇게 될 때 동왜와 서양을 막을 수 있으며 북쪽 러시아도 우리에게 위압될 것입니다.

- 일성록, 고종 18년 윤 7월 6일, 홍재학의 상소 -

위정척사운동이 격해지자 고종이 직접 조서를 내리는 등 개화정책 추진을 위해 유생층을 달래는 시도를 계속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한 임오군란으로 돌아오기도 하죠. 고종이 개화를 위해 유생들을 달래려고 한 시도들을 한번 볼까요?

왕이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바다의 한쪽 구석에 처하여 다른나라와 교섭해보지 않은 관계로, 견문이 넓지 못하고 고스란히 제 지조나 지키면서 500년을 내려왔다.

최근에 천하 대세는 옛날과 아주 다르다. 유럽과 아메리카 여러 나라들, 곧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은 정밀한 기계를 제조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해 세계 수많은 나라들과 조약을 맺어, 병력으로 서로 대치하고 국제공법으로 서로 대치하기를 마치 춘추 열국 시대와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홀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중국도 오히려 평등한 처지에서 서로 조약을 맺으며, 서양을 엄하게 배척하는 일본도 결국 서로 선린 관계를 맺고 통상을 하니 어찌 까닭없이 그렇게 하겠는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논의를 벌이는 사람들은 또한 서양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이루는 것을 가지고 장차 예수교에 물들 것이라 여긴다. 이것은 물론 유교와 세상 교화를 위해서 매우 걱정스런 일이다. 그러나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은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고 종교를 막는 일은 원래 종교를 막는 문제이며, 조약을 맺고 통상하는 것은 만국공법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설사 어리석은 사람들이 몰래 배운다 하더라도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는 이상 처단하고 용서하지 않는데, 무슨 걱정이란 말인가? 숭상하고 물리치는 데는 딴 재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를 배척하고 도구와 기물을 본받는 것은 원래 병행하여도 사리에 어그러지지 않는다. 더구나 강하고 약한 형세가 두르러진 조건에서 그들의 도구와 기물을 본받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그들의 침략을 막아내며 그들이 념겨다보는 것을 막겠는가. 참으로 안으로는 정사와 교화를 잘하며 밖으로는 이웃 나라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우리나라 예의를 지키면서 각 나라와 대등하게 부강한 나라로 발전시켜 일반 백성들과 함께 태평세월을 누린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 고종실록, 고종 19년 8월 5일 -

   저들의 종교는 사악하다. 마땅히 음탕한 소리나 치장한 여자를 멀리하듯이 해야 한다. 하지만, 저들의 기술은 이롭다. 잘 이용하여 백성들을 잘 살게 할 수 있다면 농업, 양잠, 의약, 병기, 배, 수레에 대한 기술을 꺼릴 이유가 없다. 종교는 배척하되 기술을 본받는 것은 함께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결코 충돌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강약의 형세가 이미 큰 격차로 벌어졌다. 만약 저들의 기술을 볻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들에게 모욕을 받지 않고 저들이 엿보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 1882년 8월 5일, 고종이 내린 개화 조서 -

5. 1894년 - 동학과 갑오개혁 이후의 위정척사운동

1890년대로 가면서 일본의 침략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자, 이제 위정척사운동은 통상 반대운동, 개항 반대운동, 조선책략 불태우기 운동을 넘어서게 됩니다. 이 때의 위정척사운동은 곧 <민족적인 항일 투쟁 운동>으로 점차 전환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이제 양반 유생들은 <일본과 서양은 금수가 아니라 만국공법상의 법에 의해 위법한 행위를 하는 상대국>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또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 일부 농민들도 위정척사에 흡수되었고, 그 결과 유인석, 신돌석 등의 평민의병장이 나올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도 마련됩니다. 즉, 1890년대 이후는 위정척사가 항일 의병 운동으로 전환되는 기점이며, 1910년 국권 피탈을 기점으로, 항일 의병 운동은 대일본 폭력 투쟁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이 부분은 구한말 의병운동 파트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6. 동도서기의 입장에서 위정척사를 전개한 이들

성리학 유생이라고 해서 모두 위정척사를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이 당시 위정척사의 입장이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 실행 내용에 있어 개화사상과 중간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주장도 한번 볼까요?

형이상을 도라 하고 형이하를 기라고 한다. 도는 형상이 없어 기 속에 머무르니 도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기를 버리고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러므로 군자의 학은 체(體, 몸)와 용(用, 기술)을 서로 밑천 삼고 기와 도를 같이 익히는 것이다.

- 속음청사, 상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바뀔 수 없는 것이 도(道)이고, 자주 변화하여 고정될 수 없는 것은 기(技)이다. 무엇을 도라 하는가? 삼강(三綱), 오상(五常)과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도라고 한다. 요순, 주공의 도는 해와 별처럼 빛나서, 비록 오랑캐 지방에 가더라도 버릴 수 없다. 무엇을 기라고 하는가? 예악(禮樂), 형정(刑政), 복식(服食), 기용(器用)을 기라고 한다. 당우삼대 조차도 덜하고 더함이 있거늘 하물며 수천년 뒤에 있어서라! 진실로 때에 맞고 백성이 이롭다면, 비록 오랑캐 법일지라도 행할 수 있다.

- 신기선전집 -

기계의 재주와 농수의 책이 진실로 이롭다면 반드시 선택해서 행할 것이며, 그 사람 때문에 양법을 꼭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 고종실록, 고종 18년 7월 18일, 곽기락의 상소 -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유의 윤리는 하늘로부터 얻어서 본성에 부여된 것인데, 천지에 통하고 만고에 뻗치도록 변하지 않는 이치로 위에서 도(道)가 되었습니다. 수레, 배, 군사, 농업, 기계는 백성에게 편하고 나라에 이로운 것으로 밖에 드러나 기(器)가 되니, 제가 바꾸고자 하는 것이 기인 것이지, 도가 아닙니다.

- 승정원일기, 고종 19년 12월 22일, 윤선학의 상소 -

곽기략, 윤선학 등 일련의 유생들은 우리 것을 지키더라도, 서양의 유용한 것들을 꼭 버릴 필요는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성리학의 정신적 사상체계는 민족의 양식으로서 지켜나가고, 서양의 기술은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유교주의 국가를 만들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선 건국 당시 허영 일파의 실천적 성리학과 비슷합니다.

7. 위정척사운동의 한계점

위정척사운동은 서양이 통상, 개화를 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알고 대처하려고 하였습니다. 즉, 이 운동은 우리 국익을 위한 애국적인 성격을 가진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단순히 외세를 배격하여 우리 전통의 것을 지키자는 논의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외세의 침략 의도와 나쁜 점은 알았지만, 그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였죠. 당시 조선의 가장 큰 과제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주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였습니다.

위정척사운동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성리학적 전통질서와 봉건질서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임으로서 격변기의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또 반외세를 지향했으나, 지배 신분층인 입장으로 적극적인 반봉건 노력이 없었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즉, 농민들이 원하는 것은 신분제 폐지, 양성평등, 토지제도 및 조세제도 개혁 등이었으나 이들은 이러한 문제를 외면하였습니다. 따라서 위정척사운동은 적어도 1880년대까지는 양반 위주의 신분적 운동이라는 오명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정척사운동을 정치, 경제, 사회적인 면에서 분석해 볼까요?

정치적인 분야에서 이 운동은 조선왕조의 전제주의를 긍정합니다.

경제적인 분야에서 이 운동은 지주전호제를 긍정하고, 전통 유교질서의 경제관을 고수하였습니다.

사회적인 분야에서 이 운동은 신분제도를 옹호하고 성리학적 신분관을 그대로 적용하였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부분에서 위정척사운동은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운동입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빈체제에서 복고주의, 정통주의, 보수주의를 외치는 장면이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운동에서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다음 포스트에서는 위정척사운동과 개화세력의 대립이 극에 이르게 된 <임오군란>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반부, 1991
  2. 김광진 외, 1963, 조선경제사상사, 과학원출판사 : 1989, 이성과 현실

  3. 7차 교육과정 근현대사 교과서(대한교과서)
  4. 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구회, 청아출판사, 1988
  5. 한국통사, 박은식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6
  6. 누드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이투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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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1880년 : 조선책략과 조선의 개화정책

이번 장에서 다룰 내용은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후 조선이 본격적으로 개화정책을 실시하게 된 계기와 그 내용입니다. 개화정책은 민씨정권(명성황후)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죠. 그럼 조선의 개화정책에 대해서 간단히 다뤄볼까요?

1. 수신사를 파견하기 시작하다.

수신사란, 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우리나라에서 일본에 파견한 사절단을 말합니다. 강화도조약 저번에 다루었죠? 강화도 조약 2조에 보면 <일본정부가 15개월 뒤 사신을 파견한다>는 항목이 있었고, 11관에 보면 6개월 이내 양국이 다시 통상장정, 조일수호조약 조규부록을 체결한다는 조항이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러한 조약들에 의거하여 조선도 일본에 협상 사절단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일본의 개화수준을 시찰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1차 수신사로 김기수 등 98명를 파견합니다. 1차 수신사인 김기수는 <수신사 일기>에서 <일본이 부강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이래 글을 볼까요? 양반 유생으로서 성리학을 공부한 정통 조선 관료가 일본에 가서 느낀 점을 역설한 글입니다.

기교(技巧)가 이럴 수가 있겠는가! 한 개의 화륜(火輪)으로써 천하의 모든 것을 다 만든다. 기교가 이럴 수가 있겠는가!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시지 않은 바이니, 나는 이것을 보고 싶지 않다. 지난번에 나의 유람을 막은 사람이 옳았고, 나에게 유람하도록 권고한 사람은 옳지 못했는데, 나는 그 옳은 말을 쫒지 못했으니 그렇다면 내가 유람한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는가? 기기음교(奇技淫巧)도 말로는 이것으로 이용후생(利用厚生)한다고 하니, 이용후생이라면 이를 배워야만 하는 것인데, 하물며 이를 보는 것쯤이랴.

