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 - 명가 사상
이번 장에서는 혜시, 공손룡을 주제로 명가사상에 대하여 다루어 보겠습니다. 1. 명가 사상의 개관 명가 사상은 논리를 주제로 명(이름, 언어)과 실(사실)을 강조한 학파입니다. 그들은 춘추전국시대의 혼란기에 이름(명)을 다루는 논리학자들이었고, 이에 명가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실제 명가사상의 사람들을 보면 전국시대 묵가주의자 계열의 평화주의 사상자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습니다. 이로 볼 때, 명가사상은 묵가사상의 만민애, 평화, 서민의식 등을 무시하지는 않은 학파인 듯 싶습니다. 혜시는 <역물십사>에서 모든 사물의 객관적 진리를 부정하고, 모든 진리는 <인간에 의해 결정되는 주관적 진리>라고 말합니다. 그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대동이 : 만물은 근본적으로는 모두 같은 것이다. 공손룡은 공손룡자에서 <백마는 말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왜냐면 백마란 말이 아니라 말의 종류를 나타낸 것이므로 <말의 일종>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이 됩니다. 즉, 공손룡은 좁은 범위의 개념과 큰 범위의 개념은 같은 것이 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공손 룡의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과 견백론(堅白論)은 서양의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처럼 교묘한 궤변론(詭辯論)으로 유명합니다. 결국 이들의 주장은 하나입니다. 지금 세상이 혼란한 것은 사물의 이름과 실제 모습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므로, 명실합일(名實合一)을 해야 모든 논리가 정리된다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논리학 발달에 크게 공헌했다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2. 등석의 유명한 예시 글 유강에 물이 불어 정나라의 어떤 부자가 급류에 휘말려 빠져 죽었습니다. 시체가 물에 떠내려가다가 하류에 이르렀을 때, 마침 배를 띄우려던 사공이 시체를 발녀하고는 건져내었습니다. 화려한 옷과 장신구들을 보고서 큰 부자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 사공은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물에 빠져 죽은 부자의 집에서는 주인의 시체를 찾기 위해 난리가 났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자의 집에서 보낸 사람들이 시체를 건진 사공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공은 엄청난 금액을 요구했습니다. 요구액이 터무니없이 많은 데 놀란 그들은 어떻게 할까를 상의하다가 변론을 잘하기로 유명한 등석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저희 집주인이 물에 빠져 돌아가셨는데, 그 시체를 건진 사공이 엄청난 대가를 요구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기다리시오. 그 뱃사공이 시체를 팔 수 있는 곳은 당신네 집뿐이지 않소. 기다리면 값이 내려갈 것이오." "기다리다 보면 자꾸 시체가 부패할 텐데요." "그럴수록 기다리시오. 시체가 부패할수록 값이 내려갈거요." 부잣집 사람들은 등석의 말대로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난리가 난 것은 뱃사공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애가 탄 뱃사공 쪽에서 등석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제가 어떤 부자의 시체를 건졌는데 많은 보상을 요구했더니 값을 깎자고만 하면서 시체를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기다리시오. 그 부잣집이 시체를 살 수 있는 곳은 당신네 집뿐이지 않소. 기다리면 값이 올라갈 것이오." "기다리다 보면 자꾸 시체가 부패할 텐데요." "그럴수록 기다리시오. 시체가 부패할수록 값이 올라갈거요." 이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명가의 한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여씨춘추>에 따르면 등석은 변론에 뛰어났는데, 오늘 옳다고 했던 것이 내일은 옳지 않은 것이 되고, 또 오늘 옳지 않은 것이 내일은 옳은 것이 되어 옳고 그름이 날마다 바뀌었다고 합니다. 등석은 큰 사건의 별론 대가로는 겉옷 한 벌을 받았고, 작은 변론의 대가로는 속옷 한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등석을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혼란을 일으켰다고 하며, 이런 까닭에 등석은 민중의 풍속을 흐린 죄로 처형당했다고 전해집니다. 3. 명가 사상의 분석 명가사상은 중국어(한자) 자체의 논리적인 문제 때문에 등장했다는 입장이 있습니다. 한자어는 고립어입니다. 