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퀴즈) 역사로 정리해보는 불교 이야기 제 1부. 불교 탄생 이전의 종교 이야기 : 브라만교 - 부분입니다.
1-3장까지 핵심 내용을 문제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차한잔 하시면서 풀어보세요.
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1화. 삼장법사의 구법여행과 훗날 등장한 손오공 이야기

1. 진정한 종파불교로 거듭난 불교

오늘 이야기는 중국 불교의 전성기인 <당나라> 시기의 이야기이다. 이 시기는 중국 종파 불교가 완성되어 다양한 불교사상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일단 간략하게 중국 역사를 살펴볼까?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불교의 전파와 관련된 중국 역사는 <한>나라부터이다. 그러나, 유학이 국교로 지정된 한나라 시기에 불교는 도가와 마찬가지로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반도, 왜 등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도무 <혼란기>였다. 혼란한 시기에는 새로운 국가 철학이 필요했고 불교가 유교를 대신하여 그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낸 것이다.

그러나, 초기 불교의 문제점은 불교와 국가 권력이 너무 밀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보다는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했다. 구마라집 이후 끊임없이 시도된 <불교의 참뜻 찾기 프로젝트>는 국가 불교에서 벗어나려는 불교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의 혼란기 속에서 불교의 독자성을 유지하기란 어려웠다. 불교가 진정한 <종파 불교>로 탄생한 것은 통일 국가인 <수, 당> 나라 시기였다.

<수>나라의 <천태종>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했었다. 그러나, 수나라는 통일후 성급한 <통일 정책>으로 망하였다. 결국 수 왕조는 이종 사촌인 이연이 건국한 <당나라>로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가 진정한 중국의 종파불교 시대이다. 오늘부터 이야기 할 주제는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던 <당>나라 시기의 종파 불교 이야기이다.

2. 각 종교간에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불교의 역사와 종파관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그 이론이 심오하다. 그렇다고, 역사를 통해 간략히 보는 종교인데 심오한 철학 하나 하나를 다룰 수도 없다. 그걸 다루기 시작하면 <불교 방송>이야기가 될 것이고, 그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당나라까지 불교의 전파과정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복습해보자.



지금까지 전개한 중국 불교사의 이야기는 이렇다.

인도에서 <보살>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대승불교>가 간다라 미술 전파와 함께 동아시아로 넘어왔다. 그런데, 보살이란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승>을 말하며, 그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민해야 할 철학이 반야(지혜)였다. 그 반야 사상의 핵심이 바로 <공> 사상이다.

혼란기의 중국인들은 <공> 사상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도가의 <노장사상>을 활용하여 부처의 사상을 이해했다. 도가 사상으로 불교철학을 이해하는 것을 <격의 불교>라고 한다.

그러나 구마라집이 인도 대승 경전을 번역하면서 도가를 벗어나 독자적인 중국 불교 철학이 시작된다. 그 중에서 반야사상을 강조한 학파는 삼론종으로, 깨달음과 열반을 강조한 학파는 열반종으로, 아미타불 같이 보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학파는 정토종으로 발전해갔다.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반야과 깨달음을 동시에 감싸안으려는 학파가 등장했으니, 그들이 바로 천태종과 화엄종이다.

반면, <이러한 지식들이 과연 부처가 처음 말한 진리와 같은 것일까? 너무 한쪽 측면에만 치우친 것은 아닐까?> 는 고민을 안고, 다시 인도에 불법을 찾아 떠난 이가 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이다. 현장은 <공> 사상에만 치우친 중국 불교에 <공> 사상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유심> 사상을 상기시켰다.

초기 격의 불교 시대에 번역된 불경을 고역경,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경을 구역경이라 한다면, 현장이 번역한 불경을 신역경이라고 한다. 성경에 구약, 신약의 시대가 있듯이, 불법의 시대도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야 할까?

3. 현장(602-664)의 구법 여행이 시작되다!

중국 당나라는 세계 불교사를 통털어 가장 활발한 불법 종파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이론을 쌓아온 불교의 각 학파들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종파>를 만들었다.

그러나, 종파가 많아질수록 더 큰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석가의 참 뜻은 무엇일까? 각 종파들은 자신들이 석가의 참 뜻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석가의 가르침이 이렇게 다양할 수가 있을까?

수문제 때 태어난 현장은 20살 때 출가하였다. 하지만, 어느 한 종파의 이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여기 저기 학파들을 돌아다니던 현장은 점점 실망하였다. 사상적인 체계도 서로 다르고, 같은 불경을 놓고도 종파의 입맛에 따라 해석이 달랐다. 왜 일까? 왜 석가의 마음이 이렇게 나눠진 것일까?

현장이 생각한 종파들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면서 코끼리를 설명하는 것과 같았다.> 코끼리의 코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라 말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의 본체라고 말한다. 작은 인간이 커다란 코끼리의 본체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장은 석가의 참 뜻이 담겨있는 인도 원전들을 직접 보고, 자신이 다시 해석하기로 결심한다. 쉽게 말하자면, 국내에서 영어를 백날 해보았자 발음도 안되고 무슨 뜻으로 생긴 말인지도 모르니, 영어 원조 국가에 가서 직접 배우자는 것이다. <국내파>로는 안되니 <유학파>가 되어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이랄까? 그리하여 그 유명한 삼장법사의 서역 이야기가 629년에 시작된 것이다.

<서유기>에서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라는 동물들이 현장법사를 따라 서역으로 떠난 것이라고 나온다. 물론 소설이니까... 그러나, 실제 현장의 구법 여행은 서유기의 이야기처럼 괴수들을 무찌르며 진격한 그런 여행이 아니였다.

일단 인도로 가는 길부터가 너무나 험했다. 산넘고, 물건너 가야 하는 길은 여행자가 아닌 스님이 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냥 가라고 해도 어려운 길인데, 현장법사의 출국을 막는 중국 수비대가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국제적인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동으로는 한반도와 왜, 서로는 이슬람 국가들, 남으로는 인도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따라서 너무나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당나라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당나라 정부는 모든 입출국자를 국가차원에서 통제하려고 하였다. 특히 당의 토지세법은 조용조 제도였는데, 이 제도의 핵심은 토지세와 인두세였다. 즉, 자신의 토지에서 떠난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는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현장은 국외로 빠져나가면서 국경수비대와 자주 마찰을 일으키고, 도망다녀야 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북한을 연구하는 연구소 직원이 정부 몰래 북한에 가서 현장조사를 하고온 것과 같은 것이다. 당나라 처럼 말로만 세계화를 외치는 이명박 정권에서 이런 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바로 징역형이다.

현장법사는 외친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랴?> 멋진 말씀이시다. 그 유명한 <대당서역기>는 불법을 찾기위해 국가가 만든 보안법을 위반한 한 승려로부터 출발한다.

현장법사는 죽을 고비를 몇차례 넘기고 겨우 중국 국경을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인가?

인도로 가는 동안 그는 천국과 지옥을 수 없이 경험해야 했다.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지역에서는 그의 여행을 반길리가 없었다. 불교를 숭상하는 지역에서는 그를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해주었다. 그는 결국 인도로 도착하여 석가가 수련했다는 보리수 밑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생각했다. <앞서간 사람들을 볼수 없듯이 뒤따라 올 사람을 만날 수도 없구나>

석가에 참 뜻을 구하고자 인도에 왔어도 석가는 그곳에 없다. 그의 흔적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훗날 이곳을 다시 찾아올 구법 여행자들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는 석가에 대한 기록을 찾아 실제 뜻을 연구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난타사에서 1만명의 수도승 중 최고 대우를 받으며 5년간 불법을 연구하고, 강론하였다. 인도에서는 그를 최고 고승으로 생각하며 존경하였고, 불법에 대한 열정은 주변국까지 알려졌다. 당시, 인도의 구마라왕은 그를 자신의 국가에 데려오기 위해 큰 전쟁을 할 정도였다. 그는 16년간의 파란만장한 인도생활을 마치고 중국 장안으로 돌아와 <대당서역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도에서 가져온 수많은 범어 경전을 해석하여 1335권을 번역하였다. 그 숫자상으로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권 한권 정확한 석가의 뜻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더 놀랍다고 한다. 16년간을 인도의 수많은 학자들과 같이 밥을 먹으며 석가의 참 뜻을 토론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4. 현장(602-664)의 이론체계를 완성한 <법상종>

 
현장이 16년간 공부하고 토론하여 얻은 결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과 쌍벽을 이루는 <식> 사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중국의 대승불교는 대부분 구마라집의 해석어거나, 그의 제자들로 시작된 불경 번역이었다. 너무 한편으로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구마라집의 핵심 사상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이었다.

그 핵심은, 만물은 돌고 돌기 때문에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은 곧 있는 것이라는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현상계의 자연현상을 놓고 <공>을 다루는 것이었다. 돌고 도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자, 자연의 법칙이다. 대승불교의 <용수>가 주장했던 것도 이런 입장의 <공>이었다.

세상은 돌고 돌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나란 존재는 죽으면 흙이 되고, 물이 되며, 그 흙과 물은 곡식이 되고, 곡식을 먹은 남자와 여자에 의해 다시 생명으로 태어난다. 즉, 나란 내가 아니며, 내가 아닌 흙과 물이 곧 나인  것이다. 결국 눈에 보이는 사물의 본질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은 우주나 자연보다는 인간의 마음에서 <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 대승불교의 대표 철학인 <유식>을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중국 내부에서도 성실종, 지론종 등의 학파가 <인간의 마음>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류 학파는 아니였다.

그러나 현장의 <유식> 사상은 본질이 없다는 <공> 사상이 아니라 실체가 있다고 말하는 <공> 사상이였다.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은 모두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다. 밧줄을 보고 뱀이라 생각하여 놀라는 것은 마음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진정한 실체는 존재한다. 그러나, 머릿속에 편견과 욕망이 많을수록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 밧줄을 밧줄이라고 보았을 때 실체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실체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다.

결국, 현장이 생각한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있지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주의 모든 현상은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철학을 <만법유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마음>을 강조하는 현장의 철학을 이어받은 제자 기(자은법사)는 스승의 철학을 <법상종>이라는 종파철학으로 발전시킨다.

법상종의 철학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 법상종의 기존 유식철학은 <마음>에 따라 불교 교리의 발전을 3단계로 나눈다.

1단계는 나란 존재가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버리는 초기의 <공> 사상이다. (석가철학의 아함경)

2단계는 모든 존재가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버리는 <반야>의 진리를 깨닫는 단계이다.(반야경)

3단계는 결국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므로, 실제하는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실제하는 본질은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화엄경)

결국 법상종은 기존의 <공> 사상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진다는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대에, 사상을 받아들인 학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열반종, 천태종, 밥상종의 교리를 한데 모아 큰 통합을 이루려는 <화엄종>이었다. 화엄사상은 바다와 같다. 각 종파가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이라면, 화엄은 그 모두가 뛰어놀고 있는 그 바다 자체를 지향하는 통일 종교였으니...

현장의 유식 이론은 법상종으로 이어졌으나, 그 끝은 결국 화엄종으로 귀결되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다른 종파들이 결국 화엄의 철학으로 녹아내렸듯이 법상종의 철학도 결국 모든 것은 하나라는 화엄의 <원융사상>으로 녹아내리게 된다.

당이라는 역사상 유례없이 번성한 통일왕조에서 필요했던 불교는, 모든 혼란기의 사상과 당대 사상까지 통합한 화엄종이 아니였을까? 다음 장에서는 화엄종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5. 대당서역기가 서유기로....

서유기는 명나라시대 오승은이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 오승은은 현장의 구법여행을 토대로 이 소설을 적었다.

