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20건

  1. 2013.03.19 동양철학의 이해 - 장자편 3
  2. 2013.03.18 동양사상의 이해 - 장자 1 (3)
  3. 2013.02.28 고사 속 역사여행 15 : <화씨의 벽>에서 <문경지교>까지 (1)
  4. 2010.01.01 교육용 플래시 (중1-2) 춘추전국시대 및 진한사회의 성장
  5. 2009.10.02 역사 속의 고사 이야기 - <홍일점>의 '빨갛다'는 빨갱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3)
  6. 2008.11.22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 11화. 삼장법사의 구법여행과 훗날 등장한 손오공 이야기 (3)
  7. 2008.03.01 고대 이전 동북아시아의 전투 형태 - (1) 청동기, 철기 우리 민족과 동아시아의 전쟁 양식에 대하여 (2)
  8. 2008.01.09 <고사 속 역사여행> 한비자의 변법사상과 <역린 : 용의 분노> (1)
  9. 2007.08.18 (고사 속 역사여행 3) 사족 : 뱀의 발을 그리려고 하다. (3)
  10. 2007.03.13 중국사 이야기 28 -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나라의 통일 배경 (11)
  11. 2007.03.10 중국사 21 - 춘추전국의 난립기에 제자백가 사상이 등장하다 (7)
  12. 2007.03.05 중국사 18 - 제민지배체제란 무엇인가? (2)
  13. 2007.03.05 중국사 16 - 춘추전국시대의 변법운동이 필요했던 이유
  14. 2007.03.05 중국사13 - 춘추전국시대에 새로이 규정된 국이라는 개념을 정리해보자
  15. 2007.03.05 중국사12 - 은주,춘추전국시대의 읍제국가구조와 중화사상의 출현배경
  16. 2007.03.05 중국사11 - 춘추전국시대는 중국사회의 큰 발전기였다 (1)
  17. 2007.03.05 중국사 10 - 춘추전국시대의 시작
  18. 2007.03.05 중국사 9 - 중국 서주의 멸망 이야기와 미녀 포사 이야기
  19. 2007.02.12 중국사 이야기 3 - 중국 최초의 신성왕조 <은나라> (9)
  20. 2007.02.10 중국사 이야기 2 - 도시국가설과 읍제국가설 (1)

동양 사상의 이해 - 장자 3

장자는 누구인가?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고? 아니, 난세는 엄청난 철학자들도 만든다구....

 

장자가 태어난 시기가 기원전 4세기라고 말했지? 이 무렵은 중국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다는 '전국시대'가 시작된 난세였어.

(기원전 4세기) 송나라의 위치를 보면 안쓰럽다.

 

자, 그럼 장자가 태어난 송나라의 위치를 위 지도로 살펴볼까? 가정환경... 아니, 국가 환경을 좀 알아야 장자가 왜 그렇게 철학에 뛰어났는지 알 수 있을테니 말야.

 

당시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였어. 춘추전국이란 용어는 학자들이 만든 저서에서 비롯된거야.

 

춘추란 말은 공자가 엮은 노나라의 역사서 '춘추'에서 비롯된 말이지. 그럼 전국이란? 훗날 한나라의 유향이 쓴 '전국책'이란 역사서가 있는데, 전국시대에는 각종 '책략'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시대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 

 

그럼 왜 굳이 춘추랑, 전국을 나눠둘까?

 

초기 '춘추시대'는 그래도 의리가 좀 있었어. 춘추는 봄, 가을을 뜻하지? 시대가 흘러가면서 자연의 법칙에 따라 사람들이 살아가던 시대야. 자기가 강하다고 길가는 넘 아무나 두둘겨 패면 그건 깡패잖아?

 

강한 나라도 때로는 약한 나라를 보호해주고, 정통왕조인 주왕실을 보호하면서 자신이 훌륭하다는 '인격'을 자랑하던 시대가 춘추 시대야. 어려운 말로,지지자들을 모아서 함께 세상을 보호한다는 '혈맹'의 시대라고도 하지.

 

근데, 장자가 태어난 전국 시대에는 사정이 좀 달라졌어. 깡패들도 지키는 의리와 기강이 무너졌거든. 당시 가장 강대국이 진나라였는데, 진나라를 모시던 3명의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켰어. 쉽게 말해 '형님'을 모시던 넘버 쓰리(3)들이 지들이 두목 해보겠다고 배신을 한거지.

 

즉,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가 형님국가인 진나라를 공격해서 국가를 일으켰는데, 이 때부터는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된거야. 형님도 사시미칼로 찔러 죽이는 세상에 어떻게 남들을 믿겠어?

 

이제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테고, 약한 자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모략과 야비함을 총동원해서 살아남아야지. 이 때부터를 전국시대라고 불러. 전국시대를 상징하는 용어는 '혈맹'이 아니라 '군웅'과 같은 단어야. 힘쎈 놈의 시대라는 뜻이지. 특히 7명의 깡패가 이끄는 강대국을 전국 7웅이라고 불렀어.

 

하지만, 우리가 중국 역사를 그리 깊게 알 필요는 없잖아? 그래서 보통 일반인들은 그냥 '춘추전국시대'라고 묶어서 불러도 돼. 지금은 장자를 좀 알아야 하니깐 자세히 설명한 것 뿐이야.

 

 

자자, 이제 내용 좀 알았으니 지도 다시 보자. 장자가 태어난 송나라의 위치는?

 

와우... 그 전쟁의 한가운데 위치한 동네국가야. 패자인 진나라 및 제후국인 한, 위, 조가 옆에 붙어있고  남방의 패자인 월나라, 초나라가 송나라를 감싸고 있잖아. 즉, 7대 깡패조직의 딱 경계선에 송-나이트클럽 하나가 조그맣게 버티고 있는 거랑 같아. 그 나이트는? 뭐, 금방 접수 당하겠지.... ㅋㅋㅋ

 

결국, 백년이 지난 뒤 약소국인 송나라는 강대국들에게 허구헌날 핍박 당하다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되는거지.

(기원전 3세기) 송나라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장자는 약소국인 송나라에서도 조그마한 고을인 칠원의 담당자였어. 본인은 똑똑하고 책도 많이 읽었지만, 미래의 운명은 뻔했던거지. 이런 어지러운 세상에 벼슬을 한다는 건, 조만간 맞아죽거나, 전쟁통에 죽거나, 백성 보호한다면서 죽거나.... 어.. 어찌되었던... '죽거나' 뿐이거든.

 

송나라에는 사전지지(四戰之地)말이 있었어. 사방이 적 뿐이라서 버틸 수 없다는 거지. 송나라는 춘추전국시대를 통털어서 가장 전쟁이 많았던 지역이고, 기아와 유망이 끊이지 않은 나라였지. 중국에서는 송나라 사람은 '바보'라는 인식이 있는데,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이야.

 

사기의 일화를 하나 들어볼까? 어느 날, 초나라 위왕이 장자에게 재상 자리를 줄 테니 송나라를 떠나 초나라로 망명오라고 제의를 했지. 그러자 장자는 이렇게 말했어.

 

제사에 길러질 소가 있는데, 그 소는 여러 해 동안 잘 먹이고, 귀하게 길러지지. 그런데 마지막 죽는 날은 비단 옷을 입혀서 묘지에 보내는 거야. 그 때가 되어서 소는 평범한 돼지를 부러워하다가 죽게 된다는 거야.

 

장자는 소에 비유해서 이렇게 말했어.

 

돼지처럼 더러운 오물 속에서 뒹굴지언정, 나라일에 얽매이는 것은 싫다. 벼슬을 하느니 내 뜻대로 살겠다.... 뭐 이런 말이었지.

 

결국 장자의 철학은 극한의 고통 속에서 탄생한거야.

 

어떻게 하면 끊이지 않는 전쟁, 모욕과 굴욕, 약자의 비애, 굶어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인간이 자유롭게 살 수 있을까? 그것이 장자 철학의 출발점이었어.

 

그 결론은 간단해. 공자, 맹자, 한비자 등등 철학자들이 윤리나 규범, 법, 제도 등을 통해 세상의 상식과 규칙을 논했다면, 장자는 이 세속적인 가치를 우스꽝스러운 해학으로 비웃어 버리는거야.

 

아무리 근엄한 성인도 그가 우화로 표현하면 광대가 되어 버렸지. 절대 미인은 해골바가지와 동급이 되었고, 고상한 철학은 똥과 동급이 되는 거지. 그것은 단순히 증오에 차서 막 던지는 풍자가 아니었어. 상식적인 사고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오만하고 치졸한지를 정확히 꿰뚫고 핵심을 풍자하는 거지.

 

그 풍자는 험난한 시대를 살았던 장자가 인간의 추한 모습, 인간의 한계, 인간의 이기심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거야. 그럼 이제 '장자'라는 책의 유명한 구절들을 통해 장자 철학의 실제 모습을 한번 살펴볼까?

 

다음 편부터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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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사상의 이해 - 장자 1

 

'장자' 들어가기

  전쟁을 바라보는 관점은 무엇인가?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어떤 이데올로기도, 윤리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소국들의 입장이었다. 고대 철학은 그 경계선에서 출발한다.

 

사상사의 출발점에는 공통적인 현상 한가지가 있어. 그게 뭐냐구?

 

그것은 철학의 출발점이 '도시국가'가 출현하는 '청동기' 시대라는 것이지.

 

먼저 석가모니!!!

 

석가는 인도의 공화정이었던 소왕국의 왕자 출신으로서 소국들의 대립과 거대 왕국과의 마찰이 있던 브라만 시대의 인물이었어.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당시 인도는 제국을 꿈꾸는 브라만 집단과 작은 소국을 꿈꾸는 공화정 집단들이 대립하고 있었지. 스타워즈의 제국과 공화국의 대립처럼 말야.

 

그런데 브라만이든, 공화정 집단이든 웬지 신라시대 귀족이랑 화랑들 같았어. 골품같은 고정적 신분이 있었지. 브라만교에는 카스트 제도 있는거 알지? 공화정에도 신라의 화백회의처럼 만장일치 귀족 회의가 있었지.

 

다음 공자!!!

 

공자와 장자, 한비자와 같은 사상가들 역시 춘추전국시대라는 소용돌이 속에서 공동된 고민을 했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인간이 사는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이 될 수 있을까? 밥먹고 그 고민만 했는지 후대에 남긴 어록도 무지 많아.

 

그런데, 그 정의로움을 법에서 찾는지, 도덕에서 찾는지, 자연에서 찾는지, 공리에서 찾는지는 각자 답이 달랐어. 도시국가가 많아서 밥먹고 전쟁하고, 사람 죽고, 또 전쟁하고, 통일한다고 설치고.... 

 

이런 지옥같은 무법천지인 세상을 법으로 다스릴지, 윤리로 다스릴지, 자연에서 답을 찾을지는 생각하는 사람맘 아니겠어? 그러니 철학이 발전하는거지... 철학과 과학기술은 전쟁의 참혹함에 비례해서 팍팍~ 발전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냐.

 

 

 

다음,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와 같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도 도시국가가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인물이었어. 단지, 그리스 철학의 융성은 다른 지역과 한가지 다른 점이 있었지. 그건 또 뭐냐구?

 

다른 지역의 철학자들이 난세를 걱정했다면, 아테네의 철학자들은 다른 소국을 점령하면서 쌓인 부를 활용하면서 철학이 성장했다는 거야.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이렇게 말했어. 정치하는 사람, 장사하는 사람, 농사짓는 사람 등 신분이 있고 역할이 있어야 세상이 돌아간다고. 그래서 아테네의 고귀한 신분들은 식민지 소국 노예와 상인들 덕에 철학에 집중할 수 있다고 말이야. 그런걸 철인정치론이라고 하는데, 이러니 있는 넘들이 모두 싸잡아서 함께 욕먹는거지, 뭐... 철학자가 이러는데, 다른 지배층은 오죽하겠어?

 

 

 

 

그럼 플라톤의 제자는 누구? 그 분도 같은 말을 했겠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길,

 

전쟁이 우리의 승리로 끝나고, 전리품인 노예가 끊이기 않기 때문에 철학자들은 맘놓고 철학을 고민할 수 있다고 했을 정도야. 현자인 아리스토 아저씨도 노예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니, 고대인들이 생각하는 국가관이 뭔지 알겠지?

 

자, 그럼 그 제자도 한번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유명한 알렉산더 대왕인거 알지?

 

매듭 푸는 문제 던져주면 칼로 매듭을 잘라버린다는 그 월드헤비급 챔피언.... 세계 정복왕 말야. 알렉산더는 정복을 거듭하면서 정복지를 서로 연결하는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수십개를 만들었어. 그리고 그 도시도시를 거쳐서 희귀한 동양의 물품들이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도착하는 시스템을 만들었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을 부수고, 자르고, 해부하고... 또... 음.... 독극물도 넣어보고 하면서 과학을 발전시켰던 거야. 그가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건 헌신적인(?) 스승님의 지원이 있었던 거지. 지금이라면 독일이나 일본의 생체실험이라고 난리가 났겠지만, 당시에는 엄연한 과학발전 취급을 했던 거지, 뭐....

 

말했잖아... 난세에 철학과 과학이 발전한다고...

 

 

 

 

자, 이제 청동기 소국 시대에 철학들이 융성했던 것인지, 그 이유 중 중요한 몇가지만 간추려서 정리해 볼까?

 

첫째, 문자라는 것이 존재했던 시기와 청동기 후기가 일치한다는 점이 중요해.

 

문자가 존재하기 이 전에도 수많은 철학이 존재했겠지만, 그 기록이 명확하지가 않잖아? 내가 열살 때 상대성 이론을 발견한 적이 있으면 뭐해? 커서 기억도 안나고 기록해놓은 것도 없는데.... 같은 원리야.

 

초기의 상형문자가 있긴 했어. 그런데, 그 수준이 초기 문자라서 초등학생 일기 수준이야. 알지? 아침에 밥먹었다... 친구랑 싸웠다... 엄마가 미워한다... 아빠가 사랑한다.... 선생님이 존경스럽다...

 

 

 

 

당연히 기록을 남기는 것에만 급급했기 때문에 철학적인 생각은 부족했지. 그리고 그 정신없는 기록을 당대 혹은 후대인들이 해석하는 것도 어려웠어.

 

그럼, 철학이 되지 못한 초등 7세 수준의 기록들은 어떻게 이해했을까?

 

초딩들이 사용하는 글쓰기 방법이 있잖아. 엄마한테 혼났는데, 그래서, 아빠한테 갔는데, 그랬더니, 아빠가 칭찬해주는데....

 

그거야. 철학이 되지 못한 이야기들은 접속사를 중심으로 전승되거나 이야기로 엮기게 되지, 그래서 그 이야기들이 뼈대를 잡고 스토리가 되면 신화로 정리되는 거야.

 

홍수가 났어. 그래서.... 다 죽어가... 그래서... 신에게 빌었어... 그랬더니? 다 죽지 말라고 방주 만들어 주더라....

 

뭐 이런 이야기가 성립되는 거지. 그래서 홍수 설화는 수메르 신화, 페르시아 신화, 구약성경 등 같은 지역의 모든 설화에 비슷하게 다 등장하잖아. 접속사만 바꿔서 말이야.... 그래서가 그러므로로 바뀌고, 짜라투스트라가 노아로 이름만 바뀌는 정도?

 

 

둘째, 청동기 시대의 국가가 소국가라는 것에 주목해야해. 

 

거대한 중앙집권적인 국가는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하나의 '철학' 만을 인정하지. 그것이 철학이든 종교든 국가에게 유리하다면 그거 하나면 된거야. 별로 도움되지 않은 민중철학이나, 윤리철학이 국가철학에 도전한다면? 그건 이단, 반역, 마녀, 빨갱이... 등등의 수식어를 붙여서 다 처단해야지, 뭐....  

 

그래서 거대한 국가는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게 되는 거야.

 

 

 

하지만 다양한 소국가들이 등장해서 자웅을 겨루는 시기에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만 존재해야 할까? 아니지...  당장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고, 전쟁이 날지도 모르는데, 국가의 생존에 유익하다면 어떤 철학과 사상이라도 스카웃 해와야지.

 

당장 코리안 시리즈 우승해야 하는데, 이종범이 광주출신이라고 삼성이 안데려가고, 이승협이 대구출신이라고 기아가 버려야 하나? 돈이든, 명예든, 지도자 자리 하나 던져주든.... 무조건 데려와서 우승하고 나중에 생각해야 할거 아냐? 삼성이 김응룡, 선동열.... 데려가서 우승도 몇번하고, 이제는 지역 출신 감독 쓰잖아.

 

그런데, 팬들은 그렇게 생각 안해. 감히, 이승엽이 광주가서 기아 감독한다고 하면?

 

국민타자고 뭐고 광주에서는 난리날껄? 광주가 가진 명분과 역사가 있잖아...

 

 

 

철학 역시, 그 두가지를 다루고 있어. 소국이 살기 위해 누구든 스카웃하고 부국강병을 한다는 국가관을 지켜야 하면서도, 국민정서와 명분을 따지면서 윤리의식을 생각하는 것.... 그거야.

 

장자를 제일 먼저 소개하는 이유도 그거야. 그의 철학이 실리과 명분, 즉 국가관과 윤리의식이라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거든. 

 

셋째, 청동기 중기 이후 대대적인 정복 전쟁과 연관이 있지.

 

청동기 시대쯤 되면 생산력이 늘어나서 어느 정도 재력을 갖춘 사람이라면 굶어죽지는 않을 수준이 되었어. 뭐 혹시나 굻어 죽을 것 같으면 무기 들고 나가서 약탈하면 되잖아...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사유재산이라는 개념이 생겼어. 그러자 남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욕심을 채울 수 있다는 이기심도 점점 증가했지.

 

전쟁은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였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욕심이 생명보다 소중한가라는 근본적이면서도 당연한 의문을 던지기 시작한거야. 

 

 

 

 

그러자 고대 철학자들도 두 흐름으로 나눠졌지.

