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톨이와 새싹이의 플래시 퀴즈 5회

오늘은  20문항이고,  범위는 <중국사 일반 상식 퀴즈> 랍니다.

난이도는 중, 고등학교 세계사 수준의 중국사 퀴즈입니다.

어려운 것 2개, 매우 쉬운 것 2개도 넣었답니다.

그럼 신나게 출발해 볼까요?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TAG 중국사


출처 : http://school.kerinet.re.kr/teach/

교육용으로만 활용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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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중국사

  이번 사조영웅전은 많은 기대를 모았던 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필자 의 경우, 이번 한 해 동안 김용의 무협소설들을 처음 읽기 시작해 무협의 매력에 푹 빠지기 시작할 무렵 사조영웅전 2008이 나왔기 때문에 나 역시 많은 기대를 했으며 한 화 한 화 재미있게 지켜보았다. 개인적으로 중앙유라시아에 지대한 관심이 있기 때문에 푸른 몽골 초원에서 말을 타고 달리다가 독수리를 향해 활을 겨누는[각주:1] 호가(胡歌, 곽정 役)가 무척이나 멋졌다.
  물론 최신작인 만큼 우아한 영상미를 자랑했던 사조영웅전이지만,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거나 눈살을 찌푸리는 장면이 몇몇 있었다. 감독을 비롯한 스태프들과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는 나 역시 탓하고 싶은 부분은 아니지만, 이러한 부분은 조그마한 노력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었지 않나 싶다. 개인적으로 아쉬웠던 몇몇 이야기를 잠시 소개해보고자 한다. 

들어가기 전에. 몽골인들의 중국에 대한 인식, 그리고 중국인들의 몽골에 대한 인식
  우선 계절별 이동을 통해 유목을 하는 몽골인에 입장에서 본다면 중국의 농토는 허허벌판(?)이나 다름이 없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 원사元史에서 보면 중국을 점령한 몽골인들이 중국은 유목을 하기에 적당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많아 쓸데가 없으므로 논밭을 없애 초지草地로 만들고, 사람들을 노예로 삼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각주:2]
  또한 유목을 통해 가축으로부터 우유, 유제품, 고기를 얻어먹는 몽골인들은 “가축은 풀을 먹고, 사람은 가축을 먹는데, 사람이 어찌 가축이 먹는 풀을 먹는단 말인가?”라고 하며, 대체적으로 채식을 하는 정주定住 농경민들을 매우 경시輕視하였다.[각주:3]

  중국인들의 경우에도 중국인들의 몽골초원에 대한 평가는 그리 후하지 못하다. 흔히 여러 역사서에서는 몽골 초원을 “막북漠北”으로 표기하여 “(고비) 사막의 북쪽”으로써 인식하였다. 이러한 중국인들의 표기는 현대에 들어 더 박해지는데, 이미 대만에서 정치적인 이유로 『대막大漠영웅전』으로 출판된 김용의 『사조영웅전』의 예例나, 「사조영웅전 2008」에서도 곽정이 몽골초원을 계속 “대막大漠”이라고 한 것을 보면, 이젠 사막의 북쪽이 아니라, 아예 몽골초원 자체를 사막으로 인식하는 모양이다.
  중국인들의 몽골인들에 대한 평가도 역시 후할 수 없는데, 몽골인들은 중국인들이 이야기 하는 북적北狄의 일부였다. 또한 중국인들은 이러한 북방 유목민들을 ‘사람의 탈을 쓰고 있는 예禮를 모르는 짐승’에 불과하다고 하였는데, 흉노匈奴시절부터 ‘젊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먼저 먹고, 노인들이 남은 것을 먹는다.’라고 하며 예를 모르는(?) 이들을 매우 천시하였다.[각주:4]

 

1. 몽골인들이 남송을 침략한 것은 남송이 금수강산이기 때문?
  곽정, 황용과 함께 황궁으로 숨어들은 구지신개 홍칠공 with 주백통. 홍칠공은 황제의 요리를 훔쳐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조영웅전 2008」에서는 냄새만 맡고도 음식의 이름을 알아맞히는 엄청난 신공神功을 보이시는데, 몽골의 양 요리가 준비될 무렵, 홍칠공은 몹시 못마땅한 모양이다.

"몽고 요리가 맛나긴 하지만, 옛날에 칭기스 칸이 우리 대송과 동맹을 맺은 건 
우리 대송이 풍요롭게 뵈니까 침흘린 게야. 시커먼 속이 뻔해."
by 중국딱지님 번역, 엽고성님 싱크

  앞서 몽골인들의 중국에 대한 인식에서 언급했듯이, 몽골인들이 남송을 친 것은 남송이 금수강산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쓸데없는 땅을 친 것은 칸위汗位를 유지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을 뿐이었다. 예전에 어른들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이유가 ‘우리나라가 금수강산이었기 때문’이라고 배운 모양인데, 그러한 어리석은 이야기가 여기서 또 한 번 재현되리라고는 상상 조차 하지 못했다.

 

2. WWE 슈퍼스타 테무친

자이언트 스윙을 시전 중인 칭기스 칸

  역시, 칭기스 칸이 잠든 유럽대륙을 깨운 까닭은 동서고금을 막론하였기 때문인 걸까? 화려한 중국의 권법에, 프로레슬링의 자이언트 스윙, 드롭킥까지 포섭한 그의 무공은 과연 고금에 유래를 찾아볼 수가 없다.
  원래 테무친이 그의 안다(의형제)였던 자무카와 대립하게 된 데에는 테무친이 칸이 되리라는 샤먼의 신탁과 더불어 많은 까닭이 있다. 결국 테무친을 배신한 자무카는 피를 쏟지 않는 ‘명예로운 죽음’을 당하게 되지만, 죽기 전까지 그들이 직접 주먹으로 치고 박은 것은 아니다. 김용의 원작 『사조영웅전』에서도 많은 기병을 거느리고 싸우는 테무친과 자무카를 볼 수 있는데, 「사조영웅전 2008」에서는 마치 이 둘의 싸움이 천하제일무술대회를 연상케 했다.

Please, DON'T TRY THIS



3. 몽골의 주력은 보병?

곽정 : 쟤넨 뭐하지?


병사들 : 우와아아아아아아!!

병사들 : 우와......(....)

곽정 : 아 씁(...)