총 100부작인 서유기는 총 3부의 내용으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가 손오공의 탄생 이야기, 두 번째가 현장의에게 구법의 의무가 주어지는 이야기, 세 번째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함께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제천대성 손오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손오공의 탄생 설화와 하늘에서의 난동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중국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라 현장 시대의 이야기 외에도 많은 민간 설화와 민간 종파의 이야기가 숨어 있으며, 불교의 많은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로, 손오공이 보살들에게 대들 때, 보살들의 손에서 큰 <인장>이 나온다. 인장은 도장을 말한다. 원래 <인>은 다양한 손모양을 토대로 보살들의 언어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로, <항마촉지인>을 들어볼까?

위의 손 모양이 항마촉지인이다. 이것은 검지를 뻗어 손을 아래로 내리는 일종의 <수화>이다. 석가모니가 보살일 때, 마왕이 석가모니를 시험에 들게 하였다. 마왕이 말하기를,

<당신이 엄청난 공덕을 쌓은 것을 증명해 보이시오.> 라고 협박을 하였다.

석가모니는 오른손을 땅에 대어 <이 대지가 증명할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그 순간 땅에서 <땅의 신>이 튀어나와 부처님의 은혜로운 삶을 증명해주었다. 마왕은 항복하였고 이 때부터 <항마촉지인>은 보살이 적을 무찌르는 손 모양이 되었다.

<선정인>은 부처가 깊은 선정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전륜법인>은 부처가 맨 처음 설법하던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지권인은 왼손으로 부처님 세계를 오른손으로 중생 세계를 표현하여 두 세계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수화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설정은 손오공을 <불법>과 대비되는 도사의 이미지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의 불교이야기를 하면서 핵심주제의 하나로 <불법과 도가>의 폐불사건들을 다루었었다.

그런데, 초기 망나니같은 손오공은 <도사>의 신비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머털도사처럼 머리카락을 뽑아 숫자를 늘린다는 기술은 초기 도가인 <오두미교>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술이다. 구름인 <근두운>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설정은 손오공이 학과 구름을 벗삼아 사는 신선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 <도사> 세력을 쳐 부수고, 불법의 <인장>이 승리한다. 즉, 보살이 도사를 이긴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손오공은 도사이므로 죽지 않는다. 그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도와 불법을 찾는 다는 내용은, 초기 도가 사상을 받아들인 불교가 도가를 발 아래 두고 불법의 진리를 찾는다는 역사적 상황과 맥락이 같다. 손오공의 이름 자체가 <공손하라>는 의미인 것은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손오공의 머리에는 금제가 있다. 불법을 벗어날 때 마다 고통이 찾아온다. 자비로운 삼장은 진정한 불법을 찾으면 금제를 풀어준다고 말한다. 도가에서 벗어나 진정한 불법을 찾고자 한 현장은 <독자적인 불법>을 찾은 뒤, 손오공을 풀어준다. 그러나, 손오공은 이미 불법에 빠져 버렸다.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는 현장법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 중국에 진정한 불법이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진정한 부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삼장법사>는 서역에 가서 불법을 전해받아야 한다. 그런데, 악의 무리들이 그 과정을 방해한다. 그 악의 무리들은 여러 갈래이다.

같은 불교이면서도 불법의 참 뜻을 모르는 무리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삼장의 참 뜻을 모른다. 반대로 우마왕같은 존재는 인도 바리문의 <소 숭배>를 생각나게 하면서도 반대로 농경사회인 중국의 전통을 상징하기도 한다. 처음에 우마왕과 싸우던 손오공이 우마왕과 형제가 되는 설정은 특이하지 않는가?  또, 신선술을 부리며 각종 동물이나 괴물로 변하는 도가의 술법을 쓰는 자들도 있다.

저팔계’는 저속한 마음의 욕심을 이겨내려면 여덞 가지 계율, 즉 ‘팔정도를 이루라는 뜻이고, 사오정은 맑은 마음을 가져야 깨우칠 수 있다는 불교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

사실 서유기는 불교식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이 작품이 명나라 때 쓰여진 관계로, 당나라 당대 불교의 교파들 보다는 훗날 밀교화된 불교 상황을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아미타불>과 같은 정토종 성향이 상당한 강하다. 백성들이 읽는 고전 작품이기 때문에 심오한 교리보다는 <아미타> 신앙과 같은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손오공이 알게 된 불교는 심오한 교리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 알게된 <깨달음>이지 않는가?

또, 이 작품은 명나라 당시 부패한 사회상과 나쁜 관료들을 우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 풍자의 방식으로 불교적인 사상이 덧붙여진 것이다. 암울한 현실을 직접 비판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신비하고 가벼운 모험 스토리로 풍자하는 것이 일반인들 읽기에 편하지 않겠는가?

서유기는 보살이 나오는 이야기 같으면서도, 유교, 불교, 도교의 모든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하지만, 현장법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괴물들을 물리치는 과정과 방법은 도교식이지만, 그 원리는 불교식이다. 현장은 모든 괴물들도 사실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용서가 가능하다는 <열반종>의 불성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악>은 악일 뿐이기에 퇴치해야 한다는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현장은 모든 것이 마음에 달린 것이라고 말하며, 법상종과 화엄종의 핵심 교리인 <일체유심조>를 주장한다.

실제 대당서역기와 서유기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불교의 진리가 무엇인지 찾으려하는 현장의 마음 만큼은 서유기에서도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닐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대당서역기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현장 (서해문집,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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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의 치: 위대한 정치의 시대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멍셴스 (에버리치홀딩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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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 3: 치세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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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나채훈 (씽크뱅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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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계환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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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 (논술프로그램세계명작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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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은 서천으로 갔다(서유기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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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홍상훈 (솔,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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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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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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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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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뜻깊은 불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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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계환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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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불교와 유식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일지 (세계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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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8화. 인도식 불교가 중국식 불교로 바뀌다.

1. 구마라집(구마라습 : KUMARAJIVA, 344-413) : 중국 중관사상의 아버지

도안과 혜원이 격의 불교 수준의 중국 불교에 새 바람을 넣으려 했다면, 구마라집은 대승불교의 <공>사상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정리한 사람이다. 구마라집에 의해 중국 불교는 인도에서 전래받는 수준을 뛰어넘어 중국 고유의 토착 불교로 자리잡게 된다.

<구라마집 상>

구마라집은 중앙아시아 쿠챠국의 왕족이었다. 공주였던 어머니는 어린 라집을 불교에 입문시켰고, 최고의 불문 법사들 라집을 지도하였다. 라집은 박학다식한 불교 이론을 접하였다. 불교 뿐만 아니라 베다의 천문술, 수학, 음양오행, 힌두이즘 등 다양한 학문을 익혔다.

당시 5호 16국 시대에 북방을 주름잡던 전진왕 부견은 라집을 모셔오라고 했다. <도안>과 함께 <라집>까지 있다면, 불교의 참뜻을 알 수 있을 뿐 이나라, 불법의 신이 전진의 호국신이 될 거라는 믿음도 있었기 때문이다. 도안 역시 라집을 만나 진정한 불교의 참 뜻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이들의 만남을 거부하였다. 라집은 전진의 수도 장안으로 오는 과정에서 양주에 갖히게 된다. 불교를 싫어하는 이들이 그를 가둔 것이다. 17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도안과 부견은 모두 사망하였다. 결국 라집은 전진을 계승한 후진의 왕 요흥이 전쟁까지 불사하는 의지를 보이고서야, 장안에 겨우 오게 되었다.

구마라집이 중국 불교사에 중요한 인물이 된 이유는 긔의 <불경 번역> 때문이다. 라집은 방대한 지식을 총동원하여 중국인들에게 대승 불교의 핵심인 <공> 사상과 <반야>가 무엇인지를 이해시켰다.

중국에서는 구마라집을 기준으로 불경 번역의 단계를 나눈다. 성경이 예수를 기준으로 구약과 신약을 나누듯, 라집의 불경 번역이 중국 불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이다.

중국사에서 구마라집 이전에 번역된 불경들을 <고역경>이라고 한다. 그리고,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경은 <구역경>이라고 한다. 구마라집 이후에 당나라 현장법사가 번역한 불경을 <신역경>이라고 한다.

구마라집은 격의 불교 수준의 중국 불교를 탈피하여, 중국 불교 수준을 인도 대승불교 수준으로 업그레이드 시킨 인물이다. 대표적인 그의 번역서는 <대승론>, <반야경> 등으로 이것은 인도 전통 대승불교를 확립한 <용수> 등의 중관 사상을 중국에 그대로 이식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그는 6바라밀의 핵심사상은 <반야>가 어떤 지혜를 갖는지, <공>이라는 것이 <연기설, 업설>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였다.(2-3화의 인도 불교 이론 참조)

이렇게 해서 중국에서도 대승불교의 중관학파가 탄생하게 된다. 이후, <공>사상을 바탕으로 진정한 불교이론을 갖춘 <삼론종>이 등장한 것이다.

구마라집의 불경 번역은 중국 불교 사상에 수많은 철학이 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구마라집이 대승 불교의 원전을 번역했기 때문에 대승 불교 교단이 난립하게 된 것이다. 중국의 혼란기인 남북조 시대가 되면, 삼론학파을 필두로 열반학파, 성실학파, 섭론학파, 지론학파 등이 등장하게 되고, 수,당시기에는 삼론종, 사론종, 성실종, 천태종 등 종파까지 등장하게 된다.

2. 승조로부터 시작된 <삼론종>

구마라집에게는 구름과 같이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 제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승조와 도생이다.

승조와 도생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승조는 책을 베껴적는 필사 일을 하면서 근근히 생계를 이었는데, 책을 필사할수록 그는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승조는 <노자와 묵자>의 사상을 가장 좋아하였다. 특히 민중적이라는 점은 노자와 묵자의 공통점이었다. 그런데, 더욱 민중적인 종교가 있었으니 <불교>였다. 그는 구역경 중의 하나인 <유마힐경>을 읽은 뒤 감동을 받아 불교에 입문하였다. 

라집의 제자로서 격의 불교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고, <공>사상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밝히던 그는 라집의 사상체계를 중국인들에게 전파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서구로 따지면, 예수의 철학을 알리려는 사도 바울과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는 구마라집의 제자로서 수많은 불경해석을 하였다. 구마라집은 <공>에 대한 이해가 가장 확실한 제자라고 그를 극찬하였다. 불교철학사에서 그가 지은 <반야무지론, 부진공론, 물불천론> 등은 이후 중국 대승 불교사에 큰 영향을 준 책이었는데, 그 중 <부진공론>은 삼론종의 이론적 근원이었다.

승조는 인도의 중관학파의 <공> 사상에 구마라집의 <해설>까지 더하여 중국 특유의 대승불교 학파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삼론학파>라는 연구 단체였다. 훗날, 삼론학파의 철학이 수, 당 나라 시기 정착되어 <삼론종>으로 발전하게 된다. 삼론학파는 대승불교의 핵심인 <공> 사상과 <반야> 사상을 구마라집의 해설에 기초하여 연구하는 학파였다.

3. 도생로부터 시작된 불성논쟁과 <열반종>

반면, 구마라집의 제자로서 특출하게 <자신만의 철학>을 완성시킨 이가 있으니, 그가 곧 도생이다.

도생은 난징에서 축법태에게 학문을 배운뒤, 7년간 혜원과 함께 지내면서 불법을 공부하였다. 그는 진리를 알고 싶어했다. 혜원을 떠나 구마라집에게 온 뒤, 그의 박학다식은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구마라집의 수제자가 되기도 하였다.

명성을 얻은 그는 북쪽을 떠나 남조로 내려왔다. 그는 당시 불교 이론에서 상상하지 못하였던 혁신적인 발언을 한다.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부처도 처음엔 깨달음이 없었다. 부처의 제자들 중에는 가난하고 글을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바보로 태어난 자는 어떻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같은데,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는가?

이런 내용을 강연하던 그는 깨달음은 지위고하와 지식의 유무를 떠나 누구에게나 가능한 것이다라는 말을 하게 된다. 이제 막 불교 교리가 정리되던 마당에 그의 발언은 큰 파장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세속적 쾌락만을 추구하고 불교를 비방하는 자가 있다. 하지만 그런 자도 인간으로 태어났다. 불교를 비판하는 자는 깨달음을 전혀 얻을 수 없는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인 <불성>이 있다.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갑작스럽게 깨닫는다면 <성불>할 수 있다. 살면서 수없이 이루어지는 행동들과 노력을 일일이 기록하여 깨달음에 영향을 준다고 하면, 누가 성불하겠는가?

