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사 이야기 29 - 진의 정치사 : 진시황과 진의 멸망 과정

이번 장에서는 진나라의 정치사만 다루어 보겠습니다. 진에 대한 이야기는 통일배경론, 진의 정치사, 진의 제도사로 나누어 3파트를 정리하고, 나머지 파트에서는 진나라가 중국 역사에 남긴 유산 부분을 다루어 보죠. 그게 진나라 이해에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1. 진시황제의 <황제> 즉위

진시황제의 통일정책의 기본방향은 상앙 이래 진나라의 기본 정책인 <제민지배체제를 위한 법가사상의 확립>이었습니다. 진시황제는 강력한 법가사상을 통하여 중앙집권적인 황제지배체제를 완성한 최초의 황제이죠.

그는 통일과 함께 바로 <황제>의 창호를 사용하는데, 최초의 황제이므로 역사에서는 <시황제>라고 부릅니다. 그는 중국 역시 <황제>제도의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황제라는 용어는 아마도 삼황오제 전설에서 나오는 최초의 무신인 <황제>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우선 황제는 천하를 다스리는 절대자로서 하늘의 후손 중에서 천명을 스스로 <만든 자>라는 의미의 황제 개념을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신하가 정하는 <시호>의 개념을 없애 버리고, 스스로 하늘의 자소임을 증명하는 <세제>를 선택합니다.

그는 자신을 <짐>이라고 부르도록 하고, 황제의 명령을 <제 : 행정률>와 <조 : 조칙>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제>와 <조>를 내리기 위한 황제의 증명으로 <세제>라는 증명서를 사용하는데, 여기에서 <옥세제>가 마련됩니다. 이 옥세제도는 황제의 명령을 지방에 전달하기 위한 증명으로 사용되며, 이 황제의 명령이 지방까지 구석구석 전달하기 위하여 군현제도를 한층 더 강화시킵니다.

2. 시황제는 왕이 된 후 무엇을 바꾸는가?

시황제는 황제가 된 후 시도한 모든 정책은 결국 <법가적 통치를 강력하게 실시하여 황제중심의 일원적 지배체제 확립>이라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관료제도는 황제 아래 일원화하고, 군현제는 강화하여 모든 국민을 개별지배하려고 했습니다.(제민지배체제) 또 법가 이외의 사상은 인정하지 않아 강력한 사상통제를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주대 이래의 유가 문서를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해 버리는 분서갱유와 같은 사건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는 국가적 통일성을 지향하기 위해 경제적 일원성을 적극 추진하는데, 그로 인한 정책이 화폐 통일, 도량형 통일, 마차궤도통일 및 도로 정비, 한자로의 문자 통일 시도 등입니다. 단, 그는 모든 조세와 자본을 국가체제 밑에 귀속시키기 위해 농업을 장려하면서도, 유동성이 많은 상공업은 억압합니다.(중농억상정책) 또, 토지를 가진 대지주(호족세력)은 강제로 다른 곳으로 이주시켜 버리는 법가적인 통제사상을 강력히 실시합니다.

그리고,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가 위해 아방궁 축조, 여산릉 축조 등 대규모 공사를 실시하였습니다. 북방 흉노를 정벌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을 시도하기도 하였고, 흉노를 막기위한 만리장성도 축조하였습니다. 남으로는 베트남 북부로 진출하여 중화 영역을 넓히려고도 하였죠.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정책 실시는 너무나 많은 백성들을 혹독한 노역으로 집어넣었고, 진이 반란으로 단명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3. 진은 2대로 단명하다.

진의 멸망은 너무 급진적인 정책의 실시 때문이었습니다. 대규모의 토목사업과 계속된 원정으로 국내의 모든 제반세력들이 진 왕실에 적대적이 되어 버렸지요. 군현제도는 옛 영토를 잃은 구세력의 큰 반발을, 토목공사와 원정은 부병제도 안에서 힘든 생활을 하는 농민의 반발을, 부호 이주책과 억상정책은 상인과 지주의 반발을 가져왔습니다.

또 군현제를 강력하게 실시한다는 것은, 왕권이 외부의 위협을 받을 때 왕권을 옹호해줄 혈연적 봉건세력이 없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이것은 진의 위기 때 누구도 도와주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하기도 하죠.