 

죽이고 빼앗아서 국가가 잘먹고 잘살아야 백성이 잘산다는 부국강병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등장했고, 일단 백성이 안죽어야 농사를 짓던 세금을 내던 할테니 윤리문제부터 집중하자는 사람들도 등장했어. 누군가는 이 두가지를 함께 생각했고, 누군가는 어느 하나에 집중하기도 했지.

 

부국강병을 이루는 방법에서 학파가 여러개로 나눠졌고, 윤리문제를 해결하는 근본 원리에 따라 여러 분파가 생겨서, 수많은 사상들이 '내가 옳소' 라면서 싸우게 되는 거야. 그래서 혼란기에는 철학의 전성기가 열리는 것이지.

 

자, 생각해보자.

 

21세기는 국가관이 윤리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국가주의 사회야.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자원을 빼앗기 위해 약소국을 침략해. 그런데 솔직하지 못하지. 

 

침략 명분이 세계평화나 종교윤리, 나쁜 피 제거와 같은 따분한 이데올로기 이야기거든. 뭐,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야? 이쁜 수영복 입었다고 자랑질 한 뒤에 옆의 친구 탈락시키고는, 세계평화를 위해 살겠다고 30년째 외치는?

 

그 뿐인가?

 

에너지를 얻고 문명개발에 박차를 가하려는 국가의 노력은 자국의 땅을 황폐하게 만들고, 자연의 질서를 역행하고 있어.

 

지구온난화와 기상이변.... 가장 심한 곳이 가장 개발이 화려(?)했던 미국 남부잖아. 툭하면 몇백명 이상 사망자가 나오는 허리캐인이 속출하는... 거기에 요즘은 도시 개발의 후휴증으로 도심 곳곳에 발생하는 싱크홀까지 3종 세트가 다 등장했어.

 

도시에 수도관, 가스 등 매설하느라 대부분의 지하가 텅 비어있는 공간이 많아. 거기에 균열이 가면 갑자기 거대한 홀이 생기면서 지하 30미터 짜리 구멍이 뻥 뚫리는 거지.... 잠자다가 갑자기 30미터 아래로 쏙~ 떨어져서 실종되는 미국인들이 많아지고 있잖아.

 

 

 

 

인간이 자연을 몸살나게 하고 있었지만, 자연은 조용히 기다렸지. 이제 인간에게 복수를 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는거야.

 

장자는 이렇게 말했어.

 

인류가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위장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인 '개발'은 결국 대자연의 복수를 불러온다고...생존은 개발이 아니라 순응에서 시작한다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남과 싸우고 남의 것을 강탈하려는 대립은 결국 질서의 파괴를 가져오고 모두를 파멸로 이끌 뿐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대립보다는 '상생'을 찾아야 하고, 하나의 길만 달리려는 '획일성' 보다는 자연 속에서 함께 어울릴 수 있는 '다양함'을 인정해야만 자연의 복수를 피할 수 있는 거야. 

 

그걸 모르는 어리석인 인간들의 행동은 모두 무지에서 비롯되는 거야.

 

현대 사회의 환경파괴와 생태계 붕괴, 인간 존엄성의 파괴는 결국 환경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장자님, 아니 장느님이 말씀하신거지. 장자가 21세기에도 중요한 이유는 이 때문이야. 

 

 

 

이제 장자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 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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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 속 역사여행  15

<화씨의 벽>에서 <문경지교>까지

한비자는 생각했다. 장인은 보석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하듯이

국왕은 사람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인상여는 말했다.

나는 너를 두려워해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너와 나의 싸움으로 나라가 희생되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라고...

 

  1. 한비자가 남긴 우화 : <화씨의 벽>

벽(壁)이란 단어는 구슬 옥(玉)이란 단어 위에 빛난다는 뜻을 얹어놓은 단어로 <최상품의 구슬>을 뜻한다. 여기에서는 쉽게 한글로 풀어서 <옥돌>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이 이야기는 중국 춘추전국시대라는 혼란의 시대를 살아갔던 여러 영웅들의 이야기가 모여서 이루어졌다. 먼저 법가사상의 대가였지만,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누명 속에서 불구가 되었던 철학자 한비자가 만든 이야기부터 한번 들어보자.

춘추시대의 혼란기, 남쪽 초나라에는 변화라는 인물이 있었다. 어느 날 변화는 초나라의 산기슭에서 조각하지 않은 순수한 옥돌을 하나 발견하고는 초나라 왕인 여왕에게 진귀한 옥돌이라면서 보여주었다.

그러자, 여왕은 옥돌가공 장인에게 그 돌이 어떤 돌인지 감별하라고 하였다. 옥돌가공 장인은 '그냥 일반돌인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여왕은 변화가 사기꾼이라고 생각해서 그의 왼발을 잘라 버렸다.

시간이 지나 초나라의 왕은 무왕으로 바뀌어 있었다.

변화는 무왕이 즉위하자 다시 그 옥돌을 왕에게 바쳤다. 무왕 역시 옥돌가공 장인에게 그 돌을 감별하라고 했다. 옥돌가공 장인은 귀찮다는 듯이 '이 돌은 그냥 일반돌입니다'라고 말해 버렸다. 무왕변화가 사기꾼이라고 생각해서 그의 오른발마저 잘라 버렸다.

시간이 흘러 초나라의 왕은 문왕으로 바뀌게 되었다.

변화는 새로운 왕이 즉위하자마자 그 옥돌을 품에 안고서 초나라 산에 올라가 3일동안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의 통곡 소리가 산을 울렸고, 눈물은 다 말라 버렸으며, 눈에서는 피까지 흘릴 정도였다.

이 소식을 들은 문왕은 사람을 시켜 왜 울고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변화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제 다리가 잘린 것이 서러워 우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보석을 돌이라 하고 충심을 다하는 백성을 사기꾼이라고 하니 괴로울 뿐입니다."

문왕은 옥돌가공 장인에게 이 옥돌을 소중히 다루어 가공하라고 지시했다. 이 옥돌을 가공해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이 되었다. 이 보석을 변화(卞和)가 피눈물로서 만들 보석이란 뜻으로 화씨의 벽(和氏之壁 )이라고 이름지었다.

한비자는 이 일화를 말하면서 피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했다. 한비자가 겪은 고통이란 것은 무엇이길래, 이 일화를 자신의 책에 남기고자 한 것일까?

  2. 한비자의 눈물 : <한비의 눈물(韓非之淚)>

한비자는 춘추전국시대의 강국들이 끝없는 전쟁을 계속한다면 결국 고통을 받는 것은 국민들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국가를 통일하기 위해 <참된 권력>을 가지고 백성을 위할 수 있는 강인한 군주가 나라를 통일해야 한다고 말했다.

즉, 속좁은 학자들이 말로만 떠드는 유가니, 묵가니, 명가니 하는 것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말했다. 또, 농민들의 고혈을 빨아 유통의 이익만 남기는 상인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임금의 눈을 어지럽히며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는 관리들도 모두 죽여야 국왕이 백성을 위한 통일전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한비자의 저서인 '고분', '오두' 라는 책이었다.

중국 전체를 최초로 통일했던 진시황제는, 나라를 통일하기 전 한비자의 저서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내가 이 책을 저술한 한비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진시황은 초나라까지 사람을 보내어 한비자를 진나라로 데려왔다. 그리고 그를 곁에 두고 조언을 들으려고 했다.

진시황제가 재미있게 들었던 한비자의 이야기 중에 모순(矛盾)이라는 말이 있다.

어느 거리에서 창과 방패를 파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이 창으로는 그 무엇도 뚫을 수 있습니다. 이 방패로는 그 무엇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러자, 지나가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그 창으로 그 방패를 뚫어보시오. 어떤 결과가 나오던지 당신 말은 거짓말이 될 터이니..."

진시황제는 이렇게 그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들어면서 그를 옆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비자가 완전히 충성하는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높은 벼슬을 주지 않았다.

그러자, 한비자와 어렸을 때부터 같은 스승을 모시고 공부했던 이사가 한비자를 모함하기 시작했다. 한비자와 이사의 스승은 유명한 법철학자인 순자이다. 만약 진시황제가 한비자의 능력을 알아보고 그를 옥벽(玉壁 : 옥구슬)로 사용한다면, 이사와 같은 중신들은 2인자로 물러나게 될 것이다.

이사는 한비자가 초나라 출신이라는 지역주의를 물고 늘어졌다.

"한비자는 한나라 왕족과 연결된 자입니다. 지금 진시황제께서는 천하의 제후들을 통합하여 최초의 통일제국을 만들려고 하십니다. 한비를 등용한다 해도 한비는 결국 한나라를 위해 일할 것이고 진을 위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한비자를 한나라로 돌려보낸다면, 왕께서는 가장 큰 적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입니다. 차라리 가장 가혹한 법을 적용하여 그를 죽여 버리십시오"

진시황제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해서 한비자를 일단 감옥에 가두라고 하였다. 한비자는 진시황제를 만나기만 하면 자신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한비자는 결국 진시황제를 만날 수 없었다. 얼마 후, 이사는 한비자를 속여 한비자 스스로 독약을 먹게 만들어서 죽여 버렸다.

한비자는 화씨의 벽 이야기에서 초나라, 진나라 어디에서도 뜻을 펼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담아 이야기를 했다. 자신은 초나라 출신이었지만, 화씨와 같이 자신의 보석같은 정치 주장들을 초나라의 왕들은 '일상적인 시시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보석이 돌이라고 배척당하는 그 심정을 누가 알아줄까?

그리고 진나라에서도 그의 뜻은 끝내 펼칠 수 없었다. 평소의 한비자의 글 내용으로 보아, 감옥에서 '화씨의 벽' 이야기를 다시 읇조린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옥돌가공하는 장인은 옥을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국왕은 누가 충신이고 누가 간신인지를 파악해야 성군이다. 허나, 증명되지 않은 돌이 보물이라는 것을 알아본 자는, 그 돌이 보물이 되는 순간까지 희생을 각오해야만 할 것이다.

한비자가 죽은 뒤, 어떤 일이 발생했을까? 진시황은 곧 한비자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한비자를 감옥에 가둔 것을 후회하고 그를 사면하려고 했으나 한비자는 이미 죽고 없었다.

훗날, 진시황이 죽고 그의 아들 호해가 통일제국의 왕이 되자, 이사는 또 다시 2인자로 밀리지 않기 위해 환관 조고와 충성 경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 패자는 이사였다. 이사는 자신과 한비자가 만든 가장 가혹한 형벌로 고통스럽게 죽게 된다.

얼굴에 상처를 낸 뒤 먹물을 바르고, 코를 베어 버리고, 발뒤꿈치를 자르고, 성기를 자르고, 마지막에 허리를 자르는 잔인한 5단계 형벌을 오형(五刑)이라고 하는데, 이 법은 이사와 한비자 등 법가 사상가들이 법을 지키기 않은 이들을 죽이던 잔인한 형벌이다. 이 형벌은 몸을 6토막 내는 육시(六屍)와 함께 가장 잔인한 형벌인데, 당대 법가사상가들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자신이 만든 이런 형벌들로 죽음을 당하곤 했다.

욕중에 육시럴~ 이라는 욕이 있다. 이 욕이 얼마나 잔인한 욕인지 이젠 상상이 가는가?

이사를 죽인 조고에게도 유명한 일화가 있다. 조고는 이사를 죽인 뒤, 호해 황제마저도 두렵지 않았다. 어느 날, 조고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를 고르기 위해 황제에게 사슴을 보여준 뒤 '이것은 말이다'라고 말하게 하였다. 이것에 반대하거나 분개한 사람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모두 죽이게 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고사성어이다.

  3. 인상여의 일화 : 완벽(完璧)하다의 어원

다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 춘추전국시대로 돌아가보자.

한비자가 일화로 남긴 <화씨의 벽>이라는 보물구슬은 무현이라는 사람이 보관하고 있었는데, 조나라의 혜문왕이 무현을 협박하여 이 보물을 차지하였다. 이 보물은 워낙 유명한 것이라서인지 조나라가 이 티하나 없이 푸른(완벽 : 完璧) 구슬을 가졌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졌다.

당시, 전국시대의 강대국으로 훗날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했던 '진나라'는 소양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진나라왕은 화씨의 벽을 갖고 싶어서 조나라에게 성 15개와 보물을 바꾸자고 제안하였다.

예로부터 분수에 맞지 않는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항상 화근이 밀려오곤 했다. 만약 조나라가 보물을 주지 않으면 보복공격을 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보물을 줘도 진나라는 강한 나라이므로 성 15개를 준다는 약속을 지킬리가 없었다.

조나라왕은 여러 신하들의 추천을 받아 인상여라는 식객에게 진나라에 가서 협상을 하고 오라고 했다. 식객(食客)이란, 높은 사람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으면서 조언을 해주는 밥손님을 말하는데, 인상여는 조나라왕의 충신 류현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었던 인물이었다.

인상여는 진나라 왕에게 완벽(完璧)한 보물을 넘겨주었다. 하지만 진나라왕은 보물만 받고 성 15개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럴 것이라고 미리 짐작한 인상여는 이렇게 말했다.

"그 벽은 완벽(完璧)한 구슬같지만 사실 한군데 희미한 티(불완벽)가 있습니다. 저에게 주시면 그 것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구슬을 돌려받은 인상여는 기둥 근처로 이동한 뒤 왕을 쏘아보고 이렇게 협박하였다.

"왕은 어찌 귀국과의 정의를 지키지 않고 벽만 가지려 하시오. 이제 벽은 이 사람의 수중에 되돌아왔소. 만약 3일 안에 성 15개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내 머리통과 함께 이 벽도 기둥에 부딪혀 깨질 것이오"

왕은 구슬이 깨질까봐 무서워 성 15개를 준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그 약속도 거짓임을 안 인상여는 시간을 질질 끌다가 부하를 통해 구슬을 조나라로 보내 버렸다.

진나라 왕은 괴쌤했지만 이미 구슬은 사라진 뒤였다. 그리고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구슬을 빼았을 수도 있었다. 진나라 왕은 인상여의 지혜가 뛰어남을 알고 그를 정중하게 대접한 뒤 무사히 조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고 할까? 이 인상여가 바로 훗날 장군 염파와 함께 문경지교를 맺어 조나라를 강대한 국가로 만든 인물이 된다. 그리고 진나라는 그만큼 통일정책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4. 인상여의 일화 : 문경지교(刎頸之交)

인상여는 싸움을 잘하는 인물이 아니였다. 그렇다고 가문이 좋거나 특별히 학식이 뛰어난 인물도 아니었다. 그러나 IQ가 낮으면, EQ라도 높으라고 했던가? 그는 정서지능이 높고, 순간 판단력이 빠르며 정의감이 높고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화씨의 벽을 찾아온 일로 벼슬을 시작한 인상여는 이후에도 진나라왕이 조나라왕을 괴롭히는 순간마다 특유의 재치와 말주변, 빠른 상황파악으로 왕을 도와주었다. 그 결과 인상여는 조나라의 이름난 장군인 염파보다도 더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염파인상여가 맘에 들지 않았다. 염파는 죽음을 각오한 수많은 전투를 하면서 나라를 지킨 인물이고, 인상여는 겨우 말 몇마디로 더 높은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염파는 들으란 듯이 이렇게 말하고 다녔다.

"언젠가 내가 인상여를 만난다면 꼭 수치를 안겨주고야 말리라"

이 이야기를 들은 인상여는 염파를 피해다녔다. 조정에 그가 나오면 병이라 핑계대고 집안에 숨었고, 길에서 가마나 수레가 마주칠 것 같으면 길을 피해갔다. 상황이 이러니, 인상여를 모시던 제자들도 인상여를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묻기 시작했다.

"우리는 선생님의 높은 뜻을 사모했는데, 지금 선생님은 염장군을 두려워만 하십니다. 백성들도 아는 수치를 선생님만 모르십니까? 저희는 참을 수 없으니 떠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나 인상여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우리 조나라의 염파 장군과 진나라왕 중에 누가 더 무서울까?"

"그야 강대국인 진나라의 왕이 더 두렵지요"

그러자 인상여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진나라 왕 앞에서도 당당했고 오히려 그를 면박주었다. 내 아무리 못났어도 염파 장군이 무서워서 피하겠는가? 그러나 생각해보라. 강대국인 진나라가 화씨의 벽을 빼았는다는 핑계를 대면서도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염파 장군과 나 인상여가 둘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기둥이 싸워서 하나가 쓰러지면 어찌 되겠는가? 내가 염파 장군을 피하는 것은 국가의 보존이 첫째 사명이고, 개인의 수치스러움은 뒤의 일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염파 장군은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인상여의 집에 머물고 있는 식객에게 부탁해서 그를 만난 뒤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너무 어리석은 탓에 선생님의 관대한 뜻을 몰랐습니다. 진심으로 사과하니 나를 친구로 받아주시지오"

그 후, 그 둘은 '친구를 위해서는 목이 잘리더라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고 조나라를 지켰다고 한다.

- 사기 열전 한비자, 인상여 中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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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고사 이야기

<홍일점>이란 말이 과연 아름다운 여성을 지칭하는 말일까?

수많은 꽃 사이에 눈에 띄는 색이 있으니...

우리는 흔히 수많은 남성 가운데 서 있는 아름다운 여성 한 명을 홍일점이라고 한다. 그럼 홍일점이라는 말은 누가 처음 쓴 것일까? 그리고, 그 말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의미와 같은 것일까?

그럼 한번 따져보자...

그 말이 처음 등장한 문헌을 따져 올라가면 중국 송나라의 변법가 왕안석임을 알 수 있다.

왕안석이 살던 중국 송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허약한 왕조였다. 전쟁과 반란의 역사를 끊어 버리고자 송나라 태조가 실시한 <문치주의> 때문에, 송의 국방력은 너무도 허약했다. 송의 국방력이 허약한 것과 비례하여 주변국들은 송나라를 업신여기고 국력을 키워나갔다.

