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36건

  1. 2009.12.28 한국 근현대사 낙서 노트 (1) - 근대를 구분하는 기준점과 세계사 (15)
  2. 2008.11.16 수능 근현대사 정리 1 : 흥선대원군과 척화비, 그리고 개항 (10)
  3. 2008.04.28 (근현대사 8) 1884. 갑신정변의 원인과 그 결과는? (9)
  4. 2008.04.22 1882년. 임오군란이 조선에 미친 영향에 대한 글 (10)
  5. 2008.03.05 히스토리 채널 - 1회 방송 (13)
  6. 2007.12.08 <일본사 이야기 22> 일본의 근대화 1 - 에도막부의 중농주의와 계급분화 (3)
  7. 2007.10.13 일본사 이야기 15 -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라!(막부타도운동과 겐무신정) (3)
  8. 2007.08.23 (근현대사 17장) 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의 내용과 의의 (1)
  9. 2007.08.14 (근현대사 15장) 갑오개혁(1894)의 추진배경 (2)
  10. 2007.08.11 (근현대사14장) 동학농민운동 4 - 동학농민운동의 논점들과 폐정개혁안의 취지 (4)
  11. 2007.08.11 (근현대사 13장) 동학농민운동 3 - 동학농민들의 2차 봉기 (3)
  12. 2007.08.08 (한토막 역사 13화) 개항기 때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돈이 쓰였을까? (3)
  13. 2007.08.07 근현대사 12장) 동학농민운동 2부 - 1894년 1차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4)
  14. 2007.07.29 (근현대사 11장) 동학농민운동 1부. 동학의 배경과 초기의 종교운동 (5)
  15. 2007.07.23 한토막 역사 2화. 3개의 짧은 이야기(흥선대원군도 증기선을 만들었다 등) (2)
  16. 2007.07.17 1885년 조선의 중립화론을 주장하다. (3)
  17. 2007.07.14 (근현대사7) 개화파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3)
  18. 2007.07.04 (한국근현대사 5) 1860년대 이후 계속된 위정척사 운동의 흐름 (16)
  19. 2007.07.04 (음악 속 역사여행) 경복궁 타령과 흥선대원군 (1)
  20. 2007.06.03 플래시 자료 -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금지
  21. 2007.06.03 플래시 자료 - 흥선대원군의 정치
  22. 2007.06.03 흥선대원군 시대에 대한 사진모음(ver 1.0)
  23. 2007.05.24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은 어떤 조약인가? (11)
  24. 2007.05.20 개화기 기획 자료 : 흥선대원군의 정책과 역사적 평가 (17)
  25. 2007.05.20 한국 근대의 시작인 개화기에 대한 개관 (2)
  26. 2007.01.13 오페르트 도굴사건 (2)
  27. 2007.01.13 임오군란 관련 사료 (1)
  28. 2007.01.13 조선과 일본과의 서계 문제 - 구한말 일본과의 관계 악화 (1)
  29. 2007.01.1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프랑스의 반응 - 벨로네의 서한 (1)
  30. 2007.01.13 이항로의 화서집 (1)

한국 근현대사 낙서 노트 (1)

근대를 구분하는 기준점과 세계사

1. 시대구분은 누가하는 거야?

한국 근현대사 낙서장 첫 이야기이다. 근데 말이지, 이야기를 하려다 보니 용어부터 맘에 걸리네. <근현대사>라니... 그럼 근대, 현대라는 건 뭐고, 누가 기준을 정한거야? 먼저 근현대가 뭔지 모르고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간략하게 끄적거려보자.

뭐 역사책을 보면 흔히 고대, 중세, 근대, 현대... 뭐 이런 말들이 나온다. 근데 그건 누가 정한 거지?

사실 말이지. 시대구분이라는 것은 스스로 <근대인>이라고 생각했던 서양인들이 만들어 낸 <발명품>이야. <르네상스>라는 말은 다 알지? 미켈란젤로니, 라파엘로니, 레오 선생이니 하는 분들 나오는 서양 15-16세기 말야.

서양의 근대인들은, 15세기를 무지 자랑스러워 했어. 솔직히 중세 시대에 기사도가 어쩌구, 십자군 원정이 어쩌구, 교황이 어쩌구 말은 많이 했어도 그 시기는 <우물 안 개구리> 시대였거든. 아시아인들은 각각 무역권을 만들고, 문명간 교류도 활발히 하고 하던 시기에 유럽인들은 좁은 땅덩어리에서 지들끼리 죽자 살자 치고 받고 싸웠잖아.

그런데, 르네상스니, 종교개혁이니, 신항로 개척이니 하면서 밖으로 눈을 돌려보니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이거야. 그러다 보니, 지금까지 믿었던 가치관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였지.

교황 : 야... 니들 라틴어 읽을 줄 모르잖아. 내가 성경책 읽어 줄테니 잘 들어. 하나님께서는 <면죄부>라는 티켓을 사는 사람에게 천국을 예약하셨단다. 자, 줄서... 티켓사세요.. 티켓... 교황한테 돈 바치면 천국가요... 교황믿음 만세천국 교황불신 바루지옥.....

로렌쪼 발라 : 놀구있네. 내가 조사해 봤더니, 교황이랑 황제랑 밀약맺고 둘이 해 쳐먹은 거 많던데, 이게 야~ 대체, 교황이 교지구 투기업자랑 뭐가달라? 교황이랑 랑크 제랑 따먹고, 치자금 주고 이런 거래 다메? 료 다 았다. 지금부터는 성경책 내가 직접 읽을란다. 니가 읽어주는 거 안 믿어.

루터 : 라틴어? 되었구... 지금부터는 모국어로 성경책 번역해줄테니 그거 읽으면 되겠다. 성경 직접 읽고 스스로 믿음을 가지세요... 우리 힘으로 종교를 바꿔 보자구요. 일단, 교황을 좀 죽여놓아야 우리 귀족분들이 힘좀 쓰실거에요. 교황불신 귀족만세~~

갈릴레이 : 근데, 교황이 한 말을 반박해도 될까? 내가 망원경 만들어서 보니깐 지구가 돌던데.... 근데,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는 말은 내가 안했는데... 어떤 넘이 책 팔아 먹으려고 그런 말을 써 놓았어?

콜롬버스 : 그래? 그럼 난 그 말 믿고 지구 반대편으로 돌아서 인도 가봐도 돼? 진짜 간다.. 진짜루.... 지구 반대로 갔다가 낭떠러지 만나서 죽는 거 아니지? 확실... 하지? 후덜덜...

뭐, 점차 이런 분위기가 되가는 거다. 세상이 바뀌고 세계가 넓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세계화> 시대에 걸맞게 아시아 애들 노는데도 좀 놀아달라고 애원해보고, 무역도 같이 해보고 싶었겠지. 유럽애들도 점차 <스팩>이 되잖아~ 그래서 서양인들은 지금까지의 시간과 공간을 구분하는 기준점을 만들어 본 거야.

과거 찬란했던 그리스와 로마 제국의 시대를 <고대>라고 기준점을 잡고, 로마 제국의 문화유산이 박살난 시대를 <중세>로, 그리고 르네상스를 겪은 자신들의 시대를 <근대>로 파악한거지. 이 시대 구분법이 여러 서양의 역사 학자들을 거치면서 <현대>라는 살까지 더해서 4단계 시대구분법이 나왔어.

그런데, 이 시대구분법은 문제가 있었지. 뭐 19세기 이후에 서구 애들이 세계사의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에 이 시대구분법을 널리 애용하긴 했지만,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이게 너무나 안 맞는다는 거야.

영국의 스펜서 : 뭐야... 중국, 일본, 한국, 뭐 인도, 오스만 제국... 이것들은 나름대로 세계 4대문명의 발상지라면서 19세기까지 쭈욱~ 중세 봉건시대 수준이네. 그니깐 니들이 우리 서양한테 정복이나 당하지 ㅋㅋ

일본 : 되었네 이 사람아.. 아시아는 아시아 나름대로 발전과정이 있었고, 니네 발전이랑 조금 다른 면이 많거든? 우리도 <메이지 유신>으로 나름 발전했는데, 몰랐어? 니네 시대 구분이 좀 우리랑 안 맞는다. 우린 근대랑 현대 사이에 독특한 발전 과정이 있거든? 오.. 그걸 <근세>라고 부르면 되겠다...

그리하여 4단계 시대 구분법이 <근세>를 포함한 5단계 시대 구분법으로 정착된거야. 뭐, 암튼 중요한 것은 이 시대 구분이라는 것이 서구적인 것에서 출발했다는 점이지. 따라서 우리식으로 고대니, 중세니, 근대니 때려 맞추려고는 하는데 너무나 안 맞는다는 거야.

일단, 한국사 교과서부터 봐봐.... 뭐 고대 사회로의 발전, 근세로의 전환... 이런 거창한 제목들은 많이 나오는데, 왜 고대고, 왜 근세고... 이런 설명들은 살짝 생략되어 있거든. ㅋㅋ

그래도 나름대로 역사 학자 님들께서 고민해서 만들어놓은 시대구분이 많으니, 그걸 참조로 근현대사가 어디서 부터인지 파해쳐보자.

2. 한국 근대와 현대의 기준점

자, 그럼 한국사에서 근대사회가 언제부터인지 밝혀보자.

사실 한국사에서 근대는 서양인들이 구분하는 기준과는 완전 달라. 서양애들의 근대 기준은 자본주의가 시작되고, 민족이라는 개념이 잡히기 시작하는 시기야. 뭐, 칼뱅이라는 종교개혁가가 기독교인들은, <돈 잘 벌어도 천국가유~>라고 자본주의의 단서가 되는 말을 했다나 뭐래나... 또 로마제국의 울타리에서, 교황의 울타리에서 살던 유럽인들이 <근대민족국가>라는 개념을 잡고 절대왕정이라는 걸 만든 것도 바로 이 <르네상스> 이후야.

아시아의 <근대 기준>은 사실 유럽인들이 말하는 <자본주의>가 언제 생겼냐는 거야. 근데, 아시아는 대부분 유럽인들에 의해서 식민지가 되었거나, 강제로 개항했잖아.

따라서 아시아의 <근대화>란, 거의 대부분 유럽인들이 협박~해서 강제로 <자본주의>가 들어온 시기가 바로 근대란 거지.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강제적인 개방이었기 때문에 <국가>를 지켜야한다는 확고한 의지가 생겨서 <민족의 생존>을 생각하게 된 시기를 근대로 볼 수 있어.

뭐, 유럽과 좀 다른 점이라면, 걔네들은, 다른 나라를 점령해서 민족의 영광을 널리 알리려는 거고, 아시아인들은 꼴보기 싫은 유럽민족들이 식민지를 넓히자, <니들 짱난다~>면서 저항했던 민족주의라는 거 정도지.

자, 그럼 한국사에서 말하는 근대의 기준이 감잡히지? 정치적으로는 <근대민족국가의 수립>,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국가의 수립>이 바로 근대화의 기준인 거지.

그럼, 민족국가, 자본주의 국가가 대체 언제야? 이걸 가지고 많은 학자분들께서 싸웠는데, 뭐 대충 정리하자면 이런거야.

18세기 주장파 : 일본이 안 쳐들어왔어도 우린 스스로 민족국가를 만들 수 있었거든? 특히 박지원, 박제가 등 실학파들 중에 <북학파> 있었잖아. 우리 민족이 강해지기 위해서 청나라의 발달된 문물을 배우자는 사람들. 특히, 조선후기에 영조, 정조 시기를 봐봐. 거의 서양의 루이 14세 안 부러울 도로 대군주잖아. 그 때 자본주의가 발달할 딱... 찬스였는데. 박지원의 양반전 보면 양반이 장사하는 방법도 나오구...

흥선대원군기 주장파 :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격파, 미국 격파하고 침략전쟁을 다 막았잖아요... 일본, 청나라 간섭도 다 막아 버리고... 그것만큼 민족적인게 어디있어요? 그리고 대원군기에 국가 재정이 튼튼해지면서 서울 등 근기지방부터 자본주의가 발전하잖아요?

강화도 조약 주장파 : 그래도 확실한 것은 일본이랑 맺은 <강화도 조약>이거든? 그 조약으로 우리가 비로소 세계사에 눈뜨고, 자본주의가 먼지 경험하게 된 거잖아. 비록, 일본이 나쁜 의도를 가진 것은 맞지만, 조선이 개항하고 자본주의를 배운 건 1876년이야. 또, 일본 덕분에 외세에 저항하려는 <민족주의>가 비로소 시작되었고...

갑오개혁 주장파 : 강화도 조약은 그냥 문서일 뿐이구요. 실제로, 양반, 싱민, 노비같은 신분제도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평등해진 건 1894년 갑오개혁 아닌가요? 모두가 평등해야 비로소 하나의 민족이죠. 솔직히 조선시대에 노비가 <우리는 같은 민족, 평등한 백성이다>라고 생각했겠냐구요. 신분제 폐지, 과거제 폐지, 정치, 사회 개혁이 선행되야 근대화든 뭐든 하죠. 그리고 갑오개혁 때 조세 개혁이 시작되면서 자본주의 발전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국가권력이 성립된 거 아닌가요?

음... 다 조금씩 맞는 말인거 같다. 하지만, 현재 교과서나 일반 서적에서는 <강화도 조약>을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 같다. 뭐... 강화도 조약을 챙기려면 서양과 일본 세력의 침략도 언급해야 하고, 그러려면 당대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도 언급해야 하고.... 그러다 보면 어짜피 19세기 중반으로 넘어가게 되지.

그럼 현대의 기준은 어디지?

그건, 만장일치야.... 일본이 핵무기 꽝~ 하고 맞아서 망하고, 아시아 전체가 이 날만 되면 모두 모두 기념하고 행사를 치루는 1945년 8월 15일.... 즉 광복절 날이지.

현대가 되려면 식민지 상태에서 <민족국가의 발달>이나, <독점적 자본주의>의 발달이 이루어질 수는 절대~ 없는 거잖아. 뭐... 친일파의 국가라면 모를까.... 혹... 요즘 친일을 애국으로 바꿔주시는 뉴라이트 분들이라면 새로운 시대 구분이 가능하기도 하겠지만... ㅋㅋ

자, 그럼 재미없는 시대 구분 이야기를 여기서 끝내고 본격적인 근현대사 낙서에 돌입해보자. 그럼 19세기 서양 열강의 침입과 독자적 발전을 이루려 했던 조선의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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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0. 다시 한 번 시작하며ㅡ
  올해도 수능이 끝났습니다. 수능이 끝났음에도 수능대비용으로 정리하는 것처럼 덧없고 부질없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저는 군입대를 앞둔 대학생이며, 현재 활동하시는 분들께도 공부가 미치지 못합니다. 더욱이,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란 일부를 추려내고 몇몇 사항을 정리하고 그 인과관계를 정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제가 서술한 내용과 히스토리아의 다른 필자분께서 집필하신 내용이 다르다면, 다른 필자분의 의견을 좇으시길 바랍니다. 제가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고등학교, 특히 수능에서만 통용되는 '시험대비용'에 불과하며 다른분들이 공부해서 작성한 것과는 그 질에서 비할바가 못됩니다. 이 점을 유의하시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통상 수교 거부 정책
  어린 나이에 왕에 즉위한 고종 대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의 정치는 그 당시 상황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는데, 국내적으로는 세도정치로 인한 왕권 약화와 그에 따른 조세 제도의 문란(삼정의 문란)으로 농민 봉기가 일어나고 있었고 국외적으로는 이앙선이 출몰하여 민심은 동요케 하고, 천주교가 확산되어 성리학적 세계관이 흔들리는 등, 혼란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왕권을 강화하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먼저 그는 폭넓은 인재 등용과 세도 정치의 중심이었던 비변사를 축소하게 되면서 세도 정치를 혁파하였고, 재상 회의기구였던 의정부를 부활시켰다. 그리고 법전을 편찬(대전 회통)하고 경복궁을 중건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하였다. (좀더 쉽게 이해를 하기 위해, 세도 정치를 혁파하고 왕권을 확장시킨 것을 정리한 것을 대전회통이라고 생각하는게 좋다.) 당시 무차별적으로 농민들의 땅을 합병하고, 세금도 내지 않았던 서원을 철폐하고, 각종 삼정의 문란을 개혁하면서 민생 안정을 꾀하였다.


 Tip. 삼정 개혁 : 전(田)정, 군(軍)정, 환곡(環穀) 개혁

 전정 : 양전, 양안 사업(토지 조사), 토지 겸병을 통한 개혁

 군정 : 호포법(號~, 집집마다 군포를 내도록 하는 법)을 통해 양반에게도 군역 부여

 환곡 : 환곡제를 폐지하고 양심있는 양반의 개인 창고(사창)에서 곡식을 꾸도록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원납전(願納錢 : 양반들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해서 내는 돈)을 강제적으로 징수하고 당백전의 무리한 발행으로 인프레이션을 유발하였다. '경복궁 타령'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노동력의 징발 또한 가혹하여, 농민들의 반발을 샀다. 
 
 Tip. 인민들의 반대
  
양반이 반대한 것 : 서원 철폐, 호포제, 원납전

농민이 반대한 것 : 당백전, 노동 징발


2. 통상수교 거부 정책과 양요 
  순서, 인과 관계, 관련국(중요), 지리적 위치를 확인하는 것이 포인트이다. 
 
 1) 병인박해(1866) 
  러시아의 강력한 남하 정책으로 위기를 느낀 흥선대원군이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에게 러브콜을 신청하였으나, 이를 프랑스 선교사들이 무시를 했다. 러브콜의 성공 여부와는 상관없이 흥선대원군은 이로 인해 기존 세력으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비난을 잠재우기 위해 천주교를 박해함으로써 프랑스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밝히고자 했다.(참고로 말하자면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절실한 천주교 신자였다고 한다. - 수정사항)

 2) 제너럴 셔면호 사건(1866)
 
  미국 상선(商船)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들어왔다. 물이나 식량을 구걸하는 등의 연극을 통해 평양에 들어왔지만, 시내를 향해 공격하자 이에 박규수가 제너럴 셔먼호를 불질러 버렸다.

 3) 병인 양요(1866)
  대동여지도를 통해 서울로 곧바로로 가는 길을 알게된 프랑스는 강화도를 통해들어왔다. 문수, 정족 산성 등에서 정말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내쫓는데 성공하였다. 그들은 강화도를 통해 들어와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 장서들을 쌥쳐가서 현재까지 외교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4)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충남 덕산(예산)에 위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이다. 
 
 5) 신미양요(1871)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뒤늦게 알고서는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의 보복을 한 사건이다.  그들 역시 대동여지도를 통해 강화도로 들어왔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당시 미국과 조선은 압도적인 화력차이가 났고 미국은 대포 몇 번 쏘다가 반응이 없어서 그대로 돌아갔다는 말이 있을정도이다.

 
6) 척화비
  이래저래 서양에 대한 안좋은 이미지를 갖게하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통상수교 거부(소위 쇄국정책)라는 극단적인 처방을 하게 된다. 우리 민족의 전통문화를 수호하고 주체성을 지켰다는 것은 높이 평가되어 지지만, 그만큼 근대화와 세계화를 지연시키기도 하였다.


3. 강화도 조약(1876)
  최익현의 도끼 상서로 실각하게된 흥선대원군의 바톤을 민비가 이어받아 민씨 정권을 수립하였다. 통상수교 거부 정책 및에서 억눌려왔던 개화론이 박규수 등을 필두로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한편 위로부터 원샷 개혁(메이지 유신) 성공한 일본이 예의를 지키지 않는 투로 외교문서를 보내자 조선 정부는 이를 거부하고, 이에 일본의 후쿠자와 유키치는 정한론(征韓論 : 한반도를 정복하자는 이론) 내세우기 시작한다.(원래는 신생 일본의 발전 발판으로써 한반도를 정복하려고 하였다.) 곧 일본이 운요호 사건(1875)을 꼬투리 잡아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조 일 수호 조규, 1876)가 맺어지게 된다.

 주요 조항 분석

1관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

  => 침략을 쉽게 하기 위해 청의 종주권을 부정

5관 조선은 부산 외에 2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왕래 통상함을 허락한다.

  => 본래 부산(동래)는 왜와 통상하던 항구였으므로 경제적 항구였던 부산러시아의 
        
남하 견제를 위해 군사적 목적을 띈 원산의 개항,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인천항을 개항하므로써
       
서울에 직접적인 정치적 간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7관 조선은 일본의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가한다.

   => 연안의 자원, 항로 확보와 유사시 효율적인 작전을 전개하기 위함이다.

9관 양국 관리는 약국 인민의 자유로운 무역 활동에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 더 많은 물량을 가진 일본 상인에게 유리

10관 일본 인민이 조선이 지정한 각 항구에서 죄를 범한 경우 일본 관원이 심판한다.

   => 치외법권(영사 재판권)을 인정하였다. 대표적인 불평등 조항

 * 주의 : 강화도 조약에는 최혜국 조항이 없다


부속 조약

1) 조일 수호 조규 부록

 4관 개항장에서 일본인의 간행이정을 10리로 제한한다 => 거류지 제한

 7관 일본 국민은 본국에서 사용되는 화폐로 조선 국민이 보유하고 있는 물자와 마음대로

 교환할 수 있다 => 일본의 화폐 유통 허용하여 경제적 침략을 받게 된다.


2) 조일 통상 장정

 제 6조 조선 항구에 머무르는 일본인은 쌀과 잡곡을 수출할 수 있다.

  => 양곡의 무제한 유출을 허용하게 된다(훗날 방공령으로 방어)

 제 7조 일본 선박은 선세를 납부하지 않으며, 수출입 상품에도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 자국 산업을 보호 불가(마치 현재 FTA라고 보면 됨.) 


4. 다른 나라와의 수교

 1)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제 2차 수신사로 다녀온 김홍집 전한 황쭌센의 「조선책략」에 의해 맺어진 조약이다. 청은 자신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종주권)을 과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주선하였다. 사실 청의 본 뜻은 청 - 조선 - 미국의 한 축을 구성함으로써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고, 확대되어가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에 대한 견제라 할 수 있다.


 주요 조항 분석

 제 4조 (전략) 미 합중국 국민이 조선에서 조선 인민을 때리거나 재산을 훼손하면

        (중략) 미 합중국 법률에 따라 체포하고 처벌한다 => 치외법권

 제 14조 (전략) 본 조약에 부여되지 않은 어떠한 권리나 특혜를 다른 나라에 허락할

        때에는 자동적으로 미국 관민에게도 똑같이 주어진다.

         => 최혜국 대우, 아관 파천 이후 이권침탈에 악용되었다.

 

  그 외

  거중 조정 조항 : 위험할 때 서로서로 도와준다.

  => 형식적인 조항이다. 이후 일본과 미국 사이에 맺어진 가쓰라-테프트 밀약에서
     
정면적으로 위반된 조항이기도 하다.

 2) 한러 통상조약(1884)
  조선 정부는 국내에서 청, 일의 간섭이 점점 더 심해지자 이러한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다. 때마침 러시아는 외교 고문인 베베르를 파견하여 친러 세력을 확장하고 이윽고 러시아와 독자적으로 수교를 맺게 된다. 그 결과 러시아는 함경도 경흥에 조차지를 확보하였다.


5. 외교 사절
  민씨정권은 개화한 이후 개화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주변국에 외교 사절을 파견하여 신 문물과 신 제도를 수용하였다. 에는 영선사를, 미국에는 보빙사를, 일본에는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공식적인 외교사절로 각각 귀국 후 보고서를 작성하여 올렸다. 하지만 형식적인 보고서에 실망한 고종은, 밀서를 내려 비밀리 조사 시찰단(신사 유람단)을 파견하여 일본 근대화에 대한 다향한 의견을 수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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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1884. 갑신정변이 일어나다!

1. 1880년대 이후 개화파의 분위기

오늘 다룰 내용은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은 1884년에 일어난 사건이지요. 갑신정변은 개화기의 모든 정황과 동 떨어져 단독 사건으로는 볼 수 없는 사건입니다. 개화기의 큰 흐름 속에서 척사와 개화라는 양대 기류가 정면 충돌한 사건이지요.

따라서 갑신정변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이전 포스트에서 다룬 조선책략, 위정척사, 임오군란, 개화파의 흐름 등을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럼 간략하게 그 흐름만 다시 짚어볼까요?

1880년 개화의 지침서인 조선책략이 들어온 이후, 조선 사회는 개항과 개화를 반대하는 위정척사운동이 본격화되었습니다.이 운동은 조선책략 태우기 운동, 개화를 추구하는 민씨 정권 타도 운동으로 까지 발전하려는 분위기였죠.

반대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속에서 숨 죽여 개화를 주장하는 개화 1세대들은 민씨정권의 등장이후 더욱 힘을 얻게 됩니다. 이들은 1878년 충의계라는 개화조직을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개화를 위한 깃발을 흔들기 시작합니다. 이 개화와 척사라는 큰 흐름은 언젠가 한번 크게 터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폭발은 엉뚱하게도 <임오군란>을 통하여 전혀 다른 역사 방향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임오군란은 청의 도움을 받은 민씨세력의 재집권으로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청나라의 전면적 내정간섭이 시작되었지요. 문제는 개화와 척사라는 큰 흐름이 <청>이라는 외세에 의해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청나라는 조선에 정치고문인 묄뢴도르프, 군사고문인 마젠창을 보내면서 민씨정권의 소극적인 개화마저도 태클을 걸게 됩니다.

안 그래도 민씨정권의 개화에 맘이 안 들었던 급진개화파들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김옥균, 박영효 등의 급진적 개화파들은 그동안 민씨정권에서 추진해온 소극적 개화파들의 정책으로는 근대화가 늦어질 것으로 판단하고 <고종>에게 직접 접근하여 빠른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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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주역들 :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홍영식(좌측부터)>

2. 급진개화파가 청의 세력에게 밀리다.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간섭이 심해지고, 기존의 개화파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급진 개화파들이 고종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청의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1883-1884년간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급진개화파들은 조정에서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여 청의 세력을 견재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특히 철종의 딸인 영혜공주와 결혼한 <박영효>는 고종과의 인척관계를 이용하여 적극적으로 청을 견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분위기에서 김옥균은 고종에게 개화가 필요한 이유를 역설합니다.

과연 그렇다면 어찌하여야 하겠습니까? 이는 오직 밖으로 널리 구미 각국과 신의로 친교하며, 안으로는 정략을 개혁하여 우매한 백성들을 문명의 도로 교육하며, 상업을 번성시켜 재정을 정리하는 데 있습니다. 또 군대를 기르는 일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할 수 만 있다면 영국은 마침내 거문도에서 물러날 것입니다. 그 밖의 여러 나라도 역시 침략의 뜻을 버릴 것입니다.

바야흐로 세계는 상업을 주로 하여 서로 산업의 크고 많음을 자랑하고 경쟁하는 때이거늘, 아직도 양반을 제거하여 뿌리를 뽑지 않는다면 국가의 패망은 기어코 앉아서 기다리는 꼴이 될 뿐입니다. 전하께서 이를 철저히 반성하시어 하루 빨리 무식 무농하고 수구 완고한 간신배를 축출하시고, 문벌을 폐하고 인재를 골라 중앙 집권의 기초를 확립하여 백성들의 신용을 얻으시고, 널리 학교를 세워 백성의 지식을 깨우치게 하시옵소서. 외국 종교를 들여와 교화를 돕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 될 것입니다.

- 고균 김옥균전 -

고종은 급진개화파의 사상을 어느 정도 공감하였습니다. 이미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파의 추진 정책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당시 조정의 실권은 청의 고문들에게 있었으니까요.

이러한 급진개화파와 청의 세력간의 갈등은 <재정문제>를 둘러싸고 크게 한판 대결을 벌이게 됩니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재정은 상당히 악화되어 있었는데, 이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의 고문은 묄렌도르프는 <악화주조>를 주장합니다. 악화주조란, 일단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돈을 찍어내자는 것으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짓기 위해 <당백전>을 발행한 것처럼 <당오전>을 발행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청의 재정고문의 의견에 급진개화파는 적극 반대합니다. 흥선대원군의 당백전 발행으로 물가가 올라서 백성들의 삶이 황폐해졌다는 것을 이유로, 돈을 만들어 찍기 보다는 <차관을 빌려서 재정 위기를 해결한다는 경제원칙>을 주장한 것이지요. 즉, 급진개화파의 재정해결책은 <차관도입론>이었습니다.

박영효는 일본에서 돈을 빌려서 국가의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고, 급진개화파의 입지를 확실히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겪은 후 내부적으로 일시 불황을 겪고 있던 일본은 돈을 빌려주지 못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급진개화파의 입지는 한없이 좁아졌고, 청의 고문들은 급진개화파를 공격하여 그 세력을 뿌리뽑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였습니다.

3. 하늘이 도와 청군이 일시 물러가다.

차관 도입에 실패한 개화파들은 정치적으로 구석에 몰려 곧 괴멸당하거나, 망명해야 할 위기에 처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침 하늘이 도왔습니다. 청과 프랑스 사이에 청불 전쟁이 벌어졌고, 청나라는 조선의 군대를 급히 인도차이나 반도로 돌려야 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3000명의 청군이 있었는데 이중 절반 이상이 조선을 떠난 것입니다.

김옥균 등 개화파들은 일본에 군사적인 지원을 약속받고 정변을 계획합니다. 일본 역시 청 때문에 약해진 자신들의 입지를 고려해서 급진개화파를 적극 지원하기로 합니다. 급진개화파들은 친청파인 보수세력을 제거할 시기로 <우정국 축하연>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그럼 갑신정변의 과정을 상세한 사료로 한번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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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정변의 진행도 : 정변의 과정>

갑신(1884) 9월 다케조에 신이치가 부임지인 조선에 왔다. 이때 중국와 프랑스는 안넘전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일본 공사는 김옥균 등을 꾀어 말하기를 <청국은 이제 조선을 돌아볼 틈이 없으니 청국세력을 배제하고 독립할 기회는 바로 이때다. 기회를 놓치지 말라> 하니 매일 밤 모여서 은밀한 화합을 가지고 일본군을 의탁하여 청국인을 방어하며 자객을 양성하여 청당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또한 일본 정부로부터 군함을 파송하여 후원해준다는 밀약까지 받았다.

- 박은식, 한국통사 -

같은 해 10월 17일 우정국이 낙성되고 홍영식이 총판이 되매, 연회를 베풀고 대관들과 각국 공사, 영사들을 초청하였다. 이에 육조판서와 내아문, 외아문 독판, 전후좌우 네 영사, 그리고 미국 공사 푸트, 영국 영사 애스톤, 청국 영사 진수당 등이 모두 연회에 참석하였다. 그런데 일본 공사는 병을 칭탁하고 오지 않았으며 서기 시마무라를 시켜서 대행하도록 하였다.

같은 날 오후 6시에 연회를 시작하였는데, 홍영식 등은 미리 왕궁문 앞과 경우궁 안에 사관생도들을 매복시켰으며, 또한 우정국 앞 개천에 자객을 매복시켜 방화로 신호를 하게 하였다. 김옥균 등은 출입이 잦았으나 지휘하는 형적은 속이고 극비에 부쳤다. 10시가 되어 갑자기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났다. 그 때 달이 밝아 대낮 같은데 불빛이 충천하였다. 민영익은 <불이야> 소리를 외치며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문밖으로 나오니 앞 개천을 따라오던 자객이 칼로 내려치자 영익이 몇 군데 자상을 입고 쓰러지자, 빈객들은 모두 대경실색하였다. 일당들은 여기서 청당을 모두 죽이려 하였으나 단지 민영익 한 사람만을 부상시켰다. 박영효, 김옥균, 사광범 등은 대궐로 달려가 바로 침전에 들어갔으니, 미리 내응이 되어 있던 궁녀가 문을 열고 기다린 까닭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들은 헐떡이며 급히 아뢰되 <청나라 군사가 난을 일으켜 불빛이 성안에 가득하고 대신들을 마구 죽이니 급히 자리를 옮기시어 피신하소서> 라고 청하고, 아울러 일본 공사를 불러들여 호위케 하라고 청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김옥균 등은 울며불며 달래다가 위협하며 빨리 떠나라고 요구하였다. 중관 유재현이 살해되니, 왕은 창황히 침전에서 나갔으며, 조태호, 홍태후와 왕후, 태자 이하는 모두 걸어서 따라나섰다.

영숙문에 이르러 갑자기 총소리가 일어나자, 김옥균 등은 급히 외치며 청병들이 많이 이르렀으니 서둘러야 한다고 하였다. 이 총소리는 일당들이 미리 이곳에 사관생도들을 매복시켜 왕이 이르는 것을 엿보아 총소리를 내 암호로 삼은 것이었다. 다시 일본 공사를 불러들여 호위해달라고 청했으나 왕이 듣지 않자, 김옥균, 서광범 등은 품과 있던 연필과 서양 종이를 꺼내어 일사내위(일본공사는 나를 지켜라)라는 넉자를 쓰고, 인신 증거도 없이 일본 공관에 보냈다. 왕이 경우궁에 당도하였다는 소식이 일본 공관에 이르자, 일본 군사들은 이미 낭우에 가득하고 일본 역관 아사야마는 맞아 뵙고, 공사 다케조에는 따라 들어왔다. 왕은 동상에 어거하시고, 일본 공사와 일당들은 청사에 거처했다. 조금 뒤 사관생도 12명이 입궁하여 둘러쌌으며 김옥균, 홍영식 등은 슬퍼하며 우는 모양을 짓고 있었다. 이에 일본병은 궁문을 에워싸고 일당들은 그 가운데 거하면서 외부와 내통을 억제했다.

- 박은식, 한국통사 -

이 때 우리 민인들은 일본인을 원수로 보았고 맹세코 함께 살 수 없다 하여 만나면 치고받아 죽이기까지 했다. 청병 또한 일본 공사관을 밤에 몰래 공격하여 39명을 죽이고 부녀는 욕을 보였으며 방사를 파괴하니, 드디어 다케조에 공사는 깃발을 내리고 군대를 이끌고 서소문을 빠져 도망쳤다. 이 때문에 우리 백성들은 더욱 노하여 일본 공관을 불태우고 육군 대위 이소하야시를 죽였다.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머리를 깎고 양복 차림으로 영사관에서 나무 궤짝 속에 몸을 감추고 24일 일본 상선을 타고 도망쳤다.

- 박은식, 한국통사 -

4. 갑신정변과 김옥균에 대한 평가들

갑신정변의 여러 적들(김옥균 등)은 서양을 존중하고 요순과 공맹을 비판하면서 유교를 야만이라고 하고, 도를 바꾸려 하면서 매번 개화라 일컬었다.

- 속음청사, 상 -

김옥균은 청군의 종주권 아래에 놓여 있는 굴욕감을 이겨내지 못하여 어떻게 하면 이 같은 치욕에서 벗어나 조선이 세계 각국 가운데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일원이 될 것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심초사 하였다. 김옥균은 그대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니, 시대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도 강력한 현대 국가가 되어야 함을 절실하게 바랬다. 그리하여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기술 채용에 따라 정부와 일반 사회의 구투인습을 일변시킬 필요를 확신하였다.

그(김옥균)는 구미 문명이 하루저녁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열국이 서로 경쟁을 벌여 점진적으로 이룩해낸 것으로서 수세기나 필요했으나, 일본은 일대만에 속성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스스로 일본을 본보기 삼고자 백방 분주하였다.

- 서재필, 회고 갑신정변 -

한국이 생존하기에 적합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 한국이 적자로서 살아남게 하는 것이다. 한국이 공정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한국이 적자로서 생존할 능력이 없음을 의미한다.

- 윤치호일기, 1982년 4월 7일 -

1884년 중엽에 새로운 집단이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일본으로 유학 간 몇몇 젊은이들은 철저한 개혁론자가 되어 돌아왔다. 일본이 변모하는 과정을 본 이들은 일본처럼, 아니 일본보다 더 철저히 개혁을 바랐다. 가능하다면 필봉 한자루로 조국을 서구화하고 싶어하였다. 또 일본 관료의 품에 몸을 던져 혁명적 변혁을 위한 만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 F. A. 맥켄지, 대한제국의 비극 -

처음 김옥균은 박규수 선생 문하에서 배웠다. 1881년 나는 영선사로, 김옥균은 조사시찰단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다같이 나라를 일으킬 것을 기약하였다. 임오군란 이후부터 청이 우리나라에 내정간섭을 자주했다. 나는 청나라당으로 지목되었고, 청국이 우리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데 분노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김옥균은 일본당으로 지목되었다. 그 후 일이 허사로 돌아가자 세상을 그를 역적이라 하였는데, 나는 정부에 몸을 담고 있어 그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마음은 결코 다른 나라에 있지 않았고, 애국하는 데 있었다.