  이건 좀 해도 해도 너무하다고 생각한다. 몽골인들의 드넓은 세계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기병의 빠른 기동력을 살리기 위한 많은 수의 말들과 건조한 고기 “보르츠” 때문이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유독 「사조영웅전 2008」에선 몽골병들이 말을 타질 않는다! 그 때문일까? 유독 이번 사조영웅전에서 곽정은 유독 금金과 호레즘샤 연합군에게 무척이나 많은 패배를 겪으면서 애를 먹는다.
  현재에서도 몽골에선 유목을 하는 가정이라면 반드시 한 마리의 말은 있어야 한다. 초원에 양과 염소 등의 가축을 방목하는 몽골인들에겐 더 많은 가축을 돌보기 위해서는 말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몽골인들은 말을 가축 돌보는 일 이외에도 다른 집을 방문할 때나 놀러갈 때도 많이 쓰이는데, 이러한 몽골인들의 풍습은 “세 걸음 이상은 말(을 탄다)”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각주:5]이다. 하자노프의 저서에서 마이스끼(학자이름)은 20세기 초 몽골족 5인 가정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14마리 정도의 말이 필요하며, 그 외에도 기타 가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각주:6] 

  막상 쓰고 보니까 욕만 잔뜩 적어놓은 것 같은데, 사실 무척 재미있게 보았던 작품이다. 몇몇 어처구니가 없는 부분만 모아서 소개한 것이니 너무 나무라지 말았으면 한다.
  요즘 몽골 등지를 포함한 중앙유라시아에 대한 관심과 인가가 매우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하지만 그 인기에 부합할 만한 적당한 교양저서나 지식이 없다는 것이 몹시 안타깝다. 나 역시 정작 이러한 안타까움을 이야기하면서, 쓸모없는 자료를 하나 더 만드는 것이 아닐까라는 우려가 앞서지 않을 수 없다.


- 참고문헌 & 소개
  박원길 저, 『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 민속원, 1999.
   : 아마 몽골의 유목에 대해 다룬 책 중에선 최고가 아닐듯 싶다.
     다만, 책이 나온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각종 통계치는 신용할 수 없다.

  공재성 외 저, 『하늘과 맞다은 바람의 나라 몽골』, 이른아침, 2008.
   : MBC의 다큐멘터리와 함께 나온 책. 사진도 많이 들어있어 쉽게쉽게 읽을 수 있다.
 
    다큐멘터리와 함께 본다면 금상첨화. 
  하자노프 저, 김호동 역, 『유목사회의 구조 : 역사인류학적 접근』, 지식산업사, 2000.
   : 1990년에 나왔던 초판을 이번에 새로이 찍어낸 것이기 때문에 1990년 판과 다를 것이 없다.
     학술서적이기 때문에 인류학이나 유목에 대한 지식이 없는 분들에게는 별로 권해드리고 싶지 않다.
     학술서로써는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이지만, 교양서적으로써는 글쎄.
  1. 독수리를 쏜 영웅射雕英雄은 주인공 곽정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2. 이는 김용의 무협소설 의천도룡기에서도 언급되기도 한다. 당시 몽골인들은 토지, 곡물, 물품 등에 세금을 매긴다는 인식 자체가 없었는데, 거란 출신의 재상 야율초재耶律楚材는 이러한 사실을 몽골인들에게 깨우쳐주는 한편, 농토의 초지화를 막는데 큰 역할을 했다. [본문으로]
  3. 박원길 저, 『몽골의 문화와 자연지리』, 민속원, 1999. p. 121 [본문으로]
  4. 잠시 유목민들의 편을 들어보자면, 초원에서 부족의 형태로 널리 퍼져있는 초원의 유목민들에겐 부족 간의 항쟁이란 매우 빈번한 일이었다. 또한 부족한 물자를 보충하기 위해 주변 정주 사회를 약탈하곤 하였으므로, 초원의 유목민들에겐 항상 싸움에 대한 준비가 갖추어져야만 했던 것이다. [본문으로]
  5. 공재성 외 저, 『하늘과 맞다은 바람의 나라 몽골』, 이른아침, 2008. 참고 [본문으로]
  6. 하자노프 저, 김호동 역, 『유목사회의 구조 : 역사인류학적 접근』, 지식산업사, 2000. p. 64 [본문으로]
Posted by 비회원

12) 제2차세계대전 이후의 중국
  중일 전쟁이 끝나자 공산당과 국민당은 다시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이를 국공내전(國共內戰)이라고 하는데, 국민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던 공산당이 국민당에게 승리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고 마오쩌둥의 공산당의 영향력은 전 중국 대륙에 미쳤다(1949). 드디어 중국에는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하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 인민 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정권을 잡은 중국 공산당은 개혁에 나섰다. 그동안 중국 전체에 만연해 있던 전근대적(前近代的, 혹은 봉건적封建的) 지주제를 폐지했으며, 관료들의 패단과 부정부패를 엄정히 단속하여 없앴다. 또한 중국 농촌의 사회. 생활 및 행정 조직의 기초 단위였던 인민 공사(人民公社)를 설립(1958)하고 1950년대 말 경제 성장을 위한 대약진 운동을 펼쳤다.(* Tip : 본래 중국은 소련식으로 산업화를 시도였으나 매번 실패한 경험이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은 스스로 새로운 경제 개발 방안을 찾아야만 했는데, 그 결과 창안된 것이 대약진 운동이었다. 이를 계기로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소원해졌으며, 공산당의 무리한 추진은 많은 인민을 굶주리게 하였다.)
  1960년대 초 중국과 소련은 이념적으로 불화를 겪었으며(중소 이념 분쟁), 소련은 그동안 지원해왔던 중국의 원조를 끊어버렸다. 대약진 운동 역시 결국 실패하였으며, 그와 겹쳐 자연 자해가 일어나면서 중국은 경제적으로 곤란한 상황을 겪게 되었다. 또한 덩샤오핑은「흑묘백묘론(黑苗白描論 :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경제)만 잘 잡으면 된다는 이론)」을 통해 실용주의 노선을 표방하며 마오쩌둥을 비판하였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자연 재해, 정치적 고립은 마오쩌둥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는 10년간의 문화대혁명(1966~1976)을 통해 그동안 중국을 지배해왔던 전통을 사그리 몰아내고,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문화대혁명의 주역은 그의 팬클럽이었던 홍위병이었는데 마오쩌둥은 이들을 통해 문화재를 파괴하고 전통사상을 근절하였다. 그 결과 마오쩌둥만의 공산주의 체제가 확립되었다.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정권을 잡은 것은 마오쩌둥의 오랜 전우 덩샤오핑이었다. 그는 예전에 「흑묘백묘론」을 주장했던 것처럼 실용주의자였으며, 이는 그의 개혁, 개방 정책을 통해 잘 드러났다. 그는 사회주의체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자본주의적 시장 경제 요소를 도입했다(사회주의 시장경제). 시장 경제를 도입함으로써 중국은 점차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자유 경쟁은 곧 정치적인 민주화는 아니었다. 개혁, 개방과 더불어 베이징 시민, 대학생을 중심으로 중국인들은 사상해방, 언론자유, 개인의 자유, 법치, 민주화 등을 주장하였지만, 정부는 이들을 무력으로 무참히 진압하였다. 중국 당국은 경제를 개혁할 마음은 있었지만, 정치 개혁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천안문사태, 1989)

Tip. 중국현대사의 흐름
국공내전 - 중화인민공화국 - 대약진운동 - 중소이념분쟁 - 덩샤오핑 흑묘백묘론 - 문화대혁명 - 개혁개방 - 천안문사태


드디어 중국사가 끝났습니다.

