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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사치 사화를 통해 본 한군현의 정책

1. 염사치 사화의 내용

왕망 때에 이르러 염사치가 진한의 우거수가 되었다. 그는 낙랑 땅이 토지가 아름답고 백성들이 부유하게 산다는 말을 듣고, 자기 나라에서 도망해 나와서 그곳에 항복하려고 자기 사는 부락을 나왔다. 이 때 그는 밭 가운데서 참새를 쫓는 남자 한 사람을 보았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말을 들으니 한나라 사람이 아니다.

염사치가 그 까닭을 묻자 그 남자는 말하기를, [우리들은 한나라 사람인데 내 이름은 호래요. 우리들 천오백 명이 나무를 베려고 나왔다가 한나라 사람들에게 붙들려서 모두 머리를 깎고 종이 되어 지금 삼년이 되었읍니다] 한다.

염사치는 묻기를, [그렇다면 나는 지금 한나라 낙랑에 항복하러 가는 길인데 그대들도 같이 가겠는가] 하니 그들은 모두 가겠다고 한다.

이에 염사치는 호래 등을 데리고 함자현에 나가 그 사연을 말하니 현에서는 군으로 가라고 한다. 군에서는 즉시 염사치로 통역을 삼아 잠중으로 해서 큰 배를 타고 진한으로 들어가서 전에 호래와 함께 항복한 자들을 빼앗아 일천 명은 데리고 왔으나, 그 중의 오백 명은 이미 죽어서 하는 수 없었다.

이에 염사치는 진한에게 타이르기를, [너희는 오백 명을 돌려 보내라.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낙랑에서 군사 만 명을 보내서 배를 타고 가서 너희를 치리라] 했다.

 진한에서는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오백 명은 이미 죽었으니 보낼 수가 없고 그 대신 딴 것으로 갚으리다] 하고, 진한 사람 일만오천 명과 변한에서 나는 포목 일만오천 필을 보내 왔다.

염사치는 이것을 받아 가지고 돌아오니 군에서는 염사치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하여 관책과 토지와 집을 하사했다. 그리고 그의 자손은 여러 대를 내려오다가 안제의 연광 사년 때에 이르러 모두 복제를 받았다.

2. 고조선 멸망 후 한군현의 설치

한군현은 낙랑, 진번, 임둔, 현도 등으로 구성된 중국 한나라의 한4군을 말합니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한이 설치한 이 한사군은 그 위치에 있어서도 논쟁점이 많습니다.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 학자들은 한사군이 압록강 너머에 있다고 주장하였지만, 싫증주의 학자들의 일반 학설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내에 한사군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한사군은 중심은 <낙랑군>이었습니다. 한나라는 이 낙랑을 중심으로 주변 현토군, 진번 및 임둔군을 두어 고조선의 옛 땅의 유민들을 관리, 감독하였습니다. 하지만, 중국계 지배계급은 고조선인들을 상당히 차별하였고, 따라서 한사군은 토착민과 유리된 지배체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고조선의 옛 땅에 설치했음에도 한나라와의 연락만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을 뿐, 유민들을 끌어안지 못한 것이죠. 이것이 한사군의 가장 큰 한계점입니다. 또 기존 씨족공동체 조직을 해체할 수도 없어서 고조선의 옛 유민들을 <읍락단위로 집단 복속>한 뒤 <읍락단위>로 지배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동예의 <책화>, <족외혼>등에서도 보이듯 당시 사회가 공동체적 사회질서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무력으로 해체하기에는 너무 무리수가 많았기 때문이죠. 따라서 한군현은 직접 동이족을 다스리기 보다는 각 동이 부족의 <거수, 읍군, 삼로> 등의 지배자를 통해 각 마을을 통제하는 간접 지배방식을 택합니다.

이 간접지배체제 속에서 한군현의 사회문화적 문물이 각 지배집단의 <지배층>을 통해 한반도 각지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군현은 그 지배의 목적이 <상거래를 통한 막대한 이득>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료를 보면, 상당히 많은 공물을 원하고, 그 공물 내용에 따라 조공과 책봉 형식의 무역을 하였음이 보입니다. 또, 이러한 무역체계 속에서 사무역과 밀무역도 상당히 성행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중국문물이 예맥한족의 사회에 무제한 침투되어, 법령이 증가하고, 사회구조가 복잡하게 변해갑니다.

3. 왕망의 신 정권 : 중국식 조공, 책봉의 완성 단계

중국에서 한이 망하고 왕망 정권이 들어서면서 한은 중국식 조공 - 책봉 관계를 실질적으로 완성하였습니다. 왕망은 지나칠 정도의 유교윤리를 통하여 주변국을 봉건질서로서 다스리려고 하였습니다. 스스로 천자라고 부르며, 주변국은 제후국의 취급을 하였던 것이죠. 따라서 주변국들은 천자국에 진상, 공조, 공납을 해야 했고, 그 공납 내용과 국가 규모에 따라서 왕망이 신하로서 주변국을 <책봉>하고 의책을 내려줍니다.

특히, 이러한 의책을 내려주어 집과 관직을 주는 제도는 주변 소국 지배집단들이 한나라에 <충성>하게 만드는 교모한 중국식 지배 체제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한나라의 정책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염사치 사화>입니다.

염사치 사화는 중국 입장에서는 <조공-책봉의 중화질서>를 보여주는 사료이지만, 우리측 입장에서는 <중국의 민족분열정책>에 넘어간 삼한 사회를 보여주는 사료로서 대조됩니다.

실제 이러한 분열정책에 고구려는 책구루를 쌓고 조복과 의책을 거부함으로서 반중국적인 정권으로 남지만, 부여와 삼한은 왕망정권의 조공-책봉 정책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 우호적인 관계로 남습니다. 위 사료를 보면 진한의 우거수인 염사치는 결국 포상을 받게 되지요. (고구려 책구루에 대한 자료는 '구루'라는 검색어로 사이트내 다양한 검색이 가능합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1. 이 글에 대한 관련 사료는 이 사이트 검색창에서 자유롭게 검색가능합니다.(관련 검색어로 검색하세요)
   2. 이 글은 자유롭게 가져가 사용하실 수 있으나, 꼭 가져가실 때에는 꼭 댓글을 남겨주시기 바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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