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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당서 동이전 신라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당서 동이전 신라

신라는 변한의 자손이다. 한나라 낙랑 땅에 있는데 가로가 천 리요, 세로가 삼천 리다. 동으로는 장인에 접해 있고, 동남쪽으로는 일본, 서쪽으로는 백제, 남으로는 발해, 북으로는 고려와 인접되어 있다.

  왕은 금성에 있는데 성 둘레가 팔리요, 호위하는 군사가 삼천 명이다. 그 곳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성이 모라에게 침략당해서 고을이 안에 있는 것은 탁평이라 하고, 밖에 있는 것은 읍륵이라고 한다. 탁평이 모두 여섯이요, 읍륵은 오십이개이다.

  조복은 흰 것을 숭상하고 산신에 제사 지내기를 좋아한다. 팔월 보름날이면 크게 잔치를 베풀고 관리들이 모여서 활을 쏜다. 그들의 관리는 친속으로 따져서 위를 삼는다. 그 족명을 보면 제일골과 제이골은 저절로 구별이 되고, 형제나 딸, 고종, 이종, 남매간에 모두 혼인한다.

  왕족이 제일골이 되고, 그 아내도 역시 왕족으로 친다. 여기에서 아들을 낳아도 모두 제일골이 된다. 이들은 제이골의 딸과는 혼인하지 않는다. 비록 아내를 맞아도 이는 첩으로 친다.

  벼슬에는 재상, 시중, 사농경, 태부령이 있는데, 모두 십칠등급이다. 이 벼슬은 제이골이 모두 하고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모두 모여서 의논한다. 이것을 화백이라 하는데, 만일 한 사람이라도 이의하는 자가 있으면 의논은 깨지고 만다.

  재상의 집에는 녹이 끊어지지 않고 종과 가동이 삼천 명이요, 갑병과 소, 말, 돼지가 고루 고루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가축들은 바다 속에 있는 산에서 기르는데, 먹고 싶은 때는 언제나 활로 쏘아 잡는다. 곡식을 남에게서 꾸었다가 갚지 못하면 그 집 종노릇을 한다.

  왕의 성은 김이요, 귀인의 성은 박이다. 백성들은 성은 없고 이름만 있다. 버드나무로 술잔을 만들어 쓰는데, 이것이 마치 구리로 만든 기와와 같다.

  정월 초하룻날은 사람들끼리 서로 치하하고 이 날 일월의 신에게 절한다. 남자는 바지를 입고, 부인은 치마를 입는다. 사람을 보면 반드시 무릎을 꿇는데, 손을 땅에 짚어야 공손한 태도가 된다. 얼굴에 분칠을 하지 않고, 머리털을 땋아 내리고 구슬로 장식을 한다. 남자는 머리를 깎고 검은 건을 쓴다.

  시장에는 남녀들이 모여들어 물건을 사고 판다. 겨울이면 방 안에 부엌을 만들고, 여름에는 먹을 것을 얼음 위에 두어 둔다. 가축으로는 양이 없고 나귀가 적으며 말이 많다. 말은 키가 크지만 잘 달리지는 못한다. 키가 큰 놈은 석 자가 된다. 어금니와 발톱이 있고 검은 털로 온 몸을 덮었다. 그들은 화식을 하지 않고 짐승을 씹어먹는다. 혹은 사람을 잡아먹기도 한다. 아내를 얻어야 의복을 만들어 입는다.

  그 나라는 산이 수십 리나 연해 있고, 골짜기가 좁은 곳에 굳게 철문을 만들어 달아 이것을 관문이라고 한다. 신라에서는 이 관문에 항상 활쏘는 군사 수천 명을 보내서 지키게 한다.

  처음에 백제가 고려를 치자 구원을 청하니 신라에서는 군사를 내어 이를 쳐서 깨쳤다. 이로부터 이들은 서로 공격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 뒤에 백제 왕을 잡아 죽이자 이것 때문에 차츰 원수를 맺기 시작했다.

