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으로 보는 한국사 (2)

우리 고대 역사에서도 화폐가 존재했을까?

1. 고조선에서 화폐를 사용했을까?

이제, 우리 역사에서 사용한 화폐들을 한번 짚어볼께요.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돈>이라는 개념이 나오는 문헌은, 한서지리지에 나오는 <고조선의 8개조 법>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과연 고조선 시대에 화폐를 사용했었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 교과서에서는, 고조선 시대의 화폐 주조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화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부족하고, 화폐를 만드는 틀(거푸집)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화폐를 주조해서 사용했건, 중국의 화폐를 사용했던지 간에, 고조선의 <8조법>에는 <50만전>이라는 화폐단위가 나오기 때문에, 일단 고조선에서 화폐를 사용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또,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철전인 <자모전>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여기에 대한 해석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답니다. <자, 모>란, 글자체계에서 말하는 자음과 모음을 말할 수도 있고, <부모와 자식>이라는 위계질서를 말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고조선에서 만든 우리 화폐와 우리 글자체계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반면, <자모>라는 것이 일반적인 한자의 번역이라면, 명도전같은 중국 돈은 청동식 자모전, 철기시대의 돈은 철기식 자모전 등으로 부를 수 있기 때문에, 단순히 돈을 지칭하는 일반명사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혹은, 자전, 모전과 같은 소액 화폐들과, 기타 돈들을 묶어서 자모전이라고 불렀다고 보기도 합니다. 뭐, 기록이 없으니 가설이 몇백개가 있어도 증명은 안되겠죠. 결국 결론없이 넘어갑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명도전>에 대한 해석 문제입니다. 명도전은 일반적으로 중국 돈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유물이 발견되는 지역은 고조선, 고구려의 영역이 많다는 점에서, 고조선의 화폐로 봐야 한다는 견해입니다. 제도전이나, 조도전 등은 제나라, 조나라 등 국가의 명칭을 사용했지만, 연나라는 연도전과 달리, 명도전이 또 존재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는 것이죠.

최근, 명도전의 가치를 다시 조명한다거나,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강역을 다시 생각해보는 연구는,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항하기 위해 최근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집권당인 한나라당에서, 역사왜곡에 대항하는 연구를 하고 있는 동북아 역사재단에 대한 지원 비용을 20% 삭감하고, 동북공정에 대한 관심에서 빠이빠이~ 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뭐, 한나라당 뿐만 아니라 기존 정치인들의 인식이 거의 비슷비슷하다는게 더 큰 문제죠.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한 비용을 4대강 사업에 투자하고, 한국사를 선택과목으로 지정하는 나라에 살고 있어서 우린, 아니 중국과 일본 사람들은 참 행복하답니다. ㅋ

반면, <도전>은 다른 화폐와 달리, 국가 권력이 직접 개입해서 권력을 상징하는 상징물(칼) 모양으로 만든 화폐이기 때문에, 중국 화폐가 확실하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아직 알수 없는 부분들이 많기 때문에 넘어가기로 합시다. 그런데, 사진으로 보여줄 자료가 너무 없네요. 우리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 화폐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앞에서 보여드린 자료에 몇 가지를 더해 보여 드립니다.

이 중국 화폐들은 고조선과 고구려에서도 충분히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화폐들입니다. 고조선은, 위만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남방의 진국과 중국 한나라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무역을 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중국의 화폐를 사용했겠죠.

다음은, 당시 중국의 진나라, 한나라에서 사용했던 화폐를 만드는 틀입니다. 이런 틀이 팍팍 나와준다면, 고조선에서도 화폐를 주조했다는 증거가 되겠죠? 실제, 내몽골 자치구 지방에서 이런 화폐 주조 틀들이 나오긴 하지만, 고조선에서 화폐를 주조했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지는 않는답니다. 아마, 고조선도 화폐 주조를 했겠지만, 유물은 발굴되지 않았다... 정도의 가설 수준이죠.

2. 삼국시대, 남북국시대에도 화폐를 사용했을까?

삼국시대에, 국가가 공식으로 주조한 뒤 유통시킨 화폐에 대한 기록은 없습니다.

