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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이 역사를 대신하잖아!'

사람들은 역사를 진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역사란 있었던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에 과거를 아는 사람은 없다. 역사를 변신로봇처럼 조립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1장. 12년동안 만두만 먹으면서 자란 아이들.

지금부터 일기를 쓰듯이 풀어서 역사를 조잘조잘 써보려고 한다. 그런데 말이지, 책이나 뭔가 보면 그럴듯한 서문들을 앞에 적어 놓잖아. 나도 뭐 그럴 듯한 뭔가를 적어보려고 하는데 말이야. 뭐 폼나는 거 없을까?

생각해보니깐 인터넷으로 역사에 관한 글을 적는다는 건 너무나 자유로운 일이다. 누구도 간섭하지 않고, 누구나 기분나쁘면 반박할 수 있는 공간인데, 난 그동안 너무 딱딱하게 샌님처럼 글을 적은 것 같군.

고등학교 때가 생각나는군. 누구나 한번쯤 겪은 일이라 특별할 것도 없는 이야기인데, 아마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T(샘) : 자... 공부했으니 확인해야지? 삼국통일의 의의가 뭐지?

S(우리) : 저기 선생님... 얼마전에 가야도 배웠으니까 사국통일 아닐까요?

T : 그니까... 내가 물어보는 건 말야.. 신라가 통일한 시기를 말하는 거잖아. 삼국통일의 의의가 뭐지?

S : 저기 당나라 도움을 받았다면서요. 그런데 왜 삼국통일이 자주성이 있다고 적혀있어요?

T : 그래서 대학 안갈래? 꼭 너같은 애들 땜에 진도도 안나가고 수업이 안드로메다... 아니 당나라로 날아가잖아. 당나라를 물리쳤으니깐 자주적인 통일이고, 대동강 이남만 통일했으니깐 한계가 있는 통일이죠?

S : 저기요... 진흥왕 때 세운 마운령비, 황초령비가 훨씬 위쪽인데.... 통일하면서 영토가 더 아래로 내려와요?

T : 그래서??? 고구려, 백제가 안 망했니?

S : 저기 발해가 건국되서 남북국이라면서요... 근데 왜 통일이에요? 발해는 남의 나라인가요?

T : 너.... <교과서> 공부는 안하고 뭔 생각만 계속 하는거냐???

그래... 생각해보면 결국 교과서에 적혀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진리가 되는 역사가 있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창의력을 넓혀주려고 열심히 질문을 던지는데, 그 질문이 원하는 건 교과서에 적힌 한줄의 딱딱한 문구 뿐이다.

그래놓고도 교과서는 뻔뻔하다. 고등학교 교과서 첫장을 보면, 역사적으로 생각하는 <역사적 사고력>을 키우기 위해 한국사를 배운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교과서에 있는 것만 수능에 나온다는데, 교과서를 벗어난 사고력이 대한민국 어디에 존재하는지....

아... 문득 갑자기 영화 올드보이가 생각난다. 감옥에 갇혀 15년간 만두만 먹은 그 수염긴 파이터.... 우린 그넘과 다를 바가 없는 듯 싶다. 초, 중, 고, 대학.... 15년간 똑같은 내용의 역사책만 배운 우리... 갑자기 따스한 햇살이 그립다.

난 대한민국의 역사선생님들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분들 역시 참교육을 위해 무진장 애를 쓰고 계신다. 그러나, 공교육이든, 사교육이든 입시제도 아래 존재하시는 모든 분들은 <교과서>를 벗어난 역사를 말할 수도 없고, 수능에 안나오는 변두리 역사를 말할수록 유능함에서 멀어지며, 교과서보다 더 깊고 심도있는 역사를 이야기하면 왕따를 당하는 현실이 무섭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장. 역사엔 자기주도학습이 없다?

역사를 이야기할 때, 교과서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그것은 교과서를 만든 그 분들과, 역사가 무엇인가를 써 내려가는 그 분들이다. 교과서를 공부하다보면, 이런 의문이 생긴다.

T : 일제시대 우리 조상들의 현명함을 볼까요? 의병항쟁은 총, 칼을 들고 무력으로 일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던 반면,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계몽운동을 통해 일본에게 벗어나려고 했던 운동이죠. 안창호, 이승훈 선생님등이 이끈 신민회를 배워볼까요?

S : 저기 의병항쟁은 나쁜거고, 애국계몽운동은 좋은 거에요?

T : 왜???? 왜 그런 생각을 하지?

S : 저기... 의병항쟁은 애국의병항쟁이 아니라 그냥 의병항쟁이구... 계몽운동만 애국계몽운동이잖아요.... 그럼 의병들이 칼들고 일본이랑 싸운건 무식한 짓이고, 교육으로 일본에 저항한 것만 애국인가요?

T : ... 그런건 시험에 안나온다.

교과서의 곳곳에는 이런 함정들이 숨어있다. 의병항쟁은 단순히 일본에 저항했던 사건들과 전투들을 나열한 뒤 그 의의만을 적어두지만, 계몽운동은 그 단체들부터 사업에 이르기까지 아주 꼼꼼하게 적어두었으며, 그 명칭을 달리한다. 학생들은 교사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지식을 주입받게 된다.

그래.. 역사를 적는 이들은 이미 제목에서부터 우리에게 뭔가를 강요하고 있으며, 역사는 이런 것이라는 규정을 미리 만들어 과거를 <칼질>하고 있는 것이다.

에휴... 생각해본다. 역사를 공부할 때 <역사란 무엇인가?>부터 생각하라고 한다. 하지만, <역사란 무엇인가?>를 미리 생각해놓고 책을 적어놓은 사람들은 기존의 역사가들이다. 그 책을 읽으면 누굴 따라가게 되는 것일까?

사실 역사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역사를 누가 먼저 만들어 놓았는가?>이다.

역사는 과거에 일이고 과거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역사 전문가라는 분들이 역사를 연구해서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이 중요한 일인지를 폼나게 글로 남겨 주신다.

하지만, 그것은 역사 연구가들이 할 일이시다. 우리는 그냥.... 필요한 관심있는 역사를 골라 있고 그 분들이 만들어놓은 것을 비판하기도 하고, 옹호하기도 하고, 똥을 싸질러놓기도 하고, 반짝반짝 닦아서 아우라를 펼쳐내기도 하고.... 그냥 걍 읽는 사람 맘이다. 그리고 그것을 편하게 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인터넷 공간이다.

역사는 백명이 책을 읽을 때 백개의 역사가 머릿속에서 탄생하고, 한명이 글을 적을 때마다 한 개의 역사가 새롭게 탄생한다. 역사를, 역사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다양성이란 것을 인정하면 좋겠다는 뜻이다.

역사 연구가들보다 지식이 부족한 이들이 맘대로 역사를 적을 때, 누군가 뭐라 한다면 이렇게 당당헤게 외치면서 글을 적어야겠다.

너희들 중, 죄없는 자 돌을 던져라.... 가 아니라 <저기요.. 과거 사실을 다 아시는 분만, 다 안다고 생각하시는 분만 분필을 던져주세요...> 라구... 공손하게..... ㅋㅋ

3장. 사극이 뒤바꿔놓은 역사에 대한 관심

예전 사극을 보면, 교과서 한단원보다 더 깊은 공부를 하게 되어있다.

왕 : 아니... 사태가 이런데 경들은 진정 생각이 없는 것이요?

신하 1 : 폐하.... 그래도 아니될 일이옵니다. 한나라의... 어쩌구 저쩌구...

신하 2 : 신 영의정 따발총 아뢰옵니다. 이 사태의 핵심은 ...... 이고.... 이니.... 해서.....

신하 3 : 신 좌의정 반대파 아뢰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우리는 ..... 하니..... 하옵고.... 그게....

예전 사극의 제작비는 작가가 다 가져갔을 듯 싶다. 걍 왕이 한마디 지껄이면, 신하들이 돌림노래를 부르며 상황 설명을 다 해준다. 시대 배경부터, 사건의 핵심 개요와 대처 방법, 이후에 해야할 일을 대본 3천자로 요약해서 알기 쉽게 정리해준다. 작가님들 파이팅~~~~

그런데 말이지.... 대장금 주몽이라는 사극이 나오면서 국민들은, 교과서처럼 요약해서 목소리 톤 높은 남자 성우가 나레이션으로 때우는 사극을 더 이상 보지 않는다. 성우.... 재까짓게 아무리 목소리 짱이라고 해도, 얼짱인 송일국이나, 여신 이영애를 어찌해보겠어?

국민들은 대사 길이가 3분 분량만 넘어가도 채널을 돌리는 시대가 왔다. 일단 칼부림 몇 번 해서 채널 안돌아가게 만든 뒤, 주인공이 직접 몸으로 다 때워서 작가의 대본량을 팍팍 줄여준다. 주인공은 레벨 1짜리 겁쟁이 주몽으로 출발해서 해모수의 기를 좀 받고, 모팔모에게 철제 아이템을 좀 받은 뒤, 소금산이나 주변국 등 스테이지 1,2,3를 모두 클리어 해야 한다. 고대 설화에서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면서 성장하듯, 온라인 게임의 레벨업을 마친 주몽은 만랩 파이터 대소와 자웅을 겨룬다. 이것이 현대 역사물이다.

어느 날부터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밝히는 작업보다도,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비교하면서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역사를 비판하는 작업을 더 즐거워한다. 자료가 없는 고대사는 누군가가 갑자기 <노사분규와 청년실업, 사교육조차 없는 고대 쁘레땅 뿌르국>이 진짜 있었다....라고 해도 쉽게 비판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교과서에 없는 역사라던가.... 교과서보다 자 자세한 역사를 선호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그 작업을 격식없고, 자연스럽게... 때로는 너무 거칠게도 표현해 낼 수 있으며, 인터넷에 올라온 주관적인 모든 글들을 비판하면서 댓글놀이를 할 수 있는 자유를 갖는다.

지금부터 적는 글들은 때로는 너무나 유치해서, 때로는 너무나 황당해서, 때로는 너무나 전문적이여서 비판하기도 힘든 그런 내용들이 적힐 수도 있다. 누군가는 아니라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너무 쉽다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이건 너무 어렵고 쓸모 없는 내용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관적인 글이기에 판단은 읽는 사람들이 알아서 할 몫이다.

내가 무슨 역사 전 영역을 통달한 전문가도 아니구... 그냥 있는 사실들을 주관적으로 풀어서 적을 뿐이다. 그럼 시작해볼까나....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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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편>

16화. 고구려의 불교 이야기

1. 불교가 원시 신앙을 대신하다.

자, 이번 회부터의 불교 이야기는 우리 역사 속의 불교 이야기이다. 그럼 시작해볼까?

한반도의 불교 이야기는 인도나 중국 이야기처럼 재미있는 일화로 구성하기가 힘들다. 특히, 고대 불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해동고승전 등 일부 자료와 중국측 기록 외에는 남아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가 불교 이야기를 적더라도 거기서 거기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감안해야 한다.

일단, 삼국유사에 따르면 불교는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 부견이 승려 순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전파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 아도화상이라는 스님이 다시 건너오자 성문사에 순도를, 이불란사에 아도를 머물게 하여 불법을 전수받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첫 번째 이야기는,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가 372년이라는 점에서 추론할 수 있다. 372년은 전진왕 부견이 불도징을 초빙하여 불교가 뭔지를 간신히 깨닫고 있던 시기였다. 아직 도안, 구마라습 등은 불도징의 초빙조차 받지 못한 시기였다.

참고링크 :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 6화. 현학, 청담에서 시작된 격의 불교 이야기

따라서,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는 불교이론이 확립된 도안이나, 구역경을 번역한 구마라습의 시기가 아니라 초기의 원시적인 불교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주술로 꽃을 피우거나, 도교의 신선 이야기로 부처의 이론을 설명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 도안, 구마라습 이야기는 위 6, 7 화 링크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이런 수준 낮은 불교를 왜 국가가 도입했느냐는 점이다. 그 이유는 고대 민간 신앙에서 추론해볼 수 있다.

고구려 초기의 민간 신앙은 상당히 다양했다. 특정 부족신을 숭배하는 부족신 신앙, 동물을 숭상하는 토테미즘, 다신교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정령숭배사상(애니미즘), 주술사를 통해 하늘과 지상을 이어준다는 무격 사상(샤머니즘) 등이 여기 저기에 존재했다.

다양한 종교 사상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국가 체계가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국가에서는 주몽이나 유화부인을 숭배하는 사상(시조신 숭배)을 강조했지만, 각 지역별로 다양한 민간 신앙이 존재했다. 이러한 민간 신앙들은 종교적 역할 뿐만 아니라 일반민들의 사회생활을 지배했고, 심지어 국가가 아닌 지역 공동체에 대한 충성심마저 유발하는 것이었다.

당시 백제에 의해 고국원왕이 죽고, 중국 북조의 압박으로 정치적 입지가 약해진 고구려의 왕실은 부족 통합을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불교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에 알맞은 것이었다.

2. 전진왕과 소수림왕의 정치적 거래

소수림왕 때 들어온 불교는 사실 제대로 된 석가모니의 참 뜻을 이해하기 힘든 불교였을 것이다. 전진왕 부견도 불교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스님은 전쟁의 수호신이거나, 불법으로 국가를 지켜주는 주술사> 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불교를 왜 고구려가 받아들였을까?

첫 번째 이유는, 불교가 이미 고구려 민간 신앙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일 것이다. 국가적으로는 소수림왕 당시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민간에서는 이미 불교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 해동고승전(석망명전)에는 이미 청담사상가들이나 격의불교를 이해하고 있는 중국 고승들이 고구려 불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왕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고구려인들이 신선 사상과 불교 사상을 이미 접하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두 번째 이유는, 소수림왕의 왕권 강화를 위한 사회적 구심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은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을 통해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려고 했다. 그러나, 국왕이 신성하다는 종교적 이데올로기가 이전보다 약화되어 있었다. 고조선부터 전해내려온 제천의식은 더 이상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동예의 무천, 부여의 영고와 같이 대부분의 군장국가부터, 고구려 내부의 각 부족까지 모두 제천의식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신사상과 다른 새로운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위해 불교의 수용은 필요했다.

마지막 이유는, 소수림왕의 대외 정책 때문이었다. 소수림왕은 국가안정을 위해 전진왕 부견과의 화해가 필수적이였다. 전진왕 부견은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고구려와 화해가 필요했다. 소수림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그동안 적이었던 중국 북방의 전진왕과 손을 잡았다.

이것은 중국 북방과 동아시아 북방이 화해를 함으로서 각각 자신들의 영토를 통일할 기반을 마련하고자 한 획기적인 외교적 전환이었다. 이제, 이들은 치고 받고 싸우지 않는다. 그 결과 소수림왕의 후대에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이 동북아를 평정할 수 있는 외교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3. 격의 불교와 호국불교

고구려 초장기 민간에서는 불교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천신 신앙이나, 신선 신앙으로 불교를 이해하려고 햇던 듯 싶다.

이제 주술사(샤먼)의 역할은 스님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명칭만 바뀌었을 뿐 스님이 곧 샤먼이었다. 스님이 손으로 마법을 부려 백성들을 치유하거나, 전쟁에서 수호신 역할을 한다는 믿음은 전진왕 부견 시대의 <불도징>이 불법을 전파하기 위해 활용했던 전략이었다.

주술사들의 웅얼거림과 마법적인 이야기들은 그대로 스님들의 이야기로 전해졌고, 그것이 스님들과 관련된 <향가 이야기>로 전해졌다. 부처와 보살, 미륵을 제대로 구분할 방법이 없었던 고구려에서는 보살을 산신령으로, 미륵을 하늘에서 내려온 지배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절은 원시신앙에서 제천의식을 행하던 신성한 자리에 건립되었고, 전통적 재래신과 보살은 구분이 애매하였다.

특히 고구려는 산신령이나 도사와 같은 <도가 신앙>이 초기부터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도교 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 불교가 쉽게 전파되었다. 부처의 <색즉시공>은 노자의 <무위자연>으로 이해하였고, 불교의 <해탈, 열반>은 도가의 <신선>으로 이해하였다.

