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19건

  1. 2011.01.27 (NO 4) 본문 3. 한국사에서 시대구분을 하게 된 시점은 언제인가요? (1)
  2. 2010.10.06 근대를 보는 창 20 - (02) 학교 종이 땡땡땡!(근대 교육 분야)
  3. 2010.05.16 역사퀴즈 - 근대 사회생활사(5.16) (11)
  4. 2010.02.02 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29. 금요일) - 범위 : 한국현대사
  5. 2010.01.12 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12 화요일) - 범위 : 한국사 검정능력시험 3급 (5)
  6. 2009.01.07 수능 근현대사 정리 16 : 민주주의의 발전 1 / 이승만의 독재와 4.19
  7. 2008.12.30 수능 근현대사 정리 15 : 6.25 전쟁
  8. 2008.12.27 수능 근현대사 정리10 : 무장독립투쟁의 전개 (5)
  9. 2008.12.01 포스트 모던과 문화 코드 (2) - 만약에... 라는 단어 하나로 세계사를 바꿀 수 있는 포스트 모던 역사학 (2)
  10. 2007.12.08 우리 역사 최악의 인물 - 이승만 편 - (62)
  11. 2007.11.12 <현대사 사료> 1946. 12. 2 - 이승만의 도미외교 지침서 (1)
  12. 2007.10.16 대한민국 건국강령(대한민국 임시정부, 1941 / 조소앙) (1)
  13. 2007.08.08 5만원, 10만원권 고액 화폐권 2차후보 역사인물 10명 (1)
  14. 2007.05.18 이승만 정권의 평화선 선언
  15. 2007.05.18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 창당 선언문 (1951년)
  16. 2007.05.18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정읍발언 (1946년)
  17. 2007.03.17 해방 직후 남북한 자유 총선거에 대한 제네바 회담 (1)
  18. 2007.03.17 이승만의 정읍 발언 (1)
  19. 2007.03.17 4. 19 혁명 자료 -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 의사 (1)

근현대사 이야기 (NO.4)

한국사에서 시대구분이 시작된 시기는?

- 시대구분 이야기 -

자, 이제 서양의 시대구분에 대한 이야기는 끝내자. 이제, 우리 역사에서는 어떻게 <시대 구분>를 하는 지 알아보도록 할꺼야. 자, 칼하나 들고 우리 역사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조각조각 내보면서 <카리스마> 있게 놀아볼까나? (헉... 유치한 개그 ㅋ)

그럼, 한국근현대사를 공부할 테니, 한국사에서 근대, 현대라는 개념이 언제 등장했는지 알아봐야겠지? 그 첫 번째, 시간.... First Time.... go!

지난 시간에 서양 <근대인>들이 <중세>와는 다른 자신들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근대>라는 말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했잖아. 그런데 말야. 고대-중세-근대라는 서양인들의 구분은 시간에 따라 나눈 구분점이야. 서양 근대인들이 가까운 시간을 자신들의 시간인 <근대>로 파악하면서, 점점 멀어지는 시대를 다른 용어로 표현했었지.

자 그럼 자세히 한번 볼까? <근대>의 사람들은 역사를 이렇게 생각한 거야. 역사는 먼 옛날의 이야기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시간별로 나눈 것이라구.... 하지만, 어떤 시대를 나누었다면, 아무 생각없이 나누진 않았겠지? 당연히 시대마다 그 시대를 상징하는 무언가 특징이 있다고 생각하고 시대를 나누었을 거야. 그렇게 시간이 쭈욱~~ 흐르면서 점점 나은 세상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가장 발전한 근대라는 시대까지 왔다고 생각한 거지.

결국, <근대인>들이 시대 구분을 했던 목적은 <세상이 가장 올바르게 발전했다>라는 자부심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서양 근대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발전을 똑같이 찾기가 너무 어려운 일이거든. 우리 역사는, <시대에 따라 발전했다>라는 명확한 기준보다 더 확실한 기준점이 있어. 그건 바로 <고조선 - 삼국시대 - 고려 - 조선>과 같이 왕조가 바뀌면서 새로운 시대가 되었다는 <우리식 기준>이 있다는 거야.

한마디로, 우리 역사에서는 왕조별로 각 시대를 나누는 것이 한 시대를 이해하는데 훨씬 편하거든. 이렇게, 왕조별로 역사가 다 다르고, 발전하는 모습이 다 다른데, 서양식으로 나누는 구분법을 사용하려고 하니깐 너무~ 안 맞는거야.

에구구... 우리 역사는 서양의 기준에 맞추어 표현하기 너무 힘들다. 그런데 옛날 한때.... 이걸 이용해서 우리 역사를 아주~ 비하하는 역사학자들이 짜잔~ 하고 등장했었어. 그 나쁜 사람들이 누구냐구? 바로 우리나라를 점령했던 시기, 즉 일제 식민지 시대의 <일본 역사학자>들이지.

일본 역사학자들은 박은식, 신채호 선생님 같은 민족주의 역사학자 분들이 우리 역사를 연구하는 것을 너무 싫어했어. 조선의 역사 연구가 많이 진행될수록 일본이 조선인들을 <무식한 인종~>으로 몰아세우기가 어려웠거든.

그래서~  일본 총독부에서는 1920년대부터 <조선사 편수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조선 역사를 왜곡하기 시작했지.

그럼 이 <조선사 편수회>는 당연히 뭘 했을까? 당연히~ <일본이 조선을 점령한 것이 너무 잘된 일이다> 라는 글들을 쓰기 시작했겠지, 뭐...  그럼 이 단체의 사람들이 주장한 것들을 한번 쭉~ 들어보고, 그 결론이 뭔지 같이 볼까나?

나쁜넘A : 야... 조선애들은 지들 고대 역사가 없어. 북쪽은 중국애가 내려와서 무슨 기자 고조선을 만들었잖아. 또, 중국 한사군한테도 점령당해서 뚜들겨맞구... 남쪽은 우리 일본에게 점령당해서 임나일본부를 세웠고... (타율성이론)

나쁜넘 B : 뭐, 그 이후에도 거란애들, 여진애들, 몽골애들... 돌아가면서 한반도를 박살냈잖아. 뭐, 만주쪽 이민족들의 역사가 바뀔 때마다 조선 역사가 바뀌니... 이건 뭐, 조센징은 역사가 있긴 있어? (만선사관)

나쁜넘 C : 결국 조선애들의 역사는 한반도를 벗어나보지도 못한 역사야. 뭐? 위대한 대륙 진출? 다 뻥이지 뭐~  중국, 일본, 이민족을 따라하면서 이루어진 역사일 뿐야... 어설픈 따라쟁이의 역사네!! (반도사론, 사대주의론)

나쁜넘 D : 한마디로, 고려니, 조선이니 하는 왕조 교체는 별 의미도 없는거라니까... 얘들은 쭈욱~ 고대 수준이니, 자본주의같은 건 생각도 못한 원시인들이지. 뭐, 우리 일본 아니였으면 영원히 발전도 없는 애들이야.(정체성 이론)

결논내봐 : 결과적으로 원시적인 조선이 식민지가 된 건 천만다행인 거야. 일본덕에 근대화도 된거잖아. 조센징들은 일본의 식민지 교육을 감사해야돼.(식민사관의 결론)

뭐, 이런 논리를 만든거야. 한마디로~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광고하기 위해 한국사를 연구한거지.

그럼 우리 역사학자들도 본격적으로 <시대 구분>이라는 것을 하면서, 일본의 이상한 주장을 반박해야겠지?

그 때, 짜잔~ 하고 나타나 시대 구분을 시작한 한 남자가 있었으니... 그 인물이 바로 <마르크스의 시대구분>을 가지고 일본과 싸웠던 사회주의 역사학자 <백남운>이란 사람이야.

일본학자 : 야... 조선 너네는 왕만 자꾸 바뀌지, 발전도 없고 수준은 계속 고대 수준이고.... 너무 미개하잖아.

백남운 : 아니거든? 우리도 고대-중세-근대 사회가 있었어. 내가 쓴 <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 뭐 이런책 읽어볼래?

일본학자 : 귀찮어. 그 책에서 뭐라고 쭝얼거렸는데? 어쨌든 조선애들은 원시적이라 중세가 없었다니깐?

백남운 : 자, 우리 마르크스 선생님이 말씀하신 시대 구분을 조선에 적용해 볼까? 이걸로 계산해보니깐, 와... 서양 고대처럼 우리 역사에도 노예제도 있었지, 토지생산 있었지.... 서양 고대처럼 중세 봉건제도도 있었고, 넓은 토지를 경작하는 장원제도도 있었네. 거기에도, 지주와 농노라는 계급투쟁도 있고... 와... 아 있다, 다 있어!!! 자료 들춰보니깐 하나하나 증거 다 있다!!!

자, 이렇게 백남운 선생을 시작으로 우리도 시대 구분이라는 걸 시작한 거야. 근데, 이 시대구분은 일본애들의 황당한 헛소리에 대항하기 위해 <마르크스> 이론을 우리 역사에 마구마구 가져다 붙인 거라서, 약간 억지도 좀 있었다는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자, 이렇게 시작한 시대구분은,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에게도 퍼지기 시작했지. 그런데,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우리 민족이 찌질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다보니, 위대한 고대 북방의 역사, 특히 고구려의 역사 연구에 많이 집중하게 되었지. 심지어 어떤 학자는 <고구려>를 <로마제국>과 맞먹는 위대한 고대 제국으로 표현하기도 했어.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가 광복을 맞이한 그 기쁜 날...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문제가 생겼어. 사회주의자인 백남운 선생도 북한으로 넘어갔고, 대부분 민족주의 역사가들이 스스로 북한에 갔거나, 납치되서 북한에 넘어가 버린 거지.

그 결과!!! 1950년대 이후, 남한에 남은 역사학자들은 시대구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이 대부분 이였어. 실증주의 역사학자들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가지고 역사를 연구한다는 입장이였지. 따라서 이들은 민족주의니,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단어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해.   

그나마,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시대구분>이라는 말이 빤짝~! 등장하기도 했지. 역사는 <혁명으로 발전한다>는 생각을 갖는 시민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야. 그래서 <시대를 구분할까?> 라고 생각한 용감한 역사학자들이 등장하기도 했어. 하지만....

그것도 잠깐~ 이었구.... 박정희 군사 정권이 시작되자, 또 다시 자기만의 관점을 가지고 시대 구분을 하겠다는 용기를 가진 역사학자들은 점점 사라졌지. 교과서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시대구분을 한 학자들은 <재야학자> 소리를 듣기도 했구.

그럼 본격적으로 <시대구분>이란 걸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그건 바로,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운동>이 성공한 이후야.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운동이 성공한 건,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였으니, 시대구분도 1990년대가 되어서야 겨우 교과서(3차 교과서)에 등장하게 된 거지.

자, 그럼 다음 장에서는 1990년대 이후 짜잔~ 하고 연구가 시작된 우리 역사의 시대 구분 기준을 한번 살펴보면서 이야기 해볼까나...


-  다음 정보들을 참조하면 더 많은 자료를 얻을 수 있어요!  -


중국사시대구분론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민두기
출판 : 창비(창작과비평사) 1997.08.31
상세보기

한국사 시대구분론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차하순
출판 : 소화 199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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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경제사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백남운 / 박광순역
출판 : 범우사 1999.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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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족의 진로 재론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백남운
출판 : 종합출판범우(BW범우) 2007.08.15
상세보기

르네상스의 마지막 날들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시어도어 래브 / 걍유원,정지인역
출판 : 르네상스 2008.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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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튜브 시대구분 자료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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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퀴즈) 제 1부. 근대인되기 : (02) 학교 종이 땡땡땡!

 

근대를 보는 창 20에 대한 도서퀴즈 2회 문제입니다.

도서퀴즈는 역사와 관련하여 재미있고 유익한 책들을 선정한 뒤
각 단원별로 공부한 내용을 풀어보는 퀴즈입니다.

학교시험처럼 성적을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책을 얼마나 꼼꼼하게 읽었는지 확인하고,
무심코 넘어간 중요한 내용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보는 퀴즈랍니다.

70점 이상일 경우, 축하 메시지가, 70점 미만일 경우에는 격려의 메시지가 나온답니다.
다음 회차는 근대를 보는 창 2회차분입니다.
역사도서 <근대를 보는 창 20> 은 제목 그대로 총 20회분으로 퀴즈를 구성했습니다.

만약 문제를 풀어보시는 분이
역사 전공을 하고 있는 대학생, 대학원생이시거나
공무원 또는 교원 준비를 하고 계시는 수험생이시라면
책을 읽지 않고도 충분히 문제를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실력이 되시는 분들은 책을 읽지 않고 도전해 보세요~


**** 도서 정보 ****

국내도서>역사와 문화
저자 : 최규진
출판 : 서해문집 200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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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를보는창20인간을둘러싼여러이야기묶음이곧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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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5. 16. 일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근대 사회문화사> 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1. 다음 노래를 듣고, 지문을 본 후 물음에 답하세요~

 

위 노래는 한기주와 함께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였던 토월회의 맴버, 윤심덕이 부른 사의 찬미이다. 이 노래는 본격적인 대중가요로서 일반인의 인기를 끈 최초의 노래라는데 의미가 있다. 그러나, 이 노래는 이바노비치의 __________________에 우리말 가사를 붙여 부른 것으로 제대로 된 대중가요는 아니였다. 윤심덕은 이 음반 녹음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유부남이었던 애인 김우진과 현해탄에 몸을 던져 자살한 신여성으로 더욱 유명하다. 그 이후, 최초의 창작 대중가요는 1927년 발표된 <낙화유수>이다.

 

1. 위 빈칸에 들어갈 노래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① 노들강변
② 황성의 적
③ 술이냐 눈물이냐 한숨이냐
④ 도나우강의 잔물결
⑤ 빈대떡 신사

 

2.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 사상을 바탕으로 어린이는 <인내천의 천사>라고 보아야 한다.

죄없고 평화롭고 자유로운 한울나라는 우리 어린이의 나라이다.

