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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역사 사료와 데이터

정약용의 정전의 뜻(경세유표)

수전(水田)으로서 사방 1리인 곳은 구획해서 정(井)으로 만들고, 부(?)마다 네 모서리에 돌을 세워서 표하며, 사방 2리인 곳은 구획해서 4정을 만든다.

능히 1리가 못되는 곳은 다만 1부만 구획해서 공전으로 만들고, 능히 개방하지 못하는 곳은 혹 길이 5, 너비 20을 1부로 하며, 혹 5×5로 개방하여 그 4구(區)를 합쳐서 1부로 한다. 무릇 공전은 모두 네 모서리를 방정(方正)하게 하며, 기울거나 비뚤어져서 바르지 못한 곳은 그 배미[?]를 고쳐 만든다.

생각건대, 후세에는 수전이 한전(旱田)보다 많은 까닭으로 경계하는 법을 회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만 9분의 1만을 구획해서 공전으로 해도 이것이 또한 정전이다. 삼대(三代) 이상에도 일찍이 천하 전지를 다 정전으로 하지는 못했다. 또 청주(淸州) 들, 소사(素沙) 들, 아산(牙山) 신창(新昌) 들,김제(金堤) 만경(萬頃) 들은 혹 수십 리에 걸쳐 평평하고 넓거나 10여 리가 평평하고 넓어서 한 배미 전지에 혹 50~60두를 심고 혹은 100두를 심기도 한다. 지경이 연해 있고 경계가 닿아 있어 이와 같은 곳은 비록 4정(즉 36부)을 구획하여도 넉넉하다.다만 1정 안에 물이 질펀하여 경위선(經緯線)을 그을 수가 없는 경우는 모름지기 겨울날 물이 마를 때에 법대로 구획하고 이에, 공전 네 모서리에 큰 돌을 세우고 사전 사방 끝에는 8개의 작은 돌을 세워서 경계를 분별한다.

1부(?) 전지에는 대략 40두를 심을 만한데 한 배미에 능히 40두를 심는 곳도 곳에 따라 흔히 있다. 이와 같은 곳은 드디어 한 배미를 사서 공전으로 만들고, 그 한 모서리에 남는 것이 있으면 그 굽은 데를 좁혀서 바르게 한 다음(방언에 두렁이라 이르는 것), 남은 땅은 팔아서 사전으로 만들며, 한 모서리에 모자라는 곳이 있는 것은 그 두렁을 물려 넓혀 방정하게 만들어서 모든 공전을 모나게 해야 한다.

혹 너비 5, 길이 20으로 하거나, 혹은 5×5로 개방하여 고르게 100묘(畝)로 한 것이 1부이다. 만약 산에 붙은 기울어진 땅이어서 비록 5×5로 개방하여도 오히려 불편함이 염려되는 것은 혹 너비 4, 길이 5를 한 구역으로 만들고 5구를 합쳐서 부로 만든다(너비 4묘, 길이 5묘이면 20묘가 된다).혹 너비 2, 길이 5를 한 구역으로 만들고 10구를 합쳐서 부를 만들기도 한다(한 배미에는 대략 종자 4두를 심을 수 있다). 1부의 전지는 모두 서로 연결되어서 무릇 1부 사방 안에는 한 조각 사전도 끼여들 수 없게 한다.

혹 지세가 기울어져서 변통(變通)할 수 없는데 부근 사방에도 평평하고 넓은 전지가 없는 곳은 비록 공전이라도 반듯하게 하지 못한다. 다만 그 중에서 서로 연하여 있는 큰 배미 하나를 잘라, 그 실제 면적을 계산해서 1부를 만든다. 그리고 남은 묘는 떼어내어서 사전으로 만들고 그 두렁을 고쳐 만든다

무릇 공전으로서 능히 반듯하지 못한 것은 그 네 둘레 두렁에 모두 들꽃을 심으며, 경계가 의심스러운 곳에는 가끔 돌을 세워서 표한다(사전에 꽃을 심는 것은 모두 엄금하며 본디 있는 것도 모두 뽑아버린다).

혹 두어 마장 안에 큰 전지 하나가 있어 1정을 구획할 만한데, 그 부근 사방에는 온통 작은 배미여서 공전으로 만들 만한 것이 없을 경우 1정 9부를 죄다 공전으로 만들고, 부근 전지 72부를 갖다 붙여서 그 8부에 각각 공전 1부를 농사하도록 한다.

다만 1정의 땅에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다. 가령 시냇물 동쪽은 평평하고 넓어서 반듯한 전지 2부가 서로 연했는데, 시냇물 서쪽 전지는 다 기울어진 작은 배미여서 공전으로 만들 수 없는 곳은 시냇물 동쪽 2부를 다 공전으로 만들고 시냇물 서쪽 전부(佃夫)를 다 시냇물 동쪽에다 예속시킨다.

오직 1부의 땅에만 그렇게 할 것이 아니다. 가령 시냇물 동쪽은 평평하고 넓어서 반듯한 전지 2묘, 또는 4묘를 합쳐서 구차하게나마 1부를 만들수 있는데, 시냇물 서쪽은 기울어서 이렇게도 할 수가 없으면 시냇물 동쪽에다 공전을 설치하고 전부는 시냇물 서쪽에서 오도록 한다.

생각건대, 반드시 큰 배미로써 공전을 만드는 것은 기름진 땅을 취해서 관청에 붙이려 함이 아니다. 공전은 경작하는 것과 수확하는 것을 살피지 않을 수 없는데 혹 수령이나 혹은 어사(御史)가 순심(巡審)할 때에 어찌 빙빙 돌며 꼬치꼬치 캐서 그 조각조각으로 된 배미를 찾을 수가 있겠는가?그리고 백성의 마음엔들 어찌 평탄하고 광활한 배미를 가리켜 사전이라 하고, 자잘하고 비뚤어진 배미를 가리켜 공전이라 할 수가 있겠는가? 공전을 큰 배미로 하는 것은 천지의 바른 이치이니 논의가 있을 수 없다.

연속된 전지에 부(?) 만드는 일을 이미 마치면 정에는 남는 부가 있고 부에도 남는 묘가 있는데 모두 그 율을 아홉으로 갈라서 그 중 하나를 공전으로 하고 여덟은 사전으로 한다. 9묘 미만인 것은 혹 변두리 땅을 덜어내어 한전(旱田)으로 만들도록 하고, 혹은 부근 땅에는 수전을 더 만들어서 9묘의 수(數)에 충당한다.

남은 것이 9묘이면 1묘가 공전으로, 남은 것이 18묘이면 2묘가 공전으로, 남은 것이 27묘이면 3묘가 공전이 되는데 계산해서 81묘에 이르면 9묘가 공전이 된다.

9묘 미만인 것은 두어 배미를 더 만들어서 수를 채운 다음에 그만두고, 18묘 미만인 것은 두어 배미를 더 만들어서 채운 다음에 그만둔다(14~15묘에서 위로는 18묘에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9묘에 미치지 못한 것을 이른다). 27묘 미만인 것은 두어 배미를 더 만들어서 수를 채운 다음에 그만두는데(위로는 27묘에 미치지 못하고 아래로는 18묘에 미치지 못한 것을 이른다) 거슬러 올려서 그 예는 모두 같다.

생각건대, 한전으로서 1정 미만인 것은 비록 구릉(丘陵)을 개간하더라도 1정으로 충수하기를 기약한 다음에 그만둔다(윗 문장에 있다). 하지만 수전(水田)은 그렇지 못하니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서 두어 배미를 만드는 것은 가하지만 지세가 편평하지 못하면 많이 만들 수 없으니 전적(田籍) 끝에 남은 수효가 있게 됨을 허가하지 않을 수 없다.그러나 9묘 이하이면 9분의 1로 하는 조법(助法)을 할 수가 없으니, 9묘 미만인 것은 더 만들어서 수를 채우지 않을 수 없다.

묘를 모아서 부(?)로 만들 때에 한 보(步), 한 능()이라도 모두 버릴 수 없고, 만약 부로 만든 후에도 남은 밭뙈기가 있으면 9묘를 한정해서 반드시 충당하기를 기약할 것이며, 보(步)촵능() 따위 글자를 다시 쓰는 것은 불가하다.

