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5화. 불교의 외침 - 이젠 인도를 떠나고 싶어요 ~

1. 인도에 불교가 없다?

불교의 종주국은 인도이다. 그러나, 기원후 5세기가 지나고 인도에서는 더 이상의 불교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티벳이나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불교의 교리 논쟁이 활발하게 펼쳐진다. 특히, 4세기 이후, 불교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지역은 중국과 한반도 등 동아시아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석가의 가르침이 재정리되어 대승 불교로 정립된 인도의 불교는 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정작 인도 본토에서는 불교의 힘이 사라졌다. 그 이유는 새로운 정권의 성립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마가다 왕국이 불교를 보호한 이래, 기원전 4세기 마우리아 왕조에서는 <왕이 곧 부처의 화신이다>라는 사상으로 불교를 옹호하였다. 대표적인 왕이 스스로 전륜성왕이라고 말하였던 아쇼카 왕이다.

기원후 3세기 까지도 인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조들은 불교를 인정하였다. 기원 전후 인도 남부에 브라만교를 신봉하는 안드라 왕조가 있었으나, 인도 중북부의 대부분 지역은 불교 문화와 간다라 미술을 인정하는 쿠샨 왕조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쿠샨 왕조는 쿠샨인(이란인) 계통의 왕조로 다양한 종교를 모두 인정하였다.

<쿠샨 왕조의 불상>

<쿠샨 왕조의 전성기>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2c)은 중국-이란-인도를 연결하는 헬레니즘 상권을 장악하면서 상권과 통행세를 받았고, 국경을 넘나드는 불자들을 보호하였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로 이르는 비단길과 인도를 거치는 바닷길은 불교 전파 경로와도 일치했다. 헬레니즘의 다체로운 문화는 대승 불교의 확대를 촉진하였고, 그 결과 중국, 한반도, 인도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4세기 말, 인도의 상황은 급변한다.

브라만 교를 신봉했던 아리아 인들의 강력한 국가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갠지스 강 유역에서 찬드라 굽타가 건국한 굽타왕조는 쿠샨 왕조를 멸망시키고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며 이민족들을 추방하기 시작한다.

투르크인, 샤카부족(석가부족), 이란인(쿠샨인)은 아리아인들의 세상에서 설 곳이 없었다. 이제 세상은 고대 브라만의 후손들이 아리아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리아인들의 고대 사상의 복구를 꿈꾸며 강력한 인도 민족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민족과 혼혈족, 반브라만 종교는 인도에서 추방되었다.

<4세기 굽타왕조의 영역>

그리고, 고대 브라만의 베다 문학을 재정리 하여 산스크리트 문학이 등장한다. 브라만교에서 유래한 힌두교가 인도 전통 민족 종교가 되었고, 인도인의 율법은 <마누법전>으로 정리되었다. 고대 브라만 민족의 위대함은 <대서사시>로 편집되었다. 그것이 유명한 힌두교 경전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이다.

대서사시는 고대 신인 브라만을 찬양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비슈누, 시바 등 고대적 요소를 갖춘 전통신을 아리아 부족의 현실에 맞게 재편한 것이다. 그리고, 힌두의 신은 인도인을 괴롭혔던 모든 이민족을 물리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대세는 <불교>가 아닌 <힌두교>였다.

그럼, 그동안 불교는 뭘하고 있었을까?

불교의 교리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지만, 강력한 굽타왕조에 맞설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특히 인도 북부의 불교 교단들은 이미 큰 싸움으로 지쳐있던 상태였다.

마우리아 왕조에서 쿠샨 왕조까지 이어지는 동안 불교는 북부 지역의 강대국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반면, 불교 사원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북방 이민족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하였다. 특히, 쿠샨 왕조 시기 불교 교단이 주적으로 삼았던 이민족은 <훈족>이었다.

중국의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중국에서 밀려난 훈족들은 끊임없이 인도 북부 지역을 약탈하였다. 이 훈족들은 동으로는 중국 북부로, 서로는 게르만 사회로, 남으로는 인도로 진출하여 기원후 세계사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준다. 인도의 고대 여러 왕조들이 이 훈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서유럽에서는 서로마의 멸망을 이끌었던 게르만족의 이동까지 훈족의 영향력이 미쳤다.

그나마, 이란인이 세운 쿠샨 왕조가 기원후 4세기 무렵까지 버틴 것은 왕조를 지지했던 불교 교단의 협조 때문이었다. 그러나, 쿠샨 왕조는 망했고, 불교 교단은 훈족과의 투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불교는 없었다.

힌두교의 복고주의는 불교 사상을 원시 브라만 주의로 돌려놓았다. 수드라 계급에게 평등은 더 이상 없었다. 바르나 제도의 계급 차별은 확고했고, 모든 직업과 주거, 결혼까지도 계급별로 차등을 두었다. 마누법전은 힌두교를 믿는 아리안 민족만을 위한 법이었다. 하층민에게 <해탈>의 기회는 없었다.

아잔타 석굴 : 인도양식과 이전 양식들이 결합한 인도적인 양식. 동아시아에도 많은 영항을 주었다.

2. 불교는 <밀교>가 되어간다...

아리아 민족 우월주의를 내세운 굽타 왕조는 7세기가 되기 전에 멸망한다. 7세기 무렵, 불교를 옹호하는 바르다나 왕조가 출현하면서 중국 불교와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대부분 인도의 작은 독립국들은 힌두교를 옹호하였다. 힌두교가 지배층의 종교로서 백성들을 통제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7세기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교리에 포섭되어 그 의미를 잃어갔다.

인도에서 대승 불교는 점차 <밀교>가 되었다.

힌두교를 믿는 아리아인의 탄압으로 종교 집회는 비밀스럽게 열렸다. 불교도들은 교리를 찾는게 아니라 종교 자체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점점 종교의 교리는 희박해지고, 절대자나 유일신을 찾는 신비주의 종교로 변질되었다.

초기 논리적인 불교에서 볼 수 없었던 주술 신앙도 등장한다. 미륵이 바람과 불, 홍수를 몰고와 세상을 정화시킨다는 믿음이 등장한다. 또 민간 신앙과 불교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민간에서 믿었던 수많은 신들이 불교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나마, 이런 변질된 <불교>조차 7세기 이후 사라져간다. 7세기 이후 인도에 마호메트의 이슬람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기본 사상은 <평등>이다. 계급간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와는 상극이었다. 하층민들은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가 싫어서 불교를 선택했지만, 이슬람교가 들어오자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한다. 어짜피 똑같은 <평등>을 주장하는 종교라면, 힘있는 <이슬람 정복자>들이 숨어지내는 불교도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10세기 이후 본격적인 이슬람 세계가 된 인도는 또 한번 문화적 격동을 경험한다. 힌두교 사원과 불교 사원은 동시에 파괴되었다. 이래 저래 불상은 정권의 놀림감이 되었다. 16세기 무굴제국이 성립했지만, 무굴 제국은 전통 아리아 종교인 힌두교와, 하층민 종교인 이슬람을 융합시키기에 급급했다. 불교가 설 자리는 없었다.

21세기 현재, 인도에서 불교도의 인구는 전체 인구 비율로 보았을 때 너무나 미미하다. 불교의 종주국은 대승 불교가 정립된 5세기 이후, 한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던 것이다.

