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대 이후 위정척사는 계속되었다.
1. 위정척사란? 흥선대원군이 18363년부터 집권하여 안동김씨의 노론 세도 가문을 축출한지 10년... 1873년 민씨가 정권을 잡으면서 대원군이 실각하고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개화정책을 실시합니다. 이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개화정책은 강화도조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고, 조선책략이 유입되면서 구체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화 사상을 우리 전통 유교주의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당연히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반대한 이유는 아무런 근거없이 서양을 싫어해서도, 조선 왕조를 지탱하는 신분질서의 하나인 성리학을 수호하기 위해서만도 아니였습니다. 물론 통상요구가 조선의 신분제와 사회질서의 근간을 흔들기는 하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것을 나름대로 논리있게 반박하였습니다. 성리학의 근본질서를 옳은 것(正)으로 여기는 것을 위정이라 하고, 서양의 문물을 악으로 보아 사(邪)라 하는 것을 척사라 하여 이러한 사상을 <위정척사>라고 합니다. 그럼 위정척사의 핵심 내용들을 한번 볼까요? 2. 대원군기의 위정척사(1863-1873) 흥선대원군이 막 집권하던 시기는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하고, 아편 전쟁 이후 중국 베이징을 함락시킨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열강들이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가지던 시기입니다. 또 미국은 일본을 개항시킨 이후 그 통상영역을 조선에 까지 확장하려고 하던 시기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외세를 몰아내고 척화비를 건립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부터 1871년 신미양요까지 조선은 통상을 요구하는 외세의 압력과 직접 맞싸워야 했습니다. 또, 제너럴 셔먼호 사건 등으로 조선민들은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이 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1860년대의 위정척사운동이란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인식으로 외국과의 통상은 곧, 매국이라고 여기는 분위기였습니다. 박규수, 오경석 등 초기 개화주의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집권층이 대원군 정권과는 연결되지 못하고, 개별적인 개화 주장을 해야 했습니다. 위정척사론은 외국과 통상을 했을 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화이사상에 기반을 두고 전개된 내용이긴 하지만, 이미 중국과 일본이 외세에 넘어간 상황에서 우리 상황을 잘 이해하고, 서양 침투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나열한 논리적인 반대였습니다. 하지만, 그 논리속에는 서양에 대한 두려움과 유교사상의 입장에서 본 서양인의 <짐승>같은 행위들에 대한 좁은 시선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럼 몇 가지 글을 한 번 볼까요?
1860년대 대표적인 위정척사 사상가 이항로의 화서집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위 내용에서 보면 1860년대 위정척사 사상이 <인수지별>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항로는 신미양요 후 세운 척화비에 대하여 열렬하게 지지한 유생입니다. 그는 서양의 물건을 사는 것은 <농산물>을 <공산품>과 교환하게 됨으로서 나라의 경제가 망하여 외국에 종속된다고 주장하면서,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을 최초로 꼬집여낸 성리학자입니다. 따라서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을 백성들에게 알려서, 서양의 물건을 사지 않고 서양이 통상을 요구하는 목적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신제가부터 해서 집안을 잘 단속하고, 유교윤리에 맞는 경제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유교 윤리에 따른 경제관은 농업중심의 생필품 교환과 검약 정신입니다. 따라서 유교윤리를 통해 서양을 차단하기를 주장하였고, 이 논리에 의하면 유교적 윤리를 모르는 서양과 일본은 <짐승>인 것이지요. 따라서 이 당시의 주장은 만약 외세가 통상을 계속 요구한다면,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강경한 <척화주전론>과도 연결됩니다. 이 척화주전론을 실행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척화비>를 세운 자가 바로 흥선대원군이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모든 유생들이 개화 정책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양반들 중에서는 개화사상을 인정하는 학자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유생들이 더욱 더 적극적으로 위정척사 운동을 벌였던 것이지요. 특히 위정척사를 전개했던 유생들은 이항로, 이만손, 최익현, 기정진 등 서울 근기쪽의 전통 성리학자들이 많았습니다. 3. 민씨 정권 집권 후 위정척사운동(1873-1880) 대원군이 축출되고 민씨 정권이 들어서자 위정척사를 전개하던 유생들은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민씨가 강화도 조약을 맺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이죠. 이제 유생들은 단순히 통상 거부 운동 차원을 떠나서 <개항>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논리적으로 펴기 시작합니다. 흥선대원군 때에는 쇄국정책이 국론이었기 때문에 유생들이 국가 정책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위정척사파들은 민씨와 개화파들에 대하여 <반정부투쟁>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의 위정척사운동은 흔히 <개항 반대 운동>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대표적인 예는 최익현의 5불가소입니다. 한번 봐야겠죠?