반면 지배층은, 불교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활용하는 중국 방식을 철저히 응용하였다. 특히, 불교에서 강조하는 윤회설, 업설 등을 묶어 <인과응보>로 정리하여 지배층의 우월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업설>은 전생의 행위에 따른 윤회를 강조한 것으로 국왕의 신성함을 극대화 시켰다. 국왕은 전생에 높은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만민의 지배자로 다시 태어났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왕은 곧 부처의 화신이며, 귀족들은 왕을 도와 불국토에서 안락을 누릴 미래의 보살들인 것이다. 노예들은 전생의 악덕함 때문에 현실의 고뇌가 시작된 것이므로 누군가를 탓해서는 안되는 신분이 되었다.

또 하나 왕권 강화를 위해 제시한 것은 <연기설>이다. 연기란, <인연>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모든 만남은 이전의 원인과 결과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내가 누군가와 만난 것은 수십만개의 인연이 돌고 돌아 이루어진 것이다. 즉, 모든 현상은 홀로 이루어진 것이 없으며, 상호 관계 속에서 돌고 돌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개체는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사실 우주 안에 살아가는 수많은 현상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떤 원인이 없었으면 지금 너와 나의 만남이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물은 전체 속에 포함되어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을 왕권에 대입하면? 모든 개인은 국가 속에서 활동하며, 국가의 흥망이 개인의 운명을 좌우한다. 모든 부족들도 왕권이라는 공동 운명체 속에서 인연을 만들어 갈 뿐, 독단적으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결국, 개인과 부족이라는 개체를 떠나 초부족적인 통합의 법(다르마)이 존재한다. 따라서 국왕의 행동과 국가의 율령은 모든 개체들의 운명을 위해 절대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고구려의 초기 불교 이념이었던 것이다.

4. 광개토대왕과 불법

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왕은 고구려 최전성기의 3대 태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왕들은 모두 불법의 수호자였다.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후 다음 왕은 드라마 태왕사신기에 나왔던 <고국양왕>이다. 고국양왕은 소수림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참 뜻을 깨닫고, 광개토(담덕)에게 <불교를 받들어서 복을 구해야 한다>는 충언을 하였다.

광개토대왕은 선대 왕들의 유지를 깨닫고 불교를 통한 국가 보호 사업을 추진하였다. 광개토대왕 2년에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는데, 그 이유는 선대 왕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강력한 백제군을 부처님의 가호로 막겠다는 뜻이었다.

평양은 남방으로 내려가는 길목이자, 백제군과 계속적인 전투를 벌었던 요지이다. 또 고조선의 수도이자, 대동강을 통한 국제 무역의 공식 루트였다. 광개토대왕의 불심으로 미루어 북방에도 많은 절들을 건립했을 것이지만, 기록에 없으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단, 당시 5세기의 불교는 구마라습의 구역경이 번역되어 전파된 시기이기 때문에, 국왕이 곧 부처라는 북조의 <왕즉불>사상이 전파되었음은 예측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도 불법의 수호자이자, 자신이 곧 전륜성왕이라는 이념을 생각했을 것으므로, 세계 지도자로서의 불법왕을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5. 장수왕과 불교 첩보전

광개토대왕이 북방으로 영토를 넓혔다면, 다음 왕인 장수왕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실시한 왕이다. 장수왕 때에는 불교에 관련된 재미있는 고사가 나온다.

장수왕이 백제에 보낼 간자(첩자)를 찾고 있었는데, 승려 도림이 자발적으로 첩자가 되겠다고 했다. 도림은 고구려에 큰 죄를 짓고 망명한 스님으로 위장하여 백제 개로왕에게 접근을 한다.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자 도림은 왕의 바둑 친구가 되어 왕의 신임을 얻는다.

도림은 개로왕에게 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거대한 건축 사업을 제안한다. 궁궐 보수, 왕릉 개축 등을 위해 백성들을 징발하여 화려한 건물을 짓도록 한 것이다. 이 사업으로 백제의 창고는 비게 되고, 백성들은 고된 노동을 하게 되면서 국가를 원망하게 되었다. 도림은 장수왕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고, 장수왕은 총공격을 실시하여 백제 수도를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였다.

즉, 스님이 첩보활동까지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몇가지 고구려 불교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불교 스님이 불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국왕을 위해 헌신한다면서 간첩질까지 한다는 점이다. 초기 고구려의 불교가 얼마나 국가 권력에 종속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또,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백제의 백성들을 궁지에 몰아넣은 것은, 불교 자체가 성숙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중생 구제라는 참 뜻 조차 파악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두 번째로 불교 전파를 신라가 크게 반대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신라에서 이차돈의 목까지 잘라가며 불교를 믿으라고 절규할 만큼 불교가 전파되지 못한 점 중 하나가 이런 <불교를 이용한 침략작전> 때문일 수도 있다.

물론, 불교를 전파받는 국가의 지배층은 새로운 사상 자체가 기득권을 흔들 수 있기 때문에 반대한다. 그러나, 그 이유로 <불교라는 종교가 기존 사회체제를 흔들기 위한 선진국가의 함점>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나온다.)

6. 장수왕 이후 불법의 참뜻을 파악한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까지의 불교가 왕권에 휘둘리던 호국 불교였다면, 그 이후의 고구려 불교는 진정한 불교의 뜻을 파악하기 시작한 <종파 불교>였다.

부처의 진정한 뜻을 탐구하고자 노력한 고구려 스님들의 노력은 장수왕 말기 <승랑>에서 시작된다.

승랑법사는 중국에서 구마라집이 인도불경을 번역하여 불경의 참 뜻을 해석하자 그의 경전을 읽으면서 불법을 생각하였다. 그리고 북위로 건너가 중국 대승불교의 참 뜻을 연구하였다.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그는 특히 반야(지혜)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성실종>을 연구하면서 인도 대승불교의 창시자인 용수의 반야사상을 연구하였다. 그가 연구한 학문을 <삼론학>이라고 한다.

삼론종 7대조 : 구마라집 - 승조 - 법도 - 승랑- 승전 - 법랑 - 길장

특히 승랑은 중국의 성실종과 달리, 오로지 순수한 인도의 대승불교만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삼론종의 계보를 잇는 7대 대사로 이름을 날렸다.

삼론학파란?

중론, 백론, 십이문론의 3가지 이론을 내세우는 불교 학파.

이들은 모든 사물은 원래 실체가 없다는 공(空) 사상을 주장하기 때문에 중관학파(공사상 학파)로 분류된다. 아무 것도 없다는 3론은 다음으로 정리해 본다.

1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진리이다. 집착은 언어가 만들어낸 허구적 형상이므로, 결국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불법의 최고 단계이다.

2론 : 만물이 실제한다는 것과 실체가 없다는 것도 언어에 의한 말장난일 뿐이므로, 어느 한쪽에 치우침 없이 중도를 걸어야 한다.

3론 :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탄생도, 소멸도, 영원도, 순간도 없다. 하나도 아니며 여럿도 아니다. 오는 것도 아니며 가는 것도 아니다. (팔부중도)

삼론종은 성실종에서 주장했던 <마음으로 인식하여 언어로 표출>한다는 인식론을 아무 것도 없다는 공 사상으로 체계화하여 정리하였다. 이 삼론종은 중국보다는 고구려에서 더 활성화 되었는데, 수나라 때 길장은 삼론종 7대사에 들어가며, 제자인 혜관은 일본 삼론종을 개창하였다. 이 삼론종은 훗날 법성종으로 불리며 명맥을 이어간다.

반면, 공 사상과 별도로 <유식> 사상을 주장한 이들도 있었다. 중국에서 유식학을 공부한 원측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실제 존재한다는 이론을 주장하였다.

모든 것은 실체가 없는 것인가, 눈에 보이는 본질이 존재하는가의 문제는 <공유논쟁>으로 학문적 논쟁을 야기시켰다. 비록 고구려 불교 교단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지만, 불교 자체가 왕권을 벗어나 스스로 발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7. 승군으로 활약한 고구려의 불교 교단

점차 독립적인 불교 교단으로 발전한 고구려의 불단은 국가 위기 상황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다.

불교에서는 불법을 연구하는 교단도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는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관례가 되어있다. 신라 원광 법사의 세속오계, 고구려 불법 단체들의 몽골 항쟁, 임진왜란 등에서 보여준 스님 의병들의 모습이 대표적인 예이다.

불교 단체가 <호법>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이유는 2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땅이 국왕의 땅이기 이전에 진리를 연구하는 불국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의 땅을 지키기 위해 외적은 반드시 물리쳐야 한다는 호법 사상이 있는데, 이것을 정의를 지키는 정법(다르마 : Dharma)라고 한다.

두 번째 이유는, 국가가 불법을 보장하고 지켜주는 한 불법이 펼쳐지고 있는 국가를 보호해야 한다는 의무 때문이다. 불법의 <연기설>에 의하면 국가가 없으면 불법도 없다. 국가가 불법을 인정한다면 불교 교단은 국가의 위기에서 국가를 지켜야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고구려에서도 국가의 위기 때 직접 전장에 뛰어든 스님들이 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우리는 살수대첩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때, 7 승려들이 살수(청천강) 위를 홀연히 걸어갔는데, 수나라 병사들은 스님들의 행동을 보고 물이 얕다고 생각하여 청천강을 건너기 시작했고, 그 결과 수 많은 군사들이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 이후 7 스님의 동상을 세워서 공적을 칭송한 절이 바로 <칠불사>이다. (동국여지승람)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략했을 때, 고구려 스님 3만명이 당 군대와 치열하게 항쟁하여 물리친 기록도 있다. (고려서 열전 외전)

그러나, 실제 남아있는 기록 및 유물과는 다르게 삼국사기에는 이러한 기록들이 모두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몇몇 사료와 남아있는 사원 등을 통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8. 번성한 고구려의 불교와 쇠퇴 과정

점차 독립적으로 발전하게 된 고구려의 불교는 일본에 전파되었다.

혜편은 일본 불교 최초로 비구니를 양성하였는데, 선신, 혜선 두 일본여인을 가르쳐 출가시켰다고 한다. 혜자는 고구려의 공식 사절로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활약하다고 귀국하였는데, 지금도 호류사에는 혜자법사 상에 존경의 예를 표하고 있다.

담징은 법정과 함께 불교와 더불어 종이, 먹 등의 기술을 전파하였고, 호류사의 금당 벽화를 그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1949년 화재로 벽화가 타 버린 이후 재현된 모사 벽화에는 담징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빼 버렸다.

혜관은 일본 2대 승정이 되었고, 도현은 일본세기를 저술하였으며, 승륭, 운총 등은 일본 사절로 일본을 방문하여 많은 문물을 전파해 주었다.

그러나 5-6세기 전성기를 맞이했던 고구려 불교는 7세기에 급격한 쇠퇴를 맞이하게 된다. 그 이유는 최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의 불교 탄압 때문이었다.

중국 불교를 이야기하면서 불법이 고유한 철학을 찾아가게 되면 도교나 유가를 이용한 탄압이 뒤따른다는 점을 언급했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에 왕권 강화에 이용되었던 호국 불교가 사라져가고, 불교가 독립성을 주장하자 집권자인 연개소문은 중국 당나라에서 유행하는 <호국 도교>를 이용하여 불교를 배척하였다.

그 결과 많은 스님들이 망명하게 되고, 고구려의 불교가 쇠퇴하게 되었다. 특히, 고구려 말기에는 모든 백성들이 부처가 될 수 있으며, 깨달음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열반종 사상까지 들어오게 되자 탄압은 더욱 심해졌고, 보덕이 개창한 우리식 열반종은 백제, 신라 등 남방 국가로 이전되어 전파되었다.

반면, 북교 교리가 심화되자 불교 교리를 통합하기 위한 통합 종교들도 유입되었다. 중국에서 사상 통합을 위해 활용되었던 천태종, 화엄종 등의 교리가 고구려에 유입되었고, 특히 천태종은 고구려 말기에 불교 통합 사상으로 등장하였다.

고구려는 연개소문 이후, 급격한 국력쇠퇴와 내분으로 멸망하였고, 고구려의 종파 불교도 그 꽃을 다 피우기 전에 사라졌다. 다음 편에서는 백제, 신라, 가야의 불교 역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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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던과 문화 코드 (4)

주몽도 리니지의 캐릭처럼 레벨업을 해야 살아남는다.

1. 사극의 천국을 찾아낸 작가들...

오늘 이야기할 포스트모던의 주제는 TV 사극이다. 자, 그럼 한 번 시작해볼까?

21세기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던 카운트 다운이 있기 전까지 우리 나라의 정통 사극들은 신세대들의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옛날 사극들의 지루함을 한번 볼까?

국왕이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라고 묻는다. 그러자 양쪽으로 길게 늘어선 신하들이 돌림 노래를 부른다. 영의정 아뢰오... 저는 이렇게 생각하오... 좌의정 아뢰오... 부당하신 말씀이요.... 이조 참판 아뢰오.. 전적으로 동감하오... (대사 무지 많다... 옛날 배우들 정말 고생많으셨습니다...)

5분 동안 이어지는 신하들의 릴레이 토론으로 우리는 역사 교과서 10장 분량의 공부를 끝마친다. 신하들의 위치와 입은 옷의 색깔, 서 있고 앉아 있는 위치(당상관, 당하관인가) 등은 충실한 고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지금의 사극은 어떤가? 말로 때우는 순간, 채널 돌아간다. 1회부터 빵빵한 효과음과 함께 자객들의 피튀기는 혈전이 시작되고, 시작과 동시에 주인공(또는 윗세대 주인공)이 죽일 고비를 넘긴다. 극은 팽팽한 긴장 속에서 이루어지고, 채널이 돌아갈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다.

한마디로 말해서 재미있고 극적이다.

그럼, 그 대표적인 사극인 주몽을 통해 지금 드라마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현대식 역사물>을 한번 다루어보자.

지난 세기의 역사물들이 있었던 일들을 바탕으로 <철저한 고증>에 바탕을 두었다면, 21세기 역사물들은 알려지지 않았던 역사적 사건들, 또는 자료가 부족하여 알기 힘든 역사적 사건들을 <포스트 모던>으로 다룬다. 그럼, 작가들이 가장 선호하는 포스트모던 역사는 어느 분야일까? 당연 고대사이다.

고대사는 알려진 자료가 없기 때문에, 작가의 상상력을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다. 또, 너도 나도 아는 바가 없으므로 <역사 왜곡>이니 뭐니 시비붙을 건수도 적다.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트집잡힐 이유도 없고, 작가 맘대로 극을 구성할 자유가 넓어지는 것이다. 고대사야말로 <포스트모던의 천국>이라고 할까?

2. 주몽 : 젊은 세대의 감각과 포스트모던의 만남

주몽은 사극이 <포스트모던>으로 구성되면 어떤 결과를 보여줄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일단 볼까?

주몽이 사극의 주인공이라면 강인하고 멋진 영웅의 캐릭터를 연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처음 등장한 주몽의 모습은? 어리버리한 마마보이었다.

사실, 고대 설화의 주인공들은 현대물에서 요구하는 극적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다. 영웅은 알에서 태어나거나 하늘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비범한 인물이다. 혹은 하늘의 자손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상에 태어난 영웅들의 어린 시절엔 혹독한 시련이 따르기 마련이다. 고대 설화의 일반적인 구조는 <영웅의 비범한 탄생 - 어린 시절의 시련 - 시련의 극복 - 진정한 영웅으로서의 국가 건국>으로 이어진다. 주몽뿐만 아니라, 유리, 온조, 김알지 등 모든 영웅들의 성장과정이 그렇다. 심지어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마저도 비범한 모습을 갖고, 위기를 극복하면서 진정한 면모를 갖춘 것이라며, 용비어천가에서 극찬하였다.