3. 불교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중국 불교

5세기 이후, 불교의 종주국 자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은 유가, 법가 등 다양한 사상체계가 이미 정비되어 있었고,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는데 지장이 없는 선진국이었다.

중국과 인도는 전혀 이질적인 문화권이었다. 중국어는 한자(표의문자)이고, 인도어는 범어(표음문자)이다. 중국인들은 유가, 법가 사상등 국가와 인간의 사회적 현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반면, 인도의 불교는 인간의 인지구조를 <분석>하려는 특징을 가진 사상이었다. 인도는 수많은 소왕국이 분립하면서 생성과 멸망을 반복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면,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제외한다면, 비교적 통일 국가체제를 유지해왔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불교가 중국 사상계를 장악해 버린 황당한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리고, 중국은 자신과 다른 이 문화와 사상을 어떻게 중국식으로 바꿔 버린 것일까?

인도와 중국이 불교라는 문화를 공유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헬레니즘 문화 때문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문화권을 만들고 떠난 뒤, 인도는 쿠샨 왕조 카니슈카 왕이 서역 지배권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쿠샨 왕조 자체가 이란계 왕조였던 만큼, 쿠샨 왕조는 동서 교역에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쿠샨 왕조는 동아시아의 중국, 한반도부터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무역을 전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대승 불교가 아시아 곳곳에 전파된 것이다. 특히, 쿠샨 왕조와 상업을 하던 실크로드 중간 중간의 국가들은 불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중국의 한 왕조까지 불교가 전파된 것이다. 또, 당시 인도와 중국간 직접 교역로는 바닷길이었기 때문에 <남방 바닷길>을 통해서도 불교 경전이 한 왕조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처음 접한 중국의 한족들은 불교를 사상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중국의 한나라는 한무제라는 강력한 왕이 <유학>을 국가 사상으로 공포했던 나라였다. 한 왕조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유학을 열심히 공부한 뒤, <구품관인법>이라는 관리 임용에 채용되어야 했다.

한 나라에서 불교는 중국 전통 사상인 도교에도 밀렸다. 한 나라의 지배층은 고품격 품위 유지 사상으로 도교의 <황로사상>을 숭배하였다. 황로사상은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철학을 지배층의 교양철학으로 받아들인 것을 말한다.

처음 불교를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불교를 도교와 같은 교양 철학으로 생각했다. 도교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라>라고 말한 것은 한나라 지배층의 우아한 집권 철학이었다.(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말로만 생색내기 위한 교양 철학이었지만....)

불교 역시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대승 불교의 <공> 사상을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허무함이겠구나. 아무 것도 없는 상태는 노자가 말한 자연으로 복귀한 상태이다. 공이란 곧, <없다>는 것이 아닌가? 공이란 것이 태초의 허무함이라면, 곧 자연 상태가 아니겠는가? 석가의 가르침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구나....

결국 한나라 지배층이 생각한 불교는 도교와 같은 것이었다. 현실 상태에서 필요한 것은 유학이었고, 교양이나 취미로 알아야 할 것이 도교나 불교 따위였던 것이다. 교양이나 취미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따라서 도교와 불교는 하나의 패키지 세트로 묶여서 교양철학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심심할 때 생각해보는 교양 철학이 어떻게 유가 사상과 맞먹는 거대한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자, 그럼 그 철학자들 이야기를 한번 시작해볼까?

 

   - 참고할 만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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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크리스마스와 12월 25일 - 역사속에서 위조된 어두운 이면들...

이 세상 모든 현상을 역사로 설명하는 블로그이다 보니, 크리스마스마저도 역사 속에서 살펴보려는 무모(?)한 시도를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마구잡이 글이 될지도 모르겠어요.

성탄절이란 말은 무엇이지?

크리스마스의 한국식 번역어인 성탄절은 말 그대로 <성스러운 예수의 탄생일>을 말합니다. 크리스찬들의 용어이지요. 그런데, 크리스마스(christmas)란 말은 원래 <탄생>의 의미를 가진 단어는 아니였습니다.

크리스마스란, 북유럽 계열의 앵글로-섹슨 계열의 언어 christes-Masses란 단어에서 비롯되는데, 그 뜻은 <크리스찬의 미사>라는 뜻이었습니다. christes는 <예수를 상징하는 크리스찬의 약속된 단어>이고, Masses는 <미사>를 뜻하는 예배 단어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크리스마스를 <성탄절>로 번역하고 있는데, 사실 이 번역은 12월 25일이 예수 탄생일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번역일 뿐, 크리스마스의 본래 뜻과는 약간 다릅니다. 원래 크리스마스의 본 뜻은 <크리스찬들의 미사>라는 뜻이니까요.

또 하나, 크리스마스를 간단하게 X-mas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의 X는 고대 헬라어에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단어의 첫 번째 글자가 X이기 때문에 X-mas라고 하기도 합니다. 또, 크리스마스 노래에 많이 들어가는 <노엘>이라는 말은 <성탄>이라는 말의 불어식 표현입니다.

그럼, 우리가 알고 있는 크리스마스의 본 뜻은 예수의 탄생일이라는 의미와 약간 다르겠네요. 예수의 탄생일은 보통 12월 25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사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일단 예수의 성탄일을 12월 25일로 규정한 종교는 <카톨릭 계열>입니다. 역사적으로 12세기 이전까지의 크리스트교는 서방 유럽의 카톨릭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또 하나의 크리스트교 계열인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1월 6일을 성탄절로 여기고 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후계자로서 중세시대 또 하나의 크리스트교 중심인 정교회에서는 서유럽과 다른 기준으로 예수 탄생일을 정한 것이죠. (1월 6일은 로마 기준으로 황제의 날을 말합니다.)

그리고, 개신교라고 불리는 14세기 이후의 종교들의 기록에서는 <성탄절>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성탄절에 예배를 드린다던가 성탄 축하 의식을 했다던가에 대한 기록이 없다고 하네요. 최소한 예수 탄생의 날을 기념하는 것은 중세 이후에 이루어진 것 같습니다.

크리스찬들과 구약 성경을 공유하는 이슬람의 무슬림들도 예수의 탄생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수는 이슬람교에서도 중요한 예언자이니까요. 그러나, 오랫동안 예수살렘을 사수한 이슬람 교도들은 예수의 탄생일이 12월 25일이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슬람의 기록에 예수의 탄생일은 나오지 않으니까요. 또, 이슬람 사회에서는 예수를 <신>으로 보지 않고, <예언자>로 보고 있기 때문에 굳이 탄생일을 기념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슬람이 말하는 예수 탄생의 <성탄>은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인간 선지자(또는 예언자)로서의 예수 탄생을 가르키는 말입니다.

초기엔... 크리스트교를 반대하면서 죽어간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 왜 고대 유럽 사회에서는 12월 25일을 성탄절로 규정한 것일까요? 근거가 있는지 한번 볼께요.