기독교로 따지면, <죄 없는 자는 돌을 던져라>와 같은 맥락이다. 삶은 수없이 이루어지는 인과관계의 연속이므로, 결과가 그 과정을 설명해준다. 결과는 곧 그 과정들이 선택한 지금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고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살아온 날들의 과정이 마지막 순간에 집약된 것과 같다. 인생의 어느 순간이든 인간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불성>을 깨닫게 된다면, 악인이라도 마지막 순간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인생의 과정 자체가 업보를 남기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이치를 몰라도 인간은 기본적으로 <부처의 보편적 정신>을 가지고 있다. 내 몸 안에 부처가 살고 있기에 누구든지 <갑작스러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도생은 자신의 이론을 <돈오성불>이라고 말한다. <돈오>란 자신이 부처임을 갑자기 깨닫는 것이다. <성불>이란 깨달았기 때문에 부처가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부처임을 한번에 깨닫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훗날 깨달음을 중시하는 <선종>사상에 영향을 준다.

도생의 이론은 <불성논쟁>이라는 새로운 논쟁을 가져왔다. 도생 이전의 불교 기본 이론은 <점수>였다. <점수>란, 한단계 한단계 수양을 하여 성불한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한 <깨달음>의 철학은 <점수론>을 옹호하는 기존의 승려들로부터 배척을 받게 된다. 보수적인 승려들은 그를 추방해 버렸다. 어떻게 부처의 세계와 <공>사상, <반야>의 핵심을 이해하지 못한 자가 <부처의 본성>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도둑놈도 깨달으면 성불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인가?

도생은 <노장사상>의 허무주의로 세상을 현혹한다고 하여 교문에서도 추방된다.

하지만, 도생의 이론이 인도 본토의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 사상이나 <반야> 사상과 반대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았다. 도생이 추방된 후 3년 뒤 인도에서 <대열반경>이 전래되었다. 대승불교의 심오한 뜻을 담은 이 경전에는 천제(세속적 쾌락을 추구하는 자, 불교를 비방하는 자, 무식한 자를 묶어서 다루는 말)도 사람이기에 성불할 수 있다라고 씌여진 것이다.

도생이 주장한 것은, 인도 본토에서 석가의 뜻을 해석한 것과 일치하는 것이다. 결국 도생은 최고의 고승 반열에 올라 대승 불교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기존 가치관을 바꾸는 혁명이었다. <공자>와 같은 성인은 특출하다고 생각했는데,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으니 일반인과 성인의 차이점이 좁혀진 것 아닌가? 누구가 부처가 될 수 있기에 인간의 능력은 무한한 것으로 확장된 것이다.

도생은 자신의 이론으로 <열반학파>를 창시하였다. <열반학파>는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열반학파의 사상은 수나라 시대의 <천태종>으로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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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불교의 성장으로 발생한 폐불 사건

구마라집에 의해 시작된 중국의 불교 이론 정리는 수많은 불교 연구 학파를 탄생시켰다. 승조의 <삼론학파>, 도생의 <열반학파> 외에도 구마라집의 제자들은 다양한 연구 학파를 만들어냈다.

구마라집의 제자들 중 <공> 사상을 <분석>하려는 시도를 가진 일파가 있었다. 인도의 4세기 하리바르만이 지은 <성실론>이라는 책에 의거하여, 변화하는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논리가 성립되지 않다라고 말한 것이다. 즉, <공>이라는 것을 존재나 깨달음의 차원이 아닌 <존재에 대한 분석>으로 접근하려고 한 것이다. 이 학파를 <성실학파>라고 한다. 그러나, 승조의 <삼론학파>는 이 학파의 이론이 불교를 <존재와 논리>로만 접근한다고 생각했다. 성실학파는 대승불교가 아닌 소승불교로 분류되었고, 삼론학파에 흡수되어 삼론종의 일파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훗날 고구려, 백제, 일본 등에 <성실종>이란 종파로 이론이 전파된다.

구마라집의 제자 중에서는 인도의 유식학파 세친의 <화염경>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들을 지론학파라고 한다. 이 지론학파는 훗날 <화엄종> 성립에 큰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또 남조의 진제가 번역한 <섭대승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섭론학파>를 만들고, 유식학파 세친의 <화엄경>을 연구하기도 힜다. 이들은 훗날 중국 유식학파의 대표종파인 <법상종>의 선구자들이 된다.

이렇게 불교는 <학파>와 <종파>를 만들어가면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불교가 성장함에 따라 유교와 도교 세력은 긴장하게 된다. 혼란의 절정기인 남북조 시기가 되면, 불교와 도교는 피터지는 혈투를 벌이게 된다.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이 피터지는 역사에 대해 한번 다뤄 보도록 하겠다. 불교와 도교의 싸움...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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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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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5화. 불교의 외침 - 이젠 인도를 떠나고 싶어요 ~

1. 인도에 불교가 없다?

불교의 종주국은 인도이다. 그러나, 기원후 5세기가 지나고 인도에서는 더 이상의 불교 논의가 진행되지 않았다. 오히려 티벳이나 중국, 동남아시아에서 불교의 교리 논쟁이 활발하게 펼쳐진다. 특히, 4세기 이후, 불교가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지역은 중국과 한반도 등 동아시아이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석가의 가르침이 재정리되어 대승 불교로 정립된 인도의 불교는 아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그러나, 정작 인도 본토에서는 불교의 힘이 사라졌다. 그 이유는 새로운 정권의 성립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 마가다 왕국이 불교를 보호한 이래, 기원전 4세기 마우리아 왕조에서는 <왕이 곧 부처의 화신이다>라는 사상으로 불교를 옹호하였다. 대표적인 왕이 스스로 전륜성왕이라고 말하였던 아쇼카 왕이다.

기원후 3세기 까지도 인도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왕조들은 불교를 인정하였다. 기원 전후 인도 남부에 브라만교를 신봉하는 안드라 왕조가 있었으나, 인도 중북부의 대부분 지역은 불교 문화와 간다라 미술을 인정하는 쿠샨 왕조가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쿠샨 왕조는 쿠샨인(이란인) 계통의 왕조로 다양한 종교를 모두 인정하였다.

<쿠샨 왕조의 불상>

<쿠샨 왕조의 전성기>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2c)은 중국-이란-인도를 연결하는 헬레니즘 상권을 장악하면서 상권과 통행세를 받았고, 국경을 넘나드는 불자들을 보호하였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서아시아로 이르는 비단길과 인도를 거치는 바닷길은 불교 전파 경로와도 일치했다. 헬레니즘의 다체로운 문화는 대승 불교의 확대를 촉진하였고, 그 결과 중국, 한반도, 인도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4세기 말, 인도의 상황은 급변한다.

브라만 교를 신봉했던 아리아 인들의 강력한 국가가 다시 등장한 것이다. 갠지스 강 유역에서 찬드라 굽타가 건국한 굽타왕조는 쿠샨 왕조를 멸망시키고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표방하며 이민족들을 추방하기 시작한다.

투르크인, 샤카부족(석가부족), 이란인(쿠샨인)은 아리아인들의 세상에서 설 곳이 없었다. 이제 세상은 고대 브라만의 후손들이 아리아인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아리아인들의 고대 사상의 복구를 꿈꾸며 강력한 인도 민족주의를 주장하기 시작한다.

이민족과 혼혈족, 반브라만 종교는 인도에서 추방되었다.

<4세기 굽타왕조의 영역>

그리고, 고대 브라만의 베다 문학을 재정리 하여 산스크리트 문학이 등장한다. 브라만교에서 유래한 힌두교가 인도 전통 민족 종교가 되었고, 인도인의 율법은 <마누법전>으로 정리되었다. 고대 브라만 민족의 위대함은 <대서사시>로 편집되었다. 그것이 유명한 힌두교 경전인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이다.

대서사시는 고대 신인 브라만을 찬양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비슈누, 시바 등 고대적 요소를 갖춘 전통신을 아리아 부족의 현실에 맞게 재편한 것이다. 그리고, 힌두의 신은 인도인을 괴롭혔던 모든 이민족을 물리칠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대세는 <불교>가 아닌 <힌두교>였다.

그럼, 그동안 불교는 뭘하고 있었을까?

불교의 교리는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지만, 강력한 굽타왕조에 맞설 힘은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특히 인도 북부의 불교 교단들은 이미 큰 싸움으로 지쳐있던 상태였다.

마우리아 왕조에서 쿠샨 왕조까지 이어지는 동안 불교는 북부 지역의 강대국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반면, 불교 사원들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북방 이민족들과 끊임없는 투쟁을 하였다. 특히, 쿠샨 왕조 시기 불교 교단이 주적으로 삼았던 이민족은 <훈족>이었다.

중국의 진시황제가 만리장성을 쌓으면서 중국에서 밀려난 훈족들은 끊임없이 인도 북부 지역을 약탈하였다. 이 훈족들은 동으로는 중국 북부로, 서로는 게르만 사회로, 남으로는 인도로 진출하여 기원후 세계사의 여러 지역에 영향을 준다. 인도의 고대 여러 왕조들이 이 훈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였고, 서유럽에서는 서로마의 멸망을 이끌었던 게르만족의 이동까지 훈족의 영향력이 미쳤다.

그나마, 이란인이 세운 쿠샨 왕조가 기원후 4세기 무렵까지 버틴 것은 왕조를 지지했던 불교 교단의 협조 때문이었다. 그러나, 쿠샨 왕조는 망했고, 불교 교단은 훈족과의 투쟁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불교는 없었다.

힌두교의 복고주의는 불교 사상을 원시 브라만 주의로 돌려놓았다. 수드라 계급에게 평등은 더 이상 없었다. 바르나 제도의 계급 차별은 확고했고, 모든 직업과 주거, 결혼까지도 계급별로 차등을 두었다. 마누법전은 힌두교를 믿는 아리안 민족만을 위한 법이었다. 하층민에게 <해탈>의 기회는 없었다.

아잔타 석굴 : 인도양식과 이전 양식들이 결합한 인도적인 양식. 동아시아에도 많은 영항을 주었다.

2. 불교는 <밀교>가 되어간다...

아리아 민족 우월주의를 내세운 굽타 왕조는 7세기가 되기 전에 멸망한다. 7세기 무렵, 불교를 옹호하는 바르다나 왕조가 출현하면서 중국 불교와 우호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대부분 인도의 작은 독립국들은 힌두교를 옹호하였다. 힌두교가 지배층의 종교로서 백성들을 통제하기 편했기 때문이다. 7세기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교는 힌두교의 교리에 포섭되어 그 의미를 잃어갔다.

인도에서 대승 불교는 점차 <밀교>가 되었다.

힌두교를 믿는 아리아인의 탄압으로 종교 집회는 비밀스럽게 열렸다. 불교도들은 교리를 찾는게 아니라 종교 자체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점점 종교의 교리는 희박해지고, 절대자나 유일신을 찾는 신비주의 종교로 변질되었다.

초기 논리적인 불교에서 볼 수 없었던 주술 신앙도 등장한다. 미륵이 바람과 불, 홍수를 몰고와 세상을 정화시킨다는 믿음이 등장한다. 또 민간 신앙과 불교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민간에서 믿었던 수많은 신들이 불교 안에 들어오게 된다.

그나마, 이런 변질된 <불교>조차 7세기 이후 사라져간다. 7세기 이후 인도에 마호메트의 이슬람교가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기본 사상은 <평등>이다. 계급간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와는 상극이었다. 하층민들은 <차별>을 강조하는 힌두교가 싫어서 불교를 선택했지만, 이슬람교가 들어오자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한다. 어짜피 똑같은 <평등>을 주장하는 종교라면, 힘있는 <이슬람 정복자>들이 숨어지내는 불교도보다야 훨씬 낫지 않겠는가?

