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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당서 동이전 고려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당서 동이전 고려

 고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지형은 동쪽으로는 바다를 끼고 신라와 인접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역시 바다를 끼고 백제와 연결되어 있다. 또 서북쪽으로는 요수를 건너 영주와 접해있고, 북쪽은 말갈과 접해 있다.

  그들의 임금은 평양성에 사는데, 이곳은 또 장안성이라고도 하니 한나라의 낙랑군이다. 이 곳은 서울에서 떨어지기 오천 리나 되는데, 산을 따라 꾸불어지게 곽을 쌓았다.

  남쪽은 패수에 닿아 있고, 왕은 그 좌편에 궁궐을 세우고 산다. 또 국내성과 한성이 있으니 이것을 별도라고 한다. 또 물로는 대요, 소요가 있다. 대요는 말갈 서남쪽 산에서 시작해서 남쪽으로 안시성을 지나 흐른다.

  소요는 요산 서쪽에서 나와서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또 양수라는 물이 있어 국경 밖으로 나간다. 마자수라는 물은 말갈 백산에서 시작되는데, 불빛이 오리의 머리와 같다고 해서 이름을 압록수라고 한다. 이 물은 국내성을 지나서 서쪽으로 흘러가다가 염난수와 합치고, 또 서남쪽으로 흘러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평양은 압록수 동남쪽에 있어 큰 배로 사람을 건너 주기 때문에 이것으로 참호를 삼는다. 관리는 모두 십이등급이 있다. 대대로는 혹 토쇄라 하고, 울절은 도부를 주장한다.

  이 외에 또 태대사자가 있고, 백의두대형이 있으니 소위 백의라는 것은 선인을 말한다. 이들이 나라의 정치를 맡아 다스리는데 삼년에 한 번씩은 바꾸게 마련이다. 하지만 직책을 잘 맡아 보면 바꾸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을 바꾸는 날에 먼저 있던 사람이 복종하지 않는 때는 힘으로 겨루게 하고, 왕은 궁궐 안에 있다가 이긴 자를 뽑아서 시킨다. 또 그 다음으로는 대사자, 대형, 상위사자, 제형, 소사자, 과절, 선인, 도추대가 등이 있다.

  그 주와 현은 모두 육십이 있다. 큰 성에는 누살일을 두는데, 이것은 도독과 같다. 나머지 성에는 처려근지를 두는데, 이것은 또 도사라고도 하여 자사와 같다. 또 참좌분간, 대모달이 있으니, 이것은 위장군과 같고, 말객은 중랑장과 같다.

  또 다섯 부가 있는데 이것은 내부는 곧 한나라 때 계루부로서 또한 황부라고 한다. 또 북부는 곧 절노부이니 이것을 혹은 후부라고 한다. 다음 동부는 곧 순노부로서 이것을 혹은 좌부라고 한다. 남부는 곧 관노부이니 이것은 또 전부라고 한다. 서부는 곧 소노부이다.

  왕은 오색 비단옷을 입고 흰 비단으로 관을 만들어 쓴다. 가죽띠에는 모두 금으로 장식을 한다. 대신들은 청라관을 쓰고, 그 다음은 강라를 쓰는데, 양쪽에 새깃을 꽂는다. 그리고 금과 은으로 장식을 한다. 바지의 통은 크고 흰 가죽띠에 누런 가죽신을 신는다.

  서인들은 무명옷에 고깔을 쓰고 여자는 수건을 동여맨다. 그들의 풍속은 장기와 투호, 축국을 좋아한다. 식사에는 여러 가지 그릇을 쓴다. 산골짜기를 따라 살고 지붕은 풀로 떼를 인다. 그러나 오직 왕궁과 관부와 절만은 기와로 인다.

  가난한 백성들은 겨울이면 굴을 파고 들어가 불을 피워 따뜻하게 하고 산다. 그들의 법은 몹시 엄준해서 조금만 반역을 꾀한 자가 있으면 불 위에 몸뚱이를 태우고 목 베어 죽인다. 그리고 그집을 몰수해 버린다. 다음으로 싸움에서 적에게 항복하거나 패한 자, 또 사람을 죽이거나 남을 겁탈한 자는 목 베어 죽인다. 도둑질을 한 자는 훔친 물건의 십배를 받는다. 소나 말을 훔친 자는 잡아다가 종을 시킨다. 그런 때문에 그들은 길에 흘린 물건도 줍지 않는다.

  혼인에는 폐백을 받지 않는다. 이것을 받는 자는 수치로 안다. 부모의 초상에는 삼년복을 입고, 형제는 한 달만에 벗는다. 풍속이 음사가 많아서 영성과 해와 기자와 가한 등의 신을 제사 드린다. 나라 좌편에 큰 굴이 있다. 이것을 신수라고 한다. 매월 십일이 되면 왕이 몸수 나가서 제사를 드린다.

  사람들은 모두 배우기를 좋아해서 아무리 군색한 마을의 없이 사는 집이라도 역시 모두 부지런히 배운다. 길가에는 모두 엄옥을 지어 이것을 편당이라 하고, 자제들 중에 아직 장가 들지 않은 자가 있으면 여기 모여서 경서도 외고 활 쏘기도 연습한다.

  수나라 말년에 그 왕 고원이 죽자 이모의 아우 건무가 왕위를 이었다. 무덕 초년에 그들은 다시 사신을 보내서 입조시키니 당고조는 글을 내려 수호했다. 그리하여 고려 사람이 중국에 있는 자도 돌려 보내고, 중국 사람이 고려에 있는 자도 돌려 보내고, 중국 사람이 고려에 있는 자도 돌려 보내기로 약속했다. 이에 건무는 망명해 온 사람들을 모조리 도로 찾아가지고 돌아갔는데 이들은 모두 만 명이나 되었다.

  그 뒤 삼년에 사신을 보내 오므로 제는 건무에게 상주국 요동군주 고려왕을 배하고, 도사에게 명하여 상법을 시켜 노자를 강론해 주도록 했다. 이에 건무가 크게 기뻐하여 나라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모두 들으니 그 수가 날마다 수천 명씩 되었다.

  제가 좌우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이제야 이름과 실상이 서로 맞게 되었도다. 고려가 아무리 수나라에 신하노릇을 했지만, 마침내는 양제를 거역했으니 어찌 신하노릇을 했다고 하겠느냐. 짐은 이제 사람들을 편안케 하려고 애쓰고 있거니 어찌 하필 그들을 신하로 여기려고 하랴] 했다.