이렇게 위대한 태생이 혹독한 시련을 극복하고 영웅으로서 면모를 보이는 것은, 모든 문학 작품의 인물이 가진 기-승-전-결의 구조와 비슷하다. 그러나, 고대사의 인물을 인용하여 시련을 극복한 영웅으로 표현해내는 능력은 <현대적인 감각>이 뒷받침 되었기에 더욱 빛을 발한다.

사실 사극 주몽의 인물 구성은 고대 설화의 구조에 <온라인 게임의 법칙>을 더한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젊은층에게 가장 친숙하고, 설명하기 쉬운 구조는 <게임 구조>이다. 게임은 복잡한 이론을 요구하지 않는다. 시작할 때 레벨 1에서 시작하여, 시키는 것만 충실히 수행하면 레벨이 점점 올라간다. 레벨업은 시간의 문제이지, 아이큐의 문제는 아니다.

주몽 역시 이러한 구조에 충실하다. 역사물을 게임의 법칙에 적용하여 <포스트모던>으로 포장했던 것이다.

사조영웅전 등을 저술한 <김용>의 무협지가 그렇듯, 일단 주인공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주인공 아버지는 누구나 인정하는 영웅이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꿈을 접어야 했던 인물로 설정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그 뜻을 계승하여 게임이 설정한 세계관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비리비리한 레벨 1의 주몽은, 대소에게 한방에 맞아 떨어지는 겁쟁이었다. 사극은, 주몽의 첫 전투에서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모두들 혀를 차고, 주인공에게서 어떤 가능성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주몽의 레벨이 올라갈 것이란 것을 미리 알고 있기에 걱정할 필요가 없다.)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주몽은 레벨 5짜리 스승에게 검술을 배운다. 조금 수준이 높아지자 염포 정도가 상대해준다. 아버지 해모수를 만난 주몽은 아버지에게 (무슨 장풍같은) 기를 주입받는다. (이 장면은 정말 주몽이 게임이라는 생각을 들게 했던 명장면이다. 시청자들은 어리둥절했겠지만...)

만랩 파이터 해모수의 기를 받고, 그에게 기술을 전수받은 주몽은 레벨이 급상승한다. 해모수는 할 일을 끝냈기에 작가가 멋지게 죽여(?)준다. 이제 주몽의 라이벌은 레벨이 비슷한 대소왕자가 된다.

대소 왕자는 주몽을 괴롭히기 위해 여러 가지 미션을 준비한다. 활을 찾으라던가, 소금산을 찾으라던가 하는 게임 미션같은 거 말이다. 그리고 게임과 같은 스테이지가 매회 마련된다. 전통 사극에서 처럼 신하들의 돌림노래는 최대한 자제한다. 주인공은 매회 다른 스테이지를 돌며 미션을 완료하고, 점점 더 강한 경험을 쌓는다.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료와 장비이다. 오이, 마리와 같은 인물은 역사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지만, 작가에 의해 최대한 포스트모던하게 구성된다. 주몽의 미션 수행은 이들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또, 레벨업을 할수록 강력한 장비가 마련된다. 회가 지날수록 강력한 활이 준비되고, 각종 아이템들이 갖추어진다. 게임 내에 장비 상인이 있다면 주몽에는 모팔모가 있다. 주몽이 최고 레벨을 달성했을 때, 모팔모가 만랩 축하기념으로 하사한 것이 바로 <철갑옷과 철검>이었다.

더 이야기하면 길어지니, 주몽에서 보이는 게임의 법칙은 이 쯤에서 정리하자. 중요한 것은 고대 설화의 서사 구조를 <현대식>으로 해석하여 레벨업을 이룬 강력한 <주몽 캐릭터>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역사와 문학, 게임이 접목된 주몽의 환타지 구조는 21세기 역사가 <포스트모던>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리고, 이산, 태왕사신기와 바람의 나라, 바람의 화원으로 이어지는 사극의 새로운 틀은 <포스트모던 역사>을 넘어서서 <이유없는 포스트모던>으로 질주하기 시작한다.

3. 가장 포스트모던에 걸맞는 사극 <다모>

사실, 가장 포스트모던적인 작품은 <다모>이다. 포스트모던이 <과거인들의 일상 문화> 속으로 파고든다는 관점에서 볼 때, 조선시대 여성 형사라는 비주류의 소재는 안성맞춤이다.

여기서 <다모>는 가장 기본적인 구조만을 지켜가며 전개된다. 조선시대에도 <여성 칼잡이가 존재했다>는 설정 하나 말이다. 그 외의 구조는 작가의 상상력이 만들어낸다. 산적 두목과 남매인 다모, 수사를 총괄하는 지휘자와 사랑에 빠진 다모, 임금 앞에서 칼질하는 일개 다모, 역모를 막아내는 다모... 이쯤 되면 다모 하나가 슈퍼맨이다. 이 드라마의 세상은 역사적 현실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모>와 주변인들로 인해 멋대로 돌아간다.

당시 농민들의 삶이 빈곤했고, 역모가 있었고, 산적들이 날뛰고... 등등의 설정은 다모만을 위해 존재한다. 아예 그러한 설정들이 구체적으로 어느 시대, 어느 왕때의 일인지조차 언급하기를 꺼린다. 그 이유는 사극의 존재 이유가 <역사적 교훈>을 주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과거의 한 시점을 선택한 것이지, <조선시대>라는 상황 자체를 크게 인식하지 않는다. 작가의 상상력을 더 발휘할 수 있다면, 더 옛 시대의 여성을 찾아내 이야기를 써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이다.

<대장금>이라는 사극을 한 번 보자. <장금이>가 실제 존재했을까? 장금이의 존재는 중종 실록에 한 줄 나온다. <장금이가 해준 음식이 먹고 싶구나.>라는 한 줄을 찾아낸 작가는 <장금이>를 만들어내어 50회 분량의 사극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조선 전기의 각종 음식들이 총동원되고, 당대 의학 기술이 전부 장금이의 손에서 재탄생된다.

중요한 점은, 장금이 역시 <문학의 서사 구조>를 충실히 이행한다는 점이다. 작가는 장금이의 부모 때의 시련 이야기부터 출발한다. 부모가 하지 못한 일을 장금이가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주몽과 같은 남자 영웅이 겪는 시련을 장금이도 겪는다. 라이벌 때문에 고생하고, 여성이기 때문에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여 궁궐에서 나가기도 한다. 장금이 뿐 아니라 당시 궁궐의 여성들이 모두 서로에게 가해자이자, 피해자인 것은 조선이라는 나라의 유교 예법이 그들을 억압하였기 때문이다.

다모와 장금은 사극이라는 시대 상황을 이용하여 여성이라는 억압된 존재에 대해 극대화된 차별을 부각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시련을 뛰어넘어 자신의 능력으로 결국 일어서게 된다. 실제 조선의 역사에서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가가 추구한 것은 <과거를 통해 역사적 지식을 전수>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들의 요구사항을 과거에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다.

4. 태왕사신기와 바람의 화원 

지금도 수많은 역사물들이 TV를 통해 양산되고 있다. <포스트모던>이란 이름으로 과거에 대한 무한한 상상력을 내뿜는 작품들은 <역사는 결코 알려진 지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에 대한 작품들의 인식은 <또 다른 포스트모던>에 의해 규제를 당하기도 한다.

대표적인 문제는 <태왕사신기>에서 발견된다. 일단, 태왕사신기라는 작품 자체는 훌륭하다. 사신도라는 소재에서 출발한 참신한 아이디어, 단군신화와 광개토대왕의 일대기를 연결시킨 시도는 상상력의 극단을 보여준다.

그러나, 태왕사신기는 그 이면에 큰 결점이 있었다. 태왕사신기의 큰 <줄거리와 소재>는 모두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 따온 것이다. 바람의 나라 원작자는 태왕사신기를 법적으로 고발했고, 이것은 재판으로 넘어갔다. 문제점은, 누가 이기는 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재판에 대한 <재판관>들의 역사 인식이였다.

재판은 태왕사신기 편을 들어주었는데, 그 이유가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신도>는 그림으로 남아있는 것이고, 누구나 사신도를 소재로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수 있단다. 따라서 드라마가 만화 원작과 비슷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표절이 아니라 같은 <소재>을 뿐이라고 말이다.

생각해본다. <5.18>에 대한 영화는 많다. 누구나 <5.18>을 소재로 작품을 쓸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설정과 줄거리 까지 같다면 그것은 문제이지 않을까? 태왕사신기가 <사신도>를 소재로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신을 현무, 백호, 청룡, 주작 등 영물로 표현한 뒤 사신간의 관계를 통해 줄거리를 전개해나가는 것은 <작가의 지적 재산>으로 봐야 한다. <실미도>를 드라마로 만든다고, 영화 실미도의 등장 인물과 성격까지 똑같이 만든다면 독창적인 것일까, 표절일까?

포스트모던으로 역사를 표현하는 것은, 기존의 역사에서 찾지 못한 새로운 발견을 이루어낸 것이다. 역사는 과거이고, 과거의 진리는 모두 똑같기 때문에 역사에 <표절>은 있을 수 없다는 인식은 정당한 것일까?

반면, 바람의 화원은 색다른 논쟁 거리를 던져준다. 신윤복이 여자라는 설정과 더불어 그를 둘러싼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추리 형식으로 풀어간 원작이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드라마는 기초적인 역사 상식조차도 파격적으로 무시해 버린다. 신윤복이 여자라는 설정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개 화공이 왕의 초상화를 그려놓고는 그것을 찢어 버린다. 능지처참감이지만, 작가가 아니라고 하니 그렇다고 치자. 화공신분인 김홍도가 왕 앞에 당당히 걸어가 위엄있게 따진다. 경찰신분인 다모의 하지원도 왕 앞에 예고없이 나서려다가 죽기 직전까지 칼부림 난 적이 있다. 근데, 화원 사극 속에 존재하는 근위병들은 임금이랑 안 친한 건지 그냥 두고 본다.

시청자들은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나, 작가는 설정대로 밀어붙인다. <포스트모던>은 말하려는 역사적 상황을 현실감있게 구성해야 한다. 바람의 화원이 보여주려는 역사의 새로움은 <여장한 신윤복>의 일대기와 미스테리, 그리고 작품세계였을 것이다.

보여주려는 부분과 상관없는 모든 부분을 작가 마음대로 설정한다면, 어느 순간 사극은 산으로 가고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던이 역사의 객관성에 의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해도, 모든 과거 사실을 다 부정하라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역사에서 의문시 되는 부분을 찾아내고, 그 부분에 대해 질문을 던지라는 것이다.

모든 과거 자체를 버린다면 그것은 <허무주의>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보자. <이명박 대통령님, 미친소가 싫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미친소>가 수입되서는 안된다는 근거를 1가지 이상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정부와 반대되는 주장을 한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꼬마가 연단에 서서 <미친소 죽어라~>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공감가는 행동일까? 난, 촛불시위에서 꼬마들이 연단에 서는 것만큼은 약간 의아해 했다.

마찬가지다. 포스트모던이라는 것도, 역사에 대한 기초 지식이 있어야 한다. 기초 지식이 없으면 뭐가 틀린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비판도 할 수 없다. 사극에서 <새롭고 신선한 관점>이 반가운 것은 기존의 이론을 다시 생각해보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바람의 화원은 그런 부분들을 세세히 신경써야 하지 않을까?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점은, 사극에 불필요한 러브 라인의 설정이다. 포스트 모던으로 표현하는 사극은 역사적 사실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여주기 위한 많은 장치가 필요하다. 시청률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극을 표방한 역사물의 핵심 줄거리는 <러스스토리>는 아니다. 사랑은 극의 흐름을 이어가기 위한 장치을 뿐이다.

주몽에서의 소서노는 주몽의 성공과정과 부족연합정치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했다. 다모의 황보관은 다모의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필요한 존재였다. 태왕사신기의 여인들도 (조금 과도하긴 했지만) 사신의 역할을 위해 필요한 캐릭터들이었다. 장금이를 도운 승지는 장금이를 부각시키는 역할 정도였고, 장금이는 국왕의 총애마저도 일정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바람의 화원은 러브 라인이 모든 줄거리를 감싸안은 느낌이다. 만약, 러브 스토리가 기획의도였다면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획의도가 남장 여자와 남자의 사랑은 아니지 않는가? 스토리의 정확한 느낌이 뭔지 애매하기 때문에 사랑이야기가 강조된다면 사극으로서는 실패한 것이다.

우리나라 드라마들은 특이히다. 온에어는 방송국 사랑이야기, 호텔리어는 호텔에서 사랑이야기... 더구나 대부분의 드라마는 대놓고 사랑이야기가 큰 줄거리다. 사극마저 한복입고 하는 사랑이야기로 만들면 곤란하지 않을까? 사랑이야기는 충분히 많고 많다.

5. 포스트모던 사극의 한계 : 시청자층의 문제

포스트모던으로 써나가는 사극의 추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 같다.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되는 부분은 <역사적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한 배려이다.

단군신화와 고구려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주몽이나 태왕사신기를 보면서 사극의 줄거리와 자신이 알고 있는 줄거리를 잘 연결시켜 이해할 것이다. 실제 역사를 영상 매체로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에 감탄할 수도 있고, 흥미를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에 대한 감을 잡지 못한 어린 학생들이나 일부 사람들은 포스트모던으로 보는 역사를 진실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주몽을 레벨업을 통해 키우는 게임 캐릭터로 육성할 수는 없지 않는가?

또 하나, 문제가 될 수 있는 점은 현대사에 대한 포스트모던 사극 부분이다. 고대사는 자료가 부족하고, 상상력을 펼칠 공간이 넓어서 작가의 재량이 마음껏 발휘된다. 그러나, 현대극은 그렇지 못하다. 현대사는 가장 자료가 많으며, 관련 인물들이 동시대에 살고 있는 역사이다.

만약, 제 5 공화국을 사극으로 만든다고 하자. 뉴라이트에서 이승만과 박정회를 찬양하고, 4.19는 데모라는 관점으로 드라마를 만들었다. 이것을 과연 포스트모던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현대사는 포스트모던으로 구성하기에 너무 큰 숙제들이 많다. 역사를 벗어난 정치적 의도와 구성원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문제점은, 제작자와 작가의 이해관계에 관련된 것들이다. 최근 드라마는 방송국이 방영하되, 외주 제작사에서 기획한다. 제작사는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지, 역사 연구를 하는 곳이 아니다. 따라서 최대한 재미를 추구하고, 시청률을 위해 역사적 사건들을 이용하게 된다. 즉, 사극이면서도 작품의 의도는 사극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왕과 나>였다. 조선시대 전무후무한 내시 김처선의 일대기를 다룬 신선한 작품임에도, 후반기의 <왕과 나>는 줄거리가 산으로 가 버렸다. 작가는 쪽대본을 날릴 정도로 정신없었고, 배우의 남편은 불만이 폭발해 스텝을 폭행할 정도였다. 작품의 흐름은 끊겼고, 시간에 맞춰 땜빵한 줄거리라는 점이 눈에 확 들어왔다. 중간에 시청을 끊어 버릴 정도로, 너무나 아쉬운 작품이었다.

오늘은 사극을 소재로 해서 포스트모던 역사가 문화로 재탄생 할 수 있다는 점을 이야기해보았다. 아쉬운 점은, 드라마 이야기에 치중한 나머지 정작, 드라마가 지닌 포스트모던 역사의 장단점과 활용도를 논의조차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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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모던과 문화 코드 (3)

역사학과 사회학이 싸우던 낡은 시대를 뛰어넘어...

1. 18c :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아마추어다.

익숙한 문화 코드로 이야기를 전개해야 하는데, 계속 이론 이야기만 해서 지루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화 이야기는 이 편만 끝나면 시작될 것이니, 좀 참고 견뎌보자. 자, 오늘은 포스트모던 역사학이 과연 역사학에 가까운지, 사회학에 가까운지 간단히 짚어보자.

