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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중세 역사학의 발달 과정

1. 삼국시대 : 역사학이 성립되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제대로 된 역사학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를 의거할 때, 한국에서 제대로 된 역사서를 편찬한 시기는 삼국시대로부터 비롯됩니다.

삼국시대의 역사편찬은 왕권의 이데올로기 강화를 목적으로 합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역사서를 편찬한 시기가 대체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는 시기였습니다. 고구려의 유기는 5c 고구려의 강성기에, 백제의 서기는 근초고왕의 전성기에, 신라의 국사는 신라 6세기 진흥왕기에 각각 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학이라는 학문을 객관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역사학을 <왕의 업적>을 홍보하여 왕권에 대한 정당성을 확립하는 수단으로 본 것입니다. 당시의 역사서들은 남아있는 것들이 없기 때문에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 왕실의 족보와 신성함, 왕계를 거슬러올라갔을 때의 신화, 선민의식 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즉, 왕실과 지배집단의 중앙집권적 통치가 정당함을 보여주기 위한 저서들이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고구려에서는 유기를 편찬하였고, 이후 신집 5권으로 이것을 요약하였다고 합니다. 백제는 서기, 백제기, 백제본기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산리는 국사, 가야는 개황력 등이 존재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서들은 일단, 중국의 역사 서술 방식을 도입하였습니다. 단, 사마천의 기전체 중에서 거의 대부분 <본기> 위주로 역사를 서술했을 것입니다. 왜냐면, 역사서의 편찬 목적이 국왕가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이들 책의 내용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인용되어 나오는 것으로 추론할 수 있습니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선사, 한산기, 제왕연대력, 화랑세기 등의 역사 저서들이 나오는 데, 이러한 책들인 국가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었던 삼국시대 책들과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일단 불교관련 저서나, 화랑의 역사 등 역사 서술의 폭이 넓어졌습니다. 즉, 국왕에게 치중했던 역사 서술이 이제는 좀더 넓은 지배집단 및 일부 피지배층으로 확대된 것이지요. 이것은 이제 국왕만의 역사 편찬인 <본기> 위주의 서술을 넘어 <열전, 지, 표> 등으로 역사 서술이 넓어진 것을 뜻합니다. 사마천의 사기 형식을 제대로 파악하고 적기 시작한 것이지요.

2. 중세시대 : 최초의 역사서 삼국사기의 등장

중세시대의 역사서술은 이제 <송>나라의 유학체제를 받아들이면서, 유교적 관점에서 다양한 역사서들이 출현였다는 것에 특징이 있습니다. 아직도 역사서술에 있어서 <바이블>은 사마천의 사기였습니다. 고려 후기 <원>에서 성리학이 유입되기 전까지는 사기의 기전체 방식이 역사서술의 대세였지요. 하지만, 성리학이 유입된 여말,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을 통한 유교서술이 대세가 됩니다.

우선 고려 시대 사서들을 아주 간략히 다루어 볼까요?(각 사서들에 대한 구체적 포스팅들은 따로 하겠습니다.)

고려 시대 최초의 유교적 사서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입니다. 당시 사회는 문벌귀족 사회의 폐단으로 사회적인 불안감이 조성되었고, 여진족의 금이 강성하여 국가적 위협이 되던 시기였습니다. 고려 국왕은 김부식을 책임자로 하여 당시 훈고학 계열의 유학자 12인에게 에게 삼국사기를 편찬하게 함으로서 <유교적 통치질서와 전통> 확보를 통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문벌귀족 사회는 묘청의 난을 겪고, 금나라와 사대외교를 하는 등 국가적 팽창력이 약회된 시기였습니다. 삼국사기는 문벌귀족들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신라 중심으로 고대사 체계를 정립하게 됩니다.

이후 무신 집권기에는 사회의 혼란함을 고대 위대한 유산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나타납니다. 이것은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잘 보여집니다. 이후 몽고간섭기에는 고구려의 유산을 넘어서서 민족의 기원을 단군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보입니다. 이것이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 단계의 역사서술이었습니다.

3. 고려시대 : 삼국사기에서 보이는 유교적 합리관

고려 중기 이후 유교주의적 역사서술의 특징은 상당히 합리적인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 대표적인 서술 방식을 보통 <무징불신의 태도>라고 합니다.

무징불신이란, 합리적인 역사서술을 위하여 문헌적인 증거가 없으면 믿지도 쓰지도 않는다는 역사 서술 태도를 말합니다. 즉, 고대적인 신화주의는 배격하고, 있는 그대로의 서술을 존중합니다. 이러한 무징불신의 태도가 가장 잘 반영된 역사서가 바로 삼국사기입니다. 또, 문헌적인 증거가 있다고 해도 귀신의 이야기는 합리적이지 않으므로 쓰지 않는다는 <괴력난신>, 문헌적 증거가 확실해도 합리적이지 않은 사건은 삭제해 버린다는 <필삭주의> 원칙은 중세 사서의 큰 특징입니다.

이러한 무징불신의 태도를 통해 역사서를 편찬하려고 했던 목적은 역사에서 합리적인 <교훈>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즉, 역사는 지난 날을 되돌아봐서 오늘날에 필요한 교훈을 얻는 것이라는 것이 역사 서술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실을 기록할 대는 사실 자체의 서술과, 그 사실에 대한 평가는 따로 구분해야 하며, 평가도 논,찬의 형식으로 따로 적습니다.