  이에 배구, 온언박 등이 간한다.

  [요동은 본래 기자의 나라로서 위, 진 때에 내후를 봉했아오니 그들을 신하로 삼지 않을 수가 없아옵니다. 중국과 이적은 마치 태양과 뭇별과 같아서 같이 지낼 수가 없아옵니다.]

  이리하여 이 의논은 중지되고 말았다.

  이듬해에 신라와 백제가 글을 올려 말하기를, [고려의 건무가 길을 가로막고 있어서 입조하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오라, 또 자주 침입을 당하고 있습니다] 하니, 제는 산기시랑 주자사에게 조서를 내려 가서 타이르게 했더니 건무는 사죄하고 그들 두 나라와 평화롭게 살기를 청했다.

  태종이 이미 돌궐 힐리를 사로잡자 건무는 사신을 보내서 이를 하례하고 봉역도를 올렸다. 이에 제는 조서를 내려 광주사마 장손사로 하려금 고려에서 세운 경고나을 헐라고 하니 건무는 두려워하여 천 리 길이의 장성을 쌓아 동북쪽을 부여로 머리를 하고 서남쪽은 바다에 닿는 데서 끝나게 했다. 이런 지 오래되어 태자 환권을 보내서 입조시키고 방물을 바쳤다.

  제는 후하게 물건을 내리고 사자 진대덕에게 조서를 내려 그 나라에 가서 그 수고로움에 답하게 했다. 대덕이 그 나라에 들어가자 후하게 그 관리들에게 음식을 주어 그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고, 또 중국의 유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친척의 존망을 물으니 듣는 자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런 때문에 그가 가는 곳마다 남녀들이 모여 들어 그를 맞았고, 건무도 군사를 많이 벌려놓고 그를 맞아 주었다.

  진대덕이 본국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아뢰니 제는 몹시 기뻐했다. 대덕은 또 말하기를, [고창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 나라 대대로가 세 번이나 객관에 와서 예를 베풀었습니다] 하니, 제는 기뻐하여 말하기를 [고려는 땅이 네 군밖에 없으니 내가 만일 군사 수만 명을 내어 요동을 공격한다면 모든 성 군사들이 반드시 와서 나를 구원할 것이니 배를 타고 동래로부터 바다로 해서 평양까지 가기는 진실로 쉬운 일이다. 하지만 천하가 아지 태평한 터에 사람들을 공연히 수고롭게 하고 싶지 않다] 했다.

  개소문이란 자가 있어 혹은 이름을 개금이라고도 하고, 성은 천씨라고도 한다. 그는 자칭 물 속에서 났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혹하게 하고 성질이 잔인하고 포악하다. 그 아버지는 동부대인이 되었었는데, 대대로가 죽자 개소문이 그 뒤를 이으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미워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설 수가 없었다.

  그는 머리를 조아려 여러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그 자리를 이어 받기를 청하면서 만일 잘못이 있다면 비록 죽인대도 뉘우치지 않게싿고 했다. 이리하여 모든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드디어 그 자리를 계승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잔인하고 무도하므로 모든 대신들이 건무와 의논하고 죽일 계획을 의논했다.

  개소문은 이를 깨닫고 여러 부 사람들을 모두 불러 놓고 거짓 말하기를, [크게 열병식을 할 것이니 술과 안주를 모두 마련하고 대신들을 청해서 와서 보도록 하라] 했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모이자 모조리 죽여 버리니 죽은 자가 모두 백여 명이나 되었다. 이 길로 달려 궁중에 들어가 건무를 죽이고 그 시체를 가져다가 뜰 속에 버린 다음, 새로 건무의 아우의 아들 장을 세워 왕을 삼고 자기는 막리지가 되어 나라의 정치를 혼자서 맡아 했다.

  당나라 병부상서령 직의 말을 들으면 그는 모양이 훤출하고 수염이 아름다우며 관복을 모두 금으로 장식했으며, 다섯 자루의 칼을 차거 좌우 사람들이 감히 우러러 보지 못했다. 그는 또 귀인을 땅에 엎드리라 하고, 그것을 밟고서 말에 올라탔으며 출입하면서 군사를 거느리고 긴 소리로 호령을 치면 행인들까지도 두려워하여 모두 도망했다고 한다.

  그가 투갱곡에 이르자 제는 건무가 아랫사람에게 죽었다는 말을 듣고 불쌍히 생각하여 사자를 보내서 조상하는 제사를 드리게 했다. 이 때 혹은 제에게 권하여 그를 치라고 했으나, 제는 초상난 것으로 인해서 공격하지 않겠다 하고 이에 장을 요동군왕 고려왕을 삼았다.

  제는 말하기를,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빼앗으니 이제는 짐이 이 나라를 취하기 몹시 쉽겠다. 그런 때문에 공연히 사람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려 하는데 그대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사공 방현령이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군사가 용매앟고 병력이 남으시는데도 이것을 쓰지 않으시니 이야말로 이른바 병기를 쉬고서도 위엄을 떨치시는 것이옵니다] 했다.

  또 사도 장손무기는 말하기를, [고려에서 한 번도 어려운 일이 있다고 보고한 일이 없아오니 마땅히 글을 내리시어 그들을 위로하고, 그 환관을 숨겨 주고 그 살아 있는 자들을 어루만져 주면 저들은 마땅히 우리의 명령을 들을 것입니다] 하니 제는 [옳은 말이다] 했다.

  이 때 마침 신라에서 사신을 보내서 글을 올려 말하기를, [고려와 백제가 저희들끼리 연화해서 장차 우리를 치고자 하옵기 삼가 천자께 보고하나이다] 했다.

  제는 사자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면 그 화를 면할 수 있겠는가] 하니, 사자는 [저희로서는 어찌할 길이 없아오니 오직 폐하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처리해 주시옵소서] 한다. 이에 제는 말한다. [그러면 내가 그 방법을 말하리라. 내가 조그만 군사를 거느리고 또 글안과 말갈을 이끌고 요동으로 들어가면 너희 나라는 일년 동안은 그대로 넘길 수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한 가지 계책이요, 또 내가 비단 도포와 붉은 휘장을 수천 폭 줄 것이니 이것을 만일 너의 진중에 벌려 세우면 저들 두 나가 보고, 우리 군사가 간 줄로 알고 필연 도망할 것이니 이것이 또 계책이다. 또 하나는 백제는 바다를 믿고 병기를 장만하지 않고 있으니 내가 배 수만 척을 가지고 습격하면 너희 나라는 이웃 나라가 모욕을 당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서 돕는 체하면 평안하기를 바랄 수 있을 것이니 이것이 한 방법이다. 너는 이 중에서 어느 것을 취하겠느냐.]