- 김윤식, 속음청사 -

갑신정변에 대하여, 김옥균에 대하여 당시의 전통 성리학자들은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온건개화파를 비롯하여 개화사상을 알고 있는 이들은 김옥균에 대하여 동정을 보낸 것 같습니다. 독립협회의 서재필은 그를 민족의 근대화를 위하여 노심초사한 인물로, 윤치호는 당시 근대화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같은 개화파이지만 노선을 달리한 김윤식은 김옥균 역시 애국자였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또, 김옥균이 걸어온 길이 우리 개화사상의 전통적 맥을 잇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다룬 개화파의 연결그림이 아래 있죠? 김윤식이 말한 김옥균의 스승이 박규수라는 점, 김옥균 역시 개화파의 계보를 그대로 이어가고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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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의 흐름도>

5. 정권을 잡은 급진개화파, 바로 개혁 정강을 내 놓다!

갑신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김옥균은 바로 개혁 정강을 내놓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갑신정변 14개조 정강이죠. 내용을 한번 볼까요?

1. 청에 잡혀간 흥선 대원군을 곧 돌아오도록 하게 하며, 종래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워, 능력에 따라 관리를 임명한다.
  3. 지조법을 개혁하여 관리의 부정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며, 국가 재정을 넉넉하게 한다.
  4. 내시부를 없애고, 그 중에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다.
  5. 부정한 관리 중 그 죄가 심한 자는 치죄한다.
  6. 각 도의 환상미를 영구히 받지 않는다.
  7. 규장각을 폐지한다.
  8. 급히 순사를 두어 도둑을 방지한다.
  9.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10.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자와 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정상을 참작하여 적당히 형을 감한다.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 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급히 설치한다.
  12.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13. 대신과 참찬은 의정부에 모여 정령을 의결하고 반포한다.
  14. 의정부, 6조 외의 모든 불필요한 기관을 없앤다.

이 14개조 정강의 핵심 내용을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나눠보죠.

일단 정치적으로 급진개화파가 추구한 것은 <입헌군주제>입니다. 김옥균은 조선 사회가 추구해야 할 근대화는 서양식 <부르조아>계급이 사회를 주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조선에서 부르조아 계급은 곧 토지를 가진 지주계급과 대외무역에 종사하는 상공업 계급이었죠. 따라서 이들을 중심으로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일본 메이지 헌법처럼 법으로서 국가를 통치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동양식 전제군주제를 영국, 미국식 의회제도로 바꾸어 <내각이 책임지고 통치한다>는 방식을 선택한 것입니다. 이것은 영국의 젠트리 계급이 명예혁명을 일으켜 내각을 수립한 것을 모델로 하며, 그것을 받아들인 일본의 메이지 유신 헌법을 모방하려 한 것입니다. 따라서 궁안의 내시부를 혁파하고, 의회식 회의제도인 고관 회의를 적극 도입할 것을 주장합니다.

다음으로 외교분야에서는 그동안 내정간섭을 해온 청을 적극 배제하고, 자주 독립국임을 주장합니다. <흥선대원군을 돌아오게 하라>라는 것은 대원군의 집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어른을 납치는 청을 질타하고, 사대외교를 폐지하여 나라의 자주권을 세우기 위함입니다.

다음 경제분야에서는 부세제도의 개혁인 <지조법>을 실시합니다. 이것은 지주의 봉건적이고 불법적인 수탈을 방지함으로서 <근대적 세율의 법정화>를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또 불명확한 토지의 소유권을 확실하게 하여, 주인이 없는 땅은 국유지로 편압하는 것도 포함합니다. 즉, 일정한 국유지를 확보하면서도, 토지소유자인 지주의 소유권을 인정하여 <지주계급의 부르조아지화>와 <국가 재정 확보>를 동시에 하겠다는 것이 목적이지요. 이렇게 확보한 재정은 호조가 일괄적으로 관리하고 예산을 계획함으로서 국가 재정을 근대화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메이지 유신을 모방한 것이지만, 큰 약점이 있습니다.

지조법은 실제 지주층에게 유리한 반면, 백성들이 원한 <토지제도 자체의 개혁>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이 지조법을 통한 근대적 부르조아지 양성은 농민층의 지지를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사회분야에서는 봉건적 관습인 신분제도, 과거제도 폐지를 주장합니다. 이것은 유럽의 시민 혁명과 메이지 유신에서 모방한 것으로, 전근대적 제도를 타파해야 근대적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인식한 결과입니다.

즉, 양반중심의 지배체제를 청산하고, 지주층의 기득권을 중심으로 한 <서구적 자본주의>가 바로 갑신정변에서 추구한 이상적 근대화의 모습이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위해서는 청나라라는 외세의 간섭을 완전 배제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6. 갑신정변의 실패

우정국 정변을 계기로 정권을 잡은 김옥균 일파는 3일만에 청군의 개입으로 망명을 떠납니다. 청의 대응은 김옥균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척 빠른 것이었습니다. 청은 개화당의 정권 획득이 조선에서 기득권을 잃게 되는 것임을 인식하고 발빠른 대응을 한 것입니다. 문제는, 개화파를 돕기로한 일본 공사가 김옥균을 돕지 않은 것입니다. 청군이 예상과는 달리 빠르게 대군을 조선에 보낸 마당에 일본 공사관군이 대응하기가 적절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갑신정변은 3일만에 실패로 끝납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일본이 돕지 않은 것 외에 급진개화파의 미숙성도 있습니다. 김옥균은 단순히 근대적 개혁을 국민들이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지만, 큰 착각이었죠. 일단 개혁의 방향이 국민중심이 아니라 <지주적 부르조아> 중심이었습니다. 급진개화파들은 백성들을 우매하여 계몽시켜야할 대상이라는 <계몽관>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지주제를 인정하고 지주층을 중심으로 부르조아적 지조법을 단행함으로서 봉건적인 부분을 개선하지 못한 개혁이 되고 말았습니다. 또 일본과 밀착한 개혁이었던 만큼 백성들은 개혁 자체의 의도를 불순하게 보고 있었지요. 갑신정변은 최초의 근대국민국가 건설을 지향한 운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개혁이 되고 말았습니다.

7. 청과 일본은 정변을 핑계로 경쟁적으로 조선에 침투하다.

갑신정변이 청의 간섭으로 실패함으로서 조선은 다시 <청의 고문>이 실권을 잡아 정치하는 임오군란 이후로 되돌아갔습니다. 청의 간섭이 심화될수록 보수세력은 계속 장기집권을 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게 되었고, 개화세력은 이제 완전 도태되고 맙니다. 이후 김홍집, 박영효 등이 깁오개혁, 독립협회 등의 세력과 연계되어 활동하지만 그 활동은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갑오개혁의 결과, 조선은 일본공사관이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일본 공사관의 신축비를 부담하고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하게 됩니다.(한성조약)

또 청과 일본은 조선에서 공동출병, 공동철수 할 것을 약속하는 톈진 조약을 체결합니다. 이것은 조선에서 정치적으로 밀린 일본이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맺은 것으로, 일본이 청과 동등한 파병권을 확보함으로서 조선에 대한 군사적 기반을 계속 유지해나감을 의미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이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과정을 다루겠습니다. 밤이 깊었네요. 그럼 안녕히....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잃어버린 혁명(갑신정변 연구) 상세보기
강범석 지음 | 펴냄
한반도 근대 이행기에 일어난 1884년의 갑신정변의 진실을 연구한 책. 저자는 김옥균이 갑신정변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전말을 써서 남겼다는『갑신일록』이 김옥균의 일기가 아니라 일본인에 의해 위작된 것임을 주장한다. 갑신정변의 배타적인 제1차 사료가 되어온『갑신일록』이 김옥균의 일기가 아니라는 착상을 통해, 갑신정변에 대한 포괄적이고도 심도 있는 시각을 보여준다. 1부에서는『조선 갑신일기』,「메이지 17년 조
갑신정변 회고록 상세보기
김옥균 지음 | 건국대학교출판부 펴냄
갑신정변에 대한 회고록을 편역해 소개한 책. 풍운의 한말을 살다간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갑신정변 주역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함께 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육성을 들어보며 갑신정변을 이해하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당시 혁명의 주역들이 자신들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남긴 회고록 4편을 소개하고 있다.
갑신정변 연구(한국학연구총서 27) 상세보기
박은숙 지음 | 역사비평사 펴냄
근대 변혁운동의 선구적 시발점인 갑신정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서. 보다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방법으로 갑신정변에 총체적으로 접근한 책이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들의 개혁방안을 보여주는 정령 14개조안을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하고, 정변 관련자들의 회고록과 각종 저술들을 비교 분석하여 당시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이 책은 개화파가 당시 개화사상을 받아들인 참여층의 자발적 동참과 협조를 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상세보기
김용구 지음 | 원(이보란) 펴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대하여 19세기 세계정세와 관련하여 설명한 연구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같이 한국사와 세계사의 충돌에서 나오는 격동적인 사건들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했고 그런 대응 태도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 국제정치 구조에서 살아가는 데에 치유할 것이 있는지 해부한다.

갑신정변연구 상세보기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편 지음 | 평민사 펴냄
김옥균(역사논술교과서 38) 상세보기
서울교육대학교 역사논술연구회 지음 | 파랑새 펴냄
『역사논술교과서』시리즈 제38권《김옥균》. 본 시리즈는「인물로 보는 한국사」시리즈를 읽은 후 활용하면 좋은 통합논술 대비 부교재이다. 학습자는 7단계로 나뉜 프로그램을 통해 한국사를 종합적으로 꿰뚫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체계적인 논술 학습을 할 수 있다.
한국의 근대사상(세계의사상 36) 상세보기
김옥균 외 지음 | 삼성출판사 펴냄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상세보기
김육훈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미래의 눈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우리나라 청소년을 위한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야말로 오랜 세월의 분투를 통해 달성한,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우리 모두의 현재임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가 실현한 민주주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란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살펴본다. 대안적인 특징점을 바탕으로 21세기 근현대사 인식과 역사교육, 그리고
서재필(주니어세계의인물자서전 13) 상세보기
송건호 역 지음 | 금성출판사 펴냄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6 상세보기
김태웅 지음 | 펴냄
대원군 정권의 성립부터 3.1운동 직전인 일제의 무단통치 시기까지를 다루었다. 내용 역시 이런 범위에서 외세의 침략과 수탈,사회경제 변화및 근대 개혁 운동의 전개등을 집중서술하였다. 특히 반봉건, 반침략을 둘러싸고 처지와 이념에 따라 상이한 방략을 제시하는 여러 계열의 노선과 활동에 초점을 맞추었다. 개설서와는 달리 생생한 자료의 정확한 전달과 충실한 해설에 비중을 두고 개별 항목단위로 구성한 나머지 한국 근
한국사 편지 세트(전5권)(사진과 그림으로보는) 상세보기
박은봉 지음 | 웅진닷컴 펴냄
※ 이 도서를 구매하신 고객 분께 알립니다! [한국사 편지 세트] 일부 품목에서는 별책부록인 '역사 여행을 떠나요'가 발송되지 않았습니다. 별책부록을 받지 못한 고객 분에게는 별도로 별책부록을 보내 드립니다(출판사로 연락해 주시면 바로 발송해 드립니다). 문의전화 : 웅진주니어 편집부 02-3670-1590, 영업부 3670-1501 불편을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학부모의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 역사책 친근한 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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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지음 | 건국대학교출판부 펴냄
이조말의 김옥균이 그가 주동한 갑신정변의 거사에 실패하고 망명처인 일본 땅에서 정변의 전후를 회고하면서 적은 기록으로 당시의 정세와 정변의 실상을 생생 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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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1882년. 임오군란이 조선에 미친 영향에 대한 글

1. 1882년이 나타내는 시대적 상징은 무엇인가?

이번 장에서는 임오군란에 대하여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임오군란 하면 보통 <임오년에 일어난 구식 군대의 난>이라고 알고 있고, 또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시시콜콜 다 아는 이야기, 교과서에 써 있는 이야기를 굳이 또 적을 필요가 있을까... 고민끝에 이번 포스트에서는 임오군란을 1882년이 가지는 상징성을 가지고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도록 하겠습니다. 임오군란이 과연 군란인가? 이런 주제로요. 일단 지난 장까지 설명했던 <개화, 위정척사, 조선책략>이라는 부분을 복습해 놓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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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임오군란 때의 격전지 모습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의 조선은 국론이 분열되고, 국가 체제가 동요하는 시기였습니다. 그 이유는 1880년 조선 책략이 유입되고 민씨정권이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실시하면서부터 <조선책략 거부운동>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죠. 외국과 통상을 하겠다는 개화파와 민씨정권에 대하여 기존의 성리학 유생들은 <위정척사운동>을 <정권타도 운동>으로 발전시켜 가면서 국가 위기 상황이 발생하였습니다.

거기에 세도정치이래 계속된 정치의 혼란은 백성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제시해주지 못하였죠. 백성들 입장에서 생각해보세요. 정치는 혼란하지, 세금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올라갔지, 부농과 소작농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지.... 1882년의 농민들은 산업혁명기의 영국과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농민들은 몰락하여 개화된 도시로 몰려가서 도시 빈민을 형성하였고, 도시에서는 소수 자본가 집단이 성장하려는 중이었습니다.

실제 1882년의 상황을 가지고 이후의 상황을 추론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되네요. 동학운동은 변화하는 사회체제 속에서 농민들이 살 길을 찾았던 운동이고, 갑신정변은 소수 자본가 집단의 영향력을 밀어주면서 우리나라에서 부르조아지 근대화를 시도하려던 개혁이었습니다. 갑오개혁은 전근대적인 문제점들을 조금이나마 시정하면서 신분제, 조세제를 개혁혀였죠.

1882년에는 <조선책략>의 유입 이후, 개화, 척사라는 거대한 시대 흐름이 정면 충돌하는 한 해였습니다. 개화파들은 1882년 <조미수호조약>을 맺고 조선책략의 내용대로 미국을 통상국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나 백성들과 보수파들은 그것을 환영하였을까요? 아니죠. 백성들은 일본과 서양 열강이 조선의 상권, 농업권에 침투하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민씨세력의 개화정책에 회의를 느낀 보수파들과, 세도정치 이래 문란한 정치에 질린 민중들은 강력한 리더쉽을 가진 흥선대원군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야 말로,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일본세력 등 외세의 침투에 대항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한 것이죠.

2. 1882년... 민중들은 반란거리가 필요했다.

1882년의 상황은 홍경래의 난, 진주 농민 봉기 등의 농민 반란이 계속 일어나던 세도 정치 이후, 1863 - 1873년까지 농민봉기가 없었던 <농민운동의 침체기>입니다. 그 이유는 10년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강력한 리더쉽으로 농민들의 요구 사항이었던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면서, 조세 제도를 일부 개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876년 민씨정권이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민중들은 한없이 추락해가는 자신들의 지위에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개화정책의 과도기적 분위기 속에서 농민들의 몰락으로 도시 빈민이 한없이 늘어만 갔습니다. 즉, 임오군란 때 군인들의 봉기가 아니였어도 이미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몇몇 구식군대의 봉기인 임오군란이 조선 역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정도로 크게 번진 이유는 임오군란 직후 <도시 빈민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연구가 더 이루어져서 역사가 다시 평가한다면 <임오 시민혁명>까지는 아니더라도, <민란적 성격을 가진 군인봉기>까지는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임오군란과 같은 시민봉기가 있지 않았다면, 불만이 쌓일대로 쌓인 농민들의 <동학농민전쟁>은 10년이 앞당겨졌을지도 모릅니다.

실제 1882년은 외세로 인하여 민중이 시련을 겪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정부의 세금 말고도 일본이 무역을 빙자하여 가져가는 쌀이 어마어마하였습니다. 조선 전역에서는 쌀값이 폭동하여 안그래도 힘든 빈민들의 생활을 더욱 어렵게 하였죠. 임오군란의 원인이 구식군인들의 월급이 1년 6개월 이상 밀렸다는 것에서 보았을 때도, 이 당시 쌀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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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임오군란 당시의 빈민의 모습

3. 구식 군인들의 불만은 <개화와 일본에 대한> 불만이었다.

임오군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구식군인에 대한 차별>입니다. 실제 민씨정권은 적극적인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신식군대인 별기군을 양성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신식군대가 나라를 지키기 위한 군대라기 보다는 <지배층을 위한 군대>라는 편이 더 어울렸습니다. 예로, 조선 후기 서인 특정 가문이 집권을 하면서부터 조선의 군대는 국가의 군대라기 보다는 <서인>의 군대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 전기 <5위>가 조선 후기 <5군영>으로 바뀌면서 부터였죠. 세도정치기에 특히 심했던 이 <지배층을 위한 군대 역할>이 흥선대원군기에 <국가를 위한 강력한 군대>로 재편되었지만, 민씨정권에서는 다시 <지배층을 위한 군대>로 전락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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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임오군란 당시 구식군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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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임오군란 당시 신식군대의 모습

흥선대원군 때 강력하게 재편한 <5군영>을 민씨정권은 <2영>으로 줄여버립니다. 그러고 남는 돈을 신식군대에 투자한 것이지요. 신식군대를 정말 확실한 <국가 군대>로 육성했다면 좋았겠지만, 신식군대의 주요 구성원은 양반집 자제들이었습니다. 대우는 무지 좋았고, 돈먹는 귀신들이었지만 전투력은 글쎄요.... 거기에 그들을 가르치는 신식 장교가 군사 선진국이었던 일본 장교라는 점은 구식군대와 국민들을 아주 열받게 만드는 일이었죠. 또 신식군대의 제복을 마련한다는 이유 등으로 구식군대에게 1년이상 월급을 안주었다는 점도 임오군란의 원인이 되었씁니다. 결국, 임오군란을 일으킨 구식군인들의 불만은 헛돈쓰는 개화정책과 일본이 우리 내정과 군사권에 간섭하는 분위기가 싫다는 것이었죠.

4. 시민들이여, 일어나라!

1882년, 드디어 구식군인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사실, 신식군대에 비해 무기나 인력에서 부족한 구식군대의 폭동이 손쉽게 성공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하였습니다. 민씨정권도 구식군대를 우습게 보았거든요. 그러나, 문제는 이 폭동에 도시 빈민들과 일반 백성들이 적극 참여하여 <시민 폭동>적인 성격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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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임오군란 때 구식 군인들의 폭동 경로

도시 빈민들은 군인들과 합세하여, 민씨일족들의 집을 불태우고 정부고관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일본 공사관으로 향합니다. 우리를 간섭하는 외세를 물리치자는 것이었죠. 그들은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에 불을 지릅니다. 성난 군중들은 궁궐에 침입하여 왕비인 민씨까지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구식군인들과 빈민들이 왕비의 얼굴을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이지요. 민씨는 시녀 복장을 하고 궁밖으로 도망가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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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6) 임오군란 당시 나가사키로 도망간 일본 공사관 직원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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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7) 임오군란을 피해 도망다니던 중의 명성황후 일기가 최근 발견되었다.

이렇게 국가 위기 상황이 발생하자 고종은 아버지 흥선대원군에게 다시 정권을 넘기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시민들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개화정책을 다시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되돌리기 시작합니다. 2영체제를 다시 5군영으로 돌려 구식군대를 강력한 상비군으로 정비하고, 개화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였죠.

5. 민씨 정권의 반격으로 조선의 주도권은 <청>에게 넘어가다.

도망간 왕비 민씨는 다급함에 청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청군은 국모인 민씨의 부름이라는 근거를 들어 당당히 서울로 쳐들어와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민씨를 다시 궁궐로 돌려보냅니다. 임오군란은 결국 외세에 의해 실패하고, 시민들의 봉기는 무참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외교적 전환점이 마련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청나라의 전면적인 내정 간섭>이 시작되었다는 점입니다.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임오군란을 진압하면서 민씨를 도운 청나라는 아예 정치고문과 외교고문을 우리나라에 보내어 우리 나라에 종주권을 행사하려고 하였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다가 공룡을 불러온 셈이죠.(민씨정권은 위기때마다 일본, 청, 러시아 등 외세에 의존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개화기 근대사를 엉망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럼 청나라가 우리의 내정을 적극적으로 간섭하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장하는 일본 때문이었습니다. 청은 일본이 조선에 간섭하는 것을 보면서 동아시아 전체에서 일본을 막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일본은 청, 러시아 등 대륙 세력을 막고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해양 전체를 일본의 상품시장으로 개척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에도 일본이 요구한 첫째 내용이 바로 <조선은 자주국가이다>라는 조약이었습니다. 조선이 자주국이어야 청 등이 조선에 대해 종주권을 행사할 수 없을 테니까요.

청 역시 이러한 일본의 야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청이 임오군란 이후 우리 내정에 적극 간섭한 이유는 조선시대 이래 <형식적인 조공무역>을 통해 속국 관계로 생각하던 조선을 <실제적인 식민지>로 만듦으로서 일본이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 당시 청의 실권을 잡고 있던 사람은 그 유명한 <위안스카이>였습니다. 위안스카이의 목적은 조선에 친청 정권을 수립하여 <조선은 청의 꼭두각시이다>는 것을 확실히 하려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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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스카이

따라서 청은 민씨정권의 개혁기구인 통리기무아문을 개편하여, 통리교섭통상아문(외교부), 통리군국사무아문(행정부)를 신설합니다. 또 5군영도 청나라 식으로 개편하는데, 위안스카이의 직속군영인 <친군영>을 세우고, 그 밑에 4개의 군영을 두어 모든 조선의 군권을 위안스카이가 장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감시하기 위해 군사고문인 마젠창, 외교고문인 뮐렌도르프를 파견하여 모든 정치 상황을 감시하였습니다.

6. 조청 상민 무역 장정을 체결하다.

1882년은 우리나라의 경제면에서도 획기적인 해입니다. 임오군란 이후, 청은 우리 나라에서 자유로이 무역을 하면서 경제적으로 일본을 누르기 위해 <조청수륙 무역장정>을 발표하였기 때문입니다.

전문(前文) : 조선이 속방임과 청상의 특혜규정
 “오직 이번에 체결하는 장정은 중국이 속방을 우대하는 후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다른 각국과 일체 균점하는 예와 다르다”

 제 1조 청국 상무(商務)위원의 파견 및 이들의 처우,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이 대등한 위치임을 규정.
 제 2조 조선내에서의 청 상무위원의 치외법권을 인정
 제 3조 조난구호 및 평안.황해도와 산동.봉천 연안지방에서의 어채 허용(청국인의 조선연안 어업권을 인정). 관세규정
 제 4조 북경과 한성.양화진에서의 개잔(開棧)무역을 허용하되 양국상민의 내지채판(內地采辦) 금지. 단 내지채판 및 유력(遊歷)이 필요할 경우 지방관의 집조(執照)를 받을 것.(개항장이 아닌 서울 양화진(楊花津)에 청국인이 점포를 개설할 수 있는 권리와 도성에서의 상행위 허용. 호조(護照:일종의 여행증명)를 가진 자에게는 개항장 밖의 내륙통상권과 연안무역권까지 인정) 관세규정.
 제 5조 세칙규정. 책문.의주, 훈춘.회령에서의 개시
 제 6조 홍삼무역과 세칙규정(국경무역에서 홍삼을 제외한 5 % 관세)
 제 7조 초상국윤선(招商局輪船) 운항 및 청 병선의 조선연해 왕래.정박
 제 8조 장정의 수정은 북양대신과 조선국왕의 자문으로 결정.

조청상민수륙 무역장정은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우리에게 경제적으로 치명적인 무역약관이었습니다. 위에 파란 줄 보이시죠? 그것 때문입니다. 이 조약의 핵심은 <조선에서 청상인이 자유롭게 거주하고, 여행하고, 영업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규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이제 <항구에서의 거류지 무역>뿐만 아니라, 내륙에서의 자유로운 무역을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 배웠던 <최혜국 대우>... 기억나시나요? 최혜국 대우란, 어느 한 나라에게 맺은 정치, 경제적 조약을 조약 당사자인 국가에게도 똑같이 적용한다는 불평등 조약의 내용을 말합니다. 이 청과 맺은 <내륙 무역 허가>는 최혜국 대우에 의해 일본, 미국, 영국 등등 다른 모든 국가에게도 적용됩니다. 그 결과 우리 경제는 이 때부터 파탄나기 시작하고, 우리 전통 중계무역상인으로 볼 수 있는 객주, 여각 등은 몰락하게 되죠.

또, 이 장정의 승인으로 일본도 조일수호조규 속약과 조일 통상장정을 개정할 것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 1880년대 중반부터 청과 일본은 조선의 경제권을 놓고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그 결과는 1889년 방곡령과 1894년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로 인해 일본이 경제적 주도권을 가져가게 되죠.

7. 일본도 얻을 것은 다 얻는다 - 제물포 조약의 체결

임오군란은 청의 전면적 간섭을 초래하였지만, 일본에 단숨에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일본은 일본 공사관이 불타고, 일본인들이 죽었다는 이유로 우리 정부에 강력한 손해 배상을 요구합니다. 또, 일본 공사관이 다시는 피해보지 않도록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을 주둔시킨다는 명목으로 우리 나라에 <군대>를 파견합니다. 이것이 제물포 조약입니다. 제물포 조약의 내용을 줄이면, 청에 의해 입지가 약해진 일본이 조선에 <군대 주둔>을 하면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해 나간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 조약은 결국 조선에서 청의 군대와 일본의 군대가 동시에 거주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훗날, 갑신정변 때 맺은 톄진 조약으로 청과 일본군대는 <동시파병 공동철수>를 결의하게 되자만, 그 조약은 동학운동 때 청일전쟁을 야기하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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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8) 풍자화 - 제물포 조약 체결을 위한 일본의 진격

8. 급진개화파가 등장하다.

임오군란의 실패로 인해 청이 조선에 대한 전면적인 내정간섭을 하였습니다. 이 것은 민씨정권이 스스로 개화를 할 수 없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온건개화파들의 입지는 약해졌고, 반대로 <일본의 힘을 빌려서라도 청을 타도해야 한다>는 급진개화파의 이론이 힘을 얻게 됩니다. 특히, 급진개화파는 청의 경제 구문인 묄렌도르프와 대립하면서 청의 보수적 정책에 반발하였고, 고종을 사이에 두고 친청세력과 급진개화세력이 대립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갑신정변에서 다루도록 하죠.

오늘은 임오군란과 그 결과에 대하여 글을 적어보았습니다. 하루종일 일하고, 밤에 술을 먹고... 새벽에 글을 쓰려니깐 글이 횡설수설이네요. 내일은 말짱한 정신으로 아자아자.... 끝까지 읽어주신 분들은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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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9)임오군란에 대한 풍자화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 자세한 내용은 이 책에.....

찬란한 여명 4:임오군란 상세보기
신봉승 지음 | 갑인출판사 펴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상세보기
김용구 지음 | 원(이보란) 펴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대하여 19세기 세계정세와 관련하여 설명한 연구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같이 한국사와 세계사의 충돌에서 나오는 격동적인 사건들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했고 그런 대응 태도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 국제정치 구조에서 살아가는 데에 치유할 것이 있는지 해부한다.
한국 근현대사(숨마쿰라우데) 상세보기
박준규 지음 | 이룸이앤비 펴냄
최상위권을 지향하는 수험생들을 위한 숨마쿰라우데 시리즈 『한국 근ㆍ현대사』. 숨마쿰라우데의 본문은 전체의 난이도에 따라 2중 체제(CUM LAUDE 단계와 SUMMA CUM LAUDE 단계)로 구성하였다. 즉, 교과 학습 내용에 대한 본문 설명 2단계와 해당 단원의 문제 부분 2단계로 짜여져 있어 심화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학습 개념을 확실히 잡으면 내신, 수능, 심층 면접 등 어떤 시험도 두렵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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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기외 지음 | 두리미디어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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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상세보기
김육훈 지음 | 휴머니스트 펴냄
미래의 눈으로 한국 근현대사를 읽는다 <살아있는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는 우리나라 청소년을 위한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야말로 오랜 세월의 분투를 통해 달성한, 그래서 돌이킬 수 없는 우리 모두의 현재임을 분명히 하면서 우리가 실현한 민주주의,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란 관점에서 한국 근현대사를 살펴본다. 대안적인 특징점을 바탕으로 21세기 근현대사 인식과 역사교육,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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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연구소 지음 | 서해문집 펴냄
이 책은 역사 사실을 바탕으로 서술하되 새로운 연구성과를 받아들이고 이를 종합 정리했다. 근현대사를 통사로 서술하는 한편 각 장은 각 시기의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서술했으며, 사진과 자료를 직접 수록해 객관성을 높였다. 또 각 강의 끝부분에 기존의 중요 연구 성과와 최근의 성과를 실어 참고할 수 있도록 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상세보기
김용구 지음 | 원(이보란) 펴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대하여 19세기 세계정세와 관련하여 설명한 연구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같이 한국사와 세계사의 충돌에서 나오는 격동적인 사건들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했고 그런 대응 태도가 남긴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 국제정치 구조에서 살아가는 데에 치유할 것이 있는지 해부한다.
중국 역사 이야기 14(청나라) 상세보기
박덕규 지음 | 일송북 펴냄
온 가족이 함께 읽는 <중국 역사 이야기> 제14권. 중국의 전체 역사를 시대별, 왕조별로 나누어 그 시대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중국 역사에 쉽게 접근하고 싶어하는 초등학생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이 책은 주왕조시대부터 청나라까지 약 3천년에 이르는 중국 역사 대부분의 중요한 사건과 인물들을 총망라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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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우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부 펴냄
대학의 교양 한국사 교재. 크게 2개 부로 나눠 제1부에서는 한국사의 각 시대별 특징을 14주제로 압축하여 정리하고, 2부에서는 문화사와 사회경제사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10개의 주제를 따로 설정하여 분류사 형식으로 서술했다.
한국사신론(한글판) 상세보기
이기백 지음 | 일조각 펴냄
역사적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고 구체적 사실들의 시대적ㆍ사회적 연결관계를 찾아 이를 체계화한 한국 역사서. 한국사의 새로운 이해, 원시공동체의 사회,성읍국가와 연맹왕국,문벌귀족의 사회, 민족국가의 태동과제국주의의 침략, 민주주의의 성장 등 17개 장으로 구성하였다.
이현세의 만화 한국사 바로보기 세트 (전10권) 상세보기
유경원 지음 | 녹색지팡이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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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한국사 교과서2 20세기를 넘어 새로운미래로> 20세기의 지난 역사를 되돌아 보고 21세기 새로운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가꿀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또한 본문으로 들어가는 창에는 단원마다 역사 사진에 청소년 캐릭터를 넣어 역사 체험을 좀더 재미있고 생생하게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여성과 역사에서는 세상의 절반이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여성들의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고 '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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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케스트 방송 1회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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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방송에서 무지 버벅버벅.... 이해 부탁 드려요...


1회 팟케스트 방송내용

   1. opening 역사 속에서 상상하는 만약이란 단어는?
   2. 음악 : 아, 고구려 by 서희
   3. 동화 피리부는 사나이와 역사 속 이야기
   4. 음악 : 김삿갓 by 홍서범
   5. 조선시대에도 증기선을 만든 적이 있다.
   6. 음악 : 경복궁타령 by 국립합창단
   7. 나폴레옹에 관련된 일화와 나레이션
   8. 음악 : 로렐라이 전설 by 징기스칸
   9. end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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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송에 나왔던 내용을 더 자세히 알 수 있는 참고 문헌들...
불끈불끈 나폴레옹(앗 이렇게 훌륭한 인물이 71) 상세보기
믹 고워 지음 | 김영사 펴냄
뛰어난 장군, 천재적인 군사전술가, 정복자의 대명사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진짜 정체는 뭘까? 지중해의 작은 섬, 코르시카에서 태어난 촌뜨기가 유럽 대륙을 호령하는 황제가 된 비결과 천하를 손에 넣은 그가 작은 섬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유는 무엇이지? 나폴레옹에 대한 오해와 비밀을 밝힌다.
벳시와 황제(세인트헬레나 섬의 나폴레옹과 한 영국 소녀 이야기) 상세보기
스테이턴 래빈 지음 | 오즈북스 펴냄
세인트헤레나 섬에 유배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유배지 식량조달관의 딸인 벳시 발콤의 우정과 삶, 참사랑을 다룬 소설. 실화를 바탕으로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나폴레옹의 마음과 생각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그의 유배 시절을 흥미진진하게 재창조해 낸다. 워털루전투에서 패배한 뒤 영국의 포로가 된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유배된 나폴레옹은 열네 살짜리 영국 소녀 벳시 발콤의 가족의 집에서
나폴레옹의 영광(HISTORY IN YOUR HANDS 3) 상세보기
리처드 홈즈 지음 | 청아출판사 펴냄
나폴레옹의 일대기와 업적을 정리한『HISTORY IN YOUR HANDS』제3권. <나폴레옹의 영광>은 리처드 홈즈를 비롯하여 영국의 저명한 군사역사학자들이 참여한 책이다. 당시의 사료와 그림 250여 점을 바탕으로, 나폴레옹의 탄생부터 몰락까지를 흥미진진하게 다루고 있다. 풍부한 자료를 통해 나폴레옹의 특별한 시대를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이 책에는 유럽 전역의 문서 보관소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피리부는 사나이(영어로 읽는 세계명작 스토리 하우스 20) 상세보기
편집부 지음 | 월드컴 펴냄
영어로 읽는 세계명작 스토리 하우스 20번, 피리부는 사나이 편. 주요 어휘나 숙어는 설명을 달아 놓았다. 각 Chapter의 마지막엔 질문을 수록하여 제대로 이해했는지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 테이프가 함께 들어있는 합본교재(책+테이프) 별도 판매. 구입시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 상세보기
로버트 홀든 지음 | 문학동네어린이 펴냄
한 마을의 아이들이 피리 부는 사나이를 뒤따라가 모두 사라졌다는 이야기. 독일 전설을 바탕으로 로버트 브라우닝의 <피리부는 사나이>를, 드라호스 자크의 그림으로 새롭게 꾸몄다. 초현실주의 회화를 떠올리게 하는 세밀한 펜화는, 그 어느 그림 보다 뛰어나다.   쥐 떼의 횡포로 지쳐가는 마을 사람들. 쥐 떼만 없애준다면 마을의 보물이란 보물은 모조리 줘도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이때 그들 앞에 낯선 사나이가 나
하멜른의피리부는사나이외(33.엘리트영어명작교재) 상세보기
HANS CHRISTIAN ANDERSEN 지음 | 월드컴 펴냄
우리들에게 친숙한 세계 명작을 통한 영어 학습서. 엘리트 영어명작 길라잡이 시리즈 제33권. 한스 크리스찬 알델센의 <하멜른의 피리부는 사나이>와 <거짓말쟁이 와퍼>, <재미있는 이야기들> 등 3편을 묶어 영어로 싣고 단어와 숙어, 중요 어구들을 해설했다. 중급편
십자군 이야기 1(충격과 공포) 상세보기
김태권 지음 | 길찾기 펴냄
역사만담꾼 김태권의 유쾌한 지식만화. 십자가의 이름으로 행해진 침략전쟁. 당시 지배층의 정치적 야욕, 기사계급의 물질적 욕구, 순진한 민중들의 헛된 기대라 한 데 모여 일어난, 거대한 집단적 욕망의 폭발이었던 '십자군 이야기'를 담았다. 해박한 시사 상식과 올곧은 시선 속에서 더욱 의미를 갖는 톡톡 튀는 작가의 위트와 함께, 로마네스크 양식의 그림체가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을 이룬다. ♧ 저자 소개 지은
만화 세계사. 8: 십자군 전쟁 몽고 제국과 칭기즈 칸 상세보기
무로타니 츠네조 지음 | 삼성출판사 펴냄
『만화 세계사』시리즈 제8권《십자군 전쟁ㆍ몽고 제국과 칭기즈칸》. 본 시리즈는 재미난 만화를 통해 세계사를 살펴본다. 각 권은 특정한 주제와 지역을 다루었으며,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중간 중간마다 삽화와 사진, 용어 설명을 곁들였다. 8권 <십자군 전쟁ㆍ몽고 제국과 칭기즈칸>에서는 십자군 전쟁과 칭기즈 칸이 등장한 10~15세기의 동서양 역사의 흐름을 살펴본다. ☞ 이런 점이 좋습니
살라딘(십자군에 맞선 이슬람의 위대한 술탄) 상세보기
스탠리 레인 풀 지음 | 갈라파고스 펴냄
동서양 모두에서 찬탄과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이슬람의 전설적 영웅 살라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십자군으로 부터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적국의 왕과 포로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 "가장 기사도적이며 고결한 정복자"라 칭송받았던 인물이다. 이 책에서는 살라딘의 뛰어난 군사적 지략과 인간적이고 종교적인 면모에서 나오는 참 군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채우리 역사 만화 2) 상세보기
이범기 지음 | 채우리 펴냄
아동용 역사만화. 명성황후는 곧잘 불만과 질투의 화신, 흥선대원군과 대립한 여인으로만 그려지곤 합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외세의 힘의 균형을 통해 우리 나라의 주권을 지키려 애쓴 인물이에요. 명성황후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국권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는지 그리고 당시의 국내외 정세가 얼마나 급박하게 전개되었는지 자세하게 알 수 있을 거예요. 채우리 학습만화 시리즈 2.
흥선대원군 사료휘편(전4권) 상세보기
석파학술연구원 지음 | 현음사 펴냄
<흥선대원군 사료휘편> 전4권 세트. 후손들에게 흥선대원군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주고자 했다. 다양한 사료들을 번역하여 수록했다.
만화 세계사. 10: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상세보기
무로타니 츠네조 지음 | 삼성출판사 펴냄
『만화 세계사』시리즈 제10권《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본 시리즈는 재미난 만화를 통해 세계사를 살펴본다. 각 권은 특정한 주제와 지역을 다루었으며,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중간 중간마다 삽화와 사진, 용어 설명을 곁들였다. 10권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에서는 17~18 세기의 근대 유럽을 중심으로 동서양 역사의 흐름을 살펴본다. ☞ 이런 점이 좋습니다! 「만화 세계사」시리즈는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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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일본사 이야기 22> 일본의 근대화 1 - 에도막부의 중농주의와 계급분화

1. 에도막부가 흔들리기 시작하다.