10세기 이후 본격적인 이슬람 세계가 된 인도는 또 한번 문화적 격동을 경험한다. 힌두교 사원과 불교 사원은 동시에 파괴되었다. 이래 저래 불상은 정권의 놀림감이 되었다. 16세기 무굴제국이 성립했지만, 무굴 제국은 전통 아리아 종교인 힌두교와, 하층민 종교인 이슬람을 융합시키기에 급급했다. 불교가 설 자리는 없었다.

21세기 현재, 인도에서 불교도의 인구는 전체 인구 비율로 보았을 때 너무나 미미하다. 불교의 종주국은 대승 불교가 정립된 5세기 이후, 한번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힌두교와 이슬람교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던 것이다.

3. 불교의 최강국으로 자리매김한 중국 불교

5세기 이후, 불교의 종주국 자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갔다. 중국은 유가, 법가 등 다양한 사상체계가 이미 정비되어 있었고, 굳이 불교가 아니더라도 국가와 사회를 운영하는데 지장이 없는 선진국이었다.

중국과 인도는 전혀 이질적인 문화권이었다. 중국어는 한자(표의문자)이고, 인도어는 범어(표음문자)이다. 중국인들은 유가, 법가 사상등 국가와 인간의 사회적 현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성향을 가졌다. 반면, 인도의 불교는 인간의 인지구조를 <분석>하려는 특징을 가진 사상이었다. 인도는 수많은 소왕국이 분립하면서 생성과 멸망을 반복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면, 중국은 춘추전국시대를 제외한다면, 비교적 통일 국가체제를 유지해왔다.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불교가 중국 사상계를 장악해 버린 황당한 일이 발생한 것일까? 그리고, 중국은 자신과 다른 이 문화와 사상을 어떻게 중국식으로 바꿔 버린 것일까?

인도와 중국이 불교라는 문화를 공유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헬레니즘 문화 때문이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광활한 문화권을 만들고 떠난 뒤, 인도는 쿠샨 왕조 카니슈카 왕이 서역 지배권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쿠샨 왕조 자체가 이란계 왕조였던 만큼, 쿠샨 왕조는 동서 교역에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쿠샨 왕조는 동아시아의 중국, 한반도부터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무역을 전개했는데, 그 과정에서 대승 불교가 아시아 곳곳에 전파된 것이다. 특히, 쿠샨 왕조와 상업을 하던 실크로드 중간 중간의 국가들은 불교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고, 중국의 한 왕조까지 불교가 전파된 것이다. 또, 당시 인도와 중국간 직접 교역로는 바닷길이었기 때문에 <남방 바닷길>을 통해서도 불교 경전이 한 왕조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불교를 처음 접한 중국의 한족들은 불교를 사상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없었다. 중국의 한나라는 한무제라는 강력한 왕이 <유학>을 국가 사상으로 공포했던 나라였다. 한 왕조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는 유학을 열심히 공부한 뒤, <구품관인법>이라는 관리 임용에 채용되어야 했다.

한 나라에서 불교는 중국 전통 사상인 도교에도 밀렸다. 한 나라의 지배층은 고품격 품위 유지 사상으로 도교의 <황로사상>을 숭배하였다. 황로사상은 노장사상에서 말하는 <무위자연>의 철학을 지배층의 교양철학으로 받아들인 것을 말한다.

처음 불교를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불교를 도교와 같은 교양 철학으로 생각했다. 도교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라, 백성들의 생활을 살펴라>라고 말한 것은 한나라 지배층의 우아한 집권 철학이었다.(물론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고, 말로만 생색내기 위한 교양 철학이었지만....)

불교 역시 같은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대승 불교의 <공> 사상을 접한 한나라의 지배층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허무함이겠구나. 아무 것도 없는 상태는 노자가 말한 자연으로 복귀한 상태이다. 공이란 곧, <없다>는 것이 아닌가? 공이란 것이 태초의 허무함이라면, 곧 자연 상태가 아니겠는가? 석가의 가르침은 노자의 가르침과 같은 것이구나....

결국 한나라 지배층이 생각한 불교는 도교와 같은 것이었다. 현실 상태에서 필요한 것은 유학이었고, 교양이나 취미로 알아야 할 것이 도교나 불교 따위였던 것이다. 교양이나 취미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따라서 도교와 불교는 하나의 패키지 세트로 묶여서 교양철학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심심할 때 생각해보는 교양 철학이 어떻게 유가 사상과 맞먹는 거대한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수많은 철학자들의 노력이 있었다. 자, 그럼 그 철학자들 이야기를 한번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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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4화. 인도 불교의 대중화 - 대승 불교 이야기

1. 일반민에게 친숙한 석가 - 석가의 불상이 만들어지다.

자, 이제 한반도에 직접 관련이 있는 대승 불교쪽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소승불교나 티벳 불교는 우리와 큰 상관이 없으니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만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일단, 대승불교란 무엇인가?

대승불교의 핵심을 짧게 정리하자면 <만민구제>, <속가불교>, <보살신앙> 등으로 말할 수 있다. 그럼 하나 하나 정리해볼까나? 대승이란 말 자체가 <큰 수레>라는 뜻이다. 그럼, 소승은 <작은 수레>겠지?

석가시대의 불교는 출가자들이 문답을 통해 진리를 얻고, 수양과 고행을 적절히 섞어 깨달음을 알아내는 불교였다. 불교를 믿는 출가자들의 목표는 <자신의 구제>였다. 즉, 깨달음을 위해 정진을 계속하고, 그 결과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목적이었다. 석가의 이념을 인정한 마가다 왕국이나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 왕 역시이러한 불교의 기본 교리를 지키는 <호법왕> 역할을 하려고 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초기 불교 자체가 <소승 불교>의 성격이었던 것이다.

<아쇼카 왕의 석주 : 정법실현>

<석주 머릿기둥>

그러나, 기원전 2세기 무렵, 소승 불교는 성격이 바뀌게 된다. 당시에는 새로운 사회사상으로 힌두이즘의 바크티 사상이 유행하였다. 바크티란, <믿음으로 얻어지는 은총>이란 뜻으로 신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누구에게나 신의 은총이 내린다는 초기 힌두 사상이었다.

불교도들은 이 사상이 자극을 받았다. 석가는 출가자와 일반 신도를 차별하지 않았는데, 왜 <열반>에 이르는 길은 출가자들 위주로 이루어지는가? 깨달음을 얻기 힘든 일반인들은 <도솔천>에 오르기 힘든 것인가?

거기에 계속 유입되는 철학들도 불교의 폐쇄성과 대립하였다. 유일신을 믿는 이교도들도 자신의 백성들에게는 구원을 약속한다는데, 불자들은 왜 출가자들만의 <열반>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사회적 욕구를 해결한 것이 바로 <대승 불교>였다. 붓다는 더 이상 선택받은 출가자들만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어야 하고, 모든 중생들에게 불교가 열려있어야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라 함께하는 구원이었다. 기원 전후로 인도에는 안드라 왕조가 성립하여 이민족을 몰아내고 인도 남부를 확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 왕조는 브라만교를 신봉하면서 바르나 질서를 재확립하려고 했다.

불교도들은, 이제 망설일 이유가 없어졌다. 혼자만의 <열반>을 추구할 때가 아니라 만민을 구원한다는 명분이 필요할 때였다. 자신의 깨달음의 결과를 많은 이들에게 돌려 수많은 <불도>들이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수많은 중생들을 <불제자>로 만들 수 있을까?

그 첫 번째 방법은, 석존의 가르침에 앞서 석존의 인격과 신성을 강조하는 일이었다. 원래 초기 불교에서는 석탑이라는 것이 없었다. 부처조차 죽음(입적) 후에는 화장을 하여, 몸에서 나온 다비를 세는 정도에서 죽음을 정리하곤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석가의 유물들로 각지에 불탑을 세워 보호하기 시작하였고, 일반인들은 그곳을 찾아와 경배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출가자 중심의 불교가 아닌 일반인 중심의 불교가 시작됨을 뜻한다. 일반인들은 복잡한 불교의 가르침보다는 석가에 대한 믿음을 신앙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리고 어느날 부터, 석가의 불상 조각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석가의 불상 조각을 처음 만든 것은,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 이후 인도를 접하게 된 그리스 인들이었다. 그리스인들은 석가라는 인물을 합리적으로 알기 위해 어떤 형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의 신들을 모방한 형태로 석가의 불상을 조각했고, 이것은 알렉산더의 헬레니즘 영향이 가장 크게 미치던 인도 북부 간다라 지방에서 시작되었다. (간다라 미술)

<간다라 미술의 불상들>

2. 부처의 비서실장 - 보살들의 등장

다음, 불제자 양성 프로젝트는 <보살> 이야기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초기 소승 불교의 <개인 구제> 방법은 듣고, 고행하고, 깨닫는 방법이었다. 석가의 가르침을 암송한 뒤, 석가의 고통을 스스로 느껴보고, 석가의 깨달음을 명상해서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먹고 살기 바쁜 일반인들이 언제 암송하고, 고통받아보고, 한가로이 명상하고 있겠는가? 그렇다고, <열반>에 들어간 석가가 다시 나와서 <전 중생>과 일일이 악수하고 다닐 수도 없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보살>이었다. 보살은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고 다니는 예비 부처들이었다. 보살이 부처가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선행을 쌓아야 하는데, 선행을 쌓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일반민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몸으로 보여야만 했다. 이 수행자들은 부처의 사상을 알리는 홍보실장과도 같았다.

<보살>들의 수행방법은 <육바라밀>의 실천이었다. 이것은 6개의 진리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이 육바라밀은 대승 불교의 최초 경전인 <반야경>의 핵심이었다. <반야>란, 6개의 진리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혜>를 말한다.

육바라밀 : 보시(베풀어 주는 것), 지계(바르게 사는 것), 인욕(참고 사는 것), 정진(노력하는 것), 선정(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 반야(지혜로서 살아가는 것)

이 6가지를 실천하면서 바다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 곧 보살들인 것이다. 보살들은 자신들의 깨달음을 중생들에게 다시 돌려주는 자비로움으로 백성들을 감화시키는 인물들이었다.

대표적인 보살은 <미륵>이다. 미륵은 석가시대부터 존재했던 보살이다. 많은 역사서에서 실존 인물이라고 믿었던 보살이다. 미륵은 당대 실존 인물이기도 했지만, 가장 부처에 가까운 보살로서 인간세계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보살로 알려졌다. 미륵은 언젠가 중생들의 고통이 극심해졌을 때 다시 내려와 중생들을 구원할 것이다.

그리고 다양한 보살들이 등장했다. 자비로움의 화신으로 알려진 <관세음보살>은 훗날 동아시아에서 <아미타불>과 연관된 대중적 보살이 되었다. 지혜로움의 상징으로 <반야경>과 관련있는 <문수보살>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보살이 되었다. 죽은 자들에게 도움을 준다는 <지장보살>, 티벳에서 불법의 수호자로 자정하는 <집금강보살> 등도 시기는 달리하지만,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다.

원래 보살은 수행자를 뜻한다. 신분과 관계없이 누구나 사원에서 수행을 하면 보살이 될 자격이 있다. <보살>은 불교 대중화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점차 일반인들 자체가 보살이 되는 경우는 줄어들었다. 보살이 되기 위해서는 사원을 세울 정도의 돈이 있어야 하고, 시간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보살은 수행자가 아니라, 숭배자가 되었다. 백성들은 미륵보살, 관세음보살과 같은 이들을 인간이 아닌 신적 존재로 보고 숭배하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이 힘들 때마다 <보살>들이 바쁜 부처를 대신하여 인간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예언과 종말>사상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결국, 대중 스스로가 부처가 된다는 인식은 이상적인 것에 그치고 만다.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힘든 세상에서 구원을 받고 싶다는 열망이었으니까...

