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3화. 전통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의 대결 속에서 탄생한 석가

1. 철기 시대의 사화 변화와 <정치, 사회> 계급의 성장

최고의 계급인 브라만은 우파니샤드 철학의 이념으로 <브라만>의 정당성을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의 인도는 이미 <고대 신의 신비주의> 관념만으로 지배 계급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철기가 보급되고, 생산력이 증가하였다. 따라서, 전사계급이 원하는 것은 <넓은 영토>였다. 물론, 신관들이 신의 계시를 내리고 전쟁을 도왔다고는 하지만, 전쟁에서 실제 필요한 것은 무력과 경제력이었다. 무력을 가진 자들이 왕족인 크샤트리아 계급이었으며, 재력을 가진 자들은 바이샤 계급이었다.

전쟁은 많은 민족간에 혼혈을 가져온다. 더 이상 순수한 <아리아인>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 세상이 왔다. 크고 작은 부족 국가들이 통합되면서 거대한 영토를 가진 군주국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국가가 발달하면서 엄청난 토지를 가진 귀족과 재력을 가진 상인들 역시 입김이 쎄진다. 특히, 비옥한 겐지스강 유역을 장악한 부족들은 인도 북부를 통일하겠다는 꿈까지 가진 시기였다.

<브라만>이라는 최고 계급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비옥한 겐지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점차 <브라만교 반대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2, 3계급은 브라만에게 반발하였다. 더 이상 특권을 유지하려는 브라만교를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었다. 특히, <제사를 지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들만이 신과 접촉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었다. 제사 지내는 방법이야 누구나 배우면 되지 않는가?

브라만교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직접 제사를 지내며 스스로 교단을 만들어 버린다. 특정 종교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종교의 사상을 벗어나 독자적인 종파가 된 경우를 <사문 : samana>이라고 한다.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말이지만, 원래 인도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사문들은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만들어갔다.

2. 사문들과 브라만과의 싸움

브라만교의 전통 철학은 우파니샤드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기본 원리는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과 생명의 원리인 아트만은 동일한 것>에서 출발한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중요한 점은,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이 창조주이자, 역사의 진행자이자, 생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브라만은 우주의 법칙 속에서 생명도 만들고, 죽음도 만들며, 윤회도 만든다. 우주는 브라만의 법칙에 의해 돌고 돈다. 해탈은 그 법칙을 알고 있는 <브라만>만이 가능하다.

사문들은 브라만을 반대한다. 고행을 통하여 힘든 과정을 겪으면 누구나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해탈이 가능할텐데 왜 <브라만>만 해탈한다고 하는가? 또, 착한 일을 하면 다음 생애에 <브라만>으로 태어난다고 하는데,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것이 아닌가? 지금의 선악과 내세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과격한 사문에서는 아예 <육체>가 죽으면 선악이 죽는다는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문은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들을 거론하면서 <영혼>도 결국 물질 현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영혼>이 어떻게 현실과 격리될 수 있는가? 살이있는 인간들도, 자 <영혼>을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시 대표적인 사문인 <자이나교>의 <바르다마나>는 브라만교의 <선행> 개념 자체를 부인한다.

인도 나타족 왕자(2계급)인 바르다마나는, 착한 일을 한다면서 하늘에 제사나 지내는 형식적인 브라만들이 해탈하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해탈>는 깨닫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영혼을 정화>해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1계급들이 잘나서 1계급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아무도 증명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해탈은 신분과 상관없이 <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하고, 살생을 금지하며,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해탈의 기본 조건 아니겠는가?

자이나교의 교리는 단순하다. 사람은 살면서 실수를 한다. 고의든, 우발적이든 죄를 저지른다. 그래서 영혼은 더럽다. 따라서 엄격한 계율 속에서 고통스러운 <고행>을 한다면 영혼이 정화되면서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이나교는 대부분의 브라만 의식은 인정한다. 그러나, 브라만들만의 특권을 반대하면서, 모든 계층이 고행을 통해 <구원>받는 다는 교리를 설파한 것이다. 수많은 사문 중에서 지금까지 인도인들에게 살아남은 사문은 <자이나교>밖에 없다. 그 핵심은 <고행>이었다.

<자이나교-아디나타사원>

<자이살메르사원>

티르탄카라상

3. 도시 공화국에서 태어난 석가

기원전 5세기, 강력한 철기를 가지고, 인도 북부(겐지스강가)에 살아남은 국가는 모두 16개국이었다. 그러나, 강대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국가는 모두 <군주국>이었다.

군주국에서는 국왕과 브라만들이 독단적으로 정치를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수드라 계급을 지배하기 위해 <윤회설>을 강조하였다. 수드라인 너희가 천민으로 태어난 이유는 전생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너희는 이번 생애 내내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이 무렵, 석가는 기원전 566년, 도시국가인 네팔(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났다. 석가가 살았던 지역은 크샤트리아와 바이샤가 많았던 도시 지역이었다. 당시 도시 국가에서는 2, 3계급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공화 부족들은 군주 부족과 달리 모든 일을 부족내 유력자들이 모여 회의하고 결정하였다. 신라의 화백회의와 같은 <만장일치제>가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반면, 군주 부족들은 군주와 신관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공화국의 부족국가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국가들에 의해 하나하나 멸망해가고 있었다. 곧, 강력한 군주가 인도 북부 전체를 통일할지도 몰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석가는 브라만 신관들의 독선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리고, 약소국가의 2계급으로 태어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고민을 했을까?