오늘부터는 일본 근현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일본 근대사하면 생각나는 것은? 당연히 <메이지 유신>이겠죠? 그럼, 오늘부터는 <메이지 유신>을 키워드로 삼아, 메이지 유신이 일어난 배경과 내용,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일본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펴보아야겠네요. 그럼 한번 출발해 봅시다...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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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장까지 에도 막부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죠. 그런데, 에도 막부를 다룰 때 아주 중요한 키워드를 <막부의 경제정책>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일본과 동아시아의 17-18세기는 <상품화폐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던 시기였습니다.

중국과 조선, 일본에서는 새로운 농법이 계속 개발되면서 상업역시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었죠. 당시 동아시아 각 국가에는 부유한 농민, 부유한 상인, 상품경제 발달과 화폐유통의 증가라는 수식어가 공통적으로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아시아 3국은 전통적으로 농업경제를 우선시하였고, 당시 3국은 공통적으로 <성리학이 관학화>된 사회였습니다. 성리학에서는 농업을 제 1의 근본산업으로, 상업은 농업을 보조하는 보조산업으로 인식하였죠. 성리학에서는 토지를 바탕으로 한 신분제도와 차별적인 윤리의식을 강조했으니까요.

일본 역시 그랬습니다. 에도 막부는 쇄국정책으로 서양과의 교역을 막는 입장이었고, 성장하는 상업자본은 농촌 자본으로 돌리던가, 막부의 재정으로 돌리려는 극단적인 방책을 사용하여 <사회제도와 신분제도>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은 시대의 흐름이었습니다. 막부는 이 상품 화폐 경제로 인한 이득을 <세금>으로 환원하는 정책을 사용하였습니다. 상업자본은 성장하면서도, 그 이윤의 전부를 재투자할 수 없었고, 자본이 없으면서 세금이 늘어난 하층 무사들은 빈곤함으로 힘겨워하였습니다.

일본은 18세기가 지나가면서 사회분화가 심해져갑니다. 부자농민들(호농, 부농)은 상품작물을 재배하면서 막부가 원하는 세금을 낼 수 있었고, 남은 자본으로 수공업에 뛰어들어 대기업을 이루게 됩니다. 상업자본으로 성장한 부유상인들은 전국적인 상업망을 이용하여 장시를 활성화하였고, 도시 중심의 상업문화(죠닌문화)를 만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자본이 없는 자들은 한없이 추락하게 됩니다. 막부가 원하는 세금을 낼 수 없는 가난한 농민들은 소작농이 되거나, 공장 노동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조선의 18세기 몰락한 양반들이 상민들에게 천대받는 시기가 있었던 것처럼, 일본의 몰락한 무사들은 부유한 상민보다 못한 처지가 됩니다. 하층 무사들과 가난한 농민들은 점차 에도 막부에 질리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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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막부에 대한 불만 세력이 늘어날수록 막부는 더욱 더 많은 세금을 걷어내면서 막부를 유지해나가는 상책도, 중책도 아닌 최하책으로 국가 경제를 이끌어가고 있었습니다.

막부의 세금은 토지에 집중되었습니다. 18세기 당시 청, 조선, 일본은 모두 세금을 <토지>로 집중시켜가고 있었습니다. 청은 <일조편법과 지정은제>, 조선의 <도결제와 삼정의 문란> 등은 세금을 가장 걷기 편한 <토지>에 때려 버린 제도였죠. 일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본의 세금은 영지세(연공)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세금이 증가할수록 시중의 물가는 뛰었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고달펐죠. 물가가 오르면 새로 성장하는 도시상인이나, 부유한 농민들은 시세차를 이용해 더욱 재산을 불렸고, 능력없는 하층민들은 더욱 빈곤해집니다.

더 문제점은, 그나마 성장하는 새로운 농민, 상인들마저 국가가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이들에게 세금만을 걷어 막부체제를 유지하려고 하였지 이들을 이용하여 <근대화된 일본>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막부에게는 없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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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의 근대화는 <메이지 유신>인가, <죠닌 문화>인가의 논쟁

동아시아 3국의 근대화 논쟁은 각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동아시아 3국의 근대화가 자생적이지 못하고 외세에 의해 강요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로, 중국에서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으로 인해서 근대화가 되었는가라는 논쟁이 있습니다. 아편전쟁이 중국의 근대화라면 중국의 근현대사는 유럽에 의해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에 중국 학자들은 명, 청대의 사회경제적 발전에서 근대화의 가능성을 찾으려고 합니다.

조선에서 근대화의 시작은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학자들간에는 치열한 논쟁이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흥선대원군기에 이미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어떤 학자들은 실학자들로부터 근대화의 싹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실제 근대화의 법령이 반포된 갑오개혁기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학자들은 개화파의 등장이나 갑신정변이 근대화의 계기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개혁군주인 정조 때부터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죠.

중요한 것은, 근대화라는 개념이 성립되는 조건이 무엇인가라는 점입니다. 근대화라는 것은 최소한 3가지를 인식할 수 있는 시기를 말합니다. 일단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도입된 시기를 말합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사상>이 도입된 시기를 근대화의 기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두 사상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야 근대화라고 부를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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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의 근대화 논쟁은 크게 두 시기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입니다. 두 시기란, 에도 막부 후기와 메이지 유신기를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일본의 근대화는 메이지 유신에서 찾곤 합니다.(일본 교과서 견해)

일본이 서구 열강들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사상을 직접 받아들여 실천한 시기가 메이지 유신기였고, 그것을 법으로 반포한 것도 메이지 유신기입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전통적 가치관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잘못된 관습을 타파하고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일본 근대화의 공신은 메이지 유신기의 뛰어난 <몇몇 인물>들의 업적에서 찾곤 합니다.

그리고 메이지 유신이 성공한 것은 1854년 미일화친 조약으로 <미국과 정식 수교>를 맺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므로, 1854년이 일본 근대화의 기점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이죠.

그러나,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에도막부기 지본주의>를 내세우면서 일본 근대화의 흐름을 설명합니다.

이 논리는, 일본의 근대화가 하나의 흐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조선에서도 정조 때부터 이어진 연암 박지원 - 박제가 - 박규수- 김옥균(갑신정변) - 갑오개혁기 개화파 등의 인맥을 따라가면, 근대화의 인맥적, 사상적 발원지를 우리 내부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죠?

일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에도 막부기에 자본주의 사상을 가진 이들이 있었고, 민주주의적 정신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특히, 18세기 상품 화폐 발달과 상인층이 성장하면서 <죠닌 문화>를 이끌어간 중신층들이 그들이라는 것이지요.

이들은 동업조합과 도시문화를 이끌어 가면서 학교를 세웠고, 사상과 인맥을 계속 유지해 나갔습니다. 대상인들은 서구식 독점 자본주의와 비슷한 상행위를 하였고, 미쓰이 등 재벌이라는 구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쇄국정책 속에서도 네덜란드 등과 교류하여 학문(난학)을 유입하였고, 이 학문을 일본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근대화의 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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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메이지 유신을 근대화로 보는 이들은 이 주장의 문제점을 몇가지 지적합니다.

첫째, 상인들이 돈을 벌었지만 에도막부는 과도한 세금을 걷어가 상업자본이 균등하게 성장하지 못하였다는 점.

둘째, 당시 상인들이나 부유한 농민에게 법적으로 사유재산권이 인정된 적도 없고, 그 권리를 유지할 방안도 없었다는 점.(막부가 무력으로 재산을 강탈하면 빼앗기는 시대에 자본주의라 말하기 어렵다는 거죠...)

셋째, 에도 막부의 국가 정책이 상업을 억압하고, 농업을 중시하는 성리학 이념의 중농주의였다는 점 등입니다.

어떤 관점이 맞는 지는 일본 학자들이 알아서 싸우고 결론내리겠죠. 그럼 다음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보죠. 다음 장의 이야기는 일본의 <통상조약 체결 과정>과 <막부타도운동의 전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ㄱ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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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15 -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라!

1. 가마쿠라 막부의 쇠퇴

이번 장에서 다룰 내용은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교과서적인 이야기는 지난 장까지 대부분 이야기 했네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가문이 막부를 세웠지만, 요리토모가 갑자기 죽으면서 그 실권은 가장 유력한 호족 가문인 호죠씨에게 넘어갔고, 호죠씨가 막부를 대신하여 가마쿠라 막부를 이끌어 갔습니다. 실제 가마쿠라 막부의 중요한 알짜배기 시절은 모두 호죠씨의 시대였죠. 차라지 호죠 정권이라고 불러도 될만큼 호죠 가문은 막강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권력 구조는 이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형식적인 최고 권력자 천황 - 실제 권력을 가진 쇼군(미나모토노 막부) - 쇼군을 좌지우지하는 고케닌 가문인 호죠씨 - 호죠씨와 함께 연합정권을 구성했던 유력 가문들....

그러나, 호죠씨의 독재 시절은 천황의 입장에서 무척 불쾌한 것이었습니다. 막부가 실세도 아니고 막부 뒤에서 일개 신하 가문이 권력을 좌지우지 했으니까요. 거기에 몽골(원나라)의 1,2차 침입으로 민심이 흉흉하고, 몽골 전쟁에 참여한 유력 가문들이 제대로 보상조차 하지 않는 호죠씨에게 불만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자, 이렇게 호죠씨가 독재하는 가마쿠라 막부... 호죠씨와 막부에 대한 불만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죠. 한번 볼까요?

2. 13세기의 막부타도 운동 - 1221년 죠쿠 전쟁

첫 번째 막부 타도 운동은 <1221년 죠쿠의 반란>입니다. 이 반란은 미나모토노 쇼군이 약해지고 호죠씨가 실권을 장악하자, 대의명분이 없다는 이유로 천왕의 아버지(상왕)이 주도하여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원정 정치 기억하시나요? 일본에서는 천왕의 나이가 어리면 아버지가 대신 섭정하는 정치 형태가 있습니다. 조선에서는 고종이 나이가 어리자 흥선대원군이 1863년부터 10년간 정치했던 적이 있죠? 이런 정치 형태를 일본사에서는 <원정>이라고 하고, 상왕이 정치하는 고문기관을 <원청>이라고 합니다.

원정 상왕은 막부를 타도하고, 왕실과 공가의 권위를 회복해야 한다고 유력 신하들(고케닌)들을 설득하면서 난을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막부 타도 운동은 오히려 막부의 결속력만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명한 철의 여인으로 일본 사극에 자주 나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부인 호죠 마사코는 호죠 가문이 막부에 도움이 되었으며, 막부 타도가 얼마나 큰 실수인지를 연설하면서 눈물로 막부 타도를 외치는 무사들을 달래어 돌려보냅니다.

이 사건으로 천황가는 막부 타도에 실패하고, 천황가가 몰락해버립니다. 덕분에 아직 미약했던 초기 막부는 전국적인 세력을 규합하게 되었고, 막부정권은 그 기반이 튼튼해졌습니다. 또 무가의 기본 성문 법전인 <조에시키모쿠>가 제정되어 무가 정권은 법치를 바탕으로 하는 명실상부한 전국 정권으로 도약합니다.

막부 타도운동이 막부의 기반을 다지게 된 사건이라니, 아이러니 하죠?

3. 14세기의 막부타도 운동 - 1324년 악당이 등장하다.

14세기 가마쿠라 막부에 큰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전에 설명했던 막부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인 <몽골 침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교과서에서는 가마쿠라 막부의 붕괴를 <원과 고려 연합군의 침략>에 의한 무사층의 동요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가마쿠라 막부 멸망의 근본 원인은 <무사층의 동요>였지만, 자세히 보면 여기에도 막부 타도 운동이라는 키워드가 숨겨져 있습니다. 몽골(원구)의 침입으로 유력 신하(고케닌)들은 막부에 불만이 많아졌습니다. 그 이유는 수비전이었던 몽골전을 막은 대가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죠.

침략전쟁이라면 뭔가 노획물이라도 있을 텐데, 몽골 침입을 막은 수비전에서는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었고, 민심의 불안만 찾아왔던 것입니다. 가마쿠라 막부의 호죠 가문은 불만이 가득찬 무사들과 신하집단에게 무엇도 보상해줄 수 없었습니다.

천황가는 이 때를 막부타도의 기회로 생각했습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전국적인 막부 타도를 외치며, 천황을 위해 목숨 바칠 자들을 모았습니다. 호죠씨는 이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천황을 유배 보냅니다. 천황은 탈출해서 또 막부 타도운동을 하고.... 막부는 또 천황을 유배보내고... 숨바꼭질 전이 계속되지요.

천황을 죽이면 되지 않냐구요? 절대 안됩니다. 고대사 편에서 다루었지만, 일본 천황은 천손강림 이라는 형태로 정당성을 확보한 하늘의 자손입니다. 천황을 죽일 거였으면 막부를 세운 자들이 이미 죽였겠지요. 천황은 죽일 수 없는 존재니, 막부 타도 운동을 주도하고... 막부는 천황을 계속 유배보내고... ㅋㅋ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타도운동은 계속 실패하는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천황의 뜻에 동참하는 자들이 점점 불어났죠. 이 당시 사회불만세력으로 등장한 신흥무사집단을 악당이라고 하는데, 이 악당들이 막부 타도운동에 적극 동참하여 결국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게 됩니다.

악당은 나쁜 넘들 아니냐구요? 아닙니다. 만화방에 가보면 일본 만화중에 <악당>이라는 만화가 있어요. 정의를 위해 싸우는 좀 특이한 무사들의 이야기지요. 악당은 중국으로 보면 수호전의 영웅들, 한국으로 보면 홍길동 + 일지매 정도의 인물로 보면 됩니다. 대의를 품고 우국충정(?)에 들뜬 무사들을 말하죠. 당시대 개념으로는 사무라이와 좀 구분되는 개념 같습니다.

자 이렇게 해서 일본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는 무너지고, 다시 천황가가 권위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권력은 너무나 짧은 기간뿐이여서 역사에서는 이 시기를 무시하고 넘어가기도 합니다.

4. 1333-1334 겐무 신정기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한 고다이고 천황은 1333년 강력한 천황중심의 독재적 개혁 정치를 실시하려고 합니다. 우리식으로 본다면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쯤 되는 보수적이면서도 나름대로는 대의가 있는 개혁정치라고 할까요?

그러나 이 개혁정치는 2년뿐이었습니다. 천황가와 공가는 아주 짧은 시간에 무너지고 말죠. 그 이유는 천황의 생각이 악당들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천황은 천황중심의 세상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가마쿠라 막부를 박살내는데 일조한 무사집단인 아시카가 다카우지, 닛타 요시사다 등의 명장들은 천황이라도 자신들을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했었죠. 실제 이들 명장들은 가마쿠라 막부의 명장이기도 했지만, 새로운 세상을 위해 천황파에 가담했던 인물들이었습니다.

토사구팽 아시죠? 토끼사냥이 끝났으면 사냥개를 삶아먹는다는 중국 고사죠. 한고조 유방이 중국을 통일한 뒤 개국공신이자 명장인 한신을 죽였던 일화죠. 천황파 무사들은 위기를 느끼고, 천황과 등지게 됩니다.

천황의 신정치는 핵심 무사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반란으로 무너지게 됩니다. 또 다시 주인만 바뀐 막부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 아시카가 가문의 막부가 바로 <무로마치 막부>입니다.

그러나, 무로마치 막부는 <일본에서는 하늘의 후예인 천황을 모신다>는 이념을 버릴 수가 없는 막부였습니다. 일본 모든 막부가 형식적으로는 천황을 모실 수밖에 없었죠. 막부 실력자가 천황가가 아니라면 정당성 확보를 위해 천황이 필요했고, 막부 실력자가 천황가의 친척이라면 자신의 권위를 위해 천황가를 소흘히 할 수 없었으니까요.

이 때문에 무로마치 막부는 바로 성립되지 못하고, 북쪽에서만 권위를 유지합니다. 고다이고 천황은 남쪽에서 무로마치 막부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하였죠. 이 시기를 일본사에서 <남북조 시대>라고 합니다.

남북조 시대는 1336년부터 1392년까지 몇십년간이었죠. 그럼 다음장에서는 남북조 시대의 간단한 특징을 본 후 무로마치 막부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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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의 내용과 의의

1. 2차 갑오개혁의 배경(1894년 11월)

2차 갑오개혁은 1차 갑오개혁과 내용상의 큰 차이점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2차 갑오개혁은 그 추진 세력이 달랐습니다.

1차 갑오개혁을 주도한 어윤중 등 동도서기 계열은 개화파의 성격과 보수파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습니다. 1894년 7월부터 추진한 개혁은 그 개혁법안만 200개가 넘습니다. 200개가 넘는 개혁안을 발표한다는 것 자체가 너무 성급한 개화라는 것을 반증합니다. 200개의 법 이름만 외우기에도 벅찰 것 같네요.

구체적인 개혁내용은 신분제 폐지, 조세제도 개혁, 과거제 폐지 등등 근대화를 위한 핵심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개혁안에 대한 홍보를 하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었고, 1984년의 7월엔 이미 동학농민운동이래 농민 자치기구인 집강소에서 남부 3도의 행정을 관할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1894년 9월이 넘어가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일본의 개혁 강요로 인하여 2차 농민전쟁이 기포하였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졌습니다. 일본은 1894년 11월 농민군 및 청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이제 1차 개혁을 주도한 흥선대원군 및 동도서기 계열, 조선 보수 관료 등은 더 이상 필요없게 되었죠. 이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선의 개혁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의 개혁이 바로 2차 갑오개혁입니다.

일단 일본은 이노우에 가오루 등의 고문관을 조선에 파견하여 조선의 개혁에 감놔라, 배놔라... 시비걸기 시작합니다. 1차 개혁의 중심세력인 어윤중 등 동도서기 계열을 밀어내고 비교적 친일성향의 개혁파들과 함께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때 흥선대원군은 물러나게 되었고, 1차 개혁의 중심기구인 군국기무처도 폐지하게 됩니다. 일본의 목적은 청나라 세력을 확실히 제거한 뒤,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2차 개혁은 1차 개혁과 내용상 차이는 없지만, 일본의 침투에 용이한 조항과 조선 국왕권이 더욱 약화되었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2. 조선은 일본의 보호국이다.

일본의 개혁방침은 조선을 보호국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죠. 일본은 러시아를 막기위해 연합세력을 구축한 영국의 식민지 모델 방식을 벤치마킹하였습니다. 영국은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건설을 위해 막대한 돈을 이집트에 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수에즈 운하 건설이 늦어지고 이집트 스스로 그 차관을 지불할 능력이 없어지자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삼았습니다.

보호국이란, 차관(빚)을 진 나라가 돈을 갚을 능력이 없을 경우 돈을 빌려준 나라(영국)이 그 빚을 받기 위해 해당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경제적 제재를 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이집트 같은 경우 영국에 막대한 차관이 있기 때문에 돈을 갚을 때까지 제 3국이 이집트에 불평등한 경제제재를 가할 수 없습니다. 영국이 이집트를 보호(?)해주면서 이집트의 모든 피와 살을 뜯어먹는 형식이지요. 일본이 갑오개혁을 통해 조선에 가하려고 했던 방식이 바로 이 <보호국>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2차 개혁에서 일본은 <일본이 조선을 보호해주기 위한 법령>을 만들고, 일본의 고문관들을 파견하여 <고문정치>를 실시하려고 하였습니다. 그 선결조건으로 일본과 친한 박영효, 김홍집 등의 친일 내각을 수립하려고 했죠. 당시 개화파인 김홍집 등은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나갔던 적이 있어 일본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 선진화되는 길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들을 이용하는 것이 조선의 개화와 동시에 일본의 침략을 원할하게 하는 것임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은 실패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의 성장을 두려워한 <러시아의 간섭> 때문이었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고, 청이 한반도에서 물러나자 러시아는 긴장하였습니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 등과 함께 <삼국간섭>을 하였습니다. 3나라는 일본에게 청에게 강탈한 요동반도를 다시 돌려주고, 대만 땅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였죠. 청과 시모노세키 조약(마관조약, 하관조약)을 통해 대륙진출을 시도하던 일본은 러시아의 간섭으로 청일전쟁에서 빼앗은 땅을 다시 잃게 됩니다.

일본이 <삼국간섭>으로 조선의 내정개혁에 신경쓸 여력이 없어지면서 일본의 <보호국화> 정책은 결국 1894-1895년에 실현되지 못하고, 훗날로 넘어가게 됩니다. 삼국간섭이후 조선의 개혁은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파가 주도하게 되죠. 2차, 3차 개혁을 주도한 것은 1,2,3차 김홍집 내각(김홍집, 박영효 등)이었습니다.

2. 홍범 14조를 발표하다.

2차 갑오개혁 때 발표한 홍범 14조는 1차 갑오개혁의 내용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발표한 것은 2차 개혁 때였지요. 홍범 14조로 볼 때 1차, 2차 갑오개혁의 성격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내용을 한 번 볼까요?

① 청국에 의존하는 생각을 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② 왕실전범(王室典範)을 작성하여 대통(大統)의 계승과 종실(宗室) ·척신(戚臣)의 구별을 밝힌다.

③ 국왕이 정전에 나아가 정사를 친히 각 대신에게 물어 처리하되, 왕후 ·비빈 ·종실 및 척신이 간여함을 용납치 아니한다.

④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를 분리하여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⑤ 의정부와 각 아문(衙門)의 직무권한의 한계를 명백히 규정한다.

⑥ 부세(賦稅)는 모두 법령으로 정하고 명목을 더하여 거두지 못한다.

⑦ 조세부과와 징수 및 경비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에서 관장한다.

⑧ 왕실은 솔선하여 경비를 절약해서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⑨ 왕실과 각 관부(官府)에서 사용하는 경비는 l년간의 예산을 세워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⑩ 지방관제도를 속히 개정하여 지방관리의 직권을 한정한다.

⑪ 널리 자질이 있는 젊은이를 외국에 파견하여 학술과 기예(技藝)를 익히도록 한다.

⑫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제도를 정하여 군제(軍制)의 기초를 확립한다.

⑬ 민법 및 형법을 엄정히 정하여 함부로 가두거나 벌하지 말며,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

⑭ 사람을 쓰는 데 문벌(門閥)을 가리지 않고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

홍범 14조에서 가장 먼저 나온 것은 1조의 <청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라>입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 조선이 원한바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청은 청일전쟁에서 밀리며 이미 조선에 대한 간섭을 이전처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이 아닌 청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조항은 <일본의 조선 침략 목적>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2-5조까지의 내용은 <왕권을 확실하게 약화시킨다>는 조항입니다. 갑오개혁을 추진한 개화파들은 <왕권을 약화시키고 내각제를 실시하는 것>이 서양과 같은 근대화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 역시 그렇게 생각하였습니다. 조선의 왕권이 약해져야 <조선의 보호국 정책>이 수월해지니까요. 일본의 의도가 있었다는 점은 왕권은 약화시키면서도 군제를 확실히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에서 드러납니다. 군제개혁은 12조의 징병제도 뿐인데, 이 항목을 제외하곤 실제 1894년 조선의 군대는 더욱 약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에서 가장 시급한 개혁은 군대 강화를 일본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갑오개혁의 치명적인 약점이었습니다.

6-9조는 재정과 부세에 관한 항목입니다. 여기서의 핵심은 바로 <조세의 금납화 및 조세권의 일원화>이죠. 탁지아문이라는 재정 전담부서에서 부세를 걷고, 잡세를 폐지하여 농민들의 살 길을 열어준다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조세의 일원화는 국왕이 재정에 관여하지 못하게 함으로서 왕권을 약화시킨다는 것과 맥락을 같이합니다. 또, 토지개혁없이 세금만 이야기한다는 것은 농민들이 원한 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농민들은 눈가리고 아옹하는 식으로 잠깐 세금 깍아주는 것보다, 토지개혁을 통해 농민들이 원하는 <경자유전의 원칙>이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었으니까요. <경자유전>이란, 토지를 경영하는 자(실제 농사짓는 자)가 토지를 소유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부터 계속 주장되어온 내용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실현되지 못합니다.

특히 7조의 1년 회계를 예정한다는 <서구식 선예산주의>를 택한 것으로서 재정개혁의 근대화를 보여주는 획기적인 부분입니다. 또 13조의 민법, 형법 등의 법령을 정한다는 것은, 법령위의 헌법적 성격을 가진 강령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이 13조의 내용은 훗날 독립협회가 입헌군주제를 기반으로 한 법령을 만드는 것에 기본 근거가 되는 조항이 됩니다.

10조 이하는 신분제도 폐지, 능력위주의 인재등용 등 새로운 사회의 지침을 설명한 것입니다. 200개가 넘는 수많은 개혁 법안 중 가장 핵심을 추려 놓은 것이 바로 이 홍범 14조입니다.

홍범14조를 정치적인 면에서 본다면 <입헌군주제>가 핵심이겠네요. 왕도 법을 지키라는 것이죠. 이것은 실학자들부터 이어져 내려와, 갑신정변에서도 강조된 개화파의 개혁 핵심이었습니다.

사회적인 면에서 본다면 <신분제 폐지>가 핵심입니다. 이것은 동학 농민들이 주장했던 내용입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본다는 <재정 일원화와 금납화>이겠죠. 홍범 14조는 국가의 자주권부터 정치, 행정, 재정, 교육, 국민의 권리 등을 규정한 <국가 개혁을 위한 기본 방침>이었습니다.

홍범 14조는 자주독립국가임을 국가 내부, 외부에 선언한 최초의 선언문입니다. 그리고, 그 자주독립은 청의 종주권을 부인한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국가 개혁 강령으로 함으로서 서구적인 입헌주의를 도입하겠다는 의지를 알린 것이며, 서양식 헌법내용을 도입하겠다는 것을 알린 최초의 선언문입니다.

3. 2차 개혁만의 독특한 법안

1차 개혁의 내용 대부분이 2차 개혁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실제, 주도 세력이 누구인가만 다를 뿐 개혁 그 자체의 본질은 다를 바가 별로 없으니까요. 단, 2차 개혁에서는 제도적인 정비가 많이 추가되었습니다. 한 번 볼까요?

먼저 중앙제도에서는 본격적인 내각제도의 법제화라는 부분이 눈에 띕니다. 1차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개혁 주체가 <내각>이 되었고, 국왕권은 허수아비가 됩니다. 1차 개혁 때는 군국기무처라는 도깨비같은 기구가 개혁을 주도했다면 이제 서구식 <내각>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지요. 내각으로 개편하면서 의정부와 8아문이 서양식 <~~부>로 바뀌고, 이것을 7부라고 합니다. 7개의 부가 등장했죠. 요즘으로 말하자면 행정부, 경제부, 교육부 등등이 등장한 것이죠.

다음으로 지방제도도 바뀝니다. 조선시대 이래 우리나라 지방제도는 8도가 있고 그 밑에 군, 현이 있으며, 그 아래 행정단위로 방위개념이 강한 면, 촌락개념이 강한 읍, 향촌공동체 성격의 리 등이 있었죠. 이것을 23부로 바꾸고 지방 장관이 할 수 있는 권한을 확~ 줄여 버립니다. 그 이유는 철저한 개혁을 위해 전국을 <내각 주도>로 개편한 것이라고 볼 수 있죠.

또, 사법제도도 근대식으로 바꿉니다. 사법부가 왕권에서 완전 독립하였죠. 행정부는 사법부에 간섭할 수 없었고, 재판은 독자적인 재판소의 권한이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왕실재판소인 의금부, 관리감찰을 하던 사헌부, 행정재판을 보던 한성부 등의 권한은 모두 1심, 2심 재판소로 넘어갔습니다. 이것은 재판제도의 근대화라는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왕권 약화를 위한 일본의 의도였다는 점은 약간 아쉽기도 합니다.

교육제도도 근대화됩니다. 한성사범학교가 설립되어 교사를 전문적으로 양성하기 시작하였고, 소학교, 외국어 학교 관제가 공포됩니다. 물론 이전부터 있던 개념이긴 하지만 소학교, 중학교, 대학교 등등의 학명이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바로 세워진 학교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2. 2차 개혁의 중단

1차, 2차 개혁은 조선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그러나, 2차 개혁은 1년, 2년, 3년 계속적으로 진행되지 못하였습니다. 2차 개혁이 중단된 첫 번째 이유는 전술했던 <삼국간섭>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이 러시아에 의해 청일전쟁 승리의 노확물을 얻지 못하자, 일본 내부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고조되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 정책에서 잠시 주춤할 수밖에 없었죠.

두 번째 이유는 개혁의 추진 세력이 친일 개혁파였기 때문에 국민적인지지를 얻지 못하였다는 것에 있습니다. 조선의 국민들은 너나 할 것없이 갑오개혁에 간섭하는 일본 세력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특히,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였던 일본군에 대한 반감은 과거 임오군란, 갑신정변에 개입하였던 청나라에 대한 것보다 더 큰 것이었죠.

세 번째 이유는 친일 개혁파의 거두인 박영효가 1895년 6월 쿠테타를 일으키고, 국왕을 추방하려고 한다는 혐의로 추방당했기 때문입니다. 갑오개혁의 핵심은 <국왕권 약화와 내각제 강화>였습니다. 왕의 입장에서는 개혁파가 눈에 가싯거리였습니다. 좋은 개혁 내용도 있지만, 개혁의 핵심은 <국왕을 물로 본다>는 것이었으니까요. 조선에서 일본식 입헌군주제는 아직 시기상조였습니다. 박영효가 반대파의 음모 또는 쿠테타로 추방되면서 일본의 <조선 보호국 정책>은 완전 실패하였고 2차 갑오개혁에서 일본이 이루려던 야망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더구나 <삼국간섭>으로 고종과 민씨 왕후는 <러시아가 일본을 견재할 수 있는 대항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은 일본을 버리고 친러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게 됩니다. 일본은 당황하였고, 반일세력의 중심인물을 <민씨>를 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1895년 여름 일본은 <민씨 왕후>를 낭인자객을 보내 무참하게 살해하고 시체를 불지르는 <을미사변>의 만행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을미개혁이라는 3번째 개혁을 강요하게 됩니다. 그럼 다음장에서는 을미개혁에 대하여 이야기 해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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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1894)의 추진배경

1. 1894년... 왜 개혁이 필요했는가?

오늘부터 전개할 이야기는 갑오개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갑오개혁은 1894년에 1, 2차 개혁을 하였고, 그 다음해인 을미년에 3차로 을미개혁을 하였습니다. 이 개혁으로 조선은 서구식 근대화를 이루게 되었지만,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그럼 이 개혁이 이루어진 배경을 한번 볼까요?

갑오개혁은 우리 정부가 주체적으로 추진했다는 <자율성론>과 일본에 의해 강제로 추진했다는 <타율성론>의 시각이 있습니다. 이번 나중에 다루고 이번 장에서는 이 2가지를 적절히 다루어 보도록 하죠.

갑오개혁은 조선인 스스로 개혁을 해야 한다는 <개화파>의 개혁의지가 1894년 반영되었다는 점이 일단 중요합니다. 그동안 조선은 개혁을 추진하려는 세력과 그것을 막으려는 보수세력이 혼재해 있었습니다. 1860년대부터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반대 정책이 있었고, 외국의 침략적 움직임을 간파한 위정척사운동이 있었습니다. 반대로, 이미 1860년대에도 박규수, 유홍기, 오경석 등의 개화 선구자들은 외국의 문물을 적극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외세를 막으려는 위정척사와 외세를 받아들여 이용하자는 개화의 흐름은 1880년 조선 책략이라는 개화지침서가 들어오면서 대대적으로 충돌하였습니다. 1882년 조미수호조약은 개화의 흐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고, 같은 해 임오군란은 외세를 배척하는 움직임이 강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1884년 일어난 갑신정변은 <개화사상에 의한 조선의 개혁>이란 과제를 조선 사회 전체에 던진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많은 개화파가 죽었으며,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하면서 개화파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됩니다.

김옥균같은 <급진적 개화파>는 실패하였지만, 고종과 일부 개화파들은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기 위해 꾸준히 조선의 개혁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여, 대내외의 새로운 사상을 알렸고, 최초의 국립학교인 육영공원을 세웠습니다. 서양식 군사훈련을 위한 연무공원, 광산개발을 위한 광무국, 근대적 진신시설을 위한 전신국이 창설되었죠. 물론 이러한 시설들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없는 측면이 많았기 때문에 외국인 고문들이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청, 러시아, 일본 등에서 파견한 고문은 침략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지만, 근대 시설을 수용하기 위해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또 유럽 각국에서 넘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구한말 카톨릭 선교사들에게 먼저 빼앗긴 종교 입지를 찾아오기 위해 적극적으로 조선 포교에 앞장서게 됩니다. 원래 종교란, 순수한 목적으로 포교를 한다고 해도 국가적 차원에서는 그 포교를 정치적 논리로 해석하기 마련입니다. 서양에서는 종교적 포교를 목적으로 조선에 정치, 경제적 침투를 하려 하였고, 조선은 이들을 이용하여 조선의 근대화에 도움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우리 내정에 심하게 간섭하였던 청에게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 일본, 미국에 공사관을 개설하기도 하였습니다. 초대 주미 대사의 이름은? 훗날 독립협회의 헌의 6조로 유명해진 박정양입니다. 우리 정부는 청을 견재하기 위해 조러 비밀 협약을 체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청의 강력한 반대로 조러 비밀 협약은 실패하였고, 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은 소환당하기도 하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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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가운데)

2. 개혁의 불씨를 당긴 동학농민운동

조선은 점진적으로 개화의 단계를 밟아가고 있었습니다. 열강에게 둘러싸여 힘이 없었고, 조선 스스로의 개혁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외국의 힘을 조금씩 빌려 조금씩 국가의 체질 개선을 하는 중이었죠. 하지만, 조선의 백성들이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개혁이었고, 이 개혁이 과연 백성에게 혜택으로 돌아올 것인가는 의문이었죠.

학교를 세웠지만 양반자제들의 학교였고, 군대를 개편했지만 농민들과는 상관없는 군대였습니다. 농민들이 원한건 잡세를 없애고 토지개혁을 추진하며, 신분제도를 철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구를 가지고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은 정부를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더군다나 동학농민들을 진압하겠다던 명분으로 출병한 청과 일본은 동학과 정부가 정부화약을 맺고 대립을 끝냈음에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조선에 더 이상 머물 명분이 없었던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강력히 요구하였습니다. 겉으로는 동양 평화를 위해 <조선의 개혁을 돕는다>는 입장이었지만, 사실 이것은 일본이 청을 대신하여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히기 위함이었죠.

정부는 일본의 속셈을 파악하고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농민군의 요구가 포함된 자주적인 개혁을 추진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본군은 조선의 자주적인 개혁을 끝까지 반대하면서 조선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그럼 한번 일본군의 내정 간섭 과정을 자세힐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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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과 알연하는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쓰케 :
조선 내정개혁을 요구하고 일본의 입맛대로 친일정권을 수립하였다.