  무덕 사년에 왕 진평이 사신을 보내 입조하자 고조는 조서를 내려 통직산기시랑 유문소를 시켜 여기에 회답했다. 그 뒤 삼년에 그를 주국에 배하고 낙랑군왕 신라왕에 봉했다.

  정관 오년에 여악 두 사람을 바치니 태종은 말하기를, [전번에 임읍에서 앵무새를 보내 왔는데, 그 새는 말을 하여 제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는데 더구나 사람이겠느냐] 하고 이들을 사신에게 주어 함께 돌아가도록 했다. 이 해에 진평이 죽고 아들이 없었다. 이에 그 딸 선덕을 세워 왕을 삼았다. 이에 대신 을제병국을 보내서 조서를 내려 진평에게 좌광록대부를 증직하고 비단 이백 필을 내렸다.

  구년에 또 사신을 보내서 선덕을 책봉하여 그 아버지를 계승하여 왕이 되게 하자, 그 나라 사람들은 그를 성조황고라고 불렀다. 십칠년에 그 나라는 고려, 백제의 공격을 받아 사신이 와서 구원을 청한다. 이에 제는 친히 고려를 정벌하고 조서를 내려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적의 세력을 꺾도록 했다.

  선덕은 군사 오만 명을 내어 고려의 남쪽 끝에 들어가서 수구성을 빼앗았다. 이십일년에 선덕이 죽자 광록대부를 증직했다. 그리고 그 누이동생 진덕이 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이듬해에 그 아들 문왕과 아우 이찬간 춘추를 보내서 입조하니 제는 문왕으로 좌무위장군을 삼고, 또 춘추를 특별히 진급시키었다. 이에 그들이 자기 나라의 장복을 변경하여 중국제도를 쫓겠다고 청하니, 제는 중국의 진기한 옷을 하사했다. 또 그들은 국학에 나가 석전을 보고 경서 강론하는 것을 들으니, 제는 중국에서 지은 진서를 주었다. 그들이 돌아가려 하자 삼품 이상의 벼슬을 주고 들에 나가 전송해 주었다.

  고종 영휘 원년에 백제를 쳐서 깨치자 신라에서는 춘추의 아들 법민을 보내 입조하니 진덕이 비단을 짜서 거기에 글을 써서 바쳤다. 그 글은 이러하다.

  [큰 당나라가 넓은 왕업을 이룩하니,

  높고 높게 천자의 덕이 창성하네.

  창 칼이 쉬어 천하를 크게 정하니,

  문을 이루어 백왕을 계승했네.

  저 하늘이 비를 내려 만물을 적시니 이 다스려짐 모두 흡족하네.

  깊이 어진 것은 일월과 같고,

  긴 운수는 억만 년 편안하리.

  깃대 드날려 이미 혁혁하고,

  북소리는 어이 그리 장엄한가.

  밖의 오랑캐 만일 명령을 어기면,

  그 허물 반드시 천벌을 받으리.

  순박한 바람 으윽한 곳에 서리어,

  멀고 가까움 없이 상서로움 드리네.

  사시로 옥촛대 밝혀 있고,

  빛나는 위엄 만방에 두루 했네.

  산악이 착한 재상 내리니,

  천자는 충량들에게 일 맡겼네.

  삼오의 한 덕을 이루니,

  우리 당나라 집 밝아오네.]

  제는 이 글을 보고 그 뜻이 아름다운 것을 가상히 여겨 법민을 발탁하여 태부경을 삼았다. 오년에 진덕이 죽자 제는 그를 위해서 거애하고 그에게 개부의동삼사를 증직하고 비단 삼백 필을 내렸다. 또 태상승 장문수에게 명하여 가서 조상하고 제사 지내게 했다. 그리고 춘추로 왕의 뒤를 계승하게 했다.

  이듬해에 백제와 고려, 말갈이 함께 그 삼십성을 쳐서 빼앗자, 사신을 보내 와서 구원해 주기를 청한다. 이에 제는 소정방에게 명하여 이를 치게 하고, 한편 춘추로 우이도 행군총고나을 삼아 드디어 백제를 평정했다.

