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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개항 이후의 경제적 구국 운동 
 1) 방곡령
  일본이 점점 산업사회로 이행해 감에 따라 쌀의 수출량이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당시 함경도 관찰사로 원산 관장하고 있던 조병식은 일본에게 방곡령을 사전 통보하고 원산 비롯한 주변 함경도에 방곡령(防穀令)을 실시하기에 이른다(1889). 이것이 황해도 등으로 퍼져나가 곡물의 수출을 전적으로 금지시켰지만, 일본은 방곡령 실시 1개월 전 미리 통보를 해야한다는 조일통상 장정의 규정에 의거하여 보상금을 요구한다. 이에 정부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방곡령을 철폐하고 배상금을 지불하였다. 
 
 2) 상권 수호 운동
 
  기존의 금난 정권(신해 통공) 등의 기득권을 잃어버린 시전 상인들은 임오군란 이후부터 인정된 외국 상인들의 내지통상으로 인해 더욱 어렵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시전 상인들은 철시(撤市 : 시장을 철폐함)를 하고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하고(황국 협회는 보부상 조직에다 이 전에 있던 단체이다. 헛갈리지 말자.). 종로 직조사 등을 설립하여 대항하였다. 
  개항 초에 개항장과 내륙의 시장을 연결하면서 부를 축척했던 보부상, 여각, 객주 등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체결로 인해 입지가 곤란하게 되었는데, 대동 상회와 같은 근대적 상회사 등을 설립하여 살 길을 모색하였다. 

 3) 이권 수호 
  아관 파천 이후, 러시아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자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한러 은행 철폐 등의 이권을 수호하는데 성공한다. 
  여기서 우리는 독립협회의 이중적인 면을 볼 수 있는데, 러시아는 배격하면서 일본, 미국 등에는 맹목적인 지지를 보인다. 이는 구(舊) 급진 개화파의 맥락을 이었기 때문(서재필 등)이다. 

 4) 민족 자본 육성
 
  대한 제국이 출범하면서 광무 정권은 광무 개혁의 일환으로 상공업 분야를 육성하였다. 그로인해 광무정권은 농상 회사(방직), 해운 회사, 철도 회사 등을 세웠다. 민간에 의해서 조선, 한성, 천일 은행 등 근대적 은행을 이때 설립되었다. 하지만 후에 화폐정리 사업으로 은행들은 몰락하였다. 

 5) 황무지 개간권 반대
 
  일본이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하자 보안회(1904)가 농광회사를 설립하여 대항하였다. 그로 인해 일본은 황무지 개간 철회하였다. 독립협회의 절영도 조차 반대, 한러 은행 폐쇄 등과 같이 몇 안되는 성공사례이므로 곡 알아두자. 

  6) 국채 보상 운동(1907)
 
  일본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광무 정권에게 차관을 강요하고, 이러한 이유가 대한 제국이 일본에게 예속되는 것이라 생각한 서상돈 등은 1907년 대구에서 시작하여, 서울에 국채보상 기성회를 조직하고 대한 매일 신보 등 언론 단체와 각종 애국 계몽 단체가 참여하면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하지만 한 푼 두 푼 모아서는 현실적으로 일본에서 들여온 차관을 갚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으며, 운동에 대한 참여도 일반인들만이 호응했을 뿐이었다. 게다가 통감부의 방해까지 겹쳐, 결국 실패하기에 이른다. 
 

  2천만 인민들이 3개월 동안 흡연을 금지하고, 그 대금으로 한 사람에게 매달 20전씩 거둔다면 1천 3백만 원을 모을 수 있습니다. 만일 그 액수가 다 차지 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응당 자원해서 일원, 십원, 백원, 천원을 특히 출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2월 21일



16. 사회 구조와 의식, 생활모습의 변화

1) 사회 구조와 의식의 변화 
  1801년 공노비를 해방을 필두로 개항이 되면서부터 신분제 폐지가 가속화 되었다. 1882년에는 서얼, 중인을 비롯한 모든 계층의 관직 진출이 허용되었고, 1884년 갑신 정변에서 최초로 신분제 폐지를 주장하였다. 1886년, 노비 세습제가 철폐되었으며 1894년의 동학 농민운동에서도 신분제를 철폐하고자 하는 욕구가 다시금 확인되었다. 이윽고 1894년 갑오개혁 때 신분제가 철폐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호적에는 신분 대신 직업을 기재하도록 하였다. 독립협회를 통해 자유 민주주의 사상이 보급되었고, 만민 공동회를 통해 평민의식이 확산되어갔다. 또 애국계몽운동이 시작되면서 평등사상이 보편화 되었고, 신민회를 통해 민주 공화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2) 생활 모습의 변화
 