3.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한 과정과 목적

동학농민과정에서 전주화약으로 조선과 농민군이 화해를 하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동학농민전쟁이 끝났으니, 일본군은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농민을 잡기 위해 늑대를 불렀는데 아무 것도 먹지 못한 늑대가 순순히 물러날리 없죠. 일본군은 바로 서울로 쳐들어와서 떡 하니 서울 한복판에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청, 일본 양국이 조선을 개혁하자는 개혁안을 제시하였죠. 청나라는 일본의 속셈을 알고 이것을 거부합니다.

일본공사는 조선 정부에 <일본이 조선 개혁에 도움을 주겠다>라는 공식입장을 밝히고, 일본이 작성한 내정개혁안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당연히 거부했고, 일본군이 먼저 물러가면 생각해보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일본과 조선은 내정 개혁에 대한 1,2차 회담을 열었는데, 일본의 목적이 수상하다는 것을 느낀 조선정부에서는 <교정청>을 설치하여 조선 스스로의 개혁을 추진하려고 합니다. 조선은 3차 회담에서 일본의 모든 요구를 거부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은 검은 속셈을 드러냅니다. 서울에 주둔하던 군대를 이용하여 바로 경복궁을 침입하여 조선의 정권을 탈취하였습니다. 민씨 정권은 축출당하였고, 흥선대원군이 허수아비 정권으로 다시 들어섰으며 친일적인 성향의 <개화파>들을 통해 갑오개혁을 추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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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당시의 김홍집과 어윤중

여기서 친일적인 성향이란, 친일파라는 뜻이 아니라 일본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조선의 근대화를 이루겠다던 개화파들을 말합니다. 일본에 수신사로 파견된 경력이 있었던 지식인들을 개혁 주체로 하여 개혁을 추진한 것이죠. 갑오년에 일어난 이 개혁은 김홍집을 중심으로 하는 내각이 수립되었고, 이 내각의 개혁 중심기구인 <군국기무처>는 국왕권마저도 초월하는 초법적 기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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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 당시의 군국기무처(교과서 그림)

그럼 왜, 일본이 이렇게 조선의 내정 개혁에 열을 올렸을까요?

1. 전주 화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주둔할 명분도 없었고, 청과 전쟁을 할 이유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통해 조선을 보호하고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갑오개혁을 추진한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청일전쟁을 장기화하면서도 조선에 머물 수 있는 최선책이었습니다.

2. 조선에 내정간섭을 하면서 조선의 발전을 위함이라고 말함으로서, 훗날 청, 미국, 독일, 영국,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우선적으로 침략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이 필요한 것은 조선 등 아시아 식민지였으니까요.

3. 조선의 개혁을 방해하는 청군을 몰아낸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청일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청군을 조선에서 영구히 추방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4. 그러나 1차 개혁은 일본의 간섭이 적었다.

갑오년에 실시한 1차 조선 개혁은 일본이 주도하려고 했지만, 일본의 간섭이 적었습니다. 그 이유는 갑오년 동학농민전쟁의 1차, 2차 전쟁 사이에 청과 일본의 청일전쟁이 터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혁의 시작인 일본의 압력이 작용하였지만, 실제 개혁은 조선의 개화파들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김홍집 내각은 일본의 요구를 몇가지 적절히 섞어서 조선식 개화를 추진하였는데, 일본은 여기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했기 때문에 개혁은 다시 한번 일본의 요구대로 진행됩니다. 이것이 갑오년 2차 개혁입니다. 2차 개혁의 내용은 일본의 조선 침략 의도를 볼 수 있는 개혁이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의 모델을 같은 섬나라인 영국의 황제국가체제(영국은 여왕 중심체제였고, 일본은 천황중심체제였음)에서 일부 모방하였는데, 영국이 수에즈 운하를 구실로 이집트를 보호국으로 삼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조선 역시 일본의 보호국으로 삼으려는 것이 당시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갑오개혁이 순전히 일본의 의도대로만 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선의 개화파들은 조선 사회의 시급한 문제들을 개혁의 내용에 우선적으로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럼 다음 포스트에서는 1차 개혁, 2차 개혁, 3차 개혁의 내용을 차례로 포스팅하고 갑오을미개혁의 논쟁점들을 간략히 다뤄보도록 하죠. 오늘 서론이 길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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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4 - 동학농민운동의 논점들

1. 동학농민운동의 명칭은?

1894년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의 운동을 동학농민운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동학농민운동이란 말은 교과서에서 쓰는 말입니다. 개론서와 각 단체의 입장은 다릅니다.

먼저, 동학농민운동이 동학 교도들의 종교운동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사건을 <1894년 동학운동>이라고 합니다. 동학 교단과 비교적 보수주의적인 역사학자들의 입장입니다. 당시 운동은 최시형 등을 중심으로 한 동학이 주도하였고, 동학의 포접제, 집강소 등이 사건의 중심을 이루는 기구였기 때문에 동학운동이 맞다는 논리이지요.

그러나,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과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은 <1894년 농민전쟁>으로 부릅니다. 그 이유는 사건이 일어난 이유 자체가 사회모순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전국적으로 농민들이 참여하여 사회적 모순을 바꾸려는 시도를 했다는 점을 높이 사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을 세계사적 보편성과 연결시키는 입장에서는 <1894년 농민 혁명>으로 보기도 합니다. 이 사건은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고 새로운 세상을 지향하는 아래로부터의 혁명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프랑스 혁명과 유사한 진행과 요구사항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이 나폴레옹 전쟁을 통하여 주변 강국들을 물리쳤던 반면, 농민 혁명은 일본이라는 외세에 의해 좌절되었기 때문에 그 혁명성이 전해지지 않는다라고 봅니다.

이러한 3가지 입장을 절충하여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 바로 교과서의 <동학농민운동>의 관점입니다. 동학, 농민, 혁명성을 고루 압축하여 교과서에 적절하게 실어놓았죠. 역사를 바라볼 때 교과서와 같은 만들어진 텍스트가 진리라는 입장은 정말 위험합니다. 왜냐면, 교과서 역시 결론을 내리기 힘들어 무난한 절충적인 입장에서 기술한 용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진정한 명칭은 무엇이 좋을 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2.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명칭을 그냥 사용한다고 할 때, 또 하나의 쟁점은 <누가 그럼 주도했는가?>라는 점입니다.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말은 동학, 농민이라는 두 주체가 이미 들어가 있네요.

<동학운동>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동학운동의 주체가 동학운동론자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최시형과 동학의 집행부들이 <동학>이라는 종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그 흐름에 농민이 동참하였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죠. 따라서 <동학>을 앞장서 이끌어간 사람들은 몰락양반인 교조 최제우를 비롯한 지식인층이나 몰락 양반이라고 말합니다.

동학 농민운동은 원래 몰락 양반들이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농민의 문제로 확대되었고, 사회 모순이 심화되면서 국가적 문제로 발전하였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즉, 초기부터 집행부는 지식인과 몰락양반이었고, 그들은 동학의 핵심 교도들이었다는 것이죠.

<농민전쟁>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동학의 주체가 당연히 <빈민과 농민층>이었다고 주장합니다. 동학은 단순한 사회 운동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 모순과 외세의 침략, 제국주의적인 자본이 들어오는 시점에서 발생한 <농민층>의 항쟁이었다는 것이죠. 따라서 동학의 주체는 사회 모순에 피해를 입은 모든 농민, 상인, 도시빈민 들이었고, 그들이 주체였기 때문에 동학이 전국적인 전쟁이 될 수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동학혁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동학이 서양의 시민혁명과 같은 혁명이었기 때문에 그 주체도 당연히 시민이라고 주장합니다. 프랑스 혁명의 부르조아, 영국 혁명의 젠트리가 바로 혁명의 주체라는 것이죠. 동학은 부르조아적인 부농층이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일으킨 것으로, 그 마지막 목표는 자본주의 국가의 건설이었고, 그것은 곧 반국가, 반외세를 지향한 시민혁명으로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3. 동학이 추구하는 것은 자본주의였는가에 대한 논쟁

동학을 <동학혁명>이라고 보는 입장의 사람들은 동학혁명이 서구 시민혁명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로의 근대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것은 서양 시민혁명들과 마찬가지로 아래로부터 대중들이 일으켜 근대화와 자본주의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혁명을 일으켜 무기와 조직을 만들 수 있었던 일정 재산을 가진 부농층에 주목을 합니다. 그 이유는 아시아에서도 충분히 서양과 같은 시민혁명이 가능하였고, 정조와 같은 절대군주도 존재할 수 있었으며, 실학과 같은 정치, 과학혁명적인 사상도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기 위함입니다.

동학을 <농민중심의 전쟁>으로 보는 사람들은 서구중심적인 세계사적 보편성과 시민혁명의 가능성을 부인합니다. 우리 역사를 굳이 서양이 제시한, 혁명 단계에 맞춰 해석할 필요도 없으며, 자본주의가 근대적 국가의 지표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농민들의 주장은 자본주의를 이룩하자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을 타파하자는 반봉건, 반외세적인 성격이었습니다. 그런데, 반봉건이란 개화를 주장하자는 개화파에 반발한 것이었고, 반외세란 제국주의적 자본을 가진 청, 일본을 배척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동학은 반자본적인 운동이었을 망정, 자본주의를 위한 운동이 아니였다는 입장이죠.

4. 폐정개혁안 12개조가 보여주는 동학농민운동의 성격

결국 동학농민운동의 성격은 수백개의 논문들이 얽히고 설켜 다양하고 상반된 의견들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교과서는 그러한 의견들을 절충해서 제시할 뿐이지, 명확하게 결론을 내린 것은 없습니다. 교과서에 동학농민운동의 과정에 대한 이야기만 계속 나오는 것도, 이러한 견해들을 한쪽 입장에서 정확히 기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장 중요하게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근거는 결국 실제 사료입니다. 그 중에서 동학농민운동의 핵심을 보여주는 사례가 집강소 시기의 <폐정개혁안 12개조>입니다. 이 사료를 분석하면서 4파트로 나눠 기술했던 동학을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①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② 탐관 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③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⑤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⑥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⑦ 청상 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⑧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⑨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⑩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⑪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⑫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동학의 성격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반봉건적, 반외세적인 성격을 가진 운동이라는 점입니다.

1조에서 보면, <정부와의 원한>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 자체가 동학도, 농민들과 국가가 서로 반목하는 사이었고, 국가가 백성들에게 인심을 얻지 못하였음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2,3,4조 역시 탐관오리 처벌, 횡포한 부호, 불량한 양반 을 말하면서 정부에 대한 불신과 당시 사회적 대립구조를 보여줍니다.

5조의 노비문서 소각, 6조의 천인차별 개선, 7조의 청상과부 개가 등은 구제도의 모순에 대한 혁파를 하라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보여준 길드 폐지, 신분에 대한 차별 금지 등과 비교할 수 있지만, 그것보다도 훨씬 더 강도 높은 개혁안들입니다. 신분제 폐지의 내용은 백성들로부터 이루어지는 개혁안의 핵심적인 내용이지요.

8조의 잡세 폐지는 농민들의 중요한 요구중의 하나입니다. 당시 국가가 농민에게 보여준 가장 큰 횡포였고, 농민들의 핵심요구 사항이 이것이었죠. 쉬운 말로 밥먹고 살 정도의 돈은 남겨주고 이득을 챙기라는 것이죠. 요즘으로 따지면, 비정규직도 먹고 살 것은 보장해달라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10조는 일본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네요.

11, 12조는 다른 개혁에는 볼 수 없는 농민들만의 개혁 내용입니다. 정부나 지배층의 개혁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독자적인 것이죠.

11조의 공사채를 무효로 한다는 내용은 가장 농민다운 발상입니다. 특히, 12조의 토지개혁은 농민들이 꿈꾸어왔던 이상적인 세상을 보여줍니다. 세금을 깍아주는 조세 개혁이 아닌 토지 자체를 공평히 달라는 것이죠. 그러나, 갑오개혁에서도 이 토지개혁만큼은 절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기득권층은 보수층이든, 진보층이든간에 자신들의 토지를 개혁하여 농민에게 줄 정도의 아량이 있을리 만무하니까요.

자, 여기까지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이야기들을 다루어 보았습니다. 이제, 다음 장부터는 1894년의 또 다른 사건인 갑오개혁, 청일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1895년의 이야기(을미개혁, 을미사변, 을미의병)로 넘어가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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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3 - 동학농민들의 2차 봉기

1. 1차 농민전쟁의 결과

자, 이제 농민들의 1차 봉기는 끝났습니다. 농민들은 <집강소>를 구성하여, 스스로 자치를 시작하였습니다. 정부도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개혁을 약속하였습니다. 정부가 개혁을 위해 마련한 기구가 바로 <교정청>이었죠.

그런데, 여기서 은근히 헷갈려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에게 1894년에 일어난 사건으로, 동학농민운동, 청일전쟁, 갑오개혁 중 어느 것이 먼저냐고 물어보면 다들 고민을 하더군요.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답이 없으니까요.

동학농민운동은 1, 2차로 나눠야만 다른 사건들과의 개연성이 생깁니다. 교과서에서는 이 부분을 나누어 놓지 않았기 때문에 헷갈릴 수밖에 없습니다.

정부에 대한 불신과 탐관오리 숙청, 부당한 조세제도 혁파, 토지개혁 등을 주장한 1차 동학 농민운동은 1894년 3월부터 5월까지입니다. 1차 동학운동은 전주화약을 맺으면서 정부와 농민들의 화해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조선에 들어온 청과 일본은 전주화약으로 동학농민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목적은 동학농민운동 때문이 아니라 <조선의 실질적 주도권>을 누가 가지는가 였으니까요.

특히 일본은 그동안 청과 나누어 왔던 한반도의 정치, 경제적 권리를 빼앗으려고 하였습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잡은 청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는 속셈이었지요. 일본은 서울과 부산까지 연결하는 전기선을 가설하면서 전쟁에 대비하였고, 1894년 6월 경복궁을 무력으로 장악합니다.

일본이 경복궁을 장악하고 요구한 것은 조-청간 경제 무역을 중단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본의 요구는 <조청상민무역장정>의 폐기였지요. 일본은 또 우리 정부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꾸며 아산만에서 청의 함대를 기습하여 청군을 몰살시켜 버렸습니다. 이 때 죽은 청나라 군사만 1200에 달합니다.

그리고, 일본은 경북궁을 장악한 채로 조선에 개혁을 요구합니다.(갑오개혁) 189년 6월 23일 조선에 주둔하던 청일군이 전면전을 하였는데, 일본군이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때부터 1895년까지 청일전쟁이 조선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청일전쟁은 조선정부에게도 부담스러운 전쟁이었지만, 농민에게는 더욱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겨우 자유를 얻고, 농민의 힘으로 개혁을 추진하려는 분위기를 일본이 망쳐놓은 것이지요.

갑오개혁도 처음에는 교정청에서 농민의견을 많이 반영하면서 진행되는 듯 하였지만, 교정청이 사라지고 일본이 개화파를 앞세워 군국기무처를 신설하면서 일본의 의견이 더 많이 들어가는 개혁이 되어 버렸습니다. 일본군은 전쟁을 이유로 우리 농민들에게 식량을 징발하고, 헐값에 조선인들을 인부로 채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농민들의 분노는 이제 탐관오리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죠. 동학농민의 2차 봉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2. 1차, 2차 동학농민운동 사이의 7월 - 내정 개혁이 강요되다!

일본은 1차 동학농민운동이 끝날 무렵, 청과 전쟁을 하면서도 조선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습니다. 그렇게 할 수 밖에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죠. 한번 일본의 속셈을 분석해 볼까요?

1. 전주 화약으로 일본은 조선에 주둔할 명분도 없었고, 청과 전쟁을 할 이유도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의 개혁을 통해 조선을 보호하고 발전시킨다는 명분으로 갑오개혁을 추진한 것입니다. 따라서 갑오개혁은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고 청일전쟁을 장기화하면서도 조선에 머물 수 있는 최선책이었습니다.

2. 조선에 내정간섭을 하면서 조선의 발전을 위함이라고 말함으로서, 훗날 청, 미국, 독일, 영국, 러시아 등 다른 나라에 비해 우선적으로 침략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이 필요한 것은 조선 등 아시아 식민지였으니까요.

3. 조선의 개혁을 방해하는 청군을 몰아낸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서 청일전쟁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고, 청군을 조선에서 영구히 추방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본의 개혁의지를 청이 좋아할 리 없었습니다. 전주화약 후 일본군은 바로 서울에 침입하면서 <청>에게 청일양국이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청이 보기에 일본의 속셈이 뻔하였으므로 이것을 거절하였죠.

일본공사는 바로 조선 정부에게 내정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개혁을 강요합니다. 우리 정부는 일본군이 선철수 해야 함을 강조하였고, 1,2차 회담을 열어 이 문제를 심도있게 논의하였습니다. 이 때 개혁기구로 창설된 것이 바로 <교정청>이지요. 우리는 3차 회담을 하면서 일본의 요구를 거부하고 우리 스스로 개혁을 하겠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당황한 일본은 경복궁에 무단침입을 한 뒤, 민씨 세력을 궁 밖으로 강제 추방하고 흥선대원군을 표면에 내세워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물론 흥선대원군은 허수아비였고, 개혁의 주체는 일본이 내세운 김홍집, 김윤식 등 개화파였죠. 이렇게 실시한 개혁이 바로 갑오개혁입니다.

3. 농민들은 다시 일어나다!

1차 동학농민봉기 이후, 일본의 힘이 세지자 농민들은 긴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본이 조선 농민의 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농민들은 다시 일어납니다. 2차 동학농민봉기는 일본을 추방하기 위한 반외세 운동이었습니다. 그럼 자세한 내용을 한번 볼까요?

이 땅의 살아있는 동포에게 포고한다. 우리는 왜놈을 이 땅에서 축멸(逐滅)코자 다시 기포한다! 관 민을 불문하고 우리의 창의에 합세하는 것은 충의(忠義)요 이반하는 것은 반역(反逆)이다. 충의지사(忠義之士)는 모두 삼례역으로 모여라.

- 2차 동학농민운동 출정문 -

일구(日寇)가 구실을 만들어 병사를 움직여 우리 임금님을 핍박하고 우리 국민을 어지럽게 함을 어찌 그대로 참을 수 있단 말이오.…지금 조정의 대신은 망녕되고 구차하게 생명을 유지하며, 위로는 군부를 위협하고 밑으로는 국민을 속여 왜놈, 오랑캐와 연결하여 삼남의 국민에게 원한을 사며, 망녕되게 군대를 움직여 백성을 해하려 하니 참으로 그 무슨 뜻이오.    

- 전봉준 격문(1894. 10) -

묵은밥은 새밥에 섞지 마소서.

묵은 음식은 반드시 끓여 드소서.

침을 뱉지말며, 뱉거던 반드시 땅에 묻으소서.

노변에서 대변을 보았으면 파묻고 가소서.

물을 끓여 먹고 구정물은 아무데나 버리지 마소서.

집안과 내몸을 하루에 두번씩 청결히 닦으소서.

그리고 춘추로 이회씩 정기적으로 사십구일기도를 하소서.

- 2차 동학농민운동 최시형의 통유 -

위 사료를 보세요. 2차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은 전봉준이 전라도 삼례에 투쟁본부를 두고 시작되었습니다. 전봉준은 동도창의소란 이름으로 조선민들의 거병을 촉구하였고, 전라도 각지의 집강소를 통해 농민군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남접의 지도자인 전봉준은, 1차 때부터 전국적 무력봉기를 자제할 것을 주장하였던 교주 최시형 등의 북접 세력을 설득하여 연합전선을 추구합니다. 최시형도 통유문을 발표하고 가세하였죠.

경주황오리에 고아로 태어나 가사여의치 않아 배움도 얻지못하고

이집저집 머슴살이 영일군오덕동 제지소에서 종이를 떴다

마북동검등꼴 화전민되어 신유년 서른다섯살 수운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하늘님소리 듣고파서 가진고행 마다하지 않았다

허나나는 들을수 없었다

하늘님의 소리를 그런데 어느날 우연히 하늘님의 소리를 들었다

그냥 지나가는 사람에게서 옳다 사람의 소리 곧 하늘의 소리구나

그때부터 천지가 열렸다 나는 쉬지않고 일했다

자나깨나 도인들의 고통을 나누며 죽도록 일했다

평생토록 보따리하나 걸머지고 조선팔도 도바리 아니 도망다닌 곳이 없었다

그래서 얻은 별명 최보따리 그 보따리엔 하늘님이 계셨다

이제 나는 그 보따리를 불사르고자 한다

개같은 왜적놈 총부리앞에 불사르고자 한다

이게 나의 천명이요 이게 너의 천명이다

나 너에게 이르노니 나는 이제 가노라

천명을 다하고 허나 나는 말한다

너는 너는 높이 날으고 멀리 뛰어라

너는 너는 높이 날으고 멀리 뛰어라

- 최시형의 기포 명령문 -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할 정도로 군사력이 막강한 일본군에게 열악한 무기를 가진 농민군은 점차 밀리게 되었습니다. 전략적 요충지인 전주와 논산을 빼았기고, 금구, 태인 전투 등에서도 전봉준 군은 일본군에게 밀렸습니다.(우금치 전투, 태인전투) 또 농민들의 봉기를 자신들의 기득권을 뺏는 것이라 생각한 양반들이 농민군에게 저항함으로서 산발적인 농민군의 봉기(기포)도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녹두장군 전봉준은 잡혀 죽고 말았죠.

나를 죽일진대 종로네거리에서 목을 베어 오고가는 사람에게 내 피를 뿌려주는 것이 가할진대 어찌 컴컴한 적굴속에서 암연히 죽이는가?

때가 오니 하늘과 땅이 다 힘을 합치는데 운이 가니 영웅이라도 어찌해볼 도리없다

나라위한 붉은 마음 그 누가 알리 교수대에서 헛되이 외로운 넋이 되려는가

-녹두장군 전봉준의 죽음에 대한 탄식 -

새야새야 녹두새야

웃녁새야 아랫녁새야

전주고부 녹두새야

함박쪽박 열나무딱딱

-녹두장군에 대한 노래 -

법무아문(法務衙門) 대신(大臣) 서광범(徐光範)과 전봉준의 독대

  공초사료(供草史料)중에서

서광범: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전봉준: 전봉준(全琫準)이다.

서: 전명숙(全明淑)이라는 자는 누구냐?

전: 명숙은 나의 자(字)다.

서: 전녹두는 누구냐?

전: 사람들이 나를 그리 부른다.

서: 왜 난을 일으켰으냐?

전: 어찌하여 날보고 난을 일으켰다 하느냐? 작란(作亂)을 하는 것은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이 아니냐?

서: 관아를 부수고 민병을 일으켜 죄없는 양민을 죽게한 것이 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이다. 민병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백성의 삶에서 폭력을 제거코자 했을 따름이다.

서: 그리하면 지방의 방백수령을 혼내주면 됐지 왜 서울에 입성코저 했는가?

전: 국체를 무시하고 궁궐을 침범한 왜놈들을 응징코저 한 것이다.

서: 그럼 서울에 살고 있는 외국인을 다 내쫓고자 했는가?

전: 아니다. 외국인은 통상만 하면 되는 것이다. 헌데 왜놈들은 군대를 주둔시켜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이냐? 어찌 뿌리가 썩었는데 가지를 친다함이 의미가 있을손가?

서: 너는 동학의 괴수(魁首)냐?

전: 나는 의를 펴고자 일어났을 뿐이다. 동학의 괴수라 함은 가당치 않다.

서: 동학엔 언제 입당하였느냐?

전: 삼년전이다.

서: 왜 입당하였는냐?

전: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守心)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敬天)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서: 동학의 주의(主意)가 무엇이냐?

전: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서: 그렇대면 그대는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 보다는 보국안민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학이라는 조직을 이용한 것밖에 더 되느냐?

전: 동학은 본시 우리 해동 조선땅에서 일어난 것이며 그 도학(道學)에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서: 송희옥(宋喜玉)을 아는가?

전: 면식은 있을지 모르나 나는 그 자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이 전라일도 도집강(都執綱)이요 너의 가까운 친척이라는데도 알지 못한단 말이냐?

전: 그는 본시 부랑자로 홀왕홀래했을 뿐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의 기서(奇書)에 의하면 너의 재차 기포는 국태공(國太公) 대원군과의 밀약에 의한 것이라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전: 어찌 척양척왜가 대원군 한사람의 주장일까보냐? 그것은 만백성이 원하는 바이다. 내 창의문에 써있는 몇구절로써 그런 억측을 일삼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대원군은 우리의 의거가 해산되기만을 효유했을 뿐이다. 우리의 의거는 대원군과 하등의 관련도 없다.

서: 너는 대원군을 서울 운현궁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데?

전: 유언비어일 뿐이다. 나는 대원군을 만난 적이 없다.

서: 동학에 남접 북접이 있다는데 그 구별은 무엇이뇨?

전: 그것은 호남과 호서의 지역적 구별일뿐 동학이 두개인 것은 아니다. 동학은 삼십년전 경주에 살던 최제우(崔濟愚)로부터 시작하였고 동학의 모든 접주는 최법헌(崔法軒)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최법헌이 팔도(八道)의 접주의 직책을 총괄한다.

서: 최법헌이 누구인가?

전: 해월 최시형이다. 이름은 최경상이다.

서: 그럼 너도 기포의 허락을 최법헌으로부터 받았는가?

전: 진리를 펴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가? 충의(忠義)란 본심(本心)이다. 그대 발 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대는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

서: 최법헌을 언제 처음 만났는가?

전: 작년 춘삼월 보은 장내리에서였다.

서: 그때 그대는 거기서 무엇을 했는가?

전: 나는 그 대집회에 참석한 전라도 도인들의 식량을 운반하는 운량도감의 책임을 맡았으며 또 금구 원평집회를 주도했다.

여기서 어이없는 것은 일본군이 외국 혁명군인 농민군을 학살한 것에도 모자라, 양반층들은 전쟁에 진 농민들의 재산을 모두 빼앗고,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농민들을 학살하였다는 점입니다. 여기서부터 일본군과 기득권을 가진 양반부호들의 연합은 시작되었고, 이것이 일본군의 전략상 정책으로 채택되면서 훗날 <식민지 지주제>라는 형식의 민족분열정책이 시작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음 마지막장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명칭의 문제, 동학이 주체인가, 농민이 주체인가에 대한 주체 문제, 동학이 추구한 이상향이 근대화인가에 대한 논쟁들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찬/반의 의견들을 간략히 소개하고, 동학의 의의와 폐정개혁안에 대한 내용을 분석하겠습니다. 짧게 하려고 했음에도, 동학에 대한 내용이 4번의 글로 이어져 버리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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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토막 역사 13화) 개항기 때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돈이 쓰였을까?

1. 조선 후기에 어떤 돈을 쓰고 있었나?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한반도에서도 <화폐>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럼 조선 후기 이후 개항기까지 어떤 돈들이 주로 쓰였을까요?

우리나라에서 국가가 주도하여 화폐가 쓰인 것은 고려 성종기부터입니다. 중앙집권이 이루어지고, 최승로의 건의로 유교정치가 본격적으로 실시된 고려 초기초기부터죠. 이 때의 화폐란, 국가가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어 행정적으로 사용하기 쉽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 화폐유통을 권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 백성들은 돈의 효용성을 몰랐지요. 고려 시대 유명한 스님인 의천도 화폐 유통이 국가경제와 사원경제를 원할하게 하여 결과적으로는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까지 국가의 세금은 현물세로 내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토지세는 쌀과 콩으로, 군역은 군포로, 특산물세는 각 지역의 특산물을 직접 내는 형태였죠. 이러한 현물을 운반하는 것도 일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세금을 내기가 힘들었습니다. 조선시대 대납(대신 내주고 이자붙여 받는 것), 방납(미리 내주고 후에 받는 것)과 같은 형태의 세금내기가 유행하기도 하였습니다.

화폐가 본격적으로 유통된 것은 조선후기 상평통보가 사용되면서입니다. 보통 가운데가 뻥뚫린 이러한 엽전은 사용하기도 간편하였고, 가운데 구멍에 돈을 꿰어차고 다니기도 용이했습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화폐가 본격적으로 유통되었음에도 시중에 화폐가 없어서 곤란을 겪는 <전황>이 종종 발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화폐가 재산으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부자들이 화폐를 저장하기만 하였지 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계속 화폐를 발행하고, 부자들은 계속 화폐를 저장만 하니 돈의 진정한 가치 중 저장가치만이 제 기능을 한 것이죠. 유통가치, 교환가치로서의 돈이 사용되지 못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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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2. 갑오개혁 이전에 사용했던 화폐들

조선 후기부터 사용된 대표적인 돈은 흔히 우리가 말하는 <엽전>입니다. 영조, 정조 때 이 엽전은 돈의 구실을 제대로 하였고, 사람들은 돈을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동김씨 등이 집권한 세도정치 때에도 탐관오리들은 백성들을 착취하곤 했는데, 그 때에도 돈의 가치를 이용하곤 하였습니다. 이자를 붙여 돈을 늘리는 고리대업을 할 줄 알았던 것이죠.

이후 흥선 대원군이 집권한 이후, 초기에는 화폐의 균형이 잡히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기존의 돈을 걷가나, 마구 새로운 돈을 발행하여 큰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하는 사람만 내라던 <원납전>은 백성들에게 강제로 걷었기 때문에 <원망하면서 납부한다는 뜻의 원납전>으로 말이 바뀝니다. 또 새로운 돈인 당백전을 마구 찍어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삶이 더욱 고달팠고, 시중에 돈이 남아도는 관계로 인플레이션을 겪기도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돈이 부족해지자 청나라 화폐를 수입하여 국내에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을 <청전>이라고 합니다.

대원군 이후, 민씨 정권이 정치를 하면서 청, 일본 등과 본격적인 무역을 시작하였습니다. 1880년대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돈들이 유통되기 시작합니다. 물론, 1894년의 갑오개혁까지 우리나라의 공식화폐는 엽전이었지만, 유통된 화폐는 다양해졌죠.

1880년대 초기에 청, 일본과 무역을 하기 위해 사용한 화폐는 멕시코의 은화였습니다. 신항로 개척 이후 가장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돈이었고, 당시 세계 금융시장이 은본위 화폐제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사용한 것이지요. 그런데, 점차 일본과의 무역량이 많아지면서 일본의 화폐가 조선시장에 들어오게 됩니다. 무역시장에서 주로 사용하던 <멕시코 은화>가 점차 <일본 은화>로 전환되기 시작하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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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은화


해외 국가들과의 접촉이 많아지자, 정부는 엽전보다 더 큰 단위의 돈을 만들었습니다. 1883년부터 엽전을 보완하기 위해 사용된 돈이 <당오전>이라는 돈입니다. 당오전은 <엽전 5개의 가치는 갖는 돈>이라는 뜻이기 때문에 이 돈의 가치는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불량 화폐가 너무 많이 많들어져서 시중에서 당오전은 거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돈의 실제 가치는 상당히 낮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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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당오전


3. 갑오개혁 이후에 사용하게 된 화폐들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본격적으로 갑오개혁이 추진되면서 화폐도 새롭게 바뀌었습니다. 이 새로운 돈이 바로 <백동화>입니다. 백동화는 갑오개혁 때부터 주조되었고, 대한제국기에 대량으로 주조되면서 엽전을 대체하였습니다. 이 돈의 명칭이 백동화인 것은 원료가 <동>이었기 때문입니다. 백동화는 엽전 24개의 가치를 갖는 돈이었습니다. 당오전이 엽전 5개인데, 백동화가 엽전 24개의 가치를 갖는 돈이라면 당시 물가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겠네요.

갑오개혁 때 사용된 또 다른 돈은 <일본 지폐>였습니다. 일본 지폐는 청일 전쟁 때 일본이 전쟁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대량으로 사용하면서 유통되기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1897년 일본이 은본위제에서 금본위제로 화폐단위를 바꾸면서 <일본은화> 대신에 <일본지폐, 일본금화>가 많이 사용됩니다. 일본은화와 일본금화, 그리고 우리나라의 백동화는 그 가치를 같게 하여 1:1:1로 교환할 수 있는 화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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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금화


그리나, 백동화 역시 당오전과 마찬가지로 불량 화폐가 너무 많았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백동화와 엽전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고, 백동화는 점점 가치가 하락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백동화와 일본은화(일본금화)는 실제로는 1:1의 가치였지만, 사실 백동화 2개 이상을 주어야 일본은화와 바꿔주었다고 합니다.

조선에서는 일본화폐가 조선에서 대량 유통되면서 생길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만약 조선에서 대량 유통되는 일본화폐가 일본의 농간으로 모두 일본에 환수된다면 조선은 화폐 공황을 맞아 큰 위기가 닥칠 수 있었습니다. 조선에서는 환수되는 일본 은화와 구별하기 위해 조선에서만 유통되는 은화에 도장을 찍었고, 도장을 찍은 은화는 조선에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을 <각인 부은화>라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개항기에 조선에서 유통된 화폐들은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조선 후기 우리 상업은 충분히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 외국과의 무역 개방은 상인들에게 큰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체계적이지 못한 화폐단위는 상인들에게 변수로 작용하였습니다. 훗날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하면서 실시한 화폐개혁으로 우리 상인들은 모두 몰락하게 됩니다.

일본이 실시한 화폐개혁이란, 백동화를 모두 일본화폐로 바꾸고, 일본화폐만을 공식화폐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불량 백동화는 바꿔주지 않았고, 그 교환도 1:1의 맞교환이 아니였기 때문에 어지간한 재력이 있는 상인이 아니면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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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2 -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1.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오늘 적을 내용은 동학에 대한 2번째 이야기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894년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럼 한번 출발해 볼까요?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듯이 동학은 1850년대 후반부터 그 세력을 키워왔습니다. 최제우가 혹세무민이라는 성리학적 명분에 의해 죽고난 이후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면서 동학은 그 힘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이필제의 난 등을 겪으면서 동학은 점차 사회, 정치 운동까지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1870년대의 동학은 흥선대원군 대신 친일적인 성향의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반봉건 운동을 일으킬 명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학은 1862년 임술농민봉기 등 정부에 의해 크게 진압당해본 경험을 알고 있었습니다. 차분히 교세를 확장하고, 때를 알고 기다릴 줄 아는 이가 2대 교주 최시형이었습니다. 최시형은 이필제의 난이 실패한 이후 동학의 구조를 양반중심에서 농민중심으로 개편하고, 농민 스스로를 개혁의 주체로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임오군란이 외세의 압력으로 실패하고, 갑신정변이 농민층을 배제하면서 실패하는 것을 보면서도 동학은 더 이상의 정치적 논리에 쉽게 휩쓸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894년은 뭔가 한번쯤 사건이 터질 만한 국내외적 분위기였습니다. 1862년 임술민란이 일어난지 30년이 지나면서 농민층의 불만이 쌓일만큼 쌓인대다가 청과 일본의 경제적 침투로 인하여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습니다. 농민들은 이미 부패한 나라를 씻어낸다는 반봉건의 이념에, 농촌 경제를 파탄시키는 청과 일본 등 외세에 대한 불만까지도 가득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최시형은 참고 또 참고 있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종교운동을 표방하는 교주 최시형과는 다르게 독자적인 성향으로 활동하는 세력에 의해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녹두장군 전봉준의 사상은 최시형의 온건노선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동학에서 당시 큰 세력은 전봉준, 황하일 등의 남접과 보은 집회를 연 최시형, 손병희 등을 북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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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동학의 확대 지역

2. 점차 정치적인 성격의 집회로 발전해가다.

동학농민운동은 1892년까지만 해도 비교적 종교적인 성격을 가진 집회가 열리곤 했습니다. 예로 1892년 전라북도 삼례집회에서의 요구사항도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풀어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1893년 서울 집회에서도 최시형 등 동학대표 40여명이 광화문 앞에서 <농민들은 동학이 결코 국가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운동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운동은 종교운동적 차원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893년 3월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들의 요구는 달라졌습니다. 농민들이 많이 모이면서 요구사항도 <농민들을 괴롭히는 일본의 축출과 탐관오리들의 숙청>으로 바뀐 것이지요. 물론 교조신원운동도 하였구요. 농민들의 요구는 이제 <척양척왜 : 서양도, 일본도 적이다>라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정부는 1893년의 집회가 보은, 금구 등에서 계속되자 긴장하기 시작합니다. 단순한 종교운동이라면 달랠 수 있겠지만, 이제 주체세력이 현실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농민층으로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죠. 동학의 운동은 점차 운동을 넘어 <개혁>,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혁명>에 이를 수 있는 위험한 것이 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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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1880년대 이후 농민항쟁의 증가 추이

특히 전봉준 등의 남접 우두머리들은 최시형, 손병희 등의 북접의 우두머리들이 연 보은 집회와는 별도로 금구집회를 열어 집회 후 1만명의 농민군과 함께 서울진공작전을 벌이려고도 하였습니다. 고부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아니였어도 동학농민운동은 언젠가는 일어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미 1880년대 이후 개화정책이 추진되면서 농민봉기는 점점 늘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에, 그 무리 4000여 인들은 전라도 전주 근방에 모여 감사에게 3개조의 요구를 제기하였다.

