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제 테오도라 왕비 : 천민에서 황후가 된 여인 이야기

NO. 006

천민출신 황후와 그녀를 지지해준 황제의 이야기

*** 배경 : 6세기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 : 유스티니아누스 치세기)  ***

이 이야기는 6세기 동로마 제국의 위대한 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아내 이야기랍니다.

고대 찬란했던 영광을 자랑하던 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이 서유럽 지역을 장악하면서, 서로마와 동로마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리고 게르만과 투쟁하던 서로마는 5세기말 멸망하였답니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이라고도 불린 비잔티움 제국은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천년동안 로마 제국의 영광을 이어갔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서유럽과는 달리 카톨릭이 아닌 <동방정교회>라는 종교를 만들었고, 유명한 성소피아 성당을 지었으며, 훗날 유럽의 법체계에 큰 영향을 준 로마법대전을 편찬했던 유명한 황제였습니다. 이 황제의 뒤에는 현명한 조력자인 왕비가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테오도라> 황후였습니다.

테오도라 황후(가운데 : 이탈리아 라벤나, 산비탈레 성당, 비잔티움 양식의 모자이크)

동방정교회에서는 이 황후를 성인으로 여기고 11월 14일에 기념하고 있습니다. (카톨릭에서는 예수탄신이 12월 25일이지만, 동방정교회는 1월 6일 이듯이 각종 기념일이 다르답니다.)

그녀는 출생의 비밀 때문에 더 유명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가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신분을 초월한 성인으로 추앙받듯이 그녀도 전차경기장(히포드롬)에서 동물 조련을 하는 비천한 아버지를 두었기 때문이죠.

   또, 그녀는 검투사들이 피를 튀기며 싸우는 경기장에서 춤을 추며 연기하는 배우였는데 재능이 출중했다고 합니다. 당시 춤꾼(무희)이나 여배우는 매춘부와 동급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그녀를 악의적으로 보는 이들은 그녀가 아무에게나 몸을 파는 천한 여자라고 기록했지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면 소녀시대였을텐데 슬픈 현실이네요.)  

16살이 되자 그녀는 아프리카와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가 세상 경험을 좀더 쌓은 뒤,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다시 돌아와 궁전 근처에서 양모를 짜면서 소박하게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유스티니아누스와 만나게 된 것이죠. 황제는 그녀의 미모와 지성, 삶에 대한 열정을 확인한 뒤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답니다.

그녀와의 결혼을 위해 당시 귀족일 뿐이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자신의 이름으로 기존의 법체계를 바꾸는 모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회개를 하면 여배우 출신도 로마 귀족과 결혼할 수 있다는 특별법까지 만든 것이지요. 원래 로마제국에서 천민과 귀족은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황제는 자신의 삼촌까지 설득해가면서 법을 고친 후, 그녀와 결혼했답니다. 그리고 황제가 된 후 테오도라 역시 황후가 되어 '아우구스타(여제)'의 칭호를 받게 됩니다.

그 후, 38년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제위 중에 만든 많은 법들에는 테오도라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답니다. 왕비는 외국의 법들도 공부했으며, 가장 이상적이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방법으로 법령을 개정하곤 했답니다. 또한 천한 여자 출신이라는 것 때문이었는지 여성 인신매매 금지법을 만들고, 여성에게 유리한 이혼법, 성폭력금지법 등을 만들어 여권 신장에 신경쓴 여성이라는 점도 특이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법을 개정할 때엔 그녀의 입장을 지지한 황제가 있었습니다. 황제는 황후가 외교사절을 만나거나, 상인들을 통해 바깥정세를 파악하거나 할 때에도 그녀를 믿고 일을 맡겨서 처리했답니다.

그러나, 그녀가 유명해진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재위 초창기 시절의 니카 폭동 사건 때문이랍니다.

<니카>란 <이겨라!>라는 뜻으로 경기장(히포드롬)에서 외치는 일종의 구호같은 거랍니다. 롯데 자이언츠 야구팬들이 상대방에게 <마!마!> 하면서 소리치는 것과 같은 거죠.