  신분의 구별이 나타나지 않도록 복식 개혁을 하고, 서양식 복제를 도입하였고, 커피 등의 서양음식이 등장하여 인기를 끌었다. 가택의 규모, 형태, 소재의 제한이 없어지고 서양식 건물이 등장하였는데 명동성당, 정동교회, 덕수궁 석조전, 각국 공사관 들이 이에 속한다.

17. 근대 문물의 수용
 
 1) 근대시설, 교통 통신 
  지금의 우체국 격인 우정국도 1884년부터 설립되었으나 갑신정변 때 불이 났다가 을미개혁 때(1895)나 다시 부활하였다. 또한 기기창을 설치(1883)하여 무기 개발에도 힘썼다. 또한 박문국(1883)을 설치하여 한성순보 등 각종 인쇄물을 인쇄하기도 하였다. 화폐를 발행하던 전환국 역시 1883년 설치되었다. 
  1885년 전신은 서울 - 인천(일), 서울 - 의주(청)에(자기네한테 가까운 곳에 설치했다고 생각하면 쉽다. 인천은 일본에게 개항했던 항구, 의주는 청과 국경에 가까운 곳이다.) 각각 군사적인 목적으로 설치되었고, 전화는 1898년 궁중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점 민가로 확대되었다. 전차도 1898년 한성 전기 회사의 제안으로 전차를 도입하였다.(서대문 ~ 청량리, EBS 파이널) 1899년 경인선을 필두로 시작하여 / 경부선(1901), 경의선(1905), 경원선(1905)이 차례대로 만들어졌다. 대부분의 철도가 '결국' 일본에 의해 완공되었으며, 대한 제국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러일전쟁 기간 중에 군사적인 목적과, 후에 수탈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최남선은 '경부철도 노래' 등을 만들어 찬양하기도 하였다.


 2) 의료 기관
 
  최초의 근대식 국립 병원인 광혜원은 갑신 정변 때 수십 번이나 칼빵을 맞은 민영익을 살려낸 외국인 선교사 앨랜의 의술에 감동한 고종에 의해 1885년 설립되었다. 후에 제중원으로 개칭하였으나 1894년 없어지게 된다. 또한 1899년 국민들의 질병치료를 위해 설립된 국립병원이 개칭한 광제원, 1904년 애비슨이 세운 개인 병원인 세브란스 병원과 의료 요원을 양성하기 위해 황제의 명령으로 1907년 짓기 시작하여 1908년 완공된 대한 의원, 1909년 가난한 백성을 위해 세워진 자혜의원 등이 있다.


 3) 건축
 
  1896년 프랑스의 개선문을 모방해서 만든 독립문은 독립협회에서 지은 것으로 청을 향한 독립을 나타내고 있다.(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일본에 대한 독립의지가 있는 독립문을 일본이 가만 둘리 없지 않은가.) 1898년에는 고딕양식의 명동 성당이 지어졌고, 1909년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덕수궁 석조전 등이 있다.

  서양 문물의 수용은 제도 개혁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했으므로, 동도 서기론적 입장에서 수용했다고 할 수 있다.
 

 4) 근대 교육
 
  근대교육의 도입기인 1880년대에는 최초근대식 학교이자 사립학교원산 학사1883년 함경도 덕원에서 세워졌다. 정부는 동문학(1883, 통역관 양성 기관)과 상류층 자제가 주 대상이었던 육영공원(1886)이 설립되었다. 
  갑오개혁 이후, 제도가 마련되었고 정부가 주도하는 교육정책이 실현된다. 과거제를 폐지하고 학무아문(現 교육인적자원부)을 설치하였으며, 고종의 교육 입국 조서(1895)를 발표하면서 교과서, 학제(교육시스템, 現 초, 중, 고)가 마련되었고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외국어 학교등의 각종 관립학교가 설립되었다. 광무 개혁으로 인해 기술학교들도 많이 만들어졌다. 
  1900년대는 애국 계몽 운동기로 민간이 주도하는 형태가 나타났다. 대성, 오산, 보성 학교 등이 애국 계몽가가 세운 학교배제, 이화, 숭실 등 선교사가 세운 학교로 나눌 수 있다. 하지만 1908년 일제가 사립학교령을 실시하여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통제하고, 탄압하였다.

