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고사여행

양상군자(梁上君子) : 대들보 위의 군자

1. 청의가 사라지고, 탁한 자들이 설치니...

때는 후한 말, 삼국지에 원소가 지방 호족으로 등장했던 그 시기의 이야기이다.

당시 중국은 중앙과 지방이 모두 혼란한 시기였다. 중앙에서는 환관이 득세하여 왕권을 농락하고, 대의정치를 외치는 지식인들을 옥에 가두고 있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청의 운동>이라고 하여, 혼탁한 환관들을 모두 죽이고 깨끗한 정치를 외치곤 했지만, 환관들에 의해 제거 당하곤 했다.

지방에서는, 중앙과 별도로 세력을 가진 <호족>들이 등장하였다. 호족들 중에는 환관들을 척결하고 <한나라 왕실>을 지키자는 <청의파>들도 있었다. 반면, 원소나 조조와 같이 자신의 영지와 군사력을 통해 한나라 왕실에 무력을 보여줌으로서 세를 늘리려는 세력도 있었다.

세상이 흉악하니, 농민들은 살기가 힘들었다.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었고, 전쟁이 나면 그나마 땅마저 황폐해질 뿐이었다. 화적이나 도적이란, 원래 <먹고 살기 힘든 농민> 들이 변심한 것이다. 즉, 도둑은 국가의 책임이지 않겠는가?

2. 양상군자(梁上君子) : 대들보 위의 군자

궁중에 환관들이 설쳐대고, 한나라는 점점 망해가고 있었다. 유학을 받드는 지식인들은 환관들에게 잡혀가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태구현의 <현령> 진식이라는 사람도, <청류파>들을 잡아죽이는 사건에 연루되어 잡혀갔다. 시절이 수상하니, 도망을 치면 되었지만, <내가 도망가면 나의 백성들은 누구를 기대어 살란 말인가?> 라고 말하며 기꺼이 잡혀간 사람이다. <양상군자>라는 고사 성어는 바로 이 진식에게서 비롯되었다.

진식이 다스리는 <태구현> 역시, 흉년과 전염병, 전쟁으로 백성들의 삶이 힘든 상황이었다. 진식이 어느 날 책을 읽고 있는데, 한 사나이가 몰래 그 방에 들어왔다가 슬그머니 대들보 위로 올라가서 숨었다.

진식은 도둑이 든 것을 알았지만, 그를 붙잡지 않고 모르는 척 했다. 그리고, 아들과 손주들을 불러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무릇 사람이라는 존재는 스스로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 나쁜 사람들도 원래 본성이 그런 것이 아니다. 습관이 잘못되어 반복되면 자신도 모르게 옳지 못한 짓을 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지금 대들보(양상) 위에 있는 군자도 그런 사람일 것이다.

진식의 말을 듣고 있던 도둑은 밑으로 뛰어내렸다. 상황을 파악한 도둑은 방바닥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뒤 벌을 받으려고 하였다. 진식은 이렇게 말해주었다.

자네의 모습과 얼굴을 보니 자네가 악인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는군. 아마도 가난이 너무 심해서 견디기 힘들었고, 그래서 이런 짓을 한 것이겠지.

그리고는 비단 2필을 주어 돌려보냈다. 그 일이 알려진 후, 태구현에서는 더 이상 도둑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3. 양상군자는 비꼬는 말이 되어....

진식의 일화는 후한서 <진식전>에 나온다.

원래, 진식전에 나오는 <양상군자>는 <가난함에 어쩔 수 없이 지붕위에 떠밀려 올라간 도둑>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뜻은 점차 바뀌게 된다.

후대의 유학자들은, 비열하게 남의 이목을 숨기면서 지붕위로 올라간 사람을 <양상군자>의 뜻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진식은 <군자>라는 말을 가난한 이들을 배려하는 뜻으로 사용했지만, 후대인들은 <군자>라는 가면을 쓴 도둑놈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한 것이다. 또, 대들보 위에 몰래 오르는 동물을 <쥐>라고 생각해서, <쥐새끼 같은 놈>을 뜻하는 것으로 와전되어 오늘 날에 사용되기도 한다.

후한 말에 살았던 진식은 <도둑>이란, 국가가 백성을 지켜주지 못해서 백성이 국가를 <배신>한 존재로 생각했을 것이다. <가난>은 본인의 죄가 아니라, 혼란한 <국가>가 낳은 것이다.

21c 대한민국... 지금의 정부는 실업도 해결하지 못하고, 민주주의를 지켜내지도 못하고 있으며, 북한과의 대립각만 세우려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고통을 국민들에게 떠 넘기면서도, 국민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것마저 탄압하고, 심지어 <촛불>하나 들고 거리로 나오는 것 마저 두려워하고 있다.

진식은, 후한 말 <하진> 대장군이 높은 벼슬을 줄 터이니 중앙 정치에 나오라고 있지만, 자신의 마을을 지키며 묵묵히 살다가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국가의 지도자도 아니였고, 유명세를 탄 인물도 아니였지만, 그가 죽을 때 나라 안에서 그를 추모하고 제사 지내기를 희망했던 사람이 3만이 넘었다고 한다.

서구에서 예수가 태어날 무렵 활약했던 옛 관리가 가졌던 인식을, 21세기의 현 정부 지도자들은 생각지 못하는 것일까? 진정 존경받는 인물은 어떤 인물인가라는 사실을 과거에서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동일 조건 변경 허락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6화. 격의 불교 이야기...

1. 중국 불교는 청담에서 비롯되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중국 불교 이야기를 해보자. 중국에 불교가 처음 전파된 것은 후한 시대이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듯이 쿠샨 왕조의 적극적인 확장 정책과 외교정책으로 대승 불교가 각지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중국 한나라에서의 불교는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나라는 가장 전통적인 중국 왕조이다. 중국 민족은 자신들이 <한족>이라고 믿고 있으며, 중국 전통 문화의 원류는 <한나라>에서 기반이 잡혔다고 생각했다. 가장 전통적인 <유학>도 한나라 시기에 완성되었다. 한무제가 <유교>를 국교화하고, <한자>의 정형틀을 완성시킨 것이다.

불교가 한나라에 전파되었지만, 그것은 외국 철학의 일종일 뿐이었다. 지배층이 교양을 쌓기 위해 읽어보는 수준이었을 뿐, 중국 지식인들은 관리 임용을 위해 <유학>을 익혔다.

그럼, 불교가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부터일까?

후한이 멸망할 무렵부터이다. 중국 후한시대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나고, 원소, 조조 등 호족세력들이 판치는 무법천하였다. 백성들은 길고 긴 전쟁의 시대로 막 들어선 것이다.

위, 촉, 오의 삼국시대부터 남북조 시대의 분열까지 길고 긴 분열의 시대는 시작되었다.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시기가 되기에 윤리적인 측면이 강한 <유학>은 왕따당하기 시작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진남북조 시대의 중국 국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위진남북조 시대의 국가 먹이사슬>

혼란한 시기에 사람들이 찾는 종교는 <내세>라던가 <자연>을 강조하는 종교였다. 사람들은 유학이 아닌, 도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한나라가 망한 뒤, 실권을 잡은 것은 삼국 중 조조의 <위>나라였다. 위 나라는 강력한 법치주의에 의해 국가 통일을 이루려고 했다. 하지만, 정치가가 아닌 일반 학자, 사상가들은 <도교>에서 혼란의 원인을 찾으려고 했다.

당시 도교는 혼란의 원인을 <인간의 욕심>으로 보았다. 서로 정권을 잡으려고 하는 탐욕자들이 싸우고 죽이는 탓에 백성들만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 않는가?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무엇이란 말인가?

위나라의 학자들은 도가사상의 원리인 <자연으로 돌아가자>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하였다. 이렇게 노자, 장자 등의 철학에서 현실의 문제점을 발견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을 <현학>이라고 한다.

<현학>은 노자와 장자의 철학에서 우주의 근본 원리를 규명하려는 학문이다. 우주의 근본 원리인 <도>를 <현>이라고도 부르기 때문에 현학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현학은 하안(190-249), 왕필(226-249) 등에 의해 전개되었다.

하안과 왕필 등의 사상가들은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문제점이 무언가를 따지려고 했는데, 이런 대화를 <청담>이라고 한다. <청담>이란 말 그대로 <깨끗한 세계의 담론>이란 뜻이다. 위나라에서 시작된 이들의 <대화>를 역사에서는 <정음시대의 현학>이라고 부른다. 하안은 노장사상으로 논어를 해석하였고, 왕필은 노장사상으로 주역을 해석하였다고 한다.

그럼 이들의 대화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간단하다. 도학에 나오는 사상들이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따져보는 것이었다. 도학의 문구들은 너무나 심오하다. 노자의 <도덕경>은 서양 학자들도 인정하는 동양 최고의 학술서이다. 노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무위자연>, 국가는 작을수록 좋다라는 <소국과민>, 가장 행복한 삶은 자연에서의 삶이라는 <자연합치> 등을 주장하였다.

노자의 사상에 맞춰서 모든 사상을 재해석하는 것이 <현학>이다. 유교사상은 현실사회의 직접적인 문제와 인간 윤리를 주로 다룬다. 그러나 후한이 망한 뒤의 세상은 무법 천지이다. 인간 윤리는 이제 <전쟁없는 사회>라는 틀에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청담 사상가들은 현실의 윤리보다는 <전쟁>의 참혹함, 사후세계는 어떤 것일까라는 내세에 대한 상상, 삶과 죽음과 인간관계에 대한 탐구에 더 집중한다.