송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가 겪은 치욕중에서 가장 큰 치욕인 정강의 변을 겪게 된다. 중국 황제가 이민족에 의해 끌려가고, 주변 민족에게 세금을 바치면서 겨우 왕조를 유지해나간 것이다. 김용의 원작소설로 알려진 사조영웅전도 바로 이 정강의 치욕에서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거란의 요나라, 탕구트족의 서하, 여진족의 금나라, 훗날 몽골족의 원나라까지.... 송나라는 주변국에 의해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러나, 송나라의 보수세력들은 하나같이 일신의 안위를 챙기기에 급급하였다. 주변국에 내야 할 세금은 백성들의 고혈이었지만, 백성들을 위한 획기적인 부국강병책은 없었다.

송의 황제 휘종과 흠종이 이민족의 군대에 의해 잡혀가고 송나라(북송)는 곧 망한다. 그러나, 정강의 변보다 앞서 신종 치세 때 등장한 왕안석은 약해빠진 송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였다.

  왕안석은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한 법을 바꾸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려고 했다. 그는 전통적 유학사상에 얽매여서는 국가의 발전이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공자 사상에만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요순시대의 초기 태평사상과 춘추전국시대의 법가사상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왕안석은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개혁을 추진해 나가려고 했다. 그의 진보적인 정당을 역사에서는 <신법당>이라고 부른다. 지금으로부터 천년전에도 과감한 진보적 신당이 존재했던 것이다. 
   
   신법당은 기존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구법당>과 대립하면서 왕안석은 백성들을 위한 과감한 대책들을 쏟아내었다. 송나라의 시기는 중국 역사상 가장 허약한 시기이면서도, 가장 활발하게 붕당정치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신법당은 끊임없이 개혁안을 던져놓았고, 구법당은 신법당의 개혁이 부당하다는 것을 조목 조목 반박하였다. 이 두 당의 공존 시기에는 각자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등장한 수많은 학자와 문예가들이 있었고, 제법 유명한 시인과 소설가들도 구법당에 들어가 왕안석과 논쟁을 하곤 하였다.

신법당은 국가 인력 확충을 위해 과거제도를 개방적으로 확대하고, 신분보다는 태학의 유학생 등 지식을 우선으로 하는 인재 등용을 논의하였다. 또 가난한 농민과 상인들에게 싼 이자로 농기구와 물자를 대여해주는 획기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일반 농가에 군용말을 키우게 하여 국방을 강화시키는 대신 농민들에게 물자를 제공하자고 하였으며, 농촌 사회를 군 행정구역과 일치시켜 국방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대 유명한 지식인이자 학자들인 사마광, 구양수, 소식 등은 왕안석의 획기적인 방법을 비판하였다. 기존의 사회 질서를 벗어난 개혁은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좌절하였다.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자신의 본문을 다하지도 못하면서 현실에 안주하려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보수의 가치는 <도덕성>이다.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자들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청렴하다는 인식이 있어야 일반 민중들이 수긍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가 부패하고 망해가는데 도덕성도 없는 보수에게 무엇을 믿고 맡긴다는 것인가?

그렇게 망가진 보수주의자들이 왕안석을 서슴없이 비판한다.

  - 모나게 튀어나온 못이 누군가를 찌른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무엇을 바꾼다는 말인가? -

왕안석은 자신의 개혁 사상이 결국 좌절될 것임을 알고 비통해했다. 국왕의 신임이 얻고 있는 동안에야 개혁이 가능하겠지만, 왕이 바뀌고 자신이 죽고 난다면 누가 또 굳이 힘들게 기존의 질서를 바꾸려고 하겠는가?

왕안석은 자신의 시 <석류>에 <홍일점>이라는 말을 남긴다.

수없이 푸르고 푸른 것들 중에서

홍일점이 있구나.

사람을 움직이는 아름다운 색은

생각해보면 많은 것이 아니구나.

수많은 꽃 사이에 눈에 띄는 붉은 점이 있으니 눈에 띄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눈에 띄는 색은 그리 많지가 않다. 붉은 점이 많았다면, 흔했다면 관심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왕안석이 생각한 홍일점은 수많은 꽃 중에 눈에 띄는 하나의 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어서 질투를 받아야 하고, 홀로 걸아야 하며, 그 색이 바래지면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는 그런 하나를 말한 것이 아닐까?

왕안석이 사라지면, 더 이상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 붉은 색들이 많았다면, 붉은 색들이 푸른 색들을 압도한다면... 세상을 바뀌지 않을까?

갑작스럽게 색깔론이 생각난다. 우리 사회에서는 모두가 푸른 색이여야만 한다. 하나라도 붉은 색이 있어서 튄다면, 빨갱이란 소리를 듣는다. 국회에 가보면 아직도 색깔론이 판친다. 빨갛다는 것은 하나라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푸른 것과는 별개의 것이라서 탄압받는다.

왕안석 역시 자신만이 붉기 때문에 슬퍼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파란 식물 속에 빨간 꽃을 홍일점이라고 말한다. 홀로 고고하니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한다. 남성들 사이에 유독 아름다운 여성이 있다면 홍일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왕안석이 말한 홍일점도 그런 것이었을까?

결국 송나라는 왕안석이 죽은 이후 얼마 못가 금나라에게 국토의 절반을 강탈당하고, 몽골제국에게 멸망하게 된다. 그 북방민족들은 왕안석이 그토록 가지고자 했던 강력한 기마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결과를 생각해본 왕안석이 시에서 남긴 <홍일점>은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소연할 곳 하나 없이 외로운 자신의 개혁사상에 대한 비통함을 적은 것이 아닐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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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1화. 삼장법사의 구법여행과 훗날 등장한 손오공 이야기

1. 진정한 종파불교로 거듭난 불교

오늘 이야기는 중국 불교의 전성기인 <당나라> 시기의 이야기이다. 이 시기는 중국 종파 불교가 완성되어 다양한 불교사상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일단 간략하게 중국 역사를 살펴볼까?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불교의 전파와 관련된 중국 역사는 <한>나라부터이다. 그러나, 유학이 국교로 지정된 한나라 시기에 불교는 도가와 마찬가지로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반도, 왜 등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도무 <혼란기>였다. 혼란한 시기에는 새로운 국가 철학이 필요했고 불교가 유교를 대신하여 그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낸 것이다.

그러나, 초기 불교의 문제점은 불교와 국가 권력이 너무 밀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보다는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했다. 구마라집 이후 끊임없이 시도된 <불교의 참뜻 찾기 프로젝트>는 국가 불교에서 벗어나려는 불교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의 혼란기 속에서 불교의 독자성을 유지하기란 어려웠다. 불교가 진정한 <종파 불교>로 탄생한 것은 통일 국가인 <수, 당> 나라 시기였다.

<수>나라의 <천태종>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했었다. 그러나, 수나라는 통일후 성급한 <통일 정책>으로 망하였다. 결국 수 왕조는 이종 사촌인 이연이 건국한 <당나라>로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가 진정한 중국의 종파불교 시대이다. 오늘부터 이야기 할 주제는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던 <당>나라 시기의 종파 불교 이야기이다.

2. 각 종교간에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불교의 역사와 종파관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그 이론이 심오하다. 그렇다고, 역사를 통해 간략히 보는 종교인데 심오한 철학 하나 하나를 다룰 수도 없다. 그걸 다루기 시작하면 <불교 방송>이야기가 될 것이고, 그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당나라까지 불교의 전파과정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복습해보자.



지금까지 전개한 중국 불교사의 이야기는 이렇다.

인도에서 <보살>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대승불교>가 간다라 미술 전파와 함께 동아시아로 넘어왔다. 그런데, 보살이란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승>을 말하며, 그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민해야 할 철학이 반야(지혜)였다. 그 반야 사상의 핵심이 바로 <공> 사상이다.

혼란기의 중국인들은 <공> 사상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도가의 <노장사상>을 활용하여 부처의 사상을 이해했다. 도가 사상으로 불교철학을 이해하는 것을 <격의 불교>라고 한다.

그러나 구마라집이 인도 대승 경전을 번역하면서 도가를 벗어나 독자적인 중국 불교 철학이 시작된다. 그 중에서 반야사상을 강조한 학파는 삼론종으로, 깨달음과 열반을 강조한 학파는 열반종으로, 아미타불 같이 보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학파는 정토종으로 발전해갔다.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반야과 깨달음을 동시에 감싸안으려는 학파가 등장했으니, 그들이 바로 천태종과 화엄종이다.

반면, <이러한 지식들이 과연 부처가 처음 말한 진리와 같은 것일까? 너무 한쪽 측면에만 치우친 것은 아닐까?> 는 고민을 안고, 다시 인도에 불법을 찾아 떠난 이가 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이다. 현장은 <공> 사상에만 치우친 중국 불교에 <공> 사상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유심> 사상을 상기시켰다.

초기 격의 불교 시대에 번역된 불경을 고역경,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경을 구역경이라 한다면, 현장이 번역한 불경을 신역경이라고 한다. 성경에 구약, 신약의 시대가 있듯이, 불법의 시대도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야 할까?

3. 현장(602-664)의 구법 여행이 시작되다!

중국 당나라는 세계 불교사를 통털어 가장 활발한 불법 종파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이론을 쌓아온 불교의 각 학파들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종파>를 만들었다.

그러나, 종파가 많아질수록 더 큰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석가의 참 뜻은 무엇일까? 각 종파들은 자신들이 석가의 참 뜻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석가의 가르침이 이렇게 다양할 수가 있을까?

수문제 때 태어난 현장은 20살 때 출가하였다. 하지만, 어느 한 종파의 이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여기 저기 학파들을 돌아다니던 현장은 점점 실망하였다. 사상적인 체계도 서로 다르고, 같은 불경을 놓고도 종파의 입맛에 따라 해석이 달랐다. 왜 일까? 왜 석가의 마음이 이렇게 나눠진 것일까?

현장이 생각한 종파들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면서 코끼리를 설명하는 것과 같았다.> 코끼리의 코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라 말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의 본체라고 말한다. 작은 인간이 커다란 코끼리의 본체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장은 석가의 참 뜻이 담겨있는 인도 원전들을 직접 보고, 자신이 다시 해석하기로 결심한다. 쉽게 말하자면, 국내에서 영어를 백날 해보았자 발음도 안되고 무슨 뜻으로 생긴 말인지도 모르니, 영어 원조 국가에 가서 직접 배우자는 것이다. <국내파>로는 안되니 <유학파>가 되어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이랄까? 그리하여 그 유명한 삼장법사의 서역 이야기가 629년에 시작된 것이다.

<서유기>에서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라는 동물들이 현장법사를 따라 서역으로 떠난 것이라고 나온다. 물론 소설이니까... 그러나, 실제 현장의 구법 여행은 서유기의 이야기처럼 괴수들을 무찌르며 진격한 그런 여행이 아니였다.

일단 인도로 가는 길부터가 너무나 험했다. 산넘고, 물건너 가야 하는 길은 여행자가 아닌 스님이 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냥 가라고 해도 어려운 길인데, 현장법사의 출국을 막는 중국 수비대가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국제적인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동으로는 한반도와 왜, 서로는 이슬람 국가들, 남으로는 인도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따라서 너무나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당나라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당나라 정부는 모든 입출국자를 국가차원에서 통제하려고 하였다. 특히 당의 토지세법은 조용조 제도였는데, 이 제도의 핵심은 토지세와 인두세였다. 즉, 자신의 토지에서 떠난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는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현장은 국외로 빠져나가면서 국경수비대와 자주 마찰을 일으키고, 도망다녀야 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북한을 연구하는 연구소 직원이 정부 몰래 북한에 가서 현장조사를 하고온 것과 같은 것이다. 당나라 처럼 말로만 세계화를 외치는 이명박 정권에서 이런 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바로 징역형이다.

현장법사는 외친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랴?> 멋진 말씀이시다. 그 유명한 <대당서역기>는 불법을 찾기위해 국가가 만든 보안법을 위반한 한 승려로부터 출발한다.

현장법사는 죽을 고비를 몇차례 넘기고 겨우 중국 국경을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인가?

인도로 가는 동안 그는 천국과 지옥을 수 없이 경험해야 했다.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지역에서는 그의 여행을 반길리가 없었다. 불교를 숭상하는 지역에서는 그를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해주었다. 그는 결국 인도로 도착하여 석가가 수련했다는 보리수 밑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생각했다. <앞서간 사람들을 볼수 없듯이 뒤따라 올 사람을 만날 수도 없구나>

석가에 참 뜻을 구하고자 인도에 왔어도 석가는 그곳에 없다. 그의 흔적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훗날 이곳을 다시 찾아올 구법 여행자들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는 석가에 대한 기록을 찾아 실제 뜻을 연구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난타사에서 1만명의 수도승 중 최고 대우를 받으며 5년간 불법을 연구하고, 강론하였다. 인도에서는 그를 최고 고승으로 생각하며 존경하였고, 불법에 대한 열정은 주변국까지 알려졌다. 당시, 인도의 구마라왕은 그를 자신의 국가에 데려오기 위해 큰 전쟁을 할 정도였다. 그는 16년간의 파란만장한 인도생활을 마치고 중국 장안으로 돌아와 <대당서역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도에서 가져온 수많은 범어 경전을 해석하여 1335권을 번역하였다. 그 숫자상으로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권 한권 정확한 석가의 뜻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더 놀랍다고 한다. 16년간을 인도의 수많은 학자들과 같이 밥을 먹으며 석가의 참 뜻을 토론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4. 현장(602-664)의 이론체계를 완성한 <법상종>

 
현장이 16년간 공부하고 토론하여 얻은 결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과 쌍벽을 이루는 <식> 사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중국의 대승불교는 대부분 구마라집의 해석어거나, 그의 제자들로 시작된 불경 번역이었다. 너무 한편으로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구마라집의 핵심 사상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이었다.

그 핵심은, 만물은 돌고 돌기 때문에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은 곧 있는 것이라는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현상계의 자연현상을 놓고 <공>을 다루는 것이었다. 돌고 도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자, 자연의 법칙이다. 대승불교의 <용수>가 주장했던 것도 이런 입장의 <공>이었다.

세상은 돌고 돌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나란 존재는 죽으면 흙이 되고, 물이 되며, 그 흙과 물은 곡식이 되고, 곡식을 먹은 남자와 여자에 의해 다시 생명으로 태어난다. 즉, 나란 내가 아니며, 내가 아닌 흙과 물이 곧 나인  것이다. 결국 눈에 보이는 사물의 본질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은 우주나 자연보다는 인간의 마음에서 <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 대승불교의 대표 철학인 <유식>을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중국 내부에서도 성실종, 지론종 등의 학파가 <인간의 마음>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류 학파는 아니였다.

그러나 현장의 <유식> 사상은 본질이 없다는 <공> 사상이 아니라 실체가 있다고 말하는 <공> 사상이였다.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은 모두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다. 밧줄을 보고 뱀이라 생각하여 놀라는 것은 마음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진정한 실체는 존재한다. 그러나, 머릿속에 편견과 욕망이 많을수록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 밧줄을 밧줄이라고 보았을 때 실체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실체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다.

결국, 현장이 생각한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있지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주의 모든 현상은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철학을 <만법유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마음>을 강조하는 현장의 철학을 이어받은 제자 기(자은법사)는 스승의 철학을 <법상종>이라는 종파철학으로 발전시킨다.

법상종의 철학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 법상종의 기존 유식철학은 <마음>에 따라 불교 교리의 발전을 3단계로 나눈다.

1단계는 나란 존재가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버리는 초기의 <공> 사상이다. (석가철학의 아함경)

2단계는 모든 존재가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버리는 <반야>의 진리를 깨닫는 단계이다.(반야경)

3단계는 결국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므로, 실제하는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실제하는 본질은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화엄경)

결국 법상종은 기존의 <공> 사상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진다는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대에, 사상을 받아들인 학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열반종, 천태종, 밥상종의 교리를 한데 모아 큰 통합을 이루려는 <화엄종>이었다. 화엄사상은 바다와 같다. 각 종파가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이라면, 화엄은 그 모두가 뛰어놀고 있는 그 바다 자체를 지향하는 통일 종교였으니...

현장의 유식 이론은 법상종으로 이어졌으나, 그 끝은 결국 화엄종으로 귀결되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다른 종파들이 결국 화엄의 철학으로 녹아내렸듯이 법상종의 철학도 결국 모든 것은 하나라는 화엄의 <원융사상>으로 녹아내리게 된다.

당이라는 역사상 유례없이 번성한 통일왕조에서 필요했던 불교는, 모든 혼란기의 사상과 당대 사상까지 통합한 화엄종이 아니였을까? 다음 장에서는 화엄종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5. 대당서역기가 서유기로....

서유기는 명나라시대 오승은이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 오승은은 현장의 구법여행을 토대로 이 소설을 적었다.

총 100부작인 서유기는 총 3부의 내용으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가 손오공의 탄생 이야기, 두 번째가 현장의에게 구법의 의무가 주어지는 이야기, 세 번째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함께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제천대성 손오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손오공의 탄생 설화와 하늘에서의 난동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중국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라 현장 시대의 이야기 외에도 많은 민간 설화와 민간 종파의 이야기가 숨어 있으며, 불교의 많은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로, 손오공이 보살들에게 대들 때, 보살들의 손에서 큰 <인장>이 나온다. 인장은 도장을 말한다. 원래 <인>은 다양한 손모양을 토대로 보살들의 언어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로, <항마촉지인>을 들어볼까?

위의 손 모양이 항마촉지인이다. 이것은 검지를 뻗어 손을 아래로 내리는 일종의 <수화>이다. 석가모니가 보살일 때, 마왕이 석가모니를 시험에 들게 하였다. 마왕이 말하기를,

<당신이 엄청난 공덕을 쌓은 것을 증명해 보이시오.> 라고 협박을 하였다.

석가모니는 오른손을 땅에 대어 <이 대지가 증명할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그 순간 땅에서 <땅의 신>이 튀어나와 부처님의 은혜로운 삶을 증명해주었다. 마왕은 항복하였고 이 때부터 <항마촉지인>은 보살이 적을 무찌르는 손 모양이 되었다.

<선정인>은 부처가 깊은 선정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전륜법인>은 부처가 맨 처음 설법하던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지권인은 왼손으로 부처님 세계를 오른손으로 중생 세계를 표현하여 두 세계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수화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설정은 손오공을 <불법>과 대비되는 도사의 이미지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의 불교이야기를 하면서 핵심주제의 하나로 <불법과 도가>의 폐불사건들을 다루었었다.