-김기수, 일동기유 -

일본은 1차 수신사가 다녀간 이후, 조선에 조규부록과 통상장정 체결을 요구합니다. 이 때 협상으로 부산, 원산은 개항되었지만, 실제로 중요한 관세문제, 미곡문제 등을 해결되지 못하였습니다.

청나라의 양무운동을 추진중이었던 이홍장은 수신사를 파견하는 조선에게 일본이 침략 의도가 있다며 경계하라고 합니다. 우리 정부는 과연 그런지 확인하려고 2차 수신사로 김홍집 등 58명을 파견하였습니다.

2차 수신사의 목적은

1번째, 인천을 개항하라는 일본의 요구에 대해 개항하지 않는 쪽으로 협상할 것

2번째, 일본인에 의해 쌀이 유출되는 문제를 강력히 항의할 것,    이였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 목적 자체가 아니라 2차 수신사가 파견됨으로서 수많은 국제 정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국제 정세에 대한 처방전같은 책인 <조선책략>을 얻었다는 점입니다.

2. 조선책략이 유입되다.

2차 수신사들에 의해 유입된 조선책략은 중국인 황준헌이 쓴 외교방략서입니다. 그 내용을 한번 볼까요? 바쁘신 분들은 밑줄 부분만 읽어보세요.

지구의 위에는 막대한 나라가 있는데, 아라사(러시아)라고 한다. 그 너비가 광대해서 3대륙에 걸쳐 있다. 육군 정예병이 백여만이고, 해군 거함이 이백여척이다. 다만, 나라를 북쪽에 세워서 하늘은 차고 땅은 척박하였다. 고로 빠르게 그 영토를 넓혀서 사직을 이롭게 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선세로부터 표트르대제 이래 새로 강토를 개척하여 이미 이전보다 10배가 넘었다. 지금의 왕에 이르러서는 다시 4해를 관할하고 팔방을 병합하려는 마음으로 중아세아에 있는 위구르의 모든 부족을 잠식하여 거의 다하였다

천하가 모두 그 뜻이 작지 아니함을 알고 왕왕 합종하여서 서로 항거하였다. 투르크 한 나라를 러시아가 오랫동안 병합하고자 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협력하여 유지해 나감으로 러시아가 끝까지 굳세게 그 뜻을 얻을 수가 없었다. 바야흐로 서양의 여러 대국들, 독일·오스트리아·영국·이탈리아·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모두 호시탐탐 결단코 한 척, 한 촌의 땅이라도 남에게 주려고 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서양 공략을 이미 할 수 없게 되자, 이에 번연히 계획을 바꾸어 그 동쪽의 땅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였다. 십여년 이래로 화태주(사할린)를 일본에게서 얻고, 중국에게서 흑룡강 동쪽을 얻었으며, 또한 토문강 입구에 주둔하여 지켜서 높은 집에서 물병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형세이고, 그 경영하여 여력을 남기지 않는 것은 아시아에서 뜻을 얻고자 함이다

조선의 땅은 실로 아세아의 요충에 자리잡고 있어, 형세가 반드시 싸우는 바가 되니 조선이 위태로우면 즉 중동의 형세가 날로 급해질 것이다. 러시아가 땅을 공략하고자 하면 반드시 조선으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아! 러시아가 이리 같은 진나라처럼 정벌에 힘을 쓴 지 3백여년, 그 처음이 구라파에 있었고, 다음에는 중아시아였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시 동아시아에 있어서 조선이 그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즉, 오늘날 조선의 책략은 러시아를 막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을 것이다. 러시아를 막는 책략은 무엇과 같은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결함으로써 자강을 도모할 따름이다.

중국과 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동·서·북이 러시아를 등지고 경계를 잇고 있는 것은 오직 중국뿐이다. 중국은 땅이 크고 물자가 풍부하며, 형세가 아시아주에 거하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천하는 러시아를 제어할 나라로는 중국만한 나라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국이 사랑하는 나라로는 또한 조선만한 나라가 없다. 조선이 우리 번속이 된지 이미 천년이 지났으되 중국은 덕으로써 편안히 지내게 하고 은혜로써 품어 줄 뿐, 한번도 그 토지와 인민을 탐내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음은 천하가 함께 믿는 바이다. 하물며 우리의 대청은 동쪽 땅에서 제국을 일으켜, 먼저 조선을 평정하고 후에 명을 정벌해서 2백여년 동안 덕으로 소국을 사랑하고 조선은 예로써 대국을 섬겨왔다.

강희·건륭조를 당하여서는 무슨 일이든지 상문하지 않은 것이 없이 내지의 군현과 다름이 없었다. 이는 문자가 같고, 정교가 같고 정의가 친목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형세가 연접하여 신경(북경)을 껴안아 호위함이 마치 왼팔과 같다. 서로 휴척을 같이하고, 서로 환란을 함께 하였으나, 저 월남(베트남)의 소원과 면전(버마)의 편벽과는 본디 서로 떨어짐이 오래됨이다.

지난번 조선에서 일이 있을 때에는 중국은 어김없이 천하의 양식을 소비하고 천하의 힘을 다하여서 싸웠다. 서양의 통례에 따르면 양국이 전쟁할 때면 국외의 나라는 그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한편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속국은 곧 이 예가 아니다. 오늘날 조선은 중국 섬기기를 마땅히 예전보다 더욱 힘써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선과 우리는 한 집안 같음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대의가 밝혀지고 성원이 스스로 성해지면 러시아 사람은 그 형세가 외롭지 않음을 알고, 조금은 돌아보고 꺼림이 있을 것이다. 일본 사람은 그 힘이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가히 더불어 연결하여 화친하고자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필코 외국의 혼란은 슬며시 없어지고 나라의 근본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중국과 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과 맺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중국 이외에 가장 가까운 나라는 일본이다. 옛날 선왕이 사신을 보내어 통교한 나라는 맹부에 실려 있고, 그들은 대대로 맡은 일에 충실하였다. 근일에 이르러서는 즉 북으로 이리와 호랑이가 어깨와 등을 걸쳐 타고 있어 만일 일본이 혹 땅을 잃으면 조선 팔도가 능히 스스로 보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조선은 한번 변고가 생기면 구주·사국이 또한 일본의 차지하는 바가 되지 못할 것이다. 고로 일본과 조선은 실로 보거상의의 형세에 놓여있다.

한·조·위가 합종하자 진이 감히 동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오·촉이 서로 결합하자 위가 감히 남쪽으로 침략해 오지 못하였다. 저들이 강대한 이웃 나라의 핍박으로 순치의 교분을 맺고자 하니, 조선으로서는 작은 거리낌을 버리고, 큰 계획을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구교를 닦고 외원과 결합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훗날 양국의 윤선과 철선이 일본의 바다 위에 종횡으로 누비게 되면 외해는 절로 들어올 길이 없어질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일본과 맺어야 하는 것이다.

미국과 연결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조선을 동해로부터 가면 아메리카가 있는데 즉 합중국이 도읍한 곳이다. 그 근본은 영국에 속해 있었는데 백년 전에 화성돈(워싱턴)이란 자가 유럽사람의 학정을 받기를 원치 않고 발분 자립하여 한 나라를 독립시켰다. 이 뒤로부터 선왕의 유훈을 지켜서 예의로써 나라를 세우고 토지를 탐내지 않고, 남의 인민을 탐내지 않고, 굳이 남의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와 중국과는 조약을 맺은 지 십여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조그마한 분쟁도 없는 나라이다. 일본과의 왕례에 있어서는 통상을 권유하고 연병을 권유하고, 약속을 고칠 것을 도와주니, 이는 천하만국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대개 민주국이란 공화로써 정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이롭게 여기지 않는다. 미국이 나라를 세운 시초는 영국의 혹독한 학정으로 말미암아 발분하여 일어났으므로 고로 항상 아시아와 친하고 유럽과는 항상 소원하였다. 그 인종은 실은 유럽과 동종이다. 그 나라의 강성함은 유럽의 여러 대지와 더불어 동·서양 둘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에 항상 약소한 자를 부조하고 공의를 유지하여, 유럽사람으로 하여금 그 악을 함부로 행할 수 없게 하였다. 그 국세는 대동양에 두루 미치고 그 상무는 호로 대동양에서 성하였다. 또한 동양이 각기 제 나라를 보전하여 편안히 거하고 무사하기를 원하였던 까닭에 그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으로서는 마땅히 항상 만리 대양에 사절을 보내서 그들과 더불어 수호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그들이 연달아 사신을 보내어 조선과의 연결을 유지하려는 뜻이 있음에랴! 우방의 나라로 끌어들이면 가히 구원을 얻고, 가히 화를 풀 수 있다. 이것이 미국에 연결해야 하는 까닭이다.

무릇, 중국과 친하는 것은 조선의 믿는 바이요, 일본과 맺는 것은 조선이 장차 믿고, 장자 의심할 것이다. 미국과 연결하는 것은 즉 조선이 심히 의심할 것이다.

                                                                                         - 황준헌, 조선책략  -

자 밑줄친 부분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글의 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조선책략의 내용은

1번째, 개화를 통해서 부국강병을 해야 하니 서양과 통상하고 유학생을 파견하라

2번째, 러시아의 남하에 방어해야 하니 조선은 개화를 하되,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하여 외국과 만나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숨은 뜻이 하나 더 있네요. 바로 이 책을 만든 청나라의 의도입니다. 청나라는 당시 러시아와 시베리아 및 중앙아시아, 연해주 등지에서 계속 충돌하고 있었습니다. 청은 러시아와 일본을 견재하면서도 <조선의 종주국은 청나라>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한 포석으로 이 책을 적은 것입니다. 미국과 연합하라는 제의는 곧 미국의 힘을 끌어들어 동아시아 구도를 바꿔보겠다는 청의 의지입니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이 들어옴으로서 흥선대원군 시기 억눌려 있던 개화파의 목소리가 봇물터지듯 나오기 시작하였고, 고종과 명성황후까지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조선책략의 유입을 필두로, 80년대 조선 정부는 개화라는 파도에 휩싸입니다. 개화파 신료들은 고종에게 정부가 앞장서서 개화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조선책략에 쓰여진대로 미국과 연합하여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조미수호조약, 1882)

해국도지, 영환지략과 같은 세계 역사와 지리에 관련된 책들이 들어와 우리의 눈이 넓어졌고, 만국공법 등 서양의 보편법이 유입되어 합리적인 법질서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지요.