그런데, 생각하면 할수록 답은 한가지였다. 대화를 나누던 청담 사상가들은 <전쟁>에 골몰하는 국가를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점점 현실과 떨어져 중국 전통 윤리를 비관하기 시작한다. 자, 그럼 청담 사상가들은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 노자의 세계로 가기 위한 방편으로 어떤 철학을 찾았을까?

불교에 그 답이 있었다. 불교는 만민에 대한 구원, 내세에 대한 윤회와 열반 사상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다는 <공> 사상을 강조하여 <허무주의>를 보여주면서도,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 혼란한 시기에 딱 맞다. 얼마나 맞춤형 철학인가?

2.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해 드립니다.

혼란한 위진남북조 시기의 중국인들은 지긋지긋한 전쟁에 질려있었다. 삼국시대, 위의 조조, 서진시대, 5호 16국의 이민족 시대, 남북조의 분열시대.... 길고 긴 전쟁의 역사는 훗날 <수>나라가 통일국가를 세울 무렵에야 끝나는 것이다.

이 불안한 시기에 불교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인간은 죽은 뒤 자신의 업보에 의해 <윤회>를 하게 된다. 지금 현상에서의 고난은 전생에서의 죄를 씻는 과정이다. 그 업이 끝나고 현생에 덕을 쌓으면 내세에는 행복한 날이 기다리고 있다. (업설) 지금 전쟁을 일으킨 자들은 많은 죄를 지은 것이고 생이 끝나면 죄를 받을 것이다.(인과응보론) 절망에 빠진 백성들에게 얼마나 딱 맞춤인 철학인가?

그렇다고 지배층과 국가가 불교를 탄압한 것도 아니다. 한나라가 망하고, 조조 일가의 시대가 끝난 뒤 중국은 5호 16국이라는 이민족 사회를 경험하게 된다. 이민족의 왕들은 <유학>에 관심조차 없었다. 오히려 중국인들에게는 생소한 <불교>가 이민족 취향에는 딱 맞았다.

이민족 왕들은 불교를 주술적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흉년이 들면 승려가 주술을 펼쳐주었다. 질병과 재난은 불제자들의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다고 믿었다. 큰 전쟁을 앞두고 학식이 높은 승려들에게 전쟁의 승패를 묻기도 하였다. 또, 인도의 아쇼카 왕이 했던 것처럼 왕 자체가 불법을 수호하는 <불교의 수호신>임을 자청하였다. 왕이 곧 불교의 신이라는 이념은 불교를 믿는 백성들을 한 마음으로 묶어줄 수 있었다.

왜 불교가 민간신앙이나 주술신앙, 국가 호국 불교로 전락하게 되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혼란한 이 당시에는 불법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불교는 왕권 강화를 위한 <사상>으로 충분했다. 혼란기의 각국 지배자는 큰 사찰과 어마어마한 불상, 귀따가운 큰 법회를 열어가면서 왕권이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였다.

어렵고 험난한 시기에 불교의 원래 뜻이 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종교는 현실에 도움만 주면 되지 않는가?

3. 대충 때려맞춰서 이해한 격의 불교

초기 청담 사상가인 왕필은 유교, 도교, 불교는 결국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왕필은 도교의 기준에 맞춰 다른 종교의 특징을 규정하였다. 노자와 장자가 도가 사상을 창시하면서 우주의 근본 원리와 인간의 행동 가짐을 <도>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공자 역시 큰 <도>를 깨우친 사람이고, 석가모니도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성인들이 결국 <도>를 깨달았으니, 모든 믿음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왕필이 주장한 <유,불,도교의 3교 일치설>은 지둔(314-366)에 의해 구체화 되었다.

지둔은 불교 스님이다. 왕필이 도교 기준으로 종교를 통합했다면, 지둔은 불교 사상을 중국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였다.

예를 들어보자. 중국 전통 사상은 <리기론>이다. <리>란, 우주의 근본 질서나 계절을 의미하는 불변의 진리를 말한다. 지둔은 이렇게 말한다.

<리>가 절대불변의 원리인 것처럼 불가에서 말하는 반야(지혜>는 영원 불변의 <깨달음>이다. 즉, <리>는 불가의 <절대적 깨달음>을 말한다.

다른 것도 대입해볼까?

불가의 <공>사상은 <만물은 돌고 돌아 그 형체를 알수 없다>는 뜻이다. 보이는 것은 곧 사라지고, 사라진 것은 다시 생겨난다.(색즉시공 공즉시색) 이 심오한 원리를 이해하기 쉽게 도교의 <무>로 설명한다. 사라진 것이니 아무것도 없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부처가 <열반>한다는 것은 도교의 <무위>로 해석한다.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보살들을 도교의 <도>로 해석한다. 불가의 <진리>는 도교의 <근본>으로 해석해 버린다.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얼마나 간편한 해석법인가?

이러한 불교 이해 방식을 격의 불교 방식이라고 한다. 격의란, 불교의 난해한 개념들을 중국 전통 사상에 이미 존재하는 비슷한 개념들을 인용하여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쉽게 이해된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불교의 원래 뜻을 왜곡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방법을 중국 곳곳에 알리고 다닌 이는 축법아였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불교의 승려들은 축법아의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격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을 알 수 없기에, 지배층들이 마음대로 해석하여 불교를 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든다. 또, 일반 백성들은 토착신앙과 신비주의를 불교와 구분하지도 못하고 멋대로 불교를 이해한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것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5-6세기 남북조 시대의 대립상황>

4. 불도징을 초빙하다.

불도징은 위진남북조의 혼란이 시작된 초기 인물이었다. 그는 서북인도와 관련된 구자국이라는 곳의 은거하는 불학자였다. 그가 70여살이 되었을 때, 중국의 백성들이 <위진시대>의 혼란기에서 희망없이 산다는 말을 듣고, 제자들과 중국으로 건너왔다. 드디어 불교가 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정통 <인도산 스님>이 중국을 방문한 것이다.

그런데, 불도징은 <불교의 참뜻>을 전파하지 못하였다. 당시는 혼란중에 혼란기인 5호 16국 시대였다. 5개의 이민족이 16개 국가를 세워 중국 대륙은 어딜 가나 전쟁 뿐이었다. 불도징은 후조 왕국의 석륵, 석호 부자에게 불법을 설파하였는데, 석륵은 불교를 아주 우습게 보았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3-4세기 : 5호 16국 시대의 후조 왕국 위치>

사용자 삽입 이미지

<5호 국가들의 민족 분포와 국가 창업자>

불도징은 불교 교리에 대한 철학 강의를 했지만, 석륵은 시큰둥했다. 결국 불도징은 교리로서 불법을 보여주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겼다. 불도징은 주문을 외워서 항아리에서 연꽃이 나오게 하는 등 신비로운 주술로 석륵을 감동시켰다. 결국 이 당시 불교 수준은, 뭔가 위대한 부처의 힘을 보여줘야 비로소 믿을까 말까 한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불도징은 큰 뜻을 품고 중국 대륙에 왔지만, 단 한권의 책도 쓰지 못하였다. 이민족의 왕들이 원하는 건 신비로운 주술과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 뿐이었다. 스님과 주술가, 점쟁이를 구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나마 석륵의 아들, 석호는 이 신비로운 스님을 존경하였다. 불도징은 석호에게 <국왕>이 해야 할 일을 설교하면서 중국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였다.

1. 살행을 금지하고 죄없는 사람을 살해하지 말 것
   2. 포학한 행동을 피하고 자비심을 가지고 보시할 것
   3. 부처를 섬기는 데 있어 깨끗한 마음과 자긍심을 가지고 해야 할 것

불도징은, 인도에서 건너온 선구자라는 것 외에 크게 남긴 것이 없다. 중국 대륙에 자리잡은 이민족들은 불법이 뭔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중국 불교사를 바꿀 만한 거목들을 제자로 키웠다. 그들의 이름은 도안, 혜원 이였다.

중국 대륙에서는 부처의 참뜻이 제대로 전해질 수 있을까?

다음장에서는 도안부터 시작되는 <불교 알리기>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 해 보겠다. 중국 스님들이 제대로 된 불교를 알리고자 했던 노력은 수백년 동안 계속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참고할 만한 책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중국여행지 50
카테고리 여행/기행
지은이 조창완 (랜덤하우스코리아, 2008년)
상세보기

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상세보기

중국불교철학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팡리티엔 (서울불교대학원대학교출판부, 2006년)
상세보기

부처님 나라(1 인도 중국편)(윤승운의 불교만화)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윤승운 (동쪽나라, 2003년)
상세보기

중국의 종교와 사상(보충교재)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편집부 (예지각, 2008년)
상세보기

불교사상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양훼이난 (정우서적, 2008년)
상세보기

하룻밤에 읽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소운 (랜덤하우스코리아, 2004년)
상세보기

한 권으로 읽는 불교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우더신 (산책자, 2008년)
상세보기

거침없이 빠져드는 역사 이야기: 불교 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황푸차이 (시그마북스, 2008년)
상세보기

2500년 간의 고독과 자유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강성률 (형설, 2005년)
상세보기

영원한 자유:성철스님법어집1집6권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성철 (장경각, 1988년)
상세보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고사속 역사여행 8 > 오리무중(五里霧中) - 오리의 안개 속을 헤메다

1. 고사의 시대

고사의 시대 : 후한시대 순제기    / 출처 : 후한서, 장해전

오리무중은 후한 말엽에 있었던 장해의 고사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5리의 안개 속에 숨어 버리다는 뜻으로, 어디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을 때 쓰는 말이죠. 후한시대 말엽은 외척(왕의 외가 친척)과 환관들이 왕을 무시하고 세력을 다투는 시대였습니다. 이 시대의 혼란기 이후 삼국시대로 넘어가죠. 당시, 외척과 환관들의 횡포로 지방에서 토지를 가지고 있던 토지 귀족(호족)들이 각지에 들고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원소, 조조, 손권 등도 사실은 지방 호족들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럼 고사를 한 번 볼까요?