고립어의 특성은 한 글자 한 글자가 모두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한자는 독립적인 글자를 모아놓은 단어의 집합체이므로 그 언어의 특성상 한가지 단어가 어러 뜻으로 넓게 퍼져 쓰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문은 논리적인 약점이 많고, 한자로 쓰여진 동양저술들은 그 문학적 독창성은 뛰어날 지 몰라도 과학적인 논리면에서는 너무 빈약합니다. 또 명가사상이 등장한 이유는 당시 혼란기에 화술이 뛰어난 사람을 등용하는 정치적인 목적 때문입니다.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유창한 웅변술로 한 시대를 풍미했듯이, 명가사상가들은 정치, 외교적 목적에서 유창한 논리적 언어력을 과시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이러한 명가사상가들의 언어력을 중시하는 풍조는 비단, 명가 뿐 아니라 다른 모든 사상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었습니다. 특히 유가, 묵가, 도가 등은 서로 상호 비판하는 과정에서 명쾌한 논리적 우위를 점해야 했는데, 이러한 논리적 우위를 점한 학파는 명가 계열의 학자들이 많았던 묵가 계열이라고 합니다. 이하의 이야기는 withoutQ님이 작성한 다움 지식인의 추천글입니다. 정리가 너무 잘되 있어서 이글로 나머지는 대체하려 합니다. 제가 다 정리하기 힘들어서 그러니 오늘은 이해해주세요... 새벽 1시 반입니다. 자야겠네요... 오늘은... 출근해야 하는데... 휴.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장자의 좋은 친구 혜시 언젠가 양나라와 제나라가 우호 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런데 제나라가 그 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양나라는 공격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혜시는 자기가 추천한 대진인을 만나 양혜왕을 설득할 수 있는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대진인은 혜시의 생각을 가지고 양혜왕을 만났습니다. "왕께서는 뿔이 양쪽으로 달린 달팽이를 잘 아시지요?" "잘 압니다." "옛날에 달팽이의 왼쪽 뿔 위에는 촉씨가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고 오른쪽 뿔 위에는 만씨가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한번 전쟁이 벌어지면 20일씩이나 싸우다가 물러나고는 했는데 죽거나 다친 사람이 수만 명씩 되었습니다." 얘기를 듣고 있던 양혜왕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허허, 그거 참 재미있는 이야기군요. 지어낸 얘기지요?" 대진인은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지어낸 얘기라니요. 임금께서는 동서 남북이나 위아래가 끝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끝이 없겠지요." "임금께서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끝없는 우주와 비교해서 생각해 보시지요. 끝없는 우주 속에서 양나라와 제나라는 달팽이 뿔 위에 있는 만씨의 나라와 촉씨의 나라보다 과연 얼마나 클까요?" 혜왕은 대진인의 말에 감복하여 군사를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임금을 설득한 사람은 대진인이었지만 설득의 논리는 혜시의 생각이었습니다. 혜시는 양나라로 하여금 제나라, 초나라 등과 연합하여 당시 가장 큰 세력이었던 진나라와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혼란을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혜시의 생각은 당시 국가간의 외교에서 큰 이름을 떨치던 장의의 생각과 부딪쳤습니다. 장의는 진나라를 도와서 작은 몇 나라와 힘을 합치게 하여 꽤 큰 세력들을 무너뜨리게 하려고 했습니다. 마침내 혜시는 정적 장의의 모함을 받아 정치적 기반을 잃고 초나라, 송나라 등을 전전하게 되었습니다. 혜시는 비유에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필요하다면 상대의 논리를 가지고 상대를 제압하기도 하였습니다. 한번은 맹자의 제자인 광장이 양혜왕에게 다음과 같이 혜시를 비난했습니다. "왕께서는 농부들이 왜 메뚜기떼를 없애려고 하는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것은 분명 농작물을 해치기 때문이겠지요. 지금 혜시에게는 수레를 타고 따라다니는 사람, 걸어서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합해 수백 명이나 됩니다. 바로 혜시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일은 안 하면서 말솜씨만으로 밥을 먹고 있으니, 메뚜기떼와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 본 양혜왕은 광장의 말이 옳은 듯하여 직접 혜시를 불러 스스로 해명해 보도록 했습니다. 혜시는 전혀 굽히지 않고 광장을 향해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성을 만들고 있다고 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성 위에서 돌을 쌓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성 밑에서 흙을 나르겠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설계도를 들고서 여러 일을 감독하기도 합니다. 