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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 이후 위정척사는 계속되었다.

1. 위정척사란?

흥선대원군이 18363년부터 집권하여 안동김씨의 노론 세도 가문을 축출한지 10년... 1873년 민씨가 정권을 잡으면서 대원군이 실각하고 우리나라는 본격적인 개화정책을 실시합니다. 이전 포스트에서 설명했듯이 개화정책은 강화도조약을 맺으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었고, 조선책략이 유입되면서 구체적으로 실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화 사상을 우리 전통 유교주의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당연히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반대한 이유는 아무런 근거없이 서양을 싫어해서도, 조선 왕조를 지탱하는 신분질서의 하나인 성리학을 수호하기 위해서만도 아니였습니다. 물론 통상요구가 조선의 신분제와 사회질서의 근간을 흔들기는 하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은 그것을 나름대로 논리있게 반박하였습니다.

성리학의 근본질서를 옳은 것(正)으로 여기는 것을 위정이라 하고, 서양의 문물을 악으로 보아 사(邪)라 하는 것을 척사라 하여 이러한 사상을 <위정척사>라고 합니다. 그럼 위정척사의 핵심 내용들을 한번 볼까요?

2. 대원군기의 위정척사(1863-1873)

흥선대원군이 막 집권하던 시기는 이양선이 출몰하여 통상을 요구하고, 아편 전쟁 이후 중국 베이징을 함락시킨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서양 열강들이 조선에 대해 관심을 가지던 시기입니다. 또 미국은 일본을 개항시킨 이후 그 통상영역을 조선에 까지 확장하려고 하던 시기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 등의 사건을 거치면서 외세를 몰아내고 척화비를 건립하였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부터 1871년 신미양요까지 조선은 통상을 요구하는 외세의 압력과 직접 맞싸워야 했습니다. 또, 제너럴 셔먼호 사건 등으로 조선민들은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이 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따라서 1860년대의 위정척사운동이란 외국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운동이었습니다.

당시 인식으로 외국과의 통상은 곧, 매국이라고 여기는 분위기였습니다. 박규수, 오경석 등 초기 개화주의자들이 있었지만, 이들은 집권층이 대원군 정권과는 연결되지 못하고, 개별적인 개화 주장을 해야 했습니다.

위정척사론은 외국과 통상을 했을 때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화이사상에 기반을 두고 전개된 내용이긴 하지만, 이미 중국과 일본이 외세에 넘어간 상황에서 우리 상황을 잘 이해하고, 서양 침투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나열한 논리적인 반대였습니다. 하지만, 그 논리속에는 서양에 대한 두려움과 유교사상의 입장에서 본 서양인의 <짐승>같은 행위들에 대한 좁은 시선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럼 몇 가지 글을 한 번 볼까요?

또 하나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양이의 화가 금일에 이르러서는 비록 홍수나 맹수의 해일지라도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힘쓰시고 경계하시어 안으로는 관리들로 하여금 사학의 무리를 잡아 베시고, 밖으로는 장병들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하도록 하옵소서.

오늘날 양적의 침입을 당하여 군론이 교(외교)와 전(전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그런데 양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은 내 나라 쪽 사람, 곧 국변인의 주장이고, 양적과 화친해야 한다는 주장은 적국 쪽 사람, 곧 적변인의 주장입니다. 전자를 따르면 나라의 의상지구(조선문화의 전통)를 보전할 수 있지만, 후자에 따른다면 인류(조선인)가 금수의 지경으로 빠지고 말 것입니다. 이 점이 양적과 싸우니냐 화친하느냐 하는 차이가 됩니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근본을 잡는 신념, 곧 겸이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런 상황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 노릇을 하느냐, 짐승이 되느냐 하는 고비와, 존속하느냐 멸먕하느냐 하는 기틀이 잠깐 사이에 결정되오니 정말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아니 되옵니다. 그러나 한갓 지엽만 다스리고 근본을 제거하지 않거나, 한갓 흐름만 멈추게 하고 원천을 막지 아니한다면 근본의 싹과 원천의 샘솟음을 누구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양이의 재앙을 일소하는 근본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전하를 위한 계책은 마음을 맑게 닦아 외물에 견제당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도리밖에 없습니다. 이른바 외물이란 것은 종류가 극히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지만 그 중에서도 양품이 가장 심하옵니다.