일단, 예수 탄생 연도를 기록한 책은 없습니다. 예수가 태어날 당시 로마사회에서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고, 극심한 탄압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 황제가 그리스도인을 탄압한 것은 <황배숭배>를 우상숭배로 여기는 십계의 계율 때문이었습니다. 또, 그리스도인의 일신교 사상은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비롯된 로마의 다신교 체계를 위협한 것도 있었죠. 거기에 선지자, 예언자들이라고 자청한 이들의 포교와 지역 거점주의가 로마 행정체계에 큰 위협을 준 것도 사실입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누군가의 생일을 기록할 여유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죽음>이었죠. 핍박 속에서 죽은 뒤 천국에 간다는 <내세>의 관념은 탄생일보다 사망일을 기억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심어놓았죠. 예수의 죽음과 부활부터 예수의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그리스도의 기록은 남다르게 탄생보다 죽음에 대한 기록이 많습니다.

크리스트교를 로마 황제가 인정한 것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입니다. 이후 5세기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크리스트교는 로마의 국교가 됩니다. 그러나, 이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크리스트교를 인정한 것은 <크리스트인>들의 생활양식이 제국의 안정을 추구하는 로마의 방향과 일치한다는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죠. 이상한 내용이간 하지만, 실제 콘스탄티누스 본인과 지도층은 제우스교, 미트라교를 신봉하기도 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크리스트교을 국교로 인정하면서 다른 종교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귀족들에게 거부당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큰 전쟁을 몇 차례 치르면서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인정하였습니다.

크리스트교를 박해할 때 어머어마한 자들이 죽었다면, 크리스트교를 인정하지 않았을 때 죽은 자들도 어마어마 했습니다. 평화로울 때는 종교가 사회를 지탱하는 역할을 하지만, 갈들이 있을 때의 종교란... 너무 끔찍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결국 표면적인 전쟁의 원인은 크리스트교 때문이었다고 기록되었지만, 사실 황제가 많은 사람들을 죽인 이유는 약간 다를 수 있습니다. 수많은 다양한 신을 믿는 귀족들이 존재하는 한 통일된 제국을 재건하려는 황제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탈세하지 않고, 깨끗하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당시 크리스트 백성들을 회유하면서 정적들을 죽이고, 통일된 사상체계를 만들려는 것이 황제의 목적이었으니까요.

신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을 자의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인간이다.

정치적인 이유로 크리스트교를 로마에 도입하려던 황제들은 크리스트교의 교리를 로마 제국의 체계에 맞게 통일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동방에서 진시황제와 다리우스 2세가 통일제국의 사상과 문화, 경제체계를 통일했듯이, 서방의 로마 황제들도 국가의 통일성을 위해 사상을 통일할 필요가 있었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 로마체계에 맞는 크리스트교의 사상통일에 들어갑니다. 그 공의회에서 결정된 것이 흔히 말하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설>이죠. 밀려난 아리우스파는 북쪽으로 넘어가 게르만 민족들을 교화하면서 명백을 유지해 나갑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 : 니케아 공의회)

예수의 생일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직접 주제한 니케아 공의회 직후입니다. 공의회에서 직접 논의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공의회 직후 그리스도의 미사(christmas)가 공식 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리고 12월 25일에 성탄 축하를 했다는 기록이 354년 처음 나타납니다. 379년에서는 동로마의 근거지인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성탄 축하 의식이 시작되었고, 이후 카톨릭을 신봉하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 의식을 따라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예수가 신인가 아닌가부터, 예수의 탄생일까지 모든 것은 로마 제국의 황제와 각 행정단위 주교들이 모여 결정한 것이 되어 버렸네요. 니케아 공의회와 이후 수차례 열린 공의회에서 결정된 사상들은 그대로 종교불문법이 되었습니다. 중세시대에 좀더 진보적인 종교이론을 내세운 카다리파나 왈즈파, 위클리프파 등은 모두 이단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아울러 예수의 탄생일에 의문을 품은 이들 역시 모두 <악마, 마녀>로 분류되어 사냥당하고, 처단되었습니다. 축복받은 날을 부정하는 자들은 악마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예수 탄생일은 로마 농경신과 페르시아 태양신의 합작품...

예수의 생일을 정한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의 콘스탄티누스였지만, 그 기원은 <명상록>의 저자인 철인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대 로마에서는 추수감사제가 12월에 있었습니다. 이 추수감사제의 이름은 <Saturnalia : 새터날리아>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우리 식으로 말하면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이나 삼한의 5월제 같은 수확제였죠.

이 날은 농경신인 새턴(Saturn)에게 제물을 바치고 풍년을 감사하며, 모두가 술을 먹고 즐기곤 했습니다. 이 축제는 12월 17일에 시작되어 24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 주간은 모두에게 축복받은 주간이었죠.

이 축제가 12월 24일 끝나는 이유는 다음날인 25일이 <동짓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음력달력과 다른 로마의 태양력에 따르면 12월 25이 가장 낮이 짧은 날이죠.

그런데, 페르시아교에서도 12월 25일은 태양신 미트라의 생일입니다. 다신교인 로마에서 미트라신도 믿었던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동잣날 미트라신이 태양빛의 축복을 준다는 메시지를 반포합니다.

<새로 시작되는 한 해동안에 미트라신은 너희에게 축복을 내릴 것이다.>

이것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예수의 생일에 합쳐 버린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농경신, 페르시아의 미트라신, 그리고 예수라는 새로운 신을 통합하여 통일된 사상체계를 마련한 것이죠. 12월 25일은 이들 신들이 모두 합쳐진 날입니다. 특히 콘스탄티누스의 정적인 막센티우스가 제우스교를 신봉한 만큼, 그를 이기기 위한 종교적 연합이 필요하였죠. 물론, 합쳐진 종교의 기본 뿌리는 <크리스트교>였고, 모든 종교가 크리스트교의 12월 25로 통합된 것이지요.

가톨릭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정치적 목적을 대변하는 용어...

유명한 일화를 하나 볼까요? 콘스탄티누스가 전쟁에 나갔을 때, 불타는 십자가와 함께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그 계시를 장병들의 방패에 새겨 전쟁에 임하게 하였습니다. 그 계시의 내용은 <이 표적으로 승리를 얻으리라>라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승을 거둡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왕관에 예수가 십자가 처형에서 나온 못을 붙이고, 자신을 위대한 왕이라 칭하죠. 그러나, 당시 진보적인 종교인들은 콘스탄티누스의 독선은 종교적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고 말하였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 반대파들을 모두 이단으로 몰아 추방하였습니다.

당시 다수파인 아리우스파가 추방된 이유는 <예수를 신이 아닌 인간 선지자>라고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이슬람이 주장하는 <예수는 선지자>라는 부분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예수의 생일을 <태양신>의 생일로 정한만큼, 예수의 신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부분도 고려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또, 예수가 신성해야 예수의 후원자인 황제가 신성한 존재가 되거든요.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예수의 신성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인간으로서의 예수 부분>의 기록은 모두 말살하고 말았습니다. 지금와서 <새로운 성경>이 있다던가, <프리메이슨>이 가진 문서가 있다던가하는 주장들은 모두 예수의 인간 기록이 말살되었기 때문에 더 부각되는 것 같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을 기독교의 후원자라고 말하고 황제를 <신성한 자>로 표현하였습니다. 그의 목적이 원래 <황제권 강화>였으니까요. 그는 동방의 다양한 종교와 조로아스터의 신, 로마의 신들, 그리고 예수를 모두 합하여 새로운 종교 이름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곧 <카톨릭>입니다. 카톨릭이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보편적인 것>이라는 뜻인데, 모든 종교를 융합하여 보편적인 하나의 종교를 완성했다는 뜻으로 씌는 말입니다.

