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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고사 이야기

<홍일점>이란 말이 과연 아름다운 여성을 지칭하는 말일까?

수많은 꽃 사이에 눈에 띄는 색이 있으니...

우리는 흔히 수많은 남성 가운데 서 있는 아름다운 여성 한 명을 홍일점이라고 한다. 그럼 홍일점이라는 말은 누가 처음 쓴 것일까? 그리고, 그 말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의미와 같은 것일까?

그럼 한번 따져보자...

그 말이 처음 등장한 문헌을 따져 올라가면 중국 송나라의 변법가 왕안석임을 알 수 있다.

왕안석이 살던 중국 송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 중에서 가장 허약한 왕조였다. 전쟁과 반란의 역사를 끊어 버리고자 송나라 태조가 실시한 <문치주의> 때문에, 송의 국방력은 너무도 허약했다. 송의 국방력이 허약한 것과 비례하여 주변국들은 송나라를 업신여기고 국력을 키워나갔다.

송나라는 역대 중국 왕조가 겪은 치욕중에서 가장 큰 치욕인 정강의 변을 겪게 된다. 중국 황제가 이민족에 의해 끌려가고, 주변 민족에게 세금을 바치면서 겨우 왕조를 유지해나간 것이다. 김용의 원작소설로 알려진 사조영웅전도 바로 이 정강의 치욕에서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거란의 요나라, 탕구트족의 서하, 여진족의 금나라, 훗날 몽골족의 원나라까지.... 송나라는 주변국에 의해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하였다.

그러나, 송나라의 보수세력들은 하나같이 일신의 안위를 챙기기에 급급하였다. 주변국에 내야 할 세금은 백성들의 고혈이었지만, 백성들을 위한 획기적인 부국강병책은 없었다.

송의 황제 휘종과 흠종이 이민족의 군대에 의해 잡혀가고 송나라(북송)는 곧 망한다. 그러나, 정강의 변보다 앞서 신종 치세 때 등장한 왕안석은 약해빠진 송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였다.

  왕안석은 국가를 바로 세우기 위한 법을 바꾸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려고 했다. 그는 전통적 유학사상에 얽매여서는 국가의 발전이 없다고 생각했다. 굳이 공자 사상에만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다. 필요에 따라서는 요순시대의 초기 태평사상과 춘추전국시대의 법가사상도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왕안석은 뜻을 같이하는 이들과 함께 개혁을 추진해 나가려고 했다. 그의 진보적인 정당을 역사에서는 <신법당>이라고 부른다. 지금으로부터 천년전에도 과감한 진보적 신당이 존재했던 것이다. 
   
   신법당은 기존 사회질서를 유지하려는 <구법당>과 대립하면서 왕안석은 백성들을 위한 과감한 대책들을 쏟아내었다. 송나라의 시기는 중국 역사상 가장 허약한 시기이면서도, 가장 활발하게 붕당정치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신법당은 끊임없이 개혁안을 던져놓았고, 구법당은 신법당의 개혁이 부당하다는 것을 조목 조목 반박하였다. 이 두 당의 공존 시기에는 각자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등장한 수많은 학자와 문예가들이 있었고, 제법 유명한 시인과 소설가들도 구법당에 들어가 왕안석과 논쟁을 하곤 하였다.

신법당은 국가 인력 확충을 위해 과거제도를 개방적으로 확대하고, 신분보다는 태학의 유학생 등 지식을 우선으로 하는 인재 등용을 논의하였다. 또 가난한 농민과 상인들에게 싼 이자로 농기구와 물자를 대여해주는 획기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일반 농가에 군용말을 키우게 하여 국방을 강화시키는 대신 농민들에게 물자를 제공하자고 하였으며, 농촌 사회를 군 행정구역과 일치시켜 국방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당대 유명한 지식인이자 학자들인 사마광, 구양수, 소식 등은 왕안석의 획기적인 방법을 비판하였다. 기존의 사회 질서를 벗어난 개혁은 무리가 따른다는 것이었다.

왕안석은 좌절하였다.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자신의 본문을 다하지도 못하면서 현실에 안주하려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보수의 가치는 <도덕성>이다.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자들이 인정받기 위해서는 도덕적으로 청렴하다는 인식이 있어야 일반 민중들이 수긍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라가 부패하고 망해가는데 도덕성도 없는 보수에게 무엇을 믿고 맡긴다는 것인가?

그렇게 망가진 보수주의자들이 왕안석을 서슴없이 비판한다.

  - 모나게 튀어나온 못이 누군가를 찌른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무엇을 바꾼다는 말인가? -

왕안석은 자신의 개혁 사상이 결국 좌절될 것임을 알고 비통해했다. 국왕의 신임이 얻고 있는 동안에야 개혁이 가능하겠지만, 왕이 바뀌고 자신이 죽고 난다면 누가 또 굳이 힘들게 기존의 질서를 바꾸려고 하겠는가?

왕안석은 자신의 시 <석류>에 <홍일점>이라는 말을 남긴다.

수없이 푸르고 푸른 것들 중에서

홍일점이 있구나.

사람을 움직이는 아름다운 색은

생각해보면 많은 것이 아니구나.

수많은 꽃 사이에 눈에 띄는 붉은 점이 있으니 눈에 띄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렇게 눈에 띄는 색은 그리 많지가 않다. 붉은 점이 많았다면, 흔했다면 관심을 받지도 않았을 것이다. 왕안석이 생각한 홍일점은 수많은 꽃 중에 눈에 띄는 하나의 꽃이 아니라, 하나밖에 없어서 질투를 받아야 하고, 홀로 걸아야 하며, 그 색이 바래지면 더 이상 주목받지 못하는 그런 하나를 말한 것이 아닐까?

왕안석이 사라지면, 더 이상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 붉은 색들이 많았다면, 붉은 색들이 푸른 색들을 압도한다면... 세상을 바뀌지 않을까?

갑작스럽게 색깔론이 생각난다. 우리 사회에서는 모두가 푸른 색이여야만 한다. 하나라도 붉은 색이 있어서 튄다면, 빨갱이란 소리를 듣는다. 국회에 가보면 아직도 색깔론이 판친다. 빨갛다는 것은 하나라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푸른 것과는 별개의 것이라서 탄압받는다.

왕안석 역시 자신만이 붉기 때문에 슬퍼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파란 식물 속에 빨간 꽃을 홍일점이라고 말한다. 홀로 고고하니 아름다울 것이라고 말한다. 남성들 사이에 유독 아름다운 여성이 있다면 홍일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왕안석이 말한 홍일점도 그런 것이었을까?

결국 송나라는 왕안석이 죽은 이후 얼마 못가 금나라에게 국토의 절반을 강탈당하고, 몽골제국에게 멸망하게 된다. 그 북방민족들은 왕안석이 그토록 가지고자 했던 강력한 기마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결과를 생각해본 왕안석이 시에서 남긴 <홍일점>은 아름다운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소연할 곳 하나 없이 외로운 자신의 개혁사상에 대한 비통함을 적은 것이 아닐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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