4. 석가 <사문>의 형성

석가는 브라만의 가르침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브라만에서 말하는 <생명과 윤회>를 자신이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는 생로병사를 느끼고자 여러 브라만 수행자들을 만났다. 그러던 중 29의 나이로 출가했다. 그 때, 갓 태어난 석가의 아들이 <라후라>였는데, <라후라>란 <장애물>이란 뜻이다. 석가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난 것이다.

석가가 맨 처음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선정주의자들이었다. 선정주의자들은 <착한 일>을 많이하면 <해탈>한다고 말했다. 석가는 모든 이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착한 일을 아무리 해도 해탈의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길을 떠난다.

석가가 두 번째로 택한 길은 <고행>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고행을 해도 <해탈>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석가가 마지막으로 택한 길은 <명상>이었다. 보리수 밑에서 명상을 하던 석가는 35의 나이에 문득 깨달음을 얻게 된다. 보리수란, 깨달음의 나무란 뜻이다. 또, 깨달은 사람을 <붓다>라고 하고, 성자를 <모니>라고도 하는데, 보통 <석가모니> 또는 <석존>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가 명상으로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중도>였다. 선정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극심한 고행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가야한다는 것이다.

석가의 <중도>사상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는 구름과도 같은 제자들을 얻어 <교단 : 승가>를 만들었다. 승가란, 모든 자들이 평등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동체 집단을 말한다.

석가가 만든 승단은, 공화국 체제와 비슷하다. 바르나 제도와는 달리, 모두가 평등하며, 서열은 먼저 들어온 순서로 정한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의식으로 뭉쳐진 그룹집단인 것이다.

불교도는 네 그룹으로 이루어진다. 남성 출가자(비구), 여성 출가자(비구니), 남성신도(우바새), 여성신도(우바이) 이다. 이들간의 차별은 없다. 물론 가장 똘똘한 인물들을 10대 제자로 두긴 했지만, 그것은 어느 한 분야의 능력이 출중한 인물들을 능력별로 인정해 준 것이다.

석가 사후, 석존의 가르침은 대부분 구전이었기 때문에 정리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을 정리한 사람은 100년 후 아소카왕 시대의 제자들이었다. 부처의 가르침을 경, 율법서를 율, 주석을 논 이라고 분류하여, 경,율,론 3장의 불교 지침이 성립된 것이다.

석가시대의 가르침을 보통 <원시불교 : 초기불교>라고 말한다. 원시불교란, <암송한 것>을 기억하여 가르침을 남긴 것이다. 석가와 같이 배우고 암송한 것을 함께 기억하고 되새겨 모아 적는다. 초기 석가의 가르침은 <아함경전>에 실려있다. 훗날, <아함경>으로 불리는 경전은 중국과 한반도에도 전파되었다. 경이 가르침이라면, 율은 율법서이다. 율은 출가자들이 지켜야할 조문들을 모두 모아놓은 조문집이다. 물론 주석인 <론>은 후대에 달아놓은 것들이다.

5. 석가의 가르침

석가의 핵심 가르침은 <번뇌>였다.

번뇌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고통과 고민>을 말한다. 보통 <고집멸도>라고 불리는 이 번뇌는, 고(고통), 집(고통의 원인), 멸(고통의 소멸), 도(소멸의 법도)를 총칭한다. 이 4가지 고통을 해결하는 과정을 <4제>라고 한다.

석가는 이 고통을 없애는 방법으로 8정도를 제시하였다. 8정도란, 고통을 없애기 위해 8가지를 바르게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지침이다.

올바른 견해(정견), 올바른 생각(정사유), 올바른 언어(정어), 올바른 행동(정업), 올바른 생활(정명), 올바른 노력(정정진), 올바른 기억(정념), 정신통일(정정) - 이 8가지를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8정도를 이끌어가는 방법이었다. 브라만에서는 우주의 근원인 브라만에서 충실하기 위해서 <계급에 맞는 착힌 일>을 하라고 말한다. 반면 자이나교 같은 사문에서는 철저하게 <고통스런 고행>으로 악업을 벗어나라고 말한다. 그래야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는 말한다. 선정이건, 고행 이건 단지 하나만으로 <해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중도>를 걸어야 한다고.... 그럼 왜 중도만이 고통을 없애주는 것일까?

   그 이유는,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정>은 영적인 측면을 주로 강조한다. <고행>은 육체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정신과 물질이 연결되어 일어난다.

석가가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은 상호의존한다는 것이었다. 깨닫는 다는 사실 조차,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 어떤 일을 겪지 않으면 깨달음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일은 다양한 원인과 조건으로 얽혀서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을 <연기>라고 한다.