또, 황제 자신이 태양신 미트라를 신봉한 이유로 기존 안식일도 바꿔 버립니다. 원래 유대교의 안식일은 토요일입니다. 이것은 로마에서 농경신 새턴의 날이지요. 그러나, 황제가 중요하게 생각한 날은 12월 25일, 즉 태양신 미트라의 날이기 때문에 안식일을 일요일(Sunday)로 바꾸게 됩니다. 쉬는 날이 일요일이 된 것이지요. 미트라 신과 연관이 깊은 기독교의 원류 조로아스터교(배화교)에서도 일요일을 신성한 날로 여긴답니다. 조로아스타교는 아예 불과 태양 자체를 신으로 여기기 때문에 <화교>라고도 합니다.

사실, 불교, 배화교, 마니교, 정교회,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들이 서로 서로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고 서로간 교리에 영향을 주고 있지만, 이 부분을 다루면 종교인들에게 뭇매를 맞기 때문에.... 아직까지 이 부분을 포스트하는 역사학자나 종교학자는 없는 듯 하네요. 그리고, 종교는 종교로서 가치와 목적이 있기 때문에 굳이 다룰 필요도 없고...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주저리... 이야기들...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것이 산타크로스입니다. 신타크로스의 어원은 보통 <성 니콜라스>에서 비롯되어졌다고 합니다.

3세기 경 살았던 니콜라스는 실존인물입니다. 그는 당시 고대 그리스와 페리시아의 접경지역인 소아시아의 미라라는 곳의 대주교였다고 합니다. 그는 남몰래 어린아이들을 도왔다고 전해지며, 그 선행이 알려져 카톨릭 교회에서는 그는 <어린이를 보호하는 성자>라는 칭호를 내립니다.

이후 네덜란드인들이 신대륙인 미국의 뉴암스테르담(뉴욕)으로 건너갔을 때, 니콜라스 상을 가지고, 그의 교회를 짓기도 하였습니다. 네덜란드인들 사이에서는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신트 클라우스라는 사람을 믿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니콜라스 이야기와 신트 클라우스라는 이야기는 훗날 미국을 정복한 영국인들에 의해 영국식 발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신트 클라우스가 <산타-클로스>가 된 것이죠. 물론, 이 이야기는 가설입니다.

여기에 19세기 미국의 문학가들은 산타클로스에게 사슴이 끄는 썰매라는 선물을 줍니다. 아예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라는 컨셉으로 하늘을 날게 하기도 하죠.

또, 1931년 미국의 선드블롬이라는 사람은 산타크로스에게 빨간 옷을 입혀놓습니다. 그런데, 산타크로스의 빨간 옷은 당시 코카콜라의 이미지를 고려하여 색깔을 강조한 것이고, 산타크로스의 흰 수염은 콜라에서 나오는 거품을 상징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약간 상업적인 컨셉과 맞아 떨어져 산타크로스의 이미지로 굳어져 버렸네요.

루돌프는? 루돌프는 원래 1939년 미국 백화점에서 홍보를 위해 만든 빨간코의 순록입니다. 순록은 원래 빨간 코가 아니지만, 코에 염증이 생기면 코가 빨갛게 된다고 하는 군요. 루돌프는 지병을 앓고 있네요.

크리스마스 캐롤은 원래 영국 고전주의 학파의 음악 형식입니다. 캐롤이란, 동일한 후렴을 반복하면서 즐기는 노래 형식인데, 크리스찬 국가인 영국에서 이 형식으로 크리스마스 노래를 만들었기 때문에, 그냥 모두들 캐롤이라고 부른답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유명한 인종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아름다운 전나무 모습을 보고 장식을 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고 합니다. 트리의 꼭대기에는 별을 장식하는데, 이것은 동방박사들이 예수를 찾을 때 빛나던 별을 상징합니다.

크리스마스 자선냄비는 난파선과 관련있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해안에 표류하던 난파선이 한척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너무 춥고 배가 고팠죠. 이 때 한 사람이 커다란 냄비를 길 한가운데 놓고 말하기를, <이 냄비가 끓게 합시다>라고 했답니다. 사람들은 그 냄비에 돈과 먹을 것을 담아주여 난파선에서 내린 사람들을 도왔다고 하네요. 그 때부터 구세군 모금 활동은 냄비로 하고 있답니다.

크리스마스 카드는 19세기 중반에 콜 경이라는 사람이 일일이 편지를 쓰지 않고 그림이 인쇄된 대량의 카드에 장식과 인사를 적어 넣어 한번에 보낸 것에서 유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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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3장. 세계법왕이 등장하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의 불교 전파 개념과 이후 인도불교가 중국 불교로 넘어가는 과정을 간략히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1. 기원전 4세기 - 전륜성왕이 등장하다

기원전 5세기 마가다국에 의해 보호받던 인도의 불교는 기원전 4세기 마우리아 왕조가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면서 또 하나의 변혁기를 맞이합니다.

마우리아 왕조는 마가다국과는 다른 규모의 북인도 전체 통일왕조였습니다. 따라서 석가가 주장한 연기설 정도의 부족단위 통합 논리는 이제 마우리아 왕조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모든 국가와 민족을 통합할 통일왕조의 이념이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이 통일왕조의 이념은 기원전 4-3세기로 접어들 때 즉위한 3대 아쇼카왕 때 <소승불교>이념으로 정립됩니다. 아쇼카 왕은 인도전역을 통일하기 위한 노력으로 정복전쟁을 계속하였는데, 그의 정복전쟁은 잔혹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쇼카왕이 불법에 귀의하면서 독특한 세계제왕의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특히 이 때 나타난 불교적 왕자관이 바로 <전륜성왕>사상이었는데, 이 전륜성왕 사상은 고대 인도 왕권 강화의 핵심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원래 초기의 인도 도시국가에서는 <국왕>에 대하여 바라보는 관점이 여러 개였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브라만교에서지지하는 입장으로 <왕권신수설>의 입장입니다. 왕권신수설이란, 국왕의 정통성이 곧 신으로부터 나왔다고 믿는 사상으로, 국왕권과 브라만의 제사권이 견고하게 결합된 입장이었습니다.

반대로, 부처와 같이 평등사상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왕권을 <사회계약설>적인 입장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입장은 초기 씨족공동체였던 사회가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씨족구성원 전체의 합의에 의해 국가를 운영한다는 입장으로, 석가의 <공화제론>의 근본 이념이었던 입장입니다.

