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24건

  1. 2010.06.01 러시아의 역사 1-11
  2. 2010.05.16 역사퀴즈 - 근대 사회생활사(5.16) (11)
  3. 2007.09.06 (근현대사 19) 독립협회 이야기 서론 - 아관파천과 이권침탈 (1)
  4. 2007.08.30 (근현대사 18장) 을미개혁과 개혁의 종말 (3)
  5. 2007.08.23 (근현대사 17장) 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의 내용과 의의 (1)
  6. 2007.08.14 (근현대사 15장) 갑오개혁(1894)의 추진배경 (2)
  7. 2007.07.28 (근현대사 10장) 청과 일본이 조선의 경제권을 놓고 다양한 조약을 맺다. (7)
  8. 2007.07.17 1885년 조선의 중립화론을 주장하다. (3)
  9. 2007.05.20 개화기 기획 자료 : 흥선대원군의 정책과 역사적 평가 (17)
  10. 2007.03.12 10-11세기 동유럽의 형성과 러시아사 (1)
  11. 2007.01.14 러시아사 11 - 3월혁명, 11월혁명, 카데츠, 볼셰비키, 레닌의 집권
  12. 2007.01.14 러시아사 10 - 러시아 산업혁명 (1)
  13. 2007.01.14 러시아사 9 - 알렉산드르 2세
  14. 2007.01.14 러시아사 8 - 니콜라이 1세
  15. 2007.01.14 러시아사 7 - 푸가초프의 대반란
  16. 2007.01.14 러시아사 6 - 에카테리나 2세
  17. 2007.01.14 러시아사 5 - 표트르 대제의 개혁
  18. 2007.01.14 러시아사 4 - 농노제의 모순과 스테판 라진의 난
  19. 2007.01.14 러시아사 3 - 로마노프 왕조의 등장 편
  20. 2007.01.14 러시아사 2 - 몽골의 침입과 모스크바 공국의 성장 편
  21. 2007.01.14 러시아사 1 - 그들은 어디에서 기원하였는가?
  22. 2007.01.14 러시아 현대사(세계 1차대전 이후~)
  23. 2007.01.14 러시아 역사 연대표(표트르 대제 이후의 역사 ~ 현대사)
  24. 2007.01.14 러시아 역사 연대표(고대 ~ 이반 3세까지의 역사 연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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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러시아

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5. 16. 일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근대 사회문화사> 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1. 다음 노래를 듣고, 지문을 본 후 물음에 답하세요~

 

위 노래는 한기주와 함께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였던 토월회의 맴버,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이다. 이 노래는 본격적인 대중가요로서 일반인의 인기를 끈 최초의 노래라는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이바노비치의 __________________에 우리말 가사를 붙여 부른 것으로 제대로 된 대중가요는 아니였다. 윤심덕은 이 음반 녹음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유부남이었던 애인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한 신여성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 이후,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는 1927년 발표된 <낙화유수>이다.

 

1. 위 빈칸에 들어갈 노래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① 노들강변
② 황성의 적
③ 술이냐 눈물이냐 한숨이냐
④ 도나우강의 잔물결
⑤ 빈대떡 신사

 

2.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어린이는 <인내천의 천사>라고 보아야 한다.

죄없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한울나라는 우리 어린이의 나라이다.

1923년 어린이 창간, 1926년 별나라 창간. 천도교 소년회를 바탕으로 오월회 설립

 

2. 위 신문은 동아일보에 실린 <어린이> 창간호  광고입니다. 위 신문과 지문으로 미루어 천도교 인물로서 가장 내용과 연관된 분은 누구일까요?
① 최제우                                ② 손병회                                ③ 최시형
④ 방정환                                ⑤ 최남선

 

3.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1949년. 이승만 정부는 정당 정치를 포기하고, 민중 우민화 교육과 반공 교육을 통해 1인 집권 체제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이 때 등장한 교육 방침이 바로 <일민주의> 교육이었다.

<일민주의>란, 국민의 뜻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국가 방침과 어긋나는 사상을 <좌파 사상>으로 몰아 교육분야의 <좌파 교사>들을 척결하고, 학생들의 비판적인 의견을 모두 막아 버리는 교육 방침이었다

그 정책은, 6.25 전쟁을 전후한 사회적 분위기와 맞아 떨어졌고, 한국 사회에서는 창의적 교육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졌으며, 국가가 주도하는 <주입식 교육>만이 유일한 교육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일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1949년 1월. 전국적으로 ____________을 결성하였다. 이것은 18세 이상 모든 대한민국 남녀를 모두 <국민회>에 가입시킨 후, 반공 교육과 국가 교육을 시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교장이 이 단체의 단장을 맡고, 학생이 학도부장과 대대장을 맡아서 운영되었는데, _____________ 단체의 총재는 대통령, 부총재는 국무총리 등이 맡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단체는 <공산주의를 쓸어 버리자>는 명분으로, 학생들을 국가 홍보 수단으로 이용하였으며, 단일화된 주입식 교육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3. 이승만 정부에서 살았던 분들은 아실만한 문제입니다. 위 지문과 관련된 빈칸의 단체는 무엇일까요?
① 조국청년단                              ② 학도호국단                         ③ 새나라운동본부
④ 이북척결단                              ⑤ 자유국가단                         ⑥ 백골단

 

4. 다음 사진을  잘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위 사진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호텔인 손탁 호텔의 모습과, 1907년의 광고 전단지이다.

1885년, ________ 공사 베베르를 따라 온 손탁이 아관파천 당시 고종에게 땅을 받아 지은 호텔이다. 이 호텔은 개화파들이 주로 이용하면서 서양 문물을 소개받고, 외국인들과 친분을 맺던 곳이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으로 _________ 공사의 세력이 위축되자 프랑스 사람의 손으로 호텔이 넘어갔다. 그 후, 신교육 사업을 위해 이화학당이 이 호텔을 여학생 기숙사로 이용하였는데, 일제 강점기 때 아예 철거되었다.

 

4. 위 내용의 빈 칸에 들어갈 나라는 어디일까요?
① 영국                    ② 미국                       ③ 독일
④ 일본                    ⑤ 러시아                    ⑥ 네덜란드

 

5. 다음 내용을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왼쪽 사진의 인물은 <나운규>이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부당하게 탄압받으면서 한국 문화예술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일제시대 초반 문화 예술인으로서 모든 사회 활동에 가담했으며,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의 인사들과도 친분이 있었고, 3.1운동 등 굵직한 현장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1926년, 감독과 각본, 주연을 도맡아 관객 110만명의 기념비적인 영화 ___________을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이전의 고대설화, 전설, 판소리 작품 등을 인용하던 것에서 벗어나 조선 시대의 현실적 인물들을 등장시킨 한국 영화사의 본격적인 작품이다.

지주와 소작인, 일제의 하수인과 지식인, 부자 상인과 빈곤층, 희생당하는 여성 등 조선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민족의 문제와 민중의 문제를 동시에 한편의 영화로 다루었던 것이다.

 

5. 위 빈칸에 들어갈 영화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① 혈의누                    ② 장한몽            ③ 의리적 구토
④ 월하의 맹서            ⑤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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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19) 독립협회 이야기 서론 - 아관파천과 이권침탈

1. 아관파천이 이루어지다.

지금까지 1895년의 개혁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을미개혁은 일본의 간섭으로 진행되었고, 우리 정부는 이 간섭을 벗어나기 위해 <일본의 대항마>로서 러시아를 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정책으로 친러파로 규정된 민비 왕후가 죽게되고, 고종은 일본의 행태을 점점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1896년 고종은 왕궁을 버리고 엄상궁의 호위아래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일본이 무서웠기 때문이죠. 이 사건을 러시아의 한자 <아>와 공사관의 <관>을 따서 아관파천이라고 합니다.

아관파천으로 조선은 걷잡을 수 없는 주권침해를 당하게 됩니다. 한 나라의 국왕이 일본을 무서워해 러시아에 의탁함으로서 조선은 주변 강한 나라들(열강)에게 나라의 중요한 권리들을 빼앗기게 되었죠. 흔히 말하는 <열강의 이권침탈>이 시작된 것입니다.

열강의 이권침탈은 <러시아>로부터 비롯됩니다. 러시아는 조선의 철도, 광산, 해안 등을 빼앗기 위해 청, 일본, 서양 등과 다양한 조약을 맺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고종이 열심히 러시아를 위해 도장을 찍어야 했죠.

일단 러시아는 일본과 조약을 맺습니다. 그 조약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일본군이 조선과 요동 남부에 머물수 있다. 이에 일본은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우위를 인정한다.
  2. 조선의 전신선에 대한 권리는 러시아가 갖는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권리가 있다.

또, 러시아는 청과도 개별적 조약을 맺고 조선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습니다.

1. 청과 러시아는 일본의 도발을 막기 위해 군사적 협력을 아끼지 않는다.
   2. 청은 러시아에 동청철도부설권을 주는 대신, 만주와 요동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는다.

이러한 각국과의 조약으로 러시아는 조선에서 우월한 위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고종에게 <안전을 보장>한다며 여러 가지 조약을 체결하도록 합니다. 요점만 간단히 볼까요?

1. 러시아는 조선 국왕의 안전을 보장한다. 조선의 안녕을 위해 러시아는 군사고문과 재정고문을 파견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돕는다.(재정고문으로 알렉시에프가 오게 되어 감놔라 배놔라를 시작합니다._
   2. 조선과 러시아 사이의 전신선을 연결하며, 그 권리는 러시아에게 있다.

2. 기회균등의 원리를 주장하기 시작하다.

조선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고, 러시아를 비롯하여 청, 일본 등이 조선의 이권을 빼앗아가면서 조선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맙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전통적인 제국주의 국가들도 조선의 이권을 빼앗아가기 시작하죠.

일본은 석탄 창고를 만들어 그곳을 군사기지로 활용하였습니다. 러시아는 목포를 비롯한 항구들을 차지하고 해안가 토지를 매매하기 시작합니다. 프랑스와 독일은 광산에서 은을 채굴하기 시작합니다. 조선은 간, 심장, 폐를 다 떼어주고 만신창이가 되기 시작하였죠.

특히 우리 이권을 빼앗는데 앞장선 나라는 고종을 납치(?)한 러시아와 갑오-을미개혁을 주도했던 일본이었습니다. 러시아가 고종을 이용하여 정치적 이권을 빼앗아갔다면, 일본은 철도와 광산권을 빼앗아가는데 주력합니다.

일본이 철도 부설권을 원했던 이유는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상품을 탈취하고, 대륙으로 군을 수송하여 앞으로 있을 동아시아 군사력 다툼에서 우위를 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청일전쟁으로 승리를 맛보았기 때문에 군사력에서는 자신이 있었죠. 따라서 일본이 조선에 철도를 부설할 수 있는 권리를 원한 것은 자국의 제국주의체제를 완성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기본체제가 <식민지에서 원료를 수입하고, 다시 식민지에 제품을 비싸게 파는> 방식이었고, 그 방식은 철도 등 운송체계와 군 수송체계가 원할해야 가능했으니까요.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돈을 주고 샀으며, 훗날 러일전쟁으로 경의철도 부설권도 러시아로부터 빼앗아옵니다.

한편, 러시아나 일본보다 대 조선 정책의 후발주자인 미국은 영국, 프랑스 등과 함께 <기회균등의 원리>를 주장합니다. <기회균등의 원리>란, 서구열강들이 중국(청)의 이권을 빼앗아갈 때 논의하여 협의한 정책이었습니다. 쉽게말하면, 중국이라는 큰 빵이 있는데 누구 한명이 그 큰 빵을 독식하면 싸움이 나기 때문에 빵을 똑같이 잘라 나눠먹어야 한다는 논리죠. 이 논리는 아시아에 비교적 영향력이 적은 미국이 주도하여 힘으로 결정한 사항입니다. 상대적으로 러시아, 일본 등 아시아계 제국주의 국가에게 열세인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이 이 주장을 함으로서 조선은 러시아, 일본 + 서양, 구미 세력에게 골고루 이권을 침탈당했던 것입니다.

이 이권 침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우리 농업, 수산업, 광업 등의 기초 산업이 망가지고, 외국 자본에 넘어가면서 민족 자본이 형성되지 못하였다는 점입니다. 민족자본이 없다면, 국내 산업은 외국의 차관에 의해 넘어가게 되고 결국 경제적 식민지 상태가 올 수밖에 없다는 점이죠.

따라서 이러한 열강의 이권침탈에 분개하여 민족 자본과 민족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형성한 단체가 독립협회였습니다. 따라서 독립협회의 가장 큰 주장은 아관파천에 의해 자행된 만행에 대한 반발입니다. 독립협회 초기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돌아와 자주적 국권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2. 러시아 등의 열강은 이권침탈을 멈추어야 한다.
   3. 서양에 뒤지지 않는 의회와 관제를 마련하여 그들이 넘볼 수 없다록 해야 한다.

자, 그럼 서론은 이 정도로 하고 독립협회가 어떤 단체인지 본격적으로 들어가봅시다. 다음 장으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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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18장) 을미개혁과 개혁의 종말

1. 을미개혁의 배경

을미개혁을 이야기 하려면 1894년의 정세부터 다시 짚어야 합니다. 다시 한번 1894년의 정세를 이야기해 볼까요?

1894년 청일전쟁으로 1,2차 개혁을 주도하려했던 일본의 의도가 꺾이게 되었습니다. 전쟁중에는 정신이 없어서 조선의 내정개혁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지 못하였고, 전쟁 후에는 삼국간섭에 의해 러시아 세력에 밀리게 되었죠. 또 조선 내부에서도 일본이 너무한다라는 의견이 대두하였고, 그 결과 2차 개혁의 핵심인물로서 친일적인 성향을 가진 박영효가 쿠테타 혐의로 축출되었습니다.

삼국간섭 이후, 일본보다 더 강한 나라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조선 정부는 일본의 라이벌 <러시아>의 도움을 얻어 일본을 몰아낼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조선의 왕비 민씨는 고종을 설득하여 러시아에 접근하는 것이 조선의 안정에 도움이 될 것임을 상기시켰습니다. 일본이 갑오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경복궁을 점령한 사실에 민씨 정권은 한을 품은 것이지요.

조선은 러시아에 접근하기 위해 박영효 등 친일파 개혁 세력을 몰아내고 친러파로 구성된 정부를 구상합니다. 그 핵심인물이 <이완용, 이범진>이었습니다. 박영효, 서광범, 김옥균 등은 친일파라고 해도 어느 정도 조선의 개혁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소신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완용 등의 인물은 시류에 따라 움직였던 것 같습니다. 친러파, 친미파, 친일파를 두루 섭렵했으니까요. (뒷장에 나오는 독립협회 초기의 핵심간부가 이완용이라는 사실도 아시나요?)

조선이 러시아와 친해지고, 민씨가 일본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하자 일본은 낭인들과 친일 군부를 동원하여 민씨 왕후를 살해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을미사변이라고 합니다. 을미 사변 이후, 일본은 이제 일본의 의도대로 조선의 3차 개혁을 실시하는데 이 개혁이 바로 을미개혁이죠.

2. 을미개혁의 내용

을미개혁은 1,2차 갑오개혁의 연장입니다. 단, 1차 갑오개혁이 대원군 세력과 동도서기 계열의 어윤중이 주도하였다면, 2차 개혁은 김홍집 내각의 박영효 등 친일적 성향의 개혁파가 주도하였습니다. 3차 개혁은 일본의 간섭이 가장 심했던 개혁이었습니다. 그러나, 1, 2, 3차 개혁은 모두 일관적인 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일관적인 틀은 일본이 개혁에 적극 간섭하려고 하였지만, 각각의 상황에 의해 원한 바를 모두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이고, 조선의 관료들이 주도하여 근대화를 추구하였지만 근대화의 기본 틀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방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이 요구한 개혁안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1차 개혁이 수백개의 개혁안을 쏟아내어 정신없는 개혁이었다면, 2차 개혁은 1차 개혁을 조목조목 정리하여 홍범 14조를 발표하였고, 중앙, 지방, 사법, 교육 관제를 정비한 개혁이었습니다.

그럼 3차 개혁은? 관제를 넘어서서 서양식 제도를 받아들이는 개혁이었습니다. 일단, 개혁의 첫 번째 내용은 태양력의 사용입니다. 이 개혁이 추진된 1895년 이전에는 음력으로, 이 개혁 이후의 연도는 양력으로 표시합니다. 따라서 이 태양력 사용을 놓고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면서 근대적 연대표기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냥 연표 표기가 바뀌었다는 것 뿐 역사적으로 태양력 사용이 아주 큰 의미가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또, 갑신정변 때 김옥균이 난리를 쳐서 사라졌던 우정국(우체국)이 부활되어 우편사무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또, 천연두 예방접종인 종두법을 실시하기로 하였고,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때 사용된 연호는 <건양>이었는데, 훗날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광무>라는 연호로 바꾸게 됩니다.

3. 단발령을 내리다.

을미개혁에서 실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개혁내용은 <단발령>입니다. 머리를 깎으라는 내용이죠. 단발령이 사회에 미친 파장은 어머어마한 것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주신 머리를 깍는다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도 일본놈들이 바꾼 법 때문에 실행해야 한다>는 것은 양반들에게 큰 치욕이었습니다.

사극을 보면 귀하신 마님들은 머리를 돌돌 말아 올리죠? 가채라고 하는 그 엄청난 무게의 말아올린 머리는 양반집 규수의 상징이었습니다. 야사에 보면, 그 머리무게를 못이기면서도 품위 때문에 그 머리를 유지하다가 목이 꺽여 돌아가신 할마마마 이야기도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머리는 농사짓고 장사해야할 일반 아낙의 머리는 아니죠. 양반댁 규수들도 과연 그 머리를 깎지 않고 평생 유지했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양반집 남자들은 상투를 틀죠. 조상님이 주신 머리를 깎지 않는다고 하여 머리를 묶었다고 하지만, 에어콘도 없는 여름날 어떻게 보냈을까요? 실제, 양반들도 잔머리를 많이 썼다고 합니다. 주변머리만 남기고, 가운데 머리를 깎아 버리면 시원하겠죠? 그런 다음에 주변 머리를 깍아 버린 가운데 머리로 올려 묶습니다. 이렇게 상투를 틀면 머리를 깎은 티도 나지 않고, 조금은 시원한 맛을 느끼면서 체통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단, 티가 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편법을 쓰지 않은 모범적인(?) 양반들이 더 많았구요. 하지만, 득실대는 이는 알아서 처리해야겠죠.

단발령이 중요한 이유는 <신체는 부모가 주셨고, 부모가 주신 몸을 훼손할 수 없다>는 양반들의 명분을 자극했다는 점입니다. 최익현은 상소를 올리고, <머리를 베어도 머리카락을 벨 순 없다>고 단발을 거부하였고, 성균관 학생들을 비롯한 생원, 진사 등 양반 유생들은 <머리를 치기 전에 일본을 쳐 없애자는> 의병 운동을 시작합니다. 이 의병운동은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과 을미개혁(단발령)으로 일어난 을미년 3종 세트인 을미 의병입니다.

을미의병 자체가 단발령 같은 양반들의 문데로 일어났기 때문에 이 당시 의병은 <양반중심>의 의병이었습니다. 의병장도 유인석, 이소응 등 양반출신이었죠. 실제, 농민들은 단발령 같은 것으로 의병을 일으킬 이유는 없었습니다. 농민들은 일본 자체가 싫은 것이고, 그 이유는 일본이 쌀 등 곡물을 강탈하기 때문이지 머리카락 때문은 아니였거든요.

