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3화. 전통주의자와 공화주의자들의 대결 속에서 탄생한 석가

1. 철기 시대의 사화 변화와 <정치, 사회> 계급의 성장

최고의 계급인 브라만은 우파니샤드 철학의 이념으로 <브라만>의 정당성을 과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의 인도는 이미 <고대 신의 신비주의> 관념만으로 지배 계급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철기가 보급되고, 생산력이 증가하였다. 따라서, 전사계급이 원하는 것은 <넓은 영토>였다. 물론, 신관들이 신의 계시를 내리고 전쟁을 도왔다고는 하지만, 전쟁에서 실제 필요한 것은 무력과 경제력이었다. 무력을 가진 자들이 왕족인 크샤트리아 계급이었으며, 재력을 가진 자들은 바이샤 계급이었다.

전쟁은 많은 민족간에 혼혈을 가져온다. 더 이상 순수한 <아리아인>이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 세상이 왔다. 크고 작은 부족 국가들이 통합되면서 거대한 영토를 가진 군주국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국가가 발달하면서 엄청난 토지를 가진 귀족과 재력을 가진 상인들 역시 입김이 쎄진다. 특히, 비옥한 겐지스강 유역을 장악한 부족들은 인도 북부를 통일하겠다는 꿈까지 가진 시기였다.

<브라만>이라는 최고 계급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비옥한 겐지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점차 <브라만교 반대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2, 3계급은 브라만에게 반발하였다. 더 이상 특권을 유지하려는 브라만교를 그대로 놓아둘 수는 없었다. 특히, <제사를 지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자신들만이 신과 접촉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없었다. 제사 지내는 방법이야 누구나 배우면 되지 않는가?

브라만교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은, 직접 제사를 지내며 스스로 교단을 만들어 버린다. 특정 종교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종교의 사상을 벗어나 독자적인 종파가 된 경우를 <사문 : samana>이라고 한다. 무협지에 자주 나오는 말이지만, 원래 인도어에서 비롯된 말이다.

사문들은 브라만교를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입지를 만들어갔다.

2. 사문들과 브라만과의 싸움

브라만교의 전통 철학은 우파니샤드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기본 원리는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과 생명의 원리인 아트만은 동일한 것>에서 출발한다. 지난 장에서 설명했으니 넘어가도록 하자.

중요한 점은, 우주의 원리인 <브라만>이 창조주이자, 역사의 진행자이자, 생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브라만은 우주의 법칙 속에서 생명도 만들고, 죽음도 만들며, 윤회도 만든다. 우주는 브라만의 법칙에 의해 돌고 돈다. 해탈은 그 법칙을 알고 있는 <브라만>만이 가능하다.

사문들은 브라만을 반대한다. 고행을 통하여 힘든 과정을 겪으면 누구나 깨달음을 얻기도 하고, 해탈이 가능할텐데 왜 <브라만>만 해탈한다고 하는가? 또, 착한 일을 하면 다음 생애에 <브라만>으로 태어난다고 하는데,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가혹한 것이 아닌가? 지금의 선악과 내세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과격한 사문에서는 아예 <육체>가 죽으면 선악이 죽는다는 <유물론>을 주장하기도 한다.

또 어떤 사문은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들을 거론하면서 <영혼>도 결국 물질 현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영혼>이 어떻게 현실과 격리될 수 있는가? 살이있는 인간들도, 자 <영혼>을 가지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시 대표적인 사문인 <자이나교>의 <바르다마나>는 브라만교의 <선행> 개념 자체를 부인한다.

인도 나타족 왕자(2계급)인 바르다마나는, 착한 일을 한다면서 하늘에 제사나 지내는 형식적인 브라만들이 해탈하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한다. <해탈>는 깨닫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영혼을 정화>해야 이루어지는 일이다.

1계급들이 잘나서 1계급으로 태어났다는 것을 아무도 증명한 적이 없다. 오히려, 해탈은 신분과 상관없이 <고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기를 관리하고, 살생을 금지하며, 깨끗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해탈의 기본 조건 아니겠는가?

자이나교의 교리는 단순하다. 사람은 살면서 실수를 한다. 고의든, 우발적이든 죄를 저지른다. 그래서 영혼은 더럽다. 따라서 엄격한 계율 속에서 고통스러운 <고행>을 한다면 영혼이 정화되면서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이나교는 대부분의 브라만 의식은 인정한다. 그러나, 브라만들만의 특권을 반대하면서, 모든 계층이 고행을 통해 <구원>받는 다는 교리를 설파한 것이다. 수많은 사문 중에서 지금까지 인도인들에게 살아남은 사문은 <자이나교>밖에 없다. 그 핵심은 <고행>이었다.

<자이나교-아디나타사원>

<자이살메르사원>

티르탄카라상

3. 도시 공화국에서 태어난 석가

기원전 5세기, 강력한 철기를 가지고, 인도 북부(겐지스강가)에 살아남은 국가는 모두 16개국이었다. 그러나, 강대국이라고 말할 수 있는 국가는 모두 <군주국>이었다.

군주국에서는 국왕과 브라만들이 독단적으로 정치를 이끌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수드라 계급을 지배하기 위해 <윤회설>을 강조하였다. 수드라인 너희가 천민으로 태어난 이유는 전생에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너희는 이번 생애 내내 고통을 받아야 할 것이라고...

이 무렵, 석가는 기원전 566년, 도시국가인 네팔(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났다. 석가가 살았던 지역은 크샤트리아와 바이샤가 많았던 도시 지역이었다. 당시 도시 국가에서는 2, 3계급의 발언권이 상대적으로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공화 부족들은 군주 부족과 달리 모든 일을 부족내 유력자들이 모여 회의하고 결정하였다. 신라의 화백회의와 같은 <만장일치제>가 국가의 중요한 일을 결정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반면, 군주 부족들은 군주와 신관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하는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공화국의 부족국가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군주국가들에 의해 하나하나 멸망해가고 있었다. 곧, 강력한 군주가 인도 북부 전체를 통일할지도 몰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자란 석가는 브라만 신관들의 독선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리고, 약소국가의 2계급으로 태어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고민을 했을까?