역사학과 사회학의 처절한 결투는 18세기 이래 계속되었다. 서양 연대기로 따지자면 프랑스 혁명 전후부터랄까?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는 수많은 학문이 분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역사>와 <사회>라는 항목이었다.

혁명의 기록은 역사이나, 그 과정과 결과에 대한 통계는 <사회학>에 가까운 것이었다. 이후 등장한 철학자들은 모두 역사학자같은 사회학자들 이였으니....

사실 서유럽에서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는 역사라는 독립된 학문이 존재한다는 것을 크게 인식하지 못한 듯 싶다. 고대라 불리던 사회에서는 과거와 관련된 모든 학문이 다 역사였고, 철학이었다. 중세에는 <신의 역사>가 곧 신학이으로서 역사와 동의어였다.

서구에서는 근대에 접어들면서 그나마 역사다운 역사물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서유럽의 <절대왕정>이 등장하면서 정치적인 사건들을 기록한 기록을 현재의 우리가 <역사>로 인식하는 것 뿐이다.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은 시민계급의 성장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말하고 있지만, 결국 국가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학, 사회학>을 논의할 뿐이었다. 루소의 사회계약론, 로크의 시민정부론도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결국은 올바른 <정치체제>가 무엇인가를 이야기할 뿐이었다. 밀러의 <신분론>은 사회계급현상을,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은 경제체제를 이야기하기 위해 역사를 인용할 뿐이었다.

아담스미스가 <중상주의 체제의 발전과정>을 이야기한다 해도, 그것은 중상주의보다 자율적 가격합의에 의한 시장경제질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 뿐이다. 맬서스가 <인구론>에서 원시사회부터 상업사회까지의 발전과정을 이야기한 것은 결국 <인구 증가와 자원의 한계>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역사학과 사회학을 구분하지 못한 혁명기 철학자들은 역사는 당연히 <사회>를 연구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역사자체만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이런 말이 어울렸을 것이다.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2. 19c : 랑케가 뜰 수밖에 없었던 이유...

이런 현실 속에서 <아마추어 같은 역사>를 독립적인 학문으로 끌어올린 사람은 랑케였다. 랑케는 1편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니, 그의 이론은 생략하고 이야기하자.

그럼 왜 뜬금없이 <역사 독립선언>이 등장하게 된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의 각국이 새로운 철학을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기의 사회 철학은 <계몽 사상>이었다. 인간의 능력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이 철학은 <민중이 혁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을 긍정하였다. 루소, 로크 등의 시민철학은 왕정을 박살내고 민중의 정부가 가능하다는 가능성까지 제시하였다.

이런 혁명의 시대를 겪은 유럽의 각국은 혁명이 끝나자 새로운 철학을 찾기 시작한다. 이젠 유럽의 각국 스스로가 <국민들에게 일체감>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 때 등장한 철학이 바로 <낭만주의> 사상이었다.

낭만주의는 <합리적 이성>보다는 <민족적 자긍심, 끓어오르는 열정과 애국심, 폭발적인 사랑의 힘> 등 내면적 가치관을 중요시하는 사상이었다. 국가는 애국심, 민족의 위대함, 공동체의 단합 같은 것을 강조해야만 수많은 유럽 국가들 안에서 독립국가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탈리아와 독일 같이 분열된 국가에서는 특히 이 <낭만주의>가 유행하였다. 랑케와 달타이 등은 독일 역사가였고, 크로체는 이탈리아 역사가였다. 이들 분열된 국가에서 <역사학의 독립>을 주장하는 사상가들이 많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훗날 이 두 나라에서 낭만주의적 애국심을 바탕으로 한 파시즘 사상이 유행했던 것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유럽의 국가들은 나폴레옹 이래 <국민 교육>과 <시민 교육>을 실시하였고, 역사는 민족 정신을 함양하기 위해 필수교과로 채택되었다. 랑케가 국가 공문서를 바탕으로 한 정치사 교육이 <본질적 역사>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을 받아들인 것 이다. 사실, 정부와 역사학자가 가장 긴밀한 유대관계를 가지고 상호협조했던 지역이 바로 랑케가 살았던 <분열된 독일>이었다.

이제 역사는 연대기를 보면서 과거의 일을 하나 하나 생각해보는 수준의 역사를 벗어나, 국가의 공문서를 바탕으로 기술되었다. <학교>라는 지식주입소는 새시대 인력들의 머릿속에 과거의 정치적 지식을 콸콸 쏟아부었다. 역사는 독립했지만, 그 지식의 선택권은 국가에게 있었다. 역사는 국가에 의해 재미있는 이야기로 재구성되었지만, 그것이 절대적 진리인지에 대한 판단은 학생들에게 없었다.

역사는 사회현상을 연구하기 위한 도구에서 벗어나 재미있는 이야기(내러티브)가 되었다. 랑케는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역사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랑케의 역사는 위대한 영웅들의 이야기와 그들을 통해 바라보는 세상 이야기였다. 서민들의 이야기는 없었으며, 정작 역사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흥미를 가지는 이야기는 없었다.

3. 진화론을 믿었던 사회학자들의 역사 만들기...

19세기 랑케가 역사학의 독립을 부르짖을 때, 한편으로는 사회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콩트가 <사회현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해야 한다고 연설하고 있었다.

콩트는 과거를 아주 간단히 정의하였다. 과거란 <종교의 시대, 형이상학의 시대, 과학의 시대>로 발전하였다고 말이다. 콩트 이래, 과거를 간단히 정의하는 사회학자들이 대거 등장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역사관이 뚜렷한 과학적 근거를 가진 <사관>이라고 생각한 듯 싶다.

이들 사회학자들의 사관은 <진화론>에 의거하고 있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말한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했으며, 우성은 살아남고 열성을 도태되는 적자생존의 원칙이 자연에 적용된다>는 이론을 사회학과 역사학에 인용한 것이다.

진화론을 사회학에 인용한 대표적인 학자는 스펜서이다. 그는 <노동자는 열성 유전자를 가졌기 때문에 가난은 자신의 탓이다>라고 말하여 산업 사회의 약자가 무능하다는 것을 진화론으로 증명한다. 또, <강대국이 약소국을 점령한 것은 사자가 배고픔에 양을 잡아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법칙이다.>라고 말하여 제국주의를 옹호한다. 그는 제국시대를 살아간 자랑스런 영국인이었으니까... 그가 생각한 역사는 야만적 무력 사회에서 제국의 산업자본사회로 발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사관>을 가진 역사가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런데 그 <사관>은 역사가 진화하고 발전한다는 믿음을 가진 사관이었다.

헨리 메인은 역사를 <노예사회에서 신분사회로, 신분사회에서 계약사회로> 이동한다고 말하였다. 새로운 사회로의 진화는 인류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던 힘이라고 본 것이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역사란 원시적 본능으로 이루어진 사회에서 본능을 누르고 문명사회로의 진화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진화는 원시적 유전자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문명인들 역시 내면 속에는 <성적 본능과 원시적 욕망>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가장 역사적으로 유용한 <사관>을 뽑으라고 한다면 <마르크스 사관>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역사의 발전 과정을 <원시공동체 - 고대노예제 - 중세봉건제 - 근대산업자본주의 - 공산주의 사회>의 단계로 설정하고, 각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의 필연성을 증명하였다. 다음 단계가 전단계가 진화한 결정체라는 것이다.

여기에 딴지를 건 학자들도 있다. 튀니스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의 발전 단계는 퇴보할 수도 있다면서 공동체 사회보다 후진적인 <익명성을 가진 사회>를 말하기도 하였다. 

베버는 아예 죽은 마르크스를 평생 비판하면서 살아간다.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이란 단순한 대립구조에 불과할 뿐, 실제 사회 안에는 다양한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세분화 된 <계층>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저술한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은 기독교 계층의 힘이 근대 사회를 이끌어간 동력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역사적 사관을 바탕으로 아예 <사회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체계를 수립한 사람도 있으니, 그가 바로 사회학의 아버지 <뒤르껨>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사회 발전 과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면서 사회의 구성 요소를 <기능론> 입장에서 제시한다.

사회는 우리 몸과 같은 유기체이며, 몸의 각 기관은 맡겨진 기능을 담당한다. 머리, 가슴, 손, 발 등이 모여 하나의 몸을 구성하므로 어느 하나도 빠져서는 안된다. 단, 머리가 손, 발 보다 중요한 기능이므로 그 기관이 우대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있다. 머리에 해당하는 엘리트, 손과 발에 해당하는 노동자, 심장에 해당하는 정치인 등등.... 사회에 대한 기여도가 다르므로 엘리트와 노동자의 급여가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사람들이다. 사회는 그들이 전부 존재해야 유기적으로 돌아간다. 역사도 이러한 역할 분담을 통해 과거의 질서를 유지한 것이다....

그의 이론은 훗날, 수많은 세부분야의 역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편에서 이야기 했던 아날 사학의 아버지 <브로델>도 역사 자체를 심층적이고 점진적인 발전 속에 이루어지는 유기체적 결합으로 보았다. 역사란, 사회학에서 말하는 커다란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법칙과 같은 것이다. 그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하지만, 사람들의 우연스러운 행동 역시 그 법칙에 제시한 과정 속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역할이 있고, 자신의 존재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 틀 안에서 우리는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진화론을 믿었던 사회학자들의 생각은 다시 18세기로 돌아가게 된다.

역사 자체를 알아서 어디다 쓰려고?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본다. 역사가 마르크스나 브로델이 말한 것처럼 어떤 결말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역사는 어떤 법칙을 가지고 파악해야 하는 과학이 되는 것일까? 역사의 발전 과정 속에 모든 인간들의 삶을 집어넣어 버린다면 수없이 많은 <다양성>을 가진 인간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진화론은 <역사가 가진 위대한 힘>과 <무한한 가능성>을 다시 보여주었고, 인간의 미래는 결국 가장 합리적인 결말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불어넣어주었다. 그러나, 그 안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은 주변 이야기가 되어 사라져갔다.

역사는 과거를 살았던 다양한 인간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학문이다. 사람이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진화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4. 랑케를 넘어 역사를 <인문학>으로 만들어 버린 역사학자들...

진화론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일련의 사회학자들 때문에 <역사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역사가들은 아예 역사를 사회학과 분리시키려는 이론을 만들어 제시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칼을 뽑아든 사람은 <크로체>였다.

도대체 <발전 사관>이라는 것을 만들어 <역사의 동력이니, 역사의 목표니, 역사의 발전과정이니...> 하는 거대한 틀을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는 사회학자들의 역사관은 역사도, 과학도 아닌 어중간한 발전 법칙이라고 비난하였다. 사이비 역사를 넘어, 사이비 과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 역사학을 사회과학과 다른 <인문학>으로 정립시킨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딜타이>이다.

그는 사회학을 사이비로 몰아세우며 역사학과 분리시켰다. 사회과학은 사회가 발전하고 유지되는 과정을 법칙으로 설명하기 때문에 자연과학과는 다른 사이비 과학이다. 과학은 외적인 법칙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역사는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사회학과는 학문 체계가 다른 <인문학>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라 역사학을 <인문학> 관점에서 서술한 학자가 <콜링우드>였다. 그는 과거의 일들은 법칙이 아닌 <과거인의 사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저가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말하며, 로마로 진군한 것은 법칙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사고방식에 따라 가장 합리적인 행동을 한 것 뿐이고, 그 결과는 그의 사상에 비추어 가장 있을 법한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과거에 살았던 시저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 역사일 뿐, 그의 행동에서 법칙을 찾아내고 인간 행동 패턴의 일반화를 찾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콜링우드가 생각한 역사는 과거인의 <생각>을 과거의 상황에 비추어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그에 따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거대한 법칙이나 틀을 찾는 것은 역사가 아니라 사회학에서 할 일이라는 것이다.

이로서 역사학과 사회학을 구분할 수 있는 이론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사회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또 다시 역사학의 본질을 놓고 싸움을 시작하게 된다.

5. 20c : 랑케의 정치사를 깨고 다양성을 찾는 역사학자들...

20세기 사회학자들은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역사의 독립성에 대해 큰 의문을 품게 된다.

사회가 세분화 되면서 역사, 정치, 지리, 인류학, 민속학 등 많은 분야가 제각각 독립을 주장한다. 새롭게 등장한 수많은 학문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독립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이들 학문들은 서로 인접할 수밖에 없다. 20세기 사회학과 역사학, 그리고 수많은 학문들은 서로 교류하면서도 독자성을 내세우는 모순을 보여주게 된다.

그리고 역사학은 새로운 시대적 상황에 맞게 새로운 철학으로 거듭나게 된다.

20세기 역사학의 특징은 랑케가 말한 <국민 공통의 정치사>를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역사는 과거를 다루는 학문인데, 왜 정치사만 다루어야 하는가? 왜 영웅의 일대기만 역사가 되는 것인가?

이러한 의문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나라는 랑케의 고향 독일이었다. 세계 1,2차 대전을 패하고, 국가집단의 무서운 광기를 맛본 독일은 의도적으로 정치사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오히려, 왜 국가는 인간을 억압하는가, 왜 히틀러라는 지도자의 광기가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는가 등의 근본을 탐색하기 시작한다.

독일에서 역사는 랑케가 만든 역사의 독립성을 다시 벗어나기 시작한다. 사회 구조와 변화과정을 과학적으로 탐구하고 사건이 발생한 인과관계를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역사 경향을 묶어 사회구조사 연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전쟁은 어떤 원인으로 시작되며, 전쟁의 역사는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유태인들의 이주와 독일에서의 정착생활은 역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이러한 원인을 먼 과거부터 추적하여 <탐문 수사>하듯이 파헤치는 것이다. 이 역사인식론은 랑케를 반발하는 과거 학자들로부터 이어져 세계 대전 이후 급속히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발맞추어 등장한 또 하나의 역사 철학은 프랑스의 <아날 사학>이었다. 1편에서 이야기 말했듯이 역사를 오랜시간 동안 서서히 변하는 <지중해>에서의 삶과 같이 표현하면서 일상적인 생활 모습을 이야기하는 것도 역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의 역사학은 랑케 사학의 <정치사> 뿐 아니라 사회 구조와 <인간들의 아주 작은 이야기>들도 역사의 분야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랑케의 역사 보다 훨씬 재미도 없고, 쉽지도 않은 것이었다. 고대부터 이어진 전쟁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 지식을 넘어 군사학과 통계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에 손을 대야 하기 때문에 전문 역사가나 사회학자, 군사전문가가 아닌 일반인들이 역사에 접근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렇게 전문가들이 각종 사회학 이론과 통계학 등을 기초로 만들어낸 역사는, 일반인들이 비판하기 어려웠다. 또, 쉽게 쓴 동화책이나 영상물 등 이야기(내러티브)로 만들어 설명하지 않는 이상 이해조차 쉽지 않았다.

또, <인간들의 작은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미시사>를 쓴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 자체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의 필연적인 선택을 법칙으로 만들어 버린 것에 불과했다.

<지중해>라는 표본지역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스스로 선택을 해서 살아가는 것 같다. 그러나, 오랜시간 살펴보면, 자신의 자연환경에 맞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다른 인간들이 그곳에 살아간다고 해도 아마 비슷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 자체의 고유성을 바라보는 역사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에 <사회 구조>에 종속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20세기 서구유럽에서 보여준 새로운 역사적 흐름은 역사의 독립성을 주장하는 <인문학자>들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사회과학의 법칙>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아니면 독자적으로 <인간 자체>를 연구해야 하는가?

6. 이들의 논쟁을 정리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자과 사회학자들이 바라보는 역사에 대한 시각은 <구조냐, 인간이냐>의 차이에서 출발하였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이 차이점을 모두 융합하면서 역사의 <세밀한 부분>을 강조하였다.

역사를 <진화론>으로 바라보는 거대한 법칙과 사관은 필요가 없다. 역사가 어떤 형식으로 발전한다고 믿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주관성>이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건, 베버건, 뒤르껨이던 간에 그들은 역사와 사회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포스트모던>일 뿐이다.