4. 개혁 3종 세트의 공통된 결과

갑오년 1차 개혁부터 을미년 3차개혁까지 3번의 개혁은 <왕권을 약화>시키는 방향에서 전개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국왕을 제외한 모두가 왕권 약화의 필요성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침략을 위해 조선의 국왕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왕따를 당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특히 경제와 군사적인 면에서 고종의 힘을 축소하려고 하였습니다. 개혁파 신료들도 이 점에 공감하였습니다. 당시의 근대화란,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입헌군주제>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입헌이라는 말에서 왕도 헌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군주가 법을 지킨다는 것은 그 권한이 <의회중심>으로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선의 근대화 개혁 자체가 국왕권을 제한하고, 의회권을 강화하는 <내각제>를 지향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개혁 자체에서 조선의 국왕은 제외되었습니다. 1차 개혁은 군국기무처에서, 2차 개혁 이후는 김홍집 내각에서 개혁을 주도하였죠. 이것은 서구 근대사회의 유물은 관료제를 표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서구란, 서양에 의해 개화된 일본 관료제 모델을 말합니다.

이 개혁의 핵심은 국왕권이 약화되면서 <시민사회>를 지향하려는 움직임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서구에서 18세기 시민혁명 이래 계속된 <부르조아 또는 젠트리 위주의 자본주의>를 조선 개혁가들이 꿈꾸었던 것이죠. 대표적인 부르조아 개혁이 <갑신정변>입니다. 김옥균은 소수 엘리트 중심의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고, 국민들은 계몽의 대상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프랑스나 영국이 아니였죠.

갑오개혁 역시 부르조아적 개혁을 표방하였습니다. 조세 금납화와 일원화는 상업 자본주의를, 신분제 폐지와 과거제 폐지는 근대적 능력위주의 관료제를 표방하는 것이었죠. 단, 일본의 군사적 의도가 개입되어 군제개혁은 미흡하였습니다.

갑오개혁이 생각한 부르조아 개혁의 핵심은 <지주계층을 토지 자본가로 육성>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개혁이란,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핵심 계층이 필요한데, 그 계층을 토지를 가진 지주로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에서는 <경자유전>의 원칙에 입각하여 <실제 농사를 짓는 사람이 토지를 소유해야한다>는 원리를 무시합니다. 토지는 자본을 가진 <지주>의 것이며, 따라서 갑오개혁에서는 동학에서 요구한 토지개혁을 빠져있습니다. 포함된 것은 부세 개혁정도이죠.

갑오개혁은 영국식 자유무역체제 도입, 조세제도 정비, 신분제도 철폐, 지주제도의 발전 등을 통한 체제 개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왕권의 약화를 기반으로 한 것이죠.

5. 근대화 개혁의 한계점

갑오년, 을미년의 개혁은 3가지 측면에서 큰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그 개혁이 일본에게 유리했다는 점입니다. 일단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실시한 1차 개혁 이래 일본의 입김이 계속 작용하였고, 독자적인 개혁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했다는 점입니다. 이 개혁의 내용 자체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정치, 경제, 사회적 여건을 조성하기에 딱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이 개혁이 지주에게 유리했다는 점입니다. 개혁의 기본 방향이 농민층보다 지주층을 옹호하고, 지주층의 발전을 통한 근대적 자본주의 확립에 중점을 주었습니다. 농민이 요구한 토지개혁은 싹~ 사라지고, 대부분의 개혁 내용이 국가체제, 사회체제를 변화시키기 위한 개혁이었죠. 동학 등 일련의 사태 속에서 농민들이 쟁취한 신분제 폐지 등의 개혁의 내용도 결국 근대화를 위한 필연적 요소였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 문제점은 이 개혁에 대해 국민적 지지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이 개혁에 대해 일본의 불순한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던가, 개혁의 내용이 실제 국민들의 이해관계에 절실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의문이 많았습니다. 물론, 신분제 폐지 하나만으로도 좋아할 백성들이 있었지만, 실제 양반-농민간, 지주-전호간에는 신분제 폐지에 따른 신분 변화가 크지 않았습니다. 신분상 평등하지만, 소작농이 양반지주와 겸상을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농민들이 혁명으로 이룬 개혁이 아니라, 지배층의 자의적인 개혁안이기 때문에 국민 대다수에게 절실히 와 닿지 못한 것입니다.

네 번째  문제점은 군제개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서양의 근대화를 모델로 했기 때문에 서양식 근대화의 핵심인 관료제도, 상비군의 정비가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군대의 개혁이 소홀했습니다. 그 이유는 일본이 간섭한 개혁인 만큼, 우리 국방력의 강화가 일본의 이해관계와 반비례했기 때문입니다. 갑오, 을미년의 개혁으로 조선의 군대는 오히려 친위대 수준 정도로 축소되었습니다. 조선의 군제 개혁은 훗날 대한제국의 광무개혁에서 대대적으로 개편됩니다.

갑오개혁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개혁이 지속되지 않고, 미완의 상태로 중단되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개혁도 법하나 만들고, 조칙 몇 개 내리고 끝나지 않습니다. 수년, 수십년을 계속해서 보완하고, 수정하고, 고쳐가야 합니다. 그러나, 을미개혁은 을미사변으로 민비왕후가 죽은 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겨 일본을 피해버림으로서 중단되었습니다.

즉, 수백개의 법을 만들어 놓고, 국왕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1년 몇 개월 동안 법령과 몇가지 세부사항만을 남긴채 종료되어 버렸습니다.

과거제는 폐지되었으나, 과거를 대신할 근대식 학제는 학교 몇 개 만들고 사범학교 만드는 선에서 끝났습니다. 조세의 금납화가 되었으나, 세밀한 조세 항목은 미흡했습니다. 군제개혁은 흐지부지하고 을미의병으로 국가 치안은 어수선했습니다. 신분제는 폐지되었으나, 양반이 평민들을 하대하지 못할 강력한 제재는 없었습니다. 후속 조치가 없었다는 것... 당시 개혁의 가장 큰 문제점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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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의 내용과 의의

1. 2차 갑오개혁의 배경(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은 1차 갑오개혁과 내용상의 큰 차이점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2차 갑오개혁은 그 추진 세력이 달랐습니다.

1차 갑오개혁을 주도한 어윤중 등 동도서기 계열은 개화파의 성격과 보수파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1894년 7월부터 추진한 개혁은 그 개혁법안만 200개가 넘습니다. 200개가 넘는 개혁안을 발표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성급한 개화라는 것을 반증합니다. 200개의 법 이름만 외우기에도 벅찰 것 같네요.

구체적인 개혁내용은 신분제 폐지, 조세제도 개혁, 과거제 폐지 등등 근대화를 위한 핵심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개혁안에 대한 홍보를 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었고, 1984년의 7월엔 이미 동학농민운동이래 농민 자치기구인 집강소에서 남부 3도의 행정을 관할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1894년 9월이 넘어가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일본의 개혁 강요로 인하여 2차 농민전쟁이 기포하였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졌습니다. 일본은 1894년 11월 농민군 및 청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이제 1차 개혁을 주도한 흥선대원군 및 동도서기 계열, 조선 보수 관료 등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죠. 이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의 개혁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의 개혁이 바로 2차 갑오개혁입니다.

일단 일본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고문관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개혁에 감놔라, 배놔라... 시비걸기 시작합니다. 1차 개혁의 중심세력인 어윤중 등 동도서기 계열을 밀어내고 비교적 친일성향의 개혁파들과 함께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때 흥선대원군은 물러나게 되었고, 1차 개혁의 중심기구인 군국기무처도 폐지하게 됩니다. 일본의 목적은 청나라 세력을 확실히 제거한 뒤,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2차 개혁은 1차 개혁과 내용상 차이는 없지만, 일본의 침투에 용이한 조항과 조선 국왕권이 더욱 약화되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2.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다.

일본의 개혁방침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죠. 일본은 러시아를 막기위해 연합세력을 구축한 영국의 식민지 모델 방식을 벤치마킹하였습니다. 영국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건설을 위해 막대한 돈을 이집트에 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수에즈 운하 건설이 늦어지고 이집트 스스로 그 차관을 지불할 능력이 없어지자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삼았습니다.

보호국이란, 차관(빚)을 진 나라가 돈을 갚을 능력이 없을 경우 돈을 빌려준 나라(영국)이 그 빚을 받기 위해 해당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경제적 제재를 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이집트 같은 경우 영국에 막대한 차관이 있기 때문에 돈을 갚을 때까지 제 3국이 이집트에 불평등한 경제제재를 가할 수 없습니다. 영국이 이집트를 보호(?)해주면서 이집트의 모든 피와 살을 뜯어먹는 형식이지요. 일본이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에 가하려고 했던 방식이 바로 이 <보호국>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2차 개혁에서 일본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해주기 위한 법령>을 만들고, 일본의 고문관들을 파견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선결조건으로 일본과 친한 박영효, 김홍집 등의 친일 내각을 수립하려고 했죠. 당시 개화파인 김홍집 등은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나갔던 적이 있어 일본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선진화되는 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들을 이용하는 것이 조선의 개화와 동시에 일본의 침략을 원할하게 하는 것임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은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의 성장을 두려워한 <러시아의 간섭> 때문이었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청이 한반도에서 물러나자 러시아는 긴장하였습니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 등과 함께 <삼국간섭>을 하였습니다. 3나라는 일본에게 청에게 강탈한 요동반도를 다시 돌려주고, 대만 땅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였죠.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마관조약, 하관조약)을 통해 대륙진출을 시도하던 일본은 러시아의 간섭으로 청일전쟁에서 빼앗은 땅을 다시 잃게 됩니다.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에 신경쓸 여력이 없어지면서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은 결국 1894-1895년에 실현되지 못하고, 훗날로 넘어가게 됩니다. 삼국간섭이후 조선의 개혁은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가 주도하게 되죠. 2차, 3차 개혁을 주도한 것은 1,2,3차 김홍집 내각(김홍집, 박영효 등)이었습니다.

2. 홍범 14조를 발표하다.

2차 갑오개혁 때 발표한 홍범 14조는 1차 갑오개혁의 내용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발표한 것은 2차 개혁 때였지요. 홍범 14조로 볼 때 1차, 2차 갑오개혁의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내용을 한 번 볼까요?

①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② 왕실전범(王室典範)을 작성하여 대통(大統)의 계승과 종실(宗室) ·척신(戚臣)의 구별을 밝힌다.

③ 국왕이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되, 왕후 ·비빈 ·종실 및 척신이 간여함을 용납치 아니한다.

④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를 분리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⑤ 의정부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권한의 한계를 명백히 규정한다.

⑥ 부세(賦稅)는 모두 법령으로 정하고 명목을 더하여 거두지 못한다.

⑦ 조세부과와 징수 및 경비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장한다.

⑧ 왕실은 솔선하여 경비를 절약해서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⑨ 왕실과 각 관부(官府)에서 사용하는 경비는 l년간의 예산을 세워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⑩ 지방관제도를 속히 개정하여 지방관리의 직권을 한정한다.

⑪ 널리 자질이 있는 젊은이를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과 기예(技藝)를 익히도록 한다.

⑫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제도를 정하여 군제(軍制)의 기초를 확립한다.

⑬ 민법 및 형법을 엄정히 정하여 함부로 가두거나 벌하지 말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⑭ 사람을 쓰는 데 문벌(門閥)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

홍범 14조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1조의 <청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라>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조선이 원한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청은 청일전쟁에서 밀리며 이미 조선에 대한 간섭을 이전처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이 아닌 청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조항은 <일본의 조선 침략 목적>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2-5조까지의 내용은 <왕권을 확실하게 약화시킨다>는 조항입니다. 갑오개혁을 추진한 개화파들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내각제를 실시하는 것>이 서양과 같은 근대화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역시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조선의 왕권이 약해져야 <조선의 보호국 정책>이 수월해지니까요. 일본의 의도가 있었다는 점은 왕권은 약화시키면서도 군제를 확실히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군제개혁은 12조의 징병제도 뿐인데, 이 항목을 제외하곤 실제 1894년 조선의 군대는 더욱 약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에서 가장 시급한 개혁은 군대 강화를 일본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갑오개혁의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6-9조는 재정과 부세에 관한 항목입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바로 <조세의 금납화 및 조세권의 일원화>이죠. 탁지아문이라는 재정 전담부서에서 부세를 걷고, 잡세를 폐지하여 농민들의 살 길을 열어준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조세의 일원화는 국왕이 재정에 관여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왕권을 약화시킨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또, 토지개혁없이 세금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농민들이 원한 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농민들은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잠깐 세금 깍아주는 것보다,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이 원하는 <경자유전의 원칙>이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요. <경자유전>이란, 토지를 경영하는 자(실제 농사짓는 자)가 토지를 소유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부터 계속 주장되어온 내용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실현되지 못합니다.

특히 7조의 1년 회계를 예정한다는 <서구식 선예산주의>를 택한 것으로서 재정개혁의 근대화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부분입니다. 또 13조의 민법, 형법 등의 법령을 정한다는 것은, 법령위의 헌법적 성격을 가진 강령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13조의 내용은 훗날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법령을 만드는 것에 기본 근거가 되는 조항이 됩니다.

10조 이하는 신분제도 폐지, 능력위주의 인재등용 등 새로운 사회의 지침을 설명한 것입니다. 200개가 넘는 수많은 개혁 법안 중 가장 핵심을 추려 놓은 것이 바로 이 홍범 14조입니다.

홍범14조를 정치적인 면에서 본다면 <입헌군주제>가 핵심이겠네요. 왕도 법을 지키라는 것이죠. 이것은 실학자들부터 이어져 내려와, 갑신정변에서도 강조된 개화파의 개혁 핵심이었습니다.

사회적인 면에서 본다면 <신분제 폐지>가 핵심입니다. 이것은 동학 농민들이 주장했던 내용입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본다는 <재정 일원화와 금납화>이겠죠. 홍범 14조는 국가의 자주권부터 정치, 행정, 재정, 교육, 국민의 권리 등을 규정한 <국가 개혁을 위한 기본 방침>이었습니다.

홍범 14조는 자주독립국가임을 국가 내부, 외부에 선언한 최초의 선언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주독립은 청의 종주권을 부인한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국가 개혁 강령으로 함으로서 서구적인 입헌주의를 도입하겠다는 의지를 알린 것이며, 서양식 헌법내용을 도입하겠다는 것을 알린 최초의 선언문입니다.

3. 2차 개혁만의 독특한 법안

1차 개혁의 내용 대부분이 2차 개혁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실제, 주도 세력이 누구인가만 다를 뿐 개혁 그 자체의 본질은 다를 바가 별로 없으니까요. 단, 2차 개혁에서는 제도적인 정비가 많이 추가되었습니다. 한 번 볼까요?

먼저 중앙제도에서는 본격적인 내각제도의 법제화라는 부분이 눈에 띕니다. 1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개혁 주체가 <내각>이 되었고, 국왕권은 허수아비가 됩니다. 1차 개혁 때는 군국기무처라는 도깨비같은 기구가 개혁을 주도했다면 이제 서구식 <내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지요. 내각으로 개편하면서 의정부와 8아문이 서양식 <~~부>로 바뀌고, 이것을 7부라고 합니다. 7개의 부가 등장했죠. 요즘으로 말하자면 행정부, 경제부, 교육부 등등이 등장한 것이죠.

다음으로 지방제도도 바뀝니다. 조선시대 이래 우리나라 지방제도는 8도가 있고 그 밑에 군, 현이 있으며, 그 아래 행정단위로 방위개념이 강한 면, 촌락개념이 강한 읍, 향촌공동체 성격의 리 등이 있었죠. 이것을 23부로 바꾸고 지방 장관이 할 수 있는 권한을 확~ 줄여 버립니다. 그 이유는 철저한 개혁을 위해 전국을 <내각 주도>로 개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또, 사법제도도 근대식으로 바꿉니다. 사법부가 왕권에서 완전 독립하였죠. 행정부는 사법부에 간섭할 수 없었고, 재판은 독자적인 재판소의 권한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실재판소인 의금부, 관리감찰을 하던 사헌부, 행정재판을 보던 한성부 등의 권한은 모두 1심, 2심 재판소로 넘어갔습니다. 이것은 재판제도의 근대화라는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왕권 약화를 위한 일본의 의도였다는 점은 약간 아쉽기도 합니다.

교육제도도 근대화됩니다.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되어 교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소학교, 외국어 학교 관제가 공포됩니다. 물론 이전부터 있던 개념이긴 하지만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등등의 학명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바로 세워진 학교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2. 2차 개혁의 중단

1차, 2차 개혁은 조선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2차 개혁은 1년, 2년, 3년 계속적으로 진행되지 못하였습니다. 2차 개혁이 중단된 첫 번째 이유는 전술했던 <삼국간섭>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이 러시아에 의해 청일전쟁 승리의 노확물을 얻지 못하자, 일본 내부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고조되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 정책에서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죠.

두 번째 이유는 개혁의 추진 세력이 친일 개혁파였기 때문에 국민적인지지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조선의 국민들은 너나 할 것없이 갑오개혁에 간섭하는 일본 세력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특히,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던 일본군에 대한 반감은 과거 임오군란, 갑신정변에 개입하였던 청나라에 대한 것보다 더 큰 것이었죠.

세 번째 이유는 친일 개혁파의 거두인 박영효가 1895년 6월 쿠테타를 일으키고, 국왕을 추방하려고 한다는 혐의로 추방당했기 때문입니다. 갑오개혁의 핵심은 <국왕권 약화와 내각제 강화>였습니다. 왕의 입장에서는 개혁파가 눈에 가싯거리였습니다. 좋은 개혁 내용도 있지만, 개혁의 핵심은 <국왕을 물로 본다>는 것이었으니까요. 조선에서 일본식 입헌군주제는 아직 시기상조였습니다. 박영효가 반대파의 음모 또는 쿠테타로 추방되면서 일본의 <조선 보호국 정책>은 완전 실패하였고 2차 갑오개혁에서 일본이 이루려던 야망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더구나 <삼국간섭>으로 고종과 민씨 왕후는 <러시아가 일본을 견재할 수 있는 대항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일본을 버리고 친러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게 됩니다. 일본은 당황하였고, 반일세력의 중심인물을 <민씨>를 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1895년 여름 일본은 <민씨 왕후>를 낭인자객을 보내 무참하게 살해하고 시체를 불지르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을미개혁이라는 3번째 개혁을 강요하게 됩니다. 그럼 다음장에서는 을미개혁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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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1894)의 추진배경

1. 1894년... 왜 개혁이 필요했는가?

오늘부터 전개할 이야기는 갑오개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갑오개혁은 1894년에 1, 2차 개혁을 하였고, 그 다음해인 을미년에 3차로 을미개혁을 하였습니다. 이 개혁으로 조선은 서구식 근대화를 이루게 되었지만,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그럼 이 개혁이 이루어진 배경을 한번 볼까요?

갑오개혁은 우리 정부가 주체적으로 추진했다는 <자율성론>과 일본에 의해 강제로 추진했다는 <타율성론>의 시각이 있습니다. 이번 나중에 다루고 이번 장에서는 이 2가지를 적절히 다루어 보도록 하죠.

