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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김유신을 유인하려 한 백석의 계책 김유신을 유인하려는 백석의 계책 유신공은 진평왕 17년 을묘년에 태어났다. 유신공은 7요(북두성 : 해,달,화,수,목,금,토)의 정기를 타고났으므로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고, 신기하거나 이상한 일이 많았다. 나이 18세 되던 임신년에 검술을 닦아 화랑 국선이 되었다. 이 때 백석이라는자가 있어 어디서 온지는 모르나 여러 해 동안 낭도 중에 속해 있었다. 낭은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는 일로 밤낮으로 깊이 도모하였은데 백석이 그 도모함을 알고 낭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제가 공과 더불어 몰래 저들을 염탐하고 싶사옵니다. 그런 뒤에 도모하는 거이 어떠실는지요]라 하였다. 낭이 기뻐하여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나 고개 위에서 막 쉴 때 두 여자가 나타나 낭을 따라왔다. 골화천(영천)에 이르러 유숙하매, 또 .. 더보기
백제 멸망에 대한 사료 백제 멸망에 관한 사료 3월에 당 고종(高宗)이 좌무위대장군(左武衛大將軍) 소정방(蘇定方)으로 신구도행군대총관(神丘道行軍大摠管)을 삼고 김인문(金仁問)으로 부대총관(副大摠管)을 삼아, 좌요위장군(左饒衛將軍) 유백영(劉伯英) 등 수군과 육군 30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백제를 치게하고, 왕(무열왕)으로 우이도행군총관(?夷道行軍摠管)을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응원하게 하였다. 5월 26일에 왕이 유신, 진주, 천존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장에 다다랐다. 소정방은 내주에서 출발하니 전함이 천리에 뻗쳤는데 동쪽을 향하여 순류를 타고 내려왔다.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으로 병선 백척을 이끌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게 했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더보기
만파식적 만파식적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의 이름은 정명(政明)이요 성은 김씨다. 개요(開耀) 원년 신사(辛巳) 7월 7일에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를 위하여 동햇가에 감은사(感恩寺)를 세웠다. 절의 기록에 이런 말이 있다. "문무왕(文武王)이 왜병을 진압하려 하여 이 절을 지었으나, 역사를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왕위에 올라 개요 2년(682)에 역사를 마쳤는데, 금당 계단 아래에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어 두었다. 이것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돌아다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개 유언으로 유골을 간직한 곳은 대왕암(大王巖)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感恩寺)라 이름했으며 후에 용이 나타난 곳을 이현대(利見臺)라 한 것 같다. 이듬해 임오(壬午) 5월 초하루에 해관(海官) 파진.. 더보기
화랑도의 기원 - 원화, 용화향도 화랑도의 기원 진흥왕은 천성이 풍미하여 신선을 숭상하고, 민가의 아름다운 처녀를 가려서 원화로 삼았다. 원하는 무리를 모아 그 중에서 인물을 뽑고 효제와 충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였다. 이에 남모와 교정 낭자를 원화로 뽑으니, 모여든 무리가 300-400 명이나 되었다. 교정은 남모를 질투한 나머지 술자리를 베풀어 남모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후에 몰래 북천으로 메고 가서 돌을 매달아 빠뜨려 죽였다. 무리는 남모가 간 곳을 알지 못해 슬피 울면서 헤어졌다. 이로 인하여 준정은 사형에 처해지고 무리는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자 왕은 영을 내려 원화를 폐지하였다. 그 뒤 여러 해만에 왕은 국가를 흥하게 하려면 반드시 풍월도를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여, 양가의 덕행 있는 사내를 뽑아 .. 더보기
신라의 식읍, 녹읍 신라의 식읍과 늑읍 좌사록관은 문무왕 17년에 두었다. 우사록관은 문무왕 21년에 두었다. - 삼국사기 4권 38, 잡지 7, 직관 상 - 교령을 내려 내외관의 녹읍을 없애고 해마다 조를 차등있게 하사하는 것을 항식으로 삼도록 하였다. - 삼국사기 권 8, 신라본기 8, 신문왕 9월 정월 - 내외 군관의 월봉을 없애고 녹읍을 다시 지급하였다. -삼국사기 권 9 신라본기 9, 경덕왕 16년 3월 - 무열왕 4년(657년) 태종대왕이 김인문을 압독주(경산 지역)총관으로 제수하였는데, 이에 장산성을 쌓아 요새로 만드니, 태종이 그 공을 기록하고 식읍 300호를 주었다. - 삼국사기 권 44 열전 4, 김인문 - 문무왕 8년(668) 문무대왕은 인문의 영특한 계략과 용맹한 공로가 특이하다 하여 죽은 대탁각간 박.. 더보기
김유신과 백석에 관련된 일화 김유신과 백석의 일화 유신공(庾信公)은 진평왕(眞平王) 17년인 을묘년에 출생하였는데, 7요(七曜)의 정기를 타고 났으므로 등에 칠성(七星)의 무늬가 있고 또 신기하거나 이상한 일이 많았다. 나이 18세 되던 임신년(壬申年)에 검술을 닦아 국선(國仙)이 되었다. 이 때 백석(白石)이라는 자가 있어 어디서 온 지도 모르나 여러해 동안 낭도 중에 속해 있었다. 낭(郎)은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는 일로 밤낮으로 깊이 도모하고 있었는데 백석이 그 도모함을 알고 낭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제가 공과 더불어 몰래 저들을 먼저 염탐하고 싶사옵니다. 그런 연후에 도모하는 것이 어떠실른지요."라 하였다. 낭이 기뻐하여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나서 고개 위에서 막 쉬고 있을 때 두 여자가 나타나 낭을 따라 왔다. 골화.. 더보기
금관가야의 멸망과 식읍(부체제)의 등장 금관가야의 병합기 법흥왕 19년(532)에 금관국주 김구해(金仇亥)가 왕비 장남 노종(奴宗), 둘째 덕무(武德), 세째 무력(武力)의 세 아들과 함께 국고의 보물을 가지고 항복해 오니, 왕은 이들을 예로서 대접하고 상등의 지위를 주고 그 본국을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그 아들 무력은 조정에 벼슬하여 각간에까지 이르렀다. - 삼국유사 - 자료 참조 : 법흥왕 대에 금관가야가 병합되는데, 이 사료에는 몇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신라는 금관가야를 병합하면서 그 일족을 흡수한 사실입니다. 왕이 이들을 예로서 대접하고 지위를 준다는 것은, 가야국에 대한 예우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더 연구되어야 알겠지만, 신라 통일기에 금관가야계 김씨인 김유신 등이 신라 공신으로 성장하였다가, 중대 이후 골품제의 한계.. 더보기
신문왕 대 일통삼한의식의 형성 일통삼한의식의 형성 왕은 군신과 더불어 의논한 후에 당의 조칙에 답하였다. 생각건대 선왕 춘추는 자못 어진 덧이 있었고, 더욱이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일통삼한을 하였으니, 그 공적을 이룩한 것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12년조- 사료해석 : 통일신라시기부터 진정한 민족의 형성이라고 보는 이유는 통일신라시대에 의식이 싹뜨기 때문입니다. 일통삼한이란, 이전 3국이 각각 분립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가진 것과 대비되어지며 드디어 우리 민족이 역사적인 관점에서 하나라는 의식을 스스로 자각하게 되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