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불교 편>

11화. 삼장법사의 구법여행과 훗날 등장한 손오공 이야기

1. 진정한 종파불교로 거듭난 불교

오늘 이야기는 중국 불교의 전성기인 <당나라> 시기의 이야기이다. 이 시기는 중국 종파 불교가 완성되어 다양한 불교사상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일단 간략하게 중국 역사를 살펴볼까?

춘추전국시대

위진남북조

5대10국

BC770 -

BC221-

BC206 -

265 -

581 -

618-

907 -

960 -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통일기

혼란기

통일기

제가백가

법가

유가/불교유입

격의 불교

종파형성

종파불교

유교중흥

유학완성

불교의 전파와 관련된 중국 역사는 <한>나라부터이다. 그러나, 유학이 국교로 지정된 한나라 시기에 불교는 도가와 마찬가지로 <교양 철학> 수준이었다. 중국, 한반도, 왜 등에 불교가 본격적으로 성장한 것은 도무 <혼란기>였다. 혼란한 시기에는 새로운 국가 철학이 필요했고 불교가 유교를 대신하여 그 역할을 훌륭히 소화해 낸 것이다.

그러나, 초기 불교의 문제점은 불교와 국가 권력이 너무 밀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불교의 참 뜻보다는 <호국불교>의 성격이 강했다. 구마라집 이후 끊임없이 시도된 <불교의 참뜻 찾기 프로젝트>는 국가 불교에서 벗어나려는 불교의 노력이었다. 그러나, 위진남북조의 혼란기 속에서 불교의 독자성을 유지하기란 어려웠다. 불교가 진정한 <종파 불교>로 탄생한 것은 통일 국가인 <수, 당> 나라 시기였다.

<수>나라의 <천태종>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 했었다. 그러나, 수나라는 통일후 성급한 <통일 정책>으로 망하였다. 결국 수 왕조는 이종 사촌인 이연이 건국한 <당나라>로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가 진정한 중국의 종파불교 시대이다. 오늘부터 이야기 할 주제는 동아시아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던 <당>나라 시기의 종파 불교 이야기이다.

2. 각 종교간에 어떤 관계가 있었을까?

불교의 역사와 종파관계는 너무나 복잡하고, 그 이론이 심오하다. 그렇다고, 역사를 통해 간략히 보는 종교인데 심오한 철학 하나 하나를 다룰 수도 없다. 그걸 다루기 시작하면 <불교 방송>이야기가 될 것이고, 그 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당나라까지 불교의 전파과정을 간략히 정리하면서 복습해보자.



지금까지 전개한 중국 불교사의 이야기는 이렇다.

인도에서 <보살>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하는 <대승불교>가 간다라 미술 전파와 함께 동아시아로 넘어왔다. 그런데, 보살이란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승>을 말하며, 그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민해야 할 철학이 반야(지혜)였다. 그 반야 사상의 핵심이 바로 <공> 사상이다.

혼란기의 중국인들은 <공> 사상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도가의 <노장사상>을 활용하여 부처의 사상을 이해했다. 도가 사상으로 불교철학을 이해하는 것을 <격의 불교>라고 한다.

그러나 구마라집이 인도 대승 경전을 번역하면서 도가를 벗어나 독자적인 중국 불교 철학이 시작된다. 그 중에서 반야사상을 강조한 학파는 삼론종으로, 깨달음과 열반을 강조한 학파는 열반종으로, 아미타불 같이 보살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 학파는 정토종으로 발전해갔다.

수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면서 반야과 깨달음을 동시에 감싸안으려는 학파가 등장했으니, 그들이 바로 천태종과 화엄종이다.

반면, <이러한 지식들이 과연 부처가 처음 말한 진리와 같은 것일까? 너무 한쪽 측면에만 치우친 것은 아닐까?> 는 고민을 안고, 다시 인도에 불법을 찾아 떠난 이가 있으니, 이 사람이 바로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이다. 현장은 <공> 사상에만 치우친 중국 불교에 <공> 사상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유심> 사상을 상기시켰다.

초기 격의 불교 시대에 번역된 불경을 고역경, 구마라집이 번역한 불경을 구역경이라 한다면, 현장이 번역한 불경을 신역경이라고 한다. 성경에 구약, 신약의 시대가 있듯이, 불법의 시대도 새로운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야 할까?

3. 현장(602-664)의 구법 여행이 시작되다!

중국 당나라는 세계 불교사를 통털어 가장 활발한 불법 종파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위진남북조를 거치면서 이론을 쌓아온 불교의 각 학파들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종파>를 만들었다.

그러나, 종파가 많아질수록 더 큰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도대체 석가의 참 뜻은 무엇일까? 각 종파들은 자신들이 석가의 참 뜻을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석가의 가르침이 이렇게 다양할 수가 있을까?

수문제 때 태어난 현장은 20살 때 출가하였다. 하지만, 어느 한 종파의 이론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여기 저기 학파들을 돌아다니던 현장은 점점 실망하였다. 사상적인 체계도 서로 다르고, 같은 불경을 놓고도 종파의 입맛에 따라 해석이 달랐다. 왜 일까? 왜 석가의 마음이 이렇게 나눠진 것일까?

현장이 생각한 종파들은 <장님이 코끼리 만지면서 코끼리를 설명하는 것과 같았다.> 코끼리의 코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라 말하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그것이 코끼리의 본체라고 말한다. 작은 인간이 커다란 코끼리의 본체를 볼 수가 없는 것이다.

현장은 석가의 참 뜻이 담겨있는 인도 원전들을 직접 보고, 자신이 다시 해석하기로 결심한다. 쉽게 말하자면, 국내에서 영어를 백날 해보았자 발음도 안되고 무슨 뜻으로 생긴 말인지도 모르니, 영어 원조 국가에 가서 직접 배우자는 것이다. <국내파>로는 안되니 <유학파>가 되어야 한다는 비장한 결심이랄까? 그리하여 그 유명한 삼장법사의 서역 이야기가 629년에 시작된 것이다.

<서유기>에서는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라는 동물들이 현장법사를 따라 서역으로 떠난 것이라고 나온다. 물론 소설이니까... 그러나, 실제 현장의 구법 여행은 서유기의 이야기처럼 괴수들을 무찌르며 진격한 그런 여행이 아니였다.

일단 인도로 가는 길부터가 너무나 험했다. 산넘고, 물건너 가야 하는 길은 여행자가 아닌 스님이 하기엔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냥 가라고 해도 어려운 길인데, 현장법사의 출국을 막는 중국 수비대가 있었다.

당시 당나라는 국제적인 국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동으로는 한반도와 왜, 서로는 이슬람 국가들, 남으로는 인도까지 영역을 넓히고 있었다. 따라서 너무나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당나라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당나라 정부는 모든 입출국자를 국가차원에서 통제하려고 하였다. 특히 당의 토지세법은 조용조 제도였는데, 이 제도의 핵심은 토지세와 인두세였다. 즉, 자신의 토지에서 떠난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는 반역과 같은 것이었다. 현장은 국외로 빠져나가면서 국경수비대와 자주 마찰을 일으키고, 도망다녀야 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북한을 연구하는 연구소 직원이 정부 몰래 북한에 가서 현장조사를 하고온 것과 같은 것이다. 당나라 처럼 말로만 세계화를 외치는 이명박 정권에서 이런 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바로 징역형이다.

현장법사는 외친다. <내가 지옥에 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가랴?> 멋진 말씀이시다. 그 유명한 <대당서역기>는 불법을 찾기위해 국가가 만든 보안법을 위반한 한 승려로부터 출발한다.

현장법사는 죽을 고비를 몇차례 넘기고 겨우 중국 국경을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안심할 일인가?

인도로 가는 동안 그는 천국과 지옥을 수 없이 경험해야 했다.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지역에서는 그의 여행을 반길리가 없었다. 불교를 숭상하는 지역에서는 그를 최고의 고승으로 추앙해주었다. 그는 결국 인도로 도착하여 석가가 수련했다는 보리수 밑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생각했다. <앞서간 사람들을 볼수 없듯이 뒤따라 올 사람을 만날 수도 없구나>

석가에 참 뜻을 구하고자 인도에 왔어도 석가는 그곳에 없다. 그의 흔적들만 남아있을 뿐이다. 훗날 이곳을 다시 찾아올 구법 여행자들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그는 석가에 대한 기록을 찾아 실제 뜻을 연구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난타사에서 1만명의 수도승 중 최고 대우를 받으며 5년간 불법을 연구하고, 강론하였다. 인도에서는 그를 최고 고승으로 생각하며 존경하였고, 불법에 대한 열정은 주변국까지 알려졌다. 당시, 인도의 구마라왕은 그를 자신의 국가에 데려오기 위해 큰 전쟁을 할 정도였다. 그는 16년간의 파란만장한 인도생활을 마치고 중국 장안으로 돌아와 <대당서역기>를 쓰기 시작한다.

그리고, 인도에서 가져온 수많은 범어 경전을 해석하여 1335권을 번역하였다. 그 숫자상으로도 놀라운 일이지만, 한권 한권 정확한 석가의 뜻을 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은 더 놀랍다고 한다. 16년간을 인도의 수많은 학자들과 같이 밥을 먹으며 석가의 참 뜻을 토론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4. 현장(602-664)의 이론체계를 완성한 <법상종>

 
현장이 16년간 공부하고 토론하여 얻은 결론은 무엇일까? 그것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과 쌍벽을 이루는 <식> 사상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중국의 대승불교는 대부분 구마라집의 해석어거나, 그의 제자들로 시작된 불경 번역이었다. 너무 한편으로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구마라집의 핵심 사상은 대승불교의 <공> 사상이었다.

그 핵심은, 만물은 돌고 돌기 때문에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은 곧 있는 것이라는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것이었다. 이것은 현상계의 자연현상을 놓고 <공>을 다루는 것이었다. 돌고 도는 것은 우주의 법칙이자, 자연의 법칙이다. 대승불교의 <용수>가 주장했던 것도 이런 입장의 <공>이었다.

세상은 돌고 돌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 나란 존재는 죽으면 흙이 되고, 물이 되며, 그 흙과 물은 곡식이 되고, 곡식을 먹은 남자와 여자에 의해 다시 생명으로 태어난다. 즉, 나란 내가 아니며, 내가 아닌 흙과 물이 곧 나인  것이다. 결국 눈에 보이는 사물의 본질이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장은 우주나 자연보다는 인간의 마음에서 <공>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도 대승불교의 대표 철학인 <유식>을 받아들인 것이다. 물론, 중국 내부에서도 성실종, 지론종 등의 학파가 <인간의 마음>을 강조했었다. 그러나, 그들은 주류 학파는 아니였다.

그러나 현장의 <유식> 사상은 본질이 없다는 <공> 사상이 아니라 실체가 있다고 말하는 <공> 사상이였다.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은 모두 머릿 속에서 나온 것이다. 밧줄을 보고 뱀이라 생각하여 놀라는 것은 마음이 그렇게 느끼기 때문이다. 진정한 실체는 존재한다. 그러나, 머릿속에 편견과 욕망이 많을수록 진정한 실체를 보지 못한다. 밧줄을 밧줄이라고 보았을 때 실체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실체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부처가 될 수 있다.