결국 진은 진시황제 이후, 2대 호의 대에서 망합니다. 3대 자영이 있긴 하지만, 이미 망국기에 읍급처치로 오른 황제였기 때문에 진은 2대에서 망한다고 보통 말합니다.

진이 망할 때는 대대적인 농민반란으로 역대 최초의 난인 진승, 오광의 난이 있었습니다. 이 난은 진이 얼마나 가혹한 엄형주의를 적용하였으며, 노역이 얼마나 심하였으며, 연좌제의 폐단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진승, 오광은 심한 노역으로 국가가 요구한 품목을 제 때 국가에 납부할 수 없었고, 엄격한 법 때문에 어짜피 납부해도 죽었을 것이며, 또 연좌제도에 의해 자신들의 잘못이 식솔과 모든 사람들에게 피해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직된 사회에서 그들이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은 국가에 대한 반역 뿐일 것입니다.

4. 진의 통일 의의

진은 단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사에서 몇가지 의의를 남깁니다. 첫 번째는 읍제국가로서 씨족공동체적인 사회를 영위했던 중국사회가 춘추전국이라는 군현제 소국가들의 난립을 거쳐 황제가 다스리는 통일제국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보통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국가가 발전하는 단계, 소국인 로마가 제국으로 발전하는 단계와 비교하여, 세계사적 보편성에 입각한 제국화 단계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서양이론을 대충 두들겨 맞춰 가져온 것이 보편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러한 경향이 국가발전단계상 상당히 합리적인 이론인 것은 사실입니다. 중국사의 발전과정을 보면 도시국가 - 영역국가 - 통일국가로 발전했다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또 진의 통일은 곧 이후 동아시아의 정형적 통치체제를 마련했다는 것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예로, 이후 중국 역대의 황제지배체제와 동아시아 국가들이 받은 영향,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통치제도, 군현제도, 국가적 토목사업, 중화사상에 입각한 대외원정제도 등은 진이 역대 왕조에 남긴 유산이죠. 그리고, 진대의 통일로 중국의 <중화>라는 영토의 영역이 황하이북에서 양쯔 이남의 지역까지 정립됩니다.

이 진의 제도들을 유가주의자들은 법가주의적이라고 해서 많은 비판을 하면서도 후대 왕조에서는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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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민지배체제란?

1. 제민지배체제

제민지배체제는 중국사를 공부할 때 중요한 단어로 등장하곤 합니다. 말 그대로 하면, <모든 백성을 지배하는 체제>로 왕권이 강화되어 국왕권이 모든 민, 토에 두루 미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국사를 좀더 중시하는 제 입장에서 정리하자면, 이건 그냥 왕권이 강화되어 중앙집권화된 것을 한자로 풀이한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 옵니다. 한국 고대 사회에서도 삼국시대가 정립되면서 왕권이 강화되었고, 점차 부체제가 <제민지배>가 전환되었으니까요. 이 용어는 중국사만의 용어가 아니라 철기시대를 거쳐 국왕권이 강화되는 고대 국가 전반에 걸친 공통적인 보편적 용어라는 생각이 듭니다.

쉽게 설명해보죠. 제민 지배란 <국가가 직접 인민을 지배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이것은 옛날 봉건제적 전통, 씨족공동체적 관습을 모두 소멸시키고, 군현제, 관료제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국가의 전반적 지배체제입니다. 보통 세계사적으로 보면 철기시대에 이런 현상이 많이 나타나죠. 중국에서는 제민지배를 확립하는 가장 결정적인 개혁이 바로 상앙, 이회, 오기 등이 실시한 <변법>이라고 하는데, 한국사에서도 율령반포, 불교수용 등을 통해 국왕권이 강화되는 시기에 이런 제민지배화 현상이 시작되어, 신라통일기 전제왕권이 확립되면서 신문왕 대의 개혁으로 이 체제가 완성되었다고 보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중국에서 제민지배라고 하면 보통 강력한 왕권을 확보하고, 민에게 토지를 부여함으로서 조세를 많이 걷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조세 수취는 보통 군사력 확보에 이용되었지요. 강좌중국사를 요약하면, 이 제민지배를 다움과 같이 정의내리고 있습니다.