몸을 닦아 집안이 다스려지고 나라가 잡힌다면 양품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기이함과 교묘함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저들이 기필코 할 일이 없어져 오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평생 양직물을 입지 아니하고 집안에서 양품을 사용하지 아니하여 그것으로 집안의 법도를 이루었습니다. 이는 잡아죽이고 정벌하는 일과 본말이 되어 서로 돕고 의지하게 되오니 꼭 마음에 두셔야 합니다.

- 이항로, 화서집 권 3, 소차, 사동부승지겸진소회 -

1860년대 대표적인 위정척사 사상가 이항로의 화서집의 내용 중 일부입니다. 위 내용에서 보면 1860년대 위정척사 사상이 <인수지별>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항로는 신미양요 후 세운 척화비에 대하여 열렬하게 지지한 유생입니다. 그는 서양의 물건을 사는 것은 <농산물>을 <공산품>과 교환하게 됨으로서 나라의 경제가 망하여 외국에 종속된다고 주장하면서,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을 최초로 꼬집여낸 성리학자입니다.

따라서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을 백성들에게 알려서, 서양의 물건을 사지 않고 서양이 통상을 요구하는 목적을 모두가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신제가부터 해서 집안을 잘 단속하고, 유교윤리에 맞는 경제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유교 윤리에 따른 경제관은 농업중심의 생필품 교환과 검약 정신입니다. 따라서 유교윤리를 통해 서양을 차단하기를 주장하였고, 이 논리에 의하면 유교적 윤리를 모르는 서양과 일본은 <짐승>인 것이지요. 따라서 이 당시의 주장은 만약 외세가 통상을 계속 요구한다면,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전쟁을 불사해야 한다는 강경한 <척화주전론>과도 연결됩니다. 이 척화주전론을 실행하여 외세를 몰아내고 <척화비>를 세운 자가 바로 흥선대원군이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모든 유생들이 개화 정책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양반들 중에서는 개화사상을 인정하는 학자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유생들이 더욱 더 적극적으로 위정척사 운동을 벌였던 것이지요. 특히 위정척사를 전개했던 유생들은 이항로, 이만손, 최익현, 기정진 등 서울 근기쪽의 전통 성리학자들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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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로 선생과 추도비

3. 민씨 정권 집권 후 위정척사운동(1873-1880)

대원군이 축출되고 민씨 정권이 들어서자 위정척사를 전개하던 유생들은 마음이 다급해졌습니다. 민씨가 강화도 조약을 맺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이죠. 이제 유생들은 단순히 통상 거부 운동 차원을 떠나서 <개항>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논리적으로 펴기 시작합니다. 흥선대원군 때에는 쇄국정책이 국론이었기 때문에 유생들이 국가 정책을 지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위정척사파들은 민씨와 개화파들에 대하여 <반정부투쟁>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의 위정척사운동은 흔히 <개항 반대 운동>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대표적인 예는 최익현의 5불가소입니다. 한번 봐야겠죠?

 대개 사람들은 모두 자기 약점을 보고 이를 숨기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저들이 우리가 방비가 없고 약함을 보이는 실상을 알고서 우리와 강화를 맺는 경우 앞으로 밀려올 구렁텅이 같은 저들의 역심을 무엇으로 채워주시겠습니까? 우리 물건은 한정이 있는데 저들의 요구는 그침이 없을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응해주지 못하면 저들의 노여움은 여지없이 우리를 침략하고 짓밟아 우리가 이전에 들인 모든 노력은 허망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불러들이는 첫째 이유입니다.