결국, 현장이 생각한 <공>이란,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실체가 있지만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우주의 모든 현상은 결국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철학을 <만법유식>이라고 한다.

이렇게, <마음>을 강조하는 현장의 철학을 이어받은 제자 기(자은법사)는 스승의 철학을 <법상종>이라는 종파철학으로 발전시킨다.

법상종의 철학도 결국 <마음>에서 시작된다. 법상종의 기존 유식철학은 <마음>에 따라 불교 교리의 발전을 3단계로 나눈다.

1단계는 나란 존재가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버리는 초기의 <공> 사상이다. (석가철학의 아함경)

2단계는 모든 존재가 눈에 보이는 실재라는 것을 버리는 <반야>의 진리를 깨닫는 단계이다.(반야경)

3단계는 결국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이므로, 실제하는 것은 <없는 것> 같지만, 실제하는 본질은 마음으로 볼 수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다. (화엄경)

결국 법상종은 기존의 <공> 사상을 인정하면서도, 모든 것은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진다는 본질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시대에, 사상을 받아들인 학파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열반종, 천태종, 밥상종의 교리를 한데 모아 큰 통합을 이루려는 <화엄종>이었다. 화엄사상은 바다와 같다. 각 종파가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이라면, 화엄은 그 모두가 뛰어놀고 있는 그 바다 자체를 지향하는 통일 종교였으니...

현장의 유식 이론은 법상종으로 이어졌으나, 그 끝은 결국 화엄종으로 귀결되었다.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다른 종파들이 결국 화엄의 철학으로 녹아내렸듯이 법상종의 철학도 결국 모든 것은 하나라는 화엄의 <원융사상>으로 녹아내리게 된다.

당이라는 역사상 유례없이 번성한 통일왕조에서 필요했던 불교는, 모든 혼란기의 사상과 당대 사상까지 통합한 화엄종이 아니였을까? 다음 장에서는 화엄종에 대해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5. 대당서역기가 서유기로....

서유기는 명나라시대 오승은이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 오승은은 현장의 구법여행을 토대로 이 소설을 적었다.

총 100부작인 서유기는 총 3부의 내용으로 구성되는데, 첫 번째가 손오공의 탄생 이야기, 두 번째가 현장의에게 구법의 의무가 주어지는 이야기, 세 번째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이 함께 여행하는 이야기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제천대성 손오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손오공의 탄생 설화와 하늘에서의 난동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이야기가 중국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이라 현장 시대의 이야기 외에도 많은 민간 설화와 민간 종파의 이야기가 숨어 있으며, 불교의 많은 부분들을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로, 손오공이 보살들에게 대들 때, 보살들의 손에서 큰 <인장>이 나온다. 인장은 도장을 말한다. 원래 <인>은 다양한 손모양을 토대로 보살들의 언어를 표현하는 것이다.

예로, <항마촉지인>을 들어볼까?

위의 손 모양이 항마촉지인이다. 이것은 검지를 뻗어 손을 아래로 내리는 일종의 <수화>이다. 석가모니가 보살일 때, 마왕이 석가모니를 시험에 들게 하였다. 마왕이 말하기를,

<당신이 엄청난 공덕을 쌓은 것을 증명해 보이시오.> 라고 협박을 하였다.

석가모니는 오른손을 땅에 대어 <이 대지가 증명할 것이다>라고 말하였고, 그 순간 땅에서 <땅의 신>이 튀어나와 부처님의 은혜로운 삶을 증명해주었다. 마왕은 항복하였고 이 때부터 <항마촉지인>은 보살이 적을 무찌르는 손 모양이 되었다.

<선정인>은 부처가 깊은 선정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전륜법인>은 부처가 맨 처음 설법하던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지권인은 왼손으로 부처님 세계를 오른손으로 중생 세계를 표현하여 두 세계가 하나라는 것을 보여주는 수화이다.

   

   

또 하나 재미있는 설정은 손오공을 <불법>과 대비되는 도사의 이미지로 형상화시킨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의 불교이야기를 하면서 핵심주제의 하나로 <불법과 도가>의 폐불사건들을 다루었었다.

그런데, 초기 망나니같은 손오공은 <도사>의 신비술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머털도사처럼 머리카락을 뽑아 숫자를 늘린다는 기술은 초기 도가인 <오두미교>에서나 볼 수 있는 신비술이다. 구름인 <근두운>을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설정은 손오공이 학과 구름을 벗삼아 사는 신선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 <도사> 세력을 쳐 부수고, 불법의 <인장>이 승리한다. 즉, 보살이 도사를 이긴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손오공은 도사이므로 죽지 않는다. 그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도와 불법을 찾는 다는 내용은, 초기 도가 사상을 받아들인 불교가 도가를 발 아래 두고 불법의 진리를 찾는다는 역사적 상황과 맥락이 같다. 손오공의 이름 자체가 <공손하라>는 의미인 것은 이와 관련된 것이 아닐까?

손오공의 머리에는 금제가 있다. 불법을 벗어날 때 마다 고통이 찾아온다. 자비로운 삼장은 진정한 불법을 찾으면 금제를 풀어준다고 말한다. 도가에서 벗어나 진정한 불법을 찾고자 한 현장은 <독자적인 불법>을 찾은 뒤, 손오공을 풀어준다. 그러나, 손오공은 이미 불법에 빠져 버렸다. 깨달음을 얻게 된 것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이야기는 현장법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당시 중국에 진정한 불법이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 진정한 부처의 뜻을 모르기 때문에 <삼장법사>는 서역에 가서 불법을 전해받아야 한다. 그런데, 악의 무리들이 그 과정을 방해한다. 그 악의 무리들은 여러 갈래이다.

같은 불교이면서도 불법의 참 뜻을 모르는 무리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삼장의 참 뜻을 모른다. 반대로 우마왕같은 존재는 인도 바리문의 <소 숭배>를 생각나게 하면서도 반대로 농경사회인 중국의 전통을 상징하기도 한다. 처음에 우마왕과 싸우던 손오공이 우마왕과 형제가 되는 설정은 특이하지 않는가?  또, 신선술을 부리며 각종 동물이나 괴물로 변하는 도가의 술법을 쓰는 자들도 있다.

저팔계’는 저속한 마음의 욕심을 이겨내려면 여덞 가지 계율, 즉 ‘팔정도를 이루라는 뜻이고, 사오정은 맑은 마음을 가져야 깨우칠 수 있다는 불교 교리를 상징하고 있다.

사실 서유기는 불교식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측면이 많다.

  이 작품이 명나라 때 쓰여진 관계로, 당나라 당대 불교의 교파들 보다는 훗날 밀교화된 불교 상황을 많이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아미타불>과 같은 정토종 성향이 상당한 강하다. 백성들이 읽는 고전 작품이기 때문에 심오한 교리보다는 <아미타> 신앙과 같은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손오공이 알게 된 불교는 심오한 교리가 아니라 실천을 통해 알게된 <깨달음>이지 않는가?

또, 이 작품은 명나라 당시 부패한 사회상과 나쁜 관료들을 우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그 풍자의 방식으로 불교적인 사상이 덧붙여진 것이다. 암울한 현실을 직접 비판하기 힘든 상황에서는, 신비하고 가벼운 모험 스토리로 풍자하는 것이 일반인들 읽기에 편하지 않겠는가?

서유기는 보살이 나오는 이야기 같으면서도, 유교, 불교, 도교의 모든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하지만, 현장법사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괴물들을 물리치는 과정과 방법은 도교식이지만, 그 원리는 불교식이다. 현장은 모든 괴물들도 사실 불성을 가지고 있기에 용서가 가능하다는 <열반종>의 불성론적 사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하늘에서는 <악>은 악일 뿐이기에 퇴치해야 한다는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현장은 모든 것이 마음에 달린 것이라고 말하며, 법상종과 화엄종의 핵심 교리인 <일체유심조>를 주장한다.

실제 대당서역기와 서유기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불교의 진리가 무엇인지 찾으려하는 현장의 마음 만큼은 서유기에서도 표현하려 한 것이 아닐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http://historia.tistory.com (필자 : 히스)

 

   - 불교사에 대한 이해 : 참고할 만한 책들

대당서역기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현장 (서해문집,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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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의 치: 위대한 정치의 시대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멍셴스 (에버리치홀딩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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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 3: 치세편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나채훈 (씽크뱅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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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계환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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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기 (논술프로그램세계명작 5)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오승은 (예림당,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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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은 서천으로 갔다(서유기 다시 읽기)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홍상훈 (솔,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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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로 보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히로 사치야 (황금가지,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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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명료한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스티브 하겐 (우리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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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뜻깊은 불교 이야기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달진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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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으로 만나는 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계환 (정우서적,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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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관불교와 유식불교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일지 (세계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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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남조 정권의 계승 과정

이번 장에서는 5호 16국 시대가 진행되는 동안 한족 정권인 남조 정권에 대하여 간략히 포스팅해보겠습니다. 그 두 번재 국가로 <송, 제, 양, 진>을 살펴보죠. 중국 남조는 동진 - 송 - 제 - 양 - 진 - 수(통일국가)로 연결됩니다.

5호 : 후한조부터 중국내지 이주  → 중국지식인의 사융론(한(흉노) - 후조(갈) - 전진(저 : 비수전투) -북위(선비))

△ 秦의 통일(BC 221) → 한제국(BC 202) → 왕망(8년) → 후한(23년) → 삼국시대(220) → 서진(265)

△ 화북 : 5호 16국(304-439) → 북위(439-539) → 동위(북제), 서위(북주) → 수의 통일(589)

△ 화남 : 동진(317-420) → 송-제-양-진(420-589)

1. 송 나라 시대

실제 송, 제, 양, 진의 남조시대는 엄청난 격동기로서 전투와 전쟁이 많았던 만큼, 제대로 포스팅 하려면 시리즈로 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이 포스트는 이야기 중국사가 아닙니다. 나중에 중국사를 다시 포스팅할 때 고사들은 다시 정리하기로 하고, 아주 간략히 왕조의 흥망만을 다루겠습니다.

동진의 뒤를 이어 선양으로 송을 건국한 사람은 <유유>입니다. 바로 송 무제라고도 하죠. 유유는 사실 동진의 군사적 기반이었던 화북 서진 군대의 장군이었습니다. 유유는 화북을 통일한 전진의 부견과 중국 패자자리를 놓고 엄청난 격전인 <비수의 대전>을 이끈 장수입니다.(5호편 포스트를 보시면 됩니다.) 그는 비수의 전투를 대승으로 이끌어 북방 민족들이 남조를 넘볼 수 없도록 일시적으로 쐐기를 박아놓은 영웅이었죠.

