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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조약의 부당성에 대한 고종의 친서와 원문

요즘 인터넷과 신문에 을사조약 무효 선언서라는 글이 공개되었다고 기사가 나오더군요. 공개는 지금되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여러 논문들 속에서 익히 정리된 내용들입니다. 인터넷 내용들을 좀더 구체적인 내용들로 올려볼께요.


이 글의 인용 논문 : 을사조약과 병합조약은 성립하지 않았다, 이상찬, 역사비평(1995년 겨울호)

을사조약 주요 관계자료를 가지고 계신 분 : 서울대 김기석 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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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종이 9개국에 보내는 친서의 3개 무효 주장

고종황제가 헬버트에게 9개국 국가원수에게 친서를 올리라 하고 위임장을 전달했으며, 네덜란드 헤이그의 만국공판소에 공정한 재판을 요청하도록 권한을 위임하였다.

-. 만국공법에 위배되는 강제 체결의 증거인 3가지의 내용으로 보아 이 조약은 무효인 것.

     하나. 정부대신이 위협을 받아서 작성한 조약

     둘. 정부가 조인하는 것을 고종황제께서는 허가하지 않았음

    셋. 정부회의라고 하지만 일본인들이 정부대신을 강제로 가두고 한 회의였음

-. 고종 황제가 조약을 승인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므로 고종황제가 조약을 승안하였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

-. 한국은 당당한 독립국이므로 예전과 같이 공사관을 다시 설치해야 할 것.

2. 1907년 1월 13일 <트리뷴>지에 보도한 친서 전문에 대한 <대한매일신보>의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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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5년 11월 17일 일본사신과 박제순이 체결한 조약 5조는 황제께서 처음부터 인허하지 않았고 또한 서명하지 않았다.

2. 황제께서는 이 조약을 일본이 마음대로 반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3. 황제께서는 독립 황제권을 조금도 다른 나라에 양여하지 않았다.

4. 일본이 외교권에 대해 조약을 강제한 것도 근거가 없는데 하물며 내치상에 한 문제라도 어떻게 인준할 수 있는가?

5. 황제께서는 통감이 와서 상주하는 것을 허락치 않았고, 황제권을 조금이라도 외국인이 마음대로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6. 황제께서는 세계 각 대국이 한국외교권을 함께 보호하고 그 기한은 5년으로 할 것을 원함.

(이 6개조의 내용은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여 만국공판소에 제소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고종이 퇴위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3. 프랑시스 레이,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지위

프랑시스 레이의 1906년 논문은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지적하였습니다. 당시 국제법상 만국공법에 의거했을 때, 을사조약은 무효라는 것을 유럽인들이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죠.

<조약은 일본과 같은 문명국으로서는 부끄러운 정신적, 육체적 폭력에 의하여 한국정부에 강요되어 체결되었다고 한다. 조약의 서명은 전권대사인 이토 후작과 하야시가 호위를 받는 일본 군대의 압력 아래에서 대한 제국의 황제와 대신들로부터 얻었을 뿐이다.

이틀 동안 저항한 후 대신회의는 체념하고 조약에 서명하였지만, 황제는 즉시 강대국, 특히 워싱턴에 대표를 보내어 가해진 강박에 대하여 맹렬히 이의를 제기하였다.>

다음은 윤병석님의 (을사5조약의 신고찰), 이상찬님의 (을사조약과 병합조약은 성립하지 않았다)의 논문에서 발췌한 레이의 글입니다.

1. 11월 16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는 외부대신 박제순을 일본공사관으로 불러 조약 원안을 보여주면서 찬성할 것을 협박하였다. 한편 이토는 한국정부 각 대신을 모두 그의 숙소로 납치하여 밤 늑게까지 조약 체결을 찬성할 것을 요구하였다.

2, 11월 17일 오후 3시경 경운궁에서 정부대신회의가 개최되었을 때, 본회의장 안으로 칼을 찬 헌병경찰들이 몰려들었고, 회의장 주변과 궁궐 안팎에는 완전 무장한 일본군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일본 공사관 앞, 기타 서울시내 전역을 무장한 일본군이 시가행진을 하였고, 시내의 각 성문에는 야포, 기관총까지 갖춘 부대를 배치하였다.

3. 당시 의정대신 한규설은 을사조약 체결을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에 이토는 무장한 일본군을 시켜 한규설을 본회의장 앞의 골방에 잡아넣고 감시하였다. 이토는 한규설에게 간청도 하고 공갈도 하여 유혹도 하였지만, 한규설은 죽으면 죽었지 결코 인준하지 않는다고 버티었다. 그러자 이토는 한규설이 도장을 찍지 않는 것은 관계없다고 말하면서 외부대신의 도장을 가지고 오라고 하여 도장을 찍고 나머지 대신 또한 날인하게 하였다.

