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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

후한 말 청의파 진식이 남긴 <양상군자 이야기> 역사 속 고사여행 양상군자(梁上君子) : 대들보 위의 군자 1. 청의가 사라지고, 탁한 자들이 설치니... 때는 후한 말, 삼국지에 원소가 지방 호족으로 등장했던 그 시기의 이야기이다. 당시 중국은 중앙과 지방이 모두 혼란한 시기였다. 중앙에서는 환관이 득세하여 왕권을 농락하고, 대의정치를 외치는 지식인들을 옥에 가두고 있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이라고 하여, 혼탁한 환관들을 모두 죽이고 깨끗한 정치를 외치곤 했지만, 환관들에 의해 제거 당하곤 했다. 지방에서는, 중앙과 별도로 세력을 가진 들이 등장하였다. 호족들 중에는 환관들을 척결하고 을 지키자는 들도 있었다. 반면, 원소나 조조와 같이 자신의 영지와 군사력을 통해 한나라 왕실에 무력을 보여줌으로서 세를 늘리려는 세력도 있었다. 세상이 흉악하니, 농민.. 더보기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 6화. 현학, 청담에서 시작된 격의 불교 이야기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6화. 격의 불교 이야기... 1. 중국 불교는 청담에서 비롯되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중국 불교 이야기를 해보자.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후한 시대이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듯이 쿠샨 왕조의 적극적인 확장 정책과 외교정책으로 대승 불교가 각지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에서의 불교는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나라는 가장 전통적인 중국 왕조이다. 중국 민족은 자신들이 이라고 믿고 있으며, 중국 전통 문화의 원류는 에서 기반이 잡혔다고 생각했다. 가장 전통적인 도 한나라 시기에 완성되었다. 한무제가 를 국교화하고, 의 정형틀을 완성시킨 것이다. 불교가 한나라에 전파되었지만, 그것은 외국 철학의 일종일 뿐이었다. 지배층이 교양을 쌓기 위해 읽어보는 수준이었을 뿐, 중국 .. 더보기
<고사속 역사여행 8 > 오리무중(五里霧中) - 오리의 안개 속을 헤메다 오리무중(五里霧中) - 오리의 안개 속을 헤메다 1. 고사의 시대 고사의 시대 : 후한시대 순제기 / 출처 : 후한서, 장해전 오리무중은 후한 말엽에 있었던 장해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5리의 안개 속에 숨어 버리다는 뜻으로, 어디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을 때 쓰는 말이죠. 후한시대 말엽은 외척(왕의 외가 친척)과 환관들이 왕을 무시하고 세력을 다투는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의 혼란기 이후 삼국시대로 넘어가죠. 당시, 외척과 환관들의 횡포로 지방에서 토지를 가지고 있던 토지 귀족(호족)들이 각지에 들고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원소, 조조, 손권 등도 사실은 지방 호족들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럼 고사를 한 번 볼까요? 2. 오리무중의 유래 후한 시대는 자고 일어나면 왕이 바뀐다고 할.. 더보기
<고사속역사여행 2> 등용문이란 단어의 어원은? 등용문이란 단어의 어원은? 1. 청류파의 이응과 등용문 중국 후한 시대 밀가인 환제라는 왕 때의 일입니다. 발호 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횡포한 외척 양기가 죽음을 당하자, 이를 대신하여 단초 등 환관들이 정치를 마음대로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부 관료들은 나쁜 환관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자신들을 깨끗한 관료군이라는 뜻의 라고 부르면서, 환관들을 더러운 무리라는 뜻의 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당시 황제의 신임을 얻으면서 세력을 잡은 환관들은 자신들과 대립하는 관료들을 탄압하고 죽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중국사에서는 라고 합니다. 이 항쟁의 중심이 된 사람으로서 청류파 관료 중의 하나인 이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응은 여러 군인직을 거치면서 이름을 남겼지만, 환관들을 욕하였기 때문에 감옥에 투옥되기도 .. 더보기