유유는 북방 민족들을 끊임없이 공격하여 남연, 후진 등을 박살내고 강자로 떠올랐습니다.그리고 5호에 대한 적대감을 그대로 표출하여, 남조 귀족들에게 든든한 <장수>라는 인상을 심어줍니다. 결국 무력을 가진 유유가 동진의 왕으로부터 <선양>의 예로서 황제에 즉위합니다. 이 나라가 송입니다.

그런데 문제점은 유유라는 <군인>이 황제가 되었는데, 남조의 귀족들은 이 유유를 인정했다는 점입니다. 인정한 정도가 아니라 유유가 왕이 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까지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논란이 많습니다.

첫 번재는 무인정권이 군사적 기반으로 귀족들을 굴복시켰다는 설입니다. 두 번째는 귀족들이 자신들이 사회, 정치적 지배권을 가졌기 때문에 적당한 <무인 영웅>을 왕으로 앉혀놓고 왕에게 북방 이민족을 견제하도록 유도했다는 설입니다. 실제, 무인 출신 왕은 북방 이민족과의 싸움에 이긴 영웅으로 중앙정치를 하는 왕이었지만,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사희 지배집단은 호족출신의 귀족집단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두 번째 논점을 인정하는 형태에서 포스팅을 할 까 합니다.

실제 무인으로서 왕이 된 <유유>를 비롯한 남조의 왕들은 모두 싸움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미천한 <무장 세력>이었습니다. 이 무인들은 무술 실력으로 북방 민족들을 견제하면서, 귀족들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들은 정치적 실권이 없었기에, 송- 제 - 양 - 진으로 이어지는 남조 국가들은 모두 단명하고 맙니다. 즉, 군사력으로 집권한 왕들은 군사적 가치가 떨어지면 실세인 귀족이나 지주세력에 의해 제거되는 것이지요.

실제 송나라는 송무제(유유)이래 문제 시대에 안정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이 당시 북조에서는 북위가 북방을 통일하고 송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였지만, 무신정권은 이들을 효율적으로 막아내였지요. 그러나, 송 문제 이후 왕권이 약해지고 군사력이 약해지자 결국 송은 더욱 강력한 무장은 <소도성>에게 선양의 형식으로 왕을 양위하고 맙니다. 그 결과 평화적으로 송에서 <제>나라로 양위가 양위됩니다. 그러나, 이후 강력한 무장들이 서로 왕위를 노리는 상황에서 소연의 쿠테타로 <제>라는 무신정권도 몰락하고 <양>이라는 무신국가가 다시 등장합니다.

2. 양의 시대

송 - 제를 이어 왕에 오른 자는 강력한 무신 집단이지만, 가문이 미천했던 양 무제입니다. 양나라의 소연은 왕이 되자 바로 실세인 <귀족집단>의 특권을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화북 귀족들의 정치, 경제, 사회적 특권을 보장하기 위해 <백가보>라는 것을 작성해주고, 문벌귀족들을 국가 관리로 적극 등용합니다. 그는 유교와 불교 등을 정비하고, 지방 호족적 성향의 관리들을 중앙에 적극적으로 끌어오려고 하지만 <후경의 난>으로 몰락하고 맙니다.

<후경의 난>이란, 북위가 동위, 서위로 분열된 이후 북에서 내려온 동의의 후경 장군이 일으킨 난입니다. 후경은 하남 13개 주를 양나라에 바치고 남조에 충성할 것을 맹세했지만, 결국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쿠테타를 일으킨 사건입니다. 이 후경의 난으로 당시 지방세력이었던 문벌귀족들이 대거 죽습니다. 후경은 본래 남조 출신이 아닌 만큼, 남조의 귀족들을 우대할 이유도, 그들의 눈치를 볼 이유도 없었습니다. 이 후경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결국 문벌귀족체제가 무너지는 신호탄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후, 양을 이어 진패선이라는 장군이 진을 건국하였지만, 당시 강성했던 북방의 국가들에게 멸망하였고, 중국은 <수>나라에 의해 통일국가로 전환됩니다. 남북조 시대가 끝난 것이지요.

3. 남조 정권의 가장 큰 특징

결국 남조 정권을 살펴보면,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1. 귀족세력이 실세였지만, 귀족들은 북조의 침략을 막을 만큼 실력있는 장군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았다.
   2. 남조의 왕들은 모두 무장 출신으로서 쿠테타를 통해 집권했지만, 그 집권 방식은 대부분 선양이었다.
   3. 남조의 창업주들은 철저하게 귀족들의 지위를 보장하고 그들의 협조로 국가를 운영해 나갔다.
   4. 귀족들은 군인무장을 왕으로 삼은 뒤 자신들의 가문의 영광만을 추구하였다.
   5. 남조의 왕조는 모두 문벌귀족의 신임을 잃으면 망하였기 때문에 황제권이 약하였고 단명하였다.

남조 왕조의 특징은 이 정도로 정리하고 이후에 포스팅은 북조 왕조의 통일 국가 북위를 다루겠습니다. 북위를 다루기 위해서는 5호 16국을 어느정도 다루어야 하고, 효문제와 우문태를 키워드로 왕조를 설명하는 것이 좋겠네요. 그럼 북조의 전성기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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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16국 시대의 개막 - 5호가 내려와 진을 몰아내다

이번 장에서는 5호 16국 시대가 시작된 배경은 5호의 중국 진출에 대한 내용을 포스팅 해보겠습니다. 5호란 흉노, 선비, 저, 갈, 강족을 말합니다.

1. 만리장성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다투다

5호는 고대 사회 이래 중국이 선진 문물을 수용하지 못한 미개민족으로 분류한 <오랑캐>를 말합니다. 주나라 시대 <중화사상>의 기틀이 마련된 이후 <황하문명>에 소속되지 못한 비문명 지역을 <오랑캐>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춘추시대 이후 양자강 유역의 개발이 시작되면서, 양자강 유역의 오, 월, 초 등이 중화문명에 소속되었고, 서방의 진이 중국을 통일하면서 중화 문명권은 서방의 진 ~ 남방의 양자강 ~ 북부 황하유역을 경계로 삼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명권을 벗어난 지역은 모두 <오랑캐>의 지역이라고 규정하였고, 진시황, 한무제 등은 오랑캐 문화권인 북방 흉노족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습니다. 때로는 이 흉노 원정이 국가 멸망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진의 만리장성 축조, 한무제의 무리한 흉노 정벌 등은 당시 통일된 중화 제국에 분열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떠한 강력한 중국의 통일왕조도 이들 유목문화권을 완전히 정벌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즉, 만리장성을 두고 북방문화권의 유목민족과 중화문화권의 중국왕조는 끊임없이 대립하였습니다. 그리고, 중화문화권에 강력한 왕조가 있던 시기에는 두 문화권이 충돌하는 경우가 잦았습니다. 하지만, 후한의 멸망 이후 서진 시대의 혼란한 중화민족의 사회상은 이 두 문화권의 주도권이 완전히 북방으로 넘어가게 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북방 문화권의 유목민족들은 중국의 혼란을 틈타서 따뜻한 농경사회로 침투하기 시작합니다. 이미 유비, 조조 등의 이민족 이용 정책으로 중화지역에 진출한 유목민들은 용병으로서 활약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진 시기에는 이제 대놓고 만리장성을 넘어 중화지역에 터전을 잡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이민족의 중화진출에 신호탄을 쏜 민족은 가장 치열하게 중화민족과 대립하였던 <흉노>민족이었습니다.

2. 후한기에 이미 장성을 넘은 이민족들이 많았다.

5호의 진출이 후한 멸망 이후에 본격화 되었지만, 실제로는 후한기에 이미 5호가 중국 내부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전한의 멸망과 신의 건국 및 멸망으로 지방분권적 호족사회로 나아가고 있었던 한 제국은 후한기에 접어들면서 이민족의 중화 거주에 대하여 확실하게 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남흉노가 중국에 복속하면서 만리장성 이내에는 오랑캐 민족이 거주하는 특이한 현상이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삼국시대의 호족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넓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이민족들을 활용하기 시작합니다. 끊임없이 남방을 괴롭혔던 강족은 회유책으로 중국내 거주를 인정받았고, 저족도 중국내지로 이동하였습니다. 이 저족과 강족이 중국 서북방의 중요 거점인 관중일대에 정착하면서 이민족은 쉴세없이 밀려들기 시작합니다.

물론 강통과 같은 지식인들은 이민족을 만리장성 밖으로 몰아내어 훗날의 화근을 막아야 한다며 선견지명이 있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통 <사융론>이라고 하지만, 당시 혼란했던 시대상황 속에서 이민족을 이용해야 했던 국가세력은 이러한 주장을 묵살하였습니다. 즉, 이민족은 5호 민족이 중국내에 거주하면서 한민족과 이민족이 섞여 이민족 중심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게 됨으로서 새로운 시대가 개막됩니다.

역사에서는 이것을 <호한체제 : 오랑캐와 한족의 공존체제>라고 부릅니다. 실제 이후 중국사에서는 당, 송, 명과 같은 중국 전통 왕조와 요, 금, 원, 청과 같은 이민족 왕조들이 서로 주도권을 잡으면서 중원을 장악하는 형국으로 흘러갑니다. 실제 중국사에서 절반은 이민족 왕조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현재 중국 정부는 이러한 이민족 왕조를 자국사로 편입하여 <중국사 내의 소수민족 시대>라고 규정하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이것도 동북공정, 서북공정, 티벳정복 등의 중국 역사 왜곡과 맞물려 <중화 중심 세계주의>를 구성하는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네요.

3. 5호는 국가를 세우다

5호란, 중국문명권이 약해진 틈을 이용하여 중국 북방을 점령한 이민족을 일컫는 말입니다. 5호는 <흉노, 저, 갈, 강, 선비> 등 유목민족을 말합니다. 이 5호의 국가들이 중국 북방을 점령하고 각각 16국을 건국하는데, 이 시기를 북방 5호 16국 시기라고 합니다.

5호 16국 시기의 시작은 316년 서진이 망하여 동진 정권으로 이동한 것을 기점으로 합니다. 중국 왕조인 서진은 흉노 추장의 반란(영가의 난)으로 멸망하게 되는데, 이 때부터 이민족들이 북방의 정권을 잡아 각각 다양한 왕조를 건설하였으며, 439년 북위가 북방을 완전 통일할 때 까지의 시기가 5호 16국 시기입니다.

먼저 5호 중 주도권을 잡은 것은 흉노의 한족입니다. 흉노는 중국 영토에 선이주한 흉노 지배층과 결탁하여 <한화된 흉노>를 바탕으로 <한>이라는 나라를 건설합니다. <한>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철저한 한화정책을 실시하여 중국 한나라의 민족을 규합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서진의 멸망으로 선비, 저족 등이 중국에 물밀 듯이 들어오게 됩니다. 서진이 망한 뒤 사마예는 사마씨의 2번째 정권인 동진 정권을 양자강 유역에 건설하여, 중화 민족은 남부에서 다시 세력을 규합하기 시작합니다.