  용삭 원년에 춘추가 죽자 법민이 왕의 자리를 계승하니 그 나라로 계림주 대도독부를 삼아 법민에게 도독의 자리를 제수했다.

  함형 오년에 고려에서 반란을 일으킨 무리들을 받아들여 백제 땅을 침략하여 이를 지키게 한다. 이에 제는 노하여 조서를 내려 그의 관작을 삭탈하고, 그 아우 우요위원외대장군 임해군공 인문으로 신라왕을 삼아서 중국 서울로부터 본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또 조서를 내려 유인궤로 계림도대총관을 삼고 위위경 이필과 우령군대장군 근행으로 부관을 삼아서 군사를 내어 치게 했다.

  이리하여 상원 이년 이월에 인궤가 그 무리들을 칠중성에서 치고, 또 말갈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로 해서 남쪽 국경을 침략해서 많은 사람을 목 베고 사로잡았다.

  이에 조서를 내려 이근행으로 안동진무대사를 삼아 매초성에 군사를 둔 치게 하여 세 번 싸움에 적이 패하고 말았다. 이에 법민이 사신을 보내서 입조하여 사죄했다. 이리하여 인문이 비로소 돌아와 왕에게 사례하니 제는 법민의 관작을 회복해 주었다.

  그러나 백제의 땅을 많이 빼앗은 때문에 고려의 남쪽 경계와 연접되었다. 여기에 상, 양, 강, 웅, 전, 무, 한, 삭, 명 등의 아홉 주를 두고 주마다 도독을 두어 군을 통솔하게 했는데, 이 군이 혹 열도 되고 혹 이십도 되었다. 다시 군에는 대수가 있고, 현에는 소수가 있었다.

  개요 원년에 인문이 죽자 아들 정명이 왕의 자리를 계승하여 사신을 보내 입조해서 당나라 예문과 그 밖의 글을 요구하므로 무후는 길흉례와 딴 글 오십편을 주었다.

  정명이 죽고 아들 이홍이 왕위를 이어 받았고, 그가 또 죽자 그 아우 흥광이 대를 이었다. 당나라 현종의 개원 년중에 자주 입조해서 과하마오 ㅏ조하주, 어아주, 해표피 등을 바쳤다.

  또 두 여인을 바치자 제는 말하기를, [이 여인들은 모두 왕의 고종누이라고 하는데, 자기 나라 풍속과 다른 곳에 와서 더구나 그 가깝던 사람을 작별하고 있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가 없다] 하고 후하게 물건을 주어 돌려 보냈다.

  그들은 또 자제들을 보내서 태학에 들어가 경서를 배우게 했다. 이에 제는 가끔 흥광에게 서문금과 오색비단, 자줏빛 무늬를 놓은 도포, 금은으로 만든 정한 그릇 등을 보내니, 흥광도 역시 의상과 개와 말, 황금으로 만든 물건 등을 보내 왔다.

  발해와 말갈이 등주를 침략하자 흥광이 이를 추격해 쫓으니, 제는 흥광을 승진시켜 영해군대사를 삼아 말갈을 공격하게 했다.

  이십오년에 흥광이 죽자 제는 몹시 이를 슬퍼하여 태자태보를 증직하고 형주에게 명하여 홍노소경으로 하여금 조상하고 제사 지내게 했다. 그 아들 승경이 왕위를 계승하자 제는 형주에게 조서를 내려, [신라는 군자의 나라이다. 시서를 알고 있으니 경 같은 독실한 선비가 가서 경서를 강의해 주어 그들로 하여금 우리 대국의 융성한 것을 알도록 하라] 했다.

  또 그 나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둔다 하므로 병조참군 양계응으로 부관을 삼아 가서 가르치게 했더니 바둑의 고수들이 그 곳에서 많이 나왔다. 이리하여 서신을 보내서 금과 보배를 후하게 보내 왔다. 이윽고 그 아내 박씨를 비로 책봉했다.

  승경이 죽자 사신을 보내서 가서 조상하고 그 아우 헌영으로 왕위를 계승케 했다. 제가 촉땅에 있을 때 사신을 보내어 강을 거슬러 성도에까지 이르렀다.