3. 미국과 수교를 맺다.

조선책략으로 맺은 첫 번째 결실은 미국과의 수교입니다. 미국과의 수교는 <조선책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 내면을 보면 조선책략을 유포한 청나라의 의도이기도 했습니다. 미국과 조선이 조약을 맺는 중간자로서 청이 역할을 했기 때문에, 청은 미국으로부터 조선의 종주권을 암암리에 묵인받게 되고, 청과 러시아의 영토분쟁에서 미국의 원조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지요.

<한미수호통상조약>은 우리가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의 내용이 대부분 들어가 있습니다. 먼저, 치외법권을 인정하였고, 조차지 설정을 승인한데다가, <최혜국 조관>이 들어가서 일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는 불평등 조약을 맺은 것입니다. 용어들이 어렵죠? 강화도 조약에서 했지만, 다시 한 번 용어를 정리해 볼까요? 이번엔 표로 정리해볼께요.

<불평등 조약의 일반적 내용들>

협정

내용

영사재판권

다른 나라가 무슨 짓을 해도 우리는 타국의 사람들을 처벌할 수 없습니다. 외국인은 외국인이 재판한다는 것이지요. 예로, 우리 젊은 여중생들을 미국 탱크가 밀어 죽였어도 미국병사들은 미국가서 재판받고, 국내보다 가벼운 처벌을 받잖아요? 그것과 유사합니다.

관세협정권

관세는 해외에서 물건이 들어올 때 세금을 메기는 것입니다. 관세가 높을 수록 세금이 많이 책정되므로 물건값이 비싸지고 잘 안팔리지요. 관세협정권이란, 관세를 낮게 책정하거나, 아예 관세없이 자유무역을 하여 자국의 물건이 잘 팔리게 하는 조약을 말합니다. 우리나라도 미국과 FTA를 해서 자유무역을 하려고 하고 있죠? 바로 이것입니다.

개항장

설치권

개항장은 외국과 무역을 할 수 있는 첫 입구인 항구근처를 말합니다. 개항장은 외국이 자유무역을 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거주 세력 범위를 정하는데, 이것을 <조계>라고 합니다. 특히 조계는 외국들이 자신들의 독립된 영토로서 <조차지>를 설장하기 때문에, 그 지역이 외국의 땅으로 넘어가버리는 <반식민지 지역>이 됩니다. 일본과 미국은 이 개항장은 10리, 50리, 100리로 넓혀갑니다. 조차지가 넓어지고, 개항장이 넓어질수록 해상무역은 점차 육지 무역까지 침투하게 되는 것이지요.

화폐통용권

화폐통용권은 개항장에서 외국의 화폐가 통용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외국이 자국의 돈을 사용할 수 있는 권한이 생김으로서 우리 경제를 침투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됩니다.

최혜국

대우권

최혜국 대우권은 통상, 항해, 관세 등 모든 부분에 있어서 조약을 맺는 국가가 다른 3국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로, 일본이 우리에게 원산을 개항했다면, 미국은 조약을 맺을 때 최혜국으로서 일단 원산은 자동 개항하고 나머지 부분의 개항을 추가 합의하게 됩니다. 즉, 어느 한 나라와 맺은 조약이 이후 조약 또는 이전 조약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청과 맺은 조청상민무역장정에서 <내륙지 무역을 허가한다>라는 조약이 있습니다. 이 조약은 최혜국 약관에 의해 모든 나라가 우리 내륙에서 무역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이 조약이 체결된 1880년 중반에서 청, 일본, 미국, 러시아 등 모든 나라가 우리 나라에서 경제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치고 받고를 시작하죠.

3. 민씨정권은 적극적으로 개화정책을 시도하다.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민씨정권은 개화정책의 공공연한 명분을 얻게 되고, 개화파는 이제 양지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따라서 1880년대의 개화정책의 특징은? 이라고 물어보면 답은 <정부주도의 개화정책과 온건개화파의 득세>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때의 개화정책이란, 서양의 모든 문물을 다 받아들이는 정책이 아닙니다. 조선 정부는 개화의 성공 사례는 일본을 본받으려 했지만, 개화의 원칙에 았어서는 청나라, 특히 양무운동의 이홍장에게 많은 자문을 얻게 됩니다. 양무운동은 중국의 개화정책 사상으로 <서양의 기술을 받되, 중국의 정신을 유지한다>는 중체서용의 정신을 바탕으로 합니다. 우리나라 개화도 이 중국의 중체서용, 일본의 화혼양재의 성격을 본받아 <동양의 도를 존중하면서, 서양의 기술만을 배운다>는 <동도서기>의 개화였습니다.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유의 윤리는 하늘로부터 얻어서 본성에 부여된 것인데, 천지에 통하고 만고에 뻗치도록 변하지 않는 이치로 위에서 도(道)가 되었습니다. 수레, 배, 군사, 농업, 기계는 백성에게 편하고 나라에 이로운 것으로 밖에 드러나 기(器)가 되니, 제가 바꾸고자 하는 것이 기인 것이지, 도가 아닙니다.

- 승정원일기, 고종 19년 12월 22일, 윤선학의 상소 -

위 글은 윤선학이 주장한 동도서기론입니다. 즉, 이홍장의 양무운동 내용과 거의 일치합니다.

민씨정권은 <동도시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서양식 기구와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우선 효율적인 문물 수용을 위해 청에는 김윤식 등 영선사를 계속 파견하고, 일본에는 수신사 대신 조사시찰단을 파견합니다. 조사시찰단은 정부 관료 중심이 아니라 젊은 관료와 기술자, 개화파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진보적으로 서구문물을 수용하려는 목적에서 일본에 파견되었고, 숫자도 상당히 많이 늘렸습니다.

이러한 외국 문물의 조사를 통해 통리기무아문과 12사라는 행정기구를 신설합니다. 통리기무아문은 지금으로 따지면 행정부, 12사는 각 부와 차관급이 되겠네요. 또 <국>을 신설하여 국가 기술력 향상을 추구하는데, 대표적인 곳이 박문국으로서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합니다. 또 중국 양무운동기의 기기국을 모방하여 기기창이라는 무기 제조부를 만들고, 신식 군대도 양성합니다.

신식군대는 왜별기라고 하여 양반자제로 구성하였습니다. 원래 흥선대원군 시기에 신미양요, 병인양요를 극복하면서 무위영, 장어영의 2영체제가 확립되고 군권을 국왕이 장악하였는데, 민씨정권에 들어서면서 이 구식군대를 활용하는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대원군기 구식군대는 그대로 놔둔 상태에서 신식군대를 육성함으로서 이것이 훗날 임오군란의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4. 조선책략은 룩론을 분열시켰다.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정부가 개화정책을 실시하자, 외세를 몰아내고, 우리 것을 지키자는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납니다. 이것을 흔히 정을 수호하고, 사를 몰아낸다는 <위정척사운동>인데, 80년대 위정척사운동의 내용은 <민씨정권에 대한 개화 반대운동>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조선책략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한 이만손의 영남만인소 일부를 한 번 볼까요?

일본이 이미 우리의 수륙 요충 지대를 점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허술함을 알고 충돌을 자행할 경우 이를 제지할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입니다. 갑자기 황 쭌셴의 종용을 받고 우리 스스로가 끌어 들인다면, 그들이 풍랑을 헤치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재산을 약탈 하거나, 저들이 우리의 약점을 잡아 어려운 청을 강요한다면 이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러시아는 본래 우리와는 혐의(嫌疑)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연히 남의 이간을 듣고 우리의 위신을 손상시키거나 원교를 핑계로 근린을 배척하다가 만의 하나 환란이 일어나면 장차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사학에 종사하여 재화를 이루고 농, 공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원래 우리에게도 옛부터 재용과 농공에 대한 훌륭한 법규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서학에 종사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야소교 전래가 해롭지 않다고 하는 것은 사교를 조선에 유포시키려는 간계이니, 주공, 공자, 정자, 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혀서 그 사람 귀류들을 물리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는 일본, 미국과 연합해고, 러시아를 물리쳐야 한다는 조선책략의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생들은 아무 근거없이 개화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다 나름의 명분과 이유가 있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조선책략이라는 책이 조선의 개화를 상징하는 것이 되어 버렸고, 유생들은 조선책략을 보이는대로 불태우는 운동을 하면서 개화에 대하여 저항했다는 점입니다.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우리나라의 위정척사운동을 대원군기부터 명성황후기까지 시기별로 모아서 정리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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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시대, 격동의 한국사 속에서 어떻게 봐야할까?

이번장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정책에 대하여 논의해보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1863년부터 1873년까지 약 10년간 정치를 이끌며 한국 근현대사의 주된 흐름을 이끌어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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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화와 척사가 난립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직전의 한국사회는 개화, 척사라는 두 흐름이 정치 전반에 긴장감을 주던 시기였습니다. 1860년대, 서양에서는 이양선을 보내 아시아 각국에 통상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또 중국은 서양에 의해 베이징을 점령당했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차지하여 우리와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죠.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을 차츰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860년대 초부터 이항로 등의 유학자들은 외국과의 통상이 국내 경제에 미칠 영향이 어떤 것인가를 분석하면서 <통상반대운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반대로 양반인 박규수, 중인출신인 오경석과 유홍기 등은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만 이후 조선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개화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오경석은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의 도서를 국내에 소개하였고, 이것은 훗날 조선책략, 만국공법과 함께 개화정책의 지침서가 됩니다.

또 순조 때의 효명태자와 같은 집권층 사람들은 세도정치 하에서 강력한 <국왕권>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개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도정치 하에서는 이러한 개화, 척사의 논의보다는 안동김씨 일문을 비롯한 정치가문의 정치적 논리가 우선이었으므로, 이러한 개화, 척사의 논의가 본격화되지 못하였습니다.