갑오개혁은 조선인 스스로 개혁을 해야 한다는 <개화파>의 개혁의지가 1894년 반영되었다는 점이 일단 중요합니다. 그동안 조선은 개혁을 추진하려는 세력과 그것을 막으려는 보수세력이 혼재해 있었습니다. 1860년대부터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반대 정책이 있었고, 외국의 침략적 움직임을 간파한 위정척사운동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미 1860년대에도 박규수, 유홍기, 오경석 등의 개화 선구자들은 외국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외세를 막으려는 위정척사와 외세를 받아들여 이용하자는 개화의 흐름은 1880년 조선 책략이라는 개화지침서가 들어오면서 대대적으로 충돌하였습니다. 1882년 조미수호조약은 개화의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고, 같은 해 임오군란은 외세를 배척하는 움직임이 강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은 <개화사상에 의한 조선의 개혁>이란 과제를 조선 사회 전체에 던진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많은 개화파가 죽었으며,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개화파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김옥균같은 <급진적 개화파>는 실패하였지만, 고종과 일부 개화파들은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꾸준히 조선의 개혁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여, 대내외의 새로운 사상을 알렸고, 최초의 국립학교인 육영공원을 세웠습니다. 서양식 군사훈련을 위한 연무공원, 광산개발을 위한 광무국, 근대적 진신시설을 위한 전신국이 창설되었죠. 물론 이러한 시설들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측면이 많았기 때문에 외국인 고문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청, 러시아, 일본 등에서 파견한 고문은 침략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근대 시설을 수용하기 위해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또 유럽 각국에서 넘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구한말 카톨릭 선교사들에게 먼저 빼앗긴 종교 입지를 찾아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조선 포교에 앞장서게 됩니다. 원래 종교란, 순수한 목적으로 포교를 한다고 해도 국가적 차원에서는 그 포교를 정치적 논리로 해석하기 마련입니다. 서양에서는 종교적 포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정치, 경제적 침투를 하려 하였고, 조선은 이들을 이용하여 조선의 근대화에 도움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우리 내정에 심하게 간섭하였던 청에게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일본, 미국에 공사관을 개설하기도 하였습니다. 초대 주미 대사의 이름은? 훗날 독립협회의 헌의 6조로 유명해진 박정양입니다. 우리 정부는 청을 견재하기 위해 조러 비밀 협약을 체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청의 강력한 반대로 조러 비밀 협약은 실패하였고, 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은 소환당하기도 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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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가운데)

2. 개혁의 불씨를 당긴 동학농민운동

조선은 점진적으로 개화의 단계를 밟아가고 있었습니다. 열강에게 둘러싸여 힘이 없었고, 조선 스스로의 개혁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외국의 힘을 조금씩 빌려 조금씩 국가의 체질 개선을 하는 중이었죠. 하지만, 조선의 백성들이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개혁이었고, 이 개혁이 과연 백성에게 혜택으로 돌아올 것인가는 의문이었죠.

학교를 세웠지만 양반자제들의 학교였고, 군대를 개편했지만 농민들과는 상관없는 군대였습니다. 농민들이 원한건 잡세를 없애고 토지개혁을 추진하며, 신분제도를 철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를 가지고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정부를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더군다나 동학농민들을 진압하겠다던 명분으로 출병한 청과 일본은 동학과 정부가 정부화약을 맺고 대립을 끝냈음에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조선에 더 이상 머물 명분이 없었던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강력히 요구하였습니다. 겉으로는 동양 평화를 위해 <조선의 개혁을 돕는다>는 입장이었지만, 사실 이것은 일본이 청을 대신하여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히기 위함이었죠.

정부는 일본의 속셈을 파악하고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농민군의 요구가 포함된 자주적인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조선의 자주적인 개혁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조선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그럼 한번 일본군의 내정 간섭 과정을 자세힐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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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알연하는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쓰케 :
조선 내정개혁을 요구하고 일본의 입맛대로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3.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과정과 목적

동학농민과정에서 전주화약으로 조선과 농민군이 화해를 하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전쟁이 끝났으니, 일본군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농민을 잡기 위해 늑대를 불렀는데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늑대가 순순히 물러날리 없죠. 일본군은 바로 서울로 쳐들어와서 떡 하니 서울 한복판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청, 일본 양국이 조선을 개혁하자는 개혁안을 제시하였죠. 청나라는 일본의 속셈을 알고 이것을 거부합니다.

일본공사는 조선 정부에 <일본이 조선 개혁에 도움을 주겠다>라는 공식입장을 밝히고, 일본이 작성한 내정개혁안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거부했고, 일본군이 먼저 물러가면 생각해보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일본과 조선은 내정 개혁에 대한 1,2차 회담을 열었는데, 일본의 목적이 수상하다는 것을 느낀 조선정부에서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조선 스스로의 개혁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조선은 3차 회담에서 일본의 모든 요구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은 검은 속셈을 드러냅니다. 서울에 주둔하던 군대를 이용하여 바로 경복궁을 침입하여 조선의 정권을 탈취하였습니다. 민씨 정권은 축출당하였고, 흥선대원군이 허수아비 정권으로 다시 들어섰으며 친일적인 성향의 <개화파>들을 통해 갑오개혁을 추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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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당시의 김홍집과 어윤중

여기서 친일적인 성향이란, 친일파라는 뜻이 아니라 일본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겠다던 개화파들을 말합니다.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경력이 있었던 지식인들을 개혁 주체로 하여 개혁을 추진한 것이죠. 갑오년에 일어난 이 개혁은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이 수립되었고, 이 내각의 개혁 중심기구인 <군국기무처>는 국왕권마저도 초월하는 초법적 기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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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당시의 군국기무처(교과서 그림)

그럼 왜, 일본이 이렇게 조선의 내정 개혁에 열을 올렸을까요?

1. 전주 화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주둔할 명분도 없었고, 청과 전쟁을 할 이유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통해 조선을 보호하고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갑오개혁을 추진한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청일전쟁을 장기화하면서도 조선에 머물 수 있는 최선책이었습니다.

2. 조선에 내정간섭을 하면서 조선의 발전을 위함이라고 말함으로서, 훗날 청, 미국, 독일, 영국,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우선적으로 침략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이 필요한 것은 조선 등 아시아 식민지였으니까요.

3. 조선의 개혁을 방해하는 청군을 몰아낸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청일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청군을 조선에서 영구히 추방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4. 그러나 1차 개혁은 일본의 간섭이 적었다.

갑오년에 실시한 1차 조선 개혁은 일본이 주도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간섭이 적었습니다. 그 이유는 갑오년 동학농민전쟁의 1차, 2차 전쟁 사이에 청과 일본의 청일전쟁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혁의 시작인 일본의 압력이 작용하였지만, 실제 개혁은 조선의 개화파들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김홍집 내각은 일본의 요구를 몇가지 적절히 섞어서 조선식 개화를 추진하였는데, 일본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기 때문에 개혁은 다시 한번 일본의 요구대로 진행됩니다. 이것이 갑오년 2차 개혁입니다. 2차 개혁의 내용은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를 볼 수 있는 개혁이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모델을 같은 섬나라인 영국의 황제국가체제(영국은 여왕 중심체제였고, 일본은 천황중심체제였음)에서 일부 모방하였는데,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구실로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삼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 역시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것이 당시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오개혁이 순전히 일본의 의도대로만 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개화파들은 조선 사회의 시급한 문제들을 개혁의 내용에 우선적으로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럼 다음 포스트에서는 1차 개혁, 2차 개혁, 3차 개혁의 내용을 차례로 포스팅하고 갑오을미개혁의 논쟁점들을 간략히 다뤄보도록 하죠. 오늘 서론이 길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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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청과 일본이 조선의 경제권을 놓고 다양한 조약을 맺다.

1. 정치적 침략 못지 않게 경제적인 침략이 중요하였다.

1880년대 조선에서는 청과 일본이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시기였습니다. 초기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까지만 해도 청이 조선에서 전통적인 주도권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그 대립은 1894년 동학운동 당시 청일전쟁 기점으로 일본에게 정치적 주도권이 넘어갑니다. 청과의 정치적 대립에서 승리한 일본은 이후 조선이 러시아를 통해 일본을 견재하려고 하자 을미사변 등을 일으켜 조선의 주도권을 유지하였고, 1904년 러일 전쟁을 계기로 조선에서 일본의 주도권을 확실하게 인정받습니다. 러일전쟁 직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이렇게 일본은 조선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주변 열강과 끊임없는 암투를 벌여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1880년대는 조선에서 청과 일본이 경제적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제적 대립이 극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특히 메이지 유신 등을 통하여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 일본은, 자국의 산업혁명을 위해 조선을 철저하게 이용하려고 하였습니다. 특히 일본이 산업혁명을 위해 모델로 삼았던 나라가 <영국>이었고, 일본은 영국의 산업혁명 모델 뿐만 아니라, 러시아를 공동으로 막기 위한 연대전선까지 형성하게 됩니다.

일본은 영국산 면직물을 조선에 내다 팔고, 이 차익으로 조선의 쌀을 일본으로 가져오려고 하였습니다. 즉, 농업기반의 사회를 공업기반의 사회로 급격히 전환하는 시기에 모라자는 식량 자원을 조선에서 가져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에서는 정치적인 내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산업화를 위한 추가 조약>이 꼭 필요하였습니다.

사실 강화도 조약으로 일본이 조선에 진출한 것은, 일본의 자본주의가 확립되어 조선을 강탈할 만큼의 여유가 생겨서가 아닙니다. 일본은 조선에 진출하여 제국주의적인 무역망을 구축할 필요가 있었고, 그 무역망을 통한 치익을 통해 서양과 같은 자본주의를 단기간에 이루려고 한 것입니다. 즉, 서양이 자본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식민지를 확보하려는 제국주의와 같은 움직임을 일본이 한 것입니다. 가장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인 영국을 모델로 하면서 그런 것이죠. 영국이 인도를 점령하면서 원료 공급지 확보와 제품수출을 위한 기지로 활용한 것을 일본은 그대로 조선에 적용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영국과 같이 국가 경제가 견고한 나라가 아니였습니다. 일본은 미국에게 강제로 개항당하여 근대화에 막 발을 들여놓은 나라였을 뿐이죠. 따라서 영국이 조선에 팔고자 했던 것은 자국산 공업물품이 아니라 영국산 면직물 등 수입품이었습니다. 수입품을 팔아서 차익을 남기려 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경제적 침탈은 조선과 전통적으로 무역국이었던 청을 자극하게 됩니다.

2. 조일수호 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1876년)

일본이 1876년 조선과 맺은 강화도 조약은 구체적인 경제적인 내용이 없습니다. 단지 3개 항구를 개항하고,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치외법권을 인정한다는 정도였지요. 이러한 내용들은 강화도 조약 편에서 자세히 다루었죠? 잠시 강화도 조약의 내용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보신 분은 그냥 패스!!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원래부터 우의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우의가 미흡한 것을 고려하여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가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인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과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인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이 조선국 강화부에 와서 조선국 정부가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과 부총관 윤자승과 함께 각기 지시를 받들고 조항을 토의 결정한 것으로써 아래에 열거한다.

제1조.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써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제부터 양국은 화친한 사실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우하여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이전부터 사귀어온 정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없애고 되도록 너그러우며 융통성있는 규정을 만들어서 영구히 서로 편안하도록 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또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에 가서 직접 외무경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조선국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제3조.
이제부터 두 나라 사이에 오고가는 공문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따로 한문으로 번역한 것 한 본을 첨부하며 조선은 한문을 쓴다.

제4조.
조선국 부산 초량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공관이 세워져있어 양국 백성들의 통상 지구로 되어왔다. 지금은 응당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은 없애버리고 새로 만든 조약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조선국 정부는 제5조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국 백성들이 오가면서 통상하게 하며 해당 지방에서 세를 내고 이용하는 땅에 집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을 짓는 것은 각기 편리대로 하게 한다.

제5조.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중에서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서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기간은 일본 역서로는 명치 9년 2월, 조선 역서로서는 병자년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 안으로 한다.

제6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혹 큰 바람을 만나거나 혹 땔 나무와 식량이 떨어져서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가닿은 곳의 연안 항구에 들어가서 위험을 피하고 부족되는 것을 보충할 수 있으며 배의 기구를 수리하고 땔나무를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며 그에 대한 비용은 반드시 선주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은 특별히 진심으로 돌보아서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도록 하며 보충해 주는 데서 아낌이 없어야 한다. 혹시 양국의 배가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탔던 사람들이 표류되어 와닿았을 경우에는 그들이 가닿은 곳의 지방 사람들이 즉시 구원하여 생명을 건져주고 지방관에 보고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본국으로 호송하거나 가까이에 주재하는 본국 관리에게 넘겨준다.

제7조.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를 이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면을 만들어서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8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정부는 조선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제기되면 소재지의 지방 장관과 만나서 토의처리한다.

제9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 백성들은 각기 마음대로 무역하며 양국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만일 양국 상인들이 값을 속여서 팔거나 대차료를 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으면 양국 관리들이 빚진 상인들을 엄히 잡아서 빚을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갚아줄 수는 없다.

제10조.
일본국 사람들이 조선국의 지정한 항구에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만일 조선과 관계되면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어 조사 판결하게 하며 조선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경우 일본과 관계되면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서 조사 판결하게 하되 각기 자기 나라의 법조문에 근거하며 조금이라도 감싸주거나 비호함이 없이 되도록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11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따로 통상 규정을 작성하여 양국 상인들의 편리를 도모한다. 그리고 지금 토의하여 작성한 각 조항 중에서 다시 보충해야 할 세칙은 조목에 따라 지금부터 1개월 안에 양국에서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의 경성이나 혹은 강화부에서 만나 토의결정한다.

제12조.
이상의 11개 조항을 조약으로 토의 결정한 이날부터 양국은 성실히 준수시행하며 양국 정부는 다시 조항을 고칠 수 없으며 영구히 성실하게 준수함으로써 우의를 두텁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조약 2본을 작성하여 양국에서 위임된 대신들이 각기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증거로 삼는다.

대조선국 개국 485년 병자년 2월 2일
대관 판중추부사 신헌
부관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
대일본 기원 2536년 명치 9년 2월 6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


-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구한말조약휘찬 상 -

자, 위의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을 보면 경제적인 내용이 많이 빠져있고, 중요한 경제적 합의 사항은 추후에 다시 정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강화도 조약을 맺은 직후, 같은 해 8월 일본은 <강화도 조약의 부록(조일수호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을 작성하여 경제적인 침투에 대한 법률적 근거를 마련해 둡니다.

조일수호조규의 부록(통상토지조약)

일본국 정부는 전에 특명전권변리대신육군중장겸참의개척장관 흑전청륙 특명부전 권변리대신의관 정상성으로 하여금 조선국 강화부에 파유하고 조선국 정부는 대관 판 중임부사 신헌 부관도총관 윤자승에게 위임하여 일본역 명치 9년 2월 26일 조 선역병지년 2월 초 2일 쌍방이 서로 조인하고 수호조규 제 11조의 취지에 따라 일 본국 정부는 이사관 외무대승 궁본소일에게 위임하여 조선국 경성에 파유하고 조선국 정부는 강수관의 정부당상 조인희에게 위임하여 상호 회동하여 의정한 조약 을 좌에 개례한다.

제 1관

  차후 각 항구에 주류하는 일본국 인민, 관리관은 조선국 연해지방에서 일본국 제선이 조난하여 위급을 요할 때는 지방관에게 고하고 해지에 갈수 있는 도로를 경과할 수 있 다.


제 2관

  차후 사신 급 관리관이 발하는 문리서신을 수송하게 되면 비용을 사후변상하고 또는 조선국 인민을 고용하여 전차할수도 있으니 각종기편할 것이다.


제 3관

  의정한 조선국 통상각항에 있어서 일본국 인민이 지기를 조차하여 주거함은 각지기주와 상의하여 그 가격을 정한다. 조선국정부에 속하는 지는 조선국인민으로부터 관에 납조함과 동일한 조액을 납부하고 거주 한다. 부산초양항공사관에는 종전에 동국정부로부터 수문·설문을 설정하였으나 금후 이를 징발하고 신정의 정한에 의하여 표식을 경계 상에 설정하되 타의 이항도 역시 비례에 준한다.


제 4관

  금후 부산항에 있어서는 일본국인민이 통행할 수 있는 도로의 이정은 방파제로부터 기산하여 동서남북 각 직경 10리(조선법에 의한다.)로 정한다. 동래부중에 있어서는 이 정외라 할지라도 특별히 왕래할 수 있다. 이 이정내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은 자유로 통 행하고 기타의 산물 및 일본국산물을 매매할 수 있다.


제 5관

  의정한 조선국 각항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은 조선국인민을 채악할 수 있으며 조선국인 민은 그 정부의 허가를 받으면 일본국에 왕래함도 무방하다.


제 6관

  의정한 조선국 각항에 있어서 일본국인민이 만약 사망할 때는 적선의 지처를 선발하 여 이장할 수 있다. 단 타의 이항의 이장치는 부산이장지의 원근의 예에 의한다.


제 7관

  일본국인민은 일본국의 제화폐로서 조선국인민의 소유물과 교환할 수 있고 조선국 인민은 그 교환한 일본국의 제화폐로서 일본국소산의 제화물을 매득할 수 있으니 이시로 조선국의 지정한 개항에 있어서는 인민상호간에 통용할 수 있다. 일본국인민은 조선국 의 동화폐를 사용운수할수 있다. 양국 인민으로 감히 전화를 사주하는 자가 있다면 각 그 국가의 제법률에 비추어 처단한다.


제 8관

  조선국민은 일본국민으로부터 매득한 화물 혹은 증여를 받은 제물품을 자유로 사용하 여도 무방하다.


제 9관

  수호조규 제 7조에 기재된 취지에 따라 일본국의 측량선이 소선을 내어 조선국 연해 를 측량하다가 풍우에 봉착하거나 혹은 간조로서 본선에 귀환할수 없을 시는 해처 이 정으로부터 그 근방의 인간에 안착시키고 만약 수용의 물품이 있으면 관청으로부터 변 납하고 후일 그 비용을 청산한다.


제 10관

  조선국은 아직 해외제국과 통신을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일본국은 수호 경년하여 체 맹한 제국과 우의를 보유하고 있는 관계상 금후 제국의 선박이 풍파로 곤경에 빠져 연 변지방에 포착하게 된다면 조선국인민은 모름지기 이를 수휼 않을 리가 없는지라 해표 민이 그 본국에 송환되기를 원망할 때에는 조선국정부로부터 각 항구 주류의 일본관리 관 거치하여 본국으로 송환한다. 해관원은 이를 응낙하여야 한다.


제 11관

  위 10관의 장정급 이에 첨부한 통상규칙은 모두 수호조규와 동일한 권리를 가진다. 양 국정부는 존행하여 위반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차 각 조중에 만약 양국인민이 교제 무역을 실천함에 있어 장해가 있다고 인정되어 불가불 개혁 하게 될 경우에는 양국정 부는 그 의안을 속히 작성하여 일개년 전에 통지하여 협의결정하여야 한다.

1876년의 조약들 중에서 경제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조일수호조규부록>입니다. 이것은 일본인이 경제적으로 조선의 거류지 무역을 공식으로 허락받는 것으로, 조선은 더 이상 일본의 경제적 침투를 막을 합법적인 방법이 사라짐을 의미합니다. 같은 시기에 경제적 침투를 확실하게 하기 위해 맺은 추기 규칙도 한번 볼까요?

조일 무역 규칙(1876)

1칙 일본국 상선이 입항하였을 때는 선주는 일본국 인민무역관리관이 교부하는 증서를 한국 관청에 제출하여야 한다.

2칙

일본상선이 하물(荷物)을 양륙(揚陸)하고자 할 때에는 하물의 내용과 수량등을 상기(詳記)하여 한국관청에 제출하고 하선면허를 받아야 한다.

3칙

양륙하는 하물을 한국정부관리가 검사하고자 할 때에는 이에 응해야 한다.

4칙

출하하물에 대해서도 하주(荷主)가 그 하물의 내용과 수량 등을 상세히 한국관청에 보고하고 출항하물면허를 받아야 하며 하물의 검사에 응해야 한다.

5칙

일본상선이 출항 할 때에는 전일 정오까지 이를 한국관청에 보고하고 출항면허를 받아야 한다.

6칙

금후 한국 제항구에서 양미(糧米) 및 잡곡을 수출입 할 수 있다.

7칙

항구로 들어오는 상선은 항세를 납입해야 한다. 단 일본정부소속 선박은 항세를 납부하지 않는다.

