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트교'와 관련있는 히스토리아의 글 목록19건

  1. 2011.05.18 돈을 받고 똥을 팔아야했던 일본의 선교사들 (1)
  2. 2010.07.09 가로세로 역사 퀴즈 17회 : 그리스 로마 퀴즈
  3. 2009.09.13 아우구스티누스(1) : 마니교를 믿었던 기독교의 성자 (4)
  4. 2009.08.14 배교자 율리아누스 : 전통신 지키기 프로젝트 (7)
  5. 2009.08.13 콘스탄티누스의 예수 꾸미기 프로젝트 (5)
  6. 2009.01.07 수능 세계사 정리 16 : 유럽사 7 / 크리스트교의 전개1(로마제국~프랑크 왕국) (6)
  7. 2008.11.10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기독교 편> - 7화. 그노시스와 투쟁을 벌인 바울, 그리고 초기 교부의 역사 (3)
  8. 2008.11.08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기독교 편> - 6화. 전통종교와 철학이 살해당하다 - 율리아누스와 히파티아 (2)
  9. 2008.11.04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기독교 편> - 4화. 로마의 크리스트교가 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이유는? (1)
  10. 2008.11.02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기독교 편> - 2화. 크리스트교의 기원 : 유대교 (2)
  11. 2007.12.12 로마사 이야기 12회 - 로마 크리스트교와 이단파의 문제 2부 (6)
  12. 2007.10.21 (근현대사 20) 독립협회 이야기 - 본문(카툰수정) (12)
  13. 2007.10.21 일본사 이야기 20 - 에도막부의 재정과 조세개혁 (1)
  14. 2007.07.23 한토막 역사 2화. 3개의 짧은 이야기(흥선대원군도 증기선을 만들었다 등) (2)
  15. 2007.06.03 불교이야기 1-7장. 수나라에서 중국식 불교의 기반이 시작되다 (1)
  16. 2007.02.18 로마사 이야기 11 - 로마 크리스트교의 성립과정과 발전과정 1번째... (6)
  17. 2007.02.16 로마사 이야기 9 - 서로마 멸망의 원인을 생각해보자! (5)
  18. 2007.02.10 헬레니즘 이야기 2편 - 헬레니즘 시대의 사회와 문화 알아보기 (5)
  19. 2007.01.26 오리엔트 문명의 탄생과 역사전개 - 헤브라이, 이스라엘, 페니키아 편 (1)

돈을 받고 똥을 팔아야했던 선교사들

NO. 007

일본에서는 돈을 주고 받으면서 똥을 팔았다.

*** 배경 : 일본 전국시대(오다 노부나가의 전국 전쟁기)  ***

일본에서 크리스트교가 공인된 최초의 시대는 어느 시대일까? 정답은 일본 전국시대인 <오다 노부나가>의 시대랍니다.

당시 서양에서는 카톨릭을 수호하고 루터교를 견재하기 위해 예수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답니다. 그 창시자 중 한명이 바로 프란시스코 샤비에르라는 인물이었죠. 예수회는 유럽에서 루터나 칼뱅 등 개신교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막고, 전 세계에 카톨릭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해 선교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답니다.

샤비에르는 로욜라 등과 함께 예수회를 창시한 인물이면서도 직접 인도에 진출해서 포교활동을 하다가 일본 포교까지 시작한 헌신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점차 세월이 흐르면서 일본에서는 신도가 급증하였답니다. 그리고 일본의 규수 지역은 크리스찬 지역과의 무역을 위해 아예 크리스찬 영주가 탄생하기도 했죠.

일본의 혼란한 전국시대.... 도요토미 히데요시나 도쿠가와 이에야스 같은 인물들을 이끌던 명장 <노부나가>는 크리스트교를 적극 후원하기로 맘을 먹었답니다. 그 이유는 당시 대항해 시대를 이끌던 에스파냐, 포르투갈의 화포술을 적극 도입하려는 의도가 있었죠. 또, 전통적인 불교세력이나 토착종교세력을 억압해서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서 새로운 이념의 종교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노부나가의 전국시대에 이르자 크리스트교는 막부의 지원으로 교토와 같은 대도시에 큰 교회를 세우고 교세를 자랑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청빈한 생활을 하던 선교사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바로, 변소에서 똥을 퍼내는 사람들이 돈을 받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맙다고 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바로 전국시대의 <토지정책> 때문이었답니다. 영주들은 수많은 강적들이 존재하는 전국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엄청난 토지개간작업을 했답니다. 심지어 산을 허물어서 논과 밭을 만들 정도였죠. 일본은 섬나라이다 보니 원래 평야갸 매우 적습니다. 국가세금을 확보하기 위해 식량 생산을 늘리는 것은 전쟁으로 평야를 불태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죠.

그런데 논밭을 늘리다보니 더 심각한 문제가 생겼답니다. 산을 평야로 바꾸다보니 풀과 나무가 부족해서 비료로 쓸 것들이 없어진 거에요.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비료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답니다. 그러다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사람의 똥, 즉 인분이었던 거죠.

인분은 옛날부터 훌륭한 비료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건 자연적인 것이었지 전국시대처럼 <인분>이 거금에 거래될 정도는 아니였죠.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영토에 <공중변소>라는 걸 만들기 시작합니다. 특히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상점과 공공장소, 대로변은 권리금을 내고 공중변소를 만들기도 했죠. 어떤 이들은 변소사업으로 투잡생활을 하기도 합니다.

자... 교회를 만들어 선교를 해야했던 선교사들도 이것을 이용할 수 있었겠죠? 교회에 만든 공중변소는 교회 텃밭에 뿌리는 비료도 될 수 있고, 팔아서 교회 자금으로 쓸 수도 있었겠죠. 신도들이 교회의 공중변소를 오가는 건 신성한 일이었답니다.

그러나, 가까이에 공중변소가 많으면 설교할 때 얼마나 힘들까요? 일본사는 <똥 냄새 때문에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신앙심으로도 참기 힘들었다>라고 말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똥의 거래 가격이 달랐답니다. 부자의 똥은 기름진 음식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똥보다 비싼 것이었다고 해요.

그러나, 이런 특이한 역사를 경험한 카톨릭 선교사들의 일본 체류는 길지 않았답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크리스찬 신도가 늘고, 각 영지에 교회의 입김이 세지는 것을 우려해서 선교사 추방령을 내립니다. 하지만 서양 및 동남아와의 무역 때문에 적극적인 추방정책을 펴지는 못했죠.

이후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신교국가인 네덜란드와 손을 잡으면서 카톨릭 선교사들을 추방했답니다. 이들을 추방하기 위해 수만명의 농민과 전쟁까지 한 도쿠가와 정권의 혹독한 탄압으로 카톨릭은 일본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신도들은 300년간 어둠 속에서 신앙을 지켜가게 된답니다. 훗날, 메이지 유신 때 일본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공인하자 자신이 카톨릭 신자였다고 밝힌 숫자가 많았다는 사실에서 한번 뿌리내린 종교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알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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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크로스 퀴즈(난이도 :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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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퍼즐

  1. 기원전 3세기, 로마 평민회의 결의가 원로원의 승인 없이도 법으로 효력을 지닌다는 것을 내용으로 한 법.
  2. 기원전 4세기 그리스를 정복한 나라. 필립포스 왕이 이룬 업적을 바탕으로, 훗날 알락산드로스가 대 제국을 건설한다.
  3. 마테오 리치가 한자로 쓴 천주교 교리책
  4. 고대 로마 공화정에서, 집정관 2명중 1명은 평민에서 선출한다는 법
  5. 알렉산드로스 왕이 대제국을 건설하면서 중간 거점으로 만든 72개의 도시를 칭하는 말. 그리스의 문화를 동방에 보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6. 에게 해 *** 섬에서 성립한 청동기 문명. 자유롭고 생기있는 해양 문화가 발달했으며, 크노소스 궁전이 유명하다.
  7. 옥타비아누스가 황제가 아닌 제 1의 시민이라는 뜻으로 칭했던 칭호. 공화정과 제정의 중간적인 상태를 대변하는 칭호이다.
  8. 헬레니즘 시대의 자연과학자. 기하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알렉산드리아에서 활약하였다. 수학사에서 **** 기하학이라고 불리는 <원론>을 저술하여, 기하학의 원리들을 연역적으로 정리하였다.
  9.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죽은 사람
  10. 로마는 늦대젖을 먹고자란 ****와 레무스가 건국하였다.
  11. 그리스와 같은 문화라는 뜻으로, 헤브라이즘과 함께 유럽 문화의 원류가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동서융합정책과 관련있는 용어이다.
  12. 기원전 8세기 라틴인들이 테베레 강변에 건국한 나라. 훗날 서양 고대를 상징하는 대제국이 된다.
  13. 발해는 고구려인과 **인들이 모여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14. 페르시아 전쟁사의 저자. 역사학의 아버지.
  15. 원래 비잔티움이였지만, 콘스탄티누스가 천도하면서 동로마의 수도가 되었던?도시.
  16. 3세기, 제정 로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최고가격제 도입, 행정구역 재편, 화폐제 정비를 했던 황제
  17. 해상을 이용하고 장악할 수 있는 능력. 고대 국가들은 무역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놓고 많은 전쟁을 하였다.
  18. 모판에서 모를 미리 기른 후 물을 댄 논에 옮겨 심는 농사법
  19. 3세기 말, 로마에서 50년간 26명의 황제가 바뀌었던 시대를 일컫는 말.
  20. 고대 로마의 공화정 말기 대귀족의 토지소유형태. 로마는 속주에서 값싼 농산물을 들여왔고, 귀족들이 ***** 을 형성하여 중소 자영농이 몰락하였다.
  21.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하면서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저항했던 인물
  22. 헬레니즘 시대에 지렛대와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인물. 목욕탕에서 유레카를 외치며 뛰어나왔던 일화가 있다.
  23. 헬레니즘 시대에 정신적 쾌락주의를 추구하던 학파
  24. 황제가 국가를 대표하는 정치 형태
  25. 조선 후기, 이름 없는 화가들이 서민들을 위해 그린 그림
  26. 고대 로마의 평민들이 전쟁을 통해 발언권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귀족의 관직 독점에 반발한 투쟁. 평민회, 호민관, 12표법은 모두 ** 투쟁의 결과로 본다. 대표적으로, 중장보병제의 실시확대와 성산사건 등을 예로 든다.

세로 퍼즐

  1. 왔노라 싸웠노라 이겼노라! 주사위는 던져졌다! 등 유명한 말을 남겼다. 1차 삼두정치를 이끈 장본인.
  2.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폴리스를 바탕으로 하는 사고방식이 세계의 문화로 이전되어 나타난 의식을 지칭한다.
  3. 옥타비아누스 이후 200년간의 로마의 평화시대를 일컫는 말
  4. 옥타비아누스에게 주었던 칭호. 원로원이 존엄한 자라는 뜻으로 내렸다.
  5. 도로, 법률, 건축 등이 발달한 로마의 문화를 ***문화라고 한다.
  6. 예수가 유대교를 모체로 창설하여, 베드로, 바울을 통해 로마에 전파되고, 세계종교가 된 종교
  7. 너 자신을 알라 라고 말했던 유명한 철학자.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도 유명하다.
  8. 기원전 334년부터 시작되어 10년간 페르시아를 정복하면서 제국을 만든 사람. 대제국을 건설하여, 동서문화를 윱합하였다
  9. 로마 제정 시기 천동설을 주장했던 인물
  10. 기독교를 국교화했던 로마의 황제
  11. 로마 제정 말기, 노예 유입 감소로 생산력이 약화되자, 토지를 분할하여 노예나 농민에게 주는 방식으로 농장을 경영했던 제도. 일종의 소작제도이다.
  12. 자신이 소유한 토지를 직접 경작하여 먹고사는 농민
  13. 게르만족의 본산지인 갈리아 지방에 대해 적은 카이사르의 저서
  14. 고대 아테네에서 독재자가 될 인물의 이름을 도자기 조각에 적어 6천표 이상인 인물을 10년간 국외로 추방하는 제도
  15.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결정적으로 패했던 해전
  16. 밀라노 칙령으로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황제
  17. 로마 호민관으로서 자영농민층의 안정과 라티푼티움(대토지)의 제한을 주장했던 형제. 귀족의 반대로, 형과 동생이 차례로 암살당하였다.
  18. 알렉산더 제국은 이집트, 페르시아를 거쳐 아시아의 ***강 유역까지 진출하였다.
  19. 알렉산더의 제국은 왕이 죽고 나서, ***, 이집트, 마케도니아로 분열되었다.
  20. 에피쿠로스 학파와 대비되는 학파로, 헬레니즘 시대에 일체의 육체적, 정신적 욕구를 억제하면서 이상을 이루려던 학파
  21. 기원전 264-145. 로마와 카르타고의 지중해 해상권 쟁탈 전쟁
  22. 새로운 문물과 사상을 받아들인다는 조선 후기의 정책
  23. 조선후기, 미륵신앙이나 토속신앙처럼 민간에서 유행하던 신앙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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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9)

아우구스티누스(1) : 마니교를 믿었던 기독교의 성자

1. 한 교부의 투쟁 : 고백록

354년. 11월 13일.

성 아우구스티누스

기독교  교부 가운데 최고의 사상가가 아프리카에서 태어났어. 그의 이름은 <아우구스티누스>. 교부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사람이지. 오늘은 너무나 유명한 이 사람을 주물럭 거리면서 고대라 불리던 서양 사회가 <기독교 사회>라고 불리는 시기로 넘어가는 이야기를 전개할거야.

사실, 그는 앞장에 이야기했던 <테오>만큼 종교가 절박하게 필요한 사람은 아니였어. 그렇다고, <갈라>처럼 기독교를 수호해야할 의무가 있는 사람도 아니였고, <히파티아>처럼 학문적 신념이 견고한 사람도 아니였지. 그런 그가 왜 기독교 철학을 집대성한 최고의 성인이 되었을까?

그의 인생과 사상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스스로 인생을 돌아보면서 적은 <고백록>을 보면서 이야기를 전개할 수밖에 없어.

성 아우구스티누스 교회

<고백록>은 그의 기억에 의존해서 적은 것이기 때문에 정확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거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5세기 이후 기독교 사회가 그의 <논리적인 사상> 뿐 아니라, <허무맹랑한 주장>까지도 다 수용했기 때문에, 더욱 더 그의 마음을 자세히 읽을 수밖에 없지.

그런데 말야. 그를 보통 <교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잖아? 그럼 먼저 <교부>가 뭔지부터 알아야겠지? <교부>는 <테오시대>를 살면서 국교화된 기독교 사회를 수호하기 위해 이교도와 싸운 사람들을 말해. 근데, 교부들이 주장하는 <이교도>란 <주신>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게 아냐. <테오>가 종교를 통해서 로마 사회를 통일하려고 했고, 이민족을 융합하려고 했잖아?

교부들은, 테오가 주장한 것과 그 이후 로마 황제들이 주장했던 <정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만든 사람들이야. 따라서, 자신들과 다른 기독교 교리를 주장하는 자들을 배척하고, 이단으로 만들었던 자들이지. <테오>시대에 수많은 기독교 수호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예수님을 정의내리려고 했어. 교부들은 그 수많은 기독교 수호자들과의 논쟁을 승리하면서 이후 기독교 철학을 정립한 사람들이야. 교부들과의 논쟁에서 져 버린 기독교 주교들은 이단으로 분류되어 유럽사회에서 떠나야만 했지.

자, 그럼 기독교 최고의 교부 이야기를 통해, 로마 사회에서 게르만 사회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한번 살펴보도록 할까?

2. 신학적 사고보다 철학적 사고를 중시했던 아이.

354년의 아프리카.  로마보다도 더 오랜 역사를 가진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이집트 문명을 접하면서, 지중해의 상권을 장악했던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는 로마라는 나라가 제국으로 발전하면서 로마의 속주가 되었어. 한니발 장군 이야기 알지? 코끼리떼를 몰고 알프스 산맥을 삥 돌아 로마를 공격했던 카르타고의 명장 말야. 카르타고는 로마 제국과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치룬 끝에 로마의 속주가 되었지.

속주란, 로마의 직할 지배 지역이 아닌 식민지를 말해. 로마의 속주 중 유럽을 벗어난 지역엔 아주 큰 속주가 2개 있었지. 로마는 지중해 남쪽 카르타고를 무찌르면서 <아프리카>라는 이름의 속주를 만들었고, 페르시아를 무찌르면서 <아시아>라는 이름의 속주를 만들었지.

4세기... 로마의 속주인 북아프리카의 알제리 지방. 당시에는 그곳을 <누미다아>라고 불렀지. 그곳에 <히포레기우스>라는 항구가 있었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근처의 <타가스테>라는 곳에서 태어났지.

<아우구스>의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로마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세금징수관이었어. 당시 아프리카에서는 로마제국의 명령에 따라 <크리스트교>를 보급하려는 자들과, <이단교>를 믿는 자들이 있었는데, <아우구스>의 아버지는 <마니교>를 신봉하고 있었지. 반면, <아우구스>의 어머니 <모니카>는 너무나 열정적이고 경건한 <크리스트교 신자>였어. 훗날, 기독교에서 <삼현모>라고 부를 정도의 독실한 분이었지.

그런데 말야. 4세기의 카르타고는 분위기가 참 애매한 곳이었어. 로마의 속주였으니 기독교 사상이 들어왔을테고, 아프리카 특유의 전통 사상과 이교사상도 혼합되어 있었지. 지중해의 해상국가이니 무역에 눈을 뜬 현실적인 상인도 있었고, 로마를 위해 충성하는 관료들도 존재했지. 카르타고는 로마로 가는 교통의 요지이자 아프리카의 토속 물질문명, 상업적인 오락시설들이 섞여있는 문명의 집합소같은 곳이었지.

<아우구스>의 아버지는 아들을 <공무원>으로 만들고 싶어했어. 세금징수관보다 높은 <법관>을 만들면 물질적으로 풍요로울 것이라고 생각했지. <아우구스>는 6살 때 문법학교에 입학해서 초등 교육을 받았어.

그런데, 이 아이가 의외로 똑똑한 거야. 맨날 장난질만 하고, 노는 것만 좋아하는 아이같은데도, 암기를 잘하고 웅변술도 뛰어났던거지. 어머니는 아이를 기독교 신앙에 따라 엄격하게 가르치려고 했지만, 아버지 생각은 좀 달랐어. 아이를 더 공부시켜야겠다고 생각한거야. 그래서 365년. <아우구스>는 중등학교 수준의 공부를 하기 위해 <마다우라>로 갔고, <아플레아우스>라는 이름있는 철학자 밑에서 공부하게 되었지.

하지만, 16살때 학비 문제로 공부를 중단한 채 고향으로 돌아오게 돼. 이 때를 <아우구스>는 방탕한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말하였지. 친구들과 모여서 남의 집 정원에서 배를 훔쳐먹기도 하고,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기도 했고, 여자 아이들을 괴롭히기도 했지.

열받은 아버지는 아들을 빨리 결혼시켜 버리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반대했어. 아들이 <죄>가 무엇인지를 알면 하느님의 곁으로 돌아오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지. <아우구스>의 부모는 여기 저기에서 학비를 구해서 아들을 다시 대도시 <카르타고>로 유학보내었어.

뭐... 지금도 <조기 유학>같은 거 보내면 결말이 어떤건지 잘 알잖아? 문제아가 부모 곁을 떠나서 혼자 대도시에서 살면 무슨 짓을 하고 놀겠어? 19살에 카르타고 학생이 된 <아우구스>는 신학이나 법학에는 큰 관심이 없었어. 오히려 인간이 뭔지, 고독이 뭔지를 설명한 키케로의 글 같은 걸 좋아했지. 그가 좋아했던 철학 서적은 <호르텐시우스>였어.

그 외의 시간에 그가 한 일은 <연애 사업>이었지. 피끓는 젊은 유학생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그것이라고 생각했나봐. 그가 생각한 인간이란,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할 정도로 나약한 존재에 불과해. <육체에 대한 욕망>은 인간이 제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시절이었어. 만약, 육체에 대한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학문이 있다면 그것은 철학 뿐이었지.

그렇다고 그가 큰 철학적 포부를 가진 것도 아니였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는 게 아니라, 어렸을 때 배운 <신학>같은 학문이 너무 비이성적이고, 논리에 안 맞아서 반발심에 철학책을 읽은 것이었거든.

20살. 그가 소중히 여겼던 것은 여자 앞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논리적인 웅변술, 인간 육체가 지니는 한계에 대한 철학적 고민 같은 것 뿐이었어.

3. 마니교 : 육체와 이상 사이의 갈등

19살 때, 그는 노예 출신의 천한 여자와 동거를 시작했고, 얼마 후 아들까지 낳게 되지.

그는 고민했어. 자신이 생각하는 철학적인 이상은, 항상 육체적인 유혹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진다는 것을... 그리고 젊은 시절부터 생의 마지막까지 그를 따라다닌 인생의 고민은 인간 육체의 나약함을 극복하는 것이었고, 그 핵심이 바로 성(sex)과 관련된 것이었지.

<아우구스>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한 종교가 바로 <마니교>였어.

크리스트교는 신앙에 대한 <귄위>만으로 신도들을 설득하려 했기 때문에 비이성적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마니교는 우주의 원리를 <이성적인 사고방식>으로 설명해주려고 했어.

마니교의 핵심 교리는 <금욕주의>였지. 마니교의 고위 성직자들은 모두 선택된 자들로서 <금욕>을 실천에 옮긴 자들이었고, 모두가 <독신>이었거든. 육체적인 욕망을 참지 못하는 <아우구스>에게 마니교는 너무나 대단한 종교였어.

자, 그럼 <아우구스>가 젊은 시절 내내 믿었던 마니교가 뭔지 한 번 살펴볼까?

마니교는 3세기 페르시아에서 예언자 <마니>가 만든 종교야. 3세기 페르시아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서아시아 최강의 통일국가였지. 마니교는 한마디로 말하면, 모든 종교사상의 융합체야.

로마 제국의 예수 중심의 크리스트교 사상, 페르시아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 인도의 불교까지 합쳐진 고대 종교의 종합 선물세트였지.

쉽게 말하면, 태초의 <신>이 있었는데, 그 신이 구원을 약속했어. 구원의 약속을 아담이 들었고, 아브라함이 신에게 구원을 약속 받았지. 그 구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예언자들이 지상에 내려오게 되지. 그 예언자들이 예수, 부처, 조로아스터 등이야. 그런데, 구원의 약속을 마지막으로 전한 최후의 예언자가 바로 <마니>야.

그럼 마니가 남긴 최후의 예언은 뭐냐... 그건 유럽의 그노시스파나 조로아스터교에 나오는 <빛신과 어둠의 신의 대결>이야. 조로아스터교의 예언자인 조로아스터가 말하길, 세상에는 빛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와 악의 신인 <아리만>이 투쟁한다 - 라고 했거든. 그런데 최후의 성전에서 빛의 신이 이기면, 인류는 구원을 받는 거야. 그게 바로, 신이 남긴 구원의 약속인거지. 따라서 <마니>는 빛의 사도, 또는 빛을 비추는 예언자라고 불러.

   그리고, 마니는 그 구원이 유대인만의 구원이 아니라, 부처와 조로아스터까지도 포함한 보편적 구원이라고 설명하였지. 유대인민의 종교를 예수가 전 세계의 종교로 만든 것처럼, 마니 역시 모든 이들을 위한 <보편적인 종교>가 있다는 것을 주장한거야.

그런데, 이런 큰 흐름을 가진 방대한 종교는 시간이 지나면 그 교리가 이상해 질 수 있잖아? 후대에 잘못 전달될 수도 있고... 그래서 마니는 자신이 생각한 교리와 계시받은 내용을 책으로 만들어 두었어. 그것이 바로 마니교의 성경인, <생명의 서>, <신비의 서>, <거인의 서>, <샤브라칸> 등이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믿는 페르시아는 <마니교>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어. 조로아스터교랑 비슷한거 같으면서도, 핵심 교리는 <기독교와 불교>에서 따왔고.... 결국 페르시아는 <마니교>가 국교를 해치는 사악한 종교라고 판단을 내린거야. 결국 마니는 박해를 받고 죽게 되지. 

   마니교는 아까 말한대로 <보편적인> 종교였어. 모든 종교의 좋은 점만 쏘옥~ 합쳐놓았는데, 그것도 앞뒤가 딱맞는 논리적인 내용이니 얼마나 환상적이겠어? 우주에 존재하는 빛과 어둠이라는 물질적인 개념에, 신과 구원이라는 초월적인 개념, 불교의 이론까지 두루 포함한 종교였던거지.

이 종교는 영지주의 이념이 강했던 4세기 이집트 등 북아프리카에서 크게 유행하였고, 서로마, 동로마에서도 많은 신자가 생겼어. 하지만, 교부들이 이단이라고 선고를 내려서 유럽에서 추방하였지.

반대로 동쪽으로 전파된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의 박해를 피해 동으로 동으로 전파되었어. 특히 비단길, 사막길 등 동서교역로를 따라 쭈욱~ 이동해서 중국, 인도까지 전파되었고, 하나의 종교로 인정받기도 했지. 유목국가인 위구르에서는 <국교>로 선포되기도 했어.

하지만, 중국에서 성리학 사상이 본격화될 무렵, 인도에서 이슬람교가 전파될 무렵, 그리고 중앙아시아에서 징기스칸의 유목민족이 서아시아까지 진출할 무렵부터 마니교는 탄압을 받게 되지. 그리고 14세기 무렵엔, 인류의 역사에서 <지나간 종교>의 발자취만 남기고 사라졌어.

바로 이 종교가 가장 융성했던 때가 4세기 아프리카와 로마 제국이었어. <아우구스>는 이 종교를 9년간 믿었고, 또 훗날 이 종교를 이단으로 탄압하게 되지.

<아우구스>가 이 종교에 심취했던 이유는, 이 종교가 가진 <영지주의> 사상 때문이었어.

영지주의란, 타락한 인간의 육체를 <지혜>가 해방시켜 준다고 믿는 사상이야. 마니교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가 투쟁하고 있는데, 인간의 영혼은 원래 빛의 세계에서 나왔다고 믿거든.

그런데, 살아가면서 인간의 영혼은 점점 때가 묻어서 더려워질 수밖에 없지.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는 빛과 어둠이 분리되어 있었는데,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은 빛과 어둠이 같이 존재하잖아. 그래서 빛과 영혼은 타락할 수밖에 없지. 만약, 빛의 속성인 영혼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죽어서 천국에 갈꺼야. 하지만, 육체적인 것에 푹 빠져있고, 본성이 더러운 것인 성(sex)에만 집착한다면 천국에 갈 수 없어. (마니교는 간음 뿐만 아니라 출산 자체도 육체적인 것으로 분류하고 있었어.)

  
천국에 못가면 어떻게 되지? 그 땐 브라만교와 불교의 윤회설을 적용하면 되지. 더러운 육체로 천국에 갈 수 없으니, 다시 더러운 육체를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겠지. 그런 인간은 또 다시 성(sex)에 집착하게 되고, 영원한 환생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는 거야.

결론적으로 말하면, 악이란 자기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규칙대로 진행되면서 생긴 <악의 원리>에서 나온다는 거야. 선과 악은 외부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인간은 그 악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영혼을 닦아야 한다는 것이지.

<아우구스>는 마니교회가 참된 <기독교 교회>라고 믿었어. 육체적 욕망을 고민하던 그에게 마니교의 완벽한 철학적, 논리적 이론은 너무나 감동적인 것이었지.

하지만, 그는 9년이 지난 뒤.... 이 종교를 떠나게 돼. <아우구스>의 지적 수준과 철학적 소양은 한참 높아졌는데, 마니교 성직자들은 <아우구스>의 철학적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거든. 단지, 육체를 멀리하고, 금욕적인 생활만을 하라는데.... 무조건 그러라는 건 결국 귄위적인 기독교 교회와 같은 것이잖아.

그리고, 또 하나... 그는 마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면서도, 생활은 그렇지 못했어. 카르타고라는 도시의 향락적인 생활과 도시적 분위기는 너무 멋진 것이었거든. 28살에 마니교를 빠져나온 <아우구스>....

이제 그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

아이러니 하게도, <아우구스>는 남은 인생동안 자신이 겪었던 마니교, 영지주의, 윤회설 등을 모두 부정하였고,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기독교의 이론을 만들게 되지.