앞으로는 유럽사를 연재할 생각입니다.

Posted by 비회원

① 5.4 운동
  임시총통에 앉은 위안스카이는 혁명 등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권력을 혼자 독차지하려고 하였다(위안스카이의 반동). 이를 위해 위안스카이는 중국에게 불리한 21개조 요구를 수용하면서 중국인들에게 많은 원성을 샀다.(Tip. 21개조 요구 : 그동안 독일이 누리던 이권을 일본에게 넘기고, 일본이 중국에 일본의 영향력을 늘리는 조항들을 요구함.)
  서구의 영향을 받으면서 중국에서는 지식인들이 신문화운동을 통해 중국에 팽배했던 유교적 인습 등을 비판하고 합리적인 사상을 수용을 주장하였다. 루쉰 등의 계몽사업과 백화문체가 보급된 것도 이 때이다. 신문화운동은 훗날 5.4운동의 정신적인 기반이 되었다.
  5.4운동은 위안스카이가 굴욕적인 21개조 요구를 수용하고 산둥반도를 일본에게 넘기자, 분노한 베이징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중국인들이 크게 일어난 사건이다. 과거 한국에서 행해졌던 거국적인 3.1운동은 중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심어주어, 5.4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5.4운동의 참가자들은 21개조 요구를 철폐와 산둥반도의 반환, 군벌 타도, 반일을 주장하였다. 운동은 날로 커져 전국적인 대중운동으로까지 확장되었다. 5.4운동을 통해 국민당과 공산당은 그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② 국민혁명과 항일전쟁
  5.4운동으로 기반이 다져진 국민당을 이끄는 쑨원은 삼민주의에 의거하여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를 표방하였으며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연소용공(聯蘇用共 : 소련과 연합하고 공산당을 이용함) 정책을 통해 공산당과의 연합을 꾀하였다. 당시 국민당은 베이징의 군벌과 대립을 하고 있었으므로, 국민당과 공산당은 서로 합작하여 군벌을 토벌하기 위해 나선다(1차 국공합작, 1924). 쑨원 사후에 국민혁명은 장제스가 이어받았으며 국민혁명군은 북진하여 난징, 상하이를 점령하였다. 북진 과정에서 끊임없는 좌우대립으로 결국 1차 국공합작은 해체되었다(1927). 장제스는 국공합작이 분열된 이후에도 북진하여 베이징을 점령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국민혁명을 완성시켰다(1928).
  자본가들과 결탁한 국민당은 부패해갔으며 그 결과 민중의 지지를 상실해갔다. 반면 공산당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가기 시작했으며, 농촌 등을 거점으로 개혁 세력을 확보하면서 소비에트 임시 정부를 일으켰다. 점차 공산당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국민당은 공산당을 공격하였으며 이를 피하기 위해 마오쩌둥은 대장정을 단행하게 되었다. 대장정 기간 동안 공산당은 농사 등을 거두는 등의 일을 통해 더욱 국민들의 지지를 공고히 할 수 있었으며, 반면 가는 곳마다 약탈 등을 일삼았던 국민당은 국민들에게 불만을 샀다.
  일본 제국주의의 마수가 뻗쳐오자 많은 중국인들은 이에 불만을 품었다. 일본은 만주에 있던 철도를 폭파하는 자작극을 만들었고(류타오거우 사건), 이를 통해 만주로 군대를 이동할 구실을 얻었다.
일본은 무력을 동원하여 만주지역을 점령하고 그 자리에 만주국(滿洲國)이라는 괴뢰국을 세워 청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다시 만주국의 황제로 앉혔다.(만주사변, 1931 / Tip. 괴뢰국 : 괴뢰정권은 국내 정치세력이 자주성이 없고, 외국에 영향력에 의해 지배되는 정권이다. 이러한 정치형태를 띠고 있는 나라를 괴뢰국이라고 한다.) 만주사변으로 중국의 항일감정은 극에 달했으나 국민당은 여전히 공산당의 홍군(紅軍)을 토벌하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공산당은 국민당과 손잡고 항일전선을 구성하려고 하였으나 장제스가 단숨에 거절하는 바람에 실패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긴박해짐에 따라 장쉐량이 장제스를 시안에서 가두고 공산당과 협력하여 항일전쟁을 수행할 것을 제안하였다(시안사건, 1936). 장제스는 이에 공산당과의 합작을 재고(再考)하여 토의를 통해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공산당을 인정하고 다시 한 번 손을 잡게 되었다.(제2차 국공합작, 1937)

Posted by 비회원

  우리는 이러한 화장지 없는 삶을 하루도 상상할 수가 없으며, 요즘은 많이들 비데로 교체하고 있지만, 여전히 화장지의 수요는 폭발적이다. 그만큼 화장지는 우리 생활에 필수품이며 사람들은 화장지의 유용함을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숱한 종이의 역사를 서술한 많은 연구 자료에서는 이 귀중하고 또 귀중한 화장지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성과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 화장지는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아마 적어도 중국에선 6세기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종이로 뒤를 해결(?!)한다는 것에 대해 처음 언급한 사람은 육조시대六朝時代[각주:1]의 지식인 안지추顔之推(531 ~ 591)[각주:2]였다.

“종이에는 오경五經이나 선현先賢들의 문장, 혹은 각주가 씌어있기 마련인데, 나는 감히 그것을 뒤를 닦는데 사용할 수 없다."
“Paper on which there are quotations or commentaries from Five Classics or the names of sages, I dare not use for toilet purposes.”
 

  안지추의 말을 들어보면 아마 뒤를 닦는데 사용한 종이는 이면지이거나 재활용 종이였던 모양이다. 종이가 발명된 이래, 중국에서 종이는 글을 기록하는데 아주 중요한 수단이었다.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책이 널리 팔리는 것은 지역경제가 발달한 송대宋代[각주:3] 이후지만, 이 시절에도 여러 용도(?)를 위해 이래저래 종이를 구한 모양이다. 