이 두 입장은 석가가 죽은 후 하나로 융합되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제왕>사상입니다. 불도에서는 이 세계제왕을 <전륜성왕>이라고 합니다. 전륜성왕이란, 세계제왕으로서 왕에 오른 자는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 무력으로 세상을 통치하지 않는 자입니다. 전륜성왕은 도솔천에서 내려온 세계를 교화하기 위한 법왕으로, 정법(샤크라)에 의해서 세상을 통치하고, 이상적인 도덕으로 불심자들을 교화하는 법왕입니다. 즉, 불법의 내용이 왕권의 정당성과 의무를 규정하면서, 왕권을 이상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이 전륜성왕을 돕기 위하여 미륵불이 출현하여 백성을 교화한다는 하는데, 이 미륵불이 하늘에서 하생하는가, 아니면 귀족들이 미륵으로 환생하는가 등의 논의에 따라 미륵불 상생신앙, 하생신앙이 등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미륵은 곧 전륜성왕을 돕기 위해 세상에 내려온 하늘의 수호자들입니다. 이 논리는 곧 왕은 전륜성왕, 귀족은 미륵불이라는 개념으로 도식화되어 이후 중국, 한국, 일본에서 왕권 강화의 논리로 이용됩니다.

전륜성왕의 개념

산스크리트 어로는 akra-vartirajan. cakravartin이라고도 씁니다. 고대 인도에서 유래한 세계의 통치자를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산스크리트 cakra(輪)와 vartin(轉)이 합성되어 파생된 말로서 '자신의 전차바퀴를 어디로나 굴릴 수 있는' 곧 '어디로 가거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통치자를 말합니다. 전세계를 통치한다는 전륜성왕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BC 3세기 마우리아 왕조 시대에 아소카 왕의 업적을 칭송하는 경전 및 기념비에 나타납니다. 이 세기의 불교와 자이나교의 사상가들은 보편적 군주관에 정의와 도덕의 수호자라는 측면을 부각시켰습니다. 전륜성왕은 속세에서 석가모니와 같은 존엄을 지닌 존재로서 32상(相)등 석가모니와 공통되는 다수의 특성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대비바사론 大毘婆沙論〉 등의 문헌에서는 전륜성왕에 4종을 구별하여, 금륜왕은 수미4주(須彌四洲) 곧 전세계를 통치하며, 은륜왕은 3주를, 동륜왕은 2주를, 철륜왕은 남염부주(南閻部洲) 1주를 통치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왕경 仁王經〉 및 〈보살영락본업경 菩薩瓔珞本業經〉 등에서는 이러한 설을 더욱 발전시켜 4종의 전륜성왕을 보살의 수행 단계에 배당했으니, 곧 철륜왕은 십신위(十信位), 동륜왕은 십주위(十住位), 금륜왕은 십회향위(十廻向位)에 배당했습니다. 이러한 전륜성왕의 개념은 왕권 강화 및 호국불교사상의 고취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 전륜성왕에 대한 다움 백과사전에서 발췌 -

실제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불법이 전파되면서, 이 아쇼카왕을 전륜성왕으로 인식하게 되고, 이 전륜성왕의 세계제왕 관념을 각국이 받아들어 <부족사회를 초월한 보편적 지배원리>를 체계화 시키기도 합니다.

2. 기원 후에는 대승불교가 발전하게 되다

기원후 1-4세기 인도 남부에서 성장한 쿠샨 왕조는 아쇼카왕으로 대표되는 마우리아 왕조의 <소승불교>보다 더 대중적인 <대승불교>로 나아갑니다.

특히 2세기 카니슈카왕 대에는 중국, 이란, 인도를 연결하는 통상로를 인도가 장악하여  상세와 통행세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무역의 발달은 곧 서아시아, 동아시아로 불교가 전파되는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이 때의 불교는 개인적인 해탈을 추구하는 과거의 소승불교가 아니라, 대중구제를 염원하는 대승불교적 성격이었습니다.

특히, 대승불교가 <사회적, 정치적> 성격까지 지니게 된 것은 당시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으로 남은 <헬레니즘의 유산> 때문이었습니다. 이 당시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적극적인 동서교류 및 아시아 내부의 교류가 활발해 지면서 간다라 미술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카니슈카왕은 간다라 미술을 완성하여 동서문화의 융합을 추구하는 동시에, 이 융합된 문화를 동아시아로 적극 전파하였습니다. 이 당시가 바로 불교의 전성기였고, 동아시아 각국이 불교사상을 초보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인도편에서의 불교서술은 여기까지가 끝입니다. 왜냐면, 4세기 이후 북인도에서 인도민족 고유 왕조인 굽타왕조가 등장하면서, 다시 고대 인도 문화가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굽타왕조의 찬드라 굽타는 가장 이상적인 아리아 문화를 추구하였고, 인도 고전의 황금기로서 <힌두교>를 국교화 합니다. 이 힌두교는 브라만교의 전통을 확인하는 종교로서 철저한 바르나 제도를 추구하였고, 마누법전,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와 같은 인도적 문학과 종교를 완성하므로서 점차 인도 내에서 불교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이후 7세기 북인도의 바르다나 왕조 등이 불교 보호에 노력하였으나, 불교는 점차 힌두교에 포섭되어 소멸되었고, 13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왕조가 인도 곳곳에 성립함으로서 인도의 종교는 <힌두교 vs 이슬람교>의 구도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 4세기 이후의 불교는 인도가 아니라 중국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인도 불교를 여기서 마치고, 인도 불교의 중국 전파 과정과 중국에서 불교에 대한 이해 부분을 전개해보겠습니다. 이 포스트는 매우 짧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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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미아드 왕조와 아바스 왕조의 전성기

1. 이슬람 전통의 옴미아드 왕조(7-8c)

무하마드가 죽은 뒤 아랍인들은 후계자로서 <칼리프>를 선출하였습니다. <칼리프>를 우리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제사장>, <교회지도자>가 되겠네요. 아랍인들은 칼리프의 지도 아래 대규모의 정복사업을 시작하였고, 가장 먼저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시리아, 이집트를 비잔틴으로부터 빼앗습니다. 또 사산조 페르시아는 아예 멸망시켜 버립니다.

하지만, 정복지가 확대되면서 아립인 지도자간의 내분이 시작되었습니다. 실제, 3대까지의 칼리프는 마호메트 가족 밖에서 선출했는데, 이것은 유목민족의 부족적 관습에 의거한 것이였죠. 하지만, 정복지가 늘어나면서 아립인 지도자들의 갈등이 심화되기 시작합니다. 마호메트의 조카이자 사위인 알리가 4대 칼리프로 선출되었는데, 이것은 마호메트 직계가 칼리프가 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마호메트의 가족들은 사위 알리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칼리프는 세습할 것, 마호메트의 코란에는 주석을 달지 말고 신성하게 여길 것을 주장합니다. 이것을 이슬람에서는 <시아파>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다수의 이슬람 교도들은 칼리프는 폐쇄적으로 구성하지 말고 선출할 것, 코란에는 주석을 달 수 있도록 할 것을 주장합니다. 이 다수의 이슬람 교파를 <수니파>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와중에 알리가 암살당했습니다. 보통 무하마드의 사후 칼리프를 선출하던 알리까지의 시대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고 합니다.