<관세음보살 : 불상화>

<문수보살>

<미륵보살 입상>

3. 대승불교의 아버지 - <용수>

대승불교의 철학인 육바라밀 사상을 체계화 시킨 사람은 3세기 용수(150-250)였다. 용수를 범어로 <나가르주나>라고 하는데, <나가>는 용을 말하며, 아르주나는 그의 모친이 태어난 나무 이름이다.

용수의 핵심 철학은 보살의 육바라밀 중 <반야>에서 출발한다. 다른 것은 다 실천하면 된다고 치자. 그러나, 지혜(반야)는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가? 지혜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머리 속 구조와 관련있는 인식체계이다. 용수의 이 질문으로 대승불교는 수백년에 걸쳐 인간의 인지구조(지혜)에 대한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용수가 생각한 지혜란 <공>이다. <공>이란, 아무것도 없다, 허망하다, 속이 비었다 등등의 뜻으로 쓰이는 단어이다.

여기서 부처의 철학을 다시 복습해보자.

부처는 인간의 번뇌를 없애는 방법으로 <제행무상, 제법무아>를 말하였다. 모든 것은 인과관계에 의해 돌고 돌기 때문에 본질이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무상), 나란 존재도 결국 순간적인 변화물의 일부로 그 본질을 알 수 없는 것(무상)이라고 말한다.

고대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 철학에서는 생명(아트만)은 우주의 본질(브라만)과 같은 것으로 영원 불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는 본질이란 없다고 말했다. 모든 것이 돌고 도는 데, 확고한 본질이라는 것이 어디있는가? 모든 것은 순환 과정 속에서 변한다는 것이다. (연기설)

부처의 이 교리를 용수는 <공>으로 해석하였다. 부처가 말한 돌고 도는 인연(연기)는 결국 아무 본질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공>을 말하는 것이다. 세속 세계는 부처 세계와 인연으로 닿아있어서 두 세계는 돌고 돈다. 세속이 없으면 부처 세계도 없고, 부처의 은혜가 없으면, 세속 세계의 아름다움도 없다. 둘 중 하나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각각의 개체는 <공>이 된다.

예를 들어보자. 한 인간이 있다. 그러나 그 인간은 두뇌와 눈, 코, 입, 장기, 손, 발 등이 모여서 하나의 인간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그 인간의 절대적 본질은 없다. 냄새를 맡는 것은 코이며, 아름다움을 보는 것은 눈이다. 하나라도 없다면, 각각의 기관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나란 본질은 무의미해진다.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은 논리일 뿐이다. 언어로서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 뿐이지 그 본질은 각각의 연결점을 떼어놓고 설명될 수가 없다. 그리고, 인간은 언젠가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전생의 업에 의해 다른 무엇인가로 윤회한다. 어찌 인간의 절대적 본질이 있을 수가 있는가?

용수의 대승철학의 핵심은 <공>이다. 용수의 철학을 바탕으로 성립된 불교 종파를 <중관학파>라고 부른다. 그러나, 본질은 아무것도 없다는 이 논리는 철학적 논쟁을 낳게 된다. 그럼, 우리가 보고 있는 물질들은 무엇인가? 이름뿐인가? 본질이 없는 것인가?

서유럽의 크리스트교에서 기원후 10세기가 넘어 유명론과 실제론의 논쟁이 가속화되었다면, 불교에서는 5세기 무렵, 실체와 본질에 대한 논쟁이 이미 시작되었다. 이 논쟁은 훗날 <공유논쟁>으로 불붙어 대승불교가 전파된 인도와 중국, 한반도 등 전 지역에서 논쟁거리가 된다.

<나가르주나 : 용수의 불상화>

4. 용수의 이론에 대한 제자들의 논리 논쟁

3세기 용수로부터 시작된 대승불교의 기본 <공>사상은, 5세기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으로 어떻게 중생들을 <부처>의 세계로 인도하겠다는 것인가? 철학과 현실이 따로 노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문제 때문에 <중관학파>의 내부에서는 <공>사상을 논리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사물의 본질이 <있다, 없다> 자체가 인간의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그럼, 논리적으로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 순간부터, 대승 불교는 <논리>가 핵심 주제가 되어 버렸다.

이렇게 논리를 따지면서 등장한 학파를 <논증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공> 사상을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이치에 대입하여 논리적으로 증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활 속에서 느낀 깨달음들을 하나 하나 논리적으로 규명하여 <공> 사상이 일관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서구식으로 말하자면, 귀납법이라고 할까?

반면, 논리적 철학 체계보다는 오류의 수정이 중요하다고 말한 이들은 <수정주의자>라고 부른다. 이들은 굳이 앞장서서 논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어떤 완벽한 철학도 오류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철학이 완벽해졌다고 믿지만, 그 속에서도 잘못된 오류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오류가 있을 때마다 잘못된 점을 지적해주고, 보완해준다면 자연 <공>사상은 점점 완벽한 길로 접어들 것이다.

이들은 각각 다른 파로 분리되었지만, 용수의 기본 철학인 <공>사상을 계승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길을 가고 있던 분파였던 것이다.

5. <공>사상의 라이벌인 <식>의 등장

기원후 5세기, 대승불교의 <공>사상과 맞선 또 다른 대승불교의 철학이 등장하였다. 그것은 <식> 사상이었다.

유식론자라 불리는, 이들은 대승불교의 중관파 학자들이 공 사상을 잘못 알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공>이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를 말하는 것인가? <공>이 단순히 있고, 없고의 문제인가?

아니다. 존재한다는 것은 있고, 없고의 문제도 아니고, 그 형체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바뀌고 하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사물은 우리의 머리가 <인식>하는 것이다. 같은 사물을 보아도 다르게 인식하는 것은 그 사람의 <정신과 마음>의 문제인 것이다. 이것이 <유식론>의 입장이다.

어둡고 무서운 곳에서 옷걸이에 걸려있는 옷을 보면, 사람들은 귀신으로 여기고 소리를 친다. 그것이 귀신인가? 마음이 귀신을 느낀 것이다. 어두운 곳에서 밧줄을 보면, 뱀인 것처럼 느끼고 두려워 한다. 그러나 밧줄이 뱀일 수 있는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다. 이것을 <일체유심조>라고 한다.

원효 대사의 이야기를 알 것이다. 해골 바가지의 물을 맛있게 먹었지만, 날이 밝아서 보니 그것은 핏물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알지 못할 때에는 정말 깨끗한 물이었지 않는가? 사람이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마음 뿐이지, 물질의 본질과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 <유식론>의 기원은 최고의 보살로 추앙받는 미륵에서 시작된다. 미륵은 <유가사지론>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유식론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실존인지 전설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훗날 미륵이 도솔천에 올라가 보살이 되었을 때, 제자인 무착이 대중들에게 <유식론>의 <마음 : 식>을 전수했다고 한다.

그럼 유식론의 핵심 사상인 <식>을 자세히 알아보자.

불교의 핵심인 업설과 윤회설을 유식론은 어떻게 이해할까? 윤회란, 전생의 업을 바탕으로 한다. 전생에 착한 일을 하면 인간으로, 나쁜 일을 많이 하면 축생으로 태어난다. 그럼, 나쁜 짓의 정도를 어떻게 알까? 그것은 인간의 양심에 달린 것이다. 나쁘다의 개념 자체가 <인간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므로, 업은 착하고 나쁘게 살았던 자신의 행동이 가슴에 <한>으로 남아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생각이란 <순간>적인 것이다. 기분이 좋을 때와 나쁠 때의 감정이 다르고, 마음 가짐도 다르다. 따라서 <한>이란, 주머니와 같은 것이라고 한다. 자신의 탐욕과 번뇌는 가슴 깊숙히 쌓인다. 아뢰야식이라고 하는 주머니에 모인 <죄업>들은 인간의 잠재적 의식 속에 숨어있다. 당장 기억나지는 않지만, 머릿 속에 기억이 존재하고 있으며 누군가 그 때 그 사건을 이야기 해주면 기억 날 수 도 있는 것들이 <아뢰야식의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할 때는 나 자신도 모르게 과거의 주머니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내 결정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 한이 깊을수록 <한>에 의해 지배당할 확률도 높다. 내가 공포에 지배당했다면 가로등도 귀신으로 느낄 수 있다. 숨어있던 마음이 시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세상의 모든 현상은 외부로부터 느끼는 것이 아니라 내 가슴 속에서부터 인식하고 있는 무언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즉, 세상의 모든 것은 외부적인 관점이 아닌 <인식>의 작용인 것이다.

그럼 번뇌는 왜 생기는가? 보이는 사물을 실제 사물로 믿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생긴다는 <일체유심조>를 안다면, 완전한 세계인 <진여>의 세계로 다가갈 것이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5. 무상유식론과 유상유식론

유식학파의 근본원리는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식>의 원리이다. 그러나, 이 <식>의 원리를 보는 관점에 따라 2개의 종파가 생겨난다.

철저하게 모든 것은 마음이며,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것은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주장을 하는 이론이 무상유식론이다. 이 이론에 의해 만들어진 종파는 <섭론종>이다. 섭론종은 <밧줄을 보고 놀래서 귀신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진정한 현상은 없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우리가 그렇다고 느끼는 것이며, 그것을 안다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실제 현상을 사물을 바라보는 <인식론>의 학문 체계로 정리하려는 유식학파의 정통 학자들이 있다. 진나에 의해 창시된 이 유샹유식론은 인간의 머리 구조를 논리적으로 분석한다.

인간은 감각의 단계 - 지각의 단계 - 자각의 단계를 가지고 있다. 처음에는 사물을 감각적으로 느낀다. 그 다음에는 사물의 실체를 느끼려고 하고, 마지막으로 그 사물의 본질을 알려고 한다. 그러나, <지각의 단계>에서 사람들은 그 사물의 실체를 알려고 하기 때문에 그 사물이 결국 <마음> 속으로 느낀 것이란 사실을 잊게 된다. 결국 사물의 실체에 집착한 중생들은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부처가 되지 못한다.

이 인식론은 훗날 현장(삼장법사)의 노력으로 중국(당)으로 넘어가 중국 <법상종>으로 자리잡게 된다.

자, 이제 딱딱했던 인도 불교 이야기를 접고, 인물 중심의 불교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다음 편 부터는 인도의 불교를 중국에 가져왔던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하나 하나의 불교 교단이 성립되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풀어보려고 한다. 그럼 시작해볼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 참고할 만한 책들

진언 다라니 수행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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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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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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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용하 (불천,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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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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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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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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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평천창 외 편 (경서원,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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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사 108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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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박금표 (민족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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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경의 십팔공법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형희 (경서원,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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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2화. 아리아인의 시대와 인도 초기의 종교들

1. 종교는 인간의 염원이 만든 것이 아닌가?

자, 이제 불교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이 종교 역시 크리스트교와 다를 바가 없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 종교의 시작은 인간의 <열망>에서 시작된다.

역사가 인간들의 이야기이듯, 신과 종교의 탄생 역시 인간들의 당시 사회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각 종교에서는 그것을 신이 내린 <고난>이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은 앞뒤가 바뀐 말일 수도 있다. 신과 종교를 만든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의 교리가 확립되는 것 역시 당대의 <사회 현상>을 해결하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이 <여호수아>의 강림을 바랬던 열망은, 철기 시대에 접어오면서 심해진 핍박 때문이었다. 지금 인도에서 시작하려는 새로운 종교 역시 당대인들의 열망을 반영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정복민들을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사상적 체계를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홍수나 번개 등 자연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수많은 열망들이 고대 인도에서 다양한 신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자 그럼 불교가 탄생한 고대 인도라는 나라의 종교부터 한번 살펴볼까?

2. 초기 인도 원주민들의 신앙

인도 지방의 초기 문명을 흔히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인더스 문명이라고 부르는 초기 문명에 대해 우리는 약간 오해를 가지고 있다. 인더스 문명이 곧 인도 문명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틀렸다. 세계 4대 문명은 모두 철기 시대 이전에 등장하였다. 인더스 문명 역시 청동기 시대의 문명이다. 청동기 시대에는 통일된 국가 체계가 없었던 초기 문명 시대였다. 문명이 등장하자마자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생길리는 없지 않는가?