우주가 단지 브라만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물 자체가 인과관계에 의해 얽혀서 움직이고 있기에 절대적인 근본이라는 것은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어떤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데, 어떻게 아트만(생명)이라는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연기설>의 핵심은 이런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다른 존재하는 것이 같이 존재한다.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그 현상의 원인이 있다. 원인이 없다면, 현상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만물은 서로 의존하여, 서로의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는 것이다. <연기>의 본질을 알게 되었을 때,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중도>를 모르고 한가지 길만을 추구하는 것을 <극단 : 탁자의 모서리>라고 말한다. <극단>은 <해탈>이 아니라 자신을 망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연기>의 세계를 깨닫는가?

석가는 깨달음을 아는 방법으로 삼법인(3개의 진리의 도장)을 말한다. <연기>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원인이 되어 돌고 돌기 때문에 결국 그 본질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라는 3개의 진리로 표현된다.

제행무상이란? 제행은 <움직여 변한다>는 뜻이다. 무상은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움직여 변하므로 결국 인연에 의해 연결된 세계는 사간에 따라 변하게 되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제법무아란? 제법은 <율법, 진리>를 말하고, 무아는 <나란 없다>는 뜻이다. 즉, 나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나란 육체와 정신, 생각, 역사 등등이 어떤 원인과 결과로서 만들어낸 순간적 존재이다. 순간이 지나면 변하는 것이 나이며, 내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아트만)이란 없다. 즉, 보편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열반적정이란? 열반은 <해탈>의 불교식 표현이고, 적정은 <소멸>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것이 <연기>로서 돌고 도는 인연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고통과 번뇌>가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8정도를 행동으로 옮기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면 <고통>이 사라지고, 고통이 사라지면 해탈한다는 것이다.

6. 석가의 가르침을 남긴 마가다국

석가의 이러한 불교 철학과 종단(승가)은, 갠지스 강 유역에 위치한 마가다국에 의해 보호되었다. 석가는 살아 생전에 갠지스 강 유역의 마가다 지방에서 깨달음을 찾으며 고행을 했었다. 또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포교 거점으로 삼았던 지역이 마가다 왕국이었다.

마가다 왕국은 북인도 16대 강국 중의 하나라 불교, 자이나교의 발상지로 불리는 국가이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석가를 신하로 끌어들이기 위해 영토를 주겠다는 말까지 했던 왕이다.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은 그 이후 불교와 자이나교의 성지가 되었다.

갠지스 유역을 통일했던 기원전 5세기의 마가다국과 달리 기원전 4세기의 마우리아 왕조는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면서 불교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마가다 왕국의 후손으로서 아리안 전통 직계인 마우리아 3대왕 아쇼카는 불교사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석가의 연기설은 당시 통일국가 이념으로도 제격이었다. 연기설이란, 모든 사물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연결된 것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각 부족별로 흩어져있던 당시 사상 체계를 통합하는데 딱 좋은 사상이었다.

개체는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의 인과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 즉, 개별적인 것들은 전체적인 것의 일부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부족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들은 좋던 싫던 다른 부족과의 관계에서 살아가게 되고, 궁극적으로 통일된 전체에 의해 규제받게 된다. 전체라는 것은 개별 부족을 넘어선 중앙집권국가의 지배자를 뜻할 수도 있다.

쉽게 말해, 모든 것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국가도 인연을 맺고 있다. 강력한 국왕이 출현한 것도 그 인과 관계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국왕은 모든 백성을 때려잡는 국왕이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슬기로운 지배자이다. 브라만 신앙에서 내려오는 정법(정의)의 지배자를 <전륜성왕>이라고 한다. 즉, 마우리아 왕조의 절대자 아쇼카 왕이 곧, 전륜성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쇼카 왕은 이 전륜성왕의 브라만 신화와 불교를 연결시켜 버렸다. 전륜성왕의 통치를 돕기 위해 <미륵불>이 지상으로 내려와 백성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미륵불> 신앙이라는 또 다른 의미의 신앙이 등장하였다.

아쇼카 왕은 전륜성왕과 미륵불 사상을 몸으로 실천하였다. 자신이 정법을 구현하는 왕이 되어 북인도를 통치함은 물론, 자신의 분신들을 주변국에 보내 불교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남부의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도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한다. 멀리는 이집트,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불교라는 종교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소카 왕 때의 불교는 <소승불교>라는 초기 불교였다. 아직 불교는 출가자들 위주의 불교였고, 국왕은 불법을 지키는 호법왕이라고 여겨졌다. 부처가 되는 것은 개인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함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전륜성왕

그러나 아쇼카 왕 사후, 기원전 2세기 무렵 불교는 또 다른 격동을 겪게된다. 아쇼카 왕이 죽은 뒤 약해진 마우리아 왕조는 서쪽에서 밀려온 이민족들에 의해 분열된다. 그리고, 만민 구원을 외치는 서방 종교와 서아시아 밀교 등이 들어오면서 <대중 전체의 구원>을 생각하는 불교가 등장한다. 이 때의 불교를 <대승 불교>라고 하며, 대승 불교는 비단길 등 교역로를 따라 중국과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대승 불교 이야기와 동아시아 불교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 나라까지 들어오게 된 <한국식 불교> 이야기이다. 동남 아시아로 내려간 소승 불교 이야기는 따로 하지 않겠다. 중국과 한반도로 넘어온 종파를 위주로 <대승 불교> 이야기를 좀 하고, 중국, 한반도, 왜로 넘어간 불교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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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할 만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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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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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비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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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상앙의 변법운동