4. 석가 <사문>의 형성

석가는 브라만의 가르침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브라만에서 말하는 <생명과 윤회>를 자신이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그는 생로병사를 느끼고자 여러 브라만 수행자들을 만났다. 그러던 중 29의 나이로 출가했다. 그 때, 갓 태어난 석가의 아들이 <라후라>였는데, <라후라>란 <장애물>이란 뜻이다. 석가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난 것이다.

석가가 맨 처음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선정주의자들이었다. 선정주의자들은 <착한 일>을 많이하면 <해탈>한다고 말했다. 석가는 모든 이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착한 일을 아무리 해도 해탈의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시 길을 떠난다.

석가가 두 번째로 택한 길은 <고행>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든 고행을 해도 <해탈>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석가가 마지막으로 택한 길은 <명상>이었다. 보리수 밑에서 명상을 하던 석가는 35의 나이에 문득 깨달음을 얻게 된다. 보리수란, 깨달음의 나무란 뜻이다. 또, 깨달은 사람을 <붓다>라고 하고, 성자를 <모니>라고도 하는데, 보통 <석가모니> 또는 <석존>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가 명상으로 깨달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중도>였다. 선정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극심한 고행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가야한다는 것이다.

석가의 <중도>사상은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그는 구름과도 같은 제자들을 얻어 <교단 : 승가>를 만들었다. 승가란, 모든 자들이 평등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공동체 집단을 말한다.

석가가 만든 승단은, 공화국 체제와 비슷하다. 바르나 제도와는 달리, 모두가 평등하며, 서열은 먼저 들어온 순서로 정한다.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의식으로 뭉쳐진 그룹집단인 것이다.

불교도는 네 그룹으로 이루어진다. 남성 출가자(비구), 여성 출가자(비구니), 남성신도(우바새), 여성신도(우바이) 이다. 이들간의 차별은 없다. 물론 가장 똘똘한 인물들을 10대 제자로 두긴 했지만, 그것은 어느 한 분야의 능력이 출중한 인물들을 능력별로 인정해 준 것이다.

석가 사후, 석존의 가르침은 대부분 구전이었기 때문에 정리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것을 정리한 사람은 100년 후 아소카왕 시대의 제자들이었다. 부처의 가르침을 경, 율법서를 율, 주석을 논 이라고 분류하여, 경,율,론 3장의 불교 지침이 성립된 것이다.

석가시대의 가르침을 보통 <원시불교 : 초기불교>라고 말한다. 원시불교란, <암송한 것>을 기억하여 가르침을 남긴 것이다. 석가와 같이 배우고 암송한 것을 함께 기억하고 되새겨 모아 적는다. 초기 석가의 가르침은 <아함경전>에 실려있다. 훗날, <아함경>으로 불리는 경전은 중국과 한반도에도 전파되었다. 경이 가르침이라면, 율은 율법서이다. 율은 출가자들이 지켜야할 조문들을 모두 모아놓은 조문집이다. 물론 주석인 <론>은 후대에 달아놓은 것들이다.

5. 석가의 가르침

석가의 핵심 가르침은 <번뇌>였다.

번뇌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고통과 고민>을 말한다. 보통 <고집멸도>라고 불리는 이 번뇌는, 고(고통), 집(고통의 원인), 멸(고통의 소멸), 도(소멸의 법도)를 총칭한다. 이 4가지 고통을 해결하는 과정을 <4제>라고 한다.

석가는 이 고통을 없애는 방법으로 8정도를 제시하였다. 8정도란, 고통을 없애기 위해 8가지를 바르게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지침이다.

올바른 견해(정견), 올바른 생각(정사유), 올바른 언어(정어), 올바른 행동(정업), 올바른 생활(정명), 올바른 노력(정정진), 올바른 기억(정념), 정신통일(정정) - 이 8가지를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8정도를 이끌어가는 방법이었다. 브라만에서는 우주의 근원인 브라만에서 충실하기 위해서 <계급에 맞는 착힌 일>을 하라고 말한다. 반면 자이나교 같은 사문에서는 철저하게 <고통스런 고행>으로 악업을 벗어나라고 말한다. 그래야 <해탈>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석가는 말한다. 선정이건, 고행 이건 단지 하나만으로 <해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중도>를 걸어야 한다고.... 그럼 왜 중도만이 고통을 없애주는 것일까?

   그 이유는, 모든 것이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정>은 영적인 측면을 주로 강조한다. <고행>은 육체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것은 정신과 물질이 연결되어 일어난다.

석가가 깨달은 것은, 모든 것은 상호의존한다는 것이었다. 깨닫는 다는 사실 조차,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 어떤 일을 겪지 않으면 깨달음이 없었을 지도 모른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일은 다양한 원인과 조건으로 얽혀서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을 <연기>라고 한다.

우주가 단지 브라만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물 자체가 인과관계에 의해 얽혀서 움직이고 있기에 절대적인 근본이라는 것은 없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어떤 원인에 의해 존재하는데, 어떻게 아트만(생명)이라는 본질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연기설>의 핵심은 이런 것이다.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다른 존재하는 것이 같이 존재한다.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면, 반드시 그 현상의 원인이 있다. 원인이 없다면, 현상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된다. 한마디로, 만물은 서로 의존하여, 서로의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는 것이다. <연기>의 본질을 알게 되었을 때,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깨달음을 얻었을 때 <해탈>하게 되는 것이다. <중도>를 모르고 한가지 길만을 추구하는 것을 <극단 : 탁자의 모서리>라고 말한다. <극단>은 <해탈>이 아니라 자신을 망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연기>의 세계를 깨닫는가?

석가는 깨달음을 아는 방법으로 삼법인(3개의 진리의 도장)을 말한다. <연기>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원인이 되어 돌고 돌기 때문에 결국 그 본질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이라는 3개의 진리로 표현된다.

제행무상이란? 제행은 <움직여 변한다>는 뜻이다. 무상은 <없다>는 뜻이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 움직여 변하므로 결국 인연에 의해 연결된 세계는 사간에 따라 변하게 되어 사라진다는 것이다.