기원전 2500년경 등장한 최초의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 강가>의 작고 초라한 문명을 말한다. 천년간 계속된 이 문명은 작은 도시국가 단위의 문명이었다. 우리가 고대 문명 유적지로 말하는 모헨조다로나 하라파 문명은 국가 문명이 아니라 작은 도시 문명을 뜻한다.

<초기 인더스 문명의 도시 국가들>

이 문명을 이끌어간 사람들은 토착민인 <인더스인>들이었다. 인더스 인이란, 최초로 인도에 거주한 <드라비다인, 문다인> 등을 말한다. 이들이 만들어낸 청동기 문명은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성곽과 도로가 정비되어 있었고, 홍수를 대비한 관개시설이 있었다. 이 시설들이 우선 만들어진 것은 인더스 강의 범람 때문이었다. 강은 농사를 짓기 위한 물을 제공하면서도, 큰 홍수 한방으로 주변 문명을 날려 버리기도 한다. 최초의 원주민들은 강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항상 홍수라는 큰 변수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초기 원주민들은 큰 목욕탕을 지어두었다.

목욕탕은 물(강)의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장소였다. 그들의 종교는 단순했다. 생존을 위해 필요한 존재들에게 기도하는 것이었다. 큰 곡식창고를 만들어놓고, 커다란 범선을 이용하여 주변 메소포타미아와 교역을 했던 이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홍수였을 것이다.

또한 이들의 숭배대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남성생식기였다. 노동력이 중요한 사회였기 때문에 남성의 <정자>를 신성한 것으로 여겼을 것이다. 또, 소를 숭배하는 풍습도 이미 존재했었다.

<모헨조다로
족장집에서 나온 동상>

<모헨조다로의 춤추는 소녀상>

<하라파에서 나온 인장과 유물>

<하라파의 공동 시설물>

<하라파의 주거지>

<하라파의 사원>

<모헨조다로 유적지의 흔적>

<모헨조다로의 목욕탕>

<모헨조다로의 목욕탕과 배수시설>

3. 청동기 민족을 정복한 철기인들

크리스트교 이야기를 할 때, 유대인들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을 기원전 12세기라고 했었다. 기원전 12세기는 세계사적으로 큰 의의를 갖는다. 그 이유는, 청동기 시대가 철기시대로 변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원줜 13세기무렵 히타이트 인으로부터 시작된 철기 문물은 유라시아 대륙을 모두 흔들어놓았다. 인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인도에 내려온 철기인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중앙아시아 북부에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아리아> 인들이었다. 아리아 족은 역사적으로 많은 민족의 기원을 이룬다. 이들이 서부 유럽으로 이동하여 오늘날 많은 유럽인들의 선조가 되었다. 히틀러는 순수한 <게르만>인은 <아리아인>의 핏줄이라면서 엄청난 수의 유대인을 학살히기도 했었다.

반면, 동쪽으로 이동한 아리아인들은 인도 원주민인 <드라비다 인>들과 충돌하였다. 청동기 문명의 백성들이 철기 부족을 이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기원전 15세기를 전후하여 인더스 강 유역(펀자브 지방)까지 진출한 아리아인들은 인더스 문명을 정복한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이들은 좋은 땅을 찾아 끝없이 진출하였다.

기원전 10세기, 아리아인들은 인더스 강을 넘어 갠지스 강까지 지배 영역을 넓혔다. 청동기 시절의 수많은 부족들이 이들에게 굴복하였다. 인도에 진출한 아리아인들을 유럽의 아리아인들과 구별하여 <인도-아리아인>이라고 부른다.

유목민족인 아리아인은 원주민을 정복하여, 화려한 도시 국가를 건설한다. 아리아인의 부족 족장은 <라진 : rajan)이라고 불렀는데, rajan은 <종교 : region>라는 의미의 어원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아리아 인의 국가는 농경을 주로 하는 철기 국가였는데, 수많은 아리아 부족들이 각각 영토를 확보했기 때문에, 부족의 <신> 역시 각각이었다.

그러나, 아리아 인들은 정복민만 노예로 삼았을 뿐, 각 부족간의 전쟁에는 신중한 편이었다. 최소한 기원전 5세기 까지는 이런 부족단위 국가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부족간 평등주의를 바탕으로 전쟁을 참았기 때문에, 아리아의 각 부족들이 믿는 신은 모두 평등했다.

초기 아리아인의 브라만교를 보면 하늘, 지상, 공간의 3 구역에 모두 33명의 신(데바)이 있었다. 이 33명의 신은 모두 평등하다. 결국 33명의 자연신이 훗날 브라만교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브라만교의 경전인 <베다>는 이 33명의 자연신을 찬양하는 찬양가와 기도문 등을 모아놓은 것이다. 원래 <베다>는 <지식을 안다>는 어원을 가지고 있었는데, 당시 <지식을 안다>는 것은 자연현상을 안다는 것과 같았다. 자연현상을 다스리는 것은 33명의 신이었고, 이 신에 대해 알고 있는 <신관>은 당연히 최고 지배층이었다.

<베다>는 500년간 계속 이어진 찬가들을 모으고 모아 4개의 찬가집으로 만든 것이었는데, 기원전 900년경에는 거의 정리가 끝나간 듯 싶다. 이 찬가집인 베다는 각각 독립적으로 4개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먼저, 찬가 자체는 <본집>으로 정리된다. 제사를 위한 찬송가 쯤으로 보면 된다. 그리고, 제사 규칙을 적어둔 <브라흐마나>가 있다. <브라흐마나>를 알고 있는 자는 <신>과 접촉하는 자로서 지배층이 된다. 다음으로 숲속의 비밀을 적은 <아란야카>가 있다. 마지막으로 브라만의 철학을 말하고 있는 <우파니샤드>가 있다.

물론, 베다 자체에 이 4가지가 다 들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베다>는 이 4가지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을 때 진정한 베다로 인정된다.

4. 바르나 제도의 엄격함

브라만교의 근본 철학은 <우파니샤드>이다. 그런데, 우파니샤드 철학이 완성된 것은 베다가 완성되고 한참 후인 기원전 5세기 경이다. 즉, 베다 문학보다도 400년 정도 이후인 것이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초기 아리아인들은 굳이 철학적인 접근이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신관>은 최고 계급이고, <노예>는 마지막 계급이다라고 말해 버리면 끝이다. 뭐하러 복잡한 철학체계를 인위적으로 만들겠는가?

<브라만의 모습 : 알타이 벽화>

 <우파니샤드에서 브라만 신>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브라만교의 철학을 위협하는 계급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브라만교를 만든 아리아인들은 사회 계급을 4계급으로 나누고, 그것을 <신>이 나눈 것 처럼 행동하였다. 즉, <제사> 규칙을 아는 자들이 최고 계급인 <브라만>이 된다. 브라만은 곧 신이거나, 신의 대리자이다.

왕족과 귀족은 브라만보다 낮은 제 2계급이다. 2계급은 정치와 군사력을 가지고 있고, 이들을 크샤트리아라고 부른다. 일반 백성들은 3계급이며 바이샤라고 불렀다.  청동기시대부터 존재한 원주민들은 <노예>계급으로 수드라라고 부른다.

이렇게 4계급으로 사회를 나누고, <바르나> 제도라고 불렀다. <바르나>란, 색깔을 뜻하는 단어이다. 원래 아리아인이 유럽인과 같은 계통인 백인이기 때문에, 원주민인 드라비다 족과 구분하기 위해 바르나라고 불렀다.

우리는 인도의 신분 제도를 <카스트 제도>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15세기 경 유럽에서 건너온 포르투갈 상인들이 쓴 말이다. 카스트란, 바르나 제도의 4계급에서 계급마다 <출생> 족보를 따져서 수많은 계층으로 다시 분화한 것을 뜻한다. 즉, 직업, 결혼관계 등을 따져 여러 종족(종성)으로 분화되는데, 이것을 카스트(종성)이라고 다시 부른 것이다. 카스트는 바르나와 쟈티(JATI : 출생)이란 단어의 합성어이다. 즉, 카스트는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용어로 지금 인도의 신분계층을 분류하는 용어라고 할까?

   지금 말하고 있는 제도는 21세기 카스트 제도가 아니라, 고대 4계급이 존재했던 바르나 제도를 말하려는 것이다.

고대 <바르나>제도의 특성은 철저한 신분 차별에 있었다. 지배층은 피지배층의 신분 상승 자체를 막아 버렸다. 제사계급과 아리아인 계급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실제 정치력과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2계급(크샤트리아)이 제 1 계급인 브라만의 권위를 넘보기 시작한 것이다.

크샤트리아 계급은 철기시대의 보편적 현상인 정복 전쟁을 시작하였다. 작은 부족들은 큰 부족에게 통합되었고, 중앙집권국가의 시대가 열릴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또, 부족간의 전쟁과 부족간 통합은 물자 부족을 가져왔고, 3계급인 바이샤들이 상공업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3계급은 통일된 국가가 필요했다. 커다란 국가에서 통일된 상업정책이 나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 국가의 통일은 다양한 관세나 규제 등의 장벽을 허무는 길이기도 했다. 동네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것보다 국제적 무역이 더 효율적이지 않는가?

정복사업과 상공업의 발전은 2,3 계급이 브라만 계급에 도전할 명분을 주었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 드디어 브라만교에 대항하는 종교들이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자이나교와 불교였다. 새로운 종교들은 확실한 철학을 가지고 등장하였다. 그러나, 브라만교는 왜 브라만이 위대한지 설명이 부족했다.

브라만 족들은 급해졌다. 왜 브라만이 지배계급인지를 정당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브라만은 형식적으로 존재했던 우파니샤드 철학을 실제 사회에 맞는 철학체계로 <업그레이드> 시켰다. 비로소, 브라만교의 걸맞는 사상 체계가 등장한 것이다.

5. 우파니샤드 철학의 <업그레이드>

브라만교의 철학인 우파니샤드는 <신관>들이 자신의 제자들엑게 입으로 전하곤 했다. 즉, 그들만의 구전 철학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5세기 이 철학은 논리적으로 정리되고 편집되어 <철학>으로 정리되었다. 이 철학을 굳이 소개하는 이유는 이 철학의 기본 사상들의 영향을 받거나 반발하면서 석가모니의 <불교 철학>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알다시피 인도의 왕자 출신으로 제 2계급인 왕족이었다. 1계급의 독주를 막기 위한 역사적 사명이 2계급인 석가에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 그럼 브라만교의 우파니샤드 철학을 한 번 살펴보자.

이 철학의 핵심은 <우주와 인성의 일치>이다. 우주의 근원을 브라만이라고 하는데, 그 브라만은 개인의 인성(아트만)과 같은 것이라는 뜻이다.(원래의 아트만은 myself라는 재귀대명사였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일까?

인간은 우주의 법칙으로 태어나고 죽는다. 그런데, 우주에 음양오행이 돌듯이, 인간 역시 끊임없이 돈다. 만약 착한일을 한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는 우주의 법칙에 의해 다음 세상에서는 <브라만>으로 태어난다. 즉, 브라만이 제 1계급인 이유는 단순히 부모를 잘 만난 것이 아니라 전생에 덕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음 생까지 돌고 도는 것을 <윤회>라고 한다.

대표적인 윤회설로는 <오행설>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간다. 죽은 자는 흙과 물이 된다. 물은 비가 되어 내리고 흙을 적셔주면서 다시 하나로 만난다. 흙과 물이 만나 곡식을 이루고, 남과 여는 그 곡식을 먹는다. 남자가 먹은 곡식은 정자가 되고, 여자가 먹은 곡식은 아기집이 된다. 정자와 아기집이 다시 만나면 죽었던 사람이 다시 하나로 태어난다.