<한>이 내분으로 망한 뒤 다시 정권을 잡은 것은 갈족의 <전조>였습니다. 전조는 북중국을 통일하고 중국 남조를 토벌하여 중국을 통일하려고 했지만, 내분으로 멸망합니다. 이후 저족의 <전진>이 화북을 통일하였고, 이 전진의 위세는 남부 중화 국가를 바로 토벌하고 중국을 통일할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진의 유명한 황제 부견은 어이없게도 <비수의 전투>라는 역사상 유명한 전투에서 패하고 맙니다.

부견은 유리한 위치에서 기습, 야습, 매복 등으로 쉽게 이길 수 있었음에도, <싸움은 정당해야 하므로, 평지에서 정당하게 군사력으로 싸워야 한다>라는 이론을 내세우다가 패한 것이지요. 결국 부견은 전쟁에 지고 이후 살해됩니다. 부견의 <전진>이 망한 다음 북방 이민족 국가는 북위, 후연, 후진 등이 각축을 벌이다가 선비족의 <북위>가 통일하여 5호 16국 시대가 끝나게 됩니다.

이 5호 16국 시대가 북방에서 지속되는 동안 남방의 중화국가들은 동진 - 송 - 제 - 양 - 진으로 이어지는 남조 국가 시대를 열어갑니다. 그럼 다음 포스트에서는 동진 정권부터 시작해서 5호 16국 시대의 남방 정권들을 살펴보도록 하죠. 북위가 북방을 통일한 이후에는 5호 16국이 끝났으므로, 북위 vs 남방정권의 <남북조>시대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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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시대와 호한체제의 성립

이번 장에서는 이전 포스트인 <위>나라를 계승한 진나라의 역사를 포스팅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위 나라가 몰락하다.

중국의 위,촉,오 삼국시대를 통일한 위 왕조는 너무 단명하였습니다. 그것은 후한말 이래 호족 세력들이 할거한 시대를 통일했지만, 호족 세력이 상당수 잔존하였기 때문입니다. 위는 호족세력과 개국공신들에게 많은 관직을 내려주었고, 호족세력들을 중앙 관리로 끌어들여 귀족세력으로 재편하려고 했습니다. 또 9품관인법 같은 제도를 계승함으로서 관직임명에 제도적 명분도 만들려 하였죠.

하지만, 호족이 중앙에 올라와 귀족화되면서 초기 조조, 조비의 참신한 기풍은 점점 사라지고, 지배집단이 <귀족세력>으로 변질되기만 하였습니다. 이들 호족들은 중앙에서 서로 편을 갈라 대립하곤 하였고 그 결과 사마의가 정권을 정악하면서 사마씨의 <진> 나라로 정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물론 이 진의 건국도 <선양>의 형식을 빌립니다. 사마염(무제)가 위을 선양으로 이어받으면서 건국된 <진>은 명실상부한 <삼국시대 통일국가>가 됩니다.

2. 진의 사마씨들은 호족들을 제어하지도 못하다.

진 왕조는 건국 자체부터 큰약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진 왕조는 후한 이래의 <호족>세력에 의해 건국된 왕조로서, 사마염이 선양을 받아 왕조를 개창한 자체가 강력한 호족들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진의 사마씨 왕실은 건국을 도와준 강력한 호족 집단들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건국 과정에서의 <호족 연합적 성격>은 마치, 후한 광무제의 건국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사마씨의 진국은 호족을 통제할 힘이 없는 국가였습니다. 진국에서는 호족에게 특혜를 주어 호족들이 활발하게 중앙에 진출하여 왕권에 복속된 귀족체제를 확립하였지만, 이들 호족은 너무나 독자적이었습니다. 호족들은 진 왕실을 보호하는 것보다 자신의 종가(호족가문)의 이익만을 챙기는 것에 급급하였습니다. 이것이 후한과 진의 차이점입니다. 진의 호족들은 이미 삼국시대의 오랜 전란을 거치면서, 왕실보다는 가문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사마씨 정권은 토지제도인 점전제, 과전제 등을 실시하여 호족의 대토질 소유를 막으려 했지만 실용성이 별로 없었습니다.

따라서 진은 호족들을 믿을 수가 없었고, 호족을 통제하고 왕실의 울타리를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왕실의 <왕자들>과 <종친>들에게 토지를 분봉하여 지방 통제를 맡기는 <봉건제도>를 부활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 왕조의 치명적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호족 통제를 위해 파견한 왕자들은 호족과 연합하기도 하고, 때론 독자세력화하여 진 왕실에 위협적인 세력이 되었습니다. 진 왕실은 왕자세력들이 왕실에 반기를 든 <8왕자의 난>으로 중앙집권체제가 무너져 버립니다.

3. 호한체제가 시작되다

서진 시대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찾으라면 호한체제의 시작입니다. 진은 삼국을 통일한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였지만, 이민족을 통제할 만큼 강력한 국가는 아니였습니다. 진은 이미 자체 호족들과 봉건제도를 통해 성장한 왕자세력들도 통제하지 못했으니까요.

거기에 서진은 오랜 전란으로 인해 떠난 민심을 적절히 수습할 대책도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지방을 지방호족과 봉건된 왕자들에게 맡겨 버리는 형세였으니까요. 오랜 전란으로 백성들은 이미 한나라 이래 국교가 된 유교를 버린지 오래였습니다. 이 당시에는 이미 향락적인 성향의 노장사상이 유행하였고, 허무한 염세주의 사상이 전국에 만연되어 있었습니다.

또 긴 혼란기 속에서 허약해진 중국 사회에는 이미 이민족들의 중국내 거주를 인정하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삼국시대에 유비, 조조 등은 이민족의 힘을 빌려 상대 국가를 견제하려고 하였고 이것은 북방 이민족이 중원에 내려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서진은 이민족(5호)의 만리장성 이내 거주를 허락하였고, 중국인(한족)과 이민족이 이제 중국 영토에 같이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호(오랑캐)와 한(한족 : 중국족)의 공존체제라고 부릅니다.

서진 시대는 길고 긴 중국 역사 속에서 호한체제가 시작된 기점입니다. 이 시기 이후의 모든 중국사는 결국 한나라를 계승한 전통 중국 왕조(한족 국가)와 북방에서 내려온 이민족 왕조(침투왕조, 정복왕조)의 기나긴 싸움이 됩니다.

결국 서진은 이민족의 침투에 의해 무너집니다. 이민족인 <흉노>가 <영가의 난>을 일으켜 한나라 이후 구축한 중화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이민족인 5호 국가가 중국에 자리잡는 역사가 시작된 것이죠. 이 <영가의 난>이 바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호한체제 성립을 가져온 사건입니다.

4. 서진의 멸망

결국 서진은 호족들을 제어하지 못하여, 봉건제를 실시하였다가 <8왕자의 난>으로 국가 체제가 무너지고, 이민족들이 적극적으로 서진에 침투하게 됩니다. 결국 이민족인 <흉노>족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흉노>족은 진시황, 한무제 등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통일 군주들과의 항쟁에서도 살아남아, 결국 중국사회를 정령한 최초의 이민족 국가인 <한>을 건국합니다.

이후 중국은 가장 혼란한 시기인 5호 16국 시대를 맞이합니다. 서진은 수도를 옮겨 동진이 되었고, 중국의 주요 영토는 중화사상에 의해 오랑캐라고 규정된 국가들이 나누어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곧 호한체제의 출발이자, 모든 민족이 중국 영토안에서 어울어지고, 이 모든 민족을 통일하기 위하여 서로 항쟁하는 시대의 출발을 의미합니다. 이 시대 이후는 중화민족의 시대가 아니라, 모든 민족을 아울러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하려는 각 민족국가들이 <세계국가>, <세계시민>을 추구하는 시대로 나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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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를 통일한 조조, 조비 부자의 <위> 나라

이번 장에서는 삼국시대에 대한 내용을 <위>나라 중심으로 포스팅 하겠습니다. 하지만, 삼국지의 이야기식이 아닌 순수한 역사적 관점에서 적어도록 하죠.

1. 위나라는 정통성이 있는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삼국시대의 나라는 조조의 위, 유비의 촉, 손권의 오를 말합니다. 영웅들의 대결이라는 관점에서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를 어렸을 때 한번쯤은 읽어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소설인 삼국지는 훨씬 후대에 나관중이 쓴 소설입니다. 역사로서의 정사 삼국지는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이죠.

진수의 삼국지와, 진수 이후의 삼국시대 사서들은 좀 관점이 다릅니다. 진수는 삼국시대의 정통이 <위>에 있었다고 봅니다. 위나라는 후한의 호족연합정권에서 파생된 가장 강력한 호족 세력으로서 후한 대 이후 <기득권>을 가진 세력이었고, 역사는 명분보다 <실세>로 흘러간다는 입장에서 보아도 위가 정통성이 있다는 것이었죠. 특히, 진수가 삼국지를 저술할 시기에는 삼국시대 이후 <진>나라가 정권을 잡으면서 실력있는 자들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었습니다. 진수는 위나라를 전통으로 하여 위를 기전체 역사에서 황실의 이야기인 <제왕 본기>로 서술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시대 자체가 실력으로 줭권을 잡는 시기였습니다. 실력있는 이민족들이 중국 대륙을 넘보는 시기의 역사 서술은 조씨 일가와 사마의에게 정통성을 부여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후 중국민족이 중국 전체를 휘어잡고 이민족을 몰아낸 송대에는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유지기의 사통, 주희의 통감강목 등의 역사서에서는 중화민족의 기틀을 <한나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전한왕실의 정통성을 후한이 이어갔고, 후한의 멸망 뒤에는 왕실 성인 <유씨>가 계승하려 했으므로, 유비가 곧 정통이라는 입장입니다. 이 논리는 상당히 유교적인 논리입니다.

2. 위의 발전 배경 - 둔전제

삼국시대, 위나라의 가장 큰 발전 배경은 <토지 개혁>이었습니다. 후한 말기 원소, 조조 등 유력한 토지보유 호족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사병을 양성했기 때문에 후한 말에는 토지가 황폐해졌고, 백성들은 수많은 민란을 일으켰습니다. 전란을 일으킨 장본인들은 사실 조조, 원소, 동탁 등 대토지를 보유한 호족 계급이었지만, 그들 중 사회적 모순을 적극적으로 개혁할 의지가 있었던 자들은 초기에 거의 없었습니다.

삼국시대에 조조, 유비, 손권이 패권을 잡은 것인 이렇게 문란한 토지제도와 경제질서를 개혁하였기 때문입니다. 조조는 둔전법으로, 유비는 낭방 개척과 수운사업으로, 손권은 양자강 일대의 수운 무역과 그 일대 농지개간으로 성장한 호족세력이었습니다. 이중 가장 토지개혁을 철저하게 했던 자가 바로 조조입니다.