1923년 어린이 창간, 1926년 별나라 창간. 천도교 소년회를 바탕으로 오월회 설립

 

2. 위 신문은 동아일보에 실린 <어린이> 창간호  광고입니다. 위 신문과 지문으로 미루어 천도교 인물로서 가장 내용과 연관된 분은 누구일까요?
① 최제우                                ② 손병회                                ③ 최시형
④ 방정환                                ⑤ 최남선

 

3.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1949년. 이승만 정부는 정당 정치를 포기하고, 민중 우민화 교육과 반공 교육을 통해 1인 집권 체제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이 때 등장한 교육 방침이 바로 <일민주의> 교육이었다.

<일민주의>란, 국민의 뜻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국가 방침과 어긋나는 사상을 <좌파 사상>으로 몰아 교육분야의 <좌파 교사>들을 척결하고, 학생들의 비판적인 의견을 모두 막아 버리는 교육 방침이었다

그 정책은, 6.25 전쟁을 전후한 사회적 분위기와 맞아 떨어졌고, 한국 사회에서는 창의적 교육이라는 것이 완전히 사라졌으며, 국가가 주도하는 <주입식 교육>만이 유일한 교육으로 남게 된 것이다.

이승만은 <일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1949년 1월. 전국적으로 ____________을 결성하였다. 이것은 18세 이상 모든 대한민국 남녀를 모두 <국민회>에 가입시킨 후, 반공 교육과 국가 교육을 시키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교장이 이 단체의 단장을 맡고, 학생이 학도부장과 대대장을 맡아서 운영되었는데, _____________ 단체의 총재는 대통령, 부총재는 국무총리 등이 맡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단체는 <공산주의를 쓸어 버리자>는 명분으로, 학생들을 국가 홍보 수단으로 이용하였으며, 단일화된 주입식 교육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3. 이승만 정부에서 살았던 분들은 아실만한 문제입니다. 위 지문과 관련된 빈칸의 단체는 무엇일까요?
① 조국청년단                              ② 학도호국단                         ③ 새나라운동본부
④ 이북척결단                              ⑤ 자유국가단                         ⑥ 백골단

 

4. 다음 사진을  잘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위 사진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호텔인 손탁 호텔의 모습과, 1907년의 광고 전단지이다.

1885년, ________ 공사 베베르를 따라 온 손탁이 아관파천 당시 고종에게 땅을 받아 지은 호텔이다. 이 호텔은 개화파들이 주로 이용하면서 서양 문물을 소개받고, 외국인들과 친분을 맺던 곳이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으로 _________ 공사의 세력이 위축되자 프랑스 사람의 손으로 호텔이 넘어갔다. 그 후, 신교육 사업을 위해 이화학당이 이 호텔을 여학생 기숙사로 이용하였는데, 일제 강점기 때 아예 철거되었다.

 

4. 위 내용의 빈 칸에 들어갈 나라는 어디일까요?
① 영국                    ② 미국                       ③ 독일
④ 일본                    ⑤ 러시아                    ⑥ 네덜란드

 

5. 다음 내용을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왼쪽 사진의 인물은 <나운규>이다. 그는 일제 치하에서 부당하게 탄압받으면서 한국 문화예술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일제시대 초반 문화 예술인으로서 모든 사회 활동에 가담했으며, 국내외 독립운동 단체의 인사들과도 친분이 있었고, 3.1운동 등 굵직한 현장에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1926년, 감독과 각본, 주연을 도맡아 관객 110만명의 기념비적인 영화 ___________을 개봉하였다. 이 영화는 이전의 고대설화, 전설, 판소리 작품 등을 인용하던 것에서 벗어나 조선 시대의 현실적 인물들을 등장시킨 한국 영화사의 본격적인 작품이다.

지주와 소작인, 일제의 하수인과 지식인, 부자 상인과 빈곤층, 희생당하는 여성 등 조선의 인물들을 등장시켜 민족의 문제와 민중의 문제를 동시에 한편의 영화로 다루었던 것이다.

 

5. 위 빈칸에 들어갈 영화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① 혈의누                    ② 장한몽            ③ 의리적 구토
④ 월하의 맹서            ⑤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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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29. 금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한국 현대사> 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1. 다음 지문를 잘 읽고 물음에 답하세요~

- 1956년, 3대 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으로 민주당 <장면>이 당선되자, 이승만 정부는 다음 선거를 위해 장면을 피살하려다 실패하였다. 또한, 평화통일을 주장하던 진보당 당수 (1)_________을 간첩 혐의로 처형하고, 북한과 대립구도를 조장해 국가보안법을 개정한 뒤, 경향신문을 폐간하였다.

- 그러나,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자, 외무부 장관 (2) _________를 중심으로 하는 과도 정부가 수립되었다. (2)_____ 정부는 내각제와 양원제 헌법을 개정한 뒤 총선거를 실시했는데,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 민주당은 장면을 내각 총리로 하는 장면 내각을 출범시켰으며, 의회에서 윤보선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내각 정부였다. 장면 내각은 경제 개발 계획을 수립하여 추진하려고 했다. 그러나, 장면 내각은 박정희의 군사 쿠테타로 9개월만에 무너졌으며, 경제 개발 계획은 박정희가 이어받아 실행하였다.

 

1. (1)에 들어갈 인물은 이승만의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의 대통령 후보였으며, 간발의 차이로 대통령 선거에서 패한 후, 정권에 의해 제거당한 인물입니다. 누구인지 3글자로 적어주세요~

 

2. (2)에 들어갈 인물은 <허정>이다. O,X로 답해주세요.
O
X

 

3. 다음 카툰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3. 김대중 정부는 제주 4. 3 사건 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을 국회에 상정해서 이들의 명예를 회복시켰지만, 아직도 당시 참담한 비극의 세부 이야기들은 규명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정치 상황으로 미루어볼 때 이 사건의 배경으로 가장 가까운 것은 무엇일까요?
① 무장봉기를 주도한 좌익세력들이 러시아 무정부주의자들과 연결되었다.
② 냉전 체제가 굳어지면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 수립에 반대하는 세력이 늘었다.
③ 반민족 특별법에 의해 친일판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④ 이승만 정권이 부정선거를 통해 장기집권을 추진했다.
⑤ 제주를 전라도에서 분리시켜 독립 행정구역으로 전환하려고 했다.

 

4. 다음은 월간 개벽입니다. 질문에 답하세요.

- 1906년, 대한 제국 황실유학생 출신으로 일본 메이지 대학에 입학
  - 최남선과 함께 손병희를 만나 천도교에 입교, 신민회 가입
  - 1919년 3.1운동의 33인으로 한용운(불교), 이승훈(천주교)를 참가시키고 최남선을 선언서 낭독자로 추천함
  - 3. 1 운동으로 3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총독부의 배려로 곧 석방한 뒤, 자치론 주장
  - 개벽의 사장으로 취임한 뒤,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지지하고 발표
  - 자치운동 조직인 연정회를 만들어 신간회와 대립하고, 친일조직인 시중회 조직
  - 1937년,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사장에 취임하여 <내선일체론> 주장
  - 1949년, 반민특위에서 대표적 친일파로 체포되었으나, 정권에 의해 풀려남

 

4. <개벽>의 사장이였던 위 인물은 기미독립선언 33인 중에 한사람입니다. 현재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친일파로 손꼽고 있는데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 <자치론> 등을 옹호하였고, <중추원>에서 친일파들을 이끌었던 이 인물은 누구일까요?
① 이상화
② 김동인
③ 최린
④ 박희도
⑤ 정춘수

 

5. 다음 포스터들을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5. 1990년대 후반 이후, 우리 나라의 영화, 드라마, 가요 등 대중 문화가 중국, 대만, 베트남 등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왼쪽은 중국의 ________ 소식지이며, 오른쪽은 일본의 ______ 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2글자로 적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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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역사퀴즈 (2010. 1. .12  화요일)

오늘의 출제 범위는 <한국사 3급 검정 문제> 입니다.

  - 반드시 컴퓨터용 수동 마우스를 사용해 주시고, 제출하기를 꼬옥~ 눌러주세요.
  - 점수와 후기를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음 회 난이도를 조절할 수 있답니다.

1. 다음 그림을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1. 위 그림과 같은 피난길에서 있었던 사실과 다른 것을 골라보세요.
①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소현세자를 전주로 내려보내고 자신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② 정묘호란으로 조선과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맺게 되었다.
③ 병자호란 때 소현세자가 피난한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화해를 하였다.
④ 청과 사대 관계를 맺은 후 효종은 북벌을 준비하였다.
⑤ 북벌을 위한 군대는 러시아와 함께 청나라를 공격하는 나선 정벌에 이용되었다.

 

2. 다음 그림을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2. 위 지도와 같은 시기에 있었던 사실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① 조선에 표류했던 하멜은 네덜란드에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작성하였다.
② 김육은 서양식 달력인 시헌력 채택을 주장하여 실현시켰다
③ 소현세자는 아담샬을 만나서 천주교 신앙에 관한 책을 국내로 가져왔다
④ 정두원은 천리경과 자명종을 조선에 수입하였다
⑤ 김홍집은 황쭌셴으로 부터 조선책략을 수입하여 17세기 국제정세를 조선에 알렸다.

 

3. 다음 지도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3. 위와 같은 국제 정세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은 무엇일까요?
① 대성 : 백제가 마한땅을 정복하고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한 시기였네
② 승리 : 낙동강에 진출해서 가야의 해상 교역에도 큰 타격을 주었겠군.
③ 탑 : 중국의 요서 지방과 산둥 반도에서 진출했잖아?
④ 태양 : 근초고왕의 고구려 공격으로 고국천왕이 전사했었어
⑤ 지드레곤 : 근초고왕이 왜 왕에게 하사한 칠지도는 백제의 우수한 철기문화를 보여주는 예로 볼 수 있지

 

4. 다음 지도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4. 위와 같이 세계적으로 제국주의 반대운동이 있던 시기의 조선과 주변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틀린 것을 골라보세요.
① 규리 : 조선에서 3.1 운동이 있던 같은 해에 러시아는 코민테른(제 3 인터내셔널)이 결성되어서 반제국주의 독립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지.
② 니콜 : 3.1 운동과 같은 해에 중국은 일본의 21개조 요구에 반대하는 5. 4 운동이 있었지, 아마?
③ 하라 : 당시 이집트의 반영운동은 수에즈 운하에 대한 소유권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네.
④ 승연 : 당시 인도의 독립운동은 비폭력, 불복종을 지향했었잖아.
⑤ 지영 : 3. 1 운동은 세계 1차대전이 발생하기 전에 시작되었지?

 

5. 다음 표를 보고 물음에 답하세요~

 

5. 위 표에서 설명하고 있는 단체에 대해서 틀린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① 창민 : 이 단체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를 계승하고, 베이징에 수립하였지.
② 윤호 : 초대 대통령은 이승만이였고, 행정 기관으로 국무원을 두었잖아.
③ 유천 : 이승만의 외교론과 신채호의 투쟁론이 대립하면서 분열되었고, 창조론이 대두했었지.
④ 창민 : 개헌을 거듭할 수록 힘이 약해져서 결국 김구가 주석을 맡아 이끌어갔잖아.
⑤ 재중 : 우리 나라 최초의 민주 공화제 정부인데, 연통제와 교통국 등의 조직과 애국공채 발행 등을 통해 군자금도 마련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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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35. 민주주의의 발전
  앞서 살펴보았듯이, 광복 이전에 건국을 준비해오던 단체들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건국의 강령으로써 내세웠다. 자유와 민주주의는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꿈꿔오던 단 한 가지 목표였으며, 각종 파벌과 이념으로 갈라져있던 독립운동세력을 아우르는 하나의 매개체였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도 그들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름뿐인 자유와 민주, 자신의 부정부패를 합법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원들과 대통령들― 일제강점기를 억압을 벗어나 순탄할 것만 같았던 우리나라 현대사는 또다시 민주화를 부르짖으며 격동에 휩싸인다. 

 1) 이승만의 독재와 4.19
  이승만 ‘박사’는 과거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맡았던 인물로, ‘이름난’ 독립운동의 ‘거목’이었다. 이승만은 주로 하와이나 미국 등지에서 활동하였으며, 각종 국제회의에 조선을 대표하는 인물로 참여한 바 있다. 이승만의 ‘공식적인’ 활동들로 인해 그는 국내외에서 유명해졌으며, 결국 광복 이후에는 초대 대통령직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가 정권을 잡은 것도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대다수의 민족주의자들은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반대하여 이승만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이승만은 미약했던 자신의 지지기반을 다지기 위해 친미파로 변신에 성공한 친일파와 손을 잡지 않으면 안됐다. 헌법을 만든 초대 의회였던 제헌의회制憲議會는 친미파였던 한국 민주당 출신들이 대부분을 차지하였으며, 그들은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의 지지기반의 대부분이 친일파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제헌의회의 임기가 2년으로 끝나고, 6.25 전쟁 직전에 이루어진 선거에서는 과거 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던 민족주의자들과 이승만을 비판했던 사람들이 대거 당선되어 이승만의 대통령직이 위태로워졌다. 이승만은 2대 대통령 선거가 행해질 1952년, 6.25 전쟁 중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경찰, 군대, 폭력배 등을 동원하여 강제로 대통령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헌법을 고쳤다(발췌개헌). 1954년에는 초대 대통령만은 계속 대통령직을 역임할 수 있도록(중임 제한 규정 철폐) 다시금 헌법을 고쳤다. 1954년 개헌에서는 개헌과 함께 웃지못할 이야기가 전해진다. 본래 헌법을 고치기 위해서는 전체 국회의원의 2/3의 동의가 필요했다. 1954년 당시 국회의원 재적은 203명으로, 그의 2/3은 135.33333....이었으며, 때문에 개헌을 위해서는 136명이 개헌에 동의해야했다. 투표 결과는 135명이 찬성하여 부결되었지만, 후에 이승만의 자유당은 0.333....명은 있을 수 없으므로(자연인이 아니므로) 소수점을 반올림(사사오입)하여, 135명의 찬성만으로도 개헌이 가능하다는 어처구니없는 논리를 펼쳤다. 결국 극적인 반올림으로 대통령의 중임제한을 철폐하는 것으로 헌법이 개정되었는데, 이를 사사오입 개헌이라고 한다.
 