그럼,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진행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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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6)

배교자 율리아누스 : 전통신 지키기 프로젝트

1. 크리스찬을 꼬시기 이전의 정책들 - 시민권과 빵, 그리고 서커스

오늘 전개할 이야기는 크리스트교가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로마 제정 말기에 대한 이야기야.

우리는 흔히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수많은 순교자들이 희생을 해서 크리스트교가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 그런데 말야...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크리스트교를 인정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정치적 입김도 작용한 것이었어.

로마의 전성기인 제정 초기에는 황제권이 워낙 막강했기 때문에, 굳이 크리스트교가 필요없었지. 오히려 하나님 숭배니 뭐니 하는 종교적 믿음은 황제권을 위협하는 것이었기에 탄압의 대상이었어.

하지만, 황제권이 약해질대로 약해지던 로마 제정 말기의 상황은 달랐지. 크리스트교를 인정하지 않고는 더 이상 황제권을 유지할 수 조차 없었거든. 시민권을 남발해서 인기를 끄는 것도 한계가 있었고, 빵과 서커스 정책으로 로마 시민의 탱자탱자~ 놀자는 욕구를 채우기도 어려웠거든.

여기서 잠깐~~~ 제정 시기, 황제권 강화에 이용되었던 로마 시민권과 빵과 서커스....그건 뭐였을까? 잠시 로마 초기로 돌아가볼까?

로마 정관 : 아... 좀만 싸우면 이탈리아 반도를 몽땅 일하겠구나.  쌈박질 열심히 해준 우리 군바리들이 너무 고맙구나. 농사짓다가 땅준다니깐 열심히 싸워 군바리 농민들아... 뭐 필요한거 없냐?

군바리1 : 저기... 우리 원래 농민이거든요... 땅 주세용.. 땅땅....

로마 집정관 ; 오케이.... 땅도 주고 전리품도 줄테니 앞으로도 제국을 위해 열심히 봉사해라. 전쟁에 직접 참여한 니들은 특별히 <로마 시민권>을 주마. <로마 시민권>은 서울랜드 자유이용권보다 더 좋거든? 앞으로 로마가 관리하는 모든 영토 안에서 투표도 할 수 있고, 농사도 지을 수 있고... 바이킹 먼저 탈 수 있고... 귀신의 집 들어가는 것도 무제한 리필 가능하고.. 어쩌구 저쩌구... 여~기~는~  꿈과 희망으로 가득찬 곳... <로.마.랜.드>~~~

동맹국 백성 : 저기... 우리도 로마를 사랑하는 로마 동맹국인데요. 우리는 뭐... 이용권 같은거 없나요?

로마 정관 : 니들은 동맹국 백성이지 우리 백성이 아니잖아? 음... 그럼 <로마인증 자치권>을 주마. 뭐.. <로마 시민권> 처럼 각종 투표 참여, 각종 토지 이용권, 로마시 행사 참여... 그런건 없거든? 대신 니들 동맹국 마을에서는 니들 맘대로 행사를 만들어서 하든, 서울랜드를 만들든... 알아서 할 수 있는 권리를 줄께.

동맹국 백성 : 뭐... <로마랜드>는 못가겠지만, 일단 뭐 <자치권>으로 만족하죠.. 뭐.. 쩝..

식민시 백성 : 저기... 우리도 정복당하긴 했지만, 암튼 로마 백성으로 편입된거 잖아요. 우리도 로마랜드가는 <자유이용권> 주시면 안될까요?

로마 정관 : 시꺼... 니들은 점령당한 백성들이랑 같이 살잖아. 동맹국처럼 다는 못주고... 하는 것 봐서 단계별로 <이용권> 한 장씩 줄께... 일단 투표권 같은 건 없구.. 음... 좋다. 뭐 돈 많은 애들까지는 <로마 통행증> 발급해줄께.. 그럴로 되었지?

식민시 백성 : 아나... 우리도 로마 시민인데, 전쟁한다고 여기 끌려와서 여기 산거잖아? 로마에 사는 저 자식들, 목 위에 달린 건 방울토마토인가? 생각하는게 왜 저래?

기원전 91년.... <로마랜드> 이용권을 달라며 아우성치던 식민시와 동맹국의 시민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로마로 쳐들어갔어. 그런데, 로마는 그 전쟁을 오히려 이용하였지. 동맹시와 식민지를 진압해 버린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를 완전히 통일한 거야.

그리고 로마는 <로마 시민권>을 다양하게 만들어서 점령하는 지역에 차별적으로 적용하게 돼. 로마에 거주하는 오리지널~ 백성들은 <로마 시민권>을 주었지. 단, 전쟁에 참여해서 공을 세운 남자와 그 후손들만 말이야...

그리고, 나머지 지역의 백성들은 차별적으로 시민권을 주게 되지. 식민시는 라틴동맹국으로서 <라틴 시민권>을 갖게 되는데, 그건 투표권(참정권)도 없고, 단지 식민시의 <주민증>같은 용도로 쓰였어. 통행이나 직장을 구할 때 용이한 거였지. 로마의 속주(식민시)가 된 지역도, 로마에 저항한 정도에 따라 권리와 의무가 각각 다른 <민증>을 받게 되지.

그런데, 이 <민증> 발급 제도는 로마 황제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용도가 변질되어가지. 로마 황제는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면서, 식민시를 로마 제국 안으로 가깝게 끌어들이려고 노력했지. 특히 변방 식민시의 반란은 황제한테, 아주~ 귀찮은 일이었거든.

황제들은 점점 <로마 시민권>을 남발하게 되었고, 점점 많은 이들이 <로마랜드>에서 놀 수 있게 되었어. 로마 후기 <카라칼라> 황제는 아예 로마 제국 인에서 여자와 노예를 제외한 모든 이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다 줘 버리게 되지. 뭐, 로마 안의 모든 지역이 다 평등해 진건 좋은데, 시민권을 다 뿌린 순간, 이제 더 이상 황제가 시민들에게 던져줄 뭔가가 사라진 거지.

더 이상 시민권을 뿌릴 수 없게 되자 눈을 돌린 것이 바로 <청렴하고 검소하며, 믿음심이 강한 크리스찬>이었지. 그들은 <믿음의 자유>만 준다고 해도 좋아 죽었거든~~~

여기서 시민권과 같이 뿌려진 또 하나의 시민 이벤트가 있는데, 그게 바로 <빵과 서커스> 정책이야. 원래 빵과 서커스는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시저)의 참모 클로디우스에 의해 시작된 정책이지.

시저 : 야... 내가 요즘 여기 저기 정복한 식민시 애들한테 <자치권>을 나눠줬더니, 로마 애들이 좀 말이 많다. 뭐... 천박한 넘들한테 너무 권한을 많이 줘서 로마 애들이 괴롭다나 어쩐다나 하는데... 뭐 좋은 방법 없냐?

클로디우스 : 저기... 좋은 방법이 하나 있는데유. 이천년 뒤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전두환이란 놈이 쓴 방법인데요. 국민들이 군인정치에 짜증을 내면, 군바리들이 좋아하는 원초적인 것들을 제공해서 불만을 잠재우거든요?

시저 : 군바리 길들이기? 그거 내가 잘하잖아. 초쿄파이 던져주기, 야한 사진 붙여놓기, 쉬는 시간에 족구나 축구 시키기... 그런거 말이지?

클로디우스 : 네... 전두환이란 넘이 했던 정책이 바로 3s 정책이란 건데요. 영화(Screen), 스포츠(sport), 섹스(Sex)를 국가적으로 보급하는 겁니다. 뭐... 프로야구.. .아니... 콜로세움 같은 거 지어서 집단 활극 좀 보여주고요.... 거기에 맛난 거 싸가지고 가서 먹게도 하고, 귀족들은 여친이랑 가서 어떤 노예가 안 죽고 버티나 내기도 하고... 이렇게 시민들이 잼나게 놀게 되면 사회에 대한 불만이 없어지잖아요?

시저 : 그래... 좋은데?

클로디우스 : 중요한건 이 3s 정책에 빈민을 핵심으로 포함시켜야 한다는 거죠. <로마 시민권>이 있는 빈민이면 누구나 3s를 무상으로 즐기게 하고, 경기 관람자에게 무상으로 1달에 1번씩 빵도 나눠주는 겁니다. 그럼 누가 감히 독재관(시저)님께 반항하겠습니까?

당시 시저의 정책은 평민을 위한 혁신적인 것이었어. 시저 자체가 귀족보다는 평민을 중시하는 <평민파>의 우두머리였거든. <빵과 서커스> 정책을 추진하면서 빈민에게 <로마시민권>을 팍팍 돌린 시저는 영원히 지배자로 남아달라는 로마 시민의 간절한~ 요청 때문에 <종신독재관>이 되었지.... 물론 <브루터스~ 너 마저도~> 라면서 죽기 전까지 말야.

아까 말한 <라틴시민권>이니, <동맹시 자치권>이니 한것들 있지? 그것도 다 시저가 갈리아 지방을 정복하고 난 뒤, 정복민들을 꼬시기 위해 주었던 것들이야... 시저는 확실히 대중에게 인기몰이하는 법을 잘 알았던 것 같아.

중요한 건, 이렇게 공화정 시기부터 시작된 <빵과 서커스> 정책이 로마 제정 말기까지 이어진다는 거야. 그런데, 로마 제정 말기는 이 정책을 실시할 수가 없었어. 왜? 아까도 말했잖아. 모든 자유민이 다 <로마시민권>을 얻었다구....

사치와 향략이 계속되면 될수록, 무너져가는 로마에게는 치명적인 것이었지. 로마의 황제들은 이제 향락에 빠진 로마인들에게 경종을 울릴 무언가를 찾아야했어. 콘스탄티누스가 찾은 해답은 바로 <크리스찬의 생활양식>이었어. 사치하지 않는 자... 묵묵히 기도하면서 생업에 종사하고, 외적을 스스로 막아내는 자... 믿음으로 제국을 다시 일으킬 자들....

크리스트교 공인은 로마의 오랜 전통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었어.

2. 황제의 저항... 율리아누스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의 수도를 2개로 만든 뒤 4명의 황제 체제로 국가를 유지한 걸로도 유명하지. 서쪽 로마에 황제, 부황제, 그리고 동쪽 콘스탄티노플에 황제, 부황제... 이렇게 4명의 체제로 국가를 유지해서 다양한 사태에 효율적으로 대비하려고 한거야. 훗날 이 체제로 인해 서로마 제국, 동로마 제국으로 로마가 양분되어 버리지.

근데, 문제가 생겼어. 콘스탄티누스는 <밀라노 칙령>으로 하나님을 믿어도 된다... 라고 말했는데, 또 다른 황제인 막시미누스가 반항을 한거야.

콘스탄티누스 : 이제부터 모든 로마시민권자는 전통종교과 카톨릭 중 원하는 것을 믿어도 되느니라.

막시미누스 : 헐.... 저기 내가 평소에도 콘스탄틴이 하는 거 보고 짜증이 좀 났었는데, 너 너무~ 너무~ 너무하시는거 아니에요? 우리 로마 제국의 전통신은 제우스고, 동로마는 원래 그리스 지역이고... 그리스는 전통신의 본산지인데.... 난, 하나님인지 뭔지 모르니깐 배째!!!

콘스탄티누스 : 어... 그래... 배쨀께~~~

그랬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시미누스가 배째~라고 하자 진짜로 잡아서 배를 째 버렸단다. 자... 그럼 이제 크리스트교의 승리인가?

아니다. 이후의 황제들도 전통신을 숭배하고, 카톨릭을 이단으로 몰아붙여서 이단 논쟁을 벌인 왕들이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황제가 역사에서 <배교자>라고 부르는 율리아누스이다. <배교자>는 종교를 배신했다는 뜻이니깐, 크리스찬의 표현이겠지? 근데 사실, 율리아누스는 첨부터 카톨릭을 무지 미워했었지.

아참, 생각나서 하는 말인데, 지금 말하고 있는 제국, 왕국, 공국, 공화국... 이런 거 구분은 할줄 알겠지? 제국은 말 그대로 <제>자가 들어가잖아...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이고, 왕국은 당연히 왕이 다스리는 국가겠지? 공국은 <공작, 백작> 할 때 공을 말하니깐, <귀족이 자치령>으로 다스리는 국가이고, 공화국은 지금 말한 넘들이 다 없고, 국민들이 스스로 다스리는 나라가 공화국이지.

암튼, 지금부터 율리아누스를 통해서 전통신과 크리스트교를 싸움붙여 보자.

율리아누스의 조각상(프랑스 파리시)

율리아누스는 태생부터 불쌍한 넘이야.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의 이복동생이 콘스탄티우스인데, 그 넘의 2번 째 부인의 2번째 아들로 태어났지.

근데 말이지. 율리아누스의 부모와 형제는 왕족이라는 이유로 모두 학살당했어. 왜냐면 로마가 황제권 계승 분쟁을 원천 봉쇄하려고, 콘스탄티누스의 직계 아들 외에는 모든 황족을 다 죽여 버렸거든.

어쩌다 살아난 율리아누스는 부모를 잃고 오랜 방랑을 떠나지. 방랑하는 동안, 율리아누스는 그리스의 전통 신과 전통 철학이 너무나 위대하다는 것을 알았어.

율리아누스 :  플라톤의 이데아 철학은 너무나 위대하군요.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이란게 이데아의 허상이란 말입니까? 우리가 진리라고 알고 있는 것은 사실 벽에 비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군요. 그렇다면 진리는 그림자를 만드는 태양이 아닙니까? 우리가 진정 존경하던 태양신... 미트라(Sun)...

그리스 철학자 : 그렇다네. 가톨릭에서 말하는 신도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 즉 <이데아>에 불과하다네. 신의 실제 생김새를 눈으로 본자가 인간 중에는 없지 않는가?

율리아누스는 가톨릭 세례를 받았고, 가톨릭 교육을 받으며 자랐지만, 사실 그건 전통신을 믿는다는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어. 가톡릭 교육을 받던 율리아누스는 한가지를 확신하게 되었지.

율리아누스 :  그런데, 왜 로마에 사는 기독교인들도 그리스식 인사를 하고, 로마식 예법을 익히고 살아갈까요?

교회의 주교 : 그것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지배층이기 때문이야. 로마에 살아가는 이상 그리스와 로마의 예법, 역사, 문화를 익히지 않을 수가 없거든.

율리아누스는 로마의 전통신이 자연스럽게 부활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지.

그러던 어느 날, 율리아누스에게 큰 기회가 찾아왔어. 콘스탄티누스의 친척들이 모두 죽어 버려서 로마의 4황제 중에 <부황제> 자리를 계승할 자가 없게 된 거야. 콘스탄티누스는 율리아누스가 크리스찬을 로마 사회로 이끌어줄 적임자라고 착각한거지.

그런데 왠걸... 율리아누스는 부황제가 되자마자 군대를 조직해서 콘스탄티누스와 전쟁을 벌이려고 했어. 그런데 하늘이 도운 걸까? 전쟁을 하기도 전에 콘스탄티누스가 죽어 버린거야... 그는 자연스럽게 크리스찬 사회를 이끌어갈 로마 황제로 추대되었지.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 그는 약간 찌질하면서도 교묘한 방법으로 크리스트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지. 크리스트교의 보호자인 척, 종교를 탄압하는 거야.

율리아누스 : 내가 황제가 된 이상 크리스트교를 보호하기 위해 교회가 하는 일을 좀 알아봐야겠다. 앞으로 교회의 모든 일은 황제에게 보고하고, 황제와 의논하도록 하여라.

로마교황 : 저기... 교회의 일은 교회가 알아서 할 거라서요... 황제 폐하가 신경써주는 건 고마운데, 저도 먹고 살아야죠...

율리아누스 : 거참... 내가 신경좀 써준다니깐... 고마워할줄을 모르네. 이번에 제국내에 교회들 있지. 명단 좀 뽑아봐. 내가 독실한 크리스찬들 뽑아서 <주교>로 다 선출해줄께.

그리하여... 어느 날 부터인가 교회에는 전통신을 믿는 자들이 기도와 찬양을 진행하게 되었다. 교회의 제단에서 제우스신을 위한 피의 의식이 행해졌고, 율리아누스는 하나님이 아닌 태양신의 숭배자가 되었다.

크리스찬에 밀렸던 전통 플라톤주의자들은 다시 그리스 철학을 들고, 교회로 찾아온다. 교회는 신학이 아닌 철학을 이야기하는 곳이 되었다. 율리아누스는 머리가 좋은 천재였지만, 그가 황제로 있던 기간에 했던 일들은 크리스트교 탄압 뿐이었다.

율리아누스 : 야...교회에다가 공개적으로 제우스 신상이랑, 번개창, 독수리  같은 거 가져다 놓은면 쫌 티나니깐, 티 안나게 크리스트교 애들 열받게 만들 방법 없냐?

그리스철학자 : 아... 방법이야 많죠. 예수를 죽인게 유대교 바리세인파잖아요? 예수를 믿는 교회 옆에다가 유대교 성전을 지어 버리죠. 그리고, 로마시민권은 군대 갔다온 사람만 주잖아요? 크리스찬은 군대를 못가게 막아 버리는 겁니다.

율리아누스 : 그 정도는 좀 약한데~. 이왕 하는거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애들 유골있지? 거기 개발구역이라고 말하고 다 부셔. 오다가 안티오크 성당도 부셔 버리고... 이제 대 놓고 크리스찬들 로마에서 추방해.

그리스철학자 : 네... 책도 많이 쓸께요. 크리스트교는 허무맹랑한 뻥이다... 이런 거 홍보하고, 그리스 철학이 합리적이라고 광고하면 되는 거죠? 바로 출판 들어갑니다~~~~

율리아누스 : 그래... 굿~~~ 내가 이래서 그리스 철학을 좋아한다니깐... 한마디 하면 다 알잖아?

그리하여, 율리아누스는 그 천재적인 머리로, 막 로마사회에 뿌리내리려는 크리스찬들을 공개적으로 핍박하였어.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일까?

율리아누스가 크리스찬 추방정책을 내걸고, 페르시아와의 대전투에 들어간 순간... 그는 크게 패했을뿐 더러 안전지역에 있었는데도 어디선가 우연히 날아온 눈먼 무기에 정확히 맞고 죽어 버렸지....

그리고.... 다시 로마는 혼돈에 빠지게 돼. 전통신이냐, 이교도신(크리스트교)인가라는.... 그 최후의 결전은 그리스 철학자들과 로마 제국 5 교구의 수좌대주교 간의 싸움으로 번지게 되지.

그럼 다음 이야기에서 더 자세히 다뤄볼까? 다음 장에서는 그리스 철학자를 대표하는 히파티아의 비극적 죽음과 기독교 신학의 아버지인 성아우구스티누스의 이야기를 동시에 다뤄보려구해. 빨랑 끝내고 처음에 얘기했던 구석기로 돌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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끄적대는 낙서 세계사 (5)

콘스탄티누스의 예수 꾸미기 프로젝트

1. 크리스트교의 공인

자, 이왕 창조론 얘기를 하면서 기독교 얘기를 꺼내게 되었으니 시작한 김에 기독교의 역사를 다 파해쳐놓고 다시 돌아가자. 뭐.... 앞으로도 이렇게 정신없는 이야기들이 전개될 거니깐, 알아서 이해해... 달리 <낙서 세계사> 겠어?

   세계 최초로 하나님을 믿어도 된다고 공인한 황제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였지. 근데, 이 양반은 참 독특해. 원래 이교도였던 콘스탄틴이 어느 날 갑자기 기독교의 수호자가 되었으니 말야.

아참.... 로마의 황제들은 특이하게도.. 다 us를 붙여주지? 콘스탄틴은 콘스탄티누스로 부르는 것 처럼, 율리아누스(Julianus) ,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 시베리우스.(Sibelius).... 뭔 -us 호칭이 그렇게 많은지.... 그건 그냥 라틴어의 경칭이야... 우리도 타인의 호칭을 부를 때, -님, -씨... 등을 붙이잖아. 그런데, 로마에서는 아예 태어나면서 경칭을 붙어셔 이름을 부르곤 했지. 오히려 -us를 빼명 애칭이 될 수 있잖아. 콘스탄틴, 율리안, 시베린.... 더 친근한데?

그것 말고도 라틴어에서 남, 녀에 붙이는 호칭은 상당히 많고 다양해. 여자에게는 아름다움을 상징하는 -ila를 붙이기도 하지. 율리아, 빅토리아, 마리아.... 보통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을 칭하는 라틴어 접미사를 이름 뒷부분에 많이 붙였다고 하는데, 그런 특권을 가진 이들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보기도 해. 로마 시민권이 없었던 시기의 게르만족들에게서는 그런 이름들이 잘 안보이거든.

뭐, 그게 중요한게 아니라 콘스탄틴이 기독교를 공인한 과정이 좀 재미있어서 말야. 콘스탄틴이 황제에 오른 시기의 로마는 이미 제국의 전성기가 지난 시기였어. 그에겐 새로운 힘이 필요했지.

황제 : 아 진짜... 요즘 우리 시민들 왜 이러냐? 실컷 시민권 팍팍 돌려서 인기 좀 얻었더니, 너나 없이 시민이라며 놀고 먹으려고만 하잖아? 스타가 되고 싶으면 락해!... 아니 시민이 되고 싶으면 봉사해??? 라고 했더니 개나 소나 시민이네. 놀고 먹는 시민한테 세금 좀 더 걷을 좋은 방법 없어?


쫄1 : 저기... 요즘 예수믿는 애들이 좀 경건하고, 세금도 잘 내는데 그 애들을 좀 구슬린 뒤, 숫자를 불리는 게 어떨까요? 걔네들 예수만 믿게 해주면 목숨걸고 충성할 분위기던데... 예수천국 불신지옥.... ㅋㅋ

황제 : 뭐? 우리 미트라신은 버리고? 그럼, 그리스 철학자들이랑 제우스교 믿는 애들이 좀 삐질텐데? 갑자기 종교를 바꾸면 제우스교 귀족들이 다 삐지잖아. 예수교 애들은 이단이라고 난리칠텐데?

쫄2 : 그럼, 황제 폐하가 직접 예수교 신에게 계시를 받았다고 우기고 전쟁에 나가서 대승을 거두면 되지 않을까요? 황제가 뭐 그랬다는데, 어쩌겠어요?

그리하여, 콘스탄틴은 전쟁에 나간 뒤, 밀비아 전투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조작한다.

황제 : 오... 하늘이 계시를 내린다. 보라... 불타는 십자가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십자가와 함께 전투에 임하신단다. 모든 장병들은 십자가를 방패에 새겨라. 하늘이 황제에게 <이 표적으로 승리를 거둘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병사1 : 저게 뭔 소리여?

병사 2 : 야... 이단신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려고 저쪽 애들한테 빽태클을 걸거래. 무지 쎈 신인가봐. 황제가 한 밀이니 틀림 없겠지 뭐...

콘스탄틴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기독교로 개종하였지. 역사에서는 하나님의 계시 때문에 황제가 개종했다고 말하지만, 사실 개종하려고 맘먹은 황제가 직접 계시를 만들고, 위대한 권위를 보임으로서 개종의 정당성을 설명하려고 했다는 게 더 맞을 거 같아.

황제 : 오... 이단신이 로마를 구하였도다. 이제 황제의 왕관에 십자가를 박아둘 것이며, 위대한 왕이 크리스트교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로마 시민권자들에게 부여하노라. 전통신과 크리스트의 신은 모두 위대한 황제 안에 같이 숨쉬리라....

이것이 역사에서 유명한 <밀라노 칙령>이지. 로마 말기, 크리스찬들은 드디어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된 거야. 그리고 황제는 크리스찬들의 교구제를 인정하였어.

교구제란, 교회의 조직을 로마제국의 행정제도와 일치시키는 교회 제도를 말해.

예로, 시골지역을 포함하는 하나의 로마도시가 있으면, 그곳을 총괄하는 교회가 존재하고, 그 교회를 이끄는 짱을 <주교>라고 부르지. 주교가 있는 곳을 <교구>라고 불러. 그런데, 그런 도시 몇 개를 총괄하는 더 큰 로마행정구역에는 그만큼의 행정구역을 총괄하는 교회의 짱이 존재하는데, 그걸 <대주교>라고 부르고, 그 지역을 <대교구>라고 말하지. 그런데, 대교구중에서  예수의 직계제자들이 교회를 세운 중요한 행정구역이 있어. 수도 로마,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은 아예 수좌-대주교 라고 불러주지.

그중에서도 예수의 애제자인 베드로가 교회를 세운 로마는 황제가 머무는 구역이기도 하고, 교회에서도 차지하는 위치가 크기 때문에 최고의 교회로 손꼽히지. 따라서 훗날 로마 교회의 대주교를 <교황>이라고 부르며, 서구 교회의 지도자로 인정하게 되지.

반대로 훗날 동로마 제국은 황제가 거주했던 콘스탄티노플을 중요한 성지로 여겨서 이곳의 교회를 동방 최고의 교회로 설정하는데, 그곳에서 훗날 <그리스 정교회>가 융성하게 되지.

문제는 교회세력이 로마 행정구역과 일치하게 되면서 생긴 로마 황제의 고민이야.

황제 : 야... 이거 예수교 애들을 공인했더니, 그 숫자가 장난 아니네. 얘들이 이렇게 숫자가 많았어? 로마 행정구역마다 교회가 다 생기잖아?

신하 : 얘네들, 그동안 박해받은게 무지 서러웠나봐요. 돈모아서 교회를 곳곳에 짓는데, 이거 궁전보다 더 화려한데요? 교회 주교들이 우리가 보낸 총독보다 더 신망이 높은 지역도 있다니까요.

황제 : 그럼 아예 도시 안에서 세금을 걷는 비율이나 조세 분쟁 같은 것도 예수교 애들한테 맡겨봐. 뭐... 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애들이니깐 삥땅치거나, 황제를 속이지는 않을거아냐?

신하 : 얘들은 하나님 말씀대로 진리를 전파한다면서 자체 재판도 하던데요? 교회가 지방관보다 더 인정받는 지역도 있고, 게르만족들이 쳐들어올 때 교회얘들이 직접 수비하는 지역도 있다고 하네요.

황제 : 음... 예수교 애들 무시하면서 정치할 수는 없겠다. 어짜피 인정한 종교니깐 예수교 교리를 내가 좀 손봐야겠어. 야... 성경책 좀 읽은 애들 다 모이라고 해봐.

2. 니케아 공의회

325년,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를 열어서, 종교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토론을 벌이지. 보통 예수에 대한 신학이론을 기독론이라고 하는데, 이 기독론을 정립한 것이 바로 초기 <공의회>야.

원래 공의회란, 기독교 교리에 다양한 의견이 있을 때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 하나님의 진정한 말씀이 뭔지 뜻을 모으는 자리였어. 그런데, 여기에 <황제>가 개입함으로서 <공의회>는 황제의 지배를 받는다는 선례가 생긴 것이야.

황제 : 다 모였냐? 내가 니들 종교를 인정하고 같이 믿기로 하긴 했는데, 아직 내가 좀 모르는게 많으니깐 앉아서 이것 저것 얘기해봐.

아리우스 : 저희 알렉산드리아 교구는 예수님의 존재를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대리자거든요? 구약 성경을 보면요, 하나님이 구원자(메시아)를 보낸다고 했는데, 그 메시아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라고 했어요.

황제 : 그럼 메시아는 하나님과 다른거냐?

아리우스 : 그렇죠. 예수님은 하나님과 다른 인격이고, 그냥 하나님의 말씀(logos)를 지상에 전파하다가, 옛날에 돌아가셨죠. 그니깐, 예수님은 하나님과 연결은 되어 있지만, 하나님은 아니라는 거죠.

황제 :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는군. 대충 알겠다. 내가 황제인데, 내가 동네 촌구석까지는 다 다스릴수 없잖아. 그니깐, 내가 쫄따구들을 시켜서 내 명령을 전달하지? 그거잖아. 쫄다구가 내 말을 전달하지만, 쫄다구와 내가 일치하는 존재가 아니라는거... 오키...

아타나시우스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요. 저기, 하나님이라는게 원래 사랑(선)이 본질이거든요. 근데, 사랑은 형체가 없잖아요. 하나님은 사랑을 말씀으로 전달하셨구요. 그니깐 그 말씀을 전한 예수도 사랑이라는 그 본질 자체이니깐, 하나님과 말씀, 사랑, 예수는 모두 같은 거죠.

황제 : 뭔 소리냐? 뭔 소리인지는 몰라도, 예수가 곧 하나님이라는 거지?

아타나시우스 : 네네네... 하나님을 섬기면 예수의 진리도 동시에 아는 것이고, 말씀이 곧 사람이 되신거죠.