2. 오리무중의 유래

후한 시대는 자고 일어나면 왕이 바뀐다고 할 정도로 황제가 자주 바뀌던 시대였습니다. 그것도, 외척과 환관들이 서로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린 황제를 왕으로 옹립하던 시기였죠.

당시, 화제라는 왕이 있었지만, 일찍 죽었고, 상제라는 왕도 즉위하자마자 1년도 못되어 죽었습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계속 어린 왕이 즉위하고, 정치의 실권이 계속 바뀌는 시기였습니다. 다음 왕은 안제였는데, 정치 실권은 죽은 전 황제, 화제의 부인인 등태후와 그의 오빠 등줄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힘이 없었죠.

당시, 화제-상제-안제로 이어지는 왕실에서 가장 명망있는 신하는 시중인 장패였습니다. 그러나, 장패는 황제가 자주 바뀌고 나라에 멸망의 기운이 돌자 정치적 실권을 가진 자들이 아무리 우대하도 시큰둥하더니, 결국 권력을 멀리하고 떠나 늙어 죽었습니다.

장패에서는 <장해>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장해도 학식이 깊고, 친구들이 많아서 명망있는 인사였습니다. 장해의 제자는 백명이 넘었고, 권력을 쥔 자들도 장해를 초빙하려고 서로 다투어 노력하였죠.

장해는 죽고 죽이는 권력이 싫어서 지방에 숨어 은거해 버렸지만, 그럴수록 권력자들은 장해를 초빙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답니다. 특히, 장해가 권력을 마다하고 학문에 열중한다는 소문이 돌자, 더욱 장해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조정에서는 장해를 찾아 금은보화를 들고 찾아오곤 했습니다.

왕은 <장해는 청렴결백하고, 그 절개가 백이, 숙제와 같구나>라면서 장해를 칭찬하였습니다. 하지만, 왕이 초빙하여도 장해는 아프다는 핑계로 계속 조정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장해를 초빙하려고 해도 장해는 만나주지를 않았는데, 장해를 만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장해가 도가에서 비기로 전해지는 <도술>을 익혔기 때문입니다. 태왕사신기에 보면 현무의 사신이 안개를 일으켜 시야를 가리던데 그런 도술인가 봅니다.

장해가 쓰는 도술은 안개로 자신을 찾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안개가 5리에 이른다고 하여 <5리무>라고 소문이 났죠. 당시 유명한 도술가가 자신은 3리에 안개를 만드는 <3리무>를 할 줄 안다며 장해를 찾아와 도술울 배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장해는 5리무를 사방에 뿌려 이 도술가마저 자신을 찾아오지 못하게 하였답니다.

장해가 은거하는 동안에도 여러 황제가 바뀌었습니다. 은거하고 있는 장해도 계속 바뀌는 중앙 정치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는지 반역죄로 2년간 옥살이를 하였습니다. 그가 옥살이 동안 한 일은 유명한 저서에 각주를 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옥살이가 끝나고, 황제들이 장해를 계속 초빙하였어도 그는 계속 은거하였습니다. 도술을 연마하고, 공부를 하다가 결국 70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합니다.

오리무중이란, 이 고사에서 유래합니다. 그 뜻은,

1. 5리에 걸친 안개 속에 들어서게 되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찾을 사람을 찾을 수도 없게 된다. 동서남북의 방향 감각을 잃었다는 뜻.

2. 머리 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하얗게 되어 무엇을 해야 할지 계획도 세워지지 않고, 마음의 방향을 집지 못하고 있음.

이런 뜻으로 사용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5리의 안개를 만들었다는 도술가 후한 말기 도술가 장해... 장해가 죽은 뒤, 중국에서는 장각 등 장씨성을 가진 자들이 도술을 부려 태평도를 일으키고 후한을 멸망시키는 운동을 하게 됩니다. 그 유명한 황건적의 난이죠. 기록에는 자세하지 않지만 후한 말기의 도술가들은 <장>씨 성을 가진 자들이 많은가봅니다.


관련글 모음 :
2007/08/14 - [초중고방/고사 속 역사여행] - <고사속역사여행 2> 등용문이란 단어의 어원은?
2007/03/18 - [동양사정리/중국사이야기] - 한나라 : 유교를 국교화하여 체계를 정립하다
2007/03/18 - [동양사정리/중국사이야기] - 중국사 이야기 41 - 한무제의 국가재정 장악 정책
2007/03/16 - [동양사정리/중국사이야기] - 중국사 40 - 황건적의 난과 후한의 멸망
2007/03/15 - [동양사정리/중국사이야기] - 중국사 이야기 37 - 한나라 시대의 제도사 : 중국엔 자사? 조선엔 관찰사!
2007/03/08 - [한국사사료모음/중국측기록] -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후한서 동이전 왜 편
2007/03/08 - [한국사사료모음/중국측기록] - 중국사에 나오는 한국사 자료들 - 후한서 동이전 동옥저,북옥저,예 편
2007/03/08 - [동양사사료모음/동양사원문사료] - (중국사사료) 후한서 전문 원본
2007/01/13 - [한국사사료모음/중국측기록] - 후한서
2007/01/13 - [한국사사료모음/1.초기국가사료] - 후한서에 나오는 삼한 기록
2007/03/16 - [동양사정리/중국사이야기] - 중국사 39 - 후한의 건국과 멸망에 대한 이야기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고사속역사여행 2> 등용문이란 단어의 어원은?

1. 청류파의 이응과 등용문

중국 후한 시대 밀가인 환제라는 왕 때의 일입니다.

발호 장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횡포한 외척 양기가 죽음을 당하자, 이를 대신하여 단초 등 환관들이 정치를 마음대로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부 관료들은 나쁜 환관들에게 대항하기 위해 자신들을 깨끗한 관료군이라는 뜻의 <청류>라고 부르면서, 환관들을 더러운 무리라는 뜻의 <탁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당시 황제의 신임을 얻으면서 세력을 잡은 환관들은 자신들과 대립하는 관료들을 탄압하고 죽이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중국사에서는 <당고의 화>라고 합니다.

이 항쟁의 중심이 된 사람으로서 청류파 관료 중의 하나인 이응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응은 여러 군인직을 거치면서 이름을 남겼지만, 환관들을 욕하였기 때문에 감옥에 투옥되기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응은 여러 관리들에게는 좋은 인물로 기억되었고 그 벼슬이 장군직인 사례교위까지 올라간 사람입니다.

환관들은 득세하여 중국 한나라는 점점 망해가고, 지방에서는 환관들에게 대항하는 호족 세력들이 곳곳에서 일어나는 분위기였습니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시대인 조조, 유비, 손권이 나오는 삼국시대가 이 후한 바로 다음 시대이죠.

당시 궁전에서는 환관들이 무서워 모두 벌벌 기고 있었지만, 이응은 절대 환관들에게 아부하지 않고 자신의 명성을 지켜갔습니다. 지방의 호족 청년들과 젊은 관료들은 이응을 본받으려고 하였고, 천하의 모범은 이응이라고 칭찬하였습니다.

새로 관료가 될 지식인들은 이응과 교류하고, 이응의 추천을 받는 것을 가장 큰 영광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응의 추천을 받아 관리가 되는 것은 깨끗함을 상징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응의 추천을 받는 것은 관리가 되는 지름길이라 하여 이것을 <등용문>이라고 부릅니다.

2. 용문을 오른다는 뜻의 등용문

원래 용문이란, 황하 상류에 있는 계곡의 이름입니다. 이 계곡은 너무 물살이 빨라서 큰 고기도 그 곳을 오르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기만 하면 그 물고기는 곧 <용>이 된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즉, 용이 되어 오르기 위한 입구를 <등용문>이라고 한 것이죠.

등용문이란, 누구나 이루고 싶어하지만 이루기 너무 어려운 것을 말합니다. 당시 환관파에 의해 첨령한 관리들은 관직에 오르기도 힘들었고, 쟁쟁한 선배 관료들과 경쟁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후 출세의 첫걸음을 <등용문>이라는 말로 대신 사용하였습니다. 이응의 문하에 모여 든 샛병아리 지식인들이 만든 말이지만, 이 말은 훗날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입신양명을 이루려는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말이 되었습니다.

등용문의 반대말로 <점액>이란 말이 쓰입니다. 이것은 용문을 오르려는 물고기들이 물살을 이기지 못하고 바위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쳐 다시 하류로 떨어져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즉, 경쟁에서 진 패배자와 낙오자에게 쓰는 말입니다.

- 후한서, 이응전에서 -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대한 제국을 반포하는 고종의 조서와 광무의 의미

- 대한 제국의 반포

“봉천 승운 황제(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조령(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단군(檀君)과 기자(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고려(高麗) 때에 이르러서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삼한(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태조(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말갈(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탐라국(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공납(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왕업(王業)을 세웠으니, 예악(禮樂)과 법도는 당요(唐堯)와 우순(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상제(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백악산(白嶽山)의 남쪽에서 천지(天地)에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정하고 이해를 광무(光武) 원년(元年)으로 삼으며,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신위판(神位版)을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으로 고쳐 썼다. 왕후(王后) 민씨(閔氏)를 황후(皇后)로 책봉하고 왕태자(王太子)를 황태자(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리하여 밝은 명을 높이 받들어 큰 의식을 비로소 거행하였다. 이에 역대의 고사(故事)를 상고하여 특별히 대사령(大赦令)을 행하노라.