  대력 초년에 헌영이 죽자 아들 건운이 즉위했는데, 이내 또 죽으므로 그들은 김은거를 보내서 입조해서 중국의 명령을 기다린다. 이에 창부낭중 귀숭경을 보냇 ㅓ조상하고, 감찰어사 육정과 고암을 부사로 삼았다.

  이리하여 그 어머니 김씨를 태비로 삼았더니, 마침 그 나라 재상들끼리 권리를 다투어 서로 공격하여 나라 안이 크게 어지럽다가 삼년이 된 뒤에야 겨우 안정되었다. 이 해부터 다시 조공을 바치기 시작했다.

  건중 사년에 왕이 죽자 아들이 없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재상 김양상을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했다. 이에 정원 원년에 호부낭중 개운을 보내서 이를 명하게 했다.

  이 해에 또 양상이 죽자 양상의 종부의 아우 경신으로 대를 잇게 했다. 십사년에 그가 또 죽고 아들이 없으므로 적손 준옹을 세웠다. 이듬해에 사봉낭중 위단을 보내어 책봉하려 했는데, 그가 도착하기 전에 준옹이 죽으므로 위단은 그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아들 준홍이 위를 계승했다.

  영정 원년에 조서를 내려 병부낭중 원계방을 보내어 이를 책명했더니 그 뒤 삼년 만에 사신 김역기가 와서 사례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지난해 옛 주인 준옹을 책봉하여 왕으로 삼고, 그 어머니 신씨를 태비로 삼고, 아내를 숙비로 삼았아온데 준옹이 불행해서 그 글이 지금 서울에 그대로 있아오니 신이 청컨대 받아가지고 가겠습니다] 하니 이를 허락했다.

  칠년에 중흥이 죽자 언승이 자리를 계승하고 와서 초상난 것을 고하자 직방원외랑 최정을 보내서 조상하고 새 왕을 명해 허락했다. 그리고 그 아내 정으로 비를 삼았다.

  그 후 장경, 보력 사이에 다시 사신을 보내서 입조하고, 서울에 머물러 숙위했다. 인승이 죽자 아들 경휘가 서니, 태화 오년에 태자 좌유덕 원적을 보내서 조상하고 책봉해 주기를 전과 같이 했다.

  개성 초년에 그 아들 의종을 보내서 사례하고 서울에 머물러 숙위하고 있기를 원해서 그대로 있다가 이듬해에 돌아갔다.

  오년에 그 나라에서 공부하던 학생으로서 연한이 찬 사람 일백오명을 모두 돌려 보냈다. 이 때 그 나라에 장보고, 정년이란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싸움에 능해서 특히 창을 잘 쓰고 바다 속으로 오십 리를 가도 목이 메지 않았다. 이들 중에서 그 용맹스럽고 씩씩한 것이 장보고가 제일이었다. 그래서 정년은 보고를 형이라고 불렀는데, 보고는 나이가 위이고 정년은 또 재주가 있어 서로 비등했다.

  이들이 모두 중국에 와서 무령군소장이 되었더니 그 뒤에 장보고가 신라로 돌아가 그 왕에게 아뢰기를, [중국을 두루 다녀봐도 우리 신라를 모두 종으로 여깁니다. 그러니 원컨대 청해에 진을 치고 적들로 하여금 사람들 서쪽으로 잡아 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했다. 청해란 아주 요지였다.

  이에 왕은 보고에게 군사 만 명을 주어서 지키게 하니, 이 까닭에 태화 이후로는 바다 위에서 신라 사람을 잡아가는 자가 없었다.

  보고가 이미 그 나라에서 귀하게 된 뒤, 정년은 기한이 말이 아니었다. 어느 날 그 수주 풍원규에게 말하기를, [내가 동쪽으로 가서 장보고를 찾아 밥을 얻어먹을까 하오] 했다.

  원규는 말하기를, [만일 보고가 돌봐 주지 않는다면 어찌하려는가. 왜 하필 그의 손에 죽을 일을 취하는가] 한다.

