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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명(明 1368 ~ 1644), 청(淸 1616 ~ 1911)
  원말에 한족의 주권회복을 위해 백련교도나 홍건적의 난 등 수많은 봉기가 있었다. 명의 태조인 홍무제(洪武制) 주원장 역시 이러한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일단 명이 들어서고, 다시금 중국을 한족이 지배하게 되자, 명은 지난 원나라 때 남아있던 원의 풍습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과거제를 부활하여 한족 전통 문화를 부흥하고자 하였으며, 재상제를 폐지하고, 율령 정비, 이갑제(里甲制)를 통해 황제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새로 호적인 부역황책과 토지대장인 어린도책(魚鱗圖冊 : 물고기 비늘과 같은 그림의 책)을 만들어 역과 토지세를 부과하였다. 명이 베이징으로 천도해서 보다 중국적인 면모를 갖춘 것은 성조 영락제 때였다. 영락제는 중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베트남을 공략하고 정화를 통한 원정을 실시하였다. 정화의 원정은 1405 ~ 1433년 7차에 걸친 항해 원정을 말한다. 동남아, 아프리카 동부해안에까지 닿았으며 이러한 활동은 중국의 조공질서를 명확히 하고, 훗날 화교의 동남아 진출이 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대규모의 원정은 단지 중화주의적인 조공질서를 만들었을 뿐이며, 어느 한 곳 침략해서 식민지화 한 적은 없다. 명은 환관 세력이 점차 득세를 하고 북로남왜(북쪽은 유목민족, 남쪽은 왜구)로 인해 어려움을 겪다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더욱 국력이 소모되었다가 이자성의 난으로 결국 멸망하였다.
  은 처음에는 후금(後金)이라는 이름으로 여진의 누르하치가 팔기 조직을 통해 만주 지방을 지배하면서 성장하였다. 처음 국호를 청이라고 정한 것은 태조로, 태조는 조선을 침략해 정묘, 병자호란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세조는 이자성을 몰아내고 베이징에 입성하여 중국 통치의 기틀을 다졌다. 청에서 가장 손꼽아 다루는 것은 성조 강희제와, 세종 옹정제, 고종 건륭제이다. 우선 성조 강희제는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정상공의 난을 정벌하여 타이완을 복속시켰다. 또한 중국 최초의 근대식 조약인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1689)하여 러시아와 국경 문제를 명확히 했다. 그 외에도 외몽골, 칭하이, 티베트를 정복하여 나라를 굳건히 하였으며, 문자의 옥을 통해 사상 탄압을 하기도 하였다(문자의 옥은 강희, 옹정, 건륭제 때 계속 지속된다). 세종 옹정제는 군기처를 독립시키고 러시아와 카흐타 조약을 체결하였다. 고금도서라는 백과사전을 편찬하였으며, 크리스트교가 중국의 문화를 무시하고 포교를 시작하자 크리스트교 포교를 금지시키기도 하였다. 고종 건륭제에 이르러서는 청의 최대의 영토에 달해 만주, 몽고, 한, 위구르, 티베트 지방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고금도서를 보강한 사고전서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중농 정책으로 인해 농업은 여러 발전을 하였다. 관개 시설의 확대, 농업 기술의 향상, 품종 개량을 통해 농업 생산력이 증대하였다. 쌀 외에도 목화 생산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으며, 고구마, 옥수수, 땅콩 등의 외래 작물이 전해져오기도 했다(* Tip(추가사항)  : 고등학교 국사에선 이러한 외래작물이 유입된 시기를 보통 임진왜란 전후 혹은 이후로 본다). 과거 중국과 명, 청대의 쌀 생산지는 매번 변화하였는데 송원대에는 양쯔강 하류에서, 명대는 양쯔강 중류에서 청대에 와서는 쓰찬 지방에이 쌀의 주산지가 되었다( * Tip(추가사항, 참고) : 오늘날 중국의 쌀 생산지는 만주지역이다. 원래 만주는 농경 / 목축 / 유목이 전부 가능한 비옥한 곳이긴 하였으나, 대규모 농경지로 변화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 우리니라 사람들이 이주하면서부터였다. 만주 일대의 농경 기술은 대부분 조선족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수공업 역시 크게 발전하였다. 명대에는 면직물과 견직물의 직물공업이 16세기 이후 양쯔강 하류지역에서 발달하였는데, 기존에 농민들에 부업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실학의 영향을 받아 이젠 공장을 갖춘 수공업으로 면모하여 자본주의의 맹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 명에서는 과거 원과 달리 초기에는 조공무역의 형태를 띠다가 16세기 중엽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대상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으며, 이들은 농산물과 직물, 차, 도자기 등을 수출하여 은을 벌여들었다. 이들 역시 동업 조합인 공소와 동향인 조합이었던 회관을 운영하였다. 명의 수취제도는 기본적으로 양세법을 따랐다. 하지만,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명에서는 은이 가장 구하기 손쉬운 귀금속이 되었으며, 그에 따라 명 정부는 은을 본위로 하는 경제체제를 확립하고, 잡다한 세금을 지세(토지세)와 정세(인두세)로 묶어 은으로 납부하는 일조편법을 시행하였다.