제법무아란? 제법은 <율법, 진리>를 말하고, 무아는 <나란 없다>는 뜻이다. 즉, 나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나란 육체와 정신, 생각, 역사 등등이 어떤 원인과 결과로서 만들어낸 순간적 존재이다. 순간이 지나면 변하는 것이 나이며, 내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다. 브라만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아트만)이란 없다. 즉, 보편적인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열반적정이란? 열반은 <해탈>의 불교식 표현이고, 적정은 <소멸>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것이 <연기>로서 돌고 도는 인연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고통과 번뇌>가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을 없애기 위해 8정도를 행동으로 옮기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면 <고통>이 사라지고, 고통이 사라지면 해탈한다는 것이다.

6. 석가의 가르침을 남긴 마가다국

석가의 이러한 불교 철학과 종단(승가)은, 갠지스 강 유역에 위치한 마가다국에 의해 보호되었다. 석가는 살아 생전에 갠지스 강 유역의 마가다 지방에서 깨달음을 찾으며 고행을 했었다. 또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에도 포교 거점으로 삼았던 지역이 마가다 왕국이었다.

마가다 왕국은 북인도 16대 강국 중의 하나라 불교, 자이나교의 발상지로 불리는 국가이다.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은 석가를 신하로 끌어들이기 위해 영토를 주겠다는 말까지 했던 왕이다. 마가다국의 수도 왕사성은 그 이후 불교와 자이나교의 성지가 되었다.

갠지스 유역을 통일했던 기원전 5세기의 마가다국과 달리 기원전 4세기의 마우리아 왕조는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면서 불교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마가다 왕국의 후손으로서 아리안 전통 직계인 마우리아 3대왕 아쇼카는 불교사에서 전설적인 인물로 손꼽힌다.

석가의 연기설은 당시 통일국가 이념으로도 제격이었다. 연기설이란, 모든 사물을 독립적으로 보지 않고 연결된 것으로 파악한다. 이것은 각 부족별로 흩어져있던 당시 사상 체계를 통합하는데 딱 좋은 사상이었다.

개체는 고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의 인과 관계 속에서 연결되어 있다. 즉, 개별적인 것들은 전체적인 것의 일부이다. 따라서 개별적인 부족들은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부족들은 좋던 싫던 다른 부족과의 관계에서 살아가게 되고, 궁극적으로 통일된 전체에 의해 규제받게 된다. 전체라는 것은 개별 부족을 넘어선 중앙집권국가의 지배자를 뜻할 수도 있다.

쉽게 말해, 모든 것은 혼자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국가도 인연을 맺고 있다. 강력한 국왕이 출현한 것도 그 인과 관계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강력한 국왕은 모든 백성을 때려잡는 국왕이 아니라 정의를 구현하는 슬기로운 지배자이다. 브라만 신앙에서 내려오는 정법(정의)의 지배자를 <전륜성왕>이라고 한다. 즉, 마우리아 왕조의 절대자 아쇼카 왕이 곧, 전륜성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쇼카 왕은 이 전륜성왕의 브라만 신화와 불교를 연결시켜 버렸다. 전륜성왕의 통치를 돕기 위해 <미륵불>이 지상으로 내려와 백성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는 것이다. 이로서 <미륵불> 신앙이라는 또 다른 의미의 신앙이 등장하였다.

아쇼카 왕은 전륜성왕과 미륵불 사상을 몸으로 실천하였다. 자신이 정법을 구현하는 왕이 되어 북인도를 통치함은 물론, 자신의 분신들을 주변국에 보내 불교의 참 뜻이 무엇인지를 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남부의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도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한다. 멀리는 이집트, 그리스에 이르기까지 불교라는 종교의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소카 왕 때의 불교는 <소승불교>라는 초기 불교였다. 아직 불교는 출가자들 위주의 불교였고, 국왕은 불법을 지키는 호법왕이라고 여겨졌다. 부처가 되는 것은 개인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함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전륜성왕

그러나 아쇼카 왕 사후, 기원전 2세기 무렵 불교는 또 다른 격동을 겪게된다. 아쇼카 왕이 죽은 뒤 약해진 마우리아 왕조는 서쪽에서 밀려온 이민족들에 의해 분열된다. 그리고, 만민 구원을 외치는 서방 종교와 서아시아 밀교 등이 들어오면서 <대중 전체의 구원>을 생각하는 불교가 등장한다. 이 때의 불교를 <대승 불교>라고 하며, 대승 불교는 비단길 등 교역로를 따라 중국과 동아시아에 전파되었다.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대승 불교 이야기와 동아시아 불교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 나라까지 들어오게 된 <한국식 불교> 이야기이다. 동남 아시아로 내려간 소승 불교 이야기는 따로 하지 않겠다. 중국과 한반도로 넘어온 종파를 위주로 <대승 불교> 이야기를 좀 하고, 중국, 한반도, 왜로 넘어간 불교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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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할 만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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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비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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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한국빅데이터교육협회

< H I S T O R I A > 2008 중국 근현대사 이야기

(1) 1834-1860 근대화의 시작 : 백련교도의 난과 영국의 자유무역체제

1800년대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 중국의 상황은 어떠했을까요?

18세기 건륭제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시아의 맹주 <청>은 19세기가 되면서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18세기의 평화로 늘어난 어마어마한 인구를 감당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전근대 사회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18세기 최고의 절정기를 맞이한 <청 왕조>의 인구는 세계인구의 1/4를 넘어서는 5억에 이르기 시작합니다. 청은 이 엄청난 인구에서 걷어들인 세금으로 국가 재정을 넉넉히 할 수 있었습니다. 청조 중기 이래의 세금을 걷는 방식은 <지정은제>에 기초하는데, 지정은제는 여러 잡세를 모두 토지로 묶어 토지에서만 세금을 충당하였고, 세금을 내지 않는 열외자도 상당수 있었습니다. 청조 재정의 넉넉함을 알 수 있는 대목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자본을 회전시키는 능력이 청조에게 부족했던 것 같네요. 5억의 인구를 부양하는 대국이라면, 당연히 그에 걸맞는 생산력의 발전이 뒤따라야 합니다. 서양에서는 18세기 이래 꾸준히 진행되고 있던 산업혁명을 <중국>에서는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중국사회도 양명학, 고증학 등이 발전하면서 <실용적인 기술 발달>을 생각하기는 했지만, <실용적>이라는 부분은 주로 <농업, 상업, 수공업> 등의 전통적인 기술부분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4억을 넘어서서 5억으로 가는 인구를 먹여살릴 기술은 되지 못했던 것이지요.