조조는 전란으로 황폐화된 영지가 늘자 임자없는 농경지를 모두 <둔전>으로 편제하여 버립니다. 이 둔전에 유망하는 유민들을 둔전민으로 편제하여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또 둔전을 관리하는 둔전관도 호적에 넣어서 철저한 둔전 통제책을 실시합니다. 둔전민들은 조조의 보호아래 청주 일대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농사관리관은 소, 씨앗 등을 무상으로 대여해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농경민을 적극 유치한 이유는 군사력과 조세 때문입니다. 이 둔전에서 조조는 소를 대여한 땅에서는 6/10, 자가농의 영지에서는 1/2의 세금을 걷었습니다. 엄청난 세금이었지만, 농민들은 혼란기에 안정적인 농사를 지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한 듯 싶습니다. 이 농민들은 전쟁이 극심할 경우에는 청주일대를 중심으로 조조의 사병이 되어 전쟁에 투입되었고, 조조는 병사들에게 더 많은 정복 토지를 보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둔전제의 의의는

첫째, 떠도는 유민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한 것
   둘째, 황무지를 개간함으로서 국가의 경제력을 재건한 것
   셋째, 경제력과 유민을 확보함으로서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한 것 등입니다.

3. 후한제국의 계승자로 자처하다

조조의 경제적 실권이 둔전책이라면, 정치적 실권은 바로 <후한계승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것입니다. 조조는 새로운 왕조는 자신의 왕조가 아니라, 후한을 계승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조조일가는 양자로서 가문이 계승되었던, <환관> 가문이었습니다. 중앙의 정치력을 가진 환관가문이자, 지방에서는 대토지와 무력를 소유한 호족가문이었습니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위>를 건국할 때도 무력으로 후한 세력을 다 죽인 것이 아닙니다. 조비는 구세력의 저항이 가장 적은 방법으로 <선양>이라는 형식으로 즉위합니다. 선양이란, 성현에게 왕위를 양위한다는 유교의 덕치주의적 정치원리의 형식만을 빌린 왕위계승법입니다. 즉, 위는 후한의 황제로부터 덕이 있어 왕위를 물려받은 왕조가 되는 것이지요. 이 선양은 주례체제에서 빌린 획기적인 방식 왕위계승 방식입니다. 이 후 대부분의 중국 전통 왕조는 왕위계승을 선양의 형식으로 합니다.

또 조비는 자신의 거점지인 화북을 중심으로 <낙양>에 도읍을 정하여 한의 수도가 곧 위의 수도라는 명문을 내세우며 한의 계승자임을 자처합니다.

4. 위의 몰락

그러나 위 왕조는 너무 단명하였습니다. 그것은 후한말 이래 호족 세력들이 할거한 시대를 통일했지만, 호족 세력이 상당수 잔존하였기 때문입니다. 위는 호족세력과 개국공신들에게 많은 관직을 내려주었고, 호족세력들을 중앙 관리로 끌어들여 귀족세력으로 재편하려고 했습니다. 또 9품관인법 같은 제도를 계승함으로서 관직임명에 제도적 명분도 만들려 하였죠.

하지만, 호족이 중앙에 올라와 귀족화되면서 초기 조조, 조비의 참신한 기풍은 점점 사라지고, 지배집단이 <귀족세력>으로 변질되기만 하였습니다. 이들 호족들은 중앙에서 서로 편을 갈라 대립하곤 하였고 그 결과 사마의가 정권을 정악하면서 사마씨의 <진> 나라로 정권이 넘어가게 됩니다. 물론 이 진의 건국도 <선양>의 형식을 빌립니다. 사마염(무제)가 위을 선양으로 이어받으면서 건국된 <진>은 명실상부한 <삼국시대 통일국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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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이야기 28 - 중국 최초의 통일국가 진나라의 통일 배경

이번 장에서는 진나라의 통일 배경만 다루어 보겠습니다. 진에 대한 이야기는 통일배경론, 진의 정치사, 진의 제도사로 나누어 3파트를 정리하고, 나머지 파트에서는 진나라가 중국 역사에 남긴 유산 부분을 다루어 보죠. 그게 진나라 이해에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1. 진의 통일 이전부터 추구해온 통일사상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부터 <춘추전국시대>에는 통일론이 각 제자백가 사상 속에서 내포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제자백가의 각 사상들은 자신들의 사상의 논의의 궁극적인 목표가 모두 이 혼란한 세상이 끝나고, <통일된 국가>가 탄생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단지 그 방식이 달랐을 뿐이지요. 유가는 도덕원리로서, 법가는 법치원리로서, 묵가는 겸애사상으로, 도가는 자연철학으로 그 방식이 달랐지만, 모두가 통일을 원한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 전국시대의 통일은 이러한 혼란기를 극복하고 평화를 염원하는 당시 사람들의 바램이 이루어전 것입니다. 통일의 방식 중에서 법가사상이 가장 군주의 이상적 통치방식이라고 생각하였고, 그 방식을 통해 진이 통일을 이루었던 것 뿐이죠.

세계사적 보편성으로 보아도 초기 철기를 넘어 본격적으로 철기가 보급되는 시기에는 대부분의 소국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진이나, 아시리아, 페르시아, 마케도니아와 같은 강력한 통일국가들의 통치이념이 대부분 강력한 법치주의를 통한 각종 제도 개혁이었다는 사실을 볼 때 <엄법주의 사상>이 이 시대에는 가장 잘 적용되었던 듯 싶네요.

법가사상의 가장 큰 장점은 엄격한 국가 통제 아래에서 <경제력>을 통일시키기 좋다는 점도 있습니다. 실제, 춘추전국시대에는 인위적인 각 국가간의 관세 장벽, 화폐, 도량형의 불일치로 인하여 당시 성장하고 있던 상공업 계층의 불만도 많았습니다. 따라서 통일은 곧 정치적 통일 뿐 아니라 경제적 일원화도 뜻하는 것이었으며, 진시황이 통일 후 바로 강력하게 화폐, 도량형, 도로 등을 통일하거나 정비하는 것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실제, 페르시아를 통일한 다리우스 1세기에도 진시황제와 거의 비슷한(똑같은 것도 있더군요) 경제 통일 정책을 실시하는데, 역시 통일 전 경제적인 단위의 불일치로 인한 문제점이 있었다는 점을 반증합니다.

또 진시황의 통일은 <중화>라는 개념을 통해 뭉치려고 했던 주나라 이후 중원 민족들의 일체감이 완성되었다는 것도 반증합니다. 실제 은, 주대에는 황하강 유역만이 중화의 개념이었으나, 춘추전국시대 이후 <초, 월, 오>라는 양자강 국가가 등장함으로서 이들 역시 <중화>로 포함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계속되었습니다. <초>는 스스로도 남방의 오랑캐가 이닌 <중화민족의 일부>임을 자처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서방의 오랑캐 취급을 받아야 마땅한 서부의 <진>이 통일함으로서 서-중-남을 통합한 <중화>개념이 등장합니다. 즉, 중국민족이라는 보편 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죠. 그러나, 당시 진이 너무 빨리 망한 관계로 중국 민족을 뜻하는 한족은 다음 왕조인 <한나라>에서 비릇됩니다.

또 서-중-남의 통합은 이제 북- 동부 오랑캐 정벌이라는 시각에서 중화의 영역의 확장을 시도합니다. 진나라는 북방 유목민족인 흉노를 중화 외의 경계로 설정하였고, 한나라는 동부 고조선을 외부 경계로 설정하면서 이들 민족과의 투쟁이 시작되는 것이죠. 남부로는 양자강 훨씬 이남이 이제 오랑캐의 영역이 된 것입니다. 서부는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더 나아갈 곳이 적었으므로 오랑캐의 개념과 함께 다른 세계와의 소통을 할 수 있는 무역권으로 인식을 합니다.

또 하나 중국 통일의 배경은 바로 북방 <흉노>의 강성합입니다. 강력한 유목민 문화권의 흉노가 중화문화권을 위협하는 상황에서 중국인들은 하나로 뭉쳐 대항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국가든지 강력한 통일 국가가 등장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있었고, 이것은 <진>이라는 오랑캐 국가가 중원을 통일했음에도 그 통일을 이민족의 침입으로 보지 않는 관점이 성립된 듯 싶습니다.

2. 그럼 왜 하필 진이였는가?

서방의 진이 중국을 통일한 가장 큰 원인은 <상앙>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법가주의 사상의 수용입니다.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진의 변법은 1차, 2차, 3차로 이어지면서 계속적으로 국가 개혁을 끊임없이 시도했는데, 주변에 강국이 없는 서부의 외진 국가라는 점이 변법 수행을 차질없이 진행하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이 변법을 통해서 진은 구세력을 일소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루었으며, 모든 백성들이 토지를 사유하는 제도를 완성하여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가합니다. 상앙의 제원전을 보면, 당시 농법기술의 발달이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예로, 당시에는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는 휴한농법이 이 때 도입되었죠.(유럽 중세에서의 삼포제가 보통 9- 10세기 정도에 정착되는 것으로 미루어 천년은 빠르다고도 볼 수 있겠네요.)

따라서 모든 백성들이 토지를 가지는 토지 사유제를 실시함으로서 국가는 엄청난 조세를 걷을 수 있었고, 이것이 철제무기를 원할히 생산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이 되었습니다. 또, 농업의 안정은 군공수작제 등을 통한 능력주의에 바탕을 둔 부병제를 완성시켰고, 진에서는 중국 전래의 전차전, 보병전에 유목민족의 기마전법까지 더한 강력한 군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또 능력에 따라 재산과 권력을 재분배하는 변법의 원칙은 국왕이 신료들을 능력별로 통제할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인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진의 근거지인 서방의 영토는 위수분지를 포함하는 그 서역으로서 훗날 국제적 도시 장안 등을 이루는 천연적 요새이자 동서무역의 요충지로서의 가치가 높았습니다. 또 진은 중원보다 후진적인 지역이라는 틀을 벗기 위해 북방문화도 적극 수용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진의 외교적인 역량도 높이 살 수 있죠. 진은 가까운 나라를 치기 위해 먼 나라와는 동맹을 맺어둔다는 <원교근공책>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진의 이 외교는 소진, 장의 등의 합종연횡 등의 제자백가 이야기에 자세히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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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의 난립기에 제자백가 사상이 등장하다

1. 제자 백가 사상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

제자 백가가 춘추전국시대에 등장하게 된 배경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 내용을 차분히 정리해 볼까요? 우선 당시 춘추전국시대가 어떤 사회였는지에 대하여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들이 모두 제자백가사상의 등장 배경입니다.

일단, 당시 농업혁명에 의해 발전된 농업경제는 새롭게 재산을 축적한 서민층의 성장이라는 것과 맥락이 닿습니다. 이 서민층들은 어느 정도의 재력을 가지고 전쟁에 참여하여 군공을 세운 경우가 많았는데, 이들이 <사> 계급에 새롭게 포함되기 시작합니다. <사>란 원래 귀족 주변의 사적인 종자 성격으로서 일종의 <가신 계급>으로 성장한 계급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점차 사회변화와 맞물려 성장하면서 지식인, 군사, 관료로 진출하게 됩니다. 이들은 지식을 배경으로 지배층에 포함되기를 원하였고, 그 대가로 군공을 세워 기존 제후층에게 만족감을 주었습니다. 실제 <사>라는 용어를 보면 무사계급인 사족으로 <국인>층에 포함된 하층무사라는 어원에서 출발한다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국가 체제에 맞는 입신출세를 원하였고, 군주를 보좌하면서 군주가 원하는 치국을 이루기 위해 헌신했던 신분상승의 욕구를 가진 계층입니다.