중국통일과 부국강병을 위해서 생산력 및 생산자원을 확보하는 등 국가 총동원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민의 지배를 확고히 하는 제도를 말한다.

2. 중국에서의 제민지배의 방식

중국에서 제민지배가 확고히 된 것은 변법을 실시하던 춘추전국시대입니다. 제민지배는 보통 2단계로 이루어집니다.

1단계는 제민의 보호와 육성을 통해 국력의 기반을 닦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고, 토지사유화를 억제하여 백성들이 자영농이 될 수 있도록 국가가 유도하는 방책입니다. 이회의 평조법과 진토력, 서문표의 개간사업, 상앙의 제원전과 개천맥이라는 용어가 이것에 해당합니다.

2단계는 이렇게 육성된 자영농에 대하여 국가가 세금을 부과하여, 부국을 이루고 이것을 통해 병사를 육성하는 정책입니다. 이것을 보통 <부국강병>이라고 합니다. 즉, 자영농은 경작의 자유를 얻은 대신 부역, 토지세, 인두세, 요역 등 각종 의무를 부과받게 됩니다. 자영농의 감시는 군현제제를 성립시켜 전국에서 일원적으로 감시하고, 이 감시를 어길 경우 엄한 <율령>을 적용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통제를 위해 필요한 조치는 엄격한 법가주의 사상을 통한 통제입니다. 그리고 이 당시 율령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부세를 공정하면서도 최대한 수취할 수 있는 <부세제도의 개혁>을 수반하는 것입니다.

이 부세제도의 개혁을 위해서는 특권층인 구귀족과 종래 봉건제도, 씨족적 관습은 필수적으로 타파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구래의 모든 관습은 율령이라는 엄격한 법적 제제를 통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민지배체제의 본질인 것이지요.

실제 제민들은 춘추전국시대에 많은 세금을 부과받았습니다. 그럼 춘추전국시대 세금제도를 한번 볼까요?

1. 토지세(전조) - 수확량의 1/10을 걷는다. 추세, 고세 등의 잡세 납부가 뒤따른다.
   2. 재산세(호부) - 재산세는 노동력의 정도에 따라 인두세의 개념으로 걷는다.
   3. 요역 - 요역의 노동력의 활용 여부에 따라 차등하여 걷는다.
   4. 군역 - 초기에는 상비군제도를 지향하였으나, 점차 정복전쟁이 심화되면서 국민개병제를 실시하여 전투력을 강화시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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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의 변법운동

1. 변법운동의 배경

변법운동의 배경은 15,16장에서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상앙이 다른 나라보다 변법을 더 강력히 추진해야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진나라가 서방의 오랑캐로 불릴 정도로 낙후된 국가라는 점이었죠. 진은 서방 끝에서 시작되어 중화문화에서 상당한 변방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진에게도 큰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중원의 치열한 전쟁에서 벗어난 지역이었다는 점과 위수분지를 중심으로 한 천연의 요새이자, 곡창지대였다는 점입니다. 상앙은 진의 잇점을 살리고, 진의 부국강병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구귀족과 구체제를 모두 없애 버리고, 진의 잇점을 실릴수 있는 효율적인 제민지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진이 외진 곳에 있다는 것은 다른 국가의 눈치와 강압을 피해 부국강병정책을 마음껏 펼칠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 진이 변법을 시도했을 때, 주변국의 침입은 거의 없었으며, 진의 전쟁은 진이 원할 때 원하는 국가와 동맹을 맺고 했다는 점도 특이합니다. 보통 진의 외교책을 먼 나라와 동맹을 맺고 가까운 나라부터 제압해가는 <원교근공책>이라고도 하죠.

