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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화파는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1. 개화란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번 파트에서 이야기할 내용은 개화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흔히 개화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 배경만 간단히 설명하고 갑신정변을 주로 다루곤 합니다. 하지만, 개화파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은 이상 그 기원이 있었겠죠? 자 지금부터 전개할 이야기는 개화파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부터입니다.

개화파를 알기 위해서는 <개화>란 말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객이 나에게 물었다. <개화는 무엇이며, 어떠한 일을 말하는 것인가?>

내가 답하였다. <만물의 뜻을 깨달아 천하의 일을 이루는 것이며(개물성무 : 開物成務),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바로잡는 것(화민성속 : 化民成俗)이 바로 개화이다.>

- 황성신문 논설, 광무 2년(1898) 9월 23일 -

무릇 개화란 인간의 온갖 만물이 가장 아름다운 경지에 이르는 것을 일컫는데, 개화에는 인륜 개화, 학술 개화, 정치 개화, 법률 개화, 기계 개화, 물품 개화가 있다. 인륜 개화는 천하만국을 통하여 그 동일한 규모가 천만년을 지나도 장구함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정치 이하의 여러 개화란 시대에 따라서 변개하기도 하고 지방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옛날에는 맞았지만 지금은 맞지 않으며, 저쪽에는 좋지만 이쪽에는 좋지 않은 것도 있어, 곧 고금의 형세를 살피고 피차 사정을 비교하여 장점을 취하고 단점을 버리는 것이 곧 개화의 큰 도인 것이다.

- 서유견문 제 14편, 개화의 등급 -

개화란, 백성을 다스리고, 풍속을 바로잡으며, 인륜을 바로세우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장점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화에는 인륜, 학술, 정치, 법률, 기계, 물품에 대한 개화가 있다고 말합니다. 더 간추리면, 인륜(도덕), 정치(통치술), 기술(물질문명)에 대한 3가지가 개화에 대상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 중에서 동양의 인륜은 지키고, 서양 기술만 받아들이자는 입장을 <동도서기론>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보통 개화파하면 인륜, 정치, 기술 등 모든 서양 문명의 장점을 취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동도서기적인 관점의 개화는 온건한 개화파라고 구분합니다. 실제 모든 것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은 변법적 개화파인 김옥균 등 급진적 개화파였죠.

2. 개화파의 기원 1 - 조선 시대 낙론에서 이어지는 통상 개화론자들

개화파의 기원을 찾을 때 가장 먼저 고려해야 할 부분은 <북학사상>에서 기원하는 통상 개화론자들입니다. 이들은 그 인맥과 사상이 상당히 깊은 고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먼저 방금 급조해서 만든 다음 표를 한번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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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표를 제시한 이유는 개화사상의 연결고리가 위로 거슬러 올라가면 개화파부터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개화사상의 근간이 되는 기원적인 이론은 이미 조선시대 <호락논쟁> 때의 낙론에서 비롯됩니다. 낙론과 개화사상이 연결고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낙론의 개방적인 이론이 훗날 개화사상으로 이어지는 기원적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할 뿐입니다. 낙론에서는 <인물성동론>을 내세워서 명을 멸망시킨 오랑캐 국가(여진의 청나라)도 하나의 국가로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낙론적인 입장은 중상학파 실학자들에게 계승되어 <청과 상공업을 통한 무역>을 적극 추구하는 것을 낯설게 생각하지 않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 때의 실학자들이 활동했던 시기가 정조 때이지요. 그러나, 정조 이후 세도정치를 겪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겪으면서 이들의 대외 개방적 사고는 자취를 감추는 듯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시기를 겪으면서도 개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대원군의 정책에 반발하여 외국의 통상의 이로움을 주장하면서 외국 저서들을 적극 유입한 이들이 있었죠. 바로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로 이어지는 통상 개화론자들입니다. 비록, 쇄국정책의 국론에 밀려 이들의 뜻은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이들은 개화의 선구자 역할을 합니다. 만국공법, 영환지략 등의 개화 저서들이 이 때 들어오고, 이 책들은 훗날 1880년 조선책략의 유입과 함께 개화사상을 이끌어가는 사상적 기반이 됩니다.

이러한 연결고리를 통해 개화파들은 성장하였고, 대원군 이후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개화가 곧 <국가 주요 정책>으로 떠오른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사상적 측면과 함께, 인맥에 있어서도 개화파와 기존 북학파가 연결이 된다는 점입니다. 즉 북학파인 박지원의 제자가 박제가이고, 박지원의 손자가 통상개화론자인 박규수입니다. 오경석과 유홍기같은 중인들도 이덕무와 같은 북학파들의 저서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들의 인맥이 훗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의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즉, 결론 내리자면 우리나라 개화파들의 등장은 낙론부터 북학사상, 통상개화론에 이르는 사상적 연결고리, 인맥적 연결고리가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 만 합니다.

3. 개화파의 기원 2 - 청과 일본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

개화파가 내부적인 성장만을 거친 것은 아닙니다. 더 큰 요인을 따지자면, 당시 국제 정세의 긴박함을 들 수 있습니다. 당시 우리의 주변국인 청과 일본은 각각 개항을 통해 변혁을 거치고 있었습니다.