나 혜시는 바로 설계도를 들고 감독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내가 메뚜기라니요. 만약 실을 짜는 여공이 실이 되어 버린다면 다시는 실을 짤 수 없지 않을까요? 나무를 다루는 목수가 나무가 되어 버리면 그 목수는 나무로 된 도구를 만들어 낼 수 없겠지요. 마찬가지로 성인이 농부와 함께 밭을 일군다면 그 성인은 농부를 다스릴 시간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농부들과 같이 일하지 않는 까닭은 농부들을 다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처럼 할 일이 많은 나를 가리켜 감히 메뚜기떼라고 하다니요." 일찍이 맹자는 공동체 노동을 강조한 허행의 제자들로부터 농부들과 함께 일하지 않는다고 비난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맹자는 다스리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은 서로 할 일이 다르다는 분업의 논리를 폈습니다. 지금 혜시는 광장의 스승인 맹자의 논리를 빌어다가 광장을 비판한 것입니다.언젠가 혜시의 뛰어난 비유를 문제삼아 양혜왕에게 혜시를 헐뜯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양혜왕에게 다음과 같은 청을 했습니다. "혜시는 말할 때 항상 비유를 씁니다. 임금께서 혜시에게 비유를 쓰지 말고 말하라고 하신다면 아마도 혜시는 한 번도 입을 열 수 없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제안이라고 생각한 양혜왕은 다음날 혜시를 불러 말했습니다. "그대는 언제나 비유를 즐겨 쓰는데, 앞으로는 비유를 쓰지 않고 말 할 수 있겠소?" "만일 어떤 사람이 한 번도 활을 본 적이 없다고 해보지요. 그 사람이 임금께 활이 무어냐고 물었다고 합시다. 임금께서 활은 활처럼 생겼다고 하신다면 그 사람이 활이 어떻게 생긴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야 물론 알 수 없겠지요."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활은 대나무를 구부려서 그 양쪽 끝에 줄을 맨 것이라고 설명해 준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알 수 있겠지요." "우리가 말을 하는 까닭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잘 설명해서, 아직 모르고 있는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함입니다. 지금 임금께서 제게 비유를 쓰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제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더 이상 말을 꺼낼 필요도 없겠지요." "그대의 말이 맞소. 비유를 쓴다는 것은 옳은 일이요." 양혜왕과의 대화에서 혜시는 벌써 활로 비유를 들고 있는 셈입니다. 아무튼 혜시는 뛰어난 말솜씨로 양혜왕을 설복시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항상 논쟁을 해 온 혜시로서는 이런 정도는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 사물을 보는 방법 열 가지 : 역물십사(歷物十事) <장자> '천하'편에는 혜시가 말한 열 가지 명제가 나옵니다. 역물(歷物)이라는 말은 사물을 관찰한다거나 또는 대상을 파악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혜시는 명제만 제시했을 뿐 아무런 논증을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후대의 많은 학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해설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그 열 가지 명제를 하나하나 검토해 보겠습니다. 1. 지극히 켜서 밖이 없는 것을 가장 큰 것(大一)이라고 하고, 지극히 작아서 안이 없는 것을 가장 작은 것(小日)이라고 한다. 이 명제는 가장 크다는 것과 가장 작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형식 명제입니다. <장자> '추수'편에는 항상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크다고 자부하던 황하의 물귀신이 황하가 홍수로 넘치는 바람에 바다로 떠밀려 내려가서 바다의 신을 만나는 얘기가 나옵니다. 처음으로 자기보다 큰 것을 만나서 놀라는 황하의 신에게 바다의 신은 자기도 천지와 비교하면 커다란 창고에 들어 있는 곡식 한 톨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 경험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기 쉽습니다. 그래서 경험상 자기가 본 가장 큰 것을 크다고 하고 가장 작은 것을 작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개념은 모두 상대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정말 큰 것은 밖이 없는 것이며 정말 작은 것은 안이 없는 것입니다. 