8칙

한국정부 또는 인민이 제물품을 부개항장의 해안에 수송코자 할 때에는 일본국 상선을 고용할 수 있다.

9칙

일본국 선박이 허가없이 조선국의 항구에 내항하여 물화를 매매해서는 안되며 이를 어길 때에는 그 물화를 한국관청이 몰수한다.

10칙

아편의 판매를 엄금한다.

11칙

이 조약은 조인과 더불어 효력이 발생되고, 각 임원(任員)의 상의(商議)로 개정증가(改正增加)할 수 있다.

이러한 조약들로 인하여 우리는 개항장에서의 모든 일본인의 권리를 인정하게 됩니다. 즉, 개항장에서 일본인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주고, 일본의 화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조약들 속에 <무관세를 보장>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이 무관세 보장에 의하여 일본이 파는 <영국산 면제품>을 막을 방법이 없게 되었으며, 일본인이 조선의 쌀을 유출하는 것도 막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수호부록 11조에 적혀있는 <양국의 무역을 다시 조정할 때에는 1개월 전에 통지한다>는 원칙도 문제가 됩니다. 훗날 <방곡령>이 일본에 의해 저지되는 것도 이 1개월 통지 약관에 따른 것이니까요.

일본은 우리 항구인 부산 부산, 인천, 원산 등을 차례로 개항하고 조계를 설치함으로서 점차 조선에서의 경제 침투를 가속화합니다.

3. 조선의 무역 구조 - 3종류의 무역으로 전개되다.

강화도 조약과 추가 경제 조약들은 <조선의 전통 경제 구조>를 크게 흔들어 놓았습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서 일본 상인들이 활동하면서 1876년부터 1882년까지의 대 조선 무역은 일본이 주도해 나갑니다.

이 당시 무역은 3종류의 무역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첫 번째 무역은 일본과의 조약을 통하여 <거류지 무역>이 활성화 된 것을 뽑을 수 있습니다. 거류지 무역이란, 조약을 통해 개방한 항구와 조약으로 규정된 항구의 일정 거리 이내에서의 장사를 말합니다. 즉, 초기 조약이 항구를 개방하고 항구에서 10리까지의 무역권을 일본에 허락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이 항구 10리안의 주요 포구를 거점으로 활발하게 무역을 전개합니다.

두 번째 활성화된 무역은 <조선인의 중개무역>입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의 개항장에 와서 10리 안에서 장사를 하였습니다. 주로 조선에 판 것은 영국산 면제품이며, 조선에서 무관세로 가져가는 것은 쌀, 콩, 소가죽 등이었습니다. 하지만, 10리 안에서 무역을 하겠다는 원칙 때문에 항구와 내륙을 연결하는 조선 전통의 상인들이 성장하게 됩니다. 따라서 바로, 객주, 여각으로 대표되는 전통 상인들의 성장을 가져오게 되죠. 특히, 항구와 먼 내륙지를 이동하면서 물건을 파는 부보상들(교과서에서는 보부상으로 표기)들은 많은 돈을 벌게 되죠. 그러나, 이후 항구에서의 무역거리가 100리 이상으로 확대되고, 조청무역장정으로 외국인의 내륙무역이 허가되면서 전통 상인들은 외국 상인에 의해 몰락하게 됩니다.

세 번째 무역은, 일본의 약탈 무역입니다. 일본은 자신들의 물건을 반 강제로 팔기도 하였습니다.

4. 청나라의 대응 -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1882년)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이 조선 무역을 독점하면서 청나라는 긴장하게 됩니다. 특히, 일본이 조선과 맺은 영사재판권, 화폐사용권, 치외법권, 무관세 규정 등은 조선에서의 청의 입지를 한없이 좁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따라서 1880년대 청나라는 조선의 어떤 사건만 있으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여 <청이 조선의 정치, 경제적 지배국가>라는 것을 확인하려 합니다. 또, 조선시대 이래 실제적 조공관계로 규정되던 청과 조선의 관계를 실제적 속국관계로 전환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합니다. 그 시작이 바로 임오군란 때의 청의 개입입니다. 청은 임오군란을 계기로 출병하여 조선의 내정을 완전 장악하고, <위안스카이의 고문정치>를 시작합니다. 또, 갑신정변 때 김옥균이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며 내정을 장악하려 하자, 청불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무리할 정도로 많은 군대를 조선에 파병하여 개화파를 완전 진압합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는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을 체결하여 경제적으로 일본과 동등한 내용의 조약을 체결한 뒤, 더 많은 경제적 이권을 약속받게 됩니다. 그럼 장정의 내용을 볼까요?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1883)

전문(前文) : 조선이 속방임과 청상의 특혜규정
 “오직 이번에 체결하는 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후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다른 각국과 일체 균점하는 예와 다르다”

 제 1조 청국 상무(商務)위원의 파견 및 이들의 처우,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이 대등한 위치임을 규정.
 제 2조 조선내에서의 청 상무위원의 치외법권을 인정
 제 3조 조난구호 및 평안.황해도와 산동.봉천 연안지방에서의 어채 허용(청국인의 조선연안 어업권을 인정). 관세규정
 제 4조 북경과 한성.양화진에서의 개잔(開棧)무역을 허용하되 양국상민의 내지채판(內地采辦) 금지. 단 내지채판 및 유력(遊歷)이 필요할 경우 지방관의 집조(執照)를 받을 것.(개항장이 아닌 서울 양화진(楊花津)에 청국인이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와 도성에서의 상행위 허용. 호조(護照:일종의 여행증명)를 가진 자에게는 개항장 밖의 내륙통상권과 연안무역권까지 인정) 관세규정.
 제 5조 세칙규정. 책문.의주, 훈춘.회령에서의 개시
 제 6조 홍삼무역과 세칙규정(국경무역에서 홍삼을 제외한 5 % 관세)
 제 7조 초상국윤선(招商局輪船) 운항 및 청 병선의 조선연해 왕래.정박
 제 8조 장정의 수정은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의 자문으로 결정.

이 문서를 보면, 일본과 맺은 <조약>과는 달리 <무역장정>이라고 표기하였습니다. 장정은 대등한 양국의 협정문이 아니라 중국이 속방과 맺는 협정문입니다. 임오군란으로 조선의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청나라가 <경제마저 일본을 누르기> 위한 조치로 맺은 장정입니다.

문제는 이 조약에 내륙통행권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청은 일본보다 한술 더 떠서 아예 내륙지 무역까지 하겠다고 일방적인 협정을 체결한 것이지요. 조선의 경제는 이 협정에 의해 치명타를 입게 됩니다. 그러나, 이 협정은 비단 청나라에게만 적용되는 협정이 아니였다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그동안 거류지 무역 및 개항장 무역 만을 하던 일본 등 외국들은 이 조약을 계기로 앞다투어 최혜국 대우를 요구하면서 내륙무역을 요구하게 됩니다. 최혜국 대우는 예전에 여러번 이야기 했었죠? 최혜국이란, 어느 한 나라가 조약을 맺을 때 그 조약의 내용이 제 3국과 체결한 조약의 내용과 불리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청과 맺은 조약의 좋은 내용들은 일본 등 다른 나라와의 조약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일본 역시 이러한 논리를 내세워 다시 <조일통상장정>을 다시 체결하도록 강요하였고, 이 일본과의 <장정>으로 일본과 거류지 무역권을 확보하고 조선 경제에 더욱 침투하게 됩니다. 덕분에 조선의 객주, 여각, 보부상 등 항구 100리 밖에서 중개무역을 하던 전통상인들이 크게 몰락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이 조약으로 가장 타격을 받은 것은 외국과 조선간의 중계무역을 하던 여각, 객주 등 조선 상인들입니다. 조선 상인들이 몰락하면서 조선의 경제권은 점차 외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청과 일의 이 경제적 침투를 보시면,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왜 청과 일본이 치열하게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해야 했는지 경제적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5. 청과 일본은 조폭 수준으로 조선의 경제를 흔들어 놓았다.

조선과 각각 무역장정을 맺은 청과 일본은 이제 조약의 내용대로 조선 경제를 침투해 나갑니다. 요즘 뜨고 있는 무이자! 무이자! 외치는 대출광고처럼 한번 무역을 하기 시작하면 그 조약의 내용 때문에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지요.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의 경제는 일본의 독무대였으나, 청의 반격으로 조선은 두 나라 사이에서 심한 경제적 압력에 시달려야 했고, 내륙무역이 허가되면서 조선 전역에 그 여파가 미치게 됩니다.

청나라는 그나마 조선과 비슷한 경제단계였기 때문에 침탈적인 경제활동보다는 <우세한 자본과 대규모 인력>을 활용하는 중개무역을 주로 하였습니다. 청은 조선의 물건을 가져가기 보다는 자국의 물건을 판매하는 쪽으로 무역의 기준을 잡았죠.

그러나 산업혁명이 끝나지 않아 <근대화와 자본주의의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은 조선의 쌀, 콩을 최대한 쥐어짜서 일본에 가져가려 했고, 그 비용은 영국산 면직물을 대량 판매하는 것으로 충당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경제적 침탈은 뜻대로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의 대조선 영향력>이 매우 급상승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본은 청에 대한 불만이 아주 많았죠. 청일전쟁의 경제적 배경은 여기에서부터 비롯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청일 양국이 더욱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거의 깡패수준으로 우리 포구에서 행패를 부렸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두모포 사건을 볼까요?

두모포 사건은 1878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정부의 관세방침과 일본의 무관세 규제가 충돌한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조선정부는 포구의 대외무역이 활발해지자, 막대한 상업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조선은 두모포 등의 포구에 포구세를 걷기로 하였는데, 일본은 이것이 무관세 규정에 어긋난다면서 반대입장을 분명히 합니다. 조선정부는 두모포와 같은 개항장 밖에서의 관세는 규정과 상관없는 <조선의 내정>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말로 이길 수 없자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하였습니다. 즉, 일본 상인과 부산 주둔 일본 해병대가 해관을 습격하여 점령해 버린 것이죠.

결국 조선은 일본의 압력으로 개항장 밖에서의 관세마저도 받지 못하게 됩니다. 이후 일본은 개항장 밖에서 이루어지는 장시에 대한 관세도 폐지하라고 정부를 협박하였고, 정부는 일본에 굴복하였습니다. 결국 우리 정부는 상품에 대한 직접 과세를 받지 못하자, 자릿세나 영업세 등의 부가적인 일부 세금만 징수하게 됩니다.

청과도 이러한 마찰이 있었습니다. 1886년 청나라는 모든 경제적 면에서 일본보다 우월한 지위를 요구하면서 인천 해관을 습격하기도 합니다. 우리 정부는 역시 속수무책이었지요.

이러한 청, 일본의 경제적 협박은 조선 전반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전통상인들은 객주, 여각 등은 강화도 조약이후의 중개무역으로 어느 정도 자본이 축척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청, 일본 상인들과 맞서 조직을 만들고 상권을 지켜나가기 위한 투쟁을 시작합니다.

조청수호조규의 속약(제물포 조약의 추가 협약)

제 1조. 부산, 원산, 인천항의 강행이정을 사방 50리로 하고, 1년 뒤에 양화진을 개시한다.

제 2조. 일본 공사 영사와 수행원이 조선 내지에서 자유롭게 여행을 한다.

- 고종실록 권 19, 고종 19년 7월 17일 -

위 조약은 갑신정변의 결과로 맺은 제물포 조약 때 일본이 청과 대등한 경제적 위치를 점하기 위해 맺은 속약입니다. 위 내용을 보면 일본 역시 청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 자유로운 무역이 점차 가능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 청일전쟁 이후 무역의 주도권은 일본에게 넘어가다.

청과 일본의 대조선 무역 쟁탈전의 승자는 일본이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서 조선의 무역은 또 한차례 크게 흔들립니다.

먼저 <영국산 면제품 - 조선의 쌀, 콩>으로 이어지던 대일 무역이 더욱 강화되면서 미면교환체제가 일본의 대조선 무역형태로 확고하게 자리잡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청에게 넘어갔던 대조선 무역이 일본의 독점으로 넘어간 것이지요.

특히, 청일전쟁을 겪을 무렵 1차적으로 산업화를 완성한 일본은 영국산 면제품이 아닌 일본산 면제품을 조선에 내다 팔면서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됩니다. 일본이 더 많은 이익을 얻게 되면서 조선의 쌀은 더 많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에서는 쌀을 생업으로 하는 많은 소작농들이 몰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쌀을 상업적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된 지주층들은 일본과 협력하여 많은 이익을 남기게 됩니다. 즉, 일본의 대조선 무역이 농민층의 몰락과 지주층의 성장을 돕게 된 것이지요.

일본이 쌀을 많이 사갈수록 쌀값이 폭등하면서 농민이 망해갔습니다. 쌀을 상품으로 내댜판 지주들은 그 이익금을 토지에 재투자하여 농민들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입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식민지 지주제도>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즉, 일제시대를 구분하는 사회구분법으로 흔히 <식민지 반봉건제도>를 말하곤 하는데, 이것은 조선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자들은 <제국주의 일본세력>이지만, 조선을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자들은 <식민지에서 토지를 가지고 돈을 번 지주층>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선은 1889년 이러한 문제점을 시정하기 위해 쌀이 부족한 북부지역 지방관들이 <방곡령>을 반포하고 일본에 쌀 수출을 금지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방곡령은 <조약 개정시 1개월 전에 통보한다>는 일본과의 조약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여 오히려 일본에 벌금만 내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후, 농민들은 더욱 더 분노하였고, 이것은 동학농민운동의 경제적 배경이 됩니다.

7. 청이 사라진 자리를 러시아가 메꾸려 하다.

청일전쟁이후 1894년에서 1896년은 일본이 조선의 경제를 장악합니다. 그러나, 청일전쟁 직후 삼국간섭에 의해 일본이 요동반도를 다시 청에 할양하게 되면서 조선에도 새로운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와 친해짐으로서 일본을 견재하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일본이 그 의도를 알고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킴으로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하게 됩니다.

아관파천으로 조선의 정치권은 러시아의 영향아래 들어갔고, 철도, 산림, 광산 등의 큰 이권들은 외국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일본은 10년뒤인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마저 조선에서 물러나게 하고, 모든 경제권을 손에 쥐게 됩니다.

8. 러일전쟁 후 합일합방 이전까지의 경제정책

러일전쟁 후 일본은 을사조약(1905)를 맺고, 조선을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기 위한 준비작업을 합니다. 그 목적을 위해 실시한 것이 바로 <차관제공> 정책입니다. 이것은 조선의 화폐를 정리한다는 명복으로 재정적으로 조선을 예속화하는 정책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화폐로 바꿈으로서 전통적 화폐를 사용한 조선 상인들을 몰락시키고, 일본 상인들이 조선에 터를 잡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화폐정책> 포스트에서 다룰께요.

화폐정리사업으로 조선의 전통적 상인들이 몰락하자, 다음으로 토지약탈을 합법화 하기 위한 다양한 법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본의 의도를 알고 범국민적으로 일본에게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면서 <자주국권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이것은 주로 언론활동을 통하여 열강의 약탈성을 알리고 열강의 이권침탈을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독립협회는 러시아 절영도 조차 요구를 거절하는 입장을 보였지요.

이 독립협회와 연계되어 상권수호운동을 벌인 단체가 황국중앙총상회였습니다. 이들은 시전상인을 중심으로 상업자본육성운동을 벌이면서, 각종 회사를 설립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이 생각한 경제적 자주권이란, 민족자본을 육성하여 일본과 대등히 맞설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반대로 좌절되었지요.

또, 일본이 빌린 차관을 갚아 버리자는 국채보상운동도 전개됩니다. 대구에서 서상돈의 제안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제국신문 등의 신무사들의 호응을 얻어 애국계몽운동(왜 명칭이 애국인지 모르지만, 교과서에서 그렇게 부릅니다.)과 연계되어 대대적으로 일어납니다. 양기탁이 국채보상기성회를 설립하였고, 국민들이 돈을 모아 일본의 차관을 갚아 버리려고 하였지만, 결국 일본의 집요한 방해로 실패하고 말죠.

오늘 포스트는 원래 청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만을 다루고, 몇가지 사료를 보는 선에서 쓰려고 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져서 일제시대 직전까지 전개되어 버렸네요. 뒷부분에 간략하게 다룬 이야기들은 해당 시대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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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조선의 중립화론을 주장하다.

1. 갑신정변 이후 정세

갑신정변 이후, 우리나라는 또 다시 청에게 정치적으로 종속되고 맙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이 모두 청의 개입으로 실패하면서 우리나라는 청에게 내정간섭을 심하게 받게 되죠. 그리고 일본은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청을 견제하고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조선과 지속적인 조약을 체결합니다.

일단, 임오군란 때는 제물포 조약을 통해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얻어냅니다. 갑신정변 때의 톈진조약으로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청군과 공동 출병, 공동 철수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냄으로서 최소한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청에게 밀리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의 정치적 주도권은 아직 청에게 있었죠. 청은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민씨정권쪽에다가는 <정치고문, 경제고문>을 파견함으로서 조선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니까요.

2. 조선과 러시아는 서로의 목적에 도움이 될 듯 싶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청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러시아에게 접근하려고 합니다. 러시아는 1880년 조선책략이 들어왔을 때, 일본, 중국, 미국과 연합하여 막아야 한다고 인식하였던 나라입니다. 갑신정변 직전까지만 해도 개화파 중에서 이 말을 의심하는 사람이 적었죠. 그러나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러시아는 우리 나라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 나라이고, 이 나라를 이용하면 청과 일본의 조선 침투를 막기에 좋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사실 80년대 초반부터 위정척사파들은 러시아를 적대시하는 개화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우리와 아무런 이익관계가 없던 나라였으니까요.

일본이 이미 우리의 수륙 요충 지대를 점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허술함을 알고 충돌을 자행할 경우 이를 제지할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입니다. 갑자기 황 쭌셴의 종용을 받고 우리 스스로가 끌어 들인다면, 그들이 풍랑을 헤치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재산을 약탈 하거나, 저들이 우리의 약점을 잡아 어려운 청을 강요한다면 이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러시아는 본래 우리와는 혐의(嫌疑)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연히 남의 이간을 듣고 우리의 위신을 손상시키거나 원교를 핑계로 근린을 배척하다가 만의 하나 환란이 일어나면 장차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사학에 종사하여 재화를 이루고 농, 공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원래 우리에게도 옛부터 재용과 농공에 대한 훌륭한 법규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서학에 종사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야소교 전래가 해롭지 않다고 하는 것은 사교를 조선에 유포시키려는 간계이니, 주공, 공자, 정자, 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혀서 그 사람 귀류들을 물리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만손의 영남 만인소 중에서 조선책략의 내용을 비판한 글 -

사실, 조선은 청과 일본을 막기 위해 미국과 먼저 접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먼 나라인 미국은 조선을 돕는 것이 자국에 도움이 될지 확신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우리가 접촉한 청나라의 대항마는 러시아가 된 것이죠.

그럼 러시아는 우리를 도왔을 때 무슨 이득이 있을까요?

러시아는 당시 적극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북극해에서 내려와 얼지 않는 항구(부동항)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죠. 덩치큰 러시아는 이것을 위해 전 세계적으로 열강들과 부딪히게 됩니다. 유럽에서는 발칸반도로 진출하기 위해 러투전쟁, 크림전쟁 등이 지속되었고, 청나라와는 아이훈 조약, 네르친스크 조약 등으로 국경을 정하고 있었습니다. 또 표트르 3세, 에카테리나 2세 등을 거치면서 알레스카와 북미까지 진출하려고 하였습니다.