옛 로마제국에서부터 로마의 전차경기장은 국가가 공인한 시민들의 휴식처였고, 동로마에서는 <히포드롬>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즘의 야구장과 같이 편안하게 볼거리를 즐기는 곳이었죠. 야구장에 가면 야구도 하지만, 이쁜 연예인이 시구도 하고, 재미있는 퍼포먼스도 있고, 가족의 날엔 특별 행사도 있고, 치어리더도 있죠? 또 먹을 것도 먹을 수 있구요.

   히포드롬(hippodrome) 유적지 : 히포는 말이라는 뜻. 드롬은 돔(경기장)이라는 뜻.
   즉, 마차경기를 주로했다는 뜻으로 지어진 경기장으로 터키어로는 '말의 광장' 이라는 뜻이다. 당시에는 400개의 계단에 20 여만명을 수용할 수 있었던 최대 규모의 경기장이었다고 한다.

히포드롬은 그 모든 재미를 충족시켜 주는 곳이랍니다. 전차경기를 주로 했지만, 검투사들의 생사를 건 싸움에 돈을 걸기도 했고, 맹수들의 싸움을 볼 수도 있었죠. 또, 무희나 여배우들의 공연을 보면서 욕을 하거나 먹을 것을 던질 수도 있었고, 서커스를 보면서 빵을 먹을 수도 있었죠. 특히, 정치적인 변화에 민감한 시민들을 공짜표를 줘서 경기장에 묶어두고 공짜 음식을 주면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올라갈 수 있었답니다. 이것을 <빵과 서커스 정책>이라고 불렀죠. (이것을 처음 시도한 사람은 로마 공화정의 카이사르(시저)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차싸움이나 검투사 싸움이 계속되면서 경기를 보는 사람들도 편이 갈렸답니다. 요즘도 야구장에 가면 각 팀의 팬들이 팀의 색깔을 상징하는 유니폼이나 응원막대, 비닐 봉지 등을 가지고 다니죠? 로마 시민들도 전차경주의 기수가 입는 옷 색깔에 따라 흰색파, 붉은색파, 청색파, 녹색파 등 4가지 파가 생겼답니다. 이 중 청색파와 녹색파는 계급도 다르고 진보, 보수적인 성향도 달라서 축구장의 홀리건처럼 툭하면 난동을 부리고 심지어 폭동까지 주도하곤 했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처음에 청색파와 손을 잡고 진보적 개혁을 하려고 했지만, 그의 개혁이 너무 과격했고 왕비마저 비천하다보니 청색파와 녹색파 모두 황제의 개혁을 의심하고 반대했답니다. 그 결과 황제가 주관한 기념행사에서 이 두 파 모두 니카 니카!(이겨라, 이겨라!)를 외치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황제는 제위 5년만에 은신처로 피난갈 준비를 했죠. 그러나 테오도라 황후는 피난을 결사 반대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권위를 잃고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답니다. 황제여, 생명에 연연하여 몸을 떨고 계신다면 필연코 비참한 망명생활의 끝에 불명예스러운 죽음만이 남을 것입니다. 황제의 자리란 영광스러운 무덤이랍니다. 황제의 자주색 옷이야말로 (쳥색이나 녹색을 비롯한) 어떤 색깔보다도 위대한 영광스런 색의 옷이랍니다.>

그녀는 피난을 결사 반대하였고, 아내에게 감동을 받은 황제는 벨리사리우스 장군에게 결사병을 이끌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 결과 정예병 단 3천명의 결사항전으로 폭동을 진압할 수 있었죠.