단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기록으로 미루어 곡물이나 직물이 <유사한 화폐기능>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죠. 또, <변한> 지역에서 철이 많이 생산된다는 역사 기록이나, 금, 은, 옥과 같은 것들을 보물로 여겼다는 것으로 미루어, 이러한 광물들이 화폐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론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삼한 시대에, 무덤 밑에서 일정한 규격을 갖춘 철조각(철정 : 鐵鋌)이 발견되는데, 철이 많은 지역에서는 철을 가지고, 무기, 농기구, 화폐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근에 중국의 동북공정과 역사왜곡에 대응하는 연구를 하던 중, 발해의 화폐가 발굴되었고, 진품인지 규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화폐가 진품이라는 증거를 밝히는 작업이 쉽지 않을 뿐더러, 진품이 아니라는 증거를 밝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랍니다. 발해에 대한 역사서는 물론, 유물이나 유적조차 부족한 상황이기 때문이지요. 기록을 전혀 남기지 않은 발해이기에, 왕계표를 만드는 작업조차 쉽지 않은 현실입니다.

이제, 백날 이야기 해도,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 고대 화폐 이야기는 이 쯤에서 접고, 다음 장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실제 사용된 화폐들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화폐와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시작해 봅시다.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19. 화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일본 고대사> 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1. 다음은 중국 역사서에 나오는 왜와 관련된 내용들 중 일부입니다.

- 한서지리지(반고)

기원전후 왜라는 명칭으로 불렀다

100여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진 왜에서 낙랑에 조공을 바쳤다

- 후한서 동이전 : 1-2세기 묘사

왜의 노국왕이 후한에 사신을 보내 광무제에게 인수 받다

왜의 스이쇼 국왕이 안제에게 노예 160인을 바치다

소국간 다툼이 심하여 전국적인 대란이 일어나다

- 삼국지 위지 왜인전(진수) : 3세기 묘사

왜의 대란에서 살아남아 30여개 국을 지배할 정도로 __________의 여왕 히미코가 성장하다

히미코는 위에 사신을 파견하고 다시의 구리 거울과 친위왜왕의 칭호를 얻다.

히미코 사후 __________은 혼란에 빠지나 여왕 이요가 왕위에 오른 후 안정을 찾다

이요는 진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1. 위 지문의 빈 칸에 들어갈 나라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무엇일까요?
① 위 국가는 여러 호족들과 연합한 호족연합국가의 성격을 띄었다.
② 위 국가의 위치는 야마토라는 설과 규수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으며, 기록의 부재로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③ 일본 서기에서는 위 국가의 히미코 여왕을 신공황후라고 부르고 있다.
④ 일본 서기에 따르면 위 국가는 한반도에 진출해서 임나일본을 경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⑤ 히미코 여왕은 다이카 개신을 통해 일본을 하나의 세력으로 규합하려고 했다.

 

2. 다음은 일본 고대 불교에 대한 설명입니다.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538년, 백제의 성왕이 노리사치계를 통해 불상과 경전을 일본에 보내었다. 그러나, 모노노베 가문은 <조상신의 분노를 산다>는 이유로 불교의 공인을 거부하였다. 상대적으로 불교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소가 가문은 불교를 통한 중앙집권과 가문 독재를 실현하려고 하였다.

소가 가문이었지만, 이단자였던 (1)________ 태자는 최초의 일본 여제였던 스이코 천황을 대신하여 셋쇼정치를 하였다. 그는 고구려와 백제의 스승을 모시고, 불교와 율령을 받아들여가며 소가 가문이 아닌 천황 중심의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한반도의 가야가 멸망한 이후, 가야 유민 및 삼국의 불승들이 일본에 새로운 불교문화를 정착시켰다. 그것이 최초의 불교 문화였던, (2)________ 문화였다. 호류사의 백제관음상은 7c 일본 불교의 절정을 보여준다.

8c에는 당과 통일신라의 불교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3)_________ 문화가 유행하였다. 국제적이고, 힘있는 국가들의 문화는 일본 문화에도 활기를 주었다. 이후, 진무 천황은 주변국의 국제적, 귀족적인 문화를 이어받아 더욱 활기찬 불교문화를 이끌어갔다.

헤이안 시기엔, 헤이안 천도를 반대한 구카이가 밀교(진언종)를 들여와 만다라상, 부동명왕상 등이 유행한다. 그러나 10c 후지와라 가문이 정권을 잡은 뒤에는 독자적인 일본의 불교 문화를 추구하면서 그동안 15회나 파견했던 (4)_________ 도 폐지하였다.