1860년이 되면서 청과 러시아의 관계는 급속이 냉각됩니다. 1860년 청이 아편전쟁에서 져서 영국과 베이징 조약을 맺을 때 러시아는 이 조약을 중재한 대가로 연해주를 획득하게 됩니다. <연해주>는 우리나라 동북쪽 국경과 마주보는 곳으로서, 이제 러시아가 우리와 국경을 통해 직접 만나는 국가가 된 것입니다.

1884년 조선는 러시아와 조러수호통상조약을 맺고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인정하면서 청과 일본을 견재>하려는 정책을 추진합니다. 러시아와 조선이 각각의 목적을 가지고 만난 것이지요. 그 공통의 목적은 성장하고 있는 청, 일본의 세력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베베르를 조선에 외교 고문으로 파견합니다.

1888년에는 육로통상조약을 체결하는데, 그 내용은 러시아와 마주보는 동북국경선인 <함경북도 경흥에서 국경무역을 허락>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80년대 후반부터 러시아도 우리나라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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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러수호조약원본>

3. 조선은 중립을 외치고 싶다.

러시아를 막기 위해 일본은 영국과 손을 잡기 시작합니다. 영일동맹 이전부터 이미 일본과 영국이라는 섬나라는 항구를 찾아 남하하는 러시아를 막기 위한 공동전선을 편 것이지요. 특히, 1885년 조선이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러시아와 조러비밀협약을 추진했는데 실패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구실로 우리나라 남쪽의 섬인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는 거문도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제 한반도는 <청, 러시아, 일본, 영국>이라는 4개의 나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제사회의 이슈가 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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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중반 4개국의 조선 간섭 : 청, 러시아, 일본, 영국>

이렇게 되자 조선주재 독일 부영사인 부들러는 조선의 외교 담당관이었던 김윤식에게 한반도의 중립을 건의합니다.(1885) 조선이 이러다 청일 양국의 전쟁터가 되고, 조선은 청일간의 승자에게 넘어가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이 부들러의 주장이었습니다. 실제, 10년 후 청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이 한반도 주도권을 잡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10년을 내다본 통찰략으로 말한 것이지요.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러한 의견에 부정적이었고,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톈진조약에서 조선에 대한 공동출병과 공동철수를 보장하여 세력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중립을 외쳐 그들을 자극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공론만 벌이다가 중립론을 인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 미국에서 유학을 다녀온 유길준 역시 조선 중립화론을 주장하지만, 민씨정권은 그를 김옥균, 서재필과 같은 급진 개화파의 무리로 몰아 버리는 바람에 조선 중립화론은 공표되지도 못한채 사장됩니다.

우리의 지리적 위치는 벨기에와 같고, 중국에 조공하던 것은 터키에 조공하던 불가리아와 같다.

불가리아의 중립은 유럽 열강들이 러시아를 막기 위함이고, 벨기에의 중립은 유립 열강들이 자국을 보전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나라가 아시아의 중립국이 된다면 러시아를 방어할 수도, 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보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직 중립만이 우리를 지키는 방책인데, 우리 스스로가 제창할 수도 없으니 중국에 청하도록 하자. 아시아에 관계있는 여러 나라들이 화합해 조선의 중립을 확인받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우리만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이며 다른 여러 나라가 서로 보전하는 계책도 될테니 무엇이 괴로워서 하지 않겠는가?

- 유길준의 조선 중립화론 -

유길준이 위 글에서 제시한 중립화론은 우리의 현실이 답답해서 한번 말해본 감정적인 중립화론이 아닙니다. 유길준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서유견문을 적을 정도로 당시 시대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럽의 벨기에, 불가리아와 같은 중립국이 생긴 원인을 국제 정세에서 분석하여, 우리가 중립을 하였을 때 주변의 반응과 주변국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변 열강 모두에게 인정을 받으면서도, 주변 열강들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는 실리적 중립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집권자들은 이러한 의견을 한번 고민해보지도 않은 채, 김옥균당의 변병이라면서 묵살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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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

오늘 글은 상당히 짧았네요. 다음 장에서는 중립화론이 무효화 된 이후 일본과 청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침략하는 과정을 조일수호조규부록, 통상정정,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반부, 1991
  2. 한국사통론, 변태섭 저(4개정판), 1997

  3. 7차 교육과정 근현대사 교과서(대한교과서)
  4. 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구회, 청아출판사, 1988
  5. 한국통사, 박은식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6
  6. 누드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이투스, 2007
  7.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6권, 김태웅 지음, 2003, 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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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시대, 격동의 한국사 속에서 어떻게 봐야할까?

이번장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정책에 대하여 논의해보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1863년부터 1873년까지 약 10년간 정치를 이끌며 한국 근현대사의 주된 흐름을 이끌어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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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화와 척사가 난립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직전의 한국사회는 개화, 척사라는 두 흐름이 정치 전반에 긴장감을 주던 시기였습니다. 1860년대, 서양에서는 이양선을 보내 아시아 각국에 통상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또 중국은 서양에 의해 베이징을 점령당했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차지하여 우리와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죠.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을 차츰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860년대 초부터 이항로 등의 유학자들은 외국과의 통상이 국내 경제에 미칠 영향이 어떤 것인가를 분석하면서 <통상반대운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반대로 양반인 박규수, 중인출신인 오경석과 유홍기 등은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만 이후 조선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개화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오경석은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의 도서를 국내에 소개하였고, 이것은 훗날 조선책략, 만국공법과 함께 개화정책의 지침서가 됩니다.

또 순조 때의 효명태자와 같은 집권층 사람들은 세도정치 하에서 강력한 <국왕권>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개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도정치 하에서는 이러한 개화, 척사의 논의보다는 안동김씨 일문을 비롯한 정치가문의 정치적 논리가 우선이었으므로, 이러한 개화, 척사의 논의가 본격화되지 못하였습니다.

2. 대원군이 등장하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서 고종의 어린 시절 <강력한 국왕권 확보>를 위해 개혁정치를 실시한 사람입니다. 그는 순조,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안동김씨 등 일문독재의 세도정치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상가집 개라고 불릴 정도로 미친척을 하여 안동김씨 세력을 안심시키면서, 자신의 아들을 안동김씨집안에서 이의없이 왕위에 올릴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종이 왕이 된 후 흥선대원군은 <대원군>으로서 정치를 독점하고, 안동김씨 일문을 축출하여 세도정치가 마감됩니다.

그의 정치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정확보와 민생안정을 통한 <강력한 왕권 확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흥선대원군의 정치가 민생을 안정시키고, 소농과 상인층을 보호하면서 세도정치 가문의 병폐를 근절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원군의 목적은 <농민보호>가 이니였습니다. 농민보호와 상인보호는 <왕권강화>를 위한 조세원 확보책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그럼 하나 하나 대원군의 정책을 짚어볼까요?

3. 왕권 강화를 시도하다.

흥선대원군은 집권후 가장 큰 목적인 <왕권강화>를 위해 세도정치와 관련된 인물들을 비롯하여 신권을 축소시키는 개혁을 시도합니다.

먼저, 조선 후기에 강해진 비변사를 축소합니다. 원래 조선 최고의 기구는 의정부였는데, 임란과 호란 이후 임시 군사기구였던 비변사에 신하들이 모여 붕당정치를 실시하면서 <비변사>가 조선 최고의 기구가 되는 변태정치가 실시되어 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약해진 왕권 강화를 위해 신권 기구인 비변사의 기능을 줄이고, 의정부 기능을 복원함으로서 <국왕권>이 주도하는 중앙정치로 환원시킨 것입니다.

다음으로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합니다. 경복궁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궁전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을 버리고 선조가 북으로 피난가자 백성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복궁에 불을 질렀습니다.경복궁을 중건한다는 것은 곧, 떨어진 왕실 권위를 회복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죠. 그러나, 경복궁 중건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드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을 징수합니다. 원납전이란, 원래 <원하는 사람이 납부하는 돈>이란 뜻이었는데, 점차 국가는 이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여 경복궁 중건에 투입합니다. 백성들은 반강제적인 원납전을 <원망하면서 내는 돈>으로 바꿔불렀다고 합니다. 또 동대문부터 북대문까지 4대문과 4대문 사이에 있는 소4문을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문세>를 받아 자금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역을 늘려서 백성들을 무상으로 일을 시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비가 부족해지면 <당백전>이라는 돈을 찍어서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 당백전 발행으로 시중에 돈이 너무 많아져서 인플레이션 현상이 심화되었고, 백성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리더쉽으로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보장하여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들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다시 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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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흥선대원군, 경복궁 근정전, 당백전>

대왕대비가 경복궁 중건을 명하고 다음 날 3일 시원임 대신을 회정당에 불러 중건 대사를 대원군에 위임하였다. 경복궁 영건 때의 비용과 백성의 역에 대한 절차를 의논하였는데, 백성의 노역 문제는 신중을 기하고, 안으로 재상 이하 밖으로는 지방 수령 이하가 역량에 따라 보조하며, 선비, 서민층은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자진 납부하는 자는 상을 주기로 하고 이 뜻을 8도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미 서울의 원납전이 20만량이 되었다.

- 승정원일기, 고종 2년 4월 2일, 5일 -

또 대원군은 자금 확보를 이유로 전국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정리해버립니다. 흥선대원군은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은 공자가 살아돌아오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명분을 강조하면서 서원을 철폐합니다. 서원 철폐는 양반계급이 대원군을 적대시하게 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를 계기로 지방 양반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족이 있는 곳마다 평민을 못살게 굴지만 가장 심한 곳이 서원이었다. 먹도장을 찍은 다음 편지 한통을 고을에 보내서 서원 제수전을 바치도록 명령하였다. 사족이나 평민을 물론하고 그 편지를 받으면 반드시 주머니를 쏟아야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서원에 잡혀가 혹독한 형벌로 위협을 받았고 화양동 서원 같은 곳은 그 권위가 더구나 강대하여 그곳에서 보내는 편지를 화양동 묵패지라 하였다.

백성들은 탐학한 아전들에게 시달렸는데 여기에 또 서원 유생에게 침탈을 당하니 모두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원망을 하고 이를 갈아도 하늘만 쳐다볼 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대원군이 영을 내려 나라 안 서원을 죄다 허물고 서원 유생들을 쫒아 버리도록 하였다. 감히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하니, 사족이 크게 놀라서 온 나라 안이 물 끓듯 하였고 대궐 문간에 나아가 울부짖는 자도 수십만이나 되었다. 조정에서는 어떤 변이라도 있을까 하여 대원군에서 이렇게 간언하였다.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선비의 기풍을 기르는 것이므로 이 명령만은 거두기를 청합니다.>

대원군은 크게 노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유를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에는 도둑의 소굴로 됨에 있어서라.>

드디어 형조와 한성부 나졸들을 풀어서, 대궐 문 앞에서 호소하려는 선비를 강 건너로 몰아내 버렸다. 여러 고을에서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영을 거행하지 못했는데, 대원군이 먼저 한 고을 원을 파면시키고 무거운 벌을 시행하니, 이에 여러 도에서는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일시에 서원을 철폐시킬 수 있었다.

다시 8도에다 암행어사를 보내니, 사족으로서 평민을 침해한 자가 있으면, 그 몸에 죄를 주고 재산을 몰수하니 떵떵거리는 집안들도 숨을 죽이고 감히 나쁜 짓을 못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춤추고 칭송하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체제 정비도 시도하였습니다. 먼저 수령에 대한 조목을 수정하여, 조세징수를 부당하게 하는 수령들을 적발하여 처벌하였습니다. 또 오래된 붕당정치와 일문독재정치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파와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계승한 정책도 실시합니다. 실제 대원군의 국정 운영을 잘 살펴보면, 정조기 <탕평책>으로 활용했던 정책들이 상당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원군이 집권한 뒤 어느 공회 석상에서 음성을 높여 여러 대신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겠으며 태산을 깎아 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떠시요?>

대저 천리지척이라는 말은 종친을 높인다는 뜻이요, 남대문 3층이라는 말은 남인을 천거하겠다는 뜻이요, 태산을 평지로 만들겠다는 것은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의사이다.

- 매천야록, 갑오이전 -

또 이러한 체제 정비를 체계화 하기 위하여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편찬하였습니다. 조선의 법전은 경국대전으로 완비된 이래, 새로운 사회변화에 따라 법전을 일부 개편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영조의 속대전, 정조의 대전통편은 이러한 사회변화를 반영한 대표적인 법인데, 대원군이 대전회통을 발표함으로서 보다 왕권위주의 사회개혁을 표방하는 체제정비가 이루어졌습니다.

4.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다.

삼정이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세금은 전정(전세 : 토지세), 군정(군포세 : 군역세), 환곡(이자세)를 말합니다. 원래 조선의 세금은 토지에 부과하는 전세를 바탕으로 하되, 백성들이 국가에서 몸으로 때우는 역을 추가로 설정합니다. 역이란, 실제 일을 하는 요역과 군에서 일하는 군역이 있는데, 군적수포제 이후 군역은 세금항목화 되었습니다.(조선시대 군역편을 참조하세요) 환곡은 원래 국가가 농민에게 춘궁기에 쌀이나 종자를 빌려주고, 수확기에 돌려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운반 등에서의 손실분을 메우기 위해 일분모회록을 작성하여, 약간의 이자를 받았는데, 이후 국가가 가난해지면서 이 이자를 세금처럼 늘려 받게 됩니다. (환곡편을 참조하세요)

이러한 삼정이 세도정치기에 무척이나 문란해집니다. 전정은 토지세를 엄청나게 늘려받았습니다. 토지 측량에서 관리들의 부정이 많아지고, 토지를 재는 <척>도 제각각이 됩니다.

군정은 균역법이후 군포 2필을 1필로 감해주어, 이 1필만 내면 군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은 군적을 속여 군포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를 16세 이상이라고 속여서 군적에 올리거나, 여자를 남자로 속여 군적에 올리는 행위(황구첨정), 죽은 사람을 죽지 않았다고 하면서 군적에 올리는 행위(백골징포), 도망간 자의 이웃이나 친척에게 군포를 받는 행위(족징, 인정) 등이 대표적인 군적 문란의 예입니다.

환곡은 더욱 심하여, 백성들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빌려준 후 이자를 계속 배로 받아 원곡보다 이자가 몇 배 증가하는 경우, 강제로 대출해준 다음 고리대처럼 이자를 받는 경우, 겨가 섞인 불량쌀을 빌려준 후 받을 때는 품질좋은 쌀로만 받는 경우 등등 경우도 다양했습니다.

대원군은 이러한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전정, 군정, 환곡을 대수술합니다.

먼저 전정에서는 불법으로 토지를 겸병하는 것을 막습니다. 또 국가 몰래 숨겨 경작하던 땅들을 모두 찾아내었고, 만약 숨겨진 땅이 있으면 수령이나 향리를 처벌하는 등 엄하게 토지관련 법규를 정비합니다.

다음으로 군정에서는 유명한 <호포법>을 실시합니다. 호포법은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것으로서 양반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양반들이 자존심 때문에 호포를 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양반들이 군포를 낼 때에는 하인들의 이름으로 납부하게 하여 양반 위신을 세워주었고, 또 매포당 2냥씩으로 균등한 괴세를 매겨 평등한 세금 부과를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환곡제는 완전 폐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관에서 운영하는 환곡이 관리의 부정부패로 인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환곡을 폐지한 뒤 지방자치조직인 <사>에다가 곡식 대여의 임무를 맡깁니다. 이것은 관리의 부정을 방지하면서도, 왕실의 재정과 민생 안정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한 대책이었습니다. 원래 고려 시대 이후 지방에서는 <사창>이라고 하여, 국가가 운영하지 않은 비인가 대여기구가 있었습니다.(고려에서는 국가기구였지만, 조선에서는 의창이 국가기구입니다.) 의창이 공식기구라면 사창은 조선시대의 비공식 백성 구휼기구였던 것이죠. 흥선대원군기에 사창은 국가에 공식 인정되어 국가 환곡을 담당하는 <의창>을 대신하게 됩니다

삼정의 문란이 시정되면서 흥선대원군은 원하였던 재정확보와 왕권강화를 추구하면서도, 농민층의 지지를 받게됩니다. 이후 명성황후의 집권기에 국가조세제도가 다시 문란해지면서 근대화기 우리나라는 대원권의 강력한 정책을 그리워하는 농민층이 많아졌고, 대원군의 이후 복권에도 이러한 정책에 대한 지지가 많은 뒷받침을 했었습니다.

대원군의 삼정의 문란 극복 정책

전정의 수정 : 은결색출

대저 임금이 있으면 나라가 있는데, 금일의 형세는 나라가 있으나 믿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나라라는 것은 민이 모인 것이고 민을 모으는 것은 재물입니다. 안으로는 왕실과 정부가 모두 텅 비고 밖으로는 창고가 모두 고갈되었으니, 녹봉을 계속 지급하기 어렵고 진휼곡은 내주기도 어려우며 생민이 날로 초췌해지고 온 팔도에 소요가 일어나니 흰수건을 둘러쓰고 몽둥이를 든 자가 걸핏하면 1만명이 넘고 관가를 약탈하고 관원을 살해하고 재변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난 역사에 없던 일들로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전하의 나라에 백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승정원일기, 고정 1년 정월 27일 -

영의정 조두순이 아뢰기를

<수령이 경작 토지를 찾아내어 중앙에 보고하는 양이 많고 적음으로서 징벌과 권면의 기준으로 삼기를 청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대왕대비는 여기에 따라 시행하되 회기 내에 실효가 있도록 하라고 답변하였다.

- 일성록, 고종 1년 11월 20일 -

군정의 수정 : 호포제

갑자년 초에 대원군은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그 전의 형태를 바꾸어 모든 양반, 천민에게 1정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세납전 2량씩 고루 바치게 하였으니 이를 동포전이라고 한다.

- 매천야록, 갑오이전 -

환곡의 폐지 : 사창절목

본 창에는 관장할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니 반드시 본면 중 부지런한 자를 택하고 일면회에서 천거하여 관에 보고한 뒤에 뽑니다. 또한 관에서 감히 강제로 정하지 말고 그를 일러 사수라고 하고 환곡을 분급, 수납하는 것을 맡아 검사한다. 또한 각 동에서 근검한 사람을 가려 뽑아 당장으로 삼아 일청 사수가 지휘하고 본동이 받고 내주어 그로 하여금 바로잡게 하며 창고지기 1명도 사수로 하여금 지역에 뿌리박은 자를 잘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맡아서 지키고, 출납하고, 용량을 재서 일체 환곡을 분급받은 백성에게 부칠 일이다.

환곡을 분급하는 규칙은 해당 면에서 각 동 대소 빈부로써 차등으로 삼으며 양반과 상민을 가리지 않고 동네에 분급된 양을 헤아려 지나치게 맣거나 지나치게 적을 우려를 없게 하며, 만약 유망하여 받아내지 못한 곳이 있으면 해당 동에서 골고루 배분하여 채워낼 것이로되 사수와 해당 동장은 모두 경계하고 삼가지 못한 죄로써 심문할 일이다.

- 일성록, 고종 4년 6월 11일 -

5. 쇄국정책을 실시하다

대원군이 국내에서는 강력한 <왕권보호>정책을 실시하였다면, 대외적인 정책은 철저한 <쇄국정책>이었습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강력한 정책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초기에 천주교에 관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정조기 이래 반세도정치 세력들 중에 개화주의자들이 많았고, 대원군 역시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고래 <이이제이 정책>을 생각해두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천주교를 전파하는 것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고 하였죠.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정치 불간섭 및 철저한 인도주의적 선교원칙을 주장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와의 정치적 교섭은 실패하였고,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하고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합니다.(병인박해)

또 당시 대동강 하류에 정박하면서 우리와의 통상을 주장하였던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거부당하자, 평양근처의 민가를 불지르고 약탈을 자행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평양군민들은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버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입니다. 이 프랑스, 미국과 연계된 사건은 우리 정부의 정책이 급격하게 반외세로 돌아서는데 기여합니다.