  그러나 사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이에 제는 사농승상리 현장을 보내서 새서를 고려에 주어 서로 공격하지 말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나 사신이 도착하기도 전에 개소문은 이미 신라의 두 성을 취해 버렸었다.

  현장이 그에게 제의 뜻을 전하자 그는 여기에 대답하기를, [전번에 수나라가 침략을 받았을제 신라는 그 틈을 타서 우리 땅 오백 리를 빼앗아 갔아온데 아직까지도 그 땅을 다 돌려 보내지도 않고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한다.

  현장은 [지나간 일을 어찌 말하는가. 요동은 원래 중국의 군현인데도 이것을 우리 천자께서는 아직 취하지 않고 있는 터인데 고려가 어찌 감히 천자의 뜻을 어기는가] 했지만, 개소문은 듣지 않는다.

  현장이 돌아와 이 사실을 보고하니 제는 말하기를, [막리지가 임금을 죽이고 그 아랫 사람들에게 몹시 굴어서 마치 함정에 빠뜨리듯하니 그 원통한 마음들이 가득하다. 그런데 내가 군사를 내는 것이 어찌 아무런 명분이 없다고 하겠는냐] 했다.

  간의대부 저수량이 말하기를, [폐하의 군사가 요동에 건너가서 이기게 되면 좋겠지오마는, 만일에 그렇지 못하고보면 재차 군사를 내게 될 것이온데 재차 군사를 내게 되면 안위를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한다.

  그러나 병부상서 이적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전번에 설연타가 변방을 침입했을 때 폐하께서 이를추격하시려 하자 위징이 이를 간하여 그만두시도록 했아온데 그 때에 만일 적을 쳤더라면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오. 그 뒤에도 다시 반란을 일으켜서 지금껏 한이 되었을 것입니다] 했다.

  제는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참으로 그러하다. 단 한 번 생각을 잘못했다가는 큰 허물을 짓게 되는 법이다. 이 뒤에는 누가 나를 위해서 계교를 말해 준단 말이냐] 했다.

  신라가 자주 원조를 청해 오자 이에 오선 사백 척에 양식을 싣고 영주도독 장검 등에게 조서를 내려 유주, 영주의 군사와 글안, 해, 말갈 등의 군사를 내어 치게 했더니, 마침 요수가 넘쳐서 그대로 군사를 돌렸다. 이것을 보고 막리지가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서 백금을 바쳤으나, 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자가 또 말하기를, [막리지가 관리 오십 명을 보내서 숙위시키고자 합니다] 하니, 제는 노하여 사자를 책망하기를, [너희들이 날랜 것만 믿고 절개를 지켜 의리에 죽지 않고 또 역적들을 위해서 계교를 베푸니 용서할 수 없다] 하고 이들을 모두 옥에 가두었다.

  이리하여 제는 친히 장차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려 하여 장안의 고로들을 불러 말하기를, [요동은 본래 중국 땅이었는데 막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기로 짐이 장차 손수 가서 치려고 한다. 그래서 너희들 부로들과 약속하는 것이니 너희들의 아들이나 손자가 만일 나를 따라가는 자는 내가 함께 가서 적을 치고 돌아올 것이니 너희는 조금도 근심하지 말라] 하고 즉시 포목과 곡식을 하사했다.

  그러나 모든 신하들은 모두 제를 권해서 가지 말라고 한다.

  이에 제가 말하기를, [나도 잘못인 줄은 안다. 근본을 버리고 끝을 잡는 것과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것을 취하는 것과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데로 가는 이 세 가지 일은 모두 상서롭지 못한 일들이다. 하지만 이제 개소문은 제 임금을 죽이고 또 대신들을 도륙하여 못된 짓을 하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목을 늘이고 우리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터이다. 그런데 의논하는 자들은 이런 것에 밝지 못하고 하는 말들이다] 하고, 이에 북쪽으로 곡식을 영주로 운반하고 동쪽으로 고대인성에 쌓아 두게 하고서 제가 친히 낙양에 나가 장량으로 평양도 행군대총관을 삼고, 염인덕, 유영행, 장문간, 방효태, 정명진으로 총고나을 삼아 강오 경락에서 모집한 군사 사만명과 오선 오백 척을 거느리고 바다로 해서 평양으로 나갔다.

  한편 이적으로 요동도 행군대총관을 삼고 강하 왕도종으로 부관을 삼으며, 또 장사귀, 장검, 집실사력, 계필하력, 아사나미사, 강덕본, 국지성, 오흑달로 행군총관을 삼아서 기병 육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나가게 했다.

  부서를 마친 다음 제는 조서를 내리기를, [짐이 지나는 병영에는 아예 음식을 요란스레 차리지도 말고 풍성하게 하지도 말라. 물을 건널 만한 곳은 다리를 놓을 필요가 없다. 가는 곳이 가까운 주현이 아니니 학생이나 고로들로 하여금 나와서 맞지 말도록 하라. 짐이 옛날에 병기를 이끌고 난리를 평정할 때에는 한 달의 세월을 넘기지 않아서 가는 곳마다 적들이 바람처럼 쓰러졌었다. 이제 다행히 재물도 넉넉하고 사람도 풍족하지만 다만 먼 길에 곡식을 운반하기 힘들까 걱정되어 소와 말을 몰고 가서 군사들에게 먹이고자 한다. 또 짐은 반드시 이길 일이 다섯 가지가 있다. 우리의 큰 것으로 저들의 적은 것을 치며, 우리의 순한 것으로 저들의 역을 치며, 우리의 편안한 것으로 저들의 어지러운 틈을 타며, 우리의 아농ㄴ한 것으로 저들의 수고로운 것을 치며, 우리의 서로 기뻐하는 것으로 저들의 원망하는 것을 치니, 그 어찌 이기지 못할 것을 근심하랴] 했다.

  이리하여 글안과 해와 신라, 백제의 모든 군사를 모아놓고 십구년 이월에 제가 낙양으로부터 정주에 나와 좌우에 이르기를, [이제 천하가 크게 정해졌는데 오직 요동만이 편안치 못하여 신하들이 나를 인도하여 이를 토벌하라 하기로, 난리를 치는 일이 바야흐로 시작되어 짐이 스스로 나와 이를 취하여 뒷세상에 근심을 남기지 않으려 한다] 했다.

