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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통사(박은식)

  오호라! 천지가 있은 이래로 생물의 종류와 혈기의 종속이 경쟁이 없는 때가 없었으니, 승자는 주인이 되고 패자는 노예가 되었으며, 승자는 영예를 차지하고 패자는 굴욕을 당했으며, 승자는 쾌락을 즐기고 패자는 고통을 받았으며, 승자는 존재하고 패자는 멸망하였으니, 그 경쟁의 시대에 처하여 무릇 지각과 운동 성질이 있는 자중 타인에게 승리할 것을 구하지 않은 자가 있겠는가? …무릇 우리 동포의 부형(父兄)된 자는 한 번 생각할 지어다. 자기 자신 세대는 구습과 고루 속에서 생장하여 뇌수가 이미 굳어지고 세월을 따라 가기가 힘드니 신학에 종사하여 신지(新智)를 개발하기가 어렵다고 하겠으나, 차마 그 자손에게까지 배움에 게을러서 무식 무재로 하등 지위에 깊이 떨어져 타국인의 노예가 되고 타국인의 희생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인가?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라도 오로지 남아 있을 수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를 저술하는 까닭이다.

참고글 : 한국통사는 한국독립혁명지혈사를 쓰기 이전 전 단계의 박은식 선생의 사상을 볼 수 있는 저서입니다. 한국 통사는 근대적 역사의식에 입각한 최초 한국 근대사로 독립투쟁의 필연성을 강조한 책입니다. 박은식 선생은 여기서 역사란, 국백과 국혼의 기록이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즉, 국가는 멸할 수 있어도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역사란 국혼과 국백의 결합이라고 말합니다. 국혼이란 국어, 국사, 국교 등의 정신적 요소를 말하며, 국백이란 경제, 군사, 기계 등 물질적 요소를 말합니다.

이러한 선생님의 사상을 우리는 보통 <혼사상>이라고 부릅니다. 즉, 역사는 국혼을 강화해야 국백을 회복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국혼의 회복은 전통역사사상을 정리하면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지는 것이라 보면서 박은식 성생은 연개소문전, 금사 등 많은 역사서를 저술하엿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박은식 선생은 한국의 비통함을 다음으로 나열하였습니다.

<대원군의 사심, 갑신정변의 명예욕, 동학운동의 미신과 무지, 독립협회의 허영, 지리적 요충지로서 세력 균형 도모의 실패> 등등입니다. 즉, 한국의 슬픈 역사를 우리 내적 요인으로 귀결시킨 것이죠.

그러나 이후 한국독립혁명의 혈사에서는 3.1운동을 겪으면서 발생한 선생의 역사의식 변화를 볼 수 있습니다. 3. 1운동을 세계 혁명의 신기원으로 보고 민중에 감동을 받으면서, 감신정변, 갑오개혁, 동학 등을 민족이 주체적으로 일으킨 혁명으로 재평가 합니다.

인물사전 사이트의 참고 글(출처 : 인터넷 서점 알라딘)

 <한국통사>는 백암 박은식 선생이 수년의 집필 끝에 1915년 중국 상해의 중국인 출판사에서 순한문으로 편찬하였다. <한국통사>는 제목이 함축적으로 상징하는 바와 같이 망국으로 이어지느 우리의 아픈 근대사를 서술한 것이다. <한국통사>는 박은식 선생이 체험과 견문에 바탕을 두고 대원군이 집정한 1864년 이후부터 국망 직후인 1911년까지의 근대사, 일제침략사, 민족운동사를 총 3편 114장으로 구성, 서술하였다.

박은식 선생은?

황해도에서 가난한 농촌 서당훈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밀양, 호는 겸곡(謙谷)·백암(白巖·白岩·白菴), 필명으로 무치생(無恥生)·태백광노(太白狂奴)라 함으로써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의 부끄러움을 자조적으로 표현하였다. 박은식의 생애는 제1기(1859∼1897) : 주자학을 수학하고 그 가치관에 의해 위정척사 사상을 지녔던 시기, 제2기(1898∼1909) : 언론활동 등을 통해 민중계몽과 개화자강 사상을 지녔던 시기, 제3기(1910∼1925) : 망명 이후 독립운동과 역사연구에 업적을 남긴 시기로 나눌 수 있다.

박은식은 언론인으로서, 구국계몽운동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활약하였고, 경학원(經學院)강사와 한성사범학교 교사(1900), 오성학교와 서북협성학교 교장(1909)을 역임하는 등 교육자로서도 활동하였다. 이를 전후하여「겸곡문고(謙谷文稿)」(1901)등 수편을 저술하고, 수십 편의 논설을 발표하였으며 많은 번역서를 '대한매일신보'에 게재하였다. 그러나 한일합방 후 중국으로 망명한다.

박은식은 그 무렵 역사 연구를 통해 1911년에「동명왕실기(東明王實記)」「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등을 잇달아 저술 간행하였으며, 1915년에는「한국통사」를 펴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힘쓰던 박은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는 한편, 1920년「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 간행하였다. 이는「한국통사」와 함께 그의 대표 저작으로 꼽히는 것으로, 1884년의 갑신정변부터 1920년의 독립군 무장투쟁까지의 피어린 독립운동사를 서술한 것이다. 그러던 1924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지병인 기관지염의 악화로 1925년 11월 1일, 독립쟁취를 호소하는 유촉(遺囑)을 남긴 채 서거하였다. 그의 유해는 상해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68년만인 1993년 8월 5일 봉환되어 국립묘지에 안장됨으로써, 고국에서 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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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꼭두각시 2011.02.19 15:1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대원군의 사심,갑신정변의 명예욕,동학의 미신과 무지,독립협회의 허영,...등의 악성말기적 증세로
    인한 복합적인 결과로 끝내 세력균형의 합일점을 잃어버린 채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임을
    알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