4. 외부대신을 비롯한 정부 대신에게 폭력을 가하고 위협했을 뿐만 아니라 국왕 고종에게도 여러 차례의 협박이 가해졌다. 일본 천황의 친서를 가지고 내한한 이토는 11월 10일 고종을 알현하였다. 이 때 전달된 친서는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대사를 특파하니 대사의 지휘를 쫓아서 조치>하라는 협박이 담겨 있었다. 11월 15일에는 조약안을 고종에게 제시하고 이의 체결을 강요하였다.

레이가 주장한 을사조약 무효의 또하나의 근거 : 한일의정서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보호관계를 설정한다는 조약을 하였으나, 그 조약을 무시하고 을사조약에서 한국의 독립을 포기하도록 강요하였기 때문에 선 조약과의 모순이 있다.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기로 약정한 이상 이약정에 구속되어야 한다. 한국의 독립을 제한하거나 특히 박탈할 목적으로 하는 어떠한 조약도 체결할 수 없다. 보장국은 만일 피보장국의 독립이 제 3국의 공격에 의하여 위험에 처하면 개입하여야 한다. 그 자신이 그것을 침해할 수는 없다.

- 프랑시스 레이, 대한제국의 국제법적 지위(최종고, 남효순 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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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매일신보> 1907년 1월 16일자에 수록된 '을사조약 무효선언 국서'의 내용이다. 이것은 1906년 1월 29일에 작성된 것으로 '대한국새'가 찍혀 당시 영국 트리뷴지의 더글라스 스토리 기자에게 전달되었고, 그후 이 내용은 1906년 12월 1일자 트리뷴지에 보도되어 "황제가 을사조약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서양사람들에게 알려졌다. 위의 <매한매일신보>는 그 내용을 다시 받아서 국내 보도한 것이다

4. 이상찬 교수님(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소장) 논문의 을사조약 부당 근거

다음은 을사조약의 허구성에 대한 대표적인 논문을 쓰신 이상찬 교수님의 주장 내용입니다. (좀 심하게 압축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1. 을사조약이 무효인 것은 레이 등이 쓴 논문과 유엔 국제법위원회 등에서 낸 보고서 등에서 이미 확인되어 있고, 국제법학회와 유엔이 이미 무효라고 주장한 것을 일본 역시 알고 있다.

2. 을사 조약과 같은 국가 존망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약은  최고수준의 등급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일개 대신이 국왕을 대리하여 위임과 비준과정을 무시하여 체결하였다. 일본은 이 조약을 <협약>차원에서 체결(일한협약)한 뒤 국제 사회에 조약(한일협상조약)으로 공표하였다. 즉, 국제적으로 조약의 등급이 위조되었다.

3. 조약이 체결할 당시 조약의 제목을 빈 칸으로 두었다. 고종이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일본이 편의에 따라 이 조약의 이름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4. 전권대표가 조약체결권을 위임받지 못하였다. 일본대표 하야시는 일본천황에게 받은 위임장이 없었고, 우리측에서는 전권대표라는 표현이 빠진채 외부대신 박제순이라는 이름으로 조약을 체결하였다. 즉, 양국의 전권대표의 신뢰성이 없다.

5.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속 뜻은 <도장을 찍지 않았다>는 뜻이다. 친일파인 외부대신 박제순도 두려워 직접 도장을 찍지 않았고, 박제순이 전권대표가 아니였기에 일본은 외부대신의 도장을 훔쳐 찍었다. 즉, 조약 조인 절차조차 없었다.

6. 고종은 조약의 비준을 거부했고, 헐버트에게 친서를 보내 조약의 무효를 주장하였다. 즉, 고종 퇴위 전까지 을사조약은 비준이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을사조약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고, 실제 효력이 발휘된 것은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된 시점이었다.

7. 고종이 물러난 후 순종도 조칙을 보지 못하고 서명하였다. 즉, 순종 때의 공포 칙서들도 일본의 날조 행위였다. 또한 순종 역시 고종이 강제퇴위한 후 등극하였기 때문에 전단계 황제인 고종을 승계하지 못하였고, 고종이 살아있는 시점에 새 연호를 쓰는 등 일본에 의해 조종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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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대한제국 관보> 1907년 1월 21일자에 수록된 의정부(議政府) 명의의 '광고'로 위의 <대한매일신보>에 소개된 '을사조약 무효문건'을 전면 부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그림 참조 사이트 : http://cafe.daum.net/distor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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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일본의 유명한 개화주의자 유키치는 <세계 속의 일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조선, 중국과 같은 어리석은 친구들을 버려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21세기 일본은 이런 정신상태를 개조해서 진정한 동아시아의 좋은 친구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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