그런데, 초기 망나니같은 손오공은 <도사>의 신비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머털도사처럼 머리카락을 뽑아 숫자를 늘린다는 기술은 초기 도가인 <오두미교>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술이다. 구름인 <근두운>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설정은 손오공이 학과 구름을 벗삼아 사는 신선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 <도사> 세력을 쳐 부수고, 불법의 <인장>이 승리한다. 즉, 보살이 도사를 이긴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손오공은 도사이므로 죽지 않는다. 그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도와 불법을 찾는 다는 내용은, 초기 도가 사상을 받아들인 불교가 도가를 발 아래 두고 불법의 진리를 찾는다는 역사적 상황과 맥락이 같다. 손오공의 이름 자체가 <공손하라>는 의미인 것은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손오공의 머리에는 금제가 있다. 불법을 벗어날 때 마다 고통이 찾아온다. 자비로운 삼장은 진정한 불법을 찾으면 금제를 풀어준다고 말한다. 도가에서 벗어나 진정한 불법을 찾고자 한 현장은 <독자적인 불법>을 찾은 뒤, 손오공을 풀어준다. 그러나, 손오공은 이미 불법에 빠져 버렸다.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는 현장법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 중국에 진정한 불법이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진정한 부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삼장법사>는 서역에 가서 불법을 전해받아야 한다. 그런데, 악의 무리들이 그 과정을 방해한다. 그 악의 무리들은 여러 갈래이다.

같은 불교이면서도 불법의 참 뜻을 모르는 무리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삼장의 참 뜻을 모른다. 반대로 우마왕같은 존재는 인도 바리문의 <소 숭배>를 생각나게 하면서도 반대로 농경사회인 중국의 전통을 상징하기도 한다. 처음에 우마왕과 싸우던 손오공이 우마왕과 형제가 되는 설정은 특이하지 않는가?  또, 신선술을 부리며 각종 동물이나 괴물로 변하는 도가의 술법을 쓰는 자들도 있다.

저팔계’는 저속한 마음의 욕심을 이겨내려면 여덞 가지 계율, 즉 ‘팔정도를 이루라는 뜻이고, 사오정은 맑은 마음을 가져야 깨우칠 수 있다는 불교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

사실 서유기는 불교식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이 작품이 명나라 때 쓰여진 관계로, 당나라 당대 불교의 교파들 보다는 훗날 밀교화된 불교 상황을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아미타불>과 같은 정토종 성향이 상당한 강하다. 백성들이 읽는 고전 작품이기 때문에 심오한 교리보다는 <아미타> 신앙과 같은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손오공이 알게 된 불교는 심오한 교리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 알게된 <깨달음>이지 않는가?

또, 이 작품은 명나라 당시 부패한 사회상과 나쁜 관료들을 우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 풍자의 방식으로 불교적인 사상이 덧붙여진 것이다. 암울한 현실을 직접 비판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신비하고 가벼운 모험 스토리로 풍자하는 것이 일반인들 읽기에 편하지 않겠는가?

서유기는 보살이 나오는 이야기 같으면서도, 유교, 불교, 도교의 모든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하지만, 현장법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괴물들을 물리치는 과정과 방법은 도교식이지만, 그 원리는 불교식이다. 현장은 모든 괴물들도 사실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용서가 가능하다는 <열반종>의 불성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악>은 악일 뿐이기에 퇴치해야 한다는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현장은 모든 것이 마음에 달린 것이라고 말하며, 법상종과 화엄종의 핵심 교리인 <일체유심조>를 주장한다.

실제 대당서역기와 서유기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불교의 진리가 무엇인지 찾으려하는 현장의 마음 만큼은 서유기에서도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닐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대당서역기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현장 (서해문집,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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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의 치: 위대한 정치의 시대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멍셴스 (에버리치홀딩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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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 3: 치세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나채훈 (씽크뱅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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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계환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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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 (논술프로그램세계명작 5)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오승은 (예림당,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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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은 서천으로 갔다(서유기 다시 읽기)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홍상훈 (솔,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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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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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스티브 하겐 (우리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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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뜻깊은 불교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달진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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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계환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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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불교와 유식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일지 (세계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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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 H I S T O R I A > 고대 이전 동북아시아의 전투 형태

(1) 청동기, 철기 우리 민족과 동아시아의 전쟁 양식에 대하여

우리 민족, 그 기원에 대한 논쟁

자, 지금부터 이야기하려는 내용은 고대 동아시아의 전투 양식에 관한 것입니다. 동아시아라고 하면 지금의 중국을 포함하고 있는 동북아시아부터 한반도, 일본열도까지를 다루어야 하지만, 일본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 일본에 대한 기록이 일단 없고, 야마토 호족 연합 정권 이전의 일본에는 전쟁다운 전쟁에 대한 기사가 없기 때문이죠. 그럼 시작해 볼까요?

전쟁에 대해 이야기 하기 위해서 일단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원시시대 만주와 요령지방, 그리고 한반도에는 어떤 계통의 민족이 살고 있었는지 일 것입니다.

일단,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우리 민족의 기원을 신석기 때 내려온 고아시아계통의 민족에서 찾곤 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 반박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지금은 달리 주장할 학설이 마땅치 않기 때문에 일단 인정하는 편이죠.

이 고아시아 족은 시베리아의 동남부의 바이칼 호수 주변에 살던 족속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바로 우리가 흔히 들어온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한 인류였죠. 그러나, 이러한 고아시아족을 우리 민족의 기원이라고 단정하기에도 무리가 많습니다.

다음은 한국사 특강(서울대학출판부)의 신석기 시대 분류 방식입니다. 너무 많은 다양한 의견이 있어서 이 책의 내용도 이제는 그냥 참고 자료 수준일 뿐이 되었네요.  일단, 신석기 시대의 인류를 빗살무늬 토기를 어떻게 사용하였는가, 어떤 토기를 가지고 있었는가로 구분합니다.

 신석기 1기 : 이른 민무의 토기, 고아시아족(시베리아계통)이 내려온 문화

 신석기 2기 : 전형적 빗살무늬토기를 사용한 시기로  또 다른 고아시아족이 내려온 시기

 신석기 3기 : 빗살무늬토기를  변형한 파상문무늬, 뇌문무늬, 평저무늬 등이 보이며, 중국 퉁구스 계통의 민족이 내려온 시기.

 이 3차례 이주는 선주민의 말살없이 전통을 계승함으로서 민족의 기원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신석기 3기의 퉁구스 계열의 민족이 민무늬 토기인으로 변함으로서 신석기인과 청동기인은 연관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죠.

그러나 반면, 다른 학자들은 신석기인이라고 말하는 고아시아계통의 시베리아족들이 어떤 인종인지 확실한 자료도 없이 추정으로 민족의 기원을 말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신석기인들과 청동기인들은 살아간 생활 양식도 다르고, 그들이 연속된 계통이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우리 민족의 기원을 고아시아 계통에서 찾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결국 논쟁의 핵심은 신석기인들을 우리 민족의 기원으로 볼 수 있는가, 아니면 청동기인들이 우리 민족의 기원인가, 혹은 극단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구석기인들까지 우리 민족의 기원으로 볼 수 있는가하는 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민족이 어떤 계통의 부류로 출발하였든간에 그 영역은 어디서부터였을까 하는 점이죠. 중국의 동북공정과 같은 역사 왜곡 앞에서 이 문제가 한층 더 부각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청동기인들이 도대체 누구야?

우리가 흔히 민족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청동기인>의 실체에 대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청동기인들이 모두 같은 계통이라고 이해하기도 하고, 청동기인들이 처음부터 동이족이라고 말하는가 하면, 고조선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청동기인이라는 개념은 어떤 하나의 부류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닙니다. 청동기인들은 지역에 따라 다양한 문화를 형성하고 살았습니다. 보통 청동기인 하면, 기존에 있던 신석기 후기인들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으며, 청동기를 수용하여 민족의 주류를 형성하고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청동기인들의 문화는 너무나 다양했습니다. 저마다 독특한 석기를 사용하였고, 청동제 무기도 지역에 따라 달랐습니다. 예로, 비파형 동검은 고조선의 유역이 있었던 북방계통에서 많이 사용하였다면, 남부 진국이 위치했던 곳에서는 마제석검을 이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양성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결론을 내린 사람이 없습니다.

일단 청동기 문화의 기원을 만주 요녕성으로 보는 것이 다수설입니다. 그러나, 시베리아 동남부, 발해연안 등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을 가진 청동기를 사용했던 민족들이 철기 시대로 들어서면서 하나의 큰 틀 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그들은 철기시대로 넘어와서 공통적으로 세형동검이라는 독자적인 청동검을 사용하였고, 예맥족, 한족이라는 명칭으로 공통된 범주를 형성하게 됩니다.

어찌보면 자료가 없는 고대사는 소설을 적는 기분과 같을 수 있겠네요. 하나 하나 자료를 찾아서 추리를 해야 하니까요. 자, 이 글이 우리 민족의 기원을 적는 글이 아닌 만큼, 이 정도에서 끝내고 이제 동아시아 초기의 전쟁 양식으로 본격적으로 돌어가보죠.

청동기와 동아시아 초기의 전쟁들

인류 역사에서 전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청동기 때라고 합니다. 인류 초기의 전쟁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의 생산력이 쌓이고, 생산물이 남을 때 그것을 보다 많이 확보하기 위한 무력 투쟁이였습니다. 따라서 청동제 무기를 가지고, 일정량의 생산물과 전쟁 무기를 사용할 수 있었던 시기부터 인류는 본격적으로 전쟁과 약탈을 시작합니다.

인류 최초의 전쟁 양식은 수레전이었습니다. 전쟁을 위해서는 일정량의 무기와 식량을 보관하고 운반할 수 있는 수레가 필요하였기 때문에 수레의 확보와 탈환이 전쟁에서 상당히 중요했다고 합니다. 원시 인류는 당나귀나 노새 등을 이용하여 수레를 끌게 하였는데, 기원전 10세기 정도에 인도의 아리아 계통 사람들이 말을 이용하여 수레를 끌게 하였습니다. 수레전에 기동성을 확보한 것이었죠.

그리고 이 수레전의 양상은 이란계 계통인 스키타이인들에 의해 아시아 각지에 전파되었습니다. 스키타이 인들이 각지에 전파한 말을 이용한 수레전은 두가지 형식으로 분화되었습니다. 하나는 수레를 버리고 기동성을 최대한 확보하는 형식의 전투인 <기마전>입니다. 기마전은 특히 유목민들에게는 가장 좋은 전투 방식이었습니다. 일정한 영토를 확보하지 않고, 영역 중심으로 이동하는 이동하는 유목민들에게는 기마전이 가장 좋은 전투였습니다.

반면, 중국 등 농경생활과 정착생활을 했던 지역에서는 수레전을 발전시킨 <전차전>의 방식을 선호하였습니다. 전차전이란 중국 춘추시대까지 보편적으로 볼 수 있었던 전쟁 방식으로, 넓은 들에서 두 나라의 군대가 진을 친 다음 전차를 이용하여 치고 받는 방식의 전쟁이었습니다.

청동기를 전파한 스키타이인들.

우리 민족이 처음 청동기를 사용한 것은 언제인가를 논할 때, 꼭 나오는 민족도 <스키타이인>들입니다. 얼마전에 <히스토리에>라는 그리스쪽 이야기를 담은 역사만화를 읽었는데, 거기에도 북방 민족인 무시무시한 스키타이인이 나오더군요. 이란계 스키타이인이 기마전술을 이용하여 동서로 모두 진출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우리쪽 이야기만 해야겠군요.

스키타이인이 우리 민족의 기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청동기를 전파해준 민족으로 기마전을 주로 구사했던 스키타이인을 지목하는 것은 일리가 있습니다. 만주와 한반도의 청동기는 중국의 은, 주나라와 너무 다르고, 몽골계와도 다르다는 점, 그리고 스키타이계로 칭할 수 있는 계통과 유사하는 점 때문이지요. 고대사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이상, 그나마 가장 유사한 상황근거를 다수설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누가 청동기를 전파해주었는가가 아니라, 청동기를 사용한 자들이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일단, 우리 고대사 유물 중에 말과 관련된 유물이 많은 것으로 보아 전쟁에 말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나, 고조선과 한반도 내 있었던 전쟁의 형태에 관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알 수는 없습니다. 단, 우리 민족을 가르키는 용어로 예맥족이라는 말이 중국 문헌에 많이 나오며, 그 예맥족의 실체를 추론할 수 있는 기사들이 종종 나옵니다.

예족은 부여족, 맥족은 고구려족을 지칭하는 용어로 많이 쓰이고, 한반도 남부의 민족은 한족으로 칭하는 기사들이 있죠. 또 동이족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데, 동이족의 실체는 학자들에 따라 너무 많은 의견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는 동이족을 우리 민족의 전체 개념으로 보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동이족 자체가 중국과 대립했던 모든 민족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동이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문헌들이 중국문헌이라는 점을 추론해 볼 때, 동이족은 중국 동쪽에 분포했던 민족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동이족은 요하강 동쪽과 송화강 남쪽을 기준으로 할 때, 고조선의 영역과 한반도, 그리고 산둥반도 등 중국 동해안과 발해만, 만주 등을 포괄하는 민족을 지칭하는 듯 합니다.

최근에는 동이족을 은주 교체기 때 이동한 민족으로 파악하기도 합니다. 중국에서 은나라가 망하고, 주나라가 일어날 때 은나라 계통과 손을 잡고 있던 동이족 일파가 주나라와 대립하였는데, 주나라에게 패하여 만주, 산둥반도, 한반도 등으로 흩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동이족의 일파 중 요하강 동쪽부터 한반도까지 밀려온 일파를 예맥족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즉, 예맥족은 동이족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동이족의 일파인 우리 민족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중국 전국시대에 시작된 기마전과 보병전의 전개

청동기 시대에 전차전을 위주로 했던 동아시아의 전쟁 양상은 철기를 사용하면서 급격하게 변합니다. 보통 역사 발전 단계상 청동기 국가 성립 초기의 전쟁은 보통 귀족들의 전쟁이었습니다. 서양의 그리스, 로마에서도 초기 귀족공화정 시기에는 귀족들 위주의 전차, 기마부대가 주를 이루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평민들이 성장하면서 보병전으로 전환되었습니다.

중국 역시 전차전이 철기 시대 다른 전쟁 양상으로 전환됩니다. 그 이유는 철기의 보급과 함께 철제 무기가 많아지고, 농업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전쟁을 담당할 수 있는 계층이 늘어났기 때문입니다.

또 철기의 사용으로 전쟁 양상이 격렬해지고, 전쟁 범위가 늘어나자 더 이상 전차를 이용한 국지적인 전투는 불가능해졌습니다. 전국시대 후기의 중국은 전차전 대신, 빠른 말을 이용하는 기마전, 많은 수를 확보할 수 있는 보병전으로 전쟁 방식을 전환하게 됩니다.

중국에서 새롭게 도입한 기마전과 보병전은 각각 그 쓰임새가 달랐습니다. <전국책>을 보면, 기원전 307년 전국시대 7웅 중 하나인 조나라 무령왕이 그 때까지의 전차전이 더 이상 어렵다고 판단하여 기마전을 도입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조나라는 엄청난 강국이 되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즉, 기마전은 유목민족의 기마전술을 도입하여 빠른 기동성을 활용하는 전투에 이용되었습니다. 빠른 기동성을 이용한다는 것은 순간 순간에 대처할 수 있는 다양한 <유격전술>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또, 상대적으로 빠른 유목민족과의 전투에서도 기마전술은 필수였습니다. 기마전의 핵심은 빠른 이동속도와 함께 말 위에서 화살을 날리는 기병술이었기 때문에, 기마전의 도입으로 수많은 무기가 개발되기도 합니다. 철제 창, 철제 칼, 가벼운 화살, 말을 타기 위한 소매가 좁은 옷 등이 나타나게 됩니다.

반면, 보병전은 하나의 거점을 확보한 뒤, 거점을 위주로 싸우는 방식입니다. 전국시대는 단순히 하나의 전투를 승리하기 위한 전쟁이 아니라 거점을 확보하고 지켜나가면서 전역을 통일하기 위한 전쟁이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에는 수십만에 이르는 보병들을 투입하여 거점을 빼았고 지켜나가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따라서 전국시대의 전쟁은 기마전과 보병전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고, 보병부대로 하여금 적극적인 전쟁 참여를 유도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보병부대를 유지하기 위해 징집이라는 방식의 병사 모집이 있었고, 이 병사를 통제하기 위해 국가는 <변법>이라는 방법으로 지방과 향촌을 통제하려고 했습니다. 즉, 기존의 귀족 위주의 전쟁과 국가 운영 방식을 버리고, <제민통제>이라는 방식으로 변환시키려는 시도가 바로 중국의 유명한 <변법논쟁>이였죠.

또, 이렇게 확보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키고, 각국간 민감한 정치 상황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국은 타국과의 외교를 통한 교섭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이 때 등장한 외교전술이 바로 소진의 6합책, 장의의 연횡책 등입니다. 즉, 군사력도 중요하지만, 다양한 국가들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적절한 외교술이 필수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확실한 외교책으로 중국 최초의 황제 국가를 건설한 나라가 바로 <진>국이며, 진시황제입니다.

고조선과 고대 무역로 확보를 위한 전쟁

고조선의 전쟁 방식에 대한 자료는 현재까지 없습니다. 고조선이 기록을 남긴 부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없으면 상상이라도 해봐야겠죠? 어짜피 있었을 법한 일을 글이지 논문 쓰는게 아니니까요.

고조선 역시, 청동기로 출발한 국가입니다. 그러나 요하강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는 중국과 달리 평야지대 보다 산지가 많은 지역입니다. 청동기를 전파한 스키타이인들의 기마술 역시 고조선이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중국보다 훨씬 먼저 <보병전>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이후 고구려에서는 벽화나 유물 중에 말에 대한 것들이 상당히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광개토왕이나 장수왕의 전쟁 영역 및 이동 거리 등을 볼 때 이전의 고조선 역시 상당한 <기마술>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합니다.