  그 외에도 또 다른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화장지는 그 이후에도 계속 사용되어 명 홍무제洪武帝 시대(1368 ~ 1398)에까지 이르게 된다. 1393년 홍무제는 황궁 전체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값싼 벼의 깔대로 화장지를 만들도록 하였는데, 그 수가 720000 장에 이른다고 한다. 그 중 15000장은 오로지 황제의 가족들을 위해 만들어졌는데, 옅은 노란색에 향기가 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제는 뒤만을 닦기 위한 화장지 그 자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띠는 것은 황실皇室만의 독특하고 구별된 화장지의 사용이다. 노란색은 황제를 상징하는 것으로, 향 등을 첨부하여 궁궐에서 흔히 사용되는 여타 화장지들과 차별을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장지는 아주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써왔을 것으로 보인다. 종이를 최초로 발명해낸 국가답게 정말 여러모로 종이를 활용하고 있었다. 화장지에 대한 이야기가 다소 우스울지도 모르겠으나, 그만큼 중국에선 종이를 언제든지 접할 수 있는 친숙한 것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참고문헌>
- 영문 위키피디아 검색 "Paper"

  1. 양자강 이남에 있던 강남정권이 들어선 시대를 말한다. 강남정권이란 삼국시대의 오吳와 사마씨에 의해 통일되었다가 이민족의 침입으로 남하한 동진東晉, 그리고 그 뒤를 있는 송宋, 제齊, 양梁, 진陳이다. [본문으로]
  2. 육조시대의 지식인. 노장사상을 배척하고 불교에 호의를 나타내며, 유불의 조화를 중시하였다. 당대의 경험과 지식을 두루 갖춘 최고의 지식인으로 손꼽는다. 그는 가족과 가정도덕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대표적인 저서로는 『안씨가훈顔氏家訓』이 있다. [본문으로]
  3. 이는 앞서 언급한 육조시대의 송과는 다른 별개의 왕조다. 조광윤이 5대 10국의 혼란을 평정하고 960년에 건국하였다. [본문으로]
Posted by 비회원

10) 중국의 근대화
 ① 아편전쟁(1840 ~ 1860)
  중국을 처음으로 개항시킨 것은 영국이었다. 원래 영국은 중국과 오랫동안 교역해오던 나라로, 주로 공행을 통해 차를 수입해가곤 하였다. 영국은 일방적인 구매자의 위치에 불과하였으며 영국은 줄곧 이러한 처지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영국은 식민지였던 인도에 면직물을 팔고 인도에선 아편을 재배하여 청에 팔았는데, 이러한 형태의 무역을 삼각무역이라 한다. 삼각무역에서 아편을 떠받은 청에서는 국민의 건강이 침해당하고, 경제가 악화되는 등의 폐해가 나타났다. 결국 영국과 청은 마찰을 빗게 되어 전쟁까지 이르게 되었다. 1차 아편전쟁은 청 관료였던 임칙서가 아편을 몰수하고, 통상을 금지시키자 영국이 무력으로 침략하면서 일어났다. 전쟁은 화포가 발달한 영국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였으며, 영국과 청간에 난징조약이 맺어지면서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난징조약은 중국이 맺은 최초의 불평등 조약으로 홍콩을 할양하고 상하이 등의 5개의 항구를 개항하였으며, 치외법권과 아편전쟁의 배상금을 물어준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아편전쟁의 패배와 난징조약에도 청은 공행무역을 유지하였으며, 밀수선이었던 애로호의 영국 국기를 훼손하고, 프랑스의 선교사가 중국에서 피살되는 등 국제적인 문제를 야기했다. 이로 인해 2차 아편전쟁이 일어났으며, 위협만 했었던 1차 아편전쟁과는 달리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이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2차 아편전쟁의 결과 텐진 조약과 베이징 조약이 맺어졌으며, 이는 외국 공관의 베이징 주재를 인정하고, 크리스트교의 포교를 허용했으며, 아편 무역이 실질적으로 공인되었다. 텐진 조약과 베이징 조약을 중재한 러시아에게도 연해주가 돌아갔다.

 ②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 1850 ~ 1864)
  아편전쟁의 패배는 청 왕조의 권위가 하락된 것을 증명했을 뿐더러, 청조는 전쟁 배상금을 물기 위해 농민들을 대상으로 과중하게 조세를 징수하였다. 또한 물가가 폭등하여 농민 생활이 궁핍해지면서 농민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이에 청조에 불만을 품고 있던 홍수전은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아 상제회(上帝會)를 조직하였다. 홍수전은 멸만흥한(滅亡興漢 : 만주족을 멸망시키고, 한족을 부흥시킴)의 슬로건을 내걸었고, 토지 균분제인 천조전무제(天朝田畝制) 주장하였다. 이외에도 남녀평등, 전족 금지의 근대적인 사상을 주장하면서 농민들을 모아 난징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러한 농민 봉기도 결국 같은 한족이었던 향용(향촌 의용대)을 조직한 지주들과 서구 열강의 공격을 받아 결국 실패하였다.

 ③ 양무운동(洋武運動)
  태평천국운동을 성공적으로 진압한 한족들은 새로운 지배층으로 나타났다. 이렇게 출세한 이홍장, 증국번 등의 한인 관료들은 부국강병을 위해 서양의 과학기술과 군사기술을 받아드릴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양무운동은 중체서용(中體西用 : 중국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과학, 군사기술만을 수용함)을 근본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양무운동은 얼마가지 않아 조선에서 벌어진 청일전쟁(1894)에서 청이 패배하면서 한계가 드러나게 되어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 이야깃거리 : 청나라 군대는 그 전부터 부패의 도가 지나쳐 군수물자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였다. 청일전쟁에서 주로 일본군과 싸웠던 군대는 이홍장이 거느리던 부대로 결국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패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앞서 말한 것처럼 대포의 화약을 빼돌리고 거기다 모래를 넣는 등의 비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④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
  양무운동의 실패로 청나라는 개혁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여야 했다. 또한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패배하여 그 정체가 종이호랑이임이 밝혀져 일본과 서구 열강에게 끊임없이 영토를 분할하고 이권을 침탈당하여야 했다. 캉 유웨이, 량치차오 등의 공양학파 출신의 개혁가들은 양무운동의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에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하는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시행하고자 했다. 이들은 입헌 군주제, 의회 설치 등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변법자강운동 역시 서태후 등의 보수세력의 방해로 결국 실패로 그쳤다.

⑤ 의화단 운동
  청일전쟁 이후 서구가 중국의 영토를 분할하고 이권을 침탈하였으며, 이런 상황에서 크리스트교 전파는 많은 중국인들의 불만을 샀다. 백련교도(* Tip. 백련교 : 남송 이후 중국에 전해내려오는 민중종교. 남송 이후 많은 농민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를 중심으로 조직된 의화단은 비밀결사였으며, 부청멸양(附淸滅洋 : 청을 도와 서양을 없앰)의 구호를 내걸고 철도 파괴, 방화 등을 통해 서양에 대항하였다. 의화단은 자체적으로 권각법(拳脚法 : 권법拳法 + 각법脚法)과 병법(兵法)을 교육하여 외세를 쫒아내고자 하였으나, 서구 열강들이 먼저 연합군을 구성하여 베이징을 함락시켰다. 청과 서구는 신축조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은 서양군대의 베이징 주둔, 배상금 지불 등이었다.