이 명제는 경험 세계에만 근거를 갖는 상식을 부수는 것입니다. 2. 두께가 없는 것은 쌓을 수 없지만 그 크기가 천리가 된다. 두께가 없는 물건은 아무리 쌓아도 놓아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늘어 놓으면 그 넓이는 굉장할 수 있습니다. 두께와 넓이는 다른 개념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두께가 없다고 하면 넓이도 없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일반적으로 얼굴이 번듯하고 옷을 잘 입으면 대접을 잘 받습니다. 그러나 얼굴도 못생기고 옷도 허름하면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합니다. 바로 이런 것이 우리의 상식이 갖기 쉬운 맹점입니다. 고정된 상식은 곧 편견을 의미합니다. 3. 하늘과 땅은 높이가 똑같고 산과 연못은 똑같이 평평하다. 사람들은 모두 하늘은 위에 있으니까 높고 땅은 아래 있으니까 낮다고 생각합니다. 또 산은 쑥 올라와 있고 연못은 움푹 패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달나라에 가서 지구를 보면 그런 차이는 거의 드러나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더 높이 올라가서 볼수록 더욱 평면에 가까워 보일 테지요.일반적으로 우리는 재능이나 지위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 어떤 두 사람이 차이가 많아 보이더라도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보면 도토리 키재기일 수도 있습니다. 절대의 위치에서 보면 세상 모든 것이 상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4. 남쪽은 끝이 없으면서 끝이 있다. 남쪽이라고 하면 그 연장선의 끝은 어디일까? 아마도 무한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보면 대구도 남쪽이고 부산도 남쪽입니다. 물론 대구에서 보면 경주도 남쪽이고 부산도 남쪽이 됩니다. 남쪽이라는 개념은 기준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서울에서의 남쪽과 대구에서의 남쪽, 대구에서의 남쪽과 부산에서의 남쪽, 이 문제는 멀고 가까운 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출발점을 어디로 잡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아무런 기준도 없이 바람직한 사람, 바람직한 세상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기준을 가지고 말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똑같은 바람직한 세상이 자본주의일 수도 있고, 사회주의일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바람직한 사람이 개인적 차원에서 성실한 사람일 수도 있고, 자기 희생적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기준 없이 막연히 하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말들은 모두 틀린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5. 나는 세상의 중심이 어디인가를 안다. 연나라의 북쪽과 월나라의 남쪽이 바로 그곳이다. 연나라는 중국 북쪽에 있던 나라이고 월나라는 남쪽에 있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연나라의 북쪽과 월나라의 남쪽은 서로 다른 방향이어서 겹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명제가 갖는 의미는 어떤 신비스러운 것도 아닙니다. 이 명제대로라면 중심은 없다는 말이 됩니다. 더 비약하면 어디든 중심이라는 말이 됩니다. 지구를 봅시다. 지구의 중심이 어디일까? 북극인가, 아니면 남극인가? 사실은 내가 딛고선 이 자리가 바로 중심입니다. 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는 무한합니다. 따라서 무한한 공간에서는 어디든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사람들은 살면서 자신만을 중심에 놓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가 생기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자기만이 중심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누구나 자기 삶의 중심입니다. 따라서 중심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며 상대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6. 오늘 월나라에 가서 어제 돌아왔다. 상식에서는 오늘 갔으면 내일이나 모레 돌아와야 합니다. 사실 어제, 오늘, 내일은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편의상 빈틈없이 이어져 있는 시간을 나누어 쓰고 있을 뿐입니다. 오늘은 어제에서 보면 내일이 되지만 내일의 시점에서 보면 어제가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구분은 상대적인 나눔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이 예의이고 5분 늦은 것이 큰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전체 우주의 역사에서 보면 몇 만 년도 잠깐이 됩니다. 7. 