1866년 프랑스는 강화도에 쳐들어옵니다. 이것이 병인양요입니다. 강화도는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오는 인천물길의 입구로서 통상을 위해서 한양으로 오기 위한 입구입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대외정책상 강화도를 철저히 방비하고, 대포와 함선을 비축해두고 있던 곳입니다. 또 문서를 보관하는 외규장각이 있던 섬이기도 하지요. 프랑스의 침입은 양헌수의 부대를 비롯한 관군이 정족산성 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외규장각의 수많은 문서들이 프랑스에 의해 약탈되었는데, 그 많은 문화재들을 아직도 찾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느낌표의 74434인가에서 대대적으로 방영해주기도 하더군요.

조선 국왕이 프랑스 주교 2인과 선교사 9인 그리고 조선인 신도 다수를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잔폭은 패망을 자초하는것이다. 조선은 중국에 납공하는 나라이므로, 본국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유죄를 정토하러 떠나기 전에 조선 원정을 알리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줄 안다. 조선 국왕이 프랑스 신부를 살해하는 날은 곧 조선국 최후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수일 내로 조선 정복을 위해 출정할 것이다. 조선을 정복하여 국왕을 책립하는 문제는 프랑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시행할 것이다. 전에 수차 귀 아문을 방문하고 프랑스 석교사에게 호조(여권) 발급을 요청하였으나, 귀 아문은 모두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이 비록 중국의 조공국이지만, 모든 국사를 자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호조 발급은 천진조약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본관은 조선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믿고, 이후부터 본국과 조선이 전쟁을 벌이더라도 간섭하지 않기를 선언한다.

- 청계중일한관계사료 제 2권 -

제너럴 사건이후, 시간이 꽤 흘러서 미국도 제너널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1872년 침입합니다.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어재연의 광성보 전투와 평양군민들의 저항으로 미국이 물러나기는 했지만, 이후 미국은 계속적인 통상수교를 요청하곤 합니다.

이후 독일인 오페르트의 상선이 무역을 요청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합니다. 오페르트는 조선과의 통상에 대한 정치적인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대원군의 아버지 <남원군>의 묘를 도굴하려 하다가 실패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과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 도굴사건에 분개하였고, 이 사건은 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유생층이 지지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개화파들도 당시에 개화정책을 입에 담을 수 없도록 하는 효과도 있었죠.

그들의 유골을 잠깐이나마 점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진 자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할 것이며, 서울을 점령하는 것과 다름없는 의의를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원군은 그것을 돌려받기 위해서 누구에게든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일에도 찬성할 것이다. 그러면 그를 강요하여 제안된 조건을 수락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대원군을 강요하여 이 요구를 수락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이것뿐이라는 것이다.

- 오페르트,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  -

사료분석 : 1868년(고종 5) 오페르트(E. J. Oppert:1832~?)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에 관한 사건입니다.  오페르트는 중국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던 유태계 독일상인으로 1866년 2번에 걸쳐 통상요구를 하다가 거절당하였죠. 그러자 그해에 미국인 젱킨스의 지원을 받아 통상조약 체결을 명분으로 상하이에서 조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때 통역으로 프랑스 선교사 1명과 한국인 천주교도 약간 명을 대동하였는데, 이들은 통상요구는 하지 않고 4월 18일 밤에 충청도 홍성군 구만포에 몰래 상륙해 바로 덕산으로 이동했으며, 덕산군청을 습격한 후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쳤답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들은 조선인이 시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관을 미끼로 조약을 체결하려 했던 것 같네요. 하지만 중도에 날이 밝아 도굴은 실패하였습니다. 21일에 이들은 영종진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수비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사상자를 내고 달아났습니다. 이 사건은 국외에도 널리 알려져 젱킨스가 기소되는 등(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남) 많은 파문을 일으켰으며, 대원군이 천주교탄압령을 내리고 대외강경책을 더욱 고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페르트는 이 사건 이후 〈조선기행 A Forbidden Land:Voyage to the Corea〉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예전에는 단순한 도굴사건이 통한 쇄국정책에 영향을 주었다는 책들이 많았는데, 요즘 서적들은 오페르트는 하나의 통상방법으로서 이 수단을 선택하였으며, 치밀한 계획과 조선에 대한 여러가지 상황을 감안하여 실시된 계획적인 사건이라는 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강력한 척양정책을 고수하였고, 이 정책에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대원군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특히 이항로, 최익현 등의 개항반대운동은 대원군 정권의 정통성을 공고히 해주게 됩니다. 또 서양은 조선의 강력한 저항을 보면서, 조선을 독자적인 자주국가로 인정하게 되고, 다른 방향에서의 접근을 모색하게 됩니다. 실제, 유럽 열강들은 당시 자국의 국제적인 관계상 조선까지 쳐들어올 적극적인 이유를 찾지 못하였고, 이후 대조선 정책에 있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으로 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후 척화비를 전국에 세워 반외세 정책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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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때의 강화도 격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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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어재연, 척화비, 대원군의 묘>

대원군기 통상수교 거부정책 : 이항로가 올린 글

또 하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양이의 화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홍수나 맹수의 해일지라도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힘쓰시고 경계하시어 안으로는 관리들로 하여금 사학의 무리를 잡아 베시고, 밖으로는 장병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하도록 하옵소서.

사람 노릇을 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고비와, 존속하느냐 멸먕하느냐 하는 기틀이 잠깐 사이에 결정되오니 정말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한갓 지엽만 다스리고 근본을 제거하지 않거나, 한갓 흐름만 멈추게 하고 원천을 막지 아니한다면 근본의 싹과 원천의 샘솟음을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이의 재앙을 일소하는 근본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전하를 위한 계책은 마음을 맑게 닦아 외물에 견제당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외물이란 것은 종류가 극히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양품이 가장 심하옵니다.

몸을 닦아 집안이 다스려지고 나라가 잡힌다면 양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기이함과 교묘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저들이 기필코 할 일이 없어져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평생 양직물을 입지 아니하고 집안에서 양품을 사용하지 아니하여 그것으로 집안의 법도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잡아죽이고 정벌하는 일과 본말이 되어 서로 돕고 의지하게 되오니 꼭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 화서집 권 3 -

올해 여름과 가을 이래로 외국 선박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 5도에 몰래 출몰하매 혹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가 없었다. 그중에는 상륙하여 물을 길어가기도 하고 때로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데, 그 선박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다.

- 현종실록 15권, 현종 14년 12월 -

대원군의 양이보국책 유시

   (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 때 철저한 항전의 뜻을 정부 관료에게 내린 유시)

1.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친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파는 것이다.

2. 해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3. 적이 경성에 다다를 때 도성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4. 만약 잡술이나 육정육갑(둔갑술 등에 이용되는 신) 따위로, 또는 귀신을 불러 신기하게 침략자를 물리치고자 하면 이후에 생겨나는 폐단은 사학(천주교)보다도 더 심할 것이다.

- 용호한록 권 18, 병인년 9월 4일 -

6. 대원군 정권과 메이지 정권의 마찰이 시작되다.

흥선대원군이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외세에 저항했다면, 당시 일본은 미국에 의해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을 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위해 사신을 보냈고, 1868-1876년까지 조선과 일본에서는 이 새로운 관계를 놓고 대립하게 됩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서계문제>입니다. 서계란, 일본측에서 조선측에 보낸 문서를 말하는데, 이 문서의 형식과 내용이 기존 관례와 너무 어긋나서 대원군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기존 일본은 조선에서 통신사를 받아 문물을 전수받으며 조선에 대한 예의를 지켜왔고 문서 역시 예의있는 표현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메이지 황제는 대원군에게 예의없는 문서, 즉 <대일본제국 천황이 고종의 아버지 흥선이에게 보내는 말투>의 문건을 보내고 새로운 관계설정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 서계를 보낸다, 못받겠다의 논쟁은 68-70년까지 계속되면서 양국의 첨예한 외교문제로 대두합니다. 이것은 메이지 체제의 일본과 조선의 큰 대립이었고, 흥선대원군은 일본과 외교를 단절해버립니다. 흥선대원군은 <왜양일체론>을 말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 역시 서양과 다를 바 없는 <서양 오랑캐>라고 말합니다.

일본은 흥선대원군과의 서계문제를 놓고 당장 조선을 침략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일본의 내수산업을 일으킨 이후에 점진적으로 침략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합니다. 당장 침입하자는 것을 정안론, 천천히 침략하자는 것을 점진론이라고 하는데, 이토 히로부미의 점진론이 받아들여져서 훗날 민씨정권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 부분 산업별로 조금씩 조선에 침투하기 시작합니다. 점진론의 1단계는 경제적 침략이었다고 하네요.

삼가 조선국예조판서 공 각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근래 정세가 일변하여 정권이 황실로 돌아갔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별사를 보내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겠으므로 여기서는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재주 없는 이 몸이 직을 받들어 귀국을 찾았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특히 옛 공로를 어여삐 여겨 작을 올리고 벼슬을 좌근위소장으로 진급시켰고, 다시 교린직을 맡도록 명하셨으니, 오랜 전통이 사라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별사가 가지고 가는 도서(인장)는 새로운 도장을 찍게 하여 우리 조정의 성의를 표하겠사오니 귀국 또한 잘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옛적에 귀국에서 받아온 도서는 원래 전적으로 후의에서 나왔기에 쉽게 이를 고쳐 바꿈이 옳지 않은 줄 아옵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우리 조정의 특명에 따른 것이니 어찌 사사로이 공적인 일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불초 이 몸의 정황이 여차하오니 귀국이 양찰하길 깊이 소망하는 바입니다.

- 메이지 원년 11월 -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대마도주가 보낸 서계 중에 자신을 좌근위소장으로 써온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조선이라는 두 글자는 기왕의 격례에 크게 어긋납니다. 역관으로 하여금 이를 엄중하게 알리도록 하고,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고쳐 올리게 하십시오. 직명이 전과 다른 것은 항식과 항례가 아니거니와, 300년이나 된 약조의 본의가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그들에게 서계를 고쳐 올리도록 분부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이 말에 임금이 윤허하였다.

- 승정원일기, 고종 6년, 12월 13일 -

7. 대원군 정권에 대한 반발

대원군 정권의 정책은 필요한 정책이 많았고, 국가 계층의 고른 지지를 받았습니다. 삼정문란의 극복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고, 쇄국정책으로 양반유생들의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원군에 대한 긍정적인 면들은 대원군의 극단적인 정책에 의해 모두 가려져 버립니다. 서원철폐와 호포법의 실시는 양반층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하면서도 서원정리에는 크게 반발하여 고종의 친정이 필요하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합니다.

대원군 정책에 대한 츼역현의 반발

호조참판 최익헌이 상소하였다.

<지난 나랏일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어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일이 순하지 않아 짧은 시간 안에 다 미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만 그 가운데 더욱 드러난 심한 것을 보면 만동묘(명 의종을 제사하는 사당) 철거로 임금과 신하의 윤리가 썩어졌고, 서원 철폐로 스승과 제자의 의리가 끊어졌고,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일로 아비와 자식의 친함이 문란해졌고, 호존(청나라 돈)을 씀으로서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도 어려워졌습니다.

이 몇가지 조목들이 곧 한 조각이 되어 천리와 인륜이 이미 탕진되어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원납전 같은 것이 표라가 되어 백성과 나라에 재앙을 끼치는 도구가 된 지 거의 몇 년이나 되었으니, 이것이 선왕의 옛 전장을 변화시키고 천하의 떳떳한 윤리를 썩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신의 생각으로는 전하를 위하여 오늘날의 급선무를 말하자면, 만동묘를 다시 설치하고, 서울과 지방 서원을 흥기시키고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일을 금하고 원통한 일을 풀고 부끄러운 일을 씻어 버린 국적에게 추율(죽은 역적을 다시 법을 집행함)을 적용하고 호전 사용을 혁파해야 할 것이며, 토목 공사 원납전도 한 시각이라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대원군의 정치는 <왕권강화>를 위해 백성을 이용하면서,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다고 낙인찍혀 개화주의자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백성들도 신분제 개혁과 지주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대원군의 정책을 100% 지지할 수 없었습니다.

8. 대원군은 긍정적인 인물이었다는 평가

대원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의 중요한 기준은 <전통사회의 폐단을 개혁>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대원군은 삼정의 문란을 극복하고, 기존 세도정치의 잘못된 점을 시정하였으며, 백성들을 위한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특히 대원군의 정책은 정조에서 시작되는 <탕평론>적인 개혁정책이 지속되었다는 것에서도 의의가 있습니다. 정조는 조선왕조에서도 드물 정도의 <유교적 계몽군주> 성격이 강합니다. 서양으로 따지면 <태양왕 루이 14세> 정도의 절대군주라고 할까요?

정조는 상당히 개혁적인 군주였습니다. 그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당파분열을 수습하고 서얼까지 등용하여 능력위주의 관료제를 마련합니다. 그 핵심이 규장각이었죠. 또 장용영을 마련하여 스스로의 상비군을 갖추려 했었고, 상공업 육성을 위해 사도세자의 묘가 마련된 화성을 건축합니다. 또 자유상업을 위해 신해통공으로 금난정권을 폐지하였습니다. 또 대전통편 등 법전을 정비하고, 북학사상을 가진 실학자들을 등용하여 중상주의적 국가체제를 마련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정조 때의 관료군은 모두 몰락하고, 일문독재가 시작됩니다. 물론 정조의 이념은 효명태자 등에 의해 지속되지만, 안동김씨의 입김으로 효명태자는 요절하였죠.

대원군은 이러한 정조의 이념을 부활시키고, 세도정치를 불식시킨 왕입니다. 그는 강력한 상비군을 바탕으로 국가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외세를 몰아내었습니다. 이것은 근대 민족국가를 추구하려던 정조의 이상과 일치합니다. 또 삼정의 문란 극복과 법전정비, 능력위주의 관료 등용 등으로 근대사회로 나아갈 계기를 마련한 왕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통사회의 폐단을 개혁하여 근대사회로 나갈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지요.

9. 대원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

대원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크게 2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그의 개혁 목표가 단순한 <왕권강화>였다는 점입니다. 대원군은 민생안정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즉, 조선 전통의 조세질서를 회복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고, 전제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실제 서원정리도 서원의 특권 폐지를 통한 조세확보였고, 호포제도 양반 등 특권계급에게 조세를 부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경복궁 중건을 위한 각종 세금은 민생 안정이라기보다 백성들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었죠.

따라서 흥선대원군의 왕권강화란 전통사회질서를 정조시대 이전으로 정상화하여 회복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신분제도를 인정하였습니다. 지주제도 인정하였습니다. 전제군주제도 인정하였습니다. 이 3가지는 실제 프랑스 혁명에서 말하는 구제도의 모순과 일치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구제도를 바탕으로 전통적 봉건질서를 부활하려는 인물이었습니다.

대원군에 대한 2번째 부정적 평가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의 문제점입니다. 대원군이 취한 통상수교 거부는 이유없는 반외세로서 근대 사회 발전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원군의 반외세 정책은 성리학적 이념을 가진 유생층의 지지를 통한 반외세로서 백성들의 생활과는 상관없는 반외세입니다. 따라서 개화주의자들은 시대착오적인 유교이념에 따른 반외세적 보수주의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였지만, 대원군은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곤 하였습니다. 대원군 이전 등장한 박규수, 오경석 등의 개화주의자들의 이론은 대원군 집권기에 힘을 잃고, 조선의 개화사상은 10여년의 세월동안 잠복기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민씨정권에서 개화주의자들이 활개치기 시작하지만, 이 때의 개화사상은 이미 민씨정권에 야합한 개화사상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었죠.

대원군의 정치는 결국 반근대적인 전제군주제, 봉건적 신분질서, 지주제적인 중세 토지제도를 강화하는 보수적인 정책이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이 점을 강조하여 대원군을 근대사회에 역행하는 인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원군에 대한 긍정론, 부정론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역사적 난재입니다. 보는 사람의 입장과 각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죠.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는 <강화도 조약>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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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과 슬라브족의 중세 사회

이번 장에서는 동유럽의 중세 10-11세기의 사회상을 다뤄봅니다. 아주 짧은 글이 되겠네요.

1. 10-11세기의 동유럽

10세기 이후부터 동유럽사를 다루는 이유는 이 때부터 동유럽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국가들이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10세기 노르만의 이동이 유럽사회에 미친 영향 중 동유럽 국가의 탄생도 중요합니다.

10세기부터 동유럽에는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라는 새로운 국가가 탄생합니다. 물론, 지금과 같은 국민국가가 아니라 소부족 규모의 추장 세력들이 연합한 공국이나 소국입니다.

이들 국가가 탄생하자 서유럽, 동로마, 아시아 유목민족 등은 이들의 새로운 지역들을 각각 자신의 세력권 또는 문화권으로 흡수하려고 했습니다. 특히 남부 슬라브 지역이 새로운 문화유입의 장이었죠. 그리하여 동유럽의 신생국들과 원주민들은 각각 <슬라브>라는 이름으로 소영역 단위의 문화권으로 뭉치기 시작합니다.

서슬라브족 : 폴란드, 보헤미아, 헝거리, 크로아티아 - 카톨릭 교회 문화권(서방문화권 유입)
   남슬라브족 : 세르비아, 불가리아, 러시아 일부 -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인 비잔틴 문화권(비진탄 문화권 유입)
   동슬라브족 : 키예프 공국의 지배를 받는 소영역 - 비잔틴 문화를 받은 키예프 문화권(러시아 문화 유입)

2. 10세기 이후 러시아 사회

러시아 사회에 대한 이야기는 <러시아 이야기>라는 방에 연대별로 역사를 서술했으니, 참조하세요. 10세기 이후 러시아는 주력 국가인 <키예프>공국이 동방교회의 비잔틴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비진틴 식 러시아 교회가 탄생하기 시작합니다. 보통 비잔틴의 그리스 정교는 각 나라에 전파되면서 세르비아 정교, 러시아 정교, 불가리아 정교 등으로 명칭이 바뀌는데, 러시아는 바로 러시아 정교로서 비진틴 문화를 받아들입니다.

러시아가 비잔틴의 문화를 받아들인 이유는 비잔틴이 이슬람과 항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비잔틴의 바질 2세는 종종 러시아에 원조를 요청했는데, 키예프 공곡의 블라디미르는 여기에 조건을 달았습니다. 우선 선진적인 동방교회를 러시아에 전파해줄 것, 또 비잔틴 황제의 누이동생을 키예프 공국에 넘겨줄 것입니다.

이것은 크리스트교가 러시아 등 유라시아 사회에 전파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종교 뿐 아니라 각종 생활양식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러시아 및 서유럽의 원조와 군사적 지원을 받은 비잔틴은 10세기 다시 한번 중흥을 맞이합니다. 당시 비잔틴은 북에서부터의 러시아의 남하, 동에서부터의 이슬람의 서진으로 고생하였는데, 러시아와의 수교로 이슬람과의 항쟁에 주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9세기 비잔틴 황제는 슬라브 족을 전도시킬 목적으로 두 형제를 파견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의 알파벳을 기본으로 하면서 슬라브인들도 많이 쓰는 발음들을 나타낼 수 있는 문자를 연구하였는데, 이것이 러시아의 <키릴 문자>라고 합니다 .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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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러시아 혁명의 배경은 1차 대전의 참전입니다. 1차 대전이 장기화되고, 전쟁 상태가 참호전 상태로 고착화되면서 파업과 폭동이 빈발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주의자인 르포프가 혁명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이것이 3월 혁명입니다. 3월 혁명으로 러시아 로마노프 종말을 고합니다. 입헌민주당은 소비에트를 조직하여 모든 시민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부여할 것을 약속하였고, 제헌의회 수립도 약속하였습니다. 또 국민들에게 황실과 수도원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에게 분배할 것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3월혁명의 소비에트 정부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미 심각한 경제난 속에서 기강이 해이해진 군대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고, 러시아 민중 자체가 자유가 무엇인지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무지한 국민들을 소비에트 정부는 이해하려하기 보다 자신들만의 고집으로 정치하려고 하였습니다. 즉, 자유주의자들은 통치의 경험도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3월 혁명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러시아의 자유공화정이었다는 의의만을 남긴채 사라집니다.

