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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스콜라 철학사 5 - 보편논쟁 제 4장 : <유명론>

스콜라 철학사 5 - 보편논쟁 제 4장 : <유명론>

스콜라 철학의 다섯 번째 시간으로 여기서는 보편논쟁 중 <유명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유명론을 정리하면서 유명론과 관련된 다른 이론들도 마저 정리하고, 스콜라 철학부분의 길고 긴 포스팅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중세 철학만 하다가 며칠이 가겠네요... 휴.... (보편논쟁 마지막 장입니다)

1. 초기의 유명론

유명론은 보편적 관념을 인정하지 않는 <실재론>의 반대 개념이었습니다. 초기의 유명론자들은 보편적 관념은 사람들이 만들어 낸 단순한 명칭에 불과하므로, 그것이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대표적인 학자는 로스켈리누스인데,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보편이란 것이 어떻게 존재할 수가 있는가? 모든 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물에서 시작한다. 개체적 사물이 존재한 이후에, 그것의 범주를 묶어 보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보편은 개체보다 후행한다.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말을 다르면, 귀납법과 연역법적 사고 방식이 이 당시에도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실재론이 <신의 존재>를 당연히 인정한 다음에 개별 사물에 대한 인식을 시도한다고 본다면, 유명론은 <개별 사물>을 인정한 연후에 커다란 <이데아>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니까요. 실제, 실재론, 유명론이 중세 이후 경험론에 영향을 많이 주기는 하지만, 실재론 자체가 연역론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직 조심스럽습니다. 그리고, 유명론은 이데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주장은 좀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네요.

유명론에 대한 내용을 이렇게 정리해 볼까요?

실제론 : 모든 사물은 신의 정신속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사물의 본질은 이데아에 있다)
   유명론 : 모든 사물은 개체만이 존재하여, 보편이란 것은 없다. (사물의 본질은 질량안에 있다)
   개념론 : 보편은 초월적 이념이 아니라 개별자들과 함께 그 속에서 공존한다(아벨라르의 입장)

2. 유명론은 탄압받았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유명론보다는 실제론이 우위에 있었습니다. 일단, 초기 교부철학자들부터가 <신플라톤 학파>의 실재론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중세 철학의 삼위일체설 자체가 신의 존재를 보편화하는 <실재론>적 입장이었습니다. 이 실재론을 인정하게 되면 <성부-성자-성신이 어떻게 하나일 수 있는가> 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체계화>하기가 편리했습니다. 3위일체란, 논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성령-예수가 일원화되어 있다는 것을 <신비주의적>인 믿음으로 간주하기 딱 좋았죠. 따라서 중세 시대에는 신은 곧 인간이 지식체계로는 파악할 수 없는 <절대적 이데아>였습니다.

그러나, 유명론은 (교황청과 결탁하지 않은 경우에는) 탄압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논리상의 체계가 <신의 섭리>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예로, 신이라는 보편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개별 교회를 각각 따로 인정하는 경우, 하느님과 교황청이라는 중세 보편적 매개체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유명론에 따르면 모든 개인은 각각 자신 스스로 책임을 지는 개별자가 됩니다. 보편이란 없으니까요. 따라서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확립한 <원죄론>에 맞지 않습니다. 인간은 원래 선악과를 먹은 뒤 <원죄>가 있었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면서 그 원죄에 대한 구원 가능성이 생겼는데, 유명론의 이론대로 <각각 개별적으로 살고, 개별적으로 지은 죄가 있는 것이라면> 기독교 교리는 무너집니다.

따라서 중세 사회는 거의 대부분 실재론이 지배하였으며, 유명론은 음지에서 이루어진 주장이 많았습니다. 실제 유명론의 체계적 이론이 사회적으로 대두한 것은 중세 말기 <스투터스, 오캄>이 등장할 무렵입니다.

3. 중세 말에는 교황이 오히려 유명론을 이용하기 시작하다.

중세 말에 교황권이 약해지고, 교회의 세속지배력이 약해지자, 각 개별교회의 힘이 강해졌습니다. 교황청은 위기를 극복하고,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을 막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유명론을 변형한 이론들이 교회내부에서 힘을 얻습니다.

유명론에 따르면, <하늘의 보편적 신>이라는 개념보다, 지상의 개별 권력에 더 중점을 둡니다. 따라서 보편성을 부정함으로서 <보편적 신>의 대리인인 <교황권>을 더 강화하려고 시도합니다. 원래의 유명론과는 거리가 먼 세속적인 이유로 유명론을 변형한 것이죠.

따라서 교황은 자신을 <지상에서의 신의 대리자>로서 절대화 하고, 교황의 절대권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실제적으로는 <실재론>을 지지하면서도, 일부 교황권 강화를 위해서는 유명론을 도입하는 것이죠. 교황은 신의 대리인으로서, 교회가 하느님을 대신하여 신자를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교황은 신의 대리자로서 <화려한 건물>을 지어야 하며, 신읠 대신할 심판자로서 <면벌부>를 판매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황청은 자신들에게 해가 될 수 있는 이론들(오캄, 스투터스, 위클리프, 후스 등)에 대해서는 유명론, 실재론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여 <이단>으로 처벌합니다. 결국 중세 말기에는 실제론도, 유명론도 아닌 이상한 논리가 성립되어 중세 교회가 스스로 무덤을 파기 시작한 것이죠.