2. 대원군이 등장하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서 고종의 어린 시절 <강력한 국왕권 확보>를 위해 개혁정치를 실시한 사람입니다. 그는 순조,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안동김씨 등 일문독재의 세도정치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상가집 개라고 불릴 정도로 미친척을 하여 안동김씨 세력을 안심시키면서, 자신의 아들을 안동김씨집안에서 이의없이 왕위에 올릴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종이 왕이 된 후 흥선대원군은 <대원군>으로서 정치를 독점하고, 안동김씨 일문을 축출하여 세도정치가 마감됩니다.

그의 정치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정확보와 민생안정을 통한 <강력한 왕권 확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흥선대원군의 정치가 민생을 안정시키고, 소농과 상인층을 보호하면서 세도정치 가문의 병폐를 근절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원군의 목적은 <농민보호>가 이니였습니다. 농민보호와 상인보호는 <왕권강화>를 위한 조세원 확보책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그럼 하나 하나 대원군의 정책을 짚어볼까요?

3. 왕권 강화를 시도하다.

흥선대원군은 집권후 가장 큰 목적인 <왕권강화>를 위해 세도정치와 관련된 인물들을 비롯하여 신권을 축소시키는 개혁을 시도합니다.

먼저, 조선 후기에 강해진 비변사를 축소합니다. 원래 조선 최고의 기구는 의정부였는데, 임란과 호란 이후 임시 군사기구였던 비변사에 신하들이 모여 붕당정치를 실시하면서 <비변사>가 조선 최고의 기구가 되는 변태정치가 실시되어 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약해진 왕권 강화를 위해 신권 기구인 비변사의 기능을 줄이고, 의정부 기능을 복원함으로서 <국왕권>이 주도하는 중앙정치로 환원시킨 것입니다.

다음으로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합니다. 경복궁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궁전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을 버리고 선조가 북으로 피난가자 백성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복궁에 불을 질렀습니다.경복궁을 중건한다는 것은 곧, 떨어진 왕실 권위를 회복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죠. 그러나, 경복궁 중건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드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을 징수합니다. 원납전이란, 원래 <원하는 사람이 납부하는 돈>이란 뜻이었는데, 점차 국가는 이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여 경복궁 중건에 투입합니다. 백성들은 반강제적인 원납전을 <원망하면서 내는 돈>으로 바꿔불렀다고 합니다. 또 동대문부터 북대문까지 4대문과 4대문 사이에 있는 소4문을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문세>를 받아 자금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역을 늘려서 백성들을 무상으로 일을 시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비가 부족해지면 <당백전>이라는 돈을 찍어서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 당백전 발행으로 시중에 돈이 너무 많아져서 인플레이션 현상이 심화되었고, 백성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리더쉽으로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보장하여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들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다시 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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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흥선대원군, 경복궁 근정전, 당백전>

대왕대비가 경복궁 중건을 명하고 다음 날 3일 시원임 대신을 회정당에 불러 중건 대사를 대원군에 위임하였다. 경복궁 영건 때의 비용과 백성의 역에 대한 절차를 의논하였는데, 백성의 노역 문제는 신중을 기하고, 안으로 재상 이하 밖으로는 지방 수령 이하가 역량에 따라 보조하며, 선비, 서민층은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자진 납부하는 자는 상을 주기로 하고 이 뜻을 8도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미 서울의 원납전이 20만량이 되었다.

- 승정원일기, 고종 2년 4월 2일, 5일 -

또 대원군은 자금 확보를 이유로 전국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정리해버립니다. 흥선대원군은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은 공자가 살아돌아오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명분을 강조하면서 서원을 철폐합니다. 서원 철폐는 양반계급이 대원군을 적대시하게 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를 계기로 지방 양반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족이 있는 곳마다 평민을 못살게 굴지만 가장 심한 곳이 서원이었다. 먹도장을 찍은 다음 편지 한통을 고을에 보내서 서원 제수전을 바치도록 명령하였다. 사족이나 평민을 물론하고 그 편지를 받으면 반드시 주머니를 쏟아야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서원에 잡혀가 혹독한 형벌로 위협을 받았고 화양동 서원 같은 곳은 그 권위가 더구나 강대하여 그곳에서 보내는 편지를 화양동 묵패지라 하였다.

백성들은 탐학한 아전들에게 시달렸는데 여기에 또 서원 유생에게 침탈을 당하니 모두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원망을 하고 이를 갈아도 하늘만 쳐다볼 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대원군이 영을 내려 나라 안 서원을 죄다 허물고 서원 유생들을 쫒아 버리도록 하였다. 감히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하니, 사족이 크게 놀라서 온 나라 안이 물 끓듯 하였고 대궐 문간에 나아가 울부짖는 자도 수십만이나 되었다. 조정에서는 어떤 변이라도 있을까 하여 대원군에서 이렇게 간언하였다.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선비의 기풍을 기르는 것이므로 이 명령만은 거두기를 청합니다.>

대원군은 크게 노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유를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에는 도둑의 소굴로 됨에 있어서라.>

드디어 형조와 한성부 나졸들을 풀어서, 대궐 문 앞에서 호소하려는 선비를 강 건너로 몰아내 버렸다. 여러 고을에서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영을 거행하지 못했는데, 대원군이 먼저 한 고을 원을 파면시키고 무거운 벌을 시행하니, 이에 여러 도에서는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일시에 서원을 철폐시킬 수 있었다.

다시 8도에다 암행어사를 보내니, 사족으로서 평민을 침해한 자가 있으면, 그 몸에 죄를 주고 재산을 몰수하니 떵떵거리는 집안들도 숨을 죽이고 감히 나쁜 짓을 못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춤추고 칭송하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체제 정비도 시도하였습니다. 먼저 수령에 대한 조목을 수정하여, 조세징수를 부당하게 하는 수령들을 적발하여 처벌하였습니다. 또 오래된 붕당정치와 일문독재정치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파와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계승한 정책도 실시합니다. 실제 대원군의 국정 운영을 잘 살펴보면, 정조기 <탕평책>으로 활용했던 정책들이 상당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원군이 집권한 뒤 어느 공회 석상에서 음성을 높여 여러 대신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겠으며 태산을 깎아 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떠시요?>

대저 천리지척이라는 말은 종친을 높인다는 뜻이요, 남대문 3층이라는 말은 남인을 천거하겠다는 뜻이요, 태산을 평지로 만들겠다는 것은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의사이다.

- 매천야록, 갑오이전 -

또 이러한 체제 정비를 체계화 하기 위하여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편찬하였습니다. 조선의 법전은 경국대전으로 완비된 이래, 새로운 사회변화에 따라 법전을 일부 개편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영조의 속대전, 정조의 대전통편은 이러한 사회변화를 반영한 대표적인 법인데, 대원군이 대전회통을 발표함으로서 보다 왕권위주의 사회개혁을 표방하는 체제정비가 이루어졌습니다.

4.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다.

삼정이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세금은 전정(전세 : 토지세), 군정(군포세 : 군역세), 환곡(이자세)를 말합니다. 원래 조선의 세금은 토지에 부과하는 전세를 바탕으로 하되, 백성들이 국가에서 몸으로 때우는 역을 추가로 설정합니다. 역이란, 실제 일을 하는 요역과 군에서 일하는 군역이 있는데, 군적수포제 이후 군역은 세금항목화 되었습니다.(조선시대 군역편을 참조하세요) 환곡은 원래 국가가 농민에게 춘궁기에 쌀이나 종자를 빌려주고, 수확기에 돌려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운반 등에서의 손실분을 메우기 위해 일분모회록을 작성하여, 약간의 이자를 받았는데, 이후 국가가 가난해지면서 이 이자를 세금처럼 늘려 받게 됩니다. (환곡편을 참조하세요)

이러한 삼정이 세도정치기에 무척이나 문란해집니다. 전정은 토지세를 엄청나게 늘려받았습니다. 토지 측량에서 관리들의 부정이 많아지고, 토지를 재는 <척>도 제각각이 됩니다.

군정은 균역법이후 군포 2필을 1필로 감해주어, 이 1필만 내면 군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은 군적을 속여 군포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를 16세 이상이라고 속여서 군적에 올리거나, 여자를 남자로 속여 군적에 올리는 행위(황구첨정), 죽은 사람을 죽지 않았다고 하면서 군적에 올리는 행위(백골징포), 도망간 자의 이웃이나 친척에게 군포를 받는 행위(족징, 인정) 등이 대표적인 군적 문란의 예입니다.

환곡은 더욱 심하여, 백성들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빌려준 후 이자를 계속 배로 받아 원곡보다 이자가 몇 배 증가하는 경우, 강제로 대출해준 다음 고리대처럼 이자를 받는 경우, 겨가 섞인 불량쌀을 빌려준 후 받을 때는 품질좋은 쌀로만 받는 경우 등등 경우도 다양했습니다.

대원군은 이러한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전정, 군정, 환곡을 대수술합니다.

먼저 전정에서는 불법으로 토지를 겸병하는 것을 막습니다. 또 국가 몰래 숨겨 경작하던 땅들을 모두 찾아내었고, 만약 숨겨진 땅이 있으면 수령이나 향리를 처벌하는 등 엄하게 토지관련 법규를 정비합니다.

