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못알고 있던 고대 사회에서의 식읍과 녹읍제도
1. 고대 사회에서 식읍이란 무엇인가? 식읍이란, 전쟁 등을 통하여 공이 있는 자에게 내린 토지를 말합니다. 설명하자면, 왕실의 성원, 대공신 등 아주 소수의 일부 공훈자들에게 특별 급여로 땅을 지급하는 것을 말하죠. 땅을 지급한 대신 왕실을 번병하여 지키고, 국왕에게 충성하라는 의무를 부여합니다. 즉, 식읍은 권리와 의무가 동시에 부여된 땅입니다. 식읍으로 받은 땅에서는 인민, 토지 등을 포괄적으로 지배할 수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광역 지배가 허용된 것이지요. 사실 식읍은 실제 땅을 내려주는 경우도 많았지만, 초기 국가시대에 소국의 족장들에게 원래 영토의 기득권을 허용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원래 소국 점유지에 대한 모든 권리를 양도한 것으로 보아도 이해가 가능합니다. 예로, 신라 진흥왕은 항복한 금관국의 국주 김무력에게 금관국 자체를 식읍으로 하사했습니다. 금관국은 망했지만, 금관국의 왕가는 자국을 다시 식읍으로 받아 예전과 같은 생활이 어느 정도 가능했을 것입니다. 단, 신라 왕실에 대한 충성을 담보로 한 것이죠. 또 고구려에서는 부분노와 같은 건국 공신, 고노자와 같은 신하에게 식읍을 하사했는데, 이 경우는 전투 공훈자에 대한 포상으로 식읍을 하사한 것입니다. 이들은 식읍을 자신의 국가처럼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고구려 왕실에 대한 충성을 대가로 합니다. 이러한 토지에 대한 인민지배는 국가가 아직 중앙집권화되지 못하고, 식읍에 대한 지배권이 약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식읍은 5-6c가 지나면서 국가가 식읍을 하사한 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아졌으며, 식읍주가 임의로 인민을 지배하는 것에 대한 통제도 강화됩니다. 이것은 삼국이 중앙집권화되면서 지방에까지 세력을 확장하는 시기와 일치하여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2. 고대 사회에서 녹읍이란 무엇인가? 녹읍은 5-6c세기 이후 국가가 중앙집권화 되는 시기에 식읍을 대체하면서 등장합니다. 6c 무렵 신라에서는 우경이 시작되어 농업생산력이 증가하였고, 국가는 관료제, 군현제를 정비하였습니다. 이제 신라 등 고대 국가들은 생산력 발달에 따른 각 읍락의 잉여 생산을 직접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6c 이후에는 식읍보다는 녹읍을 주는 경향이 강합니다. 녹읍은 국가가 일정 지역의 백성과 토지에 대한 지배층의 사적 기득권을 인정해주는 권리로 식읍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식읍이 소수 공신, 전공자에게 부여된 것에 비해 녹읍은 다수의 관리들에게 제공되었습니다. 또, 식읍이 백성, 토지에 대한 절대적 지배권을 갖는 것이라면, 녹읍은 국가가 인정한 땅에서 일정한 양의 조세만 수취할 수 있는 제도였습니다. 그리고 녹읍은 관리의 등급에 따라 차등있게 지급되었으므로, 일종의 연봉과 같은 개념이었다고 보면 됩니다. 녹읍과 같이 일정 지역의 토지에서 일정 비율의 세원만을 수취하는 권리를 흔히 <수조권>이라고 합니다. 즉, 녹읍은 식읍과 달리 <수조권>만 인정된 최초의 수조권제도였으며, 이것은 토지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강호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녹읍을 받은 관리들은 녹읍을 마치 식읍처럼 운영하려고 했습니다. 백성을 징발해 일을 시키고, 임의로 많은 공납을 받으려 했죠. 이러한 경우가 많아서 과거에는 녹읍은 수조권 제도가 아니라, 인민에 대한 완전한 소유권을 가진 제도라고 인식했었고, 교과서에서도 녹읍을 수조권 제도라고 볼 수도 있다는 애매한 입장을 취합니다. 국가는 이러한 녹읍의 식읍화 현상을 막기 위해 <좌우사록관>을 설치하여 녹읍에 대한 감시를 하였습니다. 3. 