독자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일본 불교는 11세기 이후, 아미타 신앙이 확대되면서 지방에 까지 퍼지기 시작한다. (5)____________ 은 지방세력들에게 유행하면서, 선종과 함께 새로운 시기를 준비하는 종교였다.

 

2. 위 지문의 빈 칸에 들어갈 용어가 틀린 것은 무엇일까요?
① 쇼토쿠
② 아스카
③ 하쿠호
④ 견수사
⑤ 정토종

 

3. 다음은 일본 고대 율령 체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물음에 답하세요.

(1) 645, 다이카 개신 : 나가노 오에 황자의 쿠테타로 소가 가문을 제거하고 천황중심 신정부가 건립되다.

(2) 646, 개신의 조 : 호족이 소유한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국가의 토지로 규정하다.

(3) 672, 진신의 난 : 호족세력을 이용하여 즉위한 덴무 천황이 호족 세력을 누르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진하기 위해 고사기, 일본서기를 편찬하다.

(4) 701, 다이호 율령 : 중국식 조용조 제도를 실시하여 백성을 국가에 귀속시키려 하다.

(5) 743, 간전영년사재법 : 개간한 모든 토지의 사유화를 인정하다.

 

3. 위 지문의 1-5번까지의 내용을 설명한 것 중 옳지 않은 것을 고르세요~
① 다이카 개신 이후에도 당의 율령체제를 답습하기 위해 수차례의 견당사를 파견하였다.
② 개신의 조는 통해 행정, 군사, 교육, 세법, 호적작성 등 백성들을 제민체제로 끌어들이기 위한 변법과 같은 성격이였다.
③ 일본서기는 천황가의 개인 서장용으로, 고사기는 국가통치지침으로 만들어졌으며, 공통적으로 천황가의 신성함을 강조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④ 다이호 율령 때 양천제를 바탕으로 토지제도인 반전수수법을 시행하였다.
⑤ 간년영전사재법으로 토지사유화가 인정되어, 일본식 장원제도와 봉건제도를 실시할 기반이 마련되었다.

 

4. 다음은 일본 고대 율령 체제에 대한 내용입니다. 물음에 답하세요.

 

4. 위 그림은 간전영년사재법 이후 성립된 10-12세기 장원입니다. 위와 같은 장원 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골라보세요.
① 황실과 연관된 유력 귀족들이 직접 토지를 경영했다
② 조정의 관리들은 장원에 출입할 수 있었고, 세금을 걷었으므로 서양과 같은 불입권, 불수권은 없었다
③ 유력농민들은 명목상으로 귀족들에게 개척 토지를 기부하는 형식으로 국가의 간섭을 피하려고 했다.
④ 토지를 직접 경작한 하층민은 모두 노예였다
⑤ 토지를 개발한 재력을 가진 자들은 사무라이 계급과 대립하였다

 

5. 다음은 일본 초기 막부에 관련된 용어입니다.

- 정의 : 가마쿠라 막부에서 비롯된 쇼권과 주종관계에 있었던 무사의 총칭

- 등장 배경 : 초기엔 쇼군 미나모토와 일반무사사이의 개인적 쌍무관계였으나, 가마쿠라 막부 성립 되면서 제도로서 고정되었다.

- 내용

1. 자신의 영지를 개간해 토지가 있는 개발영주가 충성을 맹서한 뒤, 영지 소유권에 대한 공문서를 받는다.

2. 교토에서 황실의 경비, 쇼군 저택 경비, 쇼군에 대한 노역, 전시 군역 등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부역을 담당할 만큼의 영지와 재력이 있어야만 했다.

3. 분할상속 원칙으로 점점 영지가 영세화 되어 무로마치 막부 이후 본래의 취지가 사라져갔다.

4. 에도 막부에서는 쇼군을 직접 만날 수 없는 막부의 하급 신하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된다.

 

5. 위 지문과 관련된 용어로 가장 적절한 것을 골라보세요.
① 쇼군         ② 고케닌         ③ 셋쇼         ④ 칸바쿠         ⑤ 원청         ⑥ 다이묘         ⑦ 사무라이
⑧ 지토         ⑨ 슈고            ⑩ 신판         ⑪ 후자이         ⑫ 도자마      ⑬ 죠닌            ⑭ 고쿠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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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8조의 법과 해석

1. 8조의 법

고조선의 8조법은 현재 한서지리지에 3개조만 남아있습니다. 3개조에 대한 해석내용은 이전 8조법 해석 포스팅에서 자세히 다루었습니다.