1. 변법운동의 배경

변법운동의 배경은 15,16장에서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상앙이 다른 나라보다 변법을 더 강력히 추진해야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진나라가 서방의 오랑캐로 불릴 정도로 낙후된 국가라는 점이었죠. 진은 서방 끝에서 시작되어 중화문화에서 상당한 변방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진에게도 큰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중원의 치열한 전쟁에서 벗어난 지역이었다는 점과 위수분지를 중심으로 한 천연의 요새이자, 곡창지대였다는 점입니다. 상앙은 진의 잇점을 살리고, 진의 부국강병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구귀족과 구체제를 모두 없애 버리고, 진의 잇점을 실릴수 있는 효율적인 제민지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진이 외진 곳에 있다는 것은 다른 국가의 눈치와 강압을 피해 부국강병정책을 마음껏 펼칠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 진이 변법을 시도했을 때, 주변국의 침입은 거의 없었으며, 진의 전쟁은 진이 원할 때 원하는 국가와 동맹을 맺고 했다는 점도 특이합니다. 보통 진의 외교책을 먼 나라와 동맹을 맺고 가까운 나라부터 제압해가는 <원교근공책>이라고도 하죠.

2, 상앙의 1차 변법

상앙의 변법은 2차례에 걸쳐 각각 당면한 목적을 가지고 시행되었습니다. 상앙의 1차적 변법 목적은 종래 구귀족을 일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귀족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진 주나라 종법제도의 파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개혁은 말 그대로 주나라의 혈연의식에 기반한 종법원리를 철저히 부수어 모든 사회 조직을 재편하기 위함입니다. 일단 상앙은 각각의 호와 민들이 상호 감시하는 십오제와 연좌제, 그것을 위한 사전조사인 호적작성을 통해 씨족공동체적인 읍제질서를 철저히 파괴하고 구귀족의 특권을 없애버립니다. 귀족공동체적인 사회 조직인 국가 행정조직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또 분가정책을 통하여 가족들을 다른 호로 분리시키는데, 이것은 더 많은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농업생산력 극대화를 위해 철저한 중농정책을 펼침과 동시에 상업은 규제하는 억상정책을 시도합니다. 농업이란 가장 효율적인 생산수단이나, 상업이란 생산된 물품을 분배하는 것일 뿐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상앙의 변법에서 구귀족들이 가장 많이 반발한 것은 군공수작제입니다. 전쟁에 나가 공이 있는 자들에게 <작>을 내린다는 이 제도는, <작위>와 그에 따른 <예법>이란, 귀족에게만 있다는 주나라 제도의 근간을 통채로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평민들도 능력이 있으면 <예법>이 없어도 <작위>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3. 상앙의 2차 변법

상앙의 1차 변법이 기존 <종법제도 파괴>였다면, 2차 변법은 파괴되어 임자가 없는 모든 사회질서를 군주에게 돌리는 정책이었습니다. 정의를 내리자면 <군현제적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제민지배체제의 완벽한 확립을 통한 왕권의 신성화>가 그 목적이었죠.

단 분가정책은 더욱 강화됩니다. 아예, 부자지간, 형제지간에도 같은 집에 있지 못하도록 하여 분가된 호의 수를 늘리고, 세금원을 많이 확보합니다. 군공수작제도 더욱 확대합니다.

1차 변법과는 달리 2차 변법에서는 일정부분 상업도 인정합니다. 농업외에 상업에서 걷는 조세도 국가 수입원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믿음으로, 도량형을 통일하고 국가가 무역을 규제하면서 이득을 얻는 정책을 실시합니다.

또 1차 변법으로 파괴된 씨족적 사회질서에는 군현제적 질서가 침투합니다. 군, 현에 따라 인두세와 호등세, 토지세를 부여하여 국가가 직접 인민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4. 상앙의 시대 휴경농법이 시작되었는가, 휴경농법이 사라졌는가의 논쟁

상앙의 변법에서 한가지 이슈가 되는 것은 휴한 농법의 문제입니다. 상군서의 제원전을 보면, 상앙이 <제원전>을 설치했다고 나옵니다. 문제는 원이 휴한농법을 상징하는 글자라고 할 때, 제라는 글자가 <제정>인가, <제거>인가의 논쟁이죠.

제를 제거라고 보면 휴한농법이 이 때부터 페지되어 연작상경을 했다는 뜻이 되는데, 당시 농업기술로 매년 농사를 짓는 연작상경은 조금 무리입니다. 비료도 없구... 제를 제정이라고 보면 이 당시부터 휴한농법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즉, 땅의 지력을 생각하여 서양 중세의 3포제 처럼 일정한 땅을 쉬게 해주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다수설입니다.