해가 막 하늘 가운데 뜬 상태는 막 지는 상태이며, 어떤 존재가 막 태어났다는 것은 막 죽어가는 것이다. 상대성 원리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관찰자의 위치입니다.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내용이 달라 보입니다. 이제 겨우 다섯 개 남았다는 말과 아직도 다섯 개나 남았다는 말은 내용에서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의 입장은 큰 차이가 납니다. 소고기 통조림 공장에서 포장이 끝난 통조림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반대편 끝에는 끊임없이 죽어가는 소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혜시의 논리는 사회의 또 다른 모순을 잊어버리고 한 면만을 보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인 셈입니다. 8. 많이 같은 것과 조금 같은 것은 다르다. 이것을 조금 같거나 조금 다른 것이라고 한다. 만물은 어떤 점에서는 완전히 같지만 또 어떤 점에서는 완전히 다르다. 이것을 크게 같거나 크게 다른 것이라고 한다.'같다'와 '다르다'는 동전의 양면인 셈입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같아지기도 하고 달라지기도 합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돌멩이까지도 존재한다는 점에서 보면 다 같습니다. 그러나 돌멩이들조차도 같은 돌멩이는 하나도 없습니다. 전체를 강조하면 개인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반대로 개인을 강조하면 개인을 침해하는 전체는 부정되어야 합니다. 사실은 이런 문제가 모두 관념에 불과합니다. 현실은 언제나 가변적이어야 합니다. 전체를 강조할 때도 있고 개인을 강조할 때도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고정시키면 그 나머지는 버려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명제는 사람들이 갖기 쉬운 고정 관념에 대한 부정인 셈입니다. 9. 둥근 고리는 풀 수 있다. 둥근 고리를 풀어 보라고 하면 우리는 무슨 마술을 떠올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고리를 자른다거나 부수는 것은 푸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둥근 고리 그 자체는 현실에 놓여 있더라도, 그에 앞서 부수면 안 된다는 머리 속의 고정된 생각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나무를 쪼개서 책상을 만드는 일을 생각해 봅시다. 나무에서 보면 부수는 것이지만 책상에서 보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부순다와 만든다, 푼다와 이어져 있다는 것은 상대적일 뿐입니다. 고정 관념은 언제나 현실을 왜곡하거나 억누르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30미터 높이의 장대를 밟고 올라서서 안 떨어지려고 애쓰지 말고 앞으로 한걸음 내딛으라는 불교의 명제는 바로 발상의 전환을 말하는 것입니다. 상식의 틀을 부수는 발상의 전환이 이 명제의 목적입니다. 10. 만물을 사랑하라. 온 세상이 한 몸이다. 이 명제는 앞에서 본 명제들의 결론인 셈입니다. 1번부터 5번까지의 명제는 공간 개념의 명제들이며, 6번과 7번은 시간 개념의 명제들입니다. 그리고 8번과 9번은 현상계의 존재들과 고정 관넘에 관한 명제입니다. 혜시는 이 명제들을 통해 존재든 관념이든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차별성은 부정되어야 합니다. 이렇나 지향과 통일을 거쳐 만물이 하나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어떻게 보면 혜시의 열 가지 명제가 서양의 논리적 명제들과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혜시의 결론은 정치적입니다. 혜시는 당시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사람들의 상식을 부수려고 했던 것입니다. ▶ 논리의 대가 공손룡 공손룡은 조나라 사람인데, 한때 정치 고문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명가 사상가 가운데 드물게 그의 저술이 남아 있습니다. 본래 14편으로 된 <공손룡자>라는 책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5편만 남아 있습니다. <여씨춘추>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진나라와 조나라가 서로 돕기로 조약을 맺었습니다. 조약을 맺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진나라가 군대를 동원하여 위나라를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조나라는 위나라를 도우려고 했습니다. 