황제 : 그니깐... 예수가 하나님이니깐 예수가 신성하다닌 거잖아? 대부분이 예수가 심부름꾼이라는데, 넌 예수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거지? 그거 좋네. 예수가 신성해야 예수의 후원자이고, 공인자인 나도 좀 폼이 나잖아. 좋아.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예수가 인간이면 황제가 평범한 인간보다 못한 존재가 되잖아. 야... 예수가 인간이라는 기록은 다 지워라...

그리하여.... 예수가 인간성을 지녔다는 다수파는 이단으로 규정되고 말았지. 신과 예수, 성령은 곧 하나라는 삼위일체설이 정설이 된 순간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삭제한 다수파의 기록은 아직까지 논란이 되고 있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성경이 있다는 이야기나, 프리메이슨이 고대 예수의 인간성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이야기는 역사에서 주목하는 신비로운 이야기들이지. 영화 <다빈치 코드>에서도 이단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잖아?

3. 예수 만들기 프로젝트

자... 일단 예수의 신성을 결론내린 황제... 이번엔 예수의 생일을 정하려 했어.

황제 : 일단... 예수 생일 미사를 지내고 예수를 좀 홍보해봐.

니케아 공의회 직후, 황제는 크리스찬의 미사(Christes-Masses)를 시작하는데, 원래 크리스마스는 공의회가 끝난뒤 축하파티를 하는 것을 말하지. 일명 뒷풀이라고 할까?

그런데, 황제는 이 미사를 예수의 탄생 미사로 진행하려고 했어. 크리스를 고대어로 X라고 표현하면 X-mas라고도 하는데, 훗날 불어로는 <노엘>이라고도 불러.

문제는 예수 생일이 성경에 안나온다는 점이야. 그럼, 콘스탄티누스는 예수의 생일을 어떻게 정했을까?

황제 : 예수 홍보 하라니깐, 니들 지금 뭐 하냐?

신하 : 저기... 예수님 생일이 성경에 안나오는데요? 그리고요... 기독교인들은 예수 생일보다는 부활일에 더 관심이 있는데요. 예수가 전지전능해진게 부활한거 때문이잖아요? 부활절 홍보를 하는게....

황제 : 야... 니들 개념을 천년뒤 신대륙으로 미리 보내놨냐? 부활은 현세의 일이 아니라, 내세에 대한 약속이잖아? 내가 왜 예수교애들 죽은 뒤를 챙겨주는데? 예수가 필요한 이유는 지상에서 황제가 예수를 공인했다는 것이고, 그걸 알아줄 행사는 예수의 <탄생일> 이거든? 부활절 얘기 꺼내면 다 죽는다....

신하 : 저기 우리 로마에서 가장 큰 축제는 추수감사제잖아요. 농경신인 <세턴>에게 감사지내는 축제가 12월 17일부터 24일까지 하는데, 예수님 생일을 거기에 맞출까요?

황제 : 거참.. 이것들이... 어짜피 쉬는 날을 생일로 하면 무슨 의미가 있냐? 이젠 개념이 천 년 더 지나 21세기 대한민국 이명박 정부 수준으로 넘어가는구나.

신하 : 저기... 그러면 폐하도 믿었던 페르시아 미트라신 생일은 어때요? 미트라신은 태양과 광명의 신으로 축복을 상징하면서 생일도 12월 25일이니깐, 추수감사제 끝나고 또 쉬는 거잖아요? 일종의 연휴 시너지... 짱이죠?

황제 : 그럼 유대교에서도 연말에 쉬니깐 거기까지 맞춰서 12월 25일로 하면 되겠군. 유대인들도 토요일날 쉬지? 로마의 농경신 <새턴>이 토요일이란 뜻이고, 태양신 미트라의 태양이 일요일(sun)을 지칭하니깐, 딱 맞아 떨어지네. 아.. 로마신, 페르시아신, 유대신 등등을 모두 존중하면서 만든 예수의 생일... 내가 생각해도 기막히네...

신하 : 폐하의 정적인 막센티우스, 그 넘이 제우스 교를 믿잖아요? 제우스 빼고 모든 종교를 통합해서 생일을 만들었으니, 그 넘이 배좀 아프겠네요. 폐하의 종교는 모든 종교를 다 통합한 위대한 종교이십니다요.

황제 : 그래... 이제부터 예수교를 보편적인 종교라는 뜻에서 <가톨릭>이라고 부르면 되겠구나. 그리고, 토요일날을 안식일로 하면 유대교를 배낀 티가 나니깐, 이제부터는 <일요일>이 안식일이다. 달력의 빨간날을 일요일로 바꾸도록 해라.

콘스탄티우스가 아타나시우스파를 인정하면서 황제 맘대로 종교를 만들었지만, 그가 죽자 로마에서는 또 큰 난리가 벌어져. 먼저 황제를 싫어했던 군부 세력들은 제우스 신과 그리스 전통 철학의 위대함을 다시 주장하게 되고, 크리스트인들도 좀더 합리적인 <아리우스파> 크리스트교를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하지.

그리하여, 그리스의 전통 철학과 전통신, 합리적인 크리스트교인들은, 아타나시우스파와 계속 대결을 벌이게 되지. 그 와중에 신학이냐, 합리주의적 사고방식이냐의 싸움이 로마 말기부터 다음 시대까지 이어지게 돼.

자... 그럼 지금부터 가속도를 붙여서 팍팍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크리스트교 사회를 살았던 많은 인간들의 이야기야... 콘스탄티누스와 같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을 통해 기독교의 역사를 몽땅 파해치고, 원래 목표로 했던 창조론과 진화론으로 돌아가보려구해. 처음 의도였던 구석기로도 돌아가 봐야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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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크리스트교의 전개
① 로마시대의 크리스트교
  크리스트교는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과 조로아스터교의 천당, 지옥, 최후의 심판, 영생 등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예수는 믿음과 사랑을 기반으로 하여 제자들과 함께 선교활동을 하였으나, 로마는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고 하여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신자들을 박해하였다. 그래서 크리스트교가 공인되기 이전에 많은 신자들은 카타콤과 같은 지하묘지에 몰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여러 사도들의 편지를 보면서 교리를 공부하였다.
  크리스트교가 만들어지고 300년이 지났을 무렵,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전선(戰線)의 하늘에 새겨진 붉은 십자가를 보고 역전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각주:1] 그는 하늘에 크리스트교로 개종할 것을 약속했으며, 그 약속은 곧 크리스트교를 공인하는 밀라노 칙령(313)으로 지켜졌다.
  크리스트교가 공인된 이후에는 많은 신자들이 카타콤과 같은 곳에서 비밀리 모일 필요가 없어졌으며, 그들은 이제 지상에 나와 떳떳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연구한 교리였다. A 카타콤과 B 카타콤의 교리 연구는 똑같은 자료를 가지고 했음에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었다. 세상으로 나온 교도들은 성경과 교리에 대한 해석을 통합할 필요가 있었는데, 니케아 공의회(325)는 그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성경의 교리와 해석을 통합하기 위해 열렸다.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아리우스파(派)와 아타나시우스파(派)가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아리우스는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의 신성성은 하느님에 미치지 못하다고 주장하였고, 이는 그 당시 대다수 사람들의 의견이었다. 반면 아타나시우스는 하느님과 그의 아들 예수는 모두 신성하며 성부(聖父) - 성자(聖子) - 성령(聖靈)은 모두 같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삼위일체(三位一體, Trinity)를 주장하던 아타나시우스파는 그 당시 아리우스파에 비하면 소수였다. 하지만 소수였던 아타나시우스파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인정을 받으면서 아리우스파를 압도하고, 크리스트교의 정통교리로써 자리 잡았다.[각주:2]


Tip. 아리우스파와 아타나시우스파


아리우스파 : 다수 / 하느님과 예수의 신성이 같지 않다고 주장


아타나시우스파 : 소수 / 하느님과 예수, 성령의 신성이 같다고 주장

  이후 크리스트교는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국교화(392) 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 로마,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이 성지로 지정되었고 다른 지역들도 교구 단위로 조직되었다. 또한 교황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인데, 로마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라는 인식과 니케아 공의회 이후 여러 우월권을 로마교회가 확보해 가면서 교황은 서유럽지역에서 영향력을 갖게 되었다.

② 프랑크 왕국 시대의 크리스트교
  게르만인들이 대거 유럽으로 이주하면서 유럽에는 게르만인들이 세운 많은 나라들이 들어섰다. 게르만들인이 유럽사회로 스며들면서 크리스트교 역시 게르만에게 젖어들었다. 사실 많은 게르만들은 다수파였던 아리우스파로 개종하였었다. 하지만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개창자 클로비스만은 아타나시우스파로 개종하였는데, 이는 프랑크 왕국의 성공에 주된 요인이 되었다.
  메로빙거 왕조 말기 카롤루스 마르텔(칼 마르텔)은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이슬람 군을 막아냄으로써 크리스트교의 수호자로서 여겨졌고, 그의 아들 피핀은 로마 지역의 땅을 정복하여 교황에게 기증하여 교황과 서로마 교화의 지지를 받았다.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한 카롤루스 대제(샤를 마뉴)가 800년에 서로마 황제로 대관하면서 서로마 교회와 프랑크 왕국의 연계는 더욱 공고해졌다.

  1. 종교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하늘의 기적으로 인해 승리하고 감동을 받아 크리스트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학에서는 당시 도시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종교 - 크리스트교의 입장으로 보면 이교異敎 - 지도자들이 있었는데, 콘스탄티누스는 이들을 견제하고 종교적인 형평성을 지키기 위해 크리스트교로 개종했다고 설명한다. [본문으로]
  2.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역사학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아타나시우스파를 정통으로 인정한 것은 종교적인 형평성 때문이었다고 평가한다.&#13;&#10;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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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비회원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기독교 편>

7화. 교회를 지키는 사명을 목숨처럼 여긴 사람들.

1. 유대교를 크리스트교로 전환시킨 선지자 - 바울

이번 장에서 펼쳐질 이야기는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신>을 인식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이면서도, 지극히 재미가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라는 존재가 지상에 내려온 이후, <하나님>의 존재를 <예수>와 연결하여 <최상의 가치>로 만들려는 사람들의 <교리>이야기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가장 존엄한 가치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 가치를 부정하는 이들을 <이단>으로 몰아 교회 내부에서 지워 버렸다.

교회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로마 제국내의 <전통 종교와 철학>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반면, 교회의 가치를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려는 자들을 <이단>이라는 명목으로 제거해야 했다. 그것은 <크리스트교>의 독선 때문이 아니라, 소수 종교로서 로마 제국이라는 틀 안에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초기 크리스트교의 가치를 지켜나간 자들을 <교부 : church father>라고 불렀다.

교부란, 원래 <사도>를 뜻하는 말이었다. 이것은 예수의 후계자를 지칭하는 말이었는데, 점차 교회를 승계하고 지켜나갈 후계자란 뜻에서 <교부>란 말이 쓰이게 되었다. 즉, 신약성경을 저술하면서 교리의 정통성을 확보한 자들부터, 각종 공의회에서 교회의 정통 교리를 확립한 사람들까지를 두루 모아 <교부>라고 부른다.

고대 크리스트 신학의 기본 틀은 <신인본성론>이었다. 그것은 신이 <사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한 이론이었다. 기원전 유대인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I AM WHO I AM)가 여호수아(Jeschua)라는 이름으로 살다가 처형당했는데 부활 했다고 생각했다. 여호수아의 애칭이 그리스어로 <예수아 : 예수>이다.

실제 <예수>는 선지자들에 의해 <예수아>로 지목받는다. 사도 요한은 그에게 세례를 하면서 위대한 분이라 말하였다. Q복음서에서는 요한이 예수와 비교될 만한 선지자라고 말하였지만, 마가복음에서는 요한이 예수를 기다리는 선지자라고 말한다. 마태는 예수를 지혜라고 불렀는데, 지혜와 성령은 구약에서 동의어였다. 즉, 예수가 곧 성령이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신약성경의 마가, 마태, 누가복음 등에서는 예수의 신성을 강조하였지만, 당시 일반인들이 즐겨 읽던 Q복음서에서는 예수의 인격이 부각되면서 예수의 <인성>을 더 강조하였다.

그리고, 예수를 알리고 다니던 사도 바울은 예수의 신성과 인성 중 어느것이 더 중요한지를 밝히지 못하였다. 아니, 신성과 인성과의 관계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였다.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 또, 신이라면 하나님과 동격인가, 다른 인격체인가? 이것은 기독교가 시작되는 신약에서부터 시작된 논쟁중의 하나였다.

또, 유대인들이 제기한 문제도 있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수치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진정한 메시아는 아니라고 말한다. 메시아는 영광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 말로만 사랑을 외치다 보여준 것 없이 죽은 선지자가 어떻게 유대인들의 <예수아>가 된단 말인가?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죄>를 받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라는 말로 반박하였다. 예수의 죽음은 메시아의 경고이며, 예수는 성령으로서 살아있다고 말했다. 즉, 예수가 성령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원래 유대인이었던 바울의 배신으로 유대인들은 그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종파주의를 버린 진정한 인류 모두의 사랑과 구원>을 말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조차 유대교의 율법을 어느 정도 존중하였던 초기 시대에 바울의 한마디는 예수의 가치를 <인류 보편적인 가치>로 만든 것이었다.

<베드로와 바울>, 엘그레코 작

훗날, 크리스트교의 진정한 가치를 지키겠다고 나선 <교부철학>은 바울의 정신에서 기원한다. 교부철학자들은 바울의 정신과 어긋나는 학파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반박하면서 기독교의 기본 철학을 완성하였다. 교부철학의 핵심 주제인 <삼위일체설>도 바울의 <예수와 성령은 동일>하다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로마 제국 내에서 크리스트교가 확대될수록 바울의 <전통 교리>를 반박하는 자들은 교회를 부정하는 자들로 간주되어 박해받았다. 교회가 이단을 때려잡는 <정죄>의 의식은 생각보다 가혹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해야 교회가 살아남고 정통 교리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 철학은 간단하다. 예수의 죽음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노력이다. 예수는 하나님과 더불어 존재했다가, 지상에서 백성들과 함께 했으며, 부활한 후에 하나님과 있다는 것이다. 원래 바리새파의 촉망받는 유대교인이었던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부정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율법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바울은 이단과의 싸움을 앞두고 율법을 지킬 것을 주장한다. 이단보다는 율법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2. 바울 시대의 이단아 - 영지주의

최초의 교부로서 바울이 싸워야 했던 이단은 <그노시스 학파>였다.

그노시스 학파는 소아시아를 거점으로 하여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크리스트적 이단>이었다. 그노시스 학파의 기본 교리는 바울의 주장과 같다.

즉, 성령은 말씀이며, 말씀은 곧 구원의 증표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지식이며, 신의 계시이다. 말씀을 믿고 따르면 구원이 온다.

그러나, 그노시스(영지주의)는 성령을 하나님으로만 보지 않는다. 그리스 철학도 말씀(Logos)이며, 제우스 신도 구원이 가능한 신이다. 종말과 구원은 하나님 뿐만 아니라 어느 신이나 할 수 있다. 또, 종말이 먼 훗날의 일도 아니며, 구원은 깨달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도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누가 신이냐가 아니라, 신이 어떤 말씀을 하는가이다. 신보다 말씀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또, 그노시스 주의자들은 영원불멸을 믿었다. 영혼은 순수한 것으로 지상에서 더럽혀진 육체가 영혼을 더럽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은 순수하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해방되는 것이다. 구원은 신으로 가는 과정일 뿐만 아니라 자동으로 영혼이 정화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현실에서의 더러운 육체가 원하는 욕망을 버리면 자연스레 천국이 온다. 이 세상은 육체가 만든 환영이며, 죽은 후가 실제 영혼의 세계이다.

따라서 예수가 더러운 육체로 지상에 내려온 것은 거짓이다. 말씀이 더러운 육체로 올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예수의 존재 자체는 부인된다. 예수는 단지 말씀일 뿐이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인성을 기진 인간 예수이지, 신성을 가진 말씀일 수가 없다. 즉, 예수와 말씀은 별개이며, 예수는 환상이다.

그노시스의 기본 철학은 신비주의였다.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에서 영향을 받는 그노시스의 신비주의는 과학과 다른 정신적 신비주의였다. 신비한 지식중에 최고는 살아숨쉬고 있다는 지식(실존지식)이었는데, 그 실존 지식은 플라톤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었다. 플라톤이 이데아 세계와 현실세계를 구분하듯, 그노시스는 정신 세계인 이데가가 육체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원래 플라톤 자체가 피타고라스의 신비주의 종교인 오르픽교의 영향을 받았다. 오르픽 교의 기본 교리가 영혼불멸과 윤회 사상이었다. 이 영혼불멸의 고차원 세계가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에 영향을 주었는데, 이 이데아의 신비세계는 스토아 철학의 신성세계(로고스)에 영향을 주었다. 로고스는 성령이라는 그리스어이다. 그리고 성령은 크리스트교에서 예수를 말한다.

한마디로, 그노시스는 고대 모든 철학과 종교의 정신을 종합한 <이성적이고 계몽적 종교체계>였다. 그들은 하나님 자체가 중요하지 않았다. 신은 어디서 왔으며, 악은 왜 탄생했는가? 구원은 왜 시작되었고, 영혼은 어떻게 구원받을까? 라는 실존적 지식이 중요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영원한 삶을 위한 해탈이지 <하나님 자체>가 아니다. 해탈을 위한 신이라면, 어떤 신이든 상관없다. 그들의 목적 자체가 해탈이기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거짓이 된다. 해탈은 영생이지만, 부활은 더러운 현실로의 복귀니깐...

그노시스 학파가 고민한 결과, 세상을 이루는 실제적 지식은 유일신인 하나님이 아니라 <이원론적인 신>이었다. 이원론이란, 세상의 구성물질을 두가지로 보는 것이다. 즉 <선과 악>, <빛과 어둠> 등의 대립되는 것들이 세상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스토아 사상이 유행했던 페르시아 지방의 조로아스터교 사상이었다. 세상은 선한 신과 악신의 대립으로 구성된다.

태초에 하나님은 선한 신이므로, 사악한 세계는 별로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사악한 세계가 존재하므로 인간의 영원한 해탈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 해탈을 돕기 위해 예수가 나섰다. 예수의 가르침은 신비적 마법으로 해탈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즉, 영혼의 영생의 길을 열어준 것이 예수이며, 예수는 이데아 세계를 열어준 플라톤 철학의 계승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 사상이 그노시스가 생각한 <예수>의 개념이었다.

바울은 그노시스 학파가 얼마나 황당했을까? 바울의 선교는 그노시스 학파와의 길고 긴 싸움과도 같은 것이었다.

나그 하마디에서 발견된
그노시스 문서

바울의 전통 교리를 지키려는 그의 후계자들은 끊임없이 그노시스와 싸워야 했다. 그 결과, 새로운 교리가 탄생하였다. 그것은 예수의 지위를 격상시켜 하나님과 동급으로 만들려는 시도였다. 바울의 시대를 보통 <원시 크리스트교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의 크리스트교 지도자들은 예수의 죽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동격으로 만들기 위해 <성찬식>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예수의 최후의 만찬은, 그의 피와 살로 음식을 만들어 모두에게 기적을 보여준 감동적인 사건으로 묘사되었다. 하나님 안의 예수는 다른 종파와는 다른 유일한 종교임을 강조하기 위해 <카톨릭>이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카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으로서, 훗날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크리스트교를 공인할 때 <카톨릭>이란 말도 같이 공인하였다.

바울 이후 1세기의 <교부>들은 그노시스파를 몰아내기 위해 예수의 신성을 극대화 하였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신이지만, 예수역시 태초 이전에 하나님과 더불어 있었던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즉, 창조보다 먼저 그리스도가 있었고, 창조의 보조자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예수와 말씀은 하나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노시스는 학파의 이론을 반박하기 위해 예수는 더욱 더 신성화되고, 하나님과 동격이 되어갔던 것이다. 이것이 훗날, 삼위일체설의 바탕이 되었다.

3. 기독교 변호사들의 등장

초기 크리스트교의 적은 영지주의 뿐만 아니라 전통 그리스, 로마 등의 이단 신도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가 그리스의 달변가들을 말로 제압하기는 쉽지 않았다. 철학적 지식을 두루 갖춘 소크라테스의 후손들을 믿음만으로 기도하는 자들이 어떻게 이기겠는가?

그래서 등장한 자들이 변호가(Apologiar)들이었다. 이들은 크리스트 철학을 이교도에서 알리면서 신학의 우수함이 철학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하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으며, 말씀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그리스 철학자들에게 밀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독교 변호가들은 차츰, 바울과 다른 교리로 논쟁에 다가서게 되었다.

예수는 <인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다. 예수를 <신>으로만 파악해서는 그리스 철학자들과 논쟁이 되지 않는다. 철학은 우주의 근원과 실제 존재하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했지, 보이지 않는 신과의 대화를 요구하지 않았다. 따라서 기독교의 대변인들은 갈수록 예수의 인성을 강조하였고, 예수는 하나님보다 하위라는 이론을 주장하게 된다. 이것을 <속박론 또는 종속론>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변호가 데오필루스에 의하면, <삼위일체설>이 아닌 <삼인분리설>을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존재는 성령, 성자, 성부의 3개체로 이루어져 있지만, 성자와 성부가 성령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반면, 이들은 로마인들이 크리스찬들은 현실을 무시한 미신을 믿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반박해야 했다. 따라서 변호가들은 크리스트교의 하나님이 로마 황제를 위해 헌신하고 있으며, 제우스 신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제국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강조해야 했다. 실제 크리스트교 달변가들의 노력으로 로마인들이 크리스트교를 친숙하게 여기게 되었으며, 로마 황제도 크리스트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변호가들의 입장은 <대외적>인 입장이었다. 교회 내에서 이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당연하게 생각혔고, 예수의 신성을 높이 평가했으며, 하나님은 그리스 신보다 우위에 있다고 주장했다. 단지, 그들은 크리스트교의 교세를 확장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스의 신들을 이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들의 이중적 입장은 대외적으로는 이단과의 싸움 승리, 대내적으로 정통 교리 확보라는 두가지 과제를 수행하는데 효율적이었다.

4. 제국 로마에 등장한 교부들...

바울 이후 2-3세기, 로마의 교부들은 각지에 교회를 세워 로마의 행정체제 내부에서 교리를 전파하였다. 이전에 설명한 바와 같이 <교구체제>이다.

이들은 대도시의 교회라는 이점을 가지고, 초기 사도들과 바울 사상과 반대되는 학파들을 이단으로 몰아 처단하였다. 특히, 그노시스와의 싸움에서 대승을 거둔 것은 잘 정비된 교회 조직 덕분이었다.

초기 교회의 대표적인 학파는 히타피아를 소개할 때 언급했던 알렉산드리아 학파였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노시스와 지속적으로 싸우면서도, 일부 그들의 철학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훗날 아리우스파가 <삼위일체설>을 반대한 것도 이 교단의 역사적 배경과 유사하다.

초기 교회의 교단들은 서로의 입장이 달라서 정통 교리를 놓고 많은 대립을 하였다. 그러나, 그 대립은 적절한 시기마다 종교회의를 열어 적절히 타협해 나갔다. 초기 교회는 표면적으로 문제가 없는 듯 싶었다.

그러나, 2세기 말엽 교회 내부에 <단일신론>이 등장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단일신론이란, 성자, 성령, 하나님이 하나라는 입장을 반박하였다. 데오도투스는 그리스 철학의 유물론을 바탕으로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고, 인간으로서 예수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의롭고, 인간으로서 초연한 사나이로서의 예수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가 신이 된 것은 죽은 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부활한 이후라고 주장했다. 260년 경 바울은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신성한 능력을 부여받은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안디옥 종교회의에서 이단으로 규정된다.

어떤 이들은 아예 성부만이 하나님이며, 다른 것들은 인정할 수 없다고 까지 주장하고 나선다.(양태적단일신론) 다른 이들은 성부, 성자, 성령 중에서 성부가 우선이지만 나머지 둘은 위계질서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도대체 예수는 누구일까? 예수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전통 크리스트 교리를 세울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열린 종교회의(공의회)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였다. 니케아 공의회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콘스탄티누스의 교회 간섭 의도가 숨어있었다. 반면, 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교회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절박한 교회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자, 그럼 이렇게 난해한 크리스트교의 교리를 명쾌하게 설명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지금까지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해결사는 교부철학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였다. 자, 그럼 이 지겨운 교부철학 이야기를 끝내고 한 인물의 생애를 다루어보자. 다음 장에서는 당대 최강의 탕자로 시작하여, 크리스트교 최고의 성인으로 등극한 한 인물을 다뤄보도록 하겠다. 그 인물을 통해 크리스트교 교리가 어떻게 정리되어 가는지 한번 볼까?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 http://historia.tistory.com  

 

   - 참고할 만한 책들

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유재덕 (브니엘,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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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크리스트
카테고리 인문
지은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이너북,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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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권으로 읽는 크리스트교사(기독교사)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박경민 (청목,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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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의 신학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리처드 버캠 (크리스천헤럴드,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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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바울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세윤 (두란노아카데미,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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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없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공석하 (뿌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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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또 다른 이름들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폴 니터 (분도출판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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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문헌해설총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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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레오 엘더스 외 (성바오로출판사, 19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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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세계사 넓게 보기. 2: 고대 국가와 세계종교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이현세 (녹색지팡이,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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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기독교 편>

6화. 전통종교, 전통철학을 살해한 크리스트교의 승리

1. 최후의 배교자 율리아누스(361-363)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공인된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뒤 한차례 큰 파란을 겪게 된다.

콘스탄티누스가 콘스탄티노플과 로마라는 2개의 수도에 2명의 황제체제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 후손들 역시 2명의 황제 체제로 국가를 유지해 나갔다. 그러나, 2명의 황제 체제는 큰 종교적 갈등을 불러왔다. 일단, 콘스탄티누스 황제 자체가 또 다른 황제인 막시미누스와 대립관계를 형성했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와 달리 막시미누스는 제우스교를 신봉하였다.

기독교 입장에서 우상숭배로 볼 수 있는 <이단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행위>를 하면서, 막시미누스는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을 비웃는 행동을 하였다. 결국 콘스탄티누스는 이단신을 믿는 막시미누스를 제거해 버린다.

마지막으로, 이단신의 부활을 꿈꾸었던 최후의 황제가 바로 <율리아누스>이다. 그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이복동생인 콘스탄티우스의 2번째 부인의 2번째 아들이었다. 하지만,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누스를 증오했다. 정복국가인 로마를 이끌었던 로마의 군대는 콘스탄티누스의 직계 아들들만을 후계자로 인정하기 위해 다른 왕족들을 모조리 살해했기 때문이다.

율리아누스 역시 부모를 잃고 방랑의 세월을 겪는다. 왕족과 떨어져 방랑하는 동안, 율리아누스는 그리스 전통의 철학과 문학에 흠뻑 빠져들었다. 기독교와는 다른 플라톤 사상을 접하면서 율리아누스는 기독교 체계가 말하는 구원은 허망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신은 이데아의 하나일 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데아를 기독교인들이 <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만약 신이 있다면 그것은 미트라신(태양신 : sun)일 것이다. 태양은 눈에 보이는 현실이며,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막강한 힘의 원천이니까...

율리아누스는 왕족으로서 기독교식 영세를 받고, 기독교 교육을 받았지만 마음은 딴 곳에 있었다. 그가 기독교를 믿는 척 하는 것은, 공인된 기독교 사회를 정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로마에서는 기독교인들도 전통 그리스 문화에 익숙해져 있었다. 기독교 주교들이 사회지도층인 이상, 전통 로마의 문화와 율법에 어느 정도 적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율리아누스는 기독교인이면서도, 전통문화와 전통신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가진 친구들을 많이 사귀려고 노력했다.

어린시절, 그리스에서 유배와 같은 시골생활을 하던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의 부름을 받았다. 콘스탄티누스는 친척들이 모두 죽어서 부황제로 임명할 자원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를 발탁한 것이다. 그러나, 부황제가 된 율리나누스는 강력한 로마 군대를 조직하여 황제를 위협하였다. 마침, 콘스탄티우스가 죽자 그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통합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율리아누스는 교묘하게 기독교를 탄압하기 시작한다. 표면적으로는 모든 종교를 인정한다고 칙령을 내리고 기독교를 우대하는 듯한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일에 사사건건 개입하면서 자신이 교회의 최고 <수장>임을 주장하였다. 로마 교황을 무시하고, <교황>의 역할까지 한 율리아누스는 교회 지배층을 전통신을 믿는 자들로 채워 버렸다.