  이
승만의 이러한 ‘노력’에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항상 시험 당해야 했다. 이승만과 갈라선 이들은 민주당을 만들어 대립하였는데, 민주당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 때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내걸고 대통령 후보에는 신익희, 부통령 후보에는 장면을 입후보하였다. 선거 유세 도중 신익희는 급사하였지만, 장면이 부통령에 선출되면서 자유당을 견제하였다. 1960년에 이루어진 대통령 선거에서는 혁신을 주장했던 진보당의 조봉암이 인기를 끌자 이승만과 자유당은 3.15 부정선거를 자행했을 뿐만 아니라, 진보당 사건을 일으켜 조봉암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을 선고했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그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보안법을 개정하였으며, 언론을 탄압하고 반공사상을 강화시켰다.

  3.15 선거는 3인조, 5인조로 묶어서 투표를 하도록 하거나 투표함을 교체하는 등의 부정행위로 많은 사람들의 규탄을 받았다. 국민들은 부정부패와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이러한 불만들은 각종 시위를 통해 표출되었다. 김주열이 참여한 마산 시위도 이러한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 중에 하나였다. 고등학생이었던 그는 마산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행방 불명 되었는데, 얼마 후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시체가 마산 앞바다에 떠올라 발견되었으며, 시체를 유기한 것이 경찰의 소행임이 알려지자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김주열의 사망소식은 전국적인 시위의 계기 되었으며, 4.18 고대 학생시위를 거쳐 4.19 전국 시위가 전개되었는데, 경찰들이 시위대에게 발포하였기 때문에 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이 희생당했다. 결국 같은 해 4월 26일에는 이승만이 대통령직을 하야함으로써 막을 4.19는 막을 내렸다. 4.19는 학생과 시민을 중심으로 민주화 운동이 진행되었다는 의의를 갖는다. 또한 4.19 이후로는 그동안 북진 통일 이외에는 사실상 ‘금기’로 여겨지던 통일에 대한 열망을 어느 정도 펼쳐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판문점으로! 등“)

  4.19 이후 대통령이 아닌 국무총리를 중심으로 하는 내각제 개헌이 이루어졌으며, 과거 선전하였던 민주당의 장면이 국무총리로서 권력을 잡았다.(대통령 윤보선, 국무총리 장면)

Tip1. 이승만 정부
1952. 발췌개헌
1954. 사사오입 개헌
1956. 대통령 이승만(자유당) vs 신익희(민주당) / 부통령 이기붕(자유당) vs 장면(민주당)
        민주당 “못살겠다 갈아보자” / 신익희, 선거 유세 도중 급사
1960 대통령 이승만(자유당) vs 조봉암(진보당) / 조봉암, 간첩으로 몰려 사형

Tip2. 4.19 혁명의 전개
3.15 부정선거 -> 마산 규탄 시위 -> 김주열 사명 -> 전국적으로 확대 -> 고대 시위 -> 4.19 전국적으로 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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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34. 6.25 전쟁
  사실 6.25 전쟁은 그동안 수능에서 크게 다루어지는 주제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전에 수능을 출제했던 정권과는 정치적 성향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고, 또한 총체적으로 근현대사를 한번 짚고 넘어가자는 나의 의도와 완성도를 높여보자는 생각으로 6.25를 간략하게 서술하기로 한다.
  남북한에 각각 정권에 들어서고,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이승만은 반공을 내세우면서 북진통일(北進統一)을 주장하였다. 남한과 북한의 군대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았으나 38선에서 종종 무력적인 충돌이 있었다. 1949년 무렵에는 남북한에 각각 주둔해 있었던 미국과 소련이 물러났다. 더욱이 미국은 1950년 애치슨 선언을 통해 남한을 미국의 방어지역에서 제외하면서 한반도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사료. 애치슨 선언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은 류쿠(일본 오키나와)에 이르고 (중략) 필리핀으로 이어진다. (중략) 그 밖의 태평양 지역의 군사적 안전 보장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 지역(남한)을 군사적 공격으로부터 보장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그와 같은 보증은 실제적으로는 거의 필요가 없다는 사실도 명백히 해두어야 한다. 공격이 있을 경우 첫째로 의지해야 할 것은 전 문명 세계가 유엔 헌장 아래에서 맞은 약속이다.

ㅡ애치슨(미 국무 장관), 아시아의 위기 1950

  6.25일 북한은 남침을 강행하였으며 파죽지세로 7월 말에는 낙동강까지 이르렀다. 이에 유엔은 결의를 통해 유엔군 만들어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8월부터 남한군에 합류한 유엔군은 낙동강에서부터 반격을 시작하여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상황을 역전시켜 나갔다. 9월 말에 서울을 수복하고 10월 26일에는 압록강에 다다르지만 11월 25일에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다시 38선 지대로 후퇴해야만 했다. 뒤이어 1951년 소련도 공군으르 통해 전쟁에 부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점차 세계 대전으로 확산될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만주까지 전선을 확장하고, 핵무기를 사용할 것을 주장했으나 미국은 그를 해임하고, 소련이 유엔에서 제의한 휴전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홀로 남한은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있었다. 1953년 7월, 결국 휴전이 성립되었다.
  남북한은 전쟁 시기 동안의 엄청난 경제적인 손실을 져야만 했고, 살아남은 많은 사람들도 생활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6.25로 득을 본 것은 이승만, 김일성과 같은 소수의 정치인들이었는데 그에 대한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과 북한의 역사를 통해 차차 설명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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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910년대 국내외 민족 운동 
 1) 국내의 민족 운동(비밀결사) 
  일제의 남한 대토벌(1907)로 인해 국내에선 실질적인 의병활동 및 항일 운동의 전개가 곤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내에서의 항일 활동은 비밀 결사의 형태로 전개된다. 1912년 임병찬이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의병을 규합하여 만든 독립 의군부는 국권 반환을 위해 편지 등을 통하여 국제 사회 및 일본을 향해 요구하였다. 또한 의병 투쟁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고종의 명령을 받아 결합된 비밀 결사였으므로 주된 목표는 황실의 부활, 즉 복벽적인 것이었다(왕실부활, 복벽주의).
  또한 대한 광복회군대식 조직을 가진 비밀 결사독립운동, 무관학교 설립비 등을 모금하였다. 공화정을 주장하였으며, 그 유명한 김좌진 장군이 속해있었던 단체이기도 하다. 독립운동, 무관학교, 김좌진 등의 키워드에서 읽을 수 있듯이 독립 전쟁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였다.
  여성 비밀 결사 조직인 송죽회와 조선 국권 회복단, 자립단 등이 있다.

 2)
해외 독립 운동 기지 건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국내에선 실질적인 항일 운동이 불가능 하였다. 때문에 해외에서의 독립 운동이야 말로 진정한 무장 독립 투쟁의 대안이었다. 해외의 독립 운동 기지는 크게 만주, 연해주, 상하이, 미주, 네 곳으로 나눠볼 수 있다.
  만주 역시 서간도 북간도 북만주로 나눌 수 있는데, 서간도에는 삼학사의 경학사(후에 부민단으로 개칭), 신흥 무관학교, 대한 독립군, 서로 군정서 등이 대표적이다. 북간도에는 중광단(후에 북로 군정서으로 개칭, 김좌진 장군), 서진서숙(후에 명동학교로 개칭) 등이 있었고, 북만주에는 1921년 대한독립군단이 결성하게 되는 한흥동(韓興洞 : 한족이 흥하는 동네)가 있다.
  연해주 지방에서는 성명회, 권업회와 같은 항일 결사를 비롯하여 유인석의 13도 창의군(정미 의병의 이인영의 13도 창의군과 다름, 주의), 대한 광복군 정부(1914, 이상설), 대한 국민 의회(1919, 손병희, 무장독립론) 등이 있었다.
  상하이에는 신한 청년당(1918, 안창호, 외교독립론)이 후에 상하이 임시정부의 모태가 되었으며 미주에는 대한인 국민회(1909, 안창호, 이승만), 하와이에서 박용만이 조직한 군대인 조선 구민군단(1914)이 있다.

18.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1) 3.1 운동
  1차 세계대전 이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1918년 만주 길림에서 발표된 무오독립 선언서, 1919년 도쿄에서 발표된 2.8 독립 선언이 촉매가 되어 이윽고 1919년 3월 1일. 역사에 길이 남을 3.1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본래 민족 대표 33인이 주도하기로 하였으나, 그들이 중국집에서 임의로 선언서를 낭독하고 자수해버리는 바람에 계획된 일정에 차질이 생기기도 하였다. 기다리던 학생들과 종교인 등은 계획되로 진행이 되지 않자, 스스로 기미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시작하였다. 처음 운동이 시작했을 때는 참가자들은 학생, 종교인, 지식층으로 구성되어 비폭력주의를 표방하고 힘차게 태극기만 휘날렸지만, 점점 3.1운동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상인, 노동자, 교사, 학생, 농민 등이 참여하였다. 일제는 무자비한 탄압을 했고,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무력으로 투쟁하기도 하였다.(* 추가사항 : 특히 농민들 같은 경우 전에 실시되었던 토지조사사업 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그들의 일본에 대한 불만은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운동이 점점 진행함에 따라, 상대적으로 농민 등의 참여가 두드러지게 증가한 다는 것도 알 수 있다.
  3.1운동은 운동은 3.1운동 그 자체보다 3.1운동이 가져온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일단, 일제의 통치 방식이 무단통치에서 소위 '문화통치'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이번 3.1운동을 통해 하나의 통일된 독립운동 관리조직이 필요함을 절감하였고, 이로 인해 임시정부 수립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국내에선 실력양성운동이, 국외에선 무장독립투쟁이 활성화하게 되었으며, 사회주의의 영향으로 독립 운동이 대중화 되기도 하였다.

 2) 대한민국 임시정부
  3.1운동의 영향으로 몇몇 개의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무장독립투쟁 노선을 걷고 있던 대한 국민 의회연해주에 있었고,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한성 정부국내에, 안창호가 외교활동을 위해 만든 훗나 임시정부가 되는 신한청년단상하이에 있었다. 이러한 3개의 임시정부를 안창호가 '임시 정부 통합안'을 발표함으로써 이들 임시정부가 합쳐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상하이에 자리잡게 되었다.

▷ 한성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 한성 정부의 조직과 인선을 계승한다는 것은 한성 정부가 한성에 있었다는 것을 특별히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물론 노인네라서, 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위치는 상하이로 한다.
  -> 외교독립론(외교 > 무장) / cf. 만주, 연해주는 무장 투쟁론

 
임시정부는 비밀 행정 조직이었던 연통제와 통신을 담당했던 교통국을 통해 활동하였다(행정). 만주에 이륭 양행, 부산에 백산 상회 등과 함께 애국 공채 발행으로 군자금을 조달하였으며, 군대조직으로는 육군 주만(住滿 ; 만주에 있는) 참의부와 훗날 만들어지는 광복군 사령부, 광복군 종영, 한국 광복군이 있다(군사). 파리 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였고, 미주엔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구미 위원부를 설치하여 외교 분야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다. 독립 신문(독립 협회의 독립 신문과 이름만 같지 내용은 다르다)과 사료 편찬소 등을 설립하는 등 문화적인 면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일제의 탄압은 계속되었으며 연통제와 교통국이 일제에게 파괴되기에 이른다. 또한 실리 없는 독립운동이라며 외교독립론이 비판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험학한 분위기 가운데, 우리의 이승만은 또라이짓을 잊지 않았다. 이승만이 국제연맹과 미국에 위임 통치 청원을 한 사실이 독립운동가 사이에 알려지자, 독립운동가들은 국민 대표 회의를 긴급소집하고 과연 독립운동은 이대로 괜찮은가, 라는 명제로 머리를 맞댄다. 이에 임시정부를 개편하자는 외교독립론, 실력양성론자들(개조파)과 아예 새로 뜯어 고쳐야 된다는 무장독립투쟁론자(창조파)들이 대립하기에 이른다. 끝내 창초파는 임시정부를 탈퇴하게 되고 이승만 역시 대통령 자리에서 탄핵되었다. 임시정부는 이러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지도 체제를 개편하고, 김구가 사(私)조직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1926)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노력은 임시정부의 내부분열이 얼마나 심했는지, 임시정부의 상황이 얼마나 안좋았는지 새삼 깨닫게 하는 바이다.


 Tip. 독립 운동론

  1. 무장 투쟁론 : 일제와의 독립 전쟁을 통해 독립을 얻어내자는 노선

   -> 신채호, 이동휘, 손병희 등

  2. 실력 양성론(준비론) : 힘을 길러 독립 전쟁을 준비하자는 노선

   -> 안창호

  3. 자치론 : 일제 지배하에서 자치를 얻자는 노선 -> (삐꾸) 이광수, (찐따) 최린

  4. 외교독립론 : 국제 연맹이나 미국 등 강대국의 도움으로 독립을 얻자는 노선

   -> (또라이) 이승만

  5. 계급 투쟁론 : 계급 투쟁을 통한 일제의 지배 계급 타도(사회주의계) -> 박헌영

 19. 의열 투쟁
 1) 의열단 
  3.1운동 이후 무장투쟁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김원봉과 윤세주 등이 만주 길림에서 비밀 결사인 테러조직을 조직하게 된다(1909).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외교론, 자치론, 준비론 등을 비판하며 민중의 직접 혁명을 촉구)」을 행동 지침으로 삼아 김익상(총독부에 폭탄 투척), 김상옥(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나석주(동척에 폭탄 투척) 등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하지만 비밀 결사의 한계를 인식하고 독립 운동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정당(政黨)과 군사조직으로 거듭나기 위해 의열단원 전체가 중국의 황포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훈련을 받았으며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설립(1932)하기도 하였다. 후에 김원봉은 조선 민족 혁명단을 결성(1935)하고, 조선 의용대를 창설(1937)하여 항일 운동의 최전방에 나섰다.