  이에 제가 성문에 앉아서 앞을 지나가는 군인과 사람들을 일일이 불러 위로하고, 혹 병이 있는 자는 이를 친히 돌봐 주고 주현에 말해서 치료해 주도록 했다. 이것을 보고 사대부들은 모두 기뻐했다.

  장손무기가 아뢰기를, [천자께서 시종을 모두 데리고 나오셨는데, 궁관은 겨우 십명에 지나지 않사오니 천하 사람들이 천자를 경솔히 여긴다고 합니다] 했다.

  그러나 제는 말한다.

  [군사들이 십만 명이나 요수를 건너 모두 자기 집을 버리고 왔는데, 짐은 열 사람이나 데리고 왔으니 오히려 많다고 걱정하는 터이다. 공은 이 말을 다시 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고 제는 몸소 말안장 좌우에 화살통을 매달고 다녔다.

  사월에 이적이 요수를 건너가니 고려에서는 모두 성을 닫고 굳게 지킨다. 제는 여기에서 크게 한 번 군사들을 배불리 먹인 다음 유주 남쪽에 장막을 치고 장손무기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들을 거느리고 맹세하게 하고 다시 동쪽으로 진군했다. 이 때 이적이 개모성을 공격해서 함락시켜 이만 호와 양식 십만석을 얻고, 인하여 그 땅으로 개주를 삼았다.

  한편 정명진은 사비성을 공격하여 밤에 들어가니 그 서쪽 성이 함락되었다. 그리하여 그 곳 사람 팔천 명을 포로로 잡고 군사를 압록수 위에서 쉬었다. 이에 이적은 드디어 요동성을 포위하니 제는 요택에 나가 조서를 내려 전에 수나라 때 죽은 군사들의 시체를 거두어 묻어 주게 했다.

  이 때 고려에서는 신성과 국내성의 기병 사만 명을 내여 요동을 구하자, 도종이 장군예의 군사를 거느리고 역전했다. 그러나 군예가 퇴각하므로 도종은 단기로 달려 들어가서 군사를 사로잡고 흩어진 패잔병을 수습하여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니 고려의 진중이 몹시 시끄러웠다. 이에 급히 이를 쳐서 천여 명의 머리를 베고 국예를 베어 문죄했다.

  제는 요수를 건너자 가교를 철수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굳게 한 다음 마수산에 영을 치고 몸소 성 밑에 이르러 보니, 군사들이 똘을 메우노라 분주하다. 이에 제는 그 중에서 짐이 제일 무거운 자를 부뜰어 말 위에서 짐을 받으니 모든 신하들은 몹시 두려워하고 놀랬다.

  성에는 주몽의 사당이 있고 사당 안에는 쇄갑과 갈쿠리진 창이 있는데, 이것은 전연 때 하늘에서 내린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다. 성을 몹시 급히 포위하자 성 안에서는 아름다운 여자를 부신으로 분장시켜 가지고 말하기를, [지금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몹시 기뻐하니 성은 반드시 완전할 것이라] 했다.

  이적이 수레를 몰고 큰 돌을 날리면서 앞으로 나가니 닿는 곳은 모두 무너진다. 적들은 나무를 엮어 누를 만들고 그물을 쳐도 이를 막아내지 못한다. 이리하여 수레를 몰고 나가 집들을 모조리 부셔 버렸다.

  이 때 백제에서 금목개를 바쳤고, 또 현금으로 산오문개를 만들어서 군사들은 모두 이것을 쓰고 전쟁에 나갔었다. 제가 이적과 서로 모이자 갑옷과 투구에서 나는 빛이 햇빛에 번쩍이는데, 마침 남풍이 급히 불어 온다. 군사들이 불을 놓아 적의 서남쪽을 태우자 불이 성 안에까지 번져 집들이 거의 모두 타 없어지고 사람들이 불속에서 죽은 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군사들이 적의 진으로 올라가자 적은 방패를 가지고 이를 막는다. 이에 군사들이 창을 가지고 방아찧듯이 찌르고 돌을 굴려 비오듯하자 성이 이에 함락되었다. 이 싸움에서 사로잡은 호수가 사만이요 곡식이 오십만 석이 되었다. 이 땅으로 요주를 삼았다.

  처음에 제가 태자 있는 곳에 봉화 하나를 놓아 두고 약속하기를 요동성을 함락하는 날에는 봉화를 들라 했었는데, 이 날 봉화를 들어 국경까지 소식을 알리고 진군하여 백애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성은 산을 등지고 물가에 임하여 지세가 몹시 험하다. 제가 서북쪽을 등지고 진을 치니 적의 추장 손벌음이 비밀히 항복하기를 청한다. 하지만 성 안 의논은 통일되지 못했다.

  제는 깃대 하나를 주어 보내면서, [너희가 만일 항복하겠다면 이 깃대를 진첩 위에 세워서 표신을 하라] 했더니, 이윽고 깃대가 꽂아지고 성 안 사람들은 모두 당나라 군사가 성에 오른것이라 해서 항복하고 말았다.

  처음에 벌음이 남의 항복하려 하자 남의 방해를 받았었는데, 이것을 알고 제는 노하여 사로잡은 사람들을여러 장수들에게 주겠다고 약소갛여 일제히 힘을 얻어 진군했던 것이다.

  이 때에 이르러 이적이 말하기를, [군사가 분격하여 앞으로 나가는 것은 적을 많이 사로잡으려는 것이옵니다. 하오나 이제 성을 함락시켰아오니 그들의 항복하는 것을 받아들여 군사들의 마음을 허무하게 만들지 마시옵소서] 하니, 제도  ㄹ하기를 [장군의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군사를 놓아 살육하고 남의 처자들을 사로잡는 것은 짐이 차마 못하겠소. 장군의 휘하에 공이 있는 자는 짐이 모두 물건을 상으로 줄 터이니 장군은 이 한 성을 그대로 둘 수 없겠소] 했다.

  이리하여 남녀 여러 만 명과 군사 이천 명을 사로잡고 그 땅으로 암주를 삼고 벌음을 배하여 자사를 삼았다. 제가 안시에 나가자 이 때 고려 북부의 누살 고연수와 남부의 누살 고혜진이 군사와 말갈의 군사 십오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했다.

  이에 제가 말하기를, [저들이 만일 군사를 벌여 안시까지 연결하여 높은 산을 등지고 들이쳐서 성 안에 있는 곡식을 취해다가 이것을 먹고 말갈의 군사를 놓아서 우리소나 말을 침략한대도 이것을 함락시킬 수가 없을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고, 밤에 가서 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중책이니 우리와 만일 다투고 보면 사로잡힐 것이다] 했다.