19세기 중국은 인구에 비해 토지개발이나 기술력 향상 부분이 너무 뒤쳐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엄청난 재원과 국가 번영에도 불구하고 빈부차가 심해졌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처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이러한 빈부차와 기술의 부족은 <하층민>들의 불만을 가져오게 되었고, 19세기부터 중국은 잇단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각종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중국 내지인들의 불만이 쌓여갑니다. 또, 청 왕조의 전성기부터 시작된 영토 확장과 변경 지역으로의 이민 문제 역시 중국민과 토착민간의 불화를 조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불안은 결국 <청> 왕조가 중국 전통 왕조가 아닌 <이민족인 여진족 왕조>라는 부분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 시작합니다. 잇다른 반란과 비밀결사 단체들은 <중화민족>이라는 기치를 내걸기도 하고, 농민 결사단체들은 중국 전통 사회의 반란 형식인 <불교의 미륵불>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시기에 가장 큰 비밀 결사단체로서 정부에 대항한 것이 바로 <백련교>였습니다. 백련교는 <미륵불이 나타나 천국을 세운다>는 이념을 가진 종교적 비밀 결사였습니다.

백년교도들이 난을 일으키다.

백련교는 원래 중국 당나라 이래 지속되어온 비밀결사단체입니다. 이 단체는 원래 불교의 정토종 계열에서 출발한 단체입니다. 백련교라는 명칭은 정토종의 시조인 석혜원(동진 사람)이 백련사를 만들어 중생의 안녕을 기원한 것에서 출발하므로, 백련교는 중생들의 평안을 위한다는 <대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백련교는 남송의 모자원이 종교결사운동을 하면서 백련종이란 종파를 만들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백련교는 미륵불은 아미타불을 모시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계율을 지키는 종파입니다. 또 선종의 종파이므로, 딱딱한 경전보다는 <염불>을 외워는 참선을 중요시 합니다. 즉, 살생, 도둑질, 술, 여자 등을 멀리하면서 세속보다는 <이상>을 추구한다는 이념을 가졌기 때문에 탈속적인 비밀단체였습니다.

이 단체가 중국 송, 원, 명, 청이라는 중세 시기에 백성들의 반란에 종종 이용된 것은 바로 이러한 대중적이면서도 탈속적이고, 미륵불의 구원이라는 내세사상이 있으면서도, 교리가 쉬웠기 때문입니다. 원나라 때의 백련교는 몽골에 대한 반항단체로서, 명대의 백련교는 농민핍박에 대한 대항단체로서, 청대의 백련교는 여진족왕조에 대한 비밀결사단체로서 <농민반란의 진원지>가 되곤 하였습니다. 따라서, 백련교는 때에 따라 민족주의단체였고, 어떤 때에는 반정부적 테러단체였고, 또 어떤 때에는 쿠테타의 리더로서의 역할도 하곤 했죠. 백년교는 중국 농민들 사이에 불교, 도교, 백련교라는 3대 종교가 있다는 생각을 머릿 속에 각인시킨 대형 종교였습니다.

청나라에서는 끊임없이 백년교를 탄압하면서 몰아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1789년 백년교도들은 더 이상 참지 않고, <청조 타도> 및 <미륵불 세상의 강림>을 외치며 10여년간의 대 정부 투쟁에 들어갑니다. 처음에는 <백련교>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이 점차 농민들과 반청인사들에게 영향을 주어 <백련교의 난>은 중국 전역에 바이러스처럼 퍼졌습니다. 청나라는 백년교의 10년 난을 진압하기 위해 국가 총 예산 5년분을 쏟아부었고, 엉청난 재력을 가진 청 왕조도 결국 재정난으로 휘청이게 됩니다. 청이 영국 등 대외 국가와 효율적으로 싸우지 못한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백년교로 인한 국가 재정 파탄이었습니다.

백년교의 교리가 반란과 연결되는 부분을 볼까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백년교도들의 이야기... 하면 바로 김용의 영웅문 3부에 나오는 <의천도룡기>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백년교는 비밀결사단체인 만큼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그 중 원나라의 지배에 항거하여 밝음의 단체를 지향한다는 뜻에서 <명교>라고 불린 적도 있죠.

초기 백련교의 교리는 페르시아 계통의 서역불교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 교의는 조로아스터교 등에서 보이는 <선신과 악신>의 투쟁이라는 개념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세상에는 명(明), 암(暗)이라는 두 개의 세력이 있는데, 명은 곧 <광명>으로 불과 밝음을 의미합니다.(조로아스터교의 선신이 곧 불을 의미하죠.) 이 불의 세력의 대표는 지상을 구원하러 내려오는 불교의 미륵불인데, 미륵불은 암흑의 세력을 물리치고 세상을 구원합니다. 그리고 무생노모라는 늙은 부처가 속세의 사람들을 진공가향이라는 하늘 세상으로 데려갑니다. 미륵불, 석가불, 연등불 등은 무생노모가 지상이 어려울 때마다 파견한 파견된 부처들입니다.

무생노모에게 기원하기 위해 향을 피우는 것을 소향이라고 합니다. 향을 피우는 것은 미륵불과 명왕을 믿고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식입니다. 무생노모는 모든 이들을 사랑으로 감싸기 때문에 신분과 성별,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이들을 <백련교>의 품으로 받아들입니다.