고조선에서 철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이 위만조선 때 부터인 것을 감안하였을 때, 중국식 병법은 이 때 이미 고조선에 들어왔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고조선이 흉노를 제압한 한과 1년여 가까운 싸움을 했다는 것에서도 당시 고조선이 중국에 밀리지 않은 병법과 전술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점 중 하나는 고조선과 중국 한나라의 전쟁 양상은 공성전과 해상전을 위주로 했다는 점입니다. 그럼 전쟁을 추론해 볼까요?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한 이유는 고조선이 위만 때부터 중계무역으로 이득을 남기고, 철제 무기를 사용하여 스스로 <왕을 칭한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중국이 고조선을 침략한 이유는 <무역권>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중국 한무제는 수차례 흉노 토벌로 경제력이 바닥나면서 균수, 평준법 및 전매 제도 등으로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조선은 남부의 진국(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해상교통로>를 장악하여 무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남부의 금강, 한강을 통해 대동강까지 이어지는 고대 해상 상업로는 고조선을 통해 중국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한무제는 대동강 무역권을 장악하여 중국 동해안과 한반도를 직접 잇는 루트를 만들어 국가 재정을 튼실히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실제 대동강에서 남해안을 돌아가는 루트는 삼국시대 한강을 중심으로 하는 해상 무역 중심루트였고, 통일신라시대 장보고가 활용했던 무역루트였습니다. 이 무역로는 중국 산둥반도와 이어지는 핵심 무역로였습니다.

한무제가 고조선을 공격한 루트역시 요동을 통해 좌장군을 보는 공격로 외에 누선 장군을 통해 대동강으로 침략하도록 한 루트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 이전, 수상전과 공성전에 대한 작전과 병법이 있을 법 하지만 그것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누선 장군은 수상 공격전에 체포되었다고 기록이 나오고, 고조선은 내분에 의해 멸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조선의 우거왕은 신하인 이계상에게 죽었고, 우거왕의 아들 성이는 한나라의 좌장군의 계략에 의해 백성들에 의해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즉, 당시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은 한라나의 외교와 전략에 의한 부분이 크다고 볼 수 있겠네요.

북방 유목민족의 전술 - 극강의 기마술

중국은 수천년 중화민족으로서 자부심을 지켜왔다고 말하지만, 중국의 한족이 자신의 땅을 다스린 기간은 전체 역사의 절반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에 이미 북방 민족들이 내려와 중국 내지에 깊게 뿌리를 내렸고, 전통 중국 왕조라는 수, 당 제국 역시 북방 민족 계통의 역사가 깊이 혼재해 있음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10세기 이후 금, 요, 원, 청 등 이민족 국가들이 중국을 잠식해 들어가 이민족 왕조를 세웠죠. 중국은 이러한 역사적 아이러니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중국에 들어온 모든 민족을 중국 소수 민족으로 편재하고, 중국사의 한 부분으로 귀속시켜 버렸습니다.

즉, 중국의 역사는 한족의 역사와 북방 민족의 역사가 섞여 있는 역사입니다. 중국의 전통적 조공, 책봉 사상으로 볼 때는 이러한 점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동양사를 중국사가 아닌 동아시아 문화권과 북방문화권이라는 2개의 문화권 관점에서 보면 북방 민족 역시 스스로의 문화권을 가진 각각의 민족 집단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새로운 교육과정에서는 동아사아사를 중국사 뿐만이 아닌 다양한 시각에서 적는다고 합니다. 아시아사는 중국사라고 배워온 우리에게는 지금이라도 다행이 아닐까 하네요.

북방민족의 기마술과 전술은 다음 장으로 넘겨 적겠습니다. 너무 두서없이 막 적다보니, 다음 장은 차분히 생각하면서 적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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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 속 역사여행> 한비자의 변법사상과 <역린 : 용의 분노>

1. 춘추전국시대 <법가사상>이 대세가 되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는 수많은 제자백가 사상이 난립하고 있었습니다. 중국 먼 옛날, 춘추전국시대에는 수많은 국가들이 서로 경쟁하면서 상대국가를 병합하려 하였고, 수많은 사상(제자백가)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 많은 사상들은 대부분 국가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 것인가, 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면서 통일을 이루고 훌륭한 군주가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연구하였습니다. 그 방략은 너무나 다양해서 중국의 고대 고사들의 상당수가 춘추전국시대의 고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덕으로서 군주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편안히 한다는 유가, 자연에 따른 삶이 순리라는 도가, 노동과 검약 그리고 평등을 강조한 묵가, 법에 따른 통치를 주장한 법가 등이 있었죠.

그 중에서 법가 사상은 법을 바꾸어 국가의 기반을 단단히 하고, 효율적인 제도로 체질을 바꾼다는 <변법>사상과 관련 있는 사상이었습니다. 많은 군주들이 강력한 법에 의해 국가의 부국과 강병을 이룰 수 있는 이 법가 사상을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법가 사상은 크게 세치술, 술치술, 법치술로 나누어 집니다. 세치술이란, 법을 집행하는 군주의 위세를 보임으로서 모두가 복종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신도라는 사람이 주장하였습니다. 출치술은 관료들과 제도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리는 군주의 능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신불해가 강조하였죠.

법치술이란, 국가를 유지하고 군주의 위세와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법을 제정하여 누구도 그 법에서 자유롭지 못하도록 구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세치, 술치보다 한 단계 진화한 과정으로 동문이었던 이사와 한비자가 주장하였죠.

이 3가지 세치, 술치, 법치를 종합하여 법가 사상의 기틀을 마련하고 춘추전국시대의 변방국이었던 진나라가 전역을 통일 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든 자는 그 유명한 변법가 <상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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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비와 이사의 관계

한비자는 한비라 불리는 사람입니다. 중국에서는 유명한 학자들에게 선생님이란 뜻으로, <자>라는 칭호를 쓰는데, 한비도 한비자로 불리며 훗날 그의 저서도 <한비자>로 불립니다. 공자, 맹자, 순자, 양자 등은 모두 이름이 아니라 공선생님, 맹선생님, 순선생님 등의 칭호죠. 공자의 실제 이름은 공구입니다.

한비자는 전국시대의 가장 혼란한 시대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이사와 법가사상을 함께 공부하였습니다. 이들의 법가사상은 유명하여 이사는 진나라의 유명한 재상이었고, 한비자 역시 초나라에서 재상급으로 대우받던 인물이었습니다.

어느날 진나라의 왕은, 한비자의 법가사상이 무척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이사에게 부탁하여 한비자를 진나라로 초대하였습니다. 한비자의 법가사상은 <법치주의 사상>으로 당시 법가사상 중 가장 실용적인 것이었고, 중국 역대 왕들이 가장 이상적을 생각하는 법가사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사는 동문인 한비자가 진나라에서 출세하는 것을 경계하였씁니다. 이사는 진나라 왕에게 이렇게 한비자를 모략하였습니다.

<한비자는 초나라 사람으로 초나라를 위해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말하는 계략과 사상은 진나라를 분열시키기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사는 한비자를 감옥에 가두고는 기회를 봐서 그에게 독약을 마시게 강요하였습니다. 결국 한비자는 이사에 의해 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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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비자 - 법이라도 군주의 맘을 상하게 해서는 위험하다.

저서 <한비자>의 세난편에는 <역린>이라는 유명한 말이 나옵니다. 원래는 역사적으로 많이 쓰인 말이었는데, 요즘은 무협지나 소설에서 많이 쓰더군요. ^^:

<역린>은 한비자가 중국의 4대 신성한 동물인 봉황, 호랑이, 거북이, 용 중 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다룬 말입니다. 중국 은나라 때부터 <사령>이라고 해서 이 4마리 동물을 사방의 수호신으로 생각하였답니다. 물론, 이 <사령>은 중국 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에서 공유하던 개념이었습니다. 고구려에서도 주작, 백호, 현무, 청룡의 사신도가 있죠? 요즘 태왕사신기에 나오더군요.. ㅋ

동아시아에서 4령의 으뜸은 용이거나 봉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을 용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임금의 얼굴은 용안, 임금의 옷은 용포라고 하지요.

한비자는 자신의 법가사상이 <군주>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에 대해서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사상이라도 임금의 화를 불러오면, 자신에게 불리할 것임을 알고 있으니까요.

<역린>이라는 말은, 용의 거꾸로 난 비늘을 말합니다. 한비자는 용을 임금이라고 생각하면서 용의 역린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용이란 상냥한 동물이다. 잘 길들면 타고 다닐 수도 있는 동물이다. 그러나 절대 건드려서는 안될 부분이 있다. 그 목 아래에는 길이가 한 자나 되는 거꾸로 난 비늘이 딱 한 장 있다. 만일 이 비늘을 건드리는 자가 있다면, 용은 미쳐 날뛰게 된다. 그 사람이 누구든 죽여 버린다. 군주 역시 용과 같다. 그러나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는 것이니, 이 것을 건드리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

이후로, 임금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을 <역린을 건드린다>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또 절대로 해서는 안될 금기라던가, 큰 화를 일으킬 수 있는 원인이 되는 것이 있다면 이것 또한 <역린>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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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린의 원문 출처 : 한비자, 세난편(역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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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 속 역사여행 3) 사족 : 뱀의 발을 그리려고 하다.

1. 사족의 뜻...

사족은 뱀의 발이라는 뜻입니다. 뱀에게는 발이 없는 데, 뱀의 발을 굳이 그린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전국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한 번 볼까요?

출처 : 전국책에서, 초나라 희왕 6년의 일

2. 고사의 내용

춘추전국시대에 있었던 일입니다. 당시 초나라의 국력이 상당히 강하여 주변국들이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초나라의 재상 소양은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를 격파하였으며, 다시 군대를 동으로 이동하여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습니다.

제나라의 민왕은 초나라의 공격이 두려워 진진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진진은 자신이 가서 해결하겠다고 말하고는 초나라 군대를 찾아가서 소양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진진이 말하기를,

<초나라의 국법에 대해 물어보겠죠. 적군을 쳐부수고 적장을 죽인 자는 어떤 상을 받게 됩니까?>

소양이 말하기를,

<그런 사람에게는 상주국의 벼슬을 내리고, 높은 작위의 옥(구슬)을 받게 됩니다.>

진진이 말하기를,

<상주국보다 높은 벼슬이 있습니까?>

소양이 말하기를, <그건 내가 맡고 있는 영윤이오.>

그 말을 듣고 진진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그대는 이미 영윤이고 초나라 최고의 높은 관직에 있는 사람이구려. 그런 당신이 제나라를 친다고 해서 더 높은 관직을 받는 것은 아니지 않소? 내가 재미있는 얘기를 해 드리리다.>

진진은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노비들에게 큰 사발에 가득 술을 따라 주었더니 노비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럿이 이 술을 마신다면 양에 차지도 않을테니 땅 바닥에 뱀을 그려서 제일 먼저 다 그린 사람이 혼자 마시면 어떻까?"

그 의견에 찬성한 노비들은 모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한 노비가 내가 제일 먼저 그렸다면서 술 사발을 들고 마시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발까지도 그릴 수 있어" 하며 뱀의 발을 그렸습니다.

이 때 나중에 그림을 다 그런 노비가 그 술잔을 빼았으며 술을 벌컥 먼저 마셨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뱀에게 발이 어디있느냐? 그건 뱀의 그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지요.

소양, 당신은 이미 초나라의 고위 대신이요. 그리고 위나라를 공격해서 명성이 높소. 당신이 쌓은 공과 위대함은 이미 최고요. 최고의 벼슬 위에는 더 높은 벼슬이 없는데도 지금 군사를 움직여서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고 있구려. 당신에게는 더 높은 벼슬을 할 길도 없을 뿐더러, 만약 패하는 날에는 그대는 죽게 되고, 관직은 떨어져 비난만 받을 뿐이요.

당신이 제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이미 그린 뱀에다가 발을 그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오? 이제 싸움은 그만 두고, 제나라에 은혜를 베푸시오. 그러면 얻을 수 있는 것은 충분히 얻고 잃는 것은 없게 되오. 사족을 그리겠소, 아니면 술을 마시겠소?>

소양은 그 말을 곰곰히 생각하다가 그 말이 틀린 말이 아닌 듯 하여 군사를 거두고 물러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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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이야기 28 -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나라의 통일 배경

이번 장에서는 진나라의 통일 배경만 다루어 보겠습니다. 진에 대한 이야기는 통일배경론, 진의 정치사, 진의 제도사로 나누어 3파트를 정리하고, 나머지 파트에서는 진나라가 중국 역사에 남긴 유산 부분을 다루어 보죠. 그게 진나라 이해에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1. 진의 통일 이전부터 추구해온 통일사상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부터 <춘추전국시대>에는 통일론이 각 제자백가 사상 속에서 내포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제자백가의 각 사상들은 자신들의 사상의 논의의 궁극적인 목표가 모두 이 혼란한 세상이 끝나고, <통일된 국가>가 탄생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단지 그 방식이 달랐을 뿐이지요. 유가는 도덕원리로서, 법가는 법치원리로서, 묵가는 겸애사상으로, 도가는 자연철학으로 그 방식이 달랐지만, 모두가 통일을 원한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 전국시대의 통일은 이러한 혼란기를 극복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당시 사람들의 바램이 이루어전 것입니다. 통일의 방식 중에서 법가사상이 가장 군주의 이상적 통치방식이라고 생각하였고, 그 방식을 통해 진이 통일을 이루었던 것 뿐이죠.

세계사적 보편성으로 보아도 초기 철기를 넘어 본격적으로 철기가 보급되는 시기에는 대부분의 소국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이나, 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와 같은 강력한 통일국가들의 통치이념이 대부분 강력한 법치주의를 통한 각종 제도 개혁이었다는 사실을 볼 때 <엄법주의 사상>이 이 시대에는 가장 잘 적용되었던 듯 싶네요.

법가사상의 가장 큰 장점은 엄격한 국가 통제 아래에서 <경제력>을 통일시키기 좋다는 점도 있습니다. 실제, 춘추전국시대에는 인위적인 각 국가간의 관세 장벽, 화폐, 도량형의 불일치로 인하여 당시 성장하고 있던 상공업 계층의 불만도 많았습니다. 따라서 통일은 곧 정치적 통일 뿐 아니라 경제적 일원화도 뜻하는 것이었으며, 진시황이 통일 후 바로 강력하게 화폐, 도량형, 도로 등을 통일하거나 정비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실제, 페르시아를 통일한 다리우스 1세기에도 진시황제와 거의 비슷한(똑같은 것도 있더군요) 경제 통일 정책을 실시하는데, 역시 통일 전 경제적인 단위의 불일치로 인한 문제점이 있었다는 점을 반증합니다.

또 진시황의 통일은 <중화>라는 개념을 통해 뭉치려고 했던 주나라 이후 중원 민족들의 일체감이 완성되었다는 것도 반증합니다. 실제 은, 주대에는 황하강 유역만이 중화의 개념이었으나, 춘추전국시대 이후 <초, 월, 오>라는 양자강 국가가 등장함으로서 이들 역시 <중화>로 포함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계속되었습니다. <초>는 스스로도 남방의 오랑캐가 이닌 <중화민족의 일부>임을 자처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서방의 오랑캐 취급을 받아야 마땅한 서부의 <진>이 통일함으로서 서-중-남을 통합한 <중화>개념이 등장합니다. 즉, 중국민족이라는 보편 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나, 당시 진이 너무 빨리 망한 관계로 중국 민족을 뜻하는 한족은 다음 왕조인 <한나라>에서 비릇됩니다.

또 서-중-남의 통합은 이제 북- 동부 오랑캐 정벌이라는 시각에서 중화의 영역의 확장을 시도합니다. 진나라는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를 중화 외의 경계로 설정하였고, 한나라는 동부 고조선을 외부 경계로 설정하면서 이들 민족과의 투쟁이 시작되는 것이죠. 남부로는 양자강 훨씬 이남이 이제 오랑캐의 영역이 된 것입니다. 서부는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더 나아갈 곳이 적었으므로 오랑캐의 개념과 함께 다른 세계와의 소통을 할 수 있는 무역권으로 인식을 합니다.

또 하나 중국 통일의 배경은 바로 북방 <흉노>의 강성합입니다. 강력한 유목민 문화권의 흉노가 중화문화권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중국인들은 하나로 뭉쳐 대항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국가든지 강력한 통일 국가가 등장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있었고, 이것은 <진>이라는 오랑캐 국가가 중원을 통일했음에도 그 통일을 이민족의 침입으로 보지 않는 관점이 성립된 듯 싶습니다.

2. 그럼 왜 하필 진이였는가?

서방의 진이 중국을 통일한 가장 큰 원인은 <상앙>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법가주의 사상의 수용입니다.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진의 변법은 1차, 2차, 3차로 이어지면서 계속적으로 국가 개혁을 끊임없이 시도했는데, 주변에 강국이 없는 서부의 외진 국가라는 점이 변법 수행을 차질없이 진행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이 변법을 통해서 진은 구세력을 일소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루었으며, 모든 백성들이 토지를 사유하는 제도를 완성하여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가합니다. 상앙의 제원전을 보면, 당시 농법기술의 발달이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예로, 당시에는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휴한농법이 이 때 도입되었죠.(유럽 중세에서의 삼포제가 보통 9- 10세기 정도에 정착되는 것으로 미루어 천년은 빠르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따라서 모든 백성들이 토지를 가지는 토지 사유제를 실시함으로서 국가는 엄청난 조세를 걷을 수 있었고, 이것이 철제무기를 원할히 생산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었습니다. 또, 농업의 안정은 군공수작제 등을 통한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부병제를 완성시켰고, 진에서는 중국 전래의 전차전, 보병전에 유목민족의 기마전법까지 더한 강력한 군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또 능력에 따라 재산과 권력을 재분배하는 변법의 원칙은 국왕이 신료들을 능력별로 통제할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인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진의 근거지인 서방의 영토는 위수분지를 포함하는 그 서역으로서 훗날 국제적 도시 장안 등을 이루는 천연적 요새이자 동서무역의 요충지로서의 가치가 높았습니다. 또 진은 중원보다 후진적인 지역이라는 틀을 벗기 위해 북방문화도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의 외교적인 역량도 높이 살 수 있죠. 진은 가까운 나라를 치기 위해 먼 나라와는 동맹을 맺어둔다는 <원교근공책>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진의 이 외교는 소진, 장의 등의 합종연횡 등의 제자백가 이야기에 자세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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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의 난립기에 제자백가 사상이 등장하다

1. 제자 백가 사상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

제자 백가가 춘추전국시대에 등장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차분히 정리해 볼까요? 우선 당시 춘추전국시대가 어떤 사회였는지에 대하여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들이 모두 제자백가사상의 등장 배경입니다.