장마 물에 떨어져나가서 영구토록 전지의 형태도 찾을 수 없는 것이 한전 1정 이상이면 전적(田籍)에서 제감(除減)한다. 그리고 남아 있는 것이 능히 1정이 못 되는 것은 곧 부근 땅에 신전(新田)을 기간해서 그 수효에 충당한다.

수전으로서 9묘 이상인 것은 전적에서 제감하고 남아 있는 것이 묘가 못 되는 것은 곧 부근 땅에다 새 배미를 만들어서 그 수효에 충당한다.

논이 장마 물에 떨어져나가 남아 있는 것이 18묘가 될 수 없는 것은 새 배미를 만들어서 수를 채우고, 27묘가 되지 못하는 것도 새 배미를 만들어 수를 채워 거슬러 올라가는데, 무릇 그 묘를 아홉으로 가를 수 없는 것은 모두 그 해 안에 배미를 만들어서 채운다.

전적(田籍)에서 제감(除減)한 것은 현령이 그 고을 안에서 혹 구진(舊陳)한 전지를 다시 개간하거나 혹은 농사할 만한 땅을 새로 개간해서 원래 액수에 충당한다. 모두 그해 입동(立冬) 전에 개간 일을 끝내고(한전에는 곧 보리를 심는다), 세말(歲末)에 전적을 고쳐 정리해서 경전사에 보고한다.

그해 안에 원래 액수대로 보충할 수 없는 수령은 경전사에서 논계(論啓)하여 파출(罷黜)한다.

살피건대, 근래의 규례(規例)에서, 하천으로 되어버린 것이나 떨어져나간 것을, “동쪽에는 떨어져나갔으나 서쪽에는 진흙이 생겼다.”라고 한다. 그러나 진흙이 생긴 곳은 모래와 돌이 많이 섞여서 전지가 될 수 없는 곳이 많으니 수년 안에는 조세(租稅)를 요구할 수 없다. 결국 이럭저럭 세월을 보내면서 떨어져나간 전지를 대충(代充)하지 않으니 전총(田總)이 날로 감축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또 모든 새로 기간(起墾)된 전지는 본디 제한이 없는데 만약 떨어져나간 것이 많고 신기(新起 : 새로 일군 밭)한 것이 적으면 서로 충당할 수 없게 되니 규식을 정함이 마땅하다. 떨어져나간 모든 전지는 모두 그 해 안에 대전(代田)을 받아서 대충(代充)하고, 남는 것만 새로 개간한 것으로 기록해서 전총에 보탠다.

새로 개간한 모든 전지로서 1정이 된 것은 기간하는 시초에 관에서 역정(役丁)을 지급하는데, 전지가 완성되었으면 그 중에 9분의 1을 구획해서 공전으로 하며 전지 값은 주지 않는다.

임자 없이 오랜 세월을 묵은 전지와 임자는 있어도 기간할 힘이 없는 것은 그 사람이 보고하는 대로 관에서 기간하도록 허가하여 관에서 역정을 지급하는데, 전지가 완성되면 그 중에서 9분의 1을 받아서 공전을 만들기를 위에 말한 법대로 한다.

생각건대, 사람들이 흩어져 떠돌아다니게 되는 것은 진전(陳田)에 세를 받기 때문이다. 갑(甲)에게 진전이 있는데 을(乙)의 집에 그것을 공짜로 주면서 그 세만 담당하고 영원히 을의 물건으로 하기를 청하지만 을은 머리를 흔들면서 화(禍)를 옮겨받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한 자가 흔히 있으니,이와 같은 것은 시점(時占)의 소원대로 허가해서 그 전지를 공전(公田)에 붙여 그 세를 영구히 면제하고 드디어 관전(官田)으로 만든 다음, 관에서 기간하여 부(?)와 정(井)으로 구획한다. 이와 같이 하면 1정 9부가 온통 공전이니 그 8부는 오직 편오(編伍)된 군사에게 경작하도록 하며,그 군사가 늙으면 다른 군사에게 옮겨주어서 영업(永業)으로 되지 않도록 한다(그 사람의 아들이 유력하면 그 아들에게 전해준다). 이것은 별도로 전적(田籍)을 만들어서 둔전(屯田)촵학전(學田)촵궁전(宮田) 등과 같은 장적(帳籍)으로 함이 마땅하다.

매년 동지(冬至)에 관찰사(觀察使)가 여러 고을 신기전장적(新起田帳籍)을 거두어서 경전사(經田司)에 보고하면, 경전사에서는 8도 신기전 장적을 통계해서 많고 적음을 비교한 다음 9등급으로 분간한다. 위로 3등급은 상(賞)이 있고, 아래로 3등급은 벌이 있으며, 중등(中等)은 논하지 않는다.

상지상(上之上)은 한 사람인데 그 사람의 벼슬이 대부(大夫)이면 표범가죽을 상사(賞賜)하고, 사(士)에게는 첨유(?? : 지금 玉轎에 있다)를 상사한다. 상지중(上之中)은 두 사람인데 표리(表裏) 한 벌씩을 사급(賜給)하며(表는 明紬 50자, 棉布 50자임), 상지하(上之下)는 세 사람인데 상현궁(上弦弓) 한 장씩을 사급한다.

하지하(下之下)는 한 사람인데 곤장(棍杖) 80대와 속전(贖錢)을 거두고, 하지중(下之中) 두 사람은 곤장 60을, 하지상(下之上) 세 사람은 태(笞) 50과 속전을 받는다.

만약 그 고을이 본디 작아서 억지로 책임지울 수 없는 것은 용서가 있어야 마땅하다. 무릇 전지가 400정이 못 되고 호(戶)가 1천 가구가 못 되는 고을은 3등급을 후하게 하며, 전지가 600정이 못 되고 호가 1천 500이 못 되는 고을은 2등급을 후하게 하며, 전지가 800정이 못 되고 호가 2천이 못 되는 고을은 1등급을 후하게 한다(전지와 民戶 중에 한쪽이 몹시 적은 것은 그 적은 쪽을 따라서 논한다).

3등급을 후하게 한다는 것은 하지하는 중지하로 하고, 2등급을 후하게 한다는 것은 하지하를 하지상으로 하며, 1등급을 후하게 한다는 것은 하지하를 하지중으로 하는 것이다.

30년을 시행해서 만약 땅이 다 개척되었으면 이 법은 폐지함이 마땅하다.

이에 어린도(魚麟圖)를 만드는데, 대략 사방 1리마다 그림 한 폭을 만든다. 작은 마을은 그림이 한두 폭에 지나지 않고 큰 마을은 혹 10여 폭에 이르기도 한다.

대개 어린도를 만들려면, 먼저 냇물이 강으로 들어가는 어귀에서 첫머리를 시작하여 냇물을 거슬러올라가서 산 밑까지 이른다.

무릇 어린도를 만드는 자는 모두 자오침반(子午針盤 : 나침반)을 가지고 먼저 강변에서 시작하는데, 강에서 반 마장 거리에(150보) 표목(標木) 하나를 세운다. 표목에서 남북으로 각 반 마장 거리에 자오선(子午線)을 치고(끈을 당겨서 바르게 한다), 표목에서 동서(東西)로 각 반 마장 거리에 묘유선(卯酉線)을 친다(역시 끈을 당긴다).선 네 귀에 각각 표목을 세운 다음 또 끈을 당겨서 네 둘레 선을 만들고 네 둘레 모서리에도 각각 표 하나를 세운 다음, 그 위에다 또 경위선(經緯線)을 치는데 각 31가락이 된다. 이렇게 하면 경구(經區)가 30이고 위구(緯區)도 30이며, 1구에 포함된 것이 꼭 1묘(畝)의 땅이 된다(사방 1리가 井이 되는데, 1정은 900묘이다. 이것이 비록 田은 아니나 그 포함된 것은 같게 함이 마땅하다).

무릇 구릉을 넘고 언덕에 걸친 것은 직선으로 계산하고 둘러서 굽게 할 수는 없는 것인데 다만 평지를 표준으로 한다.