 2) 한인 애국단
  국민 대표회의 이후로 침체된 임시정부의 재활을 꿈꾸며 김구가 조직한 사조직이다. 이봉창(일왕의 마차에 폭탄 투척), 윤봉길(훈커우 공원에서 폭탄 투척) 등이 대표적이며, 특히 윤봉길의 의거는 중국인들의 의식을 바꾸는 기폭제 역할을 하여 중국 국민당는 그들의 영토 내에서 무장 독립 투쟁을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또한 국민당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도 적극적으로 하게 되었다.


Tip. 의열단과 한인 애국단의 비교

 의열단 : 국내에서 활동

 한인 애국단 : 외국에서 활동

 20. 무장독립투쟁의 전개
  순서, 장소, 전투를 승리로 이끈 대장, 혹은 대표자 등은 꼭 알아두자. 요즘 많이 나오는 추세다(거의 2문제 정도).
  1920년, 포수 출신의 의병장이었던 홍범도대한 독립군이 일본군을 북간도 지방의 봉오동에서 대파하였다. 분노한 일본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은 간도 훈춘에 있던 군벌에게 자국 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난리를 부리도록 자작극을 의탁하였다. 이것을 '훈춘 사건'이라 하는데 이로 인해 일본은 간도로 대규모의 병력을 옮길 수 있는 구실을 얻게 되었다. 김좌진의 북로군정서는 일본의 이러한 움직임을 간파하고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과 연계하여 청산리에서 큰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번에도 참패를 겪게된 일본은 간도참변을 일으켜 보복(1920)하였고, 간도에서의 독립운동은 좌절되어 독립군들은 북만주에 있는 한흥동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하게 된다.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한 독립군은 소련령으로 들어가 독립전쟁을 전개하고자 하였으나 소련의 내란에 휘말려 변을 당하게 된다(자유시 참변, 1921). 수많은 독립군이 죽어갔으며, 살아남은 독립군들은 다시 만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만주에 돌아온 독립운동가들은 참의부(대한민국 임시정부 직속부대, 1923), 정의부(1924), 신민부(1925), 소위 3부를 성립하게 되며 민정(民政)과 군정(軍政)을 아우르는 자치 정부가 생겨나게 되었다.
  일제는 이것 마저 만주 군벌과의 미쓰야 협정(1927)을 통해 독립군에게 현상금을 걸고 만주 군벌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하였다. 이에 독립군들은 3부를 지역중심으로 통합하여 남만주에는 국민부북만주에는 혁신의회를 세웠다. 후에 국민부혁신의회는 각각 조선 혁명당과, 한국 독립당으로 발전하여 휘하에 양세봉 장군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지청천 장군의 한국 독립군을 두었다. 단체의 이름으로 봐선 다분히 사상을 중심으로 통합한 듯 하나, 실은 사상과 관련없이 지역 중심으로 통합되었다는 걸 간과해선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3부의 통합은 민족 유일당 운동의 하나로 손꼽는다.
  1931년 일제가 드디어 대륙 침략의 야욕을 노골화하여 만주를 침략하고 괴례국인 만주국을 세웠다(만주사변). 만보산 사건(한중 물꼬 싸움) 이후로 민족 감정이 좋지 않았던 중국과 한국인 사이가 만주 사변 이후 상호 협력적인 형태로 바뀌어가며 윤봉길 의사의 서거 또한 한 몫하여 한중 연합작전을 가능하게 하였다. 한중 연합작전에선 앞에서 만들어진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의 활약을 하게 되는데,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흥경성 등에서,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대전자령 등에서 연합하여 일제에 대항하였다.

  1935년 의열 투쟁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끼고 있던
김원봉의열단, 한국 독립당, 조선 혁명당 등을 통합하여 조선 민족 혁명당을 조직하였다(1935). 이후 조선 민족 혁명당의 산하 부대인 조선 의용대를 창설(1937)하여 활발한 항일 활동을 보인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 의 하수인 노릇(찌라시 뿌리기, 항복 권고 등의 잡일)만 하게 되자, 분노한 대다수의 조선 의용대는 화북지방으로 월북하여 중국 국민당 등지고 중국 공산당과 손을 잡게 된다. 자세한 이야기는 뒤에서 다루도록 하겠다.
  한편, 동북 지방에 중국 사회주의자들과 조선인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동북 항일 연군(東北抗日連軍, 동북쪽에서 일본에게 대항하는 군대)은 국내의 민족 유일당 조직 중 하나였던 조국 광복회의 도움을 받아 보천보 전투를 성공적으로 끝냈다. 후에 동북항일연군에 있던 조선인 사회주의자들은 소련군에 편입되어 해방후에 국내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들을 '갑산파(김일성 포함)'라 한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국민당의 처우에 불만을 품은
조선 의용대의 몇몇 사람들은 공산당이 있는 화북지방으로 이동하여 중국 공산당과 연안 지방에서 손을 잡게 된다. 조선 의용대는 화북 지방에 있는 사회주의 단체인 조선 청년 연합회와 연계하여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고 조선 의용군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해방후에도 중국의 공산혁명에 참가하여 맨 마지막으로 해방된 조국에 들어온 독립운동가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연안파'라 불리며 해방 북한의 주력부대가 되었다.
  1940년 임시 정부의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독립당(3부가 통합된 한국 독립당과 다름, 주의.)을 중추로하여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창시될 당시만 하여도 30명 남짓의 소규모 조직이었지만, 1942년 김원봉을 비롯한 남아 있는 조선 민족 혁명당이 힘을 보탬으로써 조직다운 면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은 대독,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도, 미얀마 작전에 참가하여 한 나라의 국군(國軍)적인 면모를 보였다. 처음에는 국민당 산하에서 독자적인 지휘권 없이 활동하였으나, 후에 독자적인 지휘권을 얻게 되어 미국의 도움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일본이 1945년 8월 15일 항복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Tip. 무장 독립투쟁 전개도

1920년 봉오동 전투(홍범도), (훈춘사건), 청산리 전투(김좌진) - 승리

        간도참변(경신참변) - 시련

        대한독립군단 - 극복 의지

1921년 자유시 참변 - 시련

1923~1925년 3부 성립 - 극복 의지

1927년 미쓰야 협정 - 시련

1928년 3부 통합 - 극복 의지, 민족 유일당

1931년 만주 사변 - 시련

1930년대 한중 연합 작전 - 극복 의지

1935년 조선 민족 혁명당 결성 - 극복 의지, 민족 유일당

1936년 동북 항일 연군 조직 - 극복 의지

1937년 중일전쟁 발발 - 시련

        동북 항일 연군 + 조국광복회 -> 보천보 전투 - 민족 유일당, 극복 의지

        조선 의용대 창설(조선 의용대의 이동 경로 주의) - 민족 유일당, 극복 의지

1940년 한국 광복군 창설 - 극복 의지

1942년 한국 광복군 + 조선 의용대 - 민족 유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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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새로운 역사와 문화 코드 (2)

만약에... 라는 단어 하나로 세계사를 바꿀 수 있는 포스트 모던 역사학

1. 기존의 <진리>는 모두 버려라~

자, 그럼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는 기본 입장을 정리해보자.

포스트 모더니즘의 <핵심>은 지금까지의 역사가 가지고 있는 일체의 <사실성>을 부정한다. 무슨 말이냐고?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는 누군가가 남긴 <기록>에 의존한다. 삼국시대에 대한 기록은 고려시대 김부식 등이 공동편찬한 <삼국사기>를 바탕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믿을 수 있는가?

당대 김부식은 서경천도운동을 주도했던 묘청 등과 대립하였다. 묘청이 고구려 중심 사관이라면, 김부식은 신라중심 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신채호는 이것을 이유로, 묘청이 김부식에 패한 것이 <민족 1천년래 최고의 사건>이라고 한탄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편찬하면서 고조선이 신조선, 불조선, 말조선의 3조선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고, 발해와 고려로 이어지는 민족적 정통을 이어갔다고 말했다. 그런데, 신채호가 살던 시기는 일제강점기로 민족주의가 유독 강조되는 시기였다. 그럼 <조선상고사>는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가? 신채호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았는가?

포스트모던 역사가 제기하는 것은 바로 이런 <모순성>들이다. 어떤 역사속의 문서나 자료들도 <객관적> 일 수 없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조한 이유가 말 안듣는 신하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라면? 이순신이 임진왜란 전 여진족 토벌에서 무참히 패배한 것 등을 들어 이순신의 기용이 낙하산이라고 주장한다면?

<교과서에 없는 걸 말하지 말란 말야... 죽을래?> 라고 협박하고 끝낼 것인가?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자료는 누군가가 생각을 갖고 적어놓은 것이다. 생각을 갖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주관적인 입장>에서 적었다는 뜻이다. 기록 자체에 의도성이 있는데, 무슨 객관성을 따진다는 것인가?

사실 우리가 <역사>라고 공부하는 것이 <과거>의 진실은 아니다. 전통적인 역사학에서는 <역사>란 실제 그 일이 있었다는 것을 가정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포스트 모던은 그 일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할 자료는 <그렇다고 우기는 과거의 자료> 뿐이라고 말한다.

흑사병으로 서유럽 인구의 1/3이 죽었다고 한다. 그 정도면 서유럽 사회는 망가졌어야 정상이다. 그러나 역사 자료는 상식을 뛰어넘는다. 그 정도 인구가 죽었기 때문에 노동력 부족으로 농민들의 권위 신장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과연 그 정통적인 주장들로 흑사병을 정리하면 끝날까? 어떤 이들은 반대로 주장한다. 그 정도 죽었으니깐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수입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냐고.... 의혹은 더욱 증폭된다. 흑사병으로 죽은 사람을 기록한 통계 자체가 흑사병의 가혹함을 알리기 위해 조작된 것은 아닐까?

이 쯤 되면 포스트모던 역사가들이 <탐정>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것이 정의인지를 놓고 끝없이 추격전을 벌이는 <홈즈와 뤼팡>의 견해차라고나 할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이란 없다. 그 시대를 살아보았는가? 시대의 아픔을 눈으로 느껴보았는가?

시대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사건>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따라서 역사가란, 역사를 보는 눈을 제공해주는 도우미에 불과하다. 100이 존재하면, 100가지 역사 이해가 존재한다.

누구나 그 시대를 상상할 수 있고, 누구나 그 시대를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역사적 사건의 <원인>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세종대왕이 왜 한글을 만들었을까?

훈민정음에 적어두길,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 어리석은 백성이 고생하기 때문에...> 라고 했다. 그건 당연히 적야야할 말을 적었을 뿐이다. MKMF에서 대상을 탄 동방신기도 <아버지, 어머니, 이수만 사장님 감사해요>라는 말은 먼저 달고, 그 다음에 할 말을 하지 않는가?

그 다음 말이 어떤 말일지는 100명이 있으면, 100명 모두 각자의 입장에서 상상을 해볼 것이다. 동방신기 스스로 뭐가 잘나서 상을 탔다고 생각할까? 춤을 잘춰서, 노래가 좋아서? 기획사 빽으로? 맴버 잘만나서?..... 그 원인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역사에서 원인은 하나일 수 없다. 한글을 만든 이유는 반드시 <어리석은 백성> 탓만은 아닐 것이다. 조선 건국후 독자적 기반을 닦기 위해서? 우연히 부려먹을 똑똑한 신하들이 많아서? 유교주의가 성숙해서? 어느 날 문득 한문 공부가 짜증나서?....

포스트 모던은 주장한다. 역사를 딱 하나의 원인과 결과로 설명하는 것은 그 외에 존재하는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프랑스 혁명이 <국왕의 폭정으로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발생했다>로 설명하면 끝나는가? 아니다. 수백년간 고통받았던 농민 하나하나가 가진 이유는 누가 설명해 줄 것인가?

그래서 포스트 모던은 주장한다. 역사에 진리는 없다. <교과서> 같은 책은 누군가가 자신의 입장을 대변한 <자료집>일 뿐이다. 김구가 영웅인 교과서가 있을 수 있고, 이승만이 영웅인 교과서도 있을 수 있다. 요즘 뉴라이트가 이상한 짓을 하듯이 <지 꼴리는 대로 해석하면> 역사의 한 쪽 입장을 설명할 수 있다.

2. 모든 것은 역사가 될 수 있다.

포스트 모던 역사학(이하 포스트 역사학)의 핵심은 <탐정놀이>이다. 누군가의 역사적 발견을 끊임없이 추적해서 재비판하고, 또 다시 재비판받는다.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댓글놀이와 비슷하다. (그래서 더욱 친근한 것인지도 모른다.)

포스트 역사학이 비판하는 것은, 거대한 주류 사회이다.

원래 포스트 모더니즘 이라는 철학 자체가 서구 사회의 거대한 주류 문명을 비판하면서 등장하였다. 왜 미국과 서유럽의 문학, 사회, 과학 등이 절대적 진리가 되었는가? 왜 남성이 여성을 지배한다는 인식이 당연시 되었는가? 과학의 발전이 왜 환경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는가? 백인은 왜 흑인보다 우월한가?

이 모든 것을 비판하면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주류보다 소외된 것들>에서 의미를 찾았다. 그것이 역사학에 반영된 것이다.

왜 역사를 큰 구조 속에서 바라봐야 하는가? 역사 속에는 왕조와 위인들만 존재하는가? 우리가 소외시킨 작은 진리들을 우리 스스로 생각할 수는 없는가?

그 결과 역사는 <일상사>가 되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친구 사귀기, 흑사병에 걸린 소녀의 마지막 하루, 내시 김처선의 유년 시절의 사랑이야기 등이 역사가 된 것이고, 그것을 우리 상상으로 재구성해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은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재비판 받는다. 누군가가 주몽의 하루를 이야기하면, 또 누군가는 그것이 주관적이라고 비판하며 다른 이야기를 한다. 또 누군가는 비판을 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이것은 우리가 익숙하게 접근할 수 있는 인터넷 환경과도 유사하다. 사극을 한 편 보면, 수백개의 비판글과 옹호글이 올라온다. 역사 갤러리에 의견 하나가 올라오면 반박 의견으로 수십개의 댓글이 올라와 혈투를 벌인다.