율리나누스의 주변에서 기독교인은 사라지고, 그리스인들이 중심에 나타났다. 교회의 제단은 사라지고, 제우스 신에게 바치는 피의 의식이 예배를 대신하게 되었다. 율리아누스는 이집트의 파라오와 맞먹는 <태양신의 숭배자>이자, 그리스 플라톤주의를 숭배하는 자들의 <희망처>가 되었다.

율리아누스는 다방면에 재주가 많은 천재였지만, 그 재주를 모두 크리스찬 탄압에 쓰고 말았다. 예루살렘의 교회를 무시하고, 유대교 성전을 만들어 교회를 조롱하기도 했다. 크리스찬은 로마인이 아니라며 군에서 모두 쫒아내기도 했다. 그의 여러 저서들은 고대 그리스의 합리적인 철학과는 거리가 먼 크리스트교의 허무맹랑함을 크게 비판하고 있다. 안티오크의 대성당을 파괴하고, 순교자들의 유골을 부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의 분노 때문일까.... 황제가 된지 2년도 되지 않았던 율리아누스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어디선가 날아오던 눈먼 무기에 맞아 죽고 말았다.

그리고, 전통신의 시대는 끝났다. 율리아누스가 죽음으로서 더 이상 크리스트교를 탄압하는 이들은 사라졌고, 그리스 문화가 기독교 사상보다 우수하다고 여겨지는 시대도 끝나고 난다.

그리고 그리스 최후의 철학자들 역시 역사 속으로 조용히 사라지거나, 크리스트교 교리와 타협을 하게 된다.

율리아누스 조각상(프랑스 파리)

 

2. 마지막 전통철학자의 비참한 죽음 : 히파티아(371-415)

최후의 전통 철학자라고 불리는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는 기독교가 국교로 지정된 테오도시우스 황제 무렵의 인물이다. 그리고 그녀의 시대는 크리스트교 최고의 교부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던 시기와도 같은 시기이다.

그녀가 살았던 5세기 초반은, 이미 전통 플라톤 철학은 기울고, 크리스트교가 대세가 되어 버린 시기였다. 어느 날 부터, 진리는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 되어 버렸다. 우주의 근원을 탐구하고 이데아의 세계를 엿보던 그리스 철학자들은 설 자리를 잃어 버렸다. 이제 민중을 계몽하고, 민중을 바른 길로 이끌어 가는 것은 <전통 철학>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이 시기에 태어났다면 이단으로 분류되었을지도 모른다. 우주의 진리를 외치던 길거리 철학자들은 이제 과격하고 절대적 믿음을 가진 크리스찬들에 의해 역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이렇게 철학의 시대가 끝나감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찬들의 영역을 뛰어넘는 얼짱 여성 철학자가 있었다. 그녀가 바로, 5세기 신플라톤 철학의 맥을 이었던 <히파티아>였다.

히파티아는 철학자이자 과학자로서 큰 명성을 날렸다. 그녀의 미모와 깊은 학식은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았고, 그녀의 사회적 위신은 대단하였다. 그녀는 유명한 철학자인 테온의 딸로서 <알렉산드리아>의 플라톤 철학을 이끌어갔으며, 수많은 제자들이 그녀를 떠받들고 따라다녔다.

그녀가 크리스찬으로부터 공격을 받은 것은 너무나 뛰어난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전통 그리스-로마 철학의 기본 바탕은 <웅변술>이었다. 그녀는, 뛰어난 미모와 함께 세상에 초연한 듯한 품위가 있었으며, 말로서 그녀를 당할 수 없을 정도로 달변이었다. 그녀의 집에는 당대 부자와 정치인들이 자문을 구하기 위해 찾아들었다. 하나님의 교회가 아닌 우주의 근원을 탐구하는 철학자의 집으로....

크리스찬들이 그녀를 공격한 표면적 이유는 <이교신앙>이었다. 그녀는 고대 철학을 꼼꼼히 파악하여, 간략한 문구와 기호로 남기곤 했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이라던가, <피타고라스>의 수학 공식 등의 기호를 해석하면서 크리스찬과는 다른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곤 했다.

크리스트교 교리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고대 철학자는 더 이상 로마 제국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더구나, 철학자와 교회의 역할은 중복되었다. 사람들은 기쁘고 슬픈 일이 있을 때 교회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철학자가 인생을 상담하고, 사회를 이끌어가는 핵심 구성원 역할을 한다면 철학과 신학은 같은 길을 갈수가 없다. 어느 하나가 죽어야 하나가 산다. 그렇지 않다면, 둘을 같은 것으로 묶어야만 한다.

어느 하나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히타피아를 살해했으며, 둘을 같은 것으로 묶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교부 철학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들의 생각은 같은 것이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철학은 단독으로 남아서는 안된다는 것....

또, 그녀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독 오레스테스와 가깝게 지내면서, 실제로 알렉산드리아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교회세력과는 반대편 입장에 서 있었다.

당시 크리스찬들은 몇십년 전에 율리아누스가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해 유대교에게 잘 해준 것을 비판하고 있었다. 더구나, 크리스찬 자체가 예수를 모함한 유대인들을 경멸하였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유대인들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히파티아는 유대인을 보호하려는 총독과 친구였다.

이러한 이유들이 합쳐서 광분한 크리스찬들이 히타피아를 무참히 살해해 버린 것이다.

히파티아를 찬양한 이들 중에는 유명한 기독교 철학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당시 사회는 전통 철학자와 기독교 주의자들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 키릴루스는 철학자가 교회의 역할을 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당시 교회의 지배층은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해도 된다고 생각하였다. 특히, 이단에 대한 정화는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마차를 타고 가는 히파티아를 납치한 뒤 무자비하게 폭행하고 교회로 끌고 갔다. 히파티아는 옷이 모두 벗겨진 채 살을 찢기는 고문을 당한 후, 숨이 남아있을 때 화형에 처해졌다.

히파티아의 최후(1885년작)

또 하나 주목할 점은 히파티아와 친한 인물들이 당시 과학자나 지식인들이었다는 점이다. 철학과 과학의 지식을 갖춘 이들은 보통 <네스토리우스파> 교인들이었다. 네스토리우스파 교인들은 예수가 신성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가 육체를 가지고 지상에 온 이상, 예수 역시 인성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네스토리우스파는 훗날, 451년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인정받는다.

그러나, 히파티아를 죽인 키릴루스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페수스 공의회)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은 모두 이단이라고...

즉, 히파티아의 죽음은 단순히 한 여성 철학자의 죽음이 아니라, 철학과 과학의 이념을 가진 자들, 예수를 인간으로 보는 자들을 모두 불태워 죽이겠다는 교회의 극단적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히파티아의 죽음과 네스토리우스파에 대한 탄압으로 수많은 과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동쪽으로 도망가게 되었다. 시리아 등 서아시아에 정착한 네스토리우스파는 <경교>라고 불리며, 아시아 크리스트교의 일파로서 자리잡게 된다. 이것은 크리스트교 교리가 하나로 일원화 되는 과정인 동시에, 주류 교리와 반대되는 자들은 추출되는 과정과도 연결되는 것이었다.

히파티아는 불에 타 죽었다. 이제 전통 플라톤 철학은 죽었다. 기존 교리와 대치되는 네스토리우스파도 사라졌다.

그녀가 죽음으로서 고대 철학은 사라졌다. 플라톤 철학은 크리스트교 교리에 종속되어 교부철학으로 다시 탄생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보고인 알렉산드리아는 로마가 망한 뒤 몇백년간 서유럽인들의 머릿 속에서 잊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초기 교회에서는 이교도와 이단을 정화하고 정통적 교리를 지키기 위한 <초기 교회>의 움직임이 있었다. 히타피아가 죽을 무렵, 기독교 교부 철학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을 저술하여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이제 이데아의 세계는 죽었고, 원죄에 대한 구원의 시대가 왔다. 철학은 사라졌고, 철학은 신학에 종속되어 간다. 철학자의 시대는 가고, 신학자의 시대가 왔다. 바야흐로, 카톨릭에 의해 통일될 중세가 다가오는 것이다.

자, 그럼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서유럽 전체를 장악하게 되는지 세 인물을 통해서 알아보겠다. 다음 장에서 살펴볼 인물은 아우구스티누스, 테오도시우스 1세, 갈라 플라타키아 이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 http://historia.tistory.com  

 

   - 위의 이야기가 자세히 나오는 책들....

로마제국 쇠망사. 1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에드워드 기번 (민음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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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4: 그리스도의 승리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시오노 나나미 (한길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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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2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에드워드 기번 (민음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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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성서의 이해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김용옥 (통나무,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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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쇠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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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후지사와 미치오 (일빛,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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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거룩함과 회개
카테고리 종교
지은이 박봉일 외 (예수전도협회,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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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의 역사와 황제들
카테고리 아동
지은이 박현철 (삼성출판사,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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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기독교 편>

4화. 로마의 크리스트교가 박해 속에서 살아남은 이유는?

1. 탄압 속에서 성장한 크리스트교

사도 바울이후, 극심한 탄압을 겪으면서 크리스트교는 교세를 확장해 나간다. 도대체 어떤 힘이 정치적 탄압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트교를 발전시킨 것일까?

로마 황제들은 지속적으로 크리스트교를 탄압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크리스트교의 일신 사상이 로마 황제 체제에 위협이 되기 때문이었다. 기본적으로 크리스찬들은 로마 황제가 아닌 하느님을 숭배한다. 황제가 탄압하면 숨어서 예배를 드리면 그만이다. 지하공동묘지(카타콤)에서 예배를 하는 크리스찬들은 지독하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기본적으로 만민에 대한 사랑과 평등을 강조하는 크리스찬은 정복 국가인 로마의 이상과도 맞지 않는다. 로마는 병영제도에 따라 시민권을 분배하고, 정복사업에 따라 경제체제를 확장시킨 말 그대로 <제국>이었다. <제국>에서 군대를 가지 않는 다는 것은 곧 국가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이었다.

반면, 크리스트교의 만민애는 하층민뿐 아니라 지배층에도 매력적인 것이었다. 처음 로마의 지배층은, 예수의 부활과 구원에 대한 믿음을 <로마 신화> 정도의 이야기로 치부했었다. 그러나, 2-3세기가 지나면서 로마인들은 점차 이 매력적인 종교에 대해 적응해 나가기 시작한다.

3세기 이후, 점차 쇠약해져 가던 로마는 현실로부터 눈을 돌려 내세도 생각하게 되었다. 믿음이 곧 구원이라는 기독교 이념은 단순하면서도 매력적인 것이었다. 특히, 책으로 구성된 신약은 각 복음서별로 읽기가 간편했다. 유대교는 구전된 율법체계가 복잡했고, 로마 신화의 신들은 체계화되지 못하였다. 셩경은 인간의 창조부터, 악을 이겨내는 과정, 그리고 천국으로 가는 결말이 명확했다. 어렵고 방대한 내용의 구약을 예수의 가르침에 맞게 쉽게 정리한 <바울>과 후계자들의 노력은 로마인과 이교도를 크리스찬으로 끌어들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더 중요한 점은 굳이 책으로 읽지 않아도 그 시작과 결말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구원에 대한 믿음을 단 몇마디로 설명하기 좋았다는 점이다. 종교의 핵심 교리를 쉽게 이해하고 빠져들면, 그 다음에 구체적인 내용들은 살을 붙여서 더 배우면 된다.

결정적으로, 로마인들이 크리스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속적인 <순교자들> 때문이었다. 로마의 지배층은 기존 전통신을 부정하고 로마의 가치체계를 흔든다는 이유와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크리스찬을 처형하였다. 그것도 잔인한 방법으로 처형하기 위해 광장에서 공개처형한다던가, 사지를 찢어죽인다던가 하는 방법을 쓰곤 하였다.

그러나 초기 순교자들은 죽음을 맞이하여 행복한 표정을 짓곤 하였다. 최대한 행복한 얼굴을 보여야 천국에서 문을 열어주는 이들이 자신을 기쁘게 받아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처참한 죽음에 기쁜 얼굴을 보이는 크리스찬을 보면서 로마인들은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2. 로마 행정구역과 일치하는 교구제도의 확립

3세기, 강대했던 로마제국은 팽창할 만큼 팽창해 버렸다. 더 이상 점령할 곳이 없어지자 로마는 전성기를 지나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점령할 곳이 없다는 것은 그 많은 군대를 유지할 이유가 없다는 뜻도 된다. 점령지의 땅을 군사시민에게 분배하여 세금을 받아온 로마로서는 체제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러나 체제를 바꾸기엔 로마의 덩치는 너무나 커져 버렸다.

로마의 영토가 일정화 된 3세기 무렵,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노력으로 곳곳에 교회를 세운 크리스찬들은 교회의 조직을 로마 제국 전체의 영역에 맞추어 조직하였다. 국가 행정구역과 종교구역을 일치시킨 <교구>가 등장한 것이다.

일단, 하나의 도시와 그 도시를 둘러싼 농촌지역을 통합하여 하나의 큰 교회가 설립된다. 지역 교회를 다스리는 수장을 <주교>라고 한다. 쉬운 말로, 도시 내 교회의 수장을 말한다.

이런 작은 도시들이 모인 각각의 로마 속주에는 관할 도시의 교회를 총괄하는 수장으로 대주교가 있다. 예를 들어 과천, 안양, 수원에 각각 주교가 있다면, 그 지역을 총괄하는 서울에는 <대주교>가 있어서 각각 도시의 주교를 총괄하는 것이다. 이들은 책임지는 지역이 각각의 교구이다. 즉, 교구는 로마의 도시행정구역과 일치한다.

그보다 상위 개념으로 예수의 <사도>들이 교회를 세운 5교구가 있다. 5교구란, 로마제국의 핵심 지역으로서 수도 로마,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예루살렘을 말한다. 이 5교구의 수장은 수좌대주교라 불리며 크리스트교 사회의 핵심 중책을 맡는다.

그런데, 이 5교구 중에서 예수의 제자 <베드로>과 관련된 로마의 교회는 점차 다른 지역의 교구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되었다. 특히 로마의 수도라는 점에서 다른 교회보다 우위에 있었고, 점차 로마 교회는 다른 모든 교회를 총괄하는 최고 교회가 되었다. 로마 시대 이후, 로마 교회의 수장은 <교황>으로 여겨지게 되었고, 서방 모든 교회를 총괄하게 된다.

반면, 로마 멸망 이후 동방 교회는 동로마의 중심지 <콘스탄티노플>에서 책임지게 된다. 동방 교회 역시 동로마제국의 행정구역 체계에 맞게 교회 조직이 이루어져 있었다.

이 교구제도는 로마가 크리스트교 국가로 변신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도시 교구의 주교는 주민들의 동의로 선출되면 죽을 때까지 그 자리를 유지하였다. 특히 크리스트교가 전체 로마 인구의 20%에 육박했던 3세기 말엔 그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중앙에서 로마 황제가 제국을 총괄한다면, 도시내에서는 주교의 영향력이 행정관리의 영향력과 맞먹는 정도였다.

더 중요한 점은 이러한 교구제도가 주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 냈다는 점이다. 초기 교회는 순교자들의 순수한 열정이 남아있었다. 교회는 예수의 믿음에 따라 약자를 보호했으며, 제국의 횡포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제국은 시민과 이민족에 대한 차별이 남아있었고, 강자와 약자에 대한 대우가 달랐다. 그러나 종교는 어떤 이들이든 받아들였다.

로마 제국이 도시내에서 무리한 징병을 할 때 교회는 적당한 선에서 타협안을 제시하였으며, 무리한 세금 요청이 들어오면 <지식인>이자 <협상가>인 교회 지도층이 나서서 타협하였다. 즉, 초기 교회는 주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치 역량을 키웠던 것이다. 도시 안의 사람들이 이민족에 의해 잡혀갔을 때, 그들의 몸값을 지불하고 타협안을 제시하는 역할도 교회가 하였다.

기원후 4세기, 황제도 결코 교회를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으며, 로마 황제가 제국의 체체를 그대로 둔 채 나라를 이끌어가려면 크리스찬의 교구제도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마련된 것이다.

3. 로마가 전통적으로 믿었던 종교와 크리스트교

초기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다. 로마 문화 자체가 그리스적인 요소를 많이 받아들었고, 그리스 문화는 이집트 문화의 요소를 받아들였다. 따라서, 로마의 신화를 보면 거의 그리스 신화와 체계가 비슷하다. 그리고, 이집트 오리시스 신화 등의 영향을 받은 신화 이야기도 많이 담겨 있다. 그리스와 로마신화는 제우스 신을 쥬피터라고 부르는 등 명칭과 풍습, 일부 줄거리 등이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신화내용도 유사하다.

이러한 다신교의 풍습이 로마 초기부터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로마의 종교는 그리스 신화를 기반으로 황제 예배를 시도한다. 즉, 그리스 신화의 가장 상위신인 쥬피터(제우스)를 황제의 권위와 맞먹는 권위로 신격화한 상태에서 나머지 신들은 각각 로마의 지배층 사회에서 숭배하는 하위신으로 여긴 것이다. 초기 신앙을 황제예배 신앙과 결부하여 국가종교화 시킨 것이다.

이렇게 설정된 로마의 전통 종교는 로마 제정 초기 견고하였다. 그 고유신앙은 황제예배와 결부되어, 황제권 강화에 이용되었다. 그러나, 로마 후기 사회혼란으로 이러한 황제중심의 전통신앙이 흔들리게 된다. 특히, 제우스 위주의 신의 위계질서보다 그리스식 디오니소스 신앙이 대두되었다.

디오니소스 신앙은 이집트 오리시스 신화에서 영향을 받아 영생, 불멸, 구원, 재생 등을 강조하는 신앙이다. 또, 오리엔트의 밀의 종교도 도입되어 로마는 점점 다종교 사회가 되어갔다.

기원후 4세기, 로마 지배층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강건함을 잃고 향략적인 생활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에피쿠로스 학파적인 쾌락주의가 만연하게 되었다. 본래 에피쿠로스의 이념은 경건한 생활 속에서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이들 로마의 지배층은 이 사상을 단순한 쾌락주의 이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기독교적 이념을 가진 로마인들은 에피쿠로스 학파는 악마의 학파다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로마의 지배층은 이 사태를 놓고 의견이 분분하였다. 제우스를 비롯하여 전통적 신을 무시하였기 때문에 로마가 망한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크리스트교라는 이단 때문에 로마가 흔들린다는 말을 한 사람도 있었다. 반대로, 크리스트교인들의 겸손하고, 청렴한 정신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찌되었던, 4세기의 로마는 더 이상 정복사업을 하지 못하면서, 대중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 하는 쇼맨쉽을 자랑하는 사회가 되었다. 제정 초기부터 등장한 <빵과 서커스> 정책은 그것을 대변한다. 이 정책은 로마 시민들에게 먹을 것과 볼 거리를 계속 제공해서 국가에 대한 불만을 최소화하는 정책이었다. 검투사들은 피터지게 싸웠고, 시민들은 콜로세움에 먹거리를 들고가 잔뜩 취한채 고성을 질렀다.

이러한 제정 후기 로마 사회의 전반적 향략주의와 기강 문란은 민중들의 종교적인 경향을 기독교쪽으로 돌리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특히, 교양있는 로마의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점을 신플라톤 철학의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신플라톤 철학은 지상 세계의 세속적, 향락적 생활보다, 더 높고 가치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여 로마인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한 사상이다. 이러한 이상주의적 사상은 크리스트교의 신비주의적 사상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실제 플라톤 사상은 그리스 종교와 연관된 고대 사상이지만, 크리스트교가 이 고대 철학들을 받아들이게 됨으로서 중세시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크리스트 교리가 합치되는 스콜라 철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4. 교세가 커질수록 박해도 커지고...

크리스트교의 교세가 확장될수록 반대로 박해하는 사람들의 강도도 더해져갔다.

네로 황제는 로마의 대화재가 발생하자 그것을 모두 크리스트교 소행으로 몰아 수많은 예수인들을 죽였다. 5세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아예 칙령을 발표하여 크리스트교인들이 종교적 활동을 하느라 국가 대업을 경시한다면서, 크리스트교인들이 교리를 내세워 국가 사업을 방해하는 것을 막아 버렸고, 반대하는 자들을 모두 죽여 버렸다.

그러나, 4세기 로마 사회는 몇몇 크리스찬을 죽인다고 사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였다. 밀려오는 게르만 족들을 막을 수 있는 힘이 로마에게는 없었고, 정복 전쟁 중단으로 발생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체제 전환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새로운 체제의 로마를 만들기 위해 결단을 내린다. 동쪽의 콘스탄티노플을 하나의 수도로 정하여 로마와 함께 2개의 수도 체제와 3명의 황제체제로 국가를 개편한다. 아울러, 크리스찬들의 교구제도를 인정하여 교회의 지역 지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밀라노 칙령) 즉, 크리스트교가 각 교구내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자, 지금까지 곁다리 짚듯이 내려온 크리스트교 성립의 역사는 이만큼에서 막을 내리도록 하자. 지겹고도 재미없는 이야기를 끝내고, 본격적으로 교회 이야기에 들어가도록 하겠다.

지금부터 이어질 내용들은 거시적 틀에서 이야기하는 크리스트교가 아니라 하나 하나 인물들을 통해서 교회의 역사를 살펴보려고 한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 http://historia.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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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이 빠져드는 기독교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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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 영화와 방송, 인물, 정보

예수
감독 존 크리쉬, 피터 사익스 (1979 / 미국)
출연 요세프 실로아흐, 브라이언 디콘, 니코 니타이, 알렉산더 스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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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비티 스토리-위대한 탄생
감독 캐서린 하드윅 (2006 /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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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지막 유혹
감독 마틴 스콜세지 (1988 / 캐나다, 미국)
출연 하비 키이텔, 스티브 쉴, 베르나 블룸, 폴 그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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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
감독 윌리엄 와일러 (1959 /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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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신은 아십니다
감독 울리히 자이델 (2003 / 오스트리아)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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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A.D.
감독 마티유 카소비츠 (2008 / 프랑스, 미국)
출연 빈 디젤, 멜라니 티에리, 양자경, 제라르 드빠르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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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 여기에
채널/시간 기독교TV 목 오후 6시 20분
출연진 신성남, 오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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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선의 이브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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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진 박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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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크리스천
채널/시간 기독교TV 토 오전 10시 50분
출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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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토리아 2009. 역사 속의 종교 이야기 <기독교 편>

2화. 크리스트교의 기원 - 유대교

1. 유대교, 넌 어떤 배경에서 등장했니?

자... 이제 본격적인 기독교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그런데, 기독교 이야기를 하기 전에 꼭 짚고 넘어갈 종교가 하나 있다. 그건 바로, 구약 성경을 공유하고 있는 유대교이다. 기독교의 역사가 유대교에서 출발하는 만큼 대충 짚고 넘어가 버려고 한다.

일단, 유대교 하면 떠오르는 고대 국가가 헤브라이 민족의 <헤브라이>이다. 그럼 헤브라이는 어떤 국가였을까?

헤브라이 민족은 기원전 20세기 정도부터 지금의 이란과 시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해있었던 셈족을 말한다. 셈족은 고대 인도-아랍계의 민족의 분파인데, 기독교와 구약성경을 공유하는 이슬람의 아랍계인들도 처음에는 셈족에서 출발하였다고 한다. 알고보면 세게는 다 하나인데, 왜들 그렇게 아웅다웅 하는지...

헤브라이 민족은 당시 가장 강성했던 국가인 이집트 왕국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다. 당시 이집트 신왕조는 이전 이집트 왕국과는 다르게 대외무역 등으로 메소포타미아 국가들과 교류도 하곤 했었다. 헤브라이 노예들은 이집트 왕조의 노예였는데, 주로 개인의 가내 노예이거나, 수공업 정도를 담당하는 노예였다. 때때로 국가적 부역을 담당하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자신들의 고난에 대한 신(여호와)의 믿음을 가지고 견디곤 하였다.

기원전 12세기경 청동기 국가였던 이집트와 오리엔트 국가들이 철기 시대를 맞이하여 큰 분열을 겪게 된다. 전설적인 유목 정복자 히타이트족들이 등장하여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 등을 휩쓸고 다니자 오리엔트 문명은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였다.

이전의 강대국인 바빌로니아 왕국과 이집트 왕국은 쇠약해졌으며, 이 때 헤브라이 민족의 지도자 모세가 노예 상태에 있던 민족을 규합하여 이집트를 탈출하게 된다. 그 유명한 모세의 기적은 기원전 11세기 경에 이루어졌으며, 여호와의 기적으로 홍해바다를 가르고 탈출한 헤브라이인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체계화 시키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헤브라이족이 모여 이루어진 유태인들은 <유대교>의 경전인 <구약성경>을 차츰 정리하게 된다.

2. 초기 청동기 족장 시대 : 아브라함 부족

자 그럼, 본격적으로 유대인들의 종교만들기 과정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구약으로 미루어, 최초의 유대인 시기는 청동기 족장 국가 시대부터 시작한다. 이 시기에는 우리나라의 부족사회 쯤으로 보면 될 듯하다.

  
구약에서는 이들 족장 세력 중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인 족장 일가의 이야기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그 족장이 바로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과 <계약>을 체결하였다.

계약의 내용은 간단하다. 신이 아브라함의 부족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랑을 베풀고 지켜야할 율법을 내린다. 아브라함은 그 율법을 계약으로서 지키고, 여호와를 위해 충실한 지킴이가 된다는 내용이다. 계약이 성립됨과 동시에 아브라함의 민족은 선택받은 민족이 되었다.

문제는 아브라함의 족속들이 계약을 존중하는 한, 여호와는 그들을 끝까지 사랑으로 지킬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바로 유대교의 율법이 엄격한 이유이며, 유대인들이 계약을 파기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톨릭에서는 기원전 4004년에 천지창조가 이루어진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유대교의 천지창조는 아브라함의 계시에서부터 계산하여 기원전 3761년이다. 유대인들은 이 연대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서아시아의 청동기 연대로 비추어 볼 때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연대는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유대인들에게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 예수 탄생으로 계산하는 서력이나, 단군의 탄생으로 여겨지는 단기 역시 종교와 민족적 관점에서 계산된 연표이기 때문에 뭐라 할 수 없는 사항이기 때문이다.

이 족장의 시기는 구약 성경의 초반부를 이루는 시기이기도 하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족장들의 시기로서 유대교의 기원을 이루기 때문이다.

반면, 이 족장의 시기에 등장한 아브라함의 아들들 때문에 아랍인과 유대인은 정통성 문제를 두고 다투기도 한다. 아랍인과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모두 구약성경을 종교의 <경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아랍인의 성경인 <쿠란>은 아랍인이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즈마엘의 후손들이라고 말한다. 반면, 유대교와 기독교인의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의 본처 아들 이삭이 유대인의 선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즈마엘이든 이삭이든 결국 민족의 시조는 아브라함으로 귀결되지 않는가? 같은 조상으로부터 이어진 두 민족이지만, 지금은 서로 사이가 좋지만은 않다. 두 민족은 어떤 역사적 상황을 겪으면서 지금의 앙숙으로 발전한 것일까? 그 부분은 훨씬 뒤의 이야기에서 전개된다.

3. 모세의 시대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년 경 신의 계시에 의해 하란에 정착하였다. 그 지역은 신이 계시한 <비옥한 초생달> 지역으로서 메소포타미아의 티그리스강이 흐르는 알짜배기 땅이었다. 자금의 팔레스타인 지역과도 어느 정도 겹치는 지역이다. 그러나, 족장 세력이 다스리던 아브라함의 시기를 지난 뒤 유대인들은 오랜 방랑 끝에 이집트 신왕조의 노예로서 살아가게 된다.

이집트의 신왕조가 약해지면서 탈출한 모세는 헤브라이 민족을 이끌고 하나님의 시험을 받기 시작한다. 실제 역사적으로는 <유목의 시대>를 뜻한다. 

구약에서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험하기 위해 광야에서 고난을 주신 것이라고 말한다. 맞다. 이집트 북부 지방은 지금 사하라 사막의 북부와 연결되는 지역으로 농경은 어렵고, 유목도 당시 기술로 벅찬 지역이었다. 오히려 유목이라고 보다는 40년간의 방랑의 시기로 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국가가 없는 민족이 방랑하는 것은 유목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로지 믿음만으로 버티기 모드에 들어갔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모세는, 부족의 단합을 위해 더욱 더 강력한 <율법>으로 부족들을 다스려야 했고, 그 율법은 점차 <구약성경>의 토대가 되었다.