화공(?工)이 먼저 한 폭에다 경위선을 이와 같이 만들고 사방 1치를 1구(區)로 하며(경위선을 또한 각 30구로 한다), 전지 옆으로 가져가서 전지를 대조하면서 그림을 작성한다.

1묘는 대략 수전이 네 되지기(10되지기는 1마지기)다. 큰 배미, 작은 배미, 모난 배미, 비뚤어진 배미, 긴 배미, 짧은 배미를 각각 본 모양대로 하는데 특별히 주묵(朱墨)을 이용해서 경위선 위에다 두렁을 그리며, 두렁이 서로 얽혀서 뒤섞인 것을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게 한다.

매양 주묵으로 금을 그은 한 우리마다 그 한복판에 갑촵를촵병촵정을 적어서 표한다.

이에 그림 끝에다 갑촵를촵병촵정을 벌여 적고 그 밑에다 주(註)하기를, “갑은 장삼(張三)의 논 5묘 2릉(), 을은 이사(李四)의 논 9릉 7보, 병은 김칠(金七)의 밭 12묘, 정은 최팔(崔八)의 가대(家垈), 무(戊)는 박구(朴九)의 가원(家園)이다.”라고 한다.

만약 그 중에 9부로 개방해서 1정으로 구획된 것은 이에 먹으로 그은 경선과 위선에 비스듬하게 주묵(朱墨)으로 그은 경선과 위선을 더해서, 적도선(赤道線) 위에 황도(黃道)를 비스듬하게 더하는 것과 같이 하는 것이 가하다. 대개 이 어린도의 자촵오촵묘촵유는 천지의 정위(正位)에 합치하는데 저 9부로 정을 그은 전지는 그 지세에 따라서 방향이 다르므로 자촵오촵묘촵유의 위치로 바로잡을 수 없다.

수전 한 배미가 바로 어린도의 네 둘레 선에 걸쳐서 선 밖으로 나간 것은 그 전체를 봐서 만약 선 밖으로 나간 것이 많고 들어 있는 것이 적으면, 밖으로 나간 것을 이 폭에 그리지 말고 저 폭에 그리며 이 폭 주묵 둘레 안에다 자표(字標)만 기록한다.만약 선 밖으로 나간 것이 적고 대부분이 이 폭 안에 있으면 경계선 밖에 주묵으로 그 배미를 완전하게 그리고(호로병 같은 모양이 네 둘레 경계선 밖에 나간 것임) 그림 끝에 밝히기를, “경(庚)은 정모(鄭某)의 밭 끝이고 신(辛)은 한모(韓某)의 밭 끝이다.”라고 한다.

대개 한전을 그림으로 작성하는 것도 모두 수전과 같이 한다.

한 폭을 이미 마치면 또 한 폭을 만드는데 강 남쪽에 있는 것은 북에서 남으로 하고, 강 북쪽에 있는 것은 남에서 북으로 하며, 냇물 동쪽에 있는 것은 서(西)를 상(上)으로 하고(먼저 서쪽 폭을 만들고 지세에 순응해서 동쪽으로 가는 것이다) 냇물 서쪽에 있는 것은 동(東)을 상으로 한다.

무릇 전지가 있는 곳에 산림(山林)촵천택(川澤)촵인가(人家)와 황무(荒蕪)한 땅이 전지와 함께 섞여 있는 것은 그림 안에 그려넣고, 전지가 없는 곳은 별도로 그림을 만들지 않는다.

주묵으로 금을 그은 여러 배미가 혹 22구(區)를 넘는 것은 갑촵를촵병촵정으로 하는데 혹 2첩(疊)을 쓰고(44구를 표할 수 있다), 혹 3첩을 쓰기도 한다(66구를 표할 수 있다). 2첩을 쓴 것은 표를 ‘갑1 갑2’라 하고, 3첩을 쓴 것은 표를 ‘을1 을2 을3’이라 하는데 더욱 많은 것은 혹 4첩을 쓰기도 하며, 혹은 5첩을 쓰기도 한다.

생각건대, 전적(田籍)은 이 법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이 법은 《주례》 토훈(土訓)의 옛법이고 명 태조(明太祖)의 영전(令典)인데, 어찌하여 하지 않는가? 지금 수령으로서 전지를 순시하는 자는 혹 전안(田案)이나 마상초(馬上草 : ?傷을 分俵하는 것)를 가지고 전지를 답험(踏驗)하는데,그 문서에는, “현자(玄字) 제94는 답(畓) 5부(負) 6속(束)인데 전재(全?)이고, 황자(黃字) 제57은 답 9부 5속 안에 5부가 재상(?傷)이다.”라고 한다. 현령은 문서를 잡고서 묻기를 “현자 답은 어느 배미이고 황자 답은 어느 배미인가?”라고 하면 이에 간활한 아전은,“사슴을 가리키면서 말이라[指鹿爲馬].” 하고 “쥐를 일러서 박옥(璞玉)이라[喚鼠爲璞]” 하여 6리를 600리라고 보고하니 비록 공촵황(?黃) 같은 재능이 있다 한들 무엇으로써 분변하겠는가?

 

그림 8-ⓛ 어린도(魚麟圖)

 

어린도라는 것은 전지 모양의 바른 것, 비뚤어진 것, 뽀족한 것, 뭉뚝한 것, 작은 것, 큰 것, 긴 것, 짧은 것이 환하게 눈앞에 나타나기 때문에 털끝만큼도 속일 수가 없으므로 아무리 어리석은 현령이라 하더라도 속임을 당하지 않게 되어 있다.반드시 정전으로는 못하더라도 9분의 1로 하는 데에는 이 어린도가 없어서는 안될 것이며 또한 결(結)촵부(負)로써 전지를 풀이하는 데에는 더구나 이 어린도를 빨리 만들어서 간사한 폐단을 조금이라도 그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린도는 마땅히 본을 만들어서 여러 군현(郡縣)에 보여야 할 것인데 지면(紙面)이 비좁고 작으므로 한 구역만 뽑아서 그림 8-①과 같은 도표를 만들었다.

위의 도면(圖面)은 곧 어린도 9구 중의 1구이다 경(經)촵위(緯)의 직선은 모두 동서남북 본선(本線)이고, 점선은 전지 배미가 서로 섞인 것을 주묵으로 그린 것이다.

갑(甲)촵경(庚)촵계(癸)촵자(子)촵인(寅)촵묘(卯)촵오(午)촵사(巳)는 그 배미가 모두 경계선에 걸쳐 있기 때문에 구역 밖으로 넘쳐나왔다.

기(己) 배미는 그 전지 대부분이 저쪽 구역에 있는데, 다만 그 전지 끝이 경계선에 걸쳐 있기 때문에 구역 안으로 줄여서 넣었다.

갑촵를촵정촵무의 변두리에 특별히 넘쳐나온 것이 없는 것은 본디 냇물가 큰 길 옆이어서 경계에 걸쳐진 전지가 없기 때문이다. 나머지도 모두 이와 같다.

이 고을 백성은 저 고을 전지를 경농하지 못하는데 혹 그 마을에서 오직 저 마을 전지에만 의지하는 백성이 있으면 백성을 저 마을로 이사시켜 농사하도록 한다.