백련교는 무생노모가 부처들을 파견하지 않은 현재 세상은 항상 암흑으로 봅니다. 그러나, 지금의 암혹세력들은 미륵불이 내려오면 모두 파괴될 것이고, 구제도의 파괴를 통해 세상은 <사랑>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는 예언자와 신도들의 단체가 바로 <백련교>입니다. 따라서 백련교의 예언자들은 무생노모의 힘을 받아 치유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이 강할수록 치유의 힘이 강한데, 부적, 무술, 기공, 주술 등의 힘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 힘을 발휘하면서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스승과 제자 관계로 교단을 정비해 갑니다. 백련교는 내외에 문파가 무척 많고 세력이 방대하여 수많은 문파가 각각의 이름으로 존재하면서 백련교의 하부 지부로 활동합니다. 지도자의 이름도 각각 다르고, 선교 방법도 다르므로 일반인들은 자신들이 백련교인지 모르고 가입하기도 합니다. 대양교, 청향교, 대승교, 십자교, 분향교, 혼원교, 노군문교, 청차문교, 팔침교 등등의 명칭들은 모두 백련교의 명칭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왕조에 대항하는 비밀결사로 적합하였습니다. 또, 경문을 노래로 만들어 부른다던가 저자거리에서 주술적 힘을 보여준다는 등의 방식으로 알게 모르게 민중에게 침투해 들어갑니다.

백련교에서는 <사해의 모든 사람의 형제고 가족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련교의 교주는 구제도가 파괴되고 새로운 세상이 올 때까지 모든 사람들읠 형제 가족처럼 아끼고 보호하며, 신도간 신분을 없애고, 남녀평등을 실현하는 것을 교주의 역할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종교는 농민층에게 호응을 얻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백년교와의 10년 투쟁으로 영국과의 투쟁을 준비할 겨를이 없었다.

18세기 청조는 세계 최고의 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세기, 그 막대한 자금을 가지고서도 사회 체제를 개혁하기는커녕 백년교와의 혈전으로 재정난에 허덕이게 된 청조는 때마침 밀려오는 서양세력의 도전을 막을 힘이 없었습니다.

18세기 영국은 조지 매카트니가 청조 건륭제에게 무역을 건의 했다가 소위 말하는 <쪽팔림>만 경험하고 떠나게 됩니다. 영국은 그 이후 계속적으로 청과의 <자유무역협정>을 맺을 것을 주장하지만 청은 영국과의 조공 관계만을 주장해왔습니다.

중국에는 물자가 풍부하여 없는 것이 없다. 우리는 애초에 외국 오랑캐의 물건에 기대어 없는 것을 얻어 편리를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차, 도자기, 비단은 너희 서양 각국에게 필수품이 된다고 하니, 내 그것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은혜를 베풀고자한다. 아모이에 서양 상점을 열어 일상 생활에 도움이 되고 은덕을 입도록 했던 것이다.

지금 너희 나라의 사절은 이와 같이 정해 놓은 것 이외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 아닌가? 이것은 우리가 먼 나라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사방의 오랑캐를 어루만져 기른다는 정신에 거스르는 일이다.

- 영국 사절 매카트니에게 내린 건륭제의 칙서, 1793 -

즉, 전성기의 청은 영국 등 서양이 무역을 요구할 때마다 <조공무역>을 고집합니다. 서양은 국가간 대등한 자유무역을 원하지만, 당시 세계 국가인 청은 서양의 무역체계를 이해할 필요가 없었고, 서양에서 가져다 쓸 필요한 물건도 없었습니다. 산업혁명기의 영국 양모보다 청의 수공업 양모옷이 인기있었고, 차와 도자기 등의 중국 물건은 서양인들이 원했던 것일 뿐 중국인들이 사다 쓸 물건이 많이 않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19세기 중국 사회의 불안으로 이러한 무역 체계가 점차 바뀌게 됩니다. 특히, 19세기 이후 영국이 삼각무역을 통해 <아편>을 중국에 팔기 시작하면서 전세가 뒤집어지죠... 자, 그럼 본격적으로 중국 근대화 과정으로 넘어가 보겠습니다. 다음 장에서 다룰 내용은 중국 최초의 근대 조약인 <남경조약>과 아편전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다음 장부터는 지도와 도표를 많이 첨부해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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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의 불교 사상

이번 장에서는 통일신라에 대한 불교사상을 호국불교의 이념과 대중불교의 이념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중간에 다룬 원광, 자장 대안, 혜숙, 원효와 의상은 이야기는 각 인물 각론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하고, 통일 신라 불교의 개념만 다뤄 보도록 합니다.

1. 초기의 불교 : 호국 불교의 이념

신라의 불교는 호국 불교의 성격이 상당히 강합니다. 법흥왕 때 불교를 공인하면서 불교식 왕명을 사용한 신라에서는, 진흥왕 대에 불교 교단을 정비하면서, 불교 교단을 국가 행정 구역과 일원화 시켰습니다. 마치 로마 제국이 기독교 교구를 로마 행정 구역과 일원화 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인하고 세계종교로 전파한 것과 비슷한 개념입니다.

그러나 동양에서의 종교와 행정구역 일원화는 서구와 같이 <교회>와 교황 세력의 확장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왕권 강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진흥왕은 일원화된 불교 행정 구역을 장악하고, 스스로 인도 아쇼카왕이 주장한 전륜성왕의 이념을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즉, 자신은 불교를 지상에 전파하고, 백성들을 보호하는 호법왕임을 자처한 것이지요. 여기에서 신라의 왕즉불 사상, 즉 왕이 곧 부처이고, 호법이란 곧 호국과 같은 것이라는 관념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진흥왕은 불교 행정 구역 일원화와 함께 백좌강회와 팔관회라는 것을 역사상 처음으로 성대하게 엽니다. 백좌강화란 백고좌회라고도 합니다. 이것은 인왕반야경을 읽으면서 국가안녕을 기원하는 법회로 국왕이 시주가 되어 성대하게 개최한 법회입니다. 이것은 외적을 막기위한 호국 법회이자, 국왕의 위대함을 알리는 신성법회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러한 호국 법회를 위해 신라에서 만든 절이 <황룡사>입니다. 원래 황룡사는 진흥왕이 왕터로 만들려고 했는데, 황룡이 나타나 그 터가 신라 초기 소도가 있던 <7가람의 하나>라고 계시하면서 절을 지은 곳입니다. 이 절이 곧 신라 호국 불교의 원산지입니다. 이 절은 고려 시대 이후로도 계속 국가 호국 행사로 이용되었는데, 훗날 몽골 침입기에 몽골은 이 절의 호국적 성격을 지상에서 지워 버리기 위해 불태워 버렸습니다. 임진왜란기 일본도 불국사 등 주요 호국 법회가 열리는 절이나 터를 불태우려고 했다는군요.