그러나, 그토록 현명하고 지혜로웠던 그녀도 황제와 뜻이 다른 부분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종교> 부분이었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주장한 <양성론>을 주장했답니다. 양성론이란, 예수는 신성과 인간성 모두를 갖추었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 하나님 자신이라는 주장이었죠. 그러나 테오도라 황후는 <단성론>을 주장하는 사람이었답니다. 단성론이란, 예수는 인간과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신성만이 존재할 뿐 인성은 모두 허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녀는 단성론자였지만, 남편의 주장을 대립하지는 않았답니다. 단지 단성론자들에 대해서 탄압하지 말 것을 주장하는 법령 정도를 만드는 것에서 타협을 했죠. 그리고 남편이 동방정교회의 수장으로서 행사하는 것을 지원하였습니다.

동방정교회는 서유럽 교회의 카톨릭과 교리가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틀린 것이 있다면 <자율성>을 크게 강조한 점 정도이죠. 카톨릭은 교황-주교-사제 등 서열이 확실하지만, 동방정교회는 이 것에 반항해서 개별 교회의 자율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따라서 카톨릭에서 교황을 교회의 수장으로 하는 것도 동방정교회는 반대했답니다. 교회는 개별적으로 대우받으며, 그것을 통제하는 권한은 국가의 수장인 <황제> 일뿐, 교회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동방정교회는 예배 언어도 자유롭답니다. 카톨릭은 라틴어로 예배를 드리지만, 정교회는 각 국가의 모국어로 예배를 드릴 수 있죠. 또 카톨릭이 성모 마리아와 같은 성상을 숭배하는 것을 정교회에서는 <우상 숭배>라고 생각해서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같은 하나님을 모시는 두 종교는 결국 <교회 수장의 문제와 성상 숭배의 문제>로 대립하다가 갈라서게 된답니다. 

  ( p.s : 동방정교회는 카톨릭과 예배형식이 다르고 자율성이 강조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정통 교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십자성호를 긋는 것은 카톨릭과 똑같이 했답니다. 단, 카톨릭은 머리에서 복부로 그은 뒤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로 십자성호를 긋지만, 정교회는 머리에서 복부로 그은 다음에 오른쪽 어깨에서 왼쪽 어깨로 십자성호를 긋는답니다. 똑같이 하더라도 차별성은 반드시 두는 것이죠.)

황후는 단성론을 주장했기 때문에 서방교회와 동방정교회가 이념까지도 달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는 단순히 <자율성>의 차이일 뿐, 예수의 신성이나, 성자성부성령의 문제 등 이념은 절대 건드릴 수 없다는 입장이었죠. 결국 황후는 황제의 뜻을 따르기로 했답니다.

이렇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곁에는 38년간의 통치를 조력한 현명한 황후가 있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황제를 돕고, 나서지 않아야 할 때는 적당히 타협할 줄 알며, 황제가 옳다고 생각할 때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는 현명한 황후. 그리고 신분의 차이를 넘어 그녀를 사랑했으며, 마지막까지 그녀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존중했던 황제.

이들의 사랑과 믿음이 이후 동로마 제국이 천년을 유지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비잔티움 최고의 황제이자 정교회의 성인으로 만든 것이 아닐까요?

   그리스 정교를 상징하는 하기야-성소피아 성당 : '그리스도의 경배' 라는 뜻을 가진 성당이다. 외부가 둥근 돔으로 되어 있어서, 히포드롬의 돔과 마찬가지로 비잔틴 문화의 특징인 돔을 볼 수 있다. 그러나 15세기 오스만투르크가 점령하면서 이슬람식으로 주변에 4개의 미나렛(첨탑)이 추가되었다. 원래 내부 벽에는 모자이크 양식의 무늬가 있었지만, 이슬람의 메카 방향을 가르키는 키블라(금글씨로 적은 코란 내용)가 걸렸다.

   (p.s : 이슬람 교도들은 메카 방향을 가르치는 표식을 곳곳에 남긴다. 하루 5번식 메카를 향해 절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삼성 애니콜 핸드폰이 이슬람권에서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어느 곳에서든 메카 방향을 가르쳐주는 나침반 기능을 핸드폰 기본 기능에 넣어두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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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