생각건대, 지금의 군촵현은 옛적에 제후(諸侯)라고 일컫던 것이다. 등(?)나라 백성이 설(薛)나라에 가서 경농하고, 우(虞)나라 백성이 괵(?)나라에 가서 경농하는 이런 이치가 어찌 있겠는가? 대개 군촵현을 분할하는 데에는 큰 냇물이나 큰 재[嶺]를 경계로 함이 마땅하다.그렇지 않으면 혹 시냇물을 한계로 하거나 구릉을 한계로 하며, 혹 큰 길을 한계로 하여 반드시 일정한 지역을 넘을 수 없도록 만든 한계가 있은 다음이라야 제도에 조리가 있어서 쟁송이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나라 군촵현은 경계를 분할한 것에 무리한 것이 많았다. 혹 한 방(坊) 두 방이 이웃 고을을 넘어서 있기도 하고 혹은 한 방, 두 방이 문득 이웃 고을 복판에 박혀 있기도 하며, 혹은 경계가 개 어금니처럼 서로 엇갈려서 분할한 자취가 전연 없다.대개 당초 건치(建置)할 때에 신성(神聖)한 대인(大人)이 경계를 이렇게 만든 것이 아니었고 새[鳥]나 짐승처럼 서로 모여서 저절로 촌락을 이루자 ‘부곡(部曲)’이라 일컬었던 것이다(《輿地勝覽》). 그 후 부곡을 깨뜨려서 여러 군촵현을 만들었는데 그 부곡을 갈라주면서 경계를 살피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예속시켰던 것을 역대에 그대로 따라서 우물쭈물하다가 지금에 이른 까닭으로 그 정밀하지 못함이 이와 같다.이번에는 특별히 감사(監司)에게 유시(諭示)해서 무릇 교정(矯正)할 만한 것은 죄다 옮겨다 붙이려고 한다. 한결같이 큰 냇물이나 큰 재, 넓은 도랑, 높은 언덕,큰 길 등을 한계로 하고 그런 다음에 이 고을 백성으로서 저 고을에 경농하는 것은 일체 엄금하여 비록 시점(時占)이라도 그대로 시작(時作)으로 만들어서 법을 범하지 말도록 한다. 그리고 이 전지를 경농하려 하는 자는 이 고을로 이사하여 판적(板籍)에 편입된 뒤라야 그 땅에 농사해도 금하지 않는다.

그 촌리를 마련할 때는 전지로 묶는데 무릇 4정(井)은 촌(村)이, 4촌은 이(里)가, 4이는 방(坊)이, 4방은 부(部)가 각각 된다. 촌에는 1감(監)을, 이(里)에는 1윤(尹)을, 방에는 1노(老)를, 부(部)에는 1정(正)을 각각 두고 인의(仁義)로 인도해서 공전을 농사하고,효제(孝悌)를 깨우쳐서 사전(私田)을 농사한다. 갈아서 씨뿌리고, 모심어서 김매고, 베어서 수확하고, 방아 찧는 등의 일까지 신중하게 감독하여 들에서 거두어 공창(公倉)에 바친다.

생각건대, 주(周)나라의 예는, 무릇 도를 배워서 벼슬하는 자는 위로 대부(大夫)촵삼사(三士)로부터 아래로 부사(府史)촵서리(胥吏)까지 모두 왕성 안에 있었는데, 이를 6향(六鄕)이라 일렀고 온갖 공장(工匠), 여러 기술자(技術者)와 장사치 등도 또한 그 안에 있었다. 6수(遂) 이외에 비로소 농민이 있었고 다른 직업을 가진 자도 섞여 있었으므로 정(井)으로 묶지는 않았다.그러나 원교(遠郊) 밖에서 강기(畺畿)까지는 순전히 농민만 살고 다른 업(業)은 섞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촌리 제도(村里制度)를 마련하면서 전지(田地)로 묶어서, 4정(井)은 읍(邑)이, 4읍은 구(丘)가, 4구는 전(甸)이, 4전은 현(縣)이, 4현은 도(都)가 된다 하였다(小司徒). 전지를 갈라서 부(賦)를 내며 군사를 조정(調整)해서 수레를 내는 데에 모두 법식(法式)이 있었는데, 이것이 이른바 선왕(先王)의 법이었다.

지금 우리 나라에는 사촵농촵공촵상(士農工商)이 뒤섞여서 구별이 없는데 다만 한 마을 안에 사민(四民)이 섞여 살 뿐 아니라 또한 한 몸뚱이로써 네 가지 업을 겸해 다스리니 이것이 한 기예(技藝)도 성취된 것이 없고 온갖 일에 규범이 없게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전지로 묶어서 넷과 넷이 서로 통솔하도록 하려면 옛 법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비록 그 사이에 농사하지 않는 사족(士族)이 끼여서 사는 것은 구애하지 않더라도 공촵상 두 백성만은 읍성(邑城) 안에다 모아서, 관중(管仲)이 제(齊)나라를 다스리던 법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別篇에 있다). 그리고 나서 능()을 모아서 묘(畝)로, 묘를 쌓아서 부(?)로, 부를 합쳐서 정으로 만든다(모두 聚촵合촵積으로 계산한다).

무릇 4정의 농부[佃] 및 4정 경계 안에 자리잡고 있는 것을 묶어서 1촌(村)을 만들며(옛 법은 4정이 32家로 되어 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수효를 정할 수 없다). 촌마다 이름 하나를 만든다(柴桑村촵斜川村등).4촌을 묶어서 이(里)로 하여 이름 하나를 주고(옛 법에는 4촌이 128가이다), 4리를 묶어서 방(坊)으로 하여 이름 하나를 주며(옛 법에는 4이가 512가이다), 4방을 묶어 부(部)로 만들어 이름 하나를 주는데(옛 법에는 4방이 2천 48가이다), 농사하지 않는 호(戶)를 통계하면 4부(部) 백성이 반드시 3천여 호에 가깝다.

우리 나라 작은 현에는 500호가 되기도 하고 1천여 호가 되기도 하여 누호(漏戶)가 많으나 혹 합호(合戶)한 것도 있다. 비록 그 호총(戶總)이 모두 실제 수효는 아니나 정지(井地)를 이미 고르게 했고 호적(戶籍)에 법이 있으니, 무릇 2천 호 미만인 현은 혁파하여 혹 작은 현은 둘을 서로 합치기도 하고 혹은 셋이나 넷으로 갈라서 여러 고을에 다 합치는 것이 마땅하다(별편).그렇게 한다면 2천 호쯤 되는 작은 현에는 방은 있어도 부는 없고, 혹 전총(田總)은 매우 적은데 호총(戶總)은 도리어 많아서, 북도(北道)의 장진(長津) 같은 데는 화전(火田)을 업으로 하나 전총에는 들지 않았다. 또한 엽호(獵戶)촵목호(牧戶)촵농호(農戶)보다 많은 데가 있기는 하나, 과연 전지가 아니면 백성을 실상 기를 수는 없으니(장진 남북이 300~400리임) 이와 같은 곳도 그대로 촌촵리촵방촵부로 묶어서 법대로 해야지 다르게 할 수는 없다.

살피건대, 우리 나라 군촵현의 명칭은 본디부터 모두 상말이어서 괴이쩍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아름다운 이름을 주기 시작했는데 사책(史冊)을 상고하니, 광휘(光輝)가 찬연했다. 그러나 다만 그 방이 이름은 모두 예전대로이고 고치지 않았으니 지금은 각 도 감사에게 조칙(詔勅)해서 한 도의 방촵이를 뽑아 죄다 아름다운 이름을 주는 것이 마땅하다.

파지대면(波之大面)을 ‘파지방(巴池坊)’으로 흘이내리(訖伊乃里)를 ‘탁천리(濁川里)’로 득독거리촌(得毒巨?村)을 ‘공석촌(?石村)’으로 각각 고치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이런 것은 잠깐 동안에 3천 년을 내려오는 고루한 풍습을 씻을 수 있는데, 무엇이 어려워서 하지 않는가?또 동(洞)이라는 것은 바위 틈의 명칭이니 금강산(金剛山) 만폭동(萬瀑洞)과 두류산(頭流山) 청학동(靑鶴洞)은 오히려 가하지만 지붕과 담장이 연달아 있는 야촌(野村)을 어째서 동(洞)이라 이르는가? 이웃 마을 여러 사람을 부르면서, ‘동내 첨존(洞內僉尊)’이라 하고,이임(里任)을 ‘동임(洞任)’, 이장(里長)을 ‘동장(洞長)’, 이회(里會)를 ‘동회(洞會)’, 이의(里議)를 ‘동의(洞議)’라 부르는데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지금부터 공사간(公私間)의 문부(文簿)에 동(洞)이라는 글자를 죄다 없앤다면 또한 상말을 버리는 데에 하나의 도움이 될 것이다.

