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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풀이/히스토리아 역사 스토리

단일민족은 무엇이며, 우리는 단일민족인가? 우리는 단일 민족인가? 1. 단일 민족이 뭐야? 한민족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단일민족이다. 우리는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 이 말에 대해서 혹시 의심을 가진 적이 있는가? 우리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주장한 사료는 에서부터 비롯된다. 삼한 70여 소국도 모두 단군의 자손이라고 주장했으니까... 그러나 우리는 종종 의심하곤 한다. 뭐야? 수백번의 외침을 당해 서로간의 민족이 섞였을텐데... 고대에는 국가 경계가 없어서 민족간 이동이 많았을텐데... 고대인들 스스로가 민족이라는 개념이 있었을까?... 등등 의심은 끝이 없다. 또 한국성 중에서는 중국성씨도 많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가 대체 유일한 단일민족이라는 대책없는 자부심의 근원은 무엇인가? 일단 우리가.. 더보기
라벤나의 위치와 역사 라벤나 라벤나는 이탈리아 북동부 에밀리아로마냐 지방 라벤나 주의 주도입니다. 아드리아 해 근처에 있는데, 5세기에 호노리우스 황제가 수도를 옮기면서 서로마 제국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그 후 서로마제국은 멸망하였고, 6~8세기 동고트족의 이탈리아 왕국과 비잔틴 제국령 이탈리아의 수도가 된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입니다. 라벤나에 최초로 정착한 주민은 BC 1400년경 아퀼레이아에서 남하한 이탈리아 반도의 종족들로 추측되며 에트루리아인(人)과 갈리아인이 차례로 점령했었다는 말도 전해집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곳에서 약 5㎞ 떨어진 곳에 클라시스 항구를 건설했고 BC 1세기 경 라벤나는 로마의 중요한 해군기지였습니다. 402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 호노리우스가 수도로 삼아 웅장한 기념물을 많이 세웠습니다... 더보기
테오도스우스 황제의 죽음과 로마의 멸망 테오도시우스의 죽음과 로마의 멸망 1. 테오도시우스 1세의 죽음과 로마의 변화 동로마의 테오도스우스황제는 테살로니카 폭동을 제대로 진압하고 이민족을 우대하고 이민족과 로마인이 평등하다는 기본 방침에 어긋나는 로마인들을 가차없이 죽였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황제권이 약했던 서로마의 발렌티니아누스는 이런 조화로운 정책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프랑크족 장군인 아르보가스트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르보가스트의 반란은 종교문제 때문입니다. 아르보가스트는 이교도인 게르만이었고,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아리우스파 등과 싸우은 교리 싸움을 지겹게 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경멸하면서 이교도를 믿는 유게니우스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지요. 테오도시우스는 이러한 상황을 묵과할 수 없어서 서로마로 쳐들어갔습니다. .. 더보기
테오도시우스 1세의 기독교 국교화 정책의 이유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와 이민족의 로마 1. 테오도시우스 1세의 이민족 융합 정책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동쪽으로 수도를 옮긴 후 2개의 로마가 되었을 때, 동로마에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로마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했던 황제였습니다. 이당시 서로마 제국에서는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막스무스라는 반란군 때문에 동로마로 피신해 있었는데,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서로마 발렌티니아누스 2세의 여동생(갈라티아)에게 반하여 그녀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역적 막시무스를 치기 위해 서로마로 진군했지요. 당시 로마는 이미 고대 제국의 영광이 사라져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동로마, 서로마는 모두 게르만 용병을 동원하여 공격과 수비를 하고 있던 시기였지요. 당시 동로마는 주력부대가 고트족 부대였습니다... 더보기
탈레스와 철학의 기원 1. 탈레스는 누구인가? 탈레스(B C 640-545) : 밀레토스학파의 선두주자, 통상 철학의 시조로 숭상됨 탈레스는 기원전 6세기 무렵 살았던 그리스의 철학자입니다. 그는 이오니아의 밀레토스 사람으로서 밀레토스 학파의 창시자라고도 부르죠. 그는 최초의 자연철학자라고도 불립니다. 아리스토텔레서는 그를 철학의 아버지라고 까지 말하기도 하였죠. 탈레스의 사상은 그 사상 자체의 위대함이라기 보다는 서양철학사에 있어 학문적으로 철학이 무엇인가를 밝혀준 최초의 등불같은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위대한 사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주와 만물은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를 최초로 연구한 사람이 바로 탈레스이죠. 탈레스는 일단 우주의 생성원리를 물에서 찾은 최초의 자연주의 철학자입니다. 2. 아르케는 곧 물이다. 그는.. 더보기