첫째, 국인 가운데 우리 당을 지목하여 사악함을 주창한다고 하면서 경멸하는 이가 있으니, 명령을 발하여 그 어리석음을 바로 잡을 것

둘째, 외국 선교사와 상인은 모두 나라에 해를 끼치는 것이니 속히 쫒아낼 것

섯째, 요즈음 지방 관리들이 포악하게 거두고 억지로 빼앗아 생민이 도탄에서 고통을 당하니, 마땅히 이들 지방 관리를 쫒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3개조를 들어주지 않는 동안에는 우리들 4000여인은 한 걸음도 이 곳에서 물러날 수가 없다고 강력하게 요청하였다.

-1893. 4. 18, 전봉준의 요구와 금구 집회-

3. 고부에서 농민봉기가 시작되다.

동학농민운동이 처음 시작된 것은 전라도 고부 지역이었습니다. 전라도 고부에는 만석보라는 저수지가 있었습니다. 당시 고부 군수였던 조병갑은 이미 저수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을 동원하여 강 하류에 새로운 저수지를 만들고 가혹한 세금을 걷었습니다. 전봉준 등 고부 군민들은 2차례나 고부관아에 세금을 감면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강제로 쫒겨나기도 하였습니다. 농민들은 참을 수 없어 고부 군수인 조병갑을 죽이고 봉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일으킨 횡포가 전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탐관오리의 횡포가 만연한 시기였죠. 문제는 그 횡포를 바라보는 농민들의 눈이 달라져 있었다는 점입니다. 1893년의 집회를 여러차례 경험하고, 서로 의견을 나눌 시간이 많았던 농민들인 더 이상 참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 때 농민들의 봉기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었고, 새로 부임한 군수 박원명이 농민들을 달래면서 하나의 헤프닝으로 끝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 농민들을 달래기 위해 파견한 안핵사 이용태가 민란을 엄하게 다스리려고 하면서 문제가 다시 커졌습니다. 이용태는 민란의 주동자인 전봉준 등에게 역적죄를 적용하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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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가운데 사람이 전봉준

결국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등 농민 대표들은 백산에서 격문을 발표하고 1차 동학농민전쟁을 시작합니다.전봉준이 농민들을 모으기 위해서 만든 아이디어는 사발통문이었습니다. 사발통문이란,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원으로 이름을 적어 누가 지도자이고 주동자인지를 모르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림을 보면 이름이 원으로 둘러 적혀있어서 누가 주동자인지 모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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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사발 통문의 원본

사발통문의 내용(판독된 부분이 별로 없다고 합니다.)

.... 이때 도인들은 선후책을 토의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의 집에 도소(집행본부)를 정하고 매일 운집하여 순서를 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감을 효수할 것

1.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1. 군수에게 아첨하여 인민의 것을 빼앗은 탐리를 공격하여 징계할 것

1. 전주영을 함락하고 경사로 바로 향할 것

위와 같이 결의가 되고 따라서 전략에 능하고 만사에 민활한 영도자가 될 장.....

이제 농민들을 모아 전쟁을 시작합니다. 그럼 백산의 격문과 농민들의 행동 강령을 한 번 볼까요?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름은 그 본의(本義)가 결단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요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함이며,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强敵)의 무리를 축멸코자 함이라. 양반과 부호밑에서 고통받는 민중들과 방백수령(方伯守令)밑에서 굴욕당하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라.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이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 호남창의대장소, 백산봉기문 -

첫째, 함부로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축을 죽이지 마라!

둘째, 충과 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하라!

셋째, 왜놈을 몰아내고 나라를 깨끗이 하라!

넷째,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있는 자들을 모두 박멸한다.

- 동학농민군의 4대강령, 대한계년사 권 2, 갑오조 -

백산격문을 보면 전봉준 등이 봉기한 이유가 단지 고부라는 한 마을의 사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동학농민의 1차 봉기는 탐관오리를 축출하고, 나라를 제 자리에 되돌리겠다는 의지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것이 하나의 지역문제였다면 전국에서 농민들이 모두 모이는 대규모 전쟁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 농민들은 사회의 모순이 무엇인지를 알았습니다. 동학농민의 1차 봉기는 고을 단위의 봉기가 아니라 각 지역의 농민들이 힘을 합쳐서 중앙정부에 항거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농민군은 민란을 일으킨 후 당황하는 정부에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습니다. 물론 핵심적인 내용은 <탐관오리의 처벌, 세금의 공정한 부과와 잡다한 세금 혁파>가 요구사항이었습니다. 또 균전사의 수탈을 시정하라는 것도 요구사항의 내용이었습니다.

균전사는 1890년대부터 정부에서 지금의 전라북도 서부(군산, 익산, 고창, 정읍을 잇는 황해 루트)의 11개 고을의 개간사업을 위해서 파견한 관리를 말합니다. 균전이란 말 그대로 토지를 균등히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균전사들은 왕실의 힘을 등에 업고 농민들을 괴롭혔습니다. 특히 개간 사업에 필요한 돈을 빌려준다는 명목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함부로 관리하고, 지대를 걷어가기도 하였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원인 중 가장 큰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나쁜 탐관오리들이 잡다한 세금을 핑계로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 때문이었죠.

농민들은 장성전투, 황토현 전투에서 싸울 의욕이 없는 정부군을 격파하고 전라도의 중심지 전주까지 입성하게 됩니다. 실제 전라도 지방의 정부군은 농민군과 적극적으로 싸우지 못하였습니다. 지방군 자체가 농민들 중에서 착출된 이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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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정부군에 잡혀 있는 동학농민군

4. 농민들이 전라도를 스스로 다스리다.

농민들이 전주를 점령하자 정부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가의 군대가 농민군에게 연전연패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지요. 정부는 바로 청에게 연락을 하여 원병을 요청합니다. 1894년 5월 청나라군이 조선에 입성하였습니다.

문제는 청과 일본이 갑신정변에 맺은 톈진 조약에 의해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출병하자 일본군도 같이 충병하였다는 것입니다. 갑신정변 때 길게 서술한 톈진조약 기억하나요? 청과 일본은 조선에 출병과 철수를 상의하여 같이 처리한다는 조약이었죠. 우리나라 정부는 일본군이 조선에 오자 또 다시 당황합니다. 청을 통해 농민군을 진압하려다 일본이라는 여우새끼를 불러들이게 된 것이지요.

정부는 청과 일본에게 군사를 돌려 돌아갈 것을 요구하였고, 농민군과는 타협으로 일을 마무리하려고 하였습니다. 농민과 타협하기 위해 고종이 농민들에게 했던 따끔한(?) 한마디를 살펴볼까요?

관리의 탐학과 살상은 내 반드시 엄하게 징치하리라. 세상에는 대의가 있는 것이요 조정에는 명분이 있는 것이다. 어찌 진을 치고 기를 꽂아 창의라 내세우며 대의를 어지럽히는가? 너희들은 모두 양민이니 각각 집으로 돌아가 업에 편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들의 소원을 펴게 하리라.

- 고종 황제의 글 -

농민들 역시 청, 일본이 조선에 와서 설치는 것이 불안하였습니다. 농민군은 전쟁 50일만에 정부와 타협을 하였습니다. 타협의 조건은 정부는 농민들의 요구사항의 일부를 들어주고,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한다는 내용입니다. 단, 농민들도 더 이상의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는 것도 추가되었죠. (전주화약)

이제 농민들은 자유를 얻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처럼 모든 사회를 뒤집어 엎어 버린 혁명은 아니였지만, 스스로 싸워 자신들의 요구를 현실로 바꾼 것입니다. 농민들은 전라도 전주를 중심으로 전라도 53곳에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합니다. 정부는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교정청>을 설치하고 국가적인 개혁 사업에 들어가는데 이것이 1894년 같은 해의 갑오개혁으로 일부 계승됩니다.

집강소 정강

1. 인명을 함부로 죽인 자는 벨일
  1. 탐관오리는 뿌리 뽑을 일
  1. 횡포한 부호배를 엄징할 일
  1. 유림과 양반배의 소굴을 토멸할 일
  1. 잔민 등의 군안을 불지를 일
  1. 종 문서는 불지를 일
  1. 백정의 머리에 폐랑이를 벗기고 갓을 씌울 일
  1. 무명 잡세 등은 혁파할 일
  1. 공사채를 물론하고 과거의 것은 모두 따지지 않을 일
  1. 외적과 연락하는 자는 벨 일
  1. 토지는 평균분작으로 할 일
  1. 농군의 두레법은 장려할 일

농민들은 12개조의 폐정개혁안을 발표하고 전근대적인 <구제도의 모순>을 바꿔나갑니다. 12개조의 내용은 대부분 사회체제의 개혁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기술되어 있습니다. 12개조의 내용도 한번 볼까요? (내용 분석은 동학농민운동 4부할 때 몰아서 하겠습니다.)

① 동학도는 정부와의 원한을 씻고 서정에 협력한다.
  ② 탐관 오리는 그 죄상을 조사하여 엄징한다.
  ③ 횡포한 부호를 엄징한다.
  ④ 불량한 유림과 양반의 무리를 징벌한다.
  ⑤ 노비 문서를 소각한다.
  ⑥ 7종의 천인 차별을 개선하고 백정이 쓰는 평량갓을 없앤다.
  ⑦ 청상 과부의 개가를 허용한다.
  ⑧ 무명의 잡세는 일체 폐지한다.
  ⑨ 관리 채용에는 지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한다.
  ⑩ 왜와 통하는 자는 엄징한다.
  ⑪ 공사채를 물론하고 기왕의 것을 무효로 한다.
  ⑫ 토지는 평균하여 분작한다.

자 이제 1차 동학농민운동이 끝났습니다. 혁명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농민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몇 달도 가지 못합니다. 일본 때문이었지요. 다음 장에서는 동학농민운동의 2차 봉기인 <일본군과의 전쟁>을 한번 다루어 보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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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1 - 동학의 배경과 초기의 종교운동

동학농민운동은 너무나 다양한 의견들과 이견이 많고, 사람들간에 관심이 많은 부분들이라 딱 한마디로 정의해서 글을 쓰기가 어렵네요. 3편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적으면서 각 편마다 약간의 다른 관점들을 제시해서 글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1편은 동학의 초기 활동, 2편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3편은 3.1운동기까의 동학활동과 동학운동을 보는 다양한 관점들 이라는 주제로 한번 정리해 볼까 합니다. 제 글재주로 어디까지 명료하게 적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수설과 정설에 의거해서 되도록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적어볼께요.

1. 동학이 밝음을 주장한 것은 어두운 현실 때문이었다.

동학이라는 종교가 등장한 것은 1859년경입니다. 동학의 교조(교조 : 종교창시자)는 수운 최제우 선생입니다. 최제우는 백성들이 세도 정치에 힘들어하는 것을 보고, 민중을 구원할 방법을 찾던 중 어느 선인을 만나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종교를 창시했다고 합니다. 그럼 동학이 창시된 배경을 하나 하나 볼까요?

동학이 창시될 무렵의 1850년대의 상황은 말 그대로 백성들에게는 희망이 없는 세상이었습니다. 안동 김씨 가문의 세도 정치는 극에 달하여 백성들의 삶은 너무나 황폐해져 있었습니다. 특히 백성들은 잘못된 정치로 인하여 가혹한 세금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흔히 이것을 <삼정의 문란>이라고 합니다.

삼정이란 백성들에게 걷었던 조선 후기 세금의 통칭으로 토지에서 걷는 전세, 군포를 내는 군정, 곡식종자를 빌리고 이자를 내는 환곡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금제도는 일정한 기준이 없이 백성들을 괴롭히기만 하였습니다. 전세는 일정한 기준없이 많은 세금을 걷는 남수가 일반적이었습니다.

군정은 원래 군대를 가야할 사람이 군포 1필을 내면 일정기간 동안 군을 면제해주고, 대신 납부(대납)한 군포로 직업군인을 모집하는 모병제가 조선 후기에 일반적이었습니다. 이 법을 확립한 것이 영조 때의 균역법이었죠. 따라서 원칙상으로는 군포는 1필만 내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도 정치기 문란한 사회에서의 탐관오리들은 특이한 방법으로 군포를 더 많이 걷어갑니다. 죽은 사람을 죽지 않았다고 하여 군포를 걷기(백골징포), 16세도 되지 않은 미성년자에게 군포걷기(황구첨정), 이웃에게 대신 군포를 받기(인징), 친척이 대신 내기(족징), 여자아이를 남자아이라 호적을 속여 군포를 걷기 등등 이였죠.

환곡은 더욱 심하였습니다. 원래 환곡은 춘궁기 때 쌀이나 곡식 종자를 빌려주고, 수확기 때 돌려받는 제도로서 조선 초기에는 이자를 받지 않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운반중 손실분이나, 곡식 종자보관의 어려움 때문에 국가의 손실비용만을 이자로 받는 <일분모회>이라는 제도가 도입되어 백성들의 삶을 해치지 않는 조건에서 일부 이자를 받았죠. 하지만 조선말기 사회가 어려워지고, 국가와 지방의 재정이 고갈되어 가자 지방 관리들은 이 환곡을 고리대처럼 이용하여 아자놀이를 시작합니다. 요즘 사채 광고의 이자 66%는 이 때로 보면 애교일 정도입니다. 고려 시대 이래 <이자가 원금을 넘어서면 더 이상은 받지 말라>는 원칙은 온데 간데 없었습니다. 관리들은 원금보다 비싼 이자를 받았고, 빌리지 않겠다는 사람을 협박하여 거액의 이자로 대출을 해주기도 합니다. 거짓 장부를 만들어 빌리지도 않은 돈을 빌렸다고 하고, 대출금의 담보를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잡아 백성들의 재산을 강탈하기도 합니다.

군전(군역세)은 아무 때나 마구 부과하고 환곡은 원본을 회수하고도 이자를 독촉하며, 세미는 명목도 없이 징수하고 있습니다. 민가에 부과하는 각종 잡역은 나날이 늘어가고, 인척에게 재물을 빼앗는 것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전영관(세금담당관리)은 실제보다 더 거두어 들이면서도 독촉이 심하고, 균전관(균전사 : 토지세 관리자)은 토지 면적을 속여서 세금을 징수합니다. 더구나 각 관청의 구실아치(보조 사무관)들은 백성들로부터 강제로 빼앗고 가혹하게 굴어 참고 견디어낼 수가 없습니다.

- 오하기문 -

이러한 세도정치의 상황에서 백성들은 유량을 하거나, 화전민이 되거나, 간도 쪽으로 도망가기도 합니다. 일부는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저항하여 의적단을 만들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동학>이란 종교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는 종교였습니다.

2. 동학이 받아들인 사상들

1860년대 조선의 상황은 탈선 직전의 사춘기 학생과 같았습니다. 서양의 열강들은 이양산을 보내 조선과 통상을 하자고 성화였고, 세상의 중심인줄 알았던 청이 서양열강에 의해 베이징이 점령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일본의 개화 사상가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조선을 <같이 하기엔 너무 멀리간 나쁜 친구>라는 표현으로 멀리하였는데, 이 때 조선은 스스로 어떤 성장의 길을 가야 할지를 선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필 이 중요한 시기에 세도정치라는 극단적인 망국 정치가 계속되고 있었으니까요.

동학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 것을 찾고, 외세를 배척하고자 일어났습니다. 최제우는 동학의 근간을 <유교에서의 경천사상>에서 찾았습니다. 유교의 경천사상이란, 성리학이나 고증학 같은 신유교가 아니라 중국 고대 한나라의 훈고학이나, 더 멀리 중국 주나라 때의 이상사상을 바탕으로 한 원시유교 사상의 핵심을 말합니다. 즉, 중국 고대 사상 중 천자가 하늘과 감응한다는 동중서의 <천인상응론>과 같은 <하늘, 사랑, 애민> 등의 이론을 그 사상의 근간으로 한 것이죠.

그리고, 우리 전통 사상의 핵심인 유교, 불교, 민간신앙에서 그러한 <하늘, 사랑>의 이념을 도입합니다. <부처>가 주장한 인간 평등사상, 민간에서 말하는 <샤머니즘적인 주술을 통한 하늘과의 만남> 등이 모두 동학사상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즉, 종래의 모든 전통사상들을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경전으로 작성하고, 가장 현실적으로 개편한 사상이 곧 동학인 것이지요. 동학은 외세를 배척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기에, 천주교 사상이 많이 들어가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천주교 역시 인간평등과 사랑이라는 기본정신을 담고 있기에 최제우 역시 이 부분만큼은 수용하였다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입니다.

동학에 들어가 있는 사상은 놀랍도록 방대하고 체계적이라고 합니다. 일단, 조선 후기 집권층의 사상인 주기철학에서의 개방성도 수용합니다. <이가 불변한다는> 주리론보다는 <기가 가변적이라는>주기철학이 보다개방적이죠.

주역에서의 시세와 오행에 따른 변화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이미 중국 고대 동중서가 추연의 음양오행설을 정리하고 한대 유학을 정리하면서 완성하였던 개념입니다. 천자와 하늘이 감응하고, 우주는 음양의 조화에 의해 움직이며, 오행은 순행한다는 중국 전통 사상 중의 하나이죠. 동학에서는 이중 우리 현실에 적합한 사상인 <시류에 따른 오행의 순행 변화>를 받아들입니다.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 변화는 순리에 적합해야 한다는 것이 동학의 입장이었죠.

동학에서는 종래 샤먼적인 귀신신앙과 예언을 중심으로 한 도참사상도 받아들입니다. 세상이 어려울 때에는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사상을 통해 백성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니까요. 이 예언적인 도참사상은 불교의 미륵신앙과, 샤머니즘적인 무당신앙, 귀신신앙은 불교의 업설과 연결되어 동학의 사상을 현실개혁적이고, 사회개혁적인 사상으로 이끌어 갑니다.

특히, 예언사상은 조선의 운명은 종말을 고하였다는 운수사상과 연결되는데, 이 운수사상은 오행의 순환에 의해 화-목-수-금-토의 순환논리 상 새로운 시대가 열려야 한다는 오행순환설과 연결됩니다. 모든 전통신앙을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연결시킨 것이지요.

그러나, 동학에서 말하는 새로운 세상은 중국에서 말하는 단순한 왕조의 교체는 아니였습니다. 최제우가 꿈꾼 새로운 세상이란 백성들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가는 세상이었죠. 이것은 개혁을 넘어서 혁명을 꿈꾸는 사상이었습니다. 동학의 새로운 세상은 백성이 곧 하늘이고(인내천), 모두가 평등하며(만민평등), 침략적인 외세를 몰아내고 국가를 보호하며(보국안민), 새로운 국가가 백성을 감싸안는(제폭구민) 새로운 세상입니다.

즉, 지금의 세상은 완전히 사라지고(후천개벽), 백성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알리는(광제창생)의 세상이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동학에서는 새로운 세상을 위해 현세의 문제점을 비판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동학이 초기부터 종교운동을 넘어 사회운동적 성격을 띈 것은 교리 자체부터가 새로움에 대한 기대로 시작하였기 때문이죠. 동학은 세도정치의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비판하고(반봉건적 운동), 우리의 자주적 개혁을 방해하는 침략적인 외세를 규탄하는(반외세적 운동) 운동이었습니다.

정부는 이러한 동학의 교리를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동학이 창시된 것이 1857-59년 사이이고, 교조인 최제우가 <백성을 혼란에 빠뜨려 세상을 어지럽히려 한다(혹세무민)>의 명목으로 죽은 것이 1864년이므로, 동학이 등장에 정부에 얼마나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래의 글은 최시형이 동학운동을 마치고 눈을 감을 무렵의 유언과 같은 말입니다. 이 말 한마디에서 동학의 사회운동적 성격이 극명히 드러납니다.

누가 해월(2대 교주 최시형)에게 물었다. "개벽이 언제 이루어지리이까?"

해월은 말했다. "산이 검어지고 길에 비단이 깔리고 만국의 병마가 이 땅에 왔다가 물러갈 때니라."

아래의 글은 1863년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가 2대 교주를 최시형으로 임명하면서 지은 시입니다. 최제우는 최시형을 교주로 임명하고, 1년 뒤 정부에 의해 처형을 당합니다. 아마 이 때 이미 최제우는 자신의 미래를 예감하고 최시형에게 뒷일을 부탁한 것은 아닐까요?

燈明水上無嫌隙

柱似枯形力有餘

吾順受天命

汝高飛遠走

등불이 물위에 틈없이 밝았다.

기둥은 죽어 말랐으나 오히려 힘이 있나니

나는 하늘님의 부르심을 받겠노라.  

너는 높이 나르고 멀리 뛰어라!

3. 동학의 체계를 확고히 한 최시형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하고, 미처 기틀도 잡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면, 2대 교주 최시형은 30년 이상 동학을 이끌면서 동학의 기반을 탄탄하게 잡은 인물입니다.

최시형은 최제우가 펴낸 동학의 경전인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정리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전이 2권인 것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처럼 시대가 달라서가 아니였습니다. 이것은 교리를 2원화하여 동학의지지기반을 넓히려는 의도였습니다.

즉, 동경대전은 성리학을 공부한 어느 정도 지식있는 이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자와 일화를 수록하여 작성하였죠. 그러나, 용담유사는 글을 모르는 백성이라도 쉽게 따라 말할 수 있는 시조, 창가조의 형식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쉬운 말로 이야기책과 대중가요식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거죠.

그리고, 동학의 조직도 2원화하여 체계적인 틀을 잡습니다. 흔히 말하는 포접제(抱接制)가 그것이죠. 동학에서는 촌락마다 포라는 조직을 통하여 향촌사회의 일을 처리하였습니다. 일단 동학의 최고 수장은 교주인데, 그 교주 아래에 향촌마다 포가 있어 그 포의 소교주를 대접주라고 합니다. 또 대접주 아래 향촌 말단 사회인 <면, 리>에는 접주가 있었습니다. 서양으로 따지면 교황 - 교구(대사제) - 사제로 이어지는 교구제와 비슷하네요. 교구제와 포접제의 공통점은 종교적 위계단위가 국가행정구역의 단위를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에 별도의 행정단위를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점입니다.

즉, 동학교단은 국가 행정망을 이용할 수 있었고, 농민들이 마을 단위로 봉기할 때에는 동학의 지휘를 받을 수 있는 체계가 마련된 것이지요. 또 대규모의 봉기가 있을 경우에는 포접제를 통하여 농민군이 동원될 수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봉기는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훗날 동학농민군이 전라도를 점령하였을 대 이 포접제를 이용하여 스스로 자치를 하는 <집강소>를 운영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포접제를 통해서입니다. 실제 동학농민군이 1894년 전주를 점령하였을 때 포접제를 통하여 전라도에 53개의 민정 집강소를 설치하였고, 이 집강소가 지방 행정과 치안의 기능을 동시에 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4. 동학운동이 점차 정치운동화 되어가다.

최제우가 백성들을 현혹한다고 하여 처형된 후, 1860년대의 동학운동은 교조신원운동 차원의 종교운동이었습니다. 동학이 현실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지만, 60년대 종교운동적인 특징을 보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최제우가 죽은 이후 교단의 체계를 확실히 잡아야 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둘째는 1862년 대규모 농민반란인 임술농민봉기 이후 전국적인 농민운동을 지휘할 지도자의 역할이 필요하였고, 최제우의 명예를 회복해 달라는 교조신원운동은 그것에 적합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1863년부터 10년간 세도정치를 몰아내고 개혁정치를 실시한 흥선대원군의 집권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농민들을 괴롭힌 원흉인 세도가문을 몰아낸 새로운 정권에게 동학이 굳이 적대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고, 흥선대원군은 동학농민들의 1순위 요구인 환곡의 폐단 등 삼정의 문란을 효과적으로 해결해주었기 때문입니다.

1870년대가 되어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민씨정권에 의한 개화정책이 시작되자 동학교단에서는 정치운동을 본격화하기 시작합니다. 정치운동적 성격을 확연히 보여준 것은 흥선대원군기 이필제의 난 부터입니다.

이필제는 몰락한 양반출신으로서 자신과 같은 몰락양반들과 함께 군현단위로 농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 성격이 다른 민란과는 완전 달랐습니다. 그동안의 민란이 각 고을의 부정부패를 고발하고, 교조신원운동을 확산시키는 운동이었다면, 이필제의 난은 지방관아를 점령하고 서울진공작전을 벌이려는 반국가적 반란이었습니다. 이필제는 자신이 백성을 구원하여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논리를 펴며 자신이 <정감록> 등에 나오는 세상을 구원할 인물이라 주장하였습니다.

이필제의 난은 이필제 외에 곳곳에서 동지들이 같이 난을 일으키기로 되어 있었지만, 대부분 사전 밀고로 실패하고 난을 일으킨 것은 경상도 경주 지방의 이필제 뿐이었습니다. 당시 최시형은 종교 재건작업이 한창인 때에 정치적 변란에 참여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이필제의 주장에 설득되어 난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난을 성공하여 경상도 일부를 점령하고 관청을 접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변란에 의아해하는 농민들은 이 난에 호응하지 않았고 결국 이 난은 실패하고 맙니다. 이필제는 죽었고, 최시형은 이렇게 지식인 중심, 몰락양반중심의 정치 운동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후 동학의 정치 운동은 철저히 농민중심으로 전개됩니다. 1880년대 최시형은 개화정책이 진행되던 시기에도 묵묵히 교리와 조직을 정비하는데 힘써갔으며, 포접제, 용담유사의 간행 등으로 농민속으로 들어가는 운동을 계속 진행합니다.

1890년대에는 본격적인 동학교도들의 정치 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 때에서 교주 최시형은 정치적 변란 보다는 조직의 강건함을 바탕으로 정부에 맞서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독자적인 세력이었던 전봉준 집단 등 지역 농민 집단은 이미 반정부적인 활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실제 1894년의 동학농민운동의 과정을 적어보려고 합니다. 아주 긴 포스트가 될 것 같네요. 실제 동학농민운동은 수십개의 다양한 사료를 정리해서 사료 위주의 포스트를 구성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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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토막 역사 2화. 3개의 짧은 이야기...

1. 황제나 지배자를 뜻하는 <카이저, 차르>의 어원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러시아의 지배자를 뜻하는 뜻인 <차르>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요? 러시아의 지배자인 차르, 독일에서 황제라는 말은 카이저는 모두 로마 공화정 말기의 지배자였던 카이사르(시저)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정 말기 민중파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며 <빵과 서커스 정치>로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의 인생과 양아들 부르투스에게 암살당하는 장면은 훗날 연극 등에서 주요 소재 거리가 되었는데, 유럽의 각국은 그의 이름과 황제라는 말을 연결시켜 칭호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로마의 황제란, 카이사르가 죽은 뒤 그의 양아들인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시작됩니다. 정작 카이사르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동양 중국에서 유래된 황제란 말은 전설적인 3황 5제 시대의 마지막 지배자였던 <황제>의 명칭에서 시작됩니다. 서유럽에서 말하는 지배자 슐탄-칼리프은 황제(슐탄)이자 종교지배자(칼리프)를 모두 어우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황제의 개념을 이야기할 때, 왕보다 높은 지배자를 통칭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중국의 황제는 중국 주나라 이후 주변의 제후국들을 왕으로 칭하면서 <그들의 우두머리>성격을 가진 자들을 통칭하는 말로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에서부터 사용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유럽식 언어와 연결시켜 황제의 개념을 설명하곤 하죠. 예로, 서양에서 각국의 수장을 왕이라고 하지만, 나폴레옹은 유럽 각국을 정복하여 유럽 자체를 나폴레옹 왕가로 만들어 친인척을 왕으로 임명하면서 황제의 칭호를 얻습니다.

그러나, 사실 황제의 칭호는 관념적인 것으로 어떤 특정한 기준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정치적 상황과 세력을 고려하여 칭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고려시대 묘청도 황제를 칭하여 금국을 정벌하자고 하였고, 조선 후기 고종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치면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합니다. 황제의 역사적 개념은 <넓은 영토를 다스리며 분봉된 왕들의 수장>으로 절대권력을 가진 자이지만, 실제 관념적인 개념은 <자신의 세력을 대외에 알리기 위한> 정치적 목적인 것도 있었습니다.

2. 흥선대원군도 증기선을 만든 적이 있다!

영국과 각국의 산업혁명이 언제인지 아시죠? 영국의 산업혁명은 18세기, 유럽과 미국, 독일, 일본의 산업혁명은 19세기 초반부터 후반부까지입니다. 그럼 우리나라는? 산업혁명이 없었다구요? 보통 우리나라는 광복후 급격한 산업화를 이루었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증기기관과 증기선>을 만들려는 시도가 우리나라에도 있었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서양세력을 막아낸 흥선대원군 아시죠? 흥선대원군은 프랑스가 침입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사용한 배가 <증기선>이라는 것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앞으로 계속 침략할 서양에 맞서기 위해서는 서양보다 우수한 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죠. 흥선대원군은 전국 곳곳에 글을 올려 서양의 증기선을 물리칠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 때 채택된 방법이 바로 <학우선>이라는 기발한 방법의 배를 만드는 방법이었습니다. 학우선이란 학의 깃털로 배를 만들면 그 탄력성 때문에 서양의 포탄을 맞아도 배에 구멍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만든 배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실제 그 배를 만들어보겠다고 생각하여 전국에서 학을 잡아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현상금을 받고 싶었던 사냥꾼들은 학을 잡아 그 깃털을 모으고, 국가에 깃털을 보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깃털에 아교로 붙여 만든 배를 보고 만족하여, 그 배를 포구(마포)에서 시험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배의 진수식을 하자마자 배는 물이 새어 곧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대동강에서 격파한 적이 있었는데, 대원군은 그 배의 증기기관을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제너럴 셔먼호의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철갑선을 만들고 다시 마포에서 진수식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증기기관의 엔진에 사용해야 하는 것을 석탄이었지만, 석탄이 아닌 석탄의 대체재인 숯을 연료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배는 몇 미터 나가다가 멈추어 버렸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렇게 국방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당시 집권당이 하나 하나 연구하였던 성과물들은 민씨정권으로 바뀌면서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민씨정권은 서양에서 직접 무기기술과 최신 무기를 가져와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3. 마젤란과 라프라프는 서로에게 영웅과 역적이 되었다!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마젤란은 유럽역사의 한 획을 장식한 위대한 영웅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마젤란은 실제 세계일주를 하지 못하고 필리핀에서 죽었으며 그의 부하들이 세계일주를 완료하였다고 합니다.

1521년 마젤란은 세계 일주 도중 필리핀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젤란은 세계일주가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고, 식수와 음식을 구하기 위해 필리핀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젤란이 필리핀에서 크리스트교를 강요한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필리핀의 주변 섬들은 마젤란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고, 이교도가 필리핀에서 포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강경한 신자인 마젤란과 필리핀 주변 섬에 큰 영향을 미치던 마크탄의 왕이었던 라프라프는 결국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싸움을 하느님의 가호로 쉽게 이기리라던 마젤란의 예상은 크게 빗나갔고, 필리핀인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마젤란은 죽게 되었습니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고 다급했던지 마젤란의 부하들은 함장의 시체도 찾지 못하고 섬에서 다급히 나와야 했다고 합니다.

이 싸움 후 크게 좌절한 마젤란의 일행들은 여행 도중의 섬들에서 제대로 된 식수를 공급받는 일이 드물게 되었고, 그들이 에스파냐로 돌아올 때에는 식수부족, 영양실조 등으로 정상적인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마젤란의 함대 중 한 척인 빅토리아 호만 요한 세바스찬 엘카노의 지휘아래 모국에 돌아옴으로서 세계일주가 완성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은 이것을 역사적인 여행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 아시죠? 무적함대로 전 유럽을 호령하였던 위대한 에스파냐의 왕입니다. 펠리페 2세는 마젤란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마젤란이 죽은 섬을 국왕가인 <펠리페>의 이름을 따서 <필리핀>이라고 이름지었답니다.

그러나 과연 필리핀인들의 입장에서도 마젤란의 항해가 위대한 업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지금 필리핀의 역사 박물관에는 <마젤란 비석>과 <라프라프의 비석>이 동등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마젤란의 비석에는 <애석하게도 라프라프에게 죽고만 여행가>라는 입장에서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라프라프의 비석에는 <침략자인 에스파냐인들을 무찌른 필리핀 최초의 국왕>으로서 라프라프의 이름이 적혀져 있습니다. 역사는 관점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바뀌나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영웅으로 여겨지는 광개토대왕은 여진족 입장에서는 잔인한 학살자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점진론을 주장하고 조선 초대 통감으로서 한국 정벌에 앞장선 영웅 이토 히로부미지만, 한국에서는 역적 이토 히로부미로서 안중근 의사에게 죽고만 일본인으로 묘사되죠. 역사를 뒤집어 보면 승자와 패자가 꼭 보편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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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년 조선의 중립화론을 주장하다.

1. 갑신정변 이후 정세

갑신정변 이후, 우리나라는 또 다시 청에게 정치적으로 종속되고 맙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이 모두 청의 개입으로 실패하면서 우리나라는 청에게 내정간섭을 심하게 받게 되죠. 그리고 일본은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청을 견제하고 조선에 대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조선과 지속적인 조약을 체결합니다.

일단, 임오군란 때는 제물포 조약을 통해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얻어냅니다. 갑신정변 때의 톈진조약으로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청군과 공동 출병, 공동 철수할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냄으로서 최소한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청에게 밀리지 않도록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의 정치적 주도권은 아직 청에게 있었죠. 청은 <흥선대원군>을 납치하고, 민씨정권쪽에다가는 <정치고문, 경제고문>을 파견함으로서 조선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니까요.

2. 조선과 러시아는 서로의 목적에 도움이 될 듯 싶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청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러시아에게 접근하려고 합니다. 러시아는 1880년 조선책략이 들어왔을 때, 일본, 중국, 미국과 연합하여 막아야 한다고 인식하였던 나라입니다. 갑신정변 직전까지만 해도 개화파 중에서 이 말을 의심하는 사람이 적었죠. 그러나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러시아는 우리 나라와 아무런 원한도 없는 나라이고, 이 나라를 이용하면 청과 일본의 조선 침투를 막기에 좋았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사실 80년대 초반부터 위정척사파들은 러시아를 적대시하는 개화파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는 우리와 아무런 이익관계가 없던 나라였으니까요.

일본이 이미 우리의 수륙 요충 지대를 점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허술함을 알고 충돌을 자행할 경우 이를 제지할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입니다. 갑자기 황 쭌셴의 종용을 받고 우리 스스로가 끌어 들인다면, 그들이 풍랑을 헤치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재산을 약탈 하거나, 저들이 우리의 약점을 잡아 어려운 청을 강요한다면 이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러시아는 본래 우리와는 혐의(嫌疑)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연히 남의 이간을 듣고 우리의 위신을 손상시키거나 원교를 핑계로 근린을 배척하다가 만의 하나 환란이 일어나면 장차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사학에 종사하여 재화를 이루고 농, 공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원래 우리에게도 옛부터 재용과 농공에 대한 훌륭한 법규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서학에 종사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야소교 전래가 해롭지 않다고 하는 것은 사교를 조선에 유포시키려는 간계이니, 주공, 공자, 정자, 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혀서 그 사람 귀류들을 물리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만손의 영남 만인소 중에서 조선책략의 내용을 비판한 글 -

사실, 조선은 청과 일본을 막기 위해 미국과 먼저 접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먼 나라인 미국은 조선을 돕는 것이 자국에 도움이 될지 확신하지 못하였습니다. 결국 우리가 접촉한 청나라의 대항마는 러시아가 된 것이죠.

그럼 러시아는 우리를 도왔을 때 무슨 이득이 있을까요?

러시아는 당시 적극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북극해에서 내려와 얼지 않는 항구(부동항)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죠. 덩치큰 러시아는 이것을 위해 전 세계적으로 열강들과 부딪히게 됩니다. 유럽에서는 발칸반도로 진출하기 위해 러투전쟁, 크림전쟁 등이 지속되었고, 청나라와는 아이훈 조약, 네르친스크 조약 등으로 국경을 정하고 있었습니다. 또 표트르 3세, 에카테리나 2세 등을 거치면서 알레스카와 북미까지 진출하려고 하였습니다.