일단 강화를 맺고 나면 적들의 욕심은 물화를 교역하는 데 있습니다. 저들의 물화는 모두가 지나치게 사치하고 기이한 노리개고 손으로 만든 것이여서 그 양이 무궁하지만, 우리 물화는 모두 백성들의 생명이 달렸고 땅에서 나는 것이어서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같이 피와 살이 되어 백성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유한한 물화를 가지고 저들의 사치하고 심성을 좀먹고 풍속을 음란하게 하는 물화와 교역한다면 그 양은 틀림없이 1년에도 수만에 달할 것입니다. 그러면 동토 수천리는 몇 년 안 지나 땅과 집이 모두 황폐하여 다시 보존하지 못할 것이고 나라 또한 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는 둘째 이유입니다.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이옵니다. 강화가 한번 이루어지면 사학의 서적과 천주의 초상화가 교역하는 속에서 들어올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얼마 안 가서 선교사와 신자 간의 전수를 거쳐 사학이 온 나라 안에 퍼질 것입니다. 포도청이 살피고 검문하여 잡아다 베려고 하면 저들의 사나운 노기가 또한 더욱 커질 것이고 강화로 맺은 맹세가 허사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얼마 안 가 집집마다 사학을 받아들이고 사람마다 사학에 물들 것입니다. 아들이 아비를 아비라 여기지 않고 신하가 임금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아 예의는 시궁창에 빠지고 인간들은 변하여 금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강화가 난리와 멸망을 가져오는 셋째 이유입니다.

강화가 이루어진 뒤에는 저들이 상륙하여 서로 왕래하고 또는 우리 지경 안에서 집을 짓고 살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강화하였으므로 거절할 말이 없고 저절할 수 없어서 내버려 두면 재물이나 비단과 부녀자들을 빼앗는 일을 마음대로 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도대체 누가 능히 막겠습니까? 또한 저들은 얼굴만 사람이지 마음은 짐승이어서 조금만 뜻에 맞지 않으면 거리낌 없이 사람을 죽이고 짓밟을 것입니다.

- 최익현, 면암집 권 3, 지부복궐척의소 -

5불가소에서 최익현은 서양과 통상을 했을 경우의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지적하고, 일본과의 통상도 안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정리했네요. 5가지 이유를 볼까요?

1. 개항 반대운동 : 일본의 강요에 의한 조약을 맺으면 일본의 탐욕에 노예가 되고 말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2.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 : 개항 후 수공업품과 농산물 교환이 이루어지면 나라의 경제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18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이 우리에게 수출한 영국산 면제품과 조선쌀의 무역은 방곡령에도 불구하고 우리 농촌을 망치는 것이었고, 결국 동학 농민운동의 배경이 되기도 합니다. 동학 운동 중에서도 이 부등가 교환의 문제점을 지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 왜양일체론 : 70년대 개항 반대의 가장 큰 논리가 바로 이 <왜양일체론>입니다. 즉, 서양과 일본은 사실 같은 나쁜 놈들이라는 것이지요. 메이지 유신 이후 미국의 영향을 받은 일본은 서계 문제 등으로 우리에게 행패를 부렸고, 이들은 서양의 사교 및 짐승같은 윤리를 우리에게 강요할 것이니, 대원군의 쇄국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풍속의 교란 문제 : 일본인이 부녀자를 능욕하고, 윤리에 맞지 않는 일을 할 것이니 개항을 하면 인륜이 바닥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5. 인수지별론 : 이것은 일본 역시 프랑스, 미국과 같은 짐승들이니 짐승이 인간과 같이 살수 없다는 사람, 금수의 구별론입니다. 위정척사의 핵심 사상 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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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익현

4. 조선책략 유입 후 위정척사 운동(1880~)

앞 포스트에서 설명했었죠? 조선책략은 두말 할 것 없이 중요한 우리 나라 개화의 지침서입니다. 이 조선책략의 유입으로 민씨정권이 미국과 수교를 맺고, 별기군을 설치하는 등 적극적인 개화를 실시하자 위정척사운동은 <정권타도>를 외치며 폭력적으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특히 80년대 위정척사파들은 조선책략 태우기 운동을 하며 개화파들을 적대시합니다. 이제, 국가 안에 아군과 적군이라는 개념이 생긴 것이지요. 특히 이만손이 올린 <영남만인소>는 위정척사 사상이 극에 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 영남만인소 역시 논리적인 어조로 조선책략의 유입이 왜 문제인지를 조목조목 따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이미 우리의 수륙 요충 지대를 점거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의 허술함을 알고 충돌을 자행할 경우 이를 제지할 길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은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입니다. 갑자기 황 쭌셴의 종용을 받고 우리 스스로가 끌어 들인다면, 그들이 풍랑을 헤치고 험한 바닷길을 건너와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의 재산을 약탈 하거나, 저들이 우리의 약점을 잡아 어려운 청을 강요한다면 이를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러시아는 본래 우리와는 혐의(嫌疑)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연히 남의 이간을 듣고 우리의 위신을 손상시키거나 원교를 핑계로 근린을 배척하다가 만의 하나 환란이 일어나면 장차 이를 어찌하겠습니까?