1. 조정에서 높은 벼슬과 후한 녹봉으로 신하들을 대우하는 것은 원래 그들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나라의 안위(安危)는 전적으로 관리들이 탐오한가 청렴한가 하는 데 달려 있다. 관리들이 간사하고 탐욕스러우면 뇌물이 판을 치게 되어 못나고 간악한 자들이 요행으로 등용되고 공로가 없는 자들이 마구 상을 받으며 이서(吏胥)들이 문건을 농간하므로 백성들이 해를 입는 등, 정사가 문란해지는 것이 실로 여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금년 10월 12일 이후부터 서울에 있는 크고 작은 아문(衙門)과 지방의 관찰사(觀察使), 부윤(府尹), 군수(郡守), 진위대(鎭衛隊) 장관들과 이서, 조역(皂役)으로서 단지 뇌물만을 탐내어 법을 어기고 백성들을 착취하는 자들은 법에 비추어 죄를 다스리되 대사령 이전의 것은 제외한다.

1. 조관(朝官)로서 나이 80세 이상과 사서인(士庶人)으로서 나이가 90세 이상인 사람들은 각각 한 자급씩 가자(加資)하라.

1. 지방에 나가 주둔하고 있는 군사들은 수고가 많은 만큼 그들의 집안에 대해서는 해부(該府)에서 후하게 돌봐 주라.

1. 재주를 갖고서도 벼슬하지 않고 숨어 사는 선비로서 현재 쓸 만한 사람과 무예와 지략이 출중하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은 대체로 그들이 있는 곳의 해당 관찰사가 사실대로 추천하고 해부(該部)에서 다시 조사해 보고 불러다가 적절히 뽑아 쓰라.

1. 은혜로운 조서(詔書)에 ‘묵은 땅은 세금을 면제해 주고 장마와 가뭄의 피해를 입은 곳은 세금을 면제해주고 백성에게 부과된 일정 세금을 면제해 준다.’는 내용이 있으니, 다시는 시일을 끄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간혹 이미 다 바쳤는데도 지방관이 별개의 항목으로 지출해서 쓰거나 혹은 개인적으로 착복함으로써 백성들이 세금을 내지 않는다는 누명을 쓰게 된 것은 모두 면제하라.

1. 각 처의 주인 없는 묵은 땅은 해당 지방관이 살펴보고 내용을 자세히 밝혀서 보고하면 관찰사(觀察使)가 다시 살펴보고 판단한 다음에 허위 날조한 것이 없으면 즉시 문서를 주어 돈과 곡식을 면제하여 주며, 그 땅은 백성들을 불러다가 개간하도록 하라.

1. 문관(文官), 음관(蔭官), 무관(武官)으로서 조관은 7품 이하에게 각각 한 품계씩 올려 주라.

1. 사람의 생명은 더없이 중하므로 역대로 모두 죄수를 세 번 심리하고 아뢰는 조목이 있었다. 죄보다 가볍게 잘못 처리한 형관(刑官)의 죄는 죄보다 무겁게 잘못 판결한 경우보다 가볍다. 대체로 형벌을 다루는 관리들은 제 의견만을 고집하지 말고 뇌물을 받거나 청탁을 따르지 말며 범죄의 실정을 캐내는 데 힘쓰라.

1. 모반(謀叛), 강도, 살인, 간통, 절도 등 여섯 가지 범죄를 제외하고는 각각 한 등급을 감하라.

1. 각도(各道)의 백성들 가운데 외롭고 가난하며 병든 사람들로서 돌보아 줄 사람이 없는 사람들은 해당 지방관이 유의하여 돌보아 주어 살 곳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

1. 큰 산과 큰 강의 묘우(廟宇) 가운데서 무너진 곳은 해당 지방관이 비용을 계산해서 해부(該部)에 보고하고 제때에 수리하며 공경하는 도리를 밝히라.

1. 각 도의 도로와 교량 가운데 파괴된 것이 있으면 해당 지방관이 잘 조사하여 수리함으로써 나그네들이 다니는 데 편리하게 하라.

1. 조서 안의 각 조목들에 대하여 해당 지방의 각 관리들은 요점을 갖추어서 마음을 다하여 행함으로써 되도록 은택이 백성들에게 미치도록 힘써서 백성들을 가엾게 생각하는 짐의 지극한 뜻을 저버리지 말라. 만약 낡은 틀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한갓 겉치레로 책임이나 때우고 있는 데도 해당 관찰사가 잘 살펴보지도 않고 되는 대로 보고한다면 내부(內部)에서 일체 규찰하여 엄히 처리하라.

아! 애당초 임금이 된 것은 하늘의 도움을 받은 것이고, 황제의 칭호를 선포한 것은 온 나라 백성들의 마음에 부합한 것이다. 낡은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도모하며 교화를 시행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하려고 하니, 세상에 선포하여 모두 듣고 알게 하라.”

하였다.【홍문관 태학사(弘文館太學士) 김영수(金永壽)가 지었다.】

- 고종 실록, 고종 34년 10월 13일 -

- 광무의 뜻은 무엇일까요?

고종은 일제가 압박하는 구한말,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연호를 광무라 하면서 <광무개혁>을 실시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의미는 <삼한을 계승하여 황제가 나라를 새롭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고조선 - 삼한 - 삼국시대 - 통일신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삼한정통론>을 계승하여 국호를 정한 것이지요.

여기서 뜻하지 않게 미심쩍은 것은 연호인 <광무>입니다. <대한>이야 <삼한의 큰 뜻>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광무는 뭘까요?

사실 고종이 정한 광무란, 후한의 건국자인 <광무제>를 염두에 두고 지은 연호입니다. 광무제는 한무제 때의 전성기였던 <전한>의 부활을 꿈꾸면서 <후한>을 건국하였습니다. 그리고 광무제 역시 한무제와 더불어 한나라의 위대한 제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고종은, 사라져가는 조선의 국운을 보았고, 일제의 침탈로 인해 명성황후가 비참히 죽는 것도 목격하였습니다. 자신도 죽을 위기를 넘겼고 이미 <조선>이라는 근대화되지 못한 국가가 어떤 종말을 맞을 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 스스로 <광무>라는 이름을 쓰게 됨으로서 불가능해 보였던 <전한>의 영광을 다시 재현한 광무제와 같이 한반도의 국운을 되살려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고종의 광무개혁은 그 뜻과는 다르게 <국운의 부활>을 가져오지 못하였습니다. 광무제가 살았던 시기와 고종이 살았던 시기의 사회가 너무 달랐던 탓일까요, 아니면 고종의 능력이 부족해서였을까요? <광무>란 연호는 그저 고종의 개혁 때 사용했던 연호라며 교과서에 1줄 실리는 정도에서 그 의미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남북조의 귀족 2 - 귀족사회로의 전환되다

1. 한대 호족은 <청의>를 원칙으로 하였다

원래 호족은 지방에서 대토지와 무력을 가진 세력을 뜻한다는 것을 지난 포스트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이 호족들은 전한시대에는 <공동체적인 향리조직> 속에서 대두되는 향촌 세력으로서 객, 문생, 고리, 부곡 등과 연결되었고, 노비를 통해 생산력을 확보한 계층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 중앙관계에 진출하기에는 부족했습니다. 전한 시대 외척과 환관의 싸움이 치열하였고, 이들은 지방에서 묵묵히 세력을 키우고 있었죠.

이들은 후한 광무제 정권 이후에 크게 대두합니다. 후한 정권 자체가 호족연합정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제 <공동체적 향리조직>을 붕괴시키고, 향촌 사회의 지배자로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향거리선제를 통하여 호족의 추천으로 지방 사회를 장악해 나갑니다. 보통 호족끼리 추천하여 그들끼리 지방을 해먹는다고 해서 <호족호천>이라고도 합니다. <호족은 향리를 지배한다>는 것이 후한 시대의 전반적 사회분위기였습니다.

그러나, 호족세력이 중앙에 진출하기에는 아직도 한계가 많았습니다. 중앙의 환관, 외척 세력 때문이었죠. 따라서 호족들은 부패한 중앙의 환관세력에 대하여 지방에서 호족 상호간의 유대관계를 통하여 뭉치기 시작합니다. 중앙의 환관들은 이러한 호족의 움직임을 <당파를 만들어 왕실에 대항하려는 반역의 움직임>이라고 규정합니다. 절대 호족들은 붕당을 만들수 없다는 <당인>의 논리가 여기서 나옵니다.

호족들은 이에 대하여 중앙의 환관들이 곧 부패한 <탁류>이고, 자신들의 유대는 유교적 풍속에 의한 아름다운 <청의>라고 주장합니다.

<청의>란, 독자적인 절의를 지켜나가면서 인물평가와 미풍양속을 통하여 정치를 해야 한다는 호족들의 지방 이념을 말합니다. 이 논의에 따라, 향거리선제로 추천받는 사람은 효렴, 청렴한 인물이었습니다. 물론, 그 대상은 호족이었지요.

후한 말기에 가면, 이제 <향촌 공동체적 향리조직>은 원소, 동탁, 유비, 조조 등의 청의파 호족들에 의하여 완전히 소멸됩니다. 호족들은 자신의 군대와 영지를 가지고 독자적으로 삼국시대를 열어갔습니다.

2. 구품중정법이 실시되면서 <청의>가 공론화되다

구품중정법은 삼국시대를 통일한 위나라의 건국자 <조비>가 실시한 제도입니다. 이 제도의 특징은 <청의>를 바탕으로 <호족>을 추천으로 선발하는 제도입니다. 조비는 새로운 국가에 걸맞는 인재 등용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조비는 중앙집권을 위하여 이런 제도를 마련했지만, 실제 운영에 있어서는 <호족>들이 중앙관리로 천거되어 <호족의 귀족화> 현상을 초래합니다.