1860년이 되면서 청과 러시아의 관계는 급속이 냉각됩니다. 1860년 청이 아편전쟁에서 져서 영국과 베이징 조약을 맺을 때 러시아는 이 조약을 중재한 대가로 연해주를 획득하게 됩니다. <연해주>는 우리나라 동북쪽 국경과 마주보는 곳으로서, 이제 러시아가 우리와 국경을 통해 직접 만나는 국가가 된 것입니다.

1884년 조선는 러시아와 조러수호통상조약을 맺고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인정하면서 청과 일본을 견재>하려는 정책을 추진합니다. 러시아와 조선이 각각의 목적을 가지고 만난 것이지요. 그 공통의 목적은 성장하고 있는 청, 일본의 세력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러시아는 베베르를 조선에 외교 고문으로 파견합니다.

1888년에는 육로통상조약을 체결하는데, 그 내용은 러시아와 마주보는 동북국경선인 <함경북도 경흥에서 국경무역을 허락>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80년대 후반부터 러시아도 우리나라에 대한 경제적 침투를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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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러수호조약원본>

3. 조선은 중립을 외치고 싶다.

러시아를 막기 위해 일본은 영국과 손을 잡기 시작합니다. 영일동맹 이전부터 이미 일본과 영국이라는 섬나라는 항구를 찾아 남하하는 러시아를 막기 위한 공동전선을 편 것이지요. 특히, 1885년 조선이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러시아와 조러비밀협약을 추진했는데 실패했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한다는 구실로 우리나라 남쪽의 섬인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는 거문도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제 한반도는 <청, 러시아, 일본, 영국>이라는 4개의 나라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제사회의 이슈가 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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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 중반 4개국의 조선 간섭 : 청, 러시아, 일본, 영국>

이렇게 되자 조선주재 독일 부영사인 부들러는 조선의 외교 담당관이었던 김윤식에게 한반도의 중립을 건의합니다.(1885) 조선이 이러다 청일 양국의 전쟁터가 되고, 조선은 청일간의 승자에게 넘어가는 나라가 될 것이라는 것이 부들러의 주장이었습니다. 실제, 10년 후 청일전쟁이 터지고 일본이 한반도 주도권을 잡는 상황을 생각해보면 10년을 내다본 통찰략으로 말한 것이지요.

그러나, 조선의 조정은 이러한 의견에 부정적이었고,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톈진조약에서 조선에 대한 공동출병과 공동철수를 보장하여 세력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중립을 외쳐 그들을 자극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공론만 벌이다가 중립론을 인정하지 못한 것입니다.

또, 미국에서 유학을 다녀온 유길준 역시 조선 중립화론을 주장하지만, 민씨정권은 그를 김옥균, 서재필과 같은 급진 개화파의 무리로 몰아 버리는 바람에 조선 중립화론은 공표되지도 못한채 사장됩니다.

우리의 지리적 위치는 벨기에와 같고, 중국에 조공하던 것은 터키에 조공하던 불가리아와 같다.

불가리아의 중립은 유럽 열강들이 러시아를 막기 위함이고, 벨기에의 중립은 유립 열강들이 자국을 보전하기 위함이었다. 우리 나라가 아시아의 중립국이 된다면 러시아를 방어할 수도, 아시아 국가들이 서로 보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직 중립만이 우리를 지키는 방책인데, 우리 스스로가 제창할 수도 없으니 중국에 청하도록 하자. 아시아에 관계있는 여러 나라들이 화합해 조선의 중립을 확인받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우리만 위한 것이 아니라 중국이며 다른 여러 나라가 서로 보전하는 계책도 될테니 무엇이 괴로워서 하지 않겠는가?

- 유길준의 조선 중립화론 -

유길준이 위 글에서 제시한 중립화론은 우리의 현실이 답답해서 한번 말해본 감정적인 중립화론이 아닙니다. 유길준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서유견문을 적을 정도로 당시 시대 상황을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럽의 벨기에, 불가리아와 같은 중립국이 생긴 원인을 국제 정세에서 분석하여, 우리가 중립을 하였을 때 주변의 반응과 주변국에게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변 열강 모두에게 인정을 받으면서도, 주변 열강들에게도 이익을 줄 수 있는 실리적 중립이 무엇인가를 고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집권자들은 이러한 의견을 한번 고민해보지도 않은 채, 김옥균당의 변병이라면서 묵살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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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길준>

오늘 글은 상당히 짧았네요. 다음 장에서는 중립화론이 무효화 된 이후 일본과 청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침략하는 과정을 조일수호조규부록, 통상정정,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통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반부, 1991
  2. 한국사통론, 변태섭 저(4개정판), 1997

  3. 7차 교육과정 근현대사 교과서(대한교과서)
  4. 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구회, 청아출판사, 1988
  5. 한국통사, 박은식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6
  6. 누드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이투스, 2007
  7. 뿌리깊은 한국사 샘이 깊은 이야기 6권, 김태웅 지음, 2003, 솔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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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1. 개화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번 파트에서 이야기할 내용은 개화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흔히 개화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배경만 간단히 설명하고 갑신정변을 주로 다루곤 합니다. 하지만, 개화파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은 이상 그 기원이 있었겠죠? 자 지금부터 전개할 이야기는 개화파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부터입니다.

개화파를 알기 위해서는 <개화>란 말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객이 나에게 물었다. <개화는 무엇이며, 어떠한 일을 말하는 것인가?>

내가 답하였다. <만물의 뜻을 깨달아 천하의 일을 이루는 것이며(개물성무 : 開物成務),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바로잡는 것(화민성속 : 化民成俗)이 바로 개화이다.>

- 황성신문 논설, 광무 2년(1898) 9월 23일 -

무릇 개화란 인간의 온갖 만물이 가장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일컫는데, 개화에는 인륜 개화, 학술 개화, 정치 개화, 법률 개화, 기계 개화, 물품 개화가 있다. 인륜 개화는 천하만국을 통하여 그 동일한 규모가 천만년을 지나도 장구함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 이하의 여러 개화란 시대에 따라서 변개하기도 하고 지방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맞았지만 지금은 맞지 않으며, 저쪽에는 좋지만 이쪽에는 좋지 않은 것도 있어, 곧 고금의 형세를 살피고 피차 사정을 비교하여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리는 것이 곧 개화의 큰 도인 것이다.

- 서유견문 제 14편, 개화의 등급 -

개화란, 백성을 다스리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인륜을 바로세우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화에는 인륜, 학술, 정치, 법률, 기계, 물품에 대한 개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더 간추리면, 인륜(도덕), 정치(통치술), 기술(물질문명)에 대한 3가지가 개화에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중에서 동양의 인륜은 지키고, 서양 기술만 받아들이자는 입장을 <동도서기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통 개화파하면 인륜, 정치, 기술 등 모든 서양 문명의 장점을 취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동도서기적인 관점의 개화는 온건한 개화파라고 구분합니다. 실제 모든 것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은 변법적 개화파인 김옥균 등 급진적 개화파였죠.

2. 개화파의 기원 1 - 조선 시대 낙론에서 이어지는 통상 개화론자들

개화파의 기원을 찾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부분은 <북학사상>에서 기원하는 통상 개화론자들입니다. 이들은 그 인맥과 사상이 상당히 깊은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먼저 방금 급조해서 만든 다음 표를 한번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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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표를 제시한 이유는 개화사상의 연결고리가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개화파부터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개화사상의 근간이 되는 기원적인 이론은 이미 조선시대 <호락논쟁> 때의 낙론에서 비롯됩니다. 낙론과 개화사상이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낙론의 개방적인 이론이 훗날 개화사상으로 이어지는 기원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할 뿐입니다. 낙론에서는 <인물성동론>을 내세워서 명을 멸망시킨 오랑캐 국가(여진의 청나라)도 하나의 국가로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낙론적인 입장은 중상학파 실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청과 상공업을 통한 무역>을 적극 추구하는 것을 낯설게 생각하지 않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 때의 실학자들이 활동했던 시기가 정조 때이지요. 그러나, 정조 이후 세도정치를 겪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겪으면서 이들의 대외 개방적 사고는 자취를 감추는 듯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를 겪으면서도 개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원군의 정책에 반발하여 외국의 통상의 이로움을 주장하면서 외국 저서들을 적극 유입한 이들이 있었죠. 바로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로 이어지는 통상 개화론자들입니다. 비록, 쇄국정책의 국론에 밀려 이들의 뜻은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이들은 개화의 선구자 역할을 합니다. 만국공법, 영환지략 등의 개화 저서들이 이 때 들어오고, 이 책들은 훗날 1880년 조선책략의 유입과 함께 개화사상을 이끌어가는 사상적 기반이 됩니다.

이러한 연결고리를 통해 개화파들은 성장하였고, 대원군 이후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개화가 곧 <국가 주요 정책>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사상적 측면과 함께, 인맥에 있어서도 개화파와 기존 북학파가 연결이 된다는 점입니다. 즉 북학파인 박지원의 제자가 박제가이고, 박지원의 손자가 통상개화론자인 박규수입니다. 오경석과 유홍기같은 중인들도 이덕무와 같은 북학파들의 저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의 인맥이 훗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의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즉, 결론 내리자면 우리나라 개화파들의 등장은 낙론부터 북학사상, 통상개화론에 이르는 사상적 연결고리, 인맥적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합니다.

3. 개화파의 기원 2 - 청과 일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개화파가 내부적인 성장만을 거친 것은 아닙니다. 더 큰 요인을 따지자면, 당시 국제 정세의 긴박함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우리의 주변국인 청과 일본은 각각 개항을 통해 변혁을 거치고 있었습니다.

청은 영국과의 아편전쟁 이후 서양 무기의 우수함을 알고 양무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그 중심인물은 <이홍장>이었습니다. 이홍장은 중국 핵심 지도층은 아니지만, 자신의 근무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서양식 기술을 도입하여 <중국의 정신에 서양의 기술을 입힌다>는 중체서용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개화파들은 이홍장과 많은 교류를 통하여 서양 기술의 우수성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홍장과 연결되어 민씨 정권에서 협력한 일련의 개화파들이 중체서용과 유사한 동도서기를 주장하는 <온건개화파>무리를 이룹니다.

또 당시 일본 역시 미국에 의해 개항을 하여 <메이지유신>을 겪었고, 변법적인 개화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기수, 김홍집 등의 수신사를 보내어 일본의 발전상황을 기록하고 그들의 발전과정을 배우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침략적인 행보 속에서 일본의 문물은 청의 문물보다 크게 신경쓰지는 못하였습니다. 민씨정권의 개화는 이홍장의 조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일본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입장의 전면적 개화는 민씨정권이 전면적인 청의 간섭을 받게되는 임오군란 이전에는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4. 개화파가 추진한 한국 근대화의 모델

개화파는 서구식 발전모델을 그대로 적용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하려 하였습니다. 개화파들은 강화도 조약을 맺고 난 이후인 1878년 충의계를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개화 정책을 시작하려 하였습니다.

개화파가 추구한 서구식 모델이란, 서구의 산업혁명을 모델로 하는 <부르조아지적인 부국강병>이었습니다. 개화파는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가진 지주층을 서구의 <중산계급>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따라서 지주제를 발전시켜 근대적인 농법을 발전시키고, 지조법을 개혁하여 조세제도의 합리화를 통해 지주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근대화로 인식하였습니다.

또, 상공업에 있어서는 서양식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합좌회사를 늘려 <민간자본주의>를 실현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상공업에 기여할 수 있는 계층을 자본가로 육성하여 그들에게 특혜를 주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개화파가 추진한 근대화의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갑신정변이나, 김홍집 내각의 개혁안을 보아도 농민을 위한 토지개혁이나, 노동법 등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개혁들은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여 새로운 부르조아 계급을 양산하기 위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으니까요.

5. 1880년대 개화파가 분화되다.

1880년 조선책략이 유입된 이후, 임오군란을 겪으면서 개화파는 분화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세력은 강화도 조약 이후 계속적인 개화 통상을 요구하였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 관료세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홍장의 충고를 받아들여 <몸은 우리의 것이되,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들인다>는 관점에서 동도서기론적인 개화를 추진합니다. 즉, 이들이 추구한 개화의 모델은 중국의 양무운동이었죠.

김홍집 내각은 민씨정권에서 일하는 관료세력들로서 이홍장 등 청의 세력과 타협하는 사대적인 자세를 가지고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개화방법은 국가 체제를 건드리지 않고, 조금씩 서양의 문물을 흡수 수용하는 점진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두 번째 세력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으로 대표되는 급진적 개화파였습니다. 이들은 조선책략이 유입된 이후, 조선책략의 내용대로 이행되는 사항이 더디게 이루어짐을 비판하였습니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어 개화정책이 후퇴하자, 청의 고문인 뮐렌도르프 등과 잦은 마찰이 있었습니다. 급진개화파는 임오군란 이후 고종과 직접 접촉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이들이 추구한 개화는 서구의 기술과 사상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여,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국왕중심의 입헌군주제, 즉 내각제도를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기존 세력인 민씨정권을 비판하고, 민씨정권의 개화파들과 대립하였습니다. 특히 청에 대한 사대외교를 망국의 외교라고 비판하면서 자주외교를 통하여 스스로 개화할 힘을 키울 것을 주장합니다. 이들은 청의 정치, 재정 고문들과 차관을 빌리는 문제로 대립하였고, 이것이 훗날 갑신정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됩니다.

즉 정리하자면, 온건 개화파와 급진개화파가 분화된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민씨정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입니다. 민씨 정권의 개화정책을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가, 소극적인 흉내내기로 보는가에 대한 차이입니다.

두 번째로는 외교정책에 대한 차이입니다. 조선책략에서 말한 <러시아를 견재하기 위해 청, 일본, 미국과 힘을 모아야 한다>라는 부분에서 온건개화파는 <청>에 중심을, 급진개화파는 <일본, 미국>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개화의 방법상의 차이입니다. 온건개화파는 <인륜, 정치방식>은 그대로 두고 <서양기술>부터 점진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입장이었습니다. 급진개화파는 <정치방식과 서양기술>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자는 변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여기까지 간단히 다루고 다음 파트에서는 갑신정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제가 적으면서도 지루한 이야기였네요.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반부, 1991
  2. 한국사통론, 변태섭 저(4개정판), 1997

  3. 7차 교육과정 근현대사 교과서(대한교과서)
  4. 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구회, 청아출판사, 1988
  5. 한국통사, 박은식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6
  6. 누드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이투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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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 이후 위정척사는 계속되었다.

1. 위정척사란?

흥선대원군이 18363년부터 집권하여 안동김씨의 노론 세도 가문을 축출한지 10년... 1873년 민씨가 정권을 잡으면서 대원군이 실각하고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개화정책을 실시합니다. 이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개화정책은 강화도조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고, 조선책략이 유입되면서 구체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화 사상을 우리 전통 유교주의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당연히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반대한 이유는 아무런 근거없이 서양을 싫어해서도, 조선 왕조를 지탱하는 신분질서의 하나인 성리학을 수호하기 위해서만도 아니였습니다. 물론 통상요구가 조선의 신분제와 사회질서의 근간을 흔들기는 하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것을 나름대로 논리있게 반박하였습니다.

성리학의 근본질서를 옳은 것(正)으로 여기는 것을 위정이라 하고, 서양의 문물을 악으로 보아 사(邪)라 하는 것을 척사라 하여 이러한 사상을 <위정척사>라고 합니다. 그럼 위정척사의 핵심 내용들을 한번 볼까요?

2. 대원군기의 위정척사(1863-1873)

흥선대원군이 막 집권하던 시기는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하고, 아편 전쟁 이후 중국 베이징을 함락시킨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열강들이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가지던 시기입니다. 또 미국은 일본을 개항시킨 이후 그 통상영역을 조선에 까지 확장하려고 하던 시기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외세를 몰아내고 척화비를 건립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부터 1871년 신미양요까지 조선은 통상을 요구하는 외세의 압력과 직접 맞싸워야 했습니다. 또, 제너럴 셔먼호 사건 등으로 조선민들은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이 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1860년대의 위정척사운동이란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인식으로 외국과의 통상은 곧, 매국이라고 여기는 분위기였습니다. 박규수, 오경석 등 초기 개화주의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집권층이 대원군 정권과는 연결되지 못하고, 개별적인 개화 주장을 해야 했습니다.

위정척사론은 외국과 통상을 했을 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화이사상에 기반을 두고 전개된 내용이긴 하지만, 이미 중국과 일본이 외세에 넘어간 상황에서 우리 상황을 잘 이해하고, 서양 침투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나열한 논리적인 반대였습니다. 하지만, 그 논리속에는 서양에 대한 두려움과 유교사상의 입장에서 본 서양인의 <짐승>같은 행위들에 대한 좁은 시선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럼 몇 가지 글을 한 번 볼까요?

또 하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양이의 화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홍수나 맹수의 해일지라도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힘쓰시고 경계하시어 안으로는 관리들로 하여금 사학의 무리를 잡아 베시고, 밖으로는 장병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하도록 하옵소서.

오늘날 양적의 침입을 당하여 군론이 교(외교)와 전(전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런데 양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은 내 나라 쪽 사람, 곧 국변인의 주장이고, 양적과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은 적국 쪽 사람, 곧 적변인의 주장입니다. 전자를 따르면 나라의 의상지구(조선문화의 전통)를 보전할 수 있지만, 후자에 따른다면 인류(조선인)가 금수의 지경으로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 점이 양적과 싸우니냐 화친하느냐 하는 차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근본을 잡는 신념, 곧 겸이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상황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 노릇을 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고비와, 존속하느냐 멸먕하느냐 하는 기틀이 잠깐 사이에 결정되오니 정말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한갓 지엽만 다스리고 근본을 제거하지 않거나, 한갓 흐름만 멈추게 하고 원천을 막지 아니한다면 근본의 싹과 원천의 샘솟음을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이의 재앙을 일소하는 근본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전하를 위한 계책은 마음을 맑게 닦아 외물에 견제당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외물이란 것은 종류가 극히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양품이 가장 심하옵니다.

몸을 닦아 집안이 다스려지고 나라가 잡힌다면 양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기이함과 교묘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저들이 기필코 할 일이 없어져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평생 양직물을 입지 아니하고 집안에서 양품을 사용하지 아니하여 그것으로 집안의 법도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잡아죽이고 정벌하는 일과 본말이 되어 서로 돕고 의지하게 되오니 꼭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 이항로, 화서집 권 3, 소차, 사동부승지겸진소회 -

1860년대 대표적인 위정척사 사상가 이항로의 화서집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위 내용에서 보면 1860년대 위정척사 사상이 <인수지별>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항로는 신미양요 후 세운 척화비에 대하여 열렬하게 지지한 유생입니다. 그는 서양의 물건을 사는 것은 <농산물>을 <공산품>과 교환하게 됨으로서 나라의 경제가 망하여 외국에 종속된다고 주장하면서,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을 최초로 꼬집여낸 성리학자입니다.

따라서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을 백성들에게 알려서, 서양의 물건을 사지 않고 서양이 통상을 요구하는 목적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신제가부터 해서 집안을 잘 단속하고, 유교윤리에 맞는 경제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유교 윤리에 따른 경제관은 농업중심의 생필품 교환과 검약 정신입니다. 따라서 유교윤리를 통해 서양을 차단하기를 주장하였고, 이 논리에 의하면 유교적 윤리를 모르는 서양과 일본은 <짐승>인 것이지요. 따라서 이 당시의 주장은 만약 외세가 통상을 계속 요구한다면,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강경한 <척화주전론>과도 연결됩니다. 이 척화주전론을 실행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척화비>를 세운 자가 바로 흥선대원군이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모든 유생들이 개화 정책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양반들 중에서는 개화사상을 인정하는 학자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유생들이 더욱 더 적극적으로 위정척사 운동을 벌였던 것이지요. 특히 위정척사를 전개했던 유생들은 이항로, 이만손, 최익현, 기정진 등 서울 근기쪽의 전통 성리학자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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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 선생과 추도비

3. 민씨 정권 집권 후 위정척사운동(1873-1880)

대원군이 축출되고 민씨 정권이 들어서자 위정척사를 전개하던 유생들은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민씨가 강화도 조약을 맺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이죠. 이제 유생들은 단순히 통상 거부 운동 차원을 떠나서 <개항>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논리적으로 펴기 시작합니다. 흥선대원군 때에는 쇄국정책이 국론이었기 때문에 유생들이 국가 정책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위정척사파들은 민씨와 개화파들에 대하여 <반정부투쟁>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의 위정척사운동은 흔히 <개항 반대 운동>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대표적인 예는 최익현의 5불가소입니다. 한번 봐야겠죠?

 대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약점을 보고 이를 숨기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들이 우리가 방비가 없고 약함을 보이는 실상을 알고서 우리와 강화를 맺는 경우 앞으로 밀려올 구렁텅이 같은 저들의 역심을 무엇으로 채워주시겠습니까? 우리 물건은 한정이 있는데 저들의 요구는 그침이 없을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응해주지 못하면 저들의 노여움은 여지없이 우리를 침략하고 짓밟아 우리가 이전에 들인 모든 노력은 허망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불러들이는 첫째 이유입니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면 적들의 욕심은 물화를 교역하는 데 있습니다. 저들의 물화는 모두가 지나치게 사치하고 기이한 노리개고 손으로 만든 것이여서 그 양이 무궁하지만, 우리 물화는 모두 백성들의 생명이 달렸고 땅에서 나는 것이어서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같이 피와 살이 되어 백성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유한한 물화를 가지고 저들의 사치하고 심성을 좀먹고 풍속을 음란하게 하는 물화와 교역한다면 그 양은 틀림없이 1년에도 수만에 달할 것입니다. 그러면 동토 수천리는 몇 년 안 지나 땅과 집이 모두 황폐하여 다시 보존하지 못할 것이고 나라 또한 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는 둘째 이유입니다.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이옵니다. 강화가 한번 이루어지면 사학의 서적과 천주의 초상화가 교역하는 속에서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 안 가서 선교사와 신자 간의 전수를 거쳐 사학이 온 나라 안에 퍼질 것입니다. 포도청이 살피고 검문하여 잡아다 베려고 하면 저들의 사나운 노기가 또한 더욱 커질 것이고 강화로 맺은 맹세가 허사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얼마 안 가 집집마다 사학을 받아들이고 사람마다 사학에 물들 것입니다. 아들이 아비를 아비라 여기지 않고 신하가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아 예의는 시궁창에 빠지고 인간들은 변하여 금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는 셋째 이유입니다.

강화가 이루어진 뒤에는 저들이 상륙하여 서로 왕래하고 또는 우리 지경 안에서 집을 짓고 살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강화하였으므로 거절할 말이 없고 저절할 수 없어서 내버려 두면 재물이나 비단과 부녀자들을 빼앗는 일을 마음대로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도대체 누가 능히 막겠습니까? 또한 저들은 얼굴만 사람이지 마음은 짐승이어서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고 짓밟을 것입니다.

- 최익현, 면암집 권 3, 지부복궐척의소 -

5불가소에서 최익현은 서양과 통상을 했을 경우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일본과의 통상도 안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정리했네요. 5가지 이유를 볼까요?

1. 개항 반대운동 : 일본의 강요에 의한 조약을 맺으면 일본의 탐욕에 노예가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2.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 : 개항 후 수공업품과 농산물 교환이 이루어지면 나라의 경제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18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이 우리에게 수출한 영국산 면제품과 조선쌀의 무역은 방곡령에도 불구하고 우리 농촌을 망치는 것이었고, 결국 동학 농민운동의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동학 운동 중에서도 이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을 지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 왜양일체론 : 70년대 개항 반대의 가장 큰 논리가 바로 이 <왜양일체론>입니다. 즉, 서양과 일본은 사실 같은 나쁜 놈들이라는 것이지요. 메이지 유신 이후 미국의 영향을 받은 일본은 서계 문제 등으로 우리에게 행패를 부렸고, 이들은 서양의 사교 및 짐승같은 윤리를 우리에게 강요할 것이니, 대원군의 쇄국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풍속의 교란 문제 : 일본인이 부녀자를 능욕하고, 윤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할 것이니 개항을 하면 인륜이 바닥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5. 인수지별론 : 이것은 일본 역시 프랑스, 미국과 같은 짐승들이니 짐승이 인간과 같이 살수 없다는 사람, 금수의 구별론입니다. 위정척사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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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4. 조선책략 유입 후 위정척사 운동(1880~)

앞 포스트에서 설명했었죠? 조선책략은 두말 할 것 없이 중요한 우리 나라 개화의 지침서입니다. 이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민씨정권이 미국과 수교를 맺고, 별기군을 설치하는 등 적극적인 개화를 실시하자 위정척사운동은 <정권타도>를 외치며 폭력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특히 80년대 위정척사파들은 조선책략 태우기 운동을 하며 개화파들을 적대시합니다. 이제, 국가 안에 아군과 적군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지요. 특히 이만손이 올린 <영남만인소>는 위정척사 사상이 극에 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영남만인소 역시 논리적인 어조로 조선책략의 유입이 왜 문제인지를 조목조목 따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이미 우리의 수륙 요충 지대를 점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허술함을 알고 충돌을 자행할 경우 이를 제지할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입니다. 갑자기 황 쭌셴의 종용을 받고 우리 스스로가 끌어 들인다면, 그들이 풍랑을 헤치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재산을 약탈 하거나, 저들이 우리의 약점을 잡아 어려운 청을 강요한다면 이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러시아는 본래 우리와는 혐의(嫌疑)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연히 남의 이간을 듣고 우리의 위신을 손상시키거나 원교를 핑계로 근린을 배척하다가 만의 하나 환란이 일어나면 장차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사학에 종사하여 재화를 이루고 농, 공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원래 우리에게도 옛부터 재용과 농공에 대한 훌륭한 법규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서학에 종사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야소교 전래가 해롭지 않다고 하는 것은 사교를 조선에 유포시키려는 간계이니, 주공, 공자, 정자, 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혀서 그 사람 귀류들을 물리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만손에 동조한 조선의 최고 재상 홍재학의 상소입니다. 홍재학은 이 상소로 말미암아 고종의 눈에서 벗어나 나중에 죽게 됩니다.

    대개 서양의 학문은 천리를 어지럽히고 기강을 소멸시킴이 심하다는 것을 다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서양의 물건은 대부분 음탕하고 욕심을 유도하며, 유교 윤리를 깨뜨리고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히며, 천지를 거역하는 것들입니다. 서양의 학문과 물건은 귀로 들으면 창자가 뒤틀리고 수컷이 다른 것으로 바뀌며 눈으로 보면 창자가 꼬이고 위가 뒤집히며, 코로 냄새를 맡고 입술로 그것에 닿게 하면 마음이 변하여 실성하게 되니 이는 곧 그림자가 서로 부딪치고 전염성이 서로 감영되는 것과 같으며, 그 사람의 좋고 싫음이 향배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상을 받들지 않는다 해도 예수교의 책을 읽게되면 성인에게 죄를 얻는 시작입니다. 전하의 백성들의 과연 귀와 눈과 코와 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라 안의 실정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 홍재학의 상소  -

위정 척사는 정조 임금 이래로 내려온 조정의 기본 정책으로서 아직도 그 의리가 빛나는 바, 전하의 친정 이래로 왜양일체의 해를 모르고 일본과 통상을 주장해 온 결과 사설과 이의가 횡행하여 국가의 사태가 위급하기 비길 데 없습니다. 양물과 아소라는 사교의 위세로 공맹의 태도는 날로 사라져 가정에는 윤리가 깨지고 사람에게 예의가 허물어진 결과, 종묘 사직이 무너질 위기에 있으니 전하께서는 더욱 위정척사의 대위를 밝혀 주시어 ‘주화매국’하려는 신료를 처단해야 합니다. 신설된 아문을 폐쇄하여 옛 제도를 복구하고 경비를 절약하여 사치를 금하고 언로를 넓혀 지혜를 모으고 정학을 장려하여 사악함을 막아 기강과 민력을 떨친다면 상하원근이 한 마음으로 뭉칠 수 있으니, 그렇게 될 때 동왜와 서양을 막을 수 있으며 북쪽 러시아도 우리에게 위압될 것입니다.

- 일성록, 고종 18년 윤 7월 6일, 홍재학의 상소 -

위정척사운동이 격해지자 고종이 직접 조서를 내리는 등 개화정책 추진을 위해 유생층을 달래는 시도를 계속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한 임오군란으로 돌아오기도 하죠. 고종이 개화를 위해 유생들을 달래려고 한 시도들을 한번 볼까요?

왕이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바다의 한쪽 구석에 처하여 다른나라와 교섭해보지 않은 관계로, 견문이 넓지 못하고 고스란히 제 지조나 지키면서 500년을 내려왔다.

최근에 천하 대세는 옛날과 아주 다르다. 유럽과 아메리카 여러 나라들, 곧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은 정밀한 기계를 제조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해 세계 수많은 나라들과 조약을 맺어, 병력으로 서로 대치하고 국제공법으로 서로 대치하기를 마치 춘추 열국 시대와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홀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중국도 오히려 평등한 처지에서 서로 조약을 맺으며, 서양을 엄하게 배척하는 일본도 결국 서로 선린 관계를 맺고 통상을 하니 어찌 까닭없이 그렇게 하겠는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논의를 벌이는 사람들은 또한 서양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이루는 것을 가지고 장차 예수교에 물들 것이라 여긴다. 이것은 물론 유교와 세상 교화를 위해서 매우 걱정스런 일이다. 그러나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은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고 종교를 막는 일은 원래 종교를 막는 문제이며, 조약을 맺고 통상하는 것은 만국공법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설사 어리석은 사람들이 몰래 배운다 하더라도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는 이상 처단하고 용서하지 않는데, 무슨 걱정이란 말인가? 숭상하고 물리치는 데는 딴 재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를 배척하고 도구와 기물을 본받는 것은 원래 병행하여도 사리에 어그러지지 않는다. 더구나 강하고 약한 형세가 두르러진 조건에서 그들의 도구와 기물을 본받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그들의 침략을 막아내며 그들이 념겨다보는 것을 막겠는가. 참으로 안으로는 정사와 교화를 잘하며 밖으로는 이웃 나라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우리나라 예의를 지키면서 각 나라와 대등하게 부강한 나라로 발전시켜 일반 백성들과 함께 태평세월을 누린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 고종실록, 고종 19년 8월 5일 -

   저들의 종교는 사악하다. 마땅히 음탕한 소리나 치장한 여자를 멀리하듯이 해야 한다. 하지만, 저들의 기술은 이롭다. 잘 이용하여 백성들을 잘 살게 할 수 있다면 농업, 양잠, 의약, 병기, 배, 수레에 대한 기술을 꺼릴 이유가 없다. 종교는 배척하되 기술을 본받는 것은 함께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결코 충돌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강약의 형세가 이미 큰 격차로 벌어졌다. 만약 저들의 기술을 볻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들에게 모욕을 받지 않고 저들이 엿보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 1882년 8월 5일, 고종이 내린 개화 조서 -

5. 1894년 - 동학과 갑오개혁 이후의 위정척사운동

1890년대로 가면서 일본의 침략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자, 이제 위정척사운동은 통상 반대운동, 개항 반대운동, 조선책략 불태우기 운동을 넘어서게 됩니다. 이 때의 위정척사운동은 곧 <민족적인 항일 투쟁 운동>으로 점차 전환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이제 양반 유생들은 <일본과 서양은 금수가 아니라 만국공법상의 법에 의해 위법한 행위를 하는 상대국>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또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 일부 농민들도 위정척사에 흡수되었고, 그 결과 유인석, 신돌석 등의 평민의병장이 나올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도 마련됩니다. 즉, 1890년대 이후는 위정척사가 항일 의병 운동으로 전환되는 기점이며, 1910년 국권 피탈을 기점으로, 항일 의병 운동은 대일본 폭력 투쟁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이 부분은 구한말 의병운동 파트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6. 동도서기의 입장에서 위정척사를 전개한 이들

성리학 유생이라고 해서 모두 위정척사를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이 당시 위정척사의 입장이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 실행 내용에 있어 개화사상과 중간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주장도 한번 볼까요?

형이상을 도라 하고 형이하를 기라고 한다. 도는 형상이 없어 기 속에 머무르니 도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기를 버리고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러므로 군자의 학은 체(體, 몸)와 용(用, 기술)을 서로 밑천 삼고 기와 도를 같이 익히는 것이다.

- 속음청사, 상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바뀔 수 없는 것이 도(道)이고, 자주 변화하여 고정될 수 없는 것은 기(技)이다. 무엇을 도라 하는가? 삼강(三綱), 오상(五常)과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도라고 한다. 요순, 주공의 도는 해와 별처럼 빛나서, 비록 오랑캐 지방에 가더라도 버릴 수 없다. 무엇을 기라고 하는가? 예악(禮樂), 형정(刑政), 복식(服食), 기용(器用)을 기라고 한다. 당우삼대 조차도 덜하고 더함이 있거늘 하물며 수천년 뒤에 있어서라! 진실로 때에 맞고 백성이 이롭다면, 비록 오랑캐 법일지라도 행할 수 있다.

- 신기선전집 -

기계의 재주와 농수의 책이 진실로 이롭다면 반드시 선택해서 행할 것이며, 그 사람 때문에 양법을 꼭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 고종실록, 고종 18년 7월 18일, 곽기락의 상소 -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유의 윤리는 하늘로부터 얻어서 본성에 부여된 것인데, 천지에 통하고 만고에 뻗치도록 변하지 않는 이치로 위에서 도(道)가 되었습니다. 수레, 배, 군사, 농업, 기계는 백성에게 편하고 나라에 이로운 것으로 밖에 드러나 기(器)가 되니, 제가 바꾸고자 하는 것이 기인 것이지, 도가 아닙니다.

- 승정원일기, 고종 19년 12월 22일, 윤선학의 상소 -

곽기략, 윤선학 등 일련의 유생들은 우리 것을 지키더라도, 서양의 유용한 것들을 꼭 버릴 필요는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성리학의 정신적 사상체계는 민족의 양식으로서 지켜나가고, 서양의 기술은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유교주의 국가를 만들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선 건국 당시 허영 일파의 실천적 성리학과 비슷합니다.

7. 위정척사운동의 한계점

위정척사운동은 서양이 통상, 개화를 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알고 대처하려고 하였습니다. 즉, 이 운동은 우리 국익을 위한 애국적인 성격을 가진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단순히 외세를 배격하여 우리 전통의 것을 지키자는 논의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외세의 침략 의도와 나쁜 점은 알았지만, 그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였죠. 당시 조선의 가장 큰 과제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주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였습니다.

위정척사운동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성리학적 전통질서와 봉건질서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임으로서 격변기의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또 반외세를 지향했으나, 지배 신분층인 입장으로 적극적인 반봉건 노력이 없었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즉, 농민들이 원하는 것은 신분제 폐지, 양성평등, 토지제도 및 조세제도 개혁 등이었으나 이들은 이러한 문제를 외면하였습니다. 따라서 위정척사운동은 적어도 1880년대까지는 양반 위주의 신분적 운동이라는 오명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정척사운동을 정치, 경제, 사회적인 면에서 분석해 볼까요?

정치적인 분야에서 이 운동은 조선왕조의 전제주의를 긍정합니다.

경제적인 분야에서 이 운동은 지주전호제를 긍정하고, 전통 유교질서의 경제관을 고수하였습니다.

사회적인 분야에서 이 운동은 신분제도를 옹호하고 성리학적 신분관을 그대로 적용하였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부분에서 위정척사운동은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운동입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빈체제에서 복고주의, 정통주의, 보수주의를 외치는 장면이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운동에서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다음 포스트에서는 위정척사운동과 개화세력의 대립이 극에 이르게 된 <임오군란>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반부, 1991
  2. 김광진 외, 1963, 조선경제사상사, 과학원출판사 : 1989, 이성과 현실

  3. 7차 교육과정 근현대사 교과서(대한교과서)
  4. 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구회, 청아출판사, 1988
  5. 한국통사, 박은식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6
  6. 누드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이투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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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타령

이 앨범은 다운로드 및 소스 복사가 되지 않습니다. 감상만을 위해 제공합니다.

이 노래는 경복궁 타령입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 실려있죠.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위해 원납전을 걷고, 당백전을 발행하면서 백성들을 노역에 동원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원망하는 목소리가 담겨있는 노래입니다. 현재는 경기도 민요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얼마 전에 흥선대원군에 대한 글을 적어 올렸습니다. 참고해서 같이 들어 보시면 좋을 듯 하네요.