랑케가 주장한 <정치사>도 허구이다. 영웅이란 것은, 국민교육을 위해 누군가가 만들어 낸 허상일 수도 있다. 더구나 영웅에 대한 과거의 자료들은 <영웅 만들기>를 좋아하는 누군가의 작품일 수도 있다.

포스트모던은 20세기 역사가들이 보여준 <아주 작은 인간들의 이야기>에 큰 관심을 갖는다. 왜냐면, 역사란 과거를 살아간 하나 하나 인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 역사에서 보여준 인간에 대한 관심은 포스트모던과 달랐다.

20세기 역사가들은 인간들이 집단 구조 속에서 살면서 그 구조를 유지하는 <손과 발>이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뒤르껨의 유기체론과 기능론에 입각해서 <사회를 구성하는 존재로서 인간>을 설정하고, 사회 속에서 의의를 갖는 인간을 연구했던 것이다.

포스트모던은 이것을 반박한다.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사회의 문화에 영향을 받지만, 일률적으로 똑같이 종속되지 않는다. 똑같은 노비가 존재하더라도 신분에 적응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그 시대의 이념에 저항하고 새 시대를 지향하는 인물도 있는 것이다.

또, 사회 구조 속에서만 찾는 인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찾아야만 살아있는 역사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아날 사학>은 연역법과 같다. 미리 사회 구조의 특징을 정해놓고, 그 정해진 패턴에 따라 인간들의 삶의 방식을 규정한다. 이런 사회였으니,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은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포스트모던>은 귀납법과 같다. 인간들이 그 사회와 문화의 틀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방식들을 하나 하나 상상력을 동원해 구성해 나간다. 이미 정해진 사회 구조는 누군가 만들어놓은 것 뿐이다. 내가 생각해보고, 내 관점에서 구축된 작은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그 시대에는 이런 삶이 가능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던 역사는 과거인들의 일상 생활에 자신을 집어넣어 보기도 한다. 내가 과거인이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를 스스로 생각해보는 것이다. 단, 사회 구조 속에 가두어진 과거인이 아닌, 그 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공유하는 깨어있는 과거인으로 말이다.

역사에 있어 법칙이란, 누군가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만들어 놓은 <가설>에 불과하다. 과거의 <자료>란 완전한 것도 아니고, 그것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가 역사 토대로 삼는 일종의 <참고서적>일 뿐이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내 의지와 판단에 따른 것이다. 내가 정치사가 아닌 여성들의 이야기, 소수 인종들의 이야기, 이색적인 문화에 관심이 있다면 그 과거에 파고 들어 그들의 삶과 문화를 공유하면 그 뿐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가능한 포스트모던이 현실에서도 가능한 것일까? 지금부터 그 가능성을 한국 사회 각 분야의 문화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지겹도록 재미없는 이론이야기를 이쯤에서 끝내고 실제 <문화>를 가지고 포스트모던을 이야기해보자.

다음 이야기는 문학에서의 영웅 서사 구조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가졌길래 <게임 바람의 나라>와 <드라마 주몽>이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포스트모던으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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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역사와 문화 코드 (2)

만약에... 라는 단어 하나로 세계사를 바꿀 수 있는 포스트 모던 역사학

1. 기존의 <진리>는 모두 버려라~

자, 그럼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는 기본 입장을 정리해보자.

포스트 모더니즘의 <핵심>은 지금까지의 역사가 가지고 있는 일체의 <사실성>을 부정한다. 무슨 말이냐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누군가가 남긴 <기록>에 의존한다. 삼국시대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 김부식 등이 공동편찬한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믿을 수 있는가?

당대 김부식은 서경천도운동을 주도했던 묘청 등과 대립하였다. 묘청이 고구려 중심 사관이라면, 김부식은 신라중심 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신채호는 이것을 이유로, 묘청이 김부식에 패한 것이 <민족 1천년래 최고의 사건>이라고 한탄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편찬하면서 고조선이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의 3조선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발해와 고려로 이어지는 민족적 정통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그런데, 신채호가 살던 시기는 일제강점기로 민족주의가 유독 강조되는 시기였다. 그럼 <조선상고사>는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가? 신채호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았는가?

포스트모던 역사가 제기하는 것은 바로 이런 <모순성>들이다. 어떤 역사속의 문서나 자료들도 <객관적> 일 수 없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조한 이유가 말 안듣는 신하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라면? 이순신이 임진왜란 전 여진족 토벌에서 무참히 패배한 것 등을 들어 이순신의 기용이 낙하산이라고 주장한다면?

<교과서에 없는 걸 말하지 말란 말야... 죽을래?> 라고 협박하고 끝낼 것인가?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자료는 누군가가 생각을 갖고 적어놓은 것이다.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주관적인 입장>에서 적었다는 뜻이다. 기록 자체에 의도성이 있는데, 무슨 객관성을 따진다는 것인가?

사실 우리가 <역사>라고 공부하는 것이 <과거>의 진실은 아니다. 전통적인 역사학에서는 <역사>란 실제 그 일이 있었다는 것을 가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포스트 모던은 그 일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자료는 <그렇다고 우기는 과거의 자료> 뿐이라고 말한다.

흑사병으로 서유럽 인구의 1/3이 죽었다고 한다. 그 정도면 서유럽 사회는 망가졌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역사 자료는 상식을 뛰어넘는다. 그 정도 인구가 죽었기 때문에 노동력 부족으로 농민들의 권위 신장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과연 그 정통적인 주장들로 흑사병을 정리하면 끝날까? 어떤 이들은 반대로 주장한다. 그 정도 죽었으니깐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수입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냐고.... 의혹은 더욱 증폭된다.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을 기록한 통계 자체가 흑사병의 가혹함을 알리기 위해 조작된 것은 아닐까?

이 쯤 되면 포스트모던 역사가들이 <탐정>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것이 정의인지를 놓고 끝없이 추격전을 벌이는 <홈즈와 뤼팡>의 견해차라고나 할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란 없다. 그 시대를 살아보았는가? 시대의 아픔을 눈으로 느껴보았는가?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사건>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역사가란, 역사를 보는 눈을 제공해주는 도우미에 불과하다. 100이 존재하면, 100가지 역사 이해가 존재한다.

누구나 그 시대를 상상할 수 있고, 누구나 그 시대를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역사적 사건의 <원인>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세종대왕이 왜 한글을 만들었을까?

훈민정음에 적어두길,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어리석은 백성이 고생하기 때문에...> 라고 했다. 그건 당연히 적야야할 말을 적었을 뿐이다. MKMF에서 대상을 탄 동방신기도 <아버지, 어머니, 이수만 사장님 감사해요>라는 말은 먼저 달고, 그 다음에 할 말을 하지 않는가?

그 다음 말이 어떤 말일지는 100명이 있으면, 100명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상상을 해볼 것이다. 동방신기 스스로 뭐가 잘나서 상을 탔다고 생각할까? 춤을 잘춰서, 노래가 좋아서? 기획사 빽으로? 맴버 잘만나서?..... 그 원인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역사에서 원인은 하나일 수 없다. 한글을 만든 이유는 반드시 <어리석은 백성> 탓만은 아닐 것이다. 조선 건국후 독자적 기반을 닦기 위해서? 우연히 부려먹을 똑똑한 신하들이 많아서? 유교주의가 성숙해서? 어느 날 문득 한문 공부가 짜증나서?....

포스트 모던은 주장한다. 역사를 딱 하나의 원인과 결과로 설명하는 것은 그 외에 존재하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프랑스 혁명이 <국왕의 폭정으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발생했다>로 설명하면 끝나는가? 아니다. 수백년간 고통받았던 농민 하나하나가 가진 이유는 누가 설명해 줄 것인가?

그래서 포스트 모던은 주장한다. 역사에 진리는 없다. <교과서> 같은 책은 누군가가 자신의 입장을 대변한 <자료집>일 뿐이다. 김구가 영웅인 교과서가 있을 수 있고, 이승만이 영웅인 교과서도 있을 수 있다. 요즘 뉴라이트가 이상한 짓을 하듯이 <지 꼴리는 대로 해석하면> 역사의 한 쪽 입장을 설명할 수 있다.

2. 모든 것은 역사가 될 수 있다.

포스트 모던 역사학(이하 포스트 역사학)의 핵심은 <탐정놀이>이다. 누군가의 역사적 발견을 끊임없이 추적해서 재비판하고, 또 다시 재비판받는다.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댓글놀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더욱 친근한 것인지도 모른다.)

포스트 역사학이 비판하는 것은, 거대한 주류 사회이다.

원래 포스트 모더니즘 이라는 철학 자체가 서구 사회의 거대한 주류 문명을 비판하면서 등장하였다. 왜 미국과 서유럽의 문학, 사회, 과학 등이 절대적 진리가 되었는가? 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한다는 인식이 당연시 되었는가? 과학의 발전이 왜 환경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는가? 백인은 왜 흑인보다 우월한가?

이 모든 것을 비판하면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주류보다 소외된 것들>에서 의미를 찾았다. 그것이 역사학에 반영된 것이다.

왜 역사를 큰 구조 속에서 바라봐야 하는가? 역사 속에는 왕조와 위인들만 존재하는가? 우리가 소외시킨 작은 진리들을 우리 스스로 생각할 수는 없는가?

그 결과 역사는 <일상사>가 되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친구 사귀기, 흑사병에 걸린 소녀의 마지막 하루, 내시 김처선의 유년 시절의 사랑이야기 등이 역사가 된 것이고, 그것을 우리 상상으로 재구성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재비판 받는다. 누군가가 주몽의 하루를 이야기하면, 또 누군가는 그것이 주관적이라고 비판하며 다른 이야기를 한다. 또 누군가는 비판을 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인터넷 환경과도 유사하다. 사극을 한 편 보면, 수백개의 비판글과 옹호글이 올라온다. 역사 갤러리에 의견 하나가 올라오면 반박 의견으로 수십개의 댓글이 올라와 혈투를 벌인다.

그들이 벌이고 있는 싸움은, 거대한 정치담론이 아니다. 신윤복이 과연 여자인가, 남자인가와 같은 <인물>을 던져놓고 벌이는 <재미 문화>인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 역사학은 정통 역사연구법으로 환영받지 못한다. 너무나 허무하다는 편견 때문이다. 특히, 포스트 모던으로 접근했을 때 <역사적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이유로 포스트 역사학을 불매(?)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로, <독도와 만주가 우리땅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역사적 객관성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거대담론이 있다. 포스트 모던적으로 접근해서 <안용복이 진짜 일본에 갔어?>라는 의심으로 문제의 실마리를 잡기 시작하면, 일본과의 싸움에서 승산조차 없다.

<김구가 혹시 빨갱이 아닐까?>라는 가설을 놓고 역사를 접근했을 때,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우익 역사만들기 프로젝트>에 휩쓸려 버린다. 뉴라이트 교과서를 보라. 말같잖은 소리를 교과서에 떡~ 제시해 놓아도 <이런 관점도 있잖아~>라는 입장에서 비판하기 쉽지 않다.

그럼, 포스트 역사학은, 문학과 별반 차이없는 허무한 이론에 불과한 것일까? 상상력으로 구성된 창작물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포스트 모던이 시도하려는 <다양성>은 <독재적인 역사학>의 틀을 비판하고, 역사에는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뉴라이트의 역사 교과서는 다른 교과서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또 다른 일방적 관점>을 주입하려는 꼴통짓에 불과하다.

포스트 역사학은 문학이나 창작 소설이 아니라 지난 역사가 가진 <절대성>을 부정하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 철학은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눈>을 뜻한다.

그럼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장길산>이나 <태백산맥> 같은 역사 소설, <이방인> 같은 실존주의 소설도 역사적 배경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으니 <역사물>인가?

포스트 모던 역사에서는 과감히 말할 수 있다. 그 작품들은 역사적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 연구를 위한 소재는 아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역사물로 여긴다면 그것은 역사물이 될 수 있다.

포스트 모던의 주체는 필자가 아니라 <독자>이다. 쓰는 사람은 관점을 가지고 글을 쓰지만, 읽는 사람은 쓰는 사람의 관점과 상관없는 해석을 할 수 있다. 원래 언어나 영상은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읽고, 보는 사람이 나름대로 해석할 때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포스트 모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역사가 될 수 있다. 사극도, 대하소설도, 심지어 연애편지도 역사의 한 장면이 될 수 있다.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며 만든 사람의 작품만이 역사가 아니라, 보면서 역사적 느낌을 받은 사람의 모든 것들이 역사가 되는 것이다.

3. 역사학이 과거를 창조해도 되는 것일까?

어느 책에서 본 내용인데, 책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이 책 제목 아시는 분은 댓글을 주시면 감사^^)

책 내용은 간단하다. <만약에> 흑사병으로 유럽인들이 모두 죽어 버렸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백인은 지구상에 없다. 당대 최강의 세력인 중국 명나라는 정화의 원정으로 유럽의 빈자리에 중국의 깃발을 박아둔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아시아인이 발견하였다. 인디언들은 황인종의 지배를 받는다. 동아시아에서는 산업혁명 비슷한 문화혁명이 일어닌다. 중국의 제국주의에 반발하여 아메리카 식민시의 황인종들은 독립선언을 한다. 중국의 중화주의는 전세계에 강력한 <패권주의>라는 인식을 심어놓는다. 이에 반발한 다른 국가들이 도전하여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만약에 라는 테마 하나로 역사는 이렇게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 일어난 역사가 아니라 가상의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왜 일까?

가상의 현실을 통해 실제 현실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제국주의 잔혹함을 중국 제국주의의 잔혹함으로 패러디했지만, 그것은 제국주의 국가였다면 가능했을 법한 일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았다면 유럽과는 상이한 과정을 밟았을 수도 있다. 누군가 다른 길을 가는 중국 이야기를 다시 그려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포스트 역사학이 남기려는 것은, 역사의 진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역사를 통해서 다양한 진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하나의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원인이 존재할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역사>의 틀이 너무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왜 역사는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된 자료들만을 간추려 이야기되고, 그것이 진리로 인정해야 하는가?

조선시기 타짜나 바람둥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보다 비중이 떨어지는 것일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사의 기준이 다르다면,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소재도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나의 해석이 곧 역사적 해석이 되는 것이다.

자, 지금까지 포스트 역사학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봤다. 여기서 한가지 오해할 부분을 짚고 넘어가겠다. 앞으로 쓸 이야기들이 포스트 역사학을 옹호하면서 전개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각종 매체나 문학 속에서의 역사를 바라보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이 도움이 될 수 있기에 그 개념을 설명한 것이다.

포스트 역사학은 <딱딱한 자료실>을 벗어나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본다는 사실이 매력적이다. 반면, 모든 역사에 진리가 없다는 입장을 가짐으로서 <허무주의>를 초래할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앞으로 전개할 이야기들에서 이 다양성과 허무주의는 상극을 이루며 이야기를 전개할 것이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포스트 역사학을 적극 활용할 것이며, 어떤 이야기에서는 허무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문화적 코드이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역사물로 간주할 수 있다는 <포스트모던의 정신>이다. 그럼 시작해 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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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주몽이 끝났네요. 주몽 드라마를 다시 생각해보니, 역사를 보았다기 보다는 한편의 대하서사 문학을 본 느낌이 많이 듭니다. 드라마가 역사가 될 수 없지만, 역사적으로 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 그런지 뭔가 포스트 하나를 남겨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글은 말도 안되는 글이지만, 솔직히 보다가 이런 부분들이 눈에 띄어서 그냥 적어봅니다.

1. 주몽의 설정은 고대 서사적 구조의 현대적 해석...

처음부터 주몽을 못봐서 초반 20부 정도는 인터넷에서 다운받아서 보았습니다. 한 번에 10시간씩 시간을 내서 몰아보았더니, 그 구도가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있더군요.