또 하나의 논쟁은 천맥을 열었다라는 뜻의 <개천맥>이라는 단어입니다. 천맥을 정전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때, 여기서 개를 <열다>로 해석하면 이 때부터 <정전제>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면 서주부터 시작된 정전제를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 상앙의 변법이념과는 조금 안 맞는 듯 합니다. 개를 <파괴하다>로 해석하면, 정전제를 파괴하고 토지 사유제가 시작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상앙의 변법 내용으로 보았을 때 후자가 다수설입니다.

5. 상앙 변법의 성공원인

상앙 변법의 성공원인 중 가장 큰 것은 법가주의적인 상앙의 무대포 개혁을 왕이 적극지지했다는 점입니다. 상앙의 변법은 왕이 살아있는 한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변법이 가장 철저한 법가주의적으로 시행되어 반대파의 주장을 묵살하고, 구귀족을 철저히 제거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으로 진나라는 어느 나라 못지 않은 강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그 결과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는 나라로 역사에 이름이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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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서주시대 봉건제도에 대한 분석

1. 봉건제에 대한 이론들

봉건제도는 전통적으로 중국 서주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그것은 전통적인 중국사회가 유가주의를 사상적으로 채택하면서 유교의 유덕자 주공에 의해 봉건제의 기틀이 마련된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흔히 이렇게 유가적 봉건론을 주장하면서 주공을 신성시 하는 학파를 신고파라고 합니다.

주공은 <혈연>을 중심으로 새 정복지에 대하여 왕실의 울타리를 마련하고, 국가 기반을 든든히 다지기 위해 일족과 공신에게 땅을 분봉하였는데, 이것을 봉건제의 기원으로 보고 있습니다. 주공은 봉건제도, 지방통제제도, 어진 재상의 모범, 강태공 등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러한 봉건제도에 대한 유가적인 입장을 부인하는 연구들이 많았습니다.

사실 봉건제는 주공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며, 은나라 시대에 이미 실시하고 있던 것을 주나라에서 확대 실시했다는 주장이 그것입니다. 봉건제를 주나라에서 계승하여 확대 실시한 목적은 은주교체기의 정치 사회적인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첫째로, 새로운 정복지에 왕실의 일족과 믿을 수 있는 공신을 제후로 봉함으로서 사회적 혼란을 수습함과 동시에, 공신에 대한 포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종래 은왕조에 종속되었던 유력한 읍의 지배자를 서주의 지배체제로 복속시키기 위한 사회적 의도가 있었습니다.

셋째로, 유가적인 봉건제 해석은 실제 봉건제가 주대 이상적으로 실행된 것이 아니라 후대 진시황의 법가적 통일에 대한 반발로서 부각된 것이라는 점입니다. 진의 법가주의적 통치와 분서갱유같은 유교탄압이 진왕조의 단명이라고 생각한 유교주의자들은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봉건제도를 상당히 미화한 것입니다.

2. 봉건제도의 구성

봉건제도는 일단 토지를 여러 단계로 분봉하는 과정을 포함합니다. 왕은 왕토사상에 의해 전국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직할지인 왕기만을 소유하고 나머지 토지는 제후에게 분봉합니다. 제후에게 분봉한 땅을 <국>이라고 합니다. 제후는 자신의 국(국가)를 가지고 독자적인 세력으로 거주하면서 가신집단인 경, 대부에게 토지를 사여합니다. 경, 대부에게 분봉한 땅을 <공읍, 채읍>이라고 하며, 그 중심지를 <도>라고 부릅니다.

즉,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왕기 - 왕의 직할지, 원칙적으로  왕토사상에 의하여 모든 땅은 국왕의 소유라고 관념적으로 규정한다.
   국 - 주왕실이 분봉한 읍, 제후는 이곳을 성곽으로 둘러싸고 자신의 영역으로 확정한다.
   도 - 제후가 경, 대부에게 분봉한 읍(공읍, 채읍), 경, 대부는 국의 중심지를 성곽으로 둘러싸고 종묘사직을 설치한다.
   봉토 -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내려준 토지의 명칭, 이 토지(채읍)를 받은 대가로 군사적 봉사와 공납이 따른다
   구조 - 왕기에서 각 읍에 이르는 분봉 과정은 피라미드형 구조이다.
            ; 도의 경, 대부가 갖는 봉건적 의무 역시 제후가 주왕실에 해야 하는 의무와 같다.

3. 봉건제도의 원리

봉건제도의 원리를 한 문장으로 규정하자면 천명사상, 왕토사상, 종법제도, 혈연중심 통치제도 속에서 공납과 군역의 의무를 매개로 맺어진 사회, 정치 질서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볼까요?

봉건제도는 국왕은 신으로부터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천명사상과 모든 땅은 국왕의 땅이라는 왕토사상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 속에서 혈연적 유대관념과 씨족적 질서, 종법제도, 세습제도 등으로 천명사상을 든든히 받쳐줍니다.

특히, 종법제도는 천명사상, 왕토사상에 근거한 혈연중심 통치제도입니다. 종법이란 부계씨족제, 장자상속제라는 제도적 틀 속에서 본가와 분가의 종적 신분질서를 철저히 규명하는 제도입니다. 이것은 곧 동양 가족 질서의 기반이기도 합니다.