이 때 알리와 대립하고 있던 시리아 총독 무와이야는 <다마스쿠스>에 <옴미아드 왕조>를 개창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수니파>적 사고방식을 가진 왕조네요. 이 옴미아드 왕조는 7-8c 이슬람의 전성기를 열었던 왕조입니다. 7c 말경에 아랍어를 공용어로 확정하였고, 아랍통화를 제정하면서 <아랍>이라는 민족적 단위가 형성되었습니다. 원래 아랍인은 아라비아 반도와 시리아 지방의 사막에서 오아시스 농업에 종사하던 유목민을 칭하는 말이지만, 옴미아드 왕조의 영토 확장과 아랍어 수호 운동으로 아랍이라는 민족단위는 더 확대됩니다. 이후 정복사업이 활발해지면서 이슬람교도로 개종한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이로써 아랍인이라는 개념은 더욱 확장되어 갑니다.

당시 옴미아드 왕조의 점령지역은 아주 넓었고, 영토확장은 거의 지는 경우가 없이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시리아로부터 시작하여 사산조페르시아, 이집트, 중앙아시아, 인더스강 유역, 동로마령 카르타고, 서고트 왕국(에스파냐)에 이르기까지 대제국을 건설하였죠. 그러나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마르텔에게 패함으로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 전체를 정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 옴미아드 왕조의 정복사업으로 광대한 이슬람 세계의 영역권이 오랜 시간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이렇게 아시아 - 아프리카 - 유럽에 걸친 3대륙의 대 제국이 형성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새로운 종교인 이슬람교로 정치적인 단결이 쉽게 이루어졌고, 지하드(성전)이라는 교리가 정복사업과 딱 맞아떨어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당시 국제정세가 이슬람에게 유리했습니다. 비잔틴 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는 오랜 항쟁으로 상호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또 시리아와 이집트의 경우, 오랜 기간동안의 식민지 상태로 남아 이슬람의 정복사업이라는 것이 크리스트인들에게 위협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누가 점령하든 식민지 생활만 청산되면, 종교 교리는 무시해도 된다고 여긴 것이죠.

세 번째로는 개종자에게 부여한 면세의 특권입니다. 이교도에게는 이슬람교를 강요하지 않고 관대하게 대하면서 공납만을 요구했으며, 개종자들은 세금의 특혜를 주었습니다. 즉, 종교를 전파하는 <지하드>를 목적으로 삼았기에, 살기 좋은 땅과 전리품을 차지할 뿐 선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착취하지 않은 것입니다. 특히 이슬람교 지도자들은 정복지를 지배할 때, 이슬람교도가 아닌 사람도 세금을 내면 이슬람교도로 개종할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들이 이슬람교가 됨으로서 <지하드>를 완성함과 동시에, 이슬람 문명권 안에서 의사, 통역, 법관 등 다양한 계통의 직업을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네 번째는 이슬람교의 교리가 단순하고 평등사상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목민족들은 이슬람 교도들의 승승장구를 알라신의 가호로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슬람교는 사제, 신관, 종교계급이 없는 평등한 종교였습니다. 이슬람교는 원칙적으로 모든 신자들은 인종, 성별, 계급, 재산에 상관없이 평등함을 강조합니다. 실제, 투르크계 인종들과 몽골인들도 이슬람교로 많이 개종했습니다.

다섯 번째는 이슬람교에서는 아랍어 외에 코란의 번역을 금지했습니다. 따라서 이슬람교가 되어 코란을 읽고, 이슬람의 혜택을 받으려면 아랍어가 필수가 되었고, 아랍어를 중심으로 성립된 민족공동체 의식은 쉽게 깨지지 않는 것이였습니다. 민족의 구성단위 중 제일 중요한 것이 언어의 동질성이라고 합니다.

2. 아바스 왕조(8c-)

750년 무하마드의 일족인 아바스 가문이 시아파의 전통을 내걸고, 이란인 계통의 무슬림의 도움을 얻어 옴미아드 왕조를 타다하고 아바스 왕조를 개창하였습니다. 그 성립 배경을 보면 영토 확장으로 이민족 이슬람교도가 상당히 많아졌는데, 이들이 초기 이슬람교도와 정치적으로 평등함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페르시아 이란계 무슬림들이 체제 불만을 갖은 것에서 비롯됩니다.

아바스 가문은 시아파 전통을 내세웠지만, 실제 주도권은 이란인 계통의 무슬림이였습니다. 결국 시아파는 탄압당하고, 이란인도 우대받는 왕조가 성립되었습니다. 아바스 가문은 <바그다드>를 수도로 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의 국가를 확립합니다.

아바스 왕조는 재상 중심의 동방적 관료제와 상비군을 두었는데, 여기서 아랍인의 특권은 없었습니다. 중요한 직책에는 이란인도 우대받았고, 궁정의 친위부대도 이란계 이슬람교도, 투르크계 노예병(마물루크) 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세금제도에 있어서도 아랍인, 비아랍인은 차별이 없었습니다. 이슬람교도이면 누구나 똑같이 인두세를 면제 받았고, 토지세는 누구나 공평하게 내야만 했습니다. 아바스 제국은 민족차별법을 폐지하여 이슬람법에 기초하여 통치하는 진정한 이슬람 제국을 성립시킨 것입니다. 이슬람 제국에서는 누구나 <아랍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3. 아바스 왕조의 국가 성격

아바스 왕조의 국가 성격을 한마디로 요약해보면 <페르시아적> 성격이 우세합니다. 즉, 이란계 페르시아 문화가 이슬람 곳곳에 침투한 흔적이 보입니다. 페르시아적인 궁정조직, 동방적인 관료제도로 이루어진 국가이지요.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느슨한 봉건제도>가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아바스 군대가 이민족이 많다는 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아바스 왕조에서는 이란계 용병 및 투르크계 노예병(마물루크)가 주류를 이루면서 보수로 토지를 급여했습니다. 즉, 군역의 댓가로 용병에게 토지를 주는 봉건제도가 유행이였죠. 또 정복지 군사령관을 겸한 행정관료(태수)를 임명하는 제도는 점차 독립적인 성향의 봉건영주를 육성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아바스 왕조는 문화가 크게 발전한 시기의 국가입니다. 아바스 왕조는 칼리프가 학문, 예술을 장려하고 학자를 보호함으로 문화의 수호자임을 자처했습니다. 특히, 그 지리적 위치가 동서문화의 요충지로서 중계무역의 독점과 무역으로 대도시의 부가 쌓으면서 바그다드, 카이로 등은 예술과 학문의 도시로도 성장하게 됩니다.

이 아바스 왕조는 옴미아드 왕조를 뒤이어 영토 확장을 시도했습니다. 옴미아드 왕조가 지중해쪽에 주력한 영토확장이였다면, 아바스 왕조는 동방 진출에 적극적이였죠.

특히, 중국 고선지 장군이 석국(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을 점령하자, 석국의 왕은 아바스 왕조에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로서 거대한 30만의 아바스 대군과 중국군의 아시아 대전쟁이 발생하였는데, 이 때 아바스 왕조는 중국군을 격파하고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거머쥐게 됩니다. 이 때 포로로 잡힌 중국의 제지 기술자에 의해 종이가 이슬람 세계에 전파되었다고도 합니다.

4. 이슬람 세계의 분열

아바스 왕조가 8c 개창하자 옴미아드 왕국의 일족은 이베리아 반도의 코르도바에 후옴미아드 왕조를 개창합니다. 후옴미아드 왕조는 아바스 왕조와 마찬가지로 지도자가 문예를 진흥하여 <코르도바>는 서방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잡습니다.