그들이 벌이고 있는 싸움은, 거대한 정치담론이 아니다. 신윤복이 과연 여자인가, 남자인가와 같은 <인물>을 던져놓고 벌이는 <재미 문화>인 것이다.

그러나, 포스트 역사학은 정통 역사연구법으로 환영받지 못한다. 너무나 허무하다는 편견 때문이다. 특히, 포스트 모던으로 접근했을 때 <역사적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이유로 포스트 역사학을 불매(?)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로, <독도와 만주가 우리땅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역사적 객관성이 무엇인가를 따지는 거대담론이 있다. 포스트 모던적으로 접근해서 <안용복이 진짜 일본에 갔어?>라는 의심으로 문제의 실마리를 잡기 시작하면, 일본과의 싸움에서 승산조차 없다.

<김구가 혹시 빨갱이 아닐까?>라는 가설을 놓고 역사를 접근했을 때,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우익 역사만들기 프로젝트>에 휩쓸려 버린다. 뉴라이트 교과서를 보라. 말같잖은 소리를 교과서에 떡~ 제시해 놓아도 <이런 관점도 있잖아~>라는 입장에서 비판하기 쉽지 않다.

그럼, 포스트 역사학은, 문학과 별반 차이없는 허무한 이론에 불과한 것일까? 상상력으로 구성된 창작물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포스트 모던이 시도하려는 <다양성>은 <독재적인 역사학>의 틀을 비판하고, 역사에는 다양성이 있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뉴라이트의 역사 교과서는 다른 교과서의 다양성을 무시한 채 <또 다른 일방적 관점>을 주입하려는 꼴통짓에 불과하다.

포스트 역사학은 문학이나 창작 소설이 아니라 지난 역사가 가진 <절대성>을 부정하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 철학은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눈>을 뜻한다.

그럼 여기서 또 하나의 의문이 떠오른다. <장길산>이나 <태백산맥> 같은 역사 소설, <이방인> 같은 실존주의 소설도 역사적 배경에 대한 깊은 고민이 있으니 <역사물>인가?

포스트 모던 역사에서는 과감히 말할 수 있다. 그 작품들은 역사적 의도를 가지고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 연구를 위한 소재는 아니다. 그러나, 보는 사람들이 그것을 역사물로 여긴다면 그것은 역사물이 될 수 있다.

포스트 모던의 주체는 필자가 아니라 <독자>이다. 쓰는 사람은 관점을 가지고 글을 쓰지만, 읽는 사람은 쓰는 사람의 관점과 상관없는 해석을 할 수 있다. 원래 언어나 영상은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읽고, 보는 사람이 나름대로 해석할 때 의미가 생기는 것이다.

포스트 모던 입장에서는 모든 것이 역사가 될 수 있다. 사극도, 대하소설도, 심지어 연애편지도 역사의 한 장면이 될 수 있다.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며 만든 사람의 작품만이 역사가 아니라, 보면서 역사적 느낌을 받은 사람의 모든 것들이 역사가 되는 것이다.

3. 역사학이 과거를 창조해도 되는 것일까?

어느 책에서 본 내용인데, 책 제목이 생각나지 않는다.(이 책 제목 아시는 분은 댓글을 주시면 감사^^)

책 내용은 간단하다. <만약에> 흑사병으로 유럽인들이 모두 죽어 버렸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백인은 지구상에 없다. 당대 최강의 세력인 중국 명나라는 정화의 원정으로 유럽의 빈자리에 중국의 깃발을 박아둔다. 아메리카 식민지는 아시아인이 발견하였다. 인디언들은 황인종의 지배를 받는다. 동아시아에서는 산업혁명 비슷한 문화혁명이 일어닌다. 중국의 제국주의에 반발하여 아메리카 식민시의 황인종들은 독립선언을 한다. 중국의 중화주의는 전세계에 강력한 <패권주의>라는 인식을 심어놓는다. 이에 반발한 다른 국가들이 도전하여 세계대전이 일어난다....

만약에 라는 테마 하나로 역사는 이렇게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 일어난 역사가 아니라 가상의 소설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 왜 일까?

가상의 현실을 통해 실제 현실과의 <대화>를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의 제국주의 잔혹함을 중국 제국주의의 잔혹함으로 패러디했지만, 그것은 제국주의 국가였다면 가능했을 법한 일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았다면 유럽과는 상이한 과정을 밟았을 수도 있다. 누군가 다른 길을 가는 중국 이야기를 다시 그려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역사를 바라보는 눈>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포스트 역사학이 남기려는 것은, 역사의 진리를 찾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역사를 통해서 다양한 진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하나의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원인이 존재할 수도 있고,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해보는 것이다.

그렇게 해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지금까지의 <역사>의 틀이 너무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왜 역사는 삼국유사,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된 자료들만을 간추려 이야기되고, 그것이 진리로 인정해야 하는가?

조선시기 타짜나 바람둥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순신에 대한 이야기보다 비중이 떨어지는 것일까?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역사의 기준이 다르다면, 중요한 역사적 사건과 소재도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나의 해석이 곧 역사적 해석이 되는 것이다.

자, 지금까지 포스트 역사학에 대해 간략히 정리해봤다. 여기서 한가지 오해할 부분을 짚고 넘어가겠다. 앞으로 쓸 이야기들이 포스트 역사학을 옹호하면서 전개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각종 매체나 문학 속에서의 역사를 바라보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이 도움이 될 수 있기에 그 개념을 설명한 것이다.

포스트 역사학은 <딱딱한 자료실>을 벗어나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본다는 사실이 매력적이다. 반면, 모든 역사에 진리가 없다는 입장을 가짐으로서 <허무주의>를 초래할 가능성이 너무나 크다.

앞으로 전개할 이야기들에서 이 다양성과 허무주의는 상극을 이루며 이야기를 전개할 것이다. 어떤 이야기에서는 포스트 역사학을 적극 활용할 것이며, 어떤 이야기에서는 허무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문화적 코드이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역사물로 간주할 수 있다는 <포스트모던의 정신>이다. 그럼 시작해 볼자.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by 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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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우리 역사 최악의 인물 - 이승만 편 -

1. 이승만은 땅 속에 묻어두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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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에 대한 연구는 학계에서 대부분 부정적입니다. 이유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시기에서 재뿌리기, 초치기, 배신과 분열.... 등등의 장면에 이승만이 항상 있었기 때문이죠. 역사학자들은 이승만이 역사에 미친 영향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위 조중동(?)이라 일컫는 한국 사회의 보수적 신문들은 이승만 기념 사업회를 연다던가, 이승만에 대한 기사를 미화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글이 나온다 하더라도 사실 별 관심조차 끌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에 대한 신문 기사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보다는 감정적인 측면에서 기술된 것들이 많았거든요.

자, 그럼 제가 왜 이승만을 역사상 최악의 인물편에서 다루려고 하는지 한번 볼까요?(원래 오늘 이완용편을 해보려다가 너무 열받는 사료들 몇편을 보고는 때려쳤습니다. 쓰다 심장마비 걸릴까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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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왕가의 핏줄이기에 무시할 수 없었던 인물...

이승만은 전주 이씨 양녕대군파 15대손입니다. 그러나, 이미 양녕대군 8대손부터 종친에서 멀어졌고, 12대손 때부터는 종친 대우를 못받았습니다. 또한 과거 급제자도 오랫동안 없던 관계로 양반대우 받기도 힘든 가문이었죠.

그러나, 이승만이 20살이 되기 전, 갑오개혁이 실시되어 과거라는 것이 없어지고 능력사회로 전환되어 버렸습니다. 20살의 이승만은 과거 시험 대신 외국인 선교사가 세운 배제학당에 들어가 신식 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 전국민이 일본의 강요로 머리를 깍아야 하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이승만은 단발령에 찬성하였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신교육을 받은 자신을 자랑스러워 했고, <부모가 주신 머리를 자르는 것>보다는 <깨끗한 두발>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했나봅니다.

1896년 아관파천이 발생하고, 대한제국의 정권이 친미적 성격을 가진 서재필 등의 정동구락부가 주도하자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제학당은 상당히 대우받는 학교가 되었습니다. 이승만은 이 학교에서 협성회라는 단체에서 활동하였고, 이후 한국 최초의 신문인 <매일신문>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승만은 신문에 글을 쓰면서 그 자신의 입장은 <동양평화론>의 관점에서 기술했다고 합니다. 동양평화론이란, 일본인들이 조선인에게 행패를 부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일본, 청, 대한제국은 사로 친하게 지내야 할 동양의 친구들이므로 일본과 직접 맞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라는 관점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일본 관리들과 이야기하면 들어줄 것이라는 <일본을 분석하지 못한> 관점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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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898년~ : 독립협회에서 활동과 <독립정신>

이승만은 자신의 본격적인 정치 입지를 다지고, 존경하는 친미적 경향의 서재필을 본받아 독립협회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러시아가 절영도를 조차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등의 글을 쓰고, 서재필의 미국추방을 반대하는 운동을 하는 등 독립협회의 일에 열성적이었고, 만민공동회 활동도 하였습니다.

특히, 독립협회가 어용단체인 황국협회에 의해 해산될 때, 이승만이 앞장서서 몸으로 독립협회의 해산을 막고 열성적인 모습을 보여서 이승만이라는 이름을 국민들에게 멋있게 각인시켰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거두 박영효의 쿠테타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습니다. 24살때부터 6년간이었죠. 재미있는 사실은 감옥에 갖힌 이승만은 친미파로서 죄수로서 최상의 대우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감욱에서 여러 가지 공부를 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이 어려울 때는 미국과 같은 기독교 문명국이 조선을 구원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국주의의 침략적 모습을 보지 못하고, 미국을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그의 사상이 감옥에서 완성된 것이죠. 이후 이승만의 사상은 다른 민족주의자들과는 반대되는 사상인 <외교독립론>이었습니다. 친한 친구(외국)을 많이 사귀면, 그들의 도움으로 독립할 수 있다는 주장이죠.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책 제목은 멋있어 보이죠? 그러나 내용은 형편없는 책이었습니다. 백성들이 힘든 이유인 세금이나 사회 모순, 지주제도 등의 이야기는 없고, 단지 백성들이 현실을 깨우쳐야 한다, 외국과 친구로서 만나야한다 등의 공상적인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죠.

그런데, 이승만이 생각한 가장 좋은 친구란? <미국>이었습니다. 이승만은 일본을 좋은 친구로 생각하는 자들은 친일파로서 좋지 않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은 좋은 친구인 미국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는 수호자라고 여긴 것입니다. 따라서 이승만은 <친미 기독교주의>로서 자신의 역사관을 고수해 가기 시작합니다.

이승만의 이 역사관이 일제시대 우리 독립운동사에 하나의 비극으로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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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04년~ : 미국으로 건너가다.

이승만은 감옥에서 출소한 뒤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했죠. 당시는 1905년을 전후하여 을사조약이 체결되고 우리나라의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던 시기였습니다. 많은 민족운동가들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열혈적인 독립운동을 해줄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많은 선교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독립운동과는 좀 달랐습니다. 이승만은 독립운동보다는 선교운동을 많이 하였습니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어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에게 많은 독립 외교 활동을 부탁하였습니다. 특히,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한국의 독립을 강화회의에서 상정해달라는 요구하는 문서를 제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좋은 친구인 미국이 도와줄 것이라 믿은 것이죠. 그러나, 루즈벨트는 당시 친일적 성향을 가진 인물이었고 이 요구는 묵살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이 한국인들을 위해 미국 대통령에게 청원했다는 사실로 인해 이승만에 대한 기대치와 평가는 더욱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승만이 실제 해낸 일은 없지만, 친미파인 이승만이기에 시도라도 할 수 있는 일들을 계속 부탁하면서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거두가 되어 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승만이 정녕 독립운동을 위해 헌신했을까요?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았습니다. 예로, 1907년 헤이그 특사로 이승만이 가기를 독립운동가들이 원했을 때, 그는 <미국 명문대학 학위를 받아야 국내 활동이 편해지기 때문에> 거부하였습니다. 또, 장인환 등이 친일적인 미국인 스티븐슨을 죽인 것 등에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이승만이 원한 건 미국인들이 원하는 기독교적인 외교 활동이었고, 그 외의 것들은 자신에게 불필요할 경우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이것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기본적 태도가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독립운동을 미룬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려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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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910년~ : 대학교수가 되기 위해 귀국하다.

1910년 공부를 마친 이승만은, 경신학교 교수가 되기 위해 귀국하였습니다. 그러나, 경신학교의 창립자 언더우드와의 계획이 순조롭지 못해 그는 기독교 관련단체인 YMCA의 기독교 교육운동가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를 조선인에게 전달하겠다는 선교가의 마음자세였지, 독립운동가의 자세가 아니였습니다. 실제, 그는 반일운동이나 혁명을 하고 싶은 의사가 없는데, 일본 총독부가 오해하면 어쩌나하는 것을 우려했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한국에 돌아와서 성경연구반을 만들고, 반일운동을 하는 학생들에게는 미국 유학과 기독교 정신이 꿈을 이뤄줄 것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러나, 1911년 신민회의 105인 사건이 터지면서 민족운동가들을 잡아들이는 조치가 있자, 그 역시 민족운동가로 분류되어 체포될 뻔 했습니다. 하지만, 미국 선교사들의 강력한 협조를 얻어 그는 다시 미국으로 망명을 했습니다. 망명 갈 때의 신분은 세계감리교 대회 조선 대표였죠.

다시 미국에 건너간 그는 학생복음회를 조직하고, 한국교회의 독립을 주장하였습니다. 조선 독립이 아니라, 교회 독립이었죠. 이렇게 다시 떠난 그는 30년 넘게 해외에서 활동하면서 독립운동가들과 연줄을 맺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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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921년~ :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말아먹다.