  명, 청대는 여러 분야에서 경제력이 향상되는 시대로 서민 경제 또한 같이 발맞춰 성장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서민경제의 성장은 서민의식의 확대와 성장을 야기하여 서민 운동을 야기하였다. 몇 가지를 소개하자면, 도시에서 일어난 노동자의 권익 옹호 운동인 민변(民變)과 소작인이 소작료의 경감을 요구하는 항조(亢燥) 운동, 노예의 신분 해방운동인 노변(奴變)과 명나라 때 방직 공장에서 직공을 중심으로 부당 징세에 항거한 직용(織傭)의 변(變)(1601)등이 있다.
  청대에는 대상인이 자본을 축적하여 저장 재벌로 성장하였으며, 상인 무역 조합인 방이 있었다. 청대에는 명대의 자유로운 무역과는 달리 특허를 가진 상인만이 무역을 할 수 있었는데, 이를 공행 무역이라고 한다. 18세기 이후에는 광저우만 개항되기도 했다. 청 왕조가 비록 공행을 통해 무역을 했다고는 하지만, 중국의 상품은 값비싼 것이었으며, 청은 이로 인해 막대한 은을 얻었다. 청대 역시 은을 본위로 하는 세금제도가 만들어졌는데, 18세기 초 세종 옹정제는 정은(인두세)를 지세에 포함시켜 징수하는 지정은제가 그것이다. 지정은제는 세금이 일원화 되었다는 의의와 함께 호적 상에 인구가 급증하는 결과를 낳았다.
  명, 청대에 사회 지도층은 향신(鄕紳) 혹은 신사(紳士)였다. 이는 생원(지방학생), 감생(국자감 학생), 거인(향시 합격자), 퇴직 관리들을 일컫는 말로, 민중교화, 각종 사업, 조세 징수 등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은 한족의 전통문화를 이어가기 위해 초기에는 성리학을 관학으로 삼았다. 성리학의 관학화는 유학의 형식화를 초래했기 때문에 명 중기에는 서민의식의 성장과 함께 양명학이 등장하게 되었다. 양명학은 양명 왕수인이 정리한 것으로, 마음이 즉 이치(심즉리心卽理)라는 내용과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한 실천적인 유학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양명학도 명나라 후기 때는 비판 받았으며 『본초강목』등의 실학이 발달하여 수공업 등에 영향을 끼쳤다. 명대에는 『삼국지연의』, 『서유기』, 『수호지』, 『금병매』 등이 완성되어 서민문학이 발달하였으며(* Tip(추가사항) : 삼국지연의, 서유기 등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원대이고, 완성된 것은 명대이다. 헛갈리지 말자.), 예수회 선교사였던 마테오리치에 의해 곤여만국지도와 『천주실의』가 전해졌다. 곤여만국지도는 중국인의 세계관 확대에 기여하였다.
  청대에는 문자의 옥, 금서령 등으로 학문의 현실 비판 기능을 억누르자 고전의 객관적인 해석을 근거로 실증적 연구를 하는 고증학이 발달하였다. 고염무, 황종희, 왕부지 등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강희자전』,『고금도서집성』(* Tip(추가사항) : 조선시대 후기 정조는 사고전서가 곧 출판된다는 말에 사람을 시켜 사고전서를 구입하려고 하였으나 사고전서가 늦게 나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고금도서를 사들였다고 한다. 시기상으로 차이가 있으나, 그렇게 정조 때 고금도서가 들어왔다),『사고전서』 등이 출간되었다. 고증학이 형식화하자, 그에 대한 반발로 공양학이 등장하였다. 공양학은 진보적 발전 사관을 가지고 훗날 변법 자강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된다. 청대에는 『도화선전기』,『장생전전기』와 같은 희곡과 구어체 소설인 『홍루몽』, 『유림외사』 등의 서민문화가 발달하였고, 선교사에 의해 서양과학이 전래되기도 했다. 하지만 건륭제 때 크리스트 교리와 중국 전통문화가 마찰이 일었으며, 이를 전례 문제라고 한다. 이러한 전례문제로 인해 더 이상 크리스트교의 포교는 금지되었으며, 청은 쇄국정책을 펼쳤는데, 이는 세계사 흐름에 뒤처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Tip(추가사항) : 명과 청은 크리스트교에 대해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명대의 대표적인 선교사는 마테오리치였으며, 아무런 마찰이 없었다. 반면 청대의 대표적인 선교사는 조선 효종의 형인 소현세자와 상당히 친분이 있는 인물인 아담 샬로,  전례문제 때문에 청대의 선교사들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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