초반 주몽의 구조는 고대 서사 구조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대 영웅의 구조는 보통 <신이한 탄생 - 어린 시절의 고난 - 위기의 극복 - 다시 찾아오는 위기 - 신화의 완성>이라는 단계로 나가곤 합니다. 저는 주몽 1편을 보면서 작가들이 분명 이 구도를 따라가겠구나... 라고 편견을 가지고 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주몽의 설정은 단순한 <고대 서사>의 구조가 아니였습니다. 드라마에서의 주몽은 초반에 <망나니>의 역할로 나옵니다. 바보같고, 덜떨어지고,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역할이죠.

오히려, 신화적인 설정으로 구성된 것은 <해모수>였습니다. <해모수>의 역할 구조가 바로 <고대적 영웅 구조>를 그대로 이어간 <멋진 영웅>의 표본으로 그려졌고, 유화가 그 해모수를 사모하는 구조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해모수 역시 신으로 묘사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고구려 유민을 구하려는 <민족적 영웅>으로서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킨 인물이었죠.

오히려 고대 설화구조에서의 신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신관인 <여미을>과 신녀들에게 모두 몰아줌으로서, 신화라는 고대적인 요소와 <인간적 영웅>이라는 현대적 구조를 잘 버무려 초반을 전개해 나가는 드라마였습니다. 이 신적인 부분과 인간적인 부분을 분리하여 드라마를 전개하는 진행 방식이 극적 요소를 더욱 더 빛나게 해주었다고 생각됩니다.

2. 게임의 법칙이 시작되다

주몽에서 초반 가장 카리스마 있었던 인물은 바로 해모수입니다. 해모수는 이미 처음부터 <영웅>으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한 비운의 영웅으로 생을 마감하게 되지요. 이 해모수의 <영웅>적 면모를 이어받은 인물이 바로 아들로 설정된 <주몽>입니다. 작가들은 여기서 <설화>라는 초자연적 극 전개를 <있을 법한 인간세계의 드라마>로 재현하려고 하나의 장치를 마련한 듯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게임의 법칙>이었습니다.(정확한 극전개 용어는 모르는 관계로 그냥 편의상 이렇게 부르겠습니다.)

<게임의 법칙>은 이미 드라마 전개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아시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만한 극의 전개 방식입니다. 이 방식은 요즘 드라마 전개에서 자주 등장하던데, <약한 주인공이 레벨 업>을 하면서 이야기의 스테이지를 한없이 넓혀가는 형태의 전개 방식입니다.

예로, 주몽은 처음에는 대소에게 상대도 되지 않는 레벨 1의 무력한 캐릭터였습니다. 망나니였고, 오리, 마리한테도 한방감인 캐릭터였죠. 작가들은 이 캐릭터를 <육성>시키면서 시청자들을 불러모으기 시작합니다.

주몽에게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심어주면서, 레벨 업의 목표의식을 심어준 후, 처음에는 <무송>같은 저레벨의 사부로부터 무술을 전수받습니다. 렙업이 될 때마다 유화와 주변인물들이 주몽에게 <레벨에 맞는 정신교육>을 시켜줍니다. 문제는 초반의 대소가 주몽에게는 엄청난 고레벨이었다는 점입니다.

주몽은 대소에 맞게 속성으로 레벨 업을 해야 했는데, 그것은 바로 친부인 해모수를 만나서 소위 말하는 <경험치>를 몽땅 얻는 방법이었습니다. 해모수에게 검술을 배우는 것으로 모자라서 <해모수>가 주몽에게 <기>를 불어넣어주는 생뚱맞은 장면까지 나오더군요. 이 장면은 인간적인 부분으로 이끌어가던 주몽을 <신화적, 무협적> 캐릭터로 전락시킬 위험을 가진 전개였습니다. 그러나, 작가들은 주몽의 전개상 <신화적> 장면을 최대한 배제시킴으로서 주몽이 <리니지화>되는 것을 막아가면서 극을 전개합니다.

그리고 주몽이 레벨업이 될 때마다, 액션 게임처럼 스테이지가 변경됩니다. 어떤 한 사건을 해결하여 주인공이 성숙할 때마다 조금 더 어려운 시련을 주어 다음 단계로 이끌어가는 것이죠. 그리스 신화에서의 <헤라클래스>처럼 주인공은 항상 조금 더 어려운 상황에 직면합니다. 그리고 그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소금산>을 찾아 떠나거나, <다물활>을 찾아 떠나는 등 새로운 스테이지를 주어 시청자들을 만족시킵니다.

그리고 끝없는 주변인물과 아템이 쏟아집니다. 다물활과 강철검이라는 아템은 주몽 저레벨들의 선망의 아템입니다. 초반에 반지의 제왕의 나즈굴처럼 몰려다니던 한사군의 병사들은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실제 한사군의 철기병들이 강철검을 사용했다는 증거도 없지만, 그냥 있다고 치고 <아템>이 중요함을 강조한 장면들이 계속 나오죠. 초반의 이 무시무시한 아템발의 한사군을 몰아내기 위해 강조되는 것은 곧 무기였습니다. 주몽에서는 <강철검>이라는 것이 <의천도룡기>의 신검처럼 <극을 이끌어가는 매개체>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주몽에서 이유없이 잘나오는 사람은 연예인협회가 공식으로 밀어준다는 <이계인>씨입니다. 게임에서 <npc>의 역할을 이 모팔모가 하면서 끊임없이 중요한 <아템 공급>을 하며, 강철검, 철갑옷을 마련하게 되고, 막판에는 최고수 지존들만 입는다는 <한나라를 증가하는 철제무기와 갑옷>까지 공급받게 됩니다.

또 RPG게임에서나 나올 만한 오이, 마리, 협보라는 주인공을 돕는 캐릭, 그리고 그 이후 그를 돕는 수많은 캐릭들이 등장하여 극을 <고대적 대서사시>와 <현대적인 게임의 법칙> 속에서 융합시켜 나갑니다. 와우나 리니지에 나오는 <사제>캐릭인 <여미을>은 틈틈이 금와왕과 주몽을 치료까지 하더군요.

주몽이 시청률이 높은 이유는 요즘 시청자들이 이러한 <게임적 요소>에 이미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요소가 유치하다면 곧 싫증내고 돌아섰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몽이 성공한 이유는 이러한 게임적 요소를 유치하게 만들지 않기 위하여 <역사 쇼>를 한 덕분입니다.

항상 새로운 스테이지를 만들기 위하여 역사에서는 증명되지 않은 한사군과의 전쟁, 한나라에 조공하면서 한에 고개숙인 부여 등등이 그 역사적 요소입니다. 대소와 주몽의 갈등은 곧 친한파와 반한파의 갈등, 왕권과 신권의 갈등 등으로 첨예하게 대립되어 <설화>가 아닌 <사실>로 다가옵니다. 우리가 드라마 주몽을 볼 때 역사왜곡에 대한 이의 제기가 적은 것은 이러한 <드라마적 요소>가 <고대 서사구조>와 상통하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수긍이 가기 때문이 아닐까요?

3. 알거리 많은 연개소문이 주몽에 비해 뒤진 이유는....

드라마 연개소문은 제가 보기에도 참 작가가 많이 노력했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하나 하나 사료를 꼼꼼히 읽고, 대사 하나하나에서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복식과 말투까지 세세히 신경쓴 흔적이 보입니다.

심지어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나 <백석이 김유신을 유인한 이야기> 등의 사료상 모든 이야기들을 다 다루고 있는 듯 보입니다. 어쩔 때는 제 블로그에 있는 고대사 사료를 연개소문이 다 다루었나 검토해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증이 철저한 연개소문이 주몽보다 뒤쳐진 이유는 뭘까요?

전통사극에 대한 <시각적 인지도>가 변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영화나 게임>에 적응되어 빨리빨리 전개되는 극의 흐름과 순간순간 바뀌는 상황설정의 변화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주몽은 <1시간 또는 3-4시간> 동안 전개될 주제 1개가 명확합니다. 오늘은 <소금산 찾기>, 내일은 <현토군 공격> 등등 어떤 주제 일정에 따라 전개가 팍팍 흘러가고, 그 전개에 대한 명확한 결과를 보여주며, 또 다른 주제를 제시하여 흥미를 잃지 않게 만들어 줍니다.

반면, 연개소문은 철저한 고증과 함께 <독자에게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역할에 충실합니다. 전통 사극에서 그러하듯 <나레이션>도 종종 나옵니다. 어떤 목소리 좋은 성우분이 책을 읽어 주시지요...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연개소문식의 사극이 편하게 보기에 좋지만, 요즘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듯 합니다. 사극도 <다모> 같이 뭔가 특별한 개성이 있어야 <매니아>를 확보할 수 있고, 그 매니아가 팍팍 늘어가면 <국민 드라마>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또 하나 <고대 사극>을 다룰 때에 중요한 점은 <고대 역사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점입니다. 고대사는 <조선사>처럼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따라서 작가의 상상력이 무한으로 발휘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 작가들은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를 극으로 만드는 것보다 <대장금> <서동요> <주몽> <다모> <별순검> 과 같이 거의 알려진 사료가 없는 내용으로 극을 쓰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극들은 <조선사>를 다룬 일반 사극보다 크게 히트친 작품들이 많습니다.

이전에 조선사를 다룬 사극을 보면, 왕이 한마디 하면 주변에 양쪽으로 나열된 신하들이 돌아가면서 한 마디씩 다 말합니다. <폐하,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쩌구... 저쩌구...> 그걸로 2-3분 때웁니다. 주 시청층인 중, 고, 대학생들은 그 시간에 문자를 500타 이상 치며, 그 시간이면 스타크레프트 벙커링 1판이나, 4드론 러쉬가 끝날 시간입니다. 솔직히 요즘 세대가 영상 세대이며, 통신 세대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기에, 연개소문의 극 전개는 개인적으로는 정말 맘에 들지만, 실제 시청률 면에서는 아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연개소문은 전통 사극의 <대화>하는 습관을 그대로 따라간 면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현대인들은 딱딱한 사극 보다는 <눈에 확 들어오고, 주인공의 영웅적 면모가 부러운> 사극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네요.

4. 포스트 모던적인 인식은 역사보다 문학이 역시 우위다

주몽을 보고 역사에서 <포스트모던적 사고>를 아무리 외쳐봐도 문학에 비해서는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도 생각했습니다. 보통 고대사는 <포스트모던적> 시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곤 합니다. 사실상 역사적 사료도 없고, 그 역사적 과거가 진짜 있었는지도 알 길이 없으며, 빠진 역사부분은 상상으로 채워 넣어야 하는 부분이 고대사입니다.

고대사를 볼 때 우리는 역사를 <발견>한다기 보다 <발명>한다는 포스트 모던적 시각을 갖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에서는 이런 <포스트 모던적 시각>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주류학문>과는 거리가 먼 <재야학문>이 되고 맙니다. 아직도 역사는 <정확한 사료>를 가지고, <정확한 판단>을 해서, 가장 근거있는 <정확한 사실과 해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역사적 기록은 그 역사 기록 자체가 저자의 <주관>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고대사의 바이블인 삼국사기 역시 <김부식과 편찬자 12인의 신라중심적 역사관>이 반영되어 저술되었고, 삼국유사 역시 <불교적 입장>이 반영될 수밖에 없었으며, 제왕운기와 동명왕편도 당시 <혼란한 고려시대상의 반영>이라는 측면이 강한 작품들입니다. 중국측 자료들은 거의 대부분 중국인의 시각에서 저술되어 잘 인용하지 않는 것도 많습니다.

원 사료가 주관적이고, 인용하는 현대 역사가들이 골라서 인용하는데, 정확한 사실과 해석이란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주몽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아주 짧고 간결한 고대 저서들의 1줄, 2줄 또는 1페이지짜리 자료들로 해석하곤 합니다. 그 한줄 한줄을 밑줄 긋고, 그 당시 상황을 추론해가면서 고대사가 이루어집니다.

그 한줄 한줄 밑줄 그은 몇줄짜리, 몇장짜리 기록들을 가지고서, 역사학자들은 고대사의 진실을 말하곤 합니다. 정말 어려운 작업입니다. 자료가 너무 없기에, <역사적 상상>을 총동원하여 아마 <이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고 갖다 붙이고, 상상하고, 추론하고, 그 추론에 대한 정확도를 측정합니다.

그러나 문학에서는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단 한 줄의 자료 - <장금이의 음식이 맛았었다>라는 기록 만으로도 50편짜리 대장금을 만들 수도 있고, <베어울프 이야기, 아더왕 이야기>라는 영국 설화를 가지고, <반지의 제왕, 드레곤의 전사, 어스시의 마법사>같은 대작들을 마음껏 만들수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문학이 훨씬 매력적입니다.

주몽은 그러한 상상력의 결정판입니다. 실제 사료상의 내용과 많이 달라 역사왜곡이라 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주몽에서의 역사왜곡은 극의 전개상 필요한 부분들 뿐이었다고 생각듭니다. 그리고, 사료에 없고, 기록도 불일치하는 부분에 대한 작가 나름대로의 해석과 극 전개는 왜곡이라고 할 수 없다고 생각이 듭니다. 왜곡이란 <사실>을 고의적으로 잘못 기술한 것이지 <있지도, 정확하지도 않은 자료의 변형>은 왜곡이라 보기 힘드니깐요.

문제는 주몽이라는 드라마가 해외로 수출된다는 점입니다. 해외에 수출될 때 문제점은 그 나라의 역사와 부합되지 않은 부분들이 <강펀치>를 맞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한사군과 주몽의 항쟁 부분에서 <사실이 아닌 많은 부분>, 철기사용에 관한 <시대상황에 맞지 않는 부분>들은 <중국, 대만> 등지에서는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설픈 왜곡은 대놓고 베짱으로 나가는 왜곡보다 더 문제될 수 있으니까요.

아예 주몽은 <현토, 임번, 진둔>군과의 동네 싸움이 아닌, 한나라와의 직접 대결구도로 가는 것이 옳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어짜피 드라마 전개상 한나라와의 갈등이라면, 일개 현토군과의 항쟁보다는 <중국황실>과의 일대 접전이 더 영웅적 면모를 부각시키지 않았을까요? 그 부분은 아쉽습니다. 주몽에서 막판 주몽-대소의 연합군 편성 외에는 <지속적으로 한나라 아래 있는 국가>라는 인식이 드라마 전반을 지배하고 있었으니까요.

정말 대충적인 글이 되어 버렸군요. 써 놓고 보니 뭔말인지.... 원래는 주몽에 대한 <서사적 구조>를 분석하려는 글이었는데, 막 쓰다보니 게임의 법칙만 말하다가 끝나 버렸습니다. 그냥 감상문이 되어 버렸네요. 이제 그만....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은 운영자의 주관적인 글입니다.
   2. 펌글은 가능하나, 퍼가실 땐 댓글을 부탁드립니다.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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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영토 확장

동명성왕 2년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그  땅을 다물도로 삼고 송양을 그 곳의 주로 봉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

부여왕 사촌 동생이 만여명을 데리고 투항해 오니 대무신왕이 왕으로 봉하고 연나부에 안치시켰다. 9년 10월에 왕이 친히 개마국을 정벌하여 왕을 죽이고 백성을 위로하여 노략질을 못하게 하고 군현으로 삼았다. 12월에 구다국왕이 개마가 멸망했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

태조대왕 11년 8월에 갈사왕 손도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오니 도두를 우태로 삼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 -

9월, 왕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현도군에 침입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

6월, 왕이 군사 4천 명을 내어 마침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키고 남녀 l만명을 사로잡아왔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

8월, 왕이 백제와 패수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포로 8천 명을 사로잡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   -

9월, 왕이 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입해서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고, 백제왕 부여경(개로왕)을 죽였으며 포로로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았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장수왕 -

자료 참조 : 고구려의 영토 확장에 대한 현재 교과서 내용의 증거 사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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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건국 설화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의 아버지는 추모(鄒牟)로서 주몽(朱蒙)이라고도 하는데, 북부여(北扶餘)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부여(卒本扶餘)에 이르렀다.  졸본부여의 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단지 딸만 셋이 있었다. 왕이 주몽을 보더니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을 시집보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졸본부여의 왕이 죽자 주몽이 왕위를 잇고 두 아들을 낳았다. 맏아들을 비류라 하고 둘째 아들을 온조라고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매,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다가 마침내 오간(烏干)·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으로 가니 백성 가운데 따르는 자가 많았다. 드디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는데,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고 싶어 하였다. 10명의 신하가 간언하기를 "생각컨대 이곳 하남(河南)의 땅은 북쪽으로 한수(漢水)를 끼고, 동쪽으로 높은 산악에 의지하며, 남쪽으로 기름진 들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큰 바다에 막혀있으니, 그 천혜의 험준함과 땅의 이로움은 좀체로 얻기 어려운 지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만드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彌鄒忽)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도읍하였다. 10명의 신하로 하여금 돕게 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十濟)라고 하니,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 수 없었는데, 위례성으로 돌아와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하였다. 마침내 비류가 부끄러워하고 후회하다 죽으니,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백성들이 올 때 즐거이 따라왔다 하여 나중에 국호를 백제(百濟)로 바꾸었다. 그 세계(世系)가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부여(扶餘)를 성씨로 삼았다.