4. 철기 국가시대

초기 철기 시대는 유목생활에서 점차 벗어난 시기를 말한다. 당시 철기가 조금씩 알려지면서 농경생활이 가능해졌고, 점차 국가라는 단위의 틀이 생길 여력이 생긴 시기이다. 그리하여 헤브라이 민족에게도 통일국가가 등장하게 된다. 우리로 따지면 청동기-철기 시대에 탄생한 고조선과 같은 족장 연합 국가라고나 할까?

율법을 강조한 이들 민족은 다른 민족보다 빠르게 강력한 왕권을 가질 수 있었다. 초대 왕인 사울부터 2대왕 다윗, 3대왕 솔로몬으로 넘어가는 짧은 시기에 헤브라이 왕국은 곧바로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 핵심에는 율법이 있었다. 보통 솔로몬이 지혜의 왕, 재판의 왕으로 알려진 것도 헤브라이의 독특한 율법 관념 때문이었다. 원래의 율법이 여호와와 부족간의 계약이라면, 국왕의 율법은 부족간의 계약관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계약관계에 익숙하였고, 계약에 복종하였던 이들 부족인 쉽게 율법에 적응해 나갔다.

그러나, 율법에 대한 이해차이와 왕권을 지지하는 초기 부족간의 갈등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있었고, 현명한 왕 솔로몬이 죽은 뒤 헤브라이 왕국은 얼마 못가 분열되고 만다. 북방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방의 유대 왕국은 반백년 동안 전쟁을 계속하였고, 결국 헤브라이는 내분에 의해 약해진 채 오리엔트의 철기 국가들에게 멸망하고 만다.

5. 신화가 구약으로...

구약성경의 구체적은 뼈대는 기원전 10세기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모세의 기적을 본 헤브라이인들은, 그 이전에 입으로 전해져 내려온 믿음의 이야기들을 하니씩 문자로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일단, 창세기편의 천지창조부터 시작해서, 인류 탄생, 노아의 홍수, 바벨탑 이야기 등 신화 뿐 아니라 민족의 겪은 고난까지 하나의 스토리로 엮어갔다.

이 와중에 많은 주변 신화가 구약에 들어가게 되었다.

가장 먼저 구약에 영향을 준 것은 이집트의 <사자의 서>였을 것이다. <사자의 서>는 내세로 가는 방법을 주문으로 표현한 이집트 왕가의 걸작이었다. 원래 사자의 서는 이집트 고왕국의 <파라오 : 절대 지배자>가 죽은 뒤 신이 되어 천국으로 돌아갈 때 필요한 주문을 죽은 자 옆에 놓아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왕국 시기에 유력 귀족과 서기관들도 사자의 서를 베끼기 시작하였고, 신왕조에 이르면 일반민들도 사자의 서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종이(파피루스)가 보급되면서 사자의 서는 몇천개씩 돌아다니곤 했다고 한다. 이집트 학자들에 의하면, 유대교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까지도 <사자의 서>를 비롯한 이집트 신화의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일단, 내세 사상과 관련있는 주신 <오시리스>의 지상에서의 삶이 노예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에게는 내세로 가는 희망의 원천이었다. 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다는 부분 등 수많은 부분이 초기 기독교 사상과 연관되어 있다.

또,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한 뒤 겪는 고난은 유목신과 농경신을 모시고 있던 메소포타미아의 전통 신앙과 많이 연결되어 있으며, 노아의 대홍수는 <길가메시 서사시>가 원전이다. 뿐만 아니라 원자료와 구약의 헤브라이 문체 등도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헤브라이의 구약이 경전으로서 큰 영향을 갖는 것은 단순히 <신화> 수준에서 이야기를 조합했다는 점이 아니다. 구약은 단순한 신화 수준의 이야기를 실제 존재하는 신의 이야기로 바꿔놓았다. 천지창조와 인간의 등장부터 아브라함의 자손들의 이야기, 노아의 홍수, 바벨탑 이야기 등등은 이야기 구조를 극적으로 만들면서도 하나의 전체적인 줄거리로 통합되어 있다.

결정적으로 이야기의 흐름 자체가 신에 의한 구원이라는 결말로 달려가고 있으면서, 그 결말을 위해 현실에서 해야 할 율법적인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다. 즉, 헤브라이인들에게 구약은 미래를 위해 할 일을 제시하면서도, 율법을 위한 지침서 역할까지 하는 것이다.

6. 언제부터 구약을 적기 시작했을까?

구체적인 종교가 역사에 등장하는 시기는 보통 청동기 시대에 군장(족장) 세력이 등장하는 것과 비슷한 시기로 보곤한다.

보통 부족국가에서는 부족의 족장을 신격화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특히 씨족간의 전쟁에서 이긴 군장 세력은 자신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기 위해 인간과 다른 특별함을 강조하기도 한다. 각 부족들이 각각의 신을 가지고 있다면, 그 신의 우월함은 부족간 군사력의 우월함에서 결판났을 것이다. 그러나, 헤브라이의 신은 다른 신과 다른 뚜렸한 강점이 있었다. 그것은 곧 <유일신>을 강조하면서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리스 신화나 인도 신화와 같이 외우기도 힘든 많은 신들이 존재하고, 그들 신들 간의 위계질서를 정하는 것은 부족간 위계질서를 정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것은 훗날 각 부족들이 강력한 왕권으로 흡수되었을 때, 수많은 신들이 소멸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유일신은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강력한 왕은 곧 신의 화신으로서 유일신을 단순하게 받아들 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 사회에서 대표적인 예는 이집트의 파라오이다. 태양신의 화신으로서 파라오는 다른 어떤 신의 도전도 받아들이지 않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일신이 진리가 되는 과정은 결코 수월하지 않다. 수많은 주변 신들을 물리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여호와는 어떻게 주변의 수많은 신을 물리쳤을까?

실제 유대교의 기반은 구약 성경의 기본 틀이 잡힌 것은 기원전 6세기 무렵이다. 헤브라이 왕국이 멸망하고, 유대인들이 신바빌로니아로 끌어갔던 바빌론 유수를 겪으면서 유일신 여호와는 오리엔트의 신들과 투쟁을 해야 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다곤 신,아시리아의 야스르 신, 페르시아의 미트라신 등등과 혈전을 벌이면서,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위대함을 대대적으로 광고해야 했다. 그 결과 유대인들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절대자로서의 신>이었다.

니들의 신이 부족신이라면, 우리의 신은 천지창조도 했고, 최후의 심판도 하는 신이거든?

이 절대자로서의 개념은 다른 신화에서도 나타난다. 그러나, 홀로 고고히 인류의 마지막까지 심판한다는 설정은 색다르다. 거기에 오직 유대인만의 신이라는 설정은 민족 자긍심에 불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한마디로, 지금은 당하고 살지만 죽은 뒤에 보자... 그거다. 삶은 짧고 영생은 길다?

더더욱 구약의 내용에 꼭 필요한 것은 이런 모든 상황들이 지켜진다는 <약속>이다. 성경이란 말의 어원 자체가 약속(testament)이다. 구약은 옛 약속, 신약은 새 약속이란 뜻이다. 성경은 창조에서 멸망까지가 모두 말한 대로 이루어진다는 약속을 담은 내용이며, 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바로 <율법>이다.

유대인들은 로마가 예수살렘 성전을 박살내는 것을 보면서도 <율법>만은 놓지 않았다. 그리고 그 율법을 지키고 구약의 말씀과 선지자들의 약속을 존중하면서 살려고 했던 이들이 <바리새파>의 유대인들이었다.

구약은 헤브라이 민족이 가장 어려움에 처했을 때, 꼭 지켜야할 약속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민족이 어려울 때부터 하나 하나 과거의 일들을 적기 시작해, 기원후 1세기 로마의 침공까지의 일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완성시킨 헤브라이의 역사서인 것이다.

역사블로그 <히스토리아> : http://historia.tistory.com  


   - 참고할 만한 책들

유대 전쟁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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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한길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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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강요(세계기독교고전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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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존 칼빈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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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 영화와 방송, 인물, 정보

예수
감독 존 크리쉬, 피터 사익스 (1979 / 미국)
출연 요세프 실로아흐, 브라이언 디콘, 니코 니타이, 알렉산더 스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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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비티 스토리-위대한 탄생
감독 캐서린 하드윅 (2006 / 미국)
출연 케이샤 캐슬 휴즈, 쇼레 아그다쉬루, 히암 압바스, 알렉산더 시디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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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마지막 유혹
감독 마틴 스콜세지 (1988 / 캐나다, 미국)
출연 하비 키이텔, 스티브 쉴, 베르나 블룸, 폴 그레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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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허
감독 윌리엄 와일러 (1959 / 미국)
출연 찰턴 헤스턴, 잭 호킨스, 헤이어 해러릿, 스티븐 보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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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신은 아십니다
감독 울리히 자이델 (2003 / 오스트리아)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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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론 A.D.
감독 마티유 카소비츠 (2008 / 프랑스, 미국)
출연 빈 디젤, 멜라니 티에리, 양자경, 제라르 드빠르디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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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사랑 여기에
채널/시간 기독교TV 목 오후 6시 20분
출연진 신성남, 오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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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선의 이브 타임
채널/시간 기독교TV 월 오후 2시
출연진 박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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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크리스천
채널/시간 기독교TV 토 오전 10시 50분
출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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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

로마 이후, 크리스트교 이야기 2번째

읽기 전 부탁 : 이 파트는 종교사가 아닙니다. 역사적인 부분이니까 종교적으로 덤비지 마세요.

1. 크리스트교에서 이단이란 무엇인가?

자, 이번에는 로마제국과 크리스트교 이야기 중 후반부로 이단이야기를 좀 다룰께요. 로마제국이 크리스트교를 본격적으로 인정하면서 크리스트교의 정체성에 대한 많은 논란이 시작됩니다. 신의 성격은 무엇이며, 신과 황제는 무엇이 다르며, 예수는 신성성을 가지는가의 문제와 부활의 확실성, 로마제국이 예수를 심판한 것에 대한 정당성문제 등등 끝없는 문제들이 돌발적으로 나옵니다. 로마 제국과 초기 크리스트교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하게 접근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황제와 교황에 의해 이러한 논의들은 차츰 이론적으로 해결되어 가며, 그 이론이 완성될 쯤엔 완성된 이론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자들이나 학파를 <이단>이라 규정하기 시작합니다.

실제 유럽의 고대, 중세, 근대기에 이단으로 마녀사냥당한 종교교파들을 보면 3부류가 있습니다.

첫번째로, 정말 신을 부정하는 크리스트교 공격파가 있는데, 이러한 경우는 매우 드물게 나타납니다.

두 번째로, 크리스트교의 교리상 문제를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새로운 이론을 내세우는 파들이 있는데, 이러한 파는 이단으로 추방당합니다. 그리고 추방당한 파는 완전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론의 강건함을 내세워 아시아나 북방 이민족의 크리스트교로 자리잡습니다. 네스토리우스파, 아리우스파 등의 크리스트교파는 아주 오랜 기간동안 서아시아부터 동아시아까지 전파되면서 아시아 문화에 영향을 줍니다.

세 번째로, 크리스트교와 교황이 세속화될 때, 교회개혁차원에서 기존 권위에 덤비는 신비주의파나 성경주의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중세에 대표적으로 이단 취급을 받아 <소멸>당하곤 합니다. 이들은 초기에는 기독교 교리를 확립한 교부들에게, 후기에는 교황세력에게 밀려 역사에서 사라지곤 했습니다. 알비즈와, 후스파, 도닌파, 위클리프의 경견주의파 등이 해당됩니다. 실제, 중세를 대표하면서 신앙을 지켜간 프란체스코파도 초기에는 교황에 의해 이단으로 몰릴 뻔 했다고 하며, 후기에는 도미니쿠스파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일부 계파가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2. 초기 교회에서 이단논쟁

초기 교회에서 가장 강성했던 파 중의 하나가 <그노시스>파입니다. 그노시스파의 성격은 한마디로 <영지주의>학파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들은 오로지 영적인 측면만을 강조합니다. 오직 영적 깨달음과 기도와 신성함으로 신에게 다가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간적 생활을 완전 부인합니다.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 생활한 것도 십자가에 속죄한 것의 의미는 완전 부정하면서, 오로지 신으로서의 존재만을 인정하는 학파입니다.

이 그노시스 학파의 이론은 로마 사회에서 큰 문제점을 불러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떤 존재인가? 그를 죽인 로마는 누구를 죽인 것인가 등등 수많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것을 놓고 그 유명한 그리스도의 <신성 논쟁>이 발생합니다. 그노시스파의 명맥을 이은 아타나시우스파에 대하여 아리우스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버지인 신과 아들인 그리스도는 동일한 본질일 수가 없다. 그는 사람으로서 태어나 사람으로서 로마제국에 의해 죽게 되었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은 신으로서 동일한 존재가 아니라 <유사본질>이다.

이렇게 말했죠. 이것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격하하는 발언으로 들릴 수 있는 내용이였습니다.

아타나시우스파는 그리스도는 인간인 동시에 완전한 신으로 지상에 내려왔다고 말합니다. 즉, 신이 인간의 모습을 한 것일 뿐, 그리스도 자체가 인간으로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버지 신과 아들신, 그리고 성령은 원래부터 신으로서 존재하였다는 내용을 포함하는 것으로서, 이것을 <동일본질설>이라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삼위일체설>이라고도 하죠.

결과적으로 신성논쟁은 <유사본질설>과 <동일본질설>의 대립으로 압축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 공의회를 열었고, 여기서 삼위일체설을 채택하여 아타나시우스파를 공식으로 지지합니다. 그러나, 황제의 공식 선언에 대해 교회의 각 계파들이 인정하지 않고 계속 논쟁과 싸움을 계속하였습니다. 훗날, 테오도시우스가 크리스트교를 국교화 하면서 다시 한번 삼위일체설을 확인하고, 반대파를 추방함으로서 이 논쟁은 대충 일단락 됩니다. 아리우스파는 추방된 이후, 게르만 사회로 넘어가 그들의 교화에 주력합니다. 게르만인들이 중세에 크리스트교를 쉽게 받아들이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추방된 아리우스파의 활약이였습니다.

실제, 그리스도의 신성성, 인간성 논쟁은 끝없이 계속됩니다. 에페수스 공의회, 칼케톤 공의회 등 역사상 유명한 공의회 들은 계속 삼위일체설을 지지하면서 나머지를 <이단>으로 규정하였고, 이러한 이단 논쟁은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거의 일천년 이상 계속되는 종교적 화두가 됩니다.

3. 교부들이 등장하여 교리를 확립하다.

이러한 크리스트교의 교리 논쟁과 이념 위기 속에서 초기의 교회를 굳건히 지킨 사람들을 <교부>라고 부릅니다. 교부들은 이교도, 이단설로부터 교회를 지키고 정통적인 신앙, 교리를 확립한 사람들이죠.

교부들은 삼위일체설 이후, 기독교 철학을 완벽하게 정리하여 이단파들의 도전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교부들은 교회의 철학적 전사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 철학에서 플라톤을, 헬레니즘 철학에서 스토아 철학을 가져와 단단한 신학적 철학인 <교부 철학>을 완성합니다.

이 교부들 중 가장 위대한 교부라 일컫게 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참회록을 쓴 아우구스티누스는 사실 초기에는 교회를 싫어하여 도망다니고, 가장 방탕한 생활을 즐기던 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교회에서 참회한 이후 그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교철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단파와의 논쟁에서 정결한 논리로 상대파를 굴복시켜가며 기독교 철학을 확립합니다.

먼저, 도나투스파와의 논쟁은 유명합니다. 도나투스파는 신앙을 버린 성직자가 관련된 성사는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이란 것의 정의가 무엇이냐고 따져가며 도나투스파를 무력화 시킵니다.

또, 로마가 이민족에게 당하는 것은 전통적 신앙을 버리고 낮선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라는 로마인들의 주장을 신국론에서 조목조목 반박합니다. 그의 논리정연함은 기독교적이라기 보다 철학적인 부분이 많지만, 그 철학은 모두 신앙심에서 우러나오고 있기에, 모두가 수긍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4. 아우구스티누스 <신국론>의 역사적 의의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은 후대 역사에 많은 의미를 끼치는 일종의 <성경>입니다. 실제, 중세 스콜라 철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일 뿐이며,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것을 잘 버무렸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입니다.

신국론의 전반부 이야기는 로마의 약탈 이야기입니다. 로마가 이민족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로마인들이 기독교인탓으로 돌리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렇지 않다는 증거를 조목조목 제시합니다. 기독교인은 경건하며, 참된 신앙을 누릴 줄 알며, 사랑할 줄 알며, 계율을 지킬 줄 압니다. 반대로 로마인들은 향락적으로 변했으며, 타락했고, 개인적 야망만을 따지며, 로마법의 이상을 잊었습니다. 황제가 크리스트교를 공인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크리스트교의 위대함도 있지만, 반대로 로마인들의 어리석음도 요인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죠.

신국론의 후반부는 크리스트교의 역사관과 입장을 논리적으로 서술한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크리스트교의 역사관은 고대적 순환사관을 탈피하는 <기독교적 종말론>입니다. 고대 투키디데스 등의 역사학자들은 모든 역사는 비슷한 상황이 돌고 돌기 때문에, 비슷한 역사적 경험을 알고 있으면 훗날 비슷한 역사적 상황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고대 <순환사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의 역사관은 역사의 순환성을 완전 부정합니다. 인류의 역사는 단순히 돌고 도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투쟁이 곧 <역사>로 봅니다. 인류는 아담과 이브 이후에 원죄에 대한 타락으로 얼룩진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구제를 받기 위한 투쟁이 곧 인생입니다. 따라서 역사는 <창세기>라는 시작이 있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종말이 있으므로, 아주 동적이고 극적인 전개가 곧 역사입니다. 역사는 순환되지 않고, 하느님의 계시에 따라 <종말>이 옵니다.

이러한 사상은 곧 중세 교회와 신학의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였습니다. 이로서 교부철학으로 크리스트교의 세계관을 완성하는 가장 중요한 역사의 한페이지가 완성된 것입니다.

그의 핵심 사상은 인류가 아담 이후 죄를 가지고 태어난다는 <원죄론>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있어 인간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신만이 구원에 대한 자격을 갖는다는 <의지의 예속성>입니다.

실제 그의 사상은 대부분 중세 철학의 기본이 되지만, 원죄론과 의지의 예속성은 중세철학에서 완전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습니다. 이유는 교황을 필두로하는 중세사회에서는 <신의 의지>보다는 <성직자의 권능>과 <교구의 자율성>이 강조된 면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원죄론>은 교황에 의한 <구원의 전달>로 이론이 바뀌게 됩니다.

그의 원죄론과 의지의 예속성이라는 교부의 기본 이론을 충실히 이행한 사람은, 근대 종교 혁명기의 루터, 칼뱅이였습니다. 루터의 <원죄론>과 <성경지상주의>, 칼뱅의 <예정설>등은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그들은 그 이론을 관철시키기 위해서 중세 <교황파>와 유혈이 낭자한 싸움을 벌이게 됩니다.

(이 파트는 종교사가 아닙니다. 역사적인 부분이니까 종교적으로 덤비지 마세요. 난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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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 20) 독립협회 이야기 - 본문

 

1. 1896년 : 독립협회를 발족하고, 독립신문을 만들다.



지난장에서 독립협회가 발족할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요인을 아관파천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죽은 뒤,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이동하였고 이후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각국의 열강들이 우리의 이권을 침탈하였습니다. 지식인들은 이러한 망국의 행태를 용납할 수 없었고, 우리가 독립국가임을 천명하는 수단으로 독립협회를 발족한 것입니다.

보통 독립협회하면, 전국민이 참여한 거국적인 민족운동단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가 생긴 것은 사실 국가 존망의 위기감을 느낀 정부 기득권 세력과 개혁세력들로부터입니다.

독립협회의 초기 맵버는 서재필 등을 비롯한 구미파 세력(친미적 세력, 정동구락부 세력)이 있었고, 또 갑오개혁과 개화파의 맥을 잇는 세력들도 참여하였습니다. 또한 정부 고위관리들도 참여하여 정부 방침이 독립협회에 녹아있었습니다.

독립협회를 1896년 처음 발족한 것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간 이후, <조선이 청의 간섭을 받지 않는 국가임>을 천명하기 위해 독립문을 건설하면서부터입니다. 청나라의 사신이 머무는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움으로서 조선의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초기 독립협회는 독립공원을 조성하고, 조선의 자주성을 백성들에게 알리기 위핸 <계몽홍보 단체>였습니다. 요즘으로 따지면 공익광고 협의회라고 할까요?

따라서 독립협회의 구성원들은 정부의 고위관료들이거나, 머릿속에 뭔가가 있는 국가공인 유학파들이었습니다. 독립협회 회장에 국가원로인 안경수, 위원장은 당시 친러파의 거두였던 이완용(이 때는 친일파가 아닌 친러파였죠...), 고문은 미국국적을 가진 서재필 박사였습니다.

이렇게 정부 인사를 비롯한 사람들이 모여, 국가의 자주성을 홍보하면서 여러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국민을 단합시키는 것이 독립협회 초기의 목표였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TV같은 것이 없었죠. 따라서 홍보에 적절한 매체로 신문을 이용하게 되었고, 그 신문은 백성 누구나 알 수 있게 쉬운 글자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 그 신문이 바로 한글로 이루어진 <독립신문>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독립신문이 순한글 신문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하나 더 추가 해야 합니다. 순한글 신문이자, 한글, 영문 2개판으로 나온 신문이라는 점이죠. 조선의 자주성은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 알려야 할 사항이었기 때문에 독립신문은 <별도의 영문판>으로도 제작되었습니다.

2. 1897년 : 고종이 돌아오면서 마찰이 시작되다.

독립협회가 1896년 7월 2일 발족했을 때 독립협회는 단순한 <홍보기관, 사교단체, 정부어용기관>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독립협회가 주장한 것은, 열강의 이권침탈 실태를 알린다는 정도였죠. 독립협회의 모임은 정부 주도의 소모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1897년이 고종이 환궁하였습니다. 1897년 10월 독립협회의 주장과 맞물려 러시아 공사관에서 다시 환궁한 고종은, 강력한 자주권을 가진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대한제국>의 국제를 반포하였습니다.

강력한 나라의 성립은 독립협회가 바라던 바였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자주성에 대한 성격을 놓고 고종과 독립협회의 입장이 조금 달랐습니다. 고종의 <대한제국 수립과 광무개혁>은 황제권의 절대화를 통한 왕권강화와 국력강화였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 인사중 미국의 공화정 및 일본의 입헌군주정을 경험한 친미, 친일파 출신들은 강력한 왕권이 근대화가 아니라 입헌군주제를 통하여 법치국가를 만들고, 내각제나 의회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따라서, 1897년 독립협회는 초기의 독립협회와는 성격이 달라집니다. 독립협회의 위원장인 이완용 등의 친러파들은 탈퇴하고, 서재필 등 친미파, 박영효 등 친일파 세력들이 독립협회를 주도하게 됩니다. 이들은 러시아 고문인 알렉시에프 주도의 정권과는 거리가 있는 세력이었습니다. 아관파천 이후, 조선의 정치를 주도하는 러시아 고문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친러파인 이완용 등의 세력보다 비교적 민중적이었습니다. 독립신문을 적극활용하여 백성들을 계몽하고, 우매한 이들을 깨우치는 데 주력하였죠.

그러나, 독립협회는 백성들을 진정한 개혁주체로 보지 못하였습니다. 미국 유학파인 서재필조차 <백성들은 무식하여 알리고 가르쳐 계도해야 할 존재들>로 인식하였죠. 따라서 신분제가 이미 혁파된 조선사회였음에도, 백성들과 동등한 위치에서의 대화보다는 일단 가르쳐야할 대상들로 파악하였습니다.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 인사들은 <프랑스 혁명의 부르조아같은 유산시민 지식인>을 육성하여, 법치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고종과 독립협회는 처음부터 마찰의 불씨를 안고 있었습니다.

3. 1898년 : 만민공동회가 열리며 본격적인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다.

1898년 2월, 독립협회 인사 중 입헌군주제와 법치주의를 주장하는 인사들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국왕(고종황제)과는 달리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자신들의 이상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백성속으로 들어가는 운동을 <민권운동>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독립신문은 금연광고같은 <계몽홍보신문>을 넘어서서 <정치적 비판과 정치적 이념 주장>을 펼치는 장이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고종이 환궁했음에도, 계속 우리 내정을 간섭하는 러시아의 알렉시에프 등을 비난하고, 외국세력이 우리 이권을 침탈하는 것에 대하여 크게 반발합니다.

이 시기의 운동은 민중속으로 들어가는 운동으로서 <자유민권운동>을 통하여 백성들과 하나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이 운동을 이끈 사람들은 친미적, 친일적 성향을 가진 서재필, 박영효 등의 외국물을 드신 세력들이었습니다.

4. 만민공동회의 활동 - 1, 자유민권운동

그럼 자유민권운동의 내용을 한번 볼까요?

자유민권이란, 서양 용어로 <천부인권>을 말합니다. 서양의 천부인권이란, 프랑스 혁명과 영국혁명 등에서 비롯된 <인간의 기본권 보호 사상>을 말합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구제도의 모순을 타파하였듯이, 조선에서는 갑오개혁으로 신분제 등의 구제도를 타파하였습니다. 따라서 서구처럼 <천부인권>이 조선사회에 널리 퍼져야 한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이 천부인권을 홍보하는 수단이 바로 <독립신문>이었습니다. 신문으로 모자라면 강연회, 토론회 등을 쭈욱~ 열어 자신들의 이상을 백성에게 알려야 했습니다. 백성속으로 들어가 어떤 백성이든 같이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백분토론 같은 이상적 장이 바로 <만민공동회>인 것입니다. 말 그대로 만민, 즉 모든 백성의 이야기장인 것이지요. 이 곳에서는 백정조차 자신의 의견을 자유로이 말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습니다.

서양의 천부인권에는 생존권, 재산권, 신체의 자유,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이 포함됩니다. 미국물을 먹은 서재필 박사가 이러한 권리들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요. 이러한 자유를 모두 모아 한마디로 말하자면, <국민주권>이 됩니다. 따라서 만민공동회에서 주장한 자유민권운동이란 <국민평등, 국민주권>이라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그리고, 국민평등권, 국민주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자신의 소신대로 투표할 수 있는 <국민참정권>이 필요합니다. 국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방식은 서구식으로 보면 일반적으로 <대의제도에 따른 국회의원 선출>이죠. 따라서 자유민권운동의 최종 결론은 <의회설립운동>으로 이어집니다. 의회를 설립한다는 것은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법에 따라 정치를 한다는 법치주의와 연결됩니다.

이것은 고종황제가 국가의 자주권 확보를 위해 <황제권을 절대적으로 강화한다>는 대한제국의 이념과 맞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유민권운동은 고종의 입장에서는 불쾌한 일이었죠.

자유민권운동의 결과, 서재필은 중추원을 관선국회의원, 민선국회의원으로 내각기관으로 재편합니다. 중추원은 고려시대 재추가 모이는 최고 국가 기관으로 명맥을 이어오다가 갑오개혁 때 자문기관으로 유명무실해진 기관입니다. 중추원이 재신과 추신의 합좌기관으로 고려 이래 최고 기관이었던 만큼, 민선, 관선 의원들의 협의기관으로 딱이었죠.

독립협회가 주도한 토론회의 내용

97. 8. 29 : 조선의 급선무인 인민 교육을 실시한다.
   97. 9. 26  : 부녀자들을 위한 교육도 해야 한다.
   97. 10. 17 : 인민 교육을 위해서 한글을 사용해야 한다.
   97. 12. 19 : 신문을 만들어 인민의 견문을 넓혀야 한다.
   98. 1. 2 : 관민이 같이 애국해야 한다.
   98. 1. 23 : 국가의 부강을 위해서 광산을 확장해야 한다.
   98. 2. 6 : 수구파 탐관오리들을 몰아내야 한다.
   98. 3. 6 : 우리 국토를 남에게 나누어 주지 말자.
   98. 5. 8 : 백성의 권리가 튼튼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
                                 (출처 : 누드교과서 한국근현대사, 이투스, p113)

5. 만민공동회의 활동 - 2. 자주국권운동

만민공동회는 국가의 부국강병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고종의 <광무개혁>과 그 본질은 통합니다. 그러나, 자유민권운동에서 보듯이 그 실현방법에서는 너무나 극과 극이었습니다. 이번에는 국가의 부국강병을 위한 만민공동회의 노력을 한번 볼까요?