2, 상앙의 1차 변법

상앙의 변법은 2차례에 걸쳐 각각 당면한 목적을 가지고 시행되었습니다. 상앙의 1차적 변법 목적은 종래 구귀족을 일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귀족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진 주나라 종법제도의 파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개혁은 말 그대로 주나라의 혈연의식에 기반한 종법원리를 철저히 부수어 모든 사회 조직을 재편하기 위함입니다. 일단 상앙은 각각의 호와 민들이 상호 감시하는 십오제와 연좌제, 그것을 위한 사전조사인 호적작성을 통해 씨족공동체적인 읍제질서를 철저히 파괴하고 구귀족의 특권을 없애버립니다. 귀족공동체적인 사회 조직인 국가 행정조직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또 분가정책을 통하여 가족들을 다른 호로 분리시키는데, 이것은 더 많은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농업생산력 극대화를 위해 철저한 중농정책을 펼침과 동시에 상업은 규제하는 억상정책을 시도합니다. 농업이란 가장 효율적인 생산수단이나, 상업이란 생산된 물품을 분배하는 것일 뿐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상앙의 변법에서 구귀족들이 가장 많이 반발한 것은 군공수작제입니다. 전쟁에 나가 공이 있는 자들에게 <작>을 내린다는 이 제도는, <작위>와 그에 따른 <예법>이란, 귀족에게만 있다는 주나라 제도의 근간을 통채로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평민들도 능력이 있으면 <예법>이 없어도 <작위>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3. 상앙의 2차 변법

상앙의 1차 변법이 기존 <종법제도 파괴>였다면, 2차 변법은 파괴되어 임자가 없는 모든 사회질서를 군주에게 돌리는 정책이었습니다. 정의를 내리자면 <군현제적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제민지배체제의 완벽한 확립을 통한 왕권의 신성화>가 그 목적이었죠.

단 분가정책은 더욱 강화됩니다. 아예, 부자지간, 형제지간에도 같은 집에 있지 못하도록 하여 분가된 호의 수를 늘리고, 세금원을 많이 확보합니다. 군공수작제도 더욱 확대합니다.

1차 변법과는 달리 2차 변법에서는 일정부분 상업도 인정합니다. 농업외에 상업에서 걷는 조세도 국가 수입원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믿음으로, 도량형을 통일하고 국가가 무역을 규제하면서 이득을 얻는 정책을 실시합니다.

또 1차 변법으로 파괴된 씨족적 사회질서에는 군현제적 질서가 침투합니다. 군, 현에 따라 인두세와 호등세, 토지세를 부여하여 국가가 직접 인민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4. 상앙의 시대 휴경농법이 시작되었는가, 휴경농법이 사라졌는가의 논쟁

상앙의 변법에서 한가지 이슈가 되는 것은 휴한 농법의 문제입니다. 상군서의 제원전을 보면, 상앙이 <제원전>을 설치했다고 나옵니다. 문제는 원이 휴한농법을 상징하는 글자라고 할 때, 제라는 글자가 <제정>인가, <제거>인가의 논쟁이죠.

제를 제거라고 보면 휴한농법이 이 때부터 페지되어 연작상경을 했다는 뜻이 되는데, 당시 농업기술로 매년 농사를 짓는 연작상경은 조금 무리입니다. 비료도 없구... 제를 제정이라고 보면 이 당시부터 휴한농법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즉, 땅의 지력을 생각하여 서양 중세의 3포제 처럼 일정한 땅을 쉬게 해주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다수설입니다.

또 하나의 논쟁은 천맥을 열었다라는 뜻의 <개천맥>이라는 단어입니다. 천맥을 정전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때, 여기서 개를 <열다>로 해석하면 이 때부터 <정전제>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면 서주부터 시작된 정전제를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 상앙의 변법이념과는 조금 안 맞는 듯 합니다. 개를 <파괴하다>로 해석하면, 정전제를 파괴하고 토지 사유제가 시작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상앙의 변법 내용으로 보았을 때 후자가 다수설입니다.

5. 상앙 변법의 성공원인

상앙 변법의 성공원인 중 가장 큰 것은 법가주의적인 상앙의 무대포 개혁을 왕이 적극지지했다는 점입니다. 상앙의 변법은 왕이 살아있는 한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변법이 가장 철저한 법가주의적으로 시행되어 반대파의 주장을 묵살하고, 구귀족을 철저히 제거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으로 진나라는 어느 나라 못지 않은 강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그 결과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는 나라로 역사에 이름이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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