  이 때 대대로가 연수를 위하여 계교를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중국이 어지러우면 호걸과 영웅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진왕 같은 신무로서 적들이 몹시 싸웠으나 앞으로 나가지 못해서 드디어 천하를 평정하고 남면하고 임금 노릇을 하여 북적과 서융들이 모두신하노릇을 하고 땅을 쓸다 시피하고 왔다. 그런데 지금은 모신과 장수들이 모두 있어서 그 날카로운 칼날을 막아낼 수가 없다. 그러니 지금은 군사를 머물러 두고 여러 날을 보내면서 비밀히 기병을 보대서 그 양식 운반하는 길을 끊고 보면 불과 한 달이 못되어 양식이 떨어져서 싸우고자 해도 싸울 수가 없고 돌아갈래도 길이 없을 거싱니 그들을 취할 수가 있을 것이다] 했으나, 연수는 이를 쫓지 않았고, 군사를 거느려 안시와 사십 리 거리를 연결하여 들쳤다.

  이것을 보고 제는 [적들이 내 꾀에 빠졌다] 하고, 좌위대장군 아사나사니에게 명하여 돌궐 군사 천여 명을 가지고 적을 유인하도록 했다.

  적들은 말갈의 정예한 군사가 항상 앞에 있고, 사니의 군사는 북쪽으로 연해 있으므로 연수는 말하기를, [당나라는 치기가 쉽겠구나] 하고, 진군하여 ㄱ누사를 산기슭에 의지하여 진쳤다.

  이 때 제가 연수에게 조서를 내리기를, [나는 너희 나라에 강성한 신하가 있어 그 임금을 죽였다 하기로 와서 죄를 묻는 것이니 교전하는 것은 실로 대 뜻이 아니다] 했다.

  연수는 이 말을 듣고 갑옷을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밤 제는 제장을 불러 잊거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오천 명을 거느리고 서쪽 고개에 진을 치고 적을 당하게 하고, 한편 장손무기와 우진달로 하여금 정병 만 명을 거느리고 적의 후면 좁은 골짜기로 진군하게 했다.

  제는 기병 사천 명으로 깃대를 눕히고 북산 위로 적을 향해 가다가 제군에 영을 내리기를, [북소리가 울리거든 군사를 일제히 내어 공격하라. 내일 안으로 적들이 이곳에서 항복하게 하리라] 했다.

  이날 밤 유성이 연수의 영중에 떨어졌다. 날이 밝자 그들은 이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곧 나와서 싸운다. 제는 무기의 군중에서 티끌이 이는 것으 ㄹ보고, 고각을 울리도록 명하자 군사들이 사방에서 몰아닥친다. 적은 황망하고 의혹이 생겨 장차 군사를 나누어 막으려 했으나 군중이 이미 어지러워진다. 적은 보병으로 하여금 창을 가지고 어지럽게 쳐서 패하게 하고, 한편 무기는 그 뒤를 타서 공격하며, 또 제는 군사를 몰아 산으로부터 달려 내려가니 적이 크게 어지러워진다.

  이 싸움에 이만 명의 머리를 베었다. 연수는 남은 군사를 수습하여 산을 등지고 굳게 영채를 단속했다. 그러나 이적과 무기가 함께 이를 포위하고 내 위에 놓은 다리를 헐어 돌아갈 길을 끊는다.

  제는 말고삐를 잡고 친히적의 영채를 바라보면서, [이번에 고려가 온 나라 군사를 모두 기울여 왔는데도 한 번 싸움에 이를 깨쳤으니 이것은 실로 하늘이 나를 도운 것이로다] 하고, 말에서 내려 두 번 절하고 하늘에 대해 사례했다.

  한편 연수 등은 형세가 이미 기울어진 것을 보고, 즉시 모든 군사를 이끌고 항복했다. 원문으로 들어와 무릎으로 기면서 손을 마주잡고 명령을 기다린다.

  제는 말하기를, [이 뒤에도 감히 천자와 전쟁을 하겠느냐] 하니, 연수 등은 황공해서 대답을 하지 못한다.

  이에 제는 그들의 추장 삼천오백 명을 모두 용서하여 내국으로 옮겨 살게 하고 나머지 무리 삼만 명은 모두 놓아 돌려 보냈다. 그리고 말갈 사람 삼천여 명만 베고, 말과 소 십만 마리만을 사로잡고, 명광개 만 개를 얻었다.

  이 싸움에 고려는 크게 놀래어 후황과 은 등 두 성을 자진해 철수해 가니 수백 리 사이에 연기 나는 집이라곤 없었다.

  제는 이에 역마를 시켜 태자에게 이긴 사실을 알리게 하고, 또 모든 신하들에게 글을 내렸다.

  [짐이 이제 이렇게 이겼으니 경들은 어떻다 하겠느냐.]

  이에 제가 가서 머물었던 곳을 주필산이라 하고, 적진을 깨치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돌에 새겨 그 공을 기념했다. 또 연수를 배하여 홍노경을 삼고, 혜진으로 사농경을 삼았다. 이 때 척후병 하나가 적의 군사 한 명을 잡아 왔다. 그 군사는 말하기를, 삼일 동안이나 먹지 못했다고 한다.

  이에 제는 그 묶은 것을 풀어 주게 하고, 먹을 것을 주도록 명한 다음 도랑가게 하면서, [너는 돌아가거든 막리지에게 말하라. 그대의 군중의 진퇴를 사람을 시켜 내게 알리라] 했다.

  제는 영채마다 참루를 만들지 않고 다만 척후를 시킬 뿐이었다. 군사가 비록 단기로 양식을 운반해도 적은 감히 이를 뺏지 못했다. 제는 다시 이적과 함께 적을 공격할 것을 의논한다. ** 제가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안시성은 땅이 험하고 사람들이 사나와서 막리지가 이를 치다가 함락시키지 못했다 하고, 또 건안은 지형이 험한 것만 믿어 곡식은 많아도 군사는 적다고 하니, 만일 불의에 이곳을 치면 저희들이 서로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건안을 얻고 보면 안시는 내 뱃속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했다.

  그러나 이적은 반대한다.

  [그렇지 않습니다. 양식을 요동에 쌓아 두고 서ㅉ고으로 건안을 쳤다가 적이 우리 돌아갈 길을 막는다면 어찌하겠습니까. 하오니 먼저 안시를 치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

  이에 제도 옳다고 하고 드디어 안시성을 치기로 했다. 그러나 성은 좀처럼 함락되지 않는다.