1 : 사람을 죽인자는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2 :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한다(相傷以穀償)"
   3 : 도둑질한 자는 남자의 경우에는 몰입하여 그 집 종(奴)이 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만든다(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女子爲婢)속전코자하는 자는 50만전을 낸다(欲自贖者人五十萬).

"8조 법금"의 "8조항"을 다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책은 <환단고기>이지만, 이 환단고기는 위작입니다. 하지만, 환단고기에서는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8조법에 대한 내용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내용이 들어가 있을 않을까라는 부분이지요.

사실, 고대 법들은 함무라비 법전 등을 포함하여 모두 살인, 절도, 간음, 주술, 독신 등의 인간의 기본적 범죄에 대하여 규제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법들이 주를 이루었을 것임은 상상력으로 알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아무도 모릅니다.

1, 사람을 죽이면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
   2, 사람을 상해하면 곡식으로 갚는다(相傷以穀償)
   3, 도둑질하는 자는 적몰하여 남자는 그 집의 종이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삼는다
        (相盜者男沒爲其家奴女爲婢)
   4, 소도(성역)를 훼손하는 자는 가두어 둔다(毁蘇塗者禁錮)
   5,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시킨다(失禮義者服軍)
   6, 근면히 일하지 않는 자는 공공작업에 부역시킨다(不勤勞者徵公作)
   7, 음란한 짓을 하는 자는 태형에 처한다(邪淫者笞刑)
   8, 사기를 치는 자는 훈방한다(行詐欺者訓放) 스스로 속전코자하는 자는 비록 공표되는 것은 면하지만 백성들의 풍속이 오히려 그를 수치스럽게 여겨 (딸을) 시집보내려 해도 팔려갈곳 조차 없었다(欲自贖者雖免爲公民俗猶羞之嫁娶無所수)

이 환단고기 8조의 내용은 고대 법인 함무라비 법전 등의 법들과 상당히 유사합니다. 고대 사회의 공통적인 부분이 바로 여성의 음란함의 규제(가부장성), 신에 대한 모독(성역침해), 노동에 대한 신성함(근면과 공경) 등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환단고기의 내용은 고대 일반법들의 내용을 토대로 작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2. 8조법이 남아있는 한서지리지의 원문

 연燕나라 땅은 미尾와 기箕(28숙宿의 하나. 모두 동방에 있는 별 이름으로 여기에서는 동쪽을 말함)에서 나뉜 들이다. 무왕武王이 은殷나라를 정하고 나서 소공召公을 연에 봉했다. 그 뒤 36대가 되는 동안 그는 육국六國과 함께 왕이라고 일컬어, 동쪽으로는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 요동이 있고, 서쪽으로는 상곡上谷, 대군代郡, 안문雁門을 가졌으며, 남쪽으로는 탁군 郡의 이용성과 범양을 얻었고, 북쪽으로는 신성, 즉 옛날의 안탁현, 양향, 신창과 발해의 안차가 있으니 이것은 모두 연나라에서 나뉜 땅이다. 낙랑, 현도도 역시 여기에 소속되어야 할 것이다.

  연이 왕이라고 일컬은 지 십대가 되었을 때 진나라가 육국六國을 멸하고자 했다. 이 때 연왕燕王의 태자 단丹이 용사 형가荊軻를 보내서 서쪽으로 가서 진왕秦王을 찔러 죽이려 했으나 일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베임을 당했다.

  이리하여 진나라에서는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연나라를 멸해 버렸다. 이 당시의 계 는 남으로 제나라와 조나라에 통하며 발해와 갈석蝎石 중간에 있는 한 도회都會였다.

  처음에 태자 단은 손님으로 용사들만 집에서 기르고 있어 후궁의 아름다운 여자들은 사랑하지 않았다. 그 까닭에 백성들도 거기에 화하여 습관이 되어 가지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그러하다. 손님들을 맞으면 자기 아내를 주어 모시고 자도록 하고, 시집 가는 첫날 밤에도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이것을 도리어 영화롭게 여겨 왔는데, 뒤에는 차츰 조금씩 덜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종시 아주 고치지는 못했다.