 ⑥ 신해혁명
  잇따른 개혁에 실패하고 태평천국운동, 백련교도 등에게 위협을 느낀 보수 세력 역시 개혁을 꾀하게 되었다. 광서 신정이라 불리는 이 개혁은 입헌군주제 채택, 과거제 폐지 등을 내세웠으나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쑨원은 민중으로부터 개혁을 꾀하여 중국 혁명 동맹회를 결성하고 삼민주의( * Tip. 삼민주의 : 민족民族(멸망흥한), 민권民權(공화주의), 민생民生(토지분배))를 주창하였다. 당시 청나라는 서구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으며, 이를 갚기 위해 민간철도를 국유화하여 이를 서구에 넘기려고 하였다. 중국인들은 청나라 정부의 조치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또한 우창에서는 신식 군대였던 신군(新軍)이 봉기하여 중국의 여러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로 인해 우창봉기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혁명은 중국전역에 확산되기에 이른다. 신해혁명을 통해 중국에선 아시아 최초의 공화정인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다급한 청은 위안스카이를 사신으로 보내 쑨원과 협상을 하였으나 쑨원이 위안스카이를 잘 구슬려 임시총통으로 앉히면서 청나라는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Tip. 각종 구호들
태평천국운동 : 멸만흥한
양무운동 : 중체서용
의화단 : 부청멸양
신해혁명 : 멸망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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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위 진 남북조(魏晉南北朝 220 ~ 589)
  황건적의 난으로 멸망한 후한이 여러 제후들로 인해 분열되었다가, 적벽대전 이후로 크게 삼국(위魏 촉蜀 오吳)으로 나뉘었다. 이후 소설로 유명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와 같은 100년간의 전쟁이 있었고, 사마의의 손자였던 사마염이 통일하여 진(晉)을 건국하였다(AD 280, 이를 서진西晉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진의 통일도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으며, 한족(漢族)은 북방민족이었던 흉노에게 멸망한 뒤, 양쯔강 이남으로 쫓겨 내려가게 되었다. 남북조는 북방의 유목민의 왕조와 강남으로 쫓겨간 한족이 세운 왕조가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일컫는다.
  유목민이 차지한 화북지역은 흉노 이외에도 5가지 민족(흉노, 선비, 갈, 저, 강)에 의해 16개의 국가가 생겨났는데, 다섯 개의 이민족이 16개의 국가를 세웠다고 하여 5호 16국이라고 한다. 5호 16국을 통일한 것은 선비의 북위(北魏)였다(AD 439). 화북을 통일한 북위는 효문제 때 호족의 토지 비대를 막기 위한 균전제와 적극적인 한화정책(漢化政策)을 폈다. 그 결과 북위의 유목민족은 한족 문화에 동화되어 거의 한족화(漢族化)가 이루어졌다. 훗날 수(隋)와 당(唐)을 건국한 사람들도 이곳의 군벌 세력 중 하나였다.
  강남으로 쫓겨간 한족(漢族) 또한 동진, 송, 제, 양, 진의 네 왕조를 거쳤다. 원래 강남은 늪지로 이루어진 곳이 많았기 때문에 불모지와 같았으나, 남북조 시대 이후로는 남하한 한족들에 의해 개발되어 산업이 발달하고 벼농사를 짓기 시작해 인구도 증가하였다.
  남조의 인재 등용은 한의 향거리선제를 보완한 9품 중정제를 시행하였다. 9품 중정제는 지방에 중정관을 파견하여 참신한 인재를 선발하고, 호족을 견제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의도와는 반대로 호족이 문벌귀족(門閥貴族)이 되어 오히려 9품 중정제를 통해 관직을 세습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호족은 빈곤한 농민의 토지를 고리대를 이용해 빼앗거나, 불법으로 겸병하여 대토지를 소유하여 권위를 더해갔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여러 왕조들은 귀족의 대토지 소유를 막고 농민을 구제하려는 정책을 내놓았으나 매번 실패하였다.

Tip. 호족의 대토지 소유 억제 및 농민 구제책
위: 둔전법 / 서진 : 점전제, 과전법 / 북위 : 균전제 / 서위 : 균전제

  위진남북조 시대에는 과거 한나라 때 수입되었던, 불교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유목민족과 한족 모두 불교를 보호하고 발전시켰다. 비단길 부근(둔황, 원강, 룽먼)에 석굴사원이 세워진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대에 등장한 문벌귀족으로 인해 지극히 귀족적인 문화가 발달하였는데,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歸去來辭)’나 4.6 변려체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도교 역시 북위의 구겸지나 진의 죽림 7현의 청담사상(淸淡思想)을 통해 맥을 이어갔다.

 * Tip(추가사항).
  귀족적인 문화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체, ~ 형식의 문화가 발전기 마련이다. 훗날 서민문화, 대중문화가 발전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꺼리김 없는 친근한 표현이 특징이지 않은가?