  연수와 혜진이 서로 의논ㄴ하기를, [오골성의 누살은 이미 늙었으니 이야말로 아침에 치면 저녁이면 함락시킬 수가 있다. 오골성을 함락시키면 평양은 금시에 이길 수가 있을 것이다] 했다.

  이 말을 듣는 모든 신하들도 역시 장량의 군사가 사성에 있어 불러도 금시에 오지 못할 것인즉 만일 오골성을 취하여 압록수를 건너가지고 그들의 심장을 누르는 것이 계교 중의 상책이라고 했다. 그러나 무기는 말하기를, [천자께서 친히 군사를 내시는데 요행을 바랄 수는 없다. 이제 안시 무리 십만 명이 우리의 뒤에 있으니 이를 먼저 쳐서 깨치는 이만 같지 못하니 그런 다음에 군사를 몰아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이 만전의 계책이다] 해서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이 때 안시성 안에서 제의 깃발을 보자 모두 일어서서 떠들어댄다. 제느 이것을 보고 몹시 노한다.

  이적은 제의 노하는 것을 보고, [성을 함락시키는 날에는 남자는 모조리 죽이겠습니다] 하고 청한다.

  적들은 전에 소식을 들었기에 죽기로 싸운다. 강하의 왕도종이 큰 담을 쌓아 동남쪽을 공격하자 성 안에서는 군사를 더해서 굳게 지키고 있다.

  이적이 성 서쪽을 공격하여 수레를 몰아 성을 부수고 목책을 세워 누를 만든다.

  제는 성 안에서 닭과 돼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말하기를, [성을 포위한 지가 이미 오래서 굴뚝에서는 검은 연기가 나지 않더니 이제 닭과 돼지가 우니 이는 필경 군사들이 잡아먹는 것이로구나] 했다.

  적들이 밤에 나오자 제는 명하여 군사를 엄하게 단속하게 한다. 이날 밤중에 적 수백 명이 줄을 타고 성에서 내려오자 이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도종은 나무를 쌓아 흙으로 덮어 높다랗게 만드니 성과의 거리가 불과 두어 길밖에 되지 않는데, 이것을 과의도위 부복애를 시켜 지키게 한 다음 높은 곳에서 성으로 들어가니 성이 금시에 무너진다.

  이 때 복애는 가만히 적에게로 가서 적을 시켜 성을 허물고 나가도록 했다. 그리하여 참호로 가로막고 굳게 지키면서 불을 살라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한다. 제는 노하여 복애를 주깅고 제장들에게 명하여 치게 했으나, 삼일 동안을 쳐도 이기지 못한다.

  이에 제는 조서를 내려 회군하게 하고 요와 개의 두 고을 사람만 데리고 돌아갔다. 이 때 군사가 성 밑을 지나자 성 안에서는 기운을 죽이고 깃대를 누이고 있다. 그리고 적의 추장들은 성 위에 올라 재배한다. 제는 그들의 잘 지킨 것을 가상히 여겨 비단 백 필과 요동의 곡식 십만 섬을 주니 군사들으 이것을 다 가져가지 못한다.

  제가 발착수에 이르자 팔십 리 거리를 물에 막혀 수레가 가지 못한다. 이에 장손무기, 양사도 등이 군사 일만 명을 거느리고 나무를 베어 길을 만들고 수레를 연하여 다리를 놓았다. 이것을 보고 제는 말 위에서 그들의 역사를 조력해 주었다.

  시월에 이르러 군사가 모두 건너자 이번에는 눈이 몹시 쌓인다. 횃불을 켜들고 눈이 녹기를 기다려 행군하여 비로소 군사 십만 명과 말 만 필이 지나갔는데, 이 중에는 죽은 군사가 천여 명이 되고 말은 열 필 중에 여덟 필은 죽었으며, 장량의 수군 칠만 명 중에서 수백 명이 죽었다.

  이에 조서를 내려 죽은 시체를 거두어 유성에 장사 지내고 대뇌의 예로 제사를 지내면서 제가 친히 나가서 곡하니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제사를 마치자 제는 기병을 날려 임투관으로 들어가자 황태자가 길에 나와 맞는다.

  처음에 제가 태자와 작별할 적에 갈표를 입으면서, [너를 다시 만나는 날에나 이 도포를 바꾸어 입겠다] 했었다. 그런 지 이년 동안 전지에서 한 번도 도포를 갈아입지 않아서 심지어 구멍이 뚫려 있었다. 좌우의 신하들이 이것을 갈아 입도록 청하면 제는, [군사들은 모두 해진 옷을 입었는데 내가 어찌 새 옷을 입겠느냐] 했었다.

  제가 이제 돌아오자 태자가 새 옷을 바치니 그제서야 비로소 받아 입었다. 요동에서 항복한 사람들은 모두 몰수해서 노비를 삼고 유주에서 얻어온 물건은 나누어 군사들에게 상으로 주었다. 제는 또 부자와 부부가 떨어져 있던 사람들에게는 유사에게 명하여 포목과 비단을 내리니 온 백성들이 줄지어 절하고 춤추어 삼일 동안을 쉬지 않았다.

  연수는 항복한 뒤로 근심으로 병이 생겨 죽었고, 유독 혜진만이 장안에 이르렀다. 이듬해 봄에 장이 사신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또 사죄하면서 두 누이를 바쳤으나 제는 이를 위로하여 돌려 보내고 사자에게 이르기를, [대체로 여색이란 것은 사람마다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 친척을 버리게 하여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내가 하지 않겠다] 했다.

  처음에 군사가 돌아올제 제는 활과 옷을 개소문에게 주자 그는 이것을 받을 뿐으로 사신을 보내서 사례하지는 않았다. 이에 제는 조서를 내려 그의 조공하는 것을 받지 않기로 했다.

  또 이듬해 삼월에 조서를 내려 좌무위대장군 우진달을 청구도 행군대총관을 삼고, 우무이장군 이해안으로 부관을 삼아 내주로부터 바다를 건너오게 했다. 또 이적으로 요동도 행군대총관을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과 우둔위대장군 정인태로 부관을 삼아 영주도독병을 거느리고 신성 앞길을 쫓아 나가서, 남소, 목저로 나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그들의 성곽을 불살랐다.

  칠월에 진달 등이 석정을 취하여 적리성으로 진공하여 수천 명의 적을 목 베고 돌아옸다. 이 때 장이 그 아들 막리지와 고임무를 보내서 입조하고 인하여 사죄했다.