5불가소에서 최익현은 서양과 통상을 했을 경우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일본과의 통상도 안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정리했네요. 5가지 이유를 볼까요? 1. 개항 반대운동 : 일본의 강요에 의한 조약을 맺으면 일본의 탐욕에 노예가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2.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 : 개항 후 수공업품과 농산물 교환이 이루어지면 나라의 경제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18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이 우리에게 수출한 영국산 면제품과 조선쌀의 무역은 방곡령에도 불구하고 우리 농촌을 망치는 것이었고, 결국 동학 농민운동의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동학 운동 중에서도 이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을 지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 왜양일체론 : 70년대 개항 반대의 가장 큰 논리가 바로 이 <왜양일체론>입니다. 즉, 서양과 일본은 사실 같은 나쁜 놈들이라는 것이지요. 메이지 유신 이후 미국의 영향을 받은 일본은 서계 문제 등으로 우리에게 행패를 부렸고, 이들은 서양의 사교 및 짐승같은 윤리를 우리에게 강요할 것이니, 대원군의 쇄국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풍속의 교란 문제 : 일본인이 부녀자를 능욕하고, 윤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할 것이니 개항을 하면 인륜이 바닥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5. 인수지별론 : 이것은 일본 역시 프랑스, 미국과 같은 짐승들이니 짐승이 인간과 같이 살수 없다는 사람, 금수의 구별론입니다. 위정척사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입니다. 4. 조선책략 유입 후 위정척사 운동(1880~) 앞 포스트에서 설명했었죠? 조선책략은 두말 할 것 없이 중요한 우리 나라 개화의 지침서입니다. 이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민씨정권이 미국과 수교를 맺고, 별기군을 설치하는 등 적극적인 개화를 실시하자 위정척사운동은 <정권타도>를 외치며 폭력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특히 80년대 위정척사파들은 조선책략 태우기 운동을 하며 개화파들을 적대시합니다. 이제, 국가 안에 아군과 적군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지요. 특히 이만손이 올린 <영남만인소>는 위정척사 사상이 극에 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영남만인소 역시 논리적인 어조로 조선책략의 유입이 왜 문제인지를 조목조목 따지고 있습니다.
다음은 이만손에 동조한 조선의 최고 재상 홍재학의 상소입니다. 홍재학은 이 상소로 말미암아 고종의 눈에서 벗어나 나중에 죽게 됩니다.
위정척사운동이 격해지자 고종이 직접 조서를 내리는 등 개화정책 추진을 위해 유생층을 달래는 시도를 계속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한 임오군란으로 돌아오기도 하죠. 고종이 개화를 위해 유생들을 달래려고 한 시도들을 한번 볼까요?
5. 1894년 - 동학과 갑오개혁 이후의 위정척사운동 1890년대로 가면서 일본의 침략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자, 이제 위정척사운동은 통상 반대운동, 개항 반대운동, 조선책략 불태우기 운동을 넘어서게 됩니다. 이 때의 위정척사운동은 곧 <민족적인 항일 투쟁 운동>으로 점차 전환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이제 양반 유생들은 <일본과 서양은 금수가 아니라 만국공법상의 법에 의해 위법한 행위를 하는 상대국>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또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 일부 농민들도 위정척사에 흡수되었고, 그 결과 유인석, 신돌석 등의 평민의병장이 나올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도 마련됩니다. 즉, 1890년대 이후는 위정척사가 항일 의병 운동으로 전환되는 기점이며, 1910년 국권 피탈을 기점으로, 항일 의병 운동은 대일본 폭력 투쟁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이 부분은 구한말 의병운동 파트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6. 동도서기의 입장에서 위정척사를 전개한 이들 성리학 유생이라고 해서 모두 위정척사를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이 당시 위정척사의 입장이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 실행 내용에 있어 개화사상과 중간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주장도 한번 볼까요?
곽기략, 윤선학 등 일련의 유생들은 우리 것을 지키더라도, 서양의 유용한 것들을 꼭 버릴 필요는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성리학의 정신적 사상체계는 민족의 양식으로서 지켜나가고, 서양의 기술은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유교주의 국가를 만들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선 건국 당시 허영 일파의 실천적 성리학과 비슷합니다. 7. 위정척사운동의 한계점 위정척사운동은 서양이 통상, 개화를 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알고 대처하려고 하였습니다. 즉, 이 운동은 우리 국익을 위한 애국적인 성격을 가진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단순히 외세를 배격하여 우리 전통의 것을 지키자는 논의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외세의 침략 의도와 나쁜 점은 알았지만, 그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였죠. 당시 조선의 가장 큰 과제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주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였습니다. 위정척사운동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성리학적 전통질서와 봉건질서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임으로서 격변기의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또 반외세를 지향했으나, 지배 신분층인 입장으로 적극적인 반봉건 노력이 없었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즉, 농민들이 원하는 것은 신분제 폐지, 양성평등, 토지제도 및 조세제도 개혁 등이었으나 이들은 이러한 문제를 외면하였습니다. 따라서 위정척사운동은 적어도 1880년대까지는 양반 위주의 신분적 운동이라는 오명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정척사운동을 정치, 경제, 사회적인 면에서 분석해 볼까요? 정치적인 분야에서 이 운동은 조선왕조의 전제주의를 긍정합니다. 경제적인 분야에서 이 운동은 지주전호제를 긍정하고, 전통 유교질서의 경제관을 고수하였습니다. 사회적인 분야에서 이 운동은 신분제도를 옹호하고 성리학적 신분관을 그대로 적용하였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부분에서 위정척사운동은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운동입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빈체제에서 복고주의, 정통주의, 보수주의를 외치는 장면이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운동에서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다음 포스트에서는 위정척사운동과 개화세력의 대립이 극에 이르게 된 <임오군란>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반부, 1991 <글 내용중에 잘못된 내용, 오탈자가 있으면 댓글을 주세요 by histo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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