화가 난 진나라 임금이 사신을 보내 조약 위반이라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다급해진 조나라 왕이 공손룡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공손룡은 이쪽에서도 사신을 보내서 조나라가 위나라를 도우면 진나라도 약속대로 조나라를 거들어야 하는데 오히려 위나라를 공격하고 있으니 조약 위반이라고 따지라고 조언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공손룡을 궤변론자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공손룡은 <장자> '추수'편에서 스스로 자신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습니다. 나는 다른 것과 같은 것을 한데 합치기도 하고, 한데 붙어 있는 개념을 떼어 놓기도 했다. 나는 옳지 않은 것을 옳은 것으로 만들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혜시와 마찬가지로 일반 사람들의 상식을 부순 작업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루는 공손룡이 말을 타고 국경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관문을 지키는 사람이 그를 가로막았습니다. 말을 탄 채로 관문을 지날 수 없다는 규칙을 내세우며 말에서 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손룡은 '흰 말은 말이 아니다'는 명제를 제시하고는 그대로 말을 탄 채 관문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공손룡자>에 나오는 여러 명제 중에서 가장 유명한 두 가지 가운데 하나가 이 고사와 관련 있는 '흰 말은 말이 아니다'는 명제입니다. 또 하나는 '단단하고 흰 돌을 나눌 수 있다'는 명제입니다. ▶ 흰 말은 말이 아니다 공손룡이 흰 말을 어떻게 말이 아닌 것으로 만드는가를 봅시다. 그는 세 가지로 논증합니다. 첫째, 말이라는 것은 모양을 가리키는 개념이고 희다는 것은 빛깔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빛깔을 가리키는 것은 형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흰 말은 말이 아니다. 둘째, 말이라고 하면 흰 말, 검은 말, 누런 말이 모두 해당되지만, 흰 말이라고 하면 누런 말이나 검은 말은 해당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흰 말은 말이 아니다. 셋째, 말에는 여러 가지 빛깔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말에서 빛깔을 빼 버리면 말 그 자체만 남는다. 흰 말은 바로 그러한 말에다가 흰 색을 더한 것이다. 이처럼 말에다 흰 색을 더한 것이 흰 말이기 때문에 흰 말은 말이 아니다. 사실 흰 말과 말의 관계를 정확하게 나타내려면 '흰 말은 말의 일종이다'라고 해야 합니다. 또 공손룡의 말대로라면 흰 말은 말이 아닌 소나 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공손룡의 본래 뜻은 우리가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개념들을 바로잡으려는 것이었습니다.또 공손룡은 단단하고 흰 돌을 나눌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명제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논증합니다. 첫째, 흰 돌과 단단한 돌은 두 가지이다. 왜냐하면 희다는 것은 보고 아는 것이고, 단단하다는 것은 만져 보고 아는 것이다. 따라서 보기만 해서는 단단한지를 알 수 없고 만지기만 해서는 희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러므로 흰 돌과 단단한 돌이라는 두 개념으로 나누어 진다. 둘째, 희다는 것과 단단하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에만 한정된 것이 아닌 보편 개념이다. 따라서 이 두 개념은 돌과는 별개로 존재할 수 있다. 사실 물체 가운데는 희지만 단단하지 않은 것도 있고, 단단하지만 희지 않은 것도 있다. 따라서 희다는 것과 단단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것임이 분명하다. 이 명제의 문제는 분리해서 생각한다는 점 자체에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단단하고 흰 돌을 인식할 때 먼저 시각을 통해 희다는 것을 알았고 나중에 촉각을 통해 단단하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 봅시다. 그러나 두 가지로 나누어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결국은 두 가지를 통일적으로 이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제 단단하고 흰 돌은 우리의 감각 이전에 한 덩어리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공손룡의 이러한 논리는 중국 고대의 여러 명제 가운데 대표적인 것에 속합니다. 공손룡은 당시의 사회 혼란이 개념 규정의 혼란에서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논리적 설명을 통해 구체적인 사물의 개념을 명확히 규정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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