 6) 수, 당(隨 AD 589 ~ 618, 唐 AD 618 ~ 907)
  긴 분열의 시대는 북위의 군벌 출신이었던 양씨 가문에 의해 수나라로 통일이 되면서 끝났다. 중국을 통일한 문제(文帝)는 중국 최초로 선거제(選擧制)라는 최초의 과거제도를 시행하였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煬帝)는 대운하와 같은 무리한 토목사업과 무리한 대외원정 등으로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하였고, 이것이 농민의 원성을 사서 2대 만에 단명한 왕조가 되었다.
  수의 뒤를 이은 것은 양씨 가문의 외척이었던 군벌 이연(李淵)이였다. 그러므로 당의 전체적인 제도와 관료 등용제도인 과거제와 같은 정책들은 거의 모두 수를 따랐다. 중국의 최고 명군(名君)으로 추앙받고 있는 당 태종(太宗)의 치적(治積)은 ‘정관의 치’라고 불린다. 그 외에도 주변의 유목민족이었던 토번, 돌궐, 위구르를 복속(?)시켜 내외의 안정을 꾀했다. 또한 현종도 ‘개원의 치’라고 불리는 위대한 치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훗날 양귀비와의 관계로 인해 정치가 소홀해지고, 절도사를 파견하여 지방 세력의 힘을 실어주는 등의 실정(失政)을 행해 현종 말년의 혼란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현종 말에 터진 것이 ‘안사의 난(755)’이다. 안사의 난으로 인해서, 그동안 당나라를 떠받쳐왔던 율령, 균전제 등이 붕괴하였다. 안사의 난이 몰고 온 여파는 상당한 것이어서, 안사의 난 이전의 당나라와 이후의 당나라는 큰 차이가 나게 된다. 그것에 대해선 뒤에서 자세하게 설명하겠다. 하여튼 당은 안사의 난으로 생기게 된 사회적 혼란은 황소의 난과 같은 농민 반란에 의해 몰락하게 되었다.
  당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문벌귀족이 지배하는 귀족적인 사회였다. 과거를 봐서 인재를 등용했기 때문에 능력이 존중되는 사회였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과거는 문벌 귀족 출신의 자제가 더 높은 관직에 올라가는 등용문이 되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당이 탈라스 전투(751)로 비단길을 상실하기 전까지는 비단길을 통한 육상 무역이 발달하였으나, 탈라스 전투 이후로는 바닷길을 통한 해상무역을 주로 하게 되었다. 주 교역품 역시 비단에서 도자기로 바뀐 것도 해상무역의 발달을 촉진하였다. 이로 인해 많은 동서양 문물이 오가게 되었으며, 당나라에서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이슬람, 네스토리우스교와 같은 외래종교가 정착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외국풍이 유행하는 국제적인 분위기의 사회가 만들어져갔다. 대운하의 이득을 본 것은 수가 아니라 오히려 당이었는데, 당은 대운하를 통해 강남과 강북 지방의 물자가 이동하였기 때문에, 상업과 도시가 발달하였다.
  당나라는 기본적으로 수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졌던, 균전제와 그것을 기반으로 한 조용조(租庸調), 부병제(府兵制 : 군을 징집하는 방식, 현재 우리나라가 이를 채택하고 있다.)를 채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사의 난’ 이후로 당의 경제 기반이었던 균전제가 붕괴되고, 귀족들이 소농의 토지를 겸병하여 대토지인 장원(莊園)을 경영하게 되면서, 세금제도였던 조용조는 재산 소유정도에 따라 세금을 내는 양세법으로 바뀌었다. 또한 의무병제였던 부병제 역시 지원해서 군대를 가게 되는 모병제(募兵制)로 달라졌다.
  당에 문화는 앞서 말한 것처럼 기본적이고 귀족적이며 국제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 외에도 당은 여러 가지 중국의 고전문화를 완성하였는데, 3성 6부와 같은 정치제도를 포함해서, 그동안 유교의 학파를 계승하고 있었던 훈고학이 완성되어, 공영달은 『오경정의(五經正義)』를 편찬하였다. 당나라의 문학은 귀족적인 취향만큼 세련되었는데, 이백, 두보, 백거의 같은 당시(唐詩) 작가와 한유, 유종원 등의 고전을 부흥시키고자 한 문자가도 있었다. 당삼채의 등장은 이후 등장할 도자기의 종주국으로서의 중국을 증명해준다. 도교는 왕실의 보호로 발전하였으며, 불교는 선종이 유행(소림사도 이 때 만들어진 것이다ㅎ)하고, 서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승려들이 늘어났다. 『서유기』도 삼장 법사가 이 때 법(法)을 구하기 위해 서역으로 떠난 것이 모티브가 되었다.
  당의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 문화의 근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자, 유고, 불교, 율령은 통일신라, 베트남, 일본, 발해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를 ‘동아시아 문화권’이라고 한다.

 Tip. 당은 시험에서도 많이 다뤄지는 주제이다.
      안사의 난 이전과 이후의 구별, 당의 문화에 대해 숙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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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 은, 주, 춘추전국, 진, 한, 위진남북조, 수, 당, 송, 원, 명, 청, 현대 중국
중국사는 현대 중국 영토 내에 있었던 국가들에 대한 역사를 일컫는다. 어느 역사든 공부할 때 항상 각 나라의 범위를 나타낸 지도를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세계사는 범위가 방대하기 때문에 교과서나 다른 자료 등에서 제시하는 지도는 꼭 눈에 익혀두도록 하자.

1) 주(周, BC 1100년경 ~ BC 770년경)
 주나라는 호경(현재 시안西安)에 도읍하여 세워졌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덕치주의와 천명사상으로 은(隱, 혹은 상商)을 전복시킨 것을 합리화하였다. 가족 공동체에 기반을 두어 예(禮, 예의범절 등)을 중시하였으며, 그러한 영향으로 적장자(장자, 첫째) 중심으로 가계를 이어가는 종법이 발달하였다. 또한 이를 기반으로 주나라만의 영토분할 통치제도인 ‘혈연적 종법에 의한 봉건제도’가 성립하였다. 당시는 청동기 시대였기 때문에 석기나 목기로 된 농기구를 이용하여 경작했다. 때문에 농산물의 많은 생산을 기대할 수 없었다. 정전제는 이러한 이유로 만들어졌는데, 씨족을 중심으로 공동 생활을 하며, 공동 생산을 하는 토지 공(共)개념의 제도가 나타났다. 주로 농경 생산에는 농민과 노비 계층이 종사하였다.

2) 춘추전국시대(春秋 BC 770 ~ BC 403, 戰國 BC 403 ~ 221)
 ① 춘추시대
  사실 춘추전국시대는 주나라 시대로 분류되어있다(동주東周시대라고도 한다. 은을 멸망시키고 호경에 위치한 시대를 서주西周시대라고 한다). 춘추시대의 시작은 북쪽에서 유목민족인 건융족이 침입하면서, 주 왕실이 낙양(현재 뤄양洛陽)으로 천도하면서 시작되었다. ‘춘추(春秋)’라는 시대 이름은 공자가 쓴 책의 『춘추』에서 유래하였다. 이 때까지만 해도, 주 왕실의 위엄이 어느정도 유지되던 시대로, 궐기한 세력들은 저마다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명분으로 세웠다. 이 때 유명했던 패자(覇者 : 주 왕실을 능가하는 힘을 가진, 춘추시대의 대표국가)로 등장했던 커다란 세력을 가진 나라들을 춘추 오패(五覇 : 제濟 진秦 초楚 오吳 월月)라고 한다. 춘추시대 중후반기부터 철기가 중국에 전래되었는데, 보편화 되는 것은 전국시대부터였다.