일단, 당시 농업혁명에 의해 발전된 농업경제는 새롭게 재산을 축적한 서민층의 성장이라는 것과 맥락이 닿습니다. 이 서민층들은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가지고 전쟁에 참여하여 군공을 세운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이 <사> 계급에 새롭게 포함되기 시작합니다. <사>란 원래 귀족 주변의 사적인 종자 성격으로서 일종의 <가신 계급>으로 성장한 계급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점차 사회변화와 맞물려 성장하면서 지식인, 군사, 관료로 진출하게 됩니다. 이들은 지식을 배경으로 지배층에 포함되기를 원하였고, 그 대가로 군공을 세워 기존 제후층에게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실제 <사>라는 용어를 보면 무사계급인 사족으로 <국인>층에 포함된 하층무사라는 어원에서 출발한다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국가 체제에 맞는 입신출세를 원하였고, 군주를 보좌하면서 군주가 원하는 치국을 이루기 위해 헌신했던 신분상승의 욕구를 가진 계층입니다.

이러한 욕구와 맞물려 당시 사회에서는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도시국가들이 영토국가로 전환되는 과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군현제적 영토국가의 성립은 곧 사상과 지식, 학문적 논의가 국가단위에서 이루어지며, 전쟁을 통해여 그 지식의 범위가 확대됨을 뜻합니다. 따라서 봉건질서의 붕괴는 곧 사상의 자유와 지식의 보급이 일반 서민계급과 황하강의 중원을 넘어 양쯔강의 이남 지역인 오랑캐 지역까지 파급됨을 뜻합니다. 이것은 폭발적인 지식인 계급의 성장을 지원하는 사회적 요건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당시 각국가들이 혼란기를 맞이하여 각자 <부국강병>을 위한 인재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는 점입니다. 각 국의 군주들은 영토확장을 위해 인재를 우대하였고, 이것은 사상이 다양해지고, 다양한 학설이 각국에 전파되는 것을 장려하게 된 배경이 됩니다. 따라서 다양한 사상들은 각자 사학적인 학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다양한 사상들은 <사> 계층을 중심으로 고유한 사상체계로 <부국강병>의 근본적 방책을 제시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학자를 우대하여 다양한 사상이 모여 토론하던 곳이 제나라에 <직하의 학사>입니다.

2. 제자백가의 성격

제자 백가는 일단 사학적 성격을 가진 소규모의 학단들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당시 군주들의 부국강병책은 다양한 군주윤리와 사회윤리를 제시하였고, 그 윤리들은 각각 창시자로부터 구전으로 전달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아서 책이 부족했으며, 아직 한자라는 통합적인 글자 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시기에 각 지역별로 문자체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학단의 교육이란 스승이 제자에게 설명하고, 질문하고, 암기시키는 <도제적인 지식전달과 질문법에 의한 사고력 향상>이 제자백가의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자백가는 개인적 사상체계라기 보다 개인이 속한 <학단>의 사상체계로 정착된 듯 싶습니다. 물론, 그 학단내에서도 많은 분파가 있고, 분파마다 약간 다른 학설이 있기도 합니다.

제자 백가 사상은 <부국강병>을 위한 정치문제를 다루는 학문이 주를 이루다 보니, 그 학풍이 관료제적 국가 운영체제 및 입신양명을 위한 학문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자백가 사상은 지배층의 윤리와 지배층의 정치 방식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 제자백가의 논의가 있음으로서, 주나라 까지의 천명사상과 신정정치에 의한 미신적 정치관은 일단 탈피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문제가 신과 자연의 문제보다 선행된 문제로 인식되어 중국인 특유의 현실적 세계관의 기틀이 잡히게 됩니다. 또 지나치게 부국강병에 얽매인 철학 사상은 개인적 측면의 사상보다는 군현제적 체제에 부합된 국가윤리를 강조하게 됩니다. 중국에서는 춘추시대 이후 학문과 정치라는 것이 일원화 되어 <관료가 학자이고, 학자가 곧 관료>가 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형이상학의 문제들도 현실 정치가들이 논하게 되고, 이상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등의 문제도 부국강병이나 치국에 맞는 변법적 측면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백가의 한계를 말하자면 국가주의적 윤리관을 추구함으로서 개인주의적인 인간행복의 가치를 공동체적인 규칙에 종속시켰다는 점을 일단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의 신앙을 추구하는 내세적이고, 열정적인 가치관은 이후 중국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네요.

제가백가는 중국의 철학이 사학적 성격의 철학으로 출발하여, 동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유, 도, 음양, 겸애, 태극, 오행, 법치 등의 사상을 탄생시켰다는 것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사상들은 진나라에 의해 법가주의적으로, 한나라에 의해 유가주의적으로 일원화됨으로서 다양한 사상들이 획일화되어 음지에서 퍼졌다는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3. 제자백가의 형성 지역

제자백가 중에서 유가 사상은 서주문화권에서 많이 퍼졌습니다. 공자 자체가 노나라 사람으로서 중화권이었고, 유가는 중화의 근원지인 진, 위, 제나라 등에서 유행했습니다.

반면 유가를 차별애라고 비판하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겸애를 주장하였던 묵가사상은 중원을 벗어난 남방에서 유행하였습니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에 5패 7웅에 속하였던 남방의 최강국가 <초>에서 묵가사상이 가장 유행하였습니다. 유가와 묵가는 이념적인 대립 뿐 아니라 중원과 변방이라는 지역적인 대립도 심하였습니다.

도가는 원래 남방의 <초>에서 시작되었으나, 제나라 <직하의 학사>에 유입되면서 남북지역에서 고루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도가의 무위자연이나 소국과민의 주장은 당시 <부국강병> 이념과 일치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도가의 이념은 현실적인 정치이념보다 이상적인 관념 수준으로 유행한 듯 합니다.

법가는 강력한 법치주의적 통치를 주장하는 내용 때문에 전국시대 각국에서 유행했습니다. 원래는 <한, 위, 조> 등 주왕실의 근거지인 국가들이 신봉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초, 제, 진 등 변방국가들에 전파되었고, 각국의 변법 추진의 사상적 기반이 됩니다.

그러나 초기에 이런 지역색을 가지고 있었던 각 제자백가 사상은 전국시대 중기를 지나면서 상호 융합되어 각 지역별로 사상들이 서로 경합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결국 통일을 이룬 것은 진나라의 <법가주의적 부국강병책>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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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민지배체제란?

1. 제민지배체제

제민지배체제는 중국사를 공부할 때 중요한 단어로 등장하곤 합니다. 말 그대로 하면, <모든 백성을 지배하는 체제>로 왕권이 강화되어 국왕권이 모든 민, 토에 두루 미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국사를 좀더 중시하는 제 입장에서 정리하자면, 이건 그냥 왕권이 강화되어 중앙집권화된 것을 한자로 풀이한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옵니다. 한국 고대 사회에서도 삼국시대가 정립되면서 왕권이 강화되었고, 점차 부체제가 <제민지배>가 전환되었으니까요. 이 용어는 중국사만의 용어가 아니라 철기시대를 거쳐 국왕권이 강화되는 고대 국가 전반에 걸친 공통적인 보편적 용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쉽게 설명해보죠. 제민 지배란 <국가가 직접 인민을 지배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이것은 옛날 봉건제적 전통, 씨족공동체적 관습을 모두 소멸시키고, 군현제, 관료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국가의 전반적 지배체제입니다. 보통 세계사적으로 보면 철기시대에 이런 현상이 많이 나타나죠. 중국에서는 제민지배를 확립하는 가장 결정적인 개혁이 바로 상앙, 이회, 오기 등이 실시한 <변법>이라고 하는데, 한국사에서도 율령반포, 불교수용 등을 통해 국왕권이 강화되는 시기에 이런 제민지배화 현상이 시작되어, 신라통일기 전제왕권이 확립되면서 신문왕 대의 개혁으로 이 체제가 완성되었다고 보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제민지배라고 하면 보통 강력한 왕권을 확보하고, 민에게 토지를 부여함으로서 조세를 많이 걷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조세 수취는 보통 군사력 확보에 이용되었지요. 강좌중국사를 요약하면, 이 제민지배를 다움과 같이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중국통일과 부국강병을 위해서 생산력 및 생산자원을 확보하는 등 국가 총동원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민의 지배를 확고히 하는 제도를 말한다.

2. 중국에서의 제민지배의 방식

중국에서 제민지배가 확고히 된 것은 변법을 실시하던 춘추전국시대입니다. 제민지배는 보통 2단계로 이루어집니다.

1단계는 제민의 보호와 육성을 통해 국력의 기반을 닦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고, 토지사유화를 억제하여 백성들이 자영농이 될 수 있도록 국가가 유도하는 방책입니다. 이회의 평조법과 진토력, 서문표의 개간사업, 상앙의 제원전과 개천맥이라는 용어가 이것에 해당합니다.

2단계는 이렇게 육성된 자영농에 대하여 국가가 세금을 부과하여, 부국을 이루고 이것을 통해 병사를 육성하는 정책입니다. 이것을 보통 <부국강병>이라고 합니다. 즉, 자영농은 경작의 자유를 얻은 대신 부역, 토지세, 인두세, 요역 등 각종 의무를 부과받게 됩니다. 자영농의 감시는 군현제제를 성립시켜 전국에서 일원적으로 감시하고, 이 감시를 어길 경우 엄한 <율령>을 적용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통제를 위해 필요한 조치는 엄격한 법가주의 사상을 통한 통제입니다. 그리고 이 당시 율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부세를 공정하면서도 최대한 수취할 수 있는 <부세제도의 개혁>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이 부세제도의 개혁을 위해서는 특권층인 구귀족과 종래 봉건제도, 씨족적 관습은 필수적으로 타파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구래의 모든 관습은 율령이라는 엄격한 법적 제제를 통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민지배체제의 본질인 것이지요.

실제 제민들은 춘추전국시대에 많은 세금을 부과받았습니다. 그럼 춘추전국시대 세금제도를 한번 볼까요?

1. 토지세(전조) - 수확량의 1/10을 걷는다. 추세, 고세 등의 잡세 납부가 뒤따른다.
   2. 재산세(호부) - 재산세는 노동력의 정도에 따라 인두세의 개념으로 걷는다.
   3. 요역 - 요역의 노동력의 활용 여부에 따라 차등하여 걷는다.
   4. 군역 - 초기에는 상비군제도를 지향하였으나, 점차 정복전쟁이 심화되면서 국민개병제를 실시하여 전투력을 강화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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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의 변법운동 1(변법운동의 이유)

1. 변법운동이 필요한 이유

춘추전국시대에 변법이 필요했던 이유는 중국사 15장에서 설명했던 내용들이 전부 다입니다. 즉, 춘추시대 중기 이후 이제 각 국가는 기존의 씨족공동체와 봉건제도를 완전히 해체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고 왕권을 강화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옛 전통과 씨족적 관습, 봉건제적 혈연성을 모두 버리고, 반발하는 구귀족들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또한 날로 넓어지는 새로운 영토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새로운 관료제와 새로운 관리들이 필요했습니다. 또, 군현제를 확대하여 영역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방법을 가장 효율적으로 시행하기 위한 것은 엄격한 법을 적용하여 구 세력을 모두 죽이고, 법가주의적 중잉집권과 모든 인, 민에 대한 제민지배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죠. 변법의 가장 핵심적인 목적은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모든 백성과 모든 토지를 국가가 지배하고 세금을 걷는다는 <제민지배체제>의 실현입니다. 이것은 봉건제도 속에서 존재하는 구귀족의 지배방식을 중앙집권적 국가 지배 방식으로 바꾸어 영토와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한 국왕의 노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2. 변법을 실시하였던 각국의 재상들

위나라의 이회는 상당히 유명한 변법가였습니다. 그는 구귀족의 모든 봉록을 몰수한 다음에 구귀족 역시 능력에 따라 관직에 임명한다는 파격적인 변법을 실시합니다. 또 농업생산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진토력을 시행하였고, 물가안정책으로 평조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위의 서문표는 이러한 정책의 영향으로 대규모 관개사업을 하기도 합니다.

초나라의 오기는 군주권을 강화하고 귀족세력을 누르기 위해 봉토된 귀족은 <3대>에만 한하며, 그 이후의 특권은 없다는 것을 법제화하였습니다. 왕의 친척이라 하여도 세습의 특권은 없게 하였습니다. 왕권에 위협을 주는 귀족들은 <강변정책>을 실시하여 강제로 변방에 이주시켜 버립니다.

이 외에도 초의 공중운, 한의 신불해, 제의 추기 등은 유명한 변법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변법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사나이는 뭐니뭐니 해도, 통일국가 진의 기틀을 마련한 <상앙>입니다. 상앙의 변법은 파트를 나누어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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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에 등장한 <국>의 개념을 심화해보자.

1. 국이란 무엇인가?

앞에 중국사 12장에서 은-주-춘추시대까지의 지방체제와 국, 도, 비의 개념을 심층 분석하였습니다. 이번 장에서는 이 중 현재 국가의 개념으로 쓰이고 있는 <국>의 개념을 자세히 정리해 보도록 하죠.

국이란 원래 초기 씨족사회 및 군장사회에서 <족읍>이라는 독자적 취락을 기본으로 하던 공동체 사회를 말합니다. 주나라 시기 봉건제도에서는 이 <국>이라는 것은 왕이 하사한 봉토의 개념으로 제후가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던 곳이었죠. 그러나 사회 경제가 발전하고, 특히 철기 무기와 농기구가 등장하면서 국은 이제, 하나의 독립된 거대한 세력으로 발전합니다. 이 국이 주왕실의 <직할지> 수준에 맞먹는 생산력과 무기기술 단계에 들어서면 점차 독립하게 되는 것이지요.

은, 주 시기의 도시국가 수준에서의 <국>은 4개의 단위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특히 <도>에 사는 사람들은 <도성>이라는 성을 쌓아 중심 수도를 이루었고, <국>전체에는 <외성>을 쌓아서 국과 그 밖의 지역(비읍)을 구분하였습니다. 비읍에 사는 자들은 지배층인 국인으로 인정하지 않고, 민이라 불렀습니다.

1. 국 - 내성, 외성으로 구성되어 왕에게 국을 분봉받은 제후가 거주하는 지역
   2. 읍 - 원래부터 씨족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거주하는 곳
   3. 도 - 원래 제후가 경, 대부에게 하사한 분봉 지역이었으나, 춘추시대 중기 이후 국가의 수도로 인식되는 지역
   4. 비 - 국의 외성 밖의 지역으로 작은 소읍으로 구성되어 있는 공백지역

그리고 국의 교외에는 소읍으로 비읍이 존재합니다. 비읍이란 국과 국 사이의 공백이 되는 모든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이들은 야인, 비인이라 불러 국에 사는 국인과 차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비인들은 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집단적인 개간을 통해 농업을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철기 농기구가 도입되면서 집단 취락을 형성하여 생산력을 높이게 되었는데, 이로서 비읍의 생산력은 <국>의 생산력에 버금가는 생산력을 보이게 됩니다. 전국시대에 부국강병을 추구했던 각 <국>들은 이 비읍의 생산력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전쟁을 벌였고, 이러한 영토분쟁은 각 <국>의 영유권 주장으로 확대됩니다. 따라서 각 국은 이 비읍을 점령한 다음 <군>, <현>을 설치하여 이 지역을 행정구역화 한 뒤 세금을 걷어 상비군과 관료제를 유지한 제원을 확보하려 하였습니다.

2. 국의 신분질서

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는 바로 제후라 불린 국군(공)입니다. 국군이란 국에서 가장 높은 군주란 명칭이고, 제후는 왕이 분봉한 땅의 주인이란 뜻이며, 공이란 주왕실이 하사한 제후의 명칭입니다.

그러나 국을 지배하는 국군은 춘추중기까지만 해도 힘이 미약했습니다. 그들은 국에 사는 지배층(국인)들의 수장이자 대표자 정도의 위치였습니다. 군사, 제사는 국인들이 공동으로 하여 읍사공동체적 성격을 유지하였습니다. 특히, 제사란 조상신이 같다는 혈연적 유대를 유지하고 종법질서를 확인하는 절차로서 춘추시대 권력의 구조는 아직도 봉건제도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춘추 5패와 전국 7웅을 거치면서 강력한 패자 중심의 정치가 진전되면서 이런 구조는 군현제도를 통한 중앙집권적인 체제로 변화됩니다.

경, 대부는 원래 제후로부터 <채읍>를 분배받아 생활하였는데, 그들은 이렇게 받은 채읍 중 중심지를 <도>라는 본읍으로 만들어 독자적인 권한을 유지하는 지배층(국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땅을 분봉받은 대가로 전쟁에 적극 참여할 의무가 있었고, 공통의 제사를 통하여 종법적 혈연 관계를 확인하였습니다.

국에서 가장 낮은 지배층 계급은 <사>입니다. 사 역시 국인이었지만, 이들은 경, 대부보다 혈연관계가 소원해져서 하위 무사계급으로 추락한 지배층입니다. 그들은 전쟁 참여를 통해 그들의 특권을 유지하였고, 특히 제후, 경대부와 함께 제 3의 세력으로서 국의 지배자 계승권 분쟁, 외교 분쟁 등에 관여했습니다. 만약 국인간에 내분이나 싸움이 날 경우 이 <사>계층이 누구편인가가 상당히 중요한 변수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이 사계급은 초기에는 몰락한 국인계급이 많았지만, 점차 부국강병을 통해 군사력이 중요해진 춘추 중기 이후에는 실력을 통해 성장한 평민층이 숫자가 많아집니다. 이들 새로운 평민 지배층은 전쟁참여의 대가로 토지를 분봉받은 영주이자, 학문을 통해 성장한 제자백가가 되기도 합니다. 또는 경, 대부로 신분상승하여 제후 밑에서 <재상>이 되기도 합니다. 실제, 춘추전국시대의 많은 왕들은 현명한 인재나 강병한 장군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재상>, <장군>자리를 보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자, 맹자, 한비자 등은 각국에서 서로 초빙하려 했던 유명한 제자백가입니다.