다음으로 군정에서는 유명한 <호포법>을 실시합니다. 호포법은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것으로서 양반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양반들이 자존심 때문에 호포를 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양반들이 군포를 낼 때에는 하인들의 이름으로 납부하게 하여 양반 위신을 세워주었고, 또 매포당 2냥씩으로 균등한 괴세를 매겨 평등한 세금 부과를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환곡제는 완전 폐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관에서 운영하는 환곡이 관리의 부정부패로 인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환곡을 폐지한 뒤 지방자치조직인 <사>에다가 곡식 대여의 임무를 맡깁니다. 이것은 관리의 부정을 방지하면서도, 왕실의 재정과 민생 안정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한 대책이었습니다. 원래 고려 시대 이후 지방에서는 <사창>이라고 하여, 국가가 운영하지 않은 비인가 대여기구가 있었습니다.(고려에서는 국가기구였지만, 조선에서는 의창이 국가기구입니다.) 의창이 공식기구라면 사창은 조선시대의 비공식 백성 구휼기구였던 것이죠. 흥선대원군기에 사창은 국가에 공식 인정되어 국가 환곡을 담당하는 <의창>을 대신하게 됩니다

삼정의 문란이 시정되면서 흥선대원군은 원하였던 재정확보와 왕권강화를 추구하면서도, 농민층의 지지를 받게됩니다. 이후 명성황후의 집권기에 국가조세제도가 다시 문란해지면서 근대화기 우리나라는 대원권의 강력한 정책을 그리워하는 농민층이 많아졌고, 대원군의 이후 복권에도 이러한 정책에 대한 지지가 많은 뒷받침을 했었습니다.

대원군의 삼정의 문란 극복 정책

전정의 수정 : 은결색출

대저 임금이 있으면 나라가 있는데, 금일의 형세는 나라가 있으나 믿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나라라는 것은 민이 모인 것이고 민을 모으는 것은 재물입니다. 안으로는 왕실과 정부가 모두 텅 비고 밖으로는 창고가 모두 고갈되었으니, 녹봉을 계속 지급하기 어렵고 진휼곡은 내주기도 어려우며 생민이 날로 초췌해지고 온 팔도에 소요가 일어나니 흰수건을 둘러쓰고 몽둥이를 든 자가 걸핏하면 1만명이 넘고 관가를 약탈하고 관원을 살해하고 재변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난 역사에 없던 일들로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전하의 나라에 백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승정원일기, 고정 1년 정월 27일 -

영의정 조두순이 아뢰기를

<수령이 경작 토지를 찾아내어 중앙에 보고하는 양이 많고 적음으로서 징벌과 권면의 기준으로 삼기를 청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대왕대비는 여기에 따라 시행하되 회기 내에 실효가 있도록 하라고 답변하였다.

- 일성록, 고종 1년 11월 20일 -

군정의 수정 : 호포제

갑자년 초에 대원군은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그 전의 형태를 바꾸어 모든 양반, 천민에게 1정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세납전 2량씩 고루 바치게 하였으니 이를 동포전이라고 한다.

- 매천야록, 갑오이전 -

환곡의 폐지 : 사창절목

본 창에는 관장할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니 반드시 본면 중 부지런한 자를 택하고 일면회에서 천거하여 관에 보고한 뒤에 뽑니다. 또한 관에서 감히 강제로 정하지 말고 그를 일러 사수라고 하고 환곡을 분급, 수납하는 것을 맡아 검사한다. 또한 각 동에서 근검한 사람을 가려 뽑아 당장으로 삼아 일청 사수가 지휘하고 본동이 받고 내주어 그로 하여금 바로잡게 하며 창고지기 1명도 사수로 하여금 지역에 뿌리박은 자를 잘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맡아서 지키고, 출납하고, 용량을 재서 일체 환곡을 분급받은 백성에게 부칠 일이다.

환곡을 분급하는 규칙은 해당 면에서 각 동 대소 빈부로써 차등으로 삼으며 양반과 상민을 가리지 않고 동네에 분급된 양을 헤아려 지나치게 맣거나 지나치게 적을 우려를 없게 하며, 만약 유망하여 받아내지 못한 곳이 있으면 해당 동에서 골고루 배분하여 채워낼 것이로되 사수와 해당 동장은 모두 경계하고 삼가지 못한 죄로써 심문할 일이다.

- 일성록, 고종 4년 6월 11일 -

5. 쇄국정책을 실시하다

대원군이 국내에서는 강력한 <왕권보호>정책을 실시하였다면, 대외적인 정책은 철저한 <쇄국정책>이었습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강력한 정책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초기에 천주교에 관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정조기 이래 반세도정치 세력들 중에 개화주의자들이 많았고, 대원군 역시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고래 <이이제이 정책>을 생각해두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천주교를 전파하는 것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고 하였죠.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정치 불간섭 및 철저한 인도주의적 선교원칙을 주장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와의 정치적 교섭은 실패하였고,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하고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합니다.(병인박해)

또 당시 대동강 하류에 정박하면서 우리와의 통상을 주장하였던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거부당하자, 평양근처의 민가를 불지르고 약탈을 자행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평양군민들은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버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입니다. 이 프랑스, 미국과 연계된 사건은 우리 정부의 정책이 급격하게 반외세로 돌아서는데 기여합니다.

1866년 프랑스는 강화도에 쳐들어옵니다. 이것이 병인양요입니다. 강화도는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오는 인천물길의 입구로서 통상을 위해서 한양으로 오기 위한 입구입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대외정책상 강화도를 철저히 방비하고, 대포와 함선을 비축해두고 있던 곳입니다. 또 문서를 보관하는 외규장각이 있던 섬이기도 하지요. 프랑스의 침입은 양헌수의 부대를 비롯한 관군이 정족산성 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외규장각의 수많은 문서들이 프랑스에 의해 약탈되었는데, 그 많은 문화재들을 아직도 찾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느낌표의 74434인가에서 대대적으로 방영해주기도 하더군요.

조선 국왕이 프랑스 주교 2인과 선교사 9인 그리고 조선인 신도 다수를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잔폭은 패망을 자초하는것이다. 조선은 중국에 납공하는 나라이므로, 본국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유죄를 정토하러 떠나기 전에 조선 원정을 알리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줄 안다. 조선 국왕이 프랑스 신부를 살해하는 날은 곧 조선국 최후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수일 내로 조선 정복을 위해 출정할 것이다. 조선을 정복하여 국왕을 책립하는 문제는 프랑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시행할 것이다. 전에 수차 귀 아문을 방문하고 프랑스 석교사에게 호조(여권) 발급을 요청하였으나, 귀 아문은 모두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이 비록 중국의 조공국이지만, 모든 국사를 자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호조 발급은 천진조약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본관은 조선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믿고, 이후부터 본국과 조선이 전쟁을 벌이더라도 간섭하지 않기를 선언한다.

- 청계중일한관계사료 제 2권 -

제너럴 사건이후, 시간이 꽤 흘러서 미국도 제너널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1872년 침입합니다.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어재연의 광성보 전투와 평양군민들의 저항으로 미국이 물러나기는 했지만, 이후 미국은 계속적인 통상수교를 요청하곤 합니다.

이후 독일인 오페르트의 상선이 무역을 요청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합니다. 오페르트는 조선과의 통상에 대한 정치적인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대원군의 아버지 <남원군>의 묘를 도굴하려 하다가 실패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과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 도굴사건에 분개하였고, 이 사건은 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유생층이 지지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개화파들도 당시에 개화정책을 입에 담을 수 없도록 하는 효과도 있었죠.

그들의 유골을 잠깐이나마 점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진 자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할 것이며, 서울을 점령하는 것과 다름없는 의의를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원군은 그것을 돌려받기 위해서 누구에게든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일에도 찬성할 것이다. 그러면 그를 강요하여 제안된 조건을 수락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대원군을 강요하여 이 요구를 수락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이것뿐이라는 것이다.

- 오페르트,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  -

사료분석 : 1868년(고종 5) 오페르트(E. J. Oppert:1832~?)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에 관한 사건입니다.  오페르트는 중국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던 유태계 독일상인으로 1866년 2번에 걸쳐 통상요구를 하다가 거절당하였죠. 그러자 그해에 미국인 젱킨스의 지원을 받아 통상조약 체결을 명분으로 상하이에서 조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때 통역으로 프랑스 선교사 1명과 한국인 천주교도 약간 명을 대동하였는데, 이들은 통상요구는 하지 않고 4월 18일 밤에 충청도 홍성군 구만포에 몰래 상륙해 바로 덕산으로 이동했으며, 덕산군청을 습격한 후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쳤답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들은 조선인이 시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관을 미끼로 조약을 체결하려 했던 것 같네요. 하지만 중도에 날이 밝아 도굴은 실패하였습니다. 21일에 이들은 영종진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수비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사상자를 내고 달아났습니다. 이 사건은 국외에도 널리 알려져 젱킨스가 기소되는 등(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남) 많은 파문을 일으켰으며, 대원군이 천주교탄압령을 내리고 대외강경책을 더욱 고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페르트는 이 사건 이후 〈조선기행 A Forbidden Land:Voyage to the Corea〉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예전에는 단순한 도굴사건이 통한 쇄국정책에 영향을 주었다는 책들이 많았는데, 요즘 서적들은 오페르트는 하나의 통상방법으로서 이 수단을 선택하였으며, 치밀한 계획과 조선에 대한 여러가지 상황을 감안하여 실시된 계획적인 사건이라는 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강력한 척양정책을 고수하였고, 이 정책에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대원군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특히 이항로, 최익현 등의 개항반대운동은 대원군 정권의 정통성을 공고히 해주게 됩니다. 또 서양은 조선의 강력한 저항을 보면서, 조선을 독자적인 자주국가로 인정하게 되고, 다른 방향에서의 접근을 모색하게 됩니다. 실제, 유럽 열강들은 당시 자국의 국제적인 관계상 조선까지 쳐들어올 적극적인 이유를 찾지 못하였고, 이후 대조선 정책에 있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으로 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후 척화비를 전국에 세워 반외세 정책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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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때의 강화도 격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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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어재연, 척화비, 대원군의 묘>

대원군기 통상수교 거부정책 : 이항로가 올린 글

또 하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양이의 화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홍수나 맹수의 해일지라도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힘쓰시고 경계하시어 안으로는 관리들로 하여금 사학의 무리를 잡아 베시고, 밖으로는 장병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하도록 하옵소서.