  이십이년에 조서를 내려 우무위대장군 설만철로 청구도 행군대총관을 삼고 우무위장군 배행방으로 부관을 삼아서 바닷길로 해서 들어가게 했다. 이 때 그 부장 고신감이 적과 갈산에서 싸워 적이 패하자 적은 어둠을 타고 우리 배를 습격해 왔다. 그러나 우리 복명이 이를 깨쳤다.

  만철이 압록수를 건너 작성에 이르러 자고, 적에게 사십 리를 떨어져 영을 치니 적은 두려워하여 모두 부락을 버리고 가버렸다. 이 때 그들의 추장 소부손이 항거하여 싸우니 만철이 이를 쳐서 베고, 드디어 성을 포위한 다음 그들의 구원병 삼만 명을 멸하고 돌아왔다.

  제가 장손무기와 계교를 하기를, [고려가 우리 군사에게 시달려서 백성들은 도망하고 전답은 묵어서 해마다 곡식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이제 오직 개소문이 성을 쌓고 군비를 늘이고 있지만 아랫도리 백성들은 굶주려서 도랑에 굴러 죽고 있으니 그 괴로움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내년에 우리가 삼십만 군사를 내어 치되 공이 대총관이 되고 보면 한 번 싸움에 적을 멸망시킬 수가 있을 것이다] 했다.

  이에 조서를 내려 검남에 크게 배를 만드니 촉 땅 사람들이 그들의 재물을 강남으로 운반하기를 원해서 배를 만드려고 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시끄러워서 공, 미, 아의 세 고을 오랑캐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킨다. 이에 농서, 섬내의 군사 이만 명을 거느리고 이를 쳐서 평정했다.

  처음에 제가 적을 취하기로 결정하던 때 일부러 조서를 내려 섬주자사 손복가와 내주자사 이도유로 하여금 양식과 병기를 삼산포와 오호도에 저축해 쌓아 두게 하고, 또 월주도독으로 하여금 큰 배를 만들고 기다리게 했었다. 그러나 마침 제가 붕해서 일이 모두 중지되었다. 이에 장이 사자를 보내서 위로했다.

  영휘 오년에 장이 말갈 군사를 거느리고 글안을 공격하여 신성에서 싸우는데, 큰 바람이 불어와서 쏘는 화살이 되돌아와서 도리어 글안의 공격을 받게 되어 크게 패했다. 글안은 들판에 불을 놓고 다시 싸워서 사람이 계속 죽어서 시체가 들에 쌓였다. 이에 사신을 보내서 첩보를 올리고 고종이 조정에서 노포했다.

  육년에 신라가 사정을 고려와 말갈에 호소하여 삼십육개 성을 빼앗으니, 이 때 오직 천자가 이를 불쌍히 여겨 구원해 주려 하여 영주도독 정명진과 좌위중랑장 소정방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이끌고 치게 하여 신성에서 고려 군사를 깨치고 외곽과빈 부락을 불태우고 돌아왔다.

  현경 삼년에 다시 명진을 보내서 설인귀를 이끌고 나가 쳤으나, 이기지 못했다. 그 후 이년에 천자가 이미 백제를 평정하자 좌요위대장군 걸필하력고 ㅏ우무이내장군 소정방, 좌요위장군 유백영으로 하여금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패강, 요동, 평양으로 나가서 치게 했다.

  용삭 원년에 크게 군사를 모집하여 여러 장수를 배치해 두고 천자가 몸소 나가려 하니 울주자사 이군구가 아뢰기를, [백제는 노그만 나라이온데 어찌 온 중국군사를 기울일 까닭이 있습니까. 고려를 만일 멸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군사를 내어 지켜야 할 것이온데 군사를 조금 내면 위엄이 떨치지 못할 것이요, 그렇다고 군사를 많이 내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것이온즉 이는 온 천하가 수자리에 피로하게 될 것입니다. 하오니 신은 싸우는 것이 싸우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했다.

  이 때 마침 무후가 또 싸움을 괴로와하므로 이 일을 중지하고 말았다. 이해 팔월에 소정방이 적의 군사를 패강에서 개치고 마읍산을 뺏고 드디어 평양을 포위했따.

  이듬해에 방효태가 영남 군사를 거느리고 사수를 등지고 진치니, 개소문이 이를 공격하여 온 군사가 패하자 소정방은 포위망을 풀고 돌아갔다.

  건봉 원년에 장이 그 아들 남북을 보내서 천자를 따라 태산에 봉하고 돌아왔다. 이 때 개소문은 죽고 그 아들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었다. 그는 아우 남건, 남산과 서로 원망할 일이 생겼다. 그리하여 남생이 국내성을 점령하고, 그 아들 헌성을 보내서 입조하여 구원을 청했다.

  이 때 개소문이 아우 정토도 역시 자기 땅을 베어서항복하기를 청한다. 이에 조서를 내려 걸필하력으로 요동도 안무대사를 삼고, 좌금오위장군 방동선과 영주도독 고간으로 행군총관을 삼고, 좌무위장군 설인귀와 좌감문장군 이근으로 하여금 행전하고 가게 했다.

  구월에 방동선이 고려 군사를 잘 깨쳤다 해서 남생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이니 이에 조서를 내려 동선을 특별히 요동대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에 배하고, 현도군공에 봉했다.

  또 이적으로 요동도 행군대총고나 겸 안무대사를 삼아서 걸필하력 방동선과 함께 힘을 합하여 일하라 했다. 또 조서를 내려 독고경은 압록도로 해서 나가고, 곽대봉은 적리도로 해서 나가며, 유인원은 필열도로 해서 나가고, 김대문은 해곡도로 해서 나가게 하되 이들을 모두 행군총관을 삼아서 이적의 지휘를 받도록 했다.

  이듬해 정월에 이적이 신성으로 나가 제장을 모아 가지고 의논하기를, [신성의 적은 시비이니 이를 먼저 도모할 수는 없고, 그 나머지 딴 성들도 쉽게 함락시킬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서남쪽 산을 등지고 성에 임하니 성 안 사람들이 추장을 잡아가지고 나와 항복한다.

  이리하여 이적은 진군하여 성 십육개를 빼앗고, 곽대봉은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나갔다.

  삼년 이월에 이적이 설인귀를 거느리고 부여성, 타성 등 삼십개를 함람시키고, 백성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방동선과 고간은 신성을 지키고 있는데, 남건이 군사를 보내 이를 습격하니 인귀간 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금산에서 싸우다가 이기지 못했다.