아예 녹읍을 폐지하겠다고 하며 등장한 관료전 통일 후 전제왕권을 확립한 신문왕은 아예 녹읍을 폐지하여 녹읍을 식읍처럼 부리는 관행을 아예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완전히 수조권에 입각한 <관료전> 제도를 시행합니다. 관료전 제도는 <좌우사록관>을 파견하여 녹읍을 감시하는 정도의 약한 통제가 아니라 아예 국가가 나서서 녹읍주의 직접 지배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전제왕권을 달성한 신문왕은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었고, 통일신라의 전성기인 7c에는 <관료전에 입각한 철저한 수조권 제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은 국가가 녹읍주에게 직접 매년 세조를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토지 통제 보수 귀족들의 반발을 가져옵니다. 이것은 능력별로 인재를 등용한다는 국학, 독서삼품과 제도 등에 대한 반발과 맞물려 점차 시행이 어려워집니다. 또, 관리에 대한 직접 세조 지급은 국가의 행정적인 부담이 너무 커서 경덕왕 때에는 다시 녹읍이 부활합니다. 보통 경덕왕 때 녹읍이 부활한 것을 관료전 제도의 실패이자, 왕권이 진골귀족권에 밀린 것으로 인식하는데, 그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나면, 녹읍이 부활한 것은 굳이 행정적 부담이 큰 관료전을 시행하여 관료들에게 일일이 세조를 지급하지 않아도 국가가 관료들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녹읍을 부활한 경덕왕 때에는 한화정책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우는 시기였고, 왕권이 약해지는 시기가 아니였습니다. 경덕왕이 녹읍을 부활한 것은 중국의 선진적인 토지제도를 배워 신라사회에 적용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경덕왕이 한화정책으로 중국에서 도입한 토지 정책은 바로 당나라의 <균전제>일 것입니다. 즉, 녹읍의 부활은 완전한 수조권적 형태로 국가가 토지제도를 운영해도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자, 이 제도를 시행함으로서 행정적 부담을 덜고 귀족들의 불만을 달래기 위한 방편이었을 것입니다. 4. 식읍제 방식의 변화 경덕왕 대에 새로운 녹읍의 등장으로 신라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근근히 행해져오던 식읍제도도 그 방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식읍제도 역시 인민, 토지를 완전히 장악하던 과거의 제도를 벗어나, 수조권적인 성격을 가지거나, 형식적인 성격으로 변화합니다. 식읍제는 원래 일정 지역을 지정하여 공훈자에게 주는 방식에서 벗어나, 일정한 봉호수를 정하여 그 봉호수를 사여하는 방식으로 전환됩니다. 즉 지역 하사에서 일정 호수를 지급하는 것으로 바뀐 것이지요. 김인문에게 식읍 300호를 내린다, 김유신에게 슥읍 500호를 내린다 등의 기록은 식읍에 지역에 해당하는 땅을 준 것이 아니라, 일정 마을 규모를 하사하여 그곳에서 인두세를 걷게 한 것을 의미합니다. 또 그 봉호라는 것도 실제로 그 마을을 하사한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주는 척만 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예로, 당나라 고종은 삼국통일의 공훈을 세운 김유신에게 식읍 2000호를 주고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여기서 김유신은 2000호를 직접 받은 것이 아니라(우리 땅인데, 당 황제가 준다는 자체가 말이 안됩니다.) 김유신의 업적과 작위를 고려하여 그만큼의 땅을 식읍으로 받을 정도가 된다는 것을 형식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이것이 식읍의 변화된 개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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