구품중정법의 내용을 한번 볼까요?

이 제도는 일단 지방 현지사정에 밝은 지방 출신 고관을 <중정관>으로 임명합니다. 이 중정관이 향론(지방 여론)을 살펴서 지방의 청년을 9품으로 분류하여 향품을 매깁니다. 향품은 상, 중, 하 3단계로 나눈 뒤, 각각 상상, 상중, 상하, 중상, 중중, 중하, 하상, 하중, 하하의 9품으로 세분화하였습니다. (그냥 1-9품으로 나누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마의가 실권을 잡은 이후, 서진 시대에는 중앙의 사도가 직접 9품을 매기게 되어, 중앙정부가 9품관인법을 통제하는 시기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 제도의 특징은 호족이 지방의 향리조직 대신 <향론>을 좌우하는 만큼, <호족 자제가 선발되어 고위관직의 독점>이 이루어졌다는 것에 특징이 있습니다.

이 제도로 인하여 이제 위진남북조의 사회는 <가문>을 중시하는 사회로 변질됩니다. 왜냐면, 구품중정법에 의해 관리가 되려면 <추천>이라는 것이 필수가 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추천은 <호족사회의 종족> 추천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즉, 가문을 바탕으로 출세하는 것이므로, 개인보다 가문이 중시되었습니다. 국가는 호족이 추천한 1-9 품의 향품에 대하여 그 관품을 <추천>하는 역할 정도만 하게 됩니다. (보통 3-4품을 낮추어 승인하였다고 합니다. 지방에서 3품으로 추천받은 자는 중앙에서 7-8품 정도로 관품을 주는 식입니다.)

이 제도로 인하여 가문이나 종족이 국가와 일가(또는 개인) 사이에서 매개자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가문 중심으로 변화되어 호족이 중앙에 진출하게 된 변형된 호족를 중국 역사에서 <귀족>이라고 부릅니다.

사회변화

향거리선제

구품증정제

기    반

가를 중심으로 하는 향촌사회

가문, 문벌 중심의 종족사회

관리진출

가에서 국가 관리로 진출

종족의 추천을 얻어야 국가의 관리로 진출

향촌구조

개인의 능력을 바탕으로 하는 향촌사회구조

능력보다 가문, 문벌 등 종족의 배경을 바탕으로 한 호족사회체제

국가역할

국가가 관직을 하사

국가는 호족이 정한 향품에 따라 추천된 호족자제의 관품을 승인

3. 남조정권의 귀족사회

남조에서는 귀족사회가 성립될 때, 북방귀족과 낭방귀족을 차별하였습니다.

동진 정권은 북방에서 내려온 전통 귀족들을 우대하였는데, 특히 먼저 내려온 귀족(조도귀족)이 먼저 특권을 선점하여, 후에 내려온 귀족(만도귀족)보다 우위를 점하였습니다. 북방에서 내려온 귀족들은 중원에서 해왔던 방식으로 대토지 소유, 사병 보유, 종족과 영호, 노비 관계의 확립을 통해 확실하게 남조 지방사회를 장악하였습니다.

따라서 남조의 귀족사회는 먼저 남부지방을 선점한 북래귀족들을 최상으로 하여 위계질서가 잡힌 상하관계가 형성된 사회입니다. 강남 토착귀족들은 이민족 지배에 대한 반항으로, 북방에서 내려온 중화 귀족들을 받아들였지만, 점차 북방귀족들과 사회적, 경제적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북방 귀족들은 중앙에서는 대대로 고관을 배출하였고, 지방에서는 대토지와 종족을 보유한 유력 가문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이러한 영향력 있는 귀족들을 보통 <세족>이라고 합니다.

북방에서 내려온 귀족들은 말 그대로 <귀족적>인 생활을 지향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문이 미미한 자들과는 통혼하지 않았습니다. 또 고관에 진출해도 정사를 돌보기 보다는 <북조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실권을 준 무장세력>들을 감시하는 역할 정도만 했습니다. 그들은 고관이라는 허명만 과시할 뿐, 정사는 하급관리에게 맡기고, 대토지와 종족 보존 및 노비 사역에 노력하였습니다. 따라서 남조의 사회에서는 귀족드이 시문, 예술 등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예술을 천하게 여기지 않고, 귀족적인 것으로 여기였으며 풍류를 즐기는 것이 귀족적인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4. 북조 정권의 귀족사회

북조는 5호 16국 이래 이민족들의 무대였습니다. 따라서 북조 치하에서 중국인 귀족들은 남쪽으로 남하하거나, 관직에 참여하려고 하지 않는 부류들이 많았습니다. 한인 귀족들은 중국인들까리 뭉쳐 전통적 화이사상 체계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들은 같은 성을 <골육>이라고 부르면서, 대가족을 유지하고 문벌을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선비족의 북위 정권은 한화정택을 쓰기 위해 한인 관료들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회유하여 한인호족들을 북위정권의 후원자로 활용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약 한인 귀족들이 북조 왕조를 무시하는 경우에는 가차없는 처벌을 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국사필화사건>입니다. 국사필화사건은 북위에서 자세히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넘어가겠습니다.

5. 귀족 사회가 몰락하기 시작하다.

남북조의 귀족사회가 몰락하게 되는 배경은 남조 시대를 포스팅할 때 자세히 다루었던 <후경의 난>입니다. 하지만, 귀족사회의 몰락은 귀족들 자체 내부의 모순에 기인하는 원인도 있습니다.

후한 대의 <청의>를 바탕으로 한 호족사회의 순결함은 호족들이 대토지를 가지고 중앙에 진출하여 귀족화됨으로서 무너지고 맙니다. 호족들이 귀족화되면서 특유의 효렴, 청렴, 유교적 기풍, 미풍양속이 사라졌으며, 이것은 호족의 지방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호족의 지방 여론을 주도하는 객, 문생, 고리 등의 영호세력과 지방 향리 세력의 여론을 <향당>이라고 하는데, 호족은 참신함을 잃어가면서 이 <향당>을 잃게 됩니다.

특히 남조사회에서는 북방 민족과의 대결을 위해 미천한 무장 출신을 <황제로 옹립>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황제들은 귀족권을 누르기 위하여 여러 정책을 시도합니다. 그 결과 황제권과 귀족권의 다툼이 귀족사회를 붕괴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북위에서는 효문제의 성족분정령 등으로 귀족문벌 등급을 황제가 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또, 중국식 율령제도의 도입으로 문벌귀족들을 국가 관료로 편입시키려는 노력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남북조 말기에는 귀족체제가 힘을 잃어가면서 서서히 중앙집권적 황제지배가 자리잡게 됩니다. 북주의 화북통일, 수의 중국 전테 통일은 귀족제가 몰락하는 가운데 황제권이 극강화된 면이 있습니다.

6.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귀족사회인가?

중국사에서 귀족제설은 큰 논란거리 중 하나입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귀족사회인가? 이 문제를 두고 일어난 논쟁이죠.

세계사적인 보편성에 입각한 학자들은 위진남북조에서 당나라 말까지를 귀족정치라고 봅니다. 실제 위진남북조는 사회실권이 귀족에게 있었고, 이러한 귀족적 사회구조가 당나라까지 갔다가 송대 이후 황제권 강화로 귀족사회가 사대부 사회로 넘어간다는 입장입니다. 이것은 정치주체와 정치형태로만 귀족사회를 바라보는 입장입니다.

다른 입장은 귀족정치를 특수한 <위진남북조 사회>만의 현상으로 보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은 위진남북조 사회를 전반적으로 보았을 때, 귀족적인 형태가 가장 극명하다는 점에 착안한 것입니다. 귀족정치는 고대 씨족사회와도 다르며, 호족사회와도 다르며, 봉건정치와도 다른, 독특한 시대상을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이 입장은 세계사적 보편성은 무시하고, 아시아적인 특수상황만을 고려하여 <귀족사회>라는 것이 존재했음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7. 어디서부터가 봉건사회인가?

위진남북조의 귀족사회를 생각했을 때 어디서부터가 중국의 봉건사회인지에 대한 견해도 논쟁거리입니다.

기본적으로는 송대 이후를 중세사회라고 봅니다. 이것은 송대 형세호와 사대부들에 의해서 보편적 장원이 형성되었다는 입장에서 출발합니다. 호족과 귀족사회에서는 영호, 노비가 존재하였고, 노비의 사역이 중요하였으므로 고대사회로 봅니다. 송대 장원은 장원에서 반자유민이 경작을 하므로 유럽 중세 농노제와 비슷한 생산양식이 시작되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죠.

위진남북조가 중세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견해는 중세란 사회가 <지방분권적> 성향이 강화되는 사회라는 것에 착안한 것입니다. 위진남북조는 철저한 신분제 속에서 지방에서 대토지를 소유한 호족들이 중앙귀족화한 사회입니다. 이것에 착안하면 위진남북조를 유럽과 같은 중세사회로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어디가 중세고, 어디가 근세인지를 따지는 것 자체가 좀 무리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식으로 시대구분을 가져다 붙이면, 주나라에서도 <봉건제도>가 있었고, 춘추전국시대도 <지방분권사회>였으니, 기원전 중국도 봉건사회가 될 수도 있겠네요. 굳이 중국사, 한국사에서 유럽 중세를 따져서 시대구분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시아는 그냥 아시아 나름대로의 발전양식이 있으니, 아시아 공통의 체제를 따져서 새로운 시대구분을 만드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가져가실 때는 반드시 댓글을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3.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중국사에서 호족의 개념과 성립 배경

이번 장에서는 호족이란 무엇이며, 이들이 어떻게 등장하였고, 어떻게 발전해나가는지, 후한 말기부터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다뤄보겠습니다. <호족>이라는 개념은 동아시아사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개념이나, 한국, 일본에서는 <일족을 거느린 대토지 소유자>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중국사에서 자세히 다루는 이유는 이 짧은 개념의 배경을 좀 더 상세히 알기 위함입니다.