  이에 고려 군사가 북을 치면서 진군해 오는데, 그 형세가 몹시 날카로왔다. 이것을 인귀가 가로질러 쳐서 크게 이겨 사람의 머리 오만을 베고, 남소, 목저, 창암 등 세 성을 빼앗고 군사를 수습하여 땅을 점령한 다음 이적과 합세했다.

  시어사 가언충이 계획을 세우고 돌아오자 제는 묻기를, [이번 싸움을 군중에서는 무엇이라 하던가] 하니, 그는 대답하여 [반드시 이길 것이옵니다. 옛날에 선제께서 그들의 죄를 물어 토벌하시다가 중도에 돌아와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저들 남생의 형제끼리 틈이 생겨서 우리를 위하여 길을 인도하는 형편이어서 저들의 실정을 우리가 일일이 알고 있어 충성된 군사와 힘찬 신하만 기다릭 ㅗ있는 터입니다. 그런 때문에 반드시 이긴다는 것입니다. 또 고려의 비기에 말하기를, 구백 년을 넘지 못하고 마땅히 팔십 대장이 와서 멸한다 했습니다. 고씨는 그 나라가 생긴 지 이제 꼭 구백 년이옵고, 이적의 나이 팔십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적들은 굶주려서 사람끼리 잡아먹고 땅이 갈라지며, 이리와 여우가 성 안으로 들어와 문에 구멍을 뚫고 있는 판국으로 인심이 몹시 위태롭고 황황하오니 이번 싸움을 두 번 다시 하지 않고서도 될 것입니다] 했다.

  남건이 군사 오만 명을 거느리고 부여를 습격하자, 이적이 이를 살하수 위에서 깨쳐서 머리 오천을 베고 삼만 명과 병기, 소와 말을 무수히 얻었다. 다시 진군하여 대행성을 함락시켰다. 이 때 유인원이 이적과 서로 모이기를 원하므로 그를 소환하여 죽이려다가 용서하여 요주로 귀양 보냈다. 또 걸필하력은 이적의 군사와 합세하여 욕이성을 빼앗고, 온 군사를 모아 평양을 포위했다.

  구월에 장은 남산을 보내서 수령 백 명을 이끌고 입조하기를 청해 왔다. 이적은 이들을 예법대로 불러 보았다. 이 때 남건은 굳게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나가 싸우기만 하면 자주 패했다. 이 때 대장 중 신성이 첩자를 보내서 내응할 것을 약속하고, 오일에 문을 열게 하여 군사들이 시끄러이 밀려 들어가 그 문에 불을 지르자 연기와 불꽃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이에 남건은 일이 군색하고 급하게 되어 자살하려다가 이루지 못했던 것이었다. 이리하여 장과 남건을 사로잡고 모두 다섯 부 일백칠십육성 육십구만 호를 얻고 개선해 돌아왔다.

  십이월에 제가 함원전에 앉아서 이적 등과 잡아온 적들을 불러보고, 장은 본래 중국에 협조했다 해서 용서하여 사평태상백을 삼고, 남산은 사재소경을 삼았으며, 남건을 검주로 귀양 보냈다. 또 헌성으로 사위경을 삼고, 신성으로 은청광록대부를 삼고, 남생으로 우위대장군을 삼고, 하력으로 행좌우대장군을 삼고, 이적은 태자태부를 삼고, 설인귀로 위위대장군을 삼았다.

  그들에게서 얻은 땅을 쪼개어 도독부 아홉을 두고, 주를 사십이에 현 백을 두었다. 다시 안동도호부를 두고 추호 중에 공이 있는 자를 뽑아서 도독자사령을 삼고, 설인귀로 도호를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지키게 했다.

  이해에 교제를 지내어 고려를 평정한 것을 하늘에 사례했다. 총장 이년에 고려 백성 삼만 명을 강회와 산 남쪽으로 이사시켰다. 대장감 모잠률이 무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키자 장의 외손 안순을 세워 왕을 삼았다. 그리고 조서를 내려 고간은 동주도로 가고 이근행은 연산도로 가서 모두 행군총관이 되어서 치게 했다. 한편 사평태상백 양방을 보내서 도망해 오는 백성들을 받아들이게 했다.

  안순이 감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나자 고간은 도호부를 옮겨 요동주를 다스리고, 반란을 일으킨 군사를 안시에서 깨치고 또 천산에서 이겨서 신라의 구원병 이천 명을 사로잡았다.

  또 이근행은 적을 발로하에서 깨치고 다시 싸워서 적 만여 명을 사로잡고, 베었다. 이에 평양은 힘이 몹시 쇠잔해져서 살아나갈 수가 없어 서로 이끌고 신라로 달아나니 사년 만에 모두 평정되었다.

  처음에 이근행은 그 아내 유씨를 머물러 두어 벌노성을 지키게 했었는데, 적이 공격해 오자 유씨는 갑옷을 입고 군사를 거느려 성을 지키니 적은 물러갔다. 제는 이것을 가상히 여겨 유씨를 연군부인에 봉했다.

  의봉 이년에 장에게 요동도독을 제수하고 조선군왕에 봉하여 요동으로 돌아가서 남아 있는 백성들을 편안히 해주게 했다. 이리하여 우선 그 고을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용서해 보내 주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겼다.

  장은 또 말갈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 했는데, 이 일이 일어나기 전에 제는 그를 소환하여 공주로 추방하고, 그 백성들을 하남, 농우 등지에 모두 나누어 살게 했다. 그리고 약하고 병든 사람들은 안동에 머물러 있게 했다.

  장이 영순 초년에 죽자 그에게 위위경을 증직하고 힐리의 묘 좌편에 장사지냈다. 그리고 그 무덤 옆에 비석을 세웠다.

  옛 성들은 더러 신라로 들어가고 그 남은 사람들은 모두 돌궐과 말갈로 흩어 보내니 이로부터 고씨의 군장은 영구히 끊어지고 말았다.

  수공년중에 장의 손자 보원으로 조선군왕을 삼고, 성력 초년에 좌응양위대장군에 승진시키고 다시 충성국왕에 봉해서 그로 하여금 안동의 옛 부 백성들을 통솔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받아들여 행하지 않았다.

  이듬해에 다시 장의 아들 덕무로 안동도독을 삼았더니 뒤에 차츰 스스로 나라를 이루어 원화 말년에 가서는 사신을 보내 악공을 바쳤다 한다.(唐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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