이러한 이상한 논리에 반항하여, 교황보다는 <셩경>을, 논리보다는 <믿음>을 강조하면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이미 위클리프, 후스 등의 교회개혁 사상에는 종교개혁적 성향이 많았다고 합니다.

4. 아벨라르 : 개념론이 등장하다.

개념론은 보편논쟁을 종합하여 유명론, 실제론을 통합하려는 시도입니다. 이것은 아벨라르가 처음 시도하였는데, 그는 변증법적인 논리로 보편논쟁을 정리하려고 하였습니다. 이 논리는 다음과 같은 변증법적 논리입니다.

1. 정 : 보편적인 것은 실재한다
   2. 반 : 실재하는 보편적인 것은 개별적인 것을 떠나 따로 실재하지는 않는다.
   3. 합 : 보편성과 실재성은 모두 하나안에 내재되어 있다.

그의 논리는 이것입니다. 보편적인 것은 항상 개별적인 것과 함께 존재하며, 이 둘은 파트너입니다. 만약, 혼자 존재하는 보편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추상적으로 상상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정, 반, 합을 통하여 잘못된 것을 <회의>하고, <탐구>하여 진리에 도달하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 변증법적 논리에 의해 쓰여진 그의 저서가 <긍정과 부정>입니다. 이 책은 이전 모든 교부철학자들부터 그 이후의 논쟁을 정리하여 변증법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성경의 논리에 부합되도록 정리한 책입니다. 이것을 토대로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변증법적으로 처리한 학자가 바로 전 포스트에서 설명한 <토마스 아퀴나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철학 체계를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 바로 <교회법>이었습니다. 유명한 교회법은 볼로냐 대학에서 체계화한 <그라티아누스 법령집>입니다. 이 법령집은 종교회의, 교황의 명령 등을 모아 체계적으로 만든 교회법이었습니다. 이 법이 생기면서 교황입법이 정당화되었고, 교횡법정이 전 유럽을 지배하는 최고 법정으로 규정되어집니다.

이렇게 하여 아벨라르, 토마스 아퀴나스를 거쳐 보편 논쟁은 일단락 된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교황법을 통하여 중세 교회는 전성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세 말기가 되면 다시 유명론이 득세하면서 교회 세력의 레임덕 현상이 가속되 됩니다. 마지막으로 중세 말기의 유명론을 한번 볼까요?

5. 14세기의 <윌리엄 오캄> : 프란체스코파는 철저하게 아퀴나스를 비판하다

프란체스코파의 윌리엄 오캄은 철저한 유명론자입니다. 그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주장한 것을 비판합니다. 지상세계와 신의 세계를 무리하게 연결하는 것도 문제고, 플라톤 철학 체계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체계에 집어넣어 일원화 시키려는 것은 <짜집기 철학>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신앙과 철학은 분리되는 것이 오히려 <신학>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고, 철학이 신학에 종속되면 아퀴나스 처럼 억지 학설이 나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가장 먼저 비판한 것은 실재론의 <이데아론>입니다. 아퀴나스는 <감각적 경험>도 중요하지만, 이데아라는 신의 섭리가 더 중요하다고 했는데, 오컴은 그것을 비웃습니다. 개개인의 감각은 느끼고, 지성으로 파악하는 것이지 <신을 생각해서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는 아퀴나스와 같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중요시하지만, 아퀴나스가 <이데아론 : 신플라톤 철학>과 그것을 융합하려 한 것에는 철저히 반대합니다. 오히려 아퀴나스의 <온건적 실재론>은 어설프다고 비웃습니다.

그는 보편자가 개별적 사물들 속에 있다는 것마저 부인합니다. 그는 아예 보편자가 없다고 까지 말하면서, 오직 존재하는 것은 개별적인 것 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철저한 유명론이라고 합니다. 그가 말한 <실체는 필요없이 증가되어서는 안되며, 오직 개체뿐이다>라는 주장을 <오컴의 면도날>이라고 부릅니다.

그의 주장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개체와 보편의 철저한 분리입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신앙과 이성의 분리>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이데아>라는 절대성을 부인하면서, 개체만을 고집하였고, 이것이 후에 자연과학적 사력을 중요시하는 <경험론>으로 연결됩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교황권과 철저하게 대립됩니다. 왜냐면, 오직 개체만을 강조하는 사상을 오캄이 말하므로서 <교권정치, 교권제도>보다 <개별적인 신과의 대화>가 중요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캄의 유명론은 철저하게 탄압받습니다.

6. 14세기 위클리프 : 대학에서도 교회를 비판하다

위클리프는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입니다. 그는 중세말 교회의 부와 사치를 철저하게 공격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그는 신자들의 생활 방식은 교회의 가르침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며, 형식적으로 예수를 믿는 <실체변화설(신교에서는 화체설)>을 부정합니다.

