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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최익현의 5불가소 사료와 해석

 

최익헌의 5불가소(왜양일체론)

 대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약점을 보고 이를 숨기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들이 우리가 방비가 없고 약함을 보이는 실상을 알고서 우리와 강화를 맺는 경우 앞으로 밀려올 구렁텅이 같은 저들의 역심을 무엇으로 채워주시겠습니까? 우리 물건은 한정이 있는데 저들의 요구는 그침이 없을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응해주지 못하면 저들의 노여움은 여지없이 우리를 침략하고 짓밟아 우리가 이전에 들인 모든 노력은 허망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불러들이는 첫째 이유입니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면 적들의 욕심은 물화를 교역하는 데 있습니다. 저들의 물화는 모두가 지나치게 사치하고 기이한 노리개고 손으로 만든 것이여서 그 양이 무궁하지만, 우리 물화는 모두 백성들의 생명이 달렸고 땅에서 나는 것이어서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같이 피와 살이 되어 백성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유한한 물화를 가지고 저들의 사치하고 심성을 좀먹고 풍속을 음란하게 하는 물화와 교역한다면 그 양은 틀림없이 1년에도 수만에 달할 것입니다. 그러면 동토 수천리는 몇 년 안 지나 땅과 집이 모두 황폐하여 다시 보존하지 못할 것이고 나라 또한 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는 둘째 이유입니다.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이옵니다. 강화가 한번 이루어지면 사학의 서적과 천주의 초상화가 교역하는 속에서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 안 가서 선교사와 신자 간의 전수를 거쳐 사학이 온 나라 안에 퍼질 것입니다. 포도청이 살피고 검문하여 잡아다 베려고 하면 저들의 사나운 노기가 또한 더욱 커질 것이고 강화로 맺은 맹세가 허사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얼마 안 가 집집마다 사학을 받아들이고 사람마다 사학에 물들 것입니다. 아들이 아비를 아비라 여기지 않고 신하가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아 예의는 시궁창에 빠지고 인간들은 변하여 금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는 셋째 이유입니다.

강화가 이루어진 뒤에는 저들이 상륙하여 서로 왕래하고 또는 우리 지경 안에서 집을 짓고 살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강화하였으므로 거절할 말이 없고 저절할 수 없어서 내버려 두면 재물이나 비단과 부녀자들을 빼앗는 일을 마음대로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도대체 누가 능히 막겠습니까? 또한 저들은 얼굴만 사람이지 마음은 짐승이어서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고 짓밟을 것입니다.

- 최익현, 면암집 권 3, 지부복궐척의소 -

참고글 : 이글의 내용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이 강화는 일본의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는 눈 앞의 고식일 뿐 그들의 탐욕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② 일단 강화를 맺으면 물자를 교역하게 되는데 저들의 상품은 모두 음사기완한 것이고 또 수공업품이므로 무한한 것이나,       우리의 물화는 필수품이며 땅에서 생산되는 유한한 것이므로 이내 우리는 황폐해질 것이다.
    ③ 그들이 비록 왜인이나 기실은 바로 양적이므로 강화가 한번 이루어지면 사교의 서적들이 교역을 타고 끼어들어 와 온         나라에 퍼지고 인륜이 쇠퇴할 것이다.
    ④ 일본인이 왕래하여 우리의 재산을 탈취하고 부녀자를 능욕하는 등 인간의 도리가 땅에 떨어지고 백성이 안주할 수 없을         것이다.
    ⑤ 왜적들은 물욕만 높을 뿐 조금도 사람된 도리가 없는 금수와 마찬가지이니 인류가 금수와 더불어 같이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이 5가지 반대 내용을 더 간략히 정리해보면,

1. 개항반대론 : 일본의 강요에 의한 것이다.

2. 부등가 교환의 문제 : 농산품과 공산품을 교환하면 농산품 생산을 주로 하는 국가의 경제가 무너진다.

3. 왜왕일체론 : 실제 왜는 양적과 다를 바 없는 자들이다.

4. 풍속교란 : 왜는 양적과 같으므로 인륜이 땅에 떨어진다.

5. 인수지별 : 인간과 금수가 같이 살수 없다.

즉, 이 5불가소는 1870년대의 개항반대운동기를 대표하는 사료입니다. 이 때는 60년대 대원군에게 협조하던 당시와는 달리, 민씨세력의 개항정책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며 척사 운동을 적극적으로 고양합니다. 이러한 운동은 1880년대 조선책략이 유입되면서 개화반대운동 및 집권세력과 충돌하며, 긴장이 고조됩니다. 본래 위정척사운동이 수구적인 측면의 운동이었다는 관점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외세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고 방어하려는 애국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예로,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하였던 유학자들이 등장하는 것 등이 그 증거이지요. 그러나, 아직은 봉건제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점이 더 지적되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