종법에서의 종주는 주왕실입니다. 주왕실은 종국, 종읍, 종묘, 종족 등의 관념을 형성하고 이것을 종법 속에서 신격화합니다. 천자는 하늘의 자식으로서 왕토사상에 입각하여 왕기를 다스리고, 제후, 방백들에게 <국>을 하사하여 혈연관계를 과시합니다. 제후와 방백은 경, 대부, 사 등에게 혈연관계에 입각하여 <도>를 하사함으로서 <혈연적 봉건 신분제>를 유지합니다.

서양의 봉건제도가 계약에 의한 것이며, 일본막부의 봉건제도가 의리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특징을 갖는다면, 중국의 봉건제도는 혈연을 중심으로 했다는 것에서 차이점이 있습니다.

왕도주의는 이념상 유가적 이상주의이지만, 이 제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조공, 순수, 감국 제도 등을 활용하여 제후들을 철저히 통제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지방분권주의의 병폐를 막기위한 제도적 방편이었지요. 물론 이것은 실패하여 진나라 시기 법가적 중앙집권주의로 돌아서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봉건제도의 원리를 요약하자면, 봉토를 매개로 공납과 군역의 의무를 부여하고, 혈연성을 과시하는 혈연적 종법질서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봉건제도의 원리는 한계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혈연관계가 소원해지면, 종가에 대한 분가의 종법적 충성심이 점점 무너진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봉건제도를 기반으로 국가 운영체제를 구축한 전한, 서진은 종친, 왕자의 난 등 혈연관계의 지배집단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 국가 기반이 흔들리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봉건제가 갖는 가장 큰 모순중 하나입니다.

4. 서주의 지방제후 통제

서주에서는 봉건제도의 원리 하에서 효율적인 지방 통제를 하기 위한 여러 방편을 마련했습니다.

제도적인 통제책으로는 종법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혈연의식강화로 인한 통제 효과입니다.
   사상적인 통제책으로는 천명사상을 바탕으로 한 전국토의 왕토사상으로 인한 통제 효과입니다.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제도에 의한 통제였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볼까요?

일단 서주는 주공시대에 채숙의 난을 진압하고, 양경체제를 구축합니다. 양경체제란 종주, 성주로 주요 거점을 나눠 국가를 통치하는 방책을 말합니다.

종주란, 주의 본거지인 호경으로 왕기(직할지)를 말합니다. 성주란, 낙양을 말하는 것으로 은의 옛 땅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건설한 곳입니다. 종주와 성주는 각각 종주 6사(서방 6사), 성주 8사(동방 8사)로 구성된 천자 직속군단이 있어 태사가 이를 통솔합니다.

종주6사는 왕실군으로서 국인으로 편성됩니다. 역할은 서방방어 및 호경 방어입니다.
   성주8사는 은의 유민으로 편제하여 낙양을 방어하면서, 지방제후의 반란 진압, 동남이 정벌의 주력부대로 활용됩니다.

다음으로 지방제후의 일족을 중앙에 머물게 하고 관직을 임용해줌으로서 효율적으로 지방을 통제합니다. 또, 지방에 감시관을 배치하는 <감국제도>, 천자와 제후가 상견하면서 중앙과 지방의 군신관계를 확인하는 절차로 물품을 바치는 <조공제도>, 천자의 권위를 지방으로 확대하고 제후의 정치를 천자가 나서서 직접 살피는 <순수제도>등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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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시대의 종법질서에 의한 씨, 성 제도가 있었다

1. 서주 시대의 정치

보통 은나라 다음으로 주나라 역사를 전개한다고 할 때, 주나라의 시기는 2시기로 구분됩니다.

먼저, 호경을 수도로 한 서주시대로서, 이 시대는 중국에서 가장 이상적인 시대로 평가합니다.

두 번째로, 낙양을 중심으로 하는 동주시대로서 이 시대는 주왕실이 문란해지고 각지에 제후들이 실권을 잡게 되는 특징을 보이기 때문에 춘추시대, 전국시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주나라는 주 문왕이 건국하였고, 무왕 때 역성혁명을 일으켜 <주>라는 국가를 성립시켰습니다. 그러나, 주 무왕은 은나라의 귀족들을 몰살시키지 않았습니다. 은나라 자체가 도시국가의 연합적인 성격이 강하였기 때문에, 은나라의 세력 기반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은나라의 기반 세력>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주의 무왕은 은왕의 아들 및 일족, 공신들에게 주변의 토지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주왕실의 울타리 역할을 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봉건제도>인 것입니다.

주나라는 성왕 대에 가서 어린 왕을 보필하는 <주공 단>이 실권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주공 단은 왕권에 욕심내지 않았고, 어진 정치로 백성들을 보살폈으며, 왕이 성장하게 성인이 된 이후 왕에게 자신의 실권을 고스란히 물려줍니다. 그리고 그는 낚시나 하면서 소일 하는 <강태공>이 되었다는군요.. <주공 단>은 훗날 중국에서 어진 재상을 뜻하는 일반명사처럼 쓰이게 됩니다.