사학에 종사하여 재화를 이루고 농, 공을 일으킨다고 하지만, 원래 우리에게도 옛부터 재용과 농공에 대한 훌륭한 법규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서학에 종사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야소교 전래가 해롭지 않다고 하는 것은 사교를 조선에 유포시키려는 간계이니, 주공, 공자, 정자, 주자의 가르침을 더욱 밝혀서 그 사람 귀류들을 물리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이만손에 동조한 조선의 최고 재상 홍재학의 상소입니다. 홍재학은 이 상소로 말미암아 고종의 눈에서 벗어나 나중에 죽게 됩니다.

    대개 서양의 학문은 천리를 어지럽히고 기강을 소멸시킴이 심하다는 것을 다시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서양의 물건은 대부분 음탕하고 욕심을 유도하며, 유교 윤리를 깨뜨리고 사람의 정신을 어지럽히며, 천지를 거역하는 것들입니다. 서양의 학문과 물건은 귀로 들으면 창자가 뒤틀리고 수컷이 다른 것으로 바뀌며 눈으로 보면 창자가 꼬이고 위가 뒤집히며, 코로 냄새를 맡고 입술로 그것에 닿게 하면 마음이 변하여 실성하게 되니 이는 곧 그림자가 서로 부딪치고 전염성이 서로 감영되는 것과 같으며, 그 사람의 좋고 싫음이 향배를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십자가의 상을 받들지 않는다 해도 예수교의 책을 읽게되면 성인에게 죄를 얻는 시작입니다. 전하의 백성들의 과연 귀와 눈과 코와 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나라 안의 실정은 이미 달라졌습니다.

                                                                                         - 홍재학의 상소  -

위정 척사는 정조 임금 이래로 내려온 조정의 기본 정책으로서 아직도 그 의리가 빛나는 바, 전하의 친정 이래로 왜양일체의 해를 모르고 일본과 통상을 주장해 온 결과 사설과 이의가 횡행하여 국가의 사태가 위급하기 비길 데 없습니다. 양물과 아소라는 사교의 위세로 공맹의 태도는 날로 사라져 가정에는 윤리가 깨지고 사람에게 예의가 허물어진 결과, 종묘 사직이 무너질 위기에 있으니 전하께서는 더욱 위정척사의 대위를 밝혀 주시어 ‘주화매국’하려는 신료를 처단해야 합니다. 신설된 아문을 폐쇄하여 옛 제도를 복구하고 경비를 절약하여 사치를 금하고 언로를 넓혀 지혜를 모으고 정학을 장려하여 사악함을 막아 기강과 민력을 떨친다면 상하원근이 한 마음으로 뭉칠 수 있으니, 그렇게 될 때 동왜와 서양을 막을 수 있으며 북쪽 러시아도 우리에게 위압될 것입니다.

- 일성록, 고종 18년 윤 7월 6일, 홍재학의 상소 -

위정척사운동이 격해지자 고종이 직접 조서를 내리는 등 개화정책 추진을 위해 유생층을 달래는 시도를 계속하지만, 그 결과는 처참한 임오군란으로 돌아오기도 하죠. 고종이 개화를 위해 유생들을 달래려고 한 시도들을 한번 볼까요?

왕이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바다의 한쪽 구석에 처하여 다른나라와 교섭해보지 않은 관계로, 견문이 넓지 못하고 고스란히 제 지조나 지키면서 500년을 내려왔다.