3월 혁명의 입헌민주당(카데츠) 정부는 레닌의 11월 혁명으로 무너집니다. 레닌은 원래 독일 참모부가 러시아로 귀국시켜주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독일은 레닌을 러시아에 귀국시키면 러시아가 연합국에서 탈퇴하여 독일에 유리할 것이라 생각했고, 레닌을 러시아에 보낸 것이죠. 레닌은 독일의 요구대로 임시정부와 폭력 투쟁을 벌여서 7월 반란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11월에 트로츠키와 함께 혁명을 성공하여 정권을 잡게 됩니다.

레닌은 정권을 잡고 독일군과 휴전을 합니다. 이것이 유명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입니다. 이 내용은 우크라이나, 발트연안, 핀란드 등을 독일에게 양도함으로서, 독일의 위협으로부터 러시아가 벗어나고 연합국에서 탈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조약 내용의 지역들은 러시아 인구의 1/3이요, 철생산지의 80%요, 석탄생산의 90%인 지역을 넘기는 것이라 러시아로서는 눈물을 먹고 넘긴 것이지요.(물론 전쟁에 독일이 지면서 나중에 다시 빼앗아 옵니다.)

레닌은 밖으로 우환을 없앤 뒤 안으로 제헌의회를 소집하여 완전한 자유 선거를 통하여 자신이 집권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국민들이 레닌에게 냉담하였고, 레닌의 볼세비키는 선거에 참패하였습니다. 레닌은 의회를 강제로 해산시키고, 자유주의적인 공산주의를 포기합니다. 이 때부터 레닌에 의한 독재주의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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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산업혁명과 자유주의 운동의 좌절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뒤 알렉산드르 3세는 극단적 반동정치의 강화와 자유주의의 탄압을 시도합니다.

알렉산드르 3세기는 러시아의 산업혁명기라는 사실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즉, 석탄지대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석유를 산출하였으며, 강철과 포를 생산하였고, 이러한 자원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함으로서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또 도시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시도가 많아져 어느 때보다 파업이 빈발하였구요.

이러한 사회변화를 통하여 러시아에 정당제가 확산됩니다. 즉, 사회민주당이 조직되어 마르크스주의가 확대된 시점이 이 때이며, 또 레닌이 볼세비키당을 만든 때도 이 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의 설립은 러시아의 분열을 초래합니다. 즉, 레닌의 볼세비키당은 중앙의 견고한 소수집단이 당을 지배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소수 멘셰비키 당은 당을 민주적으로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또 입헌민주당(카테츠)가 조직되어 자유주의자들의 온건한 개혁을 대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러시아의 사회적 변화는 러시아가 근대화에 성공하여, 부강한 국가로 갈 것인가, 아니면 실패할 것인가에 대한 기로에 처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알렉산드르 2세 이후 니콜라이 2세는 본격적인 공업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부르조아지 계층이 성장하고, 노동운동도 발전하는 시기였습니다. 특히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밀린 러시아는 물가고와 함께 급격한 파업확산이 초래되었습니다. 1905년 민중들은 이러한 러시아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아버지>라 부르던 황제에게 진정서를 내러 갑니다. 그러나, 왕은 수도에 없었고 어찌된 영문인지 모를 잘못된 명령 전달들로 인해 왕의 친위대는 국민들에게 총을 발포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결과 도시파업, 농민폭동 등 심각한 사회문제가 계속 진행되고, 자유주의자들은 함께 뭉쳐 전제정치에 대한 개혁을 요구합니다.

결국 <10월 칙령>으로 왕(차르)는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승인하고, 공정한 선거권을 통한 입법의회 창설을 약속하게 됩니다. 그러나, 혁명의 기운이 사그러들고, 폭동이 잠잠해지자 차르는 입헌개혁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스톨리핀을 임명하여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할 것을 명령합니다. 이것이 <국가기본법>입니다.

스톨리핀은 혁명파는 탄압하면서,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합니다. 먼저, 농업공동체(미르)를 폐지하고 자영농을 육성하려 하였습니다. 즉, 농민의 법적 지위를 시민지위와 동등하게 보장하게 한 것이죠. 또 교육개혁으로 취학률을 높이고, 점진적인 러시아 발전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좌절됩니다. 러시아 사회의 운명은 이렇게 번번이 근대화 기회를 놓쳐가면서 전제정이 무너지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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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르 2세(1855~1881)

알렉산드르 2세는 개혁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전왕대 크림전쟁의 비참한 패배를 구경하였기에 내정개혁의 필요성 및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모든 것을 시도하려고 하였습니다.

먼저 그는 유럽에 대한 여행을 완화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합니다. 또 출판물에 대한 검열도 완화합니다.

특히, 그는 농노해방령을 내립니다. 이것은 모든 농민을 해방시키고, 각 농가는 일정한 토지를 할당받는 것으로서 러시아의 민중이 정말 오랜 시간 투쟁한 결과의 성과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많았습니다. 왜냐면 종래 가진 토지는 이미 지주에게 빼앗긴 경우가 많았고, 새로 할당된 토지는 장기간 상환금이 부담되어 있는 토지라서 매입금 부담이 큰 것이었습니다.

또 할당된 토지가 농촌공동체(미르)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미르는 토지를 주기적으로 공평하게 재분배할 권리를 가지고 있어서 실제 농민들의 보유지라 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즉 농민이 되었지만, 자유는 없었습니다. 종전의 지주에게 예속당하던 농민들은 미르에 예속당하게 되었으며, 분배받은 토지에 대한 상환금만 많았습니다. (물론 이유야 어찌되었든 형식적으로라도 자유라는 것이 농민에게 주어졌으며, 러시아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계기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황제는 농노해방으로 새로운 법제도 만듭니다. 지주가 가진 영지의 사법권과 경찰권은 사라졌습니다. 즉, 영주권의 소멸이지요. 지방의회(챔스트보)를 만들어 지방행정을 관장하게 하고, 도시에는 시의회를 설치하였으며, 사법제도에 배심제를 도입합니다. 또 대학에 국가가 간섭하지 않고, 군대도 계급 구분없이 모두 징병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식인들이 보기엔 이 개혁은 너무 미흡하였습니다. 속도도 더디고, 전제정치라는 틀 자체는 변하지도 않았습니다. 지식인들은 이러한 불만많은 개혁 때문에 여러 대응책을 찾았습니다. 먼저, 농민속으로 파고들어 적극적으로 계몽운동을 하자는 <나로드니키>운동이 활성화되었습니다. 또 일단의 지식인들은 바쿠닌식의 무정부주의와 폭력혁명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은 폭력혁명을 주장하면서 농촌사회를 사회주의의 전진기지로 만들고 차르를 살해할 것을 주장합니다. 그래서 <인민의 의지>라는 테러단을 만들어 차르를 살해하였는데, 하필이면 이 때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 사회 자체를 바꿀 수도 있는 중요한 사회개혁안을 승인한 직후라서 러시아 근대화는 또 다시 뒤로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드르 2세 때 러시아는 대외정책에서 중요한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1877년의 러투전쟁이 있는데, 이 때 개혁을 추진하였던 알렉산드르 2세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산 스테파노 조약을 맺습니다. 내용은 투르크 지배하에 있던 세르비아, 몬테니그로, 루마니아가 독립하고, 불가리아가 자치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영국,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남하를 두려워해 이 조약을 축소하기 위한 새로운 조약을 <베를린 회의>에서 맺게 됩니다.

베를린 회의의 내용은,
   1. 새로 독립한 나라들의 영토는 대폭 축소한다.
   2. 영국은 키프로스 섬을 확보한다.
   3.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차지한다.    -  입니다.

이 조약은 이후 세계대전까지 영토상의 문제가 됩니다. 특히 러시아, 발칸반도국가들은 이 조약내용에 불만이 많았고, 세계대전에 기름을 붓는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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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1세

19세기 러시아는 농노제적 후진사회가 계속되었습니다. 알렉산드르 1세는 이러한 러시아를 개혁할 방안을 찾았는데, 이것이 내각제를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내각제를 도입하여 새 관료조직을 마련하면 사회개혁을 될 것이다... 라는 것인데, 문제는 이것을 토지 귀족이 오히려 독점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전제적인 지배는 계속되는데, 그 형태만 바뀌어서 토지귀족이 직접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토지귀족이 관료조직을 통해 국가를 다스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유럽의 자유주의 물결은 계속 러시아로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일부 토지귀족과, 젊은 장교, 대학생 등의 지식인들은 농노제 및 전제정치 폐지를 희망하여 비밀결사조직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추진한 것이 데카브리스트의 난입니다.

이 난의 주체는 민중이 아니라 지식인 장교등이었습니다. 그들은 사회의 주요한 악이 황제와 전제주의, 농노제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래서 알렉산드르 1세가 죽고,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자 반란을 일으켰지만, 즉위하는 니콜라이 1세에게 진압당하고 말았습니다.

니콜라이 1세는 즉위전 반란을 교훈삼아 철저한 반동정치로 일관합니다. 출판물을 검열하고, 대학도 감독하고, 비밀경찰을 투입하여 사회 곳곳을 조사합니다. 결국 지식인들은 순수한 문학이나 학문을 통해서만 사회개혁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러한 문학적 개혁주의자은 2가지 조류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서유럽을 추구하는 <서유럽주이자>였고, 또 하나는 슬라브민족 고유의 것을 주장하는 <슬라브족의 벗>이었습니다.

니콜라이 1세 때에도 러시아 고유의 확장정책과 남하정책은 계속되었습니다. 일단, 크림전쟁을 통하여 흑해방면으로 남진을 시도하려고 하였고, 그로 인하여 투르크와 마찰을 빚었습니다. 러시아는 러시아 정교회를 보호하고 해협지대에서의 러시아의 특권을 요구하였는데, 이를 투르크가 거부하여 전쟁이 난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러시아가 패전하여 오히려 러시아는 몰다비아, 왈라키아를 투르크에 내주고, 흑해의 중립을 강요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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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가초프의 대반란

에카테리나 2세(바로 위의 글)는 농노제는 계속 강화하였습니다. 국유지를 귀족에게 주면서 반면 농노가 증가하였죠. 귀족은 병역과 세금이 면제되면서 농노는 힘들어지고 영주권은 절대적인 권한이 되어갑니다. 즉, 지배층인 귀족과 민중과는 엄청난 간격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회적인 모순으로 대두하면서 <푸가초프의 대반란>이라는 사건을 초래하게 됩니다.

푸가초프는 스스로를 표트르 3세라고 말하였습니다. 표트르 3세는 부인인 에카테리나와 군대 장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을 앞에서 설명하였죠? 표트르 3세가 무언가 농민들을 위해 개혁하려다 죽었다는 설이 유포되자 푸가초프는 스스로 황제라 말하며 농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대반란>인 이유는 그 규모나 잔인함이 도를 넘어서기 때문이죠. 즉, 모든 귀족을 적으로 돌리고 지주, 관리, 장교 등을 진인하게 죽었고, 재판도 없었습니다. 농민이라 해도 지주와 행동을 같이 한 자는 모두 죽였죠. 그러나 푸가초프가 잡혀 죽음으로서 이 반란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 공허한 유혈로 끝나게 됩니다.

농민들은 자유와 토지보유를 주장하였지만, 여제는 그들을 잔인하게 진압하였고, 결국 러시아 사회는 점차 상처를 입어가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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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카테리나 2세(재위 : 1762~1796)

에카테리나 2세는 표트르 3세의 부인인데, 표트르 3세(1761~1762)는 제위기간이 짧았습니다. 표트를 3세가 추구하였던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무언가가 많은 지배층의 불만을 가져오게 되었고, 결국 표트르 3세는 러시아 장교 그룹에 의해 살해당하였습니다. 또 에카테리나 2세도 남편에 대항하여 직접 음모를 꾸몄다고 합니다.

에케테리나 2세는 남편의 죽음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녀는 표트르 1세와 같은 강력한 러시아를 꿈꾸는 여제였습니다. 책을 많이 읽었던 그녀는 마키아벨리즘에 감탄을 받았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그녀는 장서 12권의 전집을 낼 정도로 글을 좋아했는데, 초기에 그녀는 디드로, 달랑베르, 볼테르 등 계몽사상가들을 후원하기도 하였다고 하니 계몽군주를 꿈꾸었는 듯 싶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왕을 죽이는 사건을 보고는 계몽사상은 금지하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지지자들에게 막대한 국유지를 하사였습니다. 따라서 지주들은 여제를 몹시 좋아하였습니다. 이것을 여제는 시스템으로 만들어 운영하였는데, 즉 귀족은 군사적인 봉사를 여제에게 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고 의무적으로 문무관직을 가져야 했습니다. 반면 관직은 귀족들도 원하는 것이었고, 특히 이러한 봉사의 대가로 막대한 토지를 하사하는 제도입니다. 요약하자면, 러시아의 전제군주정은 막대한 토지를 하사받은 귀족계층에 의해서 운영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그녀는 농노제는 계속 강화하였습니다. 국유지를 귀족에게 주면서 반면 농노가 증가하였죠. 귀족은 병역과 세금이 면제되면서 농노는 힘들어지고 영주권은 절대적인 권한이 되어갑니다. 즉, 지배층인 귀족과 민중과는 엄청난 간격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회적인 모순으로 대두하면서 <푸가초프의 대반란>이라는 사건을 초래하게 됩니다.

여제는 또 통일법전을 만들고, 교육을 보급하였으며, 병원과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 러시아 발전을 위한 일이라 생각되는 새로운 일들을 많이 하였습니다.

여제의 업적 중 중요한 것은 러시아의 전통적 확장 정책을 계승하고, 그것을 더 강화하였다는 것입니다.

러시아는 동서남북으로 확장정책을 실시하였는데, 17세기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우랄산맥을 넘어 흑룡강까지 영토를 확장하다가 청의 제지를 받았습니다. 에카테리나는 이에 방향을 약간 돌려 캄차카 반도와 알레스카까지 진출하게 됩니다. 또 유럽으로 진출을 추진하여 폴란드 분할을하게 됩니다. 폴란드 1차 분할은 에카테리나 여제가 프로이센(프리드리히 대왕), 오스트리아(마리아 테레지아)와 조약을 맺고 나눈 것입니다. 과거 폴란드에 대한 복수였지만, 이 때부터 폴란드는 끝없이 오랜 시달림을 받게 됩니다.

남하정책으로는 투르크와의 계속된 전쟁을 들 수 있는데, 1차 러투전쟁(1774)으로 여제는 흑해연안일대와 크리미아 일부를 획득하는 쿠츄크 카이나르지 조약을 맺습니다. 2차 러투전쟁(1791)에는 크리미아 종주권을 확보하고 흑해북부의 투르크령을 병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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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트르 대제의 개혁

표트르 대제는 국민 다수가 문맹인 후진적인 러시아 사회에서, 농노 반란 등의 상황을 겪으면서 발전이 없다는 것을 보고는 서유럽화 정책을 실시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강력한 왕권을 표면적으로 보여주는 왕이었습니다. 예로 서유럽화를 위해 유럽을 시찰하는 도중 스트렐치(친위대)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는 직접 목을 베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들 알렉세이 황태자도 아버지에게 대항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죽일 정도였으니까요. 구귀족과 황족이라 해도 반대세력은 여지없이 죽이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전형적인 절대 군주로서 최고 권력의 위신과 권위를 세우고, 그 의지에 반하는 자는 참아주지 않았습니다. 그 의지란, <국가에 대한 헌신>이었습니다.

그의 서유럽화 개혁은 전제 러시아 사회를 개혁한다기 보다는 지배층과 문화적인 측면의 개혁이었던 듯 합니다. 우선 생활과 풍습을 서유럽화하려고 하였고, 각종 학교를 설립하여 유럽식 교육을 받아들이려 하였습니다. 또, 유럽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기본적인 기술을 도입하였고, 성페트로그라드를 건설한 뒤 수도를 그곳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2차 유럽여행을 다녀와서는 중앙과 지방의 행정, 관료기구를 완전 개편하고, 군사적인 병사구를 마련하여 지방행정구역에 적용하였고, 징병제도를 의무화하였고, 사관학교도 설립합니다. 또한 모든 지주에게 의무적으로 문관으로서 봉사할 것을 강요하는 초강수의 정책도 실시합니다. 반대로 재산과 문벌이 없는자라도 일정 지위에 도달하면 토지를 주고 귀족의 칭호를 부여하여 당시 사회에서는 파격적인 정책을 실시합니다.

그는 또 보수파와 교회 관계인사들의 반발이 거세자 아예 수좌대주교제도를 폐지하고, 황제가 직접 지배하는 종교회의로 대체해 버립니다. 또 원로원을 설치하여 <조국의 아버지, 러시아 황제, 표트르 대제> 라는 말을 얻어냅니다. 또 차르라는 말 대신 임페라톨(위대한 대제)이라는 말을 얻어냅니다. 보통 국가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정치를 러시아어로 에타치즘이라고 하는데, 이는 국가의 관심만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개인적 관심에 무심한 정치를 말합니다. 표트르 대제의 정치도 그와 비슷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는 해외로 발트해로의 진출을 추진하였습니다. 특히 스웨덴과의 북방전쟁을 통하여 21년간 싸웠고, 결국 나스타드 조약을 체결하여 서방으로의 출구를 확보하였습니다. 즉, 노르만 이래 북방 지배를 해오던 스웨덴과 오랜 기간동안 싸워 표트르 대제 때 스웨덴의 북방 지배를 끝맺음해 버린 것이죠.

표트르 대제는 서유럽식 계몽군주를 자청하였습니다. 그런 만큼 경제 정책도 서유럽식 중상주의 정책을 실시합니다. 일단 화폐를 개혁하여 모든 품목에 세금을 부과했고, 세금을 늘리게 되었습니다. 반면, 호구세 대신 인두세를 신설하고 농노제를 강화한 것은 그의 개혁이 농민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외국기술자를 초빙하고, 제조업자와 일부 시민들에게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부여하였으며, 중상주의적 보호관세를 적용하여 러시아 자체의 유럽경제 편입을 도모한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정책의 이후 에카테리나 2세로 이러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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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노제의 모순과 스테판 라진의 난

이반 4세 이후 강화된 농노제는 17세기까지 끊임없이 농노들을 괴롭혔습니다. 특히 17세기에는 농민들을 토지에 결박하여 모든 생산물이 지주의 손을 거치게 하였고, 거주의 자유를 더욱 탄압하였습니다. 이것은 서유럽이 이 당시 농노해방을 하면서 시민계층이 늘고, 속박에 대한 저항과 시민혁명단계로까지 나아가는 것과는 반대되는 현상입니다. 그렇다고 동유럽과 같은 상업적 장원(구쯔헤르샤프트)의 성격도 아닌, 일방적 속박을 뿐이었죠. 그래서 농노들은 도망치기 시작하였고, 그들을 모아 해적질 등을 통해 국가에 저항한 사람이 스테판 라진입니다.