여기까지가 지배층입니다.

이러한 춘추전국시대 지배층은 일반 백성인 농인, 공인, 상인, 천민 등과 구별되는데, 그 구별법은 <작>과 <예>라는 것을 통해서입니다.

작이란, 신 앞에서 지배층으로서의 의무를 선서해서 얻은 신분을 말합니다. 흔히 우리가 공작, 백작, 남작, 자작 할 때의 그 작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작을 행하는 의식과 예법을 <예>라고 합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고결함의 상징을 이런 <예법>을 아는가로 따졌기 때문에, 이 <예>라는 의식을 행할 줄 아는 사람이 바로 문명인이자, 국인입니다. 이 예는 사 계층까지만 베풀어지는 것이므로 이것이 바로 춘추전국시대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구별하는 방법이라고 하겠네요. 이 <예>라는 단어는 후대 <예절>이라는 뜻으로 인식되어 쓰입니다. 그리고 유가주의자들에 의해 <예>는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는 것으로, 꼭 인간에게 필요한 도덕으로 재인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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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주, 춘추전국시대의 지역 구조와 중화사상의 출현 배경

1. 은나라의 영역 구조

은나라 시대의 씨족 공동체적인 원시 사회에서는 지역 사회 구조가 왕을 중심으로 하는 3층적인 구조였습니다. 보통 우리가 국사나 중국사에서 고대를 논할 때, 흔히 말하는 <중층적 구조>나 <부체제>가 바로 은, 주 시대의 기본 구조입니다.

은에서는 기본적으로 모든 땅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왕의 땅이라는 왕토 사상을 바탕으로 하지만, 실제 토지 구성을 보면, 국왕은 자신의 본거지만 직할지로 가지고 있을 뿐, 실제 나머지 땅들은 각 부족장들이 독자적으로 영토를 구성하는 구조입니다. 서양으로 보면 그리스의 <폴리스>같은 도시국가 구조이고, 한국사로 보면 각 부족들이 모여 합의하는 <연맹왕국> 성격으로 볼 수 있겠네요.

그래서 은의 중층적이고 3층적인 구조를 보면 대읍(은왕 직할지) - 족읍(방백, 각 부족의 땅) - 소읍(종족단위의 마을)로 구성된 3층 구조입니다.

2. 서주 시대 초기 봉건제도에서의 지역 구조

이러한 구조는 서주시대에 <봉건제>성립과 함께 약간 바뀝니다. 봉건제도를 실시한 목적 중의 하나가 은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족읍을 주왕조의 체제로 재편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은왕조는 멸망했지만, 실제 은 왕조의 세력은 은 왕조와 연합하고 있던 각 부족의 족장세력들(족읍의 군장)들이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봉건제도는 소국의 군장들(족읍의 독자적 지배자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고민한 끝에 혈연적인 관계를 매개로 하여 토지를 분봉하는 형식으로 그 독자적 지배를 인정한 측면도 있습니다.

그럼 주나라 초기의 새로운 족읍 체제를 한번 볼까요?

은대부터 내려오는 읍은 새 제후가 그 영역을 지배하는 경우 옛 거주자는 새로운 봉건제후 밑에 들어가게 됩니다. 즉, 독자적인 옛 은의 영역에 주 왕실의 혈연성을 가진 제후를 파견하여 그 영역을 은이 아닌, 주의 영역으로 포섭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 왕실이 그 영역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파견된 제후가 그 영역을 독자적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직까지 중국 사회는 중앙집권화 할 만큼 민족적 동질성이나 고유 문화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죠. <중화>라는 개념이 있긴 하나 이것은 외부 적을 상대할 때 이야기이고, 각 부족은 아직 독립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중화>라는 중국중심의 공통 개념은 춘추전국시대를 넘어가야 완전히 확립됩니다.

주가 새롭게 개척하여 영역을 넓힌 새로운 족읍은 국가가 지정한 주왕실의 혈연 제후에게 분봉되어 그가 옛 은나라의 씨족 사회 지배자처럼 군림하면서 지배합니다. 이렇게 하면, 은주 교체로 인한 사회혼란을 줄이면서 효율적으로 은의 옛 부족국가들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국의 지배층은 인, 피지배층(정복민)은 민으로 구별함으로서 국의 구성원간에 계층적인 구별을 합니다. 지배층은 파견된 제후를 중심으로 민(정복민)과 전(토지)를 지배하며, 민은 직접생산자로서 국인의 소유물로 간주됩니다. 민(民)은 이 당시에는 정복된 노예라는 개념이 강한 단어이나, 훗날에는 지배자 밑에 존재하는 백성이라는 단어로 바뀌어 사용됩니다. 즉, 이 당시의 민은 인(人,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사람 대우를 받는 지배층 밑에서 존재하는 노예같은 민(民, 피지배층)이므로 당시 사회를 <노예제 사회>라는 규정하는 학설이 다수설입니다.

3. 서주 시대 중기 - 춘추시대의 지역 변화

춘추 시대에는 대읍-족읍-소읍이라는 3층적 구조와 인, 민 이라는 지배관계에 변화가 옵니다. 이것은 춘추시대의 혼란기에 국, 도, 비라는 새로운 지역 개념이 생겼기 때문이지요. 춘추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주왕실의 약화와 각 봉건제후들의 독자성 강화입니다. 봉건제후들은 주왕실을 받든다는 명문만 가졌을 뿐, 실제로 독자적 세력을 유지하면서 자국의 방어 태세를 위한 새로운 지역 개념을 제시합니다.

주왕실은 왕기(대읍)을 지키며 존재하지만, 제후들은 각각 족읍을 국(國) 이라고 칭하며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합니다. 또 제후들은 자신이 가진 국의 일부를 가신인 경, 대부에게 나누어 주는데 이것이 도(都)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피지배층이 거주하는 지역을 비(卑)라고 합니다. 국, 도에는 각각 지배층인 인과 피지배층인 민이 삽니다. 즉, 은, 주 시대와 같은 중층적 구조이나, 달라진 점은 제후들이 성장하여 족읍을 국으로 바꾼 것이지요.

당시 왕과 제후는 동족의 대표자 성격으로 절대적인 권한을 갖지는 않았습니다. 왕은 제후의 독립지역은 국을 넘보기 어려웠고, 제후는 자신의 영토에 거주하는 지배층인 인들에게 어느 정도 제약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한국사 초기 고구려, 백제, 신라의 귀족회의 체제나 연맹왕국 수준의 체제와 비슷합니다. 즉, 왕이 국의 민을 지배할 수 없고, 제후는 도의 민을 지배할 수 없는 각각의 독자적인 구조이지요. 고구려에서 지배층인 계루부 왕이 소노부의 종묘사직을 인정한 것처럼, 춘추시대에도 각각의 분봉자들의 영역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중국사에서는 이 시대에는 아직도 봉건제도의 역할이 유지되고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방>이라는 것도 존재했습니다. 이것은 읍에 속하지도 않고 수렵과 사냥으로 생활하는 이민족의 땅을 말하는데, 이들은 중국의 국가들과 상당히 많은 충돌을 했습니다. 중원의 국들은 이러한 방들을 <오랑캐>라고 불렀으며, 자신들의 땅인 국과 구분하기 위해 <방>이라 칭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대한 문명의 한 가운데라는 뜻으로 <중화>라고 부르고, 이민족들은 <변방>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4. 춘추- 전국시대의 국, 도, 비의 변화

춘추시대 중기를 넘어가면서 제후의 영토 확대로 국, 도, 비의 개념이 완전히 바뀝니다.

원래 주왕실이 분봉한 땅을 의미한던 국(國)은 이제 제후가 독자적으로 지배하는 집안이라는 뜻의 국가(國家)로 바뀝니다. 우리가 흔히 쓰고 있는 국, 국가라는 영토 개념은 여기에서 출현된 것입니다.

원래 제후가 경, 대부에게 다시 나눠준 땅인 도(都)는 성곽으로 둘러싸고, 종묘사직을 설치하여 경, 대부의 독자적 영토였습니다. 그러나 춘추시대 중기 이후의 도는 성곽으로 둘러쌓인 으뜸머리의 도라는 뜻의 수도(首都)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국가의 수도(서울)을 뜻합니다. 그리고 비(卑)는 비루한 백성들이 사는 피지배계급의 땅이라는 뜻에서 <변경>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각각 국가, 수도, 변경이라는 뜻으로 쓰이면서 역사적으로 보편적인 용어로 변환되는 것이며, 이렇게 국가, 수도, 변경을 갖춘 통일국가가 바로 <중화제국>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 진은 너무 단명한 까닭에 다음 한나라 시기에 이러한 중화제국이라는 보편적 이념을 유교적으로 정리하였으며, 이 한나라가 바로 <중화>를 대표하는 민족국가로 중국인들에게 인식되었습니다. 중국인을 <한족>이라고 부르고 중국말은 <한자>라고 하는 것은 모두 이 한나라가 과거 모든 사상적 체계를 차분히 완성하여 동아시아 문화의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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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전국 시대는 중국의 발전기였다!

1. 춘추 전국시대를 고깝게 보는 유교주의자들

전통적인 중국역사에서 춘추 전국시대는 부정적인 시대였습니다. 이것은 유교적 역사관이 기여한 바가 큰 것이었죠. 공자가 태어난 이 시기는 정말 공자 입장에서는 암흑기였습니다. 전쟁과 살육이 많았던 시기였기 때문이죠. 윤리에 기초한 사회확립을 주장한 공자의 입장에서는 요, 순 시대의 태평과 선양의 아름다움, 주나라의 봉건제도, 종법제도, 정전제도의 완벽함에 끌렸을 것입니다. 공자는 <춘추>라는 책에서 당시 시대를 암흑기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공자를 숭배하는 수많은 전통 유교사학자들도 춘추전국시대는 암흑기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유교적 입장에서의 암흑기라는 말을 맞을까요? 역사는 항상 새로운 시대를 추구합니다. 새로운 시대로 나가기 위해서는 진통이 필요하죠. 그것이 발전이든, 혁명이든, 쿠테다든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시대는 과도기를 겪게 됩니다. 서구 사회의 발전은 시민혁명이었고, 한국사회의 발전도 수많은 시민들의 항쟁과 산업화, 독재와 민주화의 열망이라는 얽힌 실타래를 풀면서 지금까지 온 것입니다.

춘추 전국시대는 절대 암흑기가 아닙니다. 실제 중국사회에서 가장 발전한 황금기 중의 하나로, 본격적인 철기 시대가 도래하면서 철기시대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들이 중국사회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나타는 사회 변화는 발전이었다.

춘추전국시대는 본격적인 철기시대입니다. 철기시대의 특징은 철제 무기와 철제 농기구의 사용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철제 무기는 정복 전쟁의 확대를 가져왔고, 철제 농기구는 농업혁명을 초래할 정도로 생산량의 증대를 가져옵니다. 따라서 봉건제도에 입각한 주대의 사회질서가 이 시대에 통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된 것입니다. 생산력의 발달은 각 지방 제후들의 영토확장 욕심을 부추기는 것이었고, 강력한 무기는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또, 당시 견융족의 침입으로 주가 낙양의 동주로 이동하면서, 제후들은 더 이상 주나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주나라는 그냥 종가로서 받들기만 하면 딀 뿐, 제후들은 상호 영토확장을 위한 정복전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복전에서는 많은 수의 병사가 필요한 관계로 종래 전투 양상도 전차전에서 보병전으로 바뀌게 됩니다. 수많은 보병 농민의 전쟁 활약이 중요시 되는 것이지요. 이 보병전에서 크게 활약한 것이 새롭게 지배층에 합류한 <사>계층입니다. 이들은 종래 귀족인 기병부대인 <대부>계층과 함께 전투에 적극 참여하여 말단 지배층으로 확고히 자리잡습니다.

이제 종법제도는 희식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왕실은 무능력해졌습니다. 그나마 존왕양이 사상을 바탕으로 주왕실을 형식적으로나마지지했던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가 오면, 약육강식의 패자전으로 바뀌어 주왕실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됩니다. 주왕실이 하는 일은 이제 정치, 군사적 업무가 아니라, 혈연관계에 있는 각 국을 위한 제사의식을 치루어 주는 것에 한정되죠.

3. 중국사회의 기본틀이 마련되다.

정치적인 측면

춘추전국시대는 여사적으로 <중국사회의 기본틀이 완성>되는 시기입니다. 이것은 봉건질서와 대읍-족읍-소읍으로 구성된 읍제국가체제를 근본적으로 탈피해 군, 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국가로 나가는 시기로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각 발전 양상을 살펴볼까요?

정치적인 측면에서 춘추전국시대는 주대 봉건질서가 점처 중앙집권적 군현제, 관료제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입니다. 주왕실은 낙양근처의 직할지만 차지할 뿐 아무 힘도 없었고, 각 국의 제후들은 스스로 왕을 칭하면서 <멸국치현>을 주장합니다. 멸국치현이란 제후들이 가진 국가를 부수고, 그것에 자신 국가의 행정구역인 군, 현을 설치한다는 뜻입니다. 이로서 봉건국가체제는 막을 내리고 중앙집권국가시기로 사회가 발전하게 됩니다. 이것은 대부분 국가들이 취하는 보편적 발전과정과 상통합니다.

또,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면서 가부장적인 군신관계로 전환됩니다. 주왕실처럼 군주가 영토를 분봉하여 독립된 제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군현을 설치함으로서 가신들을 철저하게 군주 밑에서 통제하게 되는 것이지요.

영역면에서는 읍제국가 단계인 도시국가가 전쟁 중 서로 병합되는 과정을 거쳐 영토국가로 발전합니다. 영토국가는 자신의 영토에 군현을 설치하고, 철기를 통한 확장사업을 계속 추진하는데 이 시기에 중국 영토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북의 라오허강 - 남의 양쯔강 이남의 영역이 확정되어 영토 확장이 가속되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측면

사회적인 면을 볼까요? 이 당시 중국사회에서 가장 큰 사회적 사건은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의 <화>개념이 완성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각 국들이 통합되고, 그들이 뭉쳐 이민족을 몰아낸다는 공통의 개념이 확립되어 민족구성이 단일화 되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민족과 문화가 동일하며, 중화는 다른 오랑캐와는 다른 우월성을 가졌다는 선민의식이 시작된 것이지요. 이 선민의식은 이후 중국 역사 2000년을 지배하는 중국인의 의식으로서 1000년간의 중화국가와 1000년간의 이민족 침입국가기간을 통해 더욱 더 견고하게 자리잡게 되는 중원의 원칙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철기시대의 영토확장 과정에서 사계층이 성장했다는 점입니다. <사>계층은 전쟁능력, 국정수행능력을 중시하는 혼란기에 부각되어 서민들이 지배층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특히, 각국은 부국강병을 위해 많은 제자백가들을 양성하였습니다. 즉, 사계층의 성장은 평민층의 성장과도 관련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 팔랑크스나 호민관계급으로 성장한 평민계급 아시죠?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경제적인 측면

다음으로 경제적인 면을 보면, 토지 소유자의 변화가 눈에 띄는 시기입니다. 특히 철기 사용을 통하여 개간사업이 활발하였고, 사계층이 성장하면서 평민들의 토지 소유 증대와 농업생산력이 확대되었습니다. 이로서 토지를 가진 자영농민층의 성장은 곧, 국왕에게 많은 세금을 가져다 주었고, 이것은 국왕이 중앙집권을 이루고, 관료제와 상비군을 마련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한 철제농기구와 우경의 확대로 경작지가 확대되자 양자강 이남의 개발도 시작되었습니다. 중국 문명이 황하에서 시작된 이유는 황하 유역은 석기로도 개발이 가능한 황토지대(황토 강가=황하)였지만, 양자강 유역은 철기가 아니면 개발이 불가능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자강의 개발은 중국이 남, 북부를 모두 농경지로 흡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비옥하고 따뜻한 남부지역은 이후 중국 농업의 중심지가 됩니다.

또, 이러한 생산력 발전은 철로 만든 화폐가 등장하는 배경을 마련하니다. 당시 청동화폐와 명도전은 고조선과 삼한사회에도 전파된 유명한 물물 교환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은 정기시장을 발달시켜 상업의 발달도 초래합니다.

당시에는 이러한 생산력 발전으로 <토지 사유화>가 진행되는데, 이 토지 사유화 현상은 공동경영을 상징하는 토지 점유에서, 토지의 분할점유로, 나중에는 개인적인 토지 사유로 확대 진행됩니다. 이 토지 사유를 극대화하여 지배층으로 성장하는 계급이 바로 한나라 시대의 <호족>입니다. 따라서 역사적인 용어로 사용할 때, <호족>이라는 용어는 지방색과 함께 토지소유자라는 부분이 꼭 따라다닙니다.

4. 춘추 전국시대의 역사적 의의

결국 이 짧은 글에서 주장하는 것은 춘추 전국시대가 절대 암흑기가 아닌 발전된 철기 문화 시기였다는 점입니다. 주대 봉건적 질서와 읍제국가체제가 무너지면서, 근본적인 사회 변화가 시작되었고 이것은 철기 사용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을 보편적 진행방향인 <중앙집권적 영토국가>시대로 나가게 됩니다. 그 역사적 사명을 이행한 것이 법가주의적 통치질서를 확립한 <진>나라의 통일입니다.