- 삼국사기 -

어떤 이들이 이르기를, <시조는 비류왕으로서 아버지는 우태>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며,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처음에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아 맏아들을 비류라 하고 둘째를 온조라고 하였는데, 우태가 죽자 졸본에서 과부로 살았다. 뒷날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전한 건소 2년 봄 2월에 남쪽으로 달아나 졸본에 이르러 나라를 세워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였다. 이 때 주몽은 소서노를 취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기초를 닦아 나라를 세우는 데 자못 내조한 공이 크므로 주몽의 총애가 특히 두텨웠으며 비류 등을 마치 자기 친아들같이 대우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인 유유(유리)가 오지 그를 태자로 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재난을 피하여 여기로 도망해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집안 재물을 죄다 쓰면서까지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런데 대왕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는 유유가 차지했으니 우리는 한갓 여기에 있어 쓸데없는 물건과 같아 답답할 뿐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나라를 세움만 같지 못하리라.>하고는 드디어 아우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패수(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이 때는 예성강)와 대수(임진강)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인천이라는 설이 다수설)에 이르러 자리를 잡았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

13년(기원전 6년) 봄 2월에 서울에서 늙은 할멈이 남자로 변하였고, 다설 마리의 범이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나이가 61세였다. 여름 5월에 왕이 신하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 영토를 침략하므로 편안한 날이 적다. 하물며 이즈음 요망한 징조가 자주 나타나고 국모가 돌아가시니 형세가 스스로 편안할 수 없도다. 장차 꼭 도읍을 옮겨야 하겠다. 내가 어제 순행을 나가 한수 남쪽을 보니 땅이 기름지므로 마땅히 그곳에 도읍을 정하여 길이 편안할 수 있는 계책을 도모하여야 하겠다.>

가을 7월에 한산 아래로 나아가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들을 옮겼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


사료분석 : 백제는 나라의 이름, 곧 국호(國號)를 몇 차례 바꾸 었으며, 또 기록에 따라 여러가지 별명으로 소개되기도 하였는데 시대를 떠나서 가장 일반적인 이름은 역시 백제(百濟) 입니다. 백제라는 국호의 의미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설명이 조금씩 다릅니다. 먼저, 한국고대사 연구의 기초자료인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이 그의 형인 비류(沸流)가 다스리던 백성을 합쳐 더 큰 나라를 만들 때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 하여서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한편, 중국측의 역사서인 수서(隋書)에는 백제를 간략하게 소개한 [백제전(百濟傳)]이 있는데, 거기에는 처음에 백여 호(戶)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남하하여 나라를세웠기 때문에 백제라고 하였다고 쓰여 있습니다.

백제의 국호에 대한 삼국사기와 수서의 설명 가운데 어느 쪽이 맞는 것인지는 아직 가려내기 어렵습니다. 양쪽 모두 설화에 입각한 설명이기에, 어쩌면 양쪽 모두 잘못된 설명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백제가 처음부터 백제(百濟)라는 국호를 사용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처음 나오는 백제의 국호는 십제(十濟)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 온조왕 즉위년조. 위의 기록은 내용상 백제의 건국설화라고 하여도 무방한데, 고구려·신라의 그것과 비교한다면, 매우 특이하다고 할 만합니다. 즉, 백제의 건국설화-온조설화(溫祚說話)에는 묘하게도 신비라든가 기적과 관련된 부분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매우 사실적이고 소탈한 방법으로 백제 건국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백제의 건국 설화가 뒤늦게 채록되었거나 중국화된 합리주의적 시각에서 채록되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바로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백제의 건국설화가 고구려, 신라의 그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욱 사실에 가깝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여하튼, 위의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국호는 애초 십제(十濟)였으며, 나중에 국력이 더욱 커지자 백제(百濟)로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십(十)에서 백(百)으로' 바뀌었다는 것인데, 이와 같은 설명이야말로 중국화된 시각, 곧 한자(漢字)에 입각한 해석이자 설명이라고 하겠습니다.

또, 그렇기에 인위적인 분위기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즉, 나라가 성장함에 따라 '십(十)'에서 '백(百)'으로 나라 이름을 바꾸었다는 설명은 마치 '백'을 염두에 두고 숫자논리에 입각하여 '십'을 지어낸 듯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는 기록은 중국에서 진수(陳壽)라는 이가 3세기 후반에 편찬한 역사서 삼국지(三國志)입니다.

중국 삼국시대의 역사를 정리한 삼국지에는 [한전(韓傳)]이라 하여 우리의 삼한(三韓)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 부분이 있는데, 그중 마한(馬韓)에 속한 54개 소국의 이름을 열거하던 가운데 백제국(伯濟國)이라는 국호를 적어놓은 대목이 있어 우리의 눈길을 끕니다.

백제(伯濟)와 백제(百濟)는 한자만 약간 다를 뿐 같은 음(音)으로 된 글자이며, 또 백제국의 위치가 한강유역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여러모로 백제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상당수의 학자들은 보통 백제국을 백제의 초기 단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백제국이 국력을 신장한 결과 국호를 한자 뜻이 더 좋고 세련된 백제(百濟)로 바꾸었다는 것이지요. 한편, 일본 정부에 의해 서기 720년에 편찬된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위례국(慰禮國)'이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이는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한 백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고대에는 도시의 명칭을 그대로 나라 이름으로 사용한 예가 적지 않았음을 감안하면, 위례국이라는 이름도 그다지 어색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만약 일본서기의 위례국이라는 표현이 어떤 근거를 가진 것임을 인정할 경우, 그것이 백제라는 국호보다는 앞선 시기의 국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도 될 듯합니다. 다만, 그것이 정식의 국호였는지, 아니면 별명과 같은 것이었는지는 아직 가리기 어렵습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백제는 성왕(聖王) 16년(538)에 도읍을 웅진(熊津) 곧 지금의 공주지방에서 사비(泗 ) 곧 지금의 부여지방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다시 한번 바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부여'라는 국호는 다른 기록에 별반 남아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국제사회에서는 물론 백제 내부에서도 그리 오래 사용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도읍을 옮길 때 국가 분위기를 새롭게 한다는 뜻에서 국호도 바꾸었지만, 백제라는 국호가 지니는 전통적 이미지가 이미 국내·외에 널리 퍼져있어 오래지 않아 환원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금까지 소개한 국호들처럼 널리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매우 특징적인 명칭도 있었습니다. 바로 응준(鷹準)과 나투(羅鬪)라는 이름입니다.

고려시대의 저작인 제왕운기(帝王韻紀) 에는 "후대의 왕 때에 국호를 남부여라고 한 적이 있으며, 또 응준 혹은 나투라고 칭하기도 하였다"라는 대목이 있는데, 응준과 나투는 모두 조류(鳥類)의 일종인 '매'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응준과 나투는 정식 국호라기 보다는 다른 나라에서 백제를 지칭할 때 사용한 일종의 별명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침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신라가 선덕왕(善德王) 14년(645)에 건립한 황룡사(皇龍寺) 9층탑의 제5층에 신라의 경계해야 할 적대국으로서 응유(鷹遊)를 적어놓았다는 기록이 있는바, 여기의 응유를 앞서의 응준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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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동명왕편 - 국가의 안정

서쪽으로 사냥을 나가 흰 사슴을 잡아 해원에 거꾸로 매달아 저주하기를, <하늘이 비를 내려 비류국 왕도를 물바다로 하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로 너를 놓아주지 아니하겠다. 이런 고난을 면하고자 한다면 네가 하늘에 호소하여라>라고 하였다.

그 사슴의 슬피 우는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니 장마비가 이레를 퍼부어 송양의 도읍은 물바다가 되었다. 왕은 갈대줄로 강을 가로질러 놓고, 오리말을 타고 있었다. 백성들은 모두가 그 줄을 붙들고 있었다. 주몽이 채찍으로 물에 금을 그으니 물이 줄었다. 6월에 송양이 온 나라 백성들을 이끌고 항복하였다고 한다.

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서 사람들은 그 산성을 볼 수 없었다. 오직 수천 사람 소리가 토목 공사를 하는 듯이 들렸다.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우리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레 만에 운무가 스스로 흩어지니, 성곽과 궁실, 누대 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있었다. 왕이 황천을 향해 절을 하고는 나아가서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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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동명왕편 - 건국의 과정

비류왕 송양이 사냥을 나왔다가 왕의 용모가 비상함을 보고 데리고 가서 더불어 앉아 말하기를, <바닷가에 떨어져 살아 아직 군자를 만나보지 못하다가 오늘 우연히 만났으니 다행한 일이요. 그대는 어떤 사람이며 어디서 오셨소?>라고 물었다.

왕이 대답하기를 <과인은 천제의 손자며 서국의 왕입니다. 감히 묻습니다. 군왕님은 누구 후손이신지요?>라고 하였다. 송양이 <나는 선인의 후예인데, 여러 대에 걸쳐 왕을 하고 있소. 지금 이 지방은 지극히 좁아 두 임금이 갈라서 차지할 수 없는데, 그대는 건국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우리 부용국이 되는 것이 좋지 않겠죠?>라고 말하였다. 왕은 <과인은 하늘을 이은 자손이고 지금 왕은 신의 자손도 아닌데도 억지로 왕이라 일컬으니 만약 나에게 복종치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그대를 벌할 것이요>라고 말하였다.

송양은 왕이 몇 번이나 천손이라고 말하는 데 대해 의심을 품고 재주를 시험해보고자 하였다. 그래서 말하기를 <왕과 더불어 활을 쏘고 싶소이다.>라고 말하고는 사슴을 그린 과녁을 100보도 못 미치는 거리에서 두고 쏘는데, 살이 사삼의 배꼽을 맞하지 못했으면서도 실지로 맞힌 것처럼 여겼다. 왕은 사람을 시켜 옥지환을 100보밖에 걸게 하고 쏘자 마치 기와장이 부서지듯이 깨지므로 송왕은 크게 놀랐다고 한다.

왕이 말하기를 <나라 일이 새로우니 아직 고각의 위의가 없다. 비류국 사자가 왕래할 때, 내가 왕의 예로서 영송할 도리가 없으니 우리를 업신여기는 구실이 되겠다>고 말하였다. 시종하던 신하 부분노가 나와서 말하기를 <신이 대왕님을 위하여 비류국의 고각을 가지고 오겠습니다>라고 하메, 왕이 <다른 나라 장물을 네가 어떻게 가져 오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에 대답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내린 물건이니 어찌 가지지 못하였겠습니가? 대체로 대왕님이 부여에서 곤궁하실 적에 어느 누가 이곳에 오시리라 생각하였겠습니까? 지금 대왕님이 만 번 죽을 위태한 땅에서 몸을 빼나와 요좌에서 이름을 날렸사옵니다. 이는 천제가 명령하시어 이루신 일이오니 무슨 일인들 이루어지지 아니하겠습니까?>하고는 부분노 등 3인이 비류국에 가서 고각을 훔쳐왔다.

비류국왕이 사자를 보내 아뢰기를 뭐라 뭐라 하였다. 왕은 고각을 와서 볼까 염려하여 어둡게 색칠해 오래된 것 같이 해놓았더니, 송양이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송양이 도읍을 세운 시기의 선후로서 부용국을 정하려 했다. 왕이 궁실을 만드는데, 썩은 나무로 기둥을 삼아 1000년이나 묵은 듯이 해 두었다. 송양이 와 복는 마침내 감히 도읍의 선후를 다투지도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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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동명왕편 - 영웅의 위기

나이 들어 어른이 되니 재능도 함께 갖추었다. 금와왕에게는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같이 사냥을 하면서 놀았다. 왕자와 종자가 40여명인데도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았으나, 주몽이 잡은 사슴은 아주 많았다. 왕자가 이를 투기하여 주몽을 잡아 나무에 묶어놓고 사슴을 빼앗아가 버리므로 주몽은 나무를 뽑아 버리고 돌아왔다. 태자 대소가 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이란 놈은 귀신같은 장사고 안목이 비상하옵니다. 이 놈을 일찍 처치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훗날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왕이 주몽으로 하여금 말을 먹이도록 하였으니, 주몽의 참뜻을 떠 보고자 한 것이다. 주몽은 속 마음에 한을 품고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저는 천제의 자손으로 남의 말을 먹인다는 것은 죽음만 같지 못한 노릇이니, 남쪽으로 가서 나라를 세울까 합니다. 그러하오나, 어머니가 계시니 감히 뜻대로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하기를 <이는 내가 밤낮으로 마음 졸인 바이다. 내가 듣기로는 장사가 먼 길을 떠날 때는 꼭 좋은 말이 필요하다. 나는 말을 고를 줄 안다.> 하고 곧 말목장으로 갔다. 그리고는 긴 채찍으로 마구 치니 뭇 말이 놀라 달리는데, 붉고 누름한 말 한 마리가 두 길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넘었다. 주몽은 훌륭한 말임을 알고 남몰래 바늘을 혀뿌리에 꽂아두었다. 그 말은 혀가 아파 물과 풀을 먹지 못하므로 몹시 야위어갔다. 왕이 말목장을 순행하다가 뭇 말이 모두가 살찐 것을 보고는 크게 기뻐하고 야원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은 그 말을 얻어서 바늘을 뽑고는 잘 먹었다.

주몽은 남으로 내려가고자 하였지만, 강을 건너자니 배가 없고 따라오는 군사들이 닥쳐올까 두려워서 채찍으로 하늘을 가르키며 한숨짓고 탄식하기를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자인데 지금 난을 피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황천과 후토는 이 외로운 사람을 살피시어 속히 배와 다리를 마련하소서>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고 활로 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이루었다. 주몽은 이러하여 건널 수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추격병들이 이러렀다. 추격병이 이르자 물고기와 자라들이 놓은 다리가 즉시 없어졌으므로 다리 위에 있던 군사들은 모두 빠져 죽었다.

주몽이 작별할 때 차마 떠나지 못하니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어미 걱정은 말아다오>하고는 오곡 종자를 싸 주었다. 주몽은 생이별하는 아픔으로 애끓이다가 그만 보리씨를 가져오는 것을 잊어 버렸다. 주몽이 큰 나무에서 쉬고 있었는데 비둘기 한 쌍이 날아왔다. 주몽이 말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어머니가 사자를시켜 보리씨를 부쳐온 것이다>하고는 활을 당겨 쏘는 한 살에 다 떨어졌다. 목구멍을 열어 보리씨를 꺼내고는 물을 비둘기에게 뿜자 다시 살아서 날아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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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동명왕편 - 주몽의 탄생

왕이 천제의 왕비임을 알고 별궁에 있도록 하였더니 여자는 품 속에 햇빛이 비치어 잉태를 하였다. 신작 4년 계해 여름 4월에 주몽이 탄생하였는데, 울음소리가 아주 크고 골격이 뛰어났다.