스테판 라진은 카스피 해를 거점으로 거대한 군대로 성장하였고, 여러 도시들을 점령하여 자유도적단 규칙도 만들었습니다. 리진은 공동집회인 총회도 만들고, 대지주와 귀족들의 물건을 약탈하여 국가와 대립하였고, 결국 사형을 당하고 맙니다. 그의 저항은 실패하였지만, 결국 러시아 사회의 모순은 점점 커지게 되었고, 이러한 모순은 강력한 왕권을 통한 개혁으로 추진하려고 하였던 사람이 표트르 대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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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프 왕조의 등장

이반 3세기에 몽골에서 벗어난 후 러시아는 강력한 농노제를 실시하면서 차르(황제)중심의 중앙집권적 전제국가를 성립시켰습니다. 그가 바로 이반 4세입니다. 이반 4세는 비밀경찰제를 실시하여 반항하는 귀족을 탄압합니다. 또 농노제를 강화하여 군사적인 봉사를 제공하는 신하에게 토지를 주어 신흥귀족을 확보하고 구귀족의 권한을 빼았습니다. 물론 신흥귀족은 왕권에 협조하는 귀족입니다. 이런 상황으로 농민들의 이동의 자유는 박탈당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세금을 걷기 위해 도시와 교역시장, 토착상인들은 꾸준히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데, 이러한 농노제는 서유럽과도 다르고, 동유럽과도 다른 강력한 왕권 유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반 4세는 그 아들 드미뜨리를 황태자로 책봉하였지만, 어린 나이에 황태자가 죽어 버렸습니다. 류릭이 러시아를 세운 이후 계속 계승되어지던 왕가의 후손이 끊기면서 러시아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왕권에 눌렸던 구귀족이 발호하고, 10세기에 성립되어 강대한 국가를 이루던 폴란드가 침공하면서 국가적인 위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이에 왕권 안에서 성장하던 도시들이 의용군을 조직하여 폴란드와 격전을 치르면서 조금씩 위기를 극복하였고, 새로운 황제로 미하일 로마노프를 선출하면서 러시아의 유명한 왕조인 로마노프 왕조가 탄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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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침입과 모스크바 공국의 성장

13세기 러시아의 소국들은 엄청난 위기를 맞이합니다. 그것은 당시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몽골부족 때문이었죠. 당시 발전해가던 러시아는 몽골의 침입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몽골의 기병이 워낙 뛰어난 것도 있었고, 말자 상속제로서 스스로 영토를 구하여 나라를 세워야 했던 몽골부족의 숙명에서 기인하는 것도 있지만, 러시아가 쉽게 무너졌던 것은 통일 국가가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즉, 러시아의 공후들은 단결되지 못하였고 서로 토지에 대한 더 많은 권리만 요구했을 뿐 단결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죠. 결국 몽골은 러시아의 발전하고 있던 아름다운 도시들은 모두 불태우고, 모든 러시아 공국들은 킵차크 한국에 종속시켰습니다. 바투의 대원정은 러시아의 역사를 바꾼 것이죠. 이 기간은 약 2세기입니다. 러시아 민중은 계속된 투쟁을 하였지만 그것은 잔인한 죽음으로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종래 키예프, 노브고르드 중심의 러시아 사회는 모스크바 공국이 주도권을 잡는 형세로 바뀌게 됩니다. 이반 1세라 불리는 모스크바 공국의 주인은 킵차크 한국에 바치는 조공을 관리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는데, 그 속에서 점점 모스크바 공국의 힘이 커져갔습니다. 또 러시아 교회의 수장이 모스크바로 거주지를 옮기면서 종교적인 권위도 갖게 되었고, 많은 금화를 축척해나가게 됩니다. 결국 바투가 침입한 지 1백년이 지나고, 이반 1세의 사후 드미뜨리가 킴차크 한국의 마마이를 대혈전끝에 대파하기 시작한 때부터 모스크바 공국은 킵차크 한국에 대항할 수 있는 러시아 공국의 중심국으로 발전합니다.

1462년 이반 3세가 즉위하면서 러시아라는 국가 명칭이 처음 등장하게 되는데,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몽골로부터 완전히 해방하면서 러시아는 강력한 국가로 떠오르게 됩니다. 이반 3세는 비잔틴 마지막 황제의 부인과 결혼하여 <비잔틴 제국의 계승자>를 자청하면서, 모스크바 대주교가 그리스 정교회를 계승한 사람으로 규정하였습니다. 러시아를 제 3의 로마로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제 러시아는 비잔틴의 계승자이자, 킵차크 한국의 계승자로서 중국, 중앙아시아, 유럽의 문화적 업적을 취합하여 빛나는 문화를 만들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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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은 어디에서 기원하였는가?

러시아 민족은 슬라브 민족입니다. 특히 동슬라브인이라 불리는 고대 민족이 러시아 민족의 조상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고대 슬라브 인들은 일반적인 고대 신앙이 그러하듯이 다신교를 믿었는데, 뇌신, 태양신, 불의신, 가축의 신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리스 등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첨럼 보입니다. 문헌상 러시아라는 지역에 국가의 관념이 생긴 것이 9세기 경이니 꽤 오랜 시간 동안 원시적인 풍습을 유지해왔던 것 같습니다.

러시아의 원년은 862년으로 기록하여 시작하는데, 그 기원은 노르만(바이킹)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약탈과 전쟁을 일삼는 노르만들이 봉건유럽을 약탈하면서 그 일파들이 러시아로 건너왔는데, 특히 노브고르드 공국과 키예프 공국을 건설하였다는 것에서 러시아의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노르만의 파괴적인 약탈이 계속되는 가운데 노르만 지휘관인 류릭이 자신의 친위대(드루쥐나)를 이끌고 노브고로드에 도착하여 스스로 공후라고 하였다(862)라는 것에서 러시아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죠.

그 뒤를 이은 올레그(879~)는 키예프와 노브고로드를 통일시켜 키예프를 수도로 하여 도시국가를 건설합니다. 많은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새로운 나라가 성장해 가는데, 올가시대(945~)에는 비잔티움에서 기독교를 수용하면서 선진 문물도 수용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블라지미르(980~)는 고대 다신교체제를 그리스 정교의 일신적 제후중심체제로 바꾸려고 노력하였는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이후 강성해진 비잔틴 문화를 적극 수용하려던 노력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특히 비잔틴 바질 2세가 이교도들과의 싸움에 러시아의 원조 요청을 해오자 블라디미르는 동방교회를 수용하는 대신 비잔틴 황제의 누이 동생을 요구하게됩니다. 어깃이 비잔틴식 러시아 교회가 탄생하게 되면서 러시아 문화를 형성하게 되지요.

이후 야로슬라프 시대(~1019)에는 황제가 자신의 아들, 딸을 노르웨이, 프랑스(헨리 1세), 헝가리, 독일, 비잔틴 제국과 결혼하는 도구로 삼으면서 유럽의 왕가와 혈족관계를 통해 국가 위상을 높이게 됩니다. 이러한 외국과의 관계 안정 이후 러시아는 내적으로 전제체제를 추구하면서 발전하게 되는데, 그러한 과정은 조그마한 공국단계의 국가들을 통일해나가는 단계로 발전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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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역사 연대표(현대사)

연대

사건

내용

1917

2월 혁명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혁명이 발생, 10월에 10월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부 구성

1918~1921

전시 공산주의

볼셰비키들의 개입으로 적군과 백군과의 내전 계속

1919

제 3 인터네셔널 설립

제 3 인터네셔널 성립

1921

해군 반란

크론슈타트 해군기지의 해군과 수비대가 노동자, 농민의 자유를 촉구하는 반란 시도


신경제 정책

레닌이 경제난 해결을 위해 NEP 정책을 실시

1922

소련 수립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수립

1924

레닌 사망

1월 21일 레닌 사망, 스탈린의 1국 공산주의와 트로츠키의 세계공산주의의 대립

1927

스탈린 집권

스탈린이 트로츠키 등을 추방함, 1929년 트로츠키의 영구 추방

1928

농업의 집단화

소프호스(국영농장)와 콜호스(집단농장) 제도가 시작됨

1936

대숙청 시작

키로프 암살과 함께 대숙청이 시작

1939

독소불가침 조약

독일과 조약이후 독일의 폴란드 침략 묵인

1941

독일의 침공

독일의 소련 침략으로 레닌그라드 포위, 2차 대전 참가, 44년 레닌그라드 봉쇄 해제

1945

2차 대전 승전

5월 8일 독일 항복, 8월에 일본 항복

1953

스탈린 사망

3월 5일 스탈린 사망

1956

흐루시초프 집권

스탈린을 비판하고 적극적 개혁을 주장


동유럽 폭동

폴란드 폭동, 헝가리의 학생 및 노동자 봉기 진압

1964

브레즈네프 등장

제한된 탈스탈린을 주장, 소련 중심의 소련/아시아/동유럽 공산화 추구

1968

프라하의 봄

체코 두브체크의 개혁 단행으로 체코를 점령하고 독트린 발표(브레즈네프 독트린)

1982

브레즈네프 사망

브레즈네프 이후 안드로포프 서기장도 1984년 사망, 85년 체르넨코도 사망

1985

고르바츠프 독트린

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을 내세우고 체제개편, 탈냉전주의 추구

1990

고르바초프 당선

고르바초프가 소련 초대 대통령 당선, 한소 수교를 맺음(노태우)

1991

소련 연방 해체

8월 보수진영의 구테타(실패), 12월 소련연방이 해체

1991

옐친 등장

러시아 대통령에 옐친 당선, 1996년 재선 성공

1999

푸틴 등장

1999년 푸틴이 대통령 대행으로 등장, 2000년 대통령 취임

이 연표는 <테마 러시아 역사>(이영범, 신아사, 2003) 책의
연표를 참조로 만들었습니다.
근데, 제가 추가하고 뺀 부분이 많아서 원전 연표랑 많이 틀려졌어요...
원작자님에게 지송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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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역사 연대표(표트르 대제~현대사회) 

재위왕

연대

사건

내용

표도르

1584~1598


모스크바 대공국 황제 : 표도르 이오아노비치가 즉위

1591

류릭 왕조 단절

황태자(드미트리)가 피살되면서 러시아 초기 류릭왕조는 단절

보리스

1598~1605


보리스 표도로비치 고두노프가 황제 즉위

1604~1613

러시아의 혼란기

왕조가 단절되면서 왕조가 혼란되고 가짜 왕들이 등장, 각지 의용군 등장

미일

1613~1645

로마노프 왕조

미일 표도로비치 로마노프가 황제로 즉위하여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됨

알렉세이

1645~1676


알력세이 미하일로비치의 즉위

1648

소금봉기 사건

농민들의 저항 시작

1654

우크라이나 연합

1월 8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재연합

1656~1658

스웨덴 전쟁

러시아가 스웨덴과의 북방영토를 놓고 전쟁

1666

종교 분열

러시아 정교회가 분열됨

1667~1671

스테판 라진의 반란

스테판 라진의 반란이 시작되었으나 1671년 진압

알렉세이

1676~1682


알렉세이 표도로비치의 즉위

알렉세예비치

1682~1682


이오안, 표드르 알렉세예비치 형제가 동시에 즉위

소피야

1682~1689


황녀 소피아가 7년간 통치함

1886

폴란드와 조약

폴란드와 영구 평화조약을 체결함

표트르 1세

1689~1725


표트르 대제가 즉위함, 서유럽화 정책을 추진시작

1695

해군창설

서유럽식 해군의 창설, 율리우스력 제도의 시행

1697~98

유럽 시찰

1차 유럽여행(1716~17년 2차 여행을 함)

1703

도시 건설

상트 페테르부르크시를 건설함(1713년 수도로 하여 이전)

1711

원로원 신설

원로원을 설치하고 귀족회의를 폐지함

1717

해외 원정

중앙아시아 원정을 시도

1721

임페라토르 사용

차르 칭호를 버리고 <임페라트르> 칭호 사용

1700~1721

북방 전쟁

스웨덴과 21년간 전쟁끝에 21년 협정체결(니스타트 화의)

예카테리나 1세

1725~1727

학술원 창설

1725년 학술원 창설, 1726년 비엔나 동맹 참가, 추밀원 설치

표트르 2세

1727~1730


표트르 2세 즉위

안나 이바노프

1730~1740

페르시아 협정

1732년 페르시아, 1735년 이란과 조약 체결

1739

벨그라드 평화조약

오스만과 조약을 체결

이반 6세

1740~1741


2년간 통치 후 추방

엘리자베타

1741~1761


엘리자베타 여제가 즉위

1741~1742

스웨덴과 전쟁

스웨덴과 전쟁 재개

1746

왕위계승전쟁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가/개입

1755

모스크바 대학설립

모스크바 대학 설립

1760

농노 이주

지주계급이 농노를 시베리아로 유형시킬 권한을 부여함

표트르 3세

1761~1762


2년 재위 중 궁정 쿠데타로 피살되고 아내가 집권함

예카테리나 2세

1762~1796


남편의 뒤를 이어 집권

1764

교회법

교회영지가 세속화됨, 이반 6세의 복위 실패

1771~

영토확장

1771년 크림 반도 점령, 1772년 1차 폴란드 분할로 영토 확장
캄차카 반도 및 알레스카 진출

1773

푸가초프의 반란

푸가쵸프의 농민반란이 있었으나, 1774년 정부군이 진압

1774

1차 러투전쟁

쿠츄크 카이나르지 조약으로 흑해연안일대, 크리미아 일부 획득

1791

2차 러투전쟁

흑해북부 투르크령 병합, 크리미아 종주권 확보

1795

영국과 연합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하여 영국 및 오스트리아와 연합

바벨 1세

1796~1801


1801년 아들 등이 개입된 쿠테타로 피살

알렉산드르 1세

1801~1825

전쟁 시도

1804~1813(페르시아 전쟁), 1806~1812(러투전쟁), 1808~1809(스웨덴과 전쟁), (1812 조국전쟁 : 나폴레옹전)

1815

신성동맹

빈체제 하에서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영국과 조약 체결

니콜라이 1세

1825~1855


니콜라이 1세의 즉위

1825

데카브리스트 반란

젊은 장교들이 엄격한 관료주의, 전제주의 및 농노제 폐지 주장 : 실패

1853

크림 전쟁

러시아의 남하 정책 좌절 : 파리 조약 체결

알렉산드로 2세

1855~1991


개혁 정치의 시도

1861

농노제 폐지

1861년 농노제 폐지

1884

개혁 시도

토지제, 재판제, 교육 등에 대한 개혁 추진, 지방자치회 결성

1881

황제 암살

인민의 자유를 결성한 급진 테러단체에 의해 황제 암살, 개혁 중단

알렉산드로 3세

1881~1894


개혁 정치에 대한 반동으로 보수정치로 회귀

니콜라이 2세

1895~1917


니콜라이 2세 즉위

1904

러일전쟁

일본과 아시아 패권을 놓고 러일전쟁 발발 : 패전

1905

피의 일요일 사건

평화시위에 총기난사로 파업 시작, 1907년 1차 러시아 혁명 발생

1914

1차 대전 발발

1차 세계대전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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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역사 연대표(고대~이반 3세)

재위왕

연대

사건

내용

-

6세기

러시아의 등장

러시아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문서상에 나타나 있음

859

노르만의 침입

뱌라크족(바이킹)의 슬라브 영토 침략

류릭 공후

862

왕조의 시작

바랴크군 통솔자인 류릭이 1대 노브고로드 공후로 통치 시작

끼릴문자 창조

끼릴과 메포지가 그리스 문자를 모방한 끼릴 문자를 창조함

올레그 공후
(879~912)

882

루시의 통일

노브고로드  ~ 키예프의 고대 루시의 통일(키예프 루시 대공국 탄생)

907

비잔틴 원정

올레그 공의 비잔틴 원정 시작

912

비잔틴 동맹

키예프 루시 공국이 비잔틴과 동맹 관계를 맺음

이고리 대공
(912~945)

942

비잔틴 원정 실패

키예프 루시 공국의 비잔틴 원정 실패로 원정 중단(944년 강화 체결)

올가 여공
(945~962)

957

그리스 정교 수용

올가 여공이 비잔틴을 방문하여 그리스 정교를 수용

스뱌또슬라프
(962~972)

972

영토확장

스뱌또슬라프가 영토 확장정책을 실시하다, 972년 유목민족에게 피살됨

블라지미르
(980~1015)

988

그리스정교 수용

키예프 루시 공국이 정식으로 기독교를 수용함

야로슬라프
(1015~1050)

1015

야로슬라프 시대

야로슬라프 무드르이가 키예프 대공이 됨. <러시아 법전>이 편찬되고 소피야 대사원이 건립되었음

이쟈슬라프

1054~1077

폴로베쯔족의 침입

이쟈슬라프 야로슬라비치이 키예프 대공이 됨.
1061, 1068년 두 차례 폴로베쯔족의 침입을 받음

프세볼로드

1078~1093


키예프 대공 : 프세볼로드의 즉위

스뱌또뽈크

1093~1112


키예프 대공 : 스뱌또뽈크의 즉위

블라지미르

1113~1125


키예프 대공 : 블라지미르 모노마흐의 즉위

므스찌슬라프

1125~1132


키예프 대공 : 므스찌슬라프 블라지미로비치의 즉위

야로폴크

1132~1139


키예프 대공 : 야로폴크의 즉위

프세볼로트

1139~1146


키예프 대공 : 프세볼로트 올레고비치의 즉위

이쟈슬라프

1146~1154


키예프 대공 : 이쟈슬라프의 즉위

유리돌고루키

1155~1157


키예프 대공 : 유리 돌고루키가 즉위

안드레이

1169~1174


키예프 대공 : 안드레이 보고류프스키가 즉위

프세볼로트

1176~1212


키예프 대공 : 프세볼로트 3세가 즉위
세베르스키 노브고로드 공후 이고리는 폴로베쯔 원정에 나섬(1185)

유리

1212~1238


키예프 대공 : 유리 프세볼로도비치가 즉위

1237

몽골의 침입

몽골의 키예프 루시 침략으로 모스크바, 블라지미르가 황폐화 됨

야로슬라프
(1238~1246)

1238


키예프 대공 : 야로슬라프 프세볼로도비치 2세의 즉위

1240

바투의 침입

바투의 대군에 의해 키예프가 점령당함

알렉산드로

1252~1263


노브고로드 공후 : 알렉산드로 야로슬라비치 넵스키가 즉위

미하일

1304~1319


키예프 공국 : 미하일 야로슬라비치 트베르스키의 즉위

1312~1316

노보고로드의 반란

노보고로드인들의 키예프 공국에 대한 반란, 1316년 진압

유리

1319~1325


키예프 공국 : 유리 다닐로비치 3세가 즉위

이반 1세

1325~1340


모스크바 공국 공후 : 이반 1세가 즉위

1327

트베리인의 반란

트베리인들이 킵차크 한국에 대항하여 폭동을 일으킴

이오아느비치

1363~1389


모스크바 공국 공후 : 시메온 이오아노비치 고르드이가 즉위

1380

몽골군 격파

모스크바 공국군이 킵차크 한국의 마마이 대군을 격파

바실리이 1세

1389~1425


모스크바 공국 공후 : 바실리이 드미트리예비치 1세의 즉위

바실리이 2세

1425~1462


바실리이 바실리예비치 쫌느이의 즉위

이오안 3세

1462~1505


이오안 바실리예비치 3세의 즉위

1497

<수제브닉>법전

농노제를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수제브닉> 편찬

바실리이 3세

1505~1533


모스크바 공국 공후 : 바실리이 이오아노비치 3세의 즉위

1510~1517

영토 확장

1510년 프스코프 병합, 1517년 랴잔 공국 병합

이반 3세

1533~1584


모스크바 공국 공후 : 이반 바실예비치가 즉위

1547

황제 선포

이반 3세가 스스로 황제로 선포

1549

공포정치

젬스키 소보르 구성, 황실령 설치로 귀족을 누르고 중앙집권 강화

1552~1556

영토 확장

1552년 까잔 점령, 1556년 아스트라한 제국 병합

1570

노브고로드 점령

이반 3세에 의해 노브고로드 공국의 멸망

1582

시베리아 점령

까지크 대장 예르마끄의 시베리아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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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