사람 노릇을 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고비와, 존속하느냐 멸먕하느냐 하는 기틀이 잠깐 사이에 결정되오니 정말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한갓 지엽만 다스리고 근본을 제거하지 않거나, 한갓 흐름만 멈추게 하고 원천을 막지 아니한다면 근본의 싹과 원천의 샘솟음을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이의 재앙을 일소하는 근본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전하를 위한 계책은 마음을 맑게 닦아 외물에 견제당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외물이란 것은 종류가 극히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양품이 가장 심하옵니다.

몸을 닦아 집안이 다스려지고 나라가 잡힌다면 양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기이함과 교묘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저들이 기필코 할 일이 없어져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평생 양직물을 입지 아니하고 집안에서 양품을 사용하지 아니하여 그것으로 집안의 법도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잡아죽이고 정벌하는 일과 본말이 되어 서로 돕고 의지하게 되오니 꼭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 화서집 권 3 -

올해 여름과 가을 이래로 외국 선박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 5도에 몰래 출몰하매 혹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가 없었다. 그중에는 상륙하여 물을 길어가기도 하고 때로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데, 그 선박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다.

- 현종실록 15권, 현종 14년 12월 -

대원군의 양이보국책 유시

   (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 때 철저한 항전의 뜻을 정부 관료에게 내린 유시)

1.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친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파는 것이다.

2. 해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3. 적이 경성에 다다를 때 도성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4. 만약 잡술이나 육정육갑(둔갑술 등에 이용되는 신) 따위로, 또는 귀신을 불러 신기하게 침략자를 물리치고자 하면 이후에 생겨나는 폐단은 사학(천주교)보다도 더 심할 것이다.

- 용호한록 권 18, 병인년 9월 4일 -

6. 대원군 정권과 메이지 정권의 마찰이 시작되다.

흥선대원군이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외세에 저항했다면, 당시 일본은 미국에 의해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을 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위해 사신을 보냈고, 1868-1876년까지 조선과 일본에서는 이 새로운 관계를 놓고 대립하게 됩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서계문제>입니다. 서계란, 일본측에서 조선측에 보낸 문서를 말하는데, 이 문서의 형식과 내용이 기존 관례와 너무 어긋나서 대원군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기존 일본은 조선에서 통신사를 받아 문물을 전수받으며 조선에 대한 예의를 지켜왔고 문서 역시 예의있는 표현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메이지 황제는 대원군에게 예의없는 문서, 즉 <대일본제국 천황이 고종의 아버지 흥선이에게 보내는 말투>의 문건을 보내고 새로운 관계설정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 서계를 보낸다, 못받겠다의 논쟁은 68-70년까지 계속되면서 양국의 첨예한 외교문제로 대두합니다. 이것은 메이지 체제의 일본과 조선의 큰 대립이었고, 흥선대원군은 일본과 외교를 단절해버립니다. 흥선대원군은 <왜양일체론>을 말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 역시 서양과 다를 바 없는 <서양 오랑캐>라고 말합니다.

일본은 흥선대원군과의 서계문제를 놓고 당장 조선을 침략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일본의 내수산업을 일으킨 이후에 점진적으로 침략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합니다. 당장 침입하자는 것을 정안론, 천천히 침략하자는 것을 점진론이라고 하는데, 이토 히로부미의 점진론이 받아들여져서 훗날 민씨정권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 부분 산업별로 조금씩 조선에 침투하기 시작합니다. 점진론의 1단계는 경제적 침략이었다고 하네요.

삼가 조선국예조판서 공 각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근래 정세가 일변하여 정권이 황실로 돌아갔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별사를 보내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겠으므로 여기서는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재주 없는 이 몸이 직을 받들어 귀국을 찾았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특히 옛 공로를 어여삐 여겨 작을 올리고 벼슬을 좌근위소장으로 진급시켰고, 다시 교린직을 맡도록 명하셨으니, 오랜 전통이 사라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별사가 가지고 가는 도서(인장)는 새로운 도장을 찍게 하여 우리 조정의 성의를 표하겠사오니 귀국 또한 잘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옛적에 귀국에서 받아온 도서는 원래 전적으로 후의에서 나왔기에 쉽게 이를 고쳐 바꿈이 옳지 않은 줄 아옵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우리 조정의 특명에 따른 것이니 어찌 사사로이 공적인 일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불초 이 몸의 정황이 여차하오니 귀국이 양찰하길 깊이 소망하는 바입니다.

- 메이지 원년 11월 -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대마도주가 보낸 서계 중에 자신을 좌근위소장으로 써온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조선이라는 두 글자는 기왕의 격례에 크게 어긋납니다. 역관으로 하여금 이를 엄중하게 알리도록 하고,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고쳐 올리게 하십시오. 직명이 전과 다른 것은 항식과 항례가 아니거니와, 300년이나 된 약조의 본의가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그들에게 서계를 고쳐 올리도록 분부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이 말에 임금이 윤허하였다.

- 승정원일기, 고종 6년, 12월 13일 -

7. 대원군 정권에 대한 반발

대원군 정권의 정책은 필요한 정책이 많았고, 국가 계층의 고른 지지를 받았습니다. 삼정문란의 극복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고, 쇄국정책으로 양반유생들의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원군에 대한 긍정적인 면들은 대원군의 극단적인 정책에 의해 모두 가려져 버립니다. 서원철폐와 호포법의 실시는 양반층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하면서도 서원정리에는 크게 반발하여 고종의 친정이 필요하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합니다.

대원군 정책에 대한 츼역현의 반발

호조참판 최익헌이 상소하였다.

<지난 나랏일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어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일이 순하지 않아 짧은 시간 안에 다 미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만 그 가운데 더욱 드러난 심한 것을 보면 만동묘(명 의종을 제사하는 사당) 철거로 임금과 신하의 윤리가 썩어졌고, 서원 철폐로 스승과 제자의 의리가 끊어졌고,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일로 아비와 자식의 친함이 문란해졌고, 호존(청나라 돈)을 씀으로서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도 어려워졌습니다.

이 몇가지 조목들이 곧 한 조각이 되어 천리와 인륜이 이미 탕진되어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원납전 같은 것이 표라가 되어 백성과 나라에 재앙을 끼치는 도구가 된 지 거의 몇 년이나 되었으니, 이것이 선왕의 옛 전장을 변화시키고 천하의 떳떳한 윤리를 썩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신의 생각으로는 전하를 위하여 오늘날의 급선무를 말하자면, 만동묘를 다시 설치하고, 서울과 지방 서원을 흥기시키고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일을 금하고 원통한 일을 풀고 부끄러운 일을 씻어 버린 국적에게 추율(죽은 역적을 다시 법을 집행함)을 적용하고 호전 사용을 혁파해야 할 것이며, 토목 공사 원납전도 한 시각이라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대원군의 정치는 <왕권강화>를 위해 백성을 이용하면서,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다고 낙인찍혀 개화주의자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백성들도 신분제 개혁과 지주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대원군의 정책을 100% 지지할 수 없었습니다.

8. 대원군은 긍정적인 인물이었다는 평가

대원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의 중요한 기준은 <전통사회의 폐단을 개혁>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대원군은 삼정의 문란을 극복하고, 기존 세도정치의 잘못된 점을 시정하였으며, 백성들을 위한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특히 대원군의 정책은 정조에서 시작되는 <탕평론>적인 개혁정책이 지속되었다는 것에서도 의의가 있습니다. 정조는 조선왕조에서도 드물 정도의 <유교적 계몽군주> 성격이 강합니다. 서양으로 따지면 <태양왕 루이 14세> 정도의 절대군주라고 할까요?

정조는 상당히 개혁적인 군주였습니다. 그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당파분열을 수습하고 서얼까지 등용하여 능력위주의 관료제를 마련합니다. 그 핵심이 규장각이었죠. 또 장용영을 마련하여 스스로의 상비군을 갖추려 했었고, 상공업 육성을 위해 사도세자의 묘가 마련된 화성을 건축합니다. 또 자유상업을 위해 신해통공으로 금난정권을 폐지하였습니다. 또 대전통편 등 법전을 정비하고, 북학사상을 가진 실학자들을 등용하여 중상주의적 국가체제를 마련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정조 때의 관료군은 모두 몰락하고, 일문독재가 시작됩니다. 물론 정조의 이념은 효명태자 등에 의해 지속되지만, 안동김씨의 입김으로 효명태자는 요절하였죠.

대원군은 이러한 정조의 이념을 부활시키고, 세도정치를 불식시킨 왕입니다. 그는 강력한 상비군을 바탕으로 국가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외세를 몰아내었습니다. 이것은 근대 민족국가를 추구하려던 정조의 이상과 일치합니다. 또 삼정의 문란 극복과 법전정비, 능력위주의 관료 등용 등으로 근대사회로 나아갈 계기를 마련한 왕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통사회의 폐단을 개혁하여 근대사회로 나갈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지요.

9. 대원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

대원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크게 2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그의 개혁 목표가 단순한 <왕권강화>였다는 점입니다. 대원군은 민생안정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즉, 조선 전통의 조세질서를 회복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고, 전제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실제 서원정리도 서원의 특권 폐지를 통한 조세확보였고, 호포제도 양반 등 특권계급에게 조세를 부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경복궁 중건을 위한 각종 세금은 민생 안정이라기보다 백성들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었죠.

따라서 흥선대원군의 왕권강화란 전통사회질서를 정조시대 이전으로 정상화하여 회복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신분제도를 인정하였습니다. 지주제도 인정하였습니다. 전제군주제도 인정하였습니다. 이 3가지는 실제 프랑스 혁명에서 말하는 구제도의 모순과 일치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구제도를 바탕으로 전통적 봉건질서를 부활하려는 인물이었습니다.

대원군에 대한 2번째 부정적 평가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의 문제점입니다. 대원군이 취한 통상수교 거부는 이유없는 반외세로서 근대 사회 발전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원군의 반외세 정책은 성리학적 이념을 가진 유생층의 지지를 통한 반외세로서 백성들의 생활과는 상관없는 반외세입니다. 따라서 개화주의자들은 시대착오적인 유교이념에 따른 반외세적 보수주의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였지만, 대원군은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곤 하였습니다. 대원군 이전 등장한 박규수, 오경석 등의 개화주의자들의 이론은 대원군 집권기에 힘을 잃고, 조선의 개화사상은 10여년의 세월동안 잠복기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민씨정권에서 개화주의자들이 활개치기 시작하지만, 이 때의 개화사상은 이미 민씨정권에 야합한 개화사상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었죠.