  정년은 다시 말하기를, [굶주리고 추워서 죽는 이보다는 차라리 남에게 무기로 찔려 죽는 것이 쾌하지 않겠소. 더구나 고향에 가서 죽으면 얼마나 좋겠소] 하고, 정년은 드디어 장보고를 찾아 갔다.

  정년이 장보고를 찾자, 보고는 그를 맞아 술을 마시면서 몹시 즐겁게 놀았다. 그러나 술자리가 끝나기 전에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대신이 그 왕을 죽여서 나라가 어지러워 주인이 없다고 한다.

  이에 보고는 군사 오천 명을 나누어 정년에게 주면서 그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자네가 아니면 이 화난을 평정할 사람이 없네] 했다.

  이리하여 정년은 그 나라에 이르러 반란을 일으킨 자를 베고 새 왕을 세웠다. 이에 왕은 장보고를 불러 정승을 시키고, 정년으로 대신 청해를 지키도록 했다. 이로부터는 중국에 조공이 다시 오지 않았다.

 

  찬해 말한다.

  두목이 말하기를, 옛날 안사순이 삭방절도가 되었을 때 곽분양과 이임회가 모두 그의 아문도장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비록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어도 서로 눈을 흘겨볼 뿐으로 한마디 말도 교환하지 않았다.

  뒤에 분양이 사순의 자리를 대신 맡아서 보게 되자 임회는 딴 곳으로 가려 한다. 그러나 이 일을 아직 결정 짓지 못하고 열흘이 지났을 때 조정에서는 임회에게 명하여 분양의 군사 반을 나누어 동쪽으로 조와 위의 국경으로 나가라고 했다. 이에 임회는 들어가서 분양에게 청한다.

  [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지만, 내 처자만은 용서해 주시오.]

  그러나 이 말을 듣자 뛰어내려와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가 말하기를, [지금 나라가 어지러워 임금이 파천했는데 공이 아니면 동쪽을 칠 수가 없는 터에 어찌 사사로운 마음을 품는단 말이오] 하고 작별하면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충의를 가지고 서로 권면했다. 이리하여 이 무서운 적을 평정한 것은 실로 두 공의 힘이었다.

  이들은 피차간에 그가 마음을 변하지 않을 것을 안 것이니, 그 마음을 알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남을 밉게 보면 반드시 상대방의 단점만 보이는 법이니, 그 재목을 알기란 더욱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보고와 분양의 어진 것이 비슷했던 것이다.

  정년이 보고에게 갈 때는 필경 [저는 귀한 사람이요, 나느 천한 사람이니 내가 가면 낮잡아 볼 뿐이지 옛 원한을 가지고 나를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 했던 것인데, 보고는 과연 그를 죽이지 않았으니 이는 사람의 상정이라 하겠다. 또 임회가 분양에게 가서 죽기를 칭했던 것도 역시 사람의 상정인 것이다.

  보고가 정년에게 일을 맡긴 것은 자기가 주선한 일이 있으니 그가 주리고 춥게 지나게 되자 쉽게 감동했던 것이다. 임회와 분양은 평생 동안 대립되어 있었는데, 임회를 외방으로 내보내려는 명령은 실상 보고에게서 나온 것이니, 이 점으로 보면 분양이 더 훌륭하다 하겠다. 이것이야말로 성현의 남을 성패의 즈음에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주공과 소공을 백 대의 스승이라고 한다. 주공이 어린 임금을 옹호하자 소공이 의심했다. 주공 같은 성스러움과 소공 같은 어진 이로 젊어서는 문왕을 섬기고 늙어서는 무왕을 도와서 능히 천하를 평정했는데, 이러한 주공의 마음을 소공이 알아 주지 못했단 말인가.

  진실로 인의의 마음이 있다면 남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스스로 알 것이니, 소공 같은 이로서도 그런데 더구나 그 아랫사람이겠는가.

  아아! 남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남을 미워하지 말아서 국가의 근심을 먼저 한 자로는 진나라 때에는 기해가 있고, 당나라에는 분양, 보고가 있을 뿐이다. 그 누가 오랑캐 땅에는 사람이 없다고 하겠느냐.(唐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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