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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왕

태종 무열왕 대 신라 율령격식의 변화 신라의 율령격식의 변화 율령을 반포하고 백관공복 제도를 처음으로 제정하였다. -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4, 법흥왕 7년 정월 - 이방부령 양수 등에게 명하여 율령을 자세히 참작하여 이방부격 60여조를 수정하도록 하였다. - 삼국사기 권 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원년 5월 - 2월 21일 군신을 모아놓고 교령을 내렸다. - 삼국사기 권 6, 신라본기 6, 문무왕 9년 2월 21일 - 사료해석 : 신라는 법흥왕 때 율령을 반포하였습니다. 법으로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것이죠. 그런데 통일기 무열왕은 율령을 임시 중단시키고 임시법인 격을 발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법원리를 격으로 제시하는 데 그것은 바로 고대법과는 다른 새로운 법원리였습니다. 즉 고대 8조의 법처럼 사람을 죽인 자는 죽이고, 상처를 입힌 .. 더보기
신라하대의 족적 강등 - 골품제의 모순 신라하대 족적 강등 성주산파(선종 9산의 하나)를 처음 연 낭혜(朗慧)는 속성(俗姓)이 김씨이며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그 8대조가 된다. 조부 주천(周川)은 품(品)이 진골이고 위(位)가 한찬(韓粲)이었으며 고조와 증조가 모두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들어와서는 재상을 지냈음은 집마다 아는 바다. 아버지는 범청(範淸)이다. 족(族)은 진골에서 한 등급이 떨어지니 이른바 득난(得難)이다. 나라에 5품이 있는데, 첫째가 성이진골(聖而眞骨)이고 둘째가 득난(得難)이다. 귀성(貴姓)의 얻기 어려움을 말한 것이니, 《문부(文賦)》에도 "혹 구하기는 쉬워도 얻기는 어렵다[惑求易而得難]"고 한 대목이 있다. 6두품부터는 숫자가 큰 신분일수록 귀한데, 이는 마치 일명(一命)에서 구명(九命)에 이르는 것과 같다. 그 4.. 더보기
태종 무열왕의 등극과 전제왕권 태조 무열왕의 등극 진덕왕(眞德王)이 돌아가매 뭇 신하들이 알천(閼川) 이찬(伊瑗)에게 섭정(攝政)을 청하였더니 알천이 짐짓 사양하되 "나는 나이 늙고 이렇다할 만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春秋公)만한 이가 없으니 그는 실로 제세(濟世)의 영웅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군신(群臣)이 드디어 춘추를 추대하여 왕을 삼으니 춘추는 재삼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 사료해석 : 645년 상대등에 취임한 비담은 647년 선덕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고 염종 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 일으킨 반란이므로 그 규모가 컸고, 사태도 매우 위급하게 전개되었죠. 반란의 와중에 선.. 더보기
김춘추의 외교술 발전 - 고구려, 당에 대한 외교 김춘추의 고구려 외교 11년…7월에 백제왕 의자(義慈)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나라 서쪽의 40여 개 성을 공취(攻取)하였다. 8월에 또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項城)을 취하여 당으로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어 당 태종(唐太宗)에게 급한 사정을 고하였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해 빼앗아가니 도독(都督) 이찬(伊瑗) 품석(品釋)과 사지(舍知) 죽죽(竹竹)·용석(龍石) 등이 전사하였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大耶)의 일을 보복하려 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에서 패할 때에 도독 품석의 처(妻)도 죽었는데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종일토록 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