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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

간략하게 정리하는 삼국통일의 과정 삼국통일의 과정 1. 6c 신라의 성장과 백제의 부흥 노력 6세기에 신라가 성장한 배경은 551년 신라의 한강 점령입니다. 신라는 나제 동맹을 통해 공동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탈환했음에도 불구하고, 진흥왕이 백제 성왕을 배신하여 한강을 독차지했습니다. 본래 한강의 남쪽을 보장받기로 했던 성왕은 격분한 나머지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진흥왕을 공격하다가 관산성에서 왕이 전사하는 위기를 맞습니다. 이후 백제는 왕권이 약화되고, 연, 백, 사씨 등 8대성이 정치를 이끌어나가는 귀족체제가 됩니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하여 당항진에 당항성이라는 요새를 건축합니다. 이것은 곧 중국과의 직접 교통로를 확보함을 의미합니다. 신라의 한강유역 차지는 고구려, 백제로 하여금 여제동맹을 맺게 하는 결정적 원인을 제공.. 더보기
통일 후 나당전쟁 - 신라와 당과의 갈등 고조 통일 후 당과의 갈등 급찬(級瑗) 기진산(祇珍山) 등을 당에 보내어 자석 두 상자를 바치고, 또 각간(角干) 흠순(欽純)과 양도(良圖)를 당에 보내어 사죄하였다. - 삼국사기 6, 신라본기 6, 문무왕 9년 5월 - 문무왕이 고구려의 반란 무리들을 받아들이고, 또 백제의 옛 땅을 점거하여 관인을 보내 지키게 하니, 당 고종이 크게 노하여 왕의 관작을 박탈하고, 당시에 당의 경사(京師)에 있던 왕의 아우 우요위원외대장군임해군공(右饒衛員外大將軍臨海郡公) 인문(仁問)을 세워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고, 좌서자동중서문하삼품(左庶子同中書門下三品) 유인궤(劉仁軌)로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摠管)을 삼고, 위위경(衛尉卿) 이필(李弼)과 우령군대장군(右領軍大將軍) 이근행(李謹行)으로 부관을 삼아 군사를 발하여 신라를 .. 더보기
김춘추와 당태종간의 외교 김춘추의 대당외교 정관(貞觀) 22년(진덕여왕 2년; 648년)에 진덕(眞德)이 그의 아우인 국상(國相) 이찬간(伊贊干) 김춘추(金春秋)와 그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와 조근(朝覲)하였다. 조서를 내려 춘추에게는 특진관(特進官)을 제수하고, 문왕에게는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을 제수하였다. 춘추가 국학(國學)에 나아가 석전(釋奠) 및 강론(講論)의 의식을 참관하겠다고 청하므로, 태종은 이로 말미암아 친히 지은 《온탕(溫湯)》·《진사비(晋祠碑)》와 새로 편찬한 《진서(晋書)》를 내려주었다. 김춘추 등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 3품 이상의 관원으로 하여금 전별연(餞別宴)을 베풀어 주는 등 예우가 극진하였다. - 구당서 199 상, 열전 149 상, 동이 신라 - 왕이 이찬 김춘추와 그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어 .. 더보기
태종 무열왕의 등극과 전제왕권 태조 무열왕의 등극 진덕왕(眞德王)이 돌아가매 뭇 신하들이 알천(閼川) 이찬(伊瑗)에게 섭정(攝政)을 청하였더니 알천이 짐짓 사양하되 "나는 나이 늙고 이렇다할 만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春秋公)만한 이가 없으니 그는 실로 제세(濟世)의 영웅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군신(群臣)이 드디어 춘추를 추대하여 왕을 삼으니 춘추는 재삼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 사료해석 : 645년 상대등에 취임한 비담은 647년 선덕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고 염종 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 일으킨 반란이므로 그 규모가 컸고, 사태도 매우 위급하게 전개되었죠. 반란의 와중에 선.. 더보기
김춘추의 외교술 발전 - 고구려, 당에 대한 외교 김춘추의 고구려 외교 11년…7월에 백제왕 의자(義慈)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나라 서쪽의 40여 개 성을 공취(攻取)하였다. 8월에 또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項城)을 취하여 당으로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하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어 당 태종(唐太宗)에게 급한 사정을 고하였다. 이 달에 백제 장군 윤충(允忠)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해 빼앗아가니 도독(都督) 이찬(伊瑗) 품석(品釋)과 사지(舍知) 죽죽(竹竹)·용석(龍石) 등이 전사하였다. 겨울에 왕이 장차 백제를 쳐서 대야(大耶)의 일을 보복하려 하여, 이찬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처음 대야에서 패할 때에 도독 품석의 처(妻)도 죽었는데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가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종일토록 눈.. 더보기
신문왕 대 일통삼한의식의 형성 일통삼한의식의 형성 왕은 군신과 더불어 의논한 후에 당의 조칙에 답하였다. 생각건대 선왕 춘추는 자못 어진 덧이 있었고, 더욱이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일통삼한을 하였으니, 그 공적을 이룩한 것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 12년조- 사료해석 : 통일신라시기부터 진정한 민족의 형성이라고 보는 이유는 통일신라시대에 의식이 싹뜨기 때문입니다. 일통삼한이란, 이전 3국이 각각 분립된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가진 것과 대비되어지며 드디어 우리 민족이 역사적인 관점에서 하나라는 의식을 스스로 자각하게 되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