특히 주공단은 은의 유민들이 사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반란들을 잘 다스렸다고 합니다. 관숙과 채숙이 일으킨 삼감의 난은 유명하죠. 삼감의 난으로 주공은 은의 유민들을 통제할 방법을 찾습니다. 주공 단은 효율적으로 주의 영토를 다스리고, 지방 제후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종주, 성주를 건설하였습니다. 그는 수도인 호경은 서방의 수도로서 <종주>라 하였고, 낙양은 은의 유민을 동방에서 이주시켜 <성주>라 하였습니다. 이러한 2중적인 거점 도시 건설은 은의 유민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면서 주왕실에 복속시키기 위함이였습니다.

주공 단의 시대를 중심으로 주나라는 이민족 정벌도 꾸준히 시도합니다. 동쪽으로 나아가 은의 잔당인 동이족에 대한 토벌을 시도하고, 서쪽으로는 견융족과 험윤족을 정벌합니다. 그러나 남부의 양자강은 정복하기 어려워 아직까지 주의 영토는 황하강을 중심으로 한 북부지방에 머뭅니다. 남부는 미지의 세계로 남게 되지요.

2. 주의 사회 통제 장치 - 종법제도와 성씨제도

주 시대는 은나라 시대보다 중앙관직이 더 다양해졌습니다. 은대는 신성정치를 하면서 제사, 전쟁 위주의 관직분포라고 설명했었습니다. 주는 은나라와 같이 제정일치사회이긴 하지만, <신성정치>를 하는 국가의 색체는 약합니다. 건국부터가 <역성혁명>을 표방하며, 천손도 교체될 수 있음을 주장했으니까요. 따라서 주대의 관직은 다양하며, 국가규모가 커질 수록 관직수도 늘어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국가에 봉사하는 귀족들은 관직 복무의 댓가로 <채읍>이라는 땅을 받았고, 관직도 세습되었습니다.

이렇게 관직도 많아지고, 땅을 받은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주나라는 이러한 왕족, 친족, 관리들을 통제해야 할 필요가 생겼습니다. 이러한 통제의 관점에서 종법제도가 정립됩니다.

종법은 혈연적인 친족관계를 명확히 하여 주 왕실에 대한 충성을 견고히 하는 것을 목적으로 탄생하였습니다. 종법은 아버지 혈통에 따른 부계씨족제, 장자 상속제를 기반으로 본가집과 분가집을 종적인 신분질서로 규정한 것입니다.

이러한 종법의 원리 속에서 성씨제도와 씨족제도라는 것이 탄생합니다. 성씨제도란, 종법사회에 있어서 혈연을 명확히 구분할 필요성이 있어서 귀족들이 만든 것입니다. 성씨제도에서 <성>이란 일반 평민들도 가질 수 있는 것이지만, <씨>라는 것은 귀족들이 스스로의 집단을 다른 집단과 구분하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귀족이 중심이 되는 사회나, 신분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에서는 <성>보다 <씨>를 더 중요시 하죠. 우리 나라에서도 고려, 조선 시대에는 성보다는 가문(씨>를 훨씬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안동 김씨, 전주 이씨 처럼요.. 어떤 집단에 속해 있다는 <씨> 안에서 <성>은 존재한다고 보았으니까요. 김씨, 이씨 등의 단순한 성은 옛날 사회에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중국이나 한국이나 고대의 성 중에서 女자변이 들어간 성이 많다는 점입니다. 이것으로 고대가 모계중심사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지요.

3. 씨족제도를 좀더 자세히 살펴볼까요?

씨라는 것은 <성>에서 갈려져 나온 집단의 명칭입니다. <이씨>가 성이라면, <전주 이씨>는 씨입니다. 이렇게 씨와 성을 구분하는 것은 주왕실(공실)에서 분가하여 새롭게 자리잡은 집단의 시조는 누구인가, 이러한 집단은 공실과 어떤 관계인가를 규명하기 위함입니다. <주공 단>을 보면, 주공이 씨 이고 이름자는 단입니다. <주공>이라는 씨에서 주나라 공실 출신인 본가임을 알 수 있지요.

이러한 씨족제도로서 종법제도가 유지됩니다. 이 종법제도는 본가와 분가를 구분함과 동시에, 남존여비사상, 적서차별사상, 동성불혼 사상 등을 포함하는 사상입니다. 즉, 종법제도가 정작되면서 남자중심의 씨, 성 제도가 정착되고, 이것으로 여자의 지위는 끝없이 하락하게 됩니다. 바로 이 주나라 시대의 종법질서에서 유교적인 남성위주의 사회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죠.

대표적인 예로, <제잉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잉제는 왕실인 제후(공실), 대부(씨실)에게 출가할 경우 언니, 여동생이 동시에 출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공 단>에게 시집갈 경우, 언니, 여동생은 주공단과 동시에 결혼하는 것이죠. 단, 서민집단은 이러한 성, 씨와 관련이 없으므로 1부1처제였습니다.

 이 종법제도는 봉건제도를 다룰 때, 이것보다 훨씬 자세하게 설명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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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에서 서주라는 시대를 인정해야될까?

1. 서주라는 시대를 인정해야 하는가?