촌감(村監) 한 자리는 곧 옛날 전준(田畯)의 직(職)이다. 그 해가 다가도록 수고하는데, 녹(祿)이 없을 수 없으니 1년에 곡식 24곡(斛, 240두)을 받아서 양식으로 하며, 비록 윤달(閏月)이 있더라도 더 주는 것은 없다. 남방에는 벼, 북방에는 메기장을 준다

생각건대, 촌감은 사족이나 양민을 불구하고 반드시 청렴하고 신중하며, 본말(本末)을 따져서 일을 아는 자라야 할 수가 있다.

메기장 쌀을 세속(世俗)에서는 ‘밭쌀’이라 이르기도 하고 또한 소미(小米)라 이르기도 하는데, 메기장이라야 참 메기장인데도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이를 모르고 돌피를 ‘메기장’이라 하며(방언에 皮와 같이 읽는다) 메기장을 ‘속(粟)’이라 하니(五葉松을 栢이라 하고 백은 側栢이라 하는 것과 같다),속을 모르는 자들이다. 모든 곡식 중에 방아 찧지 않은 것은 모두 속(粟)이니 모든 공사간의 문부를 개정함이 마땅하다.

공전(公田)에 거름하지 않고서는 감히 사전에 거름할 수 없고, 공전을 갈지 않고서는 감히 사전을 갈 수 없으며, 공전을 고무래질하지 않고서는 감히 사전을 고무래질할 수 없고, 공전에 물대지 않고서는 감히 사전에 물댈 수 없으며, 공전에 씨뿌리지 않고서는 감히 사전에 씨뿌릴 수 없고,공전에 모내기를 하지 않고서는 감히 사전에 모내기 할 수 없으며, 공전을 김매지 않고서는 감히 사전에 김맬 수 없고, 공전을 수확하지 않고서는 감히 사전을 수확할 수 없다.

생각건대, 정전하는 법은 세를 거두어들이는 데에 고르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백성에게 충순(忠順)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다. 평소에 농사일을 하면서 모두 국가의 것을 먼저 하고 사리(私利)를 나중에 할 줄 알게 되면 사변(事變)이 있는 날에 반드시 힘입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훈계하고 교도하는 것이 어찌 입과 혀로써 능히 미칠 수 있겠는가?

사전 한 구(區)에 농사하는 자가 비록 두어 사람이 있더라도 한 사람만 전안(田案)에 기재하고 촌감(村監)이 역정(役丁)을 조발(調發)하는 데에도 한 사람만 요구해서 ‘전수(佃首)’라고 부른다. 전수는 스스로 그 부(?) 안에서 역정을 조발하여 노역(勞役)에 응한다.

생각건대, 옛 법에는 한 집에서 오로지 1부만 농사했으나 지금은 능히 그렇지 못하다(옛적에는 모두 王田이었으므로 그렇게 할 수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사전이므로 제가 직접 농사하는 것을 금단할 수가 없다). 오직 그 부 안에서 여러 농부 중에 한 농부를 택해서 전수(佃首)로 삼는데, 혹 그 사람의 전지 묘수(畝數)를 보고 혹 그 사람의 인품을 보아서 참작한 다음 결정한다(촌감이 公論을 收合해서 차출하는 것이므로 현령이 간섭하지 못한다).

무릇 공전에 노역(勞役)을 조정하는 것은 모두 백분(百分)으로 분배하여 여러 농부에게 5묘를 농사하는 자는 5율(率)을 내고, 7묘를 농사하는 자는 7율을 내며, 50묘를 농사하는 자는 50율을 내게 한다.

정으로 구획하지 못한 것은 소요되는 종자(種子)가 많고 적은 것으로써 율을 만드는데 가령 사전 1부(?)가 40마지기가 되면 역정을 조정할 때에 40분으로 분배하여 3두를 뿌리는 데는 3율을 내고 5두를 뿌리는 데는 5율을 내는데 땅의 좋고 나쁜 것은 묻지 않는다.

가령 거름을 적게 내야 마땅할 것 같으면 40짐(擔)으로 의정(議定)하고, 거름을 많이 내야 마땅할 것 같으면 80짐으로 의정한다. 그리하여 역정을 조정할 때에 처음부터 40명으로 계산해서, 10두를 뿌리는 데에는 10정(丁)을 내고, 5두를 뿌리는 데에는 5정을 내어 각각 하루를 노역한다. 역정을 다 썼으면 또 40명을 조정해서 앞에 말한 법대로 쓰는데 소[牛]가 있는 자는 소로써 1정(丁)을 대신한다.

혹 사족(士族)이나 토호(土豪)가 위세를 믿고 약한 자를 업신여겨서 역정을 조정하여 고르게 하지 않은 자는 경전어사(經田御史)가 적발하여 그 사람의 전지를 가난한 백성에게 옮겨주는데 그 사람이 직접 농사를 지을 수 있을 때까지 한정하고 그 사람이 늙으면 또 다른 백성에게 옮겨준다.

첫해 봄에는 관(官)에서 씨앗을 공급하는데 가을이 되어, 벼줄기를 거두게 되면 몇 속(束)을 요량해주어서 씨앗을 준비하도록 하고, 해마다 그 예로 하며, 다시는 관에서 공급하지 않는다.

씨앗은 창(倉)에 있는 환곡(還穀)을 갈라주고 수량을 계산해서 회감(會減)한다. 만약 그렇게 하려면 지난해 겨울에 정한 곡식을 거두어서 그 마을에 두고 창에 넣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벼줄기를 거두어서 씨앗으로 하는 법은 다음 편(篇)에 있다.

모든 공전 배미에는 보리 심는 것을 금하며 사사로 씨앗 뿌리는 것도 금한다.

적이 살피건대 남쪽 지방 수전(水田)에는 가을에 모두 보리를 심는다. 보리를 심으면 세 가지 해(害)가 있는데, 첫째는 지력(地力)이 쉬지 못하고, 둘째는 번경(?耕 : 땅을 갈아 뒤엎음)할 수가 없으며, 셋째는 모내기를 제때에 못하는 것이니 일절 엄금하는 것이 마땅하다.

수원(水源)이 마르지 않는 배미에는 반드시 앙총(秧叢 : 속칭 못자리라 이르는 것임)을 하는데, 만약 비 내리는 시기가 늦어서 모내기를 제때에 못하면 해가 앙총으로 돌아간다. 무릇 공전 1부의 모는 공전에다 뿌리는 것을 허락하지만 사전 종자는 허락할 수 없다.

혹 사방 두어 마장 안에는 앙총을 만들 만한 곳이 없고 오직 공전 두어 배미에 수원이 항상 넉넉하면 앙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모내기가 시기에 늦어져서 해가 앙총에 미치면 8부(夫)에게 벼를 모아서 그 해를 보상할 것이며 용서할 수는 없다(마을 예가 본디 이와 같다).

가을에 곡식이 이미 익으면, 이윤(里尹)과 촌감(村監)이 8부(?)의 여러 농부를 모아놓고 함께 앉아서 곡식을 두드리고 두량(斗量)해서 포장(包裝)한 다음, 그 실제 수량을 현령에게 보고한다.

1두를 1곡(斛)으로 하고 1곡을 1점(?)으로 한다.

벼 1곡에 쌀 4두가 나는 것을 고정된 율(率)로 한다.

이에 곡식을 8등분 한 다음 전수(佃首)에게 갈라주고 정하게 찧어서 다음해 봄을 기다리도록 한다.

생각건대, 15두를 1석으로 하는 법은 옛적 어디에도 근거가 없다. 무릇 산수(算數)의 승제(乘除)는 모두 10(十)씩으로 율을 하니, 그 율이 명백하다. 지금 15를 서로 승(乘)하면 섬으로 계산하기가 어렵고 그 실적(實積)도 분명하지 않다. 하물며 사조(私租)는 20두로써 섬을 계산하고 공세(公稅)는 15두를 석으로 계산한다는 것인가?또 벼를 거두는 데에는 큰 말을 쓰고 양곡을 방출하는 데에는 작은 말을 쓰므로 시끄럽고 어지러워서 실수(實數)를 알 수 없으니, 마땅히 양형사(量衡司)에서 구리말[銅斗]을 만들어 8도에 반포하여, 관두(官斗)촵사두(私斗)촵시두(市斗)촵이두(里斗)를 털끝만큼도 어긋나지 않게 한 다음이라야 왕제(王制)라 할 수가 있다.