 ② 전국시대
  전국시대의 이름은 한나라 때 유항이 엮은 『전국책(戰國策)』에서 유래하였다. 이 때는 가신과 제후들이 주의 왕실을 완전히 무시하게 되는 때로, 하극상(下極上), 약육강식 등으로 대표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제후들이 봉토로 받았던 토지들은 제후 개인의 국가로써 발전하였으며, 제후들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실력 있는 관료를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추구하였다. 이렇게 등용된 사람들을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하며, 제자백가들의 출현은 사(士) 계층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제자 백가의 대표적인 학파로써 인의(仁義)와 예(禮 : 각자의 역할)을 중시하는 유가와 무차별적인 사랑인 겸애(兼愛)를 주장하는 묵가,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법치(法治)를 주장하는 법가가 있다. 제후들은 제자백가를 등용하여 군현제와 관료제 중심의 정책을 꾸렸다. 또한  상업과 공업, 농경 등에 큰 변화가 생겨 각자 개성이 뚜렸해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계층이 명확해졌다.  
  전국시대 들면서 철기가 더욱 폭넓게 사용되었다. 철기가 활용된 것은 전쟁과 경제 부분인데, 전쟁 부분은 뒤에 진이 통일하는 과정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경제부분에서 철기의 활약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철제 농기구와 우경(牛耕)으로 인해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으며, 노동력이 절감되었다. 그로 인해 토지의 사유화가 시작되었고, 공동체 중심의 생활 문화(정전제를 중심으로 하는 공동 노동체제)가 해체되어 갔다. 대토지 소유자가 늘어났고, 남아도는 농작물로는 서로 교환하고 시장에 내다 팔기도 하면서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상공업의 발달은 제철, 제염업의 발달로 이어졌고, 또 동전의 발명으로까지 나아갔다. 우리나라에서도 전국시대 때의 동전이 발굴되는데, 이는 중국과 우리나라와의 무역을 증명하고 있다.

3) 진(秦 BC 221 ~ 206)
 비교적 변두리에 위치했던 진이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주변에서 활동을 하던 유목민족으로부터 철기를 제일 먼저 수입해 재빨리 실용화에 이룩하였기 때문이다. 진은 유목민의 기마전술과 철제 무기, 법가 사상을 통해 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을 통일한 진 시황제는 중앙집권의 군현제를 실행하였으며, 법가 사상을 수용하여 엄격한 통치를 하였다. 이에 유(儒)학생들은 반발하였으나, 시황제는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하여 분서갱유(焚書坑儒 : 유교 경전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매장함)를 일으켰다. 사실 시황제의 업적은 분서갱유와 같은 잔혹함 보다 중국을 하나로 만들었던 것에 있다. 그동안 나라마다 달랐던 화폐, 문자, 도량형(추의 무게) 등을 진의 것으로 통일하여 표준으로 삼게 하였다. 또한 지난 전국시대에 나라간의 성벽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으로 보완하여 흉노의 침입을 막는 한편, 흉노를 공격하여 나라의 내외를 굳건히 하였다. 현대의 중국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영토이지만, 진의 통일은 오랜 시간 계속되었던 내란을 종결하고 ‘하나의 중국’을 이룩하였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이러했던 진나라도 대규모의 장성 건설과 엄격한 법의 적용으로 인해 백성들의 불만을 사게 되고, 진승과 오광의 난으로 결국 2대만에 멸망하게 되었다.

4) 한(전한前漢 BC 206 ~ AD 8, 신新 AD 8 ~ 23, 후한後漢 AD 25 ~ 220)
 진승과 오광의 난으로 진(秦)이 멸망한 이후, 초패왕(楚覇王) 항우와 한왕(漢王) 유방의 싸움 끝에 유방이 항우를 이기고 한을 건국하였다. 유방은 후에 한고조(漢高祖)로 추대되는데, 한고조는 처음 통치 정책으로 주(周)의 봉건제와 진(秦)의 군현제를 조합한 군국제를 시행하였다. 이는 군사적, 행정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왕이 직접 다스리고, 변두리 지역을 측근이나 친인척 등에게 하나의 소국을 만들어주어 지배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써 진(秦) 나라 때 군현제에 불만을 가졌던 지방세력의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지방 곳곳까지 황제의 권위가 닿을 수 있을 만큼 강성한 황제권이 형성되었다고 보기 힘들 것이다. 
  한 고조 이후 한나라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한무제(漢武帝)였다. ‘무제’라는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무제의 업적은 거의 모든 것이 전쟁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우선 무제는 예전부터 중국을 괴롭혀오던 주변에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장건을 통해 비단길을 개척하였으며 한반도 남부에 위치한 진(辰)과의 중계무역을 통해 이득을 보고 있던 고조선을 함락하였다. 하지만 무리한 대외원정은 국가 재정에 심각한 무리를 초래하였고, 한무제는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금과 철을 나라에서 독점해서 판매하였으며(염철 전매제), 균수법과 평준법을 통해 유통과 물가를 조절하였다. 국가의 경제 개입은 전쟁 수행에 효율적인 재정확보를 꾀할 수 있었으나, 오히려 물가가 상승하는 등 사회의 불안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진에서 탄압을 받았던, 유가 사상을 국교로 삼아 유교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한은 외척과 환관들에 의해 정치가 좌우되었으며 끝내 외척이었던 왕망에 의해 멸망하고 새로운 왕조인 신(新)이 들어섰다. 왕망은 토지를 국유화하여 주(周)나라의 토지제도였던 정전제를 부활하고자 하였으며(왕전제王田制), 노비 매매를 금지하는 등 평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은 이미 향거리 선제로 굳건한 지배층으로 성장한 호족(豪族)의 반발을 샀으며, 파격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경제개혁은 오히려 농민들에게 부담을 안겨주어 신(新)은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신이 무너지고, 호족이 광무제(光武帝)를 추대하면서 후한(後漢)이 만들어졌다. 후한은 전한과 달리 호족의 연합정권으로, 전한에 비해 황제권이 빈약하였다. 반초의 서역 원정으로 다시 비단길을 회복하였으나, 외척, 환관, 관료의 대립으로 점점 나라가 쇠약해졌다. 그래서 태평도나 오두미교와 같은 도교를 기반으로 한 민간 신앙이 널리 퍼졌고, 끝내 태평도가 중심이 된 농민 봉기인 황건적(黃巾賊)의 난으로 인해 후한 역시 문을 닫게 되었다.
  한은 관료를 뽑을 때 향촌에 있는 유능하고 청렴한 인재를 추천받는 방식으로 관리를 등용하였다. 이를 ‘향거리선제(鄕擧里選制)’라고 하는데, 기본적인 개념은 위와 같은 것이었으나, 현실에 적용되었을 때는 관료의 친인척을 등용하는 등의 문제가 생겨났다. 그래서 지방에 어느 유력한 집안을 중심으로 관료가 배출되었으며, 이러한 지방 세력가를 호족(豪族)이라고 한다.
 한의 문화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으로 중국 고전 문화의 완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한문이 정비된 것도, 채륜이 최초로 종이를 만든 것(한지)도, 또한 유교 사회가 성립된 것도 이 때이다. 유교와 사학이 접목된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기전체(紀傳體) 역사서의 시초로, 이후 역사서들의 근본이 되었다. 반고의 『한서(漢書)』도 한나라 때 나왔다.
 종교도 많이 발전하였다. 도교의 기초한 태평도나, 오두미교의 민간신앙이나, 후한 초기에 비단길을 통해 전해진 대승불교도 있었다.
 한대의 유교는 진(秦)나라 때 분서갱유를 당한 관계로 예전에 불타 없어진 경전을 정리하기 위한 훈고학(訓詁學)이 발달하였다.