노래 : 국립국악합창단

에헤,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계명산천이 밝아온다
에헤 에헤 어랴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에헤

을축 사월 갑자일에 경북궁을 이룩일세
에헤 에헤 어랴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에헤

우리나라 좋은 나무는 경복궁 중건에 다 들어간다
에헤 에헤 어랴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에헤

도편수의 거동을 봐라 먹통을 들구선 갈팡질팡한다
에헤 에헤 어랴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에헤

조선 여덟도 유명탄 돌은 경북궁 짓는데 주춧돌감이로다
에헤 에헤 어랴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근정전을 드높게 짓고 만조 백관이
조하를 드리네
에헤 에헤 어랴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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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금지

이 자료는 각 교육청 기관 중고등부 학습 자료실에서 만든 자료입니다.
   따라서 이 자료는 학습 목적 외에는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이 자료들은 사이트내에서 중고등부 한국사 모의시험 출제를 위해 수집하고 있습니다.

플래시 출처 : 에듀넷 중앙학습자료실(경남교육청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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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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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을 중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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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백전을 발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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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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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와 병인양요 학습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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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양요 때의 양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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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화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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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원군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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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은 어떤 조약인가?

이번 장에서는 우리나라가 드디어 개항을 이룬 강화도 조약(조일수호조규)의 내용과 그 의미를 한 번 포스트 해보겠습니다. 강화도 조약... 모두 알 것 같으면서도 사실 잘 모르고 있었던 내용이 많은 부분입니다.

1. 조약을 맺게 된 배경 중 국내적인 배경을 살펴보자.

조일수호조규를 맺게 된 배경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마디로는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조선 내부의 상황과 일본 내부의 상황이 복잡하게 얽히고 꼬여있기 때문이지요. 그래도 뭔가 핵심적인 <키워드>는 있을텐데... 키워드를 찾아봅시다.

먼저, 조약을 맺은 조선 내부적인 키워드는 <통상개화론>입니다. 보통 이 <통상개화론>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강화도 조약이 꼭 일본의 강요라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으며, 조선이 스스로 개화하려는 의지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곤 합니다.

통상개화론이란, 흥선대원군의 10년간 장기집권(1863-1873)을 겪으면서 쇄국정책을 우려했던 개화파들이 흥선대원군이 물러난 이후 목소리를 높였기 때문에 대두한 이론입니다. 실제, 조선 후기의 박지원, 박제가 계통으로 이어지는 상공업 중심의 실학자들의 계보가 흥선대원군 시기 박규수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들은 양반뿐 아니라 기술학에 능통한 중인들도 다수 포함된 신진 개화주의자들이었고, 이들이 개화라는 단어를 알게 된 것은 조선 후기 <북학파> 등의 상공업 중심 실학자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통상개화론자들은 개항과 개화라는 것을, 인맥상 또는 학맥상 조선 후기 실학과 연계하려는 시도가 많습니다. 그러나, 1863년 이후 대원군의 집권기에는 감히 개화라는 말을 꺼내지도 못합니다. 대원군의 철저한 쇄국정책 앞에 개화나 개항이라는 말을 꺼내어 들었다가는 바로 <서양 양놈과 마찬가지인 역적> 취급을 당하기 때문이죠.

따라서 통상개화론자들은 대원군이 물러난 1873년 이후 개항, 개화라는 말을 꺼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특히 청나라의 양무운동 등의 개화운동을 보면서 조선사회도 문호 개방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물론, 당시 조선이 개방의 준비는 전혀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화론자들은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개화가 무엇인지를 점차 알게 됩니다. 개화라는 말의 정의를 내린 다음 글을 한 번 볼까요?

객이 나에게 물었다. <개화는 무엇이며, 어떠한 일을 말하는 것인가?>

내가 답하였다. <만물의 뜻을 깨달아 천하의 일을 이루는 것이며(개물성무 : 開物成務),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바로잡는 것(화민성속 : 化民成俗)이 바로 개화이다.>

- 황성신문 논설, 광무 2년(1898) 9월 23일 -

무릇 개화란 인간의 온갖 만물이 가장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일컫는데, 개화에는 인륜 개화, 학술 개화, 정치 개화, 법률 개화, 기계 개화, 물품 개화가 있다. 인륜 개화는 천하만국을 통하여 그 동일한 규모가 천만년을 지나도 장구함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 이하의 여러 개화란 시대에 따라서 변개하기도 하고 지방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맞았지만 지금은 맞지 않으며, 저쪽에는 좋지만 이쪽에는 좋지 않은 것도 있어, 곧 고금의 형세를 살피고 피차 사정을 비교하여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리는 것이 곧 개화의 큰 도인 것이다.

- 서유견문 제 14편, 개화의 등급 -

여기서 우리는 개화란 단어를 개항기 사람들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 말한 개화란, 서양을 단지 보고 베낀다는 것이 아니라 <만물을 알고, 백성을 교화하는 것>이라고 정의된 것입니다. 또, 개화란 서양의 것을 무분별하게 베끼는 것이 아니라, 정신, 물질, 사상 등 여러 개화가 있으며, 그 중 서양과 비교하여 장점만을 취하는 것이 진정한 개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생각한 개화란, 서양의 양무운동 등의 개화운동을 보고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선별해서 얻는 것>을 개화로 여겼다는 것을 알수 있네요. 당시 개화론자들은 서양처럼 공화제를 한다던가, 혁명이 필요하다던가 하는 것은 대부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김옥균의 감신정변 이전의 개화란, 문호개방을 통한 부국자강을 추구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결국 여기서 다룬 단 1가지의 내용은 강화도 조약에서 우리가 스스로 <개항, 개화>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는 것이군요. 우리는 개화사상에 있어 내제적이고, 주체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스스로 개항하려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점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조약을 맺게 된 배경 중 일본과의 문제점들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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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 조약에서 가장 핵심적인 배경이 되는 것은 누가 뭐래도 일본과의 <서계>문제입니다. 일본과의 서계문제는 <흥선대원군>을 다룬 지난 장에서 아주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간단히 복습할까요? 1860년대 후반, 우리 나라는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프랑스, 미국 등을 물리쳤습니다. 반면, 일본은 미국에게 굴복하여 미일수호조약을 맺고 개항한 뒤 <메이지 유신>으로 국가체제를 황제 일원적인 중앙집권체제로 개편합니다. 즉, 우리는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중앙집권체제, 일본은 강력한 황제집권체제가 성립된 것이지요. 이 두가지 체제는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이 두 국가의 충돌에서 기분이 나쁜 건 흥선대원군이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보내는 편지(서계)에다가 <일본 천황, 일본 황실, 일본제국> 등의 언어를 늘어놓습니다. 300년간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 문화를 돕고 있다고 생각한 조선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 정권은 서계가 불손하다며 일본과의 통교를 거부하면서, 일본도 미국과 협상한 오랑캐 놈들이라고 말합니다. 일본과 서양은 같다는 것을 흔히 <왜양일체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 통상개화론자들은 일본의 서계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이 서계를 일부러 버릇없게 쓰는 이유는 침략의 구실을 노리는 것이므로 우리는 서계는 받되 일본에 강경하게 나가야 한다는 논리였지요.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일본과의 국교를 완전 단절하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이 서계 문제를 두고 몇 년간 조선과 교섭을 했으나 결렬되자 <정한론>이 대두합니다. 정한론이란, 조선을 바로 정복하자는 논의입니다. 특히,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막부가 무너지고 무사계급이 빈곤해졌는데, 이러한 무사계급의 불만을 대외로 돌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가 쳐들어온 이유중 하나가 국내세력의 불만을 국외로 돌리려는 것이었잖아요? 그것과 같습니다. 일본은 국민들에게 공공연하게 침략의 정당성을 광고하면서 조선 침략을 하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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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침략의 정당성이란, <대동단결의 아시아>라는 광고였습니다. 일본이 서양의 침략에 맞서 아시아를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데, 서양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서양처럼 식민지가 필요하고, 그 식민지는 조선이 가장 적합하다는 광고입니다. 이것은 사이고 다카모리가 주장하면서 일본 전역에 퍼졌습니다.

그러나 이 <정한론>은 광고효과로만 활용될 뿐 실제 일본 정부 내에서는 공식화되지 못합니다. 일본 지배층에서는 정한론보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점진론>이 더 효과가 있었습니다. 점진론이란, 당장 조선을 치기보다는 일본의 조금씩 힘을 키워나가면서, 조선을 조금씩 잠식해들어가자는 논의입니다. 실제, 임진왜란의 실패를 경험한 일본으로서는 위험부담이 큰 정한론보다는 점진론이 더 효율적이었던 듯 싶습니다. 점진론을 주장한 이토 히로부미는 이후 조선을 정복한 이후 최고의 <조선 총독부 통감>이 되어 조선 최고의 실세가 됩니다. 물론, 안중근 의사한테 죽게 되지만요. (이토는 우리에게는 역적, 일본으로서는 영웅이라고 할 인물이네요.)

3. 운요호 사건이 터지다.

운요호 사건은 점진론이 대세를 이루던 1875년 경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1875년은 대원군이 물러나고, 명성황후(민씨정권) 집단이 개화정책을 실시하려고 준비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일본의 목적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고, 우리의 목적은 개화를 통해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하필 우리의 개화 상대가 일본이었고, 일본은 우리에게 개화의 이득을 주는 나라가 아니라, 침략을 통한 우리의 이권침탈을 목적으로 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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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운요호>

1875년의 운요호는 3척의 군함을 끌고 옵니다. 이 운요호는 식량과 먹을 것이 떨어져서 조선에 잠시 왔다간다는 구실로, 불을 지르고 사람을 죽이며 약탈을 자행합니다. 이 운요호가 남의 나라에 와서 미친 짓을 한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미친 짓을 하고 있으니, 너희는 빨랑 와서 우리랑 협상을 하던지, 더 미치는 꼴을 보고 있던지 하라는 것이지요. 마침 개화에 관심이 있었던 우리 민씨정권은 일본과의 협상을 시작합니다. 그럼 아래 사료 내용을 한번 볼까요?

일본의 강화도 침략

(1) 식량이나 음료수 양은 항해 계획과 기항지를 생각해서 전문적인경리 장교가 미리 준비해 두지 않을 수 없다. 식수를 구하려고 강화도에 접근했다는 것은 구실에 불과할 것이다.

- 山邊健太郞 <日本の韓國倂合>, 태평출판사, 1966 -

(2) 구로다 기요다카에게 내린 일본 정부의 비밀 훈령

조선이 그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거나 거짓을 꾸며 도저히 일본 요구에 응하지 않을 때에는, 가령 헌저하게 난폭한 행동이나 능멸하는 따위는 없더라도, 사절은 두 나라의 화호를 단념하고 우리 정부에서 모종의 별도 조치가 있을 것임을 전하고 교섭을 중단하는 문서를 던지고 조속히 귀국하여 다시 명령을 기다려 사절의 체통을 잃지 말 것이다.

- 일본외교문서 8권 -

(3) 우리나라와 일본은 300년 동안 통신사를 교환하고 왜관을 설치하여 무역하여왔다. 비록 수년 이래 서계를 가지고 서로 버티어 왔으나 우호 관계를 존속하려는 처지에서 통상을 굳이 거절할 필요가 없으므로 통상 조약 등의 절차를 잘 협상하여 양국의 편의에 맞춰 조치하라.

- 승정원일기, 고종 13년 1월 24일 -

문서를 보면 양국의 입장이 너무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은 만약 협상이 결렬되면 바로 돌아가서 전쟁 준비를 할 태세였습니다. 우리는 일본의 속셈도 모른 채 단순히 <개화정책>을 실시할 생각으로 나갔던 거죠. 일본은 이미 여러 나라와 불평등 조약을 맺어보았습니다. 우리는 개방 조약이 뭔지도 모르면서 남의 것을 흉내내서 하려고 했습니다. 그것도 일부 개화세력만이 주도해서 협상을 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4. 조일수호조규의 전문 내용

강화도 조약(조일 수호 조규)

대일본국과 대조선국은 원래부터 우의를 두터이 하여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나 지금 두 나라의 우의가 미흡한 것을 고려하여 다시 옛날의 좋은 관계를 회복하여 친목을 공고히 한다. 이는 일본국 정부가 선발한 특명 전권 변리 대신인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과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인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이 조선국 강화부에 와서 조선국 정부가 선발한 판중추부사 신헌과 부총관 윤자승과 함께 각기 지시를 받들고 조항을 토의 결정한 것으로써 아래에 열거한다.

제1조.

조선국은 자주 국가로써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이제부터 양국은 화친한 사실을 표시하려면 모름지기 서로 동등한 예의로 대우하여야 하고 조금이라도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선 이전부터 사귀어온 정의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여러 가지 규례들을 일체 없애고 되도록 너그러우며 융통성있는 규정을 만들어서 영구히 서로 편안하도록 한다.

제2조.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은 다 그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조선국 정부도 또한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일본국 동경에 가서 직접 외무경을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해당 조선국 사신이 주재하는 기간도 역시 그 때의 형편에 맞게 정한다.

제3조.

이제부터 두 나라 사이에 오고가는 공문은 일본은 자기 나라 글을 쓰되 지금부터 10년 동안은 따로 한문으로 번역한 것 한 본을 첨부하며 조선은 한문을 쓴다.

제4조.

조선국 부산 초량항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 공관이 세워져있어 양국 백성들의 통상 지구로 되어왔다. 지금은 응당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등의 일은 없애버리고 새로 만든 조약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 조선국 정부는 제5조에 실린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국 백성들이 오가면서 통상하게 하며 해당 지방에서 세를 내고 이용하는 땅에 집을 짓거나 혹은 임시로 거주하는 사람들의 집을 짓는 것은 각기 편리대로 하게 한다.

제5조.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 5도 중에서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두 곳을 골라서 지명을 지정한다. 개항 기간은 일본 역서로는 명치 9년 2월, 조선 역서로서는 병자년 2월부터 계산하여 모두 20개월 안으로 한다.

제6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배가 조선국 연해에서 혹 큰 바람을 만나거나 혹 땔 나무와 식량이 떨어져서 지정된 항구까지 갈 수 없을 때에는 즉시 가닿은 곳의 연안 항구에 들어가서 위험을 피하고 부족되는 것을 보충할 수 있으며 배의 기구를 수리하고 땔나무를 사는 일 등은 그 지방에서 공급하며 그에 대한 비용은 반드시 선주가 배상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에 대해서 지방의 관리와 백성들은 특별히 진심으로 돌보아서 구원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데가 없도록 하며 보충해 주는 데서 아낌이 없어야 한다. 혹시 양국의 배가 바다에서 파괴되어 배에 탔던 사람들이 표류되어 와닿았을 경우에는 그들이 가닿은 곳의 지방 사람들이 즉시 구원하여 생명을 건져주고 지방관에 보고하며 해당 관청에서는 본국으로 호송하거나 가까이에 주재하는 본국 관리에게 넘겨준다.

제7조.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를 이전에 자세히 조사한 것이 없어 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들이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여 위치와 깊이를 재고 도면을 만들어서 양국의 배와 사람들이 위험한 곳을 피하고 안전한 데로 다닐 수 있도록 한다.

제8조.

이제부터 일본국의 정부는 조선에서 지정한 각 항구에 일본 상인을 관리하는 관청을 수시로 설치하고 양국에 관계되는 안건이 제기되면 소재지의 지방 장관과 만나서 토의처리한다.

제9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피차 백성들은 각기 마음대로 무역하며 양국관리들은 조금도 간섭할 수 없고 또 제한하거나 금지할 수도 없다. 만일 양국 상인들이 값을 속여서 팔거나 대차료를 물지 않는 등의 일이 있으면 양국 관리들이 빚진 상인들을 엄히 잡아서 빚을 갚게 한다. 단 양국 정부가 대신 갚아줄 수는 없다.

제10조.

일본국 사람들이 조선국의 지정한 항구에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만일 조선과 관계되면 모두 일본국에 돌려보내어 조사 판결하게 하며 조선 사람이 죄를 저질렀을 경우 일본과 관계되면 모두 조선 관청에 넘겨서 조사 판결하게 하되 각기 자기 나라의 법조문에 근거하며 조금이라도 감싸주거나 비호함이 없이 되도록 공평하고 정당하게 처리한다.

제11조.

양국이 우호관계를 맺은 이상 따로 통상 규정을 작성하여 양국 상인들의 편리를 도모한다. 그리고 지금 토의하여 작성한 각 조항 중에서 다시 보충해야 할 세칙은 조목에 따라 지금부터 1개월 안에 양국에서 따로 위원을 파견하여 조선국의 경성이나 혹은 강화부에서 만나 토의결정한다.

제12조.

이상의 11개 조항을 조약으로 토의 결정한 이날부터 양국은 성실히 준수시행하며 양국 정부는 다시 조항을 고칠 수 없으며 영구히 성실하게 준수함으로써 우의를 두텁게 할 것이다. 이를 위하여 조약 2본을 작성하여 양국에서 위임된 대신들이 각기 날인하고 서로 교환하여 증거로 삼는다.

대조선국 개국 485년 병자년 2월 2일

대관 판중추부사 신헌

부관 도총부 부총관 윤자승

대일본 기원 2536년 명치 9년 2월 6일

대일본국 특명 전권 변리 대신 육군 중장 겸 참의 개척 장관 흑전청륭(구로다 기요타카)

대일본국 특명 부전권 변리 대신 의관 정상형(이노우에 가오루)

- 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 구한말조약휘찬 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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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 조약을 체결할 때 사진>

   5. 이 조약... 뭔가 너무 허전하다.

이 조약 12개의 전문을 보면, 우리가 너무 순진해서 양의 탈을 쓴 늑대에게 간식거리로 몸을 바치려고 한 조약임을 알 수 있습니다.

1조의 <조선은 자주국이다>라는 말... 너무 좋은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꽝! 도장 찍습니다. 그런데 이건 무슨 뜻? 사실 이것은 조선이 자주국이니 중국 <청나라>는 조선에 간섭하지 말고 가라는 뜻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겠다는 속셈을 우리에게 들키지 않고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2조의 수신사 파견은 조선시대 통신사만을 우리가 파견했던 것에 비하면 전세 역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4조의 조차지 설정과 개항부분은 우리의 항구부터 일본이 잠식하겠다는 점진론의 내용을 보여줍니다. 7조에서는 아예 일본이 우리 영해를 측량하면서 영해권을 침범하고 있으며, 10조에서는 불평등 조약의 대표적 사례인 <치외법권>이 나옵니다.

치외법권이란, 일본인이 조선에서 범죄를 저질러도 일본인에게 재판을 받는 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일본에게 우리의 권리가 심하게 훼손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사실 지금도 한미상호방위조약상 미국군인이 우리 여중생을 죽이면 미국에서 재판받는 불합리한 주권침해는 계속되고 있죠...)

결과적으로 이 조약.... 완전 불평등 조약입니다. 일본은 불평등 조약에 몇 번 당해보고 개항한 나라라 이러한 조약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너무 순진하게 첫 도장을 어이없게 찍어준 것입니다. 이 조약으로 일본 <점진론>은 크게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뒤늦게 깨닫고 조약에 대한 일부 내용을 수정하려고 하지만 거부당합니다. 거부당한 조약 재조정 내용을 잠깐 볼까요?

수호 조규 체결시 조선의 추가 요구 사항

1. (개항장 체류 일본인) 상평전 사용을 금지할 것.

2. 미곡 교역을 금지할 것

3. 교육연 물물교환만 하고 외상선매(후불)와 산채취식(이자놀이)을 금지할 것

4. 조선은 일본과 수교할 뿐이니 타국인이 섞여 오는 것을 금지할 것

5. 아편과 서교(천주교)는 국법으로 엄금하니, 아편과 서교 관련 서적 수입을 금지할 것

6. 양국의 망명자를 은닉하거나 표류를 가장하여 잠입하는 자는 반드시 적발하여 송환할 것

- 왜사일기, 고종 13년 1월 26일 -

위 내용, 일본이 당연히 승인하지 않습니다. 기껏 속여서 도장 찍었는데, 다시 조약을 재조정할 이유가 없죠. 우리는 이 조약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과 아주 불평등한 내용의 조약을 비슷하게 체결합니다. 이유는 대부분의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 <최혜국 대우>라는 부분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최혜국 대우란, 조약을 맺는 국가가 다른 국가보다 우선시 되는 내용으로 대우받는다는 조항입니다. 만약, 미국이랑 조약을 맺을 때 <최혜국 대우>라는 말이 들어가면, 일본과 맺었던 조약 중 미국에게 유리한 부분의 조약은 자동 추가되는 것이지요. 미국이 조선의 <최혜국>, 즉 가장 혜택을 받도록 상호 조약을 맺는 국가로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니까요.

이 조약은 우리에게 근대 서양문물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지만, 제국주의 국가에게 우리가 침탈당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조약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세계 자본주의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 국가에게 침탈당한 국가인 일본에게 다시 침탈당하는 국가가 되면서 엄청난 시련이 시작됩니다. 이유는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는 달리 일본은 산업혁명도 늦고, 산업기반도 약하며, 다른 제국주의 국가와의 최혜국 조약을 맺은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수탈은 차후 다른 어떤 국가보다도 심한 침탈로 이어집니다. 일본과의 강화도 조약을 서양이 중국과 맺은 난징조약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듯 합니다. 중국사할 때 한번 시도해 봐야겠네요.

6. 조일수호조규부록(강화도 조약의 속약) - 일본은 더욱 더 침탈하다.

조일 수호 조규 속약

제 1조. 부산, 원산, 인천항의 강행이정을 사방 50리로 하고, 1년 뒤에 양화진을 개시한다.

제 2조. 일본 공사 영사와 수행원이 조선 내지에서 자유롭게 여행을 한다.

- 고종실록 권 19, 고종 19년 7월 17일 -

일본과 맺은 강화도 조약이 상징적으로 우리 개항과 제국주의 침탈을 상징한다면, 다시 일본과 맺은 이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의 속약은 실제 우리 경제에 미친 파급효과가 큽니다. 이 조일 수호 조규 속약과 조일통상장정이라는 2건의 문건은 강화도 조약 이후 6년뒤 체결되는데, 이 조약은 일본 점진론의 제 2단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먼제, 강화도 조약 때 단순히 항구에서 무역하던 것을 개항장 이내로 확장합니다. 즉, 개항장에서의 일본인 통행거리를 설정하고 10-100리 정도의 거리에서 일본인들이 장사를 시작합니다. 이로서 우리 전통의 상인인 객주, 여각 등은 몰락하기 시작합니다.

또 개항정에서 양곡의 수출입을 허용하고, 일본화폐를 사용하는 것도 허락하며, 일본 물품에 대하여 관세를 매기지 않는다는 것도 추가됩니다. 이로서 우리 경제는 차츰 일본 경제에 잡아먹히게 되면서 1880년대 중반, 일본의 경제침투가 심화됩니다. 1880년대 중반에 일본은 조선시대 이래 조선 무역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청나라에게 도전하는 형세로 발전하게 되고, 조선에서 청과 일본은 경제문제를 두고 심각한 대립을 연출합니다. 이 떄부터 이미 청일전쟁의 분위기는 돌기 시작한 것이죠.

자 이제 조선은 개화를 해 버렸습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음 장에서는 민씨 정권의 개화 정책의 방향과 <조선책략>의 활용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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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시대, 격동의 한국사 속에서 어떻게 봐야할까?

이번장에서는 흥선대원군이 실시한 정책에 대하여 논의해보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1863년부터 1873년까지 약 10년간 정치를 이끌며 한국 근현대사의 주된 흐름을 이끌어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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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화와 척사가 난립하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기 직전의 한국사회는 개화, 척사라는 두 흐름이 정치 전반에 긴장감을 주던 시기였습니다. 1860년대, 서양에서는 이양선을 보내 아시아 각국에 통상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또 중국은 서양에 의해 베이징을 점령당했고,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러시아는 연해주를 차지하여 우리와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죠.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세계사적 흐름을 차츰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1860년대 초부터 이항로 등의 유학자들은 외국과의 통상이 국내 경제에 미칠 영향이 어떤 것인가를 분석하면서 <통상반대운동>이 이루어지던 시기였습니다.

반대로 양반인 박규수, 중인출신인 오경석과 유홍기 등은 외국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야만 이후 조선 사회가 살아남을 수 있음을 주장하면서 개화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기 시작합니다. 오경석은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의 도서를 국내에 소개하였고, 이것은 훗날 조선책략, 만국공법과 함께 개화정책의 지침서가 됩니다.

또 순조 때의 효명태자와 같은 집권층 사람들은 세도정치 하에서 강력한 <국왕권>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개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도정치 하에서는 이러한 개화, 척사의 논의보다는 안동김씨 일문을 비롯한 정치가문의 정치적 논리가 우선이었으므로, 이러한 개화, 척사의 논의가 본격화되지 못하였습니다.

2. 대원군이 등장하다.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로서 고종의 어린 시절 <강력한 국왕권 확보>를 위해 개혁정치를 실시한 사람입니다. 그는 순조, 헌종, 철종으로 이어지는 안동김씨 등 일문독재의 세도정치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상가집 개라고 불릴 정도로 미친척을 하여 안동김씨 세력을 안심시키면서, 자신의 아들을 안동김씨집안에서 이의없이 왕위에 올릴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고종이 왕이 된 후 흥선대원군은 <대원군>으로서 정치를 독점하고, 안동김씨 일문을 축출하여 세도정치가 마감됩니다.

그의 정치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재정확보와 민생안정을 통한 <강력한 왕권 확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흔히들, 흥선대원군의 정치가 민생을 안정시키고, 소농과 상인층을 보호하면서 세도정치 가문의 병폐를 근절시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원군의 목적은 <농민보호>가 이니였습니다. 농민보호와 상인보호는 <왕권강화>를 위한 조세원 확보책의 일환이었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그럼 하나 하나 대원군의 정책을 짚어볼까요?

3. 왕권 강화를 시도하다.

흥선대원군은 집권후 가장 큰 목적인 <왕권강화>를 위해 세도정치와 관련된 인물들을 비롯하여 신권을 축소시키는 개혁을 시도합니다.

먼저, 조선 후기에 강해진 비변사를 축소합니다. 원래 조선 최고의 기구는 의정부였는데, 임란과 호란 이후 임시 군사기구였던 비변사에 신하들이 모여 붕당정치를 실시하면서 <비변사>가 조선 최고의 기구가 되는 변태정치가 실시되어 왔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약해진 왕권 강화를 위해 신권 기구인 비변사의 기능을 줄이고, 의정부 기능을 복원함으로서 <국왕권>이 주도하는 중앙정치로 환원시킨 것입니다.

다음으로 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합니다. 경복궁은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궁전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을 버리고 선조가 북으로 피난가자 백성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경복궁에 불을 질렀습니다.경복궁을 중건한다는 것은 곧, 떨어진 왕실 권위를 회복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죠. 그러나, 경복궁 중건에는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에 드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을 징수합니다. 원납전이란, 원래 <원하는 사람이 납부하는 돈>이란 뜻이었는데, 점차 국가는 이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여 경복궁 중건에 투입합니다. 백성들은 반강제적인 원납전을 <원망하면서 내는 돈>으로 바꿔불렀다고 합니다. 또 동대문부터 북대문까지 4대문과 4대문 사이에 있는 소4문을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문세>를 받아 자금으로 활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요역을 늘려서 백성들을 무상으로 일을 시키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대원군은 경복궁 중건비가 부족해지면 <당백전>이라는 돈을 찍어서 발행하기도 했는데, 이 당백전 발행으로 시중에 돈이 너무 많아져서 인플레이션 현상이 심화되었고, 백성들의 삶이 더욱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리더쉽으로 백성들의 경제생활을 보장하여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들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다시 멀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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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흥선대원군, 경복궁 근정전, 당백전>

대왕대비가 경복궁 중건을 명하고 다음 날 3일 시원임 대신을 회정당에 불러 중건 대사를 대원군에 위임하였다. 경복궁 영건 때의 비용과 백성의 역에 대한 절차를 의논하였는데, 백성의 노역 문제는 신중을 기하고, 안으로 재상 이하 밖으로는 지방 수령 이하가 역량에 따라 보조하며, 선비, 서민층은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자진 납부하는 자는 상을 주기로 하고 이 뜻을 8도에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미 서울의 원납전이 20만량이 되었다.

- 승정원일기, 고종 2년 4월 2일, 5일 -

또 대원군은 자금 확보를 이유로 전국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정리해버립니다. 흥선대원군은 <백성을 괴롭히는 자들은 공자가 살아돌아오더라도 용서하지 않겠다>라는 명분을 강조하면서 서원을 철폐합니다. 서원 철폐는 양반계급이 대원군을 적대시하게 되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은 서원철폐를 계기로 지방 양반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대원군의 서원 정리

사족이 있는 곳마다 평민을 못살게 굴지만 가장 심한 곳이 서원이었다. 먹도장을 찍은 다음 편지 한통을 고을에 보내서 서원 제수전을 바치도록 명령하였다. 사족이나 평민을 물론하고 그 편지를 받으면 반드시 주머니를 쏟아야 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서원에 잡혀가 혹독한 형벌로 위협을 받았고 화양동 서원 같은 곳은 그 권위가 더구나 강대하여 그곳에서 보내는 편지를 화양동 묵패지라 하였다.

백성들은 탐학한 아전들에게 시달렸는데 여기에 또 서원 유생에게 침탈을 당하니 모두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원망을 하고 이를 갈아도 하늘만 쳐다볼 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대원군이 영을 내려 나라 안 서원을 죄다 허물고 서원 유생들을 쫒아 버리도록 하였다. 감히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 하니, 사족이 크게 놀라서 온 나라 안이 물 끓듯 하였고 대궐 문간에 나아가 울부짖는 자도 수십만이나 되었다. 조정에서는 어떤 변이라도 있을까 하여 대원군에서 이렇게 간언하였다.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것은 선비의 기풍을 기르는 것이므로 이 명령만은 거두기를 청합니다.>

대원군은 크게 노하여 이렇게 말하였다.

<진실로 백성에게 해가 되는 것이 있으면 비록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 하물며 서원은 우리나라 선유를 제사하는 곳인데 지금에는 도둑의 소굴로 됨에 있어서라.>

드디어 형조와 한성부 나졸들을 풀어서, 대궐 문 앞에서 호소하려는 선비를 강 건너로 몰아내 버렸다. 여러 고을에서 모두 두려워하여 감히 영을 거행하지 못했는데, 대원군이 먼저 한 고을 원을 파면시키고 무거운 벌을 시행하니, 이에 여러 도에서는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일시에 서원을 철폐시킬 수 있었다.

다시 8도에다 암행어사를 보내니, 사족으로서 평민을 침해한 자가 있으면, 그 몸에 죄를 주고 재산을 몰수하니 떵떵거리는 집안들도 숨을 죽이고 감히 나쁜 짓을 못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이 춤추고 칭송하는 소리가 천지에 진동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왕권강화>를 위해 체제 정비도 시도하였습니다. 먼저 수령에 대한 조목을 수정하여, 조세징수를 부당하게 하는 수령들을 적발하여 처벌하였습니다. 또 오래된 붕당정치와 일문독재정치를 해결하기 위하여 당파와 관계없이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계승한 정책도 실시합니다. 실제 대원군의 국정 운영을 잘 살펴보면, 정조기 <탕평책>으로 활용했던 정책들이 상당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대원군이 집권한 뒤 어느 공회 석상에서 음성을 높여 여러 대신을 향해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천리를 끌어다 지척을 삼겠으며 태산을 깎아 내려 평지를 만들고 또한 남대문을 3층으로 높이려 하는데 여러 공들은 어떠시요?>

대저 천리지척이라는 말은 종친을 높인다는 뜻이요, 남대문 3층이라는 말은 남인을 천거하겠다는 뜻이요, 태산을 평지로 만들겠다는 것은 노론을 억압하겠다는 의사이다.

- 매천야록, 갑오이전 -

또 이러한 체제 정비를 체계화 하기 위하여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편찬하였습니다. 조선의 법전은 경국대전으로 완비된 이래, 새로운 사회변화에 따라 법전을 일부 개편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영조의 속대전, 정조의 대전통편은 이러한 사회변화를 반영한 대표적인 법인데, 대원군이 대전회통을 발표함으로서 보다 왕권위주의 사회개혁을 표방하는 체제정비가 이루어졌습니다.

4.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다.

삼정이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세금은 전정(전세 : 토지세), 군정(군포세 : 군역세), 환곡(이자세)를 말합니다. 원래 조선의 세금은 토지에 부과하는 전세를 바탕으로 하되, 백성들이 국가에서 몸으로 때우는 역을 추가로 설정합니다. 역이란, 실제 일을 하는 요역과 군에서 일하는 군역이 있는데, 군적수포제 이후 군역은 세금항목화 되었습니다.(조선시대 군역편을 참조하세요) 환곡은 원래 국가가 농민에게 춘궁기에 쌀이나 종자를 빌려주고, 수확기에 돌려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운반 등에서의 손실분을 메우기 위해 일분모회록을 작성하여, 약간의 이자를 받았는데, 이후 국가가 가난해지면서 이 이자를 세금처럼 늘려 받게 됩니다. (환곡편을 참조하세요)

이러한 삼정이 세도정치기에 무척이나 문란해집니다. 전정은 토지세를 엄청나게 늘려받았습니다. 토지 측량에서 관리들의 부정이 많아지고, 토지를 재는 <척>도 제각각이 됩니다.

군정은 균역법이후 군포 2필을 1필로 감해주어, 이 1필만 내면 군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탐관오리들은 군적을 속여 군포를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를 16세 이상이라고 속여서 군적에 올리거나, 여자를 남자로 속여 군적에 올리는 행위(황구첨정), 죽은 사람을 죽지 않았다고 하면서 군적에 올리는 행위(백골징포), 도망간 자의 이웃이나 친척에게 군포를 받는 행위(족징, 인정) 등이 대표적인 군적 문란의 예입니다.

환곡은 더욱 심하여, 백성들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빌려준 후 이자를 계속 배로 받아 원곡보다 이자가 몇 배 증가하는 경우, 강제로 대출해준 다음 고리대처럼 이자를 받는 경우, 겨가 섞인 불량쌀을 빌려준 후 받을 때는 품질좋은 쌀로만 받는 경우 등등 경우도 다양했습니다.

대원군은 이러한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해 전정, 군정, 환곡을 대수술합니다.

먼저 전정에서는 불법으로 토지를 겸병하는 것을 막습니다. 또 국가 몰래 숨겨 경작하던 땅들을 모두 찾아내었고, 만약 숨겨진 땅이 있으면 수령이나 향리를 처벌하는 등 엄하게 토지관련 법규를 정비합니다.

다음으로 군정에서는 유명한 <호포법>을 실시합니다. 호포법은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것으로서 양반들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양반들이 자존심 때문에 호포를 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양반들이 군포를 낼 때에는 하인들의 이름으로 납부하게 하여 양반 위신을 세워주었고, 또 매포당 2냥씩으로 균등한 괴세를 매겨 평등한 세금 부과를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환곡제는 완전 폐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관에서 운영하는 환곡이 관리의 부정부패로 인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환곡을 폐지한 뒤 지방자치조직인 <사>에다가 곡식 대여의 임무를 맡깁니다. 이것은 관리의 부정을 방지하면서도, 왕실의 재정과 민생 안정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한 대책이었습니다. 원래 고려 시대 이후 지방에서는 <사창>이라고 하여, 국가가 운영하지 않은 비인가 대여기구가 있었습니다.(고려에서는 국가기구였지만, 조선에서는 의창이 국가기구입니다.) 의창이 공식기구라면 사창은 조선시대의 비공식 백성 구휼기구였던 것이죠. 흥선대원군기에 사창은 국가에 공식 인정되어 국가 환곡을 담당하는 <의창>을 대신하게 됩니다

삼정의 문란이 시정되면서 흥선대원군은 원하였던 재정확보와 왕권강화를 추구하면서도, 농민층의 지지를 받게됩니다. 이후 명성황후의 집권기에 국가조세제도가 다시 문란해지면서 근대화기 우리나라는 대원권의 강력한 정책을 그리워하는 농민층이 많아졌고, 대원군의 이후 복권에도 이러한 정책에 대한 지지가 많은 뒷받침을 했었습니다.