화체설이란, 성체와 성혈은 예수의 몽과 피라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빵과 포도주를 제자에게 주며 예수를 기억하려고 하였는데, 교회에서는 미사 때마다 사제가 빵과 포도주로 축성합니다. 이것은 진실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믿음입니다. 이것을 성체를 받아먹는 다는 뜻으로 <영성체>라고도 합니다. 위클리프는 이것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믿음이 의식에 있지 않음을 주장합니다.

교회의 재산이 무엇으로 유지되는가? 그것은 신성한 왕권이 교회의 종이였고, 제후들이 열심히 싸워 교회를 보호해 주었으며, 신자들이 교회를 믿고 교회세를 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 죄를 범한 성직자가 성사를 하는 것을 무효이다. 순결하지 못한 자가 교회의 제단에 앉아있는 것은 범죄이다. 성사라는 것 자체가 영혼을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닐뿐더러 믿음이 없는 자의 가르침은 죄악일 뿐이다. 카톨릭의 생활은 청결과 믿음이다. 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교회의 가르침이 성경에 어긋나기 때문일 것이다. ..... 예수는 영적인 존재이다. 예수는 결코 빵이나 포도주와 같은 의식으로서 믿음을 베푸는 존재가 아니다. 예수는 사랑이다. 사랑이 없는 성사와 사랑이 없는 미사와 사랑이 없는 복음은 모두 무효이다.

그의 주장은 교회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기회를 보고 있던 <영국 귀족>들에게 환영받습니다. 하지만, 그가 교회 재산과 교회의 영적 권위에 도전하였다는 것에 분개한 교황청 및 영국의 성직자들은 그를 배척하였고, 그는 결국 이단으로 몰려 죽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교리를 충실히 수행하는 <롤라드파>가 계속 성장하여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고, 이 롤라드파는 많은 탄압을 받으면서도 계속 이어져 훗날 종교개혁기에 큰 활약을 합니다.

7. 15세기 보헤이아의 후스 : 위클리프의 뒤를 잇다

보헤미아에는 영국의 위클리프 이후 많은 사람들이 <유명론>적인 신앙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특히 후스는 <교황>이라는 존재가 아닌 사람들의 <개별적인 믿음>을 중요시하는 유명론자였습니다. 그는 교회의 부패를 공격하고, 고위성직자의 세속주의를 비판합니다. 그리고, 신앙의 중심은 <보편적 교황청>이 아닌 <성경을 통한 개별적 믿음>이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그는 면벌부 판매등에 크게 반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콘스탄트 공의회의 결정으로 이단화 되어 화형당합니다.

그가 죽은 후 보헤미아 지방의 사람들은 후스를 추종하여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종교세력에 대한 비판, 후스 신앙에 대한 확신, 보헤미아(체코) 민족주의 운동이 결합한 형태로 교황청이 반항하였고, 큰 싸움끝에 진압되었습니다. 그들은 롤라드 파와 연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롤라드파, 후스추종파의 반란과 개혁운동은 훗날 종교개혁기에 큰 역할을 하며, 종교개혁의 선구 운동이라고 7차 교과서에 의의가 나와있습니다.

8. 신비주의 운동이 확대되면서 교회는 <마녀사냥>을 확대하다

중세말에는, 이제 <보편적 교회>를 떠나 개별적 교회를 만들고 개별적 믿음을 가지려는 많은 개혁운동이 시작됩니다.대표적인 운동이< 신의 벗>과 같은 신비주의 파들입니다. 신비주의 파들은 제도적 교회보다는 <신과의 직접 소통>을 시도합니다. <공동생활의 형제단>은 복잡한 교리보다는 단순히 심성을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프란체스코파의 일부도 <하느님과의 직접소통을 통한 도시민의 교리 전파>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교황권>이라는 제도권 안에 있지 않는 교회는 <실재론, 유명론, 신비주의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이단>으로 몰아 마녀사냥을 합니다. 사실, 교황청에서는 중세말 다양한 종교적 운동들을 받아들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다양하고 개혁적인 많은 종교운동들을 탄압함으로서, 교황청은 스스로 무덤을 파게 됩니다. 교황청은 이제 개혁을 추진할 시기를 놓치게 되었고, 이후 종교개혁이라는 큰 혼란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6세기에는 위그노 전쟁, 네덜란드 독립전쟁, 30년 전쟁 등 치명적인 종교전쟁을 겪으면서 교회세력이 몰락하고, 다시는 세속정치에 교권이 등장하지 못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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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스콜라 철학과 관련된 사상과 학파들을 간략히 보았습니다. 제가 지식이 부족해서 체계적이지도 못하고, 쉽게 적지도 못하였네요. 아무튼 이 파트는 언제 또 포스팅 할지 모르지만, 일단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모르는 부분을 포스팅 하려니 무지 힘드네요.... 휴.... 종교사가 제일 싫어요.... 종교를 믿어야 뭔가를 잘 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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