최근에 천하 대세는 옛날과 아주 다르다. 유럽과 아메리카 여러 나라들, 곧 영국,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은 정밀한 기계를 제조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해 세계 수많은 나라들과 조약을 맺어, 병력으로 서로 대치하고 국제공법으로 서로 대치하기를 마치 춘추 열국 시대와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홀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중국도 오히려 평등한 처지에서 서로 조약을 맺으며, 서양을 엄하게 배척하는 일본도 결국 서로 선린 관계를 맺고 통상을 하니 어찌 까닭없이 그렇게 하겠는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논의를 벌이는 사람들은 또한 서양 나라들과 좋은 관계를 이루는 것을 가지고 장차 예수교에 물들 것이라 여긴다. 이것은 물론 유교와 세상 교화를 위해서 매우 걱정스런 일이다. 그러나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은 좋은 관계를 가지는 것이고 종교를 막는 일은 원래 종교를 막는 문제이며, 조약을 맺고 통상하는 것은 만국공법에 근거하고 있을 뿐이다. 설사 어리석은 사람들이 몰래 배운다 하더라도 나라에 떳떳한 법이 있는 이상 처단하고 용서하지 않는데, 무슨 걱정이란 말인가? 숭상하고 물리치는 데는 딴 재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를 배척하고 도구와 기물을 본받는 것은 원래 병행하여도 사리에 어그러지지 않는다. 더구나 강하고 약한 형세가 두르러진 조건에서 그들의 도구와 기물을 본받지 않는다면 무슨 수로 그들의 침략을 막아내며 그들이 념겨다보는 것을 막겠는가. 참으로 안으로는 정사와 교화를 잘하며 밖으로는 이웃 나라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우리나라 예의를 지키면서 각 나라와 대등하게 부강한 나라로 발전시켜 일반 백성들과 함께 태평세월을 누린다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 고종실록, 고종 19년 8월 5일 -

   저들의 종교는 사악하다. 마땅히 음탕한 소리나 치장한 여자를 멀리하듯이 해야 한다. 하지만, 저들의 기술은 이롭다. 잘 이용하여 백성들을 잘 살게 할 수 있다면 농업, 양잠, 의약, 병기, 배, 수레에 대한 기술을 꺼릴 이유가 없다. 종교는 배척하되 기술을 본받는 것은 함께할 수 있는 일이다. 이것이 결코 충돌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 강약의 형세가 이미 큰 격차로 벌어졌다. 만약 저들의 기술을 볻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들에게 모욕을 받지 않고 저들이 엿보는 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 1882년 8월 5일, 고종이 내린 개화 조서 -

5. 1894년 - 동학과 갑오개혁 이후의 위정척사운동

1890년대로 가면서 일본의 침략 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자, 이제 위정척사운동은 통상 반대운동, 개항 반대운동, 조선책략 불태우기 운동을 넘어서게 됩니다. 이 때의 위정척사운동은 곧 <민족적인 항일 투쟁 운동>으로 점차 전환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이제 양반 유생들은 <일본과 서양은 금수가 아니라 만국공법상의 법에 의해 위법한 행위를 하는 상대국>으로 인식하기 시작합니다.

또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폐지된 이후 일부 농민들도 위정척사에 흡수되었고, 그 결과 유인석, 신돌석 등의 평민의병장이 나올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도 마련됩니다. 즉, 1890년대 이후는 위정척사가 항일 의병 운동으로 전환되는 기점이며, 1910년 국권 피탈을 기점으로, 항일 의병 운동은 대일본 폭력 투쟁으로 전개되어 갑니다. 이 부분은 구한말 의병운동 파트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

6. 동도서기의 입장에서 위정척사를 전개한 이들

성리학 유생이라고 해서 모두 위정척사를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이 당시 위정척사의 입장이었던 사람들 중에서도 그 실행 내용에 있어 개화사상과 중간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주장도 한번 볼까요?

형이상을 도라 하고 형이하를 기라고 한다. 도는 형상이 없어 기 속에 머무르니 도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기를 버리고 장차 어디로 갈 것인가. 그러므로 군자의 학은 체(體, 몸)와 용(用, 기술)을 서로 밑천 삼고 기와 도를 같이 익히는 것이다.