1. 토지를 가진 자들이 사회세력화 하다

한 무제가 강력한 경제 통제책을 사용하여, 국가 재정과 황실 재정을 늘려나가자, 대상인들은 그들이 가진 부를 <토지>로 돌려 버리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따라서 <토지>가 곧 재산이라는 인식이 늘어나서, 대토지를 가진 자들이 사회전반에 확산되었습니다.

실제 한무제기에는 장건의 서방 실크로드 개통, 농업과 수공업의 발전, 오수전 등 국가 신용화폐제도의 성립 등으로 상업이 발전하였고, 상홍양 등 대상인이 정계에 진출해 있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무제가 강력한 경제통제로 상업을 통제하자, 결국 상인들은 상업의 이익을 <토지투기>로 전환하여 일반 백성들의 땅을 잠식하기 시작합니다.

한무제의 신하였던 동중서는 대토지 억제책을 내놓지만, 대토지를 가진 지주와 상인 관료들이 반대하여 그 뜻은 이루지 못합니다. 이후 애제기에는 토지제한법은 <한전법>을 실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사전과 노비 소유에 상한선을 두어 토지소유자를 견제하려고 한 것인데,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이렇게 대토지를 소유하면서, 자신들의 일족을 이끌어 나가는 지방세력을 호족이라고 합니다. 이 호족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자영농은 몰락하고, 한나라 시기에는 점점 농민 반란이 많아집니다. 실제, 후한이 망할 때, 장각의 태평교도들은 국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킨 것이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주 공격대상은 원소, 조조 등의 대토지 소유 호족들이었습니다.

부자의 땅은 천백경에 이르는 데, 가난한 자는 송곳 하나도 꽂을 땅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 한서 식화지 -

농업으로 얻는 부는 가장 휼륭한 것이고, 상공업은 다음이지만, 불법으로 거두어 들이는 부는 최악의 것이다.

- 사기 식화지 -

2. 호족은 대토지를 점점 더 늘이는 방법을 찾다

호족들이 토지를 늘이는 방법은 두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일정 수확을 보장하는 토지를 직접 매입하여 대토지를 소유하는 방법인데, 이것은 귄력과 결탁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불법적인 경우도 많았습니다. 농민들은 강제로 토지를 빼앗기거나, 강제 매매를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실제로, 농민에게 돈을 빌려준 뒤 높은 이자를 책정하여 토지를 빼앗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둘째는, 호족들이 직접 황무지를 개간하거나, 자신의 재력을 투입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 상인들이 직접 돈을 투자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자신의 권력을 동원하여 농민, 노비 등을 사역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하여 <호족>들은 토지를 늘여갔습니다. 전한 말기가 되면, 이 호족들의 세력이 중앙의 외척, 환관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방 권력으로 자리잡게 됩니다. 외척과 환관들은 중앙에서 투쟁할 때 호족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부탁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힙니다. 왕망이 신을 건국할 때 왕망은 외척이기도 했지만, 권력투쟁에 밀려 낙향했을 경우에는 호족과 같은 행세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 후한이 건국할 때 광무제 역시 화북의 남양 호족으로서 <호족연합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후한은 실제 호족 세력이 중앙에 진출하여 이끌어간 호족정권으로서, 외척, 환관과 함께 국가를 주도하게 됩니다.

그들은 지방에서 교양학문으로 소양을 닦았는데, 이것은 곧 한대 관료 등용제도인 <향거리선제>와 직결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은 중앙 관계와도 연줄이 닿게 되고, 위진남북조 사회의 혼란기로 넘어가면 그들이 곧 중앙의 <귀족> 세력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죠. 또, 그들은 대토지라는 경제력 위에서 사병을 먹여살릴 능력을 보유한 만큼, 토지가 많을수록 개인 병사가 많아지고,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식객이 많아지게 됩니다. 이러한 사병과 식객들이 곧 호족 가문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곤 하죠.

3. 호족의 역사

호족은 전한기에 대토지를 사요하면서 발전한 재력가이자, 대토지 소유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일족을 거느리고, 사병을 가진 무력가입니다. 따라서 호족 구성의 3요소를 말하라면 <대토지, 무력 소유, 일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한을 창업한 왕망은 이들 호족을 국가가 철저히 통제하려는 주례체제적 통제 정책을 실시합니다. 이것은 성장하는 호족 세력에 커다란 반발을 사게 되어, 왕망 정권은 20여년의 짧은 왕조로 단명합니다. 이후 호족들은 <한>왕실을 받든다는 명분으로 호족연합정권인 <후한>을 창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회 경제의 주체세력이 되어 엄청난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는데, 이것은 곧 후한 말 황건적의 난 등 민란이 발생하는 원인이 됩니다.

호족들이 지방에서 세력화되었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자면, <한>나라 시기에는 아직 호족이 중앙의 핵심에 이르지는 못한채 지방에서 호족 연합적 성격에 머물렀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 황건적의 난을 진압한 조조, 조비 일가는 후에 왕조를 창업하면서, 호족들에 의한 새로운 사회가 등장하였습니다. 따라서 호족이 중앙에 진출하여 <귀족화>된 것은 바로 위진시대 이후였고, 수에 의해 중국이 <강력한 황제지배체제>로 통일될 때까지의 사회는 곧 <귀족화된 호족 사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한나라시기에 지방호족이 관료화되고, 중앙관료가 대토지 호족화되는 현상이 시작된 이래, 후한에서는 지방 유력자인 호족이 호족을 추천하는 <향거리선제>가 정착되어 호족의 관료화가 심화되었고, 위진남북조에서는 호족에 의한 사회가 열린다는 뜻입니다.

7차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호족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습니다.

1. 한의 왕실이나 귀족 중 분가하여 지방에 내려가 대지주가 된 자
   2. 농촌의 자작농이나 지주 중에서 대토지를 소유하게 된 자
   3. 무제의 억상정책으로 상인들 중에 토지를 사서 대지주가 된 자

4. 호족 내부의 구조

그렇다면 호족들은 어떤 내부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를 마지막으로 간단히 다루겠습니다. 호족의 구성원은 <종족, 영호, 노비>라는 3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종   족

종족은 호족 사회의 중심이 되는 <가문>으로 독자적인 토지를 가지고 있는 집단을 말합니다. 종족은 혈연으로 이루어지는 <조 - 부 - 손> 등의 친족 가족집단을 말합니다. 호족의 토지는 <종족 소유>로서 관혼상제, 전쟁, 천제지변 등이 있을 경우 <종족>들이 뭉쳐 그 일을 해결합니다. 쉬운 말로 우리 나라의 <뼈대있는 족보>를 가진 가문집단 같은 것입니다.

영   호

영호란 <종족>들을 모시던 하부 계급들을 말합니다. 원래 주인과의 친분을 빌미로 주인의 장원에서 <예속민>으로 사는 <객>, 호족과 사제관계이거나 호족의 행정업무를 보던 <문생>, 호족과 연결된 관료들과의 친분으로 이루어진 <고리>, 호족의 사병인 <부곡> 등을 말합니다.

노   비

노비는 <종족>의 경제권을 보장하기 위해 호족의 가사와 잡역을 담당하는 가내노비를 말합니다. 그러나, 호족들이 대토지를 늘려가면서 노비들은 점차 장원의 생산에 투입되었으며, 노비 노동은 소작농 노동과 함께 호족 장원의 생산요소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당시 노비는 너무 비싸서 그리 많은 편이 아니였다고 합니다.

이상으로 호족이라는 개념을 짧게 정리해 보았습니다. 한국사, 일본사를 할 때는 다른 각도에서 호족의 개념을 정리하겠지만, 중요한 점은 호족이라는 용어는 <대토지 소유 개념, 일족 개념, 사병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보통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있는 집단을 동아시아사에서는 <호족>이라고 정의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CALL BACK>기능이 자동으로 삽입됩니다.
   3. 네모칸이나 밑줄이 삽입된 단어를 클릭할 경우 사이트 내 연계된 포스트들이 자동 출력됩니다.
   4.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중국사 39 - 후한의 건국과 멸망에 대한 이야기

이번 장에서는 후한시대의 건국의 의미와 멸망까지의 역사를 한번 다루어보겠습니다. 후한은 기원 후 25년에서 220년까지의 왕조입니다.

1. 호족연합정권의 성립

왕망의 신이 지나친 국가통제적 정책을 실시하면서, 사회 전반의 모든 세력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호족들은 토지에 대한 규제 정책이 싫었고, 대상인들은 상공업 규제정책에 불만을 가졌으며, 농민들은 새로운 제도가 오히려 사회 불안을 부추기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왕망이 죽을 무렵 시작된 전국 각지에서의 농민 봉기는 수습이 안될 지경이었습니다. 특히 반왕복한(왕망을 죽이고 한을 부활하자)는 구호를 위친 적미의 난(붉은 눈썹의 난)은 중국 각지에 번지고 있었습니다. 이전까지 계속 이야기 했지만, 중국의 농민반란이나 왕조 교체는 음양오행설에 입각하여 황의 왕조 다음에는 적의 왕조, 이후 청의 왕조 이런 식으로 오행의 순환을 반란 이론으로 대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여기에 도가사상과 맹자사상의 혁명론이 가미된 것이 중국 전통의 농민반란 성격이었죠. 적미의 난과 함께 녹림의 난도 사회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러한 적미의 난에 호족과 지주들은 적극 가세하여 <신>의 멸망을 지원하였습니다. 특히 남양과 하북지방의 호족 세력을은 한의 유씨 혈통인 유수를 중심으로 뭉쳐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후한>왕조입니다.