8c 후반 이후 아바스 왕조의 <느슨한 봉건제도>는 각각의 봉건영주들이 독립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10c 초에는 북아프리카에서 <파티마 왕조>가 칼리프 칭호를 사용하면서 아바스 왕조의 권위를 부정합니다. 이 때, 후옴미아드 왕조도 칼리프를 칭하면서 3인 칼리프 시대가 열립니다.

10c 중반 이란계 시아파의 브와이 왕조는 아예 아바스 왕조의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군사, 행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결국, 이 사건 이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는 이슬람 세계의 종교적인 역할만을 담당하는 왕실로 추락하였다가 13c 훌라구가 이끄는 몽고군에게 멸망하고 맙니다. 그리고 몽고의 시대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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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의 기원과 마호메트의 출현

1. 이슬람 - 종교 교리의 기원

이슬람교는 세계 인구의 20%가 믿고있는 종교입니다. 이슬람력 12월 7일에는 세계 각지에서 메카로 신도가 모여들며 장관을 이루곤 하죠. 사실 이슬람교도 그 기원은 유대교에서 시작됩니다.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는 둘 다 <구약성경>을 모체로 탄생한 종교이지만, 두 종교는 구약성경에서 제시하는 여호와의 예언자에 대한 해석이 다른 것에서부터 갈등이 시작됩니다. 크리스트교는 예수를 예언자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규정하였고, 니케아 공의회 등 수많은 종교논쟁을 거쳐 예수를 신으로 격상시켰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삼위일체설>의 목적이였죠.

그러나 이슬람교에서는 예수를 예언자로만 인정할 뿐, 신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최후의 예언자가 아니며, 최후의 예언자는 마호메트라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이슬람교의 논리는 <삼위일체설>을 확립한 중세 교회의 입장에서는 악마의 종교요, 이단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세 시대 서유럽보다 이슬람의 세력이 훨씬 강했다는 것이 서유럽 세계의 한계점이였습니다. 그 한계점을 극복하고자 중세유럽의 팽창기에 이슬람으로 진출한 것이 바로 십자군 원정이지요.

2. 무하마드의 등장

아라비아 반도에 살던 셈계의 아립인들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메카, 메디나 등에서 대상 무역을 전개했습니다. 이들 아라비아 민족은 정치적 통일도, 종교적 통일도 없는 다신교의 유목사회였죠.

그런데 6c 후반 유스티니아누스가 죽은 뒤 비잔틴 제국이 약해지고, 중앙아시아에서는 파르티아를 대신하여 사산조 페르시아가 등장하면서 양 국가의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동방, 서방의 상인들은 사막길을 이용할 수 없었고, 그래서 모든 상인들이 아라비아 반도를 거쳐 무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새로운 교역로의 중심지가 바로 <메카>입니다. 메카에는 수많은 국가의 상인과 수많은 종교들이 난립하였고, 무하마드는 장사를 하면서 이러한 수많은 종교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는 유대교, 크리스트교의 영향으로 610년경 이슬람교를 창시하였습니다.

6c 후반의 마호메트는 대상에 참가하는 상인이였습니다. 그는 유대교와 크리스트교를 모체로 새 종교를 전파하려고 했지만 당시 아라비아의 지배층에게 박해를 당합니다.

그 이유는 먼저 모든 인간이 알라앞에 평등하다는 평등주의 사상때문입니다.(평등주의 사상은 당시 기독교가 대세였던 서유럽, 비잔틴 제국의 유행과 맞물려 있었답니다.) 그는 구약성경의 사상을 받아들여 많은 신을 숭배하는 것은 우상숭배라고 비판하고 모세의 10계율을 적극 활용합니다. 그리고, 상인들이 부를 독점하는 것은 신의 섭리에 어긋나다는 기독교적인 금욕관까지 염두에 두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메카의 상인들에게는 치명적인 사상이였습니다. 상인들은 무하마드 알리를 죽이려고 했고, 무하마드는 622년 70여인의 신자들과 메디나로 이주하는데, 이를 <헤지라>라고 하며 이슬람교의 원년이 됩니다.

무하마드는 630년 무슬림 전사들을 이끌고 다시 메카를 점령한 뒤 다신교 사회였던 메카의 우상들을 모조리 부셔버렸습니다. 그리고 무하마드의 입으로부터 신의 계시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아랍어로 적힌 이슬람의 경전 <코란>의 기원입니다. 코란은 이슬람신인 알라에 대한 절대 복종을 최고의 교의로 합니다. 구약성경의 여호와가 <나 외의 신을 인정하지 않는 질투의 신>이라는 점과 상통합니다. 알라신은 단순히 신앙의 신이 아닙니다. 알라는 세속의 모든 정치, 사회, 문화, 전쟁방식에 걸친 신자의 생활체계로 자리잡게 됩니다.

3. 이슬람의 교리

이슬람교는 보통 동방에서 <회교>라고 부릅니다. 이 종교는 유대교와 크리스트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의 모세 5서, 시편의 내용을 주축으로 종교 교리의 체계를 잡았으며, 신약의 복음서도 신의 계시로서 일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의 불완전한 신의 기록이므로 완전한 신의 기록으로서 <코란>을 제시합니다. 코란에서는 구약 성경의 예언자와 예수의 정통성도 인정하지만, 마지막 예언자로서 예수가 아닌 마호메트를 설정합니다.

무슬림(신자)들은 알라의 가르침 속에서 선한 행위와 가난한 자의 자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들은 승려계급도 없고, 예배 의식도 단순하나 하루 5번 메카를 향해 기도해야 하고, 일생에 한번 메카를 순례해야 합니다. 또 정복전쟁이 많아 남성이 부족한 사회 현시에서 일부 다처제를 인정합니다. 일부다처제는 남성중심의 사회관이라기보다는 당시 어린 여성이나 미혼모, 미망인을 보호하기 위함으로 인구비율과 사회여건을 고려하여 초기에는 4명까지만 둘 수 있었습니다.

이슬람교는 6신과 5행의 의무가 있습니다. 6신은 알라, 천사, 코란, 예언자(무하마드), 내세, 예정을 믿어야 함을 말합니다. 이 6신은 크리스트교의 교리와 거의 차이가 없습니다. 단, 최후의 예언자가 예수가 아닌 무하마드라는 점만 다릅니다. 무하마드를 통해 신이 지상에 내린 최후의 계시는 <복음서>, <요한계시록>이 아니라 <코란>입니다.