- 속음청사, 상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바뀔 수 없는 것이 도(道)이고, 자주 변화하여 고정될 수 없는 것은 기(技)이다. 무엇을 도라 하는가? 삼강(三綱), 오상(五常)과 효제충신(孝悌忠信)을 도라고 한다. 요순, 주공의 도는 해와 별처럼 빛나서, 비록 오랑캐 지방에 가더라도 버릴 수 없다. 무엇을 기라고 하는가? 예악(禮樂), 형정(刑政), 복식(服食), 기용(器用)을 기라고 한다. 당우삼대 조차도 덜하고 더함이 있거늘 하물며 수천년 뒤에 있어서라! 진실로 때에 맞고 백성이 이롭다면, 비록 오랑캐 법일지라도 행할 수 있다.

- 신기선전집 -

기계의 재주와 농수의 책이 진실로 이롭다면 반드시 선택해서 행할 것이며, 그 사람 때문에 양법을 꼭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 고종실록, 고종 18년 7월 18일, 곽기락의 상소 -

군신, 부자, 부부, 장유, 붕유의 윤리는 하늘로부터 얻어서 본성에 부여된 것인데, 천지에 통하고 만고에 뻗치도록 변하지 않는 이치로 위에서 도(道)가 되었습니다. 수레, 배, 군사, 농업, 기계는 백성에게 편하고 나라에 이로운 것으로 밖에 드러나 기(器)가 되니, 제가 바꾸고자 하는 것이 기인 것이지, 도가 아닙니다.

- 승정원일기, 고종 19년 12월 22일, 윤선학의 상소 -

곽기략, 윤선학 등 일련의 유생들은 우리 것을 지키더라도, 서양의 유용한 것들을 꼭 버릴 필요는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성리학의 정신적 사상체계는 민족의 양식으로서 지켜나가고, 서양의 기술은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유교주의 국가를 만들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조선 건국 당시 허영 일파의 실천적 성리학과 비슷합니다.

7. 위정척사운동의 한계점

위정척사운동은 서양이 통상, 개화를 요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그 본질을 알고 대처하려고 하였습니다. 즉, 이 운동은 우리 국익을 위한 애국적인 성격을 가진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단순히 외세를 배격하여 우리 전통의 것을 지키자는 논의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였습니다. 외세의 침략 의도와 나쁜 점은 알았지만, 그 대안은 제시하지 못하였죠. 당시 조선의 가장 큰 과제는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주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였습니다.

위정척사운동은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성리학적 전통질서와 봉건질서를 유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임으로서 격변기의 다양한 사상을 포용하지 못한 점은 아쉽습니다.

또 반외세를 지향했으나, 지배 신분층인 입장으로 적극적인 반봉건 노력이 없었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즉, 농민들이 원하는 것은 신분제 폐지, 양성평등, 토지제도 및 조세제도 개혁 등이었으나 이들은 이러한 문제를 외면하였습니다. 따라서 위정척사운동은 적어도 1880년대까지는 양반 위주의 신분적 운동이라는 오명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정척사운동을 정치, 경제, 사회적인 면에서 분석해 볼까요?

정치적인 분야에서 이 운동은 조선왕조의 전제주의를 긍정합니다.

경제적인 분야에서 이 운동은 지주전호제를 긍정하고, 전통 유교질서의 경제관을 고수하였습니다.

사회적인 분야에서 이 운동은 신분제도를 옹호하고 성리학적 신분관을 그대로 적용하였습니다.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부분에서 위정척사운동은 전근대적이고, 봉건적인 운동입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빈체제에서 복고주의, 정통주의, 보수주의를 외치는 장면이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운동에서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다음 포스트에서는 위정척사운동과 개화세력의 대립이 극에 이르게 된 <임오군란>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반부, 1991
  2. 김광진 외, 1963, 조선경제사상사, 과학원출판사 : 1989, 이성과 현실

  3. 7차 교육과정 근현대사 교과서(대한교과서)
  4. 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구회, 청아출판사, 1988
  5. 한국통사, 박은식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6
  6. 누드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이투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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