대원군의 정치는 결국 반근대적인 전제군주제, 봉건적 신분질서, 지주제적인 중세 토지제도를 강화하는 보수적인 정책이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이 점을 강조하여 대원군을 근대사회에 역행하는 인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원군에 대한 긍정론, 부정론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역사적 난재입니다. 보는 사람의 입장과 각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죠.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는 <강화도 조약>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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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의 시작인 개화기에 대한 개관

오늘부터 다룰 부분은 한국 근현대사입니다. 그 중 맨 처음으로 개화기의 중요한 역사적 흐름과 사건을 주제별로 묶어서 포스팅 하보도록 하죠. 오늘은 그 첫 번째로, 1860~1900년대까지 개화기의 전반적 흐름을 개관하는 포스트를 작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1. 1870~80년대 한국사의 주된 흐름

1880년대의 한국사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키워드는 <조선책략의 유입>과 함께 시작된 <정부주도의 개화정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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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개화정책과 관련된 조선책략>

한국사회에서 1850년대는 세도정치의 여파로 각종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사회모순이 극에 달해있던 시기였습니다. 또 밖으로는 서양의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 일본, 러시아와의 관계가 서구의 아시아 진출로 인하여 또 다시 재정립되는 시기였습니다. 1862년에는 세도정치에 대한 대대적인 항거인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났고,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의식은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하였죠.

이러한 상황에서 1863년부터 딱 10년간 정권을 잡은 사람이 <흥선대원군>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왕권강화정책으로 삼정의 문란과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재정립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도가문과 양반벌족들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반발하였고, 흥선대원군은 집권 10년만은 1873년에 축출되고 맙니다.

대원군을 몰아낸 명성왕후 세력은 1895년까지 조선 사회를 <개화>라는 맥락에서 이끌어갑니다. 결국 이러한 정책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하게 되었고, 1880년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개화정책이 정부주도로 체계화되기 시작합니다.

1880년대의 조선 사회는 이 <조선책략에 의한 개화정책>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조선책략을 수용하여 1882년 미국과 수교를 맺고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조선책략을 통한 대미수교에 대하여 양반유생들을 비릇한 전통 성리학자들은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대대적인 위정척사운동으로 연결되고, 1882년 임오군란에서도 이러한 반대논리가 표출됩니다.

조선책략에 의한 개화정책이 절정에 맞이하면서 반개화세력과 마찰을 빚은 가장 큰 사건은 1884년의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은 급전적 개화파가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조선세력을 개화하려는 의지를 보인 사건이었으나 보수파와 청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로 끝납니다.

일본을 등에 업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서는 <청>의 정치적 세력이 강해졌고, <일본>역시 경제적인 침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1880년대 중반부터는 청과 일본이 우리나라를 놓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각축을 벌이는 형세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외세의 경제적 침략은 1889년 방곡령을 계기로 노골화되고, 보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청, 일본이 대립하게 됩니다.

2. 1890년대 한국사의 주된 흐름

1890년대 한국사의 키워드를 말하라고 하면 <일본이 청, 러시아를 제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90년이 되면서 한반도에서는 일본, 청이 각각 조선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정치, 경제적으로 대립하는 형세였습니다. 또, 방곡령 등을 계기로 반외세의 기운이 높아지고, 국내 정치의 문란으로 인한 모순이 심화되어 농민층의 불만은 <임술농민봉기>가 30년이나 지난 시점에 다시 불붙고 있었습니다.

결국 1894년 농민들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동학농민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외세인 청, 일본에 의해 진압되었고, 청과 일본은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청일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서 일본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청일전쟁직후,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은 일본의 입맞에 맞는 개화정책을 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일본은 1990년 중반을 기점으로 조선에서 정치, 군사적 실권을 잡게 됩니다. 비록, 삼국간섭에 의해 청나라에서의 주도권은 잃었지만,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아갑니다. 1895년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개혁> 등을 통해 조선을 강제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합니다.

고종은 1896년 일본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가버립니다.(아관파천) 이 사건으로 우리 나라는 국가의 무능력함을 대외에 크게 알리게 되었고, 결국 이 사건이 우리나라의 각종 철도, 광산 등의 이권이 외국에 넘어가는 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국민들은 1896년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이권수호운동 및 고종이 다시 궁으로 돌아올 것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시작됩니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요구 이후, 환궁하였으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친 후 황제가 되어 <광무개혁>을 실시합니다.

여기까지가 개화기 1860-1990년대까지의 대략적인 역사 줄거리입니다. 당시의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만, <사회모순과 외세에 대한 농민의 저항과 정부의 개화정책 실패>라는 큰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그럼 하나하나 개화기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그리고 중요 사건순으로 묶어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화기, 그 격동의 한국사로 갑니다.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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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책략 반대상소_홍재학

    대개 서양의 학문은 천리를 어지럽히고 기강을 소멸시킴이 심하다는 것을 다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서양의 물건은 대부분 음탕하고 욕심을 유도하며, 유교 윤리를 깨뜨리고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히며, 천지를 거역하는 것들입니다. 서양의 학문과 물건은 귀로 들으면 창자가 뒤틀리고 수컷이 다른 것으로 바뀌며 눈으로 보면 창자가 꼬이고 위가 뒤집히며, 코로 냄새를 맡고 입술로 그것에 닿게 하면 마음이 변하여 실성하게 되니 이는 곧 그림자가 서로 부딪치고 전염성이 서로 감영되는 것과 같으며, 그 사람의 좋고 싫음이 향배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상을 받들지 않는다 해도 예수교의 책을 읽게되면 성인에게 죄를 얻는 시작입니다. 전하의 백성들의 과연 귀와 눈과 코와 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라 안의 실정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 홍재학의 상소  -

위정 척사는 정조 임금 이래로 내려온 조정의 기본 정책으로서 아직도 그 의리가 빛나는 바, 전하의 친정 이래로 왜양일체의 해를 모르고 일본과 통상을 주장해 온 결과 사설과 이의가 횡행하여 국가의 사태가 위급하기 비길 데 없습니다. 양물과 아소라는 사교의 위세로 공맹의 태도는 날로 사라져 가정에는 윤리가 깨지고 사람에게 예의가 허물어진 결과, 종묘 사직이 무너질 위기에 있으니 전하께서는 더욱 위정척사의 대위를 밝혀 주시어 ‘주화매국’하려는 신료를 처단해야 합니다. 신설된 아문을 폐쇄하여 옛 제도를 복구하고 경비를 절약하여 사치를 금하고 언로를 넓혀 지혜를 모으고 정학을 장려하여 사악함을 막아 기강과 민력을 떨친다면 상하원근이 한 마음으로 뭉칠 수 있으니, 그렇게 될 때 동왜와 서양을 막을 수 있으며 북쪽 러시아도 우리에게 위압될 것입니다.

- 일성록, 고종 18년 윤 7월 6일, 홍재학의 상소 -

사료분석 : 조선책략유포와 개화정책실시에 대한 반대에 대한 상소문입니다. 홍재학은 이 상소에서 국왕까지 규탄하였으므로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의 형을 받고 가산은 몰수되었습니다. 내용중 보면 '어떠한 군주가 되겠습니까'라는 식의 왕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지요.. 이 사료 역시 최익현의 5불가론이나 영남만인소에 있던 내용과 비슷하니, 그 쪽 사료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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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조선책략

지구의 위에는 막대한 나라가 있는데, 아라사(러시아)라고 한다. 그 너비가 광대해서 3대륙에 걸쳐 있다. 육군 정예병이 백여만이고, 해군 거함이 이백여척이다. 다만, 나라를 북쪽에 세워서 하늘은 차고 땅은 척박하였다. 고로 빠르게 그 영토를 넓혀서 사직을 이롭게 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선세로부터 표트르대제 이래 새로 강토를 개척하여 이미 이전보다 10배가 넘었다. 지금의 왕에 이르러서는 다시 4해를 관할하고 팔방을 병합하려는 마음으로 중아세아에 있는 위구르의 모든 부족을 잠식하여 거의 다하였다

천하가 모두 그 뜻이 작지 아니함을 알고 왕왕 합종하여서 서로 항거하였다. 투르크 한 나라를 러시아가 오랫동안 병합하고자 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협력하여 유지해 나감으로 러시아가 끝까지 굳세게 그 뜻을 얻을 수가 없었다. 바야흐로 서양의 여러 대국들, 독일·오스트리아·영국·이탈리아·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모두 호시탐탐 결단코 한 척, 한 촌의 땅이라도 남에게 주려고 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서양 공략을 이미 할 수 없게 되자, 이에 번연히 계획을 바꾸어 그 동쪽의 땅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였다. 십여년 이래로 화태주(사할린)를 일본에게서 얻고, 중국에게서 흑룡강 동쪽을 얻었으며, 또한 토문강 입구에 주둔하여 지켜서 높은 집에서 물병을 거꾸로 세워 놓은 듯한 형세이고, 그 경영하여 여력을 남기지 않는 것은 아시아에서 뜻을 얻고자 함이다

조선의 땅은 실로 아세아의 요충에 자리잡고 있어, 형세가 반드시 싸우는 바가 되니 조선이 위태로우면 즉 중동의 형세가 날로 급해질 것이다. 러시아가 땅을 공략하고자 하면 반드시 조선으로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아! 러시아가 이리 같은 진나라처럼 정벌에 힘을 쓴 지 3백여년, 그 처음이 구라파에 있었고, 다음에는 중아시아였고, 오늘에 이르러서는 다시 동아시아에 있어서 조선이 그 피해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즉, 오늘날 조선의 책략은 러시아를 막는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을 것이다. 러시아를 막는 책략은 무엇과 같은가? 중국과 친하고 일본과 맺고, 미국과 연결함으로써 자강을 도모할 따름이다.