민민공동회의 기본 이념은 <자유민권운동>을 비롯하여 <자주국권운동, 자강혁신운동>이라 칭해지는 활동들이었습니다.

자주국권운동은 외세를 벗어나 국가의 자주권을 확립하는 운동을 말합니다. 만민공동회 이전부터 계속 진행되온 모든 운동을 포함하죠.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에서의 복귀 운동, 열강의 이권탈취 반대운동, 독립문 건립과 독립신문 발행 등의 모든 부국강병 운동을 말합니다. 자주국권운동의 구체적인 예를 몇가지 볼까요?

1. 러시아 절영도 조차 요구 저지함
   2. 러시아 군사 교련단과 재정 고문단을 철수시킴
   3. 일본의 석탄고 기지를 반환하게 하였음
   4. 프랑스, 독일의 광산 채굴권 요구를 저지하고, 영국의 해양 침투를 막음
   5. 미국의 무한정 광산 채굴을 일부 막고, 러시아의 은광 진출을 방어함
   6. 러시아의 목포, 증남포 해역에서 토지를 매도하는 것을 막음
   7. 외국 열강, 특히 러시아에게 이권을 넘기는 이완용을 영구 제명함
   8. 일본의 철도 부설권 확득 의도와 청의 산림 탈취 의도를 사전에 홍보하고 막으려 함

이러한 자주국권운동은 독립신문에 홍보하는 동시에 만민공동회에서 계속적인 토론과 강연을 함으로서 이전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초기의 고종환궁요구와 일본과 러시아의 내정간섭에 제동을 건 것도 독립협회의 업적이었죠.

그러나, 외세의 압력을 막는 <자주국권운동>만으로는 진정한 자유민권을 얻고 자주국가가 되기에 부족했습니다. 외세의 압력을 막는 것을 넘어, 우리 스스로가 서구 열강과 같이 발전해야 다시는 그들이 우리를 넘볼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6. 만민공동회의 활동 - 3. 자강혁신운동

만민공동회가 생각한 이상적인 국가발전과 자강혁신은 <자주독립을 위한 부국강병>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부자로 만들고, 강한 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법치주의에 입각한 의회제 설립과 내정개혁>이었습니다.

이 내정 개혁은 국가 체제 자체를 서구식 의회제로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치, 행정, 교육, 경제, 국방, 산업의 모든 분야에서 근대적 서양체제를 도입하여 국가의 체질 개선을 한 후, 부르조아 계급을 육성하여 국가 지배층을 단단하게 한다는 것이죠.

실제 자유민권운동을 주도하면서 <천부인권>을 강조하였지만, 천부인권이 곧 <모든 백성의 지배층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였습니다. 프랑스 혁명에서 보았듯, 혁명의 이념은 <천부인권>이지만, 혁명의 주체이자 새로운 사회세력은 <유산계급인 부르조아 계급>였습니다.

당시 진보적이었던 독립협회에서도, 국가발전의 이상적인 방향은 <서구식 사회진화론>이라고 인식하였습니다. 이 사회진화론은 원래 스펜서가 주장한 것으로, 다윈의 생물학적 진화론을 그대로 역사에 도입한 것입니다.

진화론의 입장에 의하면, 모든 생물은 적자생존과 우성이 열성을 지배하는 원리 속에서 살아갑니다. 강한 동물은 약한 동물을 잡아먹고, 약한 동물은 강한 동물에게 먹히지 않기 위해 진화합니다. 강한 동물은 효율적인 사냥을 위해 좀더 진화하고, 진화하지 못한 동물은 도태되어 지구상에서 사라집니다. 가장 극대화된 진화체가 바로 인간이었고,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하여 자연을 지배하였습니다.

사회진화론은 진화론을 사회에 도입한 것입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지배하는 것은 사회적인 원리이자, 본능입니다. 따라서 서구의 강한 나라들은 약한 나라들을 식민지로 만들고 그들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크리스트교 문명을 전파함으로서 약한 나라가 도태되지 않고 발전하도록 돕고 있다는 원리가 됩니다. 이 원리에 의해 강한 나라가 식민지를 더 많이 차지하는 것이 정당화되면서 영국, 프랑스 등이 식민지를 늘리는 <제국주의 이론>이 정당화됩니다.

그런데 독립협회는 이 사회진화론을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였습니다. 독립협회 뿐 아니라, 초기 민족주의 역사학자들,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도 이 사회진화론은 당연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위기는 조선이 약하기 때문이며, 먹히지 않는 자가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호랑이나 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독립운동가들의 입장이었습니다.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독립협회의 지식인들

한국이 생존하기에 적합치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장차 내가 해야 할 일은 나의 최선을 다하여 한국이 적자로서 생존하게 하는 것이다. 만일 한국이 공정한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면, 한국이 적자로서 생존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윤치호 일기 -

따라서 조선의 민중운동가들은 제국주의 세력에 즉적적으로 저항하고, 그들을 적으로 돌리지 못한 한계점이 있습니다. 갑신정변과 갑오개혁도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그들의 문명을 좀더 빨리 받아들여 근대화하려는 <서구화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서구화는 곧 <프랑스 혁명> 등에서 볼 수 있었던 <근대주의의 산물>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근대주의란, <지주, 자산가> 등 유산혁명계급을 양성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일반 백성들은 혁명의 주체가 아니라 <무지하기 때문에 계몽해야 할 사람들>로 여기게 됩니다.

독립협회가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대중적인 것임에도, 실제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일부 지식인층이었고, 광범한 백성들의 실질적 참여는 없었습니다. 토론회와 강연회에 참여하는 것에서 백성들의 역할은 끝난 것으로 본 것이죠.

갑신정변, 독립협회 등 부르조아적 운동의 공통적인 성향은 일반 국민들이 참여하여 제국주의와 직접 투쟁하는 <의병운동>을 아직 힘도 없는 어린 애가 생각없이 어른한테 덤비는 무모한 운동이라고 간주한다는 점입니다. 의병은 제국주의 국가들을 화나게 할 뿐, 자강혁신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독립협회는 지주와 자산가들이 개화하여 발전한 서양제도를 본받는 것을 표방하였고, 이후 이러한 움직임을 <애국계몽운동>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논리를 받아들인 교과서의 입장입니다. 의병운동은 그냥 <의병활동>이라고 하면서, 서양을 본받자는 운동은 <애국계몽운동>이라고 해서 <애국>이라는 말을 쓴다는 점입니다. 나라를 위해 피흘리고 죽은 사람들은 그냥 <의병>이고, 지주계급을 지배층으로 만들어 국가를 강하게 하려는 운동은 <애국>이 들어간다는 것도 이상하고, 이 논리를 학자들과 교과서에서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직도 서구식 사회진화론의 입장을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독립신문 - 의병들의 활동을 부정하는 글

조선 백성은 언제든지 원통한 일을 당하여 마음에 둔 미흡한 일이 있으면 기껏 한다는 것이 반란을 일으킨다든지 다른 무뢰지배의 일을 행하여 동학당과 의병의 행세를 하니 본래 일어난 까닭은 권의 불법한 일을 분히 여겨 일어나사 고을 안에 불법한 일이 다시 생기지 않도록 하자는 주의인데 불법한 일을 저희들이 행하니 그건 곧 도가 아니다. 도가 없으면 난민인즉, 난민은 법률상에 큰 죄이며 나라에 점점 못할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남을 시비하겠으면 나는 법률을 더 밝혀 지키고 행실을 더 높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에 의해 전개된 자강혁신운동은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강력한 <법치주의>를 표방하였고,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강력한 <국방력 강화>를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으로 산업개발을 통해 민간자본을 육성하고, 그 자본을 바탕으로 부국을 이룬다는 것이었습니다.

단, 독립협회가 이전 갑신정변과 다른 점은 <우민관>은 탈피했다는 점입니다. 갑신정변 때 김옥균은 백성들은 <무지한 존재>들로 생각하여 독단적인 정변을 일으키고 백성들의 반응에 신경쓰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신경쓸 시간도 없었지요. 3일천하였으니.... 그러나, 독립협회는 도시상인, 농민, 노동자로부터 심지어 백정에 이르기 까지 모든 백성들을 계몽하고, 독립협회의 이념을 알리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전과는 사뭇 다른 인식이며, 갑오개혁 이후 전 백성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럼 자강 개혁운동의 몇가지 사례만 들어볼까요?

1. 국방력 강화를 위해 군제를 개편하고, 전 국민을 위한 교육제도를 개혁하며 그것을 위한 재원을 마련한다.
   2. 법치주의를 위해 의회설립운동을 전개하고, 황제에게 탄원서를 제출한다.
   3. 민간자본 육성을 위한 법률을 만들고, 서구식 산업제도를 도입한다.
   4. 보수파 내각을 퇴진 시켜 개혁파 내각을 만들고, (이후) 헌의 6조를 채택한다.
   5. 관선과 민선 인원이 동등하게 구성된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여 국가 개혁을 추진한다.

7. 98년 3월 만민공동회 vs 10월 관민공동회의 차이점

지금까지 이야기한 독립협회의 <입헌군주제와 법치주의>는 박영효, 서재필 등 주도세력의 이야기를 주로 다룬 것입니다. 이러한 법치주의적인 입장은 고종황제의 전제 왕권 강화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 안에서는 이러한 법치주의 입장과 다른 시각도 있었습니다. 한번 볼까요?

박영효, 서재필 등의 법치주의파들은 개화파로 치면 급진개화파였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개화를 위해 러시아 고문인 알렉시에프 등이 당장 물러가야 하며, 친러파 관리들은 정치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합니다. 또, 국왕도 법을 지켜야 하고, 정치는 내각을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왕권과 신권이 분리되는 것이 이상적인 근대 국가로 인식한 것이죠.

고종은 열받았습니다. 1898년 2월,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독립협회의 고문 서재필을 미국으로 추방조치 하였고, 박영효 등의 세력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독립협회의 핵심인 서재필, 박영효 등은 3월 황제의 명을 반박하고 전국적인 상소운동을 전개하면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것입니다.

그러나, 서재필 등이 빠져나간 후 독립협회를 이끌었던 윤치호, 남궁억 등의 새로운 세력은 황제권과 타협을 하면서 운동을 이끌어가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모두가 쫒겨날 수는 없었고, 황제의 개혁 역시 <자강혁신과 부국강병>을 위한 것이라는 점은 독립협회와 일치했으니까요. 윤치호 등의 새로운 독립협회는 친정부적인 관점에서 정부와 협력하면서 근대화를 추구하려고 하였습니다. 개화파로 따지면 온건개화파라고 할까요? 이들의 개혁은 <강력한 전제군주 아래 황제권을 옹호하면서 이루어지는 근대화>였죠.

서재필은 반발합니다. 개혁이란, 황제와 관료들 일부가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의 대표인 부르조아가 모인 의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또, 개혁핵심인 부르조아는 정부가 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대표가 모인 의회에서 토론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도 강조합니다.

따라서 독립협회에서는 국민적 지지를 받는 서재필 등의 입헌군주파와 정부의 지지를 받는 절대군주파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입헌파가 고종에게 쓴 소리를 하면, 고종은 이들을 탄압하려 했고 온건파는 <독립협회의 입장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변명을 하면서 반년이 흘러갑니다.

7. 98년 연말 : 관민공동회의 개최와 헌의 6조의 발표

98년 10월, 윤치호 등의 전제황제파 독립협회 회원들은 <황제권을 옹호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헌의 6조를 발표하면서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였습니다.

제 1조의 내용(헌의 6조)

- 중추원은 다음의 사항을 심사하고 의정하는 처소로 할 것 -
①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고
전제황권을 공고히 할 것
②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③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④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⑤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에 따를 것
⑥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제 2조

중추원은 다음의 직원으로써 구성할 것.
의장 1인, 부의장 1인, 의권(원) 50인, 참서관 2인, 주사 4인

제 3조

의장은 대황폐하께서 직접 내려주시고, 부의장은 중추원 공천에 의하여 칙수하시고, 의관 반수는 정부에서 국가에 노고가 있는 자로 선출하시고,
반수는 인민협희에서 27세 이상인이 정치, 법률에 통달한 자로 투표 선거할 것.

제 12조.

의정부와
중추원에서 의견이 불합하는 때는 의정부와 중추원이 합석 협의하여 타당 가결한 후에 시행하고 의정부에서 직행하지 못할 것.

독립협회의 온건파들이 주장한 헌의 6조의 내용은 황제권을 강화한다는 내용이 <1조에 명백하게 제시>되어 있었고, 고종이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칙임관을 임명할 때 대신의 뜻을 묻는 다던가하는 조항들이 은근히 속 뜻을 가지고 같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윤치호 등은 의회제도를 원하면서도, 고종황제에게 황제권 강화라는 명분을 확실히 심어주는 타협적인 제시안을 내놓은 것이죠.

고종황제는 수구파 대신 5명을 몰아내고, 중추원의 구성과 재정개혁을 약속하였으며, 그 결과 <박정양 내각>이 출범하여 본격적인 내각제도가 시행됩니다. 즉, 명분상의 황제권은 절대적이나, 실제 내각이 출범하여 정치를 하는 타협안이 제시된 것이죠.

또, 중추원을 구성할 때 정부관료와 독립협회 인사가 딱 절반씩으로 구성되어 점진적인 개혁이 시작되는 듯이 보였습니다. 독립협회의 급진파였던 서재필, 박영효 등도 알게 모르게 힘을 실어주어 독립협회의 <내각제도>가 성공한 듯 보였죠. 이 시기를 보통 <독립협회의 참정권 투쟁 성공기>라고 합니다.

중추원이라는 기구는 원래 송나라 기구였습니다. 고려 시대는 재추가 모이는 막강한 권력기관이었다가 조선 시기에는 무신들의 기관이었습니다. 그래도 권한은 항상 막강한 기구였죠. 하지만, 갑오개혁 때 이 중추원의 기능을 모두 상실시켜 중추원은 <내각에 대한 지문 수준의 기관>이 되었습니다. 독립협회는 이 중추원을 국가최고의 <의회기관>으로 재편한 것입니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이 끝나면서 중추원은 유명무실해졌다고, 훗날 일제시대 때 이완용 등의 건의로 친일파 어용기구로 다시 살아납니다.

독립협회가 정치에 참여하자 그 세력은 엄청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독립협회는 서재필의 민중 계몽기부터 전국적인 지회가 있었고, 회원이 4천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붉은 악마 서포터즈가 엄청난 것과 맞먹죠. 거기에 핵심 지도부가 박정양 내각으로 대한제국 최고 권력자로 올라서니, 그 위세는 대단한 것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재필, 박영효 들이 돌아와 만민공동회의 활동을 계속하면서 서포터들을 늘리고, 그들 스스로가 각부의 장관으로 올라서려고 했습니다.

보수파들은 충격에 쉽싸입니다. 독립협회의 의회제도는 기존 관료들의 입지를 좁히는 것일 뿐 아니라, 독립협회가 강해지면서 다시 <입헌군주제 및 법치에 의한 통치>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기 때문이죠. 보수적 관료들은 독립협회 인사들을 탄압하려 하였고, 독립협회의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이들 정부 관료들을 쫒아내기 위한 모함, 테러, 쿠테타 등을 시도합니다.

고종황제는 긴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박영효 등의 활동은 황제권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였고, 같은 독립협회의 온건파들도 <너무 앞서간다>는 지적을 하기 시작합니다. 보수세력들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제거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고 한다>고 주장하면서 황제에게 상소를 올립니다.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가 여론을 주동하는 만민공동회를 혁파하기로 결심합니다. 황제는 만민공동회가 열리는 자리마다 부보상(보부상 : 황국협회)들을 투입하여 만민공동회의 회의를 방해하였습니다. 보부상으로 이루어진 황국협회의 간섭으로 만민공동회는 혁파당하고, 그 주동자들은 체포되었습니다.

서재필은 추방되고, 박영효는 심문을 받았으며, 온건파인 윤치호는 북쪽 국경쪽으로 관직을 옮겨야 했습니다. 보수파와 성리학자들은 독립협회의 문제점을 끊임없이 지적하였고 결국 독립협회는 <국가의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황국협회와 함께 해산됩니다.

8. 독립협회의 한계점

독립협회는 근대적인 민족운동인 자주국권운동, 근대화 운동인 자강혁신운동, 민주주의 사상의 발현인 자유민권운동을 표방하였고, 광범위한 계층을 포섭하여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국민국가를 이루려는 노력을 보인 단체입니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기 민족주의 사상의 기반을 마련하여, 훗날 민족주의 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주었습니다.

그러나, 독립협회의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가장 큰 원인은 고종 황제가 실시하고 있던 광무개혁과의 충돌문제입니다. 입헌군주제(내각제도)를 통한 사회개혁과 황제권 절대화를 통한 자주성 확립이 충돌한 것이지요. 그러나, 독립협회 자체의 이론에도 많은 한계점이 노출됩니다.

일단, 국가를 부강하게 하자는 자주국권운동은 이완용 등 친러파을 견제하고, 아관파천을 철회하게 하면서 러시아 등의 이권 침탈을 막는 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체가 서재필, 박영효 등 친미, 친일적 성향의 개혁가였던 만큼, 일본, 미국 등이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을 제거하지는 못한 한계점이 있습니다. 특히, 박영효는 일본 세력의 도움을 많이 얻었던 개혁가였고, 메이지 유신을 조선 개혁의 모델로 여겼던 듯 합니다.

자강혁신운동도 전술했던 <사회진화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약자이기 때문에 강자에게 저항할 수 없다는 논리는 외세를 적극적으로 배척하지 못한 이유가 되었고, 의병활동 등을 애들 장난으로 여긴 것은 <독립운동이라는 시각>과는 거리가 먼 <부르조아 운동>이었습니다. 이 사회진화론 수용이 우리 독립운동의 기본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의의와 함께 우려도 찾을 수 있습니다. 가장 진보적인 민족주의 학자인 신채호 선생님도 처음에는 이 사회진화론에 맞추어 민족 저항운동을 전개했으니까요.

자유민권운동은 <천부인권사상>등을 조선에 보급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습니다. 그러나 이 사상 역시 서구 <부르조아 유산계급>의 이론에 맞추어 토지를 가진 지주, 경제력을 가진 산업가를 자유민권의 주체로 설정했다는 점에서 한계점이 있습니다. 실제 토지가 없는 소작인, 차경인이나 노동자들의 인권은 일제시대가 끝날 때까지 보호받지 못했으니까요.

이번 장에서는 독립협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간간히 고종의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이 같은 시기에 언급되고 있죠? 독립협회와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개혁으로 독립협회와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고종의 광무개혁을 다음 장에서 이야기하겠습니다.

- 이해 : 글을 적을 때 친일파 박영효, 친미파 서재필 등등의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용어들은 박영효나 서지필이 나라를 매국한 친일, 친미를 했다는 뜻에서 쓴 용어가 아니라, 일본 문화, 미국 사상을 받아들인 입장이었다는 점에서 친일파, 친미파라고 적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이 쓰는 친러파 신채호, 친중파 김구 등의 용어도 친러, 친중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신채호가 러시아의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김구가 중국의 힘을 빌리려고 했다는 뜻으로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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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이야기 20 - 에도막부의 재정과 조세개혁

1. 막부 공통의 관심사 : 재정문제

일반적으로, 일본의 중세라고 부르는 시기는 막부 시대를 말합니다. 이 막부시대의 막부는 국왕이 아니라 막부의 군사지도자 쇼군이 다스리는 시기입니다. 일본은 중세부터 이미 군사정권으로 역사를 쭈욱~ 이어오네요. 어쩌면 근대 일본사에서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열망이 왜곡되고 군국주의로 나간 것도 천황 이데올로기와 막부정권의 전통이 일본인들 머릿 속에 깊게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한 나라의 역사라는 것이 자신들도 모르게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습에 투영된다는 것을 보면 <역사>가 참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본 중세에서 막부의 영양분은 <재정>이었습니다. 막부는 직접 국왕가로 불릴 수 없었고, 천황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막부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정통성>보다는 힘으로 사회를 이끌어갈 재정이 필수였습니다.

최초의 막부인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진 것도 재정적인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몽골의 침입에 맞써 싸운 무사들이 전쟁 이후 재정난에 허덕이며 보상을 해주지 못한 막부에 대하여 더 이상 신뢰를 하지 않았거든요.

무로마치 막부는 명나라와의 공무역을 재개하고, 조선과의 교린 무역, 류쿠 및 동남아시아와의 활발한 무역로를 개통함으로 재정을 확보하고 초기 막부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14세기 이후 명, 조선의 등장 등 급변하는 동아시아의 상황과 상공업의 발달이라는 시대 흐름을 무역로 확보로만 해결하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습니다. 즉, 성장하는 농민층의 힘을 끌어안을 능력이 없었죠. 농민층의 잉여생산은 막부가 아닌 지방 다이묘들에게 넘어갔고, 성장한 다이묘들이 독립국을 세우면서 <전국시대>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즉, 막부의 존립 근거인 재정을 원활히 통제하지 못한 것이죠.

2. 에도 막부 : 확실한 농민 통제로 조세를 확보하다.

반면, 에도 막부는 이전 막부들과 달리 가장 확실한 농민통제를 실시합니다. 전국시대 오다 노부나가가 실시했던 <변법>과 같은 부국강병책을 도용한 것이죠. 에도 막부는 농민에 대한 통제가 확실한 조세 증가로 돌아온다는 것을 전국시대의 혼란함 속에서 깨달았습니다.

일단, 농민층을 엄격한 신분으로 묶어버립니다. 에도 막부의 무사, 농민, 수공업자, 상인 이라는 신분 공식은 아주 엄격해서 농민은 어디로든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농민은 국가에 부역, 조세 등을 납부해야만 했죠.

농민들은 연대책임제인 <고닌구미>에 묶어 있었습니다. 중국과 조선에서 실시한 <오가작통법>과 같은 것이었죠. 누군가 세금을 내지 않고 도망가면 이웃이나 친척이 부담해야 했습니다. 특히 사치하는 자들은 주변인들을 같이 처벌함으로서 서로 서로 엄격하게 감시하도록 체제를 마련하였습니다.

또, 성리학의 토지 이념을 강조하여 토지는 하늘의 근본이라고 역설하였고, 농민이라는 직업이 다른 2, 3차 산업의 직업보다 우월함을 강조하였습니다. 특히, 토지를 중요시하는 사회의 특징인 <가부장권>을 중요시하여 가장에 대한 항명은 쇼군에 대한 가신의 항명과 동일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농민들보다 높은 계급의 무사들은 농민들보다 우월하는 이념으로 <무사도>를 강조하였습니다. 일명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불리는 무사도는 무사가 해야할 일들을 규제하면서, <무사는 힘써 일하는 농민을 보호해야한다>는 이념을 역설적으로 강조합니다.

제도적으로 막부는 <토지영대적 매매의 금지령>과 <분지제한령>을 법적으로 반포하여 농민을 보호하였습니다. 농민들이 가진 토지는 헐값에 매내할 수 없고, 상속도 법에 의한 것으로 제한한 것이죠. 이것은 소농민을 보호하면서, 국가에 내는 세금 공급자들을 확보하려는 국가의 정책이었습니다.

3. 무역을 통한 재정확보가 달라지다.

무로마치 막부는 대외 무역을 통하여 막부 재정을 확충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는 이전 막부보다 대외 무역에 소극적이었습니다.

에도 막부는 대외적으로 <쇄국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보통 쇄국정책이라고 하면 다른 나라의 문물을 거부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과는 좀 다른 개념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쇄국이란, <서양에 대한 쇄국> 및 <농업상품에 대한 쇄국>입니다.

에도 막부는 중국, 조선, 류큐 등 동아시아의 전통 무역은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교류하던 서양과의 무역은 단절하고, 단지 네덜란드를 통해 서양문물을 수입하는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왜 일까요?

그것은 에도 막부의 정통성 문제와 막부 유지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서양 세력이 활발하게 일본에 진출한 것은 신항로 개척기인 오다 노부나가의 <전국시대>였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통일을 위한 새로운 사상으로 크리스트교를 적극 수용하고,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에서 대포 등의 문물을 수입하였습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가 개설되면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에도 막부는 농민을 막부 재정의 원천으로 생각하여 무사와 농민을 중심으로 한 엄격한 신분제도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서양에서 들어온 카톨릭은 인간 평등을 주장하는 사상이었습니다.

또,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 카톨릭 국가들과는 성격이 다른 네덜란드라는 신교 국가가 17세기 유럽을 주름잡자 일본은 카톨릭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상인들의 자유롭고 활발한 무역 분위기는 엄격한 카톨릭과는 사뭇 달랐죠. 네덜란드를 이용하여 이전 카톨릭을 막아볼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에스파냐, 포르투갈 등의 국가들이 에도 막부와 멀리 있는 규수 지방의 다이묘들과 무역을 계속하였다는 점입니다. 에도 막부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위해 서양과의 무역을 단절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네덜란드는 카톨릭 국가들을 누르고 일본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끊임없이 카톨릭 세력을 모략했고, 그 결과 일본에서 네덜란드를 제외한 서양 세력들을 모두 배척하는 <쇄국정책>이 탄생한 것이죠.

이제 에도막부는 막부 재정의 근간을 무역에서 찾으려는 이전 막부의 재정책을 버리게 됩니다. 일본은 나가사키 항구 하나만을 열고, 네덜란드 및 중국하고만 무역을 했습니다.

조선과는 전통적으로 협상을 진행했던 대마도(쓰시마섬)에서 무역을 하였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무역은 대마도주가 거의 독자적으로 주도했고, 대마도주의 태도에 따라 무역의 어감이 달라지기도 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대마도주의 존재를 거의 막부 실력자의 존재와 대등하게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에도 막부가 다른 막부와 달리 오래 지속된 것은 이 쇄국정책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막부의 무역을 통한 재정확보와 달리, 에도 막부는 일본 국내 상품을 타지방, 또는 해외에 유통시키는 것 자체까지 제한하였죠.

즉, 에도 막부의 사회는 농업기반의 자연경제를 계속 유지하면서 변화하는 것을 경계하였고, 막부체제는 동요없이 계속 지속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쌓이고 쌓인 농업의 잉여생산물이 터져나오면서 막부의 의도와는 달리 <상공업>이 크게 발달하고, 새로운 부자와 상인들에 의해 도시에 <죠닌 문화>라는 중산층 문화가 생기기도 합니다.

아무튼, 쇄국정책으로 에도막부는 오랜 기간동안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에도 막부의 초, 중반은 일본의 평화시대이면서 일본 고유의 국학이 발전한 시대입니다. 외국 사상은 네덜란드의 <난학> 정도였죠.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러한 쇄국정책은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세계사의 큰 흐름 속에서 소외되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전 막부에서와 같이 활발한 문물 교류가 줄었고, 서구와의 교류도 원할하지 못하였죠. 미국과의 교류도 서구인들을 통해 몇 번 왕래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4. 재정이 부족하다~ - 막부의 재정확보 노력

도쿠가와 에도 막부는 초기 쇄국정책과 농업 안정책으로 많은 재정을 확보하였으나, 4대 쇼군 이후 조선의 성리학을 이념으로 정착시키면서 막부의 성격과 재정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성리학의 탄생한 중국 송나라의 문치주의, 조선의 문반 우월주의가 무신정권인 막부에도 영향을 준 것이죠. 에도 막부에서 성리학이 국가 관학으로 정착된 것은 4대 쇼군기부터입니다. 성리학은 동아시아의 정권 강화에 큰 영향을 주었던 학문이죠. 충효윤리와 국가 윤리가 지배층의 이념과 절묘하게 일치하니까요. 특히 이황이 주장한 이기론과 군신관계론은 막부 지도자들의 입맞에 딱 맞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 막부 지도자들은 서양에서 넘어온 크리스트교를 탄압하고, 일본 전통 지배층인 불교세력을 다시 옹호하였습니다. 특히, 무가 정권에 딱 맞는 선종 계열을 중시했죠. 일본의 선종은 가마쿠라 막부이야기에서 자세히 다루었죠?

문제는 이렇게 막부 정권이 무신적인 기풍을 잃어가고 <문치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게 됨으로서 국가 재정이 약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에도 막부 초기 정책인 자영농 육성, 강력한 중앙집권, 무사를 중심으로 한 사회통제가 흔들리고, 막부가 원하지 않았던 <상인계급>이 점차 뜨게 된 것이지요. 특히 지방에서 돈좀 벌었다 싶은 자들이 장사에 나서고, 무사들마저 고리대의 맛을 알게 되면서 막부의 튼튼한 재정줄이 흔들리게 됩니다.