만약 그러면 곡식을 타작하는 날에, 다듬고 키질하여 정(精)한 곡식을 만들고 또 한 곡마다 한 말을 더 주어서 건조(乾燥)함으로써 모자라게 되는 것에 대비하도록 한다. 두량(斗量)하는 법은 평두(平斗)로 함이 마땅하며 넘치게 함은 마땅치 않다.

3년이 지나면 경전어사(經田御史)가 3년 동안의 문부(文簿)를 가지고 공전을 순시(巡視)하며 이윤과 촌감을 회합하여 전지의 등급을 분간할 것을 의논한 다음에 전지의 비옥하고 메마름을 보아서 9등급으로 나눈다.

생각건대, 대략 수전(水田)에는 하나를 심어서 열을 수확하는 것을 가장 메마르다 하고, 하나를 심어서 100을 수확하는 것을 가장 비옥하다고 이른다(혹 100을 넘기는 것이 있기도 하나 이런 것은 반드시 의논할 것이 아님). 그러나 재상(?傷)만 만나지 않으면 하나를 심어서 열을 수확하는 것은 또한 볼 수 없으니,열 다섯을 수확하는 것으로 하지하를 삼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스물을 수확하는 것은 하지중, 스물 다섯을 수확하는 것은 하지상으로 함이 마땅하다. 서른을 수확하는 것을 중지하, 마흔을 수확하는 것을 중지중(속칭 두 섬 내기라 이르는 것이다), 쉰을 수확하는 것을 중지상, 예순을 수확하는 것을 상지하, 여든을 수확하는 것을 상지중, 백을 수확하는 것을 상지상으로 하면 백성의 논의가 화평해질 것이다.하등에 다섯으로써 차등한 것은 그 전지가 이미 메마르므로 세밀하게 살펴서 억울함이 없도록 한 것이며 상등에 스물로써 차등한 것은 그 전지가 이미 비옥하므로 그 이(利)함을 간략하게 해서 백성에게 후하도록 한 것이다. 중등(中等)에 열로써 차등한 것은 두 가지 중에 저울질해서 평균함을 얻도록 한 것이다.

또 따라서 법을 만들기를 “두 등급이 벌어진 사이에다 또 한 선을 그어서 그 선 이하는 아래로 붙이고 그 선 이상은 위에다 붙이기로 한다면 백성의 논의가 화평해질 것이다. 9등과 8등 사이에 서로 벌어진 것이 다섯 말이면 두 말 다섯 되 이하는 9등에다 붙이고 이보다 넘는 것은 8등에다 붙이면 이에 평균해질 것이고,6등과 5등 사이에 서로 벌어진 것이 열 말이면 다섯 말 이하는 6등에다 붙이고 이보다 넘는 것은 5등에다 붙이면 이에 평균해질 것이며, 3등과 2등 사이의 서로 벌어진 것이 스무 말이면 열 말 이하는 3등에다 붙이고 이보다 넘는 것은 2등에다 붙이면 이에 평균해질 것이다.

혹 재상(災傷)이 있는 해를 당하여 하나를 심어서 열 다섯 말이 못 되는 것도 하지하에 붙이고 더 이상 살피지는 않으며(이와 같은 경우는 거의 없다), 혹 하나를 심어서 100을 넘는 것도 상지상에 붙여서 더 이상 증가(增加)하지는 않는다(장흥촵보성 사이에 혹 하나를 심어서 200을 넘는 데가 예전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다).조정에서 반포하는 사목(事目)에 마땅히 이와 같이만 한다면 백성이 살지 못할 리가 없을 것이다. 남쪽으로 해남(海南)에서 북쪽으로 온성(穩城)까지 이 법을 시행하며, 서쪽으로 풍천(?川)에서 동쪽으로 강릉(江陵)까지 이 법을 시행한다. 그런데 모래와 돌이 많은 땅이나 진흙 땅, 풀이 우거진 땅이거나 염분이 섞인 땅은 꼭 따질 필요는 없으며 깊은 산, 큰 들, 구릉이나 물가에 있는 평지도 꼭 따질 필요는 없다.

사전(私田) 등급을 나누는 것은 이번에는 우선 거론하지 못하나 그 물정(物情)이 이미 이와 같이 함이 합당하면, 공전 등급으로 나눠서 이것을 법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에 조속(?粟)의 액수(額數)를 정한다. 전지 2묘(畝) 반(半)마다(즉 한 마지기) 1등은 100두, 2등은 80두, 3등 60두, 4등은 50두, 5등은 40두, 6등은 30두, 7등은 25두, 8등은 20두, 9등은 15두로 한다.

그렇게 한다면 1등 한 부에는 그 곡식이 4천 두(400곡), 2등 한 부에는 3천 200두, 3등 한 부에는 2천 400두, 4등 한 부에는 2천 두, 5등 한 부에는 1천 600두, 6등 한 부에는 1천 200두, 7등 한 부에는 1천 두, 8등 한 부에는 800두, 9등 한 부에는 600두이다.

생각건대, 조법(助法)이란 백성과 함께 고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풍년이 들면 공사(公私)가 함께 풍성해지고, 흉년이 들면 공사가 함께 가난해지는데, 땅의 비옥함과 메마름은 원래부터 따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왕자(王者)의 법에는 모두 일정한 경계와 넘지 못할 한정이 있고, 천지의 자연으로 인해 만홀(漫忽)히 절제가 없을 수 없기 때문에 우(禹)와 직(稷)이 정지(井地)하는 정사〔功〕를 이룩하자,우공(禹貢)이 전지를 아홉 등급으로 분간했다(이미 주에 등을 나누었으니 한 丘, 한 甸도 모두 아홉 등급으로 나눴다).

《주례》에는 땅을 상촵중촵하 3등급으로 했는데 정현의 주석에는, “3등급에 또는 각 3등급이라.”고 일렀으니, 주(周)나라에서도 또한 9등급으로 했던 것이다. 다만, 《주례》의 등급 나누는 것은 본디 전지에 매였던 것인데 지금 내가 마련한 이 책에는 사전(私田)에 대해서 등급을 분간하는 것을 감히 말하지 못한다.그것은 옛적에는 농부가 왕전(王田) 중에서 비옥한 땅은 서로 차지하려 하고 메마른 땅은 싫어했으므로 그 등급을 분간하기가 매우 쉬웠으나 지금은 왕인(王人)이 사전(私田)에 나가서 비옥한 땅을 택해서, 무거운 세(稅)를 덮어씌우고, 메마른 땅을 분변해서 가벼운 세를 배정(配定)하므로 등급을 분간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백성이 비옥한 것을 메마르다고 속이는 것).지금 그 문제는 그만두고 다만 공전에 3년 동안 수확한 것을 경험한 다음 그 등급을 자세히 정한다. 등급을 이미 정했으면 조속(?粟) 몇 말이라는 것도 일정한 액수가 있음이 마땅하다.상(上) 세 등급은 서로 사이가 넓어서 잘못되는 것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드문 경우이니 우선 너그러운 쪽을 따른다. 그리고 하(下) 세 등급은 서로 사이가 가까워서 비례에 일치하지 않으나 이런 땅이 매우 많으므로 자세히 살피고자 한 것이니 뜻이 없는 것은 아니다.

9등 한 부에는 곡식이 600두를 넘지 못한다. 그런데 지금 결촵부(結負)하는 법과 비교하면, 공가 세입(公家稅入)에 보태어지는 것이 많으나 백성은 오직 공전 농사를 도울 뿐이고 다시는 쌀을 바치지 않으니 이렇게 함으로써 나라와 백성이 함께 힘을 펴게 되었고 오직 중간에서 속이고 숨기던 사람들의 소굴(窩藪)이 온통 깨뜨려져서, 도망치고 숨을 데가 없게 되었다.유약(有若 : 공자의 제자)이 노(魯)나라 임금에게 고하기를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은 누구와 함께 부족하겠습니까?”라고 했는데, 여기서 누구란 은연 중에 세 가신(家臣 : 季氏의 가신인 孟孫촵叔孫촵季孫을 말함)을 지적한 것이다.지금 나라와 백성은 유족해지고 오직 그 중간에서 훔쳐먹던 자가 부족해질 뿐인데 임금은 누구와 함께 부족하겠는가? 시험삼아 기내(畿內)와 호남(湖南)의 하지하와 중지중 두 등급 논을 가지고, 옛 예와 지금 법으로써 세입의 많고 적음을 비교해서 다음에 열기했다.