즉, 개인의 생명(아트만)은 죽은 뒤 우주의 법칙(브라만)이 되었지만, 다시 윤회하여 생명(아트만)으로 재탄생 되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브라만으로, 나쁜 일을 하면 수드라로 윤회된다. 이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런데, 윤회의 예외로 <신도>가 있다. 신도란, 신의 길로 가 버린다는 뜻이다. 윤회의 법칙을 알고 있는 브라만이 숲속의 비전을 찾아 산 속으로 숨어 버리면 윤회하지 않고 <신의 영역>으로 가 버린 다는 것이다. 이미 윤회를 알기에, 더 이상 윤회하지 않고 떠난다는 것을 <업>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불교의 <업>설과 연결된다.

우파니샤드의 철학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브라만이 잘난 것은 전생에 착하게 살아서이고, <신>의 세상에 가는 것도 브라만 뿐이라는 것이다. 전생이 기억조차 나지 않는 수드라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는가? 수드라야 그렇다 치더라도, 크샤트리아와 바이샤는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우파니샤드 철학은 브라만의 입장을 정당화하는 철학이었지만, 다른 계급의 반발을 불러오는 철학이기도 했다. 자, 그럼 2, 3계급이 어떻게 우파니샤드에 대해 반항했는지 한번 들여다 볼까나?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 http://historia.tistory.com  

 

   - 참고할 만한 책들

영혼의 스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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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게하르트 베르 (뜰,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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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 오브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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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기태 (판미동,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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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철학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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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이태승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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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와 힌두교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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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박양운 (가톨릭출판사,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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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나를 흔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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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법륜 (샨티,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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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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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소서정첩 (여래,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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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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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스티브 하겐 (우리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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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의 길 팔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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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헤네폴라 구나라타나 (아름드리미디어,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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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니샤드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편집부 (풀빛,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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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한토막 역사 11화. 인도에서는 소도 카스트 등급이 있다

1. 소를 숭배하게 된 배경

인도의 현재 대다수 종교는 힌두교입니다. 힌두교도들이 소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인 익히 알려진 상식입니다. 그렇다면 왜 소를 먹지 않을까요?

먼저 소를 숭배하게 된 것은 고대 인도가 유목생활을 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많습니다. 인도는 약 2억마리의 소가 존재합니다. 소가 2억마리라.... 우리나라 인구의 4배 이상이네요. 인도의 소는 세계 소의 1/6에 이릅니다. 고대 인도인들은 유목생활의 주요 재산으로 소를 숭상하였는데, 인도의 최고 카스트 등급인 브라만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소를 다른 자보다 많이 확보하고, 소를 죽여서 성대한 제사를 지내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 소를 제사지내는 고대 종교가 브라만교입니다.

소를 많이 보유한 브라만과 제사에 소를 많이 사용한 브라만이 곧 경제력을 가진 사회의 지배자였고, 소는 곧 권위의 상징이었죠. 그러나, 이렇게 형식적인 제사에 소를 이용하여 경제력을 낭비하는 브라만의 형식주의에 대항하여 불교와 자이나교에서는 이 브라만의 의식을 비판합니다. 불교와 자이나교를 창시한 성인들이 인도의 왕자라는 사실을 볼 때 이 새로운 종교들은 1계급인 브라만(제사장)에 대항한 2계급 크샤트리아(왕족, 귀족)과 3계급 바이샤(상인층)이 주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의 교리는 생명이 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는 불살생입니다. 이 생명을 죽이지 말라는 사실 소를 죽이지 말라는 뜻과 상통합니다. 따라서 소를 재산으로 여기는 세속계급과 평민들은 불교에 대하여 호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석가모니 자체가 공화주의자였던 만큼, 브라만 계급의 절대적 권위를 비판하곤 하였죠. 석가가 말한 <만민평등>은 사실 당시 공화제를 지지한 석가의 사상에서 비롯됩니다. 석가가 속한 국가 자체가 공화정을 지지한 지역이었습니다.

불교에서 불살생을 주장하면서 입지가 좁아진 브라만교의 제사장들은 소를 제사지는 것이 아니라 신성한 동물로 격상시키면서 새로운 종교 체계를 마련합니다. 여기서 힌두교 체계가 등장합니다. 즉, 힌두교는 고대 브라만교의 교리를 이어 카스트 제도를 계승하면서도 소라는 동물을 신성시 하였던 것이지요. 힌두교가 성립되면서 인도 고대 국가를 완성한 굽타왕조의 라마야나, 마하바라타 등의 힌두교 경전에는 모두 <소를 신성시하는 인도의 신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특히 힌두교의 최고신 중 하나인 비슈누 신의 화신인 끄리슈나는 <소를 보호하는 목자신>이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끄리슈나 설화에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이야기가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인도에서 <제사의 신>으로 여겨지는 인드라가 고대 관습대로 소를 제물로 바치려고 하자, <목자의 신> 끄리슈나는 이 소들을 모두 풀어주려고 하였습니다. 열받은 인드라는 세상에 홍수를 내려 모든 생물을 죽이려 하였지만, 끄리슈나는 홍수를 피해 소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킨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이 이야기는 노아의 방주와 비슷한 맥락이지만, 고대 소를 죽여 제사지내던 브라만교의 전통이 소를 보호하는 힌두교 전통으로 넘어갔음을 보여줍니다. 인도에서는 끄리슈나가 소를 보호한 것을 기념하는 디왈리 데이가 있는데, 디왈리는 <소를 보호하여 번영시킨다>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2. 인간도 소도 모두 카스트 등급이 있다.

인도의 카스트 신분제도는 초기에는 4등급이었습니다.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계급이었죠. 그러나 사회가 분화되면서 지금은 수많은 카스트 등급이 존재합니다. 아직도 카스트 제도는 인도사회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고, 같은 신분이 아니면 결혼하는 것 조차 꺼린다고 합니다. 인도에서 남편이 죽으면 부인도 같이 태워죽이거나, 산채로 묻는 사티 풍습이 남아있는 지역도 있다고 합니다. 현재 인도 정부는 카스트 제도가 21세기 10억 이상의 인도 인구가 세계적인 강국으로 발전하는 분위기에 찬물을 뿌리는 제도라 생각하여 카스트 제도의 완화를 위해 애쓰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만 카스트 제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소도 카스트 등급이 있어 나눈다고 합니다.

일단 인도에서 가장 신성시 하는 것은 우유를 잘 짜내는 성우(성스런 영물)입니다. 인도에서는 암소가 생산하는 5가지 성물이 있다고 하여 암소를 숭상합니다. 그 중 대부분은 우유와 관련있습니다. 우유는 소 자체를 제사지내는 대신 제사음식으로 이용되며, 인도 사람들의 식생활에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또 요구르트, 버터 같은 우유 활용 음식은 인도인에게 필수품이죠.

그러나, 우유가 잘 나오지 않는 암소는 성우로 대우받지 못하고 고문 가까운 학대를 받기도 합니다. 우유가 나오지 않는 소는 암소 성기에 파이프를 넣어 소 젖을 쥐어 짜기도 한다고 합니다.

황소는 소의 등급 중에서 하급입니다. 황소는 생산력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카스트로 따지면 노예와 같은 존재입니다. 항상 무거운 짐을 나르면서도 인도인들에게 욕을 먹어가면서 일을 합니다. 인도인들이 신성시하는 소는 생산력을 가진 암소이지 황소가 아니니까요.

3. 소의 등급에 따라 카스트의 직업도 결정된다.

인도에서 성스런 암소를 다루는 계급은 브라만입니다. 암소에서 나오는 성스런 우유와 암소의 생산력은 브라만 계급이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급 소인 황소는 바이샤 계급이 주로 다룹니다. 상공업에 종사하는 만큼 황소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황소는 브라만이 암소를 다루는 만큼 곱게 대우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인도에서 가장 낮은 계급으로 <접촉하는 것조차 불결하다>라고 하여 이름지어진 <불가촉 천민>들은 소를 다룰 수 있을까요? 그들도 소를 다룰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소와 관련된 직업을 갖는 경우는 소가 죽었을 경우입니다. 즉, 죽은 소의 가죽으로 물건을 만들거나, 소의 시체를 이용하여 뭔가 제품을 만드는 일을 불가촉 천민이 합니다. 불가촉 천민이란, 신성한 소의 죽음 속에서 살아가는 더러운 존재들로 여기고 있으니까요.

인도에서 소는 그 자체로 등급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소를 다루는 계급도 등급이 정해져 있습니다. 카스트 제도 속에서 힌두교의 교리가 정리된 일면에는 소라는 동물에 대한 설화적 인식과 현실적 인식이 들어가있고, 소라는 동물 자체가 인도의 역사 속에서 중요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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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이야기 1-9장. 중국에서도 불교의 전성시대가 끝나다!

- 불교이야기에 대하여...

8장까지 동아시아 불교전파사로 연재하던 이야기의 제목을 <불교이야기>로 바꾸었습니다. 인도, 중국 불교 이야기가 끝나고 한국, 일본 불교 이야기를 전개하려니 제목의 뉘앙스가 별로인 듯 해서 바꾸었습니다. 앞으로의 불교이야기는 1부의 인도, 중국 이야기를 이번 포스트에서 끝내고, 한국과 일본의 불교에 대하여 글을 써볼까 합니다. 이 포스트를 사상 속 역사여행에 넣은 이유는 불교이야기 이후, 유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힌두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하고, 종교 외 사상까지 한번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언제 끝날지는 모르지만, 틈틈이 생각날 때마다 글을 올려보겠습니다.

1. 마지막으로 중국 불교의 끝을 보며... 복습이나 할까요?

중국 불교의 전성기는 혼란기였던 위진남북조였음을 지금까지 설명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서 불교가 왕권을 위해 기여한다는 <왕즉불 사상>을 통해 발전해왔습니다.

그러나, 진정 석가의 참 뜻이 무엇인가를 밝히려는 많은 고승들은 자신만의 이론을 내놓기도 하고, 인도에 구법여행을 다녀오기도 합니다. 위진남북조가 끝나가면서 중국 불교는 <왕을 위한 불교>가 아니라 진정 불법을 위한 민중의 종교로 거듭나려는 몸짓을 계속 보여왔습니다. 그 때 마다 왕권을 <불법이 왕법에 도전할 수 없다>는 논리로 불교를 탄압합니다. 이것을 역사에서는 <폐불사건>이라고 하죠.

중국의 불교도 인도와 마찬가지로, 그 종교의 참뜻을 밝히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큰 이념을 갖는 순간 국가에 의해 추방당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불교를 몰아낸 새로운 사상들은 불교 사상에서 특정한 부분을 채용한 신사상들이었습니다.

예로 인도에서 진정한 인도인의 종교를 자청한 힌두교는 브라만교의 한계점을 불교 사상으로 극복하여 만들어진 종교입니다. 물론 불교 역시 브라만교의 윤회설이나 업설을 통해 탄생한 종교라는 것도 예전에 설명했었지요. 중국의 성리학이라는 신유학 역시 중국 종래의 훈고학의 문제점을 신불교인 <선종>의 수양사상을 빌려 극복했던 종교였습니다. 자 그럼 서론을 이만하고, 중국에서 불교가 밀려는 상황을 한번 볼까요?

2. 썩은 종교에는 핏물만이 고일 뿐이다.

당나라는 전통적으로 도교를 신봉한 국가이지만, 불교 역시 존중하였습니다. 이유는 아직까지도 불교의 교리가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불교 교단에서는 이러한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입니다. 지난 장에서 설명한 법장이 측천무후에게 불교 교리를 설명한 것도, 불교 자체를 국가에서 인정해 달라는 하나의 메시지이자 국가와 불교 교단의 타협점을 찾는 과정이었죠.