서주라는 시대는 공자나 맹자와 같은 유교 사상가들이 가장 이상적이 평화로웠던 시대라고 규정한 시대입니다. 중국 문화의 기본 틀은 봉건제도, 정전제도, 종법제도 등이 이 시대에 나왔고, 실제 이 시대에서는 이러한 이상적인 틀들이 이상적으로 잘 지켜진 시대라고 유교사상가들은 말합니다.

전통적인 중국의 유교주의자들은 옛날 문헌의 모든 사실들을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서주는 봉건제도를 완성한 중국의 이상사회로서, 가장 가치있는 시대의 경험이라고 말이죠. 반대로 말하자면, 이러한 이상시대인 서주를 멸망시킨 춘추전국시대란, 암흑시대요, 저주의 시대가 시작된 것으로 볼 수 도 있는 것이죠.

그러나 중국 신문화운동기를 주도했던 근현대 사학자들은 서주시대의 이상을 철저하게 비판합니다. 중국의 현대화를 위하여 중국 전통 사상인 유교의 문제점을 하나하나 끄집어 내었던 사람들은 서주라는 시대가 유가주의자가 만들어낸 허구 시대라고 말합니다. 삼황오제의 전설은 제자백가시대에 창작된 창작물에 불과하며, 유교적인 이상이 실현될 수 있는 국가는 실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죠. 이들은 아예 서주 및 중국고대사들을 하나하나 비판하면서 서주 이전의 역사기록들이 전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실제, 역사에서 서주의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전 시대인 은나라의 유물이 더 많죠.

2. 그래도 서주 시대는 중국사의 기본틀이다.

문제는 서주 시대를 인정하든, 하지 않든 간에 서주시대가 중국사에 미친 영향이 너무 크다는 점입니다. 실제, 중국역사를 통털어 서주시대의 제도, 문물의 영향을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받지 않은 시대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서주시대는 중국 역사에 있어 창업, 개혁, 제도정비 등의 모델로 자리잡았죠. 예를 몇가지 들어볼까요?

일단 중국 역대 왕조들 중에 <주>라는 이름의 국가들은 상당히 많습니다. 북주, 후주, 무주 등등이 그렇지요. 또, 왕망은 <신>이라는 국가를 창건할 때, 국가의 이상적 모델로 서주의 제도들을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또, 전단계국가를 멸망시키고 다른 국가를 세울 때 하늘의 계시를 받아 나라를 세운다는 <역성혁명>의 이론도 주나라의 왕조교체에서 나온 것입니다.

거기에 중국식 시호제도, 봉건제도, 종법질서, 정전제도, 가족질서 등은 모두 서주의 모델을 근거로 하여 체계적으로 확립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중국 대부분의 통일왕조는 모두 서주의 근거지인 <위수분지>를 거점으로 창업하였습니다. 유일하게 위수분지가 아닌, 중국남부에서 창업한 나라는 몽골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명>나라 밖에는 없습니다. 이 위수분지는 농사짓기에 최적의 위치이자, 이민적을 막기에 천연의 요새지이고, 동서교류의 요충지로서 서주 이후의 국가들은 이 곳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3. 은에서 주로 교체되는 시기의 논쟁

은나라가 망하면서 주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의 <역성혁명>에 대해서도 역사적인 평가가 많이 갈라집니다.

은나라가 망한 것은 걸왕의 폭정 때문이며, 주를 세운 무왕은 <하늘이 새로운 뜻>으로 자신을 택하였다는 <역성혁명>의 이론으로 주를 세웠습니다. 이 <역성혁명>이란 것은 주나라가 <하늘>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정립한 것을 뜻합니다.

은나라에서의 천명사상은 <신성함> 그 자체입니다. 은의 황제는 하늘의 자손으로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신성불가침>한 존재이며, 선천적으로 절대자입니다. 그러나 주나라의 천명사상은 하늘의 뜻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은나라 왕이 폭정을 했기 때문에, 그를 처단하고 새로운 하늘의 뜻을 보여준다는 <역성혁명 : 성을 바뀌어 새로이 하늘의 뜻을 대신함>은 후천적이고 가변적인 천명입니다. 이러한 주의 <천명사상>은 후대 왕조가 바뀔 때마다 이용됩니다. 실제, 삼국지를 보면 위나라 조조의 아들 조비가 나라를 세울 때, 황제가 나에게 <쳔명>을 양보하여 황제가 바뀐다는 <선양의 예>에 따라 황제가 등극하는 예를 보여줍니다. 그 이후 이 천명사상은 중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왕조교체의 논리로 이용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주의 왕권 교체가 과연 혁명적이였는가에 대한 논쟁입니다.

보통 혁명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주나라가 혁명을 일으켜 나라를 세움으로서 봉건제도, 종법제도라는 중국적 제도를 완성했으므로, 은주혁명은 아주 획기적인 혁명이라는 입장입니다.

반대로, 서주의 등장은 은나라의 체제를 계승한 국가로서 혁명이 아니라 사회구조를 계승한 국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서주시대의 봉건제, 종법제, 읍제국가체제는 이미 은나라 말기에 있었고, 서주는 은말체제를 계승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주장을 하는 것은 유교주의자들이 서주를 위대하게 보는 것을 깔아내리려는 신문화운동기 학자들의 의도가 어느 정도 내포된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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