2. 신라 중기 : 대중 불교 운동이 시작되다.

신라 초기의 불교가 왕즉불 사상에 근거하여 왕권을 신성화하였다면, 신라 중기 이후의 불교는 이제 대중에게 파고드는 보편적 불교가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원래 불교라는 사상의 근원이 바르나 제도를 부정하면서 만민평등과 해탈사상을 강조하는 종교였던 만큼, 골품적 한계에 직면했던 신라사회에서도 골품적 모순을 극복하면서 만민을 구제할 대안으로 불교가 중요시된 것입니다.

실제 진흥왕 이후 통일 이전 승려계급은 거의 진골이었습니다. 토착 신앙을 등에 업고 불법에 있어서 왕권에 저항하던 지방의 <부> 세력을 왕이 누르기 위해 국왕은 불교적 이념을 가진 진골들을 적극 중용하였습니다. 중국에 유학을 갈 수 있는 것도 진골이었고, 전륜성왕의 화신인 왕을 돕는 미륵의 화신들도 진골이었습니다. 따라서 불교교단정비가 이루어지는 시대가 신라에서 진골이라는 계층이 새로 성립된 것도 하나의 필연적 사건이었고, 진흥왕기 이후 진골 귀족이 왕권 옹호세력이 된 것도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이 초기의 진골성향의 승려들이 바로 원광, 안함, 자장, 의상 등으로 대표되는 호국 불교 세력들입니다.

그러나,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였고, 문무왕, 신문왕기에 김흠돌의 난 등을 계기로 진골세력들마저 정권에서 몰아내고 왕의 전제정권이 확립되면서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국왕권은 이제 자신들의 정치 이념에 부합되는 진골 외에는 국정에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5,6두품 등 두품 세력을 곁에 두어 국왕의 자문으로 활용하려 했지요.

귀족사회에서 소외되었던 5,6품들은이제 국왕의 옆에서 자문정치를 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유교적인 성품이 강했습니다. 반면, 신라사회에서 그동안 진골귀족들의 세력아래에서 진정한 불교의 보편적 정신을 전파하지 못했던 불교 두품 세력들은 거리로 나가 불교의 진정한 도를 백성들과 나누기 시작합니다. 그 대표적인 대중 불교 세력들이 흔히 4-6두품이라고 알려진 혜숙, 혜공, 대안, 원효 등의 승려등입니다.

혜공은 부개사를 세워 대중들에게 불교의 진리를 알리려고 했고, 대안은 '대안, 대안~!'이라고 외치면서 불교를 거리에서 전파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최고 신분층인 진골층을 풍자하면서 서민과 함께 불교를 나눕니다. 이들은 불교가 국왕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만민평등의 자비를 갖춘 보편적 종교임을 강조합니다.

특히, 원효는 어떤 백성이라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만 외치면서 마음으로 부처를 받들면 정토와 극락에 이를 수 있다는 정토사상을 이야기했습니다. 원효는 불교에서 세, 속의 경계는 필요없다는 대중불교의 이념을 갖고 현실에 뛰어들었으며, 스스로 무열왕의 딸 요석공주와 잠자리를 하여 스스로 파계당합니다. 그러나 무열왕도 원효를 인정하여 사위로 인정하기도 합니다.

3. 원효 사상의 기본 - 일심론<모든 것은 한마음이다> : 정토종

원효의 사상은 원효 파트에서 자세히 다루겠습니다만, 일단 기본 사상만 여기서 파악해 봅시다. 그의 사상은 화쟁사상에 입각한 <일심론>이 가장 핵심 사상입니다. 그는 모든 인간은 한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한마음이란 신분과 상관없는 것이라 모든 인간, 심지어 여자와 노비들도 성불이 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일심론은 현실(예토), 마음(정토)는 한마음(일심)이라는 것이 핵심으로 마음에 따라 현실이 악몽이 될 수도 있고, 정토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니,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라는 주장이죠. 즉, 대중불교의 기본이념이 바로 일심론입니다.

일심론은 마음에 따라 성인도, 악인도, 여자도, 노비도 모두 성불할 수 있음을 주장합니다. 원래 불교에서는 극락에 여자라는 존재가 없기 때문에 여자가 성불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원효는 여자가 성불하면서 바로 여자의 몸에서 벗어나 남자로 해탈하므로 여자 역시 성불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즉, 원래 불교가 성인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진 성인 사상이라면, 원효의 불교는 인간평등의 만민사상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극락에 왕생한다는 사상은 미륵불이 내려와 인간을 구원한다는 <미륵신앙>과 다른 사상입니다. 이것을 보통 미타사상이라고 하며, 원효의 <정토사상>이라고 합니다. 원효의 정토설은 귀족 위주의 현실적 불교를 죽은 뒤 극락에 가기 위한 <내세적 불교>로 바꿔 버립니다. 그리고 이 사상은 의상 등 다른 불교 사상에 큰 영향을 줍니다. 실제, 의상이 만든 부석사는 화엄종 성격보다는 원효의 정토적 성격이 강합니다. 무량수전, 아미타불 등이 부석사에 있음으로 해서 부석사는 마치 의상이 만든 절이라기 보다 원효의 <정토사상>을 보여주는 절처럼 느껴집니다.