이러한 욕구와 맞물려 당시 사회에서는 봉건제도가 무너지고 도시국가들이 영토국가로 전환되는 과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군현제적 영토국가의 성립은 곧 사상과 지식, 학문적 논의가 국가단위에서 이루어지며, 전쟁을 통해여 그 지식의 범위가 확대됨을 뜻합니다. 따라서 봉건질서의 붕괴는 곧 사상의 자유와 지식의 보급이 일반 서민계급과 황하강의 중원을 넘어 양쯔강의 이남 지역인 오랑캐 지역까지 파급됨을 뜻합니다. 이것은 폭발적인 지식인 계급의 성장을 지원하는 사회적 요건이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당시 각국가들이 혼란기를 맞이하여 각자 <부국강병>을 위한 인재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다는 점입니다. 각 국의 군주들은 영토확장을 위해 인재를 우대하였고, 이것은 사상이 다양해지고, 다양한 학설이 각국에 전파되는 것을 장려하게 된 배경이 됩니다. 따라서 다양한 사상들은 각자 사학적인 학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다양한 사상들은 <사> 계층을 중심으로 고유한 사상체계로 <부국강병>의 근본적 방책을 제시하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학자를 우대하여 다양한 사상이 모여 토론하던 곳이 제나라에 <직하의 학사>입니다.

2. 제자백가의 성격

제자 백가는 일단 사학적 성격을 가진 소규모의 학단들로부터 출발합니다. 이 당시 군주들의 부국강병책은 다양한 군주윤리와 사회윤리를 제시하였고, 그 윤리들은 각각 창시자로부터 구전으로 전달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이유는 아직 종이가 발명되지 않아서 책이 부족했으며, 아직 한자라는 통합적인 글자 체계가 정립되지 않은 시기에 각 지역별로 문자체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학단의 교육이란 스승이 제자에게 설명하고, 질문하고, 암기시키는 <도제적인 지식전달과 질문법에 의한 사고력 향상>이 제자백가의 교육 방식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제자백가는 개인적 사상체계라기 보다 개인이 속한 <학단>의 사상체계로 정착된 듯 싶습니다. 물론, 그 학단내에서도 많은 분파가 있고, 분파마다 약간 다른 학설이 있기도 합니다.

제자 백가 사상은 <부국강병>을 위한 정치문제를 다루는 학문이 주를 이루다 보니, 그 학풍이 관료제적 국가 운영체제 및 입신양명을 위한 학문이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제자백가 사상은 지배층의 윤리와 지배층의 정치 방식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 제자백가의 논의가 있음으로서, 주나라 까지의 천명사상과 신정정치에 의한 미신적 정치관은 일단 탈피되었습니다. 그리고 인간과 사회의 문제가 신과 자연의 문제보다 선행된 문제로 인식되어 중국인 특유의 현실적 세계관의 기틀이 잡히게 됩니다. 또 지나치게 부국강병에 얽매인 철학 사상은 개인적 측면의 사상보다는 군현제적 체제에 부합된 국가윤리를 강조하게 됩니다. 중국에서는 춘추시대 이후 학문과 정치라는 것이 일원화 되어 <관료가 학자이고, 학자가 곧 관료>가 되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형이상학의 문제들도 현실 정치가들이 논하게 되고, 이상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등의 문제도 부국강병이나 치국에 맞는 변법적 측면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제자백가의 한계를 말하자면 국가주의적 윤리관을 추구함으로서 개인주의적인 인간행복의 가치를 공동체적인 규칙에 종속시켰다는 점을 일단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개인의 신앙을 추구하는 내세적이고, 열정적인 가치관은 이후 중국사회에서 잘 보이지 않네요.

제가백가는 중국의 철학이 사학적 성격의 철학으로 출발하여, 동양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유, 도, 음양, 겸애, 태극, 오행, 법치 등의 사상을 탄생시켰다는 것에 하나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한 사상들은 진나라에 의해 법가주의적으로, 한나라에 의해 유가주의적으로 일원화됨으로서 다양한 사상들이 획일화되어 음지에서 퍼졌다는 것이 아쉽기도 합니다.

3. 제자백가의 형성 지역

제자백가 중에서 유가 사상은 서주문화권에서 많이 퍼졌습니다. 공자 자체가 노나라 사람으로서 중화권이었고, 유가는 중화의 근원지인 진, 위, 제나라 등에서 유행했습니다.

반면 유가를 차별애라고 비판하면서 모든 사람이 평등한 겸애를 주장하였던 묵가사상은 중원을 벗어난 남방에서 유행하였습니다. 특히 춘추전국시대에 5패 7웅에 속하였던 남방의 최강국가 <초>에서 묵가사상이 가장 유행하였습니다. 유가와 묵가는 이념적인 대립 뿐 아니라 중원과 변방이라는 지역적인 대립도 심하였습니다.

도가는 원래 남방의 <초>에서 시작되었으나, 제나라 <직하의 학사>에 유입되면서 남북지역에서 고루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나, 도가의 무위자연이나 소국과민의 주장은 당시 <부국강병> 이념과 일치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도가의 이념은 현실적인 정치이념보다 이상적인 관념 수준으로 유행한 듯 합니다.

법가는 강력한 법치주의적 통치를 주장하는 내용 때문에 전국시대 각국에서 유행했습니다. 원래는 <한, 위, 조> 등 주왕실의 근거지인 국가들이 신봉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초, 제, 진 등 변방국가들에 전파되었고, 각국의 변법 추진의 사상적 기반이 됩니다.

그러나 초기에 이런 지역색을 가지고 있었던 각 제자백가 사상은 전국시대 중기를 지나면서 상호 융합되어 각 지역별로 사상들이 서로 경합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리고 결국 통일을 이룬 것은 진나라의 <법가주의적 부국강병책>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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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앙의 변법운동

1. 변법운동의 배경

변법운동의 배경은 15,16장에서 상세히 다루었습니다. 하지만, 상앙이 다른 나라보다 변법을 더 강력히 추진해야 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진나라가 서방의 오랑캐로 불릴 정도로 낙후된 국가라는 점이었죠. 진은 서방 끝에서 시작되어 중화문화에서 상당한 변방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진에게도 큰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중원의 치열한 전쟁에서 벗어난 지역이었다는 점과 위수분지를 중심으로 한 천연의 요새이자, 곡창지대였다는 점입니다. 상앙은 진의 잇점을 살리고, 진의 부국강병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구귀족과 구체제를 모두 없애 버리고, 진의 잇점을 실릴수 있는 효율적인 제민지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진이 외진 곳에 있다는 것은 다른 국가의 눈치와 강압을 피해 부국강병정책을 마음껏 펼칠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실제 진이 변법을 시도했을 때, 주변국의 침입은 거의 없었으며, 진의 전쟁은 진이 원할 때 원하는 국가와 동맹을 맺고 했다는 점도 특이합니다. 보통 진의 외교책을 먼 나라와 동맹을 맺고 가까운 나라부터 제압해가는 <원교근공책>이라고도 하죠.

2, 상앙의 1차 변법

상앙의 변법은 2차례에 걸쳐 각각 당면한 목적을 가지고 시행되었습니다. 상앙의 1차적 변법 목적은 종래 구귀족을 일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을 <귀족 공동체적인 성격을 가진 주나라 종법제도의 파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이 개혁은 말 그대로 주나라의 혈연의식에 기반한 종법원리를 철저히 부수어 모든 사회 조직을 재편하기 위함입니다. 일단 상앙은 각각의 호와 민들이 상호 감시하는 십오제와 연좌제, 그것을 위한 사전조사인 호적작성을 통해 씨족공동체적인 읍제질서를 철저히 파괴하고 구귀족의 특권을 없애버립니다. 귀족공동체적인 사회 조직인 국가 행정조직으로 재편되었습니다.

또 분가정책을 통하여 가족들을 다른 호로 분리시키는데, 이것은 더 많은 세금을 효율적으로 걷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농업생산력 극대화를 위해 철저한 중농정책을 펼침과 동시에 상업은 규제하는 억상정책을 시도합니다. 농업이란 가장 효율적인 생산수단이나, 상업이란 생산된 물품을 분배하는 것일 뿐 생산에 기여하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상앙의 변법에서 구귀족들이 가장 많이 반발한 것은 군공수작제입니다. 전쟁에 나가 공이 있는 자들에게 <작>을 내린다는 이 제도는, <작위>와 그에 따른 <예법>이란, 귀족에게만 있다는 주나라 제도의 근간을 통채로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평민들도 능력이 있으면 <예법>이 없어도 <작위>를 받게되는 것입니다.

3. 상앙의 2차 변법

상앙의 1차 변법이 기존 <종법제도 파괴>였다면, 2차 변법은 파괴되어 임자가 없는 모든 사회질서를 군주에게 돌리는 정책이었습니다. 정의를 내리자면 <군현제적 중앙집권체제 확립과 제민지배체제의 완벽한 확립을 통한 왕권의 신성화>가 그 목적이었죠.

단 분가정책은 더욱 강화됩니다. 아예, 부자지간, 형제지간에도 같은 집에 있지 못하도록 하여 분가된 호의 수를 늘리고, 세금원을 많이 확보합니다. 군공수작제도 더욱 확대합니다.

1차 변법과는 달리 2차 변법에서는 일정부분 상업도 인정합니다. 농업외에 상업에서 걷는 조세도 국가 수입원이 될 수 있다는 새로운 믿음으로, 도량형을 통일하고 국가가 무역을 규제하면서 이득을 얻는 정책을 실시합니다.

또 1차 변법으로 파괴된 씨족적 사회질서에는 군현제적 질서가 침투합니다. 군, 현에 따라 인두세와 호등세, 토지세를 부여하여 국가가 직접 인민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4. 상앙의 시대 휴경농법이 시작되었는가, 휴경농법이 사라졌는가의 논쟁

상앙의 변법에서 한가지 이슈가 되는 것은 휴한 농법의 문제입니다. 상군서의 제원전을 보면, 상앙이 <제원전>을 설치했다고 나옵니다. 문제는 원이 휴한농법을 상징하는 글자라고 할 때, 제라는 글자가 <제정>인가, <제거>인가의 논쟁이죠.

제를 제거라고 보면 휴한농법이 이 때부터 페지되어 연작상경을 했다는 뜻이 되는데, 당시 농업기술로 매년 농사를 짓는 연작상경은 조금 무리입니다. 비료도 없구... 제를 제정이라고 보면 이 당시부터 휴한농법이 시작된 것으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즉, 땅의 지력을 생각하여 서양 중세의 3포제 처럼 일정한 땅을 쉬게 해주었다는 뜻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다수설입니다.