Tip. 기전체(紀傳體)
 본기(本紀), 지(志), 연표(年表), 열전(列傳)으로 구성되어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본기(本紀)와 열전(列傳)의 이름을 따서 기전체(紀傳體)라고 하였다. 각각 기록한 것이 다른데, 본기는 왕의 업적이나 행동을, 지는 제례나 천문, 문화를, 연표는 역대 왕조의 변천을 연대순으로 정리한 것이다. 열전은 위인의 기록을 전한 것이다.
ex.1) 삼국지(三國志)는 삼국(위魏 촉蜀 오吳)의 문화를 서술한 것
ex.2) 관우전(關羽傳)은 관우의 행동과 업적을 기록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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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명의 탄생 - 신석기 황하문명

1. 중국 문명의 성립

중국 문명은 보통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삼황, 오제 및 하, 상, 주 3대의 성왕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라고 근대 이전 중국인들은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20c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생각은 점차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먼저 청대 고증학의 발달과 서구 근대 사학의 문헌고증학이 유행하면서 중국의 학자들은 전한 고문헌의 신빙성을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새로운 시대의 역사학자들은 삼대 및 그 이전의 역사를 가상의 역사로 생각하며, 사마천의 사기 기록이 거짓이라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제, 상왕조(은나라)가 발견되고, 하나라의 유적지로 생각되어지는 이리두 유적 등이 발견되면서 중국사의 기원은 훨씬 윗 시대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보통 중국사에서 논쟁이 되는 것은 신석기 황하문명의 문제입니다. 1번째 논쟁점은 과연 황하문명이 중석기나 구석기와 연결된 문명인가라는 점이 논쟁거리입니다. 2번째 논쟁거리는 황하문명이 추운 지방인 화북지방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입니다. 중국문명은 비옥한 양자강 지방이 아닌 추운 화북지방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이유는 양자강 유역이 고온 다습하여 당시 석기나 초기 청동기로 농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양자강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철기시대 이후라는 것이지요. 황하의 황토지대는 석기로도 개발이 가능했다는 점이 문명 발생의 원인으로 지적됩니다.

보통 문명의 발생이라고 하면 강의 범람과 관련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실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성립은 강이 범람하는 지역에서 발생하였으니까요. 그러나 황하문명은 강의 본류지역이나 범람지역이 아닌 홍수의 위험이 적은 언덕 지역에 사람이 모여살면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다른 문명과 차별됩니다. 중국 고대문명으로 유명한 앙소문화, 용산문화는 모두 언덕 지역이였습니다.

2. 신석기 시대 문명의 기원 논쟁

중국 사회에서는 중국 민족의 기원을 신석기 시대 황하문명으로 봅니다. BC 5000년 경의 중국 신석기 문명은 채도 중심의 앙소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흑도중심의 용산문화로 넘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델슨이라는 학자가 앙소문화를 서아시아 채도문화라고 규정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내용은 중국 최초의 앙소문화란, 서아시아의 페르시아 계통에서 건너온 서방의 채도문화다는 것이죠. 이것을 소위 <서방전래설>이라고 합니다. 또 황하중심이 앙소문화가 용산문화, 이리두 문화로 전파되어 중국 신석기 문화의 계보가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인들은 이러한 안델슨의 서방전래 이론을 부정합니다. 앙소문화가 채도, 용산문화가 흑도라는 것은 편의상의 규정일 뿐이고 실제 이러한 문화들은 다 중국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특히, 중국은 각 지역마다 신석기 문화가 독자적으로 발달하였으며, 구석기 시대의 문화를 물려받은 곳도 있기 때문에 상당히 다양한 신석기 문화라는 주장이 대두되었습니다.

중국문화의 <다원성>을 주장하는 내용은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 화중문화는 양자강 유역의 문화로서 춘추전국시대 초, 월, 오의 문화로 계승된다.

2. 화북문화는 황하강 유역의 문화로서 훗날 상왕조(은나라)의 문화로 연결된다.

3. 앙소, 용산문화는 다양한 중국문화 중의 하나로서 중원중심적인 황하문명기원론은 중화사상의 잔재일 뿐이다.

4. 단, 용산문화는 앙소문화를 받아들여 더욱 발전한 문화이다.

3. 모계사회에 대한 주장

중국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사회가 모계중심의 사회라는 주장이 일반적입니다. 황제, 전욱, 제곡, 제요, 제순의 시대로 넘어가는 고대 이상시대는 모두 모계사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계씨족사회가 부계씨족 사회로 넘어가게 된 계기는 하나라를 세운 <우>부터라고 합니다. 우는 제순으로부터 왕위를 선양받고 치수사업에 큰 공을 세웠지만, 다른 현명한 이에게 선양으로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는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하>왕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즉, 아들에게 왕위가 세습된 시기를 중국에서는 부계사회가 시작된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부계가족중심으로 사회가 재편되면서 사유제산이 발생하고 계급이 분화한 당시 사회를 보여주는 예입니다.

하 왕조는 원래 전설상의 왕조라고 생각되었지만, 최근 이리두 유적이 발견되면서 실존 왕조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리두 유적은 하왕조의 위치, 시가와 일치하는 유적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앙소문화 - 용산문화 - 이리두문화가 서로 연결된다고 말합니다 요즘 중국에서는 신석기 유적지 가운데 은문화와 동일하지 않는 유적을 하나라의 문화로 여기고 있습니다.

4. 하, 은의 시대에 이미 거대한 도시국가였다는 중국주장

크릴이라는 학자는 외적으로부터 보호받고, 선진문명권에 참여함으로서 이익을 얻기 위해 중국의 주변 민족들은 중국 왕조의 책봉체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즉, 주변국들은 중국 왕조의 책봉에 참여하여 선진문물을 수용하였고, 중국 황제가 보증한 권위를 배경으로 각 국가에서 권력을 유지한다는 것이지요. 중국의 이러한 전통적 사상을 조공 - 책봉에 입각한 봉건질서라고 합니다.

실제 중국에서는 고대부터 왕권에 의한 거대한 읍의 건설, 잉여노동에 의한 지배층의 재화축척 등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왕권에 의한 대외무역의 통제와 독점이 있었고, 무역에 중요한 원료를 얻기 위해 동서남북으로 전쟁을 많이 했다고 하네요. 원료를 얻은 후에는 생산성의 재고를 위해 노동을 조직, 배분하고 정치적 통합을 견고히 할 필요가 있었는데, 이러한 필요성에 의해 성립한 것이 바로 봉건제도라고 합니다. 봉건제도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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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