이렇게 1910년대의 이승만은 실제 이승만이 독립을 위해 한 일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그가 친미파로서 당시 세계를 이끌어가는 국가 중 하나인 미국의 협조를 얻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물이었다는것입니다.

둘째로는 그가 조선 왕조의 왕족에 속하는 인물이었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는 국민들의 관심을 끄는 역사적 현장속에 <그가 이상하리 만큼 꼭 있었다>는 점입니다. 독립협회의 해산 때 그는 열혈 영웅이었고, 파리 강화회의를 앞두고는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을 청원했던 영웅이었습니다.

이승만을 좋아하던 싫어하던 그는 <슈퍼스타>로서 독립운동 단체들이 필요로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이승만은, 3.1운동 직후 여러 가지 타이틀을 확보합니다. 연해주의 독립운동단체인 대한독립회의의 의장이자, 국내의 독립운동단체인 한성정부의 대통령이었죠. 당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각종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려고 했는데, 그 단체들마다 이승만이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각종 독립운동 단체는 이승만의 한성정부를 계승하여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정하고, 이름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을 따르기로 합의하죠.

그러나,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마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풍지박살이 나고 분열이 됩니다. 당시 신채호, 안창호 등 대부분 민족주의자들은 일본과의 결사항쟁 및 독립군 육성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과의 협조와 기독교 정신의 확장을 통한 <외교독립론>을 주장합니다.

임시정부 대통령인 이승만의 이 외교독립론 주장으로 임시정부는 분열되고 맙니다. 임시정부를 다시 만들자는 창조론과 이승만을 버리고 다시 임시정부를 구성하자는 개조논의 까지 나왔고, 거기에 이승만의 몇 가지 비리가 더해져 이승만은 쫒겨나게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결국 사분오열 되면서, 임시정부의 성격을 잃었고 이 망가진 임시정부를 죽기살기로 수습하여 다시 일으킨 사람은 <김구> 선생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김구 선생님이 이끌어간 임시정부로, 대통령제가 아닌 주석제 또는 국무령제(장관제도)의 임시정부입니다.

이후 이승만은 계속적으로 외교독립론만을 주장하면서, 미국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광복하는 날까지 구미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미국의 실세들과 많은 친분을 맺어두었습니다. 특히, 기독교가 중요한 미국에서 기독교 실세들과의 친분은 아주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었죠. 이러한 영향력을 우리 나라의 대대수 독립운동 노선과 연결시켰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이 듭니다.

<펠레의 예언 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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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1945년~ : 맥아더 장군, 하지 장군 VS 이승만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이승만은 미전략사무국 문관 대령으로 귀국하였습니다. 이 때 맥아더와 하지는 이승만의 귀국을 돕고 그를 협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해방된 한국사회에서 좌파를 억누르고 친미파의 과도정부를 만들기 위한 책략이었습니다.

특히 임시정부의 요직에 있었던 이승만은 맥아더와 하지에 의해 그 명성이 실제보다 훨씬 더 크게 부풀려 졌습니다. 국민들은 이승만이야말로 불세출의 영웅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요.

이승만은 귀국하자마자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고 통합적인 정치행보에 들어갑니다. 그는 극우적인 성향으로 공산주의자를 싫어했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초기에는 <공산주의 경제정책도 채용할 점이 많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밑으로 모인 단체는 친일파의 잔제세력과 극우파인 한민당 세력 뿐이었습니다. 중도좌파와 극좌파는 친미적인 이승만을 경계하였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이승만의 또하나 아쉬운 점이 드러납니다. 자신의 지지기반이 <한민당>이기에 그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처벌을 은근히 반대한 것입니다. 이 점은 민족사에서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 되고 맙니다.

또, 이승만은 당시 김구 등 중도파들과 함께 미국, 소련의 신탁통치를 결사 반대하였는데, 이것은 국민들에게 이승만이 민족주의자라는 인식을 가져오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승만은 여운형등이 세운 <조선인민주의 민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통을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자들을 분열시키기 시작합니다. 사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전통대로 국가가 세워져야 자신이 주도적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 재미있는 점은 초기에 공산주의와 연대할 수 있다던 이승만이 그 말을 한지 얼마 안되어 공산당을 <소련의 사주를 받는 자>들로 매도하고 공존할 수 없다고 선언해 버린 것입니다. 그 시점이 공산주의자들이 친일파 처벌과 반민족주의자 처벌을 강도있게 원했고, 여운형 등의 국민대표가 세운 <조선 인민주의 민주공화국>을 옹호한 시점과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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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947년~ : 김구 VS 이승만의 구도

1947년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당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구와 연합하여 우파의 범 신탁통치 반대세력이 결성되었습니다. 그러나, 김구와 연합한 이승만은 하지 등 미국세력을 등에 업고 김구를 넘어서게 됩니다. 반탁운동을 주도했던 세력 중 미국은 이승만을 의장에 선임하고, 김규식과 김구는 부의장과 총리에 임명하였습니다.

김규식과 김구는 이 결정에 의의를 가지지 않고, 남북 통일 노선을 추구하는데 노력을 다하였습니다. 김규식과 김구는 남북한이 하나로서 투표하고, 남북한이 통일된 상태에서만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만약 남북한이 이 상태로 분열된다면 되돌릴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한다고 생각하였죠. 민족주의자들은 대부분 이 생각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남한만이라도 정국이 안정되기를 원했습니다. 거기에 이승만이 <정읍발언>이라는 유명한 사건을 일으켜 풍파를 일으킵니다.

이승만은 평소, <남한만이라도 빨리 정부를 수립해야 하므로, 38선 철폐와 자율적 정부 수립이 필요하다>라고 말한 것이죠.

그런데, 이승만이 말한 자율적 정부 수립이란, 만약 38선이 철폐되지 않으면 남조선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미국이 주장해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말합니다. 특히, 전북 정읍에서 이승만은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세우자고 주장해버립니다.

난리가 났죠. 김구는 <38선을 베고 쓰러져 죽는다고 해도 통일이 아니면 안된다>고 주장합니다. 또 김규식은 이승만과 같은 극우파를 제외해 버린채, 우파와 좌파가 연합하여 남북한 통일을 추진하자는 좌우합작운동을 시도합니다. 이로서 이승만은 왕따를 당하게 되죠.

그러나, 당시 미국은 소련을 적대시하는 봉쇄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구, 김규식 보다는 이승만을지지하였습니다. 특히, 김구는 유엔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치르자는 통일정부 입장을 내세우는데, 이승만은 남한의 반절정부라도 세우자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갈등은 큰 것이었습니다.

결국, 1948년 치루어진 대한민국 최초의 총선에 김구와 다수 민족주의자들이 불참하였습니다. 그리고 제헌국회의 투표결과 이승만 의장, 신익희, 김동원 부의장이 선출되었습니다. 이후 헌법제정 후 이승만과 이시영이 대통령과 부통령이 된 것입니다.

대통령은 이승만이 되었지만, 이승만이 김구를 배척하면서 주장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주장>은 우리 역사에서 지금까지 지울 수 없는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잘못된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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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대통령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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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건립에 지대한 공을 세운 개국공신인 점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이승만을 이렇게 최악의 인물로 질타하는 이유는?

그 이유는 하나 하나의 행적이 역사를 바꾸는 기로에 있는 대단한 인물이 역사의 수레바퀴를 좀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돌릴 수 있었음에도, 하나같이 역사의 흐름을 백성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이승만 하면 생각하는 것은 <자유당과 독재>입니다. 이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서 인상깊게 남은 정책이 <북진통일>밖에 없습니다. 계속 대통령직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부정을 저지르고, 반대파는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습니다. 친일파 청산 등의 특별법은 만드는 족족 폐기시키거나, 협박으로 사장시켜 버렸습니다. 토지 개혁은 철저하지 못하여 자원의 평등분배가 이루어지지 못하였습니다.

일제시대부터 선교 중심의 외교독립론을 주장했던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된 후에는, <평화통일론>을 주장한다는 이유로 떠오르는 야당 대표 조봉암을 죽여 버리기도 했습니다. 북한 사주를 받은 자라고 하여 사형선고를 내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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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승만은 부정부패가 누적되어 3.15 부정선거 등의 이유로 국민들의 심판을 받고 하와이로 망명을 떠납니다. 4.19 혁명이 일어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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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 몇가지를 적어보았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건국 의장이자, 초대 대통령으로서 남긴 업적도 많습니다. 하지만, 일부 업적이 그의 잘못된 행적들을 덮어둘 수가 없을 정도로 한국 근현대사에 큰 상처를 남긴 인물이 되었습니다. 오늘 최악의 인물로 이승만을 다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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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앞부분 1-5장 기술을 위해 인용한 논문
                - 청년기 이승만의 언론, 정치활동, 해외활동, 주진오, 역사비평 1996년 여름본(계간 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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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글 :
2007/10/16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건국강령(대한민국 임시정부, 1941 / 조소앙)
2007/06/02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성명서(1946)
2007/05/18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이승만 정권의 평화선 선언
2007/05/18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이승만 정권의 자유당 창당 선언문 (1951년)
2007/05/18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정읍발언 (1946년)
2007/04/2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탄핵서
2007/04/2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
2007/04/2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조소앙의 <대한독립선언서> 전문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4. 19 기자 체험기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4. 19 에 대한 해외 신문의 반응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이승만의 정읍 발언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4. 19 혁명 자료 -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 의사
2007/01/13 - [왕조별왕계표/대한민국] - 대한민국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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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 사료> 1946. 12. 2 - 이승만의 도미외교 지침서

1. 1946년. 12월의 지침서

1946년 6월 이승만은 통일된 정부에서 살수 없다면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는 일명 <정읍 발언>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족통일총본부를 설치하여 모든 세력이 자신에게 협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좌파에서는 <민족분열총본부>를 만든다며 비난하였고, 김구의 한국독립당은 공식으로 이승만에게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1246년 12월 이승만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에 도미 외교의 지침서인 6개항을 작성하였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한 과도 정부안으로서 그 실제 속 뜻은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지침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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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무성에 제출할 6개항의 기본방침(1946.12.2 - 이승만)

1. 양단된 한국이 통일되어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남한에 과도정부를 수립할 것.

2. 한국에 관한 미, 소 양국의 협상에 관계없이 과도정부는 유엔의 승인을 받아야 하며, 한국의 점령 및 기타 문제에 관하여 미, 소 양국과 직접 협상하도록 할 것

3. 한국의 경제복구를 원조하기 위하여 일본에 대한 한국의 배상 주장이 조속히 검토될 것.

4. 특정 국가에 편중되지 않고 여러 나라와 평등하게 거래할 수 있는 완전한 통상권이 부여될 것

5. 국제교환제도가 마련되고 통화를 안정시킬 것

6. 미, 소 양군이 동시에 철수할 때까지 미군이 남한에 주둔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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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의  핵심 주장은 결국 미국 내부의 공산주의 온건파와 남한에 주둔하는 좌파세력을 척결해야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는 내용이면서, 단독정부 수립과 미군정을 옹호하는 당시 이승만의 입장을 보여줍니다.

출처 : 임병직, <임정에서 인도까지>, 여원사, 1964

2. 이승만 귀국 보고 연설(1947. 4. 21)

아래의 자료는 이승만이 미국에 다녀온 후 귀국하면서 보고연설한 내용의 일부입니다. 남한의 발전을 위해 남한 단독의 총선거가 필요하다는 것을 주 내용으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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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에서는 총선거가 지연되고 미군정이 실패한 것은 하지 중장이 공산파와의 합작을 고집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는 미국 정책이 공산주의와의 합작을 단념하였으므로 캄캄하던 우리의 길은 열리었다. 우리 동포는 한데 뭉치어 임시입법원으로 하여금 총선거법안을 급속히 제정하도록 하여 남북통일을 위한 남조선과도정권을 수립해야 한다.

그리고 미정책의 전환에 따라 우리가 미군정과 합저해서 우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대한입정의 법통을 고집할 플요가 없으며 이 문제는 보류해두어야 헐 것이다. 그리고 김규식 박사도 이제는 합작을 단념하고 나와 같이 보조를 취할 것을 결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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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미국의 정책이 소련을 견제하는 봉쇄정책으로 전환되어가고 있으며, 공산주의와 연대할 필요가 없게되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던 자신의 입장마저도 버리고, 통일을 위한 좌우합작의 원칙도 버려야 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 주장을 발표한 이승만은 이후 승승장구하였지만, 좌우합작과 남북통일을 전제로 한 남북한 총선거를 주장하였던 김구, 김규식 선생이나, 중도좌파인 여운형 선생은 입지가 좁아지고 점점 밀려나게 됩니다.

출처 : 동아일보, 1947. 4. 29


이 글과 관련된 이승만 기사 더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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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건국강령(대한민국 임시정부, 1941 / 조소앙)

대한민국 건국강령

제1장 강령  

1. 우리 나라는 우리 민족이 반만년 이래로 공통한 말과 글과 국토와 주권과 경제와 문화를 가지고 공통한 민족정기를 길러온 우리끼리로서 형성하고 단결한 고정적 집단의 최고조직임.  

2. 우리 나라의 건국정신은 삼균제도에 역사적 근거를 두었으니, 선민의 명명한 바 수미균평위하면 흥방보태평이라 하였다. 이는 사회각층의 지력과 권력과 부력의 가짐을 고르게 하여 국가를 진흥하며 태평을 보전, 유지하려 함이니 홍익인간과 이화세계하자는 우리 민족의 지킬 바 최고의 공리임.  

3. 우리 나라의 토지제도는 국유의 유법을 두었으니 선현의 통론한바 준성조지공분수지법하여 혁후인사유겸병지폐라 하였으니 이는 문란한 사유제도를 국유로 환원하라는 토지혁명이다. 우리 민족은 옛 규칙과 새 법을 참작하여 토지제도를 국유로 확정한 것임.  