  이리하여 그들의 풍속은 어리석고 사납고 생각이 적어 경박하고 위엄이 없었다. 그래도 역시 장점도 있기는 했으니, 남의 급한 일을 보면 용감하게 뛰어드는 성질이 있었으니 이것은 곧 단의 남긴 풍도이다.

  상곡上谷으로부터 요동에 이르기까지 땅은 넓고 백성은 드물어 자주 오랑캐들의 침입을 받기도 했다. 풍속은 조趙나라 시대와 서로 비슷한데 생선과 소금.대추.밤 같은 것이 풍족히 났다.

  북쪽으로는 오환烏丸, 부여夫餘와 틈이 있었고, 동쪽으로는 진번의 이로움을 사 들이고 있었다. 현도와 낙랑은 무제 때 설치했는데, 이것은 모두 조선, 예맥濊貊, 구려만이句驪蠻夷이다.

  은殷나라의 도道가 쇠해지자 기자가 조선으로 가서 그 백성들을 예의에 힘쓰고, 농사짓고 누에 쳐서 길쌈 하도록 가르쳤다. 또 낙랑의 조선 백성들에게 금하는 법 팔조목을 만들었다.

  그것은 대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받는다. 도둑질을 한 자는 그것이 남자일 경우에는 그 집 남자 종을 만들고 여자일 경우에는 역시 여자 종을 만든다. 자기가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람 앞에 오십만 냥을 내게 한다. 비록 용서를 받아 보통 백성이 될 때도 풍속에 역시 그들은 부끄러움을 씻지는 못한다. 아내를 얻는 데는 원수를 가리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그 백성들은 종시 도둑질을 하지 않아서 대문을 닫고 자는 법이 없었다.

  여자들은 모두 정조를 지키고 신용이 있어 음란하고 편벽된 짓을 하지 않았다. 그 지방의 농사 짓는 백성들은 대나무 그릇에 음식을 먹고, 도시에서는 관리나 장사꾼들을 본받아서 왕왕히 술잔 같은 그릇으로 음식을 먹는다.

  군에서는 처음에 요동에 가서 관리를 데려 왔었다. 그들은 백성들이 물건을 숨기거나 감추어 두는 법이 없는 것을 보았으나 장사꾼들이 오면 밤에 도둑질을 하게 되어 풍속이 차츰 박해갔다.

  지금에 와서는 법으로 금하는 것이 더 많아져서 육십여 조목이 되었으니, 어질고 착한 것의 감화야말로 귀한 것이다.

  그러나 동이東夷는 천성이 유순해서 세 지방 밖의 사람들과 다르다. 그런 때문에 공자가 올바른 도가 행해지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여 바다를 건너 구이九夷에 살고자 한 것이 까닭이 있다.

  대체로 낙랑 바다 속에는 왜인倭人들이 살고 있어 나누어 백여 나라가 되는데 이들은 해마다 와서 물건을 바치고 뵙는다고 한다. 그 지방은 위危 사도四度로부터 두 육도六道에 이르는 곳을 석목析木의 다음 위치라고 하는데, 이곳은 연燕나라에서 나뉜 곳이다.(漢書)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은 자유롭게 가져가 사용하실 수 있으나, 꼭 가져가실 때에는 꼭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립니다.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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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 지리지

태고부터 무제(武帝) 시대까지의 통사인 사기의 뒤를 이어, 후한의 반고가 편찬한 전한 왕조 1대의 역사를 기록한 한서(漢書) 중의 한 편이다. 한서는 제기(帝紀) 12·표(表) 8·지(志) 10·열전(列傳) 70의 총 100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지리는 천문·체설(滯泄) 등과 더불어 지부(志部)에 속한다.

사기가 통사로서 역사 서술의 한 전형을 이루고 있는데 대해서, 한서는 처음으로 단대사(斷代史)의 형태를 취한 것이다. 이를 본받아 그 이후의 역대 정사(正史)에는 지리지가 부기되게 되었다.