자, 그럼 이만 개관하고 춘추 전국시대의 이야기를 하나 하나 풀어볼까요? 혼란한 이 시대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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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의 역사적 의의

1. 춘추 전국시대의 구분 기준

보통 우리가 시대 구분을 할 때 서주는 호경시대라고 하고, 견융에 의해 서주가 동주로 쫓겨난 시대를 동주시대 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동주시대는 진시황이 통일할 때까지 계속되는 시대인데, 동주시대를 춘추, 전국 시대 2 시기로 나눕니다.

춘추전국시대의 구분은 여러 구분법이 있고, 사람마다 다르지만 일반적인 논의로 정리하겠습니다.

춘추시대는 공자의 춘추라는 책에서 유래된 말로, 이 시기는 견융족의 침입으로 동주가 시작된 시기를 말합니다. 전국시대란, 전국책이라는 저서에서 유래된 시기로 그 시작은 춘추시대 강국인 진나라에 하극상이 일어나 한, 위, 조 세 나라가 탄생하였고, 이것을 주왕실이 공인하여 이제 봉건제의 명분이나 의리가 사라진 시대를 말합니다.

그럼 춘추전국시대를 시작해 볼까요? 고고!! 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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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의 멸망과 미녀 포사의 이야기

1. 사회적인 모순

서주의 사회적 기반은 씨족제를 기반으로 하는 봉건제도(정치적 기반), 종법제도(사회적 기반), 정전제도(경제적 기반)이었습니다. 따라서 서주의 멸망 원인은 이 3개의 제도가 문란해지는 것을 원인으로 삼아 이해하면 쉽습니다.

실제, 서주 멸망은 봉건제도를 기반으로 한 혈연적 종법관계가 시간이 지나면서 소원해 진 것에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각 국이 독립적으로 서주의 영향력을 벗어나려 했고, 정전제로 대표되는 토지 공유제도가 문란해지면서, 토지의 분할점유 현상이 심해진 것도 하나의 멸망원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사기 등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바라보죠.

2. 서주 중기 이후 사회적 모순

서주 중기 이후 사회적 모순은 대내적으로는 봉건체제의 붕괴였지만, 대외적으로는 민족간의 분쟁문제였습니다. <중화>라는 개념을 바탕으로한 혈연적 봉건제도는 제후가 주왕실에 조공을 소흘하게 바치고, 공벌을 일심으면서 점차 약화되어 가고, 주왕실의 권위가 추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 왕실이 망하지 않고 독자적인 봉건세력들간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중화민족>으로서 이민족의 침입에 효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구심점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융적과 같은 이민족의 침입에 서주는 효율적으로 대처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서주 중기시대에는 <여왕>의 잔악한 폭정 정치로 지배계급인 국인들이 집단 반란을 일으켜 <제후의 공동관리체제>로 주나라가 유지되기도 하는데 이를 <공화행정>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후 주나라는 점차 약해지면서, 지배층간의 갈등이 심해집니다. 선왕 때 지배층간의 커다란 갈등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유왕 때에는 엄청난 정치적 실정으로 왕의 아들들이 내전을 벌이는 상황까지 치닫습니다. 이에 주의 각 세력들은 <중화>라는 개념을 버리고, 각각 이민적을 끌어들여 이 사태를 수습하려 했고 결국 주나라는 견융이라는 이민족에 의해 망하게 됩니다. 주는 견융에 쫒겨 낙읍으로 천도하여 <동주시대>를 시작합니다. 이전의 주를 서주, 새로운 주를 동주라고 하는데 이 동주시대가 바로 주가 약해지면서 각각의 제후가 국가를 세우는 춘추시대입니다.

3. 유교적 입장에서 본 서주 멸망의 단편성

중국 역대 왕조의 멸망을 다룰 때, 의아한 것은 사마천의 사기와 같이 상당히 합리적인 관점에서 왕조의 흥망을 다루는 중국인들이 가끔 엉뚱한 관점에서 왕조의 흥망을 이야기한다는 점입니다. 예로 여자가 설쳐서 나라가 망했다던가, 이민족을 끌어들여서 나라가 망했다라고 결론을 내리는 걸 말합니다. 이것은 중국 한나라 이후 기틀이 잡힌 유교사관의 영향입니다. 역사를 유교적 관점에서 교훈을 얻고 자숙하려는 의미로 해석하고, 유교 이념에 역사를 꿔어 맞추려고 했기 때문이죠. 예로 서주가 멸망한 원인은 더 구체적인 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이민족인 견융을 끌어들여 <중화인>들이 뭉치지 못했음을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 등등입니다. 이것은 서주 멸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멸망을 통해 중화인들은 뭉쳐야 한다는 교훈을 제시하는 유교적 사관을 역대 중국인들이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중국인들은 왕조의 멸망을 <여화>라는 관점에서 찾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특히, 역사적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고대로 갈수로 <여자의 화>라는 개념이 더 대두합니다. 하나라의 멸망은 요녀 <말희>의 복수로 인해, 은나라의 멸망은 역시 재녀 <달기>에 의해 망한 것이며, 서주의 멸망은 미녀 <포사>에 의해 망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가 멸망을 미인과 연계하여 여자를 경박한 존재이자 경계의 대상으로 인식하려는 중국 사관과 함께, 제왕은 여자를 멀리해야 한다는 도덕적 측면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보입니다.

4. 포사 이야기

포사는 서주 말기에 유왕의 포악한 정치에 의해 부모를 모두 잃은 미녀였습니다. 그녀는 왕에게 복수하기 위해 왕의 여자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포사는 절대 웃지 않는 미녀였습니다. 부모가 죽은 후 웃음을 잃었기 때문이죠. 포악했던 왕이지만, 그는 포사를 사랑했고 그녀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어느 날, 기름칠한 봉에서 한 일꾼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떨어져 죽은 사건을 보고 포사가 깔깔 웃었습니다. 왕은 그녀의 웃음을 보고자 많은 죄수들을 기름칠한 봉 위로 걸어가도록 했습니다. 많은 죄수들이 죽었죠. 그러나 포사는 더 이상 웃지 않았습니다. 왕은 그녀를 위해 많은 죄수를을 희생시켰습니다.

어느 날, 한 병사의 실수로 봉화대의 횃불을 올렸습니다. 군사들은 모두 전쟁이 난 줄 알고 무장을 하고 허겁지겁 모여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병사의 실수임이 밝혀졌고, 포사는 너무나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어대었습니다. 왕은 포사가 웃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시도때도 없이 봉화대에 햇불을 올렸습니다. 군사들은 이 때마다 허겁지겁 모여들었고, 각국의 제후들도 모여야 했습니다. 포사는 즐겁게 웃곤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견융족이 쳐들어오자 봉화대의 햇불을 보고 모여든 제후는 없었습니다. 모두 왕의 장난으로 여긴 것이죠. 유왕은 처첨하게 전쟁에 지고 맙니다. 그러고 이 때 포사는 정말 행복하다는 듯이 웃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제 역사일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국가 멸망에 관련된 역사적 사건에 미인을 연결시킴으로서 왕은 국정에 좀더 힘쓰고, 여인을 멀리해야 한다는 왕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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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신성왕조 <은나라>

1. 은나라를 개관해보자!

은왕조는 중국에서 유물이 발견됨으로서 가상의 왕조가 아니라 실제 존재했던 왕조로 최근 판명된 왕조입니다. 물론, 은대 이전 상왕조가 있긴 하지만, 아직 확실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여기서 내용을 서술할 객관적 근거가 부족한 관계로 중국의 왕조는 <은왕조(상왕조)>부터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상 왕조는 황하 중하류 일대의 <은허>라는 곳을 수도로 삼아 그곳에서 시작된 청동기 국가입니다. 문명 발생기에 시작된 최초의 왕조로서 그 국가의 구성은 수많은 도시 국가들이 연합한 연합왕국의 형태이지요. 그 도시 국가 중의 최고권력자가 <은>의 왕을 자임하는 형태입니다.

은 왕조의 성격은 신정정치 사회라는 점입니다. 왕은 정치와 종교를 동시에 주재하는 신관입니다.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에서 매게체의 역할을 함으로서 왕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보통 우리가 제정일치 사회라고 하는데, 일반적인 제정일치보다는 좀더 왕의 신성함이 강조된 국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은에서는 점인이 따로 있어 점을 보긴 하지만, 그 점에 대한 판단은 왕이 자의적으로 해석합니다. 또 천신사상이나 조상신 숭배 등이 아주 중요시되는 시대였습니다. 흔히 우리는 이러한 은 왕조를 <신성왕조>라고도 부릅니다.

2. <신성함>을 매개로 뭉친 도시국가들

은은 전술했듯이 몇 개의 도시국가가 연맹한 형태로서, 유력한 도시국가가 맹주가 되어 <은>이라는 나라를 이끌어 갑니다. 그러나, 연맹국가인만큼 정치, 군사적인 중요한 일들은 하늘의 자손들(씨족집단들)이 합의하여 처리하게 되죠.

은의 국가 구성은 일단 은왕이 있는 <직할지>인 <대읍>이 있고, 나머지 지방은 <족읍>이라 하여 왕에게 충성하는 <방백>들이 관할하는 구성입니다. 초기에는 왕위세습이 형제 상속이였지만, 후기에는 부자상속이 일반화되면서 은나라는 점차 강해지는 추세로 나아갑니다. 은나라에서 왕권의 <부자상속>이 확립된 시기 무렵에는 읍제국가(도시국가)들은 은에 부역, 병역 등 의무를 이행해야 했습니다. 은 왕은 그 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도시국가의 족장들을 <후, 백>으로 임명하여 통치합니다. 이것은 서양에서의 공작, 백작, 후작과 같은 작위제로서 은대에 이미 봉건제도가 존재하였다는 증거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은왕조는 다수 도시국가의 중앙정부 성격을 갖는 봉건국가로고 볼 수 있겠네요.

하지만, 은왕조는 이 봉건적인 체제를 계약관계 등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함>이라는 것을 강조하여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같은 하늘의 자손들이 지배자가 된다는 개념으로 조상숭배가 강조되었습니다. 거북이 뼈나 등피를 이용한 갑골문자 등에 의한 점, 복사 등을 보아도 알 수 있죠. 또 은왕은 하늘에 의해 점지된 자로서 신성불가침이라는 <천명사상>은 은왕조를 지탱하는 끈입니다. 달력으로 사용된 은력에서도 이러한 신성함이 엿보인다고 합니다.

특히, 은왕조에서는 아주 큰 왕의 무덤들이 발견되곤 합니다. 이것은 제사의 대상으로서 조상신을 모시는 종교의례를 뜻하며, 이것으로 보아도 <신정정치>, <조상숭배>, <제정일치>의 특징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한자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를 보면, 우주를 지배하는 천신(상제님, 하늘님)의 뜻을 묻는 복점이 많습니다. 이 복점은 국가대사와 일상생활 등 은나라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는 것으로서, 신정정치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입니다.

3. 그들의 단합은 <제사>, <전쟁>이었다!

은나라의 사회구조를 알기 위해 당시 지배집단을 살펴볼까요?

일단 지배계급으로는 국왕과 왕족이 있는데, 이들은 왕의 직할지인 <대읍>에 살았습니다. 지방은 제후들에게 후, 백, 방백 등의 칭호를 내려주면서 <족읍>을 분봉합니다. 대읍-족읍-소읍은 전 단원에서 자세히 다루었죠?

이러한 지배집단이 하나로 뭉치게 되는 것은 <제사>입니다. 같은 하늘의 자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제사가 중요하게 여겨졌으며, 다른 집단이 쳐들어왔을 때는 그것을 막기 위해 하늘의 자손들이 뭉쳐 <전쟁>을 치루게 됩니다. 따라서 은왕조에서 가장 강조된 관직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제사>와 <전쟁>에 관련된 관직들입니다.

은왕조에서 피지배집단은 일반 백성들과 노예계급입니다. 일반적으로 은대 사회를 노예제 사회라고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노예노동을 기반으로 지배층들이 생활을 유지하였으며, 노예의 명칭이 상당히 다양하고, 순장이 발달하였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노예제 사회가 아니였다는 반론도 많은데, 제가 중국사에 약해서 그 부분까지는 잘 모르겠네요.

은 나라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생산 단위는 <읍>습니다. 그 중에서도 제후들에게 나누어준 <족읍>이 가장 중심인데, 족읍은 원래 혈연관계로 맺어진 씨족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사는 마을이였습니다. 즉, 읍은 혈연성이 강한 사람들이 서로 모여사는 곳으로 볼 수 있죠. 그러나, 이 <읍>이라는 구조가 대읍 - 족읍 - 소읍 등으로 구성된 만큼, 읍 상호간에 <중층적인 예속관계>가 존재합니다.

4. 수준낮은 집단농경, 고도로 발달한 물질문명

은나라에서는 농업, 목축업, 우경을 했다는 기록이 갑골문에 암시적으로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은대의 청동기 사회는 아직 개별적인 농경이 발달하지 못하여, <집단농경방식>으로 농사를 지었을 것입니다. 씨족사회인만큼, 씨족들이 함께 경작하여 농업생계를 이어갔던거죠. 실제, 개별적으로 농사를 짓는 자영농민이 출현하는 것은 씨족공동체라는 사회 기본틀이 무너져야 가능합니다. 보통 씨족공동체가 무너지고, 실력 위주의 국가가 등장하는 것을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개별적인 자영농민이 등장하는 것도 그 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겠네요.

은대에는 또 수공업이 발달하였습니다. 기술자는 공인계층을 형성하여 관청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청동기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사회였습니다. 보통 우리가 은대 문화는 이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문화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 청동기 문명 때문입니다. 청동기 물질 문화는 엄청나게 고도로 발달한 선진적 물질문명사회가 은나라인데, 그에 비해 정신 문명이 너무 뒤떨어집니다. 종교관이나 자연관 등 정신세계는 복점을 본다던가, 신의 후예들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수준에 머물고 있습니다. 은나라에 발달된 청동기 문명은 조상신의 숭배 정도에 이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운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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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의 도시국가설과 읍제국가설

1. 도시국가설

청동기 시대인 은, 주 시대의 국가란 어떤 형태였는가에 대한 논쟁이 많았습니다. 그 내용을 크게 2가지 분류로 볼 수 있는데, 이중 1번째가 도시국가설입니다.

도시국가설의 주요 내용은 중국 은, 주 시대가 세계사의 고대 국가 발전 단계와 일치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서양에서 도시국가란 그리스의 폴리스, 로마를 말하는데, 이들 그리스와 로마는 식민도시를 건설하면서 제국적 발전형태로 나아갑니다. 중국의 은, 주도 조그마한 도시국가에서 출발하여 제국으로 나아간다고 보는 입장이 이 입장입니다.

세계사적 보편성에서 보면 <씨족사회 - 도시국가 - 영토국가 - 통일국가>로 나아가는 것이 도시 국가 발전의 일정한 패턴이고 중국의 은, 주는 이 패턴에 딱 맞는다고 본 것이지요.

그 공식에 맞추어 보면 은대 초기 = 씨족사회 / 은대후기와 춘추전국시대 = 도시국가 / 전국시대 = 영토국가 / 진나라, 한나라 = 통일국가..   이렇게 됩니다.

2. 읍제국가설

읍제국가설의 주요내용은 은, 주 국가의 발전단계보다 은, 주 사회의 사회 내부 구조를 파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즉, 이 당시는 씨족공동체 사회로서 씨족공동체가 이끌던 사회였는데,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면서 국가의 성격이 점차 바뀐다는 것이 핵심주장입니다.

이 국가설에 따르면, 은, 주 시대는 읍제국가(씨족공동체국가)입니다. 이후 봉건제도는 주왕실이 씨족적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체제재편을 위한 제도였습니다. 그리고, 춘추전국시대는 씨족적은 읍제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영역국가로 나아가는 시기입니다.

3. 은대 읍제국가의 사회 구조

은, 주의 사회 기본 단위는 씨족공동체 사회입니다. 사회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반은 혈연성을 기반으로 하는 <읍>입니다. 읍은 씨족공동체 마을을 말합니다. 이 읍을 중심으로 국가가 구성되어있죠.

그런데, 이 읍은 3층 구조로 이루어집니다. 대읍은 은왕이 사는 왕도를 말하며, 족읍은 그 밑에 종속된 가신(후, 백, 방백)이 머무는 곳입니다. 마지막으로 소읍은 족읍에 종속된 작은 혈연단위의 씨족공동체 마을을 말합니다. 이 3층 구조의 읍이 춘추 전국 시대 이후 국, 도, 비 라는 개념으로 바뀌게 된답니다.

이렇게 수많은 읍들은 2가지를 매개로 하여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씨족제사와 씨족공동체적 군사행동입니다. 제사를 통하여 같은 계통의 민족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며, 전쟁을 통하여 이민족을 정벌하고 영토를 유지했으니까요. 이 3층 구조의 읍은 족읍이 사회 기본단위를 이루며 소읍을 지배하고, 대읍에 복속하는 <중층적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4. 주 대 읍제국가의 변화

전술했던 3층적 읍구조는 서주시대에 변하게 됩니다. 대읍-족읍-소읍의 구조는 춘추시대에 와서 국-도-비라는 구조로 바뀌게 되죠. 이 국-도-비도 상하 종속관계로 설정된 <중층적 질서>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점은 여기서의 <국>은 국이라는 곳 안에서도 계급을 분리하기 시작합니다. 국에서 지배층은 <인>, 국에서의 피지배층은 <민>이라며 구분하기 시작하죠. 그리고 읍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곳은 <방>이라고 부릅니다.

정리해보면, 씨족공동체의 사회인 은, 주는 춘추전국시대에 이르러 점차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춘추 5패, 전국 7웅이 나타나는 시기에 씨족적 질서가 파괴되는 대신, 강력한 영역국가가 출연하게 되는 것이지요. 사실, 주나라의 봉건제도 역시 주의 지배계층인 제후, 경, 대부가 각각 중층적으로 땅을 나눠갖고, 농민이 피지배계층이 되는 <중층적 씨족질서>였습니다. 그리고 이 중층적 질서의 정점이 바로 왕이였구요. 왕은 모든 국토와 국인은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중층적 질서가 그 사회를 이끌어갔던 것입니다. 이러한 질서를 무너뜨린 것이 전국시대의 부국강병 사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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