러시아사 11 - 3월혁명, 11월혁명, 카데츠, 볼셰비키, 레닌의 집권 러시아 혁명 러시아 혁명의 배경은 1차 대전의 참전입니다. 1차 대전이 장기화되고, 전쟁 상태가 참호전 상태로 고착화되면서 파업과 폭동이 빈발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주의자인 르포프가 혁명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이것이 3월 혁명입니다. 3월 혁명으로 러시아 로마노프 종말을 고합니다. 입헌민주당은 소비에트를 조직하여 모든 시민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부여할 것을 약속하였고, 제헌의회 수립도 약속하였습니다. 또 국민들에게 황실과 수도원의 토지를 몰수하고 농민에게 분배할 것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3월혁명의 소비에트 정부는 문제가 많았습니다. 이미 심각한 경제난 속에서 기강이 해이해진 군대로 전쟁을 수행해야 했고, 러시아 민중 자체가 자유가 무엇인지 경험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무지한 국민들.. 더보기
러시아사 10 - 러시아 산업혁명 러시아의 산업혁명과 자유주의 운동의 좌절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뒤 알렉산드르 3세는 극단적 반동정치의 강화와 자유주의의 탄압을 시도합니다. 알렉산드르 3세기는 러시아의 산업혁명기라는 사실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즉, 석탄지대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석유를 산출하였으며, 강철과 포를 생산하였고, 이러한 자원을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함으로서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습니다. 또 도시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고,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시도가 많아져 어느 때보다 파업이 빈발하였구요. 이러한 사회변화를 통하여 러시아에 정당제가 확산됩니다. 즉, 사회민주당이 조직되어 마르크스주의가 확대된 시점이 이 때이며, 또 레닌이 볼세비키당을 만든 때도 이 때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의 설립은 러시아의.. 더보기
러시아사 9 - 알렉산드르 2세 알렉산드르 2세(1855~1881) 알렉산드르 2세는 개혁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전왕대 크림전쟁의 비참한 패배를 구경하였기에 내정개혁의 필요성 및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모든 것을 시도하려고 하였습니다. 먼저 그는 유럽에 대한 여행을 완화하고, 정치범들을 석방합니다. 또 출판물에 대한 검열도 완화합니다. 특히, 그는 농노해방령을 내립니다. 이것은 모든 농민을 해방시키고, 각 농가는 일정한 토지를 할당받는 것으로서 러시아의 민중이 정말 오랜 시간 투쟁한 결과의 성과였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많았습니다. 왜냐면 종래 가진 토지는 이미 지주에게 빼앗긴 경우가 많았고, 새로 할당된 토지는 장기간 상환금이 부담되어 있는 토지라서 매입금 부담이 큰 것이었습니다. 또 할당된 토지가 농촌공동체(미르)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 더보기
러시아사 8 - 니콜라이 1세 니콜라이1세 19세기 러시아는 농노제적 후진사회가 계속되었습니다. 알렉산드르 1세는 이러한 러시아를 개혁할 방안을 찾았는데, 이것이 내각제를 도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내각제를 도입하여 새 관료조직을 마련하면 사회개혁을 될 것이다... 라는 것인데, 문제는 이것을 토지 귀족이 오히려 독점하였다는 것입니다. 즉, 전제적인 지배는 계속되는데, 그 형태만 바뀌어서 토지귀족이 직접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토지귀족이 관료조직을 통해 국가를 다스린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유럽의 자유주의 물결은 계속 러시아로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19세기 일부 토지귀족과, 젊은 장교, 대학생 등의 지식인들은 농노제 및 전제정치 폐지를 희망하여 비밀결사조직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이 추진한 것이 데카브리스트의 난입니다. 이 난의 주체.. 더보기
러시아사 7 - 푸가초프의 대반란 푸가초프의 대반란 에카테리나 2세(바로 위의 글)는 농노제는 계속 강화하였습니다. 국유지를 귀족에게 주면서 반면 농노가 증가하였죠. 귀족은 병역과 세금이 면제되면서 농노는 힘들어지고 영주권은 절대적인 권한이 되어갑니다. 즉, 지배층인 귀족과 민중과는 엄청난 간격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회적인 모순으로 대두하면서 이라는 사건을 초래하게 됩니다. 푸가초프는 스스로를 표트르 3세라고 말하였습니다. 표트르 3세는 부인인 에카테리나와 군대 장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것을 앞에서 설명하였죠? 표트르 3세가 무언가 농민들을 위해 개혁하려다 죽었다는 설이 유포되자 푸가초프는 스스로 황제라 말하며 농민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인 이유는 그 규모나 잔인함이 도를 넘어서기 때문이죠. 즉, 모든 귀족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