또 하나의 논쟁은 천맥을 열었다라는 뜻의 <개천맥>이라는 단어입니다. 천맥을 정전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때, 여기서 개를 <열다>로 해석하면 이 때부터 <정전제>가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면 서주부터 시작된 정전제를 다시 부활한다는 것이 상앙의 변법이념과는 조금 안 맞는 듯 합니다. 개를 <파괴하다>로 해석하면, 정전제를 파괴하고 토지 사유제가 시작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상앙의 변법 내용으로 보았을 때 후자가 다수설입니다.

5. 상앙 변법의 성공원인

상앙 변법의 성공원인 중 가장 큰 것은 법가주의적인 상앙의 무대포 개혁을 왕이 적극지지했다는 점입니다. 상앙의 변법은 왕이 살아있는 한 누구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 변법이 가장 철저한 법가주의적으로 시행되어 반대파의 주장을 묵살하고, 구귀족을 철저히 제거했다는 점입니다. 이것으로 진나라는 어느 나라 못지 않은 강국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그 결과 춘추전국시대를 통일하는 나라로 역사에 이름이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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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전국시대의 변법운동 1(변법운동의 이유)

1. 변법운동이 필요한 이유

춘추전국시대에 변법이 필요했던 이유는 중국사 15장에서 설명했던 내용들이 전부 다입니다. 즉, 춘추시대 중기 이후 이제 각 국가는 기존의 씨족공동체와 봉건제도를 완전히 해체하여 새로운 시대를 열고 왕권을 강화해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옛 전통과 씨족적 관습, 봉건제적 혈연성을 모두 버리고, 반발하는 구귀족들을 처리해야 했습니다. 또한 날로 넓어지는 새로운 영토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새로운 관료제와 새로운 관리들이 필요했습니다. 또, 군현제를 확대하여 영역국가를 효율적으로 통치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방법을 가장 효율적으로 시행하기 위한 것은 엄격한 법을 적용하여 구 세력을 모두 죽이고, 법가주의적 중잉집권과 모든 인, 민에 대한 제민지배체제를 확립하는 것이었죠. 변법의 가장 핵심적인 목적은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모든 백성과 모든 토지를 국가가 지배하고 세금을 걷는다는 <제민지배체제>의 실현입니다. 이것은 봉건제도 속에서 존재하는 구귀족의 지배방식을 중앙집권적 국가 지배 방식으로 바꾸어 영토와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한 국왕의 노력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2. 변법을 실시하였던 각국의 재상들

위나라의 이회는 상당히 유명한 변법가였습니다. 그는 구귀족의 모든 봉록을 몰수한 다음에 구귀족 역시 능력에 따라 관직에 임명한다는 파격적인 변법을 실시합니다. 또 농업생산력을 증가시키기 위해 진토력을 시행하였고, 물가안정책으로 평조법을 실시하였습니다. 위의 서문표는 이러한 정책의 영향으로 대규모 관개사업을 하기도 합니다.

초나라의 오기는 군주권을 강화하고 귀족세력을 누르기 위해 봉토된 귀족은 <3대>에만 한하며, 그 이후의 특권은 없다는 것을 법제화하였습니다. 왕의 친척이라 하여도 세습의 특권은 없게 하였습니다. 왕권에 위협을 주는 귀족들은 <강변정책>을 실시하여 강제로 변방에 이주시켜 버립니다.

이 외에도 초의 공중운, 한의 신불해, 제의 추기 등은 유명한 변법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변법하면 떠오르는 유명한 사나이는 뭐니뭐니 해도, 통일국가 진의 기틀을 마련한 <상앙>입니다. 상앙의 변법은 파트를 나누어 다음 장에서 상세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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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시대의 특징과 칭왕현상

1. 전국시대의 시작

전국시대가 시작된 배경은 춘추 전국시기 이후 출현한 군현제적 중앙국가체제의 등장과 연관됩니다. 14장에서 말했듯, 춘추 전국시대 중기에는 남방과 북방의 치열한 패자 다툼이 있었고, 이 시기에는 중화사상에 입각한 강력한 통일국가가 필요했습니다. 각 국가들은 주왕실을 대신하여 자신들이 약소국을 멸망시켜 중원의 주인으로서 활약하려 하였고, 이것은 곧 군현제도의 가속화를 가져왔습니다.

전국시대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서 춘추시대 북방의 패자였던 <진>나라의 가신인 한, 위, 조가 하극상으로 각각 독립국을 세운 것을 기점으로 합니다. 이것은 가신계급인 경, 대부의 성씨집단들이 제후집단에 반란을 일으켠 것을 말하며, 이제 주왕실과 제후라는 봉건질서의 주체들 외에 경, 대부라는 국인층들도 건국 주체로 성장한 것을 상징합니다.

이제 주왕실을 지킨다는 존왕양이는 사라졌고, 주왕실의 국인으로서 같은 하늘의 백성이라는 의식인 <예>는 필요없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강력한 영토에서 자신을 지켜줄 강력한 군주가 필요한 시기가 되었고, 군주는 자신을 보필한 현명한 인재와 강한 군대가 필요했습니다.

즉, 광대한 영역 국가에서 국왕인 인, 민을 직접 지배해야 했고,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에 거대한 관료지배체제가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반맹을 거듭하는 회맹질서는 필요없게 되었고, 국왕은 가부장권을 가진 모든 지배층(인)과 피지배층(민)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지방은 왕이 직접 다스리게 되었 거대한 군, 현 제도가 등장하였습니다. 즉, 전국시대의 시작을 기점으로 봉건제적인 씨족제는 사라지고, 봉건제적인 혈연관계는 타도된 것입니다.

2, 전국시대의 왕들은 군현제를 실시하기 시작한다.

군현제는 말 그대로, 왕이 지배하는 전국을 군, 현으로 나누어 왕이 파견한 신하에 의해 전국을 직접 지배하는 제도를 말합니다. 이 군현제는 현 - 군 - 향의 3층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현이란, 대국이 소급을 병합한 경우, 국가단위의 땅을 행정구역으로 개편한 행정구역입니다. 군은 변방지역이나, 작은 읍을 점령한 경우 설치한 작은 행정구역을 말합니다. 그런데, 전국시대의 현이 너무 큰 경우 몇 개로 쪼개어 다수의 군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향이란, 현 아래 설치된 행정구역인데, 씨족 공동체적 유제가 남아있는 씨족 마을을 말합니다. 현은 차춤 군에 흡수되어 소멸되어 가지만, <향>이라는 용어는 역사적으로 오랜 시간 동안 작은 공동체 마을을 지칭하는 말로 쓰입니다.

3. 칭왕 현상의 시작과 관제 개편

전국시대의 왕들은 이제 패자가 아닙니다. 이들은 주왕실을 모신다는 개념의 패자, 제후, 국군, 작이라는 칭호를 완전히 버립니다. 그들은 스스로 왕을 칭하는데, 이 시기는 각 국이 씨족적 기반을 버리고, 구귀족을 죽이며, 새로운 사회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실시한 변법의 실시 시기와 거의 일치합니다. 이제 왕은 누군가에게 존속된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가 하늘의 자손으로서 천하를 통일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라고 하는 이데올로기를 국가사회에 제시하면서 자신의 권위를 신성화하기 시작합니다.

각 국의 왕은 이제 지방의 군현제 정비와 함께 중앙 관제를 정비하고 변법을 시도합니다. 중앙 관제의 개편 목적은 종래 세습귀족과 다른 새로운 관료들이 새로운 관직에 필요했기 때문이며, 그 특징은 보다 전문적인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관직의 세분화였습니다. 그리고 내용은 행정권 - 군사권 - 지방권을 분리시키는 일이었으며, 이 분리된 권한은 각각 왕에게 귀속됨으로서 모든 국가의 총괄책임을 왕에게 부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즉, 종래 세습귀족들은 이제 왕에게 반항할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세습귀족들의 모든 특권을 왕에게 돌려 왕이 직접 모든 백성을 다스리는 체제를 <제민지배체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제민지배체제를 완성하기 위하여 사회 제도를 씨족적 질서에서 중앙집권질서로 통채로 바꾸는 것을 <변법>이라고 합니다.

그럼 새로운 제도를 살펴볼까요?

왕권 밑에서 행정을 총괄하고 재상으로서 활약하는 최고 전문직 관리를 <승상>이라고 칭합니다. 그러나 승상은 백관을 감시하여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할 뿐 독자적으로 가진 권한은 별로 없습니다. 감찰은 <어사>가, 토지는 <사도>가, 재정은 <소부>라는 부서가 담당했습니다.

또 효율적인 영토확장을 위해 징병제를 실시했지만, 이러한 군사제도 역시 문, 무 관리들을 분할하여 각각의 임무를 따로 두었습니다. 특히 장군 아래 <위>라는 호위대장을 두었는데, 이 위가 진시황의 통일 후 <태위>가 되어 군사권을 총괄하는 총수개념이 됩니다.

지방 제도도 확실히 분할합니다. 군의 태수는 <군수>, 현의 태수는 <현승>, 향리는 자치적인 토착세력, 지방 군사는 <위>에게 각각 분담하는 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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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시대 - 춘추5패와 회맹적 국제질서란?

1. 회맹적 국제질서란?

희맹적 국제 질서란 춘추시대 초기에 나타는 <패자>를 중심으로 한 연합 질서를 말합니다. 이것은 형식상 주왕실을 받는다는 명문을 가진 패자가 힘이 없는 주 왕실을 대신하여 오랑캐를 무찌르고 <중화질서>를 지킨다는 이념을 바탕으로 성립한 질서입니다. 춘추초기의 과도기적 사회에서 보이는 특이한 질서이지요.

이 질서는 당시에도 존재했던 원시적인 주술관과 봉건제도의 혈연성을 벗어나지 못한 제도입니다. 즉, 주왕실에게 봉토를 받았던 하늘의 후예들이 연대하여 공동의 중화 질서를 지키고, 동일 조상신을 통해 같은 핏줄임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이민족을 무찌를 수 있는 강한 패자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논리에서 나온 것이니까요. 이렇게 주 왕을 받들어 오랑캐를 무찌른다는 사상을 <존왕양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당시 춘추시대 초기 패자들은 소국을 병합하면서도 소국의 <종묘사직>은 보호하고 지켜주었습니다. 병합하되, 점령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패자들의 원칙이었지요. 따라서 이 시기 국가병합의 가장 큰 특징은 주왕실과 그와 관련된 씨족질서는 계속 유지하면서 대국이 소국을 병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소국의 지배층은 완전히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대국과 결맹을 맺어 대국에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회맹>이라고 합니다. 회맹은 맹주에 대하여 소국들이 병력을 <부세>로서 제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패자가 점령한 소국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할 경우 소국은 요구조건을 들어주지 않고 오히려 패자에게 저항하는 <반맹>현상도 많았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대국이 소국을 병합하면서도 소국의 인정을 받고, 소국은 대국으로부터 살아남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며 등장한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외교가가 바로 <자산>입니다.