처음에 날 때 왼쪽 옆구리에서 한 알을 낳으니, 크기가 닷 되들이 정도였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 말하기를, <사람이 새 알을 낳았으니 불길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사람을 시켜 알을 말 우리에 두었더니 모든 말들이 밟지 않았고, 깊은 산속에 버려도 온갖 짐승들이 모두 지켜주었다. 구름이 끼고 음침한 날이면 알 위에 항상 햇빛이 비쳤다. 왕은 알을 가져오게 하여 그 어머니에게 보내 기르게 하였다. 알이 마침내 갈라져서 한 사내아이를 얻었다. 낳은 지 한달도 안되어 말을 아주 잘했다.

(주몽이) 어머니에게 일러 말하기를 <파리 떼들이 눈에 덤벼 잘 수가 없으니, 어머니가 활과 실을 만들어 주시오>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싸리나무로 활과 실을 만들어 주었더니, 물레 위의 파리를 쏘는데 화살을 쏘는 족족 맞혔다.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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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동명왕편 - 해모수와 하백

본기(구삼국사 본기인 듯)에 이렇게 적혀 있다. 부여왕 해부루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산천에 제사하여 아들 낳기를 빌러 가는데, 타고 있던 말이 곤연에 이르자 큰 돌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돌을 굴리게 하였더니 금빛 나는 개구리 모양의 작은 아이가 있었다. <왕은 이를 하늘이 내게 아들을 준 것이다.> 라고 거두어 길렀는데, 이름을 금와라 하고 태자로 삼았다. 상 아란불이 말하기를 <일전에 천제가 내게 내려와서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곳에 나라를 세우려 하니 너는 여기서 떠나거라"라고 하였는데, 동해 가에 가섭원이란 땅이 있어 오곡이 잘 되니 도읍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아란불은 왕을 권하여 옮겨 도읍하고 동부여라 이름하였다. 예전 도읍테에는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 되어 내려와서 도읍하였다.

한 신작 3년인 임술년에 천제가 태자를 보내 부여왕의 옛 도읍에 내려가 놀게 하였는데, 해모수라는 이였다.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다섯 용이 끄는 수레 오룡거를 탔고, 따르는 이 백여명은 모두 흰 고니를 탔다. 색깔있는 구름이 그들 위에 떴고 음악 소리가 구름 속에서 울려 나왔다. 웅심산에 머물렀다가 10여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내려왔는데, 머리에는 오우의 관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의 칼을 찼다.

그녀들이 왕을 보고는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좌우 신하들이 말하기를 <대왕님은 어찌하여 궁전을 마련하지 않습니까? 여자들이 방에 들거든 문을 닫아서 가로막으시옵소서>라 하니, 왕이 "그러리다"라고 말하고는 말채로 땅에 금을 그으니 동실이 문딕 서서 장관이었다. 방 가운데에 세 자리를 준비하고 통술을 차려놓았다. 그녀들이 각각 자리에 앉아 서로 권하여 술 마시더니 크게 취하였다고들 한다.

하백이 크게 노하여 사자를보내 말하기를 <너는 어떤 사람이길래 내 딸을 붙들어 두었는가?>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지금 하백과 혼인을 맺으려 한다.>고 하였다. 하백이 또 사자를 시켜 고하기를 <그대가 천제의 아들로서 나에게 구혼할 뜻이 있다면 마땅히 중매자를 시킬 일이거늘 지금 갑자기 내 딸을 붙들어 두었으니 어찌 그렇게 예의가 없는 것인가?>하므로 왕은 부끄럽게 생각하였다. 왕은 곧 가서 하백을 뵈옵고자 하였으나, 그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으므로 그녀를 놓아 보낼까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미 왕과 정이 들어 떠나가지 않으려고 하면서 왕에게 권하기를, <만약 용이 끄는 수레만 있으면 하백의 나라에 갈 수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하늘을 가르켜 고하니 갑자기 오룡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 왕이 그녀와 같이 수레에 오르니 바람과 구름이 문득 일어 하백궁에 이르렀다.

하백이 말하기를 왕이 진실로 천제의 아들이라면 무슨 신이한 것을 가졌는가?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한번 시험해 보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하백이 뜰 앞 물에서 몸을 변하여 잉어가 되어 물결 타고 노니는데, 왕은 수달이 되어 잡았다. 하백이 또 사슴이 되어 뛰어가니, 왕은 늑대가 되어 쫒았다. 하백이 뀡이 되면 왕은 매가 되어 치매, 하백은 진실로 천제의 아들임을 알고는 예로서 혼례를 치렀다. 왕이 앞으로 딸을 데려갈 마음이 없을까 두려워 풍악을 잡히고 술자리를 차려 왕에게 권하여 만취케 하여 놓고는 딸과 함께 작은 가죽 가마에 넣어 옹거에 실었는데, 같이 하늘에 오르게 하자는 생각에서인 것이다. 수레가 물에서 뜨기도 전에, 왕은 곧 술이 깨서는 그녀의 황금 비녀를 빼서 가죽 가마를 뚫고 그 구멍으로 빠져나와 혼자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하백이 크게 노하여 그녀를 책망하기를, <너는 내 훈계를 따르지 아니하였다가 끝내는 우리 집안을 욕보였다>라고 말하고는 좌우 신하들에게 딸의 입을 쥐어 당기게 시켜 입술 길이를 석자나 되게 하였다. 기여 비복 2명만 주어 우발수 한가운데로 내쫒았다. 우발수는 못 이름인데 지금 태백산 남쪽에 있다.

어부 강력부추가 아뢰기를, <근자에 발 속의 고기를 훔쳐가는 일이 있사온데, 어떤 짐승인지 알 수 없사옵니다>라고 하자, 왕이 어부를 시켜 그물로 끌어올리게 하였으니, 그물이 찢어졌다. 다시 쇠그물을 만들어 당겨내서야 비로소 한 여자를 얻었는데, 돌에 앚아사 나왔다. 여자는 입술이 길어 망을 못하기에 세 번 자르게 한 연후에야 말을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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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의 동명왕편 - 서문

세상에서 동명왕의 신이하고 이상한 일이 이야기 되는데, 비록 배운 것 없는 어리석은 남녀들까지도 제법 얘기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내가 일찍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웃으며 <선사 공자님은 괴력난신을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이 동명왕 설화는 실로 황당하고 기궤하니 우리들이 논급할 바가 아니다> 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뒤에 <위서>와 <통전>을 읽어보니 역시 그 일을 실었으나 간략하지 못하고 자세하지 못하니, 자기네 일은 자세히 기록하고 외국의 일은 핵심만 기록하려고 한 때문일 것이다.

다음 계축년 4월에 구삼국사를 얻어서 동명왕 본기를 보니 그 신이한 사적이 세상에서 이야기되는 것보다 더 자세하였다. 그러나 역시 처음에는 이를 믿지 못하였으니, 귀신(귀)이나 환상(환)의 이야기같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여러번 탐독, 미독하여 차차로 근원을 찾아가니 이는 환이 아니고 성이며, 귀가 이나고 신이다.

동명왕의 이야기는 변화롭고 어지러워 중생을 현혹시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것은 실제 나라를 건국한 신이한 사실적 이야기이며, 즉 이것이 저술되지 않았음이 후에 어찌 보겠는가. 이로서 이 이야기를 시조 짓고, 설명하고자 한다. 이것은 무릇 천하에 우리 국가의 근본이 성인의 국가임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니라.

사료해석 : 동명왕편 서문이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것은 민족적 발로에서 쓰여진 글이라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규보는 초기에는 유교적 합리사관에 의해 초기에는 유교적 합리주의 입장의 사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중세 사관인 무징불신, 필삭주의 등을 지키려 했었고 명확한 증거가 없는 것을 손대지 않으며, 신화와 같은 허무맹랑한 사실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규보는 점차 고구려 계승의식을 바탕으로 한 동명왕을 강조하면서 중국과 다른 독자성을 우리 역사에서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은 곧, 이규보가 유교 사관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우리 역사 시대를 좀더 상고시대로 끌어올려보려는 절충적 관점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규보는 동명왕 신화는 유교사관에서 말하듯 괴력난신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웅적 시조의 이야기을 잘 분석하면 우리 민족 고유의 독자적 혈연관계와 문화 공동체 의식을 찾아낼 수 있다는 민족의식의 발전성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최씨 무신 정권기에 사회 통합 기능 차원에서 어느 정도 목적성이 있을 수도 있어 보입니다. 또한 삼국사기와 같은 직전 시대의 사서에 대한 반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것을 저술함으로서 묻혀 버린 과거 이야기를 진지하게 논의하고자 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으며, 조선시대 단군조선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마련하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일 것입니다. 물론 비체계적인 서술과 감성적인 고대 전통으로의 복귀라는 문제점은 이 글의 가장 큰 약점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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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편(주몽설화)

이 작품은 고구려를 창건한 동명왕을 민족적 영웅으로 형상화한 영웅 서사시입니다. 서사시는 장중한 문체로 집단의 운명에 직결되는 심각한 주제를 다루는 장편의 이야기시의 이름인데, 특히 국가나 민족 또는 인류적 영웅의 행위를 중심으로 하는 역사적 사건을 그 주된 이야기거리로 삼은 것을 영웅 서사시라고 하지요. 우리 문학사의 경우 고전문학이나 현대문학을 막론하고 서사시가 매우 드문 형편인데, `동명왕편`은 고구려를 창건한 동명왕을 민족적 영웅으로 주인공화하여 하늘과 땅은 물론 수중 세계를 아우른 광활한 지역을 배경 삼아 기억하기에 편리한 오언시(五言詩)로 표현되고, 작자의 개인적인 정서나 사상보다는 커다란 역사 공동체로서의 당시 고려인의 신앙과 이념을 나타냄으로써 영웅서사시의 제반 요건을 충족하고 있는 귀중한 문학 유산입니다.

창작동기

이규보가 `동명왕편`을 지은 시기는 1193년(명종23)4월로 그의 나이 26세 때였습니다. 이 시기는 고려 사회의 대내외적 모순이 절정을 향하고있을 때였지요. 외적으로는 요나라의 수차례에 걸친 침공을 경험한데 이어 요나라의 뒤를 이은 금나라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무신정변이라는 살육에 의한 지배층의 교체와 1190년(명종20)부터 시작되어 진행 중에 있던 민란으로 인해 고려 국가가 분열의 위기를 맞고 있기도 했구요. 이런 대내외적 정서가 이규보의 `동명왕편` 창작의 배경으로 작용하였음은 분명한 일입니다.

이 시절 이규보는 비록 과거시험에 합격은 하였으나 아직 관직에는 오르지 못하고 있었는데, 2년 전인 1191년(명종21), 아버지를 여읜 후로부터 개성 근교에 있는 천마산에 들어가 백운거사(白雲居士)라 스스로 호를 짓고 시와 술에 몰두하여 한가로운 날을 보내면서 대뇌외적 모순에 당면한 고려 사회를 관조하고 있었습니다. `구삼국사(舊三國史)`를 구해 읽고 동명왕의 사실에 대해 감명을 받는 등 고려인으로서의, 또 문학 청년으로서의 진지한 정열을 불태우던 시기가 바로 이때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일생을 통하여 관직에의 강렬한 욕구를 보여 당시 무신정권의 권력가인 최충헌 가문에 밀착되기까지 하였고, 그 결과 70세에 상국(相國)의 지위로서 은퇴하기까지 평탄한 벼슬살이를 할 정도로 철저한 현실주의자인 이규보의 성향으로 볼 때 진지한 정열을 불태우던 시절에 대내외적 모순을 극복할 상념에 젖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함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규보와 같이 현실에 뜻있는 고려 지식인들이 고려 사회가 당시에 맞고 있었던 위기의 원인을 상념한 관점을 추정하여 `동명왕편`의 창작 동기를 민족의식의 고양, 또는 국가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동명왕편의 지은 동기는 서문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럼 서문부터 제시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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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취수제의 소멸

상산왕은 연호(휘)가 연우이다. 고국천왕의 동생이다.

위서에서 논하기를, 주몽의 손자가 <궁>인데, 능히 신이하여 태어날 때 눈을 열고 태어났다고 한다. 이 <궁>이 바로 태조이시다. 지금 왕은 태조의 증손인 상산왕인데, 역시 능히 눈을 열고 태어났으니, 증조와 같은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같은 곳을 일컫어 <위>라고 한다. 고로 그 이름이 <위궁>이 된 것이다.

고국천왕은 자식이 없었다. 그래서 연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처음에 고국천왕이 죽었을 때에는 왕후 우씨가 비밀로 하고 상을 치르지 않았다고 한다. 밤에 왕의 다른 동생인 <발우>에게 가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왕이 후손이 없는데, 아들이 위를 이어야만 한다.> 발우는 왕이 죽은 것을 모르고 대꾸하기를 <형수가 밤에 돌아다니다니 어찌된 일인가?>

                                                                                         - 위지 동이전  -

사료해석 : 초기의 고구려에는 형사취수제가 있엇습니다. 이 사료는 이것이 사라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사취수제가 사라진 것은 고국천왕기부터라고 하는데, 고국천왕이 죽었지만, 동생들은 왕의 처를 취하지 않습니다. 즉, 이것은 고구려의 사회적인 변화를 상징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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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건국설화

시조 동명성황은성이 고씨이며 이름은 주몽이다..... 부여의 금와왕이 태백산 남쪽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어 물은 즉, 하백의 딸 유화라 하는지라....... 금와왕이 이상히 여겨 그녀를 방에 가두어 두었는데 햇빛이 따라와 비추었다. 그녀는 몸을 피하였으나 했빛이 따라와 기어이 그녀를 비추었다. 이로 인하여 그녀는 잉태하게 되었고 마침내 알 하나를 낳았다. ... 한 사내아이가 껍데기를 깨고 나왔다.

기골과 모양이 뛰어나고 기이했다. 일곱 살에 의연함이 더하였고, 스스로 활을 만들어 쏘는데 백발백중이었다.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이라 하니 이로써 이름을 삼았다. .....

주몽의 어머니가 비밀을 알고 아들에게, <장치 이 나라 사람들이 너를 죽이고자 하니 너의 재간으로 어디 간들 못 살겠느냐, 지체하다가 욕을 당하지 말고 멀리 도망하여 큰 일을 이루어야 한다.>라고 타일렀다. 주몽은 그를 따르는 세 사람과 함께 도망하여 강가에 이르렀다. 그러나 다리가 없어 강을 건널 수 없었고, 추격병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주몽이 강물에 고하여 <나는 천제의 아들이고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하여 여기까지 왔으나 추격병이 쫒아오고 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고 외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니 주몽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 주몽은 졸본천으로 갔다. 그 곳 땅이 기름지고 아름다우며 산천이 험하였다. 마침내 이 곳에 도읍하기로 하였다.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하고 고를 그의 성씨로 삼았다.

                                                                                         - 삼국사기  -

사료해석 : 주몽은 부여의 지배 계급 내의 분열과 대립과정에서 박해를 피해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고대 신화의 위기극복구조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설화입니다. 특히 졸본의 산악지대는 <힘써 일해도 양식이 부족한> 지역인 만큼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소국들을 정복하고 평야지대로 진출해야만 했죠.

이 사료에서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인 해모수이고 어머니 유화부인은 물의 신 하백의 딸입니다. 즉 고구려인들은 선민의식과 천신의식을 지녔음을 알 수 있는데, 후의 고구려인들은 주몽과 유화부인을 시조신으로 모시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고구려 신화와 단군신화는 그 구조가 약간 다른데, 단군신화는 창세기적 요소로서 원시적인 초창기 신화이므로 영웅의 위기극복보다 선악의 대립구조가 강도되었음이 보입니다. 특히 청동기 시기의 전형적인 신비주의가 많이 보이죠. 반면 고구려 설화들는 유이민적인 요소가 보이는 철기시대 신화로서 신비주의는 축소되며, 그 사회상이 많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로 형제갈등에서 보이는 적장자 상속의 인정, 주몽의 모친에서 볼 수 있는 농업적 지모신 요소 등이 설화에 녹아 그 사회상을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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