대원군의 삼정의 문란 극복 정책

전정의 수정 : 은결색출

대저 임금이 있으면 나라가 있는데, 금일의 형세는 나라가 있으나 믿을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나라라는 것은 민이 모인 것이고 민을 모으는 것은 재물입니다. 안으로는 왕실과 정부가 모두 텅 비고 밖으로는 창고가 모두 고갈되었으니, 녹봉을 계속 지급하기 어렵고 진휼곡은 내주기도 어려우며 생민이 날로 초췌해지고 온 팔도에 소요가 일어나니 흰수건을 둘러쓰고 몽둥이를 든 자가 걸핏하면 1만명이 넘고 관가를 약탈하고 관원을 살해하고 재변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지난 역사에 없던 일들로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전하의 나라에 백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승정원일기, 고정 1년 정월 27일 -

영의정 조두순이 아뢰기를

<수령이 경작 토지를 찾아내어 중앙에 보고하는 양이 많고 적음으로서 징벌과 권면의 기준으로 삼기를 청하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대왕대비는 여기에 따라 시행하되 회기 내에 실효가 있도록 하라고 답변하였다.

- 일성록, 고종 1년 11월 20일 -

군정의 수정 : 호포제

갑자년 초에 대원군은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려고 그 전의 형태를 바꾸어 모든 양반, 천민에게 1정에 대해서 일률적으로 세납전 2량씩 고루 바치게 하였으니 이를 동포전이라고 한다.

- 매천야록, 갑오이전 -

환곡의 폐지 : 사창절목

본 창에는 관장할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되니 반드시 본면 중 부지런한 자를 택하고 일면회에서 천거하여 관에 보고한 뒤에 뽑니다. 또한 관에서 감히 강제로 정하지 말고 그를 일러 사수라고 하고 환곡을 분급, 수납하는 것을 맡아 검사한다. 또한 각 동에서 근검한 사람을 가려 뽑아 당장으로 삼아 일청 사수가 지휘하고 본동이 받고 내주어 그로 하여금 바로잡게 하며 창고지기 1명도 사수로 하여금 지역에 뿌리박은 자를 잘 선택하여 그로 하여금 맡아서 지키고, 출납하고, 용량을 재서 일체 환곡을 분급받은 백성에게 부칠 일이다.

환곡을 분급하는 규칙은 해당 면에서 각 동 대소 빈부로써 차등으로 삼으며 양반과 상민을 가리지 않고 동네에 분급된 양을 헤아려 지나치게 맣거나 지나치게 적을 우려를 없게 하며, 만약 유망하여 받아내지 못한 곳이 있으면 해당 동에서 골고루 배분하여 채워낼 것이로되 사수와 해당 동장은 모두 경계하고 삼가지 못한 죄로써 심문할 일이다.

- 일성록, 고종 4년 6월 11일 -

5. 쇄국정책을 실시하다

대원군이 국내에서는 강력한 <왕권보호>정책을 실시하였다면, 대외적인 정책은 철저한 <쇄국정책>이었습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강력한 정책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초기에 천주교에 관대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정조기 이래 반세도정치 세력들 중에 개화주의자들이 많았고, 대원군 역시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고래 <이이제이 정책>을 생각해두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천주교를 전파하는 것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고 하였죠.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정치 불간섭 및 철저한 인도주의적 선교원칙을 주장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와의 정치적 교섭은 실패하였고,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하고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합니다.(병인박해)

또 당시 대동강 하류에 정박하면서 우리와의 통상을 주장하였던 미국의 제너럴 셔먼호가 통상을 거부당하자, 평양근처의 민가를 불지르고 약탈을 자행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평양군민들은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버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입니다. 이 프랑스, 미국과 연계된 사건은 우리 정부의 정책이 급격하게 반외세로 돌아서는데 기여합니다.

1866년 프랑스는 강화도에 쳐들어옵니다. 이것이 병인양요입니다. 강화도는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오는 인천물길의 입구로서 통상을 위해서 한양으로 오기 위한 입구입니다. 따라서 정부에서는 대외정책상 강화도를 철저히 방비하고, 대포와 함선을 비축해두고 있던 곳입니다. 또 문서를 보관하는 외규장각이 있던 섬이기도 하지요. 프랑스의 침입은 양헌수의 부대를 비롯한 관군이 정족산성 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면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외규장각의 수많은 문서들이 프랑스에 의해 약탈되었는데, 그 많은 문화재들을 아직도 찾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느낌표의 74434인가에서 대대적으로 방영해주기도 하더군요.

조선 국왕이 프랑스 주교 2인과 선교사 9인 그리고 조선인 신도 다수를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잔폭은 패망을 자초하는것이다. 조선은 중국에 납공하는 나라이므로, 본국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유죄를 정토하러 떠나기 전에 조선 원정을 알리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줄 안다. 조선 국왕이 프랑스 신부를 살해하는 날은 곧 조선국 최후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수일 내로 조선 정복을 위해 출정할 것이다. 조선을 정복하여 국왕을 책립하는 문제는 프랑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시행할 것이다. 전에 수차 귀 아문을 방문하고 프랑스 석교사에게 호조(여권) 발급을 요청하였으나, 귀 아문은 모두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이 비록 중국의 조공국이지만, 모든 국사를 자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호조 발급은 천진조약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본관은 조선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믿고, 이후부터 본국과 조선이 전쟁을 벌이더라도 간섭하지 않기를 선언한다.

- 청계중일한관계사료 제 2권 -

제너럴 사건이후, 시간이 꽤 흘러서 미국도 제너널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1872년 침입합니다. 이것이 신미양요입니다. 어재연의 광성보 전투와 평양군민들의 저항으로 미국이 물러나기는 했지만, 이후 미국은 계속적인 통상수교를 요청하곤 합니다.

이후 독일인 오페르트의 상선이 무역을 요청하였지만, 흥선대원군은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합니다. 오페르트는 조선과의 통상에 대한 정치적인 목적에서 의도적으로 대원군의 아버지 <남원군>의 묘를 도굴하려 하다가 실패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과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이 도굴사건에 분개하였고, 이 사건은 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유생층이 지지하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또한 개화파들도 당시에 개화정책을 입에 담을 수 없도록 하는 효과도 있었죠.

그들의 유골을 잠깐이나마 점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진 자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할 것이며, 서울을 점령하는 것과 다름없는 의의를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원군은 그것을 돌려받기 위해서 누구에게든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일에도 찬성할 것이다. 그러면 그를 강요하여 제안된 조건을 수락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대원군을 강요하여 이 요구를 수락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이것뿐이라는 것이다.

- 오페르트,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  -

사료분석 : 1868년(고종 5) 오페르트(E. J. Oppert:1832~?)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에 관한 사건입니다.  오페르트는 중국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던 유태계 독일상인으로 1866년 2번에 걸쳐 통상요구를 하다가 거절당하였죠. 그러자 그해에 미국인 젱킨스의 지원을 받아 통상조약 체결을 명분으로 상하이에서 조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때 통역으로 프랑스 선교사 1명과 한국인 천주교도 약간 명을 대동하였는데, 이들은 통상요구는 하지 않고 4월 18일 밤에 충청도 홍성군 구만포에 몰래 상륙해 바로 덕산으로 이동했으며, 덕산군청을 습격한 후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쳤답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들은 조선인이 시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관을 미끼로 조약을 체결하려 했던 것 같네요. 하지만 중도에 날이 밝아 도굴은 실패하였습니다. 21일에 이들은 영종진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수비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사상자를 내고 달아났습니다. 이 사건은 국외에도 널리 알려져 젱킨스가 기소되는 등(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남) 많은 파문을 일으켰으며, 대원군이 천주교탄압령을 내리고 대외강경책을 더욱 고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페르트는 이 사건 이후 〈조선기행 A Forbidden Land:Voyage to the Corea〉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예전에는 단순한 도굴사건이 통한 쇄국정책에 영향을 주었다는 책들이 많았는데, 요즘 서적들은 오페르트는 하나의 통상방법으로서 이 수단을 선택하였으며, 치밀한 계획과 조선에 대한 여러가지 상황을 감안하여 실시된 계획적인 사건이라는 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강력한 척양정책을 고수하였고, 이 정책에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대원군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특히 이항로, 최익현 등의 개항반대운동은 대원군 정권의 정통성을 공고히 해주게 됩니다. 또 서양은 조선의 강력한 저항을 보면서, 조선을 독자적인 자주국가로 인정하게 되고, 다른 방향에서의 접근을 모색하게 됩니다. 실제, 유럽 열강들은 당시 자국의 국제적인 관계상 조선까지 쳐들어올 적극적인 이유를 찾지 못하였고, 이후 대조선 정책에 있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으로 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후 척화비를 전국에 세워 반외세 정책을 확고히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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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때의 강화도 격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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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어재연, 척화비, 대원군의 묘>

대원군기 통상수교 거부정책 : 이항로가 올린 글

또 하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양이의 화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홍수나 맹수의 해일지라도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힘쓰시고 경계하시어 안으로는 관리들로 하여금 사학의 무리를 잡아 베시고, 밖으로는 장병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하도록 하옵소서.

사람 노릇을 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고비와, 존속하느냐 멸먕하느냐 하는 기틀이 잠깐 사이에 결정되오니 정말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한갓 지엽만 다스리고 근본을 제거하지 않거나, 한갓 흐름만 멈추게 하고 원천을 막지 아니한다면 근본의 싹과 원천의 샘솟음을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이의 재앙을 일소하는 근본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전하를 위한 계책은 마음을 맑게 닦아 외물에 견제당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외물이란 것은 종류가 극히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양품이 가장 심하옵니다.

몸을 닦아 집안이 다스려지고 나라가 잡힌다면 양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기이함과 교묘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저들이 기필코 할 일이 없어져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평생 양직물을 입지 아니하고 집안에서 양품을 사용하지 아니하여 그것으로 집안의 법도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잡아죽이고 정벌하는 일과 본말이 되어 서로 돕고 의지하게 되오니 꼭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 화서집 권 3 -

올해 여름과 가을 이래로 외국 선박이 경상, 전라, 황해, 강원, 함경 5도에 몰래 출몰하매 혹 널리 퍼져서 추적할 수가 없었다. 그중에는 상륙하여 물을 길어가기도 하고 때로 고래를 잡아 양식으로 삼기도 하는데, 그 선박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다.

- 현종실록 15권, 현종 14년 12월 -

대원군의 양이보국책 유시

   (대원군이 1866년 병인양요 때 철저한 항전의 뜻을 정부 관료에게 내린 유시)

1. 괴로움을 참지 못하고 화친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파는 것이다.

2. 해독을 이겨내지 못하고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다.

3. 적이 경성에 다다를 때 도성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4. 만약 잡술이나 육정육갑(둔갑술 등에 이용되는 신) 따위로, 또는 귀신을 불러 신기하게 침략자를 물리치고자 하면 이후에 생겨나는 폐단은 사학(천주교)보다도 더 심할 것이다.

- 용호한록 권 18, 병인년 9월 4일 -

6. 대원군 정권과 메이지 정권의 마찰이 시작되다.

흥선대원군이 강력한 쇄국정책으로 외세에 저항했다면, 당시 일본은 미국에 의해 메이지 유신으로 개혁을 하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였습니다.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조선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위해 사신을 보냈고, 1868-1876년까지 조선과 일본에서는 이 새로운 관계를 놓고 대립하게 됩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서계문제>입니다. 서계란, 일본측에서 조선측에 보낸 문서를 말하는데, 이 문서의 형식과 내용이 기존 관례와 너무 어긋나서 대원군의 반발을 사게 됩니다. 기존 일본은 조선에서 통신사를 받아 문물을 전수받으며 조선에 대한 예의를 지켜왔고 문서 역시 예의있는 표현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메이지 황제는 대원군에게 예의없는 문서, 즉 <대일본제국 천황이 고종의 아버지 흥선이에게 보내는 말투>의 문건을 보내고 새로운 관계설정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 서계를 보낸다, 못받겠다의 논쟁은 68-70년까지 계속되면서 양국의 첨예한 외교문제로 대두합니다. 이것은 메이지 체제의 일본과 조선의 큰 대립이었고, 흥선대원군은 일본과 외교를 단절해버립니다. 흥선대원군은 <왜양일체론>을 말하면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 역시 서양과 다를 바 없는 <서양 오랑캐>라고 말합니다.

일본은 흥선대원군과의 서계문제를 놓고 당장 조선을 침략할 것인가, 아니면 일단 일본의 내수산업을 일으킨 이후에 점진적으로 침략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합니다. 당장 침입하자는 것을 정안론, 천천히 침략하자는 것을 점진론이라고 하는데, 이토 히로부미의 점진론이 받아들여져서 훗날 민씨정권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후, 부분 산업별로 조금씩 조선에 침투하기 시작합니다. 점진론의 1단계는 경제적 침략이었다고 하네요.

삼가 조선국예조판서 공 각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근래 정세가 일변하여 정권이 황실로 돌아갔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별사를 보내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겠으므로 여기서는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재주 없는 이 몸이 직을 받들어 귀국을 찾았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특히 옛 공로를 어여삐 여겨 작을 올리고 벼슬을 좌근위소장으로 진급시켰고, 다시 교린직을 맡도록 명하셨으니, 오랜 전통이 사라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별사가 가지고 가는 도서(인장)는 새로운 도장을 찍게 하여 우리 조정의 성의를 표하겠사오니 귀국 또한 잘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옛적에 귀국에서 받아온 도서는 원래 전적으로 후의에서 나왔기에 쉽게 이를 고쳐 바꿈이 옳지 않은 줄 아옵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우리 조정의 특명에 따른 것이니 어찌 사사로이 공적인 일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불초 이 몸의 정황이 여차하오니 귀국이 양찰하길 깊이 소망하는 바입니다.

- 메이지 원년 11월 -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대마도주가 보낸 서계 중에 자신을 좌근위소장으로 써온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조선이라는 두 글자는 기왕의 격례에 크게 어긋납니다. 역관으로 하여금 이를 엄중하게 알리도록 하고,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고쳐 올리게 하십시오. 직명이 전과 다른 것은 항식과 항례가 아니거니와, 300년이나 된 약조의 본의가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그들에게 서계를 고쳐 올리도록 분부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이 말에 임금이 윤허하였다.

- 승정원일기, 고종 6년, 12월 13일 -

7. 대원군 정권에 대한 반발

대원군 정권의 정책은 필요한 정책이 많았고, 국가 계층의 고른 지지를 받았습니다. 삼정문란의 극복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고, 쇄국정책으로 양반유생들의 지지를 얻어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원군에 대한 긍정적인 면들은 대원군의 극단적인 정책에 의해 모두 가려져 버립니다. 서원철폐와 호포법의 실시는 양반층의 심한 반발을 사게 되었습니다. 최익현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지지하면서도 서원정리에는 크게 반발하여 고종의 친정이 필요하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합니다.

대원군 정책에 대한 츼역현의 반발

호조참판 최익헌이 상소하였다.

<지난 나랏일을 보면 폐단이 없는 곳이 없어 명분이 바르지 못하고 일이 순하지 않아 짧은 시간 안에 다 미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다만 그 가운데 더욱 드러난 심한 것을 보면 만동묘(명 의종을 제사하는 사당) 철거로 임금과 신하의 윤리가 썩어졌고, 서원 철폐로 스승과 제자의 의리가 끊어졌고,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일로 아비와 자식의 친함이 문란해졌고, 호존(청나라 돈)을 씀으로서 중화와 오랑캐의 분별도 어려워졌습니다.

이 몇가지 조목들이 곧 한 조각이 되어 천리와 인륜이 이미 탕진되어 다시 남아 있는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원납전 같은 것이 표라가 되어 백성과 나라에 재앙을 끼치는 도구가 된 지 거의 몇 년이나 되었으니, 이것이 선왕의 옛 전장을 변화시키고 천하의 떳떳한 윤리를 썩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에 신의 생각으로는 전하를 위하여 오늘날의 급선무를 말하자면, 만동묘를 다시 설치하고, 서울과 지방 서원을 흥기시키고 귀신의 후사로 나가는 일을 금하고 원통한 일을 풀고 부끄러운 일을 씻어 버린 국적에게 추율(죽은 역적을 다시 법을 집행함)을 적용하고 호전 사용을 혁파해야 할 것이며, 토목 공사 원납전도 한 시각이라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됩니다.>

대원군의 정치는 <왕권강화>를 위해 백성을 이용하면서, 시대 흐름을 읽지 못한다고 낙인찍혀 개화주의자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백성들도 신분제 개혁과 지주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대원군의 정책을 100% 지지할 수 없었습니다.

8. 대원군은 긍정적인 인물이었다는 평가

대원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의 중요한 기준은 <전통사회의 폐단을 개혁>했다는 것에 있습니다. 대원군은 삼정의 문란을 극복하고, 기존 세도정치의 잘못된 점을 시정하였으며, 백성들을 위한 여러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특히 대원군의 정책은 정조에서 시작되는 <탕평론>적인 개혁정책이 지속되었다는 것에서도 의의가 있습니다. 정조는 조선왕조에서도 드물 정도의 <유교적 계몽군주> 성격이 강합니다. 서양으로 따지면 <태양왕 루이 14세> 정도의 절대군주라고 할까요?

정조는 상당히 개혁적인 군주였습니다. 그는 탕평책을 실시하여 당파분열을 수습하고 서얼까지 등용하여 능력위주의 관료제를 마련합니다. 그 핵심이 규장각이었죠. 또 장용영을 마련하여 스스로의 상비군을 갖추려 했었고, 상공업 육성을 위해 사도세자의 묘가 마련된 화성을 건축합니다. 또 자유상업을 위해 신해통공으로 금난정권을 폐지하였습니다. 또 대전통편 등 법전을 정비하고, 북학사상을 가진 실학자들을 등용하여 중상주의적 국가체제를 마련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세도정치가 시작되면서 정조 때의 관료군은 모두 몰락하고, 일문독재가 시작됩니다. 물론 정조의 이념은 효명태자 등에 의해 지속되지만, 안동김씨의 입김으로 효명태자는 요절하였죠.

대원군은 이러한 정조의 이념을 부활시키고, 세도정치를 불식시킨 왕입니다. 그는 강력한 상비군을 바탕으로 국가의 자주성을 확립하고 외세를 몰아내었습니다. 이것은 근대 민족국가를 추구하려던 정조의 이상과 일치합니다. 또 삼정의 문란 극복과 법전정비, 능력위주의 관료 등용 등으로 근대사회로 나아갈 계기를 마련한 왕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흥선대원군에 대한 긍정적 평가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통사회의 폐단을 개혁하여 근대사회로 나갈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지요.

9. 대원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

대원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크게 2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그의 개혁 목표가 단순한 <왕권강화>였다는 점입니다. 대원군은 민생안정을 추구했지만,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즉, 조선 전통의 조세질서를 회복하여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고, 전제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실제 서원정리도 서원의 특권 폐지를 통한 조세확보였고, 호포제도 양반 등 특권계급에게 조세를 부과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경복궁 중건을 위한 각종 세금은 민생 안정이라기보다 백성들에게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었죠.

따라서 흥선대원군의 왕권강화란 전통사회질서를 정조시대 이전으로 정상화하여 회복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신분제도를 인정하였습니다. 지주제도 인정하였습니다. 전제군주제도 인정하였습니다. 이 3가지는 실제 프랑스 혁명에서 말하는 구제도의 모순과 일치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러한 구제도를 바탕으로 전통적 봉건질서를 부활하려는 인물이었습니다.

대원군에 대한 2번째 부정적 평가는 <통상수교 거부정책>의 문제점입니다. 대원군이 취한 통상수교 거부는 이유없는 반외세로서 근대 사회 발전에 역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대원군의 반외세 정책은 성리학적 이념을 가진 유생층의 지지를 통한 반외세로서 백성들의 생활과는 상관없는 반외세입니다. 따라서 개화주의자들은 시대착오적인 유교이념에 따른 반외세적 보수주의를 적극적으로 공격하였지만, 대원군은 이들의 의견을 무시하곤 하였습니다. 대원군 이전 등장한 박규수, 오경석 등의 개화주의자들의 이론은 대원군 집권기에 힘을 잃고, 조선의 개화사상은 10여년의 세월동안 잠복기를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민씨정권에서 개화주의자들이 활개치기 시작하지만, 이 때의 개화사상은 이미 민씨정권에 야합한 개화사상으로 변질될 수 밖에 없었죠.

대원군의 정치는 결국 반근대적인 전제군주제, 봉건적 신분질서, 지주제적인 중세 토지제도를 강화하는 보수적인 정책이었습니다. 교과서에서는 이 점을 강조하여 대원군을 근대사회에 역행하는 인물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원군에 대한 긍정론, 부정론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역사적 난재입니다. 보는 사람의 입장과 각도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죠.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는 <강화도 조약>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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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의 시작인 개화기에 대한 개관

오늘부터 다룰 부분은 한국 근현대사입니다. 그 중 맨 처음으로 개화기의 중요한 역사적 흐름과 사건을 주제별로 묶어서 포스팅 하보도록 하죠. 오늘은 그 첫 번째로, 1860~1900년대까지 개화기의 전반적 흐름을 개관하는 포스트를 작성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시작해 볼까요?

1. 1870~80년대 한국사의 주된 흐름

1880년대의 한국사를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는 키워드는 <조선책략의 유입>과 함께 시작된 <정부주도의 개화정책>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조선의 개화정책과 관련된 조선책략>

한국사회에서 1850년대는 세도정치의 여파로 각종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사회모순이 극에 달해있던 시기였습니다. 또 밖으로는 서양의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하는 한편, 중국, 일본, 러시아와의 관계가 서구의 아시아 진출로 인하여 또 다시 재정립되는 시기였습니다. 1862년에는 세도정치에 대한 대대적인 항거인 임술농민봉기가 일어났고, 세도정치와 삼정의 문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의식은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하였죠.

이러한 상황에서 1863년부터 딱 10년간 정권을 잡은 사람이 <흥선대원군>입니다.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왕권강화정책으로 삼정의 문란과 신분제 사회의 모순을 재정립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도가문과 양반벌족들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반발하였고, 흥선대원군은 집권 10년만은 1873년에 축출되고 맙니다.

대원군을 몰아낸 명성왕후 세력은 1895년까지 조선 사회를 <개화>라는 맥락에서 이끌어갑니다. 결국 이러한 정책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개항하게 되었고, 1880년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개화정책이 정부주도로 체계화되기 시작합니다.

1880년대의 조선 사회는 이 <조선책략에 의한 개화정책>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정부는 조선책략을 수용하여 1882년 미국과 수교를 맺고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조선책략을 통한 대미수교에 대하여 양반유생들을 비릇한 전통 성리학자들은 반대운동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대대적인 위정척사운동으로 연결되고, 1882년 임오군란에서도 이러한 반대논리가 표출됩니다.

조선책략에 의한 개화정책이 절정에 맞이하면서 반개화세력과 마찰을 빚은 가장 큰 사건은 1884년의 갑신정변입니다. 갑신정변은 급전적 개화파가 일본세력을 등에 업고, 조선세력을 개화하려는 의지를 보인 사건이었으나 보수파와 청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로 끝납니다.

일본을 등에 업은 갑신정변의 실패로 조선에서는 <청>의 정치적 세력이 강해졌고, <일본>역시 경제적인 침투를 통해 조선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1880년대 중반부터는 청과 일본이 우리나라를 놓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각축을 벌이는 형세가 나타납니다. 이러한 외세의 경제적 침략은 1889년 방곡령을 계기로 노골화되고, 보다 적극적인 측면에서 청, 일본이 대립하게 됩니다.

2. 1890년대 한국사의 주된 흐름

1890년대 한국사의 키워드를 말하라고 하면 <일본이 청, 러시아를 제치고 한반도의 주도권을 잡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90년이 되면서 한반도에서는 일본, 청이 각각 조선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정치, 경제적으로 대립하는 형세였습니다. 또, 방곡령 등을 계기로 반외세의 기운이 높아지고, 국내 정치의 문란으로 인한 모순이 심화되어 농민층의 불만은 <임술농민봉기>가 30년이나 지난 시점에 다시 불붙고 있었습니다.

결국 1894년 농민들은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걸고 동학농민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외세인 청, 일본에 의해 진압되었고, 청과 일본은 조선의 주도권을 놓고 <청일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서 일본이 한반도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시작합니다. 청일전쟁직후, 갑오개혁을 통하여 조선은 일본의 입맞에 맞는 개화정책을 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일본은 1990년 중반을 기점으로 조선에서 정치, 군사적 실권을 잡게 됩니다. 비록, 삼국간섭에 의해 청나라에서의 주도권은 잃었지만, 조선에서의 주도권을 확실히 잡아갑니다. 1895년에는 명성황후 시해사건, <을미개혁> 등을 통해 조선을 강제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합니다.

고종은 1896년 일본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들어가버립니다.(아관파천) 이 사건으로 우리 나라는 국가의 무능력함을 대외에 크게 알리게 되었고, 결국 이 사건이 우리나라의 각종 철도, 광산 등의 이권이 외국에 넘어가는 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국민들은 1896년 독립협회를 결성하여 이권수호운동 및 고종이 다시 궁으로 돌아올 것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시작됩니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요구 이후, 환궁하였으며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친 후 황제가 되어 <광무개혁>을 실시합니다.

여기까지가 개화기 1860-1990년대까지의 대략적인 역사 줄거리입니다. 당시의 역사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만, <사회모순과 외세에 대한 농민의 저항과 정부의 개화정책 실패>라는 큰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겠네요.

그럼 하나하나 개화기의 역사를 시대순으로, 그리고 중요 사건순으로 묶어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개화기, 그 격동의 한국사로 갑니다.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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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르트 도굴사건

그들의 유골을 잠깐이나마 점유한다는 것은 그것을 가진 자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할 것이며, 서울을 점령하는 것과 다름없는 의의를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대원군은 그것을 돌려받기 위해서 누구에게든 두말할 것 없이 어떤 일에도 찬성할 것이다. 그러면 그를 강요하여 제안된 조건을 수락하도록 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대원군을 강요하여 이 요구를 수락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이것뿐이라는 것이다.

                                                                                         - 오페르트,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  -

사료분석 : 1868년(고종 5) 오페르트(E. J. Oppert:1832~?)가 충청도 덕산에 있는 남연군(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에 관한 사건입니다.  오페르트는 중국 상하이를 근거로 활동하던 유태계 독일상인으로 1866년 2번에 걸쳐 통상요구를 하다가 거절당하였죠. 그러자 그해에 미국인 젱킨스의 지원을 받아 통상조약 체결을 명분으로 상하이에서 조선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이때 통역으로 프랑스 선교사 1명과 한국인 천주교도 약간 명을 대동하였는데, 이들은 통상요구는 하지 않고 4월 18일 밤에 충청도 홍성군 구만포에 몰래 상륙해 바로 덕산으로 이동했으며, 덕산군청을 습격한 후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쳤답니다.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이들은 조선인이 시신을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관을 미끼로 조약을 체결하려 했던 것 같네요. 하지만 중도에 날이 밝아 도굴은 실패하였습니다. 21일에 이들은 영종진에 상륙하여 통상을 요구하며 수비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사상자를 내고 달아났습니다. 이 사건은 국외에도 널리 알려져 젱킨스가 기소되는 등(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남) 많은 파문을 일으켰으며, 대원군이 천주교탄압령을 내리고 대외강경책을 더욱 고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페르트는 이 사건 이후 〈조선기행 A Forbidden Land:Voyage to the Corea〉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예전에는 단순한 도굴사건이 통한 쇄국정책에 영향을 주었다는 책들이 많았는데, 요즘 서적들은 오페르트는 하나의 통상방법으로서 이 수단을 선택하였으며, 치밀한 계획과 조선에 대한 여러가지 상황을 감안하여 실시된 계획적인 사건이라는 설이 점차 많아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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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관련 사료

임오년(1882) 6월 초 9일, 한성 영군들이 큰 소란을 피웠다. 갑술년(1874) 이후 궁궐, 경비가 다하여 기강이 없으며 호조와 선혜청 창고도 바닥나 한성 관리들은 봉급을 못 받았으며, 오영 병사들도 가끔 결식을 하여 급기야 5영을 2영으로 줄이고 노병과 약졸들을 쫒아냈는데, 내쫓긴 사람들은 발붙일 곳이 없으므로 팔을 끼고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이 때 군량이 지급되지 않은 지 이미 반년이 지난 데다가 호남세선 몇 척이 도착하여, 한성 창고를 열어 군량을 먼저 지급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이 때 선혜청 당상관 민겸호의 하인이 선혜청 고지기가 되어 군량을 내주었다. 하인이 쌀을 벼껍질과 바꾸어 이익을 챙기자 많은 백성들이 크게 노하여 하인을 때려눕혔다. 민겸호는 주동자를 잡아 포도청에 가두고 곧 죽여버리겠다고 선언하였다. 수많은 군중들은 더욱 분함을 참지 맛하고 칼을 빼 땅을 차며, “굶어죽으나 법으로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일 사람이나 하나 죽여서 원한을 씻겠다” 고 하며 서로 고함으로 호응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고함으로 땅이 꺼질 듯 하였다. 무리는 곧바로 민겸호 집으로 쳐들어가 순식간에 집을 부수고 평지로 만들었다. 집에는 진귀한 보물들이 가득 차 있었다. 군중들은 “돈 한 품이라도 훔치는 자는 모두 죽인다” 고 하고 보물을 뜰에 모아놓고 불질렀다. 비단과 구슬이 타서 불꽃은 오색을 띄고 인삼과 녹용과 사향 냄새가 수리까지 풍겼다. 이 때 민겸호는 담을 넘어 대궐로 도망쳤다.

- 매천야록, 제 1권, 갑오이전 -

군졸들은 먼저 교동 이최응의 집을 부수고 벌벌 떨고 있는 이최응을 죽였다. 군병들은 다시 살아날까 염려하여 긴 창으로 항문을 찔러 창날이 머리와 뺨에 나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멈추었다. 그리고 나서 <장안의 민가놈은 다 죽이겠다>고 호언하면서, 민겸호, 민태호, 민규호, 민두호, 민영익, 민치서, 민치상, 민영목, 민창식을 종루로 끌고나와 난자하여 죽였다. 또 김보현의 큰 집, 작은 집과 신관호, 한성근, 윤흥렬, 홍완, 이태응, 내영집사 등속과 중인통왜자(일어통역관)의 집들을 모두 부수어버렸다. 홍안을 포박해 죽이려들자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그 밖에도 민가와 친근한 사람이나 궁궐에 출입하는 점쟁이 무당들 집까지도 모두 파괴하여 이날 살해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 저상일월, 1992년(임오년, 고종 19년) 6월 10일 -

임오년 6월 10일 대원군에게 군국사무를 처리하라는 명이 내려지자 대원군은 궐내에서 거처하며, 기무아문과 무위, 장어의 2영을 폐지하고 5영군제를 복구하려는 명을 내려 군량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난군은 물러가라는 명을 내리고 대사령을 내렸다. 난병들은 대궐에서 물러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 매천야록 제 1권, 갑오이전 -

참고글 :  임오군란은 1882년 구식 군대의 차별 대우에 항거하여 일어난 군란입니다. 이 군란은 당시 개화와 척사의 흐름 속에서 구식군대의 차별이라는 상황이 사회 전반적인 문제점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당시 조선이 점차 서양식 도시화를 추구해가면서 군란에 도시 빈민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 점도 주목할 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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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 문제

삼가 조선국예조판서 공 각하에게 글을 올리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근래 정세가 일변하여 정권이 황실로 돌아갔습니다. 가까운 장래에 별사를 보내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겠으므로 여기서는 긴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재주 없는 이 몸이 직을 받들어 귀국을 찾았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특히 옛 공로를 어여삐 여겨 작을 올리고 벼슬을 좌근위소장으로 진급시켰고, 다시 교린직을 맡도록 명하셨으니, 오랜 전통이 사라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제 별사가 가지고 가는 도서(인장)는 새로운 도장을 찍게 하여 우리 조정의 성의를 표하겠사오니 귀국 또한 잘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옛적에 귀국에서 받아온 도서는 원래 전적으로 후의에서 나왔기에 쉽게 이를 고쳐 바꿈이 옳지 않은 줄 아옵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우리 조정의 특명에 따른 것이니 어찌 사사로이 공적인 일을 해칠 수 있겠습니까. 불초 이 몸의 정황이 여차하오니 귀국이 양찰하길 깊이 소망하는 바입니다.

- 메이지 원년 11월 -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대마도주가 보낸 서계 중에 자신을 좌근위소장으로 써온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도, 조선이라는 두 글자는 기왕의 격례에 크게 어긋납니다. 역관으로 하여금 이를 엄중하게 알리도록 하고,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고쳐 올리게 하십시오. 직명이 전과 다른 것은 항식과 항례가 아니거니와, 300년이나 된 약조의 본의가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그들에게 서계를 고쳐 올리도록 분부하심이 옳을 것입니다.>

이 말에 임금이 윤허하였다.

- 승정원일기, 고종 6년, 12월 13일 -

참고글 : 서계라는 것은 국가간 공식문서를 의미합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친 후 강국이 되어 조선에 대하여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조선에 문서를 보낼 때 일본은 존대 형식의 문서를 보냈지만, 대원군기 이전부터는 점차 문서 용어에서 존대가 사라지고, 문서 형식도 격식을 갖추지 않게 되었습니다. 특히 메이지 유신은 일본이 한국을 능가한다는 자부심을 갖게 되는 일대의 사건이었지요.

조선에서는 이에 항의를 하곤 하였지만, 일본과의 묘한 마찰은 계속되었고, 결국 외교문서를 받는다, 안 받는다라는 문제로 한, 일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일본은 계속 성장하였고, 일본은 결국 당장 한국을 공격하자는 <정한론>까지 대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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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로네의 서한

조선 국왕이 프랑스 주교 2인과 선교사 9인 그리고 조선인 신도 다수를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잔폭은 패망을 자초하는것이다. 조선은 중국에 납공하는 나라이므로, 본국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유죄를 정토하러 떠나기 전에 조선 원정을 알리는 것이 도리에 합당한 줄 안다. 조선 국왕이 프랑스 신부를 살해하는 날은 곧 조선국 최후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수일 내로 조선 정복을 위해 출정할 것이다. 조선을 정복하여 국왕을 책립하는 문제는 프랑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시행할 것이다. 전에 수차 귀 아문을 방문하고 프랑스 석교사에게 호조(여권) 발급을 요청하였으나, 귀 아문은 모두 거절하였다. 그 이유는 조선이 비록 중국의 조공국이지만, 모든 국사를 자주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호조 발급은 천진조약에도 기재되어 있지 않다고 한다. 이에 본관은 조선 문제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믿고, 이후부터 본국과 조선이 전쟁을 벌이더라도 간섭하지 않기를 선언한다.

- 청계중일한관계사료 제 2권 -

참고글 : 이 서한은 대원군의 쇄국정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19세기 중엽부터 서양 열강의 배가 한반도에 자주 출몰하게 되는데, 이것을 이양선이라고 하지요. 대원군은 초기에는 서양의 천주교에 관대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서양의 배를 이용하여 러시아를 견제하려고 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의 알선으로 프랑스 세력을 이용하려던 대원군의 정책이 실패하자, 대원군은 유생들의 강력한 요구를 수용하여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병인 옥사라고 부릅니다.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쳐들어왔습니다. 대원군은 굳은 항전의 의지로 일관하였고 양헌수 부대, 한성근 부대의 활약으로 프랑스군을 격퇴하는데 이를 병인양요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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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의 화서집

또 하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양이의 화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홍수나 맹수의 해일지라도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힘쓰시고 경계하시어 안으로는 관리들로 하여금 사학의 무리를 잡아 베시고, 밖으로는 장병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하도록 하옵소서.

사람 노릇을 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고비와, 존속하느냐 멸먕하느냐 하는 기틀이 잠깐 사이에 결정되오니 정말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한갓 지엽만 다스리고 근본을 제거하지 않거나, 한갓 흐름만 멈추게 하고 원천을 막지 아니한다면 근본의 싹과 원천의 샘솟음을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이의 재앙을 일소하는 근본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전하를 위한 계책은 마음을 맑게 닦아 외물에 견제당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외물이란 것은 종류가 극히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양품이 가장 심하옵니다.

몸을 닦아 집안이 다스려지고 나라가 잡힌다면 양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기이함과 교묘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저들이 기필코 할 일이 없어져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평생 양직물을 입지 아니하고 집안에서 양품을 사용하지 아니하여 그것으로 집안의 법도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잡아죽이고 정벌하는 일과 본말이 되어 서로 돕고 의지하게 되오니 꼭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 화서집 권 3 -

참고글 : 이항로는 초기 통상반대운동기의 위정척사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60년대는 대원군의 쇄국정책고 위정척사의 목표가 일치하면서 대원군기 집권충과도 연계됩니다. 이들의 주정은 척화주전론으로,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운 맥락과 같은 주장을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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