하지만, 불교가 불교의 참뜻을 추구하는 순간, 인도, 중국, 한국을 막론하고 큰 문제점이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 내세에 의지하면서 현실을 도피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는 문제점이었습니다. 또한 국가불교가 아닌 종파불교가 성립되면서 사원경제가 발달하고, 불교교단이 이익을 추구하기 시작한다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당나라 중기 이후 불교 교단의 세가 전 중국을 덮을 정도로 위세가 강해지고, 수많은 종파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났습니다. 이 때부터 생각있는 유교주의자들은 유교의 위기를 생각하면서,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치, 여말선초에 신진사대부들이 불교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과 같은 맥락으로 말이죠.

이런 생각을 처음 했던 사람은 수나라 시대의 <왕통>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수나라 시대는 아직 불교교단이 정립되지 않았을 시기였습니다. 본격적으로 불교를 공격하기 시작한 사람은 당나라의 유교 선구자 <한유>입니다. 한유의 <진학해>에 나타난 생각을 한번 볼까요?

입으로는 끊임없이 육예의 문장을 읆고, 손으로는 그침없이 백가의 서적들을 뒤적였다. 낮은 물론이고 밤에도 등잔불 아래에서 쉼없이 공부하였다.

해가 가고 달이 바뀌어도 단 하루도 그치지 아니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이처럼 부지런히 공부하는 것을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유학을 선양하고 불교와 노장사상을 배척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의 행동은 모두 도리에 합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의 찬동이나 상사의 신임을 얻지 못하였다. 내가 한번 입을 열면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짓게 되어 귀양살이를 가기 일쑤였다.

운명은 나를 종롱하여 마치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원수 같구나. 여러 차례 일에 실패하여 곤궁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으나 겨율에는 아이들이 춥다고 울어대고 풍년이 드는 해에도 처자들은 배가 고프다고 울어댄다. 나 자신은 또 늙음에 쫒기어 머리칼과 이가 빠졌으나 어니 한가지 일도 이루지 못했구나.

한유는 국가의 녹을 먹으면서도, 불교를 신봉하는 황제와 신료들을 끊임없이 질타하였습니다. 헌종 때 석가문불의 뼈 한마디가 궁내에 들어오자 사람들은 모두 그것에 제사지내기에 바빴습니다. 한유는 죽음을 각오하고 글을 적기를 <동한의 군주들이 불교를 신봉한 이후부터 모두 단명하였구나>라고 적었고, 그것을 황제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죽을 위기를 넘기면서까지 불교에 대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아는가. 황제와 정치를 위해서는 불교의 폐단을 없애야만 한다. 구름이 큰 봉우리를 가리고 있어 집이 어딘지도 모르겠고, 눈은 온 땅을 덮고 있어 말이 앞으로 가려하지도 않는구나. 내 조양으로 귀향을 가게 되더라도 뜻은 꺽을 수 없겠구나. 후세에 나의 말을 전하려면 책으로 남기는 수밖에 없겠구나.

한유는 불교의 잘못된 점을 말하기 위하여 많은 글을 적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적은 글은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화려하기만 한 심오한 말이 아니라, 한나라 훈고학 이래 잘 쓰이지 않는 옛 글(고문)으로 글을 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를 <고문부흥운동>의 선구자라고도 합니다.

이 후 그의 뜻을 이어받은 송의 인물들은 적극적인 불교 배척운동을 시작하면서, 진정한 유교를 부흥할 것에 매진하였습니다. 한유는 맹자의 성선설에서 더 나아가 인간의 본성은 상, 중, 하의 삼품으로 구성되었다는 <성삼품설>을 주장합니다.

불교에서처럼 윤회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이 여러개이므로,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하고, 어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악하며, 어떤 사람은 어떤 길로도 스스로 갈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후 유학자들은 불교 배척운동을 하면서도 한나라 훈고학과는 다른 사상적 체계를 만들어 갑니다. 송대 만들어진 성리학은 한나라 시기 훈고학의 <자구해설>을 넘어서서 인간의 <심성>이 무엇인가까지 연구하는데, 사실 이것은 불교의 <선종>에서 강조하는 <이심전심>의 본체와 연관되는 것이었습니다. 성리학의 인간과 우주 심성이란, 선종에서 말하는 <인간의 마음은 깨달음으로 통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니까요.

오늘은 지난 여덟 장의 인도, 중국 불교사를 마무리하는 과정으로, 별 할말도 없는 당 중기 이후의 불교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이제 2부에서는 한국 불교사로 넘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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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3장. 세계법왕이 등장하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인도의 마우리아 왕조의 불교 전파 개념과 이후 인도불교가 중국 불교로 넘어가는 과정을 간략히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1. 기원전 4세기 - 전륜성왕이 등장하다

기원전 5세기 마가다국에 의해 보호받던 인도의 불교는 기원전 4세기 마우리아 왕조가 북인도 전체를 통일하면서 또 하나의 변혁기를 맞이합니다.

마우리아 왕조는 마가다국과는 다른 규모의 북인도 전체 통일왕조였습니다. 따라서 석가가 주장한 연기설 정도의 부족단위 통합 논리는 이제 마우리아 왕조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모든 국가와 민족을 통합할 통일왕조의 이념이 필요한 시점이었습니다.

이 통일왕조의 이념은 기원전 4-3세기로 접어들 때 즉위한 3대 아쇼카왕 때 <소승불교>이념으로 정립됩니다. 아쇼카 왕은 인도전역을 통일하기 위한 노력으로 정복전쟁을 계속하였는데, 그의 정복전쟁은 잔혹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쇼카왕이 불법에 귀의하면서 독특한 세계제왕의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특히 이 때 나타난 불교적 왕자관이 바로 <전륜성왕>사상이었는데, 이 전륜성왕 사상은 고대 인도 왕권 강화의 핵심적인 사상이었습니다.

원래 초기의 인도 도시국가에서는 <국왕>에 대하여 바라보는 관점이 여러 개였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브라만교에서지지하는 입장으로 <왕권신수설>의 입장입니다. 왕권신수설이란, 국왕의 정통성이 곧 신으로부터 나왔다고 믿는 사상으로, 국왕권과 브라만의 제사권이 견고하게 결합된 입장이었습니다.

반대로, 부처와 같이 평등사상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왕권을 <사회계약설>적인 입장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 입장은 초기 씨족공동체였던 사회가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씨족구성원 전체의 합의에 의해 국가를 운영한다는 입장으로, 석가의 <공화제론>의 근본 이념이었던 입장입니다.

이 두 입장은 석가가 죽은 후 하나로 융합되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제왕>사상입니다. 불도에서는 이 세계제왕을 <전륜성왕>이라고 합니다. 전륜성왕이란, 세계제왕으로서 왕에 오른 자는 강력한 무력을 가지고 있지만, 이 무력으로 세상을 통치하지 않는 자입니다. 전륜성왕은 도솔천에서 내려온 세계를 교화하기 위한 법왕으로, 정법(샤크라)에 의해서 세상을 통치하고, 이상적인 도덕으로 불심자들을 교화하는 법왕입니다. 즉, 불법의 내용이 왕권의 정당성과 의무를 규정하면서, 왕권을 이상적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지요.

이 전륜성왕을 돕기 위하여 미륵불이 출현하여 백성을 교화한다는 하는데, 이 미륵불이 하늘에서 하생하는가, 아니면 귀족들이 미륵으로 환생하는가 등의 논의에 따라 미륵불 상생신앙, 하생신앙이 등장합니다. 쉽게 말하면, 미륵은 곧 전륜성왕을 돕기 위해 세상에 내려온 하늘의 수호자들입니다. 이 논리는 곧 왕은 전륜성왕, 귀족은 미륵불이라는 개념으로 도식화되어 이후 중국, 한국, 일본에서 왕권 강화의 논리로 이용됩니다.

전륜성왕의 개념

산스크리트 어로는 akra-vartirajan. cakravartin이라고도 씁니다. 고대 인도에서 유래한 세계의 통치자를 지칭하는 개념입니다.

산스크리트 cakra(輪)와 vartin(轉)이 합성되어 파생된 말로서 '자신의 전차바퀴를 어디로나 굴릴 수 있는' 곧 '어디로 가거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통치자를 말합니다. 전세계를 통치한다는 전륜성왕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BC 3세기 마우리아 왕조 시대에 아소카 왕의 업적을 칭송하는 경전 및 기념비에 나타납니다. 이 세기의 불교와 자이나교의 사상가들은 보편적 군주관에 정의와 도덕의 수호자라는 측면을 부각시켰습니다. 전륜성왕은 속세에서 석가모니와 같은 존엄을 지닌 존재로서 32상(相)등 석가모니와 공통되는 다수의 특성들을 소유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대비바사론 大毘婆沙論〉 등의 문헌에서는 전륜성왕에 4종을 구별하여, 금륜왕은 수미4주(須彌四洲) 곧 전세계를 통치하며, 은륜왕은 3주를, 동륜왕은 2주를, 철륜왕은 남염부주(南閻部洲) 1주를 통치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인왕경 仁王經〉 및 〈보살영락본업경 菩薩瓔珞本業經〉 등에서는 이러한 설을 더욱 발전시켜 4종의 전륜성왕을 보살의 수행 단계에 배당했으니, 곧 철륜왕은 십신위(十信位), 동륜왕은 십주위(十住位), 금륜왕은 십회향위(十廻向位)에 배당했습니다. 이러한 전륜성왕의 개념은 왕권 강화 및 호국불교사상의 고취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 전륜성왕에 대한 다움 백과사전에서 발췌 -

실제 고대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불법이 전파되면서, 이 아쇼카왕을 전륜성왕으로 인식하게 되고, 이 전륜성왕의 세계제왕 관념을 각국이 받아들어 <부족사회를 초월한 보편적 지배원리>를 체계화 시키기도 합니다.

2. 기원 후에는 대승불교가 발전하게 되다

기원후 1-4세기 인도 남부에서 성장한 쿠샨 왕조는 아쇼카왕으로 대표되는 마우리아 왕조의 <소승불교>보다 더 대중적인 <대승불교>로 나아갑니다.

특히 2세기 카니슈카왕 대에는 중국, 이란, 인도를 연결하는 통상로를 인도가 장악하여  상세와 통행세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무역의 발달은 곧 서아시아, 동아시아로 불교가 전파되는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이 때의 불교는 개인적인 해탈을 추구하는 과거의 소승불교가 아니라, 대중구제를 염원하는 대승불교적 성격이었습니다.

특히, 대승불교가 <사회적, 정치적> 성격까지 지니게 된 것은 당시 알렉산더 대왕의 원정으로 남은 <헬레니즘의 유산> 때문이었습니다. 이 당시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적극적인 동서교류 및 아시아 내부의 교류가 활발해 지면서 간다라 미술이 유행하기 시작하였고, 카니슈카왕은 간다라 미술을 완성하여 동서문화의 융합을 추구하는 동시에, 이 융합된 문화를 동아시아로 적극 전파하였습니다. 이 당시가 바로 불교의 전성기였고, 동아시아 각국이 불교사상을 초보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인도편에서의 불교서술은 여기까지가 끝입니다. 왜냐면, 4세기 이후 북인도에서 인도민족 고유 왕조인 굽타왕조가 등장하면서, 다시 고대 인도 문화가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굽타왕조의 찬드라 굽타는 가장 이상적인 아리아 문화를 추구하였고, 인도 고전의 황금기로서 <힌두교>를 국교화 합니다. 이 힌두교는 브라만교의 전통을 확인하는 종교로서 철저한 바르나 제도를 추구하였고, 마누법전, 마하바라타, 라마야나와 같은 인도적 문학과 종교를 완성하므로서 점차 인도 내에서 불교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이후 7세기 북인도의 바르다나 왕조 등이 불교 보호에 노력하였으나, 불교는 점차 힌두교에 포섭되어 소멸되었고, 13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왕조가 인도 곳곳에 성립함으로서 인도의 종교는 <힌두교 vs 이슬람교>의 구도로 바뀌게 됩니다.

이제 4세기 이후의 불교는 인도가 아니라 중국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인도 불교를 여기서 마치고, 인도 불교의 중국 전파 과정과 중국에서 불교에 대한 이해 부분을 전개해보겠습니다. 이 포스트는 매우 짧았네요.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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