후한 왕조는 그 탄생부터 <호족>들의 지원으로 탄생한 호족연합정권이었습니다. 그들은 전한의 유방이 천민적 성격의 유협집단과 함께 호족적 성격인 항우를 물리치고 집권한 것과는 정반대의 집단입니다. 후한은 건국주체 자체가 대토지 사유화에 적극 찬성하는 세력으로 경제적 기반이 탄탄한 호족이 주체가 된 정권입니다.

이것은 전한과 후한을 나누는 큰 기준이 됩니다. 전한이 한무제로 대표되는 개별인신적 황제지배체제의 국가라면, 후한은 호족들이 주체가 되어 이끌어나가는 호족연합적 전제지배체제의 사회입니다.

2. 광무제의 중앙에서의 중앙 집권 정책

후한을 창시한 유수(광무제)는 천도하자마자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고, 낙양을 중심으로 한 하북정권을 성립합니다. 이것은 광무제와 그 건국주체가 하북의 기반을 이러받은 대토지 소유자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광무제는 즉위 후 고민한 것이 호족연합으로 탄생한 정권인만큼, 호족들과 떨어져서 독자적으로 왕권을 행사할 수 있는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방에서 호족의 권한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중앙에서 만큼은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실시한 정책이 중앙의 외조인 3공의 권한을 약화시켜 버린 것입니다. 후한 대의 상공은 거의 명예직이었고, 실제 정무는 황제가 상서를 통해 하는 한무제기의 상서 정치에 가깝게 실시하였습니다. 즉, 상서대를 만들어 그 하부조직으로 상서령(장관), 상서복야(차관), 6조(행정실무)의 부서를 두었는데, 이로서 상서대 등 대각(내각 : 내조)가 완전히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또 황제를 보필할 수 있는 측근 세력으로 <환관부>를 설치하여 환관들을 황제 측근으로 활용하였는데, 이것은 후한 대 환관이 발호하는 계기가 되어 후한 멸망을 가져오게 됩니다.

3. 광무제의 지방에서의 호족 연합 정책

광무제는 중앙에서는 왕권을 강화했지만, 지방에서는 호족들의 기득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한의 성립 근거 자체가 호족 연합적 정권으로서 <국가통제>를 실시하는 신을 멸망시켰기 때문입니다. 광무제는 국가가 나서서 통제할 수 있는 <국가통제체제>의 명문이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지방 통제를 위해 전한기에 실시했던 13주 자사제를 계승하여 지방을 감찰하는 정도로 지방을 통제하였습니다. 또 사례교위를 신설하여 수도 및 가까운 지방의 정무를 순찰하려고 했지만, 이것도 황제의 녹을 먹는 중앙 신하들의 감찰 정도에 머물렀습니다.

실제 지방에서의 정책은 <호족적인 성향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광무제는 대토지 소유자에 대하여 전혀 손을 쓰지도 못하였고, 노비 해방령을 내리긴 했지만, 노비매매와 같은 민감한 문제는 손도 대지 못합니다. 후한에서의 지방관리나 태수는 호족의 자제로 선발하였습니다.

이 때 관리 선발은 군내 인재를 유교적 교양에 의거하여 중앙에 추천하면, <여론>에 의하여 관리를 선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유교적 교양은 명분뿐이었고 실제 선발은 유력한 호족의 자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유력한 호족 가문에서 태수를 하고 있는 관계로, 지방의 실제 운영은 <호족>세력에 의한 것이었고, 관리를 선발하는 것은, 기존 호족이 새로운 호족을 천거하는 의미를 갖게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호족 성향의 지방 관료가 새로운 호족 관료를 선발함으로서 호족간의 유대는 깊어지고, 태수는 봉건영주와 같은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태수 아래의 하급관료들은 태수를 위하여 충성하는 <군신관계>적인 성향을 보였고, 후한의 지방 세력은 곧, 유력한 호족과 그 하위 호족들의 상하관계에 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호족들이 중앙정계에 많이 진출함으로서 후한의 호족은 단순한 토지 소유 호족이 아니라, 문무를 겸비한 관료적 호족이 많았고, 이러한 호족들이 낙양을 중심으로 호족적 문화를 이끌어 갔던 것입니다.

4. 유학은 계속 퍼져나가다.

후한시대에도 유교는 계속 되었습니다. 광무제 역시 전한의 이념을 본받아 태학, 오경박사 등을 설치하여 운영하였고, 한무제 이래 유교 관학화의 이념을 계승하려 노력하였습니다. 적극적인 숭유정책으로 백성들을 교화하였고, 덕치주의 이념에 따른 정치를 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명제, 장제의 전성기 시대에는 공평한 조세 부과와 무리한 징병제도의 폐지, 사학의 융성 등을 통해서 유교적 애민정치의 토대를 닦았고, 미신적이던 전한 시대 동중서의 참위론을 몰아내고 <공자>의 참뜻을 읽기 위한 고문 연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합니다.

5. 중앙 세력은 부패하고 호족세력은 중앙에 도전하다.

후한시대가 호족연합정권인 만큼,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호족세력들이 대토지를 사유화하고 빈부격차를 심화시켜 나갔습니다. 호족들은 지방을 근거지로 중앙과 지방 정계에 진출하고, 독자적인 봉건영주처럼 군림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호족들은 중앙 관직에 올라가면, 외척이나 환관 세력과 결탁하여 중앙 정치의 파벌 싸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습니다. 특히 후한기에도 어린 황제의 즉위가 많았던 관계로, 외척의 발호, 환관의 외척견제, 호족의 중앙진출이라는 세 가지 맥락이 후한의 정치질서를 이끌어 갔습니다.

중앙에서의 혼란은 곧 지방에 큰 파급을 미치게 됩니다. 태수를 임명할 때의 부정부패와 청탁 정치, 파벌 싸움은 곧 사회문제로까지 번집니다. 황제권이 약하면, 외척들이 황제를 가지고 놀려고 하고, 황제권이 강하면 황제가 환관을 이용하여 외척을 제거하려 했기 때문에 중앙 파벌싸움은 끝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유교적 소양을 가지고 충성과 명예, 도덕, 중용 등을 숭상하는 관료지식인들과 재야 호족들은 중앙의 더러운 파벌 세력을 비판하게 됩니다. 특히 이들이 비판한 세력은 황제를 등에 업고 설치는 <환관> 세력이었습니다. 이렇게 재야에서 태학 등을 중심으로 환관을 비판하는 깨끗한 세력을 <청류>라고 하며, 기존 환관에 기대에 정치를 하는 더러운 세력을 <탁류>라고 합니다. 청류가 탁류를 비판하면서 맑은 정치를 하자고 주장하는 운동을 <청의 운동>이라고 합니다.

당시 이응과 태학생들은 붕당을 결성하여 <환관>세력들의 부패함을 알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환관파에 의해 주살당하고 맙니다. 이 사건을 제 1차 당고의 금이라고 하죠.

1차 당고의 금 이후, 호족 출신의 대장군 두무, 진번 등은 환관을 주살하고 청류파 세력이 정권을 잡으려 정변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이것도 사전에 정보가 누출되어 청의파들은 모두 주살당하였습니다. 이것을 제 2차 당고의 금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재야 세력들은 부패한 중앙세력에 끊임없이 도전했지만, 그 결과는 처참하였습니다. 그러나 환관파의 부패한 정치는 극을 달려나갔고, 이것에 반발하는 청의운동은 더 확산되었습니다. 실제, 한의 멸망 후 위진시대와 남북조 시대의 귀족들은 이 청의 운동을 주도했던 호족들이 귀족화 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당시의 호족들은 아직 환관세력을 누를 정도로 중앙 정치에 깊숙히 개입되지 못한 지방세력들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탁류파의 승리로 후한은 이제 재기불능의 부패한 사회로 타락해갑니다. 이렇게 되자, 이젠 나라의 밑바탕인 농민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이번에는 황색의 신앙으로 무장한 황건군들이 농민봉기를 일으켰습니다. 이 농민봉기를 국가가 수습하지 못하고, 지방 호족 세력들에게 진압을 떠 넘김으로서 후한은 스스로의 힘을 유지하지 못하고 멸망하게 됩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CALL BACK>기능이 자동으로 삽입됩니다.
   3. 네모칸이나 밑줄이 삽입된 단어를 클릭할 경우 사이트 내 연계된 포스트들이 자동 출력됩니다.
   4.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중국사 이야기 38 - 왕망의 신(AD. 8~23)

이번 장에서는 짧지만 역사적 의의가 꽤 있는 왕망의 신나라에 대한 중요 개념들을 짧게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1. 신 건국의 배경

왕망은 외척출신입니다. 신이 건국된 배경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한나라의 내조와 외조가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투쟁하던 외척과 환관 세력의 다툼이 곧 신의 건국 배경입니다. 왕망은 이 싸움에서 환관을 몰아내고 외척으로서 새로운 나라인 신을 건국한 것이지요.

자세히 볼까요?