원효의 일심론이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는 모든 다양한 불교 학파를 통일한 화쟁사상에 입각하여 <공유논쟁>이라는 불교 최고의 논쟁을 원효가 정리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부처가 죽은 뒤 인도와 불교가 전파된 중국에서는 공, 유의 개념을 가지고 치열하게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것은 부처의 가르침의 핵심이 모든 것은 허상이다라는 <공>이었는가, 모든 것은 인식에 달려있다는 <유, 식>이었는가를 놓고 다툰 논쟁입니다. 중국은 물론 인도에서도 이것에 대한 결론이 나질 않았습니다.

원효는 이것을 <일심론>으로 정리합니다. 즉, 부처가 주장한 세계는 공, 유의 나눔이 아니라 본질은 한마음이라는 일심이라는 것이죠.

원래 한마음이란 본질(공 : 진여문), 현상(유 : 생멸문)가 서로 대립하는데, 이것은 하나이면서도 둘이요, 둘이면서도 하나로서 원래는 마음이라는 것에서 모두 비롯되는 하나인 것이다 - 라는 정리가 원효의 정리입니다.

이 원효의 사상은 공을 중시한 중관학파, 유를 중시한 유식학파 모두에게 영향을 주어 당나라 화엄학 성립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불교가 인도 불교를 벗어나 독자적 불교로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 원효 사상 이전의 귀족적 미륵신앙(상생적 미륵신앙, 하생적 미륵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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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생적 미륵신앙 : 부처일족이 미륵이 되어 내려와 인간을 구원한다는 국왕권 옹호 신앙(국왕 = 만민을 구원할 미륵)    상생적 미륵신앙 : 귀족들이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부처일족)이 된 뒤 언젠가 내려와 인간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
   원효의 정토신앙 : 누구나 깨달음이 있으면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만민 평등의 믿음

4. 의상의 대중불교  - 모든 것은 원융이다. : 화엄종

의상의 불교도 각론에서 다루니, 여기서는 기본만 봅시다. 의상의 불교는 통불교적인 원융사상으로 이해할 수 있겠네요. 의상은 원효와 같이 당에 유학을 갔었죠. 그런데, 5두품 출신인 원효는 해골에 고인 물을 먹고 신라로 돌아와서 의상만 당에 갔다는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의상은 당에 유학이 자유로운 진골출신입니다.

의상은 진골이지만, 불교에서의 교리의 평등성을 인정하여 불교의 보편성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제자들 중에는 노비, 평민, 극빈층 등이 많다고 합니다. 즉, 신분을 초월한 불교의 보편성을 추구한 것이지요. 그는 원효가 백성들 사이에 직접 뛰어들어 불교를 전파하는 것과 달리 자신의 신분과 재력을 이용하여 <교단불교>를 이끌어 갑니다. 특히 유명한 부석사를 지었는데, 이 부석사는 원효가 신라 화엄종을 개창했음에도, 전술햇듯이 원효성격의 대중불교적 냄새가 많이 납니다.

의상은 중국에서 화엄종 2대 시조 지엄에게 화엄학을 전수받았는데, 중국의 고승들이 원효의 사상에 감탄하고 존경했다고 합니다. 그의 불법은 <화엄일승법계도>에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 번 볼까요?

<하나 안에 일체가 있으며, 많음 안에 하나가 있다. 하나가 곧 일체요, 많음이 곧 하나이다. 한 작은 티끌 속에 시방을 머금고, 일체의 티끌 또한 이와 같다. 한량없는 먼 겁이 곧 한 찰나요. 한 찰나가 곧 그 한량없는 겁니다.>

<한국불교전서 중 발췌>

이 말은 곧 모든 것이 하나요, 하나는 모든 것이다로 요약됩니다. 이것이 화엄종의 요체인데, 신라 왕실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라는 말을 <백성은 왕에게 귀속된다>로, 하나는 모든 것이다를 <왕실은 백성에게 베푼다>로 해석하여 이 사상을 전제왕권에 이용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의상이 부석사를 세운 목적이나 그의 행적으로 볼 때 의상 스스로가 전제왕권을 옹호한 것은 아닌 듯 싶습니다. 아마도, 그가 죽은 뒤 후세의 불교에서 그의 사상을 왕권에 연결시켜 이용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융>이라는 개념입니다. 원융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도 불립된 각종 종파불교를 묶기 위한 의상의 노력을 집대성한 사상입니다. <원융>이란, 모든 것을 하나로 둥글게 감싸서 포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여타 다른 교단의 불학들이 불법이 무엇이고, 부처의 가르침의 핵심은 무엇이다라는 것으로 의견이 분분할 때, <원융사상>은 그것을 모두 포함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공>의 진리가 있는데, 이 보이지 않는 <원융>이라는 진리에 모든 것은 포함된다고 주장합니다.

예로, 다른 교파의 모든 사상들이 바다 위에 떠있는 섬과 물고기와 영양분들이라면 <화엄종의 원융>은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바다>자체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의상은 다른 통불교적 사상들을 원효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통합하려고 하였고, 이것이 종파 불교들의 대립을 완화하는데 상당히 기여했다고 합니다.

5. 원측의 유식 불교 - 법상종

법상종의 성립 배경은 원측이 당나라에서 유식론을 배울 때로 올라갑니다. 원측은 그 유명한 현장법사 아래에서 당나라 섭론종(구유식 사상)을 배웠습니다. 유식파란, 부처의 가르침은 인식에 달려있는 것으로 실제이다라는 이론입니다. 이것은 부처의 가르침은 모두 허상인 <공>을 깨닫는 것에 있다는 <중관학파>와 대립되는 사상이었죠.

그런데, 원측은 유식학파의 <유>라는 실체 역시, <공>이라는 이념을 일부 수용해야 조화롭다고 주장하면서, 중국 본토의 스님들로부터 배척받습니다. 원측의 학파를 서명학파라고 하는데, 원측의 이론을 이단이라고 하면서 오로지 <유식>만이 진리라고 한 중국승 규기 일파를 <자은학파>라고 합니다. 이 논쟁은 일본까지 참여함으로서 국제적 논쟁이 되었는데, 이것은 곧 공유논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전술했듯이 공유논쟁은 원효가 일심론으로 해결합니다.