기내 메마른 전지는 80마지기가 한 결이 되는데(남방에 上畓 20마지기가 한 結이 되는 것이니 6등 25負를 네 곱절해야 이에 한 결이 된다. 楊根 지역에 있는 나의 소유 전지 80마지기도 과연 한 결이 될 뿐이다),세미(稅米) 24두를 징수한다(田稅촵大同米촵三手米촵結錢과 잡비를 아울러 통계한다면 대략 24두가 된다). 이것은 2부(?) 되는 땅이니(지금 정전 한 부는 대략 논이 40마지기임), 9부에서 내는 쌀은 108두를 넘지 않는다(1부마다 12두이다).

지금 1정 9부에 공전 조속은 하지하등이 600두인데(찧지 않은 벼) 10두 벼를 쌀 4두로 계산하면 그 쌀이 240두이니, 예전과 비교하면 증가된 것이 132두이다.

기내에 방세(防稅)하는 예는 한 결에 조(租 : 찧지 않은 벼를 조라 한다) 100두이니 네 결 반이면 조가 450두이다(즉 9부 되는 땅이다). 또 반 결 되는 전지에 사주(私主)에게 바치는 조도 400두보다 적지 않은데(私家의 20점이다),두 가지를 통계하면 그 조가 850두이다. 예전에는 9부 되는 땅에 농가에서 바치는 조가 850두였는데 지금 바치는 조는 600두뿐이다. 예전과 비교하면 줄어든 것이 250두이니 백성이 편하지 않겠는가?

관가(官家)에서 반 결 되는 전지를 사면(공전 1부를 논으로 만들면 40마지기가 된다), 조 600두를 거둔다. 만약 사가(私家)에서 반 결 되는 전지를 사서 자기가 농사하고 자기가 수확하면 그 곡식은 적어도 1천 두를 내려가지 않는다. 그런데 액수를 이와 같이 정한 것은 해에 따라 풍(?)과 흉(凶)이 있는데, 가장 나쁜 해에 따라서 제도를 세운 것이다.

호남의 메마른 땅은 40마지기가 한 결이 되는데(한 마지기에 세가 2부 5속이면 메마른 전지이다) 세미(稅米) 24두를 징수한다. 이것은 1부 되는 땅이니(뜻은 위에 말했다), 9부에서 내는 쌀은 226두를 넘지 않는다.

지금 1정 9부에 그 공전 조속은 하지하등이 600두이고 그 쌀은 240두이니 예전과 비교하면 24두가 증가되었을 뿐이다.

호남에 방세하는 예도 또한 결마다 벼 100두를 낸다. 그러면 9결에 바치는 것이 900두이고(즉 지금의 9부 되는 땅이다), 또 한 결 되는 전지에 사주(私主)에게 바치는 조(租)가 적어도 400두를 내려가지 않으니(한 마지기마다 조가 10두이다), 두 가지를 통계하면 그 조가 1천 300두이다.지금의 법대로 하면 9결에 내는 조가 600두이니 예전과 비교하면 줄어든 것이 700두이고 700두를 쌀로 만들면 280두이다. 나라에서 거두는 것은 24두가 증가할 뿐인데 백성이 바치는 것은 28곡이 줄어드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중간에서 속이고 숨기던 것들의 소굴이 온통 깨뜨려져서, 도깨비가 낮에 나타난 것과 같이 되었으니 백성이 유족해지면 임금은 그 누구와 함께 유족하지 않겠는가?

기내 중등 전지는 대략 65마지기가 1결이 되며(이것은 제6등에서 제5등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기내 전지는 4등을 첫째로 했으므로 5등을 中等으로 했음) 세미 24두를 징수한다. 이것은 1부 62묘 반 되는 땅이니, 9부에서 내는 쌀은 133두에 불과하다(1묘마다 쌀 1승 4홉 8작 弱을 거두는 것이니 1부에는 14두 8승 약이다).

지금 1정(井) 9부에 공전 조속이 하지중등(본디 법은 6등급이었으나 이번에 9등급으로 만들었으니 하지중과 하지상등 중간에 있음이 마땅하나, 우선 가벼운 쪽을 따라서 하지중으로 말하는 것이다)으로는 800두이다. 쌀로 만들면 320두가 되는데 예전과 비교하면 증가된 것이 187두이다.

기내에서 방세하는 예는 1결에 벼 100두를 내는데 5결 53부 8속이면(1묘에 6속 一把면 900묘에는 합 566부 8속이다) 그 조가 553두 8승이 된다(즉 9부 되는 땅이다). 또 40마지기 전지에 사주(私主)에게 바치는 조가 600두를 내려가지 않는데(1마지기마다 半分해서 15두이다),두 가지를 통계하면 그 조가 1천 153두 8승이 된다. 전일에는 9부 되는 땅에 그 조가 이와 같았는데 지금은 조 800두를 거둘 뿐이다. 전일과 비교하면 줄어든 것이 350여 두이니 백성이 어찌 편하지 않겠는가?

줄어든 것이 이미 이와 같으면 그 조(租)를 비록 민전(民田)에 요구하더라도 오히려 혜택이 되는데 하물며 국가에서 공전을 설치해서 조속만 거두는 것이겠는가?

호남의 중등 전지는 모두 높은 등급의 세를 낸다(하나를 심어서 40을 얻는 땅에 세는 1마지기에 반드시 5負보다 적지 아니하다). 대략 20마지기가 1결이 되며(康津 전지 중에 1마지기 세를 8~9負 바치는 것이 있었는데, 무슨 등급으로 된 것인지 모르겠다), 세미(稅米) 24두를 징수하는데, 이것은 반부(半?)되는 땅이다(1부에 대략 40두를 심는다). 그렇다면 9부에서 내는 쌀은 432두를 넘지 않는다(1부마다 48두이다).

지금 1정 9부에 공전 조속은, 중지중이 1천 600두이고 쌀로 만들면 640두가 되는데 전일과 비교하면 증가된 것이 208두이다.

호남에 방세하는 예도 또한 1결에 벼 100두를 내는 것이다. 18결에서 바치는 것은 1천 800두이다(즉 지금 9부 되는 땅이다). 또 2결 되는 전지에(즉 1부 되는 땅이다), 사주에게 바치는 조가 적어도 800두를 내려가지 않으니(사가의 40?이다), 두 가지를 통계하면 그 조는 2천 600두가 된다. 전일에는 9부 되는 땅에 그 조가 이와 같았는데 지금은 조 1천 600두를 징수할 뿐이니, 전일과 비교하면 줄어든 것이 1천 두나 되는데 백성이 어찌 편하지 않겠는가?

총괄해서 말하자면 기전(畿田)에서 나라 수입이 증가되는 것은 항상 남도 전지보다 많고 민간 부담이 경감(輕減)되는 것은 항상 남도 전지보다 적다. 이것은 남방은 결을 만들던 당초에 본래부터 중한 쪽을 따랐고, 기전은 결로 만들던 당초에 본래부터 경한 쪽을 따랐기 때문이다. 이번 이 정조(井?)하는 법은 한 묘(畝)에 포함되는 것이 비옥하거나 메마르거나 모두 같은데,다만 비옥함과 메마름을 비교해서 그 등급을 정할 뿐이다. 남방과 북방의 법례가 모두 같기 때문에 기전에 증감되는 수량이 남도 전지와 같지 않다. 지금 기민(畿民)에게 혜택을 내리려 할 것 같으면 왕성(王城) 80리 안에는 9부로 한 정(井)을 만들지 말고 10부마다 1통(統)으로 만들어서, 9부(夫)에게 공전한 부(?)를 농사하도록 하면 이것은 10분의 1로 하는 세이다.