중국과 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동·서·북이 러시아를 등지고 경계를 잇고 있는 것은 오직 중국뿐이다. 중국은 땅이 크고 물자가 풍부하며, 형세가 아시아주에 거하고 있다. 그런 까닭으로 천하는 러시아를 제어할 나라로는 중국만한 나라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국이 사랑하는 나라로는 또한 조선만한 나라가 없다. 조선이 우리 번속이 된지 이미 천년이 지났으되 중국은 덕으로써 편안히 지내게 하고 은혜로써 품어 줄 뿐, 한번도 그 토지와 인민을 탐내는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음은 천하가 함께 믿는 바이다. 하물며 우리의 대청은 동쪽 땅에서 제국을 일으켜, 먼저 조선을 평정하고 후에 명을 정벌해서 2백여년 동안 덕으로 소국을 사랑하고 조선은 예로써 대국을 섬겨왔다.

강희·건륭조를 당하여서는 무슨 일이든지 상문하지 않은 것이 없이 내지의 군현과 다름이 없었다. 이는 문자가 같고, 정교가 같고 정의가 친목할 뿐만 아니라, 또한 형세가 연접하여 신경(북경)을 껴안아 호위함이 마치 왼팔과 같다. 서로 휴척을 같이하고, 서로 환란을 함께 하였으나, 저 월남(베트남)의 소원과 면전(버마)의 편벽과는 본디 서로 떨어짐이 오래됨이다.

지난번 조선에서 일이 있을 때에는 중국은 어김없이 천하의 양식을 소비하고 천하의 힘을 다하여서 싸웠다. 서양의 통례에 따르면 양국이 전쟁할 때면 국외의 나라는 그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고 한편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한다. 오직 속국은 곧 이 예가 아니다. 오늘날 조선은 중국 섬기기를 마땅히 예전보다 더욱 힘써서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조선과 우리는 한 집안 같음을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대의가 밝혀지고 성원이 스스로 성해지면 러시아 사람은 그 형세가 외롭지 않음을 알고, 조금은 돌아보고 꺼림이 있을 것이다. 일본 사람은 그 힘이 대적할 수 없음을 헤아리고 가히 더불어 연결하여 화친하고자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필코 외국의 혼란은 슬며시 없어지고 나라의 근본은 더욱 견고해질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중국과 친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과 맺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중국 이외에 가장 가까운 나라는 일본이다. 옛날 선왕이 사신을 보내어 통교한 나라는 맹부에 실려 있고, 그들은 대대로 맡은 일에 충실하였다. 근일에 이르러서는 즉 북으로 이리와 호랑이가 어깨와 등을 걸쳐 타고 있어 만일 일본이 혹 땅을 잃으면 조선 팔도가 능히 스스로 보전할 수가 없을 것이다. 조선은 한번 변고가 생기면 구주·사국이 또한 일본의 차지하는 바가 되지 못할 것이다. 고로 일본과 조선은 실로 보거상의의 형세에 놓여있다.

한·조·위가 합종하자 진이 감히 동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고, 오·촉이 서로 결합하자 위가 감히 남쪽으로 침략해 오지 못하였다. 저들이 강대한 이웃 나라의 핍박으로 순치의 교분을 맺고자 하니, 조선으로서는 작은 거리낌을 버리고, 큰 계획을 도모하여야 할 것이다. 구교를 닦고 외원과 결합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훗날 양국의 윤선과 철선이 일본의 바다 위에 종횡으로 누비게 되면 외해는 절로 들어올 길이 없어질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일본과 맺어야 하는 것이다.

미국과 연결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조선을 동해로부터 가면 아메리카가 있는데 즉 합중국이 도읍한 곳이다. 그 근본은 영국에 속해 있었는데 백년 전에 화성돈(워싱턴)이란 자가 유럽사람의 학정을 받기를 원치 않고 발분 자립하여 한 나라를 독립시켰다. 이 뒤로부터 선왕의 유훈을 지켜서 예의로써 나라를 세우고 토지를 탐내지 않고, 남의 인민을 탐내지 않고, 굳이 남의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와 중국과는 조약을 맺은 지 십여년이 되었는데, 그동안 조그마한 분쟁도 없는 나라이다. 일본과의 왕례에 있어서는 통상을 권유하고 연병을 권유하고, 약속을 고칠 것을 도와주니, 이는 천하만국이 모두 알고 있는 것이다.

대개 민주국이란 공화로써 정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을 이롭게 여기지 않는다. 미국이 나라를 세운 시초는 영국의 혹독한 학정으로 말미암아 발분하여 일어났으므로 고로 항상 아시아와 친하고 유럽과는 항상 소원하였다. 그 인종은 실은 유럽과 동종이다. 그 나라의 강성함은 유럽의 여러 대지와 더불어 동·서양 둘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에 항상 약소한 자를 부조하고 공의를 유지하여, 유럽사람으로 하여금 그 악을 함부로 행할 수 없게 하였다. 그 국세는 대동양에 두루 미치고 그 상무는 호로 대동양에서 성하였다. 또한 동양이 각기 제 나라를 보전하여 편안히 거하고 무사하기를 원하였던 까닭에 그 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으로서는 마땅히 항상 만리 대양에 사절을 보내서 그들과 더불어 수호해야 할 것이다. 하물며 그들이 연달아 사신을 보내어 조선과의 연결을 유지하려는 뜻이 있음에랴! 우방의 나라로 끌어들이면 가히 구원을 얻고, 가히 화를 풀 수 있다. 이것이 미국에 연결해야 하는 까닭이다.

무릇, 중국과 친하는 것은 조선의 믿는 바이요, 일본과 맺는 것은 조선이 장차 믿고, 장자 의심할 것이다. 미국과 연결하는 것은 즉 조선이 심히 의심할 것이다.

                                                                                         - 황준헌, 조선책략  -

사료분석 : 러시아의 남하정책에 대비하기 위한 조선·일본·청 등 동양 3국의 외교정책에 대해 서술한 책.

1880년경 일본 주재 청국공사관 참찬관인 황준원이 지은 것으로, 원래의 제목은 〈사의조선책략 〉입니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한 조선의 외교정책에 대한 서술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황쭌셴은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경계하고, 조선이 이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친중국하고 결일본이며 연미국하여 자체의 자강을 도모해야 러시아의 침입을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요. 친중국의 이유는 중국이 물질이나 형세에서 러시아를 능가하고, 조선은 중국의 번속국으로 1,000년이라는 세월을 지내왔기 때문에 금일에도 더욱 우호를 증대하여 러시아를 공동으로 방어해야 한다는 것이입니다. 일본은 조선이 중국 이외에 수호한 유일한 국가이기 때문에 서로 결합해야 하며, 미국은 독립정신이 남아 있는 민주국가로서 약소국을 돕고 서양의 침략적인 악행을 막아주고 있으니 비록 조선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연합하면 화를 면할 것이라는 주장이지요.

그는 중국이나 일본도 선진국 세력에 적대하고서는 국가의 안위가 위태롭기 때문에 개국한 것이므로, 조선의 쇄국정책도 끝까지 고수하기는 어려울 것이며 대외세력의 방어에 자신이 없으면 개국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중국·일본·미국과의 연합이 이루어지면, 곧바로 중국과 일본에 학생을 파견하여 병기제조·군대편성·외국어교육과 천문·화학 등 서구의 여러 학문을 습득하게 하는 한편, 부산 등지에 학교를 세워 서구의 기술을 교육하고 무기를 구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은 친중국·결일본·연미국의 외교정책은 서구의 침략으로부터 무사할 때에 공평한 조약을 맺게 해주며, 통상에도 이익을 가져다주고, 국가 부의 축적 및 군비강화에도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므로, 결국 조선이 자강하는 기초가 될 것이라는 겁니다.. 1880년(고종 17)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던 김홍집이 청국 공관을 왕래하면서 외교정책에 관해 황쭌셴과 의견을 교환하고, 귀국하는 길에 이 책을 얻어와 고종에게 이 책을 바치게 되는데 이에 대하여 조선정부에서는 찬반 논의가 격렬하게 전개되었고, 특히 위정척사론을 기반으로 하는 유생들은 이듬해 영남유생 이만손 등이 주동이 되어 〈영남만인소〉를 올려 김홍집 일파를 탄핵하게 됩니다.

. 여기에서 이만손 등은 〈조선책략〉이 패륜망덕한 불온문서라고 단정하고 그 8대불가론을 제시합니다. 즉, 이 책은 조선에 개화와 척사라는 큰 화두를 던져 주었으며, 조선 개화정책의 지침서 역할을 하는 중요한 사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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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조선책략 반대상소_홍재학

    대개 서양의 학문은 천리를 어지럽히고 기강을 소멸시킴이 심하다는 것을 다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서양의 물건은 대부분 음탕하고 욕심을 유도하며, 유교 윤리를 깨뜨리고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히며, 천지를 거역하는 것들입니다. 서양의 학문과 물건은 귀로 들으면 창자가 뒤틀리고 수컷이 다른 것으로 바뀌며 눈으로 보면 창자가 꼬이고 위가 뒤집히며, 코로 냄새를 맡고 입술로 그것에 닿게 하면 마음이 변하여 실성하게 되니 이는 곧 그림자가 서로 부딪치고 전염성이 서로 감영되는 것과 같으며, 그 사람의 좋고 싫음이 향배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상을 받들지 않는다 해도 예수교의 책을 읽게되면 성인에게 죄를 얻는 시작입니다. 전하의 백성들의 과연 귀와 눈과 코와 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라 안의 실정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 홍재학의 상소  -

사료분석 : 조선책략유포와 개화정책실시에 대한 반대에 대한 상소문입니다. 홍재학은 이 상소에서 국왕까지 규탄하였으므로 체포되어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의 형을 받고 가산은 몰수되었습니다. 내용중 보면 '어떠한 군주가 되겠습니까'라는 식의 왕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지요.. 이 사료 역시 최익현의 5불가론이나 영남만인소에 있던 내용과 비슷하니, 그 쪽 사료를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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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