아무튼, 원측은 이단파가 되어 본국인 신라에 전해졌고, 이것이 제자 도증, 태현에게 전수되어 신라 법상종으로 자리잡습니다. 법상종은 유식파의 성격이 강하므로 경전을 읽거나 경전 해석을 중요시하는 <귀족>들 사이에서 유행하였고, 신라 귀족들은 법상종, 계율종을 상당히 옹호하면서 다른 사상들과 차별화하였습니다. 법상종을 실제 일으킨 인물은 진표인데, 그는 미래 부처인 미륵불이 이상사회를 건설하러 내려온다는 <상생적 미륵신앙>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신앙은 현재 귀족들이 죽어서 미륵이 머무는 도솔천에 머물게 되므로, 룻날 내려오는 미륵은 귀족과 연관성이 있음을 내포합니다.

신라에는 통일 후 5교가 있었는데, 이들은 화엄종, 법상종 외에 열반종, 계울종, 법성종이었습니다. 5교를 개관적으로 볼까요?(세부적인 것은 각 불교 각론에서 다루겠습니다.)

화엄종과 법상종은 전술했듯이, 부처가 말한 진리는 <공>이냐, <유>이냐의 논쟁으로 유명한 교단입니다. 화엄학은 의상을, 법상학은 원측, 또는 진표를 각각 조사로 합니다. 열반종, 계율종, 법성종은 불법의 요체 논쟁을 했다고 하는데, 열반종은 열반, 법성종은 불성, 계율종은 계율이 불법의 요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5교의 난립한 이념을 <십문화쟁론>으로 정리하고, <대승기신론소>에서 주를 달면서 하나로 통일(화쟁사상)한 사람이 바로 원효입니다.

6. 신라 말기의 불교 - 선종

신라 말기에는 어려운 사회상 속에서 중국에서 전래된 선종이 유행합니다. 새로운 종교인 선종은 이전의 5개 교파 불교를 모두 교종이라 부르면서, 그 불교들의 폐단을 지적합니다. 선종은 불교의 핵심은 경전을 읽거나, 사상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부처를 믿어야 한다는 원효의 <정토종> 사상을 일부 인정합니다.

따라서 선종에서는 심성을 맑게 하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경전과 상관없다(불립문자)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인간의 타고난 본성 자체가 불성임을 알면 불교의 모든 도리는 깨닫는 다는 것(견성성불)을 말합니다. 선종 경전의 암기보다 좌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중시하므로, 귀족적이기 보다는 민중적인 불교였습니다.

원래 선종은 5호 16국 시대 북위에서 <달마>가 소림사에서 개창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선종은 경전보다는 심신을 단련하기 위한 무예,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양, 자신의 본체와 내면적 기질을 알기 위한 좌선을 중시합니다.

이 선종에서는 경전을 암기한 자에게 교파의 전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이심전심이라는 방법을 활용하여, 깨달음을 얻은 자에게 의발과 바리때를 전수함으로서 다음 조사를 법조를 선발합니다.

5대 흥인 때에는 <신수>라는 아주 유명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흥인이 제자 중 한명을 다음 선사를 뽑아 전해주려고 하면서 모든 제자에게 깨달은 것을 게어(시문)로 적어 보라고 했습니다. 이 때 신수는 선사의 방 앞에다 다음 게어를 적어놓았죠.

<몸은 보리수요, 마음은 명경대와 같도다. 때때로 부지런히 마음을 갈고 닦아 티끌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꾸나>

흥인대사는 이 게어를 보고 흡족하여 제자들에게 이 게어를 종종 암기하라고 까지 하였답니다. 하지만, 흥인대사는 이 게어가 선종의 모든 경지를 설명해주지는 못한다면서 한탄하였습니다.

어느날 방앗간 소공인 혜능이 이 게어를 보더니, 글을 쓸줄 아는 친구에게 부탁하여 또 하나의 게어를 신수의 게어 옆에 붙었답니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아니고 명경 또한 집이 아니며,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으니 어디서 티끌이 생긴다는 것인가요?>

흥인대사는 이 게어를 보고 감동하여 혜능을 만나 이야기 하였는데, 이 방앗간 소공은 비록 글을 몰랐으나, 너무나 도에 대한 깨달음이 깊었습니다. 흥인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혜능의 글을 무시하면서도, 실제로는 혜능에게 선종 6대조 자리를 물려주며, 그가 다른 제자들에게 맞아죽지 않게 도피시켰다고 합니다.

이 혜능이 개창한 선종이 바로 <남종선>입니다. 남종선은 혜능의 유지를 받아 갑작스런 깨달음(돈오)을 중시하고, 왕실과 타협을 거부하는 민중 불교가 되었습니다.

반대로, 처음 게어를 걸었던 <신수>와 직계제자들은 <북종선>을 개창했는데, 이 북종선은 측천무후의 비호로 귀족불교가 되었습니다. 이 북종선은 오랜 시간 제자들과 함께 점진적인 수행을 해야 함을 주장하는데 이것이 곧 <점수>라는 것입니다. 고려 시대에 지눌 스님은 이 북종선과 남종선의 이론을 합쳐 <돈오점수>를 병행해야 함을 주장하면서 선종이론이 점차 통합되기도 하죠.

신라에서는 <남종선>을 받아들였는데, 이 것이 전국적으로 퍼진 것은 신라 말 사회 혼란 속에서 <교종 종파 5교>가 문란해진 상황에서였습니다. 선종은 각각 나말 호족들과 연합하여 <9산>이라는 유명한 절들을 세우고 호족들과 연계했습니다. 또 선종의 9산이라는 각 파는 대부분 유력 호족들의 지원을 받거나 그 자신이 호족인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신라 진골 위주의 교종세력에 대한 반발이자, 선종이라는 종교가 혜능기부터 이어온 혁신적이고 지방분권적이며, 기존체제에 대한 반발적인 효과가 크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이 정도로 정리하고 나중에 불교 각론을 세부적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힘드네요...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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