왕망의 이복동생인 왕씨가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엔 황후가 되어 버렸죠, 왕망과 그녀의 여동생인 황후는 최고의 위치에 올랐습니다. 당시 왕인 성제는 황황후의 아들로서 왕망의 사촌이었습니다. 성제는 외척 중 4명을 뽑아 돌아가면서 정치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왕망은 당시 아버지가 일찍 죽어서 후원자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성제 다음으로 성제의 조카인 애제가 등극했는데, 이 애제는 왕씨가문이 아닌 관계로 왕망을 파면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애제가 빨리 죽고, 평제가 즉위하면서 왕망은 평제의 황후를 자신의 딸로 만들었습니다. 왕망의 최전성시기가 온 것이죠. 하지만, 평제도 빨리 죽어서 왕망은 또 다시 정치적 위기가 왔습니다. 왕망은 2살인 영을 황제로 뽑아 그 위기를 극복하고, 반대파 귀족들을 모두 제거해 버립니다. 그리고 왕망은 한의 국운이 다하여, 새로운 왕조가 건국해야 한다는 음양오행설을 대대적으로 선전합니다. 즉, 수금토화목의 우주 순행에 따라 새로운 왕조가 필요하므로, 자신이 백성을 위해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창하겠다는 것이죠. 그는 <신>을 건국합니다.

2. 주례체제를 모델로 한 이상국가를 선포하다

왕망의 신은 특이하게도 <주례체제>에 입각한 이상국가를 재건하려고 했습니다. <주례>체제란 중국 주나라의 주공 단의 이상을 실현하는 제도로서 유교윤리에 의한 국가 건설, 봉건제도를 통한 중화질서 확립, 국가주의적 부국강병을 위한 제도 개혁 등을 포함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이 체제는 유교이념을 통한 사회질서 확립인 듯 하면서도, 실제로는 국가주의적이고 법가주의적인 통제가 상당히 강한 체제였습니다. 이 <주례체제>는 국가가 유교이념을 장악함으로서 모든 사회제도를 국가주의적으로 개혁함을 원칙으로 하였는데, 이러한 통제정책은 당시 지방분권적이던 대지주, 대상인 등 호족화된 세력들의 대대적인 반발을 불러올 수 있었던 제도입니다.

3. 주례적 개혁을 시작하다.

그럼 실제 개혁 내용을 볼까요?

일단 토지제도의 개혁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은 주나라의 <정전졔>를 모델로 하여 국가가 토지를 장악하는 토지 공유제적 개념의 개혁입니다. 이 정전제를 모델로 한 왕망의 토지제도를 <왕전제>라고 합니다.

왕전제는 호족들이 대토지를 소유하는 것을 일체 금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토지의 소유를 제한하여 호족이 많은 토지를 못가지게 하는 제도이죠. 이 제도는 <완전한 토지 공유제>라는 설과 <무분별한 토지 소유의 일정한 상한선 제한>이라는 2가지 학설이 있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음으로 사속제도가 있습니다. 사속제도는 호족이나 대토지 소유자들이 임의로 인신매매를 시도하는 것을 금지한 법입니다. 물론, 노예제도의 완전한 폐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제도를 실시함으로서 일반 백성이 노예가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있었습니다. 국가 입장에서 백성이 노예가 된다는 것은 국가 세금을 걷을 주체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고 반대로 지방 호족(대토지 소유자)이 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속제도는 엄격하게 시행하려 했었습니다.

다음으로 철저한 국가주의적 상업통제 정책으로 오균, 육관제가 있습니다.

오균제란, 중요도시에 오균사시사라는 기구를 설치한 다음, 상공업을 국가기관이 철저히 관리하는 제도입니다. 세금을 징수하거나, 물가를 통제하는 것을 국가가 도맡아서 함으로서 상권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으로 돌리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물론 대상인들은 크게 반발합니다. 한무제 때의 균수-평준법을 좀더 구체적으로 실시한 것이라 보면 됩니다.

육관제란, 한무제 때의 <전매제도>와 비슷한 개념입니다. 소금, 철, 술, 화폐주조 등을 모두 국가가 전담함으로서 국유독점체제를 완상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이를 위하여 왕망은 계속적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햇는데, 너무 많은 화폐제도 개혁의 실시로 돈의 가치와 효용성이 많이 떨어졌고, 돈의 신용도가 없어서 오히려 국가적 혼란을 초래했다고 합니다.

4. 주례적 외교질서를 확립하다.

주례적 외교질서란, 주변국에 대하여 <중화사상>을 강요한 외교질서를 말합니다. 주나라 시대에도 주는 <천자국>, 주변 이민족은 <오랑캐국>이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이것을 왕망이 확장한 것이지요. 왕망은 자국의 모든 지역을 유교적 명칭으로 바꿉니다. 관직과 관제, 관명 등 모든 국가 행정 기관의 명칭도 유교식으로 바꾸어 자신의 국가가 곧 <유교적 중화 국가>임을 천명합니다.

그리고 주변 국들에게는 중화사상의 외교를 강요합니다. 자신이 <황제>이므로, 주변국들은 영토를 분봉받은 제후국으로서 <왕>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변국들 안의 소국은 자신의 입장에서는 작은 제후가 되므로 <후>라고 부를 수 있겠죠. 이렇게 용어를 정리하고 나서는, 주변국들은 천자국은 왕망의 영토에 와서 <조공>을 바쳐야 합니다. 주변국이 조공을 바치면 왕망은 유교이념에 따라 주변국을 <책봉>하여 서열을 정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주례적 중화질서에 입각한 조공-책봉의 관계입니다. 이 조공, 책봉의 관계는 이후 모든 중국 국가에서 이민족이라 부르는 국가와 관계를 맺을 때 쓰는 전통적 외교 방식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코웃음을 보이며 기도 안찬다고 반발한 자들이 흉노족입니다. 흉노족은 짜증이 났습니다. 중국은 전통적으로 주변민족들을 업신여겨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활을 잘쏘는 민족의 <동이>라는 말은 <동쪽의 오랑캐>라는 한자어로 해석하고, 남부 민족은 <남만 : 남쪽의 오랑캐>, 서쪽의 민족은 <서융 : 서쪽 오랑캐>, 주나라 시대에는 <견융 : 하찮은 놈들 또는 개같은 놈들> 등으로 자의적인 한자해석을 합니다. 흉노는 <흉칙한 노예놈들>, 선비는 <비루한 족속들>, 저갈강 족등은 <동물같은 놈들>로 멋대로 한자를 바꿔 해석하곤 하죠.

당시 주대의 주례 체제에 입각하여 주변 민족을 격하시키는 움직임이 있자, 전통적으로 중국과 대립하던 흉노가 대대적으로 반항을 합니다. 왕망은 흉노 토벌을 위해 진시황, 한무제 등이 했던 방식으로 토벌에 나섰지만, 참패하고 맙니다. 중국 역대 왕조 중에 흉노족을 크게 토벌했던 황제는 없었습니다. 당시 북방문화권이 중화문화권을 비웃을 만한 위치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죠.

5. 진시황제의 국가처럼 허망하게 단명하다

왕망의 신은 아주 짧게 단명한 왕조가 됩니다. 그 이유는 진시황제가 당시 지배세력들과 크게 대립하였던 것과 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왕망이 실시했던 토지국유화 제도, 사속제도, 상업통제제도 등은 당시 크게 성장하고 있던 호족세력, 대상인 등 기득권 세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습니다. 전한 대 후반이후 대토지를 가진 호족들이 성장하고 있던 것은 시대적 대세였는데, 이 대세를 무리하게 혼자 <고루한 주대 방식>으로 눌러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호족들은 왕망이 한의 황제를 죽인 찬탈자이자, 도덕적으로 약점이 있는 유교사상의 이방인이라며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왕망이 성급하게 사회모순을 해결하려고 발버둥칠수록 호족들과 대상인들은 크게 반발하였습니다. 그는 결국 왕조찬탈의 독재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남방호족인 유수가 중심이 된 호족연합세력에 의해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6. 신의 역사적 의의는?

신나라도 나름의 역사적 의의가 있습니다. 먼저, 주대의 체제를 복고하여 국가주의적 사회건설을 추진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비록 왕망은 악인으로 항상 묘사되곤 하지만, 그의 체제 복고 개혁은 훗날 국가가 위기에 빠졌을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사회 체제 개혁의 모델이 되곤 합니다. 조선의 건국기에도 부국강병을 위한 <주례체제>에 입각한 개혁이 있었습니다.

또 그는 음양오행설과 참위설을 바탕으로 한이 기울어 새로운 천명의 신이 등장했다는 여론 정치를 실시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즉, 동중서의 천인상응설과 오행설, 맹자의 혁명론을 교모히 묶여 왕조 개창의 이론을 완성하였고, <선양>이라는 평화적인 왕위 계승을 통해 새 왕조를 열어습니다. 후대 조조의 아들 조비부터 시작된 <선양>이라는 평화적 왕조교체는 그가 사상적으로 정립하였고, 음양오행과 참위설을 통한 혁명론은 고대의 혁명론을 종합한 것에 의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신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전한>의 내조, 외조를 통한 국가중심의 중앙정치사회가 <신>왕조를 기점으로 <호족중심적 지배체제>로 전환되었다는 점입니다. 신을 멸망시킨 호족연합세력들이 사회전면에 부상함으로서 <후한>시대는 호족들이 마음껏 나래를 펼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된 사회로 나아가는 역사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을 운영자 허락없이 불펌할 경우 티스토리에서 제공하는 <CALL BACK>기능이 자동으로 삽입됩니다.
   3. 네모칸이나 밑줄이 삽입된 단어를 클릭할 경우 사이트 내 연계된 포스트들이 자동 출력됩니다.
   4. 관련 글 모음
방 : http://historia.tistory.com/category/동양사이야기/중국사이야기

<http://historia.tistory.com 역사전문블로그 히스토리아>

신고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