《주례》에도 6수(遂)에는 10분의 1의 법을 쓰고 야외(野外)에는 9분의 1의 법을 썼는데 선왕(先王)의 법이 본디 그러했다. 그렇지 않고 조속은 징수하고 옥속(屋粟)을 징수하지 않으면 또한 여러 도(道)와 다르게 할 수가 있다.

시험삼아 나주(羅州) 한 곳을 논하자면 본 전답이 3만 결인데, 그 잡하(雜下)를 제외하더라도 평년(平年)에 실제 납세하는 것이 2만 결이다. 결마다 세미 24두를 징수하면 그 쌀이 3만 2천 석(한 석이 15두임)이니 즉 4만 8천 곡(斛)이다(한 곡은 10두이다).

지금 정조하는 법을 쓰면 원전(原田)을 9분의 1로 하여 공전 1천 111부 11묘를 얻게 된다(원전 2만 결이 약 40만 마지기가 되며, 공전 1부는 대략 40마지기가 되는 것이니 그 액수가 이와 같다). 아울러 중지중의 율로써 그 조속을 징수하면(1마지기마다 곡식 40두를 거두는 것이다) 그 조가 177만 7천 776두이다.이것을 쌀로 만들면 그 쌀이 4만 7천 407석인데, 즉 7만 1천 111곡이 된다. 전일과 비교하면 증가된 것이 2만 3천 111곡인데(석으로 계산하면 증가된 것이 1만 5천 407석이다), 6만 곡은 서울에 올려보내고 1천 111곡은 갈라서 잡비로 한다. 그리고 1만 곡은 본주에 남겨서 몇 곡은 목사(牧使)의 월름(月?)으로 하고,몇 곡은 향관(鄕官)촵이교(吏校)촵조례(??)촵노비(奴婢)의 월료(月料)로 하며, 몇 곡은 경주인(京主人) 역가(役價)와 영주인(營主人) 역가 그리고 삭선진상가(朔膳進上價)로 하고 몇 곡은 순영(巡營)에 이문(移文)하는 각가(脚價)로 하며, 몇 곡은 사객지응미(使客支應米)로 하고, 몇 곡은 신구관 쇄마가(新舊官刷馬價)로 한다.

무릇 일반 잡용(雜用)도 모두 이 안에서 법식을 제정하면 어찌 부족함이 있겠는가? 규모가 엄정하고 체면이 정대하여 명목이 바르면 말이 순해지고 이치가 통하면 의리가 서서, 사면 팔방으로 합당하고 만세토록 폐단이 없을 것이다. 삼대(三代)의 아름다운 덕을 계승하고 백왕(百王)의 착한 법을 드리워서 거룩한 공덕이 사책에 빛날 것이니 성명(聖明)은 유의하기 바란다.

나주는 2만 결에 방세하는 조(租)가 20만 곡(1결마다 100두이다)이다. 1천 111부 11묘에서 사주(私主)에게 바치는 것이 8만 8천 888곡 8두이니 두 가지를 통계해서 쌀을 만들면 그 쌀이 11만 5천 555곡이다(섬으로 계산하면 7만 7천 36석이다). 전일에는 공사간에 바치는 조의 수효가 이와 같았으나 지금 정조(井?)하는 법을 쓰면 그 수효가 저와 같으니 전일과 비교하면 줄어든 것이 4만 4천 444곡이다(석으로 계산하면 줄어든 것이 2만 9천 626석이다).

정자(程子)는 “천하의 물(物)은 다만 이 수효가 있을 뿐인데 여기에 있지 않으면 반드시 저기에 있다.”라고 했는데, 이것이 지극히 이치 있는 말이다. 지금 나라 수입에 증가되는 것이 꼭 2만을 넘는데도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지 못하고 백성의 지출에 줄어든 것이 4만을 넘어도 그것이 어디에서 없어진 것인지를 알지 못하니 이것은 무슨 이치인가?아전들이 속이고 숨기던 것이 여기에서 드러난 것이다. 나라 수입의 증가되는 것이 이미 이 덤불에서 나왔고, 백성 지출이 줄어든 것도 또한 이 덤불에서 벗긴 것이다. 이 두 가지 외에 또 숨은 은결(隱結) 1만 결이 있어(남도 사람들의 말이 모두 이와 같다) 방세(防稅)하는 쌀이 4만 곡이다. 세 가지를 통계하면 그 쌀이 10만 7천 555곡이니,한 주(州) 아전들이 훔치는 것이 10여만 곡에 이르는데도 오히려 “나라가 메마르다.”, “백성이 가난하다.”고 하니, 요량하지 못함이 어찌 이와 같단 말인가? 이 10여만 곡을 모두 아전이 먹는 것이 아니고 혹 목사의 잡용이 여기에 들어 있고(꿩촵닭촵柴炭 따위) 혹 순영의 요구에 수응(酬應)하는 비용도 여기에 들어 있는데(영주인의 폐단은 순영에 연유한다), 요컨대 아전들의 먹는 것이 그 중 많다.

이번에 비록 정조(井?)하는 법을 쓰더라도 관청의 용도나 아전의 월료와 일반 잡비는 그 지방에 남겨두지 않을 수 없으니, 이러나저러나 그들이 먹게 되는 것은 같다.법제에 한계가 분명하고 늠료가 정세(正稅)에서 나온즉 아전이 죄를 짓지 못할 것이며 죄를 짓지 않으면 능히 제 몸을 단속할 것이고 제 몸을 단속하면 복을 누릴 수 있어 그 자손 중에 울연(蔚然)히 흥기하는 자가 반드시 있게 될 것이다. 지금은 재물을 도둑질해서 얻는데, 무릇 도둑질해서 얻은 만금이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1금을 능히 당하지 못한다.

구석진 마을 가난한 사람이 해마다 곡식 10포를 수확해도 오히려 그 자손에게 가업(家業)을 전할 수 있는 것은 그 재물이 정당한 때문이고, 날치기나 큰 도둑은 하룻밤에 천금을 얻어도 한 달을 능히 보전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재물이 정당하지 못한 때문이다. 지금 주현(州縣) 아전이 왕전 곡식을 훔치는 것이 해마다 천만이나 된다.그러나 중국 병에 술을 담고 왜(倭) 냄비에 고기를 구우며, 낮 술자리에는 광대가 소리하고 밤 잔치에는 기생이 희학질하며, 사치하고 음탕한 짓을 하지 않는 곳이 없다가 수년을 넘지 않아서 반드시 가산을 탕진하여 해가 구족(九族)에까지 미친다. 그들이 늙으면 찢어진 옷을 입고 해어진 모자를 쓴 채 돌아다니며, 깊은 산, 먼 포구 사이에 비럭질하는 자가 목과 등[項背]이 서로 바라보이는데 이와 같음은 무엇인가?훔친 재물은 능히 오래 가지 못한다. 사람이 이미 나쁜 짓을 꾸며서 하늘이 복을 주지 않으니 그 자손도 능히 보존하지 못하는 자가 많다. 만약 정조(井?)하는 법을 시행한다면 나라와 백성의 소득과 아전들의 소득이 모두 커질 것이다. 정조하는 법은 아전들이 복을 기르게 한 것이기도 하니, 그 일을 아는 자는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미나리[芹]를 심은 것과 세모골[三脊蒲]을 심은 것은 아울러 제1등 율(率)에 따르고 부거(芙? : 연)를 심은 것은 제5등 율을 따라서 그 조속을 거둔다.

생각건대, 세모골이라는 것은 돗자리를 짜는데 쓰인다(龍鬚草를 방언에 ?이라 하고, 세모골은 방언에 왕골이라 이르는 것이다). 《이아(爾雅)》에 상고하니, 본초(本草)에 향포(香蒲)와 삼척모(三脊茅) 여러 종류가 있으나, 모두 이 식물과는 같지 않은데 혹시 중국에는 이 풀이 없는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더욱 심어서 중국에 판매함이 마땅하다. 미나리와 이 풀은 이익이 벼와 비교해서 두어 갑절이니, 상지상으로 세를 논함이 마땅하며, 부거를 심은 것은 그 연밥을 수확해서 또한 벼보다 이익이 많으므로 중지중의 세로 논하는 것이다.

- 경세유표 8권, 지관수제, 정전의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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