5) 언론의 발달
 
  최초의 신문이자 관보(官報) 한성 순보는 순 한문신문으로, 개화정책의 일환으로써 급진 개화파가 개화 사상의 확산을 위해 1883년 발간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갑신 정변 때 박문국이 불타면서 잠시 중단되었다가, 을미개혁 이후 한성주보로 바뀌어 다시 출판되었다.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1896)은 한글판, 영문판 두 가지로 발간되었다. 독립신문은 미국의 영향으로 최초로 띄어쓰기를 시도하였다. 민권 의식 확산에 기여하였으나 정부와 러시아의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애국계몽 단체가 그랬듯이 의병활동에도 비판하였으며 미국을 지지하였다. 대표적인 논평가로는 '아무개씨(서재필)'이 있다. 
  황성신문(1898) 국한문 혼용 신문으로 주로 구(舊) 유림이나 양반을 대상으로 한 신문이다.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린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신문 역시 의병활동에 비판적인 면을 보였다. 
  제국 신문(1898)은 겉으로 보면 상당히 딱딱한 이름의 신문이지만 순한글을 사용하여 서민층과 부녀자들을 주 대상으로 하였다. 
  대한매일신보(1905)는 양기탁과 영국인 나이스 가이 베델이 공동 창간한 신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채보상운동의 홍보하여 확산에 기여하였고, 의병활동에 지지한 유일한 신문이기도 하다. 신채호가 이 신문의 대표적인 논평가이다. 
  그 외 천도교(舊 동학)의 기관지였던 만세보(1906, 국한문 혼용), 친일파인 이용구는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 신보 등이 있따. 
  일제는 이러한 신문들을 1907년 신문지법을 제정하여 탄압하였다. 만세보의 폐간(1907)을 필두로 하여, 제국신문,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등이 1910년에 폐간되었다. 

 6) 국학 연구 
  국학은 크게 국사학과 국문학으로 나뉜다. 
  민족사학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계몽 사학신채호, 박은식 등을 통해 발달하기 시작한다. 보통 영웅 전기나 위인전, 각국(베트남, 미국) 등의 흥망사 등에 대해 서술한다. 또한 박은식, 최남선 등이 고전을 정리하고 간행하기 이해 조선광문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국어계열에선 종두법을 주장하였던 지석영이 사람들의 무지를 타파하기 위해 국문 연구를 시작한다. 그리하여 지석영과 주시경은 국문 연구소(1907)를 만들어 「국어문법」을 저술하고 그 동안 훈민정음에 '언문'이라는 굴욕적인 이름을 대신하여 '한글'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한성주보, 유길준의 「서유견문」등을 통해 국한문이 혼용되었으며 독립신문, 제국 신문 등의 한글 전용 신문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7) 문예와 종교
 
  문학분야에선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같은 신체시가, 계몽적 성격을 지닌 신소설(이인직의 「혈의 누」, 이해조의 「자유종」, 안국선의 「금수회의록」등)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신소설들은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순 한글로 쓰여졌으며 언문 일치, 계몽적 주제 등으로 쓰여지긴 하였으나, 어느정도 친일적인 내용도 첨가되어 있어 후에 식민지 문학의 토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예술부분에선 서양식 악곡에 맞추어 부르는 창가 등장하였고, 최초의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졌다(1909). 
  각종 종교단체들도 근대 문물의 수용과 애국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개신교는 의술 보급과 교육 발전에, 천주교는 고아원과 양로원 등을 설립하여 민중을 이바지하였다. 동학에선, 일진회 등의 친일조직이 생겨나고 부패하기 시작하자 의지를 새롭게 다지기 위해 손병희가 천도교로 개명하였다. 나철이 창시한 민족 종교인 대종교는 단군 신앙을 바탕으로 창시되었으며, 이후 무장독립투쟁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유교, 불교 등 고대부터 받아들여졌던 종교들은 자체 내에서 그 경직성을 비판하면서 양명학을 중심으로하는 박은식의 유교구신론, 한용운의 불교 유신론 등이 주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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