도쿠가와 8대 쇼군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코호의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이 개혁을 하게 된 근본 원인은 18세기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상인층이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막부의 쇼군은 국가 재정 확보를 위해 <검약령>을 반포하였습니다. 검약령의 중요 내용은 <식산흥업>이라는 구호입니다. 일제시대 일본이 많이 외쳤던 그 구호네요. 식산흥업이란, 농업 생산량을 늘려 국가 기반을 단단하게 하자는 논리입니다. 따라서 식산흥업의 핵심은 토지개발과 농업장려, 품종개량, 비료개발 등이었죠.

그런데, 이 정책을 실시하면서 늘어난 농업 생산력과 상품작물들은 많은 세금으로 인해 국가로 넘어가게 되었고, 국가는 세금을 미곡(쌀, 콩)으로 받아가면서 성장하던 농민층의 생산력에 찬물을 끼얻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농민은 성장하는데, 그 성장한 만큼의 생산물을 국가가 가져간 것이죠. 이러한 정책은 짧게는 막부 재정에 도움이 되나, 장기적으로는 국가 발전을 저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막부 후기로 넘어가고 19세기가 되면서 막부는 더욱 더 재정 부족으로 허덕이게 됩니다.

19세기에 막부는 막부 존속을 위한 결단으로 <간세이 개혁>과 <톈보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개혁은 성장하는 농민과 상인들의 생활을 보장하면서 같이 커가자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잉여생산물을 수탈하여 막부의 창고를 채우려는 정책이었습니다.

일단, 성장하는 상업자본을 인정하여 상업자본에 세금을 부과합니다. 동업자 조직인 자를 인정하면서, 이들이 남기는 이윤은 철저하게 세금으로 걷어갑니다. 일본 에도 막부기에 자본주의가 발달할 수 있었다는 일본학자들이 있는데, 실제 이러한 상업자본의 수탈로 일본 자본주의가 에도막부기에 형성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19세기 개혁의 내용은 <귀농령>입니다. 에도 막부는 농민이 살아야 세금을 걷을 수 있다는 인식에서 가난한 농민들의 채무를 모두 없애줍니다.(채무파기령) 그리고, 어중간한 상인들은 모두 농촌으로 돌아가라며 협박을 합니다.(구리귀명령)

이것이 에도 막부 후기의 한계였습니다. 당시 유럽은 산업혁명을 겪은 후였고, 아시아에서도 각 국의 상업자본이 발달하는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에도 막부는 상업 자본주의를 육성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는 상업자본은 찍어누르거나 수탈하면서 상인들을 농촌으로 돌려 보내려 한 것입니다. 시대착오적이었죠.

실제, 막부의 재정이 몇 년간 회복된다고 하더라도 상인과 농민을 쥐어짜고 탄압하는 정책은 무사, 농민, 상인 모두를 가난하게 만드는 최하급 정책이었습니다.

에도 막부의 재정 정책 실패로 가난해진 무사와 농민들은 결국 막부가 자신들에게 아무 것도 해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일본사에서 막부의 패망은 모두 재정 문제와 관련이 있었습니다.

결국 지배층인 무사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막부 불만 세력들은 막부가 아닌 국왕이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전통론>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일본 근대화의 시작인 메이지 유신의 이념 중 하나였던 <존왕양이론>으로 연결됩니다. 해석하면, 왕을 받들어 서양을 물리치자는 것이죠. 막부가 아닌 왕이라는 개념이 일본인의 머릿속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다음 장에서는 에도 막부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항인 <상공업의 발달과 자본주의 논쟁>을 다루고, 일본 상업발달로 등장한 <죠닌 문화>와 막부의 대응을 살펴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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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토막 역사 2화. 3개의 짧은 이야기...

1. 황제나 지배자를 뜻하는 <카이저, 차르>의 어원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러시아의 지배자를 뜻하는 뜻인 <차르>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말은 어디에서 유래된 것일까요? 러시아의 지배자인 차르, 독일에서 황제라는 말은 카이저는 모두 로마 공화정 말기의 지배자였던 카이사르(시저)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카이사르는 로마 공화정 말기 민중파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며 <빵과 서커스 정치>로 백성들에게 인기가 많았습니다. 그의 인생과 양아들 부르투스에게 암살당하는 장면은 훗날 연극 등에서 주요 소재 거리가 되었는데, 유럽의 각국은 그의 이름과 황제라는 말을 연결시켜 칭호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로마의 황제란, 카이사르가 죽은 뒤 그의 양아들인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시작됩니다. 정작 카이사르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동양 중국에서 유래된 황제란 말은 전설적인 3황 5제 시대의 마지막 지배자였던 <황제>의 명칭에서 시작됩니다. 서유럽에서 말하는 지배자 슐탄-칼리프은 황제(슐탄)이자 종교지배자(칼리프)를 모두 어우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보통 우리가 황제의 개념을 이야기할 때, 왕보다 높은 지배자를 통칭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중국의 황제는 중국 주나라 이후 주변의 제후국들을 왕으로 칭하면서 <그들의 우두머리>성격을 가진 자들을 통칭하는 말로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시황제에서부터 사용되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유럽식 언어와 연결시켜 황제의 개념을 설명하곤 하죠. 예로, 서양에서 각국의 수장을 왕이라고 하지만, 나폴레옹은 유럽 각국을 정복하여 유럽 자체를 나폴레옹 왕가로 만들어 친인척을 왕으로 임명하면서 황제의 칭호를 얻습니다.

그러나, 사실 황제의 칭호는 관념적인 것으로 어떤 특정한 기준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정치적 상황과 세력을 고려하여 칭한다고 보는 것이 맞다는 입장도 있습니다. 고려시대 묘청도 황제를 칭하여 금국을 정벌하자고 하였고, 조선 후기 고종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고치면서 황제의 칭호를 사용합니다. 황제의 역사적 개념은 <넓은 영토를 다스리며 분봉된 왕들의 수장>으로 절대권력을 가진 자이지만, 실제 관념적인 개념은 <자신의 세력을 대외에 알리기 위한> 정치적 목적인 것도 있었습니다.

2. 흥선대원군도 증기선을 만든 적이 있다!

영국과 각국의 산업혁명이 언제인지 아시죠? 영국의 산업혁명은 18세기, 유럽과 미국, 독일, 일본의 산업혁명은 19세기 초반부터 후반부까지입니다. 그럼 우리나라는? 산업혁명이 없었다구요? 보통 우리나라는 광복후 급격한 산업화를 이루었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상징하는 <증기기관과 증기선>을 만들려는 시도가 우리나라에도 있었답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등 서양세력을 막아낸 흥선대원군 아시죠? 흥선대원군은 프랑스가 침입한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사용한 배가 <증기선>이라는 것을 듣고 호기심이 발동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앞으로 계속 침략할 서양에 맞서기 위해서는 서양보다 우수한 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죠. 흥선대원군은 전국 곳곳에 글을 올려 서양의 증기선을 물리칠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그 때 채택된 방법이 바로 <학우선>이라는 기발한 방법의 배를 만드는 방법이었습니다. 학우선이란 학의 깃털로 배를 만들면 그 탄력성 때문에 서양의 포탄을 맞아도 배에 구멍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만든 배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실제 그 배를 만들어보겠다고 생각하여 전국에서 학을 잡아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현상금을 받고 싶었던 사냥꾼들은 학을 잡아 그 깃털을 모으고, 국가에 깃털을 보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깃털에 아교로 붙여 만든 배를 보고 만족하여, 그 배를 포구(마포)에서 시험해보았습니다. 그러나, 배의 진수식을 하자마자 배는 물이 새어 곧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를 대동강에서 격파한 적이 있었는데, 대원군은 그 배의 증기기관을 가져와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제너럴 셔먼호의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철갑선을 만들고 다시 마포에서 진수식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증기기관의 엔진에 사용해야 하는 것을 석탄이었지만, 석탄이 아닌 석탄의 대체재인 숯을 연료로 사용하였기 때문에 배는 몇 미터 나가다가 멈추어 버렸다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렇게 국방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 당시 집권당이 하나 하나 연구하였던 성과물들은 민씨정권으로 바뀌면서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민씨정권은 서양에서 직접 무기기술과 최신 무기를 가져와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3. 마젤란과 라프라프는 서로에게 영웅과 역적이 되었다!

최초로 세계일주를 한 마젤란은 유럽역사의 한 획을 장식한 위대한 영웅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마젤란은 실제 세계일주를 하지 못하고 필리핀에서 죽었으며 그의 부하들이 세계일주를 완료하였다고 합니다.

1521년 마젤란은 세계 일주 도중 필리핀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젤란은 세계일주가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고, 식수와 음식을 구하기 위해 필리핀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젤란이 필리핀에서 크리스트교를 강요한 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필리핀의 주변 섬들은 마젤란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고, 이교도가 필리핀에서 포교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강경한 신자인 마젤란과 필리핀 주변 섬에 큰 영향을 미치던 마크탄의 왕이었던 라프라프는 결국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싸움을 하느님의 가호로 쉽게 이기리라던 마젤란의 예상은 크게 빗나갔고, 필리핀인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마젤란은 죽게 되었습니다. 전투가 얼마나 치열하고 다급했던지 마젤란의 부하들은 함장의 시체도 찾지 못하고 섬에서 다급히 나와야 했다고 합니다.

이 싸움 후 크게 좌절한 마젤란의 일행들은 여행 도중의 섬들에서 제대로 된 식수를 공급받는 일이 드물게 되었고, 그들이 에스파냐로 돌아올 때에는 식수부족, 영양실조 등으로 정상적인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마젤란의 함대 중 한 척인 빅토리아 호만 요한 세바스찬 엘카노의 지휘아래 모국에 돌아옴으로서 세계일주가 완성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은 이것을 역사적인 여행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스파냐의 왕 펠리페 2세 아시죠? 무적함대로 전 유럽을 호령하였던 위대한 에스파냐의 왕입니다. 펠리페 2세는 마젤란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마젤란이 죽은 섬을 국왕가인 <펠리페>의 이름을 따서 <필리핀>이라고 이름지었답니다.

그러나 과연 필리핀인들의 입장에서도 마젤란의 항해가 위대한 업적으로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지금 필리핀의 역사 박물관에는 <마젤란 비석>과 <라프라프의 비석>이 동등하게 세워져 있습니다. 마젤란의 비석에는 <애석하게도 라프라프에게 죽고만 여행가>라는 입장에서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그러나, 라프라프의 비석에는 <침략자인 에스파냐인들을 무찌른 필리핀 최초의 국왕>으로서 라프라프의 이름이 적혀져 있습니다. 역사는 관점에 따라 승자와 패자가 바뀌나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영웅으로 여겨지는 광개토대왕은 여진족 입장에서는 잔인한 학살자였습니다. 일본에서는 점진론을 주장하고 조선 초대 통감으로서 한국 정벌에 앞장선 영웅 이토 히로부미지만, 한국에서는 역적 이토 히로부미로서 안중근 의사에게 죽고만 일본인으로 묘사되죠. 역사를 뒤집어 보면 승자와 패자가 꼭 보편적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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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불교 전파사 - 7장. 수나라에서 중국식 불교의 기반이 시작되다

이제 불교전파사에 대한 <중국부분>의 막바지에 왔습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전개한 인도에서의 불교 - 위진남북조에 전파된 불교가 당나라에서 전성기를 맞이하여 완성된 후, 송대 이후에는 성리학에 밀려 포스팅할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 송기의 중국 불교가 완성되고, 이것이 한반도, 일본에 전파되었다는 것을 설명한 뒤 이제 한반도, 일본으로 불교 이야기를 넘겨보려고 합니다. 자, 그럼 당대 불교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포스팅을 시작해 볼까요?

1. 위진남북조에 꽃 피기 시작한 중국식 불교

지금까지 인도 불교를 거쳐 위진남북조의 불교를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위진남북조의 불교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인도의 불교사상의 본뜻을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지 않은 채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하기 위해 이용한 불교, 또는 노장사상을 통해 이해한 격의 불교, 또는 귀족계급 등 지배층을 위하여 활용한 불교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러한 초기 중국 불교는 전술했던 수많은 불승들이 불교의 참 뜻을 중국에 전하려고 노력하였고, 중국 내부에서도 이것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많은 불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분열된 중국 사회 내부에서는 이러한 불승들의 노력을 받아들일만큼 사회가 성숙하지 못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자체가 분열과 혼란 그 자체였으니까요. 따라서 불교는 위진남북조 전 시기를 통해 불법의 참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 불교가 왕권의 요구에 따르지 않고, 독자적 불법을 내세운다면 왕권에 의해 불교가 폐교당하는 <폐불사건>을 경험하게 될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러한 위진남북조의 불교는 북위가 화북을 통일하고, 북주, 북제를 거쳐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는 중앙집권의 과정을 겪으면서 점차 불교 본 뜻을 전파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위진남북조 후기와 수의 통일 과정 사이에는 성실종, 정토종, 율종, 선종, 천태종, 삼론종 등 종파적 성격을 가진 불교 교단들이 성립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교단은 특히 민중적인 선종, 정토종을 중심으로 백성 사회에 침투하여 불교의 대중화 운동이 시작됩니다. 불교단체들은 각 마을을 단위로 불교단체를 형성하여 하나의 작은 <교구>를 이루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교구 설립 운동은 서양 중세의 <크리스트교>처럼 교황부터 대주교, 주교, 사제 등을 국가 행정 조직체계에 맞춘 것은 아닙니다. 왜냐면, 중국 등 아시아의 향촌사회는 원래부터 그 독자적인 공동체성이 무척이나 강한 농경 조직이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불교단체들은 <마을>을 종교체계에 흡수시키려고 한 것이 아니라, 종교체계가 <마을의 공동체 조직>으로 흡수되어 민중 속에서 불교를 전파하려고 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초기에는 교단이 성립되지 못하였으므로, 승려 개개인이 지방에서 교리를 전파하려고 하였으나, 교단이 성립되면서 대대적인 불교 단체가 마을마다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교단은 불상을 제작하고, 불경을 강독하면서 공동체 조직원들을 교화하고 계도하였습니다. 또 대규모의 법회를 열면서 주술적인 부분들을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신비한 부처>라는 일종의 기적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러나, 종파 불교가 완성되어 가면서 사찰의 폐단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불교 교단이 커지고, 통일기의 제국가 불교가 연계되면서 승려는 세금을 면제받고, 교단은 거대한 장원을 운영하였기 때문에 승려의 수가 증가할수록 국가재정은 부담이 되고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수, 당나라 때에도 불교세력이 왕권에 위협을 줄 정도로 성장하면 <폐불사건>을 일으켜 불교를 탄압하기도 하였지만, 불교는 전체 시기를 통털어 보았을 때 도교와 함께 중국 사상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2. 수나라 : 본격적인 교단 융합 불교인 천태종이 시작되다.

위진남북조에서 교단불교로 등장한 선종과 정토종은 자세히 이야기했었습니다. 여기서는 수나라 시기에 교단 불교로 자리잡은 천태종을 한번 다루어 보겠습니다.

중국 불교에서 가장 이론적으로 발전하면서 서로 보완관계에 있었던 종파가 수나라의 천태종과 당나라기의 화엄종입니다. 이 중 천태종은 남북조 시대 양나라 출생인 지의에 의해 탄생하였습니다. 지의는 7살 때 불가에 입문했다가 남북조의 혼란기를 패해 탁발승이 되었습니아. 탁발승이란 걸식하고 구걸하면서 도를 닦는 스님을 말합니다.

그는 어느날 문득 꿈을 꾸는 것과 같은 상태에 빠져 천년전의 석가 법회를 체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보통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체험하는 것을 <법화삼매>라고 합니다. 이것은 꿈과 비슷하지만 그것과는 더 높은 차원인 <심령현상을 이용한 신통력>이었습니다.

그 이후 유명해진 그는 천태산에서 제자들과 집을 지어 <수선사>라고 부르며 수행에 정진하였는데, 이 천태산에서 그가 완성한 사상적 체계를 <천태종>이라고 부릅니다.

지의 불교의 특징은 지와 관 양지를 모두 강조하는 양자적 합일점을 찾은 교파라는 데 있습니다. 지라는 것은 순수한 학문적 불교만을 고집하는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관이라는 것은 수련을 통하여 불교의 참 뜻을 찾는 것을 말합니다. 지의는 학문만으로 불교를 찾는 것은 불교의 참 뜻인 중생구원을 등한시 하는 것이라며 싫어했으며, 수련으로만 불교를 찾는 것은 이론적 바탕이 없는 무지의 소산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이 2가지가 다 중요하다는 것이 지의의 이론인데, 이것이 천태종의 개요입니다. 천태종은 경전을 중요시하는 교종의 입장도 반영하면서, 수련을 중요시하는 선종의 입장 역시 무시하지 않는 종파입니다.

이 지의의 불교는 지, 관을 모두 중요시 함으로서 당시 수없이 나눠진 종파들을 통합하는데 크게 기여합니다. 그는 모든 불교의 진리들은 그것이 지이던, 관이던간에 원리 석가의 가슴속에서 나온 것이므로, 모두 중요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진리는 모두가 원래 석가의 뜻 하나였으므로 석가의 본 뜻을 아는 것이 중욯하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석가의 본뜻이 모두 지, 관을 통합하였다는 것을 <일념삼천, 삼제원융>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석가의 본 뜻을 일반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난해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그는 석가의 말씀을 5단계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이 석가의 말씀 5단계가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각종 경전들인데, 그중 가장 중요한 5단계의 석가 말씀이 바로 <법화경>입니다. 따라서 그는 법화경을 가장 중요시하였고, 법화경은 화엄경과 함께 동아시아의 가장 보편적인 경전이 되었습니다. 이 천태종은 고구려, 백제를 거쳐 일본까지 전파된 대규모의 불교종파입니다.

석가의 본 뜻이 하나다라는 천태종의 교리는 당시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어 수없이 대립된 불교 교파가 대립이나 갈등 없이 중국식 불교로 정착되는 것에 크게 기여합니다.

3. 이제 불교는 동아시아 문화권 전체에 전파되기 시작하다.

위진남북조 시대 이후 중국에 정착된 불교는 점차 동아시아에 전파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불교의 전파는 동아시아 문화권의 기본 요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파된 시기가 동아시아 문화권이 완성되고, 불교 교리가 확립된 당나라 불교기가 아니라, 인도의 불교사상을 중국이 아직 다 깨닫지 못한 남북조와 수나라 시기라는 점입니다.

전진왕 부견 때 순도가 고구려 소수림왕에게 불교를 전파하였습니다. 이것은 남북조의 초기단계인 전진시대로 이 때 불교는 격의불교 수준이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중국에서 가져온 불교는 도교사상을 불교사상으로 착각하고 이해하는 격의불교 수준이었으며, 몇 번의 착오 끝에 수나라에게 천토종을 가져왔지만 이것도 완전한 불교교리 이해가 아니였습니다.

백제는 동진의 마라난타의 입교로 침류왕 대 불교가 전파되었지만, 역시 완전한 불교가 아닌 인도 불교를 이해하지 못한 초기 불교였습니다. 이러한 초기 불교의 유입은 이 당시 한반도가 불교 교리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에 유입된 불교가 가지는 호국성에 강한 관심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제점은 한반도의 불교가 중국과는 또 다른 <호국성>을 갖는 다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전파될 때에는 불교의 본 뜻을 전파한다는 인도인의 취지를 중국 왕권이 저지하는 투쟁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폐불사건> 등으로 이어졌으며, 중국은 불법과 왕법이 투쟁하는 과정 끝에 왕법이 불법을 눌렀습니다.

그러나 한반도 불교는 그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왕법이 승리해 버린 중국식의 격의불교를 유입한만큼, 불교는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 불교는 초기부터 왕법이 불법을 눌러 버렸고, 불법을 전파할 만한 사회적 기반이 없었습니다.

4세기 고구려, 백제의 불교 전파보다 훨씬 느린 6세기 법흥왕대의 신라 불교 전파는 더욱 가관입니다. 귀족들이 왕법에 이용되는 불교를 견제하고자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고, 불교보다는 귀족적인 토착신앙을 더욱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왕권은 이들 귀족권을 누르기 위해 이차돈의 순교라는 극단적인 방법까지 동원해서 결국 불교를 도입하였습니다. 신라의 법흥왕 때 왕명 자체가 불교식이었고, 진흥왕기 교단을 불교식으로 정비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삼국의 불교는 철저한 호국적 성격이었습니다. 이것은 중국의 호국불교보다 더욱 강력한 왕권 강화 이데올로기로 작용합니다.

그런데, 묵호자, 마라난타 등은 모두 이름 자체가 서역식이고, 그들을 호승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인도-아리안 계통의 승려이거나, 서역계통의 승려로 보기도 합니다. 이 불교의 전파는 한반도의 종교적 문제를 넘어서서 동아시아 문화교류나 동아시아 문화권의 확립이라는 거시적인 차원에서도 중요합니다.

일본에 불교가 전파된 것은 6세기 백제 성왕 기 노리사치계가 일본에 건너가면서 부터입니다. 일본에 대한 불교 포스팅은 중국, 한반도가 끝난 뒤 자세히 하겠습니다.

수나라기의 불교는 천태종 외에는 별로 다룰 것이 없어서 여기서 그만 넘어가겠습니다. 다음 포스팅은 중국 불교의 완성기인 당나라 불교, 침체기인 송나라 시기 불교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한국의 불교에 대하여 포스팅하겠습니다. 그럼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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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과 크리스트교 이야기 1번째

1. 초기 로마의 종교

초기 로마는 다신교 사회였습니다. 로마 문화 자체가 그리스적인 요소를 많이 받아들었고, 그리스 문화는 이집트 문화의 요소를 받아들인 탓에, 로마의 신화를 보면 거의 그리스 신화와 체계가 비슷합니다. 그리고, 이집트 오리시스 신화 등의 영향을 받은 신화 이야기도 많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신화는 제우스 신을 쥬피터라고 부르는 등 명칭과 풍습, 일부 줄거리 등이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신화내용도 유사한 부분이 많죠.

이러한 다신교의 풍습이 로마 초기부터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로마의 종교는 그리스 신화를 기반으로 황제 예배를 시도합니다. 즉, 그리스 신화의 가장 상위신인 쥬피터(제우스)를 황제의 권위와 맞먹는 권위로 신격화한 상태에서 나머지 신들은 각각 로마의 지배층 사회에서 나름대로의 이유로 받아들였습니다. 즉, 초기 신앙을 황제예배 신앙과 결부하여 국가종교화 시킨 것이지요.

이렇게 로마 제정 초기까지는 고유 신앙이 견고하였고, 그 고유신앙이 황제예배와 결부되어, 황제권 강화에 이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후기 사회혼란으로 이러한 황제중심의 전통신앙이 흔들리게 됩니다. 특히, 제우스 위주의 신의 위계질서보다 그리스식 디오니소스 신앙이 대두되었습니다.

디오니소스 신앙은 이집트 오리시스 신화에서 영향을 받아 영생, 불멸, 구원, 재생 등을 강조하였습니다.(그리스인 이야기 편을 보면 자세히 설명했었습니다.) 또, 오리엔트의 밀의 종교가 도입되어 로마 신앙은 다양한 신앙이 각 계층의 이해관계 속에서 난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배층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로마 특유의 강건함을 잃고 향략적인 생활을 추구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에피쿠로스 학파적인 쾌락주의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본래 에피쿠로스의 이념은 경건한 생활 속에서 <정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들 로마의 지배층은 이 사상을 단순한 쾌락주의 이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였고, 기독교적 이념의 로마인들은 에피쿠로스 학파는 악마의 학파다라는 잘못된 인식이 퍼지기도 합니다.

이러한 제정 후기 로마의 사회 전반적 향략주의와 기강 문란은 민중들의 종교적인 경향을 기독교쪽으로 돌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교양있는 로마의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은 이러한 문제의 해결점을 신플라톤 철학의 이상주의적 관점에서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신플라톤 철학은 지상 세계의 세속적, 향락적 생활보다, 더 높고 가치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하여 로마인의 기강을 바로잡으려 했죠. 이러한 이상주의적 사상은 크리스트교의 신비주의적 사상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게 됩니다.

2. 크리스트교의 성립

크리스트교가 등장한 것은 로마의 제정 초기입니다. 크리스트교는 일단 유대교의 구약성경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는 유대교가 선민사상을 바탕으로 유대인만의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사상이라는 것에서 탈피하려고 했습니다. 즉, 유대교의 엄격한 율법주의를 배격하고, 신약성경을 새로이 정립하여 더 많은 민족을 포용할 수 있는 도덕주의를 주장한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에 따라 베드로, 바울 등이 로마에 크리스트교를 적극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로마 민중들은 이 새로운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즉, 유대교의 특징이 율법주의, 선민사상이라면, 크리스트교의 특징은 그것을 벗어나 사랑주의, 인류주의를 추구하는 세계종교로서 탈바꿈한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의 출현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전도가인 후계자들의 노력이 뒷받침되었고, 당시 세계제국인 로마라는 전파 매개체가 있었으며, 그리스 사상이라는 민주주의적 사상 기반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실제 유대교는 바빌론 유수 이후 강대국들의 압박으로 민족주의가 더 강화되었고, 그것은 철저한 선민사상과 구원주의, 메시아 사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등장과 예수의 탄생은 전통적인 유대교의 테두리를 거부하는 것이였죠. 예수가 유대교를 벗어나게 된 결정적 계기는 당시 선민사상을 가지고, 민족적 우월성을 따지던 사두케인, 파리세인을 모두 비판한 것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는 민족주의라는 테두리는 결코 유대인에게 이롭지 않음을 역설합니다. 자신은 구세주로서 부활의 믿음을 유대인에게 보여주어 민족주의보다 사랑이 우선임을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예수에 의한 크리스트교가 세계 종교로 발전하게 된 것은 역사상으로는 가장 큰 업적을 남긴 <바울>에 의해서입니다.

크리스트교에 대하여 로마 황제들은 초기에 무관심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인들의 교세가 날로 늘어났고, 이들이 사랑과 세계구원을 주장하면서 황제의 요구를 거부하는 사건들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 중 가장 황제가 싫어했던 것은 병역거부문제, 황제숭배거부(우상거부)문제입니다. 제정시대 황제들은 로마에 큰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크리스트교의 소행으로 돌려 그들을 죽임으로서 황제권을 더 강화하려고 시도합니다. 네로 황제는 로마의 대화재가 발생하자 그것을 모두 크리스트교 소행으로 몰아 죽였으며, 이후 황제들 역시 비슷한 방법을 자주 동원합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아예 칙령을 발표하여 크리스트교인들이 종교적 활동을 하느라 국가 대업을 경시하는 것을 원천봉쇄하였습니다.

그러나, 로마 후기가 되어, 국가 기강이 문란해지자 황제들을 생각을 고치기 시작합니다. 로마 후기에 오면 충실히 생업에 종사하면서 세금 납부을 꼬박꼬박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는 자들은 크리스찬이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들은 이제 이들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경건함을 이용하여 로마의 국가 기강을 바로잡을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그 결과 콘스탄티누스는 밀리노 칙령(313)을 발표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인합니다. 단, 집권층과 황제 자신도 그들의 종교는 제우스교였습니다. 이들은 종교적인 목적에서의 크리스트교가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에서 크리스트교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훗날, 테오도스우스는 크리스트교를 국교화 하면서 모든 지배층에게 크리스트교를 강요하기 시작합니다. 역시 정치적인 목적이였기에, 크리스트교를 옹호하는 황제와 기존 신앙(제우스교, 디오니소스교 등)을 옹호하는 원로원파는 극심한 대립이 있었습니다. 배교자라 불리는 초기 신앙 옹호파들이 정권을 잡기도 하였고, 크리스트교를 옹호하는 파가 정권을 잡기도 하면서 상대파를 죽이기도 합니다. 실제, 로마가 동서로 갈리는 시기에 동서로마에는 각각 종교적인 대립이 극심하였고, 이것이 황제로 하여금 로마 분열을 공식으로 인정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투쟁과 대립을 통하여 황제들은 반 크리스트적 계파를 완전 제압하였고, 크리스트교는 로마 제국의 영광이 남아있는 한 로마 제국의 전역에 교회조직을 성립시켜 퍼지기 시작합니다.