한토막 역사 5화. 대한제국이 <광무>를 연호로 정한 이유는? 대한 제국을 반포하는 고종의 조서와 광무의 의미 - 대한 제국의 반포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 더보기
남북조의 귀족 2 - 귀족사회로의 전환되다 남북조의 귀족 2 - 귀족사회로의 전환되다 1. 한대 호족은 를 원칙으로 하였다 원래 호족은 지방에서 대토지와 무력을 가진 세력을 뜻한다는 것을 지난 포스트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이 호족들은 전한시대에는 속에서 대두되는 향촌 세력으로서 객, 문생, 고리, 부곡 등과 연결되었고, 노비를 통해 생산력을 확보한 계층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중앙관계에 진출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전한 시대 외척과 환관의 싸움이 치열하였고, 이들은 지방에서 묵묵히 세력을 키우고 있었죠. 이들은 후한 광무제 정권 이후에 크게 대두합니다. 후한 정권 자체가 호족연합정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제 을 붕괴시키고, 향촌 사회의 지배자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향거리선제를 통하여 호족의 추천으로 지방 사회를 장악해 나갑니다. 보통.. 더보기
남북조의 귀족 1 - 호족의 성립과정과 호족의 개념 중국사에서 호족의 개념과 성립 배경 이번 장에서는 호족이란 무엇이며, 이들이 어떻게 등장하였고, 어떻게 발전해나가는지, 후한 말기부터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다뤄보겠습니다. 이라는 개념은 동아시아사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개념이나, 한국, 일본에서는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중국사에서 자세히 다루는 이유는 이 짧은 개념의 배경을 좀 더 상세히 알기 위함입니다. 1. 토지를 가진 자들이 사회세력화 하다 한 무제가 강력한 경제 통제책을 사용하여, 국가 재정과 황실 재정을 늘려나가자, 대상인들은 그들이 가진 부를 로 돌려 버리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가 곧 재산이라는 인식이 늘어나서, 대토지를 가진 자들이 사회전반에 확산되었습니다. 실제 한무제기에는 장건의 서방 실크로드 개통,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 오.. 더보기
중국사 39 - 후한의 건국과 멸망에 대한 이야기 중국사 39 - 후한의 건국과 멸망에 대한 이야기 이번 장에서는 후한시대의 건국의 의미와 멸망까지의 역사를 한번 다루어보겠습니다. 후한은 기원 후 25년에서 220년까지의 왕조입니다. 1. 호족연합정권의 성립 왕망의 신이 지나친 국가통제적 정책을 실시하면서, 사회 전반의 모든 세력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호족들은 토지에 대한 규제 정책이 싫었고, 대상인들은 상공업 규제정책에 불만을 가졌으며, 농민들은 새로운 제도가 오히려 사회 불안을 부추기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왕망이 죽을 무렵 시작된 전국 각지에서의 농민 봉기는 수습이 안될 지경이었습니다. 특히 반왕복한(왕망을 죽이고 한을 부활하자)는 구호를 위친 적미의 난(붉은 눈썹의 난)은 중국 각지에 번지고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계속 이야기 했지만, .. 더보기
중국사 이야기 38 - 왕망의 신(AD. 8~23)도 역사적 의의가 큰 왕조였다. 중국사 이야기 38 - 왕망의 신(AD. 8~23) 이번 장에서는 짧지만 역사적 의의가 꽤 있는 왕망의 신나라에 대한 중요 개념들을 짧게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1. 신 건국의 배경 왕망은 외척출신입니다. 신이 건국된 배경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한나라의 내조와 외조가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투쟁하던 외척과 환관 세력의 다툼이 곧 신의 건국 배경입니다. 왕망은 이 싸움에서 환관을 몰아내고 외척으로서 새로운 나라인 신을 건국한 것이지요. 자세히 볼까요? 왕망의 이복동생인 왕씨가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엔 황후가 되어 버렸죠, 왕망과 그녀의 여동생인 황후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당시 왕인 성제는 황황후의 아들로서 왕망의 사촌이었습니다. 성제는 외척 중 4명을 뽑아 돌아가면서 정치를 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