그리고 역사를 서술할 때 <기전체>가 중심이 되어야 하지만, 때로는 역사 서술의 교훈적 목적에 맞추어 다양한 서술체제가 확립되는 것도 이 시기 역사서들의 특징입니다. 실제 기전체 양식은 사마천의 사기 형식으로 고려시대에 유행했지만, 원나라에서 송학이 들어온 이후 고려 후기 역사서들은 다양한 역사서술체제를 선보입니다. 중국 송에서도 자치통감의 편년체, 자치통감강목의 강목체 등이 선보였듯이 다양한 서술체제로 역사에서 교훈을 찾으려고 한 것이지요.

또, 역사에서 교훈을 찾는 다는 것은 다른 말로, 역사를 역사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경학의 일부로 본다는 것과도 상통합니다. 역사는 유교적인 정치이념과 윤리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일종의 <거울>로서, 역사학의 목적인 현재 통치이념에 부합되는 <유교적 정당성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니까요.

4. 15-16세기 조선시대 : 유교적 합리관에서 성리학적 유교관으로...

여말,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유교적인 합리관은 여말 들어온 <성리학>에 의해 성리학적 사관으로 전환됩니다. 여말의 성리학은 원대 허영의 학파에서 들어온 사관으로서 <수기치인> 중에서 <치인>을 강조하는 실용적이고, 부국강병 성향의 성리학이었습니다.

특히 조선왕조가 개창하면서 새왕조는 통치이데올로기를 정비하기 위해 수많은 사서들을 편찬합니다. 일단, 고조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의 근원을 정리한 뒤, 성리학적 인식에 맞추어 삼국사와 고려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합니다. 그 결과 삼국사략, 삼국사절요, 동국통감,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의 삼국사, 고려사 저서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 역사서들은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에 대한 정당성을 확립하고, 왕조초기 성리학적 가치기준에 맞춘 부국강병과 왕도정치 실현을 목표로 하였기 때문에 상당히 진보적인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고대사에서 단군기원을 확립하고, 민족단일의식을 강조한 것이 이 시대 역사학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16세기 성종 이후 사림들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이제는 부국강병적인 성리학이 아니라, 도덕지향적인 송대 주자학이 조선 시대 역사학의 대세를 이룹니다. 이 시기의 역사서들은 부국강병보다는 사람들의 향촌자치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였습니다. 역사의 영역도 정도전이 주장했던 만주와 요동수복이라는 관점보다는, 한반도 내의 조선사를 좀더 강조하게 됩니다.

주자학적 역사관과 고려 합리주의적 역사관을 비교하면 가장 큰 차이점은 명분론과 합리론이라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고려의 역사학은 <무징불신>으로 대변되는 합리사관입니다. 그러나 16세기 주자학에서의 사관은 <전통과 명분>으로 대표되는 사관입니다.

예로, 중국 삼국지에서 조조의 위와 유비의 촉 중에서 어느 쪽이 정통이냐고 물었을 경우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중세 합리적 사관을 지향하는 역사학에서는, 당시 정세와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선양으로 왕위에 오른 조비의 <위>를 전통으로 볼 것입니다. 그러나, 명분을 따지는 주자학의 사관에서는 한나라 왕실의 후손인 유씨의 유비의 <촉>이 삼국시대의 전통국가라고 볼 것입니다. 이런 차이가 있을 수 있죠.

4. 양난이후 조선시대 : 새로운 전통과 실학의 발견

16세기 중반 이후 역사서술은 아주 큰 변화를 겪습니다. 실제 16세기 중반 이후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조선 사회가 동요하고, 조선왕조의 체제가 급속히 붕괴됩니다. 따라서 조선의 지배층들은 무너져가는 왕조를 되살리기 위한 필사의 노력을 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붕당정치의 서인, 남인의 공조체제 형성, 비변사 체제의 형성, 대동법과 균역법 등 체제 변화 등으로 노력하면서, 사상적으로는 조선 왕조의 정당성을 확립할 수 있는 수많은 사서들을 만들어 냅니다.

이제 16-17세기의 정치가들은 명이 멸망한 후 <중화>의 전통이라는 것을 새롭게 정립해야 했습니다. 명은 망했고, 청이 대세인 시기에 명만이 전통이라는 <명분>만으로 사회를 이끌수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실제 명분으로 추구했던 북벌운동도 실패도 끝났습니다. 이제는 청나라를 인정하는 <북학운동>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배워야 했고, 청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이제는 명분보다는 부국강병이 필요한 시기였던 것이죠.

따라서 이 당시 역사학은 명청 교체로 인하여 중화의 전통이 조선으로 넘어왔다는 <도통동전>을 강조합니다. 이제 우리 역사를 중국 역사의 부속물이 아니라 순수한 <정통설>로 확립하려는 시도가 많아졌고, 스스로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차원에서 <북벌수호운동>, <도서방위체제확립>, <양역변통> 등의 논의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이 때 사상적으로 우리 역사의 체계를 잡으려 했던 사람들이 실학자들입니다. 이들은 단군, 기자, 고구려, 삼한 등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를 가지고 고민하였으며, 우리 역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다른 포스트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익, 정약용, 안정복 등의 고대사 시각은 이 당시 성리학 사회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것이었습니다.

다음 파트에서는 1900년 대 이후 역사인식에 대하여 간략히 다루고, 이후 한국사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사료들에 대하여 개론적으로 다루겠습니다. 중세 삼국사기부터 근대 노무현기의 사학까지를 포스팅 할 건데, 아주 가끔 다루다보니 시간은 무지 오래걸릴 것 같습니다.

이 글에 대한 참고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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