한서지리지의 내용은, 먼저 우공(禹貢)의 9주 이후 분열되어 혼란 상태에 있던 천하가 통일되어 한의 지방제도가 성립하는 연혁을 설명하고, 제2단에서는 원시(元始) 2년(기원 2년)의 상태를 기준으로 하여 103의 군국(郡國)과 그 관하(官下)의 현·읍· 도후국(道候國)으로 나누어 경역(境域)의 연혁·호구(戶口)·산천·고적(古跡)· 물산 등을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에 각지의 지리적 사정, 풍속 등을 역사적으로 서술한 부분이 있다. 전체적으로는 이처럼 3개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한서지리지는 중국 전역의 지지(地誌)로서는 최초의 것이다. 우공의 9주에서 시작하여 각 개별 지역의 경역 연혁 이하를 서술하는, 중국지지의 전통적인 체계를 처음 수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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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시기 법령 증가

군을 설치하고 초기에는 관리를 요동에서 뽑아왔는데, 이 관리가 조선 백성들이 문단속을 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장사하러 온 자들이 밤에 도둑질을 하니 풍속이 점차 야박해졌다. 지금은 범금도 많아져서 60여 조목이나 된다.

- 한서 지리지 제 8권 -

사료해석 : 초기 고구려는 8조목의 법만 있었고, 풍속이 각박하지 않아 도둑질이 없고, 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사군이 설치되면서 사회가 새롭게 개편되는데 그중 하나가 법령 조목의 증가입니다. 법 조목이 증가하였다는 자체가 사회가 각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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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조의 법

1 : 사람을 죽인자는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2 :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배상한다(相傷以穀償)"
   3 : 도둑질한 자는 남자의 경우에는 몰입하여 그 집 종(奴)이 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만든다(相盜者男沒入爲其家奴女子爲婢)
        속전코자하는 자는 50만전을 낸다(欲自贖者人五十萬).

다음은 원문 해석입니다.

은나라가 쇠퇴하고 기자가 조선으로 내려왔다. 그 백성을 예의로서 교화하고, 농사와 뽕나무 심는 법을 가르쳤다. 낙랑의 조선인들은 8개의 법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죽인 자는 죽음으로서 갚고, 서로 상처입힌자는 곡식으로서 갚는다. 도둑질한 자는 남자의 경우 몰수하여 노예로 만들고 여자는 계집종으로 만든다. 속죄하고자 하는 자는 50만냥을 내야한다. 비록 백성으로 돌아왔다 하더라도 그것을 수치스러워 하는 풍속이 있어 혼인하고자 하여도 상대가 없다. 이에 그 백성들은 서로 도둑질 하지 않으며, 집집마다 문을 걸어두지도 않는다. 부인은 정절을 지켜 음란하지 않다.

                                                                                         - 한서지리지  -

8조의 법은 현재 한서지리지에 3조만 전해져 내려옵니다. 8조 법금의 "8조항"을 다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책은 <환단고기>뿐인데 환단고기는 정통사료라고 볼 수 없는 위작으로 판명나있습니다. 따라서 8조의 법에 들어갈 내용을 역사적 상상으로 구성한 정도로 보시면 되겠네요. 고대의 법을 보면 엄형주의, 엄법주의, 간음, 정절, 주술, 독신 등의 내용등이 많기 때문에 그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빠진 내용이 무엇인지 상상해 볼 수는 있겠습니다.

다음 내용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냥 환단고기에서 제시한 8조법의 전문입니다. 아마 고대에는 이런 법들이 주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1, 사람을 죽이면 그 즉시 죽음으로 갚는다(相殺以當時償殺) :
2, 사람을 상해하면 곡식으로 갚는다(相傷以穀償)
3, 도둑질하는 자는 적몰하여 남자는 그 집의 종이되고 여자는 계집종을 삼는다  (相盜者男沒爲其家奴女爲婢)
4, 소도(성역)를 훼손하는 자는 가두어 둔다(毁蘇塗者禁錮)
5, 예의를 잃은 자는 군에 복무시킨다(失禮義者服軍)
6, 근면히 일하지 않는 자는 공공작업에 부역시킨다(不勤勞者徵公作)
7, 음란한 짓을 하는 자는 태형에 처한다(邪淫者笞刑)
8, 사기를 치는 자는 훈방한다(行詐欺者訓放) 스스로 속전코자하는 자는 비록 공표되는 것은 면하지만 백성들의 풍속이 오히려 그를 수치스럽게 여겨 (딸을) 시집보내려 해도 팔려갈곳 조차 없었다(欲自贖者雖免爲公民俗猶羞之嫁娶無所수)

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