청은 영국과의 아편전쟁 이후 서양 무기의 우수함을 알고 양무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고 그 중심인물은 <이홍장>이었습니다. 이홍장은 중국 핵심 지도층은 아니지만, 자신의 근무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서양식 기술을 도입하여 <중국의 정신에 서양의 기술을 입힌다>는 중체서용적인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개화파들은 이홍장과 많은 교류를 통하여 서양 기술의 우수성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홍장과 연결되어 민씨 정권에서 협력한 일련의 개화파들이 중체서용과 유사한 동도서기를 주장하는 <온건개화파>무리를 이룹니다.

또 당시 일본 역시 미국에 의해 개항을 하여 <메이지유신>을 겪었고, 변법적인 개화운동을 추진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김기수, 김홍집 등의 수신사를 보내어 일본의 발전상황을 기록하고 그들의 발전과정을 배우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강화도 조약 이후 일본의 침략적인 행보 속에서 일본의 문물은 청의 문물보다 크게 신경쓰지는 못하였습니다. 민씨정권의 개화는 이홍장의 조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일본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입장의 전면적 개화는 민씨정권이 전면적인 청의 간섭을 받게되는 임오군란 이전에는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4. 개화파가 추진한 한국 근대화의 모델

개화파는 서구식 발전모델을 그대로 적용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추진하고, 부국강병을 달성하려 하였습니다. 개화파들은 강화도 조약을 맺고 난 이후인 1878년 충의계를 결성하고, 본격적으로 개화 정책을 시작하려 하였습니다.

개화파가 추구한 서구식 모델이란, 서구의 산업혁명을 모델로 하는 <부르조아지적인 부국강병>이었습니다. 개화파는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가진 지주층을 서구의 <중산계급>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따라서 지주제를 발전시켜 근대적인 농법을 발전시키고, 지조법을 개혁하여 조세제도의 합리화를 통해 지주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을 근대화로 인식하였습니다.

또, 상공업에 있어서는 서양식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합좌회사를 늘려 <민간자본주의>를 실현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어느 정도 상공업에 기여할 수 있는 계층을 자본가로 육성하여 그들에게 특혜를 주고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이 개화파가 추진한 근대화의 내용이었습니다.

따라서 갑신정변이나, 김홍집 내각의 개혁안을 보아도 농민을 위한 토지개혁이나, 노동법 등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개혁들은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여 새로운 부르조아 계급을 양산하기 위한 내용들을 담고 있었으니까요.

5. 1880년대 개화파가 분화되다.

1880년 조선책략이 유입된 이후, 임오군란을 겪으면서 개화파는 분화되기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세력은 강화도 조약 이후 계속적인 개화 통상을 요구하였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등 관료세력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홍장의 충고를 받아들여 <몸은 우리의 것이되,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들인다>는 관점에서 동도서기론적인 개화를 추진합니다. 즉, 이들이 추구한 개화의 모델은 중국의 양무운동이었죠.

김홍집 내각은 민씨정권에서 일하는 관료세력들로서 이홍장 등 청의 세력과 타협하는 사대적인 자세를 가지고 기존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개화방법은 국가 체제를 건드리지 않고, 조금씩 서양의 문물을 흡수 수용하는 점진적인 방법이었습니다.

두 번째 세력은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홍영식 등으로 대표되는 급진적 개화파였습니다. 이들은 조선책략이 유입된 이후, 조선책략의 내용대로 이행되는 사항이 더디게 이루어짐을 비판하였습니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간섭이 심화되어 개화정책이 후퇴하자, 청의 고문인 뮐렌도르프 등과 잦은 마찰이 있었습니다. 급진개화파는 임오군란 이후 고종과 직접 접촉하면서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습니다.

이들이 추구한 개화는 서구의 기술과 사상을 전면적으로 도입하여,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국왕중심의 입헌군주제, 즉 내각제도를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기존 세력인 민씨정권을 비판하고, 민씨정권의 개화파들과 대립하였습니다. 특히 청에 대한 사대외교를 망국의 외교라고 비판하면서 자주외교를 통하여 스스로 개화할 힘을 키울 것을 주장합니다. 이들은 청의 정치, 재정 고문들과 차관을 빌리는 문제로 대립하였고, 이것이 훗날 갑신정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배경이 됩니다.

즉 정리하자면, 온건 개화파와 급진개화파가 분화된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민씨정권에 대한 인식의 차이입니다. 민씨 정권의 개화정책을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가, 소극적인 흉내내기로 보는가에 대한 차이입니다.

두 번째로는 외교정책에 대한 차이입니다. 조선책략에서 말한 <러시아를 견재하기 위해 청, 일본, 미국과 힘을 모아야 한다>라는 부분에서 온건개화파는 <청>에 중심을, 급진개화파는 <일본, 미국>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개화의 방법상의 차이입니다. 온건개화파는 <인륜, 정치방식>은 그대로 두고 <서양기술>부터 점진적으로 받아들이자는 입장이었습니다. 급진개화파는 <정치방식과 서양기술>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자는 변법적인 입장이었습니다.

여기까지 간단히 다루고 다음 파트에서는 갑신정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겠습니다. 오늘 이야기는 제가 적으면서도 지루한 이야기였네요.

- 이 글을 위해 참고한 역사도서 모음

1. 한국사특강, 서울대학교 출반부, 1991
  2. 한국사통론, 변태섭 저(4개정판), 1997

  3. 7차 교육과정 근현대사 교과서(대한교과서)
  4. 이야기 한국사, 교양국사연구회, 청아출판사, 1988
  5. 한국통사, 박은식 지음, 김승일 옮김, 범우사, 2006
  6. 누드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이투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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