2. 춘추 5패의 등장

춘추 5패는 이러한 회맹적 질서를 보이며 등장한 춘추시대 5명의 패자를 말합니다. 춘추 5패는 제, 진, 초, 오, 월을 말합니다. 원래 초기의 패자는 중원지역인 황하유역의 제, 진 나라 등이 영토전쟁을 하면서 패자로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후기에는 철기를 통한 양자강 유역의 개발이 활발해지면서 초, 오, 월 등의 남방국가들이 패자로 등장합니다. 초기의 중원국가들은 남방국가들은 오랑캐로 생각하여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들이 춘추 5패로서 중원에 영향력을 끼치자 후기에는 이들도 같은 중화민족으로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춘추 시대 후기에는 북방의 진과 남방의 초가 대립하면서 남북적 대립현상이 보입니다. 어떻게 본면 춘추 5패의 판도는 제, 진의 북방 중화질서 유지와 초, 오, 월 등 남방국가의 중화 진출 시대의 한 판 장이라고도 보여집니다.

3. 춘추 중기 이후의 멸국치현 현상

춘추 시대 중기 이후 남방과 북방의 대립이 심해지고, 각국의 부국강병이 절실한 시기가 오자 이제 <중화>라는 개념으로 싸우기보다 <남북간 대립>이라는 관점에서 춘추시대가 전개됩니다. 이 때는 주왕실을 받들어 소국의 종묘사직을 인정한다는 명분은 점차 희석되고, 소국을 멸망시켜 자국의 행정구역인 <현>으로 만든 뒤 세금을 부여하는 <멸국치현>현상이 발생합니다.

국가를 멸망시키고, 현을 성립시킨다는 <멸국치현>은 지배자를 제가하고 소국의 종묘사직을 파괴하였습니다. 각 국은 국력 강화를 위해 군대를 모아야 했고,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이제 패자는 절대적인 가부장적 군주로 변신하게 되고, 각 국은 <변법>을 통해 새로운 시대에 맞는 법과 이념을 정비하기 시작합니다. 이 춘추 중기의 현상은 곧 <읍제국가>수준의 지배형태를 <군현제적 중앙집권국가>로 변환시키는 것이었고, 결국 약육강식의 전국시대로 나가는 과도기적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춘추 5패가 서로 항쟁하는 부분의 고사들(와신상담 등)은 따로 정리하여 사료방에 넣어두겠습니다.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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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 전국 시대는 중국의 발전기였다!

1. 춘추 전국시대를 고깝게 보는 유교주의자들

전통적인 중국역사에서 춘추 전국시대는 부정적인 시대였습니다. 이것은 유교적 역사관이 기여한 바가 큰 것이었죠. 공자가 태어난 이 시기는 정말 공자 입장에서는 암흑기였습니다. 전쟁과 살육이 많았던 시기였기 때문이죠. 윤리에 기초한 사회확립을 주장한 공자의 입장에서는 요, 순 시대의 태평과 선양의 아름다움, 주나라의 봉건제도, 종법제도, 정전제도의 완벽함에 끌렸을 것입니다. 공자는 <춘추>라는 책에서 당시 시대를 암흑기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공자를 숭배하는 수많은 전통 유교사학자들도 춘추전국시대는 암흑기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과연 유교적 입장에서의 암흑기라는 말을 맞을까요? 역사는 항상 새로운 시대를 추구합니다. 새로운 시대로 나가기 위해서는 진통이 필요하죠. 그것이 발전이든, 혁명이든, 쿠테다든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시대는 과도기를 겪게 됩니다. 서구 사회의 발전은 시민혁명이었고, 한국사회의 발전도 수많은 시민들의 항쟁과 산업화, 독재와 민주화의 열망이라는 얽힌 실타래를 풀면서 지금까지 온 것입니다.

춘추 전국시대는 절대 암흑기가 아닙니다. 실제 중국사회에서 가장 발전한 황금기 중의 하나로, 본격적인 철기 시대가 도래하면서 철기시대에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들이 중국사회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2.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나타는 사회 변화는 발전이었다.

춘추전국시대는 본격적인 철기시대입니다. 철기시대의 특징은 철제 무기와 철제 농기구의 사용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철제 무기는 정복 전쟁의 확대를 가져왔고, 철제 농기구는 농업혁명을 초래할 정도로 생산량의 증대를 가져옵니다. 따라서 봉건제도에 입각한 주대의 사회질서가 이 시대에 통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된 것입니다. 생산력의 발달은 각 지방 제후들의 영토확장 욕심을 부추기는 것이었고, 강력한 무기는 그것을 뒷받침합니다.

또, 당시 견융족의 침입으로 주가 낙양의 동주로 이동하면서, 제후들은 더 이상 주나라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주나라는 그냥 종가로서 받들기만 하면 딀 뿐, 제후들은 상호 영토확장을 위한 정복전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복전에서는 많은 수의 병사가 필요한 관계로 종래 전투 양상도 전차전에서 보병전으로 바뀌게 됩니다. 수많은 보병 농민의 전쟁 활약이 중요시 되는 것이지요. 이 보병전에서 크게 활약한 것이 새롭게 지배층에 합류한 <사>계층입니다. 이들은 종래 귀족인 기병부대인 <대부>계층과 함께 전투에 적극 참여하여 말단 지배층으로 확고히 자리잡습니다.

이제 종법제도는 희식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주왕실은 무능력해졌습니다. 그나마 존왕양이 사상을 바탕으로 주왕실을 형식적으로나마지지했던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가 오면, 약육강식의 패자전으로 바뀌어 주왕실은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됩니다. 주왕실이 하는 일은 이제 정치, 군사적 업무가 아니라, 혈연관계에 있는 각 국을 위한 제사의식을 치루어 주는 것에 한정되죠.

3. 중국사회의 기본틀이 마련되다.

정치적인 측면

춘추전국시대는 여사적으로 <중국사회의 기본틀이 완성>되는 시기입니다. 이것은 봉건질서와 대읍-족읍-소읍으로 구성된 읍제국가체제를 근본적으로 탈피해 군, 현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국가로 나가는 시기로 정의내릴 수 있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각 발전 양상을 살펴볼까요?

정치적인 측면에서 춘추전국시대는 주대 봉건질서가 점처 중앙집권적 군현제, 관료제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입니다. 주왕실은 낙양근처의 직할지만 차지할 뿐 아무 힘도 없었고, 각 국의 제후들은 스스로 왕을 칭하면서 <멸국치현>을 주장합니다. 멸국치현이란 제후들이 가진 국가를 부수고, 그것에 자신 국가의 행정구역인 군, 현을 설치한다는 뜻입니다. 이로서 봉건국가체제는 막을 내리고 중앙집권국가시기로 사회가 발전하게 됩니다. 이것은 대부분 국가들이 취하는 보편적 발전과정과 상통합니다.

또,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면서 가부장적인 군신관계로 전환됩니다. 주왕실처럼 군주가 영토를 분봉하여 독립된 제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군현을 설치함으로서 가신들을 철저하게 군주 밑에서 통제하게 되는 것이지요.

영역면에서는 읍제국가 단계인 도시국가가 전쟁 중 서로 병합되는 과정을 거쳐 영토국가로 발전합니다. 영토국가는 자신의 영토에 군현을 설치하고, 철기를 통한 확장사업을 계속 추진하는데 이 시기에 중국 영토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북의 라오허강 - 남의 양쯔강 이남의 영역이 확정되어 영토 확장이 가속되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사회적인 측면

사회적인 면을 볼까요? 이 당시 중국사회에서 가장 큰 사회적 사건은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의 <화>개념이 완성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각 국들이 통합되고, 그들이 뭉쳐 이민족을 몰아낸다는 공통의 개념이 확립되어 민족구성이 단일화 되었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민족과 문화가 동일하며, 중화는 다른 오랑캐와는 다른 우월성을 가졌다는 선민의식이 시작된 것이지요. 이 선민의식은 이후 중국 역사 2000년을 지배하는 중국인의 의식으로서 1000년간의 중화국가와 1000년간의 이민족 침입국가기간을 통해 더욱 더 견고하게 자리잡게 되는 중원의 원칙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철기시대의 영토확장 과정에서 사계층이 성장했다는 점입니다. <사>계층은 전쟁능력, 국정수행능력을 중시하는 혼란기에 부각되어 서민들이 지배층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특히, 각국은 부국강병을 위해 많은 제자백가들을 양성하였습니다. 즉, 사계층의 성장은 평민층의 성장과도 관련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시대에 팔랑크스나 호민관계급으로 성장한 평민계급 아시죠?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경제적인 측면

다음으로 경제적인 면을 보면, 토지 소유자의 변화가 눈에 띄는 시기입니다. 특히 철기 사용을 통하여 개간사업이 활발하였고, 사계층이 성장하면서 평민들의 토지 소유 증대와 농업생산력이 확대되었습니다. 이로서 토지를 가진 자영농민층의 성장은 곧, 국왕에게 많은 세금을 가져다 주었고, 이것은 국왕이 중앙집권을 이루고, 관료제와 상비군을 마련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또한 철제농기구와 우경의 확대로 경작지가 확대되자 양자강 이남의 개발도 시작되었습니다. 중국 문명이 황하에서 시작된 이유는 황하 유역은 석기로도 개발이 가능한 황토지대(황토 강가=황하)였지만, 양자강 유역은 철기가 아니면 개발이 불가능한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양자강의 개발은 중국이 남, 북부를 모두 농경지로 흡수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비옥하고 따뜻한 남부지역은 이후 중국 농업의 중심지가 됩니다.

또, 이러한 생산력 발전은 철로 만든 화폐가 등장하는 배경을 마련하니다. 당시 청동화폐와 명도전은 고조선과 삼한사회에도 전파된 유명한 물물 교환 수단이었습니다. 이것은 정기시장을 발달시켜 상업의 발달도 초래합니다.

당시에는 이러한 생산력 발전으로 <토지 사유화>가 진행되는데, 이 토지 사유화 현상은 공동경영을 상징하는 토지 점유에서, 토지의 분할점유로, 나중에는 개인적인 토지 사유로 확대 진행됩니다. 이 토지 사유를 극대화하여 지배층으로 성장하는 계급이 바로 한나라 시대의 <호족>입니다. 따라서 역사적인 용어로 사용할 때, <호족>이라는 용어는 지방색과 함께 토지소유자라는 부분이 꼭 따라다닙니다.

4. 춘추 전국시대의 역사적 의의

결국 이 짧은 글에서 주장하는 것은 춘추 전국시대가 절대 암흑기가 아닌 발전된 철기 문화 시기였다는 점입니다. 주대 봉건적 질서와 읍제국가체제가 무너지면서, 근본적인 사회 변화가 시작되었고 이것은 철기 사용으로 말미암아 역사적을 보편적 진행방향인 <중앙집권적 영토국가>시대로 나가게 됩니다. 그 역사적 사명을 이행한 것이 법가주의적 통치질서를 확립한 <진>나라의 통일입니다.

자, 그럼 이만 개관하고 춘추 전국시대의 이야기를 하나 하나 풀어볼까요? 혼란한 이 시대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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