5행은 신앙고백, 예배, 단식, 희사, 순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이란, 알라 이외의 신은 없으며 무하마드는 알라의 사도이다라는 말을 아랍어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는 하루 5번 메카를 향해 아랍어로 드립니다. 단식은 이슬람력으로 라마단 1달동안 해가 떠 있는 동안 음식을 먹지 않고, 자기 재산 일부를 교단에 바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재산 기부를 희사라고 합니다. 순례는 경제적 여유가 있을 경우 일생에 한 번 메카를 순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6신과 5행의 의무를 열심히 하는 것을 <지하드>라고 합니다. 지하드는 우리말로 성전이라고 하는데, <성전>이란 이슬람의 의무를 현실속에서 투쟁적으로 열심히 하는 자기와의 싸움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이슬람교도가 이슬람의 진리를 부정하는 이교도와 싸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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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오리엔트 문명의 탄생

1. 석기 시대를 넘어선 문명 탄생

석기시대 오리엔트에서는 문명이 탄생할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오리엔트 문명이란,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 <동쪽의 문명>이란 뜻입니다. 석기에서 청동기로 접어들면서 탄생한 오리엔트 문명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리적으로 풍부한 물과 기름진 땅이 제공되었고, 강 유역에는 다양한 식용생물이 있었으며 주변지역의 자원이 뒷받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잉여생산이 출현하게 됩니다. 세계 4대 문명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공통점이 많은데, 제가 주관적으로 생각하기에 다음과 같습니다.

1. 청동시 시대였다. - 충분한 잉여생산이 출현 가능한 시대였고, 잉여생산물 투쟁을 위한 싸움으로 사회계급이 형성되고 국가 조직이 발생하였다.

2. 문자가 출현한 시대였다 - 어느 정도 사회구성원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하였으며, 이것은 다양한 발명품을 생산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촉매제였다.

3. 조직적인 종교가 발달하였다. - 신전 및 신관이 출현하면서 종교적인 역량을 가진 자들이 지배층으로 등장하였다.

4. 운송 기구가 발달하였다. - 선박, 바퀴 등의 발명이 잉여생산물 운반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발전 속에서 촌락을 중심으로 한 씨족 사회가 국가를 중심으로 한 문명사회로 전환된 것입니다.

2. 오리엔트의 고대 역사 전개

고대 오리엔트 지방의 역사를 논의하려면 그 역사를 4단계로 나눠서 이해하는 편이 편합니다. 오리엔트 역사를 형성기, 발전기, 암흑기, 통일기라는 4단계의 역사로 나눠 보겠습니다.

1. 형성기 : 기원전 3000년경 - 형성기의 오리엔트 사회의 특징은 각각의 문명과 국가들이 자국의 문화적 기본틀을 완성하는 시기입니다. 각 집단은 상호 접촉없이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형태를 띄고 발전하였습니다.

2. 발전기 : 기원전 2000년경 - 이 시기는 각각 개별적으로 발전한 강국들이 상호연관성을 갖는 국제사회로 전환하는 시기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 왕국, 이집트의 신왕조, 소아시아의 히타이트와 미탄니, 에게문명의 크레타는 전쟁을 통해 접촉하고, 외교문서를 교환하는 등 상호 교류를 통해 상대문물을 받아들입니다.

3. 암흑기 : 기원전 1200년경 - 이 시기는 갑작스럽게 오리엔트의 강대국들이 모두 몰락하는 시기입니다. 이집트의 신왕조가 약화되고, 바빌로니아와 히타이트는 멸망하며, 미케네 문명이 몰락합니다. 그리고 그 몰락기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보통 이 시기를 역사가 호메로스의 기록에만 의존한다고 해서 호메로스 시대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갑작스런 오리엔트의 몰락 원인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당시가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는 점에서 미루어볼 때 급격한 사회 변화가 원인이 아니였는가 추측합니다.

4. 통일기 ; 기원전 1000년경 - 이 시기는 혼란한 오리엔트의 상황이 끝나고, 강대국인 아시리아가 최초로 오리엔트를 통일한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가혹한 통치로 곧 망하여 4국으로 분열되었고, 이후 이 지역은 페르시아가 재통일하게 됩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폴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을 기원전 4c에 거치면서 점차 약해졌고, 그 무렵 마케도니아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이제 다음 글에서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고대 문명의 각각 국가들을 자세히 설명해보려 합니다. 그 전에 고대 오리엔트 지역의 문명 중 핵심 문명이 무엇인가만 짚어봅니다.

고대 오리엔트와 서방의 5대 문명은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동부 지중해 문명, 그리스 문명,(과도기인 헬레니즘), 로마 문명입니다.

이들이 오리엔트 고대 문명을 이루되, 그 핵심은 유럽중심의 로마 문명이었고, 로마가 망한 뒤 유럽은 고대시대를 넘어 중세시대로 넘어갑니다.

3. 고대 오리엔트 암흑기의 한줄기 빛 - 해상왕국

위에 설명한 오리엔트 암흑기(호메로스 시대)는 오직 암흑만이 아니였습니다. 암흑기를 이용하여 그 시대를 이끌고, 빛나는 전성기를 구가한 나라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페니키아와 헤브라이입니다. 고대 국가들을 각각 개별적으로 다음 글에서 살피기 전에 이들만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페니키아는 지금 아프리카 북단의 카르타고에 근거지를 둔 해상왕국입니다. 이들은 아프리카 북부와 유럽남단를 휘젓고 다니면서 지중해 무역을 독점했던 강국이었습니다. 이들이 중요한 점은 오리엔트 문명을 유럽에 전파했다는 점입니다. 시돈, 타루스 등의 해안 국가를 건설한 이들은 동방과 유럽을 동시에 오가는 해상민족이었으며, 오리엔트의 선진문물을 유럽에 전파하여 훗날 그리스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합니다. 특히, 카르타고를 정복한 이후에는 표음문자를 제작하였는데, 이것은 곧 훗날 알파벳이라 불리는 문자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민주정치 국가인 그리스 폴리스들의 성장은 이들의 힘이 큽니다.

헤브라이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성장한 유일한 고대 유일신 국가입니다. 고대 모든 국가가 다신교였지만, 특이하게도 이들은 선민사상을 가진 유일교를 신봉하였습니다. 이들은 초기 가나안 왕국을 건설하여 성장하고 있었는데, 이집트 왕국의 압박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 신앙과 십계명을 매개로 하여 뭉친 청동기 전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기록이 바로 구약성경의 핵심을 이룹니다. 이들은 초기에는 이집트 군을 격파하고, 수도를 예루살렘에 정하는 등 성장하였습니다. 특히 다윗, 솔로몬 왕 때에는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합니다.

   이들은 일신교인 유대교를 확립하였습니다. 이들 민족은 스스로를 위대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고대 선민사상을 가진 대표적인 민족입니다. 이들의 자부심이 곧 구약성경이지요. 이들의 유대교가 훗날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라는 두 거대한 종교의 기본 바탕이 되었는데, 특히 이 종교가 훗날 다른 종교들에게 미친 영향 중 제일 큰 것이 바로 <내세사상>이라는 부분입니다.

   내세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증명해줄 선지자가 필요했고, 각 종교는 그 선지자가 누구인지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예수, 마호메트 등은 모두 이 내세사상을 증명하기 위한 최후의 선지자라고 각 종교는 주장합니다. 뿌리가 같은 이 두 종교는 지금도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 채 분열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헤브라이는 이집트와 주변국의 끊임없는 압력으로 결국 나라가 분열되었습니다. 유대와 이스라엘이라는 2 국가로 분열된 것이지요. 유대는 훗날 바빌론 유수라는 사건을 겪으면서 신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합니다. 이스라엘은 훗날 최초의 오리엔트 통일왕조인 아시리아에게 망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각각 개별적인 오리엔트 국가들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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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