4. 우리 나라의 대외주권이 상실되었을 때에 순국한 선열은 우리 민족에게 동심복국할 것을 유촉하였으니, 이른바 '바라건대 우리동포는 국치를 잊지 말고 굳게 참고 노력하여 마음을 한가지로 하고 다 같이 덕을 닦아서 외국의 모멸을 두들겨부숨으로써 우리 독립을 회복하라'고 하였다. 이는 전후 순국한 수십만 선열의 전형적 유지로서 현재와 장래의 민족정기를 두들겨 일으킴이니 우리 민족의 남녀노소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임.  

5. 우리 나라의 독립선언은 우리 민족의 혁혁한 혁명을 일으킨 원인이며 신천지의 개벽이니 이른바 '우리 조국의 독립국임과 우리  민족의 자유민임을 선언하노라. 이로써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밝히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경계하여 민족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하였다.

이는 우리 민족이 3-1헌전을 발동한 원기이며 동년 4월 11일에 13도 대표로 조직된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을 세우고 임시정부와 임시헌장 10조를 만들어 반포하였으니 이는 우리 민족의 힘으로써  이족전제를 전복하고 5천년 군주정치의 허울을  파괴하고 새로운 민주제도를 건립하여 사회의 계급을 없애는 제일보의 착수였다. 우리는 대중이 핏방울로 창조한 국가형성의 초석인 대한민국을 절대로 옹호하며 확립함에 같이 싸울 것임.  

6. 임시정부는 13년 4월에 대외선언을 발표하고 삼균제도의 건국원칙을 천명하였으니, 이른바 '보통선거 제도를 실시하여 정권을 균히 하고 국유제도를 채용하여  이권을 균등하게 하고 공비교육으로써 학권을 균히 하며, 국내외에 대하여  민족자결의 권리를 보장하여서 민족과 국가의 불평등을 고쳐버릴 것이니ㅡ 이로써 국내에 실현하면 특권계급이 곧 없어지고 소수민족의 침몰을 면하고, 정치와 경제와 교육권리를 군히 하여  고저를 없이하고 동족과 이족에 대하여 또한 이렇게 한다'고 하였다.  이는 삼균제도의 제1차 선언이니 이  제도를 발양, 확대할 것임.  

7. 임시정부는 이상에 근거하여 혁명적 삼균제도로써 복국하고, 건국을 통하여 일관한 최고공리인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과 독립, 민주, 균치의 3종방식을 동시에 실시할 것임.

제2장 복국

1. 독립을 선포하고 국호를 일정히하여 행사하고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세워서 임시약법과 기타 법규를 반포하고 인민의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행하며 군력과 외교와 당무와 인심이 서로 배합하여 적에 대한 혈전을 정부로써 지속하는 과정으로 복국의 제1기라 할 것임.  

2. 일부 국토를 회복하고 당.정.군의 기구가 국내로 옮기어  국제적 지위를 본질적으로 취득함에 충족한 조건이 성숙할 때를 복국 제2기라 할 것임.  

3. 적의 세력에 포위된 국토와 포로된 인민과 침점된 정치. 경제와 말살될 교육과 문화 등을 완전히 탈환하고 평등지위와 자유의지로써 각국 정부와 조약을 체결할 때는 복국의 완성기라 할 것임.  

4. 복국기에서 임시 약헌과 기타 반포한 법구에 의하여 임시의정원의 선거로 조직된 국무위원회로서 복국의 공무를 집행할 것임.  

5. 복국의 국가주권은 광복운동자 전체가 대표할 것임.  

6. 삼균제도로서 민족의 혁명의식을 환기하며, 해외의 민족역량을 집중하여 광복운동의 총동원을 실시하여 장교와 무장대오를 통일훈련하여 상당한 병력의 광복군을 곳곳마다 편성하여 혈전을 강화할 것임.  

7. 적의 침탈세력을 박멸함에 일체  수단을 다하되 대중적 반항과  무장적 투쟁과 국제적 외교와 선전 등의 독립운동을 확대, 강화할 것임.  

8. 우리 독립운동을 동정하고 원조하는 민족과 국가와  연결하여 광복운동의 역할을 확대할 것이며 적 일본과 항전하는 우방과 절실히 연락하여 항일동맹군의 구체적 행동을 취할 것임.  

제3장 건국  

1. 적의 일체 통치기구를 국내에서 완전히 박멸하고  국도를 정하고 중앙정부와 중앙의회의 정식활동으로 주권을 행사하여 선거와 입법과 임관과 군사, 외교, 경제 등에 관한 국가정령이 자유로 행사되어 삼균제도의 강령과 정책을 추행하되 시작하는 과정을 건국의 제1기라함.  

2. 삼균제도를 골자로 한 헌법을 시행하여 정치, 경제, 교육이 민주적 시설로 실제상 균형을 도모하며 전국의 토지와 대생산기관의 국유화가 완성되고 전국 학령아동의 전수가 고등교육의 면비수학이 완성되고 보통선거 제도가 구속  없이 완전히 실시되어 전국 각 동,  리, 촌과 면, 읍과 도, 군, 부와 도의 자치조직과  행정조직과 민중단체와 조직이 완비되어 삼균제가 배합, 실시되고 경향 각층의 극빈계급에 물질과 정신상 생활정도와 문화수준을 높이어 보장되는 과정을 건국의 제2기라 함.

3. 건국기의 헌법상 국민의 기본권리와 의무는 다음 원칙에 의거하고 법률로 따로 정하여 시행함.

4. 건국시기의 헌법상 중앙과 지방의 정치기구는 다음 원칙에 의거함.

5. 건국시기의 헌법상 경제체계는 국민 각개의 균등생활을 확보함과 민족 전체의 발전 및 국가를 건립, 보위함과 민족 전체의 발전 및 연환관계를 가지게 하되 다음에 열거한 기본원칙에 의거하여 경제정책을 추진, 실행함.  

1) 대산업기관의 공구와 시설을 국유로  하고, 토지, 광산, 어업,  수리, 임업, 소택과 수상, 공증의 운수사업과 은행, 전신, 교통 등과 대규모이 농 ,공, 상, 기업과 성시,  공업구역의 공용적 주요산업은 국유로 하고, 소규모 혹 중소기업은 사영으로 함.  

2) 적의 침략, 침점 혹은 시설한 관공, 사유 토지와 어업, 광산,  농림, 은행, 회사, 공장, 철도, 학교, 교회, 사찰, 병원, 공원 등의 산업과 기타 토지 및 경제, 정치, 군사, 문화, 교육, 종교, 위생에 관한 일체 사유자본과 부적자의 일체 소유자본과 부동산을 몰수하여 국유로 함.

3) 몰수한 재산은 빈공, 빈농 및 일체 무산자의 이익을  위하여 국영 혹 공영의 집단 생산기관에 충당함을 원칙으로 함.  

4) 토지의 상속, 매매, 저압, 전양,  유증, 전조차의 금지와 고리대금업과사인의 고용농업의 금지를 원칙으로 하고 농장생산 소비와 무역의 기구를 조직 확대하여 농공대중의 물질과 정신상 생활정도와 문화수준을 높임.

5) 국제무역, 전기, 수도, 대규모의 인쇄소, 출판, 영화극장 등을 국유, 국영으로 함.

6) 노공, 유공, 여인의 야간노동과 연령, 지대, 시간의 불합리한 노동을 금지함.  

7) 농공인의 면비의료를 보급, 실시하여 질병소멸과 건강을 보장함.  

8) 토지는 자력자경인에게 나누어줌을 원칙으로 하되, 원래의 고용농, 자작농, 소지주농, 중지주농 등 농인지위를 보아 저급으로부터 우선권을 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2년 이승만의 미국 신탁 위임론으로 분열된 이후, 백범 김구 선생님이 주석제도와 국무령 제도를 도입하며 광복기까지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던 대표적인 정부입니다. 1941년의 이 법령은 일본으로부터의 자주독립을 원칙으로 하여 인류, 민족, 국가의 평등을 원칙으로 하여 그 안에서 정치, 경제, 교육을 균등히 하는 삼균주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토지와 기업은 국가로 귀속한 이후, 다시 백성들에게 평등히 나눠주고 모든 사회 시설에 있어 신분과 재산 유무를 떠나 민족의 평등함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재산의 국유화 이후, 특히 토지의 균등 분배를 통해 농민들의 생활을 보장하는 것을 개혁의 주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 전단계로 민족의 독립을 위한 조건으로 일본과의 타협이 없는 절대 독립 노선을 추구하면서, 광복을 위한 스스로의 노력을 위한 군비 마련 등의 기초를 잡고 있습니다. 이후의 법령에는 광복과 절대독립, 광복군 통합 등의 논의가 계속됩니다.

관련글 모음 :
2007/05/1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건국강령(1941, 김구와 조소앙의 삼균주의)
2007/05/1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한국광복군 선언(1940, 김구와 조소앙)
2007/05/1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한국광복군 전당대표대회 선언문(1941, 조소앙)
2007/04/27 - [한국사사료모음/14.현대사사료] - 한국 민주당 선언
2007/04/26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국강령(1941)
2007/04/25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민국 임시헌장 선포문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대한 민국 임시 헌장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한국 광복군 서약문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한국 광복군 선언문
2007/03/17 - [한국사사료모음/13.일제시대사료] - 한국 광복군의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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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만원, 10만원권 고액 화폐권 2차후보 역사인물 10명

1. 어떤 사람이 후보가 되었을까?

한국은행에서는 2009년부터 발행될 5만원권, 10만원권 지폐의 인물 후보를 10명으로 압축해서 2차로 발표했습니다. 그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김구, 김정희, 신사임당, 안창호, 유관순, 장보고, 장영실, 정약용, 주시경, 한용운

2차로 발표된 인물에 대한 각기 평가가 너무 상이하기도 합니다. 예로, 각종 인터넷 포털사이트 등에서 1위를 차지한 광개토대왕은 아예 평가후보에서 빠졌습니다. 국민들은 광개토대왕을 원한다고 하지만, 중국의 동북공정 등의 정치적 파장을 고려해 아예 처음부터 삭제한 것이지요.

여성사이트에서는 신사임당, 유관순, 허난설헌, 김만덕 등의 역사 속 여성들이 많은 표를 차지했지만 신사임당과 유관순을 제외하고는 모두 10인 후보에는 빠졌습니다.

단재 신채호 등 민족주의자들이나 독립 운동가들이 대거 빠진것도 눈의 띕니다. 신채호의 사상은 무정부주의적인 사상이 많다는 점, 안재홍은 월북한 민족주의자라는 점, 윤동주, 김소월, 방정환 등도 10인 후보에서는 탈락하였습니다. 소위 좌파 사상가라는 것도 미래성에 맞지 않은 듯 합니다.

건국이후 인물들은 모두 제외된 점도 특이합니다. 박정희, 김대중, 이승만 등의 인물은 역사적 평가와 업적이 규명되지 않은 점이 많고, 국민적 논란 및 정치적 파장이 크다는 입장인 듯 합니다. 이들은 아예 후보군에도 없었습니다.

2. 인물 선정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10만원권은 이후 오랜 기간동안 한국 지폐의 최고권으로 나라를 대표할 돈입니다. 지금까지 나라를 대표하는 돈인 만원권은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업적이 너무 눈부신 만큼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0만원권 지폐에서 세종대왕만큼의 업적을 가진 인물을 선정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될 듯 합니다. 그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10만원권의 지폐에 들어갈 역사적 인물은 어떤 기준을 가져야 할까요? 한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1.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한다.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기준은 그 나라의 역사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화폐 인물의 기준을 역사성에 두고 있습니다. 영국의 모든 지폐에는 엘리자베스 2세가 들어갑니다. 인도의 모든 지폐에는 간디가 들어갑니다. 중국의 지폐에는 어김없이 마오쩌둥이 나옵니다. 모든 지폐의 앞면에 이 인물들을 넣고, 뒷 면에서는 다른 분야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면의 인물들을 새겨넣습니다. 같은 인물이 계속 나오는 돈이 식상할지 모르지만, 이 인물들이 그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엘리자베스 1세 때 르네상스, 절대왕정, 신항로 개척, 식민지 시대를 열었습니다. 여왕은 영국인들의 자부심을 표현합니다. 영국 왕실은 아직도 여왕을 사랑하며, 국민들은 왕실을 존중합니다. 지금 1952년 즉위한 현재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화폐에 들어감으로서 <웃고 있는 여왕의 모습>이 영국의 모습을 상징하도록 도안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 역사 속의 엘리자베스 1세나, 빅토리아 여왕이 아니라 현재 여왕을 화폐에 넣음으로서 국민적 단합을 유도한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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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화폐 50 파운드 - 엘리자베스 2세의 웃는 모습

중국의 화폐의 마오쩌둥은 중국 근현대사를 상징하며, 인도의 간디 역시 인도의 평화사상을 상징하도록 도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 인물들을 보면서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 진정한 국민 화폐의 역할을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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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화폐 1천루피 - 간디의 자상한 모습

2. 외국인들이 보기에 그 나라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화폐를 선정할 때 중요한 점의 하나는 <화폐가 통용되는 곳이 국내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가 외국화폐를 볼 때 화폐 속 인물들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것처럼 외국인들도 우리 화폐에서 우리 나라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한은의 후보군에서 단군,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등은 후보에 없거나, 중요성이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외국인들이 보기에 큰 가치가 없거나, 주변국과의 논란이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건 큰 오산이라고 생각됩니다.

미국 화폐의 조지 워싱턴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을 이끈 장군입니다. 하지만 영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화폐에서 빼지는 않습니다. 광개토대왕을 중국의 동북공정을 고려해서 후보군에서 제외되거나, 단군이 실존인물인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후보군에서 제외한다면 우리 역사의 정체성을 우리 스스로 잘라 버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단군이 우리 국조가 아니고, 광개토대왕이 영토를 넓힌 것이 사실이 아닌지는 생각할 가치도 없을 뿐더러, 외국의 입장을 고려하여 우리 정체성을 폄하하는 입장으로는 제대로 된 화폐를 만들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주변국의 입장을 살펴 우리의 외교자세를 선택한다는 실리주의는 실리주의가 아니라 사대주의로 비칠 수도 있습니다.

