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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신

역사 크로스 퀴즈 9회 - 난이도 : 상 역사 크로스 퀴즈(난이도 : 상) 만약 한글이 보이지 않는다면, 상단의 보기(v) - 인코딩(D)로 들어가서 자동선택 - 한국어(또는 유니코드)로 바꿔주시기 바랍니다. This interactive crossword puzzle requires JavaScript and a reasonably recent web browser, such as Internet Explorer 5.5 or later, Netscape 7, Mozilla, Firefox, or Safari. If you have disabled web page scripting, please re-enable it and refresh the page. If this web page is saved to your computer, you m.. 더보기
통일신라의 정치사에 대한 개관 통일신라의 정치사에 대한 개관 통일신라에 대한 구체적인 포스팅을 하기 전에 통일신라시대에 대한 개관을 해보겠습니다. 1. 전제왕권이 성립하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면서 겪은 가장 큰 변화는 국가 운영 체제와 영토의 팽창입니다. 삼국통일은 곧 영역의 확대 뿐 아니라 인구,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왔습니다. 또 통일로 인하여 유민 세력에 대한 처우 개선, 군사력의 확보, 정치적 안정의 추구, 반신라세력에 대한 탄압 등 국가적 과제가 많았습니다. 즉, 국가적으로 팽창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과제들을 해결할 정치적 역량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라의 왕권은 이러한 새 시대의 과업을 를 통해 효율적으로 해결하였습니다.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충신의 왕으로서 새 시대를 위한 체제 개선을 .. 더보기
신라의 지배층 - 성골과 진골이란? 신라 지배층 - 진골과 성골 1. 진골이란? 신라가 중앙집권화되는 과정에서 족장세력으로 영역을 가지고 있던 세력을 체제에 끌어들이면서 이라는 새로운 계급이 성립하였습니다. 이들 은 신라의 지배집단으로서의 우월성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라 사회가 초기의 소국을 벗어나 체제 정비를 하는 지증-법흥-진흥왕기를 거치면서, 지배층의 변화를 가져오게 됩니다. 가야계 귀족들이 신라에 유입되었고, 진흥왕의 영토확장으로 북방계 귀족들도 신라체제에 흡수됩니다. 그리고, 삼국통일기에 이르면, 족의 증가로 인하여 골족들의 특별한 표지가 필요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시기에 내물 마립간계 후손들은 자신들의 혈통을 다른 지배집단과 구분하고,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를 격상시킬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즉, 차별화된 지배.. 더보기
96각간의 난과 선덕왕의 즉위 사료 96각간의 난과 선덕왕의 즉위 사료 [혜공왕(惠恭王) 4년] 7월 3일에 대공(大恭) 각간(角干)의 적도(賊徒)가 일어나자 왕도(王都) 및 5도(道)·주군(州郡)의 도합 96각간들이 서로 싸우게 되어 크게 어지러워졌다. 대공 각간의 집이 망하매 그 집에 있던 보물과 비단 등 가재(家財)를 왕궁(王宮)으로 옮겼다.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이 불에 탔으므로 역당(逆黨)의 보물과 곡식 중 사량리(沙梁里)·모량리(牟梁里) 등에 있던 것을 또한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 난리는 석달이 지나서야 그쳤다. (《三國遺事》 2, 紀異 2, 惠恭王) [혜공왕 6년] 가을 8월에 대아찬(大阿瑗) 김융(金融)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복주(伏誅)되었다. …… 11년 여름 6월에 이찬(伊瑗) 김은거(金隱居)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복주되.. 더보기
원성왕의 즉위와 원성왕계의 시작 원성왕의 즉위 원성왕(元聖王)이 즉위하니 휘는 경신(敬信)으로 내물왕의 12세손이었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이며 비는 김씨 신술(神述) 각간의 딸이다. 처음에 혜공왕 말년에 반신(叛臣)들이 발호할 때 선덕(宣德)이 상대등(上大等)으로 있으면서 임금 측근의 나쁜 무리들을 제거하자고 먼저 부르짖자 경신이 참여하여 난을 평정한 공이 있었으므로 선덕이 즉위함에 이르러 그는 곧 상대등이 되었다. 선덕이 돌아가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군신(群臣)이 후사(後嗣)를 의논하여 왕의 족자(族子)인 주원(周元)을 세우려고 하였다. 주원의 집은 서울 북쪽 20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마침 큰 비가 와서 알천(閼川)의 물이 불어 주원이 건너오지 못하니 어떤 이가 말하되 "사람이 임금의 큰 자리에 즉위한다는 것은 진실로.. 더보기
96각간의 난, 김지정의 난 96 각간의 난과 김지정의 난 혜공왕(惠恭王) 4년 7월 3일에 대공(大恭) 각간(角干)의 적도(賊徒)가 일어나자 왕도(王都) 및 5도(道)·주군(州郡)의 도합 96각간들이 서로 싸우게 되어 크게 어지러워졌다. 대공 각간의 집이 망하매 그 집에 있던 보물과 비단 등 가재(家財)를 왕궁(王宮)으로 옮겼다. 신성(新城)의 장창(長倉)이 불에 탔으므로 역당(逆黨)의 보물과 곡식 중 사량리(沙梁里)·모량리(牟梁里) 등에 있던 것을 또한 왕궁으로 실어 날랐다. 난리는 석달이 지나서야 그쳤다. - 삼국유사 기이편 2, 혜공왕 - [혜공왕 6년] 가을 8월에 대아찬(大阿瑗) 김융(金融)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복주(伏誅)되었다. …… 11년 여름 6월에 이찬(伊瑗) 김은거(金隱居)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복주되었으며, 가을.. 더보기
김헌창의 난 - 신라의 골품적 질서가 동요하기 시작하다 김헌창의 난 "신라 하대의 족적 변동, 사회적 변화, 골품제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회 내부의 반란' 신라 하대에 접어들면서 귀족의 유대의식의 약화로 골품제도가 붕괴되어가자, 진골 귀족세력의 분열이 극심하였습니다. 그러한 중대에서 하대로의 변동은 왕권의 전제주의적 경향에 대한 귀족들의 반항으로 초래되었습니다. 그 결과 하대의 신라는 귀족적이고 연립적인 방향을 걷게 되어 155년간 20명의 왕이 교체되지요. 김헌창의 난은 신라 하대의 모순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상대등 김양상이 선덕왕에 오른 이후 이제 골품에 얽매이지 않고, 진골 내부에서는 누구나 실력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선덕왕 대에 상대등이었던 김경신이 다음 왕에 오르며 원성왕계를 형성한 것이 그 예이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