3. 로마 교회의 조직 구성

로마 교회의 교세 성장은 교회 관리자가 도시와 주변농촌에 행정 기능까지 관리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초기의 로마 교회는 단순히 <장로>가 다스리는 지역교회라고 보면 됩니다. 이들은 로마황제에 의해 핍박받고 음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 공인 이후 교세는 급격히 확장됩니다. 특히 교회조직을 <로마제국의 행정조직>과 일원화하는 방식은 크리스트교의 세계화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그 구성 방식을 한 번 볼까요? 크리스트교 구성방식은 로마 행정조직에 따라 3단계로 설정됩니다.

1. 도시와 주변 농촌 지역 : 가장 기본적인 교리 전파 지역으로 주교가 책임을 집니다.

2. 로마의 속주지역 : 로마의 속주는 몇 개 도시와 농촌을 포괄하는 식민지로서, 이 지역의 총책임자는 대주교입니다. 대주교가 주교들을 총괄합니다.

3. 로마제국의 5교구 : 로마제국의 가장 거점이 되는 5개의 수도에 각각 수좌대주교가 있어 대주교들을 총괄합니다. 이 5개의 5교구는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크, 예루살렘입니다.

이러한 5개의 교구 중 가장 상위의 교구가 <로마>로서 로마의 교황은 다른 교구 및 모든 크리스트교 지역을 총괄하게 됩니다. 이 로마교구를 책임지는 자는 교황으로 불리며, 서방교회의 책임자이입니다. 로마가 가장 상위를 차지한 이유는 로마제국의 실질적 수도였으며, 로마교회가 예수의 직계인 베드로에 의해 건설되었기 때문입니다.

훗날, 로마제국이 게르만족에게 망하게 되면서 5개의 교구중 로마(서방교회의 중심지), 콘스탄티노플(동로마교회의 중심지)만 남게됩니다. 이 2곳이 동, 서 유럽의 종교 중심지가 되며, 나머지 3곳은 이슬람 세력으로 넘어가 교회중심지로서 구심점은 잃게됩니다. 나머지 3곳을 탈환하려는 노력은 훗날 십자군 전쟁으로 이어집니다.

자, 다음장에서도 로마 교회 이야기를 계속합니다. 다음 장에서는 이단과의 논쟁, 교부철학 부분을 역사적으로 논해봅시다. 고고 싱!!

(이 파트는 종교사가 아닙니다. 역사적인 부분이니까 종교적으로 덤비지 마세요. 난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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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마 멸망의 원인을 추론해보자.

1. 서로마의 멸망

서로마의 멸망은 강력한 동방 전제군주정치를 실시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뒤 황제권의 약화에서 비롯됩니다.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뒤 배교자라 불린 율리아누스는 <밀라노 칙령>을 무시하고, 다시 고대 로마의 <제우스신>을 모시는 고유 종교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율리아누스 이후에서 다수의 원로원 의원들도 크리스트교보다는 고유의 신앙을 믿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이미, 일신교적 성격을 가진 <크리스트교>를 인정하는 분위기였고, 로마인의 대다수 빈민들은 이미 크리스트교를 <국교>처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아예 크리스트교를 국교화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동쪽을 통치하면서 서로마는 자신의 후계자에게 맡겨버립니다. 이 시기에 동서 로마는 완전히 분리되어갑니다.

또, 5현제의 마지막 왕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시대부터 게르만족들이 로마에 진출하여 로마의 용병으로 활약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의 기병부대는 이미 게르만 군사들이 장악한 상태였지요. 로마인들은 토지에 결박되어 있거나, 의무적이고 강제적인 직업군인으로 활약하면서 로마 군인으로서의 위상을 잃어갔습니다. 3c부터 로마군은 급격히 약해지기 시작했고, 4c에 들어서자 대규모로 넘어오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로마는 감당하기 힘들었습니다. 결국, 로마 영토 곳곳에 게르만의 왕조가 들어섰고, 로마의 게르만 군대중에서도 반란을 일으켜 로마 주변에 왕국을 만드는 자도 등장했습니다. 서로마는 결국 이러한 게르만 족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476년 멸망하고 맙니다.

2. 로마 멸망에 대한 원인을 모두 꺼내보자.

지금부터 설명하는 내용들은 다 로마사 이야기 1-8편에서 이야기한 내용들을 근거로 로마 멸망 원인을 설명합니다. 모르는 내용은 앞편 이야기들을 참조하세요.

로마 멸망에 대한 1번째 원인으로 보통 크리스트교의 유포를 들고 있는데, 이것은 약간 문제점이 있습니다. 크리스트교가 로마 멸망기에 로마 원시종교와 첨예하게 대립한 것은 사실입니다. 실제 많은 로마 지배층들은 크리스트교 보다 원시종교를 숭배했고, 예수의 부활보다는 제우스의 천벌이 더 가슴에 와 닿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의 유포와는 상관없이 로마는 이미 여러 가지 원인으로 쇠퇴해 있었습니다. 오히려,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것은 이렇게 몰락해가는 로마에 기독교적인 신앙심과 정결함, 순결함, 공동체 의식을 불어넣어서 로마 사회를 개혁하려는 개혁적 경향의 황제들의 의지였습니다. 이 부분은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는 것 같지만, 저는 크리스트교 때문에 로마가 망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저는 교회를 충실히 다니지 않습니다. 역사적 입장에서 본 것입니다.) 오히려 크리스트교보다는 로마인들의 강건한 기풍이 문란해져 있는 것에서 멸망원인을 찾는 게 더 나을 듯 하네요.

로마 멸망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는 사실 <정복사업 중단>입니다. 로마는 초기 티베르 강 하류에서 출발하여, 끊임없이 영토확장을 하면서 융성했던 국가입니다. 따라서 국가체제 자체가 상무적이고, 군사적인 단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로마 시민회인 병사회는 100인의 병사단위로 시민을 편제하였고, 로마의 12표법부터 시작하는 법제 정비도 전쟁에 참여한 시민들에게 토지분배를 하면서 이루어졌습니다. 3c이후 로마는 정복사업을 끝내고 평화기에 접어들었죠. 이것은 더 이상 평민들에게 토지분배가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상무적인 기풍이 사그러들게 됨을 의미하죠. 이 정복 사업의 중단이 로마에 여러 가지 문제점을 유발하게 됩니다.

로마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하는 군대의 역화도 결국 정복사업 중단 때문입니다. 로마가 정복사업을 할 때의 군대는 정복지의 토지를 분배받는 자유로운 국민병이였습니다. 마리우스와 시저(카이사르)같은 군벌들은 무산자들에게 많은 토지와 연금을 주었고, 시민들의 생활은 향상되었습니다. 물론 사병화된 군대였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러나, 정복사업이 끝난 제정 후기에는 정복사업 중단과 함께, 게르만 군대나 속주민 군대가 로마군의 주력이 됩니다. 이것은 로마 멸망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합니다.

또, 정복사업의 중단은 노예공급의 중단을 의미합니다. 노예가 없다는 것은 노예경영을 통한 <라티푼티움>이 사라짐을 의미하죠. 실제, 로마 제정 말기에는 노예노동이 소작농민 경영으로 전환됩니다. 이것이 <콜로누스>제도입니다. 콜로누스 제도로의 전환은 강건한 로마 시민단이, 힘없는 소작농으로 전락함을 뜻합니다.

그리고, 정복사업의 중단으로 황제권도 약해집니다. 최초의 황제인 옥타비아누스기의 황제권은 황제의 정복사업을 통한 개인재산 확보로 이루어진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정복사업이 끝나가면서 황제의 개인재산은 점점 줄어들게 되고, 국가의 경제권도 줄게 됩니다. 황제권이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오히려 어마어마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 엄청나게 증가하게 됩니다. 카라칼라 황제는 제정부담으로 전 로마속국에 시민권을 부여해서 세금을 올려받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는 재정 부담 때문에 직업의 고정화와 세금 증가를 추진했음을 이야기했었습니다.

특히 군인황제 시기의 황제권 하락은 황제권의 치명적인 결함을 보여주는 사건이였습니다. 물론 동방군주제도의 도입으로 개혁을 추진하여 그 위기를 극복하였지만, 황제권 약화가 로마 멸망의 원인임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3. 로마 멸망기에 이미 중세제도들은 출현하고 있었다.

로마의 멸망기에는 도시라던가 상업이 쇠퇴하고 자연경제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직업 세습화 등으로 도시는 완전 쇠퇴하고, 농민들은 <콜로나투스>에 속박되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트교는 확대되었습니다.

보통 중세의 특징 하면, 자연경제, 도시쇠퇴와 장원경제, 지방분권화, 불입권, 봉건제도 등으로 설명되어집니다.

이러한 중세적 요소는 로마 말기에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직업 세습화로 인한 도시 쇠퇴와 자연경제로의 전환이 있었죠? 콜로나투스에 속박된 농민들은 중세 농노와 같은 위치로 전락했습니다. 이제 대토지를 가진 지주들이 주요세력으로 등장하였고, 그들은 자신의 땅에 대한 콜로나투스의 <면세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면세특권이 중세의 불입권의 시초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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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니즘 시대의 사회와 문화

1. 헬레니즘 사회의 융성

헬레니즘 시대를 정확히 규명하려면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아주 세부적으로 들어가기에는 제 지식이 짧기에, 헬레니즘 시대의 전반적인 특징과 키포인트로 여겨지는 몇몇 사실들을 위주로 정리해 볼까 합니다.

헬레니즘 시대가 그리스 문화를 중심으로 한 오리엔트 문화의 융합이라는 사실은 전단원에서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이 단원에서는 헬레니즘 당시의 사회와 문화 중심으로 다뤄볼께요.

우선 헬레니즘 사회는 알렉산더의 동방 이민정책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알렉산더는 그리스인들을 동방으로 이주시켜 2가지 효과를 얻으려 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리스 사회의 혼란을 잠재우고, 그리스가 알렉산더 제국에 반기를 드는 것을 차단하며, 그리스 지배층에게 어느 정도 특권을 주는 것입니다. 2번째는 지중해와 오리엔트를 연결한 거대한 교역권과 경제권을 성립시키고, 그 무역의 주체를 그리스인으로 삼으로 한 것입니다.

실제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으로 페르시아의 경제력은 엄청나게 확장하였지만, 그 경제력을 알렉산더 제국의 경제력으로 흡수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전문적 식견을 가진 그리스인들이 필요했습니다. 이 그리스인들은 그리스적인 고대 문화유산을 동방에 전파하는 동시에 금, 은의 약탈 등을 통하여, 동방의 자원을 착취하는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되는 것이지요.

실제, 알렉산더 제국에서는 앗티카(아테네 지방) 주화가 화폐로 통용되었고, 앗티카 방언이 공용어로 인정되었습니다. 즉, 그리스어가 제국의 언어가 되어 상업, 제조업, 광업 등의 모든 교역산업의 통역을 맡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 인들의 진출로 인하여 그리스적인 형태의 도시가 제국 곳곳에 생기게 됩니다. 대표적인 도시가 70여곳이나 건설된 알렉산드리아죠. 또, 아시아와 인도의 교역 중심지인 안티오크도 이 당시 무역의 중심지입니다. 동서양의 거점에 위치한 로도스섬, 델로스섬도 발전을 거듭합니다.

하지만, 그리스인이 동방으로 계속 진출하면서 식량 부족 문제가 대두하였습니다. 이 문제는 알렉산더 제국의 입장에서도 심각한 문제였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국에서는 <노예노동>을 통한 대규모 농업경영이라는 방식을 도입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상공업, 수공업, 농업 등에 <그리스적인 노예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였죠. 여기서 말하는 노예는 <원주민과 이주 노예>를 말합니다. 이러한 정책은 그리스적인 도시와 농촌의 중산층이 원주민과 자주 충돌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제국은 원주민을 철저하게 탄압하고 가혹하게 통치함으로서, 원주민과 이주민간의 빈주차이는 엄청나게 벌어집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알렉산더 제국의 번영은 노예노동과 원주민 착취를 바탕으로 한 경제번영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겠네요. 그리스의 민주정치가 시민이 먹고놀 때 <일하는 노예>를 기반으로 하였다면, 알렉산더 제국의 번영은 그리스적 시민이 먹고놀 때, 일하는 <원주민과 노예>를 기반으로 합니다.

또 알렉산더가 죽은 뒤에는 서로 정권을 차지하기 위해 소모적인 전쟁이 계속되면서 제국의 물질적 자원과 풍부한 인적 기반이 새롭고 발전된 제국의 기반으로 자리잡지 못하고, 계속 소모되고 고갈되어 갑니다. 알렉산더 제국이 로마제국에게 힘없이 망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이것 때문이지요.

2. 헬레니즘 문화를 정의내리자면?

헬레니즘 문화는 결국 동서문화의 융합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평등한 입장에서의 융합은 절대 아닙니다. 전술했듯이, 원주민 착취를 통해 사회가 유지되었으니까요. 이것은 그리스적인 입장에서의 문화가 폴리스 단위를 넘어 세계적 단위로 탈바꿈한 정도의 문화로 볼 수 있습니다. 즉, 폴리스의 분립적이고, 도시국가적인 문화는 오리엔트의 거대한 전제적이고도 전체적인 문화를 만나 새로운 문화로 탈바꿈하는 것이지요. 폴리스의 분립적이고 지역적인 성격은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 보편적, 세계시민적, 개인주의적인 성격의 문화로 나아갑니다. 특히 철학, 문학, 예술 분야는 그리스적이면서도 세계적이고 동양적인 문화 색체를 가지고 있지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간다라 미술입니다. 이 문화는 동서양에 걸친 거대한 제국인만큼, 로마, 이슬람, 간다라, 중국 등 당대 모든 지역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럼 대표적인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 예술 분야를 살펴볼까요?

3. 헬레니즘 철학 - 스토아 학파

헬레니즘 시대 하면 바로 떠오르는 것이 스토아 철학입니다. 이 철학의 기본 정신은 행복은 정신과 영혼의 안정에 있기 때문에 철저한 금욕을 통하여 정신을 안정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철학이 중요한 점은 거대한 제국 질서에 걸맞는 <보편성>을 가진 철학이라는 점입니다. 스토아 철학은 그리스의 분립주의적 성격을 넘어선 <초폴리스적인 세계국가>를 추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이 철학은 알렉산더 제국과 같은 세계국가란, 자연법과 보편적 정의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국가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연법>이란, 인간이라면 누구가 갖는 자유와 평등을 원칙적으로 지켜줌으로서 정의가 살아있는 법을 말합니다. 세계국가에 살고 있는 <세계시민>이란 이성을 가진 존재로서 모두가 평등한 시민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평등한 모든 시민들은 민족, 국가를 초월하여 평등한 시민입니다. 즉, 그 어떤 사회적 구속에서도 해방되고, 그 어떤 공동체에서도 해방된 사람들로 구성된 국가가 세계국가이며, 이 세계국가에서의 시민이란 철저한 개인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살아가는 <원자적인 개인>을 말합니다.

하지만, 알렉산더 제국에서는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이상은 철저히 받아들이면서도, 실제 정치체제에서는 정반대의 전제군주제를 실시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알렉산더 제국의 기반이 그리스적인 <노예제도>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세계국가와 같은 이상국가의 이념은 지배층에 한정된 것으로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실제, 동방의 수많은 민족들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페르시아적인 <전제군주제>가 가장 이상적이였습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스토아 철학의 논리는 훗날 로마인들이 세계제국을 세울 때, 그대로 받아들였던 논리입니다. 알렉산더 제국을 멸망시킨 로마는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이념을 수용하여, 시민권의 분배와 이민족에 대한 차별을 적절히 하였습니다. 단, 제정 후기의 로마는 이러한 스토아 철학의 논리보다는 점차 향락에 빠짐으로서 제국의 멸망을 스스로 초래하였다는 점도 하나의 키포인트입니다.

또 스토아 학파의 철저한 금욕주의와 세계시민사상은 유대교가 배타적인 선민사상에서 벗어나, 세계종교로 나아가는 것에도 영향을 줍니다. 실제, 크리스크교 초기의 구약에서는 선택받은 민족으로 민족성을 과시하던 부분이 있어서 타 민족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스토아 학파의 사상이 크리스트교 사상의 철학적 배경으로 자리잡으면서 이 종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지자를 만나 세계적 종교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4. 헬레니즘 철학 - 에피쿠로스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는 흔히 쾌락주의 학파라 불리며, 스토아 학파의 반대선상에 있는 철학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 학파에서 말하는 쾌락주의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의미와 약간 다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를 저급하고, 더러운 쾌락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 제정 로마 후기 사회적으로 퇴폐하고 문란한 상황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 에피쿠로스 학파의 시조인 에피쿠로스는 스토아적인 금욕적 생할을 하였다고 전해지기도 합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기본 철학은 <정신적 쾌락과 개인적 세계>를 위한 즐거움의 추구입니다.

그들은 철저한 개인주의를 추구하는데, 이것은 스토아 학파의 기본 사상과 일치하는 부분이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일단 국가라는 기관도 개인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목적은 각 개인들이 생존과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하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의 행복을 위한 발명품 정도의 역할을 하는 기구인 것입니다. 즉, 국가가 개인의 행복을 저해하면 국가는 필요없는 기구가 되는 것이지요. 이미 로크의 저항권이나, 근대 시민권의 개념이 이들에게서도 보입니다.

또 이들은 개인이 철저하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가장 즐거운 생활을 추구해야 하며 그것은 인간의 본능이자 권리라고 말합니다. 즉, 쾌락은 인간의 당연한 권리이므로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한 그들이 실제 쾌락적인 삶을 산 이들은 거의 없었다고 하네요.

이들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정신적 수양이 필요하기 때문에, 쾌락 이전에 수양이 필요함을 강조합니다. 예로, 인간이 가장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은 죽음이나 신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인데, 이러한 두려움을 없애려면 두려움에 대한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곧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논리지요. 즉, 죽음은 무엇이며 그것이 왜 두려운가? 신이란 무엇이며, 신의 존재가 우리에게는 어떤 영향을 주는가? 등등을 생각하고, 자신의 몸가짐을 바로하는 것이 곧 가장 평온하고 행복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결국, 에피쿠로스 학파의 이론은 언뜻 보면 난잡하고, 쾌락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스토아 학파와 마찬가지로 금욕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세계시민적인 측면이 많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에피쿠로스적인 사상이 로마 제정 초기에는 그 근본정신 그대로 받아들여졌지만, 로마 말기에는 난잡하고 문란한 쾌락주의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 있습니다.

사실 헬레니즘 미술이 감각적, 향락적인 측면이 강한 것도 바로 이 에피쿠로스적인 쾌락추구의 영향이 큽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사람들이 금욕을 하던, 수양을 하던 간에 이들은 쾌락 자체는 절대 나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니까요.

5. 헬레니즘의 예술

이러한 에피쿠로스적인 측면에서 헬레니즘 예술을 봅시다. 이들의 예술은 그리스적인 가치관, 즉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관능적이고 격정적인 현실미를 추구합니다.

헬레니즘에서의 비너스는 아름다운 여신을 넘어서서 인간육체가 얼마나 관능적인 미를 갖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니케상은 승리의 여신이 자유롭게 기뻐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라오콘의 군상은 죽음의 고통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주며, 정신적 쾌락을 방해하는 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들의 건축을 보면 <코린트 양식>입니다. 건축 양식을 비교하는 것은 <그리스 이야기>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넘어갈께요. 헬레니즘 건축은 그리스와 동방문화가 혼합된 것 처럼, 고전적인 공공건물과 세속적인 건축 양식이 동시에 보입니다.

5. 자연과학의 발달

헬레니즘 시대는 세계시민주의가 발달하면서, 보편적으로 탐구되야할 진리는 무엇인가? 라는 명제가 중요해졌습니다. 그러한 명제에 호응하여 발달한 분야가 자연과학 분야입니다. 아르키메데스의 기하학, 유클리드의 물리학, 아리스타르코스의 지동설, 에라토스테네스의 자오선 측정과 지구둘레의 계산 등은 이 당시 자연과학이 최첨단 수준임을 보여줍니다.

특히, 이러한 과학적 발달은 알렉산더 대왕이 제국 곳곳의 알렉산드리아에 도서관을 지으면서 활성화되었습니다. 즉, 이 시대는 국가가 처음으로 학문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과학에 대한 지원을 아낌없이 투자한 시대입니다. 실제,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만의 독특하고 심도있는 철학과 과학의 대부분을 스승이 지원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이뤄냈습니다. 알렉산더는 전 세계를 정복하면서 곳곳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을 도서관으로 바로 바로 보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살아생전에 절대 볼 수 없었던 진귀한 모든 것들을 도서관에서 볼 수 있었다고 하니까요.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의 스승을 하지 않았다면, 유럽 철학과 과학의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인문과학분야는 그리스 시대의 작품을 수집하고, 해석하며, 해설을 다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이 있었기에 고대 그리스 문화의 기록들이 현재 남아있는 것이지요.

이 정도로 헬레니즘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이제 겨우, 로마편에 입문하겠군요. 로마편은 제가 유럽 고대사 중에서 그나마 책을 좀 많이 읽은 부분입니다. 재미있으면서도, 핵심적인 내용을 모두 적을 수 있도록 생각하면서 전개해보겠습니다. 그럼 로마시대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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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문명의 탄생

1. 석기 시대를 넘어선 문명 탄생

석기시대 오리엔트에서는 문명이 탄생할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오리엔트 문명이란, 서양의 기준에서 볼 때 <동쪽의 문명>이란 뜻입니다. 석기에서 청동기로 접어들면서 탄생한 오리엔트 문명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리적으로 풍부한 물과 기름진 땅이 제공되었고, 강 유역에는 다양한 식용생물이 있었으며 주변지역의 자원이 뒷받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잉여생산이 출현하게 됩니다. 세계 4대 문명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공통점이 많은데, 제가 주관적으로 생각하기에 다음과 같습니다.

1. 청동시 시대였다. - 충분한 잉여생산이 출현 가능한 시대였고, 잉여생산물 투쟁을 위한 싸움으로 사회계급이 형성되고 국가 조직이 발생하였다.

2. 문자가 출현한 시대였다 - 어느 정도 사회구성원간의 의사소통이 가능하였으며, 이것은 다양한 발명품을 생산하고, 거대한 건축물을 만들 수 있도록 하는 촉매제였다.

3. 조직적인 종교가 발달하였다. - 신전 및 신관이 출현하면서 종교적인 역량을 가진 자들이 지배층으로 등장하였다.

4. 운송 기구가 발달하였다. - 선박, 바퀴 등의 발명이 잉여생산물 운반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발전 속에서 촌락을 중심으로 한 씨족 사회가 국가를 중심으로 한 문명사회로 전환된 것입니다.

2. 오리엔트의 고대 역사 전개

고대 오리엔트 지방의 역사를 논의하려면 그 역사를 4단계로 나눠서 이해하는 편이 편합니다. 오리엔트 역사를 형성기, 발전기, 암흑기, 통일기라는 4단계의 역사로 나눠 보겠습니다.

1. 형성기 : 기원전 3000년경 - 형성기의 오리엔트 사회의 특징은 각각의 문명과 국가들이 자국의 문화적 기본틀을 완성하는 시기입니다. 각 집단은 상호 접촉없이 개별적이고 독자적인 형태를 띄고 발전하였습니다.

2. 발전기 : 기원전 2000년경 - 이 시기는 각각 개별적으로 발전한 강국들이 상호연관성을 갖는 국제사회로 전환하는 시기입니다. 메소포타미아의 바빌로니아 왕국, 이집트의 신왕조, 소아시아의 히타이트와 미탄니, 에게문명의 크레타는 전쟁을 통해 접촉하고, 외교문서를 교환하는 등 상호 교류를 통해 상대문물을 받아들입니다.

3. 암흑기 : 기원전 1200년경 - 이 시기는 갑작스럽게 오리엔트의 강대국들이 모두 몰락하는 시기입니다. 이집트의 신왕조가 약화되고, 바빌로니아와 히타이트는 멸망하며, 미케네 문명이 몰락합니다. 그리고 그 몰락기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보통 이 시기를 역사가 호메로스의 기록에만 의존한다고 해서 호메로스 시대라고도 하는데, 이러한 갑작스런 오리엔트의 몰락 원인은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당시가 청동기에서 철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는 점에서 미루어볼 때 급격한 사회 변화가 원인이 아니였는가 추측합니다.

4. 통일기 ; 기원전 1000년경 - 이 시기는 혼란한 오리엔트의 상황이 끝나고, 강대국인 아시리아가 최초로 오리엔트를 통일한 시기를 말합니다. 그러나 아시리아는 가혹한 통치로 곧 망하여 4국으로 분열되었고, 이후 이 지역은 페르시아가 재통일하게 됩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 폴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을 기원전 4c에 거치면서 점차 약해졌고, 그 무렵 마케도니아에게 멸망하게 됩니다.

이제 다음 글에서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고대 문명의 각각 국가들을 자세히 설명해보려 합니다. 그 전에 고대 오리엔트 지역의 문명 중 핵심 문명이 무엇인가만 짚어봅니다.

고대 오리엔트와 서방의 5대 문명은 이렇게 나눌 수 있습니다.

이집트 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동부 지중해 문명, 그리스 문명,(과도기인 헬레니즘), 로마 문명입니다.

이들이 오리엔트 고대 문명을 이루되, 그 핵심은 유럽중심의 로마 문명이었고, 로마가 망한 뒤 유럽은 고대시대를 넘어 중세시대로 넘어갑니다.

3. 고대 오리엔트 암흑기의 한줄기 빛 - 해상왕국

위에 설명한 오리엔트 암흑기(호메로스 시대)는 오직 암흑만이 아니였습니다. 암흑기를 이용하여 그 시대를 이끌고, 빛나는 전성기를 구가한 나라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바로 페니키아와 헤브라이입니다. 고대 국가들을 각각 개별적으로 다음 글에서 살피기 전에 이들만 간단히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페니키아는 지금 아프리카 북단의 카르타고에 근거지를 둔 해상왕국입니다. 이들은 아프리카 북부와 유럽남단를 휘젓고 다니면서 지중해 무역을 독점했던 강국이었습니다. 이들이 중요한 점은 오리엔트 문명을 유럽에 전파했다는 점입니다. 시돈, 타루스 등의 해안 국가를 건설한 이들은 동방과 유럽을 동시에 오가는 해상민족이었으며, 오리엔트의 선진문물을 유럽에 전파하여 훗날 그리스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합니다. 특히, 카르타고를 정복한 이후에는 표음문자를 제작하였는데, 이것은 곧 훗날 알파벳이라 불리는 문자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민주정치 국가인 그리스 폴리스들의 성장은 이들의 힘이 큽니다.

헤브라이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성장한 유일한 고대 유일신 국가입니다. 고대 모든 국가가 다신교였지만, 특이하게도 이들은 선민사상을 가진 유일교를 신봉하였습니다. 이들은 초기 가나안 왕국을 건설하여 성장하고 있었는데, 이집트 왕국의 압박으로 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들은 여호와 신앙과 십계명을 매개로 하여 뭉친 청동기 전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의 기록이 바로 구약성경의 핵심을 이룹니다. 이들은 초기에는 이집트 군을 격파하고, 수도를 예루살렘에 정하는 등 성장하였습니다. 특히 다윗, 솔로몬 왕 때에는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합니다.

   이들은 일신교인 유대교를 확립하였습니다. 이들 민족은 스스로를 위대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고대 선민사상을 가진 대표적인 민족입니다. 이들의 자부심이 곧 구약성경이지요. 이들의 유대교가 훗날 크리스트교와 이슬람교라는 두 거대한 종교의 기본 바탕이 되었는데, 특히 이 종교가 훗날 다른 종교들에게 미친 영향 중 제일 큰 것이 바로 <내세사상>이라는 부분입니다.

   내세사상을 전파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증명해줄 선지자가 필요했고, 각 종교는 그 선지자가 누구인지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예수, 마호메트 등은 모두 이 내세사상을 증명하기 위한 최후의 선지자라고 각 종교는 주장합니다. 뿌리가 같은 이 두 종교는 지금도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 채 분열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헤브라이는 이집트와 주변국의 끊임없는 압력으로 결국 나라가 분열되었습니다. 유대와 이스라엘이라는 2 국가로 분열된 것이지요. 유대는 훗날 바빌론 유수라는 사건을 겪으면서 신바빌로니아에게 멸망합니다. 이스라엘은 훗날 최초의 오리엔트 통일왕조인 아시리아에게 망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각각 개별적인 오리엔트 국가들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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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히스토리아 기업부설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