중립국인 스위스는 인물 화폐가 아니라 뭔지도 모를 추상화 같은 화폐를 도안하기도 했습니다. 도대체 말도 안되는 그 화폐를 통용한 것은 미래로 나가는 스위스인의 정체성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추상화같은 화폐는 둘째로 하고라도, 역사 속 인물들을 특정한 이유로 배제하는 행동만큼은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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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봐도 모르겠습니다. 스위스 화폐
  

화폐를 보는 외국인들이 그 인물을 보는 순간, 이나라의 역사성과 민족적 기상이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화폐, 또는 그 나라의 역사성을 한 눈에 생각할 수 있는 화폐가 되어야 합니다.

3. 사상적 체계가 살아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화폐를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순신, 이황, 이이, 세종대왕.... 모두 이씨 입니다. 다른 종친회에서 반발할만도 하네요. 이번 화폐에서는 이씨를 빼자는 움직임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존 화폐의 특징은 이씨라는 것보다 이들이 모두 조선시대 성리학과 연관된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세종대왕이야 성리학적인 애민정치를 하였고, 이황과 이이는 성리학을 완성시키고 조선성리학으로 발전시킨 분들입니다. 이순신 역시 성리학이 자리잡혀가고 붕당정치의 흐름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지만, 이순신의 업적은 성리학보다는 장군으로서 위대함이였죠. 기존 화폐의 기준에 사상적인 측면이 들어가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실제 화폐에 들어갈 인물이라면 사상적 체계가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업적이 어떤 사상에서 나온 것이고, 그 사상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었느냐가 중요합니다. 화폐의 인물은 그 인물의 단순한 업적이 아니라, 그 시대 속의 상황 속에서 그 사람이 행한 합리적 행위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지나치게 조선시대 성리학 인물만으로 화폐가 도안되었습니다. 우리 역사에 조선시대만 있었고, 우리 역사의 황금기가 조선시대였다라는 인식을 할 수밖에 없는 화폐 도안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에는 고조선, 철기시대 국가들,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그리고 대한제국까지 많은 영토국가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이외의 국가에서도 사상적인 체계가 있는 인물들은 참 많습니다. 유교 인물은 많았지만, 정작 조선 이전 역사에 큰 흐름을 좌지우지 했던 불교사상이나, 민족 종교인 천도교, 대종교 등은 포함된 적이 없습니다.

또, 일제시대 민족운동을 한 사람들의 사상은 지금까지 폄하되어 있었습니다. 당대 일제에 대한 저항은 무정부주의, 폭력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계몽주의 등 다양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사상이 공산주의인지, 사회주의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그 사상이 일본에 저항할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었으니까요. 사회주의를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상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당시의 상황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자라서 제외한다면, 일본 고관들에게 폭탄을 던진 한인애국단의 리더 김구 선생님도 폭력주의자가 됩니다.

사상적 체계는 당시 상황을 고려하여 계산되어야 합니다. 단지 성리학을 완성시킨 인물들만 지폐가 채워진다면 미래에 대한 지향성이 살아나지 않습니다.

4. 한국 사회의 미래를 엿볼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화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역사성이지만, 그 역사성은 과거의 업적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역사성이여야 타당합니다. 예로, 장영실은 우리나라가 지향할 IT산업과 이공계 산업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10인안에 선정되었고, 장보고는 후기신라시대 해상왕으로서 그 상업적 마인드와 탁월한 외교능력 등이 인정되어 10인안에 선정되었습니다.

단, 미래성만 있는 인물은 국민화폐로서 무게감이 떨어집니다. 역사성과 확실한 사상체계, 우리 조상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 중에서 미래성을 볼 수 있는 인물로 선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3. 정말 고심해서 좋은 인물이 나오기를 기대합니다.

선정된 역사 속의 인물들에 대하여 벌써 말이 많습니다. 이 사람은 안된다. 이 사람이 왜 빠졌는가.... 말이 많죠. 선정된 인물들 모두 역사 속에서는 훌륭한 위인들입니다. 그러나 화폐에 들어갈 인물은 위인의 경중을 따져서 선별해서는 안됩니다. 역사성과 사상성, 인간적 노력, 미래성 까지 갖춘 인물을 가려야 합니다.

이번에 10인의 후보를 보면 역사성, 사상성 보다는 한국사회의 미래지향적인 면을 많이 고려한 듯 보입니다. 역사적인 위대한 인물들은 더 많을 지 모르지만, 그 인물들 가운데 미래 한국사회의 이상향으로 적합한 인물을 후보로 고른 듯 싶네요.

민족정체성만으로 선별한다면, 시조인 단군과 광개토대왕을 뽑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후보군에 없습니다. 감강찬, 을지문덕, 서희 등 역사속 무관들은 없습니다. 한국 사회가 지향하는 바와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래의 한국사회가 여성을 중시하는 사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신사임당과 유관순 같은 여성인물들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과학사회를 주도하는 미래의 한국을 본다면 장영실을 뽑을 수 있겠죠.

실학자로서 기존의 사상체계와는 다른 변화된 사상을 제시하여 조선사회의 변화를 꿈꾼 정약용도 후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조선후기 실학자로서는 정약용과 김정희 두 분이 들어가 있습니다. 국가 속에 포함되지 않은 인물이지만, 해상왕 장보고의 상업적 마인드와 미래 지향적 태도도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일제시대 이후의 인물로서 독립에 앞장선 김구, 안창호, 한용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실제 일본의 침략에 의해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라는 기틀을 잡게 된 중요한 시점의 인물들이 화폐 도안에 없다는 점에서 김구 선생님도 유력한 후보중의 한 분이십니다.

이제 10인 가운데 2분이 5만원권, 10만원군의 지폐에 들어갈 인물이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여러 사회단체들의 입장 속에서 추려낸 후보군이라, 역사성을 가진 인물보다는 미래성을 가진 인물들을 많이 택하였다는 점이 아쉽긴 합니다. 하지만, 이 인물들 중에서 어떤 인물이 한국을 대표할 지폐에 들어가게 될지 기대가 많이 됩니다.

인터넷에서 블로거들이 합성한 10만원권 인물......(재미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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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가 장금이까지 지폐 후보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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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의 평화선 선언

 평화선 선언 -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

  확정된 국제적 선례에 의하고 국가의 복지와 방어를 영원히 보장하지 않으면 안될 요구에 의하여 대한민국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대한민국 정부는 국가의 영토인 한반도 및 도서의 해안에 인접한 해붕의 상하에 기지되고, 또 장래에 발견될 모든 자연자원  광물 및 수산물을 국가에 가장 이롭게  보호 보존 및 이용하기 위하여 그 심도 여하를 불문하고 인접 해붕에 대한 국가주권을 보존하며 또 행사한다. 

  2.대한민국 정부는 국가의 영토 및 한반도 및 도서의 해안에 인접한 해양의 상하 및 내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자원 및 재부를 보유 보호 보존 및 이용하는 데 필요한 좌와 여히 한정된 연장 해안에 한하여 그 심도 여하를 불구하고 인접 해양에 대한 국가의 주권을 보지하며 또 행사한다. 특히 어족 같은 감소될 우려가 있는 자원 및 재부가 한국주민에게 손해되도록 개발되거나 또는 국가의 손상이 되도록 감소 혹은 고갈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수산업과 어염업을 정부의 감독하에 둔다. 

  3.대한민국 정부는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의 관활권과 지배권이  있는 상술한 해양의 상하 및 내에 존재하는 자연자원 및 재산을 감독하며 또 보호할 수역을 한정할 좌에 명시된 경계선을 선언하며 또 유지한다. 이 경계선은 쟁래에 구명될 새로운  발견 연구 또는 권익의 출현에 인하여 발생하는 신정세에 맞추어 수정할 수 있음을  겸하여 선언한다. 대한민국의 주권과 보호하에 있는 수역은 한반도 및 그 부속도서의 해안과 좌의 제선을 연결함으로써 조성되는 경계선간의 해양이다. 

  (ㄱ)함경북도 경흥군 우암령 고정으로부터 동경 130도 45분의 점으로부터 북위 38도 동경 132도 50분의 점에 이르는 선. 

  (ㄴ)북위 42도 15분 동경 130도 15분의 점으로부터 동경 132도 50분의 점에 이르는선. 

  (ㄷ)북위 38도 동경 132도 50분의 점으로부터 북위 35도 동경 130도의 점에 이르는 선. 

  (ㄹ)북위 35도 동경 130도의 점으로부터 북위 34도 40분 동경  129도 10분의 점에 이르는 선. 

  (ㅁ)북위 34도 40분 동경 129도 10분의 점으로부터 북위 32도  동경 127도의 점에 이르는 선. 

  (ㅂ)북위 32도 동경 127도의 점으로부터 북위 32도 동경 124도의 점에 이르는 선. 

  (ㅅ)북위 32도 동경 124도의 점으로부터 북위 39도 45분 동경 124도의 점에 이르는 선.

  (ㅇ)북위 39도 45분 동경 124도의  점으로부터(평안북도 용천군 신도열도) 마안도 서단에 이르는 선. 

  (ㅈ)마안도 서안으로부터 북으로 한만 국경의 서단과 교차되는 직선. 

  4.인접 해양에 대한 본주권의 선언은 공해상의 자유항해권을 방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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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권의 자유당 창당 선언문 (1951년)

  1.우리는 압제시대의 잔해와 관료주의를 배제하여 상하귀천의 계급을 타파하고 진정한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확립으로 민족협동적 사회건설을 기함. 

  2.우리는 독점경제 패자들의 억압과 착취를 물리치고 노동자, 농민, 소시민, 양심적인 기업가 및 기술자의 권익을 도모하며 빈부등차의 원인과 그 습성을 거부하고 호조호제의 주의로써 국민생활이 안전과 향상을 기함. 

  3.우리는 지방 파벌로 권위쟁탈을  위하여 중상모략하는 폐습을 배격하고 정치의 도의를 배양할 것을 기함. 

  4.우리는 남녀 동등을 실천하고 인권옹호로써 국가의 화복, 안정의 책임, 의무를 전국민이 동일히 분담케 할 것을 기함. 

  5.우리는 문화의 향상 보급과  과학기술의 진흥으로 신시대 신생활을  지향하여 도시문화 및 농촌문화의 교류 병진과 재건으로써 국민생활의 변혁을 기함. 

  6.우리는 민주우방과 국교를 돈독히 하며 독재 공산주의 및 '파시즘' 군국주의 일체의 반동주의를 타도하고 자유와 평화를 신조로 하는 협동세계를 건설함으로써 항구적 세계평화에 공헌을 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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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정읍발언 (1946년)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도니 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게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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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남북한 자유 총선거에 대한 제네바 회담

미국은 회담에 참석하는 15개 동맹 국가와 더불어 다음과 같이 회담에 임하는 원칙을 결정하였다.


1. 통일된 한국 정부의 수립은 자유 선거에 그 기치를 두지 않으면 안된다.
2. 한국 문제에 관하여 유엔의 권위와 권능이 인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4월 26일 남한과 한국전쟁 참전 15개국 및 북한, 중국, 소련 등 19개국의 대표가 참석한 정치 협상 회의가 제네바에서 열리게 되었다. 7주간이나 계속된 정치 회의는 서로 대립되는 주장만을 반복하는 가운데 결국 아무 성과 없이 결렬되고 말았다.
  

당시 남북한이 내놓은 통일 방안의 요지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남한 측 제안 (변영태 외무 장관 발표)
1. 통일 독립 민주 한국을 수립할 목적으로 종전의 유엔 제 결의에 의거, 유엔 감시 하에 자유 선거를 실시한다.
      ......
7. 전 한국 의회 의원 수는 전 한국의 인구에 정비례할 것.
      ......
10. 다음 문제는 전 한국 의회가 개최된 후 제정되어야 한다.
   가. 통일 한국 대통령의 신임 선출 여부
   나. 대한민국 현행 헌법의 수정 여부
   다. 군대 해산에 관한 문제
       ......
12. 중국 군은 선거 실시일 1개월 이전에 한국에서 철수 완료한다.
13. 한국에서 유엔군의 점진적 철수는 선거 실시 전에 시작할 것이다.
14. 통일 독립 민주 한국의 권위와 독립은 유엔이 보장해야 한다.
    거듭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유엔의 실체는 단연 미국이다. 따라서 남한측의 제안은 미국의 감독 하에 미국이 보장하는 통일 한국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북한 측 제안 (남일 외상 발표)
1.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와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의 급속한 부흥과 독립 및 통일 민주국가를 창설할 목적으로 다음 사항을 촉진한다.
  가. 전 조선 주민의 자유의사 표시에 입각한 통일 조선 정부와 국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총선거를 실시한다.
  나. 조선 국회를 위한 자유 선거에 필요한 준비를 행하고 남북 조선의 경제문화 교류를 위한 긴급 조치를 취하기 위하여 남북조선 대표로서 '전조선 위원회'를 조직한다. 동 위원회의 회원은 조선 인민공화국 최고 인민위원회와 대한민국 국회에 의하여 각각 선출되며 남북 조선에 있는 가장 큰 민주적 사회단체의 대표들을 포함시키기로 한다.
      ......
2. 6개월 이내에 조선 영토로부터 모든 외국 군대가 철수해야 될 필요성을 인정한다.
3. 극동의 평화 유지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모든 국가들이 한국의 평화적 발전을 보장하는데 대한 필요성을 인정함으로써 평화적 방법에 의하여 통일독립된 민주국가로서 한국을 통일하는 과업의 조속한 성취를 촉진시킬 제조건을 조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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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정읍 발언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우리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 통일 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 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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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 혁명 자료 -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 의사

이승만 대통령 담화문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 와서 우리 여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 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할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 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 가지 결심을 요구하고 있다 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한가지 내가 부탁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38선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자 공산